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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9일 금요일

포츠담선언과 일본의 항복에 대한 몇가지 가정

저는 역사에 if를 대입하는 것을 꺼립니다. 재미있는 일이긴 한데 진지하게 하지 못하면 그냥 무의미한 말장난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좀 의미있는 if를 제시하려면 상당한 공부가 필요하지요. 그래서 저는 재미있기는 합니다만 if를 최대한 피합니다.

하세가와 츠요시의 Racing the Enermy : Stalin, Truman, and the surrender of Japan은 포츠담선언 직전 부터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수락하기 까지의 과정을 추적하는 흥미로운 저작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상당히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지만 가장 흥미로운 점은 결론부분에 제시한 여러가지의 if 시나리오입니다. 포츠담선언의 내용과 형식에서 소련의 대일참전과 원자폭탄 투하 등 여러가지의 변수들을 고려한 if 시나리오들을 검토하고 있는데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재미있는 것은 포츠담선언에 대한 if 시나리오 입니다. 저자는 포츠담선언에 관해서는 세가지의 가능성을 검토해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일본의 천황제 존속을 명시했을 경우이고 두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무조건 항복을 명시하되 소련이 서명국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경우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천황제 존속을 명시하면서 소련이 서명국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경우입니다. 저자는 이 세가지 경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천황제 존속을 명시했을 경우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미국 상당수의 미국 외교관들과 군인들의 지지를 받은 안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 경우에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제시합니다. 먼저 미국이 천황제 존속을 명시하더라도 일본 국내의 주전파들이 항복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성이 매우 낮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천황제 존속이라는 조건 때문에 히로시마에 첫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경우 주전파가 급속히 힘을 잃고 일본이 항복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었을 것으로 파악합니다.
그 러나 이 시나리오는 미국의 대중여론은 물론 정책 결정권자인 트루먼이 무조건항복을 원했기 때문에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트루먼이 진주만 기습으로 인한 확실한 ‘복수’를 위해 무조건 항복을 선호했으며 결정적으로 원자폭탄을 실전에 사용하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두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무조건 항복을 명시하되 소련이 서명국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는 일본이 소련을 통해 미국과 교섭하려는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지만 그래도 주전파로 인해서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까지 싸움을 계속할 것 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천황제의 존치문제 때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더라도 주전파가 논의를 주도할 가능성이 높으며 결국에는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참전은 불가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세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천황제 존속을 명시하는 한편 소련도 서명국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경우입니다. 포츠담선언에 관한 if 시나리오 중 가장 재미있는 시나리오 입니다. 이 경우는 천황제를 유지하는게 가능한데다가 소련의 참전도 확실해 지기 때문에 주전파가 설자리가 없어진다는 변수가 있습니다. 저자는 주전파에서 육해군을 유지하는 것 같은 세부적인 조건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영향력은 미미하리라 봅니다. 물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까지도 주전파를 압도하지 못할 가능성은 있으나 이 경우에는 일본의 항복이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트루먼과 번즈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스탈린 또한 동아시아에서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참전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현가능성이 가장 낮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저자는 이렇게 세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것들이 왜 실제로는 실현되기 어려웠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if 시나리오를 제시하면서 이것을 통해 실제 역사가 왜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죠. 꽤 흥미로운 서술 방식입니다.

2012년 1월 18일 수요일

한국전쟁 이전 미육군의 기갑전력 증강계획

2차대전이 끝난 뒤 미군은 대규모의 동원해제에 들어갑니다. 국무부와 군부는 동원해제가 미국의 대외정책 수행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했으며 특히 국무부장관 번즈James F. Byrnes는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말기에 수립된 동원해제계획은 예정에 맞춰 시행되었습니다. 1946년 초가 되면 동원해제가 당초 예측했던 것 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전쟁 말기에 수립한 계획에서는 동원해제를 실시하더라도 월간 50,000명의 신병을 보충해서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월간 37,000명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반면 동원해제는 계획대로 시행되어 병력은 급속히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각 군은 전후처리와 소련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대비해 동원해제를 최대한 늦춰보려 했으나 미국 국내의 경제적인 이유와 함께 신속한 귀국을 희망하는 병사들의 격렬한 요구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소련이 새로운 위협이란 것은 정치 지도층과 군부에서나 인식할 수 있었을 뿐 일선에서 연합군으로 싸운 병사들이 깨닫기는 어려운 것 이었으니 말입니다. 여론이 나빠지자 1946년 1월 8일 성명을 발표해 동원해제가 신속히 이루어 질 것을 천명하게 됩니다.1) 미 육군의 동원해제는 모든 징집병을 전역시킨 1947년 6월 30일 완료됩니다.2) 1945년에서 1947년 까지 미국 각 군의 병력이 감소한 추이는 아래와 같습니다.3)

표1. 미군의 병력변화(1945~1947)
1945. 6. 30
1946. 6. 30
1947. 6. 30
육 군
5,984,114
1,434,175
683,837
육군항공대
2,282,259
455,515
305,827
해 군
3,377,840
951,930
477,384
해병대
476,709
155,592
92,222
총 계
12,120,922
2,997,212
1,559,270


육군의 대대적 감축은 기갑부대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의 기갑은 제도상 정식 병과도 아니어서 그 위치가 매우 애매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전쟁부는 2차대전 중 경험을 쌓은 기갑장교들이 원래 병과로 복귀해 그 경험을 잃어버리는 것을 우려하여 1947년 부로 기병병과로 전환하였고 기병병과는 1949년 기갑기병Armored Cavalry로 개칭됩니다. 결국 1950년 육군조직법Army Organization Act에 따라 기갑병과가 정식 병과로 격상되긴 합니다만 이러한 사례는 전후 미육군에서 기갑병과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또한 동원해제에 따라 대부분의 기갑사단이 해체되어 1948년 중순에는 제2기갑사단만이 현역 사단으로 남게되었고 기존의 전차대대 중 상당수가 1946년 7월 1일자로 경비연대Constabulary Regiments에 배속된 경비기병중대Constabulary Squadrons으 로 개편되어 명맥만을 유지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M-26, M-24와 같은 신형장비의 도입으로 기갑병과는 유지하는데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1944년에 M-4를 장비한 기갑사단을 편성하는데 3천만 달러가 소요되었는데 1950년에 M-26을 장비한 기갑사단을 편성하는 데는 2억 달러가 소요되는 실정이었습니다.4)

그렇지만 소련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미국은 다시 재래식 전력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기갑전력이 다시 강화되게 됩니다. 유일한 현역기갑사단인 제2기갑사단의 강화와 함께 제3기갑기병연대가 신규로 편성되었습니다. 또한 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3개의 경비여단을 기갑기병연대로 개편했습니다.5) 전차대대의 숫자는 다시 회복세로 돌아서 1946년에 12개 대대까지 줄어들었던 것이 1950년에는 64개 대대까지 확대되었습니다.6)

하지만 예산 증액이 어려웠기 때문에 대대적인 병력 증강이나 신규장비 도입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군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1948회계연도에 총병력을 1,641,000명으로 증강하기 위해 96억4700만 달러의 국방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지만 의회는 이를 기각하고 87억5100만 달러만을 승인했습니다. 결국 1948년 회계연도의 병력 증강은 당초 목표치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1948년 2월 18일 합동참모본부의 합동참모국장 그런터Alfred M. Gruenther장군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군병력 부족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에서 그런터 장군은 육군의 병력 부족이 심각한 상태이며 추세가 유지되면 1948년 말 까지 165,000명의 병력이 부족해 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7) 트루먼 대통령은 1949년 회계연도에 총병력을 1,734,000명으로 증강할 것을 결정하고 30억 달러의 추가예산을 신청하기로 결심합니다. 이 계획안은 육군을 대대적으로 증강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8) 국방부장관 포레스탈은 1948년 3월 25일에 이 추가예산안을 상하원에 제출했는데 이에 따르면 각 군의 증강 내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9)

표2. 미국방부가 1948년 3월 25일 상하원에 제출한 병력 증강계획
1948. 3. 1 병력
증강 이후 병력
증강 규모
육 군
542,000
782,000
240,000
해 군
397,000
460,000
63,000
해병대
81,000
92,000
11,000
공 군
364,500
400,000
35,500
총 계
1,384,500
1,734,000
349,500


그런데 잘 아시다 시피 육해공군은 예산 증액의 기회가 오자 당초 합동참모본부가 구상한 것 이상의 병력과 장비 증가를 요구합니다. 특히 공군이 이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70개 비행단 계획과 해군의 주요 전투함 384척 계획은 끝내 나중에는 제독의 반란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지게 되지요. 육군도 당초 국방부가 제시한 782,000명 보다 더 많은 837,000명의 병력과 12개 현역사단, 13개의 완편 주방위군사단, 25개의 예비사단을 요구합니다. 각 군의 요구를 모두 반영한 예산은 당초 계획안 보다 90억 달러 늘어난 것으로 이것은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30억 달러를 세배 초과한 것 이었습니다. 이것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 이었고 결국 합참이 포레스탈 장관에게 35억달러로 약간 늘어난 예산안을 제시하여 간신히 균형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4월 21일 이 방안을 승인합니다. 그러나 재무부가 국방예산의 급격한 증가를 경고하면서 추가예산 신청은 31억5900만 달러로 결정됩니다. 이에 따라 트루먼 행정부가 1949년도 국방예산으로 신청한 금액은 129억6200만 달러가 됩니다. 그러나 상하원은 이보다 더 많은 국방예산을 배정해 최종적으로 승인된 1949년 회계연도 국방예산은 139억4100달러가 됩니다. 이 중 육군에 배정된 액수는 42억 1700만 달러였습니다.10)

새 예산안은 800대의 전차를 신규로 도입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11) 새 예산안에 따라 1949년 6월에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이 작성됩니다. 전차 생산 5개년 계획은 76mm포 탑재전차 T-41(M-41)과 90mm포 탑재전차 T-42, 그리고 120mm포 탑재전차 T-43(M-103) 등 세 종류의 신형전차를 생산하여 소련의 전차개발에 대응하고자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작성된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은 다음과 같았습니다.12)(도표에는 6개년도로 되어 있는데 원문에서 5개년 계획으로 적고 있으므로 그에 따릅니다.)

표3-1.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의 생산대수(1949년 6월 작성)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109
109
1951
200
200
1952
31
340
100
471
1953
240
240
480
1954
240
240
480
1955
240
240
480
총 계
340
1060
820
2,220


표3-2.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의 소요비용(1949년 6월 작성, 단위 백만달러)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40.3
40.3
1951
45.0
7.5
12.1
64.6
1952
7.0
85.1
35.0
127.0
1953
48.0
84.0
132.0
1954
48.0
72.0
120.0
1955
48.0
72.0
120.0
총 계
92.3
236.6
275.1
604.0


1949 년도의 계획은 예산상의 제약으로 단지 전차 생산 기술을 유지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아무리 평시라지만 2차대전 직후의 미국이 1년에 전차를 고작 백대 단위로 만든다니!!!) 실제로 미 육군에서는 이 정도의 생산계획으로는 전시동원에 필요한 소요는 물론 현재 유지하고 있는 전력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13) 이 시기 미육군 기갑사단의 전차 대수는 373대였습니다.14) 1년에 중형전차를 240대 생산하는 것으로는 기갑사단 하나도 장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는 것 입니다.

또한 미국의 대소작전 계획이 방어적인 성격에서 적극적인 반격에 초점을 맞추면서 육군, 특히 기갑전력의 중요성도 강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49년 12월 8일 승인된 작전계획 오프태클Offtackle은 반격작전에 미군 41개 사단을 투입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프랑스를 해방한 이후의 전과확대 단계에서는 기계화부대와 공수부대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15) 새로운 전쟁계획과 NATO의 결성은 미육군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련과의 전면전을 상정한 이상 기갑전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이었습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50년 회계연도 국방예산을 작성하면서 정책과 전쟁계획을 반영하여 1949년 회계연도 보다 병력 규모를 더 증강했습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50년 회계연도 내로 육군의 경우 현역 12개사단, 주방위군 34개 사단, 예비군 25개 사단을, 해군은 현역함 993척과 예비함 1,657척, 해병대 2개 사단과 해병항공단 2개, 공군은 70개 항공단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예산을 작성했습니다. 이 예산안에 따른 병력 규모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 계획에 따른 예산은 3백억 달러에 달했습니다.16)

표4.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1950년 회계연도 예산에 따른 병력규모
현 역
예비군 및 주방위군
육 군
947,000
1,137,000
해 군
519,196
1,555,000
해병대
104,075
165,838
공 군
502,000
140,500
총 계
2,072,271
2,998,338


3백억 달러는 1949년 회계연도에 의회가 승인한 국방예산의 두배를 훨씬 넘는 금액이었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었습니다. 결국 포레스탈 장관의 지시에 따라 144억 달러로 제한되었고 최종적으로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 액수는 3군에 133억9900만 달러, 총 142억4000만 달러였습니다. 이 예산안은 1949년 1월 10일 의회에 제출됩니다. 의회는 3군에 배정된 예산은 139억1200만 달러로 증액했으나 육군과 해군의 예산을 삭감하는 대신 공군만 8억 달러 가까이 증액해 버립니다. 육군 예산은 트루먼 대통령이 제출한 안에서 44억9800만 달러였으나 의회에 의해 승인된 액수는 44억2000만 달러였습니다.17)

1950 년에 이르면 미국 기갑부대는 부대의 숫자는 증가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인해 신형 전차 도입의 지연과 기존 전차의 유지정비의 미비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직전 미육군이 보유한 전차를 보면 M-24의 경우 가동가능한 차량이 900대인 반면 가동불능 상태인 차량이 2,557대에 달했고 M4A3E8은 가동 가능한 차량이 1,826대, 가동불능의 차량이 1,376대에 달했습니다.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신형전차 M-46은 319대에 불과했고 여기에 M-26 800여대와 1950년 회계연도 예산으로 M-46으로 개량될 M-26이 1,215대 있었습니다.18) 1948년 이후 국방예산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2차대전 직후의 급격한 감축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던 것 입니다.

한편 미육군은 새로운 안보정책기조와 전쟁계획에 맞춰 전차생산계획을 재검토 합니다. 미육군 기갑위원회Army Armored Panel은 1950년 5월 31일 제출한 보고서에서 육군동원계획 I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연간 2,072대의 전차를 생산해야 하며 편제되어 있는 부대의 수요만을 고려하더라도 연간 1,680대를 생산해야 한다고 결론내렸습니다. 이에 따른 전차 생산계획은 다음과 같았습니다.19)

표5-1. 육군 기갑위원회가 작성한 전차생산계획(1950. 5. 31)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109
109
1951
200
200
1952
240
100
125
465
1953
240
960
240
1,440
1954
240
1,200
240
1,680
1955
240
1,200
240
1,680
1956
240
1,200
240
1,680
1957
240
1,200
240
1,680
1958
240
1,200
240
1,680
1959
240
1,200
240
1,680
총 계
2,229
8,260
1,805
12,294


표5-2. 육군 기갑위원회가 작성한 전차생산계획 소요예산(1950. 5. 31 단위 백만달러)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40.3
40.3
1951
45.0
7.5
12.1
64.6
1952
48.0
27.5
43.8
119.3
1953
42.0
187.2
84.0
313.2
1954
36.0
194.4
72.0
302.4
1955
36.0
194.4
72.0
302.4
1956
36.0
194.4
60.0
290.4
1957
36.0
194.4
60.0
290.4
1958
36.0
194.4
60.0
290.4
1959
36.0
194.4
60.0
290.4
총 계
391.3
1388.6
523.9
2303.8


이 보고서는 육군이 추진한 12개 현역 사단 기반의 육군에 포함될 기갑전력을 최소한 기갑사단 2개, (경)기갑기병연대 1개, 기갑기병집단 1개, 수륙양용전차대대 1개로 유지하고 보병과 공수사단에도 기갑전력을 편제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습니다.20)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됩니다. 신형 전차의 확보가 시급해 지자 1952년 부터 양산에 들어갈 T-42는 취소되고 M-46에 T-42의 포탑을 결합한 M-47이 급거 양산에 들어가게 됩니다. M-47은 1951년 6월 부터 1953년 11월 까지 총 8,576대가 생산됩니다.21)  이것은 1950년 미육군 기갑위원회가 제시한 전차생산 10개년 계획의 T-42 생산계획을 압도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된 냉전기간의 재래식 전력 증강은 미육군 기갑전력의 양적 수준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기 됩니다.



1) James F. Schnabel, History of the Joint Chiefs of Staff :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1945~1947, (USGPO, 1996), pp.101~102
2) James F. Schnabel, Ibid., p.104
3) James F. Schnabel, Ibid., p.109
4) James A. Sawicki, Tank Battalions of the U.S.Army, (Wyvern Publications, 1983), p.34
5) Philip L. Bolte, “Post-World War II and Korea : Paying for Unpreparedness”,  George F. Hofmann and Donn A. Starry(ed), Camp Colt to Desert Storm : The History of U.S. Armored Forces, (1999,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p.218
6) James A. Sawicki, Ibid., p.34
7) Kenneth W. Condit, History of the Joint Chiefs of Staff :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1947~1949, (USGPO, 1996), pp.99~100
8) Kenneth W. Condit, Ibid., pp.101~102
9) Kenneth W. Condit, Ibid., p.102
10) Kenneth W. Condit, Ibid., pp.107~111
11) Philip L. Bolte, Ibid., p.220
12)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RG319,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Assistant Chief of Staff for Intelligence, Top Secret Correspondence, 1914~62, Entry 4, 1950, Box 13, p.2
13)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p.2
14) James A. Sawicki, Ibid., p.34
15) Steven T. Ross, American War Plans 1945~1950, (Frank Cass, 1996), pp.118~119; Kenneth W. Condit, Ibid., pp.159~163
16) Kenneth W. Condit, Ibid., pp.123~124
17) Kenneth W. Condit, Ibid., pp.136~137
18) Philip L. Bolte, Ibid., p.224
19)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p.4
20)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p.7
21) R. P. Hunnicutt, Patton : A History of the American Main Battle Tank. Vol.1, (Presidio, 1984), pp.5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