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연구자인 존 리드(John S. Reed)가 2024년에 발표한 논문 The Infantry's "Problem of Quality": Classification and Assignment to MOS 745, Rifleman, 1942-1945를 읽었습니다. 이 논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육군의 병과별 인력수급 구조 때문에 보병 병과에는 사회적으로 교육과 소득 수준이 낮은 인력이 많이 배치되었고 이때문에 보병의 전투력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지적되었고, 전쟁 직후 전훈 분석 과정에서도 제기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주장은 아닙니다. 그 유명한 마르틴 판 크레벨트(Martin van Creveld)의 연구 Fighting Power에서도 이 문제를 제기했지요.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 나온 제2차 세계대전의 미군을 다루는 유명 저작들이 이 당시 미군을 이상적인 시민군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이런 저작들은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죠. 이 연구의 저자 존 리드는 리 케넷(Lee Kennett), 존 맥마너스(John C. McManus), 피터 킨즈배터(Peter S. Kindsvatter), 릭 애킨슨(Rick Atkinson) 같은 작가들에 비판적입니다.
필자는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직후 부터 1944년 초 까지는 미육군 지상군(Army Ground Force), 그 중에서도 보병에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인력이 배치되어 전투효율성을 떨어트리는 요인이 되었지만 1944년 이후 점진적으로 우수한 인력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문제가 개선되었다고 봅니다. 전쟁 초기~중기에 이렇게 인적자원이 불균등하게 배분된 원인은 미육군의 항공군(Army Air Force)과 근무지원군(Army Service Force)에 우수한 인적자원이 우선적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연합군이 유럽 본토 침공을 준비하면서 제공권 장악을 위해 항공군을 크게 강화했고 1944년 초 까지는 질이 높은 인적자원이 항공군에 배치되었습니다. 항공군은 기술집약적인 특성상 질이 낮은 인력을 쓰기가 곤란하죠. 마찬가지로 전투지원 병과로 구성된 육군 근무지원군도 질이 높은 인적자원을 필요로 했습니다. 행정과 보급 같은 임무를 수행하려면 일정한 교육수준이 필요하지요. 그리고 근무지원군 병과는 특성상 민간 사회의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병과가 많습니다. 미육군공병단은 1,000명당 725명 꼴로 민간 사회의 직업에 대응하는 보직에 배치되었고 미육군수송단은 1,000명당 788명, 미육군통신당은 1,000명당 579명이었습니다. 반면 보병 병과는 순수하게 전투를 수행했기 때문에 민간 사회의 직업에 대응하는 보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 기술을 가지고 있는 우수한 인적자원은 항공군과 근무지원군에 먼저 가고 남은 인력이 지상군, 그 중에서도 보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건 통계로 입증이 됩니다. 전쟁 기간 중 미육군이 병과분류를 위해 시행한 육군일반분류평가(AGCT, Army General Classification Test)는 5개 등급으로 나누었습니다. 1943년에 미육군 항공군에 보충된 병력의 41.7%는 AGCT 1등급과 2등급이었습니다. 반면 보병 병과는 1등급과 2등급의 비중이 30.2%였습니다. 반면 미육군 항공군에는 4등급과 5등급이 27%였으나 보병 병과는 37.2%였습니다.
이때문에 1943년 부터 1944년 초 까지 미군 보병의 전투효율성은 낮은 편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육군 지상군 사령관 맥네어(Lesley J. McNair) 장군은 AGCT 점수가 높은 인력을 지상군에 보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1944년 초 까지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미육군은 보병 보충병의 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병보충훈련소(IRTC, Infantry Replacement Training Centers)의 훈련 과정을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1944년 여름 부터 유럽과 태평양 전선의 반격이 본격화되면서 사상자가 급격히 증가했고 이중 대다수가 육군 보병이었습니다. 1944년 말이 되면 방공포병과 대전차포병 등 상대적으로 여유있는 병과를 보병으로 전환하는 것도 한계에 달합니다. 필자는 그결과 1945년 초 부터는 AGCT 점수가 높은 인력도 보병에 배치되는 비율이 높아지게 됐다고 주장합니다. 즉, 미육군의 사회적 불평등이 이상한 방식(?)으로 해소됐다는 결론입니다.
비교적 재미있긴 하지만 많은 내용이 기존의 연구에서 다루었던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시민군'의 신화를 팔아먹는 대중서에 대한 비판으로서 나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