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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2일 목요일

Robert M. Citino著, The Wehrmacht's Last Stand: The German Campaigns of 1944~1945


Robert M. Citino著, The Wehrmacht Retreats : Fighting a Lost War, 1943


2017년에 출간된 로버트 시티노의 The Wehrmacht's Last Stand는 프로이센-독일의 전쟁방식의 탄생과 몰락을 추적하는 연작 The German Way of War :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Death of the Wehrmacht : The German Campaigns of 1942, 그리고 The Wehrmacht Retreats : Fighting a Lost War, 1943의 마지막 권입니다. 첫 번째 책 The German Way of War에서는 중부유럽을 지리적 배경으로 단기 결전에 초점을 맞춘 독일식 전쟁수행방식이 등장하고 1940년 프랑스 전역에서 그 정점을 찍는 과정을 서술했습니다. 두 번째 책인 Death of the Wehrmacht는 독일군이 소련과 북아프리카로 전장을 확대해 나가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공간의 확대와 단기전으로 격퇴할 수 없는 막대한 물량을 갖춘 적 앞에서 예봉이 꺾이는 과정을 추적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권인 The Wehrmacht Retreats에서는 동서 양면으로 조여오는 연합군의 압박에 전통적인 기동전으로 대응한 독일군의 전쟁 수행 방식이 무너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마지막권인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핵심적인 이야기를 기존의 저작에서 모두 풀어놓았기 때문에 신선함은 덜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티노는 독일군의 전쟁 수행방식의 핵심은 '가난한 국가의 가난한 군대'인 독일군이 승리하기 위해서 단기결전을 추구하는데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장의 공간적인 규모가 확대되고 군대의 규모가 커지면서 독일의 전쟁 수행 방식은 한계에 봉착했고 그 결과는 1942년 이후 계속되는 패배로 이어졌다고 지적합니다. 저자는 Death of the Wehrmacht와 The Wehrmacht Retreats에서 이것을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마지막권인 The Wehrmacht's Last Stand는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완전히 소모된 독일군이 철저하게 붕괴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독일군은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까지 전술-작전 단위에서 강력한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이것은 전략적인 실책을 만회할 수 없었습니다. 저자가 1944년 여름 동부전선의 전황을 설명하면서 "독일군이 국지적인 승리를 거두면 전선의 다른 곳에서 더 큰 구멍이 뚫리고 있었다"고 평가한 구절은 이 책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1943년 이후 전략적인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 독일군은 "수술대 위의 환자처럼" 무기력하게 동서 양면으로 큰 타격을 받으며 붕괴됩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독일식 전쟁 방식은 어떠한 해법도 제시하지 못 합니다. 저자는 1944년 초 만슈타인과 히틀러의 논쟁을 그 예로 듭니다. 만슈타인은 군사적(작전적)으로 타당한 대안을 제시하지만 그 대안에는 정치적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었고, 히틀러는 정치적으로 타당한 주장을 펼치지만 군사적으로는 재앙을 불러오는 주장만을 펼쳤을 뿐 입니다. 1940년 이후 전략적인 초점을 상실한 채 작전적인 승리를 맹신하며 불리한 환경을 조성한 결과 독일군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된 것 입니다.

저자는 1944년 여름 동서 양면으로 연합군의 대공세에 직면해 독일군 수뇌부가 내린 전략적 판단을 비판하면서 그 비합리성을 지적합니다. 1944년 여름 서부전선 방어를 다룬 부분에서는 히틀러 체제하에서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지휘체계의 파탄을 보여줍니다. 국방군 총사령부로 만들어진 OKW는 3군 통합작전 지휘 보다는 비대한 육군을 견제하기 위한 관료기구의 성격이 강했고, 예하의 3군은 이 체제하에서 통합작전 보다는 타군을 정치적으로 견제해 왔으며 이 모순이 결국 1944년 프랑스 방어의 실패로 나타난다는 것 입니다. 서부전구 사령관 룬트슈테트는 명목상 서부전선의 3군을 통합 지휘해야 하지만 실제로 공군과 해군은 서부전구 사령부 보다는 자군 사령부의 지휘통제를 받았으며, 육군을 지휘하는 롬멜도 룬트슈테트를 무시하고 히틀러에 직보하는 등의 난맥상을 보였다고 지적합니다. 지휘체계의 난맥은 기갑사단의 분산 배치라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는 원인이 됩니다. 전략적인 파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히틀러를 정점으로 한 최고수뇌부의 오판을 거듭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1944년 여름 소련군의 하계대공세 직전 히틀러가 내린 여러가지 잘못된 결정들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시티노는 히틀러를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계 공세 직전 철수를 주장하다가 히틀러의 압박에 물러선 뒤 히틀러의 전선 사수 명령만을 수동적으로 전달하는데 그친 무기력한 지휘관 부슈, 적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 없이 낙관적인 예측만으로 허황된 작전을 수립하는 요들, 연합군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며 이탈리아에서 무의미한 소모전을 전개한 케셀링 등 고위 장성들의 실책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물론 1944년 1월 만슈타인이 거둔 우마니 지구의 승리, 1944년 8월 모델이 바르샤바에서 거둔 승리 등 독일군의 작전적인 탁월함을 보여준 사례도 빠트리지 않고 언급합니다. 저자는 전쟁 말기 까지도 독일군은 기동과 화력을 조합한 작전에서 우수한 수준을 유지했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독일군의 모든 지휘관들이 군수보급과 정보라는 측면에서 형편없었음을 빠트리지 않고 지적합니다. 또한 이들은 정치, 대전략, 경제에 완전히 무지했다고 평가합니다. 즉 독일 장교단은 현대의 총력전을 수행하기에 부족한 집단이었다는 것입니다. 장교단이 전쟁 말기로 갈수록 히틀러에 충성하며 정치화된 점도 빠트리지 않고 비판합니다. 결론 부분에서는 패전이 임박하자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친 쇠르너의 초라한 말로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처럼 독일 장교단의 몰락을 보여주기에 알맞은 사례도 없을 것 입니다.

부대 명칭 오류 같은 소소한 문제가 있지만 상당히 재미있고 균형잡힌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맥락상 앞선 책들에 논리적으로 부속되어 있다 보니 뭔가 좀 애매한 느낌이 있습니다.


2016년 7월 27일 수요일

Robert Forczyk,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3-1945: Red Steamroller (Pen and Sword, 2016)

매우 흥미롭게 읽었던 책의 후속작이 나온다면 항상 기대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전작이 좋았다고 후속작도 좋으란 법은 없지요. Robert Forczyk의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3-1945: Red Steamroller (Pen and Sword, 2016)는 딱 그런 경우입니다. 전작인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1-1942: Schwerpunkt (Pen and Sword, 2014)가 매우 재미있어서 기대를 했으나 아마존 서평 부터 심상치 않더니 정말 실망스럽군요.

이 책의 단점은 이렇습니다.

1. 서술의 불균형.
- 제목은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3~1945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943년'에 대부분의 서술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제가 읽은 E-Book 기준으로 1943년도의 작전을 다루는 부분은 14쪽 부터 199쪽까지 인데, 1944년 1월 부터 8월까지의 작전을 서술하는데는 216~252쪽, 1944년 9월 부터 1945년 5월까지의 작전은 252~255쪽만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전쟁 말기의 작전을 불과 4쪽만 가지고 대충 서술하고 넘어가는데서는 거의 황당함을 느낄 지경입니다. 물론 저자가 1943년 이후의 작전은 중요성이 덜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으나 그럴 거라면 애시당초 책을 1943년의 기갑작전에 집중해서 썼어야 한다고 봅니다.

2. 매우 제한적인 1차사료 활용
- 이 책의 주석만으로 판단하면 1차사료 활용이 전작에 비해 격감했습니다. 대부분의 주석이 2차사료를 출처로 하고 있습니다. 전작의 경우도 1차사료 활용이 미국에 소장중인 독일 노획문서에 한정된다는 한계가 있긴 했습니다만 이 책은 독일 노획문서 조차도 그리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지 않아 보입니다.
 사료 활용면에서 이렇다 할 장점이 없으니 책의 내용도 매우 평이하고 결론도 평이합니다. '독일이 연료 소모가 큰 중전차 생산에 집중한 것은 패착이다' '무장친위대와 공군이 많은 자원을 소모해 육군 기갑전력의 증강을 방해했다' '히틀러가 조장한 비효율적 관료제가 독일 군수산업에 악영향을 끼쳤다'와 같은 주장은 합리적이지만 기존의 연구자들도 충분히 지적해 온 문제입니다. 기존의 주장만을 답습하는데 그친다면 이 책의 의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 지 회의적이군요.


 다만 1943년과 1944년 초의 기갑작전이 잘 정리된 점은 충분한 장점입니다. 저는 뭔가 좀 새로운 내용이 없을까 기대해서 실망했지만, 개설서라는 측면에서는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전작에 비해서는 확실히 실망스럽습니다.


2013년 1월 8일 화요일

어떤 명령문

1944년 7월 27일 오후에 제4군 사령부가 모길료프 요새지구(Fester Platz) 사령관 에르드만스도르프(Gottfried von Erdmannsdorf) 소장에게 내린 명령문입니다.



"총통각하의 명령에 따라 모길료프 요새지대를 포기하지 말고 최후까지 방어하라."

2차대전 말기에 히틀러에 의해 내려진 수많은 사수명령 중 하나이지요. 이런 짤막한 명령문에 수천, 수만명의 생사가 좌우되었습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자료입니다.

2012년 11월 13일 화요일

"제프" 디트리히와 미국 정신과의사의 면담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피고인들의 정신상담을 담당했던 미국 정신과의사 리언 골든슨Leon Goldensohn의 면담록을 읽는 중 입니다. 나치 독일의 굵직한 거물들이 나오니 재미있게 술술 잘 읽히는군요. 오늘은 “제프” 디트리히Josef Sepp Dietrich를 면담한 부분을 읽었는데 이것도 역시나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 하나를 발췌해 보지요. 1946년 2월 28일에 있었던 면담이라고 합니다.

골든슨 : 히틀러가 1940년 이전에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합니까?

디트리히 : 물론이오. 전쟁을 일으켰잖소. 전쟁에 진 패자는 한심해 보이는 법이지. 독일의 외교는 형편 없었소.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 부터 말이오.

골든슨 : 무슨 이야기입니까?

디트리히 : 지도를 한번 펼쳐봐요. 독일이 어디에 붙어 있습니까? 독일을 둘러싼 나라들을 한번 봅시다. 그리고 독일의 적국과 우방국을 찾아 보시오. 그러면 내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린지 알 게요.

Leon Goldensohn(Author), Robert Gellately(Editor), Nuremberg Interviews : An american psychiatrist’s conversations with the defendants and witnesses, (Vintage Books, 2004), p.283

양면전쟁을 두 번이나 경험한 군인다운 평가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재미있는 또 다른 요소는 여러 인물들의 주관적인 인물평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물평이니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게 많습니다. 골든슨은 디트리히에게 롬멜에 대해 물어봅니다. 디트리히는 롬멜에 대해 꽤 냉정한 평가를 내립니다.

디트리히 : 롬멜 원수는 나와 대략 비슷한 연배였소. 기갑전에 능통한 장군이라고 하기는 조금 그랬지.

골든슨 : 롬멜 원수가 유능한 기갑부대 지휘관이 아니란 겁니까?

디트리히 : 평범한 수준이었소.

(디트리히는 롬멜에 대해 매우 냉정했다.)

디트리히 : 병과를 바꾸는건 어려운 일이오. 롬멜 원수는 보병전에 능통한 장군이라고 해야겠지. 롬멜 원수는 침착하지 못한 성격이라서 모든 것을 한번에 해치우길 원했소. 그리고 나면 흥미를 잃어버렸지. 나는 노르망디에서 그의 부하였소. 롬멜 원수가 좋은 장군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지. 성공을 거두면 괜찮았지만 상황이 역전되면 침울해 졌소.

Leon Goldensohn(Author), Robert Gellately(Editor), ibid., p.280

디트리히는 면담에서 자신이 카톨릭 신도임을 강조하면서 나치즘에 경도된 인물은 아니었다고 자신을 변호합니다. 이러한 자기 변론은 전후 서독에 거주한 무장친위대 출신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논조라 꽤 재미있습니다.  몇년전 포스팅 했던 “기이한 도덕적 먹이사슬”에 인용한 글 처럼 나치당의 사조직이 아니라 독일군의 일원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2012년 8월 6일 월요일

Wolfram von Richthofen : Master of the German Air War

독일공군에 관한 책은 세기 힘들정도로 많지만 독일공군의 장군을 다룬 평전은 그다지 많지가 않습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저작으로는 악명높은 데이빗 어빙David Irving이 집필한 독일공군원수 밀히Erhard Milch의 전기인 The Rise and Fall of the Luftwaffe : The Life of Field Marshal Erhard Milch 정도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2008년에 출간된 제임스 코럼James S. Corum의 리히토펜 전기, Wolfram von Richthofen : Master of the German Air War는 독일공군 장성을 주제로 삼은 보기 드문 저작입니다. 제임스 코럼은 독일공군의 창설에서 프랑스전역 까지를 다룬 The Luftwaffe: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의 저자로서 독일공군 연구의 권위자입니다. 제임스 코럼은 기존의 저작에서도 리히토펜의 역할에 대해 많은 주의를 기울였는데 결국에는 리히토펜을 독립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확대했습니다. 그 결과물인 이 전기는 제 기준에서 본다면 상당히 좋은 저작이라고 생각됩니다. 보기 드문 독일공군 장성에 대한 전기일 뿐만아니라 상당히 균형이 잡혀있으며 독일공군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는 저작입니다.

먼저 리히토펜에 대한 군사적인 측면의 서술을 살펴보지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코럼은 기존의 연구에서 독일공군 내에서 리히토펜의 역할에 대해 다룬바있습니다. 군인으로서 리히토펜은 독일공군의 교리와 조직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개척자이자 유능한 야전지휘관으로 요약됩니다. 스페인내전에서 보여준 탁월한 지휘능력과 현대적인 공지협동작전의 기틀을 확립한 것 만으로도 리히토펜의 군사적 능력은 높게 평가받을 만 합니다. 저자는 2차대전 초기 리히토펜이 승승장구하면서 항공사단장에서 항공군단장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공군원수로 진급하여 항공군을 지휘하게 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합니다. 또한 스페인내전과 2차대전 기간 중 보여준 탁월한 군사외교가의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리히토펜은 스페인내전 당시 부터 탁월한 정치감각을 보여줬으며 2차대전 발발 뒤에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서 군사외교를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동맹국과의 관계가 원할하지 못했던 독일에서 리히토펜과 같은 인물은 독특하다 하겠습니다.
물론 리히토펜의 성공을 단순히 그의 능력만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탁월한 군사사가 답게 리히토펜이 참여한 각 전역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농업국가로서 근대적인 공군을 건설할 능력이 부족했던 폴란드, 규모는 컸으나 근대적인 항공전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던 프랑스와 소련 공군에 대한 서술은 독일공군이 어떻게 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것을 도와줍니다.
리히토펜이 살았던 시대와 그가 몸담았던 조직의 구조적인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독일이 소모전에 말려들어가면서 서서히 패배로 치닫는 과정에서는 독일군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비판합니다. 영국본토항공전에서 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정보력의 부족, 그리고 독소전쟁으로 이어지는 거시적인 전략의 결여로 인한 방향성 상실은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특히 독일육군과 마찬가지로 작전 단위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던 독일공군이 잘못된 전략으로 소모되는 과정은 이 책의 후반부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독소전쟁에서 리히토펜의 제8항공군단이 운용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독일공군이 능력이상의 임무를 담당하면서 서서히 붕괴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독일공군이 소모전으로 붕괴되는 모습은 리히토펜이 마지막으로 지휘한 지중해전역에서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리히토펜이 1940년 공군소장의 계급으로 항공사단을 지휘했을 때 1943년에 공군원수의 계급으로 항공군을 지휘했을 때 보다 더 많은 항공기를 지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전략의 결여로 인한 소모전의 결과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또한 이 저작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균형이 잘 잡혀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데이빗 어빙의 밀히 전기가 독일측의 시각을 강하게 반영해 우호적인 논조로 씌여졌다면 코럼의 리히토펜 전기는 서술대상의 과오에 대해서는 엄격한 태도를 유지합니다. 스페인내전 당시 게르니카 폭격에 대한 서술에서 이 점이 두드러집니다. 코럼은 케르니카 폭격은 민간인을 목표로 한 ‘테러폭격’이 아니었으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민간인 피해도 과장된 것임을 지적하지만 동시에 리히토펜은 군사적인 목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군인으로 스페인 민간인의 희생에는 무관심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아마 어빙과 같이 독일측에 우호적인 저자가 같은 내용을 서술했다면 게르니카 폭격이 민간인에 대한 테러공격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면서 리히토펜에 면죄부를 주려 했을 것 입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히틀러와의 관계도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저자는 리히토펜이 다른 귀족 출신들과 마찬가지로 바이마르 공화국체제 보다는 나치즘에 우호적이었으며 또한 히틀러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음을 지적합니다. 코럼은 1944년 7월 20일의 쿠데타에 보여준 태도를 통해 완고한 보수주의자로서의 리히토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리히토펜이 히틀러를 지지한 동시에 히틀러의 지지를 받는 인물로서 나치체제의 그림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비단 히틀러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프로이센 군사귀족으로서의 보수성에 대한 서술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리히토펜의 일기를 통해 드러나는 타국에 대한 우월감은 그런 사례의 하나입니다. 저자는 리히토펜의 한계를 지적함으로서 리히토펜을 입체적인 인물로 되살려내고 있습니다.

물론 약간의 오류들이 있어 다소 아쉽기는 합니다. 특히 군사용어나 인명의 오류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점 입니다. 코럼은 독일 제6군 사령관 파울루스를 계속해서 ‘폰 파울루스’라고 적고 있는데 코럼 같은 군사사가가 이런 실수를 한다는 것이 다소 의아하기까지 합니다. 마찬가지로 독일육군이나 소련군의 부대명칭을 표기는 데 있어서도 사소한 오류가 몇개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몇가지 오류에도 불구하고 리히토펜 전기는 매우 훌륭한 저작으로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일독할 가치가 충분한 책 입니다.

2012년 3월 6일 화요일

스타하노프 운동의 성과?

스타하노프 운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러시아 인들을 훌륭한 노동자로 만들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러시아 노동자들의 근면함을 자본주의자들도 인정했으니 말입니다.

인력문제는 우리의 큰 걱정거리이고 매우 심각한 문제요. 독일인은 군인으로서 최고이며, 창조적인 일과 조직적인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최고라고 할 수 있소. 이탈리아인들은 좋은 노동자이지만 러시아인들이 이탈리아인들 보다 두 배에서 세 배는 더 일을 잘 하고 있소. 러시아인들은 우리의 손아귀에 있는 최고의 노동력이라 할 수 있소. 러시아인 노동자들을 독일로 데려올수록 우리에게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오.

1943년 3월 11일, 아돌프 히틀러가 자포로제에 위치한 남부집단군 사령부에서 열린 작전회의에서 주요 지휘관들에게. Eberhard Schwarz, Die Stabilisierung der Ostfront nach Stalingrad, (Munster-Schmodt Verlag, 1985) pp.259~260

그래서 러시아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국가에 가서도 마구 착취당했습니다. 음?

2012년 2월 20일 월요일

[번역글]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 및 반격작전 : 1943~1945

날림번역 하나 나갑니다.

2000년대에 들어와 2차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전투에 대한 주목할 만한 작전사 연구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국내에 소개되지 못하는게 안타까울 정도이지요. 이러한 경향은 사실 2차대전 당시 동부전선에 대한 연구 자체가 여전히 미흡하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독일에서는 미국으로 부터 반환된 2차대전기 문서들을 활용한 주목할 만한 연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러한 연구들은 자료의 제약으로 소련군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부족한 점이 많지만 현재 시점에서 보더라도 여전히 참고할 만한 훌륭한 저작이 많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새롭게 공개된 러시아 자료들을 활용한 중요한 연구들이 영어권 국가들에서 대거 출현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기 동부전선은 여전히 연구해야 할 대상이 무궁무진합니다. 그런데 약간 재미있는 점은 독일의 연구들도 영어권의 대중들에게 널리 소개되지 못한 상태에서 데이빗 글랜츠와 같이 러시아 자료를 중심으로 한 연구가 늘어나면서 기존의 시각들이 독일의 입장에 치우쳐져 있다고 비판받는 것 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독일의 시각을 담은 연구들도 대중적으로 널리 소개된 것은 아닙니다. 대중적으로 큰 반응을 얻은 구데리안, 만슈타인, 멜렌틴 등의 회고록이 있긴 하지만 이것들은 독일측 시각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지요.

오늘 소개할 그레고리 리트케Gregory Liedtke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1호(2008)에 기고한 논문, “FUROR TEUTONICUS: German offensives and counter-attack on the eastern front, august 1943 to march 1945”는 1990년대 이후 러시아의 시각이 반영된 연구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독일 시각을 반영한 균형잡힌 작전사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필자가 제기하는 주장에 비해서 논증이 약간 부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1차사료 이용이 제한적이고 2차사료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문제점이 보이는군요. 하지만 개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그 점은 감안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데이빗 글랜츠와 같은 유명한 영어권 연구자들이 러시아 자료에 무게를 두다 보니 정작 독일측의 움직임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경청할 만한 주장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을 반영한 개론서들이 역시 비슷한 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 또한 리트케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라고 생각이 됩니다. 독소전쟁 후반기 독일군의 반격작전을 단지 거대한 물결에 휩쓸리는 와중에 별 의미없이 허우적 댄 것으로 인식하는 것 또한 일면적인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2차대전 후반기 동부전선의 주요 작전에 대한 간단한 해설로도 괜찮은 논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소개를 해봅니다.


튜튼인들의 격노 :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 및 반격작전 1943-1945
그레고리 리트케

독소전쟁에 관한 대중적인 서술들은 대부분 치타델레Zitadelle 작전(1943년 7월 5일~17일)이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작전의 종막을 알리는 상징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앨버트 시튼Albert Seaton과 같은 역사가들은 독일군이 이 공세 기간중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다는 점을 들어 “치타델레 작전 이후 추축군은 동부전선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다시는 이것을 되찾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렸다.1) 마찬가지로 존 에릭슨은 그의 유명한 저작에서 1943년 7월 이후 “러시아에서 독일군의 공세와 승리는 더 이상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서술했다.2) 얼 짐케와 마그나 바우어는 이 전투의 결과 “소련에게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주게 되었다”는 점을 일치하여 강조하였다.3) 주도적인 연구자들 간에 이렇게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보니 학계내에서는 일반적으로 독일 동부군Ostheer이 쿠르스크 전투로 입은 손실 때문에 공세능력이 약화되었고 돌이킬 수 없이 방어를 취해야만 했다는 인식이 퍼져있다. 독일 동부군은 공세를 효과적으로 맞받아 칠 수 있는 전력이 없어서 1945년 5월에 항복하게 될 때 까지 소련군에 의해 가차없이 퇴각을 강요당했다는 것이다.4)

쿠르스크를 둘러싼 전투가 독일의 절대적인 전략적 상황에 대해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작전이라는 수준에서 본다면 독일 육군은 전쟁이 끝나는 순간 까지도 매우 공세적이며 위험한 적수로 남아 있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널리 퍼진 인식은 치타델레 작전 종결 부터 독일이 항복할 때 까지 감행한 여러 차례의 공세와 대규모 반격작전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이 연구는 이러한 공세들은 독일 동부군이 독소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에도 공세능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뜻한다는 것을 설명하려 한다. 이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1943년 7월 이후 전개된, 독일군의 여러 공세와 반격에 대해 시간순서에 따른 검토와 개략적인 설명을 하고자 한다. 특히 작전에 투입된 병력의 규모와 전투의 치열함, 그리고 가능한 한도내에서 이러한 작전이 소련군과 소련군 수뇌부에 끼친 영향에 특히 주목하고자 한다.

독소전쟁 후반기에 독일군이 실시한 공세와 반격에 대한 검토는 쿠르스크 전투가 종결된 이후에도 독일군이 오랫동안 강력한 공세 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밝히는 것 외에도 몇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이런 작전들은 때로는 성공을, 때로는 실패를 하면서 작전 단위에서 전쟁에 영향을 끼치는 한편, 소련이 갈수록 심각한 인력 부족에 시달려 가던 시점에서 항상 소련군에게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혔다. 즉, 독일군의 공세 및 반격 작전은 전략 및 작전 단위에서 차후 소련의 계획 수립에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붉은군대 자체의 교리 및 조직구성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5) 마지막으로, 독소전쟁을 주제로 한 가장 최신 저작들 조차 대부분은 이러한 작전을 무시해 왔다.6)  수많은 개별적인 공세와 전투, 교전은 (독소전쟁이라는) 커다란 모자이크를 구성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시적인 연구는 독소전쟁을 학문적으로 이해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치타델레 작전의 실패의 바로 직후에, 그리고 그 패배의 여파로 소련군은 일련의 공세를 펼쳤다. 이러한 공세 중 하나인 제4차 하리코프 전투 기간 중이었던 1943년 8월 3일, 독일군의 첫 번째 대규모 반격을 개시했다.7) 제5근위전차군과 제1전차군이 선두에 선 소련군의 공격은 순식간에 제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Armee Abteilung Kempf의 지경선을 돌파해 들어왔다. 수일 만에 두 야전군의 사이에는 35마일에 달하는 간극이 벌어졌으며 이것은 러시아에서 독일군 전선의 남부 전체를 무너뜨릴 위협이 되었다. 남부집단군Heeresgruppe Süd의 사령관 에리히 만슈타인 원수가 훗날 그의 회고록에서 기록한 바에 따르면 “적은 폴타바를 거쳐 드네프르 강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할 수 있을 것 처럼 보였다.”8)만슈타인은 히틀러가 도네츠 지역의 공업 및 광업 자원의 중요성 때문에 전선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다수의 기갑사단을 집결시키는 것으로 대응했다.9) 이들 기갑사단은 7월에 전개된 격렬한 전투로 소모된 상황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기갑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표1에서 보여지는 것 처럼 상황을 회복하기 위해 투입된 5개 기갑사단은 대략 289대의 가동 가능한 전차와 돌격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이 기갑사단들은 가동상태가 아닌 기갑차량 384대도 보유하고 있었다. 독일군 정비인력의 효율성과 이러한 차량 대부분이 (2주 이하의) 단기간의 수리를 요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런 파손된 차량들은 기갑사단이 기갑전력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자산이었다.10) 8월 11일, 총 673대의 기갑차량을 보유한 이 기갑사단들은 소련군의 선봉 기갑부대들에 대해 일련의 반격을 시작해서 8월 20일에는 돌파구를 메울 수 있었다.

표1. 하리코프 지구에 투입된 독일군의 증원 기갑전력 규모11)
부대12)
전차
(가동)
전차
(수리중)13)
돌격포
(가동)
돌격포
(수리중)
가동
총계
수리중
총계
3Pz
34
54
-
-
34
54
3SS. PGD
58
110
18
16
76
126
2SS. PGD
56
126
16
16
72
142
PGD GD14)
53
46
21
14
74
60
5SS. PGD15)
33
?
?
?
33
?
총계
234
338
55
46
289
384


이 과정에서 독일 기갑사단들은 소련군의 서진을 저지하고 독일군 전선의 연결을 회복했다.
정리하면, 이 반격은 러시아 남부에서 독일군의 전선이 완전히 붕괴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저지했다. 실제로, 독일군이 드네프르 강 서안으로 퇴각하도록 하는데에는 이로 부터 한 달 이상의 격렬한 전투가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이 지구에 투입된 소련의 5개 전선군은 701,474명의 사상자와 2,026대의 전차, 1,730문의 야포와 박격포, 596대의 항공기를 잃어야 했다.16) 직접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이 반격을 통해 소련군의 공세 선봉에 선 두개의 전차군을 철저하게 격파했다는 점이다. 제1전차군과 제5근위전차군은 처음에 각각 전차와 자주포 542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제 1전차군은 8월 18일에 120대로 줄어들었고 제5근위전차군은 8월 24일에 겨우 111대의 가동 가능한 전차만을 보유하고 있었다.17) 제5근위전차군은 이후 드네프르 강을 향한 진격에도 계속해서 투입되었으나 상태가 심하게 약화되어 후퇴하는 독일군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19) 제1전차군의 상황은 더 나빠서, 이 부대는 총사령부(STAVKA) 예비로 돌려져 대규모의 재편성에 들어갔다. 제1전차군은 11월 중순 키예프 지구에 투입되기 전 까지는 전투에 다시 참가하지 못했다.20)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하리코프는 8월 23일 소련군에 탈환되었으며 독일군의 반격은 격렬하게 계속되었지만 원래의 전선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반격은 커다란 재앙을 저지하였고, 붉은군대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소련군의 대규모 기갑부대들이 작전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지만, 동부전선 전체에 걸쳐 악화되기 시작한 독일의 전략적 상황을 바로잡는데는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 독일 동부군은 기나긴 전선을 따라 여러 차례의 소련군 공세를 막아내는 동안 한계점에 다다르고 말았다.

9월 15일, 히틀러는 드네프르 강 서안으로 퇴각하여 8월 중순 이래 대략 드네프르 강을 따라 건설되고 있었던 요새선, 즉 동부방벽Ostwall 방어선을 따라 부대를 배치하게 해 달라는 휘하 야전 지휘관들의 요청을 마지못해 승락했다.21) 히틀러는 끝내 퇴각에 동의했지만, 독일이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방어선이자 크리보이 로그와 니코폴의 중요한 철, 니켈, 그리고 망간 광산을 확보할 수 있는 선인 동부방벽 방어선을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수할 것을 요구했다.22) 또한 히틀러는 동부 방벽의 자연적인 조건과 인력으로 구축한 진지가 서부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를 방어하는 동시에 독일 동부군이 전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 방어선에 의지하여 강력하고 전투로 단련된 역전의 독일 동부군은 붉은 군대의 서진을 계속해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23)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군은 일련의 반격을 감행했으며 이 중 첫번째의 반격은 체르노빌Чернобыл 지구에서 드네프르을 도하해 교두보를 만든 소련 제13군과 제60군을 대상으로 감행되었다. 역사가 데이빗 글랜츠가 기록한 것 처럼, 이 교두보들이 하나로 통합되게 된다면 “독일 중부집단군Heeresgruppe Mitte과 남부집단군의 중요한 연결점을 노리는 정면 40km, 종심 40km의 비수”가 될 것이었다.24) 독일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은 이 교두보가 동부방벽 방어선의 상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합동으로 대규모의 반격을 준비했다. 10월 3일 부터 4개 기갑사단으로 구성된 제56기갑군단이 소련군 교두보의 북부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이와 함께 2개 기갑사단과 3개 보병사단으로 구성된 59군단이 교두보 남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25) 10월 14일에 전투가 마무리 상태로 접어들 무렵, 반격을 통해 체르노빌을 재점령 했으며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고, 소련군의 교두보를 밀어내어 여러개의 작은 교두보로 쪼개 놓았다.26) 그 결과 이 지구는 그 다음달 내내 평온하고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드네프르 강의 남쪽에서는 10월 15일에 소련의 스텝 전선군Степной фронт이 미슈린 로그Мишурин Рог의 교두보에서 공세에 나섰다. 며칠만에 독일 제8군과 제1기갑군을 연결하는 지점의 방어선이 붕괴되었고 이를 따라 제5근위전차군이 크리보이 로그를 향해 남진하였다. 이러한 소련군의 진격은 히틀러가 하달한 경제적 목표와 전체 동부방벽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제1기갑군의 우익을 드네프르강 만곡부에 고립되어 격파될 수 있는 위협을 가하는 것 이었다.
독일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여러개의 사단이 서부에서 도착하고 있는 중이었다. 10월 말, 만슈타인은 새로이 도착한 제14, 24기갑사단을 제3SS 기갑사단과 함께 제40기갑군단에 편입시켜 돌파해온 소련군의 서쪽 측면을 공격하고 크리보이 로그 일대를 확보하도록 명령했다. 제40기갑군단은 새롭게 도착한 3개 보병사단의 선견대와 함께 10월 28일 공격을 감행했다. 독일군은 최소한 254대에 달하는 전차 및 돌격포로 이루어진 기갑전력으로 소련군의 측면을 분쇄해 나갔다.27) 독일공군도 이 지구에 하루 1,200회 출격해 이 반격을 지원했다.28) 이 공세로 인하여 소련군의 선봉에 선 약체화된 전차군단과 기계화군단들은 인굴레츠Ингулец강 까지 후퇴했으며 크리보이 로그 북쪽 20km 지점 까지 밀려나고 말았다.29) 만슈타인에 따르면 소련군은 “심각한 방해”를 받았으며 11월 3일 반격이 종결될 때 까지 10,000명의 전사자와 5,000명의 포로, 그리고 350대의 전차를 잃었다.30)

비록 소련군은 드네프르강 서안에 확대된 교두보를 계속 확보할 수는 있었으나 독일군 전선의 이 지역에 들이닥친 위협은 감소되었다. 이로 인해 만슈타인은 독일군이 주도하는 두 가지의 공세 계획을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10월 28일에 소련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4-й Украинский фронт이 독일 제6군이 방어하고 있던 드네프르강 만곡부와 아조프해 사이의 전선을 돌파해 들어왔다. 11월 초 이 지구의 독일군은 드네프르 강 까지 밀려났으며, 소련군의 진격으로 크림 반도의 제17군은 고립될 위험에 처했다. 만슈타인은 육군 총사령부OKH에 추가로 도착할 예정인 3개 기갑사단을 활용하여, 40기갑군단 소속의 제14, 24기갑사단과 함께 진격해오는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북익을 타격하는 작전을 제안했다.31) 또한 만슈타인은 대안으로서, 이들 기갑사단을 크리보이 로그 북쪽에 있는 확대된 소련군 교두보를 분쇄하는데 투입하는 방안도 제시했다.32) 여기에 투입될 5개 기갑사단의 기갑전력은 대략 783대의 전차와 돌격포였기 때문에, 이 두 공세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실행되었다면, 아마도 붉은 군대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겨줄 수 있었을 것이다.33) 이러한 승리는 독일군이 이 지역의 방어태세를 안정시키고 소련군이 새로운 공세를 재개하기 위해서 상당한 기간 동안 재정비를 하도록 만들어서 독일 남부집단군이 담당하고 있던 남부지역의 전선에서 독일의 전략적 상황을 크게 호전시켰을 것이다. 소련군의 다음 공세가 오기 까지의 시간에 독일군은 부대들을 휴식시키고 재편성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공세계획들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 계획 모두 기획 단계 이상으로 진전되지 못했다. 11월 3일, 니콜라이 바투틴이 지휘하는 소련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1-й Украинский фронт이 키예프 북부의 교두보에서 공세를 개시해 11월 6일에는 키예프를 점령했다. 제4기갑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1주일만에 소련 기갑부대는 남쪽으로 40마일, 서쪽으로 90마일 진격했으며 이 과정에서 교통의 요지인 파스토프Фастов, 코로스텐Коростень, 그리고 지토미르Житомир를  점령했다.34) 소련군 총사령부는 이 성과를 활용하여, 4개의 야전군과 여러개의 전차군단 및 기계화군단을 이동시켰다.35) 남부집단군의 북익 전체가 완전히 붕괴될 지경에 처했으며 그러한 재앙은 남부집단군이 드네프르강을 따라 형성한 방어선을 버리고 남서쪽으로 퇴각하도록 만들 것이었다. 즉, 이렇게 된다면 러시아의 독일군 전선에서 중부와 남부 사이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게 되는 것 이었다.
이러한 사태를 저지하기 위해서 독일군은 쿠르스크 전투 이래 최대 규모의 기갑전력을 집결시켰다. 여기에는 만슈타인이 드네프르강 만곡부에 투입하려 한 새로이 도착한 3개 기갑사단은 물론 다른 지역에서 차출해온 2개 기갑사단과 1개 기갑척탄병사단, 2개 보병사단이 포함되었다.36) 표2에 나타난 것 처럼, 11월 20일에 이 전력이 추가됨으로써 제4기갑군의 기갑전력은 총 938대의 전차 및 돌격포로 증강되었으며 이 중 360대가 가동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독일 야전지휘관들은 논의를 한 끝에 지토미르와 코로스텐 사이에 존재하는 소련군의 취약한 측면을 찿아내는데 주력하기로 했다. 독일 기갑사단들은 소련군의 방어선에 정면으로 부딛히는 대신, 기동을 통해서 적을 포위하고 각개 격파하고자 했다.37) 연속된 전선을 다시 형성하고 소련군의 대부분을 섬멸하거나 최소한 심각한 타격만 가할 수 있더라도 소련군을 키예프 교두보에서 몰아내는 것을 기대할 수 있었다.38)

표2. 키예프 지구 반격에 투입된 독일 기갑전력(1943년 11월 20일)39)
부대
전차
(보유)
전차
(가동)
돌격포
(보유)
돌격포
(가동)
보유
총계
가동
총계
1.SS PzD
218
58
50
35
268
93
2.SS PzD
144
41
23
8
167
49
1.PzD
196
122
-
-
196
122
7.PzD
33
17
-
-
33
17
8.PzD
78
8
-
-
78
8
19.PzD
30
10
-
-
30
10
25.PzD
75
26
10
4
85
30
독립부대
38
16
43
15
81
31
총 계
812
298
126
62
938
360


11월 12일, 도착한 독일 기갑사단들의 선견대가 집결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소련 제3전차군의 선봉 전차여단을 격파하는 것으로 키예프 지구에 대한 독일군의 작전이 시작되었다.40) 3일 뒤 제48기갑군단 소속의 1기갑사단과 1SS기갑사단이 선봉에 서고 독일 공군의 충분한 지원을 받는 주공이 시작되었다.41) 소련군의 전선은 독일 기갑사단들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동요했으며 11월 19일에는 지토미르를 다시 빼앗기고 24일에는 코로스텐이 그 뒤를 이었다. 소련군 총사령부는 독일군의 성공에 불안을 느껴 키예프 지구로 서둘러 병력을 증원했다.42) 독일 기갑사단들은 코로스텐을 재점령한 뒤 진창과 매우 나쁜 기상상태로 인해 기동이 불가능해 져서 잠시 작전을 중지하였고, 12월 6일에 제48기갑군단이 기동할 수 있을 정도로 지표가 얼어붙은 뒤에야 공격을 재개했다.43) 그러나 이 무렵 작전에 투입된 독일군 부대들은 심각한 인명 손실을 입었고 소련군은 증원병력이 계속해서 도착하면서 점차 완강하게 저항해갔다.44) 그 결과 독일군이 소련군의 교두보를 완전히 제거함으로서 얻을 수 있었을 기회는 사라져 버렸다. 독일군의 반격은 12월 22일 최종적으로 종결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추가로 소련군 부대들을 격파했다.
결국 독일군의 반격은 소련군의 교두보를 완전히 분쇄하지는 못 했지만 소련군이 공세 초기에 탈환한 지역의 대략 절반 가량을 반격 과정에서 재점령했다.45) 코로스텐과 지토미르를 재점령 함으로써 러시아의 독일군 전선의 중부지역과 남부지역의 직접적인 육상 교통로가 회복되었다. 이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소련 제38군 전체와 제1근위군 및 제60군의 일부 부대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만슈타인에 따르면 소련군의 피해는 전사자 20,000명과 포로 5,000명에 달했고 전차 600대와 각종 화포 300문, 대전차포 1,200문이 파괴되거나 노획당했다.46) 키예프 방어작전(1943년 11월 13일-12월 22일)에 대한 러시아 측의 공식적인 추산에서 인명피해를 87,473명, 그리고 이중 26,443명을 전사 및 실종으로 서술하고 있은 점을 감안하면 만슈타인이 제시한 수치는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47)

12월 전반에 걸쳐 키예프 지구에서 전투가 전개되는 동안 독일군은 전선의 다른 곳에서도 별도의 반격을 감행했다. 소련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2-й Украинский фронт(기존의 스텝 전선군)은 크리보이 로그에서 패배한 다음에는 드네프르 강 일대에 걸쳐 서쪽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12월 초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중요한 교통의 요지인 키로포그라드Кировоград의 동북쪽과 동남쪽의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해 들어갔다. 키로포그라드 동남쪽에서 돌파한 소련군은 제13기갑사단과 갓 도착한 제2강하엽병사단이 상대했다. 이 두 독일군 사단은 이틀(12월 19~20일)에 걸친 격전 끝에 소련 제1기계화군단과 여러개의 소총병 사단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노브고로드카를 다시 점령하고 독일 제8군과 제1기갑군을 연결하는 전선의 안정을 회복했다.48) 12월 26일, 세개의 기갑사단이 키로포그라드 동북쪽에 뚫린 돌파구를 막기 위해 반격을 개시했다. 약화된 소련군은 이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이 과정에서 제10근위기계화군단과 제252소총병사단의 대부분이 포위당했다. 독일군은 12월 29일까지 돌파구를 막고 포위된 소련군을 섬멸했다.49) 이 전투로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 소속 기동부대들의 남은 공격 역량이 소모되어 버렸으며,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은 공세작전을 잠정적으로 연기해야만 했다.50)

이러한 전투들이 진행되는 동안 독일 중부집단군도 동부전선의 중부지역에서 중요한 반격 작전을 실시했다. “니콜라우스Nikolaus”라는 암호명의 작전에서 공격 목표는 11월 초에 만들어진 독일 제2군과 제9군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메우는 것 이었다. 소련 벨로루시 전선군Белорусский фронт의 공격은 이 간극을 확대하거나 돌파구를 뚫는데 실패했지만 소련군이 광대한 프리펫 습지대에 독일 제2군을 고립시키고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인 보브루이스크Бобруйск를 점령할 가능성이 있었고 이것은 오랫 동안 방치해 둘 수는 없는 위협이었다.51) 12월 20일 부터 독일 제41기갑군단이 2개 보병사단과 새로 도착한 제16기갑사단을 동원하여 이 간극의 북쪽 측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52) 21일에는 독일 제2군이 제4기갑사단으로 간극의 남측면을 공격하였고 신속하게 북쪽에서 진격해온 부대들과 연결하는데 성공했다.53) 공격해온 독일군 부대들은 소련군의 소총병사단 3개와 소총병여단 1개를 포위했다. 소련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간극은 봉쇄된 채로 유지되었고 포위된 부대들은 12월 27일까지 분쇄되거나 와해되어 소련군 전선으로 탈출할 수 밖에 없었다.54) 니콜라우스 작전은 불과 1주일만에 종료되었지만  두 야전군의 연결을 다시 굳건히 하였고 이로서 1944년 중반까지 소련은 남부 벨로루시로 진격하려는 시도를 중단하여야만 했다.

1943년 말, 독일군이 실시한 반격작전들로 인해 소련이 군사작전을 통해 더 큰 작전적, 전략적 성과를 얻는 것이 저지되긴 했으나 소련군 총사령부는 독일군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으려 했다. 키예프 지구에서 독일군의 반격이 결국 종결되자, 바투틴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12월 24일 새로운 공세를 재개했다. 공세 첫날이 끝나갈 무렵, 소련 제1근위전차군과 제3근위전차군은 3개의 야전군의 지원을 받아 독일군 후방으로 20마일 가까이 밀고들어갔다.55) 다음날 측익에 배치되어 있던 다른 소련 야전군들도 공격에 가세했으며 키예프 교두보를 봉쇄하고 있던 독일군 전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12월 29일에는 코로스텐이 소련군에게 다시 탈환되었으며 31일에는 지토미르가 그 뒤를 이었다. 1944년 1월 첫째 주말까지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150마일의 전선에 걸쳐 50마일을 진격했다.56) 비록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과 지엽적인 역습으로 소련군 기갑부대가 큰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제4기갑군의 전선은 고립된 부대들 단위로 무너져버렸다.57) 소련군은 고립된 독일군 부대들 사이로 사실상 남서쪽, 그리고 남부집단군의 깊숙한 후방 까지 활짝 열린 것이나 다름없는 길을 확보했다. 독일군의 전 선선에 걸쳐 심각한 위협이었기 때문에 만슈타인은 훗날 회고록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그 이후의 몇 주일이 동부전선의 독일군 남익이 고립되어 남서방면으로 퇴각하게 될 것이나 말 것이냐를 결정할 것 이었다.”
만슈타인과 독일 육군총사령부는 이런 사태가 초래되는 것을 우려하여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강력한 수단을 취하였다. 제1기갑군 사령부가 2개 기갑사단과 함께 드네프르 만곡부에서 이동해와 돌파구 동쪽의 모든 독일군 병력에 대한 통제권을 이양받았다. 돌파구의 반대편에는 제4기갑군이 제48기갑군단(여전히 제1기갑사단과 제1SS기갑사단을 거느리고 있던)을 집결시켰고 육군 총사령부가 동부전선의 다른 지구에서 차출한 1개 기갑사단과 5개 보병사단도 증원되었다. 1월 말 까지 총 5개 기갑사단과 5개 보병사단이 암호명 “바투틴Vatutin”이라는 반격 작전을 위해 집결했다.59)
바투틴 작전을 위해 동원된 기갑전력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그 대략적인 규모는 표3에 나타냈다. 자료를 확인할 수 없었던 제17기갑사단은 표에서 제외했으므로, 이 수치는 최소한의 추정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베케Bäke” 전투단에 배속된 티거 전차들도 제외했다.60) 또한 16기갑사단이 보유한 기갑차량의 대부분이 가동가능 상태에 있었으므로 가동가능한 전차와 돌격포의 총 수량은 상당히 큰 수준이었을 것이다.61)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독일군이 반격을 위해 대략 400대 정도의 기갑차량을 집결시켰으며 이 중에서 거의 300대 정도는 가동가능한 상태였을 것으로 추정해도 괜찮을 것이다.

표3. 바투틴 작전에 투입된 독일 기갑전력의 추정치
부대
날자
총 보유대수
가동대수
1.SS. PzD62)
1944. 1. 21
116
77
1.PzD63)
1944. 1. 1
60
42
6.PzD64)
1944. 1. 2
?
29
16.PzD65)
1944. 1. 10
196
?
PzKG Bäke66)
1944. 1. 23
?
37
총계
-
372
185


1월 24일, 바투틴 작전이 제18포병사단 소속 야포들의 지원을 받으며 시작되었다.67) 독일군 1개 군단이 돌파구를 확대하려던 소련군을 견제하는 동안 또 다른 군단들이 돌파한 소련군의 측면을 타격했다. 소련군은 이때 까지의 전투로 보급선이 늘어난데다 전투력도 약화되었기 때문에, 소련 제5근위군과 제40군은 20마일 가까이 밀려났으며 제1근위전차군과 제38군의 일부 부대가 포위되어 섬멸당했다.68) 소련군의 정확한 인명피해는 확인할 수 없으나, 만슈타인은 최소한 5,000명을 사살하고 5,5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전차 700대, 야포 200문, 대전차포 500문을 격파하거나 노획했다고 주장했다.69) 소련군의 실제 피해가 어느 정도였건 간에, 1월 29일에 독일군의 반격이 종결될 무렵에는 독일군이 연속적인 전선을 다시 형성했으며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공세 역량은 일시적으로 고갈되었다.70)

이후 수개월 동안 독일 남부집단군은 집단군의 존속을 걸고 필사적으로 싸워나가면서 몇 차례의 반격을 실시했다. 2월 초에는 8개 기갑사단이 2개 군단으로 편성되어 코르순 일대에 포위된 독일 제8군의 일부 병력을 구출하는 데 투입되었다. 비록 구출을 위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포위된 부대들이 자력으로 포위망에서 벗어나야 했지만, 만슈타인은 이 과정에서 소련군 2,000명을 포로로 잡았고 전차 700대, 대전차포 600문과 야포 150문을 파괴하거나 노획했다고 주장했다.71) 3월에는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감행한 공세로 독일군의 전선이 붕괴되고 제1기갑군 전체가 포위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2SS기갑군단과 여기에 배속된 2개 기갑사단이 황급히 프랑스로 부터 이동해왔다. 무장친위대의 두 기갑사단(204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장비)은 새롭게 도착한 2개 보병사단과 함께 4월 4일 구원공격을 개시하였고 이틀만에 제1기갑군과 접촉을 할 수 있었다.72)

남쪽에서는 독일 제6군과 제8군이 루마니아 북부로 퇴각하여 이곳에서 4월과 5월 초에 걸쳐 일련의 격전을 치른 끝에 소련군의 진격을 막아내었다.73) 그러나 5월 말, 독일측은 소련이 타르굴-푸르모스Targul-Frumos와 야시Iasi 북쪽에서 공세를 준비하기 위해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는 것을 포착하였다. 루마니아는 독일의 유일한 대규모 원유 공급지였기 때문에 이러한 공세는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에 직접적으로 전략적 위협을 가하는 것 이었다. 독일군은 약체화된 부대들로는 소련군이 대규모 공세를 다시 한번 감행할 경우 견뎌낼 수 없음을 우려하였으나 소련군 총사령부가 5월 26일 부로 이미 공세작전을 무기한 연기했다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74) 독일군은 소련군의 공세 준비를 방해하기 위하여 4개 기갑사단과 독일군 및 루마니아군의 4개 보병사단을 동원하여 두 차례의 파쇄공격(암호명 소냐Sonja와 카챠Katja)을 감행하였다.75) 일주일 간(5월 30일~6월 5일)에 걸친 격렬한 전투 끝에 많은 소련군 부대들이 큰 피해를 입었고 전선을 북쪽으로 2~5마일 정도 밀어 올릴 수 있었다.76) 이렇게 해서 독일군은 중요한 교통의 요지인 타르굴-푸르모스와 야시 북쪽에 방어선을 종심깊게 구축할 수 있었고 이것은 전술적 상황을 호전시켰다. 더욱 중요한 것은 독일군이 우크라이나를 가로 질러 악몽과도 같은 퇴각을 한 끝에 이 공격을 통해 1943~44년 전역을 사기를 북돋아주는 승리로 마무리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독일군이 이 작은 승리를 만끽할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6월 22일, 소련군은 독일 중부집단군을 격멸하고 벨로루시 전역을 해방하기 위한 대공세인 바그라티온Багратион작전을 개시했다.77) 12일 만에 중부집단군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독일군 44개 사단 중 25개 사단이 사실상 전멸했으며 인명피해는 30~35만명에 달했다.78) 중부집단군의 괴멸로 소련군은 서쪽으로 300km 진격할 수 있었으며 소련군의 선봉부대는 동프로이센의 국경지대 지척까지 육박해 들어갔다.79) 전황이 이렇게 진행되는 동안 발트해 연안지역의 소련 전선군들은 북부집단군Heeresgruppe Nord에 일련의 공세를 감행해 북부집단군의 전력을 소모시키고 이 벨로루시 지구에 효과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7월 13일에는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소련군의 일련의 공세에 호응하여 갈리치아의 독일 북우크라이나 집단군Heeresgruppe Nordukraine을 공격했다.80)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7월 27일 까지 독일군의 방어선을 분쇄하고 비스와Wisła강에서 20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했다. 동북방면으로 소련 제2전차군은 바르샤바의 문턱 까지 도달했다. 7월이 끝나갈 무렵 독일군의 전 선선은 돌이킬 수 없는 붕괴를 목전에 둔 것 처럼 보였다.81)
독일은 이 위태로운 상황에 대해 이와 같은 위기가 닥칠 때 마다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방법으로 대응했다. 바로 공격하는 것 이었다! 7월 24일, 그때 막 독일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한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은 어떻게 상황을 바로 잡을 것이냐는 어떤 부하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공세를 취해야 하네!”83) 히틀러는 7월 31일에 열린 군사회의에서 “전선을 안정시키고 가능하면 한 두차례의 승리를 거두기 위해” 공세적인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발언했다.84) 독일인들에게는 다행히도 독일과 루마니아에서 이동해온 여러개의 사단들이 마침내 7월 말 경 전선에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이와 같은 의도를 실행하는데 필요한 수단들이 갖춰지기 시작했다.85) 이렇게 해서 독일군 지휘관들의 공세적인 성향과 증원부대의 도착은 독일군이 1944년 8월에 걸쳐 일련의 공격과 반격을 수행할 수 있게 했다.

첫 번째 반격은 바르샤바 동부에서 수행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소련 제2전차군의 진격으로 독일 제2군이 측면을 우회당하여 세개의 독일 야전군의 중요한 보급로를 차단당할 위협을 받고 있었다.86) 7월 30일, 3개 기갑사단이 소련 제3전차군단에 공격을 감행해 북쪽으로 가장 깊숙히 진격해온 소련군의 2개 전차군단의 후방을 끊고 바르샤바 일대에 안정적인 전선을 회복하려 했다.87)  8월 2일에는 제4기갑사단과 제3SS기갑사단도 반격에 가담했다. 표4에 나타난 것 처럼 반격에 투입된 5개 기갑사단의 기갑전력을 모두 합하면 전차와 돌격포 700여대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일군은 이후 3일간에 걸친 격렬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웠던 전투를 통해 소련 제3전차군단을 포위하여 거의 전멸시켰고 제8근위전차군단에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8월 7일 반격이 종결될 무렵, 독일측은 소련군이 전사 3,000명과 포로 6,000명이라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88) 소련군의 기갑전력 손실도 의심할 바 없이 심각했으며 8월 11일 제2전차군이 휴식과 재편성을 위해 철수했을 때 원래 보유하고 있던 758대의 전차와 자주포 중 100대 미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89) 이 반격은 소련 제1벨로루시 전선군의 공세 능력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 중요한 교통로를 확보하였으며 안정적인 방어선을 다시 형성하였고 소련군이 8월 1일에 시작된 폴란드인들의 바르샤바 봉기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했다.

표4. 바르샤바 반격작전에 투입된 독일군 기갑전력의 추정치(1944년 7월 30일~8월 6일)90)
부대
전차
돌격포
총계
FPD “HG”
72
31
103
19.PzD
168
-
168
5.SS PzD
105
21
126
3.SS PzD
119
16
135
4.PzD91)
156
12
168
총계
620
80
700


바르샤바 일대에서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소련군은 바르샤바 남쪽에 비스와강을 따라 몇 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비스와 강은 독일이 자국의 동부 국경지대를 방어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최후의 중요한 자연 방벽이었다.92) 독일은 비스와강이 방어선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소련군의 교두보를 봉쇄하고 분쇄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강력한 반격을 감행했다. 8월 4일에서 8일에 걸쳐 감행된 제19기갑사단과 헤르만 괴링 강하기갑사단의 일부 부대의 공격은 소련 제8근위군이 마그누셰프Magnuszew일대에 확보한 교두보를 봉쇄하고 축소하였으나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 했다.93) 마스누셰프 교두보의 남쪽에서는 소련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산도미에쉬Sandomierz 일대에 거대한 교두보를 확보하고  8월 8일까지 2개 전차군과 2개의 야전군을 배치했다. 독일군은 이 위협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7개 기갑사단 및 기갑척탄병사단, 2개 보병사단과 2개 보병여단을 단계적으로 집결시켰다.94) 독일군은 9월에 걸쳐 산도미에쉬 교두보를 거듭해서 공격했으며 일련의 길고 피해가 큰 교전이 이어졌다. 독일군의 반격은 비스와강에 형성된 거점들을 격파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교두보를 봉쇄하고 그 규모를 축소하였으며 방어하는 소련군에게 심각한 손실을 입혔다.95)

폴란드의 전투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독일은 발트해 지역에서 훨씬 더 큰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7월 말에 걸쳐 소련 제1발트전선군1-й Прибалтийский фронт은 벨로루시의 독일군 전선이 붕괴된 것을 기회로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로 압박해 들어왔다. 7월 31일에 소련군의 선봉은 바로 리가 서쪽 해안에 도달하여 독일군의 육상 교통로를 차단하고 북부집단군을 독일군의 전선에서 고립시켰다.96)
독일 육군총사령부는 북부집단군이 완전히 전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제3기갑군 사령부의 지휘하에 구출작전을 실시하기로 하고 강력한 전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도펠코프Doppelkopf” 라는 암호명의 이 작전은 6개의 기갑사단과 한개의 사단급 기갑전력을 갖춘 부대를 2개 기갑군단으로 편성하여 프로이센 국경의 집결지에서 공격을 시작해 소련 제2근위군과 제51군의 방어를 분쇄하고 리가 일대에서 북부집단군과의 접촉을 재개하려는 것 이었다. 주공의 우익에는 1개 기갑사단과 7개 보병사단, 그리고 여러개의 독립 기갑부대로 편성된 2개 보병군단이 주공을 지원하고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97)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3개 보병사단과 2개 기갑여단이 추가 증원병력으로 도착했다.98) 표5에 자세히 나타낸 것 처럼, 독일군은 8월 16일 작전이 시작될 때 까지 659대의 전차와 돌격포라는 상당한 전력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도착한 증원전력이 이 숫자를 더 늘렸기 때문에, 8월 25일에 도펠코프 작전이 종료될 무렵 제3기갑군은 812대의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 중에서 517대가 가동 가능한 상태에 있었다.99)

표5. 도펠코프 작전 개시 당시 독일군 기갑 전력(1944년 8월 16일)100)
부대
전차
(가동)
전차
(수리중)101
돌격포
(가동)
돌격포
(수리중)
가동
총계
수리중
총계
4.PzD
47
54
-
-
47
54
5.PzD
38
24
-
-
38
24
12.PzD
28
-
36
2
64
2
PzG GD
77
22
20
4
97
26
14.PzD
11
-
11
-
22
-
7.PzD
24
20
5
-
29
20
PzKG
Strachwitz
85
-
-
-
85
-
IX.AK
18
17
41
-
59
17
XXVI.AK102)
6
-
69
-
75
-
총계
334
137
182
6
516
143


독일군의 구원부대의 규모와 독일공군의 상당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10일간의 격전을 치른 뒤에야 북부집단군과의 굳건한 접촉을 할 수 있었다.103) 전투가 진행되는 와중에 소련군은 제5근위전차군, 제3근위기계화군단, 그리고 제1전차군단을 증원했으며 추가로 3개의 야전군이 주공의 측면을 엄호하고 있던 우익의 독일군 군단들에 대해 공격을 감행했다.104) 독일군은 이렇게 소련군이 증원병력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소련군을 뒤로 밀어냈으며, 북부집단군도 구원부대와의 접촉을 위해 자체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소련 제1발트 전선군은 공격해 오는 독일군 사이에 예하 부대들이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8월 21일에 남쪽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05) 소련군의 철수로 독일군은 30km폭의 회랑을 확보했으며, 이를 통해 북부집단군에 병력을 보내고 물자를 보급할 수 있었다.106)
도펠코프 작전은 독일군이 연속된 전선을 다시 형성할 수 있도록 하여 한 개의 집단군이 완전히 괴멸되는 것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붉은군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전선 북부를 안정시킬 수 있도록 했다. 8월 16일 부터 25일까지, 독일 제39기갑군단만 하더라도 담당 지구에서 소련군 전사자 2,060명을 확인했으며 포로 929명을 잡고 전차 277대, 대전차포 472문, 야포 82문을 격파하거나 노획했다.107) 소련군이 입은 전체적인 손실은 알 수 없으나, 제1발트전선군이 또 다른 공세를 개시하기 까지는 거의 6주가 걸렸다.108)

전쟁의 마지막 수 개월에 걸친 시기 독일 동부군은 계속되는 소련군의 공세를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한편, 계속 해서 다수의 공세작전을 계획하거나 실행에 옮겼다. 이러한 공세 중에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통로를 재점령하여 독일의 유일한 원유 공급지인 헝가리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1944년 10월 초 실시할 예정이었던 “집시 남작Zigeunerbaron”작전이 있다. 이를 위하여 독일 제3기갑군단의 예하에 4개의 기갑사단 및 기갑척탄병사단이 배속되어 데브레첸Debrecen 일대에 집결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헝가리를 침공하여 이 작전은 실시되지 못하였으며 보류되었다.109) 그러나 독일 제3기갑군단이 데브레첸 일대에 전개함으로써 독일군은 소련군이 10월에 헝가리를 침공했을 때 소련군의 측면에 여러 차례의 역습을 감행할 수 있었다. 독일군의 역습은 소련군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한동안 치사Tisza강에서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110)
이외의 공세작전으로는 부다페스트 아래의 도나우강 서안에서 소련군을 몰아내기 위한 목적에서 계획이 입안된 “늦은 추수Spatlese” 작전이 있다. 독일 육군총사령부는 12월 18일 까지 2개 기갑사단과 3개의 독립 전차대대와 400여대에 달하는 기갑차량을 부다페스트 북서쪽에 집결시켰으나 소련군의 돌파로 인해 이 부대들을 즉시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이 작전도 취소되고 말았다.112) 또 다른 작전으로는 1945년 2월 베를린을 향해 진격해 오던 소련군의 150마일에 달하는 북측익에 대해 폼메른에서 감행한 공세인 “(동)지Sonnenwende” 작전이 있다. 황급히 긁어모은 7개의 기갑사단 및 기갑척탄병사단을 투입한 이 공격은 게오르기 주코프가 지휘하는 제1벨로루시 전선군을 상대로 극히 미미한 성과만을 거두었지만 소련군 총사령부에는 상당한 동요를 일으켰다.113) 동지 작전은 완전히 실패했지만, 독일군이 전력을 긁어모아 투입함으로써 붉은군대가 베를린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폼메른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도록 만들었다. 폼메른에 대한 소련군의 공세는 오랫 동안 많은 손실을 입으며 진행되었으며 1945년 4월 4일에야 마무리 될 수 있었다.114)
독일 제4군이 1945년 1월 27일에서 30일 사이에 동프로이센에서 고립된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감행한 공세 또한 소련군의 우려를 일으켰다. 독일군이 소련 제48군을 휩쓸고 엘빙Elbing일대의 독일군 주방어선에서 6마일 되는 지점까지 진출하자 소련군은 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다른 지구에서 3개의 야전군을 차출해왔다.115) 이 증원병력으로 인해 독일군의 돌파는 좌절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116)

독소전쟁의 최종단계에서 감행된 독일군의 모든 작전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봄의 부활Frühlingserwachen”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부다페스트를 재탈환하고 소련군을 다뉴브강 동안으로 밀어냄으로써 나지카니자Nagykanizsa 일대의 마지막 유전지대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여기에는 서부전선에서 헝가리로 비밀리에 이동해온 제6SS기갑군도 투입되었다.117) 독일군은 공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2월 17일 부터 22일 까지 “남풍Südwind”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작전에는 2개 기갑사단과 3개 보병사단이 투입되어 부다페스트 북서쪽의 에스체르곰Esztergom 지구의 소련군 교두보를 분쇄했다. 그 결과 소련 제7근위군이 큰 타격을 받았고 독일군이 준비하고 있던 공세의 좌익에 대한 위협이 제거되었다.118) 3월 5일에 봄의 부활 작전이 시작될 무렵 제6SS기갑군은 발라톤 호수 북쪽에 8개 사단을 집결시켰으며 이 중 5개 사단이 기갑사단이었다. 남쪽에서는 또 다른 8개 사단이 드라바 강 일대에서 양동작전을 감행했다. 이 작전에서 주공의 북쪽에는 독일 제6군이 5개 기갑사단과 3개 보병사단으로 좌익을 엄호하고 공세가 성공적으로 진행될 경우 여기에 가세할 예정이었다.119)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독일군이 24개 사단을 집결시킨 것은 그 자체로도 대단한 것 이었지만, 더 놀라운 것은 여기에 매우 많은 기갑전력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120) 표6에 나타난 것과 같이, 제6SS기갑군은 작전을 개시한지 8일 뒤에도 979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보유하고 있었다.121) 3월 15일에, 헝가리에 배치된 독일군의 기갑전력은 총 1,796대에 달했고 이중 772대가 가동가능한 상태에 있었다.122) 소련 제3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이 막대한 전력에 대항하여 407대의 전차와 자주포의 지원을 받는 465,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123)

표6. 봄의 부활 작전 진행중 제6SS기갑군의 기갑전력(1945년 3월 13일)124)
부대
전차
(가동)
전차
(수리중)125
돌격포
(가동)
돌격포
(수리중)
가동
총계
수리중
총계
1.SS.PzD
86
58
22
10
108
68
12.SS.PzD
54
39
67
49
121
88
2.SS.PzD
51
40
56
39
107
79
9.SS.PzD
56
33
57
30
113
63
23.PzD
53
41
29
22
82
63
44.ID
-
-
10
5
10
5
3.KD
-
-
22
13
22
13
4.KD
4
2
16
15
20
17
총계
304
213
279
183
583
396


독일군에게는 불행히도, 소련은 독일측의 공세준비를 포착하였고 이에 따라 방어를 준비했다. 이로서 양측 모두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 힘겨운 대결이 벌어졌다.126) 제한적인 도로망 또한 전차의 신속한 기동에 장애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온이 오르면서 지면은 진창이 되어 버렸다.127) 독일군은 힘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작전 초기의 며칠 동안 겨우 20마일을 진격하는데 그쳤으며 이후에는 급속히 공세의 탄력을 상실해 갔다. 3월 15일, 이 작전은 결국 중단되었으며 그 다음날에는 소련군이 독일 제6군을 상대로 공세를 시작했다. 공세 이틀차에 소련군은 독일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렸으며 독일군의 후방으로 신속히 진출했다. 이로 인해 독일 6SS기갑군도 후퇴할 수 밖에 없었으며 2차대전에서 독일군이 감행한 최후의 공세도 끝나고 말았다.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봄의 부활 작전이 감행되기 훨씬 이전에 독일의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으므로 이 작전은 어떠한 전략적으로 중요한 결과도 가져올 수가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 언급한 반격작전들은 바르바로사 작전이나 블라우 작전과 비교했을 때 어떠한 전략적 의미도 없었다. 전략적인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유럽 전역에 걸쳐 심각한 압박을 받고 있던 독일이 동원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설명한 작전들은 독일군이 그 공세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간주되어온 쿠르스크의 전투로 부터 한참 뒤에도 공세능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러 문헌에서 나타나는 인식과는 달리 이러한 공세들은 전쟁이 끝나가는 순간까지도 독일 동부군이 위험한 적수로 남아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1943년의 하리코프에서 1945년의 헝가리 평원에 이르기 까지 독일군은 반격을 위해 상당한 규모의 기갑전력을 가진 대규모의 병력을 계속해서 집결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능력으로 독일은 몇번이고 소련에게 작전상의 차질과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바르샤바 일대에서 전개된 반격은 소련군이 폴란드인들의 봉기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여 폴란드인들이 패배하도록 했다. 마찬가지로 도펠코프 작전은 발트해 지역의 독일군이 격파당하는 것을 방지했으며, 동지작전은 베를린에 대한 소련군의 최종 공세를 지연시켰다. 독일군의 공세가 입힌 손실과 그것이 이후의 소련군 작전에 끼친 영향의 관점에서 보면 소련 전차군들이 하리코프 일대에서 큰 타격을 받은 뒤 후방으로 돌려진 것을 가장 적합한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독일군의 공세 및 반격작전들은 붉은군대의 승리를 오랫동안 지연시키면서 그 승리를 막대한 인명 손실을 치른 뒤에야 이룰수 있도록 만드는 상당한 누적 효과를 일으켰다고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Albert Seaton: The Russo-German War, 1941–1945. (London: Arthur Baker Ltd., 1971), p. 368. 이제는 쿠르스크에서 독일군이 입은 손실이 기존에 받아들여졌던 것 보다는 가벼웠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에 대한 가장 종합적인 재검토는 Niklas Zetterling & Anders Frankson: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Portland, OR: Frank Cass Pub., 2000)를 참고하라.
2) John Erickson: The Road to Berlin: Stalin’s War with Germany. (London: Weidenfeld & Nicolson, 1983), p. 135.
3) Earl Ziemke & Magna E. Bauer: Moscow to Stalingrad: Decision in the East. (Washington, DC: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87), p. 141.
4) 동부군Ostheer이라는 용어는 1941년 부터 1945년 까지 동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의 일부를 칭하는 것이다. 이 용어는 이탈리아, 발칸반도, 또는 프랑스에서 싸운 독일군과 동부전선에서 싸운 독일군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5) 현재 전쟁 기간 중 붉은 군대의 발전에 관해 가장 상세하게 다룬 연구로는 David Glantz: Colossus Reborn: The Red Army at War, 1941–1943. (Lawrence, KS: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을 참고하라.
6) 예를 들면 Evan Mawdsley: Thunder in the East: The Nazi-Soviet War 1941–1945.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5)나 Richard Overy: Russia’s War: A History of the Soviet War Effort, 1941–1945. (London: Penguin Pub., 1997) 두 저작 어디에서도 1943년 11월에서 12월에 걸쳐 독일군이 키예프 일대에서 감행한 반격에 대한 언급을 찾아 볼 수 없다.
7) 이 전투에 대한 작전사적 저술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는 George M. Nipe: Decision in the Ukraine, Summer 1943: II SS and III Panzer Corps. (Winnipeg: J.J. Fedorowicz, 1996)가 있다. 전체적인 소련의 전략내에서 이 전투의 맥락을 알기 위해서는 David Glantz & Jonathan M. House: When Titans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Hitler. (Lawrence, KS: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8)를 참고하라.
8) Erich von Manstein: Lost Victories. (Novato, CA: Presidio Press, 1982), p. 454
9) 히틀러가 러시아 남부를 유지하고자 한 경제적 이유에 대해서는 Seaton, p. 379를 참고하라.
10) 1943년 10월 1일 부터 1944년 1월 31일 까지 독일군의 야전 정비부대는 모든 전선에서 최소한 8,702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수리해서 전선에 복귀시켰다. Zetterling & Frankson, p. 135.
11) 별도로 표기 하지 않는 한 여기에 인용된 수치는 6. AOK, Ia. Zustandsberichte. Wochenmeldungen über Panzer und Sturmgeschütz Lage. NARA, T312, Roll 1483, Frame 441에 의거한 것이다. 이 수치는 해당 기갑사단의 1943년 8월 1일자 기갑전력을 가르킨다.
12) 이하 약칭은 다음과 같다. Pz 기갑사단, SS-Pz 친위대 기갑사단, PGD 기갑척탄병사단, SS-PGD 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 Kav, 기병사단, Inf 보병사단.
13) 이것은 장기 및 단기 수리를 요하는 차량의 합계를 뜻한다. 단기 수리를 요하는 차량은 보통 2주 이내에 가동 가능 상태가 되었다.
14) 이 사단의 1943년 8월 1일자 통계는 Zetterling & Frankson, p. 218에 의거한 것이다.
15) 이 사단은 8월 11일에는 33대의 가동 가능한 전차를 보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Nipe, p. 217
16) 이 통계는 소련이 체르니고프-폴타바 전략 공세작전(8월 26일~9월30일)과 돈바스 전략 공세작전(8월 13일~9월 22일) 동안에 입은 피해를 합친 것이다. G.F.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20th Century. (Mechanicsburg, PA: Stackpole Books, 1997), pp. 135–137 & 267.
17) Glantz, Colossus Reborn, p. 277
18) 생략
19) 추격 과정에서 제5근위전차군의 남은 기갑차량은 세개의 선견대에 인도되었고 전차군의 주력은 예비대로 돌려져 재편성에 들어갔다. Glantz & House, p. 172. 소련군이 독일군의 퇴각 과정을 방해할 수 없었던 것에 관해서는 Manstein, p. 469를 참고하라.
20) 비슷한 이유에서, 제2전차군과 제4전차군 및 많은 독립 전차군단들이 최고사령부 예비로 돌려졌다. Erickson, p. 122.
21) 동부 방벽은 북부와 중부 지구의 완성도가 훨씬 높았는데, 해당 지역의 집단군들이 더 느리게 퇴각하고 있어서 건설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부 방벽의 남쪽 부분은 독일군이 9월 말 드네프르강 서안으로 퇴각할 무렵에는 아직 건설 초기 단계에 있었다. Mawdsley, p. 273.
22) Manstein, p. 482;  Seaton, p. 379.
23) Erickson, p. 134.
24) David Glantz: Forgotten Battles of the German-Soviet War, 1941–1945: Volume Five-The Summer-Fall Campaign, 1 July–31 December 1943. Part Two. (Carlisle, PA: Self-published, 2000), p. 582.
25) 제56기갑군단은 2, 4, 5, 12기갑사단으로 구성되었고 59군단은 7, 8기갑사단과 291, 217, 339 보병사단으로 편성되었다. Ibid, pp. 590 & 594. 전체적인 독일 기갑전력은 알 수 없으나 10월 1일에 제4기갑사단은 9대의 가동가능한 전차와 41대의 단기간의 수리를 요하는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Joachim Neumann: Die 4. Panzer Division 1943–1945: Bericht und Betrachtung zu den zwei letzten Kriegsjahren im Osten. (Bonn: Selbstverlag der Verfassers, 1989), p. 188. 제5기갑사단사에 따르면 이 사단은 10월 2일에 10대의 가동 가능한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Anton von Plato: Die Geschichte der 5. Panzer Division, 1938 bis 1945. (Regensburg: Verlag Georg Zwickenpflug, 1978), p. 302. 9월 30일에 제7기갑사단은 56대의 전차 중 18대가 가동 가능한 상태라고 보고했으며 제8기갑사단은 77대의 전차 중 가동가능한 것이 단 한대도 없다고 보고했다. 4. PzAOK. Ia. Zustandsberichte. Wochenmeldungen über Panzer und Sturmgeschütz Lage. NARA T313, Roll 391, Frames 8681807–8681815.
26) 이 전투에 대한 가장 탁월한 서술은 Glantz, Forgotten Battles of the German-Soviet War, Vol. Five, Part Two, pp. 574–603를 참고하라.
27) 제14기갑사단과 제24기갑사단은 각각 109대와 116대의 전차 및 돌격포를 가지고 도착했다. Thomas L. Jentz: Panzertruppen: The Complete Guide to the Creation and Combat Employment of Germany’s Tank Force, Volume Two, 1943–1945. (Atglen, PA: Schiffer Military History, 1996), p. 109. 10월 30일에 제3SS 기갑사단은 29대의 가동 가능한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Wolfgang Vopersal, Soldaten, Kampfer, Kameraden: Marsch und Kampfe der SS-Totenkopf Division, Band IVa & IVb. (Bielefeld: Im Selbstverlag der Truppenkameradschaft der 3. SS-Panzer Division, 1988), p. 53.
28) E.R. Hooten, Eagle in Flames: The Fall of the Luftwaffe. (London: Arms & Armour Press, 1997), p. 198.
29)  소련 제5근위전차군 소속의 제18전차군단은 편제상 223대의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10월 28일에는 단지 23대의 전차만 남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10월 23일에 제7근위군 소속의 제1근위기계화군단은 편제에 있는 229대의 전차 및 자주포 중 75대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Glantz, Colossus Reborn, p. 278.
30) Manstein, p. 483.
31) Ibid, p. 484.
32) Ibid, pp. 484–485.
33) Jentz, p. 117.
34) Mawdsley, p. 278; Manstein, p. 488.
35) 존 에릭슨에 따르면, 12월 초,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은 병력 452,000명, 전차 1,100대, 각종 화포 및 박격포 6,000문에 달했으며, 총 66개 소총병사단과 8개 전차군단/기계화군단으로 구성되었다. Erickson, p. 143.
36) 새롭게 도착한 3개 사단은 1.SS 기갑사단과 1, 25기갑사단이었다. 나머지 사단은 2.SS 기갑사단과 19기갑사단, 16기갑척탄병사단, 그리고 68, 168보병사단이었다.
37) Ziemke & Bauer, p. 187, Manstein, pp. 488–489, Erickson, p. 143.
38) 키예프 일대의 전투에서 독일 야전 지휘관들이 내린 결정을 보다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F.W. von Mellenthin: Panzer Battles: A Study of the Employment of Armour in the Second World War. (London: Cassel & Coy. Ltd., 1955), pp. 244–260를 참고하라.
39) 4. PzAOK. Ia. Zustandsberichte. Wochenmeldungen uber Panzer und Sturmgeschutz Lage. NARA T313, Roll 391, Frames 8681807– 8681815에 있는 기갑전력현황에 대한 주간 보고를 편집한 것이다.
40) Glantz & Frankson, p. 174.
41) Mellenthin, p. 255. 또한 Hooten, p. 198도 참고하라.
42) 예를들어 8월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뒤 총사령부 예비로 있던 제1근위전차군이 12월 초 546대의 전차 및 자주포를 가지고 키예프 지구에 투입되었다. Glantz, Colossus Reborn, p. 280. 인접한 벨로루시 전선군의 지휘관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는 그의 회고록에서 총사령부로 부터 바투틴의 사령부를 방문해 왜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했는지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소련군 총사령부의 의도는 바투틴이 독일군의 반격을 격퇴하는데 실패한 것 때문에 전선군 사령관에서 면직시키려는데 있었것으로 보인다. Konstantin Rokossovsky, A Soldier’s Duty. (Moscow: Progress Pub., 1970), pp. 226–228. 또한 Mawdsley, p. 278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43) Manstein, p. 489, Ziemke & Bauer, p. 189, 그리고 Mellenthin, p. 251.
44) 11월 2일에서 12월 1일 까지 제1기갑사단은 1,202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 XXIV. Panzer Korps. Ia, Anlagen z. KTB. NARA T314, Roll 726, Frame 1177. 11월 동안 1.SS 기갑사단은 1,685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 Rudolf Lehmann: Die Leibstandarte, Band III. (Osnabruck: Munin Verlag GMBH, 1982), p. 344.
45) Mawdsley, p. 278.
46) Manstein, p. 489.
47) Glantz & House, p. 298에 인용된 내용.
48) 에릭슨이나 시튼의 저작에서는 이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전투에 대한 몇 안되는 서술 중 하나로는 Glantz, Forgotten Battles of the German-Soviet War, Volume Five, Part Two, pp. 742–750를 참고하라.
49) Ibid, pp. 760–768.
50) 제29전차군단은 이미 12월 8일에는 전차 22대로 줄어들어 있었고 12월 15일 제5근위기계화군단은 겨우 23대의 전차만 보유하고 있었다. Glantz, Colossus Reborn, p. 280.
51) Ziemke, pp. 194–195.
52) 제16기갑사단은 러시아에 도착했을 무렵 총 110대의 전차와 42대의 돌격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Jentz, p. 117.
53) 12월 19일에 제4기갑사단은 가동가능한 전차 39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다른 부대 소속의 전차 5대와 호르니셰 15대가 배속되었다. Neumann, p. 270.
54) 이 전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Glantz, Forgotten Battles of the German-Soviet War, Volume Five, Part Two, pp. 545–561을 참고하라.
55) Seaton, p. 413.
56) Erickson, p. 163; Manstein, p. 500.
57) 제3근위전차군은 공세 시작당시 419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했으나 1월 8일에는 85대로 줄어들어 있었다. Glantz, Colossus Reborn, p. 280.
58) Manstein, p. 498.
59) 여기에는 1SS, 1, 6, 16 그리고 17 기갑사단, 4산악사단, 101엽병사단, 그리고 1, 96, 254보병사단이 투입되었다. 혼성기갑전투단인 ‘베케’ 전투단도 전투에 참여했다. 베케전투단은 23기갑연대 2대대(판터)와 503중전차대대(티거)로 구성되었다.
60) 다른 독립 부대들 또한 제외하였다.
61) 제16기갑사단은 니콜라우스 작전에 참여한 직후에 곧바로 도착하였으며 이 작전 기간 중 별다른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62) Lehmann, p. 408.
63) XXIV. Panzer Korps. Ia, Anlagen z.KTB 1/44, Versheidene Bericht. NARA T314, Roll 731, Frame 727.
64) Wolfgang Paul: Brennpunkte: Die Geschichte der 6. Panzer Division (1. leichte), 1937–1945. (Krefeld: Hontges-Verlag, 1977), p. 346.
65) Wolfgang Werthen, Geschichte der 16. Panzer Division 1939–1945. (Bad Nauheim: Verlag Hans-Henning Podzun, 1958), p. 190.
66) Ernst Rebentisch: Zum Kaukasus und zu den Tauren: Die Geschichte der 23. Panzer Division, 1941–1945. (Esslingen: Herausgegeben von Verband ehemaliger Angehoriger der 23. Panzer Division, 1963), p. 361.
67) 제18포병사단은 다수의 중포병부대로 편성되었으며 이 공격에 72문의 야포를 지원했다. Wolfgang Paul: Geschichte der 18. Panzer Division 1940–1943, mit Geschichte der 18. Artillerie Division 1943–1944, anhang Heeresartillerie Brigade 88 1944–1945. (Germany: Preussischer Militar-Verlag, 1989), p. 312.
68) Seaton, p. 416.
69) Manstein, p. 509. 소련군 소총사단 6개가 전멸한 것으로 추정되며 소련군 5개 전차군단은 기갑 전력의 대부분을 잃었다. Paul, Geschichte der 18. Panzer Division 1940–1943, p. 315.
70)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독일군의 반격 동안에 입은 피해에 더하여 이미 1943년 12월 24일 부터 1944년 1월 14일까지 감행한 공세로 100,018명의 사상자를 입은 상태였다. Glantz & House, p. 298.
71) Manstein, p. 516. 소련군이 코르순-세브첸코스키 공세(1월 24일~2월 17일) 기간 중 입은 손실은 총 80,188명이었고 이 중 24,286명이 전사자였다. Glantz & House, p. 298.
72) Jentz, p. 130. 이 작전에 관한 가장 자세한 서술은 Michael Reynolds: Sons of the Reich: The History of the II SS Panzer Corps in Normandy, Arnhem, the Ardennes and on the Eastern Front. (Havertown, PA: Casemate, 2002), pp. 4–13을 참고하시오.
73) 1944년 4월에서 6월에 걸쳐 루마니아 북부에서 전개된 전투에 관한 가장 상세한 저술로는  David Glantz: Red Storm over the Balkans: The Failed Soviet Invasion of Romania, Spring 1944. (Lawrence, KS: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5)와 F.M. von Senger und Etterlin: Der Gegenschlag. (Neckargemund: Kurt Vowinckel Verlag, 1959)를 참고하라.
74) Glantz, Red Storm over the Balkans, p. 365.
75) Ibid, pp. 330–367. 5월 31일 기준으로 이 공격에 참여한 기갑사단들은 245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Jentz, p. 205.
76) 두 독일기갑사단만 해도 98대의 전차와 92문의 야포, 그리고 88문의 대전차포를 격파하거나 노획했다고 주장했다. Glantz, Red Storm over the Balkans, p. 366.
77) 이 작전에 참여한 4개의 소련 전선군은 병력 1,254,300명, 전차 및 자주포 4,070대, 그리고 야포 24,363문을 보유했다. Glantz & House, p. 201.
78) Seaton, p. 442; Glantz & House, p. 209.
79) 독일 중부집단군의 붕괴와 그 이후의 사건을 주로 다루고 있는 훌륭한 연구로는 Paul Adair: Hitler’s Greatest Defeat: The Collapse of Army Group Centre, June 1944. (London: Arms & Armour, 1994), Alex Buchner: Ostfront 1944: The German Defensive Battles on the Russian Front, 1944. (West Chester, PA: Schiffer Military History, 1991), 그리고 Rolf Hinze: East Front Drama-1944: The Withdrawal Battle of Army Group Center. (Winnipeg: J.J. Fedorowicz Pub., 1996)를 참고하라.
80) 이 전투에 관한 가장 훌륭한 서술은 Rolf Hinze: To the Bitter End: The Final Battles of Army Groups North Ukraine, A, Centre, Eastern Front 1944–1945. (Solihull, UK: Helion & Coy., 2005) 그리고 David Glantz & Harold S. Orenstein, eds.: L’vov-Sandomierz 1944: The Soviet General Staff Study. (Carlisle, PA: Self-published, 1998)를 참고하라.
81) 이 모든 사건들에 대한 개괄은 Samuel Mitcham: Crumbling Empire: The German Defeat in the East, 1944. (Westport, CT: Praeger Pub., 2001)를 참고하라.
82) 독일의 전쟁 이론과 그것이 역사적으로 적용된 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Robert Citino: The German Way of War: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 (Lawrence, KS: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를 참고하라.
83) Ziemke & Bauer, p. 336. 또한 Seaton, p. 452도 참고하라.
84) Ibid, p. 339.
85) 한 자료에 따르면 7월에서 9월 까지 3개 기갑사단, 7개 기갑여단, 그리고 9개 전차대대가 독일에서 이동해 왔다. Jentz, pp. 206–207 & 218. 8월 초 까지 중부집단군은 새로이 12개 보병사단을 배속받았다. Mitcham, p. 101.
86) Hinze, East Front Drama, p. 305.
87) 여기에 투입된 독일군 사단은 막 독일에서 도착한 제19기갑사단과 이탈리아에서 이동해 온 헤르만 괴링 강하기갑사단, 그리고 상대적으로 전력 소모가 없었던 5SS기갑사단이었다. 이 반격에 관한 가장 훌륭한 서술은 David Glantz: “The Red Army’s Lublin-Brest Offensive and the Advance on Warsaw (18 July-30 September 1944): An Overview and Documentary Survey”.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9, (2) (2006), pp. 401–441을 참고하라.
88) Werner Haupt: Army Group Center: The Wehrmacht in Russia, 1941–1945. (Atglen, PA: Schiffer Military History, 1997), p. 209.
89) Glantz, “The Red Army’s Lublin-Brest Offensive and the Advance on Warsaw”, pp. 407, 417.
90) Jentz, pp. 206–207.
91) Neuman, p. 434. 1944년 8월 1일에는 이 사단이 보유한 기갑차량 중 전차 98대와 돌격포 12대가 가동 가능한 상태였다.
92) “OKW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비스와강을 겨울 방어선으로 유지하기를 원하였다.” Hinze, To the Bitter End, p. 22.
93) Hinze, East Front Drama, pp. 310–312.
94) 이 전투를 다룬 자세한 문헌은 없으나 여기에 투입된 독일군 부대는 Glantz & Orenstein의 49번 지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95) 한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붉은 군대는 8월 3일에서 9월 7일까지 포로 3,000명, 전차 및 자주포 650대, 그리고 각종 화포 942문을 상실했다. Herausgegeben von Traditionsverband der Division. Geschichte der 3. Panzer Division Berlin- Brandenburg, 1935–1945. (Berlin: Verlag der Buchhandlung Gunther Richter, 1967), p. 442.
96) Glantz & House, p. 226.
97) Gerd Niepold: Panzer Operationen: Doppelkopf und Casar- Kurland, Sommer 1944. (Herford: Mittler & Sohn, 1987), p. 35–38.
98) 이 부대들은 제1보병사단과 새롭게 편성된 548, 551척탄병사단, 그리고 제103, 104기갑여단이었다. Ibid, p. 66. 이 두 기갑여단은 전선에 도착했을 때 각각 판터 36대와 대공전차 4대를 보유한 1개 전차대대를 가지고 있었다. Jentz, pp. 206, 207.
99) Niepold, p. 66.
100) Ibid, pp. 35–37.
101) 이것은 단기간 수리를 요하는 차량으로 2주 이내에 가동 가능한 것으로 예상되는 것을 의미한다. 장기간 수리를 요하는 차량은 포함하지 않았다.
102) 니폴트의 저작에는 제6기갑사단의 기갑차량 현황에 관한 정보가 없다. 도펠코프 작전 개시 당시의 제6기갑사단의 기갑 전력은 알 수 없으나 6기갑사단이 7월에 동부전선에 도착할 무렵에는 81대의 4호전차와 8대의 대공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Jentz, pp. 206, 207. 제6기갑사단의 전차는 1944년 8월 26일까지 10대의 수리중인 4호 전차와 23대의 가동가능한 4호 전차로 줄어들어 있었다. 배속된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연대 1대대는 26대의 가동가능한 판터와 11대의 수리중인 판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Paul, Brennpunkte, p. 422.
103) 독일공군은 8월 17일 하룻동안만 해도 제3기갑군 구역에 260회 출격했다. Niepold, p. 40. 작전 후반기에 독일군의 선봉부대는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과 여러척의 구축함으로 부터 화력지원을 받았다. Ziemke & Bauer, p. 343; Seaton, p. 507.
104) Glantz & House, pp. 226, 227; Ziemke & Bauer, p. 343.
105) Erickson, p. 325.
106) Glantz & House, p. 226.
107) Niepold, p. 78.
108) Glantz & House, p. 228.
109) 제3기갑군단의 기갑전력은 전차와 돌격포 224대였다. Peter Gosztony: Endkampf an der Donau, 1944/1945. (Wien: Verlag Fritz Molden, 1969), p. 40. 또한 Hans Friessner: Verratene Schlachten: Die Tragodie der Deutschen Wehrmacht in Rumanien und Ungarn. (Hamburg: Holsten-Verlag, 1956), p. 130도 참고하라.
110) 독일측은 한달 간에 걸친 격전을 통해 소련군 18,155명을 사살하고 포로 6,662명을 잡았으며 전차 및 자주포 632대와 야포 및 박격포 557문, 그리고 600문의 대전차포를 파괴하거나 노획했다고 주장했다. Ibid, p. 153. 이 기간(10월 6일~28일) 동한 소련군이 입은 총 피해는 사상자 84,010명으로 이 중 19,713명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자였다. Glantz & House, p. 299.
111) 생략
112) Gosztony, pp. 97, 98.
113) Mawdsley, p. 373. 이 사건은 주코프와 스탈린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더 심하게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미 주코프의 야심에 대해 의혹을 가지고 있던 스탈린은 동지 작전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자 분노했다. Erickson, p. 522. 독일군의 준비에 대해서는 Ziemke & Bauer, p. 446를 참고하라.
114) 동 폼메른에서의 작전 기간(1945년 2월 10일~4월 4일) 동안 소련군의 손실은 사상자 234,360명에 달하였으며 전차 및 자주포 1,027대와 야포 및 박격포 1,005문, 그리고 1,073대의 항공기가 파괴되거나 노획당하였다. Krivosheev, pp. 156 & 263. 이러한 피해는 부분적으로 독일군이 역사책에서 흔히 서술하는 것 처럼 항상 약한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예를 들어 1945년 3월 25일 기준으로 10SS기갑사단은 15,067명의 병력과 130대의 전차 및 돌격포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 중 61대가 가동 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Wilhelm Tieke: Im Feursturm letzter Kriegsjahre: II. SS Panzerkorps mit 9. und 10. SS-Division ‘Hohenstaufen’ und ‘Frundsberg’. (Osnabruck: Munin Verlag GMBH, 1975), p. 623.
115) 여기에는 소련 제5근위전차군, 제8전차군단과 제3근위기병군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Rokossovsky, pp. 287, 288.
116) Erickson, pp. 468, 469.
117) “히틀러는 여전히 독일의 생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략 지대는 헝가리와 빈 분지의 유전 지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Seaton, p. 541.
118) 이 전투에서 소련군의 피해는 최소한 8,800명이었다. Erickson, p. 511.
119) Ibid, p. 509.
120) 이들 사단의 대부분은 병력의 기준에서 보면 거의 완편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3월 1일에 제9SS기갑사단은 총 병력이 17,229명이라고 보고했다. Tieke, p. 622.
121) 이때 까지 제6SS기갑군은 다 해서 겨우 42대의 기갑차량만을 상실했을 뿐 이었다. Georg Maier: Drama Zwischen Budapest und Wien: Der Endkampf der 6. Panzerarmee 1945. (Osnabruck: Munin Verlag GMBH, 1985), p. 241.
122) Krisztian Ungvary: Battle for Budapest: 100 Days in World War II. (New York: I.B. Tauris & Co., 2003), p. 331.
123) 이 수치는 제6근위전차군을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더해 소련군 201,500명과 전차 500대가 북쪽의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 혹은 부다페스트 동쪽에 예비대로 있던 제9근위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Glantz & House, p. 372.
124) Maier, p. 241.
125) 이 수치는 단기간의 수리와 장기간의 수리를 요하는 차량을 모두 포함한 것이다.
126) 소련군의 손실은 32,899명에 달했으며 이 중 8,492명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이었다. Glantz & House, p. 300. 반면 3월 6일에서 13일까지 독일군의 손실은 14,818명으로 이중 3,702명이 사망 혹은 행방불명이었다. 같은 기간 동안 46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상실했다. Maier, pp. 240 & 268.
127) 이 작전 기간 중 너무나 심각한 진창 때문에 독일 전차 지휘관들은 전차 보다는 잠수함이 필요하다고 불평하는 보고를 올렸다. Erickson, p. 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