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21일 화요일

내가 맹아론자라니! ㅋㅋㅋ

얼마전에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해방이후의 (정치, 경제적) 성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해방 이후의 성장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라 식민지 시기 일본의 역할에 대해서는 낮게 평가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대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상대방이 저를 대뜸 “자본주의 맹아론자+민족주의자”로 인식하더군요. 아주 웃기는 경험이었습니다.

어째서 A가 아니면 자동으로 B가 된다고 생각하는건지 이해를 못 하겠더군요. 어쨌든 저는 졸지에 자본주의 맹아론을 신봉하는 민족주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놈이 그놈!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미국측 자문단장이었던 토마스 도드(Thomas Joseph Dodd)가 1946년 7월 1일 아내 그레이스에게 보낸 편지 중 한구절.

내 사랑 그레이스,

지난 토요일에 재판은 한시까지 진행되었고 우리는 마지막 피고를 마무리 했어. 우리는 모두 우리가 중요한 단계를 넘어섰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런데 다시 문제가 생겼어. 예전에 러시아쪽에서 독일이 스몰렌스크 인근의 카틴 숲에서 항복한 폴란드군 장교 1만1천명을 학살했으므로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거 기억하지? 물론 독일쪽에서는 러시아에서 학살을 저질렀다고 주장해왔지. 이제 우리는 양쪽 모두로 부터 세 사람씩의 증언을 들어야 해. 이게 얼마나 걸릴지는 주님만이 아시겠지. 나는 그냥 동전던지기로 정해버리면 좋겠어. 독일과 소련 모두 범죄를 저지를 동기가 충분하니까. 그리고 어떻든 양쪽은 1939년에 힘을 합쳐서 폴란드를 유린했으니 책임을 나눠 가져야 해. 단지 단 하나의 사실, 한가지 “작은” 사실만은 이론의 여지가 없겠지. 1만1천명의 폴란드군 장교가 잔혹하게 집단으로 살해됐다는 점 말이야. 그리고 독일이나 러시아 둘 중의 하나가 범인이라는 건 확실하겠지. 내 생각에 세상은 독일과 소련이 논쟁을 벌이는 것엔 관심이 없을 것 같아. 하물며 역사의 관심도 받지 못하겠지.

(후략)

Christopher J. Dodd, Letters from Nuremberg : My father’s narrative of a quest for justice(Crown Publishing, 2007),  p.333

2010년 9월 20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예고편을 올렸을 때 천천히 연재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천천히 올리고 있군요;;;; 타고난 게으름은 어쩔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 테렌스 홈즈의 첫 번째 반론


테렌스 주버의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로 논쟁의 막이 오르자 군사사연구자들은 기존의 학설을 완전히 뒤엎는 파격적인 주장에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전통적인 학설, 즉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작전계획이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주버의 주장에 반대했습니다. 주버에 대한 본격적인 반론은 테렌스 홈즈(Terence M. Holmes)가 시작했습니다. 홈즈는 주버가 논문을 발표했던 War in History 8권 2호(2001)에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란 제목의 반박논문을 기고합니다.

이 반박논문은 핵심인 1905년 비망록에 대해서는 주버의 분석이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홈즈는 이 논문에서 주버의 주장은 참신하지만 근본적으로 1905년 비망록 자체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참모부연습과 부대전개계획 등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훌륭하지만 정작 주사료가 되어야 할 1905년 비망록에 대한 분석이 크게 부족했다는 것 이지요. 홈즈는 슐리펜이 실시한 여러 연습에서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을 작전계획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버의 주장에 대해 슐리펜이 가장 우선시 한 것은 적의 주력을 ‘어떤 곳에서 상대하건 간에’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파리를 우회하여 포위’하는 것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소(小)몰트케가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또한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병력부족문제에 대해서도 주버와는 반대로 설명합니다. 주버는 1905년 비망록에 나타난 대규모 포위기동을 실시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것이 실제 작전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해석한 반면 홈즈는 슐리펜은 실제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작전을 구상했는데 이 과정에서 병력부족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병력 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다음으로는 조금더 구체적인 부분으로 들어가서 비판을 시작합니다.
홈즈는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군에 대한 평가도 주버가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전통적인 학설에서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를 과소평가하게 된 슐리펜이 서부전선에 주력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한 것을 독일군의 정보보고를 인용해 비판했는데 홈즈는 이에 대해 주버가 제한적인 사료를 확대해석하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실제로 슐리펜이 러일전쟁을 계기로 러시아군의 공세능력을 낮게 평가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료는  충분하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슐리펜이 러시아군의 공세능력을 낮게 평가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대한 공세계획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설명합니다. 주버가 첫 번째 논문에서 주장하는 것 처럼 프랑스군의 선제공격을 막아낸 뒤 반격하는 계획은 프랑스가 러시아와 양면공세를 펼칠때나 가능한 것 이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없이 프랑스가 단독으로 선제공격을 걸어올 가능성은 없으니 슐리펜으로서는 독일측이 먼저 서부전선에서 전략적인 공세로 나서는 방향으로 선회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같은 내용을 가지고 주버와는 다른 해석을 하고 있죠. 홈즈는 근거로서 1905년 비망록이 프랑스의 국경지대 방어선에 대해 심도깊은 분석을 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즉 1905년 비망록은 변화된 전략환경에 대한 슐리펜의 고민이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슐리펜이 퇴임직전 실시한 마지막 연습에서 러일전쟁의 교훈을 언급하면서 강력한 요새선에 대한 정면공격 대신 ‘적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해 포위섬멸을 실시할 것’을 강조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규모 우회기동으로 파리를 서쪽에서 포위하는 것은 주버가 설명한 대로 국경지대에서의 포위 섬멸이 불가능할 경우 취해야 할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은 맞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홈즈는 주버가 슐리펜이 국경지대에서 반격을 통한 포위섬멸전에 집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 파리를 포위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을 완전히 생략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홈즈는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국경지대에서의 포위섬멸전을 강조하는 내용이라는 주버의 해석은 완전히 틀린 것이며 이 비망록의 핵심은 엔(Aisne)강 서안, 랭스(Rheims)에서 라 페레(La Fere)를 잇는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슐리펜은 이 방어선의 좌익으로 우회하면 반드시 프랑스군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 입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이 방어선을 포기한다면 파리 동쪽의 방대한 지역이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기 때문에 독일군으로서는 매우 유리한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프랑스군이 엔강 서안의 방어선까지 포기하고 마른강과 세느강의 방어선으로 후퇴한다면 독일군으로서는 매우 골치아픈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경우 파리라는 대도시가 이 방어선의 좌익에 강력한 보루로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경우 유일한 대안은 파리의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하는 것 밖에 없었다는 것이 홈즈의 설명입니다. 즉 홈즈는 파리 서쪽으로의 대규모 우회기동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으로 슐리펜도 이러한 상황은 가능한 피하길 원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할 수 있도록 우익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 입니다.
1905년 비망록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첫 번째 안에서는 ‘가능하다면’ 프랑스군의 주력을 파리 동쪽, 즉 랭스와 라 페레를 잇는 선에서 포위 섬멸할 것을 구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첫 번째 안에서도 ‘가능하다면’이라는 단서를 단 것 처럼 프랑스군 주력이 마른과 센강 서안으로 퇴각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떨치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섯번째 안과 여섯번째 안에 이르면 파리를 우회포위하는 것을 확실하게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홈즈는 다시 한번 주버가 제기한 문제 하나에 대해 답을 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전까지의 각종 연습에서는 파리까지 진격하는 것이 실시되지 않았는가? 홈즈는 아주 명쾌한 대답을 내놓습니다. 슐리펜은 은퇴할 무렵이 되어서야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으며 이것이 1905년 비망록에 반영되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1905년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세를 감행할 경우 독일군의 우익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운 서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우익의 공격을 계속하되 최대 진출선을 라 페레까지로 제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파리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프랑스군이 단계적으로 철수할 경우를 가정한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에 선제공격을 감행한다면 독일군 우익의 기동이 제한되는건 지극히 당연하다고 비판합니다. 슐리펜은 어디까지나 프랑스군 주력을 포착해 섬멸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프랑스군 주력이 어디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파리를 우회하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점은 어디까지나 포위섬멸전의 주역이 독일군 우익이라는 것 입니다. 홈즈는 주버가 슐리펜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다음으로는 주버가 1905년 비망록과 슐리펜이 재임중에 실시한 여러 연습간에 이질성을 강조하는데 대한 비판이 이어집니다.
주버는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이 동부전선에 주의를 기울였음을 강조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프랑스가 방어를 취할 경우에만 서부전선에서 선제공격을 고려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홈즈는 바로 이점을 지적합니다. 즉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이 선제공격을 감행할 가능성은 줄어들었고 프랑스는 방어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앞서 주버가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군의 능력에 대한 독일군의 평가에 대해 완전히 잘못 알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1904년 4월의 첫번째 참모부 연습은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점이 나타나지만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슐리펜의 서부전선에 대한 작전개념은 어디까지나 그가 1897-98년에 작성한 비망록과 베셀러가 1900년에 작성한 작전연구에 나타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의 1897-98년 비망록과 베셀러의 작전연구가 ‘슐리펜 계획’의 개념과 유사한 점은 주공인 우익을 베르덩 북쪽으로 돌파하게 한다는 점 말고는 없다고 비판합니다. 특히 우익의 규모가 작다는 점이 문제라고 봅니다. 1897-98년 비망록은 우익에 8개 군단을, 베셀러의 작전연구는 10~11개 군단을 배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1905년 비망록에 명시한 우익의 규모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슐리펜이 우익의 규모를 크게 강화하는 계기가 된 것은 1903년 4월 총참모부 철도국(Eisenbahnabteilung)의 국장이었던 슈탑(Hermann von Staabs)과의 회의에서 슈탑이 모젤 이북에 집결할 병력의 규모를 두배로 늘려야 한다는 건의를 한 이후라고 봅니다. 그리고 슐리펜은 1904년 4월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 이 점을 명확히 했다고 강조합니다. 홈즈는 1903~1904년이 ‘슐리펜 계획’이 구체화 되는 결정적인 시기라고 보는 것 입니다.
홈즈는 이 시기에 정립된 기본 개념이 1904년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과 1905년 비망록에 그대로 이어진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홈즈는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우익이 최대한 진출해서 프랑스군이 어떠한 대응을 취해도 포위될 수 밖에 없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슐리펜은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이 국경의 프랑스 방어선을 우회하더라도 그 후방에 있는 다른 방어선에 막힐 가능성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1905년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파리라는 강력한 거점을 끼고 있는 방어선으로 후퇴할 가능성을 지적한 것과 이어지는 맥락으로  해석합니다.
계속해서 홈즈는 주버가 1904~1905년의 참모부연습과 1905년 비망록의 연관성을 부정하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주버는 1905년 비망록에서는 우익에 35.5개 군단을 배정하고 있지만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는 우익에 17개 군단만을 배정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1904년 4월의 참모부연습에서는 우익이 약했기 때문에 슐리펜이 참모부연습이 끝난 뒤 최종논평에서 우익을 더 강화할 것을 강조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할 경우 우익에 위치한 주력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는 우익의 5개군을 베셀(Wesel)-디덴호펜(Diedenhofen) 일대에 집결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계획에 명시한 것과 거의 비슷하다고 주장합니다. 홈즈는 아헨-트리어 지구의 철도망이 증설되면서 슐리펜이 우익의 주력을 보다 더 북쪽으로 배치하게 됐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슐리펜은 메츠의 요새를 강화해서 우익의 측면을 더 강화하는 조치도 취하도록 했습니다. 홈즈는 이 결과 1905년 참모부연습을 실시할 무렵에는 병력, 부대집결지, 초기 목표 등에서 슐리펜계획의 윤곽이 잡히게 되었다고 봅니다.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주버는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실시한 세 차례의 워게임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세 차례의 워게임 모두 우익을 활용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홈즈는 이러한 주버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합니다. 프라이탁-로링호벤(Freiherr von Freytag-Loringhoven) 중령이 프랑스군을 맡아 실시한 첫 번째 연습에서는 독일군 우익의 포위기동에 의해 프랑스군 주력이 격파되었으며 쿨슈토이벤(von Steuben) 대령이 프랑스군을 맡은 세 번째 연습에서도 주버의 설명과는 달리 우익이 충분히 강력했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단지 슈토이벤 대령이 프랑스군을 맡은 두 번째 연습에서만 슐리펜이 우익의 상당수를 로렌 방면으로 돌렸지만 이경우 조차 주력의 5개 군 중 2개군을 돌린데 불과했으며 우익에 남은 나머지 3개군은 주력이 빠진 프랑스군의 2선급 부대를 상대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홈즈는 이 연습에 대한 쵤너(Zoellner)의 논평은 슐리펜의 구상이 옳다는, 즉 프랑스군의 공세를 저지한 뒤 우익으로 공세를 감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서술합니다. 그리고 같은 자료를 참조한 주버가 사료를 오독했다는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실시한 두 번째 워게임에서 프랑스군 주력이 로렌을 공격해 올 경우 우익의 일부 병력을 돌린 것이 부적절한 결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는 프랑스군이 로렌을 공격할 경우 우익은 지체없이 공세에 나서도록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1905년 11~12월에 실시된 워게임에 대한 해석도 주버와는 다릅니다. 이 워게임은 동부와 서부 양쪽에서 전략방어를 취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계획을 작성하기 전에 실시한 마지막 연습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버는 이 워게임이야 말로 1905년 비망록이 작전계획이 아님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1904년 이후 가지고 있었던 구상을 살펴본다면 1905년 겨울의 워게임이야 말로 슐리펜의 구상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른다면 1905년 비망록에서 독일군의 병력이 파리를 우회 포위하기에 부족하다고 지적한 점도 쉽게 설명이 가능해 집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병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언급한 것은 단지 독일군의 증강을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하는 반면 홈즈는 이것을 말 그대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위해 병력 증강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왜 소(小) 몰트케는 총참모장에 취임한 직후 슐리펜으로 부터 넘겨받은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가? 주버는 이 점에 주목해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작전계획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설명하기 까다로운 문제지요.
홈즈는 소 몰트케는 프랑스군이 전략적 방어를 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총참모장에 취임한 이후 상당기간 슐리펜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이점은 1906년 참모부연습에서 프랑스군 주력이 로렌을 침공할 것이라는 가정을 한 것에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소 몰트케가 이후 우익에 주력을 집중한 공세를 취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홈즈는 소 몰트케 취임 이후 국경지대, 특히 메츠의 요새를 강화하면서 프랑스 내에서 로렌을 공격하는 것이 어렵다는 의견이 강해졌다는데 주목합니다. 그리고 독일 내에서도 이런 환경에서는 프랑스가 선제공격을 감행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프랑스가 공격을 감행한다면 베르덩 북쪽으로 주력을 집중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우 우익에 주력을 집중한 독일군과 직접 격돌하게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홈즈는 결국 이 때문에 1911년에 소 몰트케가 그동안 회의적으로 생각했던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을 재검토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여기서 홈즈는 소 몰트케가 1911년에 ‘1905년 비망록’을 재검토 했다는 주버의 해석은 옳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 말고는 주버의 해석이 틀렸다고 비판합니다. 홈즈는 주버가 ‘1905년 비망록’에 첨부된 지도 중에서 국경지대에서의 반격을 명시한 지도(1:800,000축적의 지도5와 지도5a)만을 주목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홈즈에 따르면 비망록에 첨부된 지도는 대부분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통한 대규모 우회기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프랑스군이 취할 것으로 예상되는 방책은 슐리펜이 비망록을 작성할 당시와는 달라졌기 때문에 소 몰트케의 대규모 우회기동은 슐리펜이 구상한 것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습니다. 슐리펜은 대규모 포위섬멸을 위해 우회기동을 구상한 반면 소 몰트케는 방어선을 버리고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는 개념에서 우회기동에 주목했다고 보는 것 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지도 3과 6에 대한 해석도 달라집니다. 주버는 지도3에 파리까지 도달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작전계획으로서의 미비함을 강조하는데 홈즈는 소 몰트케가 슐리펜의 계획을 재검토했을 때 파리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다고 주장합니다. 소 몰트케의 목표도 파리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신속히 프랑스를 격파하고 서부전선의 병력을 돌려 러시아군을 상대하는 것 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홈즈가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슐리펜계획의 핵심은 파리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우익의 대규모 우회기동을 통해 프랑스군 주력을 섬멸하는데 있다는 것 입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소 몰트케가 1914년 8월 전역에서 어떤 식으로 야전부대를 지휘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소 몰트케는 1914년 8월 30일 독일 제2군이 생 캉탱 방면에서 반격을 받자 제1군과 2군에게 진격방향을 남서에서 남쪽으로 바꾸도록 했습니다. 프랑스군 주력이 파리로 퇴각하지 않고 반격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를 격파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 입니다. 즉 홈즈는 실제 전역에서 파리를 점령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으며 적 주력의 섬멸이 최우선이었음을 보여주려 합니다. 그리고 주버가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이 실시한 여러 연습과 ‘1905년 비망록’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슐리펜계획의 핵심이 무엇인지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2010년 9월 13일 월요일

미국 공군에 대한 어떤 평가

팽덕회는 한국전쟁 참전 직전 사단급 이상 주요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미국 공군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고 합니다.

미 공군은 비록 조선에 [항공기를] 많이 투입하고 있지는 않음에도 우세하다. 그러나 공군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공군은 나름대로의 곤란한 점이 있다. 또한 공군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서운 존재도 아니다.

‘在中人民解放军师以上干部动员大会上的讲话’(1950. 10. 14), 彭德怀军事文选(中央文献出版社, 1988), p.323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대륙의 기상!

2010년 9월 6일 월요일

짜증나는 사설

한주의 시작을 잡치는 짜증나는 사설 하나.



나는 전쟁 첫날 최전방의 장병들이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을 때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었던 인간의 기념관을 세우는 건 절대 반대다. 

예전에 축석령 전투 전적비에 이름조차 알수 없어 그냥 무명용사로 표기된 전사자들의 명단을 보면서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전쟁 초기의 혼란통에 기록을 상실해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무명용사들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을 때 이승만은 피난열차를 타고 도망쳤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국민을 버리고 도망치는 건국대통령 따위를 받들어 모신다고 생기는게 아니다. 글자그대로 권력이 시민에게 있기 때문에 정통성이 생기는 것이지.

2010년 9월 3일 금요일

셔먼의 놀라운 생산성!

셔먼의 생산성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었습니다. 다음의 자료를 보시죠.





이 엄청난 설계에서 알 수 있듯 셔먼은 비숙련 노동자 한 명 조차 1분이면 생산할 수 있는 놀라운 생산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입니다. 독일놈들이 전쟁에 진 것도 다 이유가 있지요.



우리는 셔먼의 깜찍한 위용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