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에서 일본군의 궁색한 대전차 전투 사례를 하나 다루긴 했습니다만 2차대전기 일본 육군의 장비상태를 보면 이게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열강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물론 태평양 전쟁이 해전 위주였고 일본해군이라면 세계 일류급 해군이긴 합니다만 육군과
육해군 항공대의 질적 수준은 삼류라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니 말입니다. 게다가 질적수준은 물론이고 양적 수준도 형편없지요.
태평양 전쟁 종전 직후 미군이 일본군을 무장 해제한 기록을 보면 본토결전을 위해 일본 육군이 준비한 전력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장기간의 소모전을 겪은 이후라 하더라도 1944년 말 부터 본토결전 준비를 한 것 치고는 준비가 영
부실한게 눈에 띄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사례일 수 있는데 규슈에 배치된 제16방면군 예하 40군의 경우 군 전체에 트럭 186대,
기타 차량 64대, 장갑차 46대 등 총 296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장갑차를 제외한다면 250대의 차량이
있는 셈이지요.1)
일본 제40군은 1945년 1월 8일 편성에 들어갔고 여기에 총 4개 사단과 1개 혼성여단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제303,
206, 146, 77사단과 독립혼성 125여단이지요. 그냥 단순하게 계산해서 제40군에 배속된 각종 지원부대를 제외하면 총
15연대(303사단 3개연대, 206사단 3개연대, 146사단 4개연대, 77사단 3개연대, 제125여단은 5개대대 편성이니 대략
2개연대로 계산)에 차량 250대, 1개 연대에 차량 16~17대 정도가 돌아가는 셈입니다;;;; 여기에 군 직할대를 포함시켜서
나눈다면 그 숫자가 더 줄어들겠지요. 사실상 미군이 직접 공격해 왔다면 신속한 기동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40군은 303, 206, 146사단과 독립혼성125여단 등 총 3개사단과 1개 여단을 해안 방어에 투입하고 있었습니다.2) 제40군의 유일한 예비대로는 77사단만이 남는 셈인데 뭐 신속한 기동이 어려우니 미군이 상륙해 왔을 경우 어떻게 되었을지는 상상만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다른 곳과 비교해 본다면 어떨까요? 제 개인적으로 일본군의 본토 결전준비와 비교할 만한 대상으로는 독일군의 북부 프랑스 방어준비가
적합할 듯 싶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장기간의 소모전을 거친 뒤 방어를 위해 수개월간 전력을 급히 축적한 사례이니 비교대상으로
적절하지 않을까 싶군요. 먼저, 위에서 언급한 일본군 보병사단들과 비슷하게 차량화 우선순위에서 뒤떨어지는 제6강하엽병연대의 경우
연합군의 상륙 직전 70대의 트럭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3)
장비 상태가 나쁜 축에 속했던 272보병사단의 경우는 오토바이를 제외하고 105대의 자동차, 136대의 트럭, 71대의 견인용
트랙터를 보유하고 있었고 비교적 양호한 수준으로 볼 수 있는 353보병사단은 오토바이를 제외하고 573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4) 매우 거친 비교이긴 합니다만 일본군에 비교하면 차량화 수준이 상당히 양호한 편입니다.
물론 1945년 봄 본토방어를 위해 준비한 독일군과 비교하는게 타당하다고 보시는 분들도 계실 것 입니다. 1945년 봄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 독일군 보병사단도 상당히 엉망입니다. 약간의 예를들면 제167국민척탄병 사단은 1945년 3월 중순 편제의 13%의
차량만 갖추고 있었고 제326국민척탄병 사단의 경우는 아예 말과 마차만 갖추고 있었습니다.5)
하지만 그 당시의 독일군은 껍데기만 남긴 했어도 어느 정도의 기동부대들을 유지하고는 있었지요. 그 점에서 1945년 봄의
독일육군 조차도 일본 육군 보다는 조금 나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사실 국민돌격대에 판쩌파우스트라도 쥐어준 것을
보면 아무래도 독일이 일본 보다는 좀 낫지 않습니까.
주
1) John Ray Skates, The Invasion of Japan : Alternative to the Bomb,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Press), p.190
2) John Ray Skates, ibid., p.120
3) Hans-Martin Stimpel, Die deutsche Fallschirmtruppe 1942~1945 : Einsätze auf Kriegsschauplätzen im Osten und Westen, (Mittler&Sohn, 2001), p.156
4)
Niklas Zetterling, Normandy 1944 :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m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 (J.J.Fedorowicz, 2000) p.252,
282
5) John Zimmermann, Pflicht zum Untergang : Die deutsche Kriegführung im Westen des Reiches 1944/45, (Schöningh, 2009), p.229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2009년 1월 19일 월요일
한국전쟁 기간 중 북한지역에서 발생한 미군에 의한 민간인 살해
예전에 신천학살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역사서술이 가지고 있는 허구성에 대해서 글을 한 편 쓴 일이 있습니다. 원래 다른 용도로 쓴 글을 블로그에 올리기 위해서 양을 크게 줄였기 때문에 황해도의 우익단체 봉기나 북한측의 주장에 대해서 상세히 쓰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군요. 나중에 신천학살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신천학살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
그리고 역시 그 글에 넣지 못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북한 점령기간 중 미군에 의해 자행된 구체적인 민간인 살해에 대한 내용입니다. 물론 북한의 억지 주장처럼 미군이 수 만명의 대량학살을 자행한 것은 아니지만 민간인에 대한 소규모의 공격은 분명히 존재했으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문제입니다.
북한은 1951년부터 본격적으로 UN을 통해 미군의 전쟁 범죄를 비난하고 국제 사회의 여론을 유리하게 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물론 북한의 이런 선전 중에는 신천학살과 같이 터무니 없는 것도 있지만 소규모의 민간인 살해는 미국 측 기록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미 육군 제187공수연대전투단과 미 해병대 제1해병사단, 미육군 10군단 헌병대의 민간인 살해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사례는 1950년 11월 평양 인근에서 187공수연대전투단 D중대 소속의 모리슨(Aubrey L. Morrison) 이병과 손더스(Arnold A. Saunders) 일병의 주도로 일어난 민간인 살해사건에 대한 개요입니다.
다음은 미 해병대와 미 10군단 헌병대의 사례입니다.
먼저 첫 번째 문서에 나타난 살해 사례는 수색 작전 도중에 발생한 사례라는 점에서 비정규전 상황에서 발생하는 다른 사례들과 유사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민간인 살해는 17~19세기 유럽에서 게릴라전에 직면한 유럽군대에서도 일어 났었고 2차대전 당시의 게릴라전 상황에서도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문서에서 나타난 10군단 헌병대의 경우는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정도가 더 심각합니다. 특히 앞의 문건에 기록된 사건은 전투 작전(비록 허가는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중 전투 지역에서 벌어진 일인 반면 두 번째 문서에 나타난 민간인 공격은 전투상황이 아닌 상태에서 명백히 민간인 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10군단 헌병대의 사례에서는 인종적 멸시감이 주된 동인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북한인’에 대한 ‘적’으로서의 적대감입니다. 민간인 살해에 항의하는 한국군 장교에게 북한인들을 ‘전우를 죽인 자들’이라는 표현으로 지칭한 것은 북진 이후 알려진 미군 포로 학살사건의 영향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전쟁 중 적국의 민간인에 대해서 적대감을 표출하는 하는 경우 또한 기존의 전쟁에서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경우에는 적대감에 인종적 멸시가 함께 작용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예전에 신천학살에 대한 글을 쓰자 이것이 인터넷 게시판의 좌우투쟁(!)에 인용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상당히 보수적이라 북한의 주장에 휘둘리는 자칭 진보들을 볼 때 마다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긴 합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편’의 손이 항상 깨끗한 것은 아니지요. 인터넷에서 우연히 그 논쟁을 구경한 뒤 제 블로그가 지나치게 우편향(?)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균형(?)을 잡아볼 생각으로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한국전쟁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감정에만 사로잡힌 논쟁들이 오가는 것을 보면 전쟁이라는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성찰은 아직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아직까지 북한이라는 찝찝한 국가가 남아있다는 점이 원인으로 작용할 수 도 있겠지만 어쨌든 휴전 이후 60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도 편을 갈라 소모적인 감정싸움만 벌인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요.
신천학살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
그리고 역시 그 글에 넣지 못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북한 점령기간 중 미군에 의해 자행된 구체적인 민간인 살해에 대한 내용입니다. 물론 북한의 억지 주장처럼 미군이 수 만명의 대량학살을 자행한 것은 아니지만 민간인에 대한 소규모의 공격은 분명히 존재했으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문제입니다.
북한은 1951년부터 본격적으로 UN을 통해 미군의 전쟁 범죄를 비난하고 국제 사회의 여론을 유리하게 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물론 북한의 이런 선전 중에는 신천학살과 같이 터무니 없는 것도 있지만 소규모의 민간인 살해는 미국 측 기록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미 육군 제187공수연대전투단과 미 해병대 제1해병사단, 미육군 10군단 헌병대의 민간인 살해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사례는 1950년 11월 평양 인근에서 187공수연대전투단 D중대 소속의 모리슨(Aubrey L. Morrison) 이병과 손더스(Arnold A. Saunders) 일병의 주도로 일어난 민간인 살해사건에 대한 개요입니다.
(전략)
2. 개요 : (CID 보고서 51-O-78-A의 색인 A를 참고). 1950년 11월 3일 오전 178공수연대 전투단 소속의 모리슨 이병과 7명의 사병은 북한 평양 근교의 주둔지를 출발해 한 마을에 도착했으며 이곳에서 북한군 군복을 입고 있는 민간인을 발견했다. 모리슨은 그 사람이 북한인민군의 탈영병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무장을 하고 있지 않았다. 손더스 일병이 그에게 45구경 권총 두 발을 발사했으며 모리슨 이병은 총검으로 찔렀다. 그 민간인은 이때 입은 상처로 사망했다.
같은 날 오후 모리슨과 7명의 사병(이 중 두 명은 오전의 수색조에도 속해있었다)과 함께 다시 공산군을 찾는다는 구실로 주변 마을들을 돌아 보았다. 이 과정에서 모리슨은 여섯 명의 한국 민간인을 총으로 쏜 뒤 총검으로 찔렀다. 다른 사병 두 명도 각각 한국 민간인 두명을 쐈으며 그 뒤 모리슨이 총에 맞은 민간인들을 찔렀다. 이들은 수색은 사전 허가를 받지 않았다. 모두 남성인 민간인 아홉명이 살해되었다.
2. Facts : (See Tab “A”, CID Report 51-O-78-A). On the morning of 3 Nov 50 a Pvt Aubrey L. Morrison and seven other EM of the 178th Abn RCT left their area near Pyongyang, North Korea, and proceeded to a Village where they found a civilian who had among his effects a North Korean uniform. The EM were told that the civilian was a deserter from NKPA. He was not armed. Pfc Saunders shot the civilian twice a caliber .45 postol and Morrison bayoneted him. The civilian died from such wounds.
On the afternoon of the same day Morrison and seven EM(two of whom had been present in the morning group) again went to other outlying villages, assertedly in search of communists. During this trip Morrison shot and then bayoneted six Korean Civilians. Two other EM each shot Korean civilians and Morrison proceeded to bayonet them also. None of the soldiers were on authorized patrol. Nine civilians, all men, were killed.
‘Request for confinement and mental evaluation’, 29 Jan 51, RG 338, Eighth U. S. Army, Box 740, Security-Classified General Correspondence
다음은 미 해병대와 미 10군단 헌병대의 사례입니다.
(전략)
2. 1950년 11월 3일, 미 해병대를 태우고 원산을 출발한 기차가 덕원(德源)에 정차했을 때 해병대원 중 일부가 전화선 작업을 하던 철도 신호원들을 아무 이유 없이 총으로 쐈다고 한다. 철도원 한 명이 허벅지에 총을 맞아 현재 치료 중이다.
3. 1950년 11월 10일, 10군단 헌병대의 차량과 사병(이 기차에 장교는 타고 있지 않았다)을 태우고 10시 30분에 원산을 출발한 기차에서 탑승한 헌병대원들에 의해 다음과 같이 타당한 이유도 없고 불필요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a. 13시 25분 경, 용훈 근처의 야산에서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던 한국인이 한 명이 총을 맞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b. 용훈 근교에서 14세 정도의 한국 소년 한 명이 기차에 손을 흔들다가 총을 맞았다. 그는 양 손을 모두 치켜들고 있었는데 사망한 것으로 추정 될 때 까지 사격이 계속되었으며 이 사건은 13시 30분경에 일어났다.
c. 16시경 야산에 서서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던 한국 남성이 사격을 받았으며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d. 밭에서 일하던 7명의 한국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노인이 사격을 받았다. 모두가 그 자리에 쓰러졌으며 그대로 있었다. 이 총격의 결과는 알 수 없다. 장소는 알 수 없으며 사건 발생 시각은 16시 05분경이다.
e. 의류를 짊어 지고 가던 한 한국 남성이 사격을 받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소는 알 수 없으며 사건 발생 시각은 16시 30분 경이다.
4. 한국군 수송장교와 영어로 말하고 쓰고 읽는 것을 유창하게 하는 그의 부관이 중간에 기차를 세우고 미군들에게 민간인에게 총을 쏘는 것을 멈추고 그러기 싫거든 민간인들을 쏘지 말고 차라리 자신들을 쏘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미군들은 한국군이 상관할 일이 아니며 만약 그들이 공산당이거나 또는 공산당에 동조하는 것이라면 북쪽으로 가버리던지 아니면 ‘자신들의 전우를 죽인 자들과’ 똑같이 당해 보라고 대답했다. 기차에 타고 있던 다른 한국군 장교들은 아무것도 도울 수가 없었으며 부끄러움과 불쾌감 때문에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이 기차에는 부사관 한 명이 인솔자로 동승하고 있었으나 사병들의 행동을 막기 위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2. On 3 Nov 50 a train out of Wonsan bearing US Marines stopped at Dukwon and some of the marines, without any provocation being noted, allegedly began firing weapons at railroad signal men who were working on the telephone lines. One worker was hit in a thigh and is presently hospitalized.
3. On 10 Nov 50 a train out of Wonsan, leaving there at 1030 hours, and bearing vehicles and enlisted men(no officer accompanying them) of X Corps Military Police unit had the following incidents allegedly performed by members of this group, all of which apparently were unprovoked and uncalled for :
a. A Korean man walking up a mountain side near Yonghoon, carrying an “A” frame, was shot and apparently killed, at about 1325 hours.
b. A Korean boy, age about 14 years, near Yonghoon, waving his hand at the train, was fired upon. He raised both hands above his head, firing continued till he was apparently killed, at about 1330 hours.
c. A Korean man standing on a small hill watching the train pass was fired upon and apparently killed, location not given, at about 1600 hours.
d. Sev(en) Korean women, children a(nd) old men working in a field were fired upon. All fell flat and remained that way. Effect of fire not known. Location not given, at about 1605 hours.
e. A Korean man carrying a bundle of clothing on his back was fired upon and apparently killed, location not given, at about 1630 hours.
4. The KA Transportation Officer and his aide, who is a well educated person fluent in speaking, reading and writing the English language, stopped the train at one point and remonstrated with the men, asking them to cease these sort of action, or to shoot them instead of these people. The reply was, in effect, that it was none of their(the Korean’s) business and that if they were, or liked, Commies they should go north or get the same thing thing they (the MP’s) were giving people “who had killed their buddies”. Other Korean officers on the train were helpless to do anything and hid their faces in shame and disgust. The Military Police on this train were apparently in charge of a non-commisioned officer, who did nothing to stop their activities.
‘Malicious Use of Weapons’, 15 Nov 1950, RG 338, KMAG Box 39, AG 333.5 G-1
먼저 첫 번째 문서에 나타난 살해 사례는 수색 작전 도중에 발생한 사례라는 점에서 비정규전 상황에서 발생하는 다른 사례들과 유사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민간인 살해는 17~19세기 유럽에서 게릴라전에 직면한 유럽군대에서도 일어 났었고 2차대전 당시의 게릴라전 상황에서도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문서에서 나타난 10군단 헌병대의 경우는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정도가 더 심각합니다. 특히 앞의 문건에 기록된 사건은 전투 작전(비록 허가는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중 전투 지역에서 벌어진 일인 반면 두 번째 문서에 나타난 민간인 공격은 전투상황이 아닌 상태에서 명백히 민간인 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10군단 헌병대의 사례에서는 인종적 멸시감이 주된 동인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북한인’에 대한 ‘적’으로서의 적대감입니다. 민간인 살해에 항의하는 한국군 장교에게 북한인들을 ‘전우를 죽인 자들’이라는 표현으로 지칭한 것은 북진 이후 알려진 미군 포로 학살사건의 영향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전쟁 중 적국의 민간인에 대해서 적대감을 표출하는 하는 경우 또한 기존의 전쟁에서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경우에는 적대감에 인종적 멸시가 함께 작용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예전에 신천학살에 대한 글을 쓰자 이것이 인터넷 게시판의 좌우투쟁(!)에 인용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상당히 보수적이라 북한의 주장에 휘둘리는 자칭 진보들을 볼 때 마다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긴 합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편’의 손이 항상 깨끗한 것은 아니지요. 인터넷에서 우연히 그 논쟁을 구경한 뒤 제 블로그가 지나치게 우편향(?)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균형(?)을 잡아볼 생각으로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한국전쟁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감정에만 사로잡힌 논쟁들이 오가는 것을 보면 전쟁이라는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성찰은 아직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아직까지 북한이라는 찝찝한 국가가 남아있다는 점이 원인으로 작용할 수 도 있겠지만 어쨌든 휴전 이후 60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도 편을 갈라 소모적인 감정싸움만 벌인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요.
2007년 12월 23일 일요일
지나치게 심각한 영국인들 - 1941년 듀잉(Dewing) 위원회가 예상한 독일군의 영국상륙계획
좀 황당하더라도 웃진 마세요.
1940년 가을의 시점에서 영국군 수뇌부는 여전히 히틀러가 영국을 침공할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판단은 당시 기준으로는 물론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매우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 세워진 것 입니다. 즉 독일은 장기전과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1941년 중으로 영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단행할 것 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영국은 1940년 11월에 독일군의 예상되는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일환으로 독일측의 의도를 분석하기 위한 FOES (Future Operations Enemy Section)를 설치했습니다. 이 조직은 1941년 3월에 해체됩니다만 독일의 침공에 대한 대비는 계속하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영국은 독소전이 개시된 이후에도 독일군의 영국 본토 침공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1941년 7월, 영국 전쟁성은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를 독일의 본토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 작전국장(Director of Military Operations)인 듀잉(R. II. Dewing) 소장을 책임자로 하는 소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원회는 1941년 12월 독일군이 1942년 봄에 영국 본토를 침공할 경우를 상정하고 예상되는 침공 작전에 대한 보고서 -"Invasion 1942: Form and Scale of Attack”– 를 제출합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현재의 시각에서 봤을 때 독일군의 공격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한 물건입니다만 제법 장대한 스케일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고 합니다.
이 보고서는 1942년에 독일이 소련을 KO 시킨 뒤 서부전선을 제외한 전 전선에서 전략 방어를 실시하고 그 대신 모든 역량을 영국본토 침공에 쏟는다는 상황을 가정하고 만들어졌습니다. 이 보고서가 가정하고 있는 독일군의 공격계획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즉 모든 전력을 단기간에 집중해 영국 본토에 상륙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독일군이 기상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하는 1942년 4월 1일에 침공할 것을 가정하고 구체적인 독일군의 작전과 투입 병력 규모에 대해 추정했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독일군은 1940년 여름과 같은 축차적인 소모전을 피하고 해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훈련부대를 제외한 모든 공군력을 침공 당일에 출동시키고 상륙부대도 동시에 발진시킬 것으로 상정했습니다. 침공 첫 48시간 동안 독일군의 예상 출격회수는 중형폭격기 2,800소티, 급강하폭격기 600소티, 그리고 전투기 4,000소티였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전력을 단기간에 투사해 영국 동남부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침공함대도 발진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너무 엄청난 것이라 내부적으로도 좀 뻥이 센거 아니냐는 논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침공부대의 규모도 실제 독일은 꿈도 못 꿀 수준이었습니다. 먼저 공격 첫날 새벽에 16,000명의 공수부대와 100대의 경전차가 상륙해안에 강하, 또는 글라이더로 투입되어 후속 부대가 착륙할 비행장을 확보하고 인근의 전투기 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 것 으로 예상했습니다. 다음 단계로는 양동작전을 위해 티르피츠가 주축이 된 호위함대의 호위를 받는 1개 기갑사단과 2~3개 보병사단 규모의 상륙부대가 첫날 요크셔(Yorkshire) 일대에 상륙을 감행할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력 상륙부대의 규모도 독일로서는 꿈도 못 꿀 황당한 것 이었는데 방어군을 압도하기 위해서 320척의 전차양륙정, 1,250척의 중형 바지선, 970척의 소형 바지선을 동원해 병력 22만, 전차 750대, 박격포 및 야포 9,000문에 달하는 전력을 침공 첫 날에 램스게이트(Ramsgate)-세인트 마가렛(St. Margaret), 포크스톤(Folkestone)-뉴 롬니(New Romney), 벡스힐(Bexhill)-이스트본(Eastbourne), 워팅(Worthing)-보그너(Bognor) 지구에 투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은 독일측이 해군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보급로 주변에 엄청난 규모의 기뢰와 해안포를 설치하는 한편 영국 해군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160척의 U-보트를 출동시킬 것으로 보았습니다.
첫날 상륙이 성공하면 당연히 후속 부대가 쏟아져 들어올 것 인데 상륙부대의 규모 만큼이나 후속부대의 규모도 황당한 수준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최소한 상륙 8일차 까지 12개 보병사단(이중 8개 사단은 축소편제)과 6개 기갑사단, 그리고 15개 독립기갑여단이 교두보를 통해 투입될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계획은 당시의 영국인들도 좀 황당한 규모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진짜로 침공해온다면 예상 이외의 미친짓을 할 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이 만들어질 10~12월 무렵에는 당장이라도 소련이 붕괴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니 히틀러가 다음 단계로 전력을 다해 영국을 칠 것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영국인들에게 이렇게 심각한 구석도 있었다니 나름대로 재미있습니다.
1940년 가을의 시점에서 영국군 수뇌부는 여전히 히틀러가 영국을 침공할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판단은 당시 기준으로는 물론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매우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 세워진 것 입니다. 즉 독일은 장기전과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1941년 중으로 영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단행할 것 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영국은 1940년 11월에 독일군의 예상되는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일환으로 독일측의 의도를 분석하기 위한 FOES (Future Operations Enemy Section)를 설치했습니다. 이 조직은 1941년 3월에 해체됩니다만 독일의 침공에 대한 대비는 계속하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영국은 독소전이 개시된 이후에도 독일군의 영국 본토 침공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1941년 7월, 영국 전쟁성은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를 독일의 본토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 작전국장(Director of Military Operations)인 듀잉(R. II. Dewing) 소장을 책임자로 하는 소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원회는 1941년 12월 독일군이 1942년 봄에 영국 본토를 침공할 경우를 상정하고 예상되는 침공 작전에 대한 보고서 -"Invasion 1942: Form and Scale of Attack”– 를 제출합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현재의 시각에서 봤을 때 독일군의 공격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한 물건입니다만 제법 장대한 스케일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고 합니다.
이 보고서는 1942년에 독일이 소련을 KO 시킨 뒤 서부전선을 제외한 전 전선에서 전략 방어를 실시하고 그 대신 모든 역량을 영국본토 침공에 쏟는다는 상황을 가정하고 만들어졌습니다. 이 보고서가 가정하고 있는 독일군의 공격계획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즉 모든 전력을 단기간에 집중해 영국 본토에 상륙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독일군이 기상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하는 1942년 4월 1일에 침공할 것을 가정하고 구체적인 독일군의 작전과 투입 병력 규모에 대해 추정했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독일군은 1940년 여름과 같은 축차적인 소모전을 피하고 해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훈련부대를 제외한 모든 공군력을 침공 당일에 출동시키고 상륙부대도 동시에 발진시킬 것으로 상정했습니다. 침공 첫 48시간 동안 독일군의 예상 출격회수는 중형폭격기 2,800소티, 급강하폭격기 600소티, 그리고 전투기 4,000소티였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전력을 단기간에 투사해 영국 동남부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침공함대도 발진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너무 엄청난 것이라 내부적으로도 좀 뻥이 센거 아니냐는 논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침공부대의 규모도 실제 독일은 꿈도 못 꿀 수준이었습니다. 먼저 공격 첫날 새벽에 16,000명의 공수부대와 100대의 경전차가 상륙해안에 강하, 또는 글라이더로 투입되어 후속 부대가 착륙할 비행장을 확보하고 인근의 전투기 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 것 으로 예상했습니다. 다음 단계로는 양동작전을 위해 티르피츠가 주축이 된 호위함대의 호위를 받는 1개 기갑사단과 2~3개 보병사단 규모의 상륙부대가 첫날 요크셔(Yorkshire) 일대에 상륙을 감행할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력 상륙부대의 규모도 독일로서는 꿈도 못 꿀 황당한 것 이었는데 방어군을 압도하기 위해서 320척의 전차양륙정, 1,250척의 중형 바지선, 970척의 소형 바지선을 동원해 병력 22만, 전차 750대, 박격포 및 야포 9,000문에 달하는 전력을 침공 첫 날에 램스게이트(Ramsgate)-세인트 마가렛(St. Margaret), 포크스톤(Folkestone)-뉴 롬니(New Romney), 벡스힐(Bexhill)-이스트본(Eastbourne), 워팅(Worthing)-보그너(Bognor) 지구에 투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은 독일측이 해군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보급로 주변에 엄청난 규모의 기뢰와 해안포를 설치하는 한편 영국 해군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160척의 U-보트를 출동시킬 것으로 보았습니다.
첫날 상륙이 성공하면 당연히 후속 부대가 쏟아져 들어올 것 인데 상륙부대의 규모 만큼이나 후속부대의 규모도 황당한 수준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최소한 상륙 8일차 까지 12개 보병사단(이중 8개 사단은 축소편제)과 6개 기갑사단, 그리고 15개 독립기갑여단이 교두보를 통해 투입될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계획은 당시의 영국인들도 좀 황당한 규모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진짜로 침공해온다면 예상 이외의 미친짓을 할 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이 만들어질 10~12월 무렵에는 당장이라도 소련이 붕괴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니 히틀러가 다음 단계로 전력을 다해 영국을 칠 것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영국인들에게 이렇게 심각한 구석도 있었다니 나름대로 재미있습니다.
2007년 9월 8일 토요일
Löwen von Carentan - Volker Griesser
제 나쁜 습성 중 하나는 표지 디자인이 촌스러우면 책 내용도 신통치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표지 디자인이 신통치 않은 책은 더 신경써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나오는 책이라면 이것이 가능하지만 외국 서적이라면 어렵습니다. 특히 아마존 같은 곳에서 미리 보기를 지원하는 책이 아닌, 작은 출판사의 책이라면 외국 포럼의 서평에 의존해야 하는데 이런 것 조차도 없을 때는 난감하기 그지 없습니다. 특히 요즘 같이 쪼들릴 때에는…
이번에 도착한 책 중 하나인 Löwen von Carentan도 뭔가 촌스러운(또는 오덕스러운?) 표지 때문에 살지 말지 고민하다가 큰 마음을 먹고 지른 물건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한번 훑어 보니 표지의 촌스러움을 훌륭한 내용으로 완벽히 커버하고 있어 안심이 됩니다.
이 책은 예전에 페리스코프 포럼에 쓰던 제 6강하엽병연대의 노르망디 전투의 수정판을 쓰려고 산 책입니다. 예전에 썼던 글은 Willi Kammann의 제 2강하엽병사단사인 Der Weg der 2. Fallschirmjagerdivision과 Hans-Martin Stimpel의, Die deutsche Fallschirmtruppe 1942-1945 제 2권을 기반을 썼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Stimpel의 책에는 제 6강하엽병연대의 작전이 카랑탕 전투까지는 잘 서술된 편이지만 이후 제 2SS 기갑사단에 배속되어 벌인 7월~8월의 방어전은 부실하게 묘사가 되어 있어서 더 이상 쓰기도 곤란했습니다.
나중에 자료를 조금 더 보강해서 다시 쓰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제 6강하엽병연대 부대사가 나오다니 매우 즐겁습니다. 추가로 이 연대의 지휘관이었던 하이테의 회고록을 입수하는 대로 제 6강하엽병연대의 노르망디 전투를 다시 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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