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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8일 월요일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 한 편

무장친위대는 2차대전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있는 소재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화려한 전과를 자랑하는 정예 사단에서 전쟁 말기에 급조한 빈약한 사단이 함께 존재하며, 인원 구성을 보면 독일인 은 물론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까지 참여하는 등 다채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호기심을 자극할 수 밖에 없지요. 무장친위대 출신 참전자들이 주축이 되어 펴낸 무장친위대에 관한 수많은 서적들이 상업적으로도 좋은 성과를 거둔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 보니 LAH나 다스 라이히 같은 정예 사단은 물론 뭔가 좀 부실해 보이는 사단의 부대사까지 출간되는 실정입니다.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무장친위대 제14척탄병 사단은 후자 중 하나입니다. 재미있게도 이 별볼일 없어 보이는 사단은 상업적으로 출간된 사단사만 두 권이 있습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인 Richard Landwehr가 펴낸 Fighting for Freedom: The Ukrainian Volunteer Division of the Waffen-SS와 Michael O. Logusz가 펴낸 Galicia Division: The Waffen-SS 14th grenadier Division 1943-1945입 니다. 이게 가능한 배경에는 캐나다와 미국에 존재하는 꽤 큰 규모의 우크라이나 이민자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 많은 수는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 출신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도 계시겠고 이쯤에서 눈치채신 분들도 많으실텐데,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는 꽤 말이 많은 집단입니다.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5호에 실린 Per Anders Rudling의 “‘They Defended Ukraine’ : The 14. Waffen-Grenadier-Division der SS(Galizische Nr.1) Revisited”는 이 복잡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는 우크라이나의 우경화와 맞물린 무장친위대 복권 문제를 화두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이 사단의 간략한 역사와 전후 행적을 고찰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전개되고 있는 우경화에 맞물린 무장친위대의 복권에 깔린 위험한 정치적 의도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유셴코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있던 시기에 우크라이나의 민족운동 지도자 스테판 반데라Степан Андрійович Бандера를 건국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를 복권시키려는 움직임까지 힘을 받은 바 있습니다. 필자는 유셴코는 무장친위대에 대한 복권까지 나가지는 않았지만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여러 정당과 단체에 대한 복권도 시사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정부가 우익 운동에 편승했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겠지요. 유셴코의 후임인 야누코비치 대통령 시기에는 반데라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에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우크라이나 서부를 중심으로 한 극우들은 오히려 무장친위대 복권에 더 열을 올립니다. 마치 독립을 전후한 시기 인도에서 찬드라 보스와 인도국민군에 대한 반응과도 비슷하지요. 필자는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를 복권하려는 움직임에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이 함께하는 점을 경계합니다. 실제로 독일에 협력한 우크라이나인 무장단체와 무장친위대는 민간인 학살에 참여한 혐의가 있지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지요.


필자가 주목하고 있는 또 하나는 캐나다 등 북미에 존재하는 대규모의 우크라이나 이민자 공동체 입니다. 잘 아시다 시피 이중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민 온 무장친위대와 무장단체 출신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북미에서 자리를 잡은 뒤 우크라이나 이민자 공동체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치까지 올라갔습니다. 필자는 그러한 사례 중 하나로 2011년에 앨버타 대학에 우크라이나 무장친위대 출신인 세명의 우크라이나계 이민자가 기부를 한 점을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캐나다 사회에서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의 활동을 찬양하고 정당화 하는데 힘써 왔습니다.


우크라이나 무장친위대에 대한 옹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무장친위대 옹호와 맥을 함께 합니다. 무장친위대를 일반친위대와 분리하여 ‘순수한 군인’의 위치에 놓고자 하는 것이지요. 무장친위대의 입장을 반영한 상업 출판물에서는 전쟁범죄와 무장친위대를 분리하려는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간혹 오토 바이딩어처럼 적극적으로 무장친위대의 입장을 옹호하고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경우도 있지요. 잘 알려져 있는 것 처럼 오토 바이딩어는 다스 라이히 사단사에서 오라두르-쉬르-글랑 학살에 무장친위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논지를 펼쳤고 뒤에는 아예 단행본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이 점은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전쟁범죄를 부정하면서 여기에 ‘민족주의’를 추가해 비판을 봉쇄하는 무기로 삼습니다. 이 점은 한국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이 반공이라는 방패를 통해 비판을 면하려는 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필자의 비판은 꽤 흥미롭습니다. 필자는 우크라이나 무장친위대가 창설될 당시 부터 나치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으며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면할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필자는 여기에 냉전 이후 러시아와 폴란드, 우크라이나에서 진행된 홀로코스트 연구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지적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후타 페냐치카Гута Пеняцька학살을 포함해 우크라이나인 친위대원이 참여한 전쟁범죄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후타 페냐치카 학살에 대해서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연구 결과가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고 학살 당시 지휘계통에 무장친위대 제14척탄병사단이 들어가는가의 여부도 여전히 논의의 대상입니다.)
다음으로는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를 옹호하는 측에서 전쟁 말기에 부대의 명칭이 무장친위대에서 우크라이나 국군으로 개칭된 것을 구실로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나치즘과의 단절을 꾀하는 시도를 비판합니다. 필자는 1945년 4월 28일에 발행된 사단의 신문이 반유대주의 선전으로 가득차 있다는 점을 들어 전쟁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크라이나 무장친위대가 나치즘에 충실했다고 주장합니다.


필자의 지적대로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는 아직 시작단계에 있습니다. 이 사단의 ‘군사 작전’에 집중한 상업적인 출판물은 오래전 부터 존재했지만 이들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고찰은 이제 시작단계라는 것 이지요.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도 몇 가지 생각할 점을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2011년 7월 19일 화요일

우연히 드라마 "계백" 예고편을 봤는데;;;;

우연히 드라마 "계백" 예고편을 봤습니다.

대사가 꽤 웃기던데 계백이 "당나라를 끌어들이고도 부끄럽지 않은가"운운하는데서 실소가 나오더군요. 유치한 민족주의 냄새가 풀풀나는데 예고편 배경음악은 또 에반게리온 사운드트랙에서 뽑아왔습니다. 할말이 없군요.

하여튼 신라가 외세를 끌여들였네 운운하는 개소리를 21세기에도 하고 있다니 참 짜증이 납니다. 아니.그럼 신라인들이 앉아서 망하기나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7세기의 신라인들이 뭘 잘못했길래 21세기에 사는 덜떨어진 인간들이 품는 망상의 희생물이 돼야 합니까.

그냥 한마디로 병신같습니다. 이런 정신나간 작품은 그냥 망하는게 나을 듯.

2011년 6월 21일 화요일

아데나워, 그리고 동맹에 대한 잡담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Steven J. Brady의 Eisenhower and Adenauer : Alliance maintenance under pressure, 1953-1960이 있습니다. 이제 막 읽기 시작해서 진도가 별로 나가지 않았는데 앞 부분 부터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부분은 1953년 미국을 방문한 아데나워가 아이젠하워에게 한국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 의료인력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한 부분입니다. 명목상으로는 의료인력 지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간접적으로나마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군사적 기여를 하겠다는 의사 표명인 셈이지요. 사실 이때는 독일의 재무장 논의가 급물살을 타던 시점이라 이건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무렵  기민당은 10만명 수준의 군대 창설을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고 쓸모있는 동맹이라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이후 소련의 엉성한(???) 평화공세에도 불구하고 친미-친서방노선을 고수해 나갔습니다. 이것은 독일이 통일 된 뒤 돌아보니 결과적으로 매우 현명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결과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겠지만. 2차대전 이후의 소련은 독일을 위험한 잠재 적국으로 보았기 때문에 독일을 중립화 해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려고 기도했습니다. 물론 아데나워같은 보수진영의 선수들은 이런 엉성한 속임수를 간단히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친미노선을 고수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요즘 중국이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한국을 중립적으로 만들려고 기도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역시나 흐루쇼프 이래의 엉성한 속임수인게 한눈에 보이는데 문제는 이런 조잡한 수작이 의외로 민족주의적인 진영에서 잘 먹히는 것 처럼 보이는 겁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합니다만 한미동맹이 존속하려면 한국 쪽에서 동맹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줘야 합니다. 그런데 민족주의적인 진영은 이런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요. 한국전쟁 직후와 같이 대립구도가 명확한 상황에서는 동맹이 비교적 잘 기능했습니다만 냉전이 끝나고 표면적으로 평화가 정착된 지금 시점에서는 안보적 동맹이 제대로 돌아가기가 어렵습니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점은 흐루쇼프가 엉성한(?!?!) 평화공세를 시작했을 때 한국 내의 일부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은 이것을 새로운 변화의 전조로 받아들였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제3세계의 부상을 바라보면서 미국에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의 한미동맹 구도에 비판적인 집단 중 일부는 바로 1960년대에 뿌리를 둔 지식인들이지요. 물론 저도 미래를 내다보는 재주가 없으니 예언은 할 수 없습니다만 과거 이러한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의 전망이 계속해서 빗나간 것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주장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2011년 4월 16일 토요일

제3세계에 대한 어떤 관점

“리비아/예멘 지도자 인물평”을 읽고나니 생각이 하나 떠올라서...

최근 수개월간 중동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엄청난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비교적 국제문제에 무관심한 한국에서도 최근의 중동은 큰 관심을 끌었지요. 정치와는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중동 문제가 다뤄진 것을 보면 그 영향력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일본의 대지진 등 굵직한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지금은 중동에 대한 관심이 다소 줄어들길 했습니다만.

하지만 좀 아쉬운 점이라면 한국 내에서는 갑작스럽게 관심이 끓어오른 것에 비해서 흥미로운 글이 부족했다는 것 입니다. 주류언론의 기사들은 정보 전달이 중심이었지만 한국의 언론들이 일반적으로 국제문제, 특히 한반도 주변국을 벗어난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취약한 편이었으니 그다지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꽤 흥미로웠던 것은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들에 올라온 일반인들의 글이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수의 글이 중동 사태를 단순한 독재세력vs민주화세력의 대결로 보고 있었고 특히 한국의 경험을 단순하게 대입시켜 보고 있었던 것 입니다.

해당 국가의 정치·사회적 배경에 대한 고찰없이 단순한 선악의 문제로 바라본다는 것이 좀 답답했는데 진보를 자처하는 몇몇 언론들도 유사한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꽤 흥미로웠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관점은 리비아 사태와 뒤이은 서구의 군사개입에도 반영되고 있습니다. 진보를 자처하는 한 인터넷 언론의 다음 기사가 이런 관점을 잘 보여주는 것 같군요.


사실 한국의 진보 지식인들이 제3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런 구제불능의 발상은 하루이틀 된 것이 아니라서 더 재미있습니다. 1965년에 씌여진 다음 글을 보시지요.

1965년 4월 반둥 회의의 기조연설을 통해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은 “우리 인도네시아인이나 그 밖의 아시아·아프리카 제국(諸國)의 형제국들이 겪어온 고전적 형태의 것으로만 식민주의를 생말자. 식민주의는 이 밖에도 일국내의 소수의 외래적 집단에 의한 경제적 지적 물질적 지배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현대적 의상을 쓰고 있는 것이다. 식민주의는 능숙한 솜씨로 과감히 행동을 하는 적이며 여러가지 가장을 하고 나타난다. 식민주의는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던간에 이 지구상에서 뿌리를 뽑아야 할 악이다.” 이와 같은 수카르노의 기조연설 내용은 전후 후진국 개발원조라는 휴머니즘 탈을 쓰고 지배복종의 관계를 수립한 신식 제패형태, 즉 유선형의 제국주의적 신식민주의의 출현을 단적으로 말하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신형태의 제국주의와 대항하여 투쟁을 아끼지 않고 있는 신생 민족국가의 움직임은 아시아·아프리카를 비롯한 전세계의 후진지역 전반에 긍(亘)하여 확대되고 있으며 이 들의 횡적인 연대와 단결의 힘은 금일 세계사 상황의 주요한 새로운 원동력으로  등장함으로써 안으로는 진정한 민주주의적 사회정의의 실현과 완전한 정치적 경제적 자주독립을 쟁취하고 밖으로는 전쟁을 반대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신생제국이 달성한 독립의 과정과 형태는 일정하지 않고 각양각색의 특성을 가지고 있음은 주의깊게 관찰해야 할 점이다.

朴哲漢,「新生民族國家의 基本動向」,『靑脈』8호(1965. 5), 130-131쪽

저 글은 기본적으로 서구는 제국주의적인 惡이고 제3세계는 평화를 애호하는 善이라는 관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1965년은 한국이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불과 20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한국은 여전히 빈곤한 후진국이었던 때 입니다. 한일국교정상화가 가시화 되어 일본의 새로운 침략을 우려하던 때였으니 진보적 지식인들이 제3세계에 기대를 걸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이 21세기에도 저것과 다름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우울한 일이지요. 인용문에서 제국주의 반대를 소리높여 외친 인도네시아만 하더라도 동티모르에서 똑같이 ‘제국주의적인’ 행태를 보였던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서방세계의 선진국들이 현실정치적인 바탕에서 움직이듯 제3세계의 모든 나라들도 마찬가지로 움직이고 있는 것 이죠. 뭐, 제가 굳이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이곳을 들러주시는 분들이라면 아주 잘 알고 계실 것 입니다. 하지만 인용문이 씌여진 지 40년이 훨씬 넘었건만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별로 발전한게 없어 보입니다. 정말 우울한 일이죠.

진보적 지식인들의 서구와 제3세계에 대한 이분법적인 인식은 앞으로도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은 한국의 식민지 경험과 강력한 민족주의가 가장 큰 원인일 것 입니다. 한국의 역사적인 경험은 마찬가지로 식민지 경험을 가진 제3세계에 대한 객관화를 어렵게 하는 요인입니다. 1960년대의 지식인들이 그러했던 것 처럼 식민지 경험이라는 공통요소는 제3세계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을 가지게 만듭니다. 21세기의 한국은 더 이상 제3세계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국가가 되었지만 과거의 경험은 너무나 깊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2010년 1월 17일 일요일

우리 여자들을 지킵시다! - 안방전선 방어작전???

「또 하나의 전선 : 2차대전 중 독일과 영국의 안방전선」과 엮은 글 입니다.

즉 날로 먹자는 포스팅이지요;;;; 언제나 그렇듯 땜빵용 불법날림번역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전쟁에서 안방전선의 중요성이 어떤 방식으로 강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입니다.

"우리" 여자들을 지킵시다(Defending "our" women)

성 (性)은 민족주의에서도 이용된다. 민족은 여성화하고 국가는 남성화 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여성은 의미에 따라 민족으로 상징되며 백여년 전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기세를 떨치면서 여성과 (민주화 된)남성 대중은 정치적 맥락으로 포섭되었다. 여성의 모습은 19세기 벵갈 민족주의의 밑바탕에 깔린 상징적인 의미와 같이 혼란스러운 집단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어떤 집단을 통합하거나 또는 축출하기 위해 영토의 경계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육체를 민족의 상징, 집단 내부의 표식, 또는 남성에 의해 지켜지고 보호받아야 할 국가적 '자산'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 여자들이 강간당하는 것은 적국의 남자들이 민족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한 은유 방식이 되기도 했다. 한 인종 집단이 "민족의 영역이 위협받거나 위태롭다고" 느꼈을 때 이것은 노래나 전설을 통해 적들이 어린 여자를 납치하거나 유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는 "영웅이 될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미국 남북전쟁과 전후 남부의 복구 시기에 남부 백인 여성이 흑인과 섹스를 한다는 상징은 남부 백인 남성들을 동원하는 기제가 되었다. 2차대전 초기 독일의 폴란드나 폴란드 침공, 또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과 같은 군사적 침략은 "강간"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양차 세계대전 시기의 전시선전은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간이라는 주제를 활용했다. 1차대전 당시 영국 정부는 독일군의 강간에 대해 선전하면서 "당시 (독일에) 점령당한 나라의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것을 통해 전쟁을 상기시키고 묘사했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군 병사들에게 그들이 전선에서 싸우는 동안 러시아군이 그들의 고향을 점령하고 그들의 여자를 강간할 것이라는 전단을 살포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은 오스트레일리아군 병사들에게 미군이 그들의 여자와 놀아나고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선전을 했다. 독일에서는 프랑스 여자들이 프랑스 식민지군대의 흑인들과 섹스를 하고 영국 여자들이 미군의 흑인 병사들과 섹스를 한다는 선전을 했다. 과거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각 민족 상호간의 강간이 "민족의 표식"이 되었으며 다른 민족집단을 위협적인 강간마들로 묘사하는 선전을 통해 각 민족집단 내부의 단합을 강화했다.

민족을 여성화 하는 방식은 (강간 피해자 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의 성적 유동성을 제약하면서 전통적인 성차별을 강화했다. 1990년대에 크로아티아 정부는 여성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행위, 그중에서도 특히 낙태를 비난했다.(크로아티아의 집권당은 '태아도 크로아티아 민족의 일원이다'라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세르비아의 정교회 총대주교는 전쟁에서 하나 뿐인 자녀를 잃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아이를 낳으라고 권했다. 여성들은 사회적 재상산이라는 역할 외에도 "고장의 전통을 보존하고 .... (그렇게 함으로써) 민족의 미덕을 발휘" 하기 위해 집단의 문화를 수호하는 역할도 맡아야 했다.

"우리" 여자들에 대한 적들의 위협이라는 상징은 아주 기괴한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1997년에 팔레스타인 내에서 판매되는 이스라엘의 껌에는 아랍 여성들을 성적으로 흥분시키고 동시에 아랍인의 출산률을 낮추기 위해서 소녀와 소년들을 불임으로 만드는 프로게스테론(progesterone) 성분이 첨가되어 있다는 주장을 했다.(이런 소문 중에는 이슬람 도덕을 약화시키고 여성들을 성적으로 속박해 정보원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도 있었다) 이 괴소문은 널리 확산되었는데 사실 그 껌들의 원산지는 스페인이었으며 독립된 기관에서 분석한 결과 프로게스테론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프로게스테론은 여성의 성욕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성욕을 다소 감소시키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그렇다고 이 성분이 피임에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Joshua S. Goldstein, War and Gender : How Gender shapes the War System and Vice Vers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p.369-371

언제나 그렇듯 잘사는 양키의 존재는 잘 살지 못하는 남자들을 두렵게 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을 애낳는 기계로 여기는 것은 남의 일도 아닌 것이 남조선의 보수반동집단(?!)도 비슷한 접근법을 취하고 있지요. 물론 한국은 전쟁 상황은 아닙니다만 사회적으로 위기를 느낄 정도로 전반적인 상황이 좋지 않고 희한하게도 이런 상황에 맞춰 여자들을 갈궈대고 있습니다. 여기에 맞춰 보수적인 남성들은 여자들의 성적 방종과 영어 강사하러 온 양키나 공장일 하러 온 파키스탄인이 한국여자와 자는 것을 맹렬히 비난하지요. 어떻게 보면 영어 강사하러 온 양키는 돈 많은 GI에, 공장일 하러 온 파키스탄인은 식민지군대의 흑인이나 강간마 러시아군과 유사한 이미지 같기도 합니다. 여기에 요상한 소문이 뒤섞여 야릇한 괴담으로 진화하기도 하지요.

한국의 가부장적인 민족주의가 사회경제적 어려움과 맞물리면서 전쟁에서나 나타날 법한 요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야 말로 진짜 전쟁인지도;;;;

2009년 11월 19일 목요일

야당의 올바른 자세???

60년대 잡지를 읽다가 재미있는 구절이 있어서 소개해봅니다. 1965년 초 한일회담 타결이 가시화 된 시점의 이야기 입니다.

야당지도자들은 한일회담에 대하여 두가지 전략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첫째는 한일회담은 어차피 타결되어야 하는 것인데 국민의 반일감정에 비추어 타결한 정부는 치명상을 입는다. 그러므로 적당히 반대한다는 명분과 기록만 남겨두고 박(정희)정권으로 하여금 타결하게 하자는 것인데 지금 몇몇 재야정치인은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둘째는 이번의 한일교섭은 한국측에 매우 불리한 것이어서 극한투쟁을 해서라도 반대해야 한다, 그 반대투쟁에 국민의 반일감정이 가세하면 현정권을 아주 무력하게 거세하거나 또는 더 나아가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으로 민정당 주류에서 작년에 그와같은 전략을 따랐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한일교섭이 대단원을 향해 쾌속으로 달리는 이때 야당측이 어떤 전략을 택하고 있는지가 분명치 않다. 현실이 지나치게 앞질러 가고 있으니 둘째의 전략을 택할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첫째의 전략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南載熙*, 「剩餘價値만 남기는 政治」, 靑脈 第7號(1965. 4), 15쪽

* 당시 조선일보 문화부장

오늘날의 야당 또한 민감한 일이 발생한다면 위의 두가지 중 한가지 테크를 타겠지요. 이래서 야당 노릇 하는게 쉽다는 이야기가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09년 10월 18일 일요일

한미관계에 대한 어떤 논평

최근 이글루스에서 한일회담과 관련된 토론이 진행중입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논쟁거리여서인지 좋은 글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저는 특히 번동아제님의 '한국이 원하는 돈을 받지 못한 이유'를 가장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번동아제님께서는 이 글에서 한일협정이 진행되던 과정의 국제적 정세와 당시 한국이 처한 한계점에 대해 명료하게 정리를 해 주셨는데 저 또한 이 글의 주된 논지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저도 뭔가 사족을 조금 달아볼까 했는데 생각해 보니 한일협정과 관련된 문서는 주로 이승만 정부 시기에 이루이전 협상에 대한 문서만 조금 읽었는지라 박정희 정부 시기의 한일협상에 대해서는 마땅히 적을 만한 것이 없더군요;;;; 대신 당시 한일협정 문제로 고조된 반미/반일감정을 경계하는 보수적인 지식인들의 견해를 보여주는 글을 한 편 소개해 볼까 합니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재직중이던 박준규(朴俊圭)는 시사잡지인 청맥 1965년 1월호에 「條約協定으로 본 韓美關係」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습니다. 이 글의 결론부분에서는 당시 한일협정 체결문제로 격앙된 민족감정을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전략)

이상에서 몇 가지 주요 조약과 협정을 통하여 한미관계를 고찰하였다. 결과적으로 느껴지는 것은-적어도 조약 및 협정의 조문을 통해서는- 과연 우리는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마땅히 받어야 할 대접을 받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 다음에 느껴지는 것은 대체로 미국은 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소극적이고 회피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 문제를 하나의 가외(加外)의 부담으로 생각하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의아심이다. 그리고 최근의 미일관계를 조감할 때 미국의 한국과 일본에 대한 비중의 격차가 너무나 현격하다는 비애감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느낌을 어떻게 승화시키고 한미관계를 어떻게 조정해나가느냐가 한국의 당면한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한미관계를 국가대 국가의 외교관계로서 고찰할 때 우리는 미국에 대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친 기대를 걸고 있는것이 아닌가를 재삼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국제사회란 도덕사회도 자선사회도 아니며 그곳에서는 '힘'의 서열에 따라서 응분의 지위가 규정되며 각자의 지위에 따라서 응분의 대우를 받기 마련이다. 일본이 한국보다 월등한 비중의 대우를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는 것도 그러한 원리로 부터 연유하는 것이며 어느 의미에서 한국은 미국의 대우를 탓하기 전에 스스로의 무력함을 한탄해야 할 입장인지도 모른다.

일본이 받고있는 정도의 대우를 미국으로부터 받지 못한다고 반미적 감정에 흐른다거나 한미관계의 역사적 의의를 망각하고 미국 이외의 다른 강국(예컨데 일본)과 새로운 기축(基軸)관계를 형성하려고 덤벼드는 것은 모두가 '한국의 국가이익'에 배치되는 처사라고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한반도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2차대전 말기에 한국을 분점(分占)하게 된 것은 대일전쟁 종결을 위한 전략적 고려의 결과였으며 한반도에 항구적으로 고착할 의도를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대한정책은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지만 한미관계의 기축이 변동할 리는 없을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대미일변도니 사대주의니 하고 비판할는지도 모르나 세계정치의 현세하(現勢下)에서 소위 중립국가를 제외한 국가로서 미국 혹은 쏘련과의 기축에 크고 작고간에 의존하지 않는 나라가 몇개나 되는지 따져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영국, 서독, 일본 등은 말할 필요도 없고 '드골'의 프랑스가 큰소리 칠 수 있는 것도 역시 미국 세력의 배경하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한국처럼 미국의 전쟁처리 과정에서 탄생한 나라가 대미관계를 국가 이익의 기축으로 삼는것은 자명의 이치라 하겠다.

(후략)

朴俊圭,「條約協定으로 본 韓美關係」, 靑脈 第5號(1965.1), 82~83쪽

지금은 이 당시보다 사정이 많이 좋아졌지만 큰 틀은 유지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입니다. 물론 '민족감정'에 입각해서 본다면 당시 협상은 굴욕적인 면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어쩔수 없는 당시의 국제적 역학관계가 그대로 반영된 것 이었습니다. 우리가 강화협상에 승전국의 지위를 가지고 참여할 수 있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수는 없었지요.

사실 논쟁의 시발점(?) 이었던 슈타인호프님의 글이나 번동아제님의 글은 어디까지나 당시 협상이 진행된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필요이상으로 흥분하는 분들이 보이는 것 같아 구경하는 입장에서 약간 난감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1964년이 아닌데 말입니다.

잡담하나. 한일협정관련문서가 공개된 뒤 동아일보에서는 이 협정 문서 전체를 PDF로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한일회담 관련 공개 문서 全文 다운 받기

2009년 8월 13일 목요일

The Ideological Origins of Nazi Imperialism, 그리고 잡담 약간

Woodruff D. Smith의 The Ideological Origins of Nazi Imperialism을 다시 한번 읽었습니다. 읽은지 꽤 돼서 내용이 가물가물해서 한 번 더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일 때문에 어수선해서 그런지 한 번 더 읽었지만 읽은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최근의 ‘간도떡밥’ 때문인지 재미있게 읽히긴 하더군요.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역시 파국으로 치닫기 직전인 9장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입니다. 저자인 Smith 또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제국주의적 정서’가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파고들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 대표적인 예로 1920년대에 제국주의적 팽창을 주제로 한 소설들이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는 1926년에 출간된 그림(Hans Grimm)의 소설 “Volk ohne Raum”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유사한 종류의 소설 중 성공한 작품으로 1926년부터 1935년까지 315,000부가 팔렸다고 하는군요.
이 소설의 저자인 그림은 유럽 외부의 식민지 획득을 옹호하고 Lebensraum을 동유럽에서 찾는 나치에 비판적인 경향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독일의 팽창을 옹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Lebensraum 사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될 수 있는 매개가 되었으며 정치적 보수주의를 확신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가장 재미있게 읽힌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듯 얼마 전 튀어나온 간도 반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간도 반환 문제는 상식적으로 봤을 때 말도 안되는 이야기 이지만 대중매체를 통해 주기적으로 재생산 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같은 언론사가 간도 회복 캠페인 같은 짓을 앞장서서 하기도 했지요. 2009년이 지나간다고 하더라도 간도 떡밥은 미래에 다른 형태로 변주되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이런 대책 없는 망상을 무책임하게 유포하고 있는 대중매체들입니다. 한국이야 독일 같은 강대국이 아니니 극우 정당이 집권해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개념 없는 민족주의 프로파간다가 판을 치는 것은 단순히 웃어 넘길 일은 아닙니다.

독도와 같이 민감한 문제가 튀어 나올 때 마다 반복되는 정치인들의 호들갑에서 볼 수 있듯 민족주의적인 정서는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입니다. 그리도 한반도 균형자론 같은 외교적 망신사례에서 볼 수 있듯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싸구려 민족주의를 팔어먹으려는 움직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이것은 어떻게든 대중의 정서에 영향을 끼칠 것 입니다. 물론 한국의 현실을 볼 때 나치 독일처럼 파국적으로 폭주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2009년 5월 29일 금요일

Q&A - 북한을 핵폭격 하면 어떻게 되나요?

Q : 저는 원자폭탄을 조금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북한에 핵 공격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A : 욕 먹습니다.


**********



한국전쟁 당시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문제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논의 되었습니다. 물론 원자폭탄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한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방안 중 하나로 타당성을 검토한 수준이었습니다.

1950년 7월 7일, 미 육군 작전참모부는 정보참모부에 북한에 핵 공격을 할 경우 세계 각국의 여론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대한 평가를 요청했습니다. 작전참모부가 상정한 원자폭탄의 사용 목적은 다음의 세 가지 였습니다.

a. 공산군에게 38선 이북으로의 철퇴를 강요하는 것
b. 위의 목표를 달성할 경우 공산군을 38선 이북에 계속 남아있도록 보장하는 것*
c. 유엔군의 북한 침공과 점령을 지원하는 것

a. Forcing the withdrawal of Communist Forces north of the 38th Parallel.
b. Having been successful in the above, insuring that communist Forces remain north of the 38th parallel.*
c. Supporting UN invasion and occupation of North Korea

Utilization of Atomic Bombardment to Assist in Accomplishment of the U. S. Objective in South Korea(1950. 7. 7),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 즉, 다시는 남침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

작전참모부의 요청에 대해 정보참모부는 7월 13일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습니다.

a. 한반도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서유럽과 남아메리카, 중동과 극동의 친미 국가들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b. 한반도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정치적, 선전적 측면에서 소련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c.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소련의 군사적 대응은 현재 가능한 정보로는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d. “궁극적 병기”에 가장 근접한 존재인 원자 폭탄은 그 사용에 대해 명백히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만 사용하도록 아껴야 한다. 한반도의 미군 잔류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사용할 필요가 생기지 않는 이상 한국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것이다.

a. The use of atom bombs in Korea would probably result in alienating pro-U.S. nations in Western Europe, Latin America, the Near and Middle East, and the Far East.

b. The use of atom bombs in Korea would serve to favor the Soviet from political and propaganda standpoint.

c. Soviet military reaction to U.S. atomic bombing cannot be definitely determined from intelligence available.

d. The atom bomb, being the nearest approach to “the absolute weapon”, should be reserved for use in such circumstances where its employment is clearly incontrovertible; which circumstances cannot be envisaged in Korea, except should the necessity for its use arise to permit the extrication of a remnant of U.S. Forces from Korea.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1,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서유럽은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한 국가가 많았기 때문에 미국은 이곳의 여론에 가장 민감했습니다.

(d) 서유럽은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미국이 재래식 군사전략과 전술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 무력하며 미국이 약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으로 받아 들일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대서양 조약(Atlantic Pact)과 리오 협약(Rio Treaty)에서 약속한 공약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서유럽의 신뢰를 깎아 내릴 것이며 소련의 유화정책이 통하도록 만들어 미국은 고립될 것이다.

(d) Western Europeans would regard use of the atom bomb as an admission of weakness and of U.S. inability to cope with the situation by traditional military strategy and tactics. This would undermine Western Europeans faith in U.S. ability to meet its commitments under the Atlantic Pact and Rio Treaty, and thus pave the way for appeasement of the U.S.S.R., leaving the U.S. isolated.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2,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아시아의 경우는 도덕적 비난의 우려도 제기되었습니다.

(a) 아시아인들은 남한과 북한에 있는 북한군의 목표에 대해 원자 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이다. 특히 남한 지역에 사용할 경우 민간인을 포함한 아군측의 피해 문제는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가져올 것이며 이것은 공산세력에 의해 “백인 대 황인”이라는 선전에 이용될 것이다. 새로운 아시아의 민족주의와 의식은 서방측이 진정한 협력을 얻기 위해서 활용해야 할 강력한 힘이다. 그러나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서구에 대한 아시아의 오래된 의심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을 통해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대될 것이다.

(a) The question in Asiatic minds as to the suitability of atom bomb against existing North Korean targets in both parts of Korea would be raised. Particularly in connection with their use in South Korea, the question of losses to friendly forces, including the civilian population, might cause a significant unfavorable reaction, which would be exploited by the communists in terms of “White versus Yellow” propaganda. The new Asiatic nationalism and consciousness is a powerful force which the west has been attempting to use to encourage genuine cooperation; Nevertheless, inherent Asiatic suspicion for West could easily be expanded by communist propaganda to unmanageable proportion in case of the use of atom bombs.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3,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비록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긴 했으나 여전히 미국은 핵 전력에 있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핵무기는 말 그대로 “궁극의 병기” 였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사용하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정치적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물건이었으니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마음대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에 비판적인 쪽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의 도덕적 문제를 비난하기 위해서 원자폭탄 투하문제를 자주 거론합니다. 하지만 이런 비난들은 당시 원자폭탄이라는 무기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상징성을 지나치게 간과한다는 생각입니다.

2009년 4월 18일 토요일

책을 읽던 중 떠오른 민족주의에 대한 잡상

어제 낮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50~60년대 경제개발에 대한 책 몇권을 꺼내 놓고 두서없이 읽었습니다. 원고마감이 코앞에 닥쳤는데 이게 무슨 미친짓 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갑자기 근로의욕이 뚝 떨어졌는지라 어쩔 수 없더군요. 다행히 오후 늦게 근로의욕을 회복하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어제 오후에 읽던 책들은 내용이 내용인지라 50~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될 무렵 한국의 민족주의적 정치세력과 미국의 대한정책이 가지는 시각차이에 대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1950년대의 미국은 아시아에서 높아져 가는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사회주의화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고 이때문에 4.19의 민족주의적 경향을 미심쩍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민족주의적 성향은 5.16 쿠데타 주도세력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이야 박정희의 독재적 측면이 부각되어 일반적으로는 5.16 쿠데타가 가진 민족주의적 성향을 간과하는 분들이 많은데 60년대에는 그렇지가 않았지요.

결국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이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으로의 선회한데에는 미국의 정책적인 압력이 많이 작용했습니다. 사실 미국의 원조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이 무리하게 내포적 공업화를 추진했다면 북한이 70년대 부터 겪었던 경제적 파탄을 조기에 겪고 남한의 국가 자체가 붕괴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하여튼 40~60년대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우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2009년 1월 15일 목요일

1차 중동전쟁과 레바논군

캠브리지 대학출판부(Cambridge University Press)에서 나온 The War for Palestine 2판을 읽는 중입니다. 이 책은 개정판으로 확대되면서 1948년 전쟁 당시 레바논군에 대한 글이 한편 추가되었더군요. 휴즈(Matthew Hughes)가 쓴 이 짧은 글은 꽤 재미있는데 이 글을 바탕으로 관련 1차 중동전쟁 당시 레바논군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레바논은 마론파 기독교도와 수니파, 시아파 이슬람교도, 드루즈파 등 잡다한 종교집단이 뭉쳐져 만들어진 나라이다 보니 독립부터 약간 불안한 출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레바논은 2차대전 중 자유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약속 받고 기독교와 이슬람교도 간에 국가협약을 체결해 독립국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이 협약은 1932년도 인구조사에 따라 대통령과 총리 등 정부의 주요 직위를 각 종파별로 배분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은 기독교도, 총리는 수니파 이슬람교도가 가지는 식입니다.
물론 기독교도는 물론 이슬람교도 중 상당수가 이 국가협약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레바논에서 이슬람의 우위를 확보하려 했으며 기독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마론파 기독교도들은 1920년대부터 팔레스타인의 시온주의 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이슬람교도에 상당수의 권력을 양보한 국가협약에 극도로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슬람교측이 시리아의 지원에 기대하고 있었던 것 처럼 기독교도들도 이전부터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이스라엘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위임통치 시기에 대통령을 지낸 에데(Emile Edde)는 1948년 7월 3일에 이스라엘과 비밀리에 회동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남부 레바논을 침공할 경우 기독교도가 베이루트에서 반정부 무장폭동을 일으킬 것을 제안했습니다. 벤 구리온은 레바논이 아랍의 포위망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레바논 기독교도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므로 에데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Hughes, 2007, p.206]
레바논 정부는 국내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전쟁으로 치달을 경우 국가가 혼란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레바논은 아랍연맹의 가맹국 중 유일하게 최후까지 외교적 해결을 주장했습니다.[Pappe, 2001, p.102~103]

어쨌든 정부에 반발하는 기독교 무장세력이 존재하는 만큼 레바논 군대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규군도 기독교도의 영향력이 강했다는 점 입니다. 국가협약에서 국방부장관이 기독교도에 배분되었을 뿐 아니라 군사령관도 기독교도인 셰합(Fuad Chehab) 대령 에게 돌아갔고 참모장은 드루즈 출신이 맡았습니다. 여기에 군 장교단의 상당수는 기독교도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레바논군이 정식으로 발족했을 때 레바논군 장교단의 71.8%가 기독교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식민통치의 유산이었습니다. 레바논 군대는 식민지 시기 프랑스가 만든 식민지군대에 기반하고 있었는데 당시 기독교도와 함께 군대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시리아인들은 레바논이 독립하자 시리아로 돌아가 버리고 레바논 군은 기독교도만 남게 된 것입니다. 장교단 중 이슬람교도는 1958년 까지도 20%를 겨우 웃도는 수준이었습니다.[Hughes, 2007, p.208] 셰합 대령은 신생 레바논군의 장교단을 소수의 정예화된 장교들로 구성하고자 했기 때문에 엄격한 심사기준을 적용했고 교육수준이 낮은 시아파나 수니파 이슬람교도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레바논의 이슬람 교도들은 레바논군을 ‘우리의 군대’라기 보다는 ‘기독교도 군대’로 인식하는 실정이었습니다.

1948년 전쟁 당시 레바논군은 4개 경보병대대(Battaillons de Chasseurs)와 1개 포병대대, 1개 기갑대대, 약간의 기병대와 독립 공병, 의무, 수송대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1차 중동전 당시 레바논군의 총 병력에 대해서는 Herzog의 2,000명 설에서 5,000명 설 등이 있는데 레바논군의 작전일지를 활용한 휴즈는 3,000명에서 3,5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중장비로는 18대의 프랑스제 전차(아마도 R-35)와 장갑차, 75mm와 105mm 포가 혼재된 2개 포대 규모의 야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제 전차를 대체하기 위해 미국측과 M-4 셔먼을 도입하는 문제를 협상했는데 이것은 1차 중동전쟁이 끝난 1949년 7월 까지도 진전이 없었다고 하는군요.[Hughes, 2007, p.207]

레바논은 아랍연맹(Arab League)에 가입한 만큼 이스라엘에 대한 전쟁에 공식적으로 참전하기는 했습니다.물론 실제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투입된 것은 3대대 하나 뿐이었다고 합니다. 레바논군은 1차 중동전 와중에도 국내 치안 유지와 산적 토벌 등을 위해 동원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작 이스라엘 군과의 전투는 제대로 치르지 못했습니다. 유일하게 이스라엘과 교전한 3대대 조차 1948년 5월 7일에 바알벡(Baalbek)의 치안 유지를 위해 1개 중대를 차출해서 보냈다고 하니 어떤 상태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는지는 짐작하실 수 있을 것 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레바논 정부는 국내의 친 시리아 성향 이슬람 교도들이 시리아와 연계할 것을 우려해 공식적으로는 이스라엘과 교전하는 상황에서도 동맹국(!)인 시리아 국경에 방어시설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Hughes, 2007, p.208]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레바논군 중에서 공식적으로 이스라엘과 교전한 것은 1개 대대에 불과했습니다. 1차 중동전쟁에서 레바논군의 역할은 미미하다 보니 대부분의 연구들은 레바논군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출간된 중동전쟁 개설서인 김희상(金熙相)의 『中東戰爭』에서는 레바논군의 공세에 대해 ‘네 줄’만을 할애하고 있지요(;;;;)[김희상, 1989, 59쪽]
1948년 5월 중순, 아랍연합군은 레바논군에게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군과 합류해 갈릴리 방면에 대한 공세에 나서라는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처음에 레바논 군에게 부여된 임무는 아크레를 점령한 뒤 하이파 방면으로 공세를 확대하는 것 이었습니다.[Pappe, 2001, p.125] 그러나 셰합 대령은 레바논군의 전력이 고작 4개 대대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전투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공세에 적합하지 않다고 연합군 수뇌부를 설득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도인 레바논 대통령도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셰합 대령의 방어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결국 레바논군이 담당한 알 나쿠라(al-Naqura) 지구에서는 별다른 교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레바논 국내의 이슬람 정치인들이 계속해서 정부에 공격을 요청했기 때문에 레바논군은 결국 소규모의 공격에 나서게 됩니다.
레바논군의 공격목표인 말리키야(Malikiyya)는 5월에 아랍해방군(ALA)이 잠시 점령했다가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다시 빼앗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레바논군에게는 다행히도 원래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이프타흐(Yiftach) 여단의 1대대가 예루살렘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전투경험이 부족한 오데드(Oded) 여단의 예하 부대가 배치되었습니다. 이 부대는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투경험이 부족한데다 장비도 형편없어서 전투력이 낮았습니다.
1948년 6월 5일, 레바논군 3경보병대대(병력 436명)이 공격을 개시하자 오데드 여단은 약간의 저항만 하고는 이날 17시30분에서 18시 사이에 말리키야를 버리고 퇴각했습니다. 레바논군은 전사자 두 명을 내는데 그쳤으며 이스라엘 측은 8명이 전사했습니다. 전투경험이 부족했던 오데드 여단은 이것을 최소 2개여단 규모의 대공세로 착각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스라엘 측의 이런 착각이 전후의 연구에도 반영되어 대표적인 개설서로 꼽히는 Herzog의 저작에도 이날의 전투는 시리아-레바논 연합군 2개 여단에 의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측은 이 공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시리아-레바논 연합군이 말리키야를 점령한 뒤 유대인 지구에 대한 공세를 계속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 전투는 소규모로 전개된 전투였으며 레바논군은 국내외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 마지못해 공세에 나선 만큼 말리키야를 점령한 선에서 공세를 멈추려 했습니다. 그리고 레바논군은 7월 8일에는 아랍해방군에게 말리키야를 인계하고 다시 레바논으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이것으로 1차 중동전에서 레바논군의 작전은 사실상 종료되어 버립니다.

이 전투는 군사적으로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레바논 정부는 국내의 이슬람교도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말리키야 전투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승리를 기념하여 베이루트에서 각 종파 지도자들의 참석 하에 대대적인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습니다.

레바논군이 생색내기용 전투를 벌이고 승전퍼레이드를 하는 동안 말리키야를 인계 받은 아랍해방군은 이스라엘 측의 대대적인 반격에 맞서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아랍해방군은 정규군이 아니다 보니 창설에 관여한 시리아와 이라크 정부 모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은 존재였습니다. 비정규부대 답게 부대원의 질적 수준도 들쑥 날쑥해서 그야말로 강간과 약탈 말고는 할 줄 모르는 건달부터 열렬한 아랍 민족주의자까지 다양한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훈련과 장비 모두가 부족해 정규전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 이었습니다. 게다가 보급도 부족해 9월 이후 탄약 재고가 영국제 소총은 1정당 18발, 프랑스제 소총은 1정당 45발, 기관총은 1정당 650발 수준이었습니다. 사실 아랍연맹의 가맹국들은 겉으로는 아랍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국내의 단결을 외치고 있었지만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서로 주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1차 중동전이 개시될 당시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이 국내의 강경한 여론 때문에 군대를 보내긴 했지만 실제로는 전쟁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시리아나 이라크 등은 아랍해방군 같은 군사조직을 지원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기묘하게도 당시 이스라엘은 아랍해방군의 전투력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이 발발할 무렵 아랍해방군의 총 병력을 25,000명 수준으로 평가하고 있었으며 장비와 훈련수준도 높다고 보았습니다.[Pappe, 2001, p.129] 물론 실제로는 아니었습니다만.

※ 1차 중동전쟁에 대한 과거의 저작들은 아랍해방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스라엘 측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섭니다. 먼저 7월 8일 발동된 데켈(Dekel) 작전으로 7월 18일 까지 중부 갈릴리 지역이 이스라엘의 손에 떨어집니다. 아랍해방군은 이스라엘의 공세가 시작되자 일방적으로 패주해 버립니다. 데켈 작전 종료 이후 일시적인 소강기가 시작되자 아랍해방군 병사들은 식량 부족, 질병 등의 이유로 대규모로 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0월 29일 이스라엘이 다시 히람(Hiram) 작전을 발동해 공세로 나서자 이미 붕괴 상태에 있던 아랍해방군은 전면적으로 패주합니다. 식량은 커녕 물 조차 보급받지 못하자 병사들은 물을 찾아 부대를 이탈해 버리고 일부 병사들은 식량을 사기 위해 레바논 경찰에 총을 팔아 버리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랍해방군의 제1 야르무크(Yarmuk) 대대는 히람 작전 기간 동안 불과 세 명의 전사자만 냈으며 피해의 대부분은 탈영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하니 전투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패주의 뒷면에는 구질구질한 이야기도 더러 있는데 패주하던 아랍해방군 병사들이 같은 무슬림 형제들을 약탈하거나 강간했다는 것 들입니다.

이미 승전행사를 한 뒤 쉬고 있던 레바논군은 이스라엘의 대공세를 맞은 아랍해방군이 포병 지원을 요청하자 점잖게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지역을 석권한 이스라엘이 레바논 국경을 넘자 교전을 회피하고 퇴각해 버렸습니다. 결국 레바논군에게 실질적인 전투는 말리키야 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1차 중동전이 끝나고 포로 교환이 있었을 때 레바논측은 36명의 포로가 귀환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아랍해방군에 지원한 레바논의 이슬람교도였다고 합니다.

레바논은 놀랍게도 1948년의 난장판을 별다른 손실 없이 회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 나라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항상 이렇게 좋은 결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나라가 결국 참혹한 내전에 휘말려 콩가루가 되었다는 씁슬한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요.


참고문헌
金熙相, 『中東戰爭』, 日新社, 1977/1989
Chaim Herzog, Shlomo Gazit, The Arab-Israeli Wars: War and Peace in the Middle East, Greenhill, 2004
Matthew Hughes, ‘Collusion across the Litani? Lebanon and the 1948 War’, The War for Palestine(2nd Edi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2007
Ilan Pappe, The making of the Arab-Israeli conflict 1947~1951, I. B. Tauris, 1992/2001

※잡담 1. 참고 자료를 찾아 볼까 해서 레바논군 웹사이트에 들어가 봤는데 영어, 프랑스어, 아랍어로 서비스가 되는군요. 레바논군 박물관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레바논이 안전해 지면 한번 구경해 보고 싶은 곳 입니다.

※잡담 2. 이번에 글을 쓰면서 찾아 보니 셰합 대령은 나중에 레바논 대통령이 되었더군요. 역시 어느 사회에서나 군고위직은 더 높은 자리로 가는 징검다리인가 봅니다.

2008년 11월 19일 수요일

Strangers in a Strange Land

'하얼빈지방검열부 통신검열월보' 1942년 11월호를 읽다보니 좀 재미있는 단체의 이름이 나오더군요.


天津猶太國復興運動結成委員會


중국에도 유태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으니 시오니즘 운동이 없지는 않았겠습니다만 2차대전이 발발한 와중에 독일 동맹국의 점령지역에서도 저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건 좀 깨더군요.

예전에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를 읽다가 국공내전 와중인 1948년에 만주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독일인들을 독일로 송환하는 문제가 언급된 것을 읽고 재미있게 생각했었는데 이건 그것 보다 약간 더 특이한 것 같습니다.

2008년 11월 7일 금요일

China and the Great War : China’s pursuit of a new national identity and internationalization

국내에 나온 중국 근현대사 개설서들은 대개 신해혁명을 다룬 다음 1차대전에 대한 설명은 간략히 하고 바로 베르사이유 조약과 5∙4운동에 대한 서술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제가 국내에 출간된 중국 근현대사 개설서를 모두 읽어 보진 않았습니다만 제가 읽어본 개설서들은 그런 경향이 있더군요. 1차대전 같이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일에 중국이 손가락만 빨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리 개설서라 하더라도 별다른 언급이 없는게 좀 의아했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중국사에 대한 영어권의 연구를 찾아 보다 보니 정말 중국과 1차대전의 관계에 대한 단행본이 손가락으로 꼽을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일본어권의 연구는 아직 제대로 찾아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본과 함께 해외 중국학 연구의 양대 산맥인 영어권의 연구가 저 정도 라는건 정말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번에 읽은 쉬궈치(Xu Guoqi, 徐国琦)의 China and the Great War : China’s pursuit of a new national identity and internationalization(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는 바로 영어권의 중국사 연구에서 ‘공백’이라고 할 만한 1차대전기 중국의 대외정책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중국의 1차대전 참전이나 중국 노동자들의 유럽 파송 같은 건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접한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을 1차대전이라는 하나의 틀에 넣어 잘 정리해 놓은 글은 처음 접했습니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중국의 1차대전 참전에 대한 연구서가 한 권 나온 일이 있긴 하다는데 이것은 중국 쪽 자료를 별로 이용하지 않고 주로 영국과 미국, 일본의 외교문서를 토대로 연구했다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이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내용이 재미있어서 간단히 소개해 볼까 합니다.

저자인 쉬궈치가 1차대전에 대해서 주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20세기 초 근대적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과제를 안게 된 중국의 지식층은 국내적으로는 근대적 ‘민족주의(nationalism)’에 기반을 두고 대외적으로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을 추구하는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병립은 다소 모순되게 느껴지는데 20세기 초의 중국 지식인들은 그것의 병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군요. 그리고 중국의 지식인들은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 전쟁을 통해 중국이 평등한 조건에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전쟁 초기부터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외적으로는 국력에 의해 지배되는 냉혹한 국제질서를 체험하고 이렇게 해서 강화된 민족주의는 5∙4운동을 통해 극적으로 표출됩니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자들은 5∙4운동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였지만 1차대전 중 근대적 민족주의가 함양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것이 수궈치의 지적입니다. 그리고 1차대전에서 중국의 역할 자체가 제대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존 키건이나 니알 퍼거슨 등이 쓴 유명한 개설서들은 1차대전 중 중국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책의 제목이 잘 보여주듯 이 책에서는 1차대전 중 중국 지식인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근대적 민족주의에 기반하면서 대외적으로 국제주의적 노선을 취하는 국가를 건설하려 한 노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먼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근대적 민족주의가 싹트는 과정을 먼저 살펴보고 있습니다. 청 왕조가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중국은 아직 세계체제(World System)하에서의 국민국가(nation state)라는 체제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 말에 가서야 중국 지식인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추상적이고 문화적인 ‘중화’라는 개념 대신 ‘시민’에 기반한 근대국가를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민’의 사상적기반으로서 ‘민족주의’가 대두되었습니다. 저자는 1911년의 신해혁명은 중국 최초의 근대적 공화국과 함께 근대적 민족국가를 추구하는 운동이었다고 평가합니다. 혁명을 계기로 언론의 자유를 타고 수많은 근대적 언론매체들이 등장한 것은 대중(public)의 증가와 동시에 이루어 졌습니다.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새로운 근대적 ‘대중’은 중국의 국가적 운명과 주권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이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이런 대중의 민족주의적 애국심이 국제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것을 민족주의적 국제주의라고 부르는데 좀 오묘한 느낌이 드는 용어입니다. 중국 지식인들이 새로운 중국 민족국가를 국제사회에 편입시키는 문제로 골몰하고 있을 때 드디어 (중국인들이 보기엔) 그 기회가 왔습니다.

1차대전이 발발한 것 입니다.

저자는 중국정부가 1차대전 초기부터 전쟁에 참전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 전쟁에 교전국의 일원으로 당당히 참전한다면 새로운 중국 국가는 평등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량치차오(양계초, 梁啟超)와 같은 지식인들과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군인들은 전쟁 초기 독일의 승리를 점치기도 했으나 전쟁이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자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원세개의 측근이고 참정원(參政院) 참정으로 있던 량스이(梁士詒)는 전쟁이 발발하자 원세개에게 참전을 부추겼고 원세개는 주중공사 존 조던(John Jordan)에게 영국이 칭타오를 공격할 경우 중국군 50,000명을 지원한다는 제안을 합니다. 영국 측에서는 이 제안을 거절했지만 중국은 1915년 말까지 계속해서 영국에게 참전의사를 밝힙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만약 중국이 연합군으로 참전한다면 일본의 참전을 이끌어내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을 우려했습니다.
참전제안을 거부당하자 중국 정부는 우회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에 노동자 파견을 제안합니다. 이공대병(以工代兵) 이라는 정책은 역시 량스이의 발상이었다고 하는데 량스이는 1915년 영국측에 30만명의 노무자(이 중 10만명은 전선에 투입될 무장 노무자)를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서부전선의 소모전으로 병력이 부족해지자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먼저 1915년 3월 프랑스가 중국에 노무자 지원을 요청해왔고 영국은 1916년 8월에 노무자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 노무자들이 서부전선으로 파견됩니다만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의 공헌은 철저히 무시당합니다. 당시 영국 외무상이었던 밸푸어(Arthur Balfour)는 중국의 전쟁 기여도에 대해서 “1실링의 돈도, 단 한 명의 목숨도 바치지 않았다”라는 혹평을 하기도 했다는 군요.
물론 중국도 뒤에 공식으로 전쟁에 참전하긴 합니다만 애당초 중국군 파병을 위해 재정지원을 하기로 한 미국이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영국과 프랑스로 부터의 군사지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결국 중국은 선전포고만 하고 전투는 참여하지 못 하게 됩니다. 저자는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중국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이었다고 비판합니다. 중국이 군사적으로 연합군에 기여한 것은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극동지역의 러시아군에 대한 무장해제에 참여한 정도였습니다.

한편, 이 와중에 원세개가 다시 제정을 부활하려다 정권 자체가 무너져 버려 군벌할거 시대가 도래하고 대외적으로는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중국의 주장이 모두 무시당하면서 낭만적인 국제주의를 추구하던 중화민국 초기의 외교정책은 붕괴에 이르게 됩니다.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해 국제체제에 편입되려는 첫 번째 시도는 이렇게 해서 무산되게 됩니다. 신해혁명 이후 한껏 고양된 민족주의적인 중국 지식인들은 1차대전과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연합국이 보인 태도를 통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의 본질을 깨닫고 이후 공산주의 등 다른 대안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자는 중국 지식인들이 냉전 초기까지도 국제주의적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을 함께 지적합니다.

전체적으로 매우 재미있는 책 이었는데 저자의 일부 논지는 동의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저자는 중국의 노무자 파견의 규모를 강조하면서 중국의 전쟁 기여도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으로는 비록 식민지 이긴 했지만 역시 수많은 노동자와 전투 병력을 파견한 베트남의 전쟁 기여도가 차라리 중국 보다 높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정적으로 중국은 전투 병력을 파병하려는 의지만 있었을 뿐 능력은 없었고 실제로는 파병조차 하지 못했으니 기존 역사가들의 중국의 전쟁 기여도에 대한 평가도 불공정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저자의 일부 논지에는 공감하지 못하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특히 쉬궈치는 근대국가 건설문제를 국제전쟁과 연결해 설명하고 있는데 저는 이런 시각을 매우 선호하는 입장입니다. 도서관에 반납할 일자가 다가와서 허겁지겁 읽느라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넘어간 부분도 많은데 뒤에 다시 시간을 내서 숙독해볼 생각입니다. 사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한권 구입하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2008년 9월 23일 화요일

오늘 구입한 책

저녁에 서점에 들렀다가 책을 한 권 샀습니다.


표지가 멋져서(!) 집어들었는데 목차와 본문의 몇몇 부분을 대략 훑어 보니 꽤 재미있어 보이더군요. 돌아오는 버스에서 조금 더 읽었습니다. 대략 훑어 보니 저자가 아시아 문제에 있어서 민족주의의 강화를 가장 우려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특히 한국 부분에서는 노무현 정부 들어 부쩍 높아진 한국의 민족주의 문제가 한-미-일 삼각동맹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꽤 주목하고 있더군요. 대표적으로 2005년에 있었다는, 한국이 미국에게 한미동맹의 가상적으로 '일본'을 넣자고 요구한 민망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헉;;;;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을 재미있게 읽은 경험이 있는데 이 책은 그 책 보다는 조금 딱딱해도 비슷하게 재미있어 보입니다.

2008년 8월 5일 화요일

Same Shit, Different Asshole

얼마전에 읽은 책에 꽤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있더군요. 그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다구치에 이어 일본민족기원론자로 알려진 인물은 잡지 '일본주의'에서 기독교를 공격했던 기무라 타카다로우(木村應太郞)였다. '일본주의'가 구미문화배격과 일본지상주의를 내세우면서 쓰보이에게 황색인종은 열등하지 않다는 기사를 쓰게 하거나 일본인의 뇌가 크다는 미국 학자의 연구를 신나게 소개했던 것은 3장에서 언급한 바 있다.

기무라가 ‘세계적 연구에 기초한 일본태고사’를 발표한 것은 일한병합 다음해인 1911년이었다. 서문에서 거론했던 다음 문장은 내용과 집필동기를 잘 이야기 하고 있다.

"옛날 신무천황을 오나라 태백의 후예라고 했다가 재난을 당한 학자가 있었지만 지금 대학의 많은 학자들은 그보다도 못하게 일본인의 기원을 남양원주민이라고 하거나 혹은 만주나 몽고의 미개한 야만인으로 기원을 삼거나 혹은 조선에서 도래한 인종이라고 하여 일본인종 열등기원론을 말해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일본민족은 아시아나 남양의 '열등기원'이 아니라고 기무라는 말한다. 그는 제국대학 같은 곳은 '일본인종열등주의자' 및 '저능학자의 소굴'이라고 하면서 그에 비해 오히려 서양인의 일본인종관에는 “일본인을 아리안족이라고 하여 일본인의 우월성을 인정하는”경우가 있다고 칭찬한다.

기무라의 설은 성서나 그리스신화와 기기신화, 그리고 그리스어와 일본어의 유사성을 들어 그리스·아리안 민족이 동천(東遷)하여 일본에 이르렀다고 주장한 것 이었다. 그에 따르면 이자나기가 저승국에 간 것은 그리스신화의 오르페우스와 같은 것이고, 가타카나의 'ナ'는 한자의 '十', 로마 숫자 'X'는 불교의 '卍', 기독교의 십자가와 같은 것이고, 유태교나 기독교의 사상은 일본사상의 표절이다. 나아가 '다카아마노하라는 아르메니아'이고 오호누시노미코토는 구약성서의 요셉이고 신공황후는 조선반도가 아니라 이탈리아반도를 정복한 것이라고 말한다.

기무라에 따르면 "일본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극동의 작은 섬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사상이나 포부가 비굴해져 일청·일로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신이 지닌 역량을 지각한 듯하나 아직 충분히 자각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래서 그는 "일본민족의 태고사는 실로 세계 태고사거나 중심사"라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 이었다.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 조현설 역,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원』, 소명출판, 2003, 235~237쪽

※쓰보이 쇼우고로우(坪井正五郞)는 도쿄제국대학교수와 도쿄인류학회회장을 지낸 인물입니다. 쓰보이 쇼우고로우의 학문적 활동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 하십시오.

과연. 20세기 초 일본 우익들이 좀 멀쩡한 정신상태를 가졌다면 친일파들이 환단고기 따위를 만들어 정박아들을 현혹하는 비극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인류학자들에 대한 기무라의 공격을 보자니 환빠들이 멀쩡한 역사학자들을 공격하는 걸 보는 듯해 쓴웃음이 날 정도입니다. "일본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극동의 작은 섬에 갇혀"라는 부분은 한민족이 반도에 갇혀 대륙의 기상을 잃었다는 환빠들의 망발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을 정도죠.

집단적인 열등감을 이따위로 표출하는 걸 보면 일본의 저질우익이나 남조선의 환빠의 관계는 가히 Same Shit, Different Asshole인 것 같습니다.

2008년 4월 25일 금요일

김구 = 테러리스트??? - (2)

만약 저에게 한국 현대사에서 과대평가된 인물을 몇 명 꼽으라면 저는 김구를 반드시 포함시킬 것 입니다. 김구는 1948년의 남북협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긴 하지만 임시정부 시절에는 반대파에 대해 살상을 일삼았고 해방 이후에는 요란하게 반탁투쟁을 벌여 이승만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주었죠. 어쨌건 김구는 한국내에서 매우 큰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사실 그가 1948년에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은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봤을 때 매우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하기 어렵습니다만… 김구는 종종 신성시되기도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부정적인 발언을 하기란 참 힘듭니다. 얼마전에는 어떤 외국인이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지요.

지금도 이러니 과거에는 김구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는게 더욱 힘들었을 것 입니다. 오늘 The Origin of the Korean War를 읽다가 한국어 판과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른 부분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이 부분 입니다.

김구는 테러리스트와 암살문제에 정통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므로 국내의 치안을 맡는 내무부장에 선임된 것도 논리적 타당성을 지닌다.

Bruce Cummings, 김주환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上』, 靑史, 161쪽

원문은 이렇습니다.

Kim Ku’s reputation as a terrorist and assassin no doubt commended him for duty concerning domestic law and order

Bruce Cummings, 『The Origin of the Korean War. Vol 1 :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 역사비평사, 1981, 2002, p.87

제가 번역했다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김구는 테러와 암살로 명성을 날렸기 때문에 국내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데 적임자라고 천거되었을 것이다.

“김구는 테러리스트와 암살문제에 정통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므로”는 풍기는 느낌이 뭔가 묘합니다. 김구가 테러나 암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 처럼 읽히거든요. 일부러 불필요한 의역을 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냥 직설적으로 '김구는 테러리스트...' 라고 옮기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요?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김구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김구 = 테러리스트???

2008년 3월 19일 수요일

찝찝한 중국의 민족주의

티벳 문제가 시끄러워 지면서 중국의 민족주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읽은 책에도 중국의 민족주의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례가 하나 있더군요.

나는 중국에서 민족주의가 떠오르고 있음을 몇 가지 점에서 입증할 수 있다. 내가 집필한 지리학 교과서는 전 세계에 팔렸으며 중국어로도 번역되었다. 미국 및 해외에 있는 학생과 일반 독자들에게서 책에 대한 비판적인 코멘트가 꾸준히 들어오는데, 미국 대학에 다니고 있는 중국 학생들도 자기 나라와 출신 지역을 기술한 방식에 대해 의견을 많이 보내오곤 한다. 중국 독자들은 특히 내 책에 실린 지도에 대해 불쾌해 하는 경향이 있다. 이 지도에는 대만이 중국의 한 지방으로 분명히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인도와 카자흐스탄의 일부가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지도 않고, 한 성난 기자가 편지에서 써 보냈듯이, 러시아의 태평양 연안 남동부를 ‘도둑맞은 땅’으로 표기하지도, 분쟁 중인 태평양의 섬들을 중국에 귀속시키지도 않았기 대문이다. 그런 사고방식은 중국 못지않게 대만에서도 강한 것 같다. 나는 티베트(시짱) 지역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세심하게 기술했지만, 대만 쪽에서 격렬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청나라 때 확립된 경계선은 변경할 수 없는 중국 국경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역사적 유산을 판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하름 데 블레이, 유나영 번역, 분노의 지리학 – 공간으로 읽는 21세기 세계사(Why Geography Matters), 천지인, 2007, 204~205쪽

주변에 이런 덜 떨어진 이웃이 있다는 것은 참 찝찝한 일 입니다.

2007년 5월 13일 일요일

자칭 민족주의자의 이중 플레이

다음은 1950년 4월 28일에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한 것 입니다.

한국 국회의 반응 : 국무부장관 각서와 호프만 서한의 번역본은 4월 7일, 헌법수정안 표결 다음날 개회 직후에 배부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사전 통보 없이 의회에 참석했으며 만약 국회의원들이 정부가 미국에게서 받은 경고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경제협력처나 미국 대사에게 문의한다면” 미국의 원조가 삭감되거나 철회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래티모어(Owen Lattimore)와 미국에 거주하는 불특정 다수의 한국인들을 비난한 뒤 1950/51년도 예산안으로 이야기를 옮겨서 의원들이 “개인적” 이해관계를 떠나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총선을 5월 25일에서 30일 사이에 실시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는 한편 이전에 총선의 연기를 요청한 것은 (국회의원들이)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편안한 마음으로 중요한 안건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명을 하고 사과했습니다. 부록 2(Enclosure 2)은 4월 7일 국회 회의의 요약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부장관 각서에 대해서 언급하자 대한국민당 당수인 윤치영 국회부의장이 즉각 발언을 했습니다. 윤치영은 자신의 생각에는 미국이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고 국무부장관 각서 뿐 아니라 이전에 번스 박사가 의회에 발언한 내용도 함께 비난했는데 이것은 마치 1920년 하니하라 주미 일본대사가 일본 의회에서 발언한 이후 있었던 상황과 유사했습니다. 윤치영은 “우리는 다시는 외국인들로부터 이런 문서를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는 우리의 우방 미국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국가로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입니다.”라고 평상시 보다 선동적인 어조로 말했습니다. 부록 2에는 국회속기록에서 발췌 번역한 윤치영 부의장의 발언 내용도 포함돼 있습니다.

“민족주의자” 윤치영 선생께서는 국회에서는 이렇게 민족의 존엄을 세우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양반 미국인들을 만나시더니 말씀이 이렇게 돌변하시네요.

부록 3의 윤치영과 대사관 직원과의 대화에 나타나 있듯 윤치영은 “국회의원 대부분은 한국이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생존 여부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으며 “(한국은 미국의 방침을 따를 것 이기 때문에) 핵심적인 문제는 미국의 방침에 따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국가의 입법부로서 최소한의 체면을 차리는 것.”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윤치영은 국무부장관 각서와 호프만 서한이 미국정부에 의해 발표됐다는 점이 유감이라고 지적한 뒤 이와 관련해서 한국의 언론 매체들이 국무부장관 각서의 전문을 직접 보도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아마도 이승만 대통령의 국회 출석과 윤치영 자신이 국무부장관 각서와 호프만 서한을 비판했다는 내용, 워싱턴의 특파원들이 송고한 내용 정도나 보도하는데 그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Drumright, Everret. F, 'Reaction to the Secretary’s Aide-memoire, April 28, 1950',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VII Korea, (Washington DC: USGPO, 1976), 54~55

이래서 민족 팔아먹는 정치인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요즘도 목청 높이며 민족 외치는 높으신 분들께서는 이런 짓을 하신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