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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6일 화요일

The Defeat of the Damned

 무장친위대의 딜레방어 여단은 전쟁범죄로 유명한 부대입니다. 많은 무장친위대 부대가 전쟁범죄에 연루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딜레방어 여단의 악명에 견줄 수 있는 부대는 없습니다. 워낙 악명이 자자하다 보니 형편없는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이 부대의 부대사가 몇권 나와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나온 딜레방어 여단 부대사들에 관심이 없어서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군사적으로 무가치한 부대는 관심이 가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미국의 저명한 군사사학자 내쉬(Douglas E. Nash sr.)가 딜레방어 여단 부대사를 쓴다는 소식을 접하자 조금 놀랐습니다. 어째서 이런 저명한 군사사학자가 딜레방어 여단 같이 형편없는 범죄조직의 부대사를 쓰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쉬가 집필한 The Defeat of the Damned : The Destruction of the Dirlewanger Brigade at the Battle of Ipolysag, December 1944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1944년 말 헝가리의 이포이샤그(Ipolyság)에서 벌어진 전투에 초점을 맞춘 연구입니다.(Ipolyság 현재 슬로바키아의 도시 Šahy가 되어 있습니다.) 내쉬는 무장친위대 제4기갑군단의 역사를 다룬 3부작 From the Realm of a Dying Sun을 집필하던 중 이포이샤그 전투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 결과 이 책을 집필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책은 딜레방어 여단의 부대사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이포이샤그 전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전체 15개 장 중에서 11개 장이 이포이샤 전투의 배경, 전개과정, 결과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결론을 제외한 3개 장이 딜레방어 여단의 창설, 성장과정, 종전에 이르기 까지의 여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포이샤그는 이펠(Ipeľ, 헝가리어로는 이포이Ipoly)강을 접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부다페스트에서 빈으로 가는 주요 도로 중 하나가 이 곳을 지나갑니다. 이런 지리적 입지 때문에 신성로마제국과 오스만투르크의 전쟁에서 요충지로 인식됐습니다. 이때문에 1944년에도 이 도시는 격전지가 됩니다.

 이포이샤그 전투는 1944년 12월 14일 소련군 제9근위기계화군단이 이포이샤그를 점령하자 이를 탈환하기 위해 12월 15일 부터 독일군이 감행한 역습입니다. 12월 15일 전투에는 딜레방어 여단이 포함된 린텔렌(Rintelen) 사단집단이 주공을 맡았으나 소련군에게 패배했습니다.  린텔렌 사단집단은 제357보병사단의 잔존병력에 딜레방어 여단, 헝가리군 등 다양한 부대를 배속시킨 임시부대였습니다. 이 임시 부대는 제357보병사단장 요제프 린텔렌(Josef Rintelen) 장군의 이름을 따와서 린텔렌 사단집단으로 불렸습니다. 린텔렌 사단집단의 패배로 소련군의 전력이 상당히 강하다는걸 파악한 독일군은 제8기갑사단을 이포이샤그 지구로 이동시켜 반격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제8기갑사단의 반격도 실패하면서 독일군은 이포이샤그 지구에서 수세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이포이샤그 전투 당시 딜레방어 여단의 형편없는 작전 수행을 매우 세밀하게 재구성 했습니다. 이 부대의 전투력이 엉망이었던 이유는 여러가지입니다. 범죄자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정치범들로 구성되어 병사들의 전투 의지가 낮았고, 지휘관들은 후방에서 치안유지와 학살을 하던 인물들이었으며 보유한 장비도 그에 맞게 잡다한 구식 무기 위주였습니다. 린텔렌 사단집단에 배속된 뒤에는 다른 부대들의 중화기 지원을 받을 수 있긴 했으나 근본적으로 형편없는 전투력을 단기간에 개선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결과 이포이샤그 전투에서 딜레방어 여단의 많은 병사들이 제대로 된 전투도 하지 않고 도주하거나 소련군에 투항했습니다.

 1944년 12월 헝가리 전역을 다루는 연구는 제법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 많은 수가 독일 기갑사단의 작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내쉬의 연구는 독일군 내에서도 전투력이 가장 뒤떨어지는 보병 부대가 중요한 작전에 투입되어 와해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포이샤그 전투에 관해서는 다른 책에서 짤막하게 언급된 내용만 읽었는데, 이렇게 상세하게 작전 경과를 분석한 연구가 나와서 반갑습니다. 

 

※유튜브의 WW2TV 채널에 내쉬가 Ipolysag 전투에 대해 설명한 동영상도 올라와 있습니다.

(258) Dirlewanger Brigade and the Battle of Ipolysag - YouTube


2019년 2월 17일 일요일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최근 일 때문에 뵙게 된 선생님께 한국전쟁 시기 이야기를 들었는데 꽤 흥미로운 일화가 있더군요. 전쟁 당시 화성군 송산면 지역에서 자위대장으로 있었던 박상봉이라는 사람은 지역 우익 인사들을 여러명 학살했다고 합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뒤집혀서 도망가던 중 퇴로가 일찍 끊겨서 월북을 못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이 사람은 머리를 굴려서 국군에 자원입대 하는 방식으로 검거를 피했다고 합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진짜 그랬던 셈이죠. 그러나 결국 전쟁이 끝난 뒤인 1956년 경찰에 검거되어 죄값을 치르게 됐다고 합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여서 기록이 남아있을까 찾아봤습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 검색을 해보니 정말 확인이 되네요.




2018년 10월 7일 일요일

러시아의 국가 범죄 은폐 의혹?


Dig Near Stalin-Era Mass Grave Looks To Some Like Kremlin Dirty Work

Russian digs accused of covering up Stalinist crimes

9월에 있었던 AFP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제2차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유해 발굴작업을 명분으로 소련의 학살 범죄를 은폐하는 공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부에서는 제2차대전 중 핀란드군이 학살한 소련군 포로 유해를 발굴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 핀란드군이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소련군 포로들을 대량 학살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발굴을 주도하고 있는 군사사학회(РОССИЙСКОЕ ВОЕННО-ИСТОРИЧЕСКОЕ ОБЩЕСТВО [РВИО])는 문화부장관 블라디미르 레딘스키와 우익 정치인 드미트리 로고진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용단체'입니다. 실제로 이 단체의 활동에 대해서는 러시아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있지요.

러시아 인권운동단체들은 이 발굴이 스탈린 시절 소련 정부가 자행한 정치범 학살을 은폐하려는 공작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푸틴 집권 이후 퇴행적이고 쇼비니즘 적인 분위기에서 소련 시기를 미화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정부의 주도 하에 적극적으로 역사 왜곡에 나서는 분위기는 매우 우려스럽군요. 카틴 학살 같이 소련의 전쟁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다른 국가의 범죄라고 날조공작을 한 사례도 있습니다. 그러니 만큼 러시아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찝찝함이 느껴지는군요.


2013년 4월 8일 월요일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 한 편

무장친위대는 2차대전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있는 소재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화려한 전과를 자랑하는 정예 사단에서 전쟁 말기에 급조한 빈약한 사단이 함께 존재하며, 인원 구성을 보면 독일인 은 물론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까지 참여하는 등 다채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호기심을 자극할 수 밖에 없지요. 무장친위대 출신 참전자들이 주축이 되어 펴낸 무장친위대에 관한 수많은 서적들이 상업적으로도 좋은 성과를 거둔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 보니 LAH나 다스 라이히 같은 정예 사단은 물론 뭔가 좀 부실해 보이는 사단의 부대사까지 출간되는 실정입니다.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무장친위대 제14척탄병 사단은 후자 중 하나입니다. 재미있게도 이 별볼일 없어 보이는 사단은 상업적으로 출간된 사단사만 두 권이 있습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인 Richard Landwehr가 펴낸 Fighting for Freedom: The Ukrainian Volunteer Division of the Waffen-SS와 Michael O. Logusz가 펴낸 Galicia Division: The Waffen-SS 14th grenadier Division 1943-1945입 니다. 이게 가능한 배경에는 캐나다와 미국에 존재하는 꽤 큰 규모의 우크라이나 이민자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 많은 수는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 출신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도 계시겠고 이쯤에서 눈치채신 분들도 많으실텐데,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는 꽤 말이 많은 집단입니다.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5호에 실린 Per Anders Rudling의 “‘They Defended Ukraine’ : The 14. Waffen-Grenadier-Division der SS(Galizische Nr.1) Revisited”는 이 복잡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는 우크라이나의 우경화와 맞물린 무장친위대 복권 문제를 화두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이 사단의 간략한 역사와 전후 행적을 고찰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전개되고 있는 우경화에 맞물린 무장친위대의 복권에 깔린 위험한 정치적 의도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유셴코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있던 시기에 우크라이나의 민족운동 지도자 스테판 반데라Степан Андрійович Бандера를 건국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를 복권시키려는 움직임까지 힘을 받은 바 있습니다. 필자는 유셴코는 무장친위대에 대한 복권까지 나가지는 않았지만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여러 정당과 단체에 대한 복권도 시사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정부가 우익 운동에 편승했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겠지요. 유셴코의 후임인 야누코비치 대통령 시기에는 반데라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에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우크라이나 서부를 중심으로 한 극우들은 오히려 무장친위대 복권에 더 열을 올립니다. 마치 독립을 전후한 시기 인도에서 찬드라 보스와 인도국민군에 대한 반응과도 비슷하지요. 필자는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를 복권하려는 움직임에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이 함께하는 점을 경계합니다. 실제로 독일에 협력한 우크라이나인 무장단체와 무장친위대는 민간인 학살에 참여한 혐의가 있지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지요.


필자가 주목하고 있는 또 하나는 캐나다 등 북미에 존재하는 대규모의 우크라이나 이민자 공동체 입니다. 잘 아시다 시피 이중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민 온 무장친위대와 무장단체 출신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북미에서 자리를 잡은 뒤 우크라이나 이민자 공동체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치까지 올라갔습니다. 필자는 그러한 사례 중 하나로 2011년에 앨버타 대학에 우크라이나 무장친위대 출신인 세명의 우크라이나계 이민자가 기부를 한 점을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캐나다 사회에서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의 활동을 찬양하고 정당화 하는데 힘써 왔습니다.


우크라이나 무장친위대에 대한 옹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무장친위대 옹호와 맥을 함께 합니다. 무장친위대를 일반친위대와 분리하여 ‘순수한 군인’의 위치에 놓고자 하는 것이지요. 무장친위대의 입장을 반영한 상업 출판물에서는 전쟁범죄와 무장친위대를 분리하려는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간혹 오토 바이딩어처럼 적극적으로 무장친위대의 입장을 옹호하고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경우도 있지요. 잘 알려져 있는 것 처럼 오토 바이딩어는 다스 라이히 사단사에서 오라두르-쉬르-글랑 학살에 무장친위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논지를 펼쳤고 뒤에는 아예 단행본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이 점은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전쟁범죄를 부정하면서 여기에 ‘민족주의’를 추가해 비판을 봉쇄하는 무기로 삼습니다. 이 점은 한국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이 반공이라는 방패를 통해 비판을 면하려는 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필자의 비판은 꽤 흥미롭습니다. 필자는 우크라이나 무장친위대가 창설될 당시 부터 나치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으며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면할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필자는 여기에 냉전 이후 러시아와 폴란드, 우크라이나에서 진행된 홀로코스트 연구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지적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후타 페냐치카Гута Пеняцька학살을 포함해 우크라이나인 친위대원이 참여한 전쟁범죄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후타 페냐치카 학살에 대해서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연구 결과가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고 학살 당시 지휘계통에 무장친위대 제14척탄병사단이 들어가는가의 여부도 여전히 논의의 대상입니다.)
다음으로는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를 옹호하는 측에서 전쟁 말기에 부대의 명칭이 무장친위대에서 우크라이나 국군으로 개칭된 것을 구실로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나치즘과의 단절을 꾀하는 시도를 비판합니다. 필자는 1945년 4월 28일에 발행된 사단의 신문이 반유대주의 선전으로 가득차 있다는 점을 들어 전쟁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크라이나 무장친위대가 나치즘에 충실했다고 주장합니다.


필자의 지적대로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는 아직 시작단계에 있습니다. 이 사단의 ‘군사 작전’에 집중한 상업적인 출판물은 오래전 부터 존재했지만 이들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고찰은 이제 시작단계라는 것 이지요.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도 몇 가지 생각할 점을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2012년 8월 9일 목요일

외계문명(?????)의 지혜

꽤 즐겁게 읽었던 소설의 한 토막.

빌리는 지구인들이 벌이는 그 전쟁과 같은 살인 행위에 트랄파마도어인들이 곤혹스러워하거나 경악을 금치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지구인들의 잔학성과 굉장한 무기들이 결합되면 결국에는 순결한 우주의 한 부분이, 나아가 전체가 파괴될 수도 있다고 염려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에 관한 질문은 한번도 나오지 않았고, 빌리 자신이 말을 꺼낸 뒤에야 비로소 나왔다. 동물원 관객 중에 누군가가 해설자를 통해 지금까지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운 것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빌리의 대답은 이랬다.

“한 행성의 모든 주민이 어떻게 이렇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지요! 아시다시피, 나는 태초 이래 무의미한 살육에 열중해 온 행성에서 왔습니다. 내 나라 사람들이 급수탑에 넣고 산 채로 삶아 죽인 여학생들의 시체를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당시 자기들이 절대 악과 싸우고 있다는 긍지에 차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빌리는 드레스덴에서 삶아져 죽은 시체들을 보았다.

“그 뿐입니까? 나는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에는 삶아져 죽은 여학생들의 오빠와 아버지들이 살육한 인간들의 지방으로 만든 촛불로 밤을 밝혔습니다. 지구인들은 우주의 골칫거리임이 분명합니다! 다른 행성들이 지금은 무사하더라도 곧 지구 때문에 위험에 빠지게 될 겁니다. 그러니 내게 비결을 좀 가르쳐 주세요. 내가 지구로 가져가서 우리 모두를 구원할 수 있게요. 어떻게 한 행성이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까?

빌리는 자기가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트랄파마도어인들이 작은 손을 쥐어 눈을 가리는 것을 보고는 당혹했다. 이제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그 몸짓이 무슨 뜻인지는 분명했다. 그가 바보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 이었다.

“제발- 말씀 좀 해 주세요?”

그는 몹시 풀이 죽어 안내원에게 말했다.

“내 말이 뭐가 그리 바보 같다는 거지요?”

“우린 우주가 어떻게 멸망할지 아는데-” 하고 안내원이 말했다. “지구는 그 일과 아무 관계가 없소. 지구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만 빼면.”

“어떻게- 우주가 멸망합니까?” 빌리가 말했다.

“우리가 날려 버리지. 비행접시에 쓸 새 연료를 실험하다가 말이오. 트랄파마도어의 시험 조종사 하나가 시동 버튼을 누르면 온 우주가 사라져 버리는 거요.”

그렇게 가는 거지.

“당신들은 그것을 알고 있으니까 예방할 방법도 있을 것 아니에요?” 빌리가 말했다. “그 조종사가 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할 수 없습니까?”

“그는 이제까지 늘 버튼을 눌렀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요. 우리는 늘 그에게 그렇게 하게 했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요. 그 순간은 그런 식으로 되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렇다면-” 하고 빌리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구에서 전쟁을 예방한다는 생각도 어리석은 거군요.”

“물론이오.”

“하지만 이 행성은 평화롭잖아요?”

“오늘은 그렇소. 다른 날들은 당신이 보았거나 읽은 어떤 전쟁보다 잔혹한 전쟁을 벌이지. 우리가 전쟁에 대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 우리는 그냥 전쟁을 보지 않을 뿐이오. 무시해 버리는 거지. 우리는 영원토록 즐거운 순간들만 보며 지내요. 오늘 동물원에서 처럼. 이 순간은 정말 멋지지 않소?”

“멋집니다.”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지구인들도 그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요. 끔찍한 시간은 외면해 버리고 좋은 시간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오.”


커트 보네거트 지음/박웅희 옮김, 『제5도살장, 혹은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 (아이필드, 2005), 138~141쪽

2010년 4월 22일 목요일

문화대혁명 시기 학살의 유형

문화대혁명하면 떠오르는 것은 혼란과 광기일 것입니다. 문화대혁명은 초기 단계 부터 대규모의 유혈사태를 가져왔는데 그 중에서도 이른바 '사류분자(四類分子 :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악질분자)'에 대한 학살은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류분자에 대한 학살은 1966년 8월 하순 부터 시작되었는데 초기에 학살이 시작된 다싱(大興)현의 경우 8월 27일 부터 9월 1일 까지 325명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1) 문혁이 종결 된 뒤 정부차원에서 문혁 당시의 인명피해에 대한 공식 조사를 하긴 했습니다만 문혁 시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를 정확히 알기란 앞으로도 불가능 할 것 입니다.

문혁당시 학살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몇몇 연구자들은 학살 피해를 집계하기 위해서 당시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집계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지난번에 언급했던 Roderick MacFarquhar와 Michael Schoenhals의 저작에 인용된 Andrew Walder와 Yang Su의 공동연구는 1,500여종의 지역 신문에 실린 학살 관련 기사들을 집계해서 이 시기에 약 75만명에서 150만명 사이가 학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2) Yang Su는 문혁당시의 학살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계속하고 있는데 200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는 세곳의 성(省)을 사례로 학살의 유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Yang Su가 2006년의 논문에서 사례로 든 지역은 광시(廣西), 광동(廣東), 후베이(湖北) 등 세 곳인데 광시성의 경우 1966년 행정구역 기준으로 83개 현 중 65개 현이, 광동성은 80개 현 중 57개 현이, 후베이성은 72개 현 중 65개 현이 조사 대상이었습니다. Yang Su는 살해당한 인원이 10명 이상인 경우만 학살로 분류해서 집계하고 있습니다. 조사 대상이었던 세 지역 중 학살이 가장 지독했던 곳은 광시성으로 조사 대상 65개 현 중 43개 현에서 학살이 발생했으며 이 중에서도 15개 현은 1천명 이상이 학살되었습니다. 특히 우밍(武鳴)현의 학살이 가장 심해서 문화대혁명 중 2,463명이 학살되었고 학살이 절정에 달했던 1968년 6월 중순 부터 같은해 7월사이의 두달도 안되는 기간 동안 1,546명이 살해되었습니다. 광동성에서는 28개 현에서 학살이 일어났으며 6개 현에서 1천명 이상이 살해되었습니다. 후베이성은 특이하게도 학살이 드물게 일어났으며 조사대상 중 4개 현에서만 학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3)

이 연구에서 흥미로운 점은 학살이 일어난 현은 많은 경우 성도에서 조금 더 멀리 떨어지고 인구도 적은 편이었다는 겁니다.4) 다음으로 특징적인 것은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방식이 많았다는 것 입니다. 광시성의 림구이(臨桂)현에서는 1,991명이 학살되었는데 절반에 달하는 918명이 이른바 '사류분자'와 그 자녀였습니다. 더 골때리는 것은 농민도 547명이나 포함되는 등 학살대상이 사류분자에 한정되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당간부도 무려 326명이나 살해되었습니다. 심한 경우 사류분자의 자녀가 희생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고 빈농이 대량으로 학살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5)

마지막으로, 지방에서 학살이 심화된 시기는 1968년 여름 이후로 이 시기는 바로 문혁 초기 난립하던 수많은 분파들이 정리되고 지방에서 혁명위원회의 형태로 사태가 일단 정리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잘 아시다 시피 혁명위원회의 수립 과정에서도 이에 반발하는 분파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혁명위원회들은 지역 안정 차원에서 수많은 계급의 적들을 만들어 소탕했는데 그 대상이 누가 될지는 뻔한 것 이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 했듯 학살 대상은 주로 '사류분자와 그 가족'이었지만 이밖에도 다양한 계층이 피해자였습니다. 저자의 표현 대로 현대판 마녀사냥이라고 할 수 밖에요.

잡담 하나. 저자는 집계 과정에서 분파간의 상호 투쟁으로 사망한 경우는 제외했습니다. 각 파벌간의 투쟁으로 인한 사망자도 집계해 본다면 꽤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1) 산케이 신문 특별취재반/임홍빈 옮김, 『모택동 비록』上(문학사상사, 2001), 187쪽
2) Roderick MacFarquhar and Michael Schoenhals, Mao's Last Revolution(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p.262
3) Yang Su, "Mass Killing in the Cultural Revolution : A Study of Three Provinces", Joseph W. Esherick(ed.), The Chinese Cultural Revolution as History(Standford University Press, 2006), pp.98~103
4) Yang Su, ibid., p.106
5) Yang Su, ibid., pp.107~109

2010년 3월 13일 토요일

나름 공정한 서술....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과 안악지방에서 일어난 학살은 당시 38선 이북지역에서 일어난 학살 중에서도 유명합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이 학살은 단일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로는 한국전쟁 당시 가장 규모가 큰 것입니다. 물론 정확한 피학살자가 몇 명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요. 어쨌든 북한 정부는 한국전쟁 당시 부터 이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을 '미국의 전쟁범죄'로 요란하게 선전했습니다. 이때문에 한국 측에서도 북한의 선전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신천 봉기에 참여한 월남민들은 1957년에 『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라는 책을 발간합니다. 이 책은 당시 우익측 시각을 반영한 저작이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신천 지방에 서술의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안악 등 학살이 벌어진 인접 지역의 정보는 소략하지만 주된 서술대상인 신천 지방의 사건에 대해서는 우익의 입장에서 매우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민군과의 교전에서 신뢰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도한 전과를 자랑하는 등 의심스러운 면이 많긴 합니다만 봉기에 가담한 우익 인사들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어 유용합니다.

이 저작이 재미있는 점은 우익측의 보복 학살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에 나온 저작에서 우익의 보복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꽤 흥미로웠는데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해 보니 오히려 전쟁 직후라서 사람을 죽인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을것 같더군요. 물론 북한 측의 학살에 대한 서술은 자세한 반면 우익의 보복학살에 대한 서술은 매우 소략합니다. 황해도 인민위원장을 조리돌림한 뒤 총살한 내용과 교전 중 인민군이나 당원을 사살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좌익에 대한 보복학살을 다룬 부분은 세 쪽 정도에 불과합니다. 내용도 얼마 되지 않으니 해당 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원문 그대로 인용해서 맞춤법은 엉망입니다)

끝없이 맑게 개인 가을하늘에 높이 계양된 태극기 밑에서 남녀노소 할것없이 총동원되여 구국대업에 나섰다. 의거대가 확보해 놓은 지구마다 유능한 지방유지를 선출하고 또 선출된 그들은 남한의 기관조직기구를 따라 미약하나마 손색없는 자치위원회와 치안대를 조직하였다.

봉기군과 아군 -국군들과 유엔군-의 진격으로 퇴각의 혈로를 차단당하게 된 괴뢰들은 수많은 애국지사를 학살하며 구월산으로 대거 입산하였다. 신천에서 八百여명에 달하는 애국자의 시체를 내무서 방공호와 유치장 참호 정치보위부의 지하실 -양민을 학살하기 위하여 가설한 곳- 및 유치장 군당의 방공호 및 토굴-양민을 학살하기 위하여 가설한 곳- 각처 방공호 창고 하수도 등에서 발굴해 내였고 해주형무소에서 一千여명 안악중학교 강당 및 지하실에서 五ㆍ六백명의 시체를 발굴하였다. 또한 재령과 안악 서하면 장련면 붕암리에서 의거하였으나 실패한 관계로 무참하게도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학살당하였다.

이러한 참변을 목격한 이 지구 주민들은 놈들 소행에 대하여 무조건 복수할것을 맹서하고 이를 갈며 때를 기달렸다. 한편 치안대들은 부역자 숙청과 공비 소탕이 그 중요한 임무였다. 이와같이 이 지구에서는 매일같이 피의 복수가 계속되였다. 이러한 피의 복수는 공산정치가 지난 五년동안에 저질러 놓은 죄악 -가혹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학살- 에 대한 어디까지나 당연한 것이었으며 또한 치안대원들이 놈들을 잔인하게 처단하는 것은 놈들이 가르치고 간 그대로 이른바 복습(?) 이라는 것 뿐이었다. 심지어는 예수교인들도 놈들이 베풀어준 은혜(?)에 대하여 곱게 보답해 주었다. 사실상 인과응보라는 결과밖에 아무것도 아닌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한편 어떻한 부역자의 아네는 남편이 도망한 뒤라 정의의 심판을 받게됨이 두려워 치안대를 찾아와서는 "저는 친정의 가정 성분으로 보아 절대로 공산당이 될수 없읍니다. 그저 남편하나 잘못맞난 탓이라 생각하고 남편의 대를 받은 자식을 내손으로 처단했으니 저만은 살려주시요" 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애원하였다.

이토록 전율할 피의 복수는 전 북한을 휩쓸었으나 특히 반공의 전위인 구월산지구 일대가 제일 심하였다. 그러나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이러한 피의 복수는 무고하고 졸렬한 방법이었음을 각 책임자들이 선무 만류하고 패잔 공산괴뢰들의 역습을 방어하며 동족상쟁의 해를 피하였다.

趙東煥,『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서울, 1957), 474~476쪽

학살을 저지른 것은 모두 미국의 소행이라는 북한의 주장에 비하면 아주 솔직한 기록인 셈인데 그래도 뭐랄까, 사람 죽인 것을 아주 당연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꽤나 으스스합니다. 보복학살 외에 위에서 언급한 봉기 과정에서의 살인에 대한 묘사도 좀 깹니다. 자신들도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죽였다고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잡담하나.
『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은 국회도서관에서 전자문서로 전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번 읽어보십시오. 이박사 치세하의 반공정서를 듬뿍(???) 느끼실 수 있습니다.

잡담둘. 2008년에 북한이 신천학살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미군 장교에 대해 잡담을 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결론이 바뀔일은 없겠지만 미국 자료를 추가로 확보하면 보강해서 한번 더 써볼까 합니다. 

2008년에 썼던 글은☞  신천학살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

2010년 1월 24일 일요일

기분나쁜 추억 하나

구글리더를 읽던 중 나이지리아의 종교간 충돌에 대한 소식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지역의 종교간 갈등이야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것 이지만 제목이 눈길을 끌더군요.


국민학교 시절 반공서적에서 가장 공포감을 자극한 것은 학살된 시신을 우물에서 끄집어 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시골에 내려갈 때 마다 우물 안을 들여다 보면 그 생각이 나곤 했을 정도지요.

머나먼 이국에서 일어난 학살이 국민학교 시절의 불쾌한 추억을 끌어내는군요.

2009년 11월 18일 수요일

한 무장친위대 대원의 전쟁범죄

구글리더에 쌓여있는 아직 읽지 않은 글들을 정리하던 중 2차대전 당시 자행된 어떤 전쟁범죄에 대한 소식을 하나 접하게 됐습니다.

Former Nazi SS member charged with killing Jewish labourers - Guardian

이 기사에 따르면 올해 90세의 전 무장친위대 대원 아돌프 슈톰스(Adolf Storms)이 전쟁 종결직전인 1945년 3월에 수십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5 SS 기갑사단 비킹(Wiking) 소속이었던 아돌프 슈톰스는 57명의 유태인들을 오스트리아의 도이치 쉬첸(Deutsch Schützen)에서 사살했으며 다른 한명은 도이치 쉬첸에서 하르트베르크(Hartberg)로 이송하던 도중 걸을 수 없게 되자 사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슈톰스는 1946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뒤 이름을 바꾸고 살아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조용한 말년을 보내는 것은 실패한 것 같군요.

당사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슈톰스의 과거는 조용히 떨쳐버리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 이었습니다.

2009년 9월 7일 월요일

대량학살의 요건

씁슬한 이야기 하나...

르완다는 서구지정학에 대한 비백인 비평가들이 보기에는 아프리카의 문제에 대해 미국과 유럽은 별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워싱턴과 다른 유럽국가들이 아프리카인의 목숨의 가치를 서방 또는 백인들의 목숨과 비교할 때 이중잣대를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그들은 서방에서는, 적어도 서방의 일부에서는 유럽인이 유럽인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보스니아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지만 아프리카인이 아프리카인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거의 완전히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즉 서구의 기준에서 아프리카인이란 실체가 없으며 정체성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럽은 역사적으로 미국 사회의 요람으로 인식되었고 미국과 바다를 건너 접하고 있으며, 게다가 미국의 국가안보적 이해관계에 중요한 지역이었다. 유럽에서 국경을 넘어 퍼져나가는 폭력사태는 항상 아프리카의 경계를 넘어 퍼져나가는 폭력사태 보다 미국의 정책입안가들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다.

(중략)


워싱턴은 르완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소말리아 사태의 정치적 결과로 이미 충분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최대한 작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전혀 가능하지 않았다. 클린턴 행정부의 국무부 공보담당관은 이전의 부시 행정부의 전임자들이 보스니아 문제를 담당할 때 그랬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르완다 사태를 대량학살(Genocide)라고 칭하는 것 조차 꺼렸다. 4월 28일, 한 기자가 국무부 대변인 크리스틴 셀리(Christine Shelly)에게 국무부는 르완다의 폭력사태를 대량학살로 보는지 질문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기자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비록 대량학살이라는 용어는 엄밀한 법률적 개념이 아니나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정확한 법률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대량학살이라는 용어에는 다른 요인들도 포함됩니다."

국무부 출입기자들은 이 발언은 관료적 발언의 놀라운 사례로서 어떤 발언을 하건 도덕적으로 타격을 받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야기 하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하겠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5월로 접어들면서 대량학살의 징후는 더욱 더 명확해 졌고 UN은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다. 미국은 물자를 지원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UN군이 르완다를 이동할 수 있도록 보병수송장갑차가 보내질 것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물자의 대여 조건, 장갑차의 도색, 그리고 어떠한 표시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때문에 천천히 지연되고 있었다. 한 주가 지날 때 마다 사망자가 늘어만 갔다. 어느 순간 사망자의 추정치는 50만명이 되었고 그 숫자는 꾸준히 늘어만 갔으나 워싱턴에서는 논의만 계속하고 있었다.

만약 이 사태가 대량학살이라면 행정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 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지침은 대량학살이 아니라 '대량학살적 행위(acts of genocide)'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6월 10일, 크리스틴 셀리는 국무부가 대량학살적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믿을수 있는 모든 근거가 있다고 말했다. 이 브리핑에 참석한 한 기자는 얼마나 많은 대량학살적 행위가 일어나야 대량학살이 되는지 질문했다. 셀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질문은 제 직위에서 대답할 수 없는 것 입니다."

다른 기자가 질문했다.

"국무부가 대량학살이라는 단어를 단독으로 사용하지 않는 대신 대량학살의 앞 부분에 "~적 행위"라는 단어를 붙이라는 지침을 가지고 있다는게 사실입니까?"

셀리의 답변은 정부가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반영했다.

"제가 받은 지침은... 즉... 즉 제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용어를 사용하라는 것 입니다. 저는... 저는...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데 모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표현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특정 사안에 대해서 절대적인 규정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정의(定義)는 있습니다. 저는 신중한 검토를 거쳐 선정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조지 오웰이 그녀가 당황한 모습을 봤다면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David Halberstam, War in a Time of Peace : Bush, Clinton, and the Generals, Scribner, 2001, pp.273, 276~277

이 당시 미국의 행동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었는데 도덕적인 비난'만' 받았습니다. 세상일이 대개 이렇게 돌아간다는 것은 참 씁슬한 일이지요.


잡담 하나. 크리스틴 셀리는 2005년 12월 17일 병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링크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9년 1월 19일 월요일

한국전쟁 기간 중 북한지역에서 발생한 미군에 의한 민간인 살해

예전에 신천학살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역사서술이 가지고 있는 허구성에 대해서 글을 한 편 쓴 일이 있습니다. 원래 다른 용도로 쓴 글을 블로그에 올리기 위해서 양을 크게 줄였기 때문에 황해도의 우익단체 봉기나 북한측의 주장에 대해서 상세히 쓰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군요. 나중에 신천학살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신천학살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

그리고 역시 그 글에 넣지 못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북한 점령기간 중 미군에 의해 자행된 구체적인 민간인 살해에 대한 내용입니다. 물론 북한의 억지 주장처럼 미군이 수 만명의 대량학살을 자행한 것은 아니지만 민간인에 대한 소규모의 공격은 분명히 존재했으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문제입니다.
북한은 1951년부터 본격적으로 UN을 통해 미군의 전쟁 범죄를 비난하고 국제 사회의 여론을 유리하게 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물론 북한의 이런 선전 중에는 신천학살과 같이 터무니 없는 것도 있지만 소규모의 민간인 살해는 미국 측 기록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미 육군 제187공수연대전투단과 미 해병대 제1해병사단, 미육군 10군단 헌병대의 민간인 살해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사례는 1950년 11월 평양 인근에서 187공수연대전투단 D중대 소속의 모리슨(Aubrey L. Morrison) 이병과 손더스(Arnold A. Saunders) 일병의 주도로 일어난 민간인 살해사건에 대한 개요입니다.

(전략)

2. 개요 : (CID 보고서 51-O-78-A의 색인 A를 참고). 1950년 11월 3일 오전 178공수연대 전투단 소속의 모리슨 이병과 7명의 사병은 북한 평양 근교의 주둔지를 출발해 한 마을에 도착했으며 이곳에서 북한군 군복을 입고 있는 민간인을 발견했다. 모리슨은 그 사람이 북한인민군의 탈영병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무장을 하고 있지 않았다. 손더스 일병이 그에게 45구경 권총 두 발을 발사했으며 모리슨 이병은 총검으로 찔렀다. 그 민간인은 이때 입은 상처로 사망했다.

같은 날 오후 모리슨과 7명의 사병(이 중 두 명은 오전의 수색조에도 속해있었다)과 함께 다시 공산군을 찾는다는 구실로 주변 마을들을 돌아 보았다. 이 과정에서 모리슨은 여섯 명의 한국 민간인을 총으로 쏜 뒤 총검으로 찔렀다. 다른 사병 두 명도 각각 한국 민간인 두명을 쐈으며 그 뒤 모리슨이 총에 맞은 민간인들을 찔렀다. 이들은 수색은 사전 허가를 받지 않았다. 모두 남성인 민간인 아홉명이 살해되었다.

2. Facts : (See Tab “A”, CID Report 51-O-78-A). On the morning of 3 Nov 50 a Pvt Aubrey L. Morrison and seven other EM of the 178th Abn RCT left their area near Pyongyang, North Korea, and proceeded to a Village where they found a civilian who had among his effects a North Korean uniform. The EM were told that the civilian was a deserter from NKPA. He was not armed. Pfc Saunders shot the civilian twice a caliber .45 postol and Morrison bayoneted him. The civilian died from such wounds.

On the afternoon of the same day Morrison and seven EM(two of whom had been present in the morning group) again went to other outlying villages, assertedly in search of communists. During this trip Morrison shot and then bayoneted six Korean Civilians. Two other EM each shot Korean civilians and Morrison proceeded to bayonet them also. None of the soldiers were on authorized patrol. Nine civilians, all men, were killed.

‘Request for confinement and mental evaluation’, 29 Jan 51, RG 338, Eighth U. S. Army, Box 740, Security-Classified General Correspondence

다음은 미 해병대와 미 10군단 헌병대의 사례입니다.

(전략)

2. 1950년 11월 3일, 미 해병대를 태우고 원산을 출발한 기차가 덕원(德源)에 정차했을 때 해병대원 중 일부가 전화선 작업을 하던 철도 신호원들을 아무 이유 없이 총으로 쐈다고 한다. 철도원 한 명이 허벅지에 총을 맞아 현재 치료 중이다.

3. 1950년 11월 10일, 10군단 헌병대의 차량과 사병(이 기차에 장교는 타고 있지 않았다)을 태우고 10시 30분에 원산을 출발한 기차에서 탑승한 헌병대원들에 의해 다음과 같이 타당한 이유도 없고 불필요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a. 13시 25분 경, 용훈 근처의 야산에서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던 한국인이 한 명이 총을 맞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b. 용훈 근교에서 14세 정도의 한국 소년 한 명이 기차에 손을 흔들다가 총을 맞았다. 그는 양 손을 모두 치켜들고 있었는데 사망한 것으로 추정 될 때 까지 사격이 계속되었으며 이 사건은 13시 30분경에 일어났다.

c. 16시경 야산에 서서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던 한국 남성이 사격을 받았으며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d. 밭에서 일하던 7명의 한국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노인이 사격을 받았다. 모두가 그 자리에 쓰러졌으며 그대로 있었다. 이 총격의 결과는 알 수 없다. 장소는 알 수 없으며 사건 발생 시각은 16시 05분경이다.

e. 의류를 짊어 지고 가던 한 한국 남성이 사격을 받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소는 알 수 없으며 사건 발생 시각은 16시 30분 경이다.

4. 한국군 수송장교와 영어로 말하고 쓰고 읽는 것을 유창하게 하는 그의 부관이 중간에 기차를 세우고 미군들에게 민간인에게 총을 쏘는 것을 멈추고 그러기 싫거든 민간인들을 쏘지 말고 차라리 자신들을 쏘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미군들은 한국군이 상관할 일이 아니며 만약 그들이 공산당이거나 또는 공산당에 동조하는 것이라면 북쪽으로 가버리던지 아니면 ‘자신들의 전우를 죽인 자들과’ 똑같이 당해 보라고 대답했다. 기차에 타고 있던 다른 한국군 장교들은 아무것도 도울 수가 없었으며 부끄러움과 불쾌감 때문에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이 기차에는 부사관 한 명이 인솔자로 동승하고 있었으나 사병들의 행동을 막기 위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2. On 3 Nov 50 a train out of Wonsan bearing US Marines stopped at Dukwon and some of the marines, without any provocation being noted, allegedly began firing weapons at railroad signal men who were working on the telephone lines. One worker was hit in a thigh and is presently hospitalized.

3. On 10 Nov 50 a train out of Wonsan, leaving there at 1030 hours, and bearing vehicles and enlisted men(no officer accompanying them) of X Corps Military Police unit had the following incidents allegedly performed by members of this group, all of which apparently were unprovoked and uncalled for :

a. A Korean man walking up a mountain side near Yonghoon, carrying an “A” frame, was shot and apparently killed, at about 1325 hours.

b. A Korean boy, age about 14 years, near Yonghoon, waving his hand at the train, was fired upon. He raised both hands above his head, firing continued till he was apparently killed, at about 1330 hours.

c. A Korean man standing on a small hill watching the train pass was fired upon and apparently killed, location not given, at about 1600 hours.

d. Sev(en) Korean women, children a(nd) old men working in a field were fired upon. All fell flat and remained that way. Effect of fire not known. Location not given, at about 1605 hours.

e. A Korean man carrying a bundle of clothing on his back was fired upon and apparently killed, location not given, at about 1630 hours.

4. The KA Transportation Officer and his aide, who is a well educated person fluent in speaking, reading and writing the English language, stopped the train at one point and remonstrated with the men, asking them to cease these sort of action, or to shoot them instead of these people. The reply was, in effect, that it was none of their(the Korean’s) business and that if they were, or liked, Commies they should go north or get the same thing thing they (the MP’s) were giving people “who had killed their buddies”. Other Korean officers on the train were helpless to do anything and hid their faces in shame and disgust. The Military Police on this train were apparently in charge of a non-commisioned officer, who did nothing to stop their activities.

‘Malicious Use of Weapons’, 15 Nov 1950, RG 338, KMAG Box 39, AG 333.5 G-1

먼저 첫 번째 문서에 나타난 살해 사례는 수색 작전 도중에 발생한 사례라는 점에서 비정규전 상황에서 발생하는 다른 사례들과 유사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민간인 살해는 17~19세기 유럽에서 게릴라전에 직면한 유럽군대에서도 일어 났었고 2차대전 당시의 게릴라전 상황에서도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문서에서 나타난 10군단 헌병대의 경우는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정도가 더 심각합니다. 특히 앞의 문건에 기록된 사건은 전투 작전(비록 허가는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중 전투 지역에서 벌어진 일인 반면 두 번째 문서에 나타난 민간인 공격은 전투상황이 아닌 상태에서 명백히 민간인 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10군단 헌병대의 사례에서는 인종적 멸시감이 주된 동인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북한인’에 대한 ‘적’으로서의 적대감입니다. 민간인 살해에 항의하는 한국군 장교에게 북한인들을 ‘전우를 죽인 자들’이라는 표현으로 지칭한 것은 북진 이후 알려진 미군 포로 학살사건의 영향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전쟁 중 적국의 민간인에 대해서 적대감을 표출하는 하는 경우 또한 기존의 전쟁에서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경우에는 적대감에 인종적 멸시가 함께 작용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예전에 신천학살에 대한 글을 쓰자 이것이 인터넷 게시판의 좌우투쟁(!)에 인용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상당히 보수적이라 북한의 주장에 휘둘리는 자칭 진보들을 볼 때 마다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긴 합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편’의 손이 항상 깨끗한 것은 아니지요. 인터넷에서 우연히 그 논쟁을 구경한 뒤 제 블로그가 지나치게 우편향(?)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균형(?)을 잡아볼 생각으로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한국전쟁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감정에만 사로잡힌 논쟁들이 오가는 것을 보면 전쟁이라는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성찰은 아직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아직까지 북한이라는 찝찝한 국가가 남아있다는 점이 원인으로 작용할 수 도 있겠지만 어쨌든 휴전 이후 60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도 편을 갈라 소모적인 감정싸움만 벌인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요.

2009년 1월 9일 금요일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2008) - 김태우

국내의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 성과는 방대한 양이 축적되어 있지만 상당수가 전쟁의 기원과 발발과정, 또는 휴전과정과 그 영향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전쟁 시기에 초점을 맞춘 연구도 대부분은 전쟁기의 학살, 피난민 문제 등 사회사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요. 본격적인 군사사 연구는 거의 대부분 국방부의 전사편찬위원회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며 흥미로운 민간 연구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김태우(金泰佑)의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2008)는 한국전쟁의 군사적 측면을 다룬 보기 드문 연구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게다가 재미있습니다!!!


한국전쟁 시기의 미공군 작전에 대한 연구로는 스튜어트(James T. Stewart)의 Airpower: The Decisive Force in Korea, 퍼트렐(Robert F. Futrell)의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크레인(Conrad C. Crane)의 American Airpower Strategy in Korea, 1950-1953등이 있습니다. 냉전기에 출간된 스튜어트와 퍼트렐의 연구는 시기적 한계와 미국 공군의 공식적인 견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제약이 있습니다. 반면 냉전 이후 출간된 크레인의 연구는 미공군의 입장을 반영한 기존 연구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냉전기에는 잘 언급되지 않았던 측면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참고로 퍼트렐의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미공군군사사연구소(Air Force Historical Studies Office)에서 pdf 형식으로 전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이 주제에 대한 가장 최근의 연구답게 90년대 이후 공개된 방대한 미공군 자료들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공군, 또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간과하기 쉬운 북한과 공산군측의 입장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시기적으론 1950년부터 1951년에 대부분의 내용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 후반의 작전에 대한 서술이 부족한 편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들이 잘 다루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저자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이 지나치게 전쟁의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 집중된 나머지 전쟁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문은 한국전쟁기 수행된 미군의 항공작전을 군사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미공군의 폭격정책이 형성된 과정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미공군의 지휘운용체제를 다루고 있으며 두 번째로는 전쟁 초기 북한지역에 감행된 미공군의 ‘전략폭격’작전을, 세 번째로는 전쟁 초기 남한 지역의 전술항공작전, 네 번째로는 중국군 참전 이후 공군에 의한 초토화 작전과 전선 고착 이후 항공압력전략으로 선회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미공군의 폭격정책이 형성되는 과정을 고찰한 1장은 1차대전과 2차대전 시기 미공군을 비롯한 열강들의 폭격 교리가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논문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주로 2차자료를 활용하고 있고 또 영어권 자료에 집중되어 지금 시각에서는 약간 잘못된 부분이 보입니다.(독일 공군의 폭격 정책에 대한 설명이 대표적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의 이해를 위한 도입부로서 매우 잘 서술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제독의 반란’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다뤄줬으면 좋았겠지만 곁가지를 너무 많이 치면 논문이 산으로 갈 수 밖에 없지요.
2장에서는 전쟁 초기 미공군이 수행한 북한 지역에 대한 전략폭격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시 한국에서 나온 연구 답게 미국인들이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북한의 대응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전쟁 초기에 북한 공군이 섬멸 되었기 때문에 북한의 대응은 방공호 건설과 피해 복구 등 철저히 수동적인 것에 제한 되었지만 이러한 수동적인 대응도 나름대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3장에서는 전쟁 초기 남한 지역에서의 전술지원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는 미군에 의한 민간인 폭격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입니다. 저자는 전쟁 초기 미공군이 효과적인 지상지원을 할 수 없었던 이유로 제5공군이 미국의 방어적 전략에 의해 일본의 방공에 중점을 두고 개편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지상군에 대한 전술지원 체계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민군의 진격에 의해 전선의 상황이 유동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지상지원이 어려웠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미공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눌린 북한군이 점점 은폐에서 신경 쓰고 야간 작전으로 전환한 것도 미공군의 지상지원능력의 효과를 떨어트린 요소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요소들이 결합되어 남한 지역에서 많은 민간인 희생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2장과 3장이 1950년 6월부터 겨울까지의 짧은 기간을 다룬 반면 4장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 이후부터 전쟁 종결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중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후퇴하는 미군이 초토화 작전의 일환으로 공군력을 동원한 것과 전선 교착 이후 미공군이 항공압력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분량에 비해서 다루는 시기가 방대하기 때문에 서술의 밀도가 떨어지는 감이 있습니다. 특히 2장과 3장에서는 노획문서 등 북한 문헌의 활용을 통해 북한측의 대응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4장에서는 북한의 공식 문건이나 소련을 통해 공개된 문건 등으로 자료가 제한되고 있습니다. 1951년 이후로는 노획문건이 급감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미국의 폭격으로 인한 북한 사회의 변동에 대한 평가입니다. 저자는 미국의 폭격으로 북한 경제의 기반이 송두리째 붕괴되었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전후 국가 주도의 농업집단화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비해 신속하고 원활하게 수행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이 논문은 기존에 국내의 한국전쟁 연구가 거의 방치한 군사적 측면을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저자는 군사사상은 물론 미공군의 장비, 전술 등의 측면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충실한 서술은 군사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미군의 ‘폭격’에 초점을 맞춘 만큼 1951년 이후의 항공작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 제공전투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다는 점은 섭섭하지만 그 점까지 다뤘다간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을 것 입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공개된 문헌을 통해 북한측 시각을 최대한 공정하게 반영하려 했다는 점은 미국측 연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미덕입니다. 아무래도 언어의 한계 때문에 미국의 한국전쟁 연구는 반쪽 짜리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데 이렇게 한국인의 시각에서 군사적 측면을 다룬 연구가 나왔다는 점은 매우 반가운 일 입니다.

당장 단행본으로 나와줬으면 하는 재미있는 논문입니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2008년 6월 22일 일요일

막장을 달리는 짐바브웨 사태

Mugabe's men bring rape and torture to Harare suburbs- GUARDIAN

Mugabe allies 'set up' political terror - GUARDIAN

Assassins in Zimbabwe Aim at the Grass Roots - The New York Times

Zimbabwe opposition asks voters to end Mugabe rule - The Washington Post/AP

Krieg gegen das eigene Volk - Frankfurter Allgemeine

Mugabe setzt auf Mord - Der Spiegel

요 며칠 사이에 짐바브웨에서 아주 난감한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물론 짐바브웨에서는 선거 때 마다 막장상태가 반복돼 오긴 했습니다만 이번엔 약간 더 난감해 보입니다.

짐바브웨 대통령 무가베가 선거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자신을 추종하는 민병대를 앞세워 정치테러를 자행하고 있다는군요. 소총, 그리고 칼과 돌팔매(!)로 무장한 민병대가 살인과 강간을 저지르며 대통령의 반대파와 유권자들에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야당 당원에 대해서는 대량학살 이라고 불러도 될 수준의 테러가 가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당사자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테러의 마수가 뻗치고 있다니 할 말을 잃을 지경입니다. 이건 마치 이박사 치하의 대한민국을 살짝 업그레이드 한 듯한 막장 분위기로군요. 아니나 다를까 짐바브웨의 국가 경제도 엉망인걸 보니 그야 말로 이박사와 동급이라 해도 틀리진 않겠습니다. "Krieg gegen das eigene Volk"라는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의 기사 제목은 정말 짐바브웨 사태의 핵심을 잘 요약했다는 느낌입니다.
저 위에 링크는 하지 않았는데 AFP 통신의 한 보도에 따르면 무가베는 자신을 권좌에서 내려오라고 할 수 있는건 "신" 뿐이라고 떠들고 다닌다고 합니다. 아이고 맙소사. 역시 도킨스 옹이 옳았습니다. 정말 갖가지 쓰레기들이 신의 이름을 걸고 세상을 막장으로 만들고 있군요.
짐바브웨의 막장 상태를 보니 이렇게 집에 편하게 들어앉아 대통령을 씹을 자유가 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2008년 6월 11일 수요일

신천학살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

신천학살은 한국전쟁 당시 있었던 수 많은 학살 중 한 단위 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는 ‘최대규모’인 학살입니다.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은 북한의 공식 주장에 따를 경우 신천에서 학살된 민간인은 35,383명으로 북한 전역에서 가장 많은 것 입니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신천 외에도 황해도의 안악, 은율은 각각 1만명을 넘는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전체적으로 황해도지역의 민간인 희생은 북한이 주장하는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까지 38선 이북지역의 민간인 희생자의 65% 이상에 달합니다. 현재로서는 민간인 희생자의 규모에 대한 북한 주장의 진위를 확인하기가 극히 어렵지만 어쨌든 불과 3개월 사이에 황해도 지역, 특히 신천에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입니다.

하여튼 신천학살은 그 규모 덕분에 한국전쟁이 진행되던 와중에 정치적 이슈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북한 외무상이던 박헌영은 1951년 4월 15일에 유엔에 보낸 서한에서 유엔군의 점령기간 중 38선 이북지역에서 미군과 ‘리승만 군대’에 의한 대량의 학살이 일어났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 당시 박헌영의 주장에 따르면 신천에서 25,000명, 황해도 전역에서 10만명 이상이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이 국제적 문제가 되자 진보적 국제단체들은 미국의 학살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단을 북한으로 파견합니다. 첫 번째 조사단은 국제민주여성연맹(Women's International Democratic Federation)이 파견한 조사단 이었고 두 번째 조사단은 국제민주법률가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의 조사단이었습니다. 이 두 단체는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기초해서 ‘미군’이 학살을 저질렀다는 주장을 했고 당연히 미국과 남한정부는 그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첫 번째 국제조사단인 국제민주여성연맹의 조사에서는 학살의 주체로 ‘미군’을 비롯해 ‘영국군’과 ‘한국군’이 거론되고 있는데 두 번째 조사단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의 발표에서는 ‘미군’의 학살만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초기의 발표에서 뒤의 발표로 가면서 학살의 책임이 ‘미군’으로 집중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남한에서는 월남인들을 중심으로 ‘북괴의 선전’에 대항하기 위한 의도로 황해도 일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반공항쟁’의 관점에서 서술한 저작들이 나왔습니다. 대표적인 저작이 1955년에 출간된 박계주의 『한국전쟁 이면 비사 – 자유공화국 최후의 날』과 1957년에 출간된 조동환의 『항공(抗共)의 불꽃』이 있습니다. 특히 후자는 500쪽을 넘는 분량에 봉기 참여자들의 증언을 대량으로 수록해 ‘북괴의 모략’을 분쇄하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정부에서도 북한의 선전전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조동환의 책에는 앞머리에 당시 부통령이던 장면(張勉)의 義氣衝天 이라는 휘호가 실렸으며 이 밖에도 국방부장관 김용우(金用雨), 검찰총장 정순석(鄭順錫)이 발간사를 적었습니다. 이런 월남민들의 저작들은 학살의 책임을 북한에 전가하고 있지만 우익에 의해서도 약간의 보복학살이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70년대 이후의 반공서적들 보다 다소 객관적인 면이 엿보이는게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동환에 따르면 좌익에 의한 학살은 천여명 정도 수준으로 신천군 정치보위부에서 90명, 신천 군당방공호에서 100여명, 또 내무서 방공호 근처에서 230여명, 내무서 내에서 20명, 시내에서 300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이후의 보복학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규모를 명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80년대 이후부터 남한의 대학가에는 북한의 주장을 반영하는 사회과학 서적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일단 북한의 주장은 국제민주여성연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라는 국제단체의 지원사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 방식의 비과학적인 측면을 보지 못한다면 상당히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어쨌든 신천학살은 꽤 민감한 떡밥이어서 아직까지도 남측의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미군이 대량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2001년에 출간된 황석영의 ‘손님’이나 2002년에 방영된 MBC의 이제는 말 할 수 있다가 ‘신천학살’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미군의 학살 개입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여전히 미군이 학살을 저질렀다고 확신하고 있지요.

북한은 미국이 학살을 저질렀으며 학살을 지휘한 자는 미군 중위 해리슨이라고 주장합니다. 미군의 학살을 입증하려면 먼저 이 ‘해리슨’의 실체에 대해 밝혀야 겠지요. 실은 이 ‘해리슨’은 북한의 주장 뿐 아니라 남한의 반공성향 서적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북한연구소에서 1990년에 펴낸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황해도 편에는 신천에 진주한 미군 지휘관이 ‘해리슨’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렇다고 이것이 북한의 주장을 입증해 주는 증거이냐고 물으신다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해리슨이나 남한의 서적에 등장하는 해리슨은 모두 문서로 확인이 안된, 증언에 기초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MBC의 취재가 밝혀냈듯 재령-신천일대에 진주한 미육군 24보병사단 19보병연대 3대대에는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중위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1950년 9월 29일부터 10월 31일까지의 미 육군 24보병사단 장교명부에 실려있는 19연대 소속의 H로 시작하는 장교들의 이름을 발췌해봅니다.

19보병연대의 H로 시작하는 이름의 장교

휴즈(Irving C. Hughes) 대위
할(Charles E. Hall) 대위
홀더(J. M. Holder) 대위
히슬롭(Kenneth C. Hyslop) 대위
핸들리(Norman C. Handley Jr) 중위
할스태드(Ray H. Halestead) 중위
하우겐(Richard D. Haugen) 중위
허버트(Robert L. Herbert) 중위
힐(James F. Hill) 중위
호넷(John H. Hodnett) 중위
호로니(John A. Horony) 소위
허드슨(George W. Hudson) 소위
헤일(Lindsey W. Hale) 소위
햄릭(Clifford D. Hamric) 소위

물론 미군의 학살을 굳건히 믿는 쪽에서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민족21이라는 잡지는 2002년 5월 호에서 학살을 저지른 미군 ‘해리슨’이 방첩대(CIC)나 헌병대 소속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물론 아무런 근거도 없는 심증일 뿐이지요.
그렇다면 1950년 10월 미 24보병사단 방첩대와 헌병대에는 ‘해리슨’이란 이름의 장교가 있었느냐? 그럴리가 없죠…

미육군 24보병사단 24방첩대 장교명부(준위 이상)

마운트조이(Pearl B. Mountjoy) 소령
쿡(Harvey J. Cook) 대위
매커비(John F. McCabe) 대위
킴(Calvin Kim) 중위
매키(Francis L. Mackey) 상급준위
요네무라(Minoru Yonemura) 상급준위
존슨(Joshep H. Johnson) 준위
이시하라(James H. Ishihara) 준위
스미스(Elmer L. Smith) 준위

미육군 24보병사단 24헌병중대 장교명부(준위 이상)

햄릿(Lamar Hamlett) 대위
매닝(James D. Manning) 대위
애버릴(Edward R. Averill) 중위
보이드(Raymond S. Boyd) 중위
리건(Wandle Legan) 중위
풋냄(Harry A. Putnam) 중위
솔라-오티즈(Antonia M. Sola-ortiz) 중위

생각해 보면 오직 증언에 기초해 ‘해리슨’이란 인물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신천학살에 대한 최초의 국제조사에서는 ‘해리슨’이란 인물이 등장하지 않다가 갑자기 그 이후의 조사에서부터 튀어나오고 있다는 것을 보더라도 조작의 냄새가 풀풀 풍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입니다. MBC의 이제는 말 할 수 있다를 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북한측이 ‘해리슨’의 학살을 목격한 증인으로 내세우는 김종문과 민선홍은 1950년 당시 각각 11세와 6세였는데 이들이 영어를 다 알아들을 정도로 영어실력이 좋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뭐, 공화국이 당시부터 조기영어교육에 성공을 거두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만?

해리슨이라는 인물이 없다고 해서 미군이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느냐고 하는 분도 계실 것 입니다. 그렇다면 재령-신천에 있었던 19연대나 방첩대, 헌병대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살펴보면 될 것 입니다.
먼저 재령-신천에서 작전한 19보병연대 3대대의 경우 대대장인 에이어스(Harold B. Ayres) 중령이 10월 7일 야전병원에 후송되어 로건(Edwad O. Logan) 소령이 대대장 대리를 맡고 있었다. 3대대는 북진을 개시할 당시 재령의 도로교차점을 장악한 뒤 사리원 방향으로 진출, 북상하는 영국군과 접촉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10월 16일에 이 대대가 북진을 시작할 무렵 북한군의 저항은 와해단계에서 오히려 북한의 빈약한 도로망에 의한 교통정체가 더 큰 장애물일 정도였다고 연대 작전일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날인 17일 오후 19연대는 재령에 돌입했고 다음날 까지 재령일대를 장악하는데 성공합니다. 19연대의 일지에는 신천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어서 언제 신천이 점령되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재령은 사리원에서 신천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중앙에 위치한 교차점이었고 또 월남한 신천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아마도 18일 오후 늦게야 미군은 신천에 돌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재령-사리원 일대를 장악한 미 19보병연대는 다시 방향을 서쪽으로 돌려 진남포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3대대에는 후방 경비의 임무가 내려졌고 이 중 L중대와 여기에 배속된 6전차대대의 전차 몇 대가 재령-신천 일대의 경비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10월 20일에 재령 방향으로 북상한 제 5보병연대전투단에 방어구역을 인계했기 때문에 재령일대에는 불과 이틀 정도만 머물렀습니다. 설사 해리슨이 실존인물이라도 학살을 저지르기에는 터무니 없이 짧은 기간이지요. 물론 후속부대인 제 5보병연대도 바로 사단 주력을 따라 북상해서 별다른 건덕지가 없습니다.;;;;;
방첩대의 경우는 좀 더 건덕지가 있긴 합니다. 북진과정에서 24방첩대의 임무는 미군 포로의 수색, 특히 대전에서 포로가 된 딘 소장의 행적을 찾는 것과 좌익 간부의 색출이었습니다. 하지만 방첩대의 일지를 보면 좌익 간부 색출은 상당수의 간부들이 줄행랑을 친 덕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방첩대가 좌익 색출과정에서 우익 치안대의 협조를 받았다는 점 정도입니다. 헌병대의 경우는 더 심심해서 교통정리와 피난민 통제 말고는 없습니다.

간단히 결론을 내리자면 소규모 민간인 살해를 제외하면 미군이 북한의 주장 처럼 수만명을 학살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황석영의 손님이 출간 된 뒤 황석영이 신천학살을 내부의 문제로 돌리고 미군의 학살을 은폐했다고 비난한 유태영 목사도 정작 자신은 미군이 학살을 저지른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밝혔지요.

황석영이 한 인터뷰에서 밝힌 것 처럼 신천 학살이 전적으로 미국의 책임이라는 것은 휴전 이후 사회 내부의 통합을 위해서 택한 고육지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황석영의 설명은 타당한 것 같습니다. 북한의 공식 역사인 조선전사에서는 신천학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천에서의 대중적 학살 만행은 신천 땅을 강점한 미제침략군의 우두머리인 해리슨 놈의 직접적인 지휘 밑에 계획적으로 감행되었다. 이 살인마는 1950년 10월 17일 미제침략군이 신천을 강점한 첫날에 ‘나의 명령은 곧 법이다. 이를 위반하는 자는 무조건 총살한다.’고 떠벌이면서 전복된 지주, 악질종교인, 고리대금업자, 건달군 등 인간쓰레기들을 제 놈의 졸개로 긁어모아 인민학살에 내몰았다. 이리하여 신천 땅에서는 일찍이 역사가 알지 못하는 야수적인 대중적학살만행이 감행되었다.

『조선전사 26권』,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130~132쪽

이 서술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전복된 지주, 악질종교인, 고리대금업자, 건달군 등 인간쓰레기들을 제 놈의 졸개로 긁어모아 인민학살에 내몰았다'는 구절입니다. 사실왜곡을 하는 와중에서도 진실을 알 수 있는 약간의 실마리를 넣어놓았다는 것 이지요. 즉 북한의 논리는 ‘전쟁의 원천 제공자가 미제니까 미제가 다 한 것이 아니냐’인 것 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진실을 회피하는 것이 그 사회의 발전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될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북한이 고립을 유지하는 동안은 이런식으로 진실을 은폐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정면으로 바라봐야 할 때가 올 것 입니다. 그게 언제가 될진 아무도 모르지만.

추가(6월 12일 18시 36분)

그러고 보니 해리슨이라는 인물이 구체화 되는 과정에 대해서 몇 가지 더 덧붙일 필요가 있겠군요. 제가 아직 신천학살에 대한 북한측 문헌을 모두 찾아 본 것은 아니지만 『조선전사 26권』(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신천학살박물관에서 펴낸 신천의 원한을 잊지 말자』(금성청년출판사, 1987), 고상진의 『조선전쟁시기에 감행한 미제의 만행』(사회과학출판사, 1989) 등 1980년대의 문헌에는 학살을 감행한 ‘살인마’의 이름이 ‘해리슨’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기 부터인지 ‘해리슨’은 이름이 되었고 그의 성은 '메이든'(Madden)이 되었지요.

그렇다면 ‘해리슨’이란 성을 가진 중위는 없어도 ‘메이든’이란 성을 가진 중위는 있었느냐? 당연히 있을리가 없지요.

역시 19연대 소속의 장교 중 성의 앞 글자가 M으로 시작하는 장교는 다음과 같습니다.

Nedd D. Moore 대령
Thomas M. McGrail 중령
Robert M. Miller 소령
Melecio J. Montesclaros 소령
Sidney M. Mark 대위
Nathan Masin 대위
Robert S. Mason 대위
Samuel T. Minnich 대위
Oliver L. Mcdougell 중위
James M. Mattson 소위
Cosby Mcbeath Jr. 소위
Raymond R. McEachin 소위
William R. Megibren 소위

2008년 4월 15일 화요일

거창에 다녀왔습니다

거창에 다녀왔습니다


오늘 거창 학살 57주기 추모식이 있었거든요.

다행히(?) 거창 학살 추모식은 군단위에서 조용하게 치러져서 얼마전에 다녀온 4.3 추모식 보다는 훨씬 조용했습니다. 딱히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이 없다 보니 행사는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편했습니다. 유족분들은 행사가 진행 되는 동안 알아서 식사하러 가시니 빈 자리가 많아 좋더군요. 사실 봄볕이 강한지라 대부분 60을 넘기신 유족분들이 오래 앉아 계시긴 어려웠을 겁니다.
생각해 보니 4.3 기념식에 참석한 한승수 국무총리는 추도사 보다는 제주도에 대한 여러가지 공약을 설명하면서 사전 선거운동만 하고 갔는지라 추모식 분위기를 망쳤습니다. 참석하신 분들 상당수가 뒷담화를 했다지요. 거창에는 다행히도 화환만 보내는 선에서 그쳤습니다. 높은 분들이 참석해 주는게 행사에 무게도 실리고 좋다는 분들도 많은데... 저는 그냥 이렇게 지역적으로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되는게 정말 좋더군요.

이 어린양은 점심식사 준비를 하는 데서 자원봉사(???)를 했는데 그 덕에 도시락 외에도 사이다 한 병을 덤으로 얻었습니다. 나쁘지 않더군요.

반찬 종류는 많았으나...

자원봉사의 대가

2008년 3월 4일 화요일

문명의 충돌

줄루전쟁 당시의 이야기 입니다.

(전쟁에서) 포로를 잡지 않는 집단들은 대개 왜 그렇게 하는 지에 대해 명확한 관념이 없다. 많은 경우 포로를 잡지 않는 것은 이들에게 그냥 관습이어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1879년의 줄루전쟁 당시 한 영국군 장교는 생포한 줄루족 포로들에게 줄루족들은 항상 영국군 포로를 학살했는데 자신이 줄루족 포로를 살려줘야 할 이유가 있는지 물었다. 이 질문에 한 줄루족 포로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우리를 살려줘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들의 포로를 죽이는 것은 그게 우리 검둥이들의 관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 흰둥이들의 관습은 그게 아니잖습니까?

영국군 장교는 이 포로의 대답을 듣고 줄루족 포로들을 살려줬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영국군은 줄루족을 상대로는 (포로대우에 있어) 호혜적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자 포로를 잡지 않았다.

Lawrence H. Keeley,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p.84

이 어린양은 영국인들의 융통성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바 입니다.

2008년 2월 20일 수요일

친위대 사관학교 중국음식점이 되다 - 다하우 수용소와 바드 퇼츠 친위대 사관학교

여행 둘째 날은 다하우(Dachau), 그리고 바드 퇼츠(Bad Tölz)를 가기로 정했습니다. 그 때문에 원래 갈 계획이었던 잉골슈타트(Ingolstadt)의 바이에른 육군 박물관(Bayerisches Armeemuseum)은 다음 기회로 미뤘습니다. 그래도 좀 아쉬워서 잉골슈타트를 잠깐 가 봤습니다.

잉골슈타트 역 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야간이라 바이에른 육군 박물관은 못 찾았습니다. 비도 조금 내리고 있어서 길 찾기가 어렵더군요.

잉골슈타트 역은 매우 작지만 따뜻한데다 구내서점도 괜찮았습니다. 이곳 구내서점은 무려 오전 5시 30분에 여는데다 쓸만한 책이 더러 있더군요.

잉골슈타트 역의 대합실에는 도시의 발전 과정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사진이 흔들린게 유감입니다. 빨리 좋은 카메라를 하나 장만해야 겠습니다.


잉골슈타트 역에서 책을 한 권 산 뒤 커피 한잔을 마시고 다하우 수용소로 향했습니다. 뮌헨 근처에서 가장 유명한 나치 시대의 유적이니 만큼 구경을 하고 가야 겠더군요.


정문 안 쪽에는 다하우 수용소를 해방시킨 미육군 제 20기갑사단의 공적을 기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다하우 수용소는 유명한 사적지인지라 단체 관람객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한가한 분위기더군요.




다하우 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명인사 중 한 명인 Vojtech Preissig의 데드 마스크 입니다.


전쟁 당시 다하우 수용소의 축소모형입니다.


이 곳은 다하우 수용소의 화장터 입니다. 괴이하게도 수용소의 다른 건물들에 비해 훨씬 평온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하우 수용소 관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은 걸어서 갔습니다. 다하우 기차역까지 대략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중간에 제 3제국 시절 친위대가 연병장으로 쓰던 곳의 터가 있더군요.


그리고 조금 더 가니 케네디 광장이라는 곳도 있더군요.


그리고 다하우 역에 도착했습니다. 걸어다니면서 게으름을 피운 탓에 뮌헨으로 가는 기차를 놓쳤습니다.;;;;;


바드 퇼츠로 가려면 뮌헨으로 돌아가서 다시 기차를 한 번 더 갈아타야 합니다. 사진 오른쪽 끝에 있는 기차가 바드 퇼츠로 가는 녀석입니다.


바드 퇼츠 역입니다. 다른건 다 좋은데 유별나게 플랫폼이 지저분한 역이었습니다. 쓰레기가 정말 많이 떨어져 있더군요.;;;;


바드 퇼츠의 시내는 꽤 예쁘장하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정말 장난감 집 같더군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바드 퇼츠에 온 목적은 예쁜 집들을 구경하는게 아니고 친위대 사관학교(SS-Junkerschule)를 답사하러 온 것 이었습니다.;;;;; 이런 정신상태하고는.

그런데 관광상품 파는 곳에 가서 물어보니 그런 곳이 있다는게 금시초문이라는 것 이었습니다. 뭐, 젊은 아가씨들이니 그런 우중충한 역사에 대해 모르는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관광상품 파는 곳 옆에 있는 바드 퇼츠 박물관으로 갔습니다.


박물관 매표소의 직원에게 물어보니 친절하게도 공짜 지도와 함께 위치를 잘 알려 줬습니다. 그런데 박물관에 들어오니 박물관 구경도 하고 싶어지더군요. 바드 퇼츠 박물관은 전형적인 민속박물관이었습니다. 생활사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군요. 그런데 이 박물관의 마루 바닥은 너무 삐걱 거려서 걸어다니기가 두려울 정도였습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친 뒤 바로 친위대 사관학교 터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뭐가 씌였는지 지도를 잘못 보고 얼마 안되는 거리를 한참 돌아갔습니다.

친위대 사관학교는 바드 퇼츠 주민들을 위한 스포츠 센터와 상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스포츠 센터에는 태권도장도 있더군요.



우수 인종 중의 엘리트들을 교육시키던 장소에서 열등인종의 무술을 가르치고 있다니 이거야 말로 나치들대한 최고의 조롱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태권도장 간판을 바라보며 한참 즐거웠습니다.

친위대 사관학교의 정문입니다. 처음 만들어 질 당시에는 아치가 있는 구조였다는데 전쟁이 끝난 뒤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건물 내로 들어가 보니 태권도장은 약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병장 터에는 아예 중국음식점이 들어섰더군요. 지옥에 있을(?) 히믈러가 약이 오를것 같습니다.

2007년 6월 12일 화요일

SS가 아니에요!

“You SS? You SS?”

하이트(Heinz Heidt)는 겁에 질려 뒤를 돌아봤다. 그는 자기 뒤에 있는 미군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하이트는 자신으로부터 불과 수 미터 떨어진 곳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미군 병사는 위장포를 덮은 철모를 쓰고 털 달린 가죽 자켓과 위장무늬 바지를 입었고 아주 검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에는 탄환이 끼워진 탄띠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 병사의 길다란 소총은 하이트가 아니라 슈타이어에 타고 있는 검은색 전차병 유니폼을 입은 젊은 소위를 겨누고 있었다. 하이트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한발 앞으로 나가 학교에서 배운 서투른 영어로 말했다.

“No SS! Armoured Division! Panzer Troopers wear black uniform too.( SS 아니에요! 기갑사단! 전차부대도 검은 유니폼을 입어요!)”

그리고 제복의 오른쪽 가슴에 달린 독수리 문장을 가리키며 계속 말했다.

“육군은 독수리를 가슴에만 달아요! SS처럼 팔에도 달진 않아요!”

미군 병사는 씨익 하며 미소를 지었다.

“It’s OK. Boy.”

미군 병사는 소위를 겨눴던 총을 거두고 가늠쇠를 쓰다듬으며 주위의 포로들에게 말했다.

“If I see SS, I kill them all.(SS가 눈에 띄면 모조리 죽여버린다)”

위험 천만한 순간이 지나가자 미군 병사는 포로들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그는 총을 치운 뒤 포로들에게 카멜 담배와 껌을 나눠줬다.

Guido Knopp, Die Gefangenen, (Goldmann Verlag, 2005), s.265.

전쟁이 끝날 무렵에 SS라고 하면 미군이건 소련군이건 간에 좋은 꼴을 못 당했다고 하지요. 종종 SS가 아닌 병사들도 SS로 오인받아 사살되는 경우가 비일 비재했던 모양입니다. 전에 인용했었던 Hungary at War에는 헝가리군 포로들이 무장친위대로 오인돼 소련군에게 학살당했다는 증언도 실려 있지요. 전쟁 말기에 재수없게 SS로 편입된 병사들은 얼떨결에 공공의 적이 됐을 테니 얼마나 황당하고 억울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군요.

참전자들의 이런 저런 증언을 듣다 보면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사람의 운명이 갈리는 것은 순식간인 것 같습니다.

2007년 4월 17일 화요일

1주일 전에 커트 보네것이 사망했었군요

회원으로 가입한 어느 북클럽의 뉴스레터를 받고야 커트 보네것이 1주일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Kurt Vonnegut dies at 84

이상하게도 요 몇달 동안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세상을 뜨고 있습니다. 부흐하임도 그렇고.

보네것을 추모(?)하기 위해서 제 5도살장을 다시 읽어 볼까 생각중입니다.

2007년 2월 18일 일요일

아무리 다급해도 크리스마스 트리는 만드는 독일인들

아래의 이야기는 1944년 겨울 부다페스트에 포위된 독일군이 부다페스트 근교의 한 독일계 마을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부다페스트가 포위된 뒤 독일군이 Solymar에 주둔하게 됐다. 하지만 독일군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전쟁으로 남성들이 징집됐던 터라 독일 병사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독일 병사들은 장작을 패거나 추수를 도왔고 마을 사람들은 독일 병사들을 매우 좋아했다. – 물론 이들은 아기가 아니라서 같은 침대에서 재우지는 않았다. 그리고 독일군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을 사람들을 위해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줬다. 병사들 중 한명은 Erzsebet에게 자신의 가족 사진을 보여주고 이름을 적어줬다고 한다. 그 병사가 적은 것은 아돌프 헤르만 라인플루스라고 돼 있는데 Erzsebet은 라인플루스가 병사의 이름인지 아니면 그 병사의 고향 마을 이름인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다른 병사 한명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했는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크리스마스만 되면 포위망 안에 갇히네요.”

소련군은 Solymar를 점령하자 독일 부상병들을 학살했다. 소련군은 마을 광장에 카츄샤를 배치하고 Varhegy(부다에 있는 성채언덕, 독일군의 마지막 거점 중 하나)를 포격했다. 나중에 포위된 독일 무장친위대 병력이 포위망을 탈출하려 했을 때 이들 중 일부가 Solymar로 들어왔고 소련군은 일시적으로 후퇴했다. 마을사람들은 독일군들에게 식량을 주고 도망치는데 도움이 되도록 옷을 빌려줬다. 하지만 도망치던 독일군 대부분은 소련군에게 잡혀 그 자리에서 사살됐다. 그리고 소련군이 Solymar를 다시 점령한 뒤 남은 패잔병들도 사로잡혀 죽었다. 마을사람들은 독일군을 좋아했기 때문에 학살된 독일군들을 마을 묘지에 매장했다. Erzsebet도 일년에 한번 라인플루스의 무덤에 꽃을 가져다 준다고 한다.

Cecil D. Eby, Hungary at War : Civilian and Soldiers in World War II, The Pennsylvan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8, p201

포위망에 갇혀 오늘 내일 하는 중에도 크리스마스는 잘 챙기는 걸 보면 역시 독일인들은 크리스마스를 아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