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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16일 토요일

제3세계에 대한 어떤 관점

“리비아/예멘 지도자 인물평”을 읽고나니 생각이 하나 떠올라서...

최근 수개월간 중동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엄청난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비교적 국제문제에 무관심한 한국에서도 최근의 중동은 큰 관심을 끌었지요. 정치와는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중동 문제가 다뤄진 것을 보면 그 영향력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일본의 대지진 등 굵직한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지금은 중동에 대한 관심이 다소 줄어들길 했습니다만.

하지만 좀 아쉬운 점이라면 한국 내에서는 갑작스럽게 관심이 끓어오른 것에 비해서 흥미로운 글이 부족했다는 것 입니다. 주류언론의 기사들은 정보 전달이 중심이었지만 한국의 언론들이 일반적으로 국제문제, 특히 한반도 주변국을 벗어난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취약한 편이었으니 그다지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꽤 흥미로웠던 것은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들에 올라온 일반인들의 글이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수의 글이 중동 사태를 단순한 독재세력vs민주화세력의 대결로 보고 있었고 특히 한국의 경험을 단순하게 대입시켜 보고 있었던 것 입니다.

해당 국가의 정치·사회적 배경에 대한 고찰없이 단순한 선악의 문제로 바라본다는 것이 좀 답답했는데 진보를 자처하는 몇몇 언론들도 유사한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꽤 흥미로웠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관점은 리비아 사태와 뒤이은 서구의 군사개입에도 반영되고 있습니다. 진보를 자처하는 한 인터넷 언론의 다음 기사가 이런 관점을 잘 보여주는 것 같군요.


사실 한국의 진보 지식인들이 제3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런 구제불능의 발상은 하루이틀 된 것이 아니라서 더 재미있습니다. 1965년에 씌여진 다음 글을 보시지요.

1965년 4월 반둥 회의의 기조연설을 통해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은 “우리 인도네시아인이나 그 밖의 아시아·아프리카 제국(諸國)의 형제국들이 겪어온 고전적 형태의 것으로만 식민주의를 생말자. 식민주의는 이 밖에도 일국내의 소수의 외래적 집단에 의한 경제적 지적 물질적 지배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현대적 의상을 쓰고 있는 것이다. 식민주의는 능숙한 솜씨로 과감히 행동을 하는 적이며 여러가지 가장을 하고 나타난다. 식민주의는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던간에 이 지구상에서 뿌리를 뽑아야 할 악이다.” 이와 같은 수카르노의 기조연설 내용은 전후 후진국 개발원조라는 휴머니즘 탈을 쓰고 지배복종의 관계를 수립한 신식 제패형태, 즉 유선형의 제국주의적 신식민주의의 출현을 단적으로 말하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신형태의 제국주의와 대항하여 투쟁을 아끼지 않고 있는 신생 민족국가의 움직임은 아시아·아프리카를 비롯한 전세계의 후진지역 전반에 긍(亘)하여 확대되고 있으며 이 들의 횡적인 연대와 단결의 힘은 금일 세계사 상황의 주요한 새로운 원동력으로  등장함으로써 안으로는 진정한 민주주의적 사회정의의 실현과 완전한 정치적 경제적 자주독립을 쟁취하고 밖으로는 전쟁을 반대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신생제국이 달성한 독립의 과정과 형태는 일정하지 않고 각양각색의 특성을 가지고 있음은 주의깊게 관찰해야 할 점이다.

朴哲漢,「新生民族國家의 基本動向」,『靑脈』8호(1965. 5), 130-131쪽

저 글은 기본적으로 서구는 제국주의적인 惡이고 제3세계는 평화를 애호하는 善이라는 관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1965년은 한국이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불과 20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한국은 여전히 빈곤한 후진국이었던 때 입니다. 한일국교정상화가 가시화 되어 일본의 새로운 침략을 우려하던 때였으니 진보적 지식인들이 제3세계에 기대를 걸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이 21세기에도 저것과 다름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우울한 일이지요. 인용문에서 제국주의 반대를 소리높여 외친 인도네시아만 하더라도 동티모르에서 똑같이 ‘제국주의적인’ 행태를 보였던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서방세계의 선진국들이 현실정치적인 바탕에서 움직이듯 제3세계의 모든 나라들도 마찬가지로 움직이고 있는 것 이죠. 뭐, 제가 굳이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이곳을 들러주시는 분들이라면 아주 잘 알고 계실 것 입니다. 하지만 인용문이 씌여진 지 40년이 훨씬 넘었건만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별로 발전한게 없어 보입니다. 정말 우울한 일이죠.

진보적 지식인들의 서구와 제3세계에 대한 이분법적인 인식은 앞으로도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은 한국의 식민지 경험과 강력한 민족주의가 가장 큰 원인일 것 입니다. 한국의 역사적인 경험은 마찬가지로 식민지 경험을 가진 제3세계에 대한 객관화를 어렵게 하는 요인입니다. 1960년대의 지식인들이 그러했던 것 처럼 식민지 경험이라는 공통요소는 제3세계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을 가지게 만듭니다. 21세기의 한국은 더 이상 제3세계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국가가 되었지만 과거의 경험은 너무나 깊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2010년 2월 25일 목요일

식민통치의 폐해;;;;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지휘관들의 능력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런 문제는 계급이 높아질 수록 더 심해졌는데 한국군 장교단이 한국전쟁 이전 부터 급속하게 증가해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 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말이 많은데 게중에는 꽤 재미있는 의견이 하나 있습니다. 미 군사고문단장은 한국군 장교단의 자질 부족의 원인을 식민통치의 악영향에서 찾았습니다.

한국군은 지휘능력을 갖춘 인재가 부족하다. 주된 원인은 지휘관이 될 만한 잠재력을 가진 인력이 부족한 데 있다. 여러해 동안 한반도에서는 외국인들이 지도층을 구성했다. 한국인들 스스로가 지도층의 위치로 올라가는 것은 심하게 억제되었다.

The Korean Army does not have adequate leadership. The major factor to be considered here is the lack of potential leaders. Korea has had its position of leadershp filled by foreign elements for many years. Develpoment of indigenous leadership was forcefully discourged.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이 미 제8군 부참모장에게(1951. 5. 25),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Korea Army

꽤 일리있는 말 같습니다. 식민지 시기에 일본에서 정규 육군사관학교 교육을 받은 조선인은 겨우 세자리 숫자를 넘기는 수준이었고 태평양 전쟁 말기에 대량으로 양산된 조선인 장교단도 기껏해야 위관급이었으니 말입니다. 조선인 중에서는 가장 군사적인 지식이 풍부했을 홍사익은 전범으로 처형당했으니;;;; 그 밖에 김석원 같이 제법 높은 지위로 올라간 장교들도 있었지만 실전 경험은 야전에서 대대를 지휘한 정도가 고작이죠.

어쩌면 국가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키우지 못했다는것이야 말로 식민통치의 가장 지독한 유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2010년 2월 5일 금요일

황군의 정신력은 세계 최강?!?!

쇼와(昭和) 15년(1940년), 지나 전선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귀국한 김석원 중좌는 어떤 잡지에 이런 글을 기고하셨더랍니다.

나는 전지에 나갓슬때 황군의 아름다운 행동이며 부상병이 엉금엉금 기여가면서 돌격해 나가든그 눈물나는 정경을 생각하면 전쟁이란 반드시 무긔로만 익이는 것이 아니라 용사들의 아름답고, 놉고, 굿센 정신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와 갓흔 정신이 투철한 우리 황군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것은 당연한 리치입니다. 명치 37, 8년 일로전쟁때 탄환대신으로 2만명의 황군이 적의 진지에 뛰여드러가 성공한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황군이 얼마나 굿센 정신을 가젓는지 아실 것 입니다.

김석원, 「軍人의 立場에서 銃後에 附託함」,『家庭之友』(1940. 1) 28호, 4~5쪽

이 시절의 정신력 드립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한번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군인 뿐 아니라 식민지 지식인들도 황군의 정신력을 찬양하던 시절이죠.

김중좌께서는 정말 황군의 정신력에 감화받으셔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해방되고 1사단장을 하실 때도 육탄 10용사 같은 황군의 전통을 잇는 공격을 좋아하셨다고 하죠. 김석원 외에도 채병덕 같은 양반들도 정신력 드립을 쳐대고 있었던 걸 보면 정말 이것이야 말로 최악의 식민지 잔재인듯;;;;


잡담 하나. 위에서 인용한 글은 요즘 국립중앙도서관에 전자문서로 열람 가능하게 되어 있더군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아주 깨끗하게 스캔을 잘 해 놓아서 제가 예전에 복사했던 상태 나쁜 것은 못 보겠더군요. 전자문서들이 잘 되어 있다보니 옛날에 구닥다리 복사기로 복사한 것들 중 통째로 복사해서 제본 뜬 것이 아니면 모두 이면지로 재활용 하고 있지요.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이상 국립중앙도서관이 문 닫지는 않을 테니.

잡담 둘. 위의 인용문에서 *표 표시한 것은 아무래도 203고지 전투를 이야기 하는 것 같지요?

2009년 1월 15일 목요일

1차 중동전쟁과 레바논군

캠브리지 대학출판부(Cambridge University Press)에서 나온 The War for Palestine 2판을 읽는 중입니다. 이 책은 개정판으로 확대되면서 1948년 전쟁 당시 레바논군에 대한 글이 한편 추가되었더군요. 휴즈(Matthew Hughes)가 쓴 이 짧은 글은 꽤 재미있는데 이 글을 바탕으로 관련 1차 중동전쟁 당시 레바논군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레바논은 마론파 기독교도와 수니파, 시아파 이슬람교도, 드루즈파 등 잡다한 종교집단이 뭉쳐져 만들어진 나라이다 보니 독립부터 약간 불안한 출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레바논은 2차대전 중 자유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약속 받고 기독교와 이슬람교도 간에 국가협약을 체결해 독립국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이 협약은 1932년도 인구조사에 따라 대통령과 총리 등 정부의 주요 직위를 각 종파별로 배분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은 기독교도, 총리는 수니파 이슬람교도가 가지는 식입니다.
물론 기독교도는 물론 이슬람교도 중 상당수가 이 국가협약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레바논에서 이슬람의 우위를 확보하려 했으며 기독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마론파 기독교도들은 1920년대부터 팔레스타인의 시온주의 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이슬람교도에 상당수의 권력을 양보한 국가협약에 극도로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슬람교측이 시리아의 지원에 기대하고 있었던 것 처럼 기독교도들도 이전부터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이스라엘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위임통치 시기에 대통령을 지낸 에데(Emile Edde)는 1948년 7월 3일에 이스라엘과 비밀리에 회동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남부 레바논을 침공할 경우 기독교도가 베이루트에서 반정부 무장폭동을 일으킬 것을 제안했습니다. 벤 구리온은 레바논이 아랍의 포위망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레바논 기독교도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므로 에데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Hughes, 2007, p.206]
레바논 정부는 국내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전쟁으로 치달을 경우 국가가 혼란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레바논은 아랍연맹의 가맹국 중 유일하게 최후까지 외교적 해결을 주장했습니다.[Pappe, 2001, p.102~103]

어쨌든 정부에 반발하는 기독교 무장세력이 존재하는 만큼 레바논 군대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규군도 기독교도의 영향력이 강했다는 점 입니다. 국가협약에서 국방부장관이 기독교도에 배분되었을 뿐 아니라 군사령관도 기독교도인 셰합(Fuad Chehab) 대령 에게 돌아갔고 참모장은 드루즈 출신이 맡았습니다. 여기에 군 장교단의 상당수는 기독교도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레바논군이 정식으로 발족했을 때 레바논군 장교단의 71.8%가 기독교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식민통치의 유산이었습니다. 레바논 군대는 식민지 시기 프랑스가 만든 식민지군대에 기반하고 있었는데 당시 기독교도와 함께 군대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시리아인들은 레바논이 독립하자 시리아로 돌아가 버리고 레바논 군은 기독교도만 남게 된 것입니다. 장교단 중 이슬람교도는 1958년 까지도 20%를 겨우 웃도는 수준이었습니다.[Hughes, 2007, p.208] 셰합 대령은 신생 레바논군의 장교단을 소수의 정예화된 장교들로 구성하고자 했기 때문에 엄격한 심사기준을 적용했고 교육수준이 낮은 시아파나 수니파 이슬람교도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레바논의 이슬람 교도들은 레바논군을 ‘우리의 군대’라기 보다는 ‘기독교도 군대’로 인식하는 실정이었습니다.

1948년 전쟁 당시 레바논군은 4개 경보병대대(Battaillons de Chasseurs)와 1개 포병대대, 1개 기갑대대, 약간의 기병대와 독립 공병, 의무, 수송대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1차 중동전 당시 레바논군의 총 병력에 대해서는 Herzog의 2,000명 설에서 5,000명 설 등이 있는데 레바논군의 작전일지를 활용한 휴즈는 3,000명에서 3,5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중장비로는 18대의 프랑스제 전차(아마도 R-35)와 장갑차, 75mm와 105mm 포가 혼재된 2개 포대 규모의 야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제 전차를 대체하기 위해 미국측과 M-4 셔먼을 도입하는 문제를 협상했는데 이것은 1차 중동전쟁이 끝난 1949년 7월 까지도 진전이 없었다고 하는군요.[Hughes, 2007, p.207]

레바논은 아랍연맹(Arab League)에 가입한 만큼 이스라엘에 대한 전쟁에 공식적으로 참전하기는 했습니다.물론 실제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투입된 것은 3대대 하나 뿐이었다고 합니다. 레바논군은 1차 중동전 와중에도 국내 치안 유지와 산적 토벌 등을 위해 동원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작 이스라엘 군과의 전투는 제대로 치르지 못했습니다. 유일하게 이스라엘과 교전한 3대대 조차 1948년 5월 7일에 바알벡(Baalbek)의 치안 유지를 위해 1개 중대를 차출해서 보냈다고 하니 어떤 상태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는지는 짐작하실 수 있을 것 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레바논 정부는 국내의 친 시리아 성향 이슬람 교도들이 시리아와 연계할 것을 우려해 공식적으로는 이스라엘과 교전하는 상황에서도 동맹국(!)인 시리아 국경에 방어시설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Hughes, 2007, p.208]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레바논군 중에서 공식적으로 이스라엘과 교전한 것은 1개 대대에 불과했습니다. 1차 중동전쟁에서 레바논군의 역할은 미미하다 보니 대부분의 연구들은 레바논군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출간된 중동전쟁 개설서인 김희상(金熙相)의 『中東戰爭』에서는 레바논군의 공세에 대해 ‘네 줄’만을 할애하고 있지요(;;;;)[김희상, 1989, 59쪽]
1948년 5월 중순, 아랍연합군은 레바논군에게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군과 합류해 갈릴리 방면에 대한 공세에 나서라는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처음에 레바논 군에게 부여된 임무는 아크레를 점령한 뒤 하이파 방면으로 공세를 확대하는 것 이었습니다.[Pappe, 2001, p.125] 그러나 셰합 대령은 레바논군의 전력이 고작 4개 대대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전투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공세에 적합하지 않다고 연합군 수뇌부를 설득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도인 레바논 대통령도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셰합 대령의 방어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결국 레바논군이 담당한 알 나쿠라(al-Naqura) 지구에서는 별다른 교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레바논 국내의 이슬람 정치인들이 계속해서 정부에 공격을 요청했기 때문에 레바논군은 결국 소규모의 공격에 나서게 됩니다.
레바논군의 공격목표인 말리키야(Malikiyya)는 5월에 아랍해방군(ALA)이 잠시 점령했다가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다시 빼앗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레바논군에게는 다행히도 원래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이프타흐(Yiftach) 여단의 1대대가 예루살렘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전투경험이 부족한 오데드(Oded) 여단의 예하 부대가 배치되었습니다. 이 부대는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투경험이 부족한데다 장비도 형편없어서 전투력이 낮았습니다.
1948년 6월 5일, 레바논군 3경보병대대(병력 436명)이 공격을 개시하자 오데드 여단은 약간의 저항만 하고는 이날 17시30분에서 18시 사이에 말리키야를 버리고 퇴각했습니다. 레바논군은 전사자 두 명을 내는데 그쳤으며 이스라엘 측은 8명이 전사했습니다. 전투경험이 부족했던 오데드 여단은 이것을 최소 2개여단 규모의 대공세로 착각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스라엘 측의 이런 착각이 전후의 연구에도 반영되어 대표적인 개설서로 꼽히는 Herzog의 저작에도 이날의 전투는 시리아-레바논 연합군 2개 여단에 의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측은 이 공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시리아-레바논 연합군이 말리키야를 점령한 뒤 유대인 지구에 대한 공세를 계속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 전투는 소규모로 전개된 전투였으며 레바논군은 국내외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 마지못해 공세에 나선 만큼 말리키야를 점령한 선에서 공세를 멈추려 했습니다. 그리고 레바논군은 7월 8일에는 아랍해방군에게 말리키야를 인계하고 다시 레바논으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이것으로 1차 중동전에서 레바논군의 작전은 사실상 종료되어 버립니다.

이 전투는 군사적으로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레바논 정부는 국내의 이슬람교도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말리키야 전투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승리를 기념하여 베이루트에서 각 종파 지도자들의 참석 하에 대대적인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습니다.

레바논군이 생색내기용 전투를 벌이고 승전퍼레이드를 하는 동안 말리키야를 인계 받은 아랍해방군은 이스라엘 측의 대대적인 반격에 맞서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아랍해방군은 정규군이 아니다 보니 창설에 관여한 시리아와 이라크 정부 모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은 존재였습니다. 비정규부대 답게 부대원의 질적 수준도 들쑥 날쑥해서 그야말로 강간과 약탈 말고는 할 줄 모르는 건달부터 열렬한 아랍 민족주의자까지 다양한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훈련과 장비 모두가 부족해 정규전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 이었습니다. 게다가 보급도 부족해 9월 이후 탄약 재고가 영국제 소총은 1정당 18발, 프랑스제 소총은 1정당 45발, 기관총은 1정당 650발 수준이었습니다. 사실 아랍연맹의 가맹국들은 겉으로는 아랍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국내의 단결을 외치고 있었지만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서로 주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1차 중동전이 개시될 당시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이 국내의 강경한 여론 때문에 군대를 보내긴 했지만 실제로는 전쟁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시리아나 이라크 등은 아랍해방군 같은 군사조직을 지원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기묘하게도 당시 이스라엘은 아랍해방군의 전투력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이 발발할 무렵 아랍해방군의 총 병력을 25,000명 수준으로 평가하고 있었으며 장비와 훈련수준도 높다고 보았습니다.[Pappe, 2001, p.129] 물론 실제로는 아니었습니다만.

※ 1차 중동전쟁에 대한 과거의 저작들은 아랍해방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스라엘 측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섭니다. 먼저 7월 8일 발동된 데켈(Dekel) 작전으로 7월 18일 까지 중부 갈릴리 지역이 이스라엘의 손에 떨어집니다. 아랍해방군은 이스라엘의 공세가 시작되자 일방적으로 패주해 버립니다. 데켈 작전 종료 이후 일시적인 소강기가 시작되자 아랍해방군 병사들은 식량 부족, 질병 등의 이유로 대규모로 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0월 29일 이스라엘이 다시 히람(Hiram) 작전을 발동해 공세로 나서자 이미 붕괴 상태에 있던 아랍해방군은 전면적으로 패주합니다. 식량은 커녕 물 조차 보급받지 못하자 병사들은 물을 찾아 부대를 이탈해 버리고 일부 병사들은 식량을 사기 위해 레바논 경찰에 총을 팔아 버리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랍해방군의 제1 야르무크(Yarmuk) 대대는 히람 작전 기간 동안 불과 세 명의 전사자만 냈으며 피해의 대부분은 탈영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하니 전투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패주의 뒷면에는 구질구질한 이야기도 더러 있는데 패주하던 아랍해방군 병사들이 같은 무슬림 형제들을 약탈하거나 강간했다는 것 들입니다.

이미 승전행사를 한 뒤 쉬고 있던 레바논군은 이스라엘의 대공세를 맞은 아랍해방군이 포병 지원을 요청하자 점잖게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지역을 석권한 이스라엘이 레바논 국경을 넘자 교전을 회피하고 퇴각해 버렸습니다. 결국 레바논군에게 실질적인 전투는 말리키야 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1차 중동전이 끝나고 포로 교환이 있었을 때 레바논측은 36명의 포로가 귀환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아랍해방군에 지원한 레바논의 이슬람교도였다고 합니다.

레바논은 놀랍게도 1948년의 난장판을 별다른 손실 없이 회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 나라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항상 이렇게 좋은 결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나라가 결국 참혹한 내전에 휘말려 콩가루가 되었다는 씁슬한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요.


참고문헌
金熙相, 『中東戰爭』, 日新社, 1977/1989
Chaim Herzog, Shlomo Gazit, The Arab-Israeli Wars: War and Peace in the Middle East, Greenhill, 2004
Matthew Hughes, ‘Collusion across the Litani? Lebanon and the 1948 War’, The War for Palestine(2nd Edi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2007
Ilan Pappe, The making of the Arab-Israeli conflict 1947~1951, I. B. Tauris, 1992/2001

※잡담 1. 참고 자료를 찾아 볼까 해서 레바논군 웹사이트에 들어가 봤는데 영어, 프랑스어, 아랍어로 서비스가 되는군요. 레바논군 박물관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레바논이 안전해 지면 한번 구경해 보고 싶은 곳 입니다.

※잡담 2. 이번에 글을 쓰면서 찾아 보니 셰합 대령은 나중에 레바논 대통령이 되었더군요. 역시 어느 사회에서나 군고위직은 더 높은 자리로 가는 징검다리인가 봅니다.

2008년 12월 27일 토요일

필리핀의 부정부패에 대한 현지인의 견해

로버트 카플란의 『제국의 최전선』을 읽던 중 폭소를 터뜨린 부분입니다. 카플란이 한 필리핀 사업가와 이야기 하던 중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하는데 정말 소설의 한 부분 같더군요.


"필리핀은 왜 그렇게 부패가 심한 겁니까?"

내가 물어보자 그는 귀찮다는 태도로 따지듯이 이렇게 말했다.

"에스파냐 식민지 생활을 오래한 나라 치고 제대로 굴러가는 나라가 있으면 어디 한번 대보시오."

로버트 카플란/이순호 옮김, 『제국의 최전선 : 지상의 미군들』, 갈라파고스, 241~242쪽

정말 명쾌한 답변입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8년 12월 7일 일요일

간만의 짐바브웨 이야기

Zimbabwe declares cholera emergency

A month ago, the hospitals were overflowing. Now they lie empty

Zimbabwe declares cholera emergency

정치적 난장판과 식량난을 겪던 짐바브웨에 이번에는 콜레라가 덮쳤다고 하는군요. 짐바브웨의 참상을 전하는 소식들을 보면 1946년 남한에 창궐한 콜레라 사태의 참상이 연상될 정도입니다. 정치적 상황은 한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중재로 안정(????) 되어가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무가베는 반대 정파를 내각에 입각시키는 선에서 타협을 보려 했는데 효과는 꽝인듯 싶습니다.
정치적 문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 짐바브웨가 처한 문제가 산더미로군요. 짐바브웨는 경제적으로도 파탄상태이니 국제적인 원조가 없다면 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영국 등 국제사회는 경제적 위기와 전염병 창궐 등에 대한 무가베 정권의 무능에 대해 격렬히 비난하고 있습니다. 고든 브라운 영국총리와 라이스 국무장관이 무가베가 권좌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격렬히 비난하는군요.

Mugabe must go, Brown insists, as crisis grips Zimbabwe

Condoleezza Rice: Southern Africa must pressure Mugabe to quit

일부 인사들은 무가베 축출을 위한 국제사회의 무력 개입도 주장하고 있군요(;;;;)

짐바브웨를 볼 때 마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제3세계 국가의 정치적 지도자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능력과 정통성을 다 가지면 좋은데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죠. 물론 둘 다 없는 경우는 매우 많습니다만. 만약 둘 중 한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것이 좋을까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특히 남한도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이다 보니 자칫 잘못하면 민감한 정치적 논쟁에 휘말리기 딱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