2007년 3월 30일 금요일

1차대전 당시 알자스-로렌의 병역 기피와 탈영문제

요즘 농담거리가 잘 생각나지 않다 보니 자꾸 번역글로 때우고 있습니다.

이번 글은 1차대전 기간 중 엘사스-로트링엔(알자스-로렌) 출신 사람들의 병역 기피 및 탈영에 대한 내용입니다. 한국내 게시판을 보면 친독일적(?) 네티즌 들이 알자스-로렌은 독일 땅이다~ 라면서 열심히 키보드 투쟁을 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당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했을 까요?

자. 스크롤을 하십시오!

독일 육군의 엘사스-로트링엔 출신자들

1차대전 발발 당시 해외에 거주하던 엘사스-로트링엔에 거주하는 징집연령자 16,000명 중 징집통지서를 받고 귀국한 사람은 불과 4,000명 밖에 안 된다는 점을 보면 이들의 독일에 대한 충성심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 최소한 7,000명 이상이 병역회피 사유로 재판에 회부된 상태였다. 1차대전 기간 동안 17,650명의 엘사스-로트링엔 사람이 프랑스 육군에 복무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징집연령대의 남성들은 대규모로 국경을 넘어 도망쳤다. 보통은 20-150명씩 무리를 지어 국경을 넘거나 아예 마을 전체의 남성들이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최소한 전쟁 발발과 동시에 3,000명의 남성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도망쳤다. 스위스와 인접한 국경지대에서는 국경을 넘는 병역기피자의 대열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엘사스-로트링엔이 국경지대라는 점은 부수적인 요인에 불과했다. 상(上)엘사스의 관구 사령관은 이 지역의 주민들이 “애국심이 없으며” “병역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만연해 있기 때문에 이들은 병역을 (영광이 아니라) “처벌”로 받아들여진다고 지적했다. 한 마을의 시장은 병력 소집을 방해하려 했다. 많은 지역에서 병역 회피가 계속됐는데 상엘사스의 마르키르히(Markirch)에서는 전체 인구 11,800명 중 700명의 남성이 병역회피를 위해 잠적했다. 그리고 1917년 6월이 되자 병력 적령기의 남성 427명 중 213명이 스위스로 달아났다. 이 때문에 병역소집통지는 징집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배달했으며 무장병력이 동반했다. 로트링엔과 하(下)엘사스에서도 역시 “엄청나게 많은” 남성들이 병역을 회피했다.

역설적이게도 독일 군부역시 엘사스-로트링엔 지역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징집을 사용했기 때문에 병역에 대한 부정적인 성향은 더욱 강해졌다. 1915년 8월, 육군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엘사스와 로트링엔의 성인 남성 거의 대부분을 소집했다. “병역, 또는 노동에 적합한” 최대한의 기준이 적용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런 가혹한 방식 때문에 징집이 잘 되기 보다는 반발만 늘어났다. 전쟁 초기부터 징집은 엘사스-로트링엔 전 지역에서 인기가 없었다. 전쟁의 종결이 가까워지자 더 많은 민간인들이 징집을 피해 잠적했다.

징집될 경우 엘사스-로트링엔 출신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차별에 대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항했다. 이들은 같은 고향 출신자들을 규합해서 위험한 명령을 거부하고 종종 탈영이나 폭동을 일으켰다. 독일 군부는 특히 탈영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탈영은 부대의 사기를 떨어트릴 뿐 아니라 군의 기밀을 적에게 넘겨줄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전투중에 발생하는 포로와 실제로 탈영해서 항복한 경우가 굉장히 모호하기 때문에 탈영에 대한 통계는 주의해서 살펴봐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사스-로트링엔 출신 병사들의 탈영율이 높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1917년 7월에 독일육군 부참모장은 최소한 1,000명 이상의 엘사스-로트링엔 출신 병사들이 탈영했으며 달리 말하면 10,000명 중 80명이 탈영했다고 기록했다. 일반적인 독일군의 탈영율은 10,000명 당 1명 이었다. 그리고 1917년 12월에서 1918년 9월까지 530명이 더 탈영했다.

Alan Kramer, "Wackes at War : Alsace-Lorraine and the failure of German national mobilization 1914-1918", State, society and mobilization on Europe during the First World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pp.110-112

한국의 인터넷 게시판에 알자스-로렌 사람들 보다 더 독일적인 한국어 사용자가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 입니다.

2007년 3월 29일 목요일

주머니안에 있는 거스름돈의 처리

주머니 안에 있는 거스름돈을 정리하는 것은 꽤 골치아픈 일 입니다. 특히나 잔돈이 많을 경우에는.

소련 영내의 소수민족들에 대한 “개념적인 정복”은 특별한 기준이나 계획이 없이 시행됐다.

소련이라는 국가의 건설은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정치적)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스탈린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그런 경향이 더 심해졌다. (제정 러시아에서 탄압받은) “미개한” 소수 민족들이 자신들의 전통문화와 종교를 되찾는 것은 1927년부터 시작된 1차 5개년 계획의 성과에 실망하고 있던 소련 정부에게 상당히 곤란한 문제였다. 1929년 스탈린이 외친 과거와의 “대단절(Великий перелом)”과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개혁을 가속화하는 것이 국가의 목표가 되었다. 소련정권은 소련 인민들의 “인류학적 진보”를 위해서“작고” “약한” 민족들을 보다 발전된 “상위민족(Главные народность)으로 통합하는 작업을 처음에는 서류상으로 시작했고 시행단계에서는 소수민족의 영토와 언어정책을 변경하는 것을 통해 추진했다. 즉 막스적 역사발전단계에서 여전히 봉건체제나 자본주의 단계에 있는 소련인민들을 공산주의 단계로 앞당겨 인도하려는 것 이었다. 이런 민족통합작업은 스탈린의 “대단절”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 최초의 인구조사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소련정권은 자국의 국민과 영토, 그리고 자원에 대한 중대한 정보를 정리할 수 있었다. 이때 조사된 인구통계는 1928년 발행되었으며 여기에는 166개 민족과 4개의 소집단, 그리고 6개의 기타 민족집단의 연령, 성별, 언어, 문자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Francine Hirsch, Empire of Nations : Ethnographic knowledge and the making of the Soviet Union, (Cornell University Press, 2005), p.137

1939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서는 166개의 민족이 62개의 민족과 30개의 소수민족으로 정리됐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잔돈이 많은 것 보다는 지폐로 바꾸는 쪽이 관리하기엔 편하겠지요.

2007년 3월 27일 화요일

'독소전쟁사'의 표지 문제...

처음에 표지 시안이 변경됐다기에 출판사에 가서 현재의 표지 디자인을 처음 봤는데 뭔가 좀 말랑말랑해 보인다는 느낌은 들었습니다. 그래도 제 개인적으로는 그럭 저럭 무난한 표지가 아니었나 생각했는데 다른 분들의 평을 보니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더군요.

그 중에 최악의 평가는 이것 같습니다.

When Titans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Hitler 한국어판 출간

이 외에도 표지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는 분들이 많으시더군요.

표지 디자인 담당한 분이 좀 섭섭하실 것 같습니다. 2쇄가 나오게 되면 표지 디자인을 고쳐 보자고 건의하는 것도 고려해 봐야 겠군요.

2007년 3월 25일 일요일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해동고승전 권1 일해거사 전두환

일해거사 전두환은 본시 한국의 국왕이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출가하여 2년 만에 득도하였다.

전두환은 합천 사람으로 후버3년 1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가지를 가르치면 몰라도 될 것 까지 깨치니 모두가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아이젠하워 3년에 군관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흉중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그 뜻을 펼칠 도리가 없었다.

케네디 원년 5월 16일 장군 박정희가 반정을 일으켜 전횡을 일삼던 문하시중 장면을 잡아들이고 사직을 반석에 세웠다. 전두환이 이 소식을 듣고 무과에 합격한 장사들을 모아 박정희를 찾았다.

“소장 비록 무반의 말석에 불과하나 장군께서 이렇게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셨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 보고 있겠사옵니까?”

박정희가 감격하여 전두환을 비장으로 삼았다. 케네디 황제가 박정희를 한국 국왕에 봉한 뒤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여러 요직을 거치다가 마침내 닉슨 5년에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

카터3년 10월 26일, 상장군 김재규가 자객을 이끌고 국왕 박정희를 시해하였다. 이때 견룡대정 차지철은 삼십육계를 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황제가 문하시중 최규하를 한국 국왕에 봉했으나 최규하는 글만 아는 선비인지라 용맹과 위엄이 없어 백성들이 심히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북쪽의 홍건적들이 준동할 기미를 보이니 민심이 더욱 더 흉흉하였다. 국왕 최규하가 도원수 정승화에게 군율로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라 하였으나 정승화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두환이 나라의 형세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여기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국왕 최규하를 알현하였다. 최규하는 평소 스스로 국왕 될 재목이 아님을 알고 양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두환을 만나 그의 뜻을 들으니 크게 기뻐하며 양위 할 뜻을 비추었다. 전두환이 황공해 하며 거듭 사양하였으나 수천명의 선비들이 모여 왕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니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전두환은 본시 덕이 많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국왕이 된 뒤 옛 일을 잊지 않고 따르던 무리들에게 관직과 재물을 후하게 내리니 많은 이들이 과연 전두환은 신의를 지킨다며 감탄하였다.
전두환이 국왕에 오르자 북괴의 김일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김일성은 혹여 전두환이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 조공으로 쌀과 시멘트를 바쳤다. 한국의 여러 국왕 중 북괴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은 전두환이 처음이었다. 이로서 전두환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니 레이건 황제도 크게 기뻐하며 전두환에게 “平北傀保國大將軍韓國國王”의 작위를 내렸다.

레이건 8년,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전두환은 본시 불심이 깊어 항상 출가할 뜻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내 왕위에서 물러 난 뒤 출가할 마음을 굳혔다. 전두환이 출가할 것을 결심하니 그의 처 이씨가 따르기를 간청하였다. 전두환이 대비 이씨와 함께 출가하여 백담사로 가니 많은 이들이 놀랐다. 전두환이 출가하니 본시 머리 숱이 거의 없어 따로 삭발할 필요가 없었다.

조지 부시 2년 12월, 마침내 전두환이 도를 얻었다. 사람들은 석가모니도 득도하는데 7년이 걸렸는데 전두환은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여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여러 신이(神異)한 일을 행하였다.

노태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김영삼은 야소교도로 불도를 탄압하였다. 마침내 상황 전두환과 노태우도 불교를 숭상한다 하여 잡아들였다. 이때 전두환은 감옥에서 일절 음식을 먹지 않고 참선하였는데 그 기운이 범상치 않으니 옥리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 하였다.

클린턴 5년, 한국에 큰 환란이 닥치니 많은 이들이 이것은 김영삼이 불도를 탄압한 때문이라 하였다. 클린턴 황제가 김대중을 국왕에 봉했다.

김대중은 국왕이 되어 다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상왕으로 복위시켰다.

이때 전두환은 김영삼이 모든 재물을 빼앗아 전 재산이라고는 29만원 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덕망이 높아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많은 이들이 흠모하여 찿아왔다. 하루는 대비 이씨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였다.

“찿아오는 객은 많은데 지금 있는 돈이라고는 29만원 뿐이라 세뱃돈이 부족하니 이를 어찌 하면 좋겠사옵니까?”

전두환이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객이 오는대로 세뱃돈을 듬뿍 주어 보내도록 하오.”

대비 이씨가 반신 반의하며 손님이 오는 대로 출금하여 세뱃돈을 주었는데 통장에는 여전히 29만원이 남아 있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니 더욱 더 전두환의 이름이 높아졌다.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해동고승전 권1 일해거사 전두환

일해거사 전두환은 본시 한국의 국왕이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출가하여 2년 만에 득도하였다.

전두환은 합천 사람으로 후버3년 1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가지를 가르치면 몰라도 될 것 까지 깨치니 모두가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아이젠하워 3년에 군관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흉중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그 뜻을 펼칠 도리가 없었다.

케네디 원년 5월 16일 장군 박정희가 반정을 일으켜 전횡을 일삼던 문하시중 장면을 잡아들이고 사직을 반석에 세웠다. 전두환이 이 소식을 듣고 무과에 합격한 장사들을 모아 박정희를 찾았다.

“소장 비록 무반의 말석에 불과하나 장군께서 이렇게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셨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 보고 있겠사옵니까?”

박정희가 감격하여 전두환을 비장으로 삼았다. 케네디 황제가 박정희를 한국 국왕에 봉한 뒤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여러 요직을 거치다가 마침내 닉슨 5년에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

카터3년 10월 26일, 상장군 김재규가 자객을 이끌고 국왕 박정희를 시해하였다. 이때 견룡대정 차지철은 삼십육계를 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황제가 문하시중 최규하를 한국 국왕에 봉했으나 최규하는 글만 아는 선비인지라 용맹과 위엄이 없어 백성들이 심히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북쪽의 홍건적들이 준동할 기미를 보이니 민심이 더욱 더 흉흉하였다. 국왕 최규하가 도원수 정승화에게 군율로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라 하였으나 정승화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두환이 나라의 형세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여기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국왕 최규하를 알현하였다. 최규하는 평소 스스로 국왕 될 재목이 아님을 알고 양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두환을 만나 그의 뜻을 들으니 크게 기뻐하며 양위 할 뜻을 비추었다. 전두환이 황공해 하며 거듭 사양하였으나 수천명의 선비들이 모여 왕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니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전두환은 본시 덕이 많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국왕이 된 뒤 옛 일을 잊지 않고 따르던 무리들에게 관직과 재물을 후하게 내리니 많은 이들이 과연 전두환은 신의를 지킨다며 감탄하였다.
전두환이 국왕에 오르자 북괴의 김일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김일성은 혹여 전두환이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 조공으로 쌀과 시멘트를 바쳤다. 한국의 여러 국왕 중 북괴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은 전두환이 처음이었다. 이로서 전두환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니 레이건 황제도 크게 기뻐하며 전두환에게 “平北傀保國大將軍韓國國王”의 작위를 내렸다.

레이건 8년,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전두환은 본시 불심이 깊어 항상 출가할 뜻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내 왕위에서 물러 난 뒤 출가할 마음을 굳혔다. 전두환이 출가할 것을 결심하니 그의 처 이씨가 따르기를 간청하였다. 전두환이 대비 이씨와 함께 출가하여 백담사로 가니 많은 이들이 놀랐다. 전두환이 출가하니 본시 머리 숱이 거의 없어 따로 삭발할 필요가 없었다.

조지 부시 2년 12월, 마침내 전두환이 도를 얻었다. 사람들은 석가모니도 득도하는데 7년이 걸렸는데 전두환은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여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여러 신이(神異)한 일을 행하였다.

노태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김영삼은 야소교도로 불도를 탄압하였다. 마침내 상황 전두환과 노태우도 불교를 숭상한다 하여 잡아들였다. 이때 전두환은 감옥에서 일절 음식을 먹지 않고 참선하였는데 그 기운이 범상치 않으니 옥리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 하였다.

클린턴 5년, 한국에 큰 환란이 닥치니 많은 이들이 이것은 김영삼이 불도를 탄압한 때문이라 하였다. 클린턴 황제가 김대중을 국왕에 봉했다.

김대중은 국왕이 되어 다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상왕으로 복위시켰다.

이때 전두환은 김영삼이 모든 재물을 빼앗아 전 재산이라고는 29만원 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덕망이 높아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많은 이들이 흠모하여 찿아왔다. 하루는 대비 이씨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였다.

“찿아오는 객은 많은데 지금 있는 돈이라고는 29만원 뿐이라 세뱃돈이 부족하니 이를 어찌 하면 좋겠사옵니까?”

전두환이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객이 오는대로 세뱃돈을 듬뿍 주어 보내도록 하오.”

대비 이씨가 반신 반의하며 손님이 오는 대로 출금하여 세뱃돈을 주었는데 통장에는 여전히 29만원이 남아 있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니 더욱 더 전두환의 이름이 높아졌다.

2007년 3월 23일 금요일

황빠들의 추태

사무실 공기가 매우 텁텁해서 창문을 열어 놓고 있는 중 입니다.

그런데 대략 2~3분 전(3시 17~18분) 부터 황빠들이 스피커를 부착한 차량을 타고 청계천 근처를 싸돌아 다니며 황우석 박사를 지지하는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젠장할!

이 친구들은 빨리 황우석 박사의 명예를 회복하고 자신들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고 호소하는데 이 망할 인종들 때문에 제 정상적인 생활이 방해받고 있습니다.

국제여단에 대한 우울한 이야기

(전략) 국제여단 소속의 외국인 지원병들은 스페인 병사들과 유리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공식적인 방문을 제외하면 국제여단 병사들은 스페인 병사들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영국이나 미국인 병사들은 “럭키 스트라이크”를 피우지만 담배가 없어 피우지 못하는 스페인 병사들에게 자신들이 피우는 담배를 나눠줄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국제여단 병사들은 고국에서 보내오는 물품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지만 이것을 스페인 전우들과 나누지 않습니다. 외국인 지원병들에게는 출신 국가의 식품이 제공되지만 국제여단에 소속된 스페인 병사들에게 스페인 전통 음식을 제공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알바세테(Albacete)의 의무부대는 최근까지 외국인 지원병들만 치료했으며 스페인 병사들은 해당 부대에서 알아서 하라고 방관했습니다. 알바세테, 무르시아(Murcia), 알리칸테(Alicante), 베니카심(Benicassim)의 군병원은 매우 좋은 시설을 가지고 있지만 국제여단본부의 의무감 Telge 소령과 그의 부관 Franek 대위는 국제여단에서 외국인 전우들과 함께 싸운 스페인 병사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사단이 처음으로 스페인 전우들에게 외국인 지원병들과 동등한 처우를 한 것이 대단한 성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1여단장 Richard는 브루네테와 사라고사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보고하면서 외국인 지원병의 경우는 매우 자세하게 집계하고 때로는 이름까지 일일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정작 자신이 지휘하는 스페인 병사들의 피해는 얼마나 되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후 략)

1938년 1월 14일, 스베르쳅스키 대령의 보고서 중에서

Spain Betrayed : The Soviet Union in the Spanish Civil War, Yale University Press, 2001, pp453-454에서 재인용

부대 재편성 도중에 매우 유감스럽고 극도로 심각한 사고들이 발생했습니다. 본부의 요청에 따라 장교 한명과 정치위원 한명이 Trembleque로 파견됐습니다. 이 두 명이 도시에 도착하자 (Trembleque) 요새사령관과 인민전선위원회에서는 이들이 도착하기 전날에 발생한 (국제여단 병사들이 일으킨) 사고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국제여단소속의) 많은 병사들이 술에 취해서 밤새도록 도시에서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술에 취한 (국제여단) 병사들은 경비병을 강제로 무장해제 한 뒤 위협했으며 도시의 건물들을 마구 파손해 주민들이 밤새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부대 이동 과정에서 60명이 탈주했습니다.

(후 략)

1938년 2월 13일, 14혼성여단장 뒤몽 중령이 국제여단 본부에 보낸 보고서.

Spain Betrayed : The Soviet Union in the Spanish Civil War, Yale University Press, 2001, pp462-463에서 재인용

정치적 올바름을 외치는 자들의 이중성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모양입니다. 프랑코에 맞서 싸운 이들의 용기까지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렇게 깽판을 칠 요량이라면 스페인에는 뭐하러 간 것일까요?

이와 비슷하게 1820년대에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가한 서유럽 지원병들 상당수가 그리스인들을 극도로 혐오했다고 하지요.

2007년 3월 20일 화요일

2차 대전 중 소련장교에 대한 농담

2차대전 당시 소련군 병사들 사이에서 돌던 우스개라고 하는군요.

어느날 저녁, 한 장교가 자신의 부하들을 모아놓고 농담을 했다. 병사들은 농담을 듣고 모두 웃었는데 유독 한명의 병사는 무뚝뚝하게 있는 것이었다. 장교는 정치위원을 불러서 가만히 있는 병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물어보라고 했다.
정치위원이 병사에게 물었다.

“동무, 혹시 집에서 무슨 나쁜 소식이라도 들었소?”

그 병사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자신의 전우들은 모두 무사하고 또 자기 자신도 별 다른 문제가 없다는 것 이었다. 정치위원이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런데 왜 웃지 않은거요?”

그 병사가 대답했다.

“저는 다른 연대 소속입니다. 저 분은 제 연대장이 아닙니다.” (웃는 것도 장교의 명령에 따라야 할 정도로 장교의 권위가 높았다는 이야기)

Catherine Merridale, Ivan’s War : Life and Death in the Red Army 1939-1945, Metropolitan Books, 2006, p.199


이 이야기가 웃기십니까?

2007년 3월 18일 일요일

300

비수기의 절대강자(?) “300”을 보고 왔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다 필요 없고 그저 마초를 위한 마초 영화더군요.

민주주의, 자유 같은 식상한 이야기를 꺼내긴 하지만 이건 그저 양념에 불과합니다. 페르시아 사자가 와서 복종을 요구하자 우리의 주인공은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고는 바로 사자를 우물에 멋지게 처넣지요. 그리고 바로 싸우러 나갑니다. 별 이야기 없습니다. 싸움을 거는데 우리의 대(大)마초 스파르타인들이 그냥 있을 수는 없지요.

물론 이것만 가지고는 이야기가 안 되겠는지 중간 중간 스파르타 내의 부패한 정치인과 왕비의 이야기를 넣긴 하는데 이건 정말 불필요한 사족이지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헐벗은 근육맨들이 말 그대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적들의 살과 뼈를 분해해 준다는 것입니다. 어찌나 일방적인 싸움인지 페르시아군이 더 불쌍하더군요. 끝없이 밀려드는 엑스트라들은 거의 대부분 스파르타 마초들에게 단 한칼에 사지가 절단됩니다. 그나마 정예부대라는 “임모탈”들도 거의 일방적으로 도륙당하기는 마찬가지지요. 페르시아군은 코뿔소, 코끼리 등 인간 이외의 것들도 끌고 옵니다만 이 짐승들 역시 대마초들의 망토 자락 하나 건드려 보기도 전에 도륙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쓸데없는 사족이었던 여왕과 스파르타 의회 이야기만 뺀다면 제법 볼만한 영화였습니다.

약간 의외였던 것은 반지의 제왕에서 온화하고 사려깊은 성격으로 나왔던 David Wenham도 스파르타 대마초 일당의 일원으로 나온다는 점 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파르타 마초들 중 가장 미남이 아니었나 싶군요.

2007년 3월 15일 목요일

독일의 점령지역 산업시설 활용 1939-1945 - 항공산업의 사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전시 동원과 관련해 자주 논의되는 이야기 중 하나는 1940년 독일이 장악한 서유럽의 공업기반이 독일의 전쟁 수행능력에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줬는가 하는 점 입니다.

가장 먼저…

전후 연합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차 대전 기간 중 독일에 점령된 국가들이 독일 공군에 공급하기 위해 생산한 항공기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국 가1941194219431944총 계
프랑스626681,2855022,517
체코슬로바키아8195688051,9554,147
네덜란드1675414442947
헝가리0073344417
이탈리아003279111
Richard Overy, The Luftwaffe and the European Economy 1939-1945,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1979/2


통계에도 나타나 있듯 독일이 가장 재미를 본 국가는 체코였습니다. 일단 오스트리아를 제외하면 가장 먼저 독일의 수중에 들어온 산업화된 국가였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국항공성(RLM) 내에는 체코의 기업들에게는 항공기 완제품 생산대신 부품과 반조립 정도만 맡겨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우데트(Ernst Udet)가 체코의 공업시설 활용을 적극적으로 밀어 붙였기 때문에 이미 1939년 말에 체코의 항공기 제조업체들은 독일공군으로부터 총 1,797대의 항공기 생산을 수주 받습니다. AVIA가 이때의 경험으로 전후에도 Bf 109의 짝퉁(?)을 생산한 것은 유명하지요.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체코의 군수 산업체들은 독일 점령지역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고 기여도가 컸다는 점 입니다. 체코의 기술 좋은 노동자들은 비교적 말도 잘 듣고 사보타지에 취미가 없었다지요. 군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도 경호를 위해 무장 병력을 붙여줘야 했던 유고슬라비아에 비하면 체코는 독일 기업들이 털어먹기 좋은 낙원이었다고 합니다.

슬로바키아는 명색은 독립국이었지만 실제 사정은 옆 동네인 체코와 같아서 거의 일방적으로 독일에 털립니다. 독일의 공군사절단(Luftwaffenmission)은 슬로바키아 정부로부터 국영 항공기 공장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권리를 얻어내는데 사실 이건 반 강제적인 것이었지요. 독일은 슬로바키아 정부에게 슬로바키아의 국영 공장이 생산한 항공기의 75%는 독일 공군이 인수하고 25%만 슬로바키아 공군에 공급한다는 조항을 강요해서 아주 재미를 봅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꽤 흥미로운 경우입니다.
먼저 독일 점령지역의 공장과 비시 정부 관할 지역의 공장을 다루는 주체가 달랐습니다. 비시 정부 관할 지역은 1943년 점령 이전까지는 스위스, 스웨덴과 함께 중립국으로 분류돼 독일항공산업위원회(DELIKO, Deutsche Luftfahrtindustriekommision)의 담당이었습니다. 반면 독일 점령지역은 제국항공성의 관할하에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특히 항공기 완성품 뿐 아니라 중간 부품의 공급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서는 독일 다음으로 항공 산업이 발달한 나라였기 때문에 많은 독일 기업들이 침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국항공성이 나서기 전에 기업들이 먼저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지요. 많은 수의 항공 기업(특히 융커스)들은 아직 프랑스와의 휴전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즉 이론적인 교전상태)에서 프랑스 기업들과 사업계약을 체결하러 인력을 파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는 전체적인 항공기 생산에서는 슬로바키아에 뒤지긴 하지만 독일 공군의 중요한 해외 파트너(?) 였습니다. 1942년 까지 독일 공군과 납품 계약을 체결한 프랑스 기업은 192개사였다고 합니다.(같은 기간 독일 육군은 60개사, 해군은 9개사)
프랑스는 휴전 이후에도 자국 정부를 위해서 항공기 생산을 계속했는데 가끔은 독일이 제 3국에 공여할 목적으로 프랑스제 항공기를 주문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1943년에 불가리아 정부는 독일측에게 Dewoitine D.520(도데체 왜 이걸 독일에?) 96대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전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이건 취소되고 Bf 109 16대가 공여 됩니다.

폴란드의 경우는 말 그대로 안습 입니다. 국가사회주의 강도단의 두목인 괴링 부터가 폴란드는 산업적으로 가치가 없으며 약탈할 건덕지가 없다고 공언할 정도였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켈은 크라쿠프에, 융커스는 포즈난에 부품 생산 공장을 확보합니다. 물론 폴란드의 경우 서유럽과 달리 항공기 완성품을 조립할 수 있는 공장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폴란드와 유사한 국가로는 유고슬라비아도 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항공 기업들은 독일 점령과 동시에 독일 항공기업들의 자회사로 강제 흡수됩니다. 전쟁 이전 유고슬라비아의 대표적인 항공기업이었던 Aeroput은 루프트한자의 정비공장으로 바뀌고 Rakovica는 융커스의 엔진 부품 공장으로 전환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일이 가장 재미를 보지 못한 곳은 이탈리아였습니다.
독일은 이탈리아를 점령한 뒤 이탈리아의 항공기업들을 독일의 항공기 생산에 활용하려 했으나 성과가 매우 시원치 않았다고 하지요. 항공기 생산이 1943년에 32대, 1944년에 79대로 독일의 한달 치 생산도 안 되는 규모였습니다.

독일이 해외의 산업 기반을 활용한 것은 이렇게 외형적으로나마 합법의 탈을 쓴 것도 많았지만 아예 노골적인 약탈로 나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많았습니다.
먼저 체코슬로바키아가 점령된 다음 접수된 장비와 시설은 불가리아로 매각됐고 폴란드 점령 후 압수된 항공기와 기자재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스웨덴 등지로 매각, 또는 공여 됐습니다.
독일 공군은 점령지로부터 산업 시설을 인수하는데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소련 침공을 앞두고는 제국항공성 내에 산업시설 노획을 위한 조직(Beute-Sonderkommando)를 만들었습니다. 이 조직은 1941년 한 해 동안 소련의 점령 지역내에서 8,400여대의 대형 공작기계를 약탈해서 독일로 보냈다고 합니다.
뭐, 어쨌건 소련도 전쟁이 끝난 뒤 실레지엔과 동프로이센의 기계들을 잔뜩 뜯어 갔으니 피장 파장이려나요?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항공산업 부문만 놓고 보면 독일인들은 2차 대전기간 동안 충분히 재미를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으로 거덜직전까지 가긴 했지만 그것 조차 미국의 경제원조로 피해가니 말 다했지요.

2007년 3월 13일 화요일

문화적 충격 - 세뇌 교육의 부작용?

(병사들이) 전쟁이전에 조국에 대해 가지고 있던 관념은 전쟁이 쉽게 끝날 것이라는 희망과 마찬가지로 빨리 사라졌다. 고르돈은 학교에 다닐 때 까지만 해도 매우 순진한 "국제공산주의자"였다. 그가 처음 만난 독일군은 포로가 된 장교 한 명과 병사 두명이었다. 병사 중 한명은 "노동자"였다. 고르돈은 그때를 회상했다.

"처음 통역병이 독일군 포로에게 어떻게 당신 같은 노동자가 전세계 무산계급의 첫 번째 조국인 소련을 향해 무기를 들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 독일 포로는 처음에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 했습니다. 그 포로는 자신의 부대의 동료들 대부분이 노동자나 농민이라고 했지요. 그러나 자신들의 조국은 소련이 아니라 독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그 포로의 대답을 듣고 나서 그 동안 우리가 믿었던 '전 세계 무산계급의 조국인 소련'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Catherine Merridale, Ivan’s War : Life and Death in the Red Army 1939-1945, (Metropolitan Books, 2006), p.129

폐쇄적인 국가에서 폐쇄적인 교육을 받으면 이렇게 된다고 하지요.

2007년 3월 12일 월요일

[妄想大百科事典] 환빠

환빠(Hwan-ppa)

실체가 없는 가상의 왕국을 상상하며 성적 쾌감을 느끼는 변태성욕자들을 통칭하는 단어.

환빠들이 보이는 증상은 다음과 같다.

1. "환국"이라는 가상의 왕국을 떠올리며 자위를 한다. 종종 자위를 돕기 위해 "환단고기", "단기고사"등의 판타지 소설을 읽는다.

2. 증상이 심해지면 천안문 광장에 탱크를 몰고 들어가거나 이휘소 박사가 개발한 핵탄두를 대포동에 실어 도쿄에 날리는 망상을 하며 쾌감을 느끼게 된다.

환빠들의 자위는 오른손(또는 왼손)을 쓰지 않고 뇌만 가지고도 가능하기 때문에 의학계에서는 "플라토닉 오나니(Platonic Onanism)"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의학자들은 실체조차 없는 대상을 가지고 자위를 한다는 점에 주목해 "초현실적 오나니(Surrealistic Onanism)"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환빠들의 초현실적 성적 경향에 주목해 대한민국은 자위행위도 포스트모던한 단계에 진입했으며 자위행위야 말로 대한민국의 각 분야에서 가장 먼저 탈근대에 진입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환빠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럭저럭 지적으로 보이나 조금만 대화를 나눠도 극심한 변태성욕자임을 알 수 있다. 환빠들은 언제 갑자기 자신들의 성적욕구를 드러낼 지 모르므로 각별한 주의가 요구 된다.

전문가들은 주위에 환빠가 있을 경우 접촉을 삼가고 최대한 신속히 가까운 경찰서나 정신병원에 신고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고조선 역사 부활 국민대축제라는 행사

고조선 역사부활 국민대축제

언제 이런 행사를 준비한 건지 놀랍군요. 세상에는 참 쓸데없이 낭비되는 돈이 많다는걸 실감하게 됐습니다. 국사교과서에 삼국유사에 기록된 고조선의 건국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는 발표가 나온 뒤 이를 축하하기 위해 기획했다고 하는데 굉장히 난감합니다.

이 행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국학연구원이라는 괴이한 단체의 경우 예전 부터 돌아가는 모양새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국사교과서 개정과 함께 내놓은 성명을 보니 역시 굉장히 위험한 곳 이더군요.

국학연구원이 지난 7일 내놓은 성명을 보면 도데체 이 양반들이 뭘 하자는 건지 알수가 없습니다.

이 양반들의 성명 중 일부를 발췌하자면..

국학연구원은 "식민사관에 젖어 자국의 역사 축소에 앞장서온 국내 학계는 그동안 한국의 역사문화에 대한 양심과 책임을 저버렸음을 뼈아프게 반성해야 한다" 며 "교육인적자원부의 용단을 계기로 국내 상고사연구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이번 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자국의 역사 축소에 앞장서온 국내 학계에 반성을 촉구한다고 하는 군요...

그리고 그 다음이 더더욱 가관입니다.

이날 국학연구원은 ▲단군 조선의 건국 전후사에 관한 문헌고증 연구를 존중하고 국사교육에 수용하는 방안 적극 검토 ▲단군 이전의 신시와 환국의 역사 연구 심화 ▲한국사의 외연을 한반도에 국한시키지 말고 고구려, 발해, 금, 요, 원, 청, 일본 열도로 뻗어나간 역사를 밝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한국사 왜곡에 맞서야 함 ▲민족 고유의 선도문화 연구 강화 ▲사대주의와 일제 식민사관과 사회주의 유물사관에서 벗어나야 함 등 5개 연구 제언도 함께 제시할 예정이다.

역시 이들은 충성스런 환국의 신민이었습니다. 환국의 역사 연구 심화? 도데체 뭘 가지고? 황당고기 같은걸 들고 역사 연구를 할 바에는 차라리 반지의 제왕을 가지고 유럽 고대사를 하는게 나을 듯 싶습니다. 반지의 제왕은 재미라도 있지...

그리고 발해까지는 그렇다 치고 금, 요, 원, 청은 도데체 뭐 하자는 수작인지. 국제적 망신을 자초하고 싶은지 아무 말이나 마구 늘어 놓는군요... 이렇게 도처에서 환빠가 암약하고 있다는게 끔찍합니다.

아. 참고로 11일 행사에서는 고조선 전통무예 "천부신공" 이라는 것도 시연했다고 합니다.

이런게 있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으니 이 어린양이 얼마나 민족정신이 부족한지 알겠습니다.

2007년 3월 11일 일요일

1차 대전과 군수체계의 혁명 - Martin van Creveld

이 글은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한 Great War, Total War에 실린 Martin van Creveld의 “World War I and the Revolution in Logistics”에서 64-69쪽을 발췌한 것 입니다. 사실 이 글에서 말하는 내용은 같은 저자의 유명한 저서 “Supplying War”의 4장과 거의 동일한데 후자의 분량이 더 많아서 우리말로 옮기는데 시간이 걸리는 고로 양이 더 적은 이 글을 번역했습니다.

1871년부터 1914년 사이의 기간은 유럽의 역사에서 유례없이 인구적, 경제적 팽창이 이뤄진 시기였다. 불과 44년만에 유럽의 인구는 2억9300만명에서 4억9000만명으로 70%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동안 산업, 무역, 그리고 교통수단은 눈부시게 발전해 유럽을 전체적으로 변화시켰다. 1870년에 유럽의 3대 공업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의 석탄 및 갈탄 생산량은 1억6000만톤이었는데 이것이 1913년에는 6억1200만톤으로 증가했다. 이와 비슷하게 1870년 세 국가의 선철 생산량은 750만톤이었는데 1913년에는 2900만톤으로 거의 300%의 증가를 이뤄냈다. 이런 산업생산의 증가는 두말할 필요 없이 직업, 주거환경, 그리고 문화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비록 산업혁명이 18세기 말에 일어났지만 석탄, 선철, 강철로 대표되는 산업화의 영향이 처음으로 나타난 전쟁은 1870년의 보불전쟁이었다.

공장의 굴뚝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면서 유럽 각국의 군사력도 크게 증가했다. 사실 19세기 후반 유럽 각국의 군대규모의 증가는 같은 기간 인구 증가보다 더 큰 것이었다. 사회적 발전과 행정 효율의 증가, 그리고 국민개병제의 도입은 방대한 규모의 육군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를 뒷받침하는 사회-경제 체제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두번째로 거대한 육군을 가졌던 프랑스는 1870년 당시 전체 인구 3700만명 중 군사훈련을 받은 국민은 50만명으로 그 비율이 1대 74였다. 그러나 1914년에는 전체 인구가 불과 10%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훈련을 받은 국민은 400만에 달했다.
마찬가지로 독일제국 역시 1870년부터 1914년까지의 인구증가율이 프랑스 보다 높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1870년에 전체 인구 대비 군사훈련을 받은 국민의 비중이 44대 1에서 1914년에는 15대 1로 증가했다. 유럽 전체를 놓고 볼 때 1914년 전쟁 발발 직전 가용한 병력 자원은 거의 2000만명에 달했다. 그리고 비유럽 국가 중 가장 중요한 미국의 경우 육군 규모는 보잘 것 없었지만 전시 동원능력은 유럽의 어떤 국가보다 막강했다.

전쟁 수행이 보다 복잡해 지면서 군대에 필요한 보급도 마찬가지로 복잡해 졌으며 병사 일인당 필요한 보급량은 병력 증가 보다 더 급속히 늘어났다.
예를 들어 1870년 당시 독일 육군의 군단 사령부 수송대의 마차 대수는 30대 였으나 1914년에는 두 배로 늘어났다. 1870년 전쟁에서 북독일 연방이 보유한 대포는 1,585문 이었으나 1914년 독일 제국이 보유한 대포는 거의 8,000문에 달했다. 게다가 1914년 당시의 무기는 발사속도가 더 빨라졌으며 1890년대에 등장한 기관총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유압식 제퇴기와 포미장전 방식을 채택한 1914년의 대포는 1866년 당시의 대포에 비해 발사속도가 3-4배 늘어났으며 병사 세명이 조작하는 분당 발사속도 600발의 빅커스 기관총은 1866년 당시 1개 보병대대의 탄약 소모량의 절반을 소모했다. 육군 규모의 증가와 무기 성능의 개선으로 전쟁이 벌어질 당시 각 국 육군이 하루의 전투에 보급해야 하는 물자의 양은 대략 (1870년 전쟁의) 12배 이상 늘어났다.
이렇게 필요한 보급품의 양이 엄청나게 증가했기 때문에 1차대전이 일어날 당시 각 국의 정치인과 군인들이 단기전을 예상한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정치인들과 군인들은 만약 장기전으로 들어간다면 경제적으로 국가가 붕괴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Ivan Bloch같은 사람들은 장기전으로 간다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건 간에 유럽인들은 이런 변화가 미치는 영향을 직접 느낄 수 있게 됐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1870-71년 전쟁에서 프로이센군 포병의 탄약 소모량은 포 1문이 5개월 간 평균 199발 이었다. 1914년 당시 유럽 각국 중 가장 전쟁 준비가 잘된 독일은 포 1문 당 탄약 1,000발을 비축한 상태에서 전쟁에 들어갔으며 이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000발로 6개월을 버틴다는 예상과는 달리 불과 1개월 반 만에 비축량은 모두 바닥이 나 버렸다.
다른 나라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모든 교전국들이 1914년 말과 1915년 초 까지 이른바 “포탄 위기”를 겪었다. 일부 국가, 특히 러시아는 이때의 타격에서 회복되지 못했으며 다른 국가들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항상 포탄 부족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독일은 발터 라테나우(Walter Rathenau)가, 그리고 영국은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가 새로운 전쟁 상황에 직면해 행정 체계를 쇄신하고 산업 동원에 박차를 가했다.

1916년이 되자 주요 교전국들은 전쟁 초기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마침내 본격적인 총력전 체제로 들어갔다.
약간의 통계를 인용하면 영국의 경우 연간 대포 생산량이 91문에서 4,314문으로 증가했고 탱크 생산은 전무하던 것이 150대로, 항공기는 200대에서 6,100대로, 그리고 기관총은 300정에서 33,500정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다시 1918년에는 대포 8,039문, 전차 1,359대, 항공기 32,000대, 기관총 120,900정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일일 기준으로 전투 사단의 보급품 소요량은 1914년에 55톤에서 1916년에는 거의 세배로 증가했다. 근본적으로 병사들과 견인용 동물에게 필요한 보급량은 변화가 없었다. 즉 대부분의 보급 소요의 증가는 각종 장비의 증가 때문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으며 장비에 필요한 보급은 사단 보급량의 60-75%를 차지했다. 가장 중요한 보급품은 탄약이었으며 차량의 증가로 휘발유 및 윤활유의 소모도 크게 증가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교체용 장비(특히 야전 정비가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와 예비부품 이었다. 여기에 막대한 양의 지뢰, 철조망, 콘크리트, 철판, 널판지 등 참호전에 필요한 물건들의 소요도 엄청났다. 보급품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고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모두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건이었다. 마침내 군대가 야전에서 주변의 거주지에서 보급을 조달할 수 있는 시대가 끝난 것 이었다.

이렇게 역사상 유례가 없던 거대한 보급 혁명으로 보급의 중요성이 병사들의 식료품과 말 먹이에서 기계 장비로 옮겨 가면서 모든 국가들이 총력전 체제로 전환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돼야 했다. 총력전 체제로 전환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보급 소요량이 크게 증가한 데 비해 보급품을 전방으로 추진하는 기술적인 발전은 1870년 이래 매우 더딘 수준이었다는 점에 있다.
19세기 후반 이래 철도의 효율이 증가하고 또 철도망이 더 조밀해 진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유럽의 철도 연장은 101,000km에서 322,000km로 늘어났다. 그러나 철도 수송 체계의 비융통성과 취약성은 1914-18년의 전쟁 기간 동안 여지없이 드러나 버렸다. 이전 전쟁에서도 마찬가지 였지만 철도는 보급품을 싣고 내리기 위해 여러 부대 시설이 필요했으며 철도역 같은 시설들은 적의 기습으로부터 보호 받기 위해 전선으로부터 수십 km 떨어져 있어야 했다. 1870년 전쟁과 마찬가지로 1914년에도 철도역과 전방을 이어주는 수단은 말이 끄는 마차였다. 이런 방식으로는 계속해서 증가하는 전방의 보급소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 결과 유럽 각국의 군대는 과거와 비교해서 보급 종단점에서 멀리 진격할 수 가 없게 됐다. 구스타프 아돌푸스나 말버러, 나폴레옹, 몰트케(특히 앞의 세 사람은) 같은 지휘관들은 적의 영역으로 깊이 들어가더라도 충분히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1차대전이 발발하고 몇 주 뒤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의 철도 시설이 파괴되자 슐리펜 계획은 처음부터 차질을 빚게 됐다. 설사 독일군이 마른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더라도 보급 문제 때문에 더 이상의 진격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뒤에 기관총과 참호의 활용, 또 유선전화를 이용한 지휘 통제 체계의 문제점 때문에 결국에는 작전적 방어가 작전적 공세보다 더 위력을 발휘하게 됐다. 이런 방어 우위 경향으로 모든 교전국들은 한층 더 동원체제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보급의 특이한 문제, 즉 전방의 소요량과 이를 추진할 기술적 능력의 불균형이 총력전 체제를 가져오게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대규모의 보급 소요가 총력전을 불러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공격하는 쪽이건 방어하는 쪽이건 보급 소요는 엄청났고 특히 1916년 이후로는 급격히 증가했다. 영국군은 솜 공세당시 공격 준비사격을 위해 1,200,000발의 포탄을 준비했는데 이것은 무게로 따지면 거의 23,000톤에 달했는데 이것은 나폴레옹이 보로디노 전투에서 사용한 포탄 양의 100배를 넘는 것 이었다. 만약 첫 번째의 대공세가 돈좌될 경우 그 다음의 공격 준비사격은 더 강력해 졌다.
예를 들어 1917년 6월 Messiness 전투에서는 350만발의 포탄이 발사됐으며 50만 톤의 폭약이 사용됐다. 2개월 뒤의 이프르 전투에서는 4,300,000발의 포탄이 발사됐으며 무게로는 107,000톤에 달했다. 이 무렵 미국의 공장들은 월간 5,000~6,000톤의 무연화약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남북전쟁 전 기간 중 남부군이 사용한 흑색화약과 비슷한 규모였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물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교전국들은 산업을 총 동원했고 더 많은 것을 전쟁에 쏟아 넣었다. 영국의 경우 1914년 국가총생산의 15%였던 전쟁예산이 1918년에는 85%까지 치솟았다.

약간 다른 관점에서 서부전선을 살펴보면 이런 20세기 초 보급의 특이한 문제점들은 모든 작전을 과거의 공성전과 비슷한 유형으로 만들어 버렸다.
각각의 공세를 위해서 막대한 양의 물자가 생산되어 후방에 대규모로 축적된 뒤 전방의 특정한 지점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공격 개시일이 되고 명령이 떨어지면 엄청난 포탄의 폭풍이 전선을 휩쓸었다. 항상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대규모 포격은 적의 방어선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고 특히 1918년 독일의 춘계 공세와 하계 공세 기간이 그런 경우였다.
그리고 공세가 성공하면 다음 공격을 위해서 수많은 병력과 막대한 무기, 통신망, 보급품이 전방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이런 진격은 결국에는 철도 종단점에서 더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장지역은 후퇴하는 적에 의해 초토화 되고 또 수많은 포탄구멍으로 엉망이 돼 있었기 때문에 가장 기초적인 수송수단, 즉 말이 끄는 수레나 사람 말고는 사용할 수가 없었고 이런 식의 보급추진은 진격하는 전방 부대를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솜 전투 처럼 유선 전화에 의존하는 지휘 통신 체계가 붕괴될 경우 초기의 공격이 성공을 거두더라도 후속 부대가 제때 투입되지 못 해 진격이 중지되었다. 보급 문제가 작전과 전략적 문제를 압도하게 되자 양 측의 지휘관들은 결국에는 비슷한 방식을 더 크게 반복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2007년 3월 9일 금요일

역시 그랬구나.

디시인사이드 김유식 사장이 구글을 가봤더니…(조선일보)

가끔 디시인사이드에 들어가는데 김유식 사장의 정치성향에 대한 이야기가 많더군요. 뭐, 가끔씩 가는 저도 김유식이라는 양반의 성향이 오른쪽이라는건 알았습니다만 너무 오른쪽 같군요.

2007년 3월 8일 목요일

[美利堅史] - 테네시공 엘 고어 世家

테네시공 엘 고어는 황도(皇都) 화성돈 사람으로 트루먼 4년에 태어났다.

고어의 부친 앨버트 시니어는 덕망이 높아 루즈벨트 황제가 테네시 후에 봉하였다.

아이젠하워 원년, 테네시주 백성들이 앨버트 시니어를 거듭 칭송하니 황제가 이를 듣고 앨버트 시니어의 작위를 높여 테네시 공으로 봉하였다.

고어는 장성하여 하버드 서원에서 수학하였다. 고어는 이때 토미 리 존스라는 선비를 만났는데 존스는 뒤에 서부로 가서 광대가 되었다고 전한다.

닉슨 원년, 고어는 군졸이 되었다. 처음 고어가 군졸이 되겠다 하니 많은 이들이 이를 만류하였다.

“어찌 제후 집안의 자제로서 일개 군졸이 되려 하는가?”

고어는 만류하는 벗들에게 이렇게 답하였다.

“군역이야 말로 신하의 도리 중 으뜸이거늘 어찌 천하다 하는가?”

닉슨 2년, 고어가 애치슨(Aitcheson)씨를 정실로 맞았다.

지미카터 원년, 황제가 고어를 테네시 후에 봉하였다.

레이건 5년, 황제가 고어의 작위를 높여 테네시 공으로 봉하였다.

조지 부시 4년, 여러 제후들이 아칸소 공 클린턴의 인품이 훌륭하다 하여 황제에게 클린턴에게 양위할 것을 상주하였다. 마침내 황제가 클린턴에게 양위하였다.

클린턴 원년, 황제가 고어를 승상으로 삼았다.

고어는 승상이 되자 상주하여 관리와 군졸의 수를 줄이자고 하였다. 이에 황제가 이를 옳게 여겨 관리와 군졸들을 줄이니 많은 관리와 군졸들이 고어를 원망하였다.

클린턴 원년, 묵서가 국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묵서가는 땅은 넓으나 그 백성들은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때문에 묵서가는 항상 더 많은 하사품을 원하였다.

고어가 묵서가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 황제에게 묵서가가 조공하는 것을 제한하지 말 것을 간하였다. 이때 로스 페로라는 부호가 상주하여 묵서가가 조공하는 것을 계속 옛 법도에 따르자 하였다.

“천조의 물산은 풍부하여 부족함이 없으니 묵서가 같은 오랑캐의 조공을 더 받을 이유가 없사옵니다.”

그러나 황제가 고어의 말을 옳게 여겨 묵서가가 마음껏 조공하게 하였다.

고어는 본시 아비를 닮아 덕이 있고 지혜로웠으나 승상이 되어 황제의 총애를 받으니 마침내 본래의 덕을 잃고 교만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클린턴 8년, 황제가 승상 고어에게 양위 하고자 여러 제후들에게 뜻을 물었다. 그러나 많은 제후들이 고어가 교만하고 덕이 없다 하여 고어에게 양위하지 말 것을 간하였다. 여러 제후들이 선황제 부시 시니어의 장자 부시 주니어를 추대하니 마침내 황제도 부시 주니어에게 양위 하였다.

고어는 평소 자신이 부시 주니어보다 덕망있고 학식도 높다고 자부하였으나 황제가 부시에게 양위하자 크게 상심하여 마침내 실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고어는 실성한 채 천하를 방랑하며 천하의 얼음이 모두 녹아 재액이 닥친다며 외치고 다녔다. 평소 고어의 학식을 사모하던 많은 선비들 중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대인배의 꿈을 키웁시다

아래의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일화이지요.

(전략) 그러나 7월 2일에 시작된 협상은 거의 시작하자 마자 난항에 부딛혔다. 스탈린이 소련의 국가안보에 있어서 외몽골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15년 혹은 20년 내에 일본이 다시 국력을 회복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련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므로 외몽골을 소련의 영향력 안에 둬야 한다는 것 이었다. 스탈린은 송자문(宋子文)에게 말을 계속했다.

“만약 우리가 일본과 전쟁을 시작한다면 인민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막 4년에 걸친 전쟁을 끝냈는데 왜 또 전쟁을 시작하냐고 할 것 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는데 왜 소련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냐고 하겠지요. 그러니 우리 인민들에게 전쟁을 벌이는 이유가 소련의 안보를 더 굳건히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 말고 더 좋은 구실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송자문은 외몽골 문제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외몽골은 중국의 고유한 영토이기 때문에 외몽골을 독립시키는 것은 중국의 자존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 이라는 것 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스탈린이 국민당 정부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자 만약 소련이 만주에서도 국민당의 우위를 보장하고 여기에 덧붙여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도 중단할 경우 외몽골을 소련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7월 9일, 송자문은 이에 따라 스탈린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송자문은 중국이 외몽골을 포기하는 대가로 소련이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경우 국민당 정부는 소련에게 뤼순과 다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또 만주 철도는 중국이 소유권을 가지되 운영은 중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하자는 제안을 내 놓았다. 스탈린은 이 제안을 받자 즉시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만주 문제에 있어서는 이견이 있었다. 스탈린은 뤼순은 소련이 소유권을 가져야 하며 또 만주 철도 역시 소련이 소유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었다. 왜냐하면 “만주 철도를 건설한 것은 러시아 였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빨리 국민당 정부와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뤼순과 만주 철도 문제에 있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7월 11일 회담에서 스탈린은 “내가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에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했으나 결국 양측의 이견을 좁히지는 못했다. 7월 12일 회담에서도 양측은 평행선을 달렸고 결국 스탈린이 먼저 포기했다. 협상은 일시 중단됐으며 스탈린은 중국측과 포츠담 회담 이후 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스탈린이 겪게 될 여러 문제 중 하나에 불과했다.

Tsuyoshi Hasegawa, Racing the enemy : Stalin, Truman, and surrender of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129

한때는 우리의 마오 주석도 대인배들의 거스름 돈 이었다고 합니다. 자. 우리도 대인배의 꿈을 키웁시다!

2007년 3월 7일 수요일

데자뷰 - (3)

할리우드 영화 300에 내재된 오리엔탈리즘

영화는 다르되 기사는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한 기사다. 내용도 익숙한 내용이다. 정말 예전에 썼던 기사에 명사만 고쳐서 내 놓은게 아닐까?

2007년 3월 6일 화요일

1951년 2-3월 한국 육군의 보병사단 차량 배분 계획안

미군사고문단 문서 RG338 File No.400.73.451에는 한국 육군이 1950-51년 동계전역의 참패를 수습하고 재정비를 시작할 무렵인 1951년 2월과 3월 보병사단의 차량 지급 계획에 대한 문서가 두 건 실려 있습니다.

첫 번째 문서는 1951년 2월 27일에 작성된 것으로 이 문서에 나타난 한국군 보병사단의 차량 지급 계획은 다음과 같습니다.

차량종류사단본부통신중대헌병중대정비중대보급중대수색중대각 보병연대포병대대공병대대대전차대대의무대대총 계
1/4톤 트레일러9314442571031121
1톤 트레일러1112113541531
1톤 트레일러(250갤런 탱크)1111114441532
1/4톤1812124410512216610267
3/4톤 구급차00000001102729
3/4톤 12V 발전차0900000960024
2½톤00000003600036
2½톤 통신차량030000000003
2½톤 밴000300000003
4톤 레커000210001004
6톤 레커000100000001
6톤 견인차000000003003
3/4톤 6V 발전차1333217840147
1½톤 PC0300610000111
2½톤 LWB 410220342382041210232

※ 3/4톤 6V 발전차, 1½톤 PC, 2½톤 LWB는 일제 트럭을 대신 지급할 수 있음

그리고 한 달 뒤인 1951년 3월 26일자 차량 지급 계획은 다음과 같이 변경됐습니다.

1951년 3월 26일 차량지급 계획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보병사단의 대전차 대대가 편제에서 사라지면서 여기에 배치될 차량도 없어졌다는 점 입니다. 이것과 2½톤 LWB 분배가 약간 조정된 것을 제외하면 2월 27일 편제와 큰 차이는 없습니다.

차량종류사단본부통신중대헌병중대정비중대보급중대수색중대각 보병연대포병대대공병대대의무대대총 계
1/4톤 트레일러931444257101118
1톤 트레일러111211354530
1톤 트레일러(250갤런 탱크)111111444531
1/4톤181212441051221610261
3/4톤 구급차0000000112729
3/4톤 12V 발전차090000096024
2½톤0000000360036
2½톤 통신차량03000000003
2½톤 밴00030000003
4톤 레커00021000104
6톤 레커00010000001
6톤 견인차00000000303
3/4톤 6V 발전차133321783146
1½톤 PC030061000111
2½톤 LWB 493183123736010224

※3/4톤 6V 발전차, 1½톤 PC, 2½톤 LWB는 일제 트럭을 대신 지급할 수 있음

1/48 스케일 AFV를 좋아하는 이유

작년 가을 부터 1:48 AFV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제대로 완성한 놈은 하나도 없지만 그럭 저럭 조립까지 해 놓은 녀석들은 몇 놈 있지요.

제가 처음 만든 모형은 아카데미에서 반다이(?)의 금형을 가지고 만든 1:48 M4A1 76mm 탑재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1:48 스케일의 AFV가 이상하게 정이 가더군요.

1:48 AFV가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이것 입니다.


바로 손바닥 안에 쏙 들어 오는 크기라는 점 입니다. 특히 셔먼이나 3호, 4호 계열은 정말 말 그대로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크기죠. Hobby Boss가 쏟아놓은 M4 시리즈는 가격도 적당해서 매우 좋아하는 놈 들입니다.


완소 3돌...

그리고 좋은 점은 1:48 스케일은 저 같은 초보자들에 대한 배려가 잘 돼있다는 점 입니다.


위의 타미야제 티거의 주행륜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부품에다가 조립 순서를 표시해 주니 정말 편하더군요.

시간 여유가 있을 때 마음 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은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타미야의 1:48 AFV들이 시장에서 고전(???) 한다는 소문이 들리는게 많이 섭섭하더군요.

2007년 3월 4일 일요일

독일과 프랑스의 군단급 기갑전투 : 독일 16차량화군단과 프랑스 기병군단의 교전사례

1940년 프랑스 전역은 6주만에 독일의 전무후무한 대승리로 끝났고 유럽 최고의 육군국이라고 자부하던 프랑스는 힘도 쓰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연합군의 주력은 아르덴느 삼림지대 북쪽으로 투입된 반면 독일군의 주공은 아르덴느 삼림지대로 집중됐기 때문에 독일과 프랑스 양군 모두 상당한 규모의 기갑전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급 이상의 기갑전투는 별로 치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군단급 기갑부대가 역시독일군의 군단급 기갑부대와 정면으로 격돌한 사례가 한 건 있긴 합니다. 바로 1940년 5월 12일부터 14일 까지 회프너가 지휘하는 독일 제 16차량화군단(XVI. Armeekorps(mot.)) 소속의 제 3, 4기갑사단이 프랑스 육군 기병군단(Corps de Cavalerie, 지휘관 René Prioux 중장) 소속의 제 2, 3경기계화사단(DLM, Divisions légères mécaniques)과 벌인 전투입니다.
이 외에 독일 제 5, 7기갑사단이 프랑스군 제 1기갑사단과 격돌한 Flavion 전투도 있는데 프랑스군이 1개 사단이므로 군단급 기갑전투라고 하긴 좀 그렇습니다.
이 전투는 1940년 여름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거의 유일한 군단급 기갑전투이기 때문에 독일군과 프랑스군 기동부대의 실력을 살펴보기에 좋은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1. 양 측의 전력

이 전투에 투입된 양측의 기갑전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독일군 제 16 차량화군단

제 3기갑사단(Horst Stumpff 소장) : 1호전차 117대, 2호전차 129대, 3호전차 42대, 4호전차 26대, 지휘전차 27대
제 4기갑사단(Johann Joachim Stever 중장) : 1호전차 135대, 2호전차 105대, 3호전차 40대, 4호전차 24대, 지휘전차 10대
-> Jeffrey A. Gunsburg의 Battle of the Belgian Plain에는 제 4기갑사단이 1호전차 141대, 2호전차 111대, 3호전차 40대, 4호전차 24대, 지휘전차 15대를 보유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프랑스군 기병군단

제 2경기계화사단(Gabriel Bougrain 준장) : S35 87대, H35 및 H39 87대, AMZ-ZT 63대
제 3경기계화사단(Langlois 소장) : S35 87대, H35 및 H39 150대
-> Karl-Heinz Frieser의 Blitzkrieg-Legende 302쪽 에는 이 전투에 프랑스군이 176대의 S35와 239대의 H계열 전차를 투입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전차의 구성을 보면 독일측은 중형전차 64~68대를 보유한 반면 프랑스는 S35만 87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H35나 H39는 모두 37mm 전차포를 탑재하고 있으며 보병지원 용도에 걸맞게 45mm의 정면장갑을 가진 반면 독일 기갑사단의 주력인 1호, 2호는 기껏해야 20mm 미만의 기관포/기관총을 장비했으며 방어력도 소화기나 겨우 막는 수준에 지나지 않은 상황입니다.

또 프랑스군은 사단 마다 독일군의 경전차보다 화력이 우세한 P-178 장갑차를 45대씩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제 3, 4기갑사단은 각각 56대의 정찰용 장갑차를 장비했지만 독일군이 장비한 장갑차들은 모두 20mm 기관포 이상은 장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전차 전력은 독일측이 37mm 대전차포와 47mm 대전차포를, 프랑스군이 25mm 대전차포를 장비하고 있어 독일측이 조금 우세하다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포병의 경우는 독일군 기갑사단의 사단 포병이 최하 105mm급을 장비한 대 반해 프랑스군은 75mm 포를 장비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 합니다.

2. 황색작전 개시와 독일 16차량화군단의 벨기에 국경 돌파

“황색작전”의 1939년 10월 29일 계획안에서 독일 제 6군의 공격 축선에는 5개 기갑사단이 투입될 계획이었지만 최종적으로 아르덴느가 주공 지역으로 결정되면서 이 축선에는 제 3, 4기갑사단만 투입되는 것으로 변경됐습니다. 독일 제 16차량화군단의 2개 기갑사단은 제 6군의 중핵으로 주공 부대가 아르덴느 삼림지대를 돌파하는 동안 연합군 주력을 고착, 견제하는 매우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독일 제 6군은 2개 기갑사단으로 연합군, 특히 프랑스군의 기갑부대 주력을 상대해야 하는 것 이었습니다. 회프너의 임무는 Gembloux를 점령하고 연합군 주력을 견제하는 것 이었습니다. 만약 프랑스군의 2개 경기계화사단이 회프너의 군단을 격파한다면 프랑스 제 1군은 병력을 차출해 아르덴느 삼림지대로 돌파하는 독일군을 저지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황색작전 발동과 함께 독일군은 에반 에말(Eben Emael) 요새를 점령하고 알베르 운하를 돌파해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이 교두보를 통해 공격을 개시할 독일군의 선봉은 제 4기갑사단 이었습니다. 독일측의 계획에 따르면 벨기에 영내에 진입하기 전 까지는 4기갑사단이 선봉에 서고 3기갑사단은 4기갑사단을 후속하도록 돼 있었습니다. 4기갑사단은 네덜란드 국경을 돌파한 뒤 신속히 벨기에 영내로 진입할 계획이었으나 네덜란드군이 주요 기동로의 교량을 폭파하면서 후퇴했기 때문에 10일 저녁까지 네덜란드 영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제 4기갑사단이 벨기에로 진입한 것은 5월 11일 오전이었습니다. 벨기에 영내로 진입하면서 프랑스군 선발대와 교전해 경전차(?) 1대가 격파되긴 했지만 이날 오전 동안 산발적인 연합군의 공습을 제외하면 진격은 순조로운 편 이었습니다.
오후 12시15분에 제 4기갑사단을 제 16차량화군단에 배속시킨다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후 회프너는 계획대로 이 제 3, 4의 두개 기갑사단을 Gembloux를 향해 진격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오후 4시30분 경에 서쪽으로 퇴각는 벨기에군 병력이 포착돼 제 6군 사령부는 제 4기갑사단에 일부 병력을 차출해 벨기에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병력이 벨기에군의 퇴각을 저지하는데 투입됐고 오후 늦게야 원래 계획대로 진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결국 제 16군단이 진격을 재개할 수 있게 된 것은 11일 오후 5시45분이었습니다.

한편, 제 4기갑사단을 후속하는 제 3기갑사단의 진격도 매우 느려서 3기갑사단이 뮤즈(Meuse)강을 도하한 것은 원래 작전계획보다 5시간 30분 늦은 11일 오후 6시 30분이었습니다. 제 3기갑사단의 진격이 늦어졌기 때문에 제 4기갑사단의 우익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제 4기갑사단의 비전투 직할대는 여전히 Maas 동안에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회프너는 상급 사령부의 명령 변경과 제 3기갑사단의 늦은 진격 때문에 이날 밤 9시가 돼서야 제 4기갑사단에 12일의 작전지시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제 4기갑사단이 12일에 확보해야 할 목표는 Hannut였습니다. 11일 저녁, 12일의 사단 주력의 공격에 앞서 사단 기갑수색대대(제 7기갑수색대대)가 Hannut 동쪽 5km인 Geer-Tal 까지 진출해 위력 수색을 실시하고 포로 수 백명을 생포했습니다.

3. 프랑스 기병군단의 대응과 양군의 조우

한편, 프랑스 기병군단은 먼저 선발대인 제 2경기계화사단을 5월 10일 오전 4시 30분에 벨기에 영내로 투입했고 그 뒤를 이어 제 3경기계화사단을 투입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회프너의 2개 기갑사단이 겨우 벨기에 영내로 진입한 11일 오전에 이미 Gembloux 지구에 도착해 방어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프랑스 기병군단장 Prioux는 프랑스 제1군 사령부에 독일군이 알베르 운하와 뮤즈강을 돌파하기 전에 이 선에서 독일군의 도하를 저지하게 해 달라고 건의했으나 벨기에군의 방어선이 순식간에 무너져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Gembloux 지구에 전개해 방어준비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벨기에군은 이 지역에 방어시설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 한 상태였습니다.

한편, 10일과 11일에 진격이 지지부진했던 독일군은 12일 오전 5시 30분 경 Gembloux 북동쪽 30km 지점인 Hannut 근교에 도달했습니다. Hannut는 독일 제 16군단의 1차 목표였고 회프너는 예하의 2개 기갑사단에게 Hannut를 확보한 뒤 여기서 다시 공격을 재개, Gembloux 방향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독일 제 4기갑사단은 오전 8시 20분경 Hannut 외곽에 진입해 프랑스군의 정찰대와 교전에 들어갔습니다. 독일 제 4기갑사단장 슈테버(Johann Joachim Stever) 중장은 프랑스군의 기계화 부대가 투입된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접촉한 부대가 제 1경기계화사단이라고 오인 했으며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틀에 걸친 진격으로 연료가 부족해 일단 Hannut 서쪽에 대한 공격은 잠시 보류해야 했습니다. 연료는 12일 오후에야 낙하산으로 보급됐다고 합니다.
이날 첫 번째 전차전은 제 35기갑연대 5중대가 Hannut 서쪽에서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 소속 제 11용기병연대 1대대 소속의 H-35/39 전차와 교전한 것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5중대 소속의 3호전차들이 프랑스 11용기병연대의 전차 7대(독일측은 11대 격파를 주장)를 격파하고 프랑스군을 퇴각시켰습니다. 독일군은 이 교전에서 전차 5대가 피격되고 5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 전차들의 고질적인 약점인 시야 불량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 입니다. 독일측의 보고에 따르면 프랑스 군은 독일 전차들이 100~150m 이내로 접근 할 때 까지도 독일 전차를 발견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한편, 전방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독일 6군 사령부는 회프너에게 “적이 전면 퇴각”하고 있으니 신속히 추격해 Gembloux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이 시각 독일 4기갑사단은 프랑스군 기병군단의 주력과 조우, 본격적인 교전에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회프너는 오전 9시 20분에 제 4기갑사단에 Hannut-Braives를 잇는 선을 확보하고 남서쪽 방향으로 위력수색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슈테버 중장은 오전 8시경 공격을 재개, Hannut 남서쪽의 Crehen을 공격했습니다. Crehen은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 소속의 제 5경기계화여단(5e Brigade Légère Mécanique) 2 흉갑기병연대(2e Régiment de Cuirassiers)가 방어하고 있었는데 오전의 전투로 11~12대의 전차를 잃고 11시 무렵 Merdorp에서 퇴각했습니다. 프랑스 기병군단은 제 5경기계화여단을 지원하기 위해서 오후 3시경 제 2경기계화사단의 1개 전차중대를 투입해 Merdorp를 탈환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오후에 여세를 몰아 Crehen을 공격했지만 보병의 지원 없이 시가지로 진입했다가 S-35 4대를 잃고 다시 Merdorp 방향으로 퇴각합니다.

독일 제 4기갑사단의 정면에 나타난 것은 완전편제의 2개 경기계화사단 이었기 때문에 슈테버 중장은 4기갑사단 만으로 공격을 계속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10일부터 진격이 지지부진했던 제 3기갑사단이 Hannut 지구에 도착한 것은 이날 오후 8시가 되어서 였습니다.
그리고 이날 저녁 독일 제6군 사령부는 항공정찰을 통해 Gembloux 지구에 프랑스군 차량화 보병사단들이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회프너에게 신속히 프랑스 기병군단을 분쇄한 뒤 프랑스군이 Gembloux 지구의 방어를 굳히기 전에 이 지역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12일 독일 제 6군의 상황은 회프너의 제 16차량화군단이 Hannut 지구에서 프랑스군 기동부대와 교전하는 동안 보병으로 편성된 4군단소속의 18보병사단이 이 16군단의 측면을 엄호하기 위해 오고있었고 27군단은 여전히 벨기에군 소탕 때문에 리에쥬(Liege) 북쪽에 묶여있었습니다. 즉 제 16차량화군단의 좌익인 남쪽 측면은 뻥 뚫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2일 오후 8시, 슈테버는 제 4기갑사단의 정면에 프랑스군의 2개 경기계화사단이 나타났다고 보고했고 회프너는 13일 오전을 기해 제 3기갑사단과 함께 공격을 재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날 저녁 양군은 다음날 전투를 위해 Hannut 부근의 촌락들을 둘러싸고 소규모 교전을 계속했습니다. 독일측은 에버바흐 중령의 지휘하에 대대급 전투단을 편성해 Hannut 서쪽의 Thisnes를 점령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에버바흐가 탄 지휘전차가 격파됐지만 결국 프랑스군은 Thisnes를 빼앗기고 퇴각했습니다. 12일 야간과 13일 새벽에 걸쳐 독일군 보병은 오전에 있을 전차부대의 공격을 위해 Hannut 서쪽의 마을들을 공격해 상당수를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
한편, 프랑스군도 12-13일 야간에 독일군의 전차부대가 집결한 곳으로 예상되는 지역에 교란 사격을 산발적으로 퍼부었고 이로 인해 독일군은 차량 몇 대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4. 독일 3기갑사단의 도착과 13일 전투, 프랑스 기병군단의 퇴각

13일 전투는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시작됐습니다.
프랑스 제 2경기계화사단은 13일 새벽 5시30분에 30대의 S-35 전차를 투입해 Crehen 방향으로 공격을 감행했지만 독일군은 대전차포를 주요 거점에 매복시켜 프랑스군의 전차대를 저지합니다. 프랑스군은 보전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옥을 거점으로 배치된 독일군의 대전차포를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5월 13일 오전, 마침내 독일 제 4군단 소속의 제 18보병사단이 도착해 제 16차량화군단의 우익에 전개하기 시작했고 제 16차량화군단 소속의 2개 기갑사단도 계획에 따라 공격을 재개했습니다. 회프너의 계획은 13일 저녁까지 제 3기갑사단은 Gembloux 동쪽 10km 지점인 Thorenbais, 제 4기갑사단은 Thorenbais 남쪽의 Perwez을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제 3기갑사단의 5, 6기갑연대는 오전 11시 30분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제 3기갑사단을 상대하는 프랑스군의 제 6경기계화여단 소속 제 11차량화용기병연대(11e Régiment de Dragons Portés)는 이미 북쪽의 독일 18보병사단과 교전하고 있는데다가 우세한 독일 기갑부대의 공격을 받자 크게 고전했습니다. 제 6경기계화여단장 Loges 대령은 배속받은 제 1흉갑기병연대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독일군의 근접항공지원과 대전차포에 걸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결국 11용기병연대는 오후 2시경에 우세한 독일군을 상대로 잘 버티다가 탄약이 거의 떨어지자 후퇴하게 됩니다.

제 3기갑사단 좌익(남쪽)의 4기갑사단은 사단의 좌익에 “뤼트비츠 전투단(Gefechtsgruppe Lüttwitz, 사단수색대대, 사단대전차대대 1중대, 9기관총대대(Maschinengewehr-Bataillon 9), 654 대전차대대(Panzerabwehr-Abteilung 654)로 편성됨)과 제 79기갑공병대대를 배치해 프랑스 제 2경기갑사단을 견제하도록 하고 사단 주력은 서쪽으로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전력으로만 보면 뤼트비츠 전투단은 프랑스군 1개 사단을 막기에는 다소 부족했지만 프랑스 전차부대의 공격은 집중적이지 않은 중대 단위의 산발적 공격에 불과해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제 4기갑사단은 먼저 오전 11시 45분부터 15분간 공격준비사격을 퍼부은 뒤 보병을 투입해 촌락들을 제압하고 오후 1시가 돼서야 예비로 있던 2개 기갑연대를 투입했습니다. 서쪽으로 진격하던 35기갑연대는 Merdorp에서 프랑스군의 제 2흉갑기병연대 소속 전차들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독일측에게는 다행히도 오전의 공격준비 사격으로 대전차포 진지 다수가 제압 된데다 프랑스군은 보병 매우 부족해 전차들이 보병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독일측은 보병을 투입해 프랑스군 전차들을 격퇴했습니다. Merdorp를 방어하던 프랑스군은 S-35 3대와 6대의 H-35/39를 잃고 후퇴했습니다. 독일측의 주장에 따르면 제 4기갑사단은 Merdorp에서 프랑스군 400명을 생포하고 25mm 대전차포 4문과 전차 5대를 노획했습니다.

그리고 이날 마침내 독일 제 27군단 소속의 제 269보병사단이 제 4기갑사단의 좌익에 도착했습니다. 프랑스 제 2경기계화사단은 독일군의 3개 보병사단을 상대하게 되자 제 4기갑사단을 상대하던 전차부대들을 돌려 제 269보병사단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결국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은 독일군 기갑부대의 주공을 그대로 얻어 맞게 돼 버립니다. 불과 12km밖에 안되는 지구에 독일군 2개 기갑사단의 전차가 집결해 공격을 개시하자 그 효과는 결정적이었습니다.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은 13일까지의 전투에서 총 30대의 S-35와 75대의 H-35/39를 잃었습니다. 독일 3기갑사단은 1호 전차 2대와 2호전차 1대를 잃는데 그쳤고 4기갑사단의 피해는 확실치 4기갑사단의 전차 손실은 확실치 않으나 병력 손실은 12일부터 13일 까지 전사 36명, 부상 104명, 행방불명 13명 이었습니다. 이날의 전투 결과는 독일군의 승리였습니다.
프랑스 제 3경기계화 사단은 독일군 3개 사단(제 3, 제 4기갑사단, 제 18보병사단)에 압도돼 큰 손실을 입고 밀려났으며 프랑스 제 2경기계화 사단은 불과 3개 대대급에 불과한 4기갑사단의 좌익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해 제 3경기계화군단 방어선이 뚫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비록 프랑스군 기병군단의 임무는 보병사단들이 방어선에 전개할 때 까지 시간을 버는 것 이었지만 원래 계획은 15일 까지, 그리고 변경된 계획에서도 14일 까지는 버티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명백히 프랑스군의 패배라고 하겠습니다.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은 예비대를 모두 투입한 상태에서 피해가 가중되자 오후 3시30분 경 군단사령부에 철수허가를 요청합니다. 군단장 Prioux 중장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즉시 철수 명령을 내립니다. 먼저 오후 4시부터 제 3경기계화사단이 교전을 중단하고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이어 5시부터 우익의 제 2경기계화사단도 후퇴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이날 저녁 8시 경 Beauvechain-Perwez를 잇는 선 까지 퇴각해 방어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회프너는 프랑스 기병군단이 전면적으로 철수하는 것을 확인한 뒤 제 3, 제 4기갑사단에 추격을 명령합니다.

5. 5월 14일 전투와 프랑스 제 1군 주력과의 교전

13일 전투에서 프랑스 기병군단에 큰 피해를 입힌 독일군은 14일 오전 5시 공격을 재개합니다. 제 4기갑사단은 계속해서 원래 목표인 Gembloux 방향으로 전진했습니다. 슈테버는 36 기갑연대를 선두에 세우고 35 기갑연대가 후속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오전 11시 무렵 숲속에 매복한 프랑스 전차들의 공격으로 전진이 지연됐으며 슈테버는 다시 보병을 투입해 숲에 매복한 프랑스 전차들을 격퇴해야 했습니다.
한편, 3기갑사단은 5기갑연대로 사단 우익(북쪽)을 방어하도록 하고 6기갑연대만 서쪽으로 전진시킬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프랑스군 기계화부대가 출현했다는 잘못된 정보로 공격이 지연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3기갑사단은 프랑스 제 4군단의 모로코 보병사단이 방어하는 Gembloux 북쪽의 Ernage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습니다.

12일부터 14일 까지 전개된 전투로 프랑스 기병군단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제 3경기계화사단만 보유 전차 중 30대의 S-35와 75대의 H-35/39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측은 독일군의 손실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 독일군의 전차 손실 중 완전 손실은 20대 가량에 불과했고 전체 피해는 5월 14일 기준으로 수리가능 한 피해와 고장을 합쳐 160대 정도였습니다.
독일군의 두 기갑사단은 5월 16일까지 49대의 전차를 "완전손실"로 잃었다고 하며 이 피해의 상당수가 5월 15일부터 16일까지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Hannut 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더 적다고 봐야 할 것 입니다. 프랑스 기계화 부대는 객관적으로는 우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더 큰 피해를 입은 채 퇴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제 1군의 주력인 보병군단들이 Gembloux 지구에 증원돼 전체적으로는 상황이 나아졌습니다. 증원된 부대는 3군단 소속의 제 2북아프리카보병사단(Divisions d’infanterie nord-africaine)과 제 1차량화보병사단(Division d’infanterie motorisee)과 4군단 소속의 모로코 보병사단 및 제 15차량화보병사단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저녁부터 4개 보병사단과 지원 전차부대를 투입해 독일 제 16군단에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회프너는 오후 늦게 까지 큰 피해 없이 진격이 계속되다가 새로운 프랑스군 부대가 출현해 맹렬히 반격을 개시하자 크게 놀랐습니다.

14일 저녁까지 회프너의 2개 기갑사단은 마침내 목표지점인 Gembloux 외곽에 도달했으며 프랑스군 4개 보병사단과 상대하게 됐습니다. 회프너는 14일 오후 동안 공격을 강행할 것인지 아니면 보병사단들이 도착할 때 까지 기다릴 것인지 고민하다가 다음날 공격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3일에 걸친 대규모 전차전은 독일측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기술적으로는 프랑스군이 우세한 것이 확실했지만 전술적으로 봤을 때 제 3경기계화사단은 방어적인 태도를 취해 전차들을 중대 단위로 분산 배치했고 제 2경기계화사단 역시 중대별로 산발적인 공격만 거듭해 성과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독일측은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결정적인 이유가 독일군이 연대단위로 작전하는데 비해 프랑스군은 대대 이하 단위로 작전했다는 점을 꼽고 있습니다. 독일측은 만약 프랑스군이 연대급 이상의 S-35 전차를 집중 운용했다면 상대하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소형 포탑에 시계가 불량하고 무전기가 부족한 프랑스 전차들은 무전기를 장비하고 각급 지휘관들의 일사분란한 지시에 따라 단위부대로 전투를 벌이는 독일군의 전차들에게 상대가 되지 못 했습니다. 프랑스군의 전차는 수치상으로는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지만 전차 역시 사람이 타는 물건입니다. 프랑스 전차에 탑재된 47mm포는 1940년 당시의 기준으로는 꽤 쓸만한 물건이었지만 이 전차포가 탑재되는 포탑은 시야가 불량하고 전차장 한명이 지휘부터 사격까지 겸하는 아주 골치 아픈 물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프랑스측의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태도였습니다. 프랑스군은 기병군단의 임무를 주력 부대가 방어선에 전개할 때 까지 독일군을 저지하는 소극적인 것에 한정했고 이 때문에 11-12일에 전체적으로 프랑스군이 우세한 상황에서 방어로 일관했습니다. 방어적인 태도 때문에 제 2경기계화사단은 제 3경기계화사단을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독일군은 공세적으로 과감하게 작전한 결과 전투 초반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지요.

1941년 여름, 역시 숫적으로 우세했던 소련 전차부대도 막대한 피해를 입고 와해돼 버리는데 소련군 역시 프랑스군 기갑부대와 유사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서적

Karl-Heinz Frieser, Blitzkrieg-Legende(Oldenbourg, 1995)
Jeffrey A. Gunsburg, "The Battle of the Belgian Plain", The Jounal of Military History 56, April 1992
Jeffrey A. Gunsburg, "The Battle of Gembloux", The Jounal of Military History 64, Jan 2000
Thomas Jentz, Panzer Truppen vol.1(Schiffer, 1996)
Ernest R. May, Strange Victory(Hill and Wang, 2000)
Joachim Neumann, Die 4. Panzer-Division 1938-1943 : Bericht und Betrachtung zu zwei Blitzfeldzügen und zwei Jahren Krieg in Russland(Selbstverlag, 1985)

2007년 3월 3일 토요일

북한이 외교에 강한 이유!

다나카와 엑스의 논의는 진전 없이 반복됐고 시간만 하릴 없이 흘러갔다.

"당신은 경질되는 것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나는 목숨을 걸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엑스가 골똘히 생각한 끝에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후나바시 요이치, 김정일 최후의 도박 : 북한 핵실험 막전막후 풀 스토리, 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07, p41

나는 목숨을 걸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나는 목숨을 걸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나는 목숨을 걸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북한 외교가 강한 이유는 이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