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기갑사단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기갑사단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4년 1월 28일 일요일

에른스트 폴크하임에 관한 논문 한편

 미국의 군사사가 제임스 코럼(James Corum)이 1990년대 초반 The Roots of Blitzkrieg이라는 연구를 발표하면서 전간기 독일군의 기계화전 교리의 발전에 대한 논의가 크게 진전됐습니다. 특히 이 연구의 중요한 업적은 1980년대 까지 독일군의 기계화전 교리 발전을 구데리안을 중심으로 논의하던 틀을 깨고 에른스트 폴크하임(Ernst Volckheim), 오스발트 루츠(Oswald Lutz) 등의 이론가들을 발굴한 데 있습니다. 이후 메리 헤이벡(Mary Habeck)의 Storm of Steel, 러셀 하트(Russell Hart)의 Guderian : Panzer Pioneer or Myth Maker?와 같은 연구가 나오면서 그동안 잊혀졌던 독일 군사이론가들의 업적이 발굴되고 구데리안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언 존슨(Ian Ona Johnson)이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87호(2023)에 발표한 Ernst Volckheim, Heinz Guderian, and the Origins of German Armored Doctrine은 위에서 언급한 연구들의 연장선 상에서 에른스트 폴크하임의 업적을 조명하는 연구입니다. 존슨의 연구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폴크하임의 제1차세계대전 당시 경험과 전후 기갑전 교리 연구, 두 번째는 폴크하임이 독일군의 교리 발전에 끼친 영향, 마지막은 폴크하임이 잊혀지게 된 원인입니다.

 폴크하임은 제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전차 부대에서 복무한 소수의 장교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는 1917년 창설 중이던 전차부대에 부임해 1918년 공세에 참가했습니다. 전후에도 군에 남게 된 폴크하임은 1923년 부터 본격적으로 기갑전 교리에 대해서 연구를 시작합니다. 폴크하임은 1923년에 발표한 Die Deutschen Kampfwagen in Weltkriege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수뇌부가 전차의 중요성을 일찍 깨닫지 못한 점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전차는 여러가지 약점이 있지만 제병협동하에 적절한 시기와 장소에서 사용한다면 큰 전술적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미래의 전쟁에서는 대량의 전차를 집중운용해야 하며 적 방어선 돌파를 위한 중전차와 돌파 이후 전과확대 임무를 수행할 경전차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전차를 지원하기 위한 공군력의 발전도 강조했습니다. 폴크하임은 제병협동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없다면 전차는 보조적인 무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폴크하임은 전선돌파를 위한 중전차는 독립된 전차사단으로 편성하고 전과확대를 수행할 경전차는 기병사단과 보병사단에 편성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그가 구상한 중전차사단은 450대의 전차를 보유하는 강력한 전투부대였습니다. 즉 독일군 내에서 처음으로 기갑사단 편성을 주장한 이론가는 에른스트 폴크하임 이었습니다.

 폴크하임은 전차 부대를 지휘한 장교였기 때문에 전차의 기술적인 면에서도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차가 기술적으로 발전한다면 미래에는 진지전이 불가능할 거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효과적인 기동작전을 위해서는 전차의 기술적 수준이 높아야 했습니다. 그는 미래의 전차가 충분한 연료와 예비 탄약을 탑재하고 시속 30km의 순항속도로 12시간 이상 작전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정도의 기술적 수준을 갖춰야 전차가 작전적으로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본 것 입니다. 

 폴크하임은 1923년 첫 연구를 발표한 이래 잇따라 기갑전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폴크하임은 직접 전차를 운용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전차의 기술적인 측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1924년 8월에 발표한 글에서는 '중형전차'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돌파구가 형성된 뒤 전과확대를 위해 투입될 전차는 빠른 속도와 긴 행동반경 뿐만 아니라 적 전차부대와 교전을 하기 위한 강력한 무장과 장갑이 필요한데 경전차는 기술적으로 이것을 충족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당시 세계 각국은 경제적인 이유에서 경전차나 탱켓(Tankette) 개발에 주력했는데 폴크하임은 이런 방향으로 가서는 안된다고 봤습니다. 독일에서도 엔지니어 빌헬름 브란트(Wilhelm Brandt)와 같이 탱켓 개발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폴크하임은 탱켓 개발은 근시안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에 전차 개발을 책임진 차량화부대총감 오스발트 루츠 장군은 폴크하임의 주장을 지지했습니다. 병기 개발을 총괄하는 병기-장비국(Inspektion für Waffen und Gerät)의 폴라트-보켈베르크(Alfred von Vollard-Bockelberg) 장군도 폴크하임의 이론을 받아들 중형 전차와 중전차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유명한 3호전차와 4호전차입니다.

 폴크하임이 주목한 또다른 기술적 요소는 전차의 통신수단이었습니다. 폴크하임은 초기부터 터 제병협동하에서의 전차 운용을 강조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전차부대가 공군은 물론 보병, 포병 등 다른 병과와 원활하게 통신을 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습니다. 폴크하임은 전차의 통신 수단이야 말로 미래에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단언했습니다. 1920년대의 무전 기술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주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폴크하임이 1923년 부터 1924년 사이에 발표한 연구들은 큰 반향을 일으켜서 바이마르 공화국군 군무청(Truppenamt)은 폴크하임에게 기갑 병과 교육을 위한 교육 과정을 연구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즉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육성되기 시작한 기갑장교들은 폴크하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 입니다. 구데리안 또한 폴크하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인물입니다. 구데리안은 훗날 회고록에서 폴크하임의 영향을 축소하는 왜곡을 했습니다만 1920년대 중후반 구데리안의 사상이 형성되는데는 폴크하임과의 교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1928년 이후 폴크하임은 교리 연구에 많은 시간을 쏟지 못했습니다. 이 논문의 필자인 이언 존슨은 폴크하임의 보직이 자주 바뀌면서 연구에 집중할 수 없었고, 여기에 가족 문제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반면 구데리안은 폴크하임의 연구가 침체되었던 시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구데리안이 Achtung Panzer!를 출간해 큰 명성을 얻고 히틀러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데 비해 폴크하임은 전쟁 발발 직전에야 중령으로 진급했습니다. 전쟁 기간 중에는 노르웨이 침공작전에서 제40특수임무전차대대(Panzer-Abteilung z.b.V. 40)를 지휘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소련 침공당시 제203전차연대장으로 참전해 부상을 입은 뒤로는 일선 지휘관으로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아 전선에 복귀하지 못 합니다. 구데리안이 승승장구한 것과 크게 대비되지요.

 폴크하임을 재조명하는 연구는 1990년대 이래 지속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만 이언 존슨의 연구는 폴크하임의 초기 연구를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읽어볼 만 합니다. 좋은 연구 같습니다.

2023년 7월 15일 토요일

Ben Wheatley 저, The Panzers of Prokhorovka : The Myth of Hitler's Greatest Armoured Defeat

 결론부터 이야기 하겠습니다. 벤 휘틀리(Ben Wheatley)의 The Panzers of Prokhorovka : The Myth of Hitler's Greatest Armoured Defeat는 제가 2023년에 읽은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서적 중 가장 흥미롭고 유익한 책입니다. 1990년대에 칼 하인츠 프리저의 선구적인 연구가 발표된 이후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됐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 서술도 상당 부분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쿠르스크 전투와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해서는 충분히 많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틀리의 이 연구는 새로운 사료를 활용해 몇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밝혀냈습니다. 

 이 책을 구성하는 내용들은 많은 부분이 기존에 발표한 연구들을 보완한 것 입니다. 예를들어 프로호롭카 일대의 항공사진을 분석한 연구는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라는 제목으로 2019년 JOURNAL OF INTELLIGENCE HISTORY 18-2에 실렸습니다.

 이 연구에서 가장 훌륭한 점은 새로운 사료 발굴입니다. 쿠르스크 전투, 그중에서도 프로호롭카 전투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게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휘틀리는 꼼꼼한 사료 분석을 통해 이런 선입견이 틀렸다는걸 입증했습니다. 휘틀리의 업적 중 특히 중요한 건 그동안 사료의 공백 이었던 1943년 7월 20일 부터 1943년 8월 1일 까지 독일측의 기갑차량 통계를 입증한 겁니다. 러시아에서는 프로호롭카 전투의 실상이 드러난 뒤 이 시기의 사료가 공백상태라는 점을 들어 독일측이 실제 손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물론 이건 러시아쪽에서 불리한 사실이 드러날 때 마다 내놓는 상투적인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휘틀리의 연구로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러시아측의 주장은 또 설득력을 잃었습니다. 저자는 '현재 남아있는 사료'를 분석했을 때 1943년 7월 11일 부터 7월 20일까지 무장친위대 제2기갑군단의 기갑차량 손실은 '최대 16대'이며 치타델레 작전 전 기간을 포함한 손실은 '41대'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독일측 1차 사료의 성격을 분석한 1장이 매우 중요하니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는 독일군 각 사단의 차량 '차대번호' 까지 확인하는 철저한 분석으로 연구의 신뢰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개별 차량의 차대번호까지 확인하고 있으니 이에 대해 러시아쪽이 반론을 제기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러시아쪽에서는 휘틀리의 연구에 대해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죠.

 통계 분석 뿐만 아니라 항공사진을 활용한 전투 분석도 매우 훌륭합니다. 저자는 프로호롭카 전투의 전술적 양상을 분석한 제4장에서 항공사진을 구술자료 및 문헌자료와 교차 검증해 전투를 미시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휘틀리는 소련군이 큰 피해를 입은 핵심적인 요인은 독일군의 진격에 당황한 소련군이 충분한 정찰 및 정보수집 없이 역습을 감행한 데 있다고 봅니다. 이때문에 소련 제5근위전차군은 소련군이 구축한 대전차호의 존재도 파악하지 못하고 돌격하다가 공황상태에 빠져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겁니다.

 물론 휘틀리는 소련군이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승리'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소련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전투가 끝난 뒤에도 숫적으로는 여전히 독일군을 압도하고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소련군이 많은 수의 대전차포와 야포로 방어를 하고 있어 독일군의 진격이 매우 어려웠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이 연구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하리코프(하르키우) 함락 이후 시작된 독일군의 전략적인 후퇴와 이에 따른 기갑전력의 소모 문제입니다. 휘틀리는 1943년 8월 까지는 독일군이 전투에서 손상을 입은 전차를 회수해 작전가능 상태로 되돌리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기갑전력의 손실이 크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하리코프를 상실한 뒤 계속해서 철수를 하게 되면서 손상을 입은 전차를 회수해 수리하는게 어려워졌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독일 본토로 후송한 전차를 수리해서 복귀시키는 것 또한 독일 국내의 인프라 부족(대형 크레인 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지적합니다. 이 점은 이 책의 제6장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휘틀리는 무장친위대 제2기갑군단의 기갑차량들은 쿠르스크 전투가 끝난 뒤에도 많은 수가 남아있지만 9월 부터 12월에 걸쳐 거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합니다. 제6장은 1943년 하반기의 작전에서 독일군의 기갑전력이 소모를 통해 붕괴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분석의 밀도가 높고 1차 사료의 활용도 매우 탁월한 우수한 저작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꼭 읽어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23년 1월 12일 목요일

우팔리즈 전투 직후에 촬영된 흥미로운 사진 한 장

흥미로운 사진 한 장을 봤습니다. 미국 시사잡지 라이프의 사진 기자가 1945년 1월 하순 벨기에의 우팔리즈(Houffalize)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사진을 보시면 우팔리즈 시가지의 폐허 속에 3호전차 한대가 있는게 보입니다. 

ⓒLife Magazine Archives

재미있는 점은 우팔리즈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 제116기갑사단은 기록상 3호전차를 보유하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Kamen Nevenkin의 Fire Brigades : The Panzer Divisions 1943-1945의 제116기갑사단 항목(594쪽)을 보면 이 사단은 아르덴느 공세 직전인 1944년 12월 10일에 4호전차 26대, 판터 45대, 3호돌격포 25대를 보유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944년 12월 17일 부터 12월 29일까지 추가로 4호전차 5대, 판터 23대, 4호 구축전차 5대, 3호돌격포 14대를 보충받았다고 합니다.

Thomas L. Jentz의 Panzer Truppen 2권 198쪽을 보면 제116기갑사단이 1944년 12월 16일 기준으로 4호전차 21대, 판터 41대, 4호대공전차 3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추가로 4호전차 5대, 판터 23대, 돌격포 14대가 사단에 배치되기 위해 이송중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제116사단에 배치됐다는 기록이 없는 3호전차가 우팔리즈에 있는게 재미있습니다.

제116기갑사단 부대사는 다른 곳에 두고 있어서 지금 없는데 나중에 한번 아르덴느 공세 당시 3호전차에 관련된 내용이 있는지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원래 부대가 보유하지 않았던 장비가 나오는 사례는 간혹 있습니다. 나중에 한번 이야기 할 일이 있을 것 같은데,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군 제5기갑사단도 작전 투입 당시에는 3호전차를 보유했다는 기록이 없으나 작전 도중 제5기갑사단 소속의 3호전차에 대한 보고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우팔리즈의 3호전차도 그 이력이 궁금해지는군요.

2022년 6월 5일 일요일

연합국 정보기구의 독일 기갑부대에 대한 평가

 제2차세계대전 중 독일의 정보기관들은 전략적으로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정보전을 다루는 많은 저작들은 독일의 수많은 실패사례와 연합국의 성공사례들을 비교하고 있지요. 전략적인 면에서 제2차대전 시기 독일의 정보기관들이 실패한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일 입니다. 그런데 전략적인 성공사례들만 놓고 보면 연합국 정보기관들의 한계를 놓치는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작전차원의 정보전에서는 어땠을까요? 

스웨덴의 군사사가 세테를링(Niklas Zetterling)은 Normandy 1944 :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m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에서 이 문제를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 제2차대전 중 미국과 영국 정보기관은 무장친위대와 국방군 기갑사단의 전차연대 편제에 차이가 있다고 판단했고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이런 잘못된 평가를 유지했습니다. 예를들어 1945년 3월 15일 간행된 TM-E 30-451 Handbook on German Military Forces에서는 국방군 소속 기갑사단은 4호전차 52대와 판터 51대를 보유하고 있으나 무장친위대 기갑사단은 4호전차 64대와 판터 62대를 보유한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1) 물론 이건 잘못된 평가입니다. 


미군이 추정한 독일 국방군 기갑사단 편제표
TM-E 30-451 Handbook on German Military Forces, p.II-26

미군이 추정한 독일 무장친위대 기갑사단 편제표
TM-E 30-451 Handbook on German Military Forces, p.II-28

세테를링은 독일 사료를 근거로 미군이 추정한 이런 편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2)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 기갑사단의 전차연대는 편제상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고 편제상 전차 보유대수는 동일합니다. 물론 1944년 후반기 이후 정치적으로 친위대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무장친위대의 기갑사단 편제를 정규군과 차별화 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3) '최소한' 장비 보급 측면에서는 국방군과 무장친위대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는 점은 독일군에 관한 여러 연구가 지적하고 있습니다.

적군의 편제와 병력 규모를 파악하는건 매우 어려운 일 입니다. 정보기구들이 자주 실패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 서부전선의 독일군 기갑사단 배치와 전력을 파악하려던 연합국의 시도가 실패한 사실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미영 연합군은 상륙작전 직전까지도 노르망디에 배치된 독일 제21기갑사단의 전차 전력이 총 240대에 달하고 이중 상당수가 판터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무장친위대 제12기갑사단을 합치면 독일군이 총 54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4) 실제로는 독일 기갑사단 중 가장 전력이 약했던 제21기갑사단을 무장친위대 기갑사단 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제21기갑사단이 노르망디 상륙 직전인 1944년 6월 1일 보유한 전차를 보면 3호전차 6대, 4호전차 장포신형 98대, 4호전차 단포신형 6대, 프랑스제 S-35 40대, 호치키스 H-35 2대로 총 152대입니다.5) 이중 48대는 구식화된 독일제와 프랑스제 전차이니 연합군 전차를 상대로 유효한 전력이라곤 할 수 없습니다. 장포신 4호전차 98대가 실질적인 전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전쟁에서 확보해야 하는 정보는 굉장히 방대합니다. 연합국의 정보기관은 준수한 활약을 했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는 못했습니다. 독일 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소련도 전쟁 말기 까지 독일군의 규모와 편제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평가하는데는 형편없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러시아 군사사가 발레리 자물린은 소련군이 쿠르스크 전투 당시 독일군 기갑사단의 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지적한 바 있지요.6) 연합국 정보기관이 작전 차원의 정보를 파악하는데 보여준 한계점은 사실 전쟁의 승패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기 때문에 종종 간과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한계점을 알아야 제2차세계대전 중 정보전의 양상에 대해 공정하게 평가를 할 수 있겠지요.


주석

1) TM-E 30-451 Handbook on German Military Forces, War Department, 1945, pp.II-26~II-28.

2) Niklas Zetterling, Normandy 1944 :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m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 casemate, 2019, pp.18~19

3) "SS Panz. u. SS Panz. Gren. Div"  SS Führungshauptamt Amt II Org.Abt.Ia/II, Tgb.Nr. 948/45 g.Kdos. (1945. 2. 14), H16/120 Zustandberichte Band 501(Gen Insp d Pz Tr/Org Abt.), RG242 T78 R617.

4) Marc Milner, Stopping the Panzers : The Untold Story of D-Day,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14, pp.90~91

5)  Zetterling, p.330.

6) Valeriy Zamulin, 'Prokhorovka: The Origins and Evolution of a Myth',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5-4

2022년 5월 5일 목요일

로만 퇴펠의 논문 "The Battle of Prokhorovka: Facts against Fables"

 작년인 2021년에 독일 군사사학자 로만 퇴펠(Roman Töppel)이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4-2호에 기고한 논문 "The Battle of Prokhorovka: Facts against Fables"를 읽었습니다.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연구는 여러편이 발표됐지만 여전히 새로운 연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로만 퇴펠의 이 연구도 꽤 흥미로운 주장을 하고 있네요. 이 논문에서 눈에 띄는 주장 중 몇개를 골라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프로호롭카 전투의 시간과 공간적 범위 문제

퇴펠은 소련 시기의 프로호롭카 전투 서술 뿐만 아니라 최근 러시아 학계에서 제기된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합니다. 유명한 발레리 자물린의 연구가 대표적입니다. 퇴펠은 냉전이 종식된 뒤 서방 학계와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프로호롭카 전투의 실체가 명확히 드러나자 러시아 학계에서는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기존의 서술, 즉 소련 시절에 정립된 '프로호롭카 대전차전' 이야기를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독일 군사사가 칼 하인츠 프리저(Karl-Heinz Frieser)가 독일 문헌을 근거로 독일측 손실을 명확하게 제시하면서 러시아 학계에서도 이에 대응하기 위한 논의가 일어났습니다. 러시아 학계의 대응 중 하나는 프로호롭카 전투의 기간과 전투 장소의 범위를 넓히는 것 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발레리 자물린은 프로호롭카 전투를 1943년 7월 10일 부터 16일까지 전개된 전투로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시했습니다. 이 주장은 독일 남부집단군이 주공 축선을 프로호롭카 방면으로 변경하면서 7월 10일 부터 16일까지 프로호롭카를 장악하기 위한 전투가 이어졌으므로 이 7일간을 프로호롭카 전투로 봐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퇴펠은 이런 서술 자체가 냉전 시기부터 이어진 소련측 역사서술의 잔재라고 비판합니다. 실제 제4기갑군과 제2SS기갑군단의 문서를 분석해 보면 독일군은 작전 수립 단계 부터 프로호롭카 방면에 주공을 지향했다는 것 입니다. 소련과 러시아의 역사서술은 독일군의 원래 주공 축선은 오보얀이라고 보는데 오보얀 남부의 평야지대는 습지로 기갑부대의 기동에 불리하기 때문에 이곳을 주공 축선으로 선정했다는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고 비판합니다. 퇴펠은 최근 러시아 연구자들이 프로호롭카 전투의 시간과 공간적 범위를 확대하는 이유는 더 이상 7월 12일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는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자 전투의 범위를 넓게 잡아 소련군의 승리로 해석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합니다.


2. 독일군은 소련군의 역습을 예측했는가?

두 번째로는 독일군이 소련 제5근위전차군의 역습을 예측하고 사전에 방어 준비를 갖췄기 때문에 소련군의 피해가 컸다는 주장을 반박합니다. 하지만 퇴펠은 독일측 사료를 검토해 보면 독일군은 소련 제5근위전차군의 배치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예를들어 소련군이 7월 12일 역습에 투입한 제29전차군단(25, 31, 32전차여단)과 제18전차군단(110, 170, 181전차여단) 중 독일군이 7월 12일까지 파악하는데 성공한 것은 제32, 110, 170, 181여단 뿐이고 제25, 31여단 등 2개 여단은 7월 13일에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남부집단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도 7월 11일 밤 까지도 소련군 제18전차군단과 제29전차군단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지적합니다. 제4기갑군과 제2SS기갑군단도 소련군 작전 예비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파악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퇴펠은 독일군이 소련군의 역습을 예측하고 대비했다는 주장은 소련군의 전술적 졸전을 변명하기 위한 의도라고 비판합니다.


3. 7월 12일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발생한 양측의 전차 손실

개인적으로 이 연구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퇴펠의 분석에 따르면 제2SS기갑군단이 7월 12일 전투에서 입은 전차 손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LAH : 3호전차 2대, 4호전차 2대 대파, 4호전차 4대 완파

다스 라이히 : 4호전차 5대 대파

토텐코프 : 4호 전차 1대, 티거 1대 대파


즉 7월 12일 전투에서 독일군의 총 손실은 완파 4대를 포함해 15대에 불과하다는 이야기 입니다. 소련 제5근위전차군의 전차 완전손실은 227대이니 이걸 독일군과 비교하면 4:227, 대략 1:56의 교환비가 나옵니다. 퇴펠은 발레리 자물린이 7월 12일 독일군의 손실을 정확히 집계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을 비판합니다. 예를들어 발레리 자물린은 2015년 루돌프 폰 리벤트롭(Rudolf von Ribbentrop)을 만나서 7월 12일 전투 당시 LAH 사단의 전차 보유대수를 문의했는데 자세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퇴펠에 따르면 리벤트롭은 이미 1989년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글을 쓰면서 LAH 사단의 전차 손실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즉 발레리 자물린은 독일측 자료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 입니다. 또한 리벤트롭은 2015년 러시아를 방문해 자물린과 면담을 했을때 러시아측을 고려해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소련군의 패전을 자세히 언급하는게 결례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꽤 재미있는 연구이지만 로만 퇴펠이 독일측에 편향된 서술을 한다는 비판도 있으니 주의해서 읽을 필요는 있습니다.


2019년 7월 16일 화요일

프로호롭카 전투에 관한 새로운 연구 -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

JOURNAL OF INTELLIGENCE HISTORY 18-2호에 실린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의 Ben Wheatley의 논문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를 읽었습니다. 이 논문은 독일공군의 항공사진을 바탕으로 프로호롭카 전투의 전술적 양상을 분석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항공사진과 현대의 위성사진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잡지의 판형 때문에 항공사진이 매우 작게 실려 있어서 알아보기가 매우 힘듭니다. 필자의 해설이 없으면 항공사진에 실린 전차 잔해의 차종은 커녕 전차인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예를들어 LAH 사단의 4호전차 잔해와 기동중인 티거를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여주는데 논문에 실린 사진 만으로는 차종은 커녕 어디에 전차가 있는지 조차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진 자료는 큰 판형으로 편집을 해야 알아보기가 쉽죠.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전술적인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어서 프로호롭카 전투와 무장친위대의 작전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보셔야 할 글 입니다.

필자는 결론 부분에서 프로호롭카 전투 직후 만슈타인의 제안 대로 제24기갑군단을 추가로 투입해 공세작전을 지속했다면 소련군의 예비 전력을 섬멸하는 작전적 승리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 대신 제24기갑군단을 차출한 지역의 방어가 취약해지는 사태는 피할 수 없었겠지만, 소련군의 주력에게 더 큰 작전적 손실을 강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2019년 1월 2일 수요일

[번역글] 쿠르스크 전투의 무장친위대와 국방군: 작전 수행 비교


새해 벽두부터(….) 불법날림번역(…) 나갑니다.

이 글은 2014년 출간된 논문집 Die Waffen-SS: Neue Forschungen에 실린 독일 군사사가 로만 퇴펠의 글 Waffen SS und Wehrmacht in der Schlacht bei Kursk: Ein Vergleich im operativen Einsatz를 번역한 것 입니다. 로만 퇴펠은 최근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단행본을 출간하는 등 제2차대전 작전사 연구를 하는 연구자입니다. 이 글은 1943년 하계 전역 당시 무장친위대와 육군 부대의 작전 수행능력을 비교 평가하는 내용입니다. 이 글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무장친위대와 육군의 알력 다툼으로 인해 친위대 장교단에 대한 폄하가 있었고 이게 전후에도 육군 장교들의 회고록을 통해 확대된 면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 입니다. 무장친위대가 나치의 선전 기구에 의해 실제 이상으로 과대 평가된 면이 있지만 최소한 1943년 전역에서 무장친위대의 기계화 부대가 달성한 전과는 군사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무장친위대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학술적으로 증명해 주는게 아니냐는 느낌도 받을 수 있을 것 입니다. 물론 이 논문집 자체는 무장친위대의 정치적인 면, 특히 전쟁범죄 문제도 다루고 있으니 불필요한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이 논문집에는 노르망디 전역의 작전 수행을 비교 분석한 글도 있으니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번역해 보고 싶습니다.

**********

쿠르스크 전투의 무장친위대와 국방군: 작전 수행 비교

로만 퇴펠

서     론

194345일 히틀러는 올해의 첫번째 공세로서 치타델레작전을 수행한다는 명령을 내렸다.1)치타델레는 러시아의 도시인 쿠르스크를 중심으로 한 돌출부에 대한 양익공세를 감행해 소련군을 섬멸하는 작전의 암호명이었다. 소련군도 쿠르스크 돌출부에서 하계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치타델레작전이 성공하면 독일 국방군은 전선을 크게 단축하고 남는 병력을 다른 전선에 투입할 수 있는 예비대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독일 지도층은 국방군이 다수의 소련군 전쟁포로와 민간인 노동력을 확보하길 희망했다. 포로를 독일로 보내 노동력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2)
히틀러는 처음에 치타델레작전을 19435월 초에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공세 개시일이 계속 변경되면서 독일군 뿐만 아니라 소련군도 다가올 하계 전역에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마침내 194375치타델레공세가 시작되었고, 이후 2개월에 걸쳐 오룔, 쿠르스크, 하리코프를 둘러싸고 전투가 벌어졌다. 오늘날 이 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로 불린다.3) 실제로 제2차세계대전 당시 벌어진 전투 중에서 이 전투에 투입된 병력 규모에 비견할 만한 대상을 찾기 힘들다. 전투가 시작되고 첫 2주동안 양측을 합쳐 2백만 명의 병력과 5천대의 항공기, 8천대의 전차 및 자주포, 그리고 거의 39천문에 달하는 야포가 투입됐다.4)
무장친위대와 국방군의 작전 수행을 비교하는데 쿠르스크 전투의 제1단계인 독일의 하계공세 치타델레작전이 좋은 사례가 된다. 공세에 투입된 대부분의 부대는 공세 첫 주에 담당구역에서 지속적으로 전투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쿠르스크 전투의 후반부에 독일군이 방어와 역습을 하는 입장이 됐을때는 상황이 다르다. 공세에 투입됐던 부대들의 소속이 바뀌고 다른 전선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 때문에 부대들의 작전 행동을 비교하기가 훨씬 어렵다.
이 미시연구의 목표는 세가지 문제에 답을 구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된 무장친위대가 육군 사단들 보다 무장상태가 더 좋았냐는 문제다. 두 번째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군사적인 가치를 입증했느냐이다. 세 번째는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육군 사단들 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느냐이다. 이를 통해 무장친위대 부대의 작전사 연구와 무장친위대의 군사적 효율성을 평가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I. SS사단은 육군 부대 보다 무장상태가 더 좋았는가?

쿠르스크 공세에 투입된 독일군은 총 33개사단으로 이중 보병사단이 17, 기갑척탄병사단이 5, 기갑사단이 11개였다.5) 또한 육군직할대(Heerestruppen)’인 전차대대, 대전차대대, 돌격포대대들도 여럿 투입됐다.6) 9군사령부(Armeeoberkommando 9)의 지휘를 받는 제9군은 돌출부 북쪽에 배치되어 오룔 지구에서 쿠르스크 방면으로 공격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발터 모델 상급대장이었다. 9군은 총 18개 사단을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했으며 이중에는 무장친위대 사단이 없었다. 9군의 공세는 194375일부터 11일까지 일주일간 진행됐다. 712일 붉은군대는 오룔 방면으로 반격을 개시했다.(쿠투초프 작전) 이 때문에 북익에서 공세를 개시한 제9군은 공세를 중단해야 했다.
돌출부 남쪽인 벨고로드 지구에서는 제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Armeeabteilung Kempf)이 공격에 투입됐다. 켐프 분견군은 부대의 지휘관인 베르너 켐프(Werner Kempf) 기갑대장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부대의 사령부는 나중에 제8군 사령부가 됐다.7) 켐프 분견군은 7개 사단을 치타델레작전에 투입했다. 켐프 분견군의 임무는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제4기갑군의 동쪽에서 공세를 시작해 제4기갑군의 측면을 소련군의 공격으로부터 엄호하는 것이었다.
4기갑군은 돌출부 남쪽에서 공세에 투입된 부대 중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4기갑군은 쿠르스크 남쪽에 종심깊게 구축된 소련군의 방어선을 최대한 신속히 돌파해 북쪽으로 진격한 뒤 모델 상급대장의 제9군과 접촉해 쿠르스크 돌출부에 배치된 소련군을 포위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4기갑군의 지휘부는 제4기갑군사령부(Panzerarmee-Oberkommando 4)였으며 켐프분견군 보다 전투력이 강했다. ‘치타델레작전에서 제4기갑군에 배속된 사단은 10개 사단이었다. 이중 9개 사단이 쿠르스크 방면으로의 공세를 담당했다. 이 중에는 육군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GD)’,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히틀러(L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사단 등이 있었다. 3개의 SS 기갑척탄병사단은 제2SS기갑군단 예하였다.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은 육군의 기갑척탄병사단과 비교했을 때 편제상 모든 면에서 더 많은 병력과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8) 심지어 육군의 기갑사단과 비교했을때도 편제상 더 많은 병력과 장비를 보유했다. 위에서 언급한 3개의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은 급양기준병력(Verpflegungsstärke)2만명에 달했고 대부분의 육군기갑사단을 능가하는 규모였다. 육군기갑사단은 3개의 차량화보병대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은 5개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3개의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은 경곡사포 대대가 2개였다. 반면 육군의 기갑사단은 경곡사포 대대가 1개에 불과했다.9) 육군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GD)’만이 무장친위대 부대와 비슷한 수준의 특권을 가졌다. 이 사단은 무장친위대 LAH사단을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차량화보병대대 전력을 보유했다. LAH를 제외한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의 차량화보병대대대는 4개 중대로 편성됐으나 GD사단의 차량화보병대대는 5개 중대로 편성되었다.10) 부대의 전투력을 평가하는데 있어 또다른 결정적인 요인 중에는 전차 보유량도 있다.(도표1)

1. ‘치타델레작전에 투입된 기갑사단 및 기갑척탄병사단들의 전차 및 자주포 보유량. 1943630일 기준.11)
사단
신형전차12)
신형전차 중 티거 숫자
구형전차
돌격포
대전차자주포
자주곡사포
총계
GD
81
15
54
35
28
34
232
다스 라이히
73
14
73
34
13
30
223
토텐코프
59
15
80
35
14
30
218
LAH
96
13
26
35
29
30
216
2기갑사단
65

51

34
30
180
4기갑사단
79

22

26
30
157
9기갑사단
56

53

28
18
155
11기갑사단
25

89

14
18
146
7기갑사단
37

75

14
12
138
6기갑사단
32

85

12
6
135
20기갑사단
40

42

28
6
116
3기갑사단
22

78
2
14

116
12기갑사단
36

50

16
6
108
19기갑사단
38

49

14

101
18기갑사단
29

46

16
6
97
10기갑척탄병사단




39

39

1943년 여름 무장친위대의 3개 기갑척탄병사단과 GD사단은 육군의 기갑사단들이 그저 꿈이나 꿔야 할 수준의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4개 사단은 신형 자주곡사포로 완편된 1개 포병대대를 갖추고 있었다.13) 뿐만 아니라 이 4개 사단은 적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티거 전차를 완편 상태로 14대나 보유했다.14) 무장친위대의 3개사단과 GD사단이 1개 대대의 돌격포를 보유한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1943년 여름 동부전선에서 돌격포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장비였다. 당시의 보고서를 보면 돌격포의 강력한전투력을 엄청나게 호평하고 있다.15) 뿐만 아니라 GD사단은 1943년 여름에 티거 전차를 완전한 1개 대대편성으로 45대나 보유하게 되었다.16) 그리고 무장친위대 사단들 보다도 먼저 최신형 전차인 판터를 장비하게 되었다.17) GD사단은 육군 내에서 매우 이례적인 부대였다. 이 부대는 육군의 LAH’로 불렸다.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GD사단을 지원했고 이례적일 정도로 다른 육군 사단에 비해 우대를 받았다. 무장친위대의 3개 기갑척탄병사단도 이와 비슷해서 LAH 사단이 최우선적으로 지원을 받았다. GD사단은 쿠르스크 공세를 앞두고 신형 전차를 대량으로 보급받았다.18)
치타델레작전에 참가한 무장친위대의 3개 기갑척탄병사단이 평균 이상으로 좋은 장비를 갖추었다는 사실만 가지고 1943년 여름 무장친위대가 육군에 비해 더 좋은 보급을 받았다고 성급한 일반화를 해서는 안된다. 유명한 부대인 무장친위대의 비킹기갑척탄병사단은 위에서 말한 3개 친위대 사단에 비해 전력이 빈약했다. 1943년 여름 시점에서 봤을 때 비킹 사단의 기갑 전력은 당시 평균적인 육군 기갑척탄병사단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19437월 초 이 사단은 46대의 전차와 6대의 돌격포, 14대의 대전차자주포를 보유했는데, 전차는 대부분 구형 전차였다. 비킹 사단과 함께 도네츠강 만곡부에 투입된 육군의 제16기갑척탄병사단은 53대의 전차와 14대의 대전차자주포를 보유했다.19)
무장친위대의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사단은 1943년 여름 기준으로 다른 부대에 비해 장비를 잘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쿠르스크 공세에서 중점(Schwerpunkt)을 구성했다.20)치타델레작전에 투입된 육군 사단 중에서 이들 3개 사단 만큼 좋은 지원을 받은 부대는 GD사단 말고 없었다. 다른 보병사단에 비해 좋은 장비를 갖추었던 보병사단인 제78돌격사단(Sturmdivision)1943년 하계 전역 기간에 겪은 경험은 좋은 사례이다. 19438월 중순에 작성된 한 보고서를 인용해 본다.

78돌격사단은 현재 상태는 좋지 못하다. 최소한 자주대전차포를 장비한 사단의 대전차대대를 편제에서 제외할 필요가 있다. 이 사단의 편제에는 돌격포대대도 있기 때문이다. 이 사단은 너무 많은 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며, 사단장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장비들을 적절히 운용하지 못하고 있다. 유사시 중장비를 회수하지 못하거나 승무원이 부족할 수도 있다.”21)


II. 쿠르스크 전투에서 무장친위대사단들은 평균이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는가?

2SS기갑군단 예하의 3개 사단은 치타델레작전에서 중점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큰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같은 전투에 투입된 육군 사단들과 비교했을때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입은 피해는 어느 정도 수준이었으며 또한 평균이상으로 높은 수준이었느냐는 것이다. 국방군측 인사들이 종종 주장한 것 처럼 무장친위대의 전과는 불필요하게 많은 손실을 치루면서 얻은 대가라는 비판은 타당한가?22) 기존의 연구는 이 문제를 언급하면서 하인리히 힘러가 어림짐작으로 무장친위대의 손실이 컸다고 여러 차례 언급한 사실을 지적했다.23) 힘러는 이런 주장을 통해 친위대야 말로 강인하고 이념무장이 잘 된 전사들이라는 평판을 얻으려 했다. 이런 방식의 마케팅전략(Vermarktungsstrategie)’은 양날의 칼이었다. 일반인들은 이런 선전을 통해 무장친위대가 쓸데없이 많은 인명피해를 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는걸 꺼렸다.24) 군사전문가들은 무장친위대가 많은 인명손실을 입기 때문에 전투부대로서 가치가 없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아군의 손실은 최소화하면서 적에게 더 많은 피해를 입혀야 좋은 부대라고 평할 수 있다. 쿠르스크 전투 당시 육군 제18기갑사단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 많은 손실을 입는 것은 전투력이 높은 것과 상관이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치타델레작전 기간 중 제18기갑사단이 입은 손실만을 구체적으로 집계한 통계는 없다. 하지만 이 부대가 1943년 하계전역에서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때 입은 피해를 보충할 수 없어서 사단이 해체되고 (포병사단으로) 재편되고 말았다.25) 18기갑사단이 치타델레작전에서 실패한 이유는 이 사단이 작전에 투입된 기갑사단 중에서 전투력이 가장 약했으며 공세가 시작됐을 당시 사단 병력을 필요한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못했던데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원인은 전술상의 실수에 있었고, 이로 인해 많은 손실을 입은데 있다.26) 18기갑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퇴역군인들이 집필한 제18기갑사단사를 보면 이 부대가 쿠르스크 전투에서 작전상으로 실패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27)
무장친위대 사단의 경우는 이런 비판을 할 수 없다. ‘치타델레작전이 절정에 달한 1943712, 남부집단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는 제2SS기갑군단을 방문해 3개의 무장친위대사단에 대해 전투에서 거둔 탁월한 전과와 타의 모범이 되는 행동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28) 다음날에는 제4기갑군 사령관 호트 상급대장도 휘하의 무장친위대 사단이 그동안의 전투에서 보여준 행동과 단호함, 그리고 타의 모범이 될 용맹함에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는 특별명령을 내렸다.29) 이런 찬사는 단지 부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특별명령에 집어넣은 허례허식이 아니었다. 쿠르스크 공세 작전이 끝난 뒤 제2SS기갑군단장 파울 하우서(Paul Hausser) SS대장이 호트 상급대장의 추천으로 곡엽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은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30) 4기갑군에 배속됐던 3명의 군단장급 지휘관 중에서는 하우서만이 유일하게 치타델레작전이 종결된 뒤 이 훈장을 받았다. 48기갑군단장 오토 폰 크노벨스도르프(Otto von Knobelsdorff) 대장은 호트로부터 표창을 받는데 그쳤다.31) 52군단장 오이겐 오트(Eugen Ott) 대장은 아무런 포상도 못 받았다.
그렇다면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치타델레작전에서 이러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렀을까? 평균 이상의 큰 손실을 입었을까? ‘치타델레작전에 참가한 모든 사단의 손실을 단순 비교만 하는 것은 타당한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9군사령부 예하 부대들의 경우는 이미 1943711일에 쿠르스크 공세작전이 끝났지만 켐프분견군과 제4기갑군 예하 부대들은 1943717일까지 공세작전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총손실만 비교하는 것도 충분치 않다. 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의 총병력도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의미있는 비교를 하려면 인명손실이 작전 개시당시의 총병력과 비교했을 때 차지하는 비중을 계산해봐야 한다. 남부집단군 소속으로 치타델레작전에 투입된 사단들의 전투 시작당시 병력대비 인명손실 비중은 표2와 같다.

2.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에 투입된 독일군 사단의 병력손실이 작전개시당시 총병력에서 차지하는 비중, 1943 7 4~718.32)
사단
작전개시당시 병력
사망
부상
행방불명
총계
비율(%)
332보병사단(4기갑군)
15,959
398
2,340
129
2,867
18.0
106보병사단(켐프분견군)
19,848
533
2,470
63
3,066
15.4
168보병사단(켐프분견군)
15,880
383
1,946
66
2,395
15.1
320보병사단(켐프분견군)
20,030
469
2,159
378
3,006
15.0
167보병사단(4기갑군, 켐프분견군)
14,347
389
1,551
48
1,988
13.9
19기갑사단(켐프분견군)
14,906
260
1,710
91
2,061
13.8
SS LAH(4기갑군)
23,160
514
2,541
81
3,136
13.5
SS 토텐코프(4기갑군)
19,795
503
2,103
38
2,644
13.4
GD(4기갑군)
21,524
442
2,247
82
2,771
12.9
SS 다스라이히(4기갑군)
20,303
483
1,931
23
2,437
12.0
11기갑사단(4기갑군)
15,894
234
1,449
39
1,722
10.8
7기갑사단(켐프분견군)
15,705
232
1,238
33
1,503
9.6
3기갑사단(4기갑군)
13,968
204
989
21
1,214
8.7
6기갑사단(켐프분견군)
20,229
257
1,390
23
1,670
8.3
255보병사단(4기갑군)
14,107
124
671
13
808
5.7

이 표를 보면 보병사단들이 가장 높은 인명손실 비중을 기록한 것을 알 수 있다. 보병사단들은 제외하고 기갑부대들만 가지고 비교를 하면 무장친위대 사단들의 손실이 높은 편에 들어간다. 그러나 무장친위대 3개사단은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의 공격부대 중에서 중점을 형성했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 무장친위대의 손실은 특별히 높은 편이 아니다.33)치타델레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의 기갑차량 손실을 비교하면 이점이 더 명확히 드러난다. 3의 통계는 1943714일까지 완전손실로 처리되어 육군본부에 보고된 티거, 3호전차, 4호전차, 그리고 돌격포의 숫자이다.

3. ‘치타델레작전에 참가한 기갑사단과 기갑척탄병사단의 기갑차량 손실 통계, 194375~14.34)
사단
작전개시당시 보유대수
714일까지의 완전손실
비율(%)
19기갑사단(켐프분견군)
80
23
28.8
6기갑사단(켐프분견군)
98
17
17.3
18기갑사단(9)
67
11
16.4
2기갑사단(9)
102
14
13.7
GD(4기갑군)
158
19
12.0
7기갑사단(켐프분견군)
93
10
10.8
3기갑사단(4기갑군)
90
9
10.0
SS LAH(4기갑군)
144
12
8.3
SS 토텐코프(4기갑군)
165
12
7.3
4기갑사단(9)
95
6
6.3
11기갑사단(4기갑군)
101
5
5.0
20기갑사단(9)
66
3
4.5
SS 다스라이히(4기갑군)
143
3
2.1
9기갑사단(9)
102
2
2.0

이 표를 보면 무장친위대 사단들의 기갑차량 손실은 놀라울 정도로 적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35) 이 부대들은 공세가 시작될 당시 매우 많은 전차를 보유했기 때문에 손실 비중은 그렇게 까지 중요한 요인은 아니다. 전차 보유량이 많은 부대는 전차를 조금 보유한 부대 보다 적의 저항을 신속히 극복해서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이 3개 무장친위대 사단은 적 기갑부대와의 교전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런 사실들을 고려하면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전차 손실이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


III.엘리트부대?’ 1943년 여름 무장친위대 사단에 대한 군사적 평가

쿠르스크 전투는 치타델레작전의 중단으로 끝나지 않았다. 소련측에서는 1943823일 붉은군대가 하리코프를 재탈환한 바로 그날 쿠르스크 전투가 종결됐다고 본다.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무장친위대 사단들을 군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1943년 여름 동부전선의 남부에서 전개된 전투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치타델레작전 이후의 전투에는 LAH 사단이 참가하지 않았다. 이 사단은 1943725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자 이탈리아로 파견됐다.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사령관 한스 귄터 폰 클루게 원수에게 LAH 사단을 이탈리아에 투입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파시즘에 기반한 최정예 부대가 이탈리아에 있어야 무언가를 할 수 있소.36)
반면 다스라이히와 토텐코프 사단은 동부전선에 남아서 남부집단군의 중점, 그리고 위급한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19437월 말 이 두사단은 도네츠만곡부 미우스강에 소련군이 구축한 교두보를 분쇄하기 위한 역습에 투입됐다. 쿠르스크 전투의 마지막 단계가 시작된 8월 초에는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과 함께 다시 하리코프 지구에 투입되어 제3기갑군단 예하에 들어갔다. 3기갑군단 참모장 에른스트 메르크(Ernst Merk) 대령은 1943813일 육군본부에서 시찰을 나온 한 참모장교에게 3개 무장친위대 사단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했다.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좋은 인력과 장비에 걸맞게 잘 싸우고 있다. 하지만 그 지휘부는 부대의 수준에 맞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장친위대 사단을 엄격히 지휘해야 하며, 상급부대가 지속적으로 감독할 필요가 있다.”37) 메르크 대령이 이런 평가를 내린 시점은 3개의 무장친위대 사단이 제3기갑군단에 배속된 지 얼마 안된 시점이기 때문에 이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 나온 육군 장군들의 회고록에서도 무장친위대 간부들의 지휘능력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38)
사실 무장친위대는 항상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했다.39)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무장친위대가 단기간에 팽창한데 있다. 1943년 상반기에만 무장친위대 6개 사단을 신규 편성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40) 그 결과 기존에 있던 부대들이 약화되었다. 우대를 받고 있었던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사단 조차 1943년 여름에는 장교와 부사관이 현저한 수준으로 부족했다. 가장 심한 손실을 입은 부대는 LAH였다. 이 사단은 치타델레작전이 시작되기 전 특별한 전투에 휘말리지 않았지만 19437월 초에는 장교 277명과 부사관 1,179명이 부족한 상태였다.41) 이렇게 된 이유는 LAH의 자매부대인 12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를 창설하기 위해 간부를 차출한데 있었다. 새로 편성되는 사단들은 단순히 병력을 보충하는 정도가 아니라 LAH사단을 보충대 처럼 이용했다. LAH사단은 군사적으로 유능한 장교와 부사관을 히틀러유겐트 사단을 편성할 기간요원으로 내줘야 했다.42) 다스라이히 사단과 토텐코프 사단도 마찬가지로 병력 부족을 겪었다. 다스라이히 사단은 장교 286명과 부사관 734명이 부족했고 토텐코프 사단은 장교 259명과 부사관 967명이 부족했다.43)
치타델레작전에 참여한 다른 육군 기갑사단들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44) 육군 기갑사단 중 장교가 가장 부족했던 부대는 제2기갑사단이었는데 그 숫자는 21명에 불과했다.45) 부사관이 가장 부족한 부대는 제12기갑사단이었다. 그 숫자는 388명이었다.46) 대부분의 육군 기갑사단은 간부 부족이 심각하지 않았다. 한 사단은 아예 해당사항이 없었다. 6기갑사단은 장교와 부사관이 편제대로 있었다.47)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이렇게 심각한 장교와 부사관 부족에 시달린 결과 전장에서의 전투 수행 능력, 그리고 부족한 지휘력으로 인한 불필요한 희생이 얼마나 발생했느냐는 것이다. 많은 피해를 입는다는 것은 보통 지휘 능력이 부족하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그리고 실제로 무장친위대 부대가 잘못된 판단으로 불필요한 피해를 입은 사례도 찾아낼 수 있다. 그런 사례 중 가장 심한 것은 19437월 말 미우스강의 소련군 교두보에 대한 역습 과정에서 발생했다. ‘치타델레작전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무장친위대가 중점에 투입됐다. 그러나 역습 첫날은 많은 인명손실과 함께 실패로 돌아갔다. 무장친위대 사단들을 배속받은 제6군 사령부는 유연한 전술을 펼칠 것을 강조했다. 6군사령부는 다음날 공격을 할 때는 같은 지점을 거듭해서 공격하지 말도록 했다. 하지만 무장친위대는 다음날에도 같은 방면으로 공격했다. 공격은 또다시 실패했고 특히 토텐코프 사단의 인명손실이 컸다. 6군사령부는 친위대 사단들에게 명령을 내려 3일차 공격은 중점을 변경하고 공략이 어려운 고지를 우회하도록 했다. 3일차의 공격은 성공을 거두어 소련군의 교두보를 분쇄할 수 있었다.48)
하지만 1943년 여름 전역에서는 무장친위대만 이렇게 형편없는 지휘로 인한 막대한 인명손실을 치른게 아니었다. 유사한 사례는 육군에서도 나타나며 실제로 각급 제대에 걸쳐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GD사단의 작전참모 올트비히 폰 나츠머(Oldwig von Natzmer) 대령은 19438월에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기갑사단장 중에는 그 직위에 맞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있다.”49) 지휘관들의 잘못된 지휘 문제는 연대급 지휘관들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치타델레작전 당시 GD전차연대와 제39전차연대를 지휘한 히아진트 그라프 슈트라흐비츠(Hyazinth Graf Strachwitz) 대령이 그러하다. 그는 2개 전차연대를 손실도 고려하지 않고 무모하게 투입했다. 상관이었던 제10전차여단장은 이러한 지휘방식을 완전히 미쳤고 저능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50) 중대급 지휘관들도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치타델레작전 중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에 투입되었던 제505중전차대대장은 육군본부에서 시찰을 나온 한 참모장교에게 이렇게 불만을 제기했다. “과거에는 후방 보직에 있거나 본부중대장 정도나 하던 경험이 부족한 장교들이 전차중대장에 임명되면서 대대의 공격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여러대의 티거를 잃게 됐다.”51) 이건 유일한 사례가 아니었다.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에 투입되었던 제10전차여단이 작성한 한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여단 예하 부대들은 최신형 전차인 티거와 판터를 장비하는 등 훌륭하게 편성되어 있지만 중대급 지휘관들은 젊고 경험이 부족한 장교들이다.’ 이 보고서에서 예외로 취급한 부대는 무장친위대 다스라이히 사단의 판터 대대 뿐이었다.52)
무장친위대 부대가 많은 손실을 입은 책임이 육군 지휘관에게 있는 경우도 있었다. 194384일 독일군이 도네츠강의 소련군 교두보를 공격한 전투가 대표적이다. 40기갑군단장 지크프리트 헨리치(Sigfrid Henrici) 기갑대장은 군단에 배속된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의 사단장이 항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단을 가망없는 공격에 투입했다. 독일군은 공격에 실패하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53)
육군 부대가 잘못된 지휘로 많은 손실을 입은 사례는 더 있다. 육군에서는 자주 무장친위 간부들의 지휘능력이 부족하다고 비난했는데, 이러한 비난은 무장친위대가 독일군 내에서 차지하는 특수한 지위 및 여러 특권과 결합해서 국방군 측의 불신을 불러오고 긴장을 초래했다.54) 오토 뵐러(Otto Wöhler) 대장은 켐프분견군의 지휘권을 인계받기 5일 전인 1943820일에 다스라이히 사단장 발터 크뤼거(Walter Krüger) SS중장을 교체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크뤼거가 무분별하다거나 그의 지휘 방식 때문에 불필요한 희생이 발생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뵐러는 크뤼거가 무장친위대 같은 최정예부대를 지휘하기에는 활력이 없고 둔하다.”고 생각했다.55) 하지만 뵐러의 제안은 허사로 돌아갔다. 크뤼거는 다스라이히 사단을 계속 지휘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11일 뒤에는 곡엽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56) 다스라이히 사단은 하리코프 전투에서 크게 활약해 1943827일 독일국방군 공식보도에 언급되었다.57)
뵐러의 휘하에 배속된 다른 무장친위대 사단들도 쿠르스크 전투의 최종 단계에서 크게 활약했으며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8월 중순 토텐코프 사단이 하리코프 지구에서 수행한 역습은 대성공을 거두어 제3기갑군단장 헤르만 브라이트(Hermann Breith) 대장은 국방군 공식보도에 토텐코프 사단을 언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58) 뵐러도 며칠 안되는 기간 동안 두 차례나 무장친위대 사단들의 활약을 칭찬했다. 그는 817일 토텐코프 사단을 치하했으며 3일 뒤에는 비킹 사단을 칭찬했다.59) 비킹 사단에 대해서는 194311월 초에 작성된 흥미로운 문건이 하나 있다. 이 자료는 이른바 무장친위대 간부진의 형편없는 지휘능력이라는 문제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3기갑군단에서 작성한 각 사단의 내적 전투력에 대한 평가(Beurteilung des inneren Kampfwertes der Divisionen)’라는 제목의 문건은 비킹 사단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비킹 사단은 치열한 방어전을 수행했으며 현재 전개되고 있는 공세작전에서도 역량을 입증했다. 이 사단의 예하부대들은 26개월간 동부전선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강인한 부대들이다. 이 사단의 전과는 많은 희생을 치르며 거둔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경험이 풍부하고 우수한 장교와 부사관들을 지속적으로 작전에 투입하고 있다. 이 사단의 지휘부는 정력적이고 창의적이며 잘 훈련되어 있다. 하지만 인접부대 및 상급부대와의 관계가 경직되어 있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60)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훌륭하게 지휘할 수 있었다. 양보다 질이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많다. 1943년 여름의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 사단들은 물질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인적인 면에서도 우수했다. 그래서 무장친위대의 기갑부대들은 꾸준히 중요한 전장에 투입됐다. 미국의 역사가 조지 스타인(George Stein)1960년대에 오늘날에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무장친위대의 역사서를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히틀러는 위태롭다고 생각되는 지역에는 무장친위대 기갑부대를 투입했다.”61) 스타인은 이러한 예로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비킹, 호엔슈타우펜, 프룬즈베르크, 히틀러유겐트 사단을 들었다. 이 사단들은 1943년 말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에서 무장친위대 기갑사단으로 개칭됐다.62) 스타인은 이들 사단을 엘리트 사단이라고 불렀다.63) 그렇다면 실제로 무장친위대는 엘리트부대라고 할 수 있었는가?
군사 엘리트라는 개념은 최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무장친위대와의 관련성 때문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64) 그리고 실제로 무장친위대는 38개 사단에 달했기 때문에 부대간의 수준 차이가 컸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장친위대 전체를 군사 엘리트로 볼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어떤 부대를 엘리트부대로 불러야 할 것인지, 그리고 엘리트라는 용어를 분석적인 개념으로 군사적 효율성 연구에 적용하는게 완전히 부적절한지에 관해서도 논의를 해야 한다.65) 물론엘리트부대(Elitetruppen)’라는 용어는 역사적 개념으로 존재해왔다. 독일국방군 공식보도에서는 19416월의 그리스군이나 19449월 아른헴에 강하한 영국 공수부대와 같이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한 적군 부대에 대해 엘리트부대라는 명칭을 사용했다.66) 히틀러는 19433월에 2개의 독일군 공수사단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이 부대들을 엘리트부대라고 불렀다.67) 그리고 군사사 연구에 있어서도 지금까지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했거나 사기가 왕성한 부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부대나 좋은 장비를 갖춘 부대들을 엘리트로 불러왔다. 군사적 엘리트라는 개념을 전통적인 작전사 연구의 개념으로 본다면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엘리트부대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소련군도 그렇게 생각했다. 1943년 여름에 작성된 소련군 문헌들을 보면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비킹, 그리고 GD사단을 엘리트사단(Отборные дивизии)’으로 구분하고 있다.68)  


 

한 전투에 참가한 부대들의 군사적 효율성을 비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전술적 상황, 지형, 기상 상태, 항공지원 뿐만 아니라 아군 부대의 전력과 사기, 적군 부대의 전투력 같은 요인들의 편차가 크기 때문이다. 이런 요소를 모두 고려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많은 문제를 해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3년 동부전선 하계 전역에서는 명확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이것을 가지고 무장친위대 지휘부의 지휘능력이 부족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무장친위대 사단들의 군사적 능력이 증명되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등 3개의 무장친위대 사단의 장비 보유 현황은 평균 이상으로 우수했으며 이 때문에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특별 대우에는 반대급부가 있었다.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항상 중점이나 위기가 발생한 지역에 투입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무장친위대 참전자들의 자의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필자는 1942년 무장친위대에 입대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동부전선에서 싸운 토텐코프 사단 소속의 한 참전자를 인터뷰한 일이 있다. 그는 토텐코프 사단의 병사들이 스스로를 엘리트로 생각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우리가 엘리트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행동을 했을 뿐 입니다.”69) 1943년 여름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전투들을 살펴보면 이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 Operationsbefehl Nr.6. Ernst Klink, Das Gesetz des Handelns. Die Operation Zitadelle 1943, Stuttgart 1966, S.292-294에서 재인용. 여기서 인용한 부분은 292쪽에 있다.
2) Operationsbefehl Nr.6, Anlage 2. 위의 S. 296-298을 참고하라.
3) Karl-Heinz Frieser, Die Schlacht im Kursker Bogen, in: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 Weltkrieg(DRZW), Bd.8: Die Ostfront 1943/44, Der Krieg im Osten und an den Nebenfronten, München 2007, S.81-208, 여기서 인용한 부분은 200쪽을 참고하라.
4) 같은책 100. 프리저의 글은 전차의 숫자를 다소 적게 산정하고 있다. Roman Töppel, Kursk-Mzthen und Wirklichkeit einer Schlacht, in: Vierteljahrshefte für Zeitgeschichte 57(2009), S. 349-384, 특히 358-361쪽을 참고하라.
5) 다행히도 치타델레 작전에 참전한 3개 야전군의 해당기간의 전투일지와 그 부록은 잘 보전되어 있다. Führungsabteilungen(Ia) im Bundesarchiv-Militärarchiv(BA-MA), RH 20-8/83(Armeeabteilung Kempf), RH 20-9/134(9.Armee), RH21-4/104(4.Panzerarmee) 등이다.
6) 육군직할대(Heerestruppen)는 사단 예하에 편제되지 않은 부대들을 뜻한다. 이 부대들은 상급사령부에서 중점을 강화하기 위해서 예하 부대에 일시적으로 배속시켜주는 것이다.
7)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켐프분견군 사령부는 19438월 중순 제8군 사령부로 개칭되었다.(Stabsbefehl, AOK8, Ia, 16.8.1943, BA-MA, RH 20-8/95, Anlage 700, unpag.을 참고하라.) 좀 더 단순히 서술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19437월의 전투를 서술할 때에도 제8군 사령부로 통일한다.
8) 문제에 대한 분석은 Bernhard R. Kroener, Menschenbewirtschaftung, Bevölkerungsverteilung und personelle Rüstung in der zweiten Kriegshäfte(1942-1944), in: DRZW, Bd 5/2: Kriegsverwaltung, Wirtschaft und personelle Ressourcen 1942-1944/45, Stuttgart 1999, S.960을 참고하라.
9) Niklas Zetterling u. Anders Frankson,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London 2000, S.45를 참고하라.
10) ebd., S.44를 참고하라.
11) Panzer-Lage, 11.7.1943, BA-MA, RH 10/60, Bl. 57-59; Sturmgeschütz-Lage, 11.7.1943, BA-MA, RH 10/62, Bl.92; Pak(Sf)-Lage, 13.7.1943, BA-MA, RH 10/63, Bl.62-65; Zetterling u. Frankson, Kursk, S.46 통계를 정리한 것이다. 이 표에는 운용 가능한 차량 외에도 정비 중에 있거나 독일 본토에서 이동중이던 차량도 포함시켰다. 치타델레 작전에 일시적으로 참가한 부대의 경우는 제외했다.
12) 신형전차에는 4호전차 장포신형, 5호전차 판터, 6호전차 티거, 노획한 T-34를 포함시켰다. 1호전차, 2호전차, 3호전차, 4호전차 단포신형, 35(t), 38(t), 그리고 이 차량의 차대에 기반한 지휘전차는 구형 전차로 구분했다.
13) 여기에는 후멜과 베스페가 해당된다. 그리고 표1의 자주포항목에는 여기에 더해 자주중보병포 그릴레도 포함시켰다. 이 세 종류의 기갑차량에 관해서는 Peter Chamberlain u. Hilarz L. Dozle, Encyclopedia of German Tanks of World War Two, 2. Aufl., London 1993, S.39 f., 47 u. 108f를 참고하라.
14) 쿠르스크 공세작전에 투입된 티거는 총 147대였다. 1에는 이중 90대가 제외되어 있다. 90대는 제503, 505중전차대대 소속이었다. 티거 전차의 개발 및 실전 운용에 대해 가장 상세하고 잘 연구되어 있는 서적으로는 Thomas L. Jentz u. Hilarz L. Doyle, Germany’s Tiger Tanks, 3 Bde., Atglen(Pennsylvania), 1997-2000가 있다.
15) Reisebericht des Majors i.G. von Busse zur Heeresgruppe Mitte, 17.8.1943, BA-MA, RH 10/54, Bl.87 그리고 Bericht über die Ostfrontreise des Kommandeurs der Sturmgechütz-Ersatz- undAusbildungsabteilung 200 vom 30.8. bis 22.9.1943, Abschrift, BA-MA, RH 10/58,Bl.385를 참고하라. 돌격포의 개발 과정과 기술적 특성에 관해서는 Walter J. Spielberger, Sturmgechütze. Entwicklung und Fertigung der sPak, 3.Aufl, Stuttgart 1997을 참고하라.
16) Helmut Spaeter, Die Geschichte des Panzerkorps Großdeutschland, Bd.2, Duisburg-Ruhrort 1958, S.146 u. Wolfgang Schneider, Tigers in Combat, Bd. 2, Winnipeg(Manitoba) 1998, S.49 참고하라.
17) Thomas L. Jentz, Der Panther. Entwicklung, Ausführungen, Abarten, seltene Varianten, charakteristische Merkmale, Kampfwert, Wölferscheim 1997, S.137을 참고하라.
18) LAH 사단과 GD 사단의 특별 대우에 관해서는 Jean-Luc Leleu, La Waffen-SS. Soldats politiques en guerre, Paris 2007, S.356 그리고 Sönke Neitzel u. Harald Welzer, Soldaten, Protokolle vom Kämpfen, Töten und Sterben, Frankfurt-M. 2011, S.367.등을 참고하라. 육군의 LAH라는 표현은 요제프 괴벨스가 194341일에 쓴 것이다. Elke Fröhlich(Hg.), Die Tagebücher von Joseph Goebbels, Teil II, Diktate 1941-1945, Bd.8, April-Junu 1943, München u. A. 1993, S.26을 참고하라.
19) Panzer-Lage, 21.7.1943, BA-MA, RH 10/61, Bl.125(Stand: 10,7,1943); Sturmgeschütz-Lage, 21.7.1943, BA-MA, RH 10/62, Bl.88(Stand: 10.7.1943); Pak(Sf)-Lage, 13.7.1943, BA-MA, RH 10/63, Bl.62(Stand: 30.6.1943). 이 수치는 운용 가능한 차량 뿐만 아니라 정비중에 있는 차량과 본토에서 이동중인 차량도 포함한 것이다. 두 사단은 19434월 재정비에 들어가 1943717일 다시 전투에 투입되었다.
20) 이점은 켐프 분견군 참모장이 194341일 제출한 Entwurf für Operationsvorschlag K에서부터 나타난다. BA-MA, RH 20-8/81, Anlage 8, unpag. 4기갑군의 치타델레 작전 최종안은 Klink, Gesetz, S.308-311을 참고하라.
21) Reisebericht des Majors i.G. von Busse zur Heeresgruppe Mitte, 17.8.1943, BA-MA, RH 10/54, Bl. 91. 78돌격사단은 마르더 대전차자주포 28대로 편성된 대전차대대 1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돌격포 31대로 편성된 제189돌격포대대도 배속받고 있었다. 이 사단에 관해서는 Ludwig Merker, Das Buch der 78. Sturmdivision, Tübingen 1965를 참고하라.
22) 에리히 만슈타인은 그의 회고록에서 무장친위대를 이렇게 묘사했다. “무장친위대는 수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그들이 달성한 전과는 희생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Erich von Manstein, Verlorene Siege, Erinnerungen 1939-1944, 13.Aufl., Bonn 1993, S.188; 그리고 Neitzel u. Welzer, Soldaten, S.368 f.를 참고하라.
23) Bernd Wegner, Hitlers Politische Soldaten: Die Waffen-SS 1933-1945. Leitbild, Struktur und Funktion einer nationalsozialistischen Elite, 6. Aufl., Paderborn 1999, S. 282 f.; Leleu, Waffen-SS, S. 37을 참고하라.
24) ebd., S. 239 f.를 참고하라.
25) 18기갑사단이 1943년 하계전역에서 입은 피해에 관해서는 Reisebericht des Majors i. G. Von Busse zur Heeresgruppe Mitte, 17.8.1943, BA-MA, RH 10/54, Bl.93 Kroener, Menschenbewirtschaftung, S.951을 참고하라.
26) 18. Panzerdivision, Ia, Kriegstagebuch(KTB) Zitadelle, 28.6.1943ß12.7.1943, Russland, BA-MA, RH 27-18/139, Bl. 10-12 u. 17-23을 참고하라.
27) Wolfgang Paul, Geschichte der 18. Panzerdivision 1940-1943. Mit Geschichte der 18. Artillerie-Division 1943-1944, Reutlingen 1989, S.255 f.를 참고하라.
28) Silvester Stadler(Hg.), Die Offensive gegen Kursk 1943. II. SS-Panzerkorps als Stoßkeil im Großkampf, Osnabrück 1980, S.104 그리고 108을 참고하라. 여기에는 KTB Nr.6, Generalkommando II.SS-Panzerkorps, Ia, mit Anlagen, für Zeitraum 1.7.1943-2.8.1943.의 일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이 자료의 원본은 BA-MARS 2-2/17(Textband) RS 2-2/18(Anlagen)로 소장되어 있다.
29) Der Oberbefehlshaber der 4.Panzerarmee, Tagesbefehl, 18.7.1943, BA-MA, RH 21-4/111, Bl.115; 그리고 Stadler, Offensive, S. 155 f.를 참고하라.
30) Antrag auf Verleihung des Eichenlaubs zum Ritterkreuz für Paul Hausser, National Arc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College Park, Maryland, A3343, SSO 071A(Personalakte Hausser). 바이로이트의 파이트 셰르처(Veit Scherzer)씨가 이 문서의 사본을 제공해 준데 감사드린다.
31) Schreiben Hoth an Knobelsdorff, 21.7.1943, BA-MA, RH 21-4/111, Bl.174. 크노벨스도르프가  곡엽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은 것은 19431112일이었다. Veit Scherzer, Die Ritterkreuzträger. Die Inhaber des Ritterkreuzes des Eisernen Kreuzes 1939 von Heer, Luftwaffe, Kriegsmarine, Waffen-SS, Volkssturm sowie mit Deutschland verbündeter Streitkräfte nach den Unterlagen des Bundesarchivs, 2. Aufl., Ranis-Jena 2007, S.453.
32) 57보병사단은 치타델레 작전 기간 중 주로 방어적인 엄호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이 표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198보병사단은 공세 작전이 시작되고 며칠 뒤에야 전선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표에서 제외했다. 이 표에 포함한 부대들은 쿠르스크 공세 작전 기간 중 지속적으로 투입되었던 사단들이다. 남부집단군 예하의 사단 일부는 이미 치타델레 작전 개시에 앞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기 위해 194374일 보병을 투입해 소규모 공격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여기에는 74일에 발생한 인명 피해도 포함했다. Kursk Operation Simulation and Validation Exercise-Phase II(KOSAVE II), prepared by Office of the Chief of Staff, US Army Concepts Analysis Agency, Bethesda(Maryland) 1998, Appendix F, 문서는 다음 주소에서 찾을 수 있다. http://dialspace.dial.pipex.com/town/avenue/vy75/data.htm(마지막 검색일 201163). 이 연구에서 사용하고 있는 ‘onhand strength‘라는 용어는 다소 혼동을 줄 수 있다. 이 용어의 개념(onhand effective personnel present for duty)에 대응하는 독일어 용어는 Tagesstärke이다. 그러나 1차사료와 대조해서 분석한 결과 이 보고서에 사용된 경우는 Iststärke에 해당된다. 독일어에서 병력 현황을 나타내는 용어에 관해서는 Niklas Zetterling u. Anders Frankson, Analyzing World War II Eastern Front Battles, in: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1(1998), S> 176 f. 그리고 Kroener, Menschenbewirtschaftung, S. 839를 참고하라.
* 역자주: Kursk Operation Simulation and Validation Exercise-Phase II(KOSAVE II)PDF판은 https://apps.dtic.mil/dtic/tr/fulltext/u2/a360311.pdf 에서 다운로드 가능.
33) 2차대전 전 기간을 다루는 연구들도 유사한 결론을 내놓고 있다. Wegner, Soldaten, S. 282; Rüdiger Overmans, Deutsche militärische Verluste im Zweiten Weltkrieg, München 1999, S: 295 f.; Leleu, Waffen-SS, S. 725.
34) 12기갑사단은 치타델레 작전에 적은 전력만을 투입했기 때문에 이 표에 포함하지 않았다. Panzer-lage, 11.7.1943, BA-MA, RH 10/60, Bl. 57ß59(Stand: 30.6.1943); Sturmgeschütz-Lage, 11.7.1943, BA-MA, RH 10/62, Bl.92(Stand: 30.6.1943); Ausfälle H.Gr.Süd, Stand 14.7.1943, BA-MA, RH 10/64, Bl.67; Ausfälle H.Gr.Mitte, Stand 14.7.1943(Berichtigt), BA-MA, RH 10/65, Bl.12.
35) 치타델레 작전에 종결될 때 까지 이런 추세는 변하지 않았다. 2SS기갑군단은 1943723일 총 손실이 전차 31대와 돌격포 5대라고 보고했다. Stadler, Offensive, S.165를 참고하라.
36) Helmut Heiber(Hg.), Hitlers Lagebesprechungen. Die Protokollfragmente seiner militärischen Konferenzen 1942-1945, Stuttgart 1962, S.373.
37) Reisebericht des Majors i.G. Ferber zur Heeresgruppe Süd, 17.8.1943, BA-MA, RH 10/54, Bl.112.
38) Sönke Neitzel, Des Forschens noch wert? Anmerkungen zur Operationgeschichte der Waffen-SS, in: Militärgeschichtliche Zeitschrift 61(2002), S.403-429를 참고하라. 여기에 인용한 부분은 408쪽이다.
39) Leleu, Waffen-SS, S.287 f.를 참고하라.
40) Kurt Mehner, Die Waffen-SS und Polizei 1939-1945, Führung und Truppen, Norderstedt 1995, S. 145 f.을 참고하라.
41) Zustandsberichte der SS Panzergrenadierdivision Leibstandarte SS Adolf Hilter, Meldung vom 1.7.1943, BaßMA, RH 10/312, Bl.2.를 참고하라.
42) Rudolf Lehmann, Die Leibstandarte, Bd. 3, Osnabrück 1982, S. 218-220, 그리고 Hubert Meyer, Kriegsgeschichte der 12.SS-Panzerdivision Hitlerjugend, Bd. 1, 3. Aufl., Coburg 1996, S. 11-16.를 참고하라.
43) Zustandsberichte der SS-Panzergrenadierdivisionen Das Reich u. Totenkopf, Meldungen vom 1.7.1943, BA-MA, RH 10/313, Bl.1 u. RH 10/314, Bl. 1.을 참고하라.
44) 안타깝게도 GD사단의 194371일 보고서는 현존하지 않는다. (BA-MA, RH 10/209)
45) Zustandsberichte der 2. Panzerdivision, Meldung vom 1.7.1943, BA-MA, RH 10/141, Bl. 2.를 참고하라.
46) Zustandsberichte der 12. Panzerdivision, Meldung vom 1.7.1943, BA-MA, RH 10/150, Bl. 1.을 참고하라.
47) Zustandsberichte der 6. Panzerdivision, Meldung vom 1.7.1943, BA-MA, RH 10/145, Bl. 1.을 참고하라.
48) KTB AOK 6, Ia, Bd.5, 17.7.1943-17.8.1943, BA-MA, RH 20-6/303, Bl. 123-149.를 참고하라.
49) Reisebericht des Majors i. G. Ferber zur Heeresgruppe Süd, 17.8.1943, BA-MA, RH 10/54, Bl.113.
50) Bericht von Oberst Karl Decker, Kommandeur der Panzerbrigade 10, vom 17.7.1943, Abschrift, BA-MA, RH 10/54, Bl. 58.를 참고하라.
51) Bericht von Oberstleutnant i. G. Graf von Kielmansegg über einen Flug zur 9.Armee am 11.7.1943, BA-MA, RH 10/54, Bl. 61에서 발췌.
52) Panzer-Brigade 10, Gliederung und Offz.- Stellenbesetzung der Panther- und Tiger-Einheiten, 31.8.1943, BA-MA, RH 10/56, Bl. 135.를 참고하라.
53) Ewald Klapdor, Mit dem Panzerregiment 5 Wiking im Osten, Siek 1981, S.160 f.(여기서는 HenriciHeinrici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KTB XXXX. Panzerkorps, Ia, Bd. 3, 1.8.1943-15.8.1943, BA-MA, RH 24-40/54, Eintrag vom 4.8.1943 그리고 Tagesmeldung an das PzAOK 1 vom 4.8.1943, unpag.를 참고하라. 다음날 비킹 사단장 헤르베르트 길레(Herbert Gille) SS소장은 비킹 사단은 필요한 준비와 지형 정찰을 하지 않으면 계획된 공격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위의 일지 194385일 참조.
54) 무장친위대의 특수한 위치를 보여주는 확실한 사례는 제4기갑군의 1943713일 일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 [4기갑군 참모장은] 남부집단군 참모장과 상의하면서 무장친위대의 병력 현황과 보충은 완전히 별도의 체계로 이루어지고 있어 제4기갑군이 이를 완전히 파악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BA-MA, RH 21-4/104, Bl. 157).
55) AOK 8, Fernschreiben vom 20.8.1943, 19.30 Uhr, an Heeresgruppe Süd, Abschrift, BA-MA, RH 20-8/95, Anlage 728, unpag. 이 시사점이 많은 문서에 관해 알려준 베른의 카타리나 슈트라웁(Katharina Straub)에게 감사한다. 당시 다스라이히 사단 병기참모(1. Ordonnanzoffizier)의 회고록은 뵐러가 크뤼거와 갈등을 빚게 된 계기가 8군의 다른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우리 사단 예하 부대를 계속해서 전용하는 것에 대해크뤼거가 뵐러에게 강력히 항의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설명한다. 뵐러는 크뤼거가 항의하자 남부집단군 전체가 전례없이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이상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원칙에 기반한 지휘 방식은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는 지휘관이 반대하더라도 전투력이 양호한 부대에 방어 작전의 부담을 지우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계속 취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Rolf Diercks, Lebenserinnerungen- überschattet vom Irrweg im Dritten Reich. Autobiographische Schliderungen von den Anfängen der Weimar Republik bis zum Beginn des 21. Jahrhunderts, München/Straubing 2009[Ms]., S.413). 이 회고록의 내용은 크뤼거가 1943820일과 822일 힘러에게 보낸 전문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크뤼거는 힘러에게 다스라이히 사단이 분산 운용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BA-MA, M841, Akte 4, unpag.을 참고하라.
56) Scherzer, Ritterkreuzträger, S. 479.를 참고하라.
57) Die Wehrmachtberichte 1939-1945, 3 Bde., Köln 1989를 참고하라. 여기 인용한 부분은 Bd. 2, S. 549.
58) AOK8, Fernschreiben vom 17.8.1943, 10.40 Uhr, an Heeresgruppe Süd, Abschrift, BA-MA, RH 20-8/95, Anlage 702, unpag.를 참고하라. 토텐코프 사단은 1943818일 독일국방군 공식보도에 언명되었다. Die Wehrmachtberichte, Bd.2, S.542.를 참고하라.
59) AOK8, Fernschreiben vom 17.8.1943, 19.35 Uhr, u. 20.8.1943, 22.00 Uhr, an III. Panzerkorps, Abschriften, BA-MA, RH 20-8/95, Anlagen 707 u. 729, unpag.
60) Generalkommando III. Panzerkorps, Beurteilung des inneren Kampfwertes der Divisionen, 2.11.1943, BA-MA, RH 20-8/89, Anlage 113, unpag. 이 문서는 19431020일부터 1125일까지 제3기갑군단 군단장 대행을 맡은 하인츠 치글러(Heinz Ziegler) 중장이 서명을 했다.
61) George H. Stein, Geschichte der Waffen-SS, Düsseldorf/Wiesbaden 1999(1967), S.186.
62) Mehner, Waffen-SS, S.166-219를 참고하라.
63) Stein, Geschichte, S. 186 u. 260 f.
64) 특히 Jens Westermeier, Die Junkerschulgeneration- eine militärische Elite des Führers? Ergebnisse einer Untersuchung der Absolventen der SS-Führerschulen, in: Arbeitskreis Militärgeschichte e.V., Newsletter 35(2010), S. 8-13.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65) 옌스 베스테마이어와 얀 에릭 슐테는 201156일부터 7일까지 열린 독일 제2차세계대전사 편찬위원회와 뷔르츠부르크 대학 역사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무장친위대의 역사를 다루는 콜로키움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H-SOZ-U-KULT(http://hsozkult.geschichte.hu-berlin.de/tagungsberichte/id=3790)에 올라온 페터 리프(Peter Lieb)의 글과 필자가 Militärgeschichtlichen Zeitschrift 70(2011), S.99-104.에 기고한 글을 참고하라.
66) Die Wehrmachtberichte, Bd.1, S. 565 u. Bd. 3, S. 262.를 참고하라.
67) Heiber, Lagebesprechungen, S. 192.를 참고하라.
68) Iz otcëta o boevych dejstvijach 5-j Gvardejskoj Tankovoj armii za period s 7 ijula po 24 ijulia 1943 goda(194377일 부터 724일까지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보고), S. 3; Otcët o boevych dejstvijach 29 tankovogo korpusa za period s. 7.7. po 24.7.43 g.(194377일 부터 724일까지 제29전차군단의 전투보고) 포돌스크 소재 러시아연방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에서 복사한 사본으로 포츠담의 독일연방군사사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다. 5근위전차군의 전투보고서는 GD 사단도 SS 사단으로 잘못 구분하고 있다.
69) 6SS기갑척탄병연대 테오도르 아이케에서 하사로 복무했던 하인츠 베허(Heinz Becher)2010919일에 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