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채병덕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채병덕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3년 9월 22일 일요일

한국전쟁 초기 채병덕 총참모장에 대한 김계원 포병단장의 회고

올해에 10.26당시 박정희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계원의 회고록이 나왔습니다. 김계원은 한국전쟁 초기 야전포병단장으로 국군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기에 개전초기의 상황에 대해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입니다. 사실 김계원의 증언 중 가장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1960년대 국방부에서 한국전쟁사 편찬을 준비할 당시 했던 증언입니다. 그러나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에서 60~70년대에 구술받은 증언록을 편집해서 공개한 『6.25전쟁 참전자 증언록』에는 이상하게도 김계원의 증언이 빠져있습니다. 그러니 정확도가 약간 떨어진다는  느낌은 들지만 올해 출간된 김계원의 회고록과 작년에 출간된 국사편찬위원회의 구술사료집에 있는 내용을 소개해 보지요.


이 포스팅에서는 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개전초기 채병덕 총참모장과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김계원 야전포병단장은 장로회 기독교인으로 1950년 6월 25일에는 일요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전 소식을 듣고 황급히 복귀해 포병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김계원이 국사편찬위원회와의 인터뷰에서 증언한 개전 당일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면담자 : 개전 당일 오후에 방문한 의정부 전선은 어떻던가요?
김계원 : 정확한 전선 상황은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 정확한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의정부 전선에 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정확한 전황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포병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화력지원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어떻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의견을 말했지만, 어느 것도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채병덕 장군이 와서 뭐라고 화를 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화력지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아군이 가지고 있는 포탄의 양이 이미 바닥이 나서 그 양반이 요구하는 더 많은 화력지원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서로 답답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면담자 : 일선에서도 계속 이동하셨나요?
김계원 : 나는 포병이라서 자동차로 자주 움직여 다녔습니다. 아까 말했던 최덕신 대위가 당시 포병학교 연대의 부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발발하자, 나는 전방으로 출동했는데, 최덕신 대위는 마지막까지 포병학교를 지키다가 철수했다고 합니다. 나는 전방에서 활동하다가 의정부 방면에서 헤어져서, 몇 사람과 합류해서 노량진으로 갔습니다. 

나종남 편집, 『국사편찬위원회 구술사료선집 19 : 한국군 초기 역사를 듣다 - 군사영어학교 출신 예비역 장성의 구술』, (국사편찬위원회, 2012), 52~53쪽.


국사편찬위원회와의 면담에서는 채병덕에 대한 표현이 완화되어 있는데 2013년에 출간한 회고록에서는 이때의 상황을 조금 더 직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해당 부분을 인용해 보지요.


부대의 열악한 통신시설로는 상황이 감지가 안 되어 나는 육군으로 작전국장 장창국(張昌國) 준장1) 에게 올라갔다. 이곳 육군본부 또한 전방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았다. 상황의 요약은 6월 25일 새벽 서부 전방일선에서 북의 기계화부대에 의하여 38선이 돌파당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무렵 육중한 몸의 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은 적침의 사실을 통보받고 안면이 벌겋게 상기되어 급히 본부상황실에 도착했다.
“적의 기계화부대가 돌격해 내려오는데 대체 포병은 뭐하고 있었던 거야?”
나를 보자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내가 포병의 상황을 보고 하려는데 틈도 주지 않고 또 흥분되어 말을 이었다.
“망할 놈에 영감태기가 날 보고 한강 남안으로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여 대비하여야 된다고 아주 명령조로 이야기 하더라고.”
조금 전 총장 방을 찾은 김홍일(金弘一) 장군이 오랜 중국군 공군 전략경험을 진언한 것을 놓고 하는 소리였다.
“장군은 무슨 놈에 장군, 허구헌날 후퇴만 하는 중국군 경력을 가지고.”
전시 위급한 상황에 힘을 합쳐도 부족한 판에 일본군 경력자의 중국군 경력자를 과소평가하는 군 통수권 내부의 처신이 못내 못마땅했다. 전방의 상황이 조금씩 보고가 이루어지자 채 장군의 푸념은 끝이 났다. 

김계원, 『The Father, 하나님의 은혜』, (SNS미디어, 2013),  284~285쪽.


채병덕 총참모장에 관한 당시의 증언을 보면 전황이 매우 불리했기 때문에 불안한 심리상태가 겉으로 표출되는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김종필은 2011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서울 함락을 막을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채병덕이 심하게 손을 떨어서 담뱃갑에서 담배가 줄줄 흘러나올 정도였다는 증언을 했지요.


김계원이 서울 함락 이후 채병덕을 만났을 때 채병덕이 보인 반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당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면담자 : 철수하는 과정에 채병덕 장군이나 다른 지휘관을 만나셨나요?
김계원 : 한강을 도하한 직후에 채병덕씨를 만났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좋지 않은 이야기는 할 수 없고, 내 상관이었으니까요. 채병덕 장군도 일본 군대에서 포병 출신이었습니다. 포병 출신인데, 실제로 포병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기 만드는 것만 했지, 야전포병으로 전쟁을 해 본 경험은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에 채병덕 장군이 참모총장이었는데, 우리 포병 부대들이 “대포가 없어졌다”고 보고를 했더니, 이분이 “가서 바로 대포 뺏어오지 못하면 자살하라”고 대답했다는 군요. 그래서 내가 “자살은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적의 포병을 뺏어오지는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우리 병사들이 힘들게 고전분투하고 있는데, 막무가내로 처리하는 참모총장의 태도에 화가 나서 방에서 나와서 전방으로 갔습니다. 그때 신응균 장군은 일본에 가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포병학교 학교장 대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것이 어설펐던 시기였습니다. 내 말도 잘 통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 행정부에 있는 장교나 병사들은 대부분 신참들이라서 이야기도 잘 통하지 않았는데, 다만 포병학교에 행정과장으로 근무했던 최덕신 대위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특하게도 최덕신 대위가 아무도 없는 포병학교를 지키느라고 혼자 남아있더군요. 

나종남 편집, 위의 책 53쪽.



1) 장창국 육군본부 작전국장의 계급은 대령이었습니다. 김계원의 회고록은 세부적인 사항에서 오류가 조금 있는데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는 회고록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2011년 12월 4일 일요일

국무총리 두 사람의 한국전쟁 회고, 그리고 잡담 하나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은 상당히 잘 쓰여진 회고록입니다.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서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교차 검증 가능한 부분을 살펴보면 제법 정확성과 객관성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한강교 폭파에 대한 서술은 미국 군사고문단의 기술과도 제법 맞아 떨어집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객관적으로 서술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밖에도 건군기, 한국전쟁 이전 옹진반도 교전과 같은 부분의 서술도 그렇습니다. 한국전쟁과 전후 재건기 한국군에 대한 서술을 읽으면 조금 더 자세하고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내용이 풍부하고 신뢰할 만 한 자료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강영훈 전 총리는 현리전투 당시 제3군단 부군단장으로 있었습니다. 회고록에서는 164쪽에서 166쪽 까지 세쪽을 할애하고 있는데 분량이 짧아서 아쉽지만 핵심적인 이야기는 잘 짚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유재흥의 책임 보다는 육군본부의 작전 책임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점에서 중립적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만 같은 책의 김석원에 대한 서술과 비교해 본다면 저자가 상당히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노력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분량이 짧아서 아쉽기는 하지만 7사단이 붕괴된 후 주보급로를 차단당해 군단 전체가 붕괴되는 과정을 상당히 잘 서술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특히 철수 과정에서 병사들이 겪은 고난에 대해서 서술하는 부분은 매우 짧지만 인상적입니다.

사족을 하나 더 덧붙이자면 강영훈의 회고록은 또 다른 전직 국무총리의 회고록과 비교가 됩니다. 노신영 전 국무총리는 소위로 임관된 뒤 한국전쟁 당시 8사단 21연대에 소속되었는데 바로 첫번째 실전을 악명높은 횡성전투에서 경험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8사단은 괴멸에 가까운 참패를 겪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번째 전투를 횡성에서 겪었다면 기억 속에 깊게 각인이 되었을 것이며 쓰고 싶은 내용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노신영의 회고록은 이 점에서 완전히 독자의 기대를 저버립니다. 횡성전투에 대한 서술은 달랑 다섯줄에 불과합니다. 이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해당 부분을 인용하자면...

1951년 2월 12일로 기억된다. 그날은 진눈깨비가 내리는 음산한 날씨였고, 그날 밤 암호는 ‘겨울비’였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전투가 자정이 넘어서 부터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의한 공세로 일대 격전이 전개되었다. 날이 밝았을 때에는 중공군의 손실도 컸지만 우리측 피해도 적지 않았다.

노신영, 『盧信永 回顧錄』, (고려서적, 2000), 32쪽

횡성의 참패에 대한 내용이 달랑 이것 뿐 입니다. 게다가 전투의 경과에 대해서도 매우 모호하게 서술을 해 놓았지요.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황당함을 느낀 부분이기도 합니다. 노신영은 당시 소위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 패전에 대한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왜 이런 서술을 한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내용이 충실한 듯 하면서도 핵심적인 부분은 살살 피해가고 있어서 읽는 사람을 간질간질하게 하는게 이 회고록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습니다.

2010년 2월 5일 금요일

황군의 정신력은 세계 최강?!?!

쇼와(昭和) 15년(1940년), 지나 전선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귀국한 김석원 중좌는 어떤 잡지에 이런 글을 기고하셨더랍니다.

나는 전지에 나갓슬때 황군의 아름다운 행동이며 부상병이 엉금엉금 기여가면서 돌격해 나가든그 눈물나는 정경을 생각하면 전쟁이란 반드시 무긔로만 익이는 것이 아니라 용사들의 아름답고, 놉고, 굿센 정신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와 갓흔 정신이 투철한 우리 황군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것은 당연한 리치입니다. 명치 37, 8년 일로전쟁때 탄환대신으로 2만명의 황군이 적의 진지에 뛰여드러가 성공한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황군이 얼마나 굿센 정신을 가젓는지 아실 것 입니다.

김석원, 「軍人의 立場에서 銃後에 附託함」,『家庭之友』(1940. 1) 28호, 4~5쪽

이 시절의 정신력 드립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한번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군인 뿐 아니라 식민지 지식인들도 황군의 정신력을 찬양하던 시절이죠.

김중좌께서는 정말 황군의 정신력에 감화받으셔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해방되고 1사단장을 하실 때도 육탄 10용사 같은 황군의 전통을 잇는 공격을 좋아하셨다고 하죠. 김석원 외에도 채병덕 같은 양반들도 정신력 드립을 쳐대고 있었던 걸 보면 정말 이것이야 말로 최악의 식민지 잔재인듯;;;;


잡담 하나. 위에서 인용한 글은 요즘 국립중앙도서관에 전자문서로 열람 가능하게 되어 있더군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아주 깨끗하게 스캔을 잘 해 놓아서 제가 예전에 복사했던 상태 나쁜 것은 못 보겠더군요. 전자문서들이 잘 되어 있다보니 옛날에 구닥다리 복사기로 복사한 것들 중 통째로 복사해서 제본 뜬 것이 아니면 모두 이면지로 재활용 하고 있지요.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이상 국립중앙도서관이 문 닫지는 않을 테니.

잡담 둘. 위의 인용문에서 *표 표시한 것은 아무래도 203고지 전투를 이야기 하는 것 같지요?

2008년 10월 15일 수요일

한국군 장성들에 대한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의 평가

며칠 전에 쓴 '김홍일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에서 김홍일 소장의 기계화부대 건설 구상을 다소 비판적으로 다뤘습니다. 그런데 이거 어째 김홍일 소장을 졸지에 몽상가로 만들어 버린 듯 해서 찝찝하더군요. 초기 한국군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김홍일 소장은 중국군 출신에 대해 비판적이던 미군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미군측은 일본식 교육을 받은 장교들이 중국식으로 교육받은 장교들 보다 우수하다고 보았고 중국식 교육을 받은 장교들에 대해서는 극도로 비판적이었는데 예외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김홍일 소장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한국전쟁 발발 직전 군사고문단장이었던 로버츠(W. L. Roberts) 준장의 한국군 장성들에 대한 평가를 인용해 보지요. 아래의 인용문은 로버츠 준장이 육군본부의 볼테(Charles L. Boltes) 소장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인용한 것 입니다.

일본식으로 교육받은 장교들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중국식으로 교육받은 장교들에 비해 월등히 우수합니다. (그러나) 일본식으로 교육받은 장교들은 내버려 두면 일본식으로 지휘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중국식으로 교육받은 장교들은 높은 계급과 체면을 중시하며 그들이 중국군에서 가지고 있던 계급보다도 더 높은 계급을 원합니다.

(중략)

한국군의 고위장교단의 지도력은 매우 매우 부족합니다.

총참모장은 일본군 시절 소령으로 병기창에서 근무했던 인물입니다. 매우 열심히 노력하며 우리의 조언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물자를 횡령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현재 한국군 장성 중에서는 가장 총참모장에 적합한 인물일 것 입니다. 그는 비만이지만 호감을 주는 인물이며 또 소장으로 진급하길 원하지만 좋은 조언자인 자신의 고문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참모차장은 한국군 지휘관중 가장 유능한 인물이며 훌륭한 전술가로 사단장으로도 적합한 인물입니다. 최근 그는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관으로 남부 지역의 공비들을 섬멸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정(일권) 입니다.

행정참모부장(원용덕)은 준장으로 원래는 군의관이었으며 반미주의자이고 무능함 때문에 사단장(5사단)에서 해임되었습니다.

호국군무실장은 준장으로 시대에 뒤떨어진(fuddy-duddy) 일본식 교리만 아는 인물로서 주의 깊게 감시하지 않는다면 사고를 칠 것(put it over) 입니다. 그의 이름은 신(응균)입니다.

한국군 1사단장(김석원)은 정치적 배경으로 임명된 준장으로 한국군 총참모부와 국방부장관이 싫어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지휘하는 사단은 38도상의 개성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1사단장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만약 미국인 고문관이 제어하지 않는다면 그자는 군벌처럼 될 것 입니다. 그는 사단의 8개 대대 중 7개 대대와 1개 포대를 특별히 중요한 일도 없는데 전방에 배치해 놓고 있습니다. 고문단에서는 그를 보통 곤경에 빠진 장군들이 가는 남쪽(게릴라 토벌)으로 전출시키려 시도 중입니다. 우리측에서는 예비대가 부족한 상황을 원치 않기 때문에 1사단의 후방에 추가로 부대를 배치했습니다.

7사단장(이준식)은 준장이고 이범석의 정치적 친구입니다. 고문단은 이제 겨우 그를 제어할 수 있게 됐습니다. 7사단은 바로 서울 북쪽의 38도선상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6사단장(유재흥)은 괜찮은 인물입니다. 우리측에서 그를 추천했습니다. 그는 제주도를 평정했으며 고문단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한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합니다.

동북해안지구에 배치된 8사단장(이형근)은 베닝(Fort Benning)에 교육을 보낸 세 명 중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장군이 되더니 맛이 갔으며(burst his buttons) 더 이상은 안되겠습니다. 그는 통위부 시절이 전성기 였습니다. 그의 고문관인 중령도 당시에는 잘 나갔지만 너무나 쉽게 출세한 나머지 먼저 한 명이 나가 떨어지고 그리고 나머지가 그 뒤를 따르게 될 것 입니다.

수도경비사령부 지휘관(권준)은 대령으로 중국군 출신입니다. 즉 별 능력이 없으며 그는 그에 걸 맞게 행동합니다. 정치적 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우리는 반드시 그를 해임시킬 것 입니다.

2사단장 송호성은 준장이며 한국군 최초의 장성입니다. 중국군 출신이며 원래 국방부장관이었던 이범석과 정치적 앙숙입니다.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져있으며 이범석파는 그를 가을쯤에 외국(아마도 중국대사관 무관)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그는 작은 거래에는 서투른 편입니다. 사단장병들에게 훈시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전술적으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으며 특히 여순반란에서는 최악이었습니다. 비록 우리는 공식적으로는 그에게 온갖 칭찬을 다 했지만 실제로 일을 담당한 것은 풀러 대령(현재 25보병사단 참모장인) 이었습니다.

3사단장은 이응준 소장으로 그는 일본군 대령이었습니다. 한국군 장군 중에서는 매우 유능한 편이지만 예전에 그의 예하 대대장 두 명이 대대를 이끌고 월북해서 곤경에 처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응준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에 임명하길 원합니다. 이응준은 한국군 장성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습니다.

5사단장은 사단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까지 육본 정보국장이었습니다. 이름은 백(선엽) 입니다. 우리는 그를 지지하며 저 또한 그가 좋은 지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젊은 대령 중에도 유능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중국군 출신 장군 중 가장 유능한 사람은 김홍일 소장이며 현재 그는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있습니다. 나이는 50이며 매우 명석하고 성실하며 학자풍인 인물이고 미국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모든 한국군 지휘관들이 전술적 지식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 만약 중요한 작전이 전개된다면 우리 고문관들이 전술적 실수를 막아줄 수 있겠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을 것 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체면을 중요시하며 많은 경우 말 보다 행동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Roberts to Boltes'(1949. 8. 19), RG 338, KMAG, Box 8, Brig General W. L. Roberts(Personal Correspindence), 1949; Brig General W. L. Roberts(Memorandum), 1949

매우 주관적인 평가지만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전반적으로 중국군 출신 장성들에 대해 혹평을 하고 있지만 김홍일 소장에 대해서는 평이 좋습니다. 물론 이런 후한 평가는 그가 Americanize 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만;;;;

추가) 로버츠 준장은 한국군 고급장교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한국군 사병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역시 같은 보고서에서 한국군 병사에 대한 평가를 발췌해 봅니다.

사병들은 훌륭합니다. 개인적으로 한국군 사병들은 6개월 정도의 훈련이면 상당히 좋은 병사로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군 사병들의 주의 깊음, 극기정신, 훈련에 대한 욕구, 명령에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의지, 완고함은 미군 병사들이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Roberts to Boltes'(1949. 8. 19), RG 338, KMAG, Box 8, Brig General W. L. Roberts(Personal Correspindence), 1949; Brig General W. L. Roberts(Memorandum), 1949

2008년 1월 9일 수요일

채병덕과 여운형에 관한 일화

아래 글에 Cato님이 다신 댓글을 읽고 나니 갑자기 생각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채병덕이 공산주의자는 아니더라도 해방 전후에는 좌익과 약간의 관계는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내용입니다. 만주군 출신으로 해방 이후에는 국군준비대 부사령이었고 해방 전에는 건국동맹에서 군사문제를 담당했던 박승환의 부인 김순자(金順子)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 전에 여운형과 채병덕 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몽양의 얘기로는 채병덕을 만나서 담판을 했다고 해요. 자기가 유사시에 요구할 때는 무기를 공급해 주기로까지 했다는 얘기를 몽양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몽양 얘기는 채병덕 뿐만 아니라 그 공장에 중요한 간부들 중에 건국동맹의 중요맹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무기를 탈취해 공급하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후에 개성신문사 부사장을 지낸 인물을 만났습니다. 편집이 아닌 공무계통 기술자로 가주 유능한 선반기술자였지요. 이 사람 얘기로는 자기가 주안 조병창의 선반직장 이었는데 건국동맹 맹원이었다는 겁니다. 이래서 자기가 몽양도 몇 번 만나고 몽양이 요구할 때 무장, 수류탄, 보총 심지어 경기관총까지도 공급할 수 있도록 다 짜놓고 있었다고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 이때 몽양이 조병창 공장 간부 중에 건국동맹 맹원이 있었다는 얘기가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몽양은 주안 조병창에서 채병덕 하고만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라 직장장으로 있던 조선인도 포섭해 무장봉기 준비에 골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103~104쪽

이런 일도 있었으니 채병덕에 대한 의심이 생겨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채병덕도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2008년 1월 7일 월요일

자주국방을 위한 우리의 정신 자세 - 채병덕 장군의 말씀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 주는 sonnet님의 글을 읽고 나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주국방을 하자면 세금이 많이 들어갑니다. 아 그러나 요즘은 경제도 어려우니 돈으로 때우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일본으로 부터 조금 많은 영향을 받은 우리 민족의 60년 전통인 정신력으로 승부를 해야 할 것 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자주국방을 위해서는 어떠한 정신 자세가 필요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채병덕 장군께서 60여년 전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구가 적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군인 10명 쯤은 우리 국군 1인 으로서 막아낼 만한 1인당 10의 기개와 용맹이 절대 필요한 것이다.

채병덕, 『國民精神의 確立과 國民皆兵의 意義』, (正民文化社, 1949), 61쪽

과연, 북괴가 종종 떠들듯 일당백 따위의 허황된 구호가 아니라 1:10이라는 소박하기 그지 없는 목표치이니 달성하는데 부담도 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6년 11월 5일 일요일

김석원 준장 재임용 소문에 대한 미국 군사고문단의 반응

김석원이라는 군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많은데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의견이 많은 것 같다. 나는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걸로 봐선 당시에도 썩 좋은 평을 받지는 못 한 것 같다.

다음 문서는 미 대사관 문서군인 RG59에 들어있는 내용으로 미 군사고문단장이 신성모 장관에게 보낸 편지다. 꽤 유명한 문서고 한국전쟁과 관련된 저작들에 자주 언급되는 것 같다. 아마도 김석원에 대한 가장 신랄한 평가가 아닐까 싶다.

1950년 3월 18일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각하

본관은 최근 김석원 전 육군 준장이 복직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 경우 그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될 것이라는 정보를 접했습니다.
각하(신성모) 께서도 기억하시겠지만 저는 지난해 7월과 8월 김석원이 공금횡령과 부정행위를 저질렀으며 부패하고 공직을 남용하는데다 장교에게 필요한 윤리와 도덕적 기준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음이 적발된 데 관한 저의 견해를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이미 지적한 문제점 외에도 제가 직업군인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평가하면 김석원의 군사 과학과 전술에 대한 지식은 매우 형편없습니다. 김석원은 그가 맡은 방어책임구역의 방어 준비를 하는데 기본적인 원칙조차 이해하지 못했으며 설사 말단 초급장교라 하더라도 용납 못할 정도로 전술원칙에 대해 근본적으로 무지합니다. 저는 김석원이 전술가로서의 능력이 형편없기 때문에 만약 그가 더 책임 있는 직위를 맡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안보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김석원은 도덕적으로도 해이한 인물이기 때문에 행정이나 재정을 책임지는 직위에는 결코 임명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김석원의 무능함에 대해서 더 지적하자면 우리 미국측의 관점에서 봤을때 김석원 장군은 고문단을 활용할 줄도 모르고 그럴 의사도 없었습니다. 그는 미국인 고문관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한번도 솔직하게 의논한 적이 없고 고문관의 조언을 무시했습니다. 김석원은 한국 육군본부의 명령을 종종 무시했습니다. 제가 그의 직속상관이었을 때도 김석원은 명령을 따르지 않아 저는 몇 차례나 그를 군법회의에 회부하려 했습니다.

김석원을 채병덕 소장의 후임으로 임명하는 것이 국가에 해가 되는 일이기 때문에 각하께서 이 문제를 직접 다루셨으면 합니다. 각하께서 김석원 문제를 그냥 내버려 두신다면 김석원은 참모총창과 국방부를 무시하고 직접 이 대통령에게 음모를 꾸밀 것입니다. 김석원이 재임용 된다면 그의 입지가 더 커져 각하마저도 그에게 휘둘리게 될 것입니다.

김석원은 일본 장교집단이 가진 가장 추악한 특성은 모두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갖춘 직업군인적인 미덕은 하나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건데 김석원이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될 경우 한국군과 미국 군사고문단이 계속해서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심이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석원이 고위직에 임명된다면 한국에서의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김석원이 참모총장에 임명된다면 저는 본국에 저의 소환을 요청할 것이고 또 제 후임을 추천하는 것도 매우 난처할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각하께서 김석원을 복직시키실 경우 저의 반응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실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육군이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각하를 직접 뵙고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각하께 저의 존경을 표하는 바입니다.

미육군 준장 W. L. 로버츠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신성모 각하께 
‘Activities of Brig Gen. Kim Suk Won’(1950. 3. 25), Enclosure 1; RG 59, Records of State Department


당시 한국군 장성 중 김석원 이상으로 미국측이 혐오한 사람은 또 누가 있으려나?

2006년 10월 3일 화요일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의 1950년 3월 8일자 보고서

주한미국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1950년 3월 8일 육군부 작전국에 한국의 상황에 대해 보고하면서 북한의 공군력 증강에 대응하기 위해 주일 미공군의 잉여 장비인 P-51또는 P-47 중 50대를 한국군에 양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보고서의 전문을 옮겨 본다.

친애하는 찰리(볼테 소장의 애칭)

본인이 “한국 내부” 정보에 대해 보고서를 올린 것이 2-3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주한미군사고문단과 한국 국방군의 최신 정보를 요약해서 보냅니다.

지난 겨울 기간 동안 한국군은 두 세곳의 지역에서 게릴라의 침투를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게릴라들은 대개 북쪽에서 침투하고 있으며 종종 북쪽으로부터 무기 보급도 받고 있습니다. 아군은 동해안 지역에서 무기를 실은 적의 선박을 발견해 무기 대부분을 압수했습니다. 한국군은 게릴라전에 5개 연대를 투입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부대 훈련에 심각한 지장이 초래되고 있지만 계속해서 각 중대, 대대, 연대를 순환 투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38도선에 배치된 4개 사단의 사단장들이 사단 및 연대 예비 대대의 운용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됐으며 그에 맞춰 훈련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지원 중대 및 소대 단위 부대에 대한 훈련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1948년과 1949년에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8월 이후로그런 위협은 감지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38도선 상의 충돌은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게릴라 침투를 완전히 차단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으며 현재의 게릴라 토벌 상황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현재 400명 정도의 게릴라를 사살했지만 아직도 산악지역에는 수배에 달하는 게릴라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상황과 현재 국립경찰 병력이 50,000명(본관은 현재의 경찰 병력이 적정수준에서 15,000명에서 20,000명 정도는 많다고 생각합니다)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해 본관은 경찰 10,000명(각 465명으로 편성된 22개 대대)을 전투경찰로 게릴라 토벌작전에 투입하려 합니다. 현재 이를 위한 조직과 훈련이 진행 중입니다. 경찰 간부 240명이 보병학교에서 8주 과정의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경찰 병력이 4월 1일부터 육군으로부터 게릴라 토벌 임무를 인계 받을 예정이고 5월 1일에는 임무 교대가 끝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실질적인 한국군 병력은 1만이 증가하는 셈이고 육군 부대들을 게릴라 토벌에서 빼내 훈련을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경찰의 게릴라 토벌이 잘 진행되면 51년 여름에 추가로 5,000명에서 10,000명의 경찰을 이 임무에 투입할 계획입니다.

본인의 한국 근무기간은 거의 끝나가고 있으며 10월 1일에는 전역할 예정입니다. 본인은 5월 8일 부로 24개월의 근무기간을 끝냅니다. 제가 도쿄의 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참모장 콜린스 장군과 잠시 만난 일이 있습니다. 콜린스 장군은 제가 전역하기 전인 여름에 한국에서 전출 될 수 있을지 확약할 수 는 없다고 말했고 만약 한국근무를 끝낸다면 전역하기 전 까지 어디서 근무하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저는 제 6군 사령부에서 근무하고 싶다고 대답 했습니다. 지금 엘라(Ella)는 병을 앓고 있는데 수막염, 소아마비 또는 뇌막염 중 하나인 모양입니다. 의사도 정확히 어떤 병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엘라는 지금 캘리포니아에 있습니다. 저는 엘라의 곁에 있고 싶지만 제 후임이 도착하기 전 까지는 한국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제 후임으로는 행정력 보다는 전투 경험과 부대 지도에 유능한 소장급 장성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3개월 이내에 주한미군사고문단의 주요 고위 장교들이 전출될 예정입니다. 먼저 제 참모장은 6월에 근무기간이 끝나며 작전참모, 정보참모, 인사참모, 군수참모, 부참모장, 회계장교와 유능한 고문관 여러명이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

미군사고문단이 언제부터, 그리고 어느 정도 역할을 축소해야 할 지가 앞으로의 문제입니다. 제 의견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a. 미군사고문단은 1949년 12월 15일 이래 편제에 항상 미달했습니다.

b. 병과학교 체계(보병학교, 참모학교, 사관학교, 포병학교, 통신학교, 정비학교, 공병학교, 군수학교, 재정학교, 군의학교)는 한국군의 굳건한 기반이며 이 체계는 계속해서 강화되야 합니다.

c. 미국의 군사원조(MDAP)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미군사고문단의 감독이 필수적입니다.

d. 고문단의 지도가 이제 효과를 발휘하기 지작했습니다.

e. 일부 사단은 이제 대대급 기동훈련을 시작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중대단위 훈련만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f. CPX는 이제 막 진행되고 있습니다.

g. 한국군의 사격 실력은 우수하며 미군보다 조금 뒤지는 수준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먼저 대대급에서 고문단을 철수 시키고 점차 사령부와 지원부대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고문단의 감축은 1951년 1월 1일 이전에는 절대 불가합니다. 왜냐하면 이때 까지의 기간이 한국군의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부분을 특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남한 정부가 북한의 공격을 받게 될 경우 남한 육군은 충분히 그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 고문단이 잔류한다면(최소한 연대와 사단급 부대만이라도) 한국군은 훨씬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고문단은 더 직접적인 방식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전쟁이 발발할 경우 고문단은 명칭만 고문단일 뿐 실질적으로 지휘를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보부의 보고에 따르면 북한은 100대 가량의 러시아제 항공기를 획득했으며 조종사를 양성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유사시) 이 100대의 항공기가 남한군 부대와 도시, 그리고 주요 수송로에 대해 어떤 짓을 할 지는 우리 모두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지금 당장이라도 북한이 남침한다면 숫적으로 열세인 북한육군은 공군의 지원으로 남한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한 국민들이 전쟁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다면 그들은 기꺼이 승자를 따를 것이며 남한은 아시아 공산국의 하나로 전락할 것입니다.

현재 남한은 ECA원조로 물자가 풍부하며 인플레이션으로 재정 상태는 좋지 않으나 풍년으로 식량도 충분한 상태입니다. 남한이 북쪽에 점령된다면 매우 훌륭한 전리품이 될 것입니다. 남한은 전략적으로 일본의 심장부를 위협하고 있으며 적의 손에 떨어질 경우 서방세계의 보루인 일본의 방어를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북한 공군에 대한 대응책으로 즉각 남한정부에 항공기를 제공해야 한다고 요청하는 바입니다. 현재 남한군은 12대에서 14대 정도의 L 계열 항공기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월요일 3대의 AT-6 기가 남한군에 배치됐으며 한국 정부는 추가로 7대를 더 구매했습니다.

일본에 배치된 미국 공군의 P-51과 P-47은 제트기로 대체될 예정입니다. 이것들은 우리에게는 구식 장비이지만 남한에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물론 필리핀 군도 이 장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 공군의 퇴역 전투기 50대를 양도하면 폐기에 필요한 비용이 절감될 것입니다. 미국 정부는 이렇게해서 납세자들의 세금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전투기만 있다면)한국 정부는 조종사들을 충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공군 고문단도 필요합니다. 이런 방안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만 KMAG의 편제가 500명으로 제한돼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을 보낸 바 있습니다만 NSC 8/2가 한국군의 “항공대” 확장에 부정적인 것이 문제입니다. 10만에 달하는 남한군은 서방을 위해 싸우는 군대이며 워싱턴이 이들에게 제공하는 것 보다 더 큰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 정부는 언젠가 한국군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군수공장 프로그램은 전 참모총장인 채병덕 소장의 책임하에 활발히 추진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번달에 일본제 99식 소총탄 500,000발을 생산했으며 다음달에는 1,000,000발에 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국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공작 기계를 도입하는 것을 추진 중입니다. 최근 한국은 M-1과 유사한 반자동 소총의 시제품을 생산했으며 또 스프링필드 소총과 비슷한 노리쇠 장전식 소총의 시제품도 생산했습니다. 채병덕은 고위층의 조언을 잘 듣고 있으며 현재 소수의 민간인 기술자들을 조병창에 배치해 필요한 장비들을 생산하고 있고 또 비현실적인 목표를 추진하지도 않습니다.
현재 주한미군사고문단은 한국군 장교 중 자질이 뛰어난 33명을 선발해 포병 관측 훈련을 위해 일본으로 3개월간 파견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이들은 4월 1일 출발할 예정입니다. 세부적인 사항은 모두 결정됐습니다.

행정적인 측면에서 주한미군사고문단의 활동은 훌륭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모든 임무는 감찰관의 배석하에 진행됐으며 주한미군사고문단을 감독하기 위해 극동사령부(FEC)에서 중령 한명이 파견됐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활동에 대해 잘 정리해 놨습니다. 우리는 4월에 있을 프리켓(Prickett) 장군의 감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기는 매우 양호한 수준입니다. 아직까지 고문단 소속의 군인과 민간인 중 큰 물의를 일으킨 사례는 보고된 바 없습니다. 군인 자녀들은 좋은 학교에서 교육 받고 있으며 의료 지원도 훌륭합니다. 또 사병들의 여가 시설도 훌륭하며 서울의 PX가 취급하는 제품은 도쿄에 있는 PX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서울에서는) 좋은 술 한병 가격이 2달러입니다. 장교 51명과 사병 138명이 한국 근무를 연장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군사고문단 소속으로 MATS(Military Air Transportation Service) 항공기가 한 대 있으며 (김포에 기착하는) 노스웨스트 항공편 외에도 섬을 오가는 항공편이 한달에 한 대 있습니다.

고문단의 회계 장교인 화이트(R. R. White) 중령은 최고 수준의 회계 장교이며 한국군의 재정 상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데 5월 25일 부로 국방성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이 친구는 장군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한미군사고문단의 전 군수참모인 가이스트(Geist) 소령도 1~2주 내에 국방성 수송국으로 전출될 예정입니다.
베니에게 제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미육군 준장 W. L. 로버츠
주한미군사고문단장

수신인
C. L. 볼테 소장
미육군부 작전국장
국방성, 워싱턴 D. C.


흥미롭게도 북한의 육군을 남한군 보다 약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A. Millet의 연구에 인용된 1950년 6월 15일자 미국 군사고문단의 북한군 전력 평가는 특기할 만한데 북한군의 병력이 103,000명, 전차는 불과 64대로 보고 있다. 흥미롭게도 같은 시기 미국 대사관쪽의 분석은 실제 북한군의 전력을 거의 정확하게 추정하고 있다. 아무래도 국무부의 정보망이 군대 보다 나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로버츠 준장의 요청에 대한 미국방부의 회신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린

언제나 그랬듯 귀관의 3월 8일자 보고서는 매우 유용한 정보가 많았으며 내가 한국에 대해 고민하던 많은 문제에 대해 해답을 줬소.

먼저 키팅(Frank A. Keating) 소장이 귀관의 후임자로 내정됐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소. 그러나 불행하게도 귀관이 희망한 대로 5월 또는 6월에 귀국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는 점을 알리는 바이오. 키팅 장군이 한국에 부임하는 것은 7월 말이나 돼야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오. 엘라의 건강이 좋지 않고 귀관의 걱정이 심한 것을 알기에 더 미안하게 생각하오. 그러나 귀관의 근무지를 LA 근처로 하는 것은 가능하오.
키팅 소장은 미군사고문단을 맡기 위해 특별히 선발됐소. 그는 지난 대전 때 유럽전선에서 102 보병사단을 지휘했고 이 사단을 지휘하기 전에는 에드워드 기지의 상륙훈련소 부소장이었고 커크(Kirk) 제독의 참모진에서 선임 육군연락장교로 있었소.

주한미군사고문단의 감축에 대한 귀관의 건의는 시의적절한 것으로 판단되오. 현재 합참은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각지의 사절단, 고문단 등의 감축을 검토중에 있소. 귀관의 의견은 먼저 무초 대사의 승인을 받은 뒤 육군성에 제출할 예정이오. 이와 함께 우리는 국무부에 남한 해안경비대에 대한 민간 고문단의 예산을 집행할 것을 요구하는 중이오.

그리고 예산절감에 대한 귀관의 의견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소. 나 역시 한국에서 벌이는 미국의 모든 활동에 대한 경상비용 책정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는데 군사고문단의 경우 그 활동의 특성상 현재 예산의 3분의 1 수준만 집행돼야 할 것으로 생각되오. 특히 최근 합의에 따라 한국정부가 군사고문단의 활동 비용의 상당수를 부담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오.

현재의 MDAP(Mutual Defense Assistance Program)는 3월 15일 최종 승인을 위해 국무부에 제출됐소. 만약 이 원조프로그램의 실행이 늦춰진다면 이건 전 세계적인 군사원조를 재조정 하겠다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오. MDAP와 함께 한국에 대한 다른 원조 계획도 정치적 문제로 아직 국무부의 결정이 나지 않았소. 육군의 대부분은 군사고문단의 요청은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국 육군의 증강은 NSC의 정책결정사항에 위배되오. 물론 NSC 8/2가 한국 해군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금지하고 있고 공군 창설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라는 것을 말해두오. 또 귀관 역시 NSC 8/2에서 규정하고 있는 한국 육군과 해안 경비대, 경찰병력의 상한선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므로 본인은 국무부의 승인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형태의 추가적인 원조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오.
우리는 프리켓 장군에게 한국 방문에 앞서 몇가지 사항을 브리핑 했으며 이전 감찰관이 방문한 이후 많은 점이 변화했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당부했소. 나는 프리켓 장군이 미 군사고문단의 모든 활동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확신하오.

귀관의 반년 단위의 보고서는 완결적이고 정보가 가득한 자료요. 귀관의 보고서는 육군의 작전 수립에 필요한 매우 유용한 자료라고 할 수 있소. 귀관의 보고서 사본은 아직 국무부에서 검토중이며 육군부에는 전달되지 않았지만 귀관이 같이 보내준 정보보고서는 가지고 있소. 이 훌륭한 보고서에 대해 귀관과 주한미군사고문단의 모든 장교들에게 감사하는 바이오.

귀관과 귀관의 가족에 경의를 표하며 엘라가 빨리 건강을 회복하기를 기원하오.

볼테


한마디로 줄이면 한국군 병력 증강과 전투기 지원은 국무부의 방침에 어긋나므로 어렵다는 내용이다.
참고로 NSC 8/2는 한국군의 병력 상한선을 육군 65,000명, 해안 경비대 4,000명, 경찰 35,000명으로 제약하고 있었지만 이미 1950년 3월 한국군의 병력은 이걸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미 육군이 북한의 지상군 전력에 대해서는 과소평가 했던 것은 맞는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