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4일 일요일

국무총리 두 사람의 한국전쟁 회고, 그리고 잡담 하나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은 상당히 잘 쓰여진 회고록입니다.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서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교차 검증 가능한 부분을 살펴보면 제법 정확성과 객관성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한강교 폭파에 대한 서술은 미국 군사고문단의 기술과도 제법 맞아 떨어집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객관적으로 서술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밖에도 건군기, 한국전쟁 이전 옹진반도 교전과 같은 부분의 서술도 그렇습니다. 한국전쟁과 전후 재건기 한국군에 대한 서술을 읽으면 조금 더 자세하고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내용이 풍부하고 신뢰할 만 한 자료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강영훈 전 총리는 현리전투 당시 제3군단 부군단장으로 있었습니다. 회고록에서는 164쪽에서 166쪽 까지 세쪽을 할애하고 있는데 분량이 짧아서 아쉽지만 핵심적인 이야기는 잘 짚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유재흥의 책임 보다는 육군본부의 작전 책임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점에서 중립적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만 같은 책의 김석원에 대한 서술과 비교해 본다면 저자가 상당히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노력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분량이 짧아서 아쉽기는 하지만 7사단이 붕괴된 후 주보급로를 차단당해 군단 전체가 붕괴되는 과정을 상당히 잘 서술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특히 철수 과정에서 병사들이 겪은 고난에 대해서 서술하는 부분은 매우 짧지만 인상적입니다.

사족을 하나 더 덧붙이자면 강영훈의 회고록은 또 다른 전직 국무총리의 회고록과 비교가 됩니다. 노신영 전 국무총리는 소위로 임관된 뒤 한국전쟁 당시 8사단 21연대에 소속되었는데 바로 첫번째 실전을 악명높은 횡성전투에서 경험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8사단은 괴멸에 가까운 참패를 겪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번째 전투를 횡성에서 겪었다면 기억 속에 깊게 각인이 되었을 것이며 쓰고 싶은 내용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노신영의 회고록은 이 점에서 완전히 독자의 기대를 저버립니다. 횡성전투에 대한 서술은 달랑 다섯줄에 불과합니다. 이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해당 부분을 인용하자면...

1951년 2월 12일로 기억된다. 그날은 진눈깨비가 내리는 음산한 날씨였고, 그날 밤 암호는 ‘겨울비’였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전투가 자정이 넘어서 부터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의한 공세로 일대 격전이 전개되었다. 날이 밝았을 때에는 중공군의 손실도 컸지만 우리측 피해도 적지 않았다.

노신영, 『盧信永 回顧錄』, (고려서적, 2000), 32쪽

횡성의 참패에 대한 내용이 달랑 이것 뿐 입니다. 게다가 전투의 경과에 대해서도 매우 모호하게 서술을 해 놓았지요.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황당함을 느낀 부분이기도 합니다. 노신영은 당시 소위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 패전에 대한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왜 이런 서술을 한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내용이 충실한 듯 하면서도 핵심적인 부분은 살살 피해가고 있어서 읽는 사람을 간질간질하게 하는게 이 회고록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습니다.

댓글 6개:

  1. 自重自愛10:25 오후

    1951년 당시 강영훈은 부군단장, 노신영은 소위. 하지만 국무총리는 노신영이 먼저 했군요. 장유유서의 도가 땅에 떨어졌으니.....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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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신영이 확실히 신뢰를 얻는 능력은 뛰어났던 것 같다. 한 번 만나봤는데 진짜 입이 무겁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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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무르쉬드9:37 오전

    소위니깐 자기가 아는 범위안에서 서술한 거고 전체 정황같은 정보는 나중에 딴 기록에서야 봤을테니 아 그랬구나 뭐 그정도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도 그의 부대는 운이 좋게 큰 피해를 입지 않은 부대였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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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횡성 전투에서는 8사단 자체가 괴멸되었습니다. 연대본부까지 괴멸된 10연대 같은 최악의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 21연대의 피해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 시기 노신영의 행적은 의문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횡성전투 이후 후방으로 빠져서 특무대에 복무했으며 김창룡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는 설이 있는데 노신영의 회고록에는 그와 관련해서 한마디의 언급도 없는게 특징입니다.

      노신영의 회고록 전체가 이렇게 두리뭉실하고 모호한 서술이 많기 때문에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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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위장효과9:28 오전

    강영훈 전 총리의 경우 육군 중장-육사교장 시절에 5.16이 일어났고 당시 사관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가 행진을 반대하다가 쿠데타파에 의해서 연금되기도 했었기에(그때 사관생도 행진을 추진한 게 육사교관이었던 29만원 거사였다죠 아마) 박통 집권기에는 해외에서 유학아닌 유학생활도 해야 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노신영 전 총리야 외교분야의 직업관료로 착실하게 커리어 쌓았으니 처음 정권잡은 29만 거사가 중용할 밖에요. 29만 전대갈 거사가 까일 거 참 많은 인간이지만 그래도 초기에 직업관료들이나 전문가들을 나름 중용한 거는 인정해줘야죠.
    입이 무겁다는 건 그만큼 외무공무원 생활 오래하고 안기부장까지 역임하면서 뭐가 자신에게 중요한 지 제대로 인식한 결과가 아닐까 싶네요. 그렇지만 그 덕에 회고록이 그렇다면...후학 입장에서는 속터지겠죠^^(30년가까이 외무부공무원생활에 외무장관, 안기부장, 국무총리 역임? 이거 정말 대단한 자료잖아!!!=>뭐야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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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런 것 같습니다. 노신영이 비교적 젊은 나이로 요직을 경험하고 승승장구한데는 그런 장점이 작용했겠지요. 그덕에 회고록은 굉장히 묘한 물건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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