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8일 일요일

크리스토퍼 로렌스의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지역 항공전 연구

얼마전 듀푸이 연구소 소장 크리스토퍼 로렌스가 쿠르스크 전투 항공전을 다루는 단행본을 준비 중 이라고 포스팅을 했습니다. 로렌스는 이미 쿠르스크 전투 지상전을 다룬 연구서에서 항공작전에 대해 한 장을 할애해 서술했으니 향후 출간될 항공전에 대한 연구도 기본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을 겁니다. 2019년에 나온 축약본 The Battle of Prokhorovka: The Tank Battle at Kursk, the Largest Clash of Armor in History, 243-290쪽의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보죠.

크리스토퍼 로렌스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소련 공군은 양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 항공전에서 압도적인 열세였다."


1.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에 전개한 독소 양군의 공군력

남부집단군의 공세를 지원한 공군부대는 그 유명한 리히토펜이 지휘하는 제8항공군단이었습니다. 제8항공군단은 공세 직전 1,093~1,112대의 항공기를 보유했습니다. 로렌스는 전투서열 상 1,093대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를 기준으로 할 경우 전투기 145대, 지상공격기 407대, 폭격기 309대, 정찰기 69대, 야간공격기 60대, 수송기 13대, 헝가리 공군기 90대 입니다. 

이에 맞서는 소련 공군은 제2항공군이 전투기 572대, 지상공격기 306대, 폭격기 117대, 야간폭격기 57대, 정찰기 21대를 보유했고, 제17항공군이 전투기 198대, 지상공격기 360대, 폭격기 76대, 야간폭격기 75대, 정찰기 41대를 보유했습니다. 총 1,823대로 독일공군 보다 다소 우세한 전력을 보유했습니다. 특히 전투기 전력은 770대로 독일공군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독일공군의 지상공격기 중 85대의 Fw190이 공중전이 가능한 기종이긴 하지만 이걸 합해도 소련공군 전투기 전력의 압도적 우위입니다.


2. 양측의 항공기 손실

그러나 소련공군은 양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 상공에서 열세를 보였습니다. 독일공군은 1943년 7월 4일 부터 18일까지 111대의 항공기를 잃은 반면 소련 공군은 같은 기간 동안 658대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소티 대비 항공기 손실율로 따지면 독일 공군은 소티대비 0.72%의 손실율을 보인 반면 소련 공군은 소티 대비 5.3%의 손실을 보이고 있습니다.

로렌스는 소련공군의 높은 손실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르겠군요.

"소련 공군의 높은 손실을 보면 이들의 용맹함을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p.281)

소련 공군은 자신들이 교환비 면에서 유리했다고 평가를 내렸습니다. 즉 658대의 항공기를 손실하는 동안 독일 공군기 928대를 격추했다고 판단한 겁니다. 소련 공군은 1943년 7월 5일 부터 7월 18일까지 341대의 Me109를 격추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투입된 Me109는 198대였고 총손실은 37대였으니 소련 공군의 격추 산정이 극도로 신뢰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Christopher A. Lawrence, The Battle of Prokhorovka (Stackpole Books, 2019), 285.


반면 독일 공군은 비교적 정확하게 전과를 산정했습니다. 독일 공군은 소련 공군기 658대를 격추했다고 평가했는데 소련공군의 실제 손실이 658대였으니 굉장히 정확한 추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독일 공군의 평가가 가장 부정확 했던 것은 1943년 7월 5일 입니다. 이날 독일 공군은 소련 공군기 260대를 격추했다고 평가했는데 실제 소련군의 손실은 187대였습니다. 이날은 대규모 공중전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혼란한 상황 속에서 집계가 부정확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7월 6일 부터는 매우 정확하게 추산을 하고 있으며 때로는 실제 격추한 소련 공군기 보다 더 적은 숫자를 격추했다고 엄격하게 산정하는 양상이 보입니다.

Christopher A. Lawrence, The Battle of Prokhorovka (Stackpole Books, 2019), 285.


이런 부정확함은 정예 조종사들의 격추기록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예를들어 1943년 7월 5일 제8근위전투기사단과 제205전투기사단의 에이스 조종사 7명은 총 25대의 독일 공군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이날 독일공군 총손실 19기 보다 훨씬 많습니다. 로렌스는 소련 에이스들의 격추기록 중 55%는 사실이 아니거나 기종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반면 독일 공군 에이스들의 격추 기록은 신뢰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에리히 하르트만은 쿠르스크 전투 당시 25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하는데 이 중 22대가 확인됩니다.


3. 총 소티 및 폭탄 투하량

총소티 및 폭탄 투하량으로 비교해도 소련 공군의 열세가 두드러집니다. 독일 공군은 1943년 7월 4일 부터 18일까지 총 15,338 소티를 기록한 반면 숫적으로 우세한 소련공군은 12,426소티로 열세를 보였습니다. 특히 근접항공지원 소티의 격차가 큰데, 독일공군의 지상공격기 부대와 폭격기 부대는 같은 기간 총 11,641소티를 출격한 반면 소련공군의 지상공격기부대와 폭격기 부대는 4,295소티를 출격하는데 그쳤습니다. 독일공군의 지상공격기 및 폭격기는 716대, 소련군의 지상공격기 및 폭격기는 859대로 격차가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숫적 우위에 있는 소련공군의 소티가 독일군의 40% 수준인 것은 놀랍습니다. 작전 초반 독일공군 전투기부대가 제공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소련 지상공격기 및 폭격기부대가 제대로 작전을 전개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전투 손실도 컸으니 더더욱 그러했겠지요.
이것은 지상작전 지원에 소모한 폭탄의 양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독일측의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약 10,000톤에서 12,000톤의 폭탄을 투하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소련 제2항공군과 제17항공군은 1,748톤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소련공군이 공중전은 물론 지상지원 임무에 있어서도 효율성이 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2019년 7월 16일 화요일

프로호롭카 전투에 관한 새로운 연구 -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

JOURNAL OF INTELLIGENCE HISTORY 18-2호에 실린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의 Ben Wheatley의 논문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를 읽었습니다. 이 논문은 독일공군의 항공사진을 바탕으로 프로호롭카 전투의 전술적 양상을 분석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항공사진과 현대의 위성사진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잡지의 판형 때문에 항공사진이 매우 작게 실려 있어서 알아보기가 매우 힘듭니다. 필자의 해설이 없으면 항공사진에 실린 전차 잔해의 차종은 커녕 전차인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예를들어 LAH 사단의 4호전차 잔해와 기동중인 티거를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여주는데 논문에 실린 사진 만으로는 차종은 커녕 어디에 전차가 있는지 조차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진 자료는 큰 판형으로 편집을 해야 알아보기가 쉽죠.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전술적인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어서 프로호롭카 전투와 무장친위대의 작전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보셔야 할 글 입니다.

필자는 결론 부분에서 프로호롭카 전투 직후 만슈타인의 제안 대로 제24기갑군단을 추가로 투입해 공세작전을 지속했다면 소련군의 예비 전력을 섬멸하는 작전적 승리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 대신 제24기갑군단을 차출한 지역의 방어가 취약해지는 사태는 피할 수 없었겠지만, 소련군의 주력에게 더 큰 작전적 손실을 강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2019년 7월 3일 수요일

쿠르스크 전투 항공전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가 나옵니다

통계 기반 작전연구로 유명한 듀푸이 연구소의 소장 크리스토퍼 로렌스가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새 연구를 내놓는다고 합니다. 제목은 Aces at Kursk 라는군요.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에서 전개된 항공전에 대한 통계 기반 연구입니다. 로렌스는 이미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항공전의 양상을 잘 정리한 바 있는데, 이 연구를 위해 94쪽 분량의 새로운 내용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또한 항공전 통계자료만 77쪽에 달한다고 하는군요. 쿠르스크 전투는 물론 독소전쟁 항공전의 양상을 이해하는데도 필수적인 중요한 저작이 될 것 같습니다. 로렌스의 전작인 Kursk: The Battle of Prokhorovka와 이 책의 축약판인 The Battle of Prokhorovka: The Tank Battle at Kursk, the Largest Clash of Armor in History에도 항공전에 대한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만 부차적으로 다뤄진 면이 있지요. 집필은 거의 마쳤다고 하니 조만간 책으로 접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2019년 7월 2일 화요일

주몽의 후예(?)

간만에 짤막한 포스팅 하나 합니다. 늘 그렇지만 긴 포스팅을 할 만한 시간이 도통 나질 않습니다.

옛날 책을 한권 읽다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나와서 올려봅니다. 아래의 증언은 김점곤 소장이 한국전쟁 40주년기념 국제회의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증언 자료라서 진위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꽤 재미있더군요. 여포가 방천화극 끄트머리에 화살을 맞춰서 유비와 원술을 중재했다는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는 일화입니다.(.....)

"나는 52년부터 9사단장을 역임했다. 그때 미국 사람들이 우리에게 예산이 문제된다는 명분을 앞세웠으므로, 나는 포탄 사용을 제한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당시의 미국 신문은 사실과 다르게 보도했다. 즉, 당시에 미국의 언론들은 미국의 어떤 육군 장군이 잘못 알고 포탄 사용을 제한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즉, 포탄을 제한해가며 전쟁을 치른 것이 일개의 육군 장군의 오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당시에 우리는 포탄을 쏘지 않고 4.5mm(4.2인치의 오기로 추정) 박격포 이하로만 싸워서 고지를 탈환했던 것이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오늘 나오신 정장군께서 증인이 되실 수 있을 것이다. 정장군께서는 그 당시에 부군단장으로 계셨으므로 나중에 포탄을 너무 많이 썼다는 이유로 당시에 포병사령관이 감찰조사를 받은 사실을 알고 계실 것이다. 
나도 물론 그때 증인으로 입회한 적이 있다. 아믛든 감찰조사에서 5만 몇천 달러인가 15만 몇천 달러를 우리가 초과사용했다는 것이 문제시 되었다.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포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기 위해, 나는 그들에게 일종의 내기를 걸었다. 내가 권총으로 매를 떨어트리면 우리를 인정할 수 있겠냐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다행히 나는 첫발에 매를 명중시켰다. 그리고 난 뒤에 보고서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그에 대해서 전혀 문책이 없었다."

라종일 편, 『증언으로 본 한국전쟁』, 예진, 1991, 211~2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