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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9일 토요일

맥아더 기념관 - 2


맥아더 기념관 - 1


지난번에 올리다가 인터넷 접속이 잘 안돼서 그만뒀던 맥아더 기념관 사진을 계속 올립니다. 돌아오니 인터넷 속도와 안정성이 높아서 좋군요.

시간이 모자라서 급하게 사진을 찍다 보니 초점이 안맞은게 많습니다. 많이 아쉽군요.

기념관 한 쪽에는 태평양전쟁에서 맥아더를 보좌했던 인물들에 대한 설명과 초상화가 있었습니다. 제8군 사령관을 지냈던 아이첼버거의 초상화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제8군 사령관 로버트 아이첼버거
맥아더의 참모장 리처드 서덜랜드
말 많은 정보참모 윌로비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필리핀에 상륙하는 맥아더와 참모진을 묘사한 그림이 걸려있었습니다. 사진으로 유명한 그 장면이죠.



다음으로는 필리핀 전역과 일본의 항복을 다룬 전시실이 있습니다.


전시물은 대체로 평이합니다. 저는 필리핀에서 활약한 전함 캘리포니아와 호위항공모함 갬비어 베이의 모형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캘리포니아의 모형은 좀 투박합니다.


왠지 비싸보이는 전함(.....) 캘리포니아

갬비어 베이의 모형은 상대적으로 멀쩡합니다...

그리고 필리핀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관한 설명문이 이어집니다.



다음으로는 일본 침공작전인 "다운폴" 작전에 관한 설명문이 나오고...



일본의 항복이 이어집니다.


일본의 항복선언문
그 유명한 미주리 갑판의 기념판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일본의 항복 이후에는 맥아더의 영광이 절정에 달했던 일본 점령기에 대한 전시물이 있습니다. 일본 점령과 맥아더가 추진한 일본 개혁에 관한 내용들이지요.




그리고 마카사 쇼군에게 올라온 진상품들이...






한국전쟁에 관한 전시는 상대적으로 평이합니다.





맥아더의 해임을 비판한 Carey Orr의 만평. 트루먼은 난쟁이로 묘사되고 있지요.

마지막으로는 맥아더의 해임과 그 이후의 활동에 관한 전시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왼쪽 아래의 레코드판은 맥아더가 의회에서 했던 유명한 연설을 녹음한 것 이라네요.
역시나 유명한 맥아더의 원수모와 담뱃대, 그리고 선글라스 입니다.
맥아더가 받은 주요 훈장. 아랫줄 오른쪽에서 네번째에는 한국에서 받은 무공훈장도 있습니다.

시간이 모자라서 구경을 날림으로 한게 아쉬운데 제가 이곳을 방문하고 얼마 있지 않아 신관이 개관을 했습니다. 다음번에 이곳을 방문하면 신관을 구경하게 되겠지요.

맥아더 기념관은 Norfolk라는 큰 도시에 있다 보니 주변에 돌아볼 곳이 많았습니다. 근처에 버지니아 비치도 있어서 그냥 놀러가기에도 적절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념도서관과 박물관이 별도로 분리되어 있는 구조가 아이젠하워 기념관과 비슷하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말그대로 작은 시골마을에 있는 아이젠하워 기념관과는 천지차이였습니다.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전쟁 말기 일본육군의 차량 부족에 대한 잡담

아래의 글에서 일본군의 궁색한 대전차 전투 사례를 하나 다루긴 했습니다만 2차대전기 일본 육군의 장비상태를 보면 이게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열강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물론 태평양 전쟁이 해전 위주였고 일본해군이라면 세계 일류급 해군이긴 합니다만 육군과 육해군 항공대의 질적 수준은 삼류라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니 말입니다. 게다가 질적수준은 물론이고 양적 수준도 형편없지요.

태평양 전쟁 종전 직후 미군이 일본군을 무장 해제한 기록을 보면 본토결전을 위해 일본 육군이 준비한 전력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장기간의 소모전을 겪은 이후라 하더라도 1944년 말 부터 본토결전 준비를 한 것 치고는 준비가 영 부실한게 눈에 띄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사례일 수 있는데 규슈에 배치된 제16방면군 예하 40군의 경우 군 전체에 트럭 186대, 기타 차량 64대, 장갑차 46대 등 총 296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장갑차를 제외한다면 250대의 차량이 있는 셈이지요.1) 일본 제40군은 1945년 1월 8일 편성에 들어갔고 여기에 총 4개 사단과 1개 혼성여단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제303, 206, 146, 77사단과 독립혼성 125여단이지요. 그냥 단순하게 계산해서 제40군에 배속된 각종 지원부대를 제외하면 총 15연대(303사단 3개연대, 206사단 3개연대, 146사단 4개연대, 77사단 3개연대, 제125여단은 5개대대 편성이니 대략 2개연대로 계산)에 차량 250대, 1개 연대에 차량 16~17대 정도가 돌아가는 셈입니다;;;; 여기에 군 직할대를 포함시켜서 나눈다면 그 숫자가 더 줄어들겠지요. 사실상 미군이 직접 공격해 왔다면 신속한 기동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40군은 303, 206, 146사단과 독립혼성125여단 등 총 3개사단과 1개 여단을 해안 방어에 투입하고 있었습니다.2) 제40군의 유일한 예비대로는 77사단만이 남는 셈인데 뭐 신속한 기동이 어려우니 미군이 상륙해 왔을 경우 어떻게 되었을지는 상상만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다른 곳과 비교해 본다면 어떨까요? 제 개인적으로 일본군의 본토 결전준비와 비교할 만한 대상으로는 독일군의 북부 프랑스 방어준비가 적합할 듯 싶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장기간의 소모전을 거친 뒤 방어를 위해 수개월간 전력을 급히 축적한 사례이니 비교대상으로 적절하지 않을까 싶군요. 먼저, 위에서 언급한 일본군 보병사단들과 비슷하게 차량화 우선순위에서 뒤떨어지는 제6강하엽병연대의 경우 연합군의 상륙 직전 70대의 트럭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3) 장비 상태가 나쁜 축에 속했던 272보병사단의 경우는 오토바이를 제외하고 105대의 자동차, 136대의 트럭, 71대의 견인용 트랙터를 보유하고 있었고 비교적 양호한 수준으로 볼 수 있는 353보병사단은 오토바이를 제외하고 573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4) 매우 거친 비교이긴 합니다만 일본군에 비교하면 차량화 수준이 상당히 양호한 편입니다.

물론 1945년 봄 본토방어를 위해 준비한 독일군과 비교하는게 타당하다고 보시는 분들도 계실 것 입니다. 1945년 봄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 독일군 보병사단도 상당히 엉망입니다. 약간의 예를들면 제167국민척탄병 사단은 1945년 3월 중순 편제의 13%의 차량만 갖추고 있었고 제326국민척탄병 사단의 경우는 아예 말과 마차만 갖추고 있었습니다.5) 하지만 그 당시의 독일군은 껍데기만 남긴 했어도 어느 정도의 기동부대들을 유지하고는 있었지요. 그 점에서 1945년 봄의 독일육군 조차도 일본 육군 보다는 조금 나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사실 국민돌격대에 판쩌파우스트라도 쥐어준 것을 보면 아무래도 독일이 일본 보다는 좀 낫지 않습니까.




1) John Ray Skates, The Invasion of Japan : Alternative to the Bomb,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Press), p.190
2) John Ray Skates, ibid., p.120
3) Hans-Martin Stimpel, Die deutsche Fallschirmtruppe 1942~1945 : Einsätze auf Kriegsschauplätzen im Osten und Westen, (Mittler&Sohn, 2001), p.156
4) Niklas Zetterling, Normandy 1944 :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m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 (J.J.Fedorowicz, 2000) p.252, 282
5) John Zimmermann, Pflicht zum Untergang :  Die deutsche Kriegführung im Westen des Reiches 1944/45, (Schöningh, 2009), p.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