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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2일 월요일

미서전쟁과 미국의 전시동원

미서전쟁은 짧은 기간 동안 전개되었고 규모도 유럽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리 큰 전쟁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몇 년 뒤 벌어진 러일전쟁이 1차대전을 예고하는 듯한  산업화된 근대전쟁의 양상을 뚜렷이 보여준 것과 대비가 됩니다. 대규모 함대결전, 그리고 기동전과 근대적 요새에 대한 포위전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전쟁 양상이 나타난 러일전쟁에 비하면 미서전쟁은 소박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서전쟁은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입장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점을 몇가지 보여줍니다. 이미 산업적으로 대국으로 성장해 있던 미국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전쟁 준비는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이 상태로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두개의 대양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엄청난 과업이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전쟁 준비는 이런 준비부족을 극복하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국력이 받쳐 주기 때문에 부실한 전쟁 준비가 어떻게든 극복이 되는 것이긴 합니다만.

이 글에서는 기본적인 병력, 수송, 장비 및 보급 문제만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행정과 인사문제까지 들어가면 정리하는 것도 좀 더 어렵고 글이 더 길어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전시동원이라고 하면 일단 첫번째로 병력 동원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사람이 있어야 싸우죠. 미국이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할 당시 미육군은 겨우 28,000명 밖에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국과 스페인의 관계는 이미 1897년 초 부터 악화되고 있었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매킨리William McKinley가 본격적으로 전시동원을 고려하기로 한 것은 선전포고가 이루어지기 한달 전에 불과했습니다.1) 전쟁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었습니다. 다행인 점이라면 상대가 스페인이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육군이 3만명도 되지 않는 상황인데다 선전포고가 전쟁 준비도 갖추기 전에 일어났기 때문에 미국은 각 주의 “주방위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기 미국의 “주방위군”은 오늘날과 같은  “주방위군”으로 체계가 잡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병력동원은 엉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미국은 물론이고 현재의 역사가들도 미서전쟁 당시 미국의 민병대 동원은 실패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매킨리 대통령은 초기에 원정을 위해 125,000명의 동원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동원규모가 수정되어 연방정부는 182,687명의 병력을 동원하기로 하고 각 주지사들에게 민병대의 동원할 것을 통보했습니다.2) 대규모의 대외원정이 연방군이 아닌 주의 민병대를 주축으로 실행해야 했던 것 입니다.
주 방위군은 사실상 미군의 주력을 담당할 수 밖에 없었는데 정규 육군이 3만명도 채 안되었던 반면 각 주의 민병대는 1897년 기준으로 총 114,000명이었습니다. 실질적인 전투력은 둘째 치고라도 일단 숫자는 어느 정도 채우고 있었던 셈입니다. 여기에는 기병 4,800명과 포병 5,900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편제는 제각각이어서 사단급 편제를 갖춘 주는 5개 밖에 되지 않았고 그외에 25개의 여단이 있었습니다.3) 나머지 주방위군 부대들은 연대 이상의 편제가 없었으니 일단 사단 부터 만든 뒤 훈련을 시켜야 쓸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 입니다.
각 주의 병력동원은 상당히 엉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일단 이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주방위군 체제가 잡혀 있지 않았고 여전히 각 주 민병대의 자율성이 강했습니다. 이 때의 경험으로 미서전쟁 이후 주방위군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는 했습니다만 이 시점에서는 아직 미래의 일이지요.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지요. 미네소타 주에서는 존스 팜Jones Palm이라는 사람이 친구들과 사설 군사조직을 만든 뒤 주지사와 연방정부 민병대국에 정식 주방위군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가 거부를 당하고 그냥 기존의 주방위군 연대에 입대했습니다. 반면 캔자스 주에서는 주지사 존 리디John Leedy가 기존의 주방위군을 불신하여 새로 지원병을 모집하여 연방정부로 부터 할당받은 4개 연대를 편성했습니다.4) 평시 주방위군의 훈련과 감독을 성실히 했던 주들은 부대편성과 병력 동원이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매사추세츠, 펜실베니아, 오하이오, 위스콘신 등이 그런 모범적인 사례였습니다. 반면 플로리다, 미주리, 루이지애나, 텍사스와 같은 주들은 상대적으로 주방위군 편성과 동원에서 혼란을 겪었습니다. 평시 훈련과 관리를 소홀히한 주들은 주방위군 대원들의 상당수가 연방군의 체력 검정도 통과 못하는 굴욕을 겪을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5)
게다가 아직 주방위군을 전시에 해외파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법적, 행정적인 철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주방위군 대원 중 일부는 소집에 응하지 않았지만 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병력 동원은 그럭저럭 이루어 졌으며 약 20만명의 주방위군이 미서전쟁 기간 중 동원되었습니다.
실제로 주방위군은 전쟁 기간 중 미군의 중추를 이루었습니다. 비록 유럽의 기준과 비교하면 서투르고 부족한 면이 많았지만 스페인과의 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자발적인 참여 열기는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각 사회단체는 물론이고 갑부들 중에서는 자비를 부담하여 1개 연대를 무장시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오하이오주의 한 공무원은 오하이오에서만 10만명의 자원병은 모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을 정도라니 굉장하지요.6) 스페인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원의원 헐A. T. Hull이 입안한 이른바 “헐 법안Hull-Bill”은 정규군 만을 원정에 투입하고 주방위군은 국내 방위에만 투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는데 의회는 물론 각 주의 주지사와 주방위군 단체들의 반발로 폐기되고 주방위군은 대외 원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7)

미국이 전쟁경험의 부족 때문에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그 외에도 여러 부문에서 나타납니다. 국내 자원의 동원에서 그런 점이 잘 드러나는데 막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은 다소 부족한 점이 엿보입니다.
철도이동에 관한 규정들은 선전포고가 있고 거의 2주가 지난 5월 8일이 되어서아 육군 군수국장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전까지 군부대의 철도를 이용한 이동은 아무런 규정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 지고 있었습니다. 육군 군수국은 민간철도회사와의 계약을 통해 철도를 활용했는데 철도부대를 운용하던 독일과는 달리 대규모 군병력의 철도 이동 경험이 없었던 미군은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군수국이 필요한 시기에 민간 철도회사의 차량을 투입하지 못해 부대이동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미숙한 운용은 침공군의 주요 집결지였던 플로리다 탬파Tampa에는 1천여대의 열차편이 몰려 극심한 정체를 이루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탬파행 열차가 직선거리로 대략 700km 떨어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컬럼비아에 묶여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8) 그야말로 대륙적인 규모의 교통정체였습니다.

컬럼비아에서 탬파까지는 직선거리만 해도 어마어마하지요;;;;대륙 규모의 교통정체란;;;

철도와 달리 해상교통은 훨씬 준비가 잘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군수국은 3월 24일 전쟁을 대비해 선박 확보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4월 1일부터 8월 31일 까지 대서양 방면의 작전을 위해서 44척의 선박을 임대했고 추가로 14척을 구입했으며 태평양 방면의 작전에는 17척을 임대하고 2척을 구입했습니다. 이와 별도로 병원선으로 사용하기 위해 존 잉글리스John Englis라는 기선이 구입되어 개조된 뒤 릴리프Relief로 개칭되었습니다.9)
그 다음으로 중요한, 특히 작전 단위의 이동에서 중요한 이동수단은 말과 노새와 같은 축력이었습니다. 당시 편제상 미육군의 기병중대는 말 126마리, 보병중대는 12마리, 경포병 포대는 126마리의 말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10) 그렇기 때문에 수송용 동물의 조달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미국의 방대한 생산력 덕분에 마필의 조달은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은 미서전쟁 기간 중 기병용 말 10,000마리, 포병용 말 2,500마리, 견인용 노새 17,000마리, 등짐용 노새 2,600마리를 조달했습니다. 반면 견인용 수레는 약간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노새 6마리가 끄는 미육군의 표준형 수레는 민간시장에서 생산하지 않는 것이라 결국 육군의 기준에는 미달하는 민수용인 4마리가 끄는 수레를 3,600대 구입해야 했다고 합니다.11) 미육군의 표준형 노새 6마리 수레는 4천파운드의 수송량을 가졌는데 민수용인 노새 4마리 수레는 3천파운드 이하로 적재하도록 권장되었다고 합니다.12)

장비와 물자의 조달은 매킨리 대통령이 병력동원을 결심한 3월 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미육군은 위에서 언급한 헐 법안에 따라 주방위군은 본토 방위에 투입하고 원정군은 정규군을 중심으로 한 7만5천명에서 많아봐야 10만명 정도면 충분하다는 계획하에 물자 조달을 시작했기 때문에 헐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고, 또한 전쟁의 규모가 커져 수십만명의 주방위군을 무장시켜 원정군에 합류시켜야 하는 상황이 되자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없었습니다.13) 당장 쿠바 침공 부터 미육군이 당초 예상한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방위군 및 지원병을 동원해야 했으며 이것은 장비와 물자조달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게 됩니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켄터키 주방위군 소속의 한 연대는 집결지로 지정된 치카마우가에 도착했을때 위스키는 잔뜩 챙겨왔지만 소총은 단 한정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1개사단의 절반에 해당되는 2개연대가 무장이라곤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당장 연방군이 가진 물자를 모조리 털어서 지원병들을 장비시켜야 했고 이것은 정부가 계약한 업체들이 쉽게 공급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14) 군수국Quartermaster Department과 병기국Ordnance Department은 4월 20일이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군수물자를 발주하였습니다. 병기국은 4월 30일까지 5만3천정의 크랙-요르겐슨Krag-Jörgensen소총과 1만5천정의 카빈을 구할 수 있었는데 20만에 육박하는 주방위군이 소집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이게 턱없이 모자란 수준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15) 이런 상황에서 급하게 장비를 조달하다 보니 문제가 속출했습니다. 병기국이 윈체스터사에 1만정의 소총을 먼저 주문했다가 이것들이 육군이 요구한 성능기준에 미달해 20만달러를 허공에 날린 일도 있었습니다.16) 스프링필드 조병창은 근로자를 6백명에서 10시간 2교대 1,800명으로 늘렸고 소총 생산은 3월 중순 하루 120정에서 8월 중순에는 하루 363정으로 늘어납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총은 부족했기 때문에 주방위군과 지원병으로 구성된 부대는 초기에 흑색화약을 사용하는 구식 스프링필드 소총을 장비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쟁 발발 당시 26만정 가까운 재고가 있었다고 하는군요.18)
다 른 모든 병과와 마찬가지로 포병도 준비가 매우 부실했습니다. 1896년 당시 미육군은 야전포병의 표준장비인 3.2인치 야포를 150문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898년 전쟁이 발발하자 14개의 정규군 포병 포대는 포대당 6문의 편제를 갖출 수 있었으나 지원병으로 새로 편성된 포대는 포대당 4문의 편제를 갖춰야 했습니다.19)
또한 무연화약의 생산도 문제였습니다. 이것 또한 평시 상비군의 규모가 적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습니다. 민간기업들은 민수용으로 주로 흑색화약을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닥치고서 군대의 발주에 의해 황급히 시설을 전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시동원이 시작될 당시 민간 기업중 무연화약 생산능력을 갖춘 곳은 세곳 뿐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무연화약의 배분은 해군의 함포와 육군의 크랙-요르겐슨 소총 탄환에 최우선적으로 할당되었고 해안포와 야전포병에는 임시변통으로 흑색화약이 보급되었습니다. 야전포병에 대한 무연화약 구입은 5월이 되어서야 시작되었고 전쟁 내내 무연화약 보급은 부족했습니다.20)
그 밖의 군장류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족한 재고량을 민간기업의 생산능력으로 보충하려 했으나 위에서 언급한 무연화약과 마찬가지로 민간기업들은 생산해 본 경험이 없는 군수물자를 생산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실제 생산된 것들도 조악한 품질이 많았던 모양입니다.21) 탄입대 같은 것은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본다면 꽤 단순한 물건인데 이런 것 조차도 당시 미육군의 품질 기준을 통과하는데 꽤 어려움을 겪었던 모양이더군요.

미서전쟁 기간 중 미국의 전시동원을 보면 아무리 방대한 산업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바로 군수물자 생산능력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은 방대한 동원력을 보여주었지만 거기에는 미서전쟁과 1차대전을 거치면서 축적된 경험과 전간기 동원을 위한 많은 연구가 바탕에 깔려있었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30년이 지난뒤 갑자기 전쟁에 뛰어든 미서전쟁기의 미국은 그와는 동떨어진 존재였습니다. 군대를 어떻게 유지하고 조직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도 부족했고 민간부문의 경제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는 능력도 부족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몇가지 극단적인 사례처럼 경험부족으로 인한 심각한 비효율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저런 시행착오를 극복하면서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고 이런 경험이 조금씩 쌓여가면서 마침내 2차대전 시기에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방대한 전시동원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1) Jerry Cooper, The Rise of the National Guard : The Evolution of the American Militia, 1865-1920,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97), p.97
2) Michael D. Doubler, Civilian in Peace, Soldier in War : The Army National Guard, 1636-2000,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p.129
3) Graham A. Cosmas, An Army for Empire : The United States Army in the Spanish-American War,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8), pp.6~7
4) Jerry Cooper, Ibid., pp.99~100
5) Jerry Cooper, Ibid., pp.102~103
6) Graham A. Cosmas, Ibid., p.86
7) Jerry Cooper, Ibid., pp.97~98; Graham A. Cosmas, Ibid.,  pp.82~89
8) “The Dodge Commission Assesses the Work of the Quartermaster Department in the War with Spain”,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36
9) “The Dodge Commission Assesses the Work of the Quartermaster Department in the War with Spain”,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p.337~338
10) “Official Allowances for Supplies, Equipment, and Transprot, 1898”,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46
11) Graham A. Cosmas, Ibid.,  p.151
12) “Official Allowances for Supplies, Equipment, and Transprot, 1898”,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46
13) Graham A. Cosmas, Ibid.,  pp.82~84
14) Graham A. Cosmas, Ibid.,  p.124
15) Graham A. Cosmas, Ibid.,  p.148
16) Graham A. Cosmas, Ibid.,  p.137
17) Graham A. Cosmas, Ibid.,  p.149
18) Graham A. Cosmas, Ibid.,  p.154
19) Janice E. McKenny, The Organizational History of Field Artillery, 1775~2003, (CMH, US Army, 2007), pp.85~88;  Graham A. Cosmas, Ibid.,  p.152
20) Graham A. Cosmas, Ibid.,  pp.152~153
21) Graham A. Cosmas, Ibid.,  pp.156~157

2011년 1월 8일 토요일

기병에 관한 한국 전통군사사 논문 한 편

한국 전통군사사에 대한 논문을 한 편 읽었습니다. 저자는 여기 들러주시는 분들이라면 다들 아실만한 바로 ‘그 분’입니다. 사실 19세기 이전 군사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지만 매우 흥미롭게 읽은 논문이기에 짧은 평을 하고 싶습니다. 이 논문을 읽을 기회를 주신 필자께는 죄송하게도 도움이 될 만한 평이 못 되는게 아쉽습니다.

이 논문의 제목은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으로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한국의 기병 병종에 대해 통사적인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필자께서 처음 논문을 보내주셨을 때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범위가 매우 방대해서 놀랐습니다만 내용을 철저하게 기병 병종의 분류에 맞췄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밀도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글도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논문은 부록을 포함해 90쪽이고 짧은 단행본 한 권으로 만들어도 될 정도입니다. 아마 필자께서도 글을 쓰시는 동안 글의 분량에 상당한 신경을 쓰셨을 것 같은데 독자의 입장에서는 적당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 글의 구성은 머릿말과 맺음말을 제외하고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2장에서는 이 논문의 근간을 이루는 기병 병종의 기본 개념을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는 여기서 서구의 중기병과 경기병이라는 구분을 한국사에 적용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하고 그 대신 사용하는 장비와 전술의 성격에 따라 창기병과 궁기병이라는 분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말에도 갑옷을 입히는 중장기병은 다른 병종과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으므로 중장기병이라는 개념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외국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빌려오지 않고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 맞는 개념을 고민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합니다.

다음의 3장에서는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기승문화가 도입된 시점부터 삼국시대 까지의 기병 병종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고대의 문헌사료가 부족한 만큼 고고학의 연구성과를 풍부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료의 공백이 많은 시기인 만큼 논리를 전개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수 밖에 없는데 필자는 중국 등 동시기 다른 지역과의 비교 분석을 통해 접근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필자가 기승문화의 확산 시점을 추정하면서 마구의 기술적인 수준 보다는 말을 대량으로 사육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이 주장은 주로 문헌자료에 바탕을 하고 있는데 상당히 재미있는 가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다음으로는 삼국시대 기병 병종의 분화를 분석하기 위해 이 글에서 사용하는 구분의 기준이 되는 전투용 활과 기병창, 그리고 말의 품종과 마구의 발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구의 발전에 대한 부분에서 중국은 물론 같은 시기 유럽(로마)과의 비교 분석이 돋보입니다. 필자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 삼국시대의 기병 병종을 중장기병, 창기병, 궁기병이라는 세 종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4장에서는 삼국시대의 중장기병에 대해 분석하고 있습니다. 논문이 전체적으로 시기적 구분을 채택하고 있는데 비해 4장에서만 특별하게 삼국시대의 중장기병이라는 하나의 병종에 대해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분석하고 있는 것은 다소 의외입니다. 이 부분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한반도 내에서의 중장기병 운용 방식에 대한 추정입니다. 필자는 한반도의 산악지형과 열악한 도로 환경 때문에 중장기병이 소규모로 성곽을 거점으로 한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5장은 고려시대의 기병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헌사료의 부족과 고고학적인 자료의 부족 때문인지 그 분량은 고대나 조선시대에 비해 적습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원간섭기 이후 몽골의 영향으로 궁기병의 비중이 늘어났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은 조선 초기의 기병운용과 내용적으로 연결이 되는데 뒷받침 할 수 있는 자료가 더 풍부하다면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6장은 조선초기의 기병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6장 부터는 풍부한 문헌사료를 바탕으로 보다 밀도있는 서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고대에서 고려시대 까지는 문헌사료의 부족으로 많은 부분을 고고학적인 자료나 다른 지역과의 비교를 통해 논리적인 추론을 해야 하는데 조선시대는 상대적으로 문헌자료가 풍부하다는 점 때문에 이런 제약에서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6장에서 흥미로운 것은 조선초기에는 궁기병과 창기병이라는 2원적 체제에서 16세기에 이르면 사실상 궁기병 중심의 체제가 완성되었다는 지적입니다. 필자는 이미 5장에서 원간섭기 이후로 궁기병의 비중이 늘어났을 가능성을 제시했으며 조선초기도 문헌사료를 통한 분석으로 궁기병이 다소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16세기까지 창기병이 꾸준히 쇠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는 주장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필자는 15세기를 거치면서 기병의 훈련 체계와 선발체계에서 기병창 보다 활을 중요시 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점을 밝혀내 궁기병 중심으로의 전환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약간 아쉬운 점 이라면 왜 궁기병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 정도입니다. 또한 안정적인 말 공급기반의 쇠퇴가 기병의 점진적인 쇠퇴를 가져왔다는 주장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7장에서 다루고 있는 조선 기병의 쇠퇴와 내용적으로 연결이 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7장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기병의 쇠퇴를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는 임진왜란 이후 전술이 보병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군사력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기병의 우선순위가 밀리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조선후기 기병의 변화에서 제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내용은 근접전 능력 향상을 위해 편곤 사용이 확대되었고 18세기 초에 창설된 평안도의 별무사의 경우 하마전투를 고려해 조총도 사용하게 되었다는 부분입니다.
7장에서는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조선 기병의 질적ㆍ양적 쇠락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쉬운 점은 조선 후기에 기병이 쇠퇴하게 되었다는 설명은 있으나 구체적인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점 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제가 전통 군사사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부족해 논문에 대한 대략적인 평 밖에 할 수 없었지만 상당히 인상깊은 논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병 병종에 대한 통사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이 글에서 필자가 제시한 몇몇 독특한 논점들은 후속 연구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0년 6월 30일 수요일

일본의 군사혁명

어쩌다 서점에 간 김에 책을 조금 샀는데 그 중의 한 권이 『일본의 군사혁명』 입니다. 올해 2월에 발행되었으니 제법 신간에 속하는 군요.

꽤 흥미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주저하지 않고 샀는데 사실 제가 일본사, 특히 20세기 이전의 일본사나 그 연구경향에 대해서는 완전히 깡통인지라 이 책에 대해서 뭐라고 평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저자인 구보타 마사시(久保田正志)는 일단 책에 소개된 약력에서 도쿄대에서 법학을 연구했고 현재 일본에서 성새사적(城塞史跡) 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라고 되어 있고 또 저자 후기에는 1984년 이래 군사사 연구를 계속해 오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 연구자인지 궁금합니다.

책 자체는 아주 재미있게 읽힙니다. 아직 앞부분과 결론 부분만 살펴 본 정도이지만 일본사에 문외한인 입장에서 꽤 흥미로운 서술이 많군요. 일단 저자가 '군사혁명(Military Revolution)'이라는 개념으로 일본의 전쟁양상 변화를 설명하려 하고 있어서 같은시기 유럽과 비교해서 서술하고 있는데 덕분에 이해가 잘 가는 편입니다. 앞부분을 조금 읽다가 꽤 재미가 있어서 결론을 먼저 읽어보게 됐는데 저자는 이시기 일본의 전쟁양상이 가진 특징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1. 일본 또한 동시기 유럽과 마찬가지로 14세기 이후 창을 사용하는 보병중심의 전술로 움직였다. 그러나 유럽과 달리 모든 창병이 밀집대형을 취하지는 않았는데 주된 이유는 일본의 기병은 유럽의 기병보다 덜 위력적이기 때문이었다.

2. 기병의 위협이 적었기 때문에 총포가 도입된 뒤에도 유럽과는 다른 발전양상을 보였다. 즉 유럽과 달리 탄막사격 대신 저격을 중심으로 하는 발전이 이루어졌다. 또한 유럽에서는 총병의 등장과 상비군의 발생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일본은 그렇지 않다.

3. 일본 말의 열등한 체격은 대포를 사람이 견인하는 소형포 위주로 발전하게 했으며 이때문에 축성 양식도 총포사용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이 때문에 유럽 처럼 성곽의 높이가 낮아지지 않았다.

4. 총포의 도입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상률을 높였다. 그러나 일본의 독특한 군사문화가 유럽과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했다. 일본의 군사문화는 수급 획득을 중시했다. 총포의 도입으로 인한 사상률 증가는 수급 획득의 기회를 늘렸으며 군사문화의 특성으로 적의 지휘관, 사령부에 대한 공격 지향이 강했다. 이것은 전역을 조기에 종결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유럽과 달리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지 않게 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5. 유럽은 군사혁명의 과정으로 들어가면서 병농일치를 통한 병력 확대가 이루어졌는데 일본에서는 전란이 조기에 종결되면서 잉여 병력이 늘어나면서 병농분리와 상비군화가 진행되었다.

6. 죠프리 파커 등은 일본에서는 군사혁명이 '중단' 되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것은 일본사의 특성을 무시한 것이다. 유럽의 군사혁명은 전쟁의 장기화의 결과였으나 일본은 통일을 이루면서 유럽과 같은 군사혁명의 과정을 밟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즉 군사혁명이 중단된 것이 아니라 필요한 범위 내에서 군사혁명을 완료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유럽군사사와의 비교분석이 꽤 흥미롭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나중에 渤海之狼님 같이 일본전통군사사를 공부하시는 분들을 뵐 때 한번 고견을 들어봤으면 합니다.

일단 국내에도 일본 전통군사사에 대한 책이 나왔다는 사실이 꽤 반갑습니다.

2009년 9월 1일 화요일

흥미로운 가정

오늘은 쉬는 시간에 결론 부분을 남겨두고 거의 2년 가까이 방치해 둔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를 마저 다 읽었습니다.


저자인 Jay Luvaas는 남북전쟁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주요 열강의 군사교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남북전쟁 발발부터 1차대전 발발직전 까지의 시기를 서술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미국에 파견된 각국 무관단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고 후반부는 유럽에서는 미국의 내전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남북전쟁은 새로운 군사기술이 대규모로 활용되어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유럽에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군사교리에 있어서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남북전쟁이 군사교리 면에서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이유는 유럽의 군인들은 연방과 남부연합 모두를 아마추어 군인들로 한수 낮춰보는 경향이 있었고 거의 동시기에 유럽에서도 보불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굳이 '수준낮은' 미국으로 부터 교훈을 얻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 입니다. 그나마 미국의 경험이 유럽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북독일연방과 프랑스의 기병 전술정도였다고 합니다.


유럽의 군사사상가들이 남북전쟁을 재평가하게 된 것은 1차대전이라는 전례없는 소모전을 경험한 이후였습니다. 1차대전에서 유럽국가들이 경험한 전략적 문제는 바로 50년전의 전쟁에서 미국인들이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1차대전 이후 유럽, 특히 영국의 군사사상가들이 남북전쟁의 교훈을 재평가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주로 언급되는 것은 풀러와 리델하트의 남북전쟁 연구인데 특히 리델하트가 기동전 이론을 연구하면서 남북전쟁 당시의 대규모 기병운용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Luvaas는 이 부분에서 꽤 재미있는 추론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Luvaas는 짤막하게 리델하트와 독일 장군들간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리델하트의 많은 저작들이 2차대전 이전에 독일어로 번역되었고 그가 만난 독일 장군들도 번역된 것 중 일부를 읽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비록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북전쟁 당시의 기병전술이 독일 장군들의 기동전 사상에 '미미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흥미로운 떡밥을 던지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이 책은 1959년에 초판이 나왔고 제가 읽은 개정판도 1988년에 나온 것이라 리델하트가 독일의 군사사상에 끼친 영향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근래의 연구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저자가 90년대 이후에 이 책을 썼다면 이런 재미있는 추론을 하지는 못했겠지요. 이제 이런 추론을 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발상 자체는 꽤 참신하다는 느낌입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9년 6월 26일 금요일

작은 국가의 한계

땜빵 포스팅 한 개 더 추가입니다;;;;

배군님이 칼 12세(Karl XII)와 북방전쟁에 대한 글을 써 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침 예전에 읽었던 Robert I. Frost의 The Northern Wars의 내용이 생각난 김에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간단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칼 12세는 군사적으로 유능하지만 운은 따라주지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필 그가 즉위했을 무렵은 스웨덴이 사회 경제적으로 한계에 부딪힌 데다 발트해의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지요. 덴마크-작센-러시아 연합군은 전쟁이 그리 길게 끌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큰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스웨덴은 30년 전쟁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며 발트해의 강국으로 떠올랐지만 강국으로 남기에는 근본적으로 제약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인구 자체가 적었습니다. 1620년대에 스웨덴의 인구는 핀란드를 합쳐도 125만 명 정도였으니 폴란드, 러시아, 그리고 독일의 여러 국가들과 비교하면 절대적인 열세였습니다. 병사는 돈을 벌어 용병으로 채우면 된다지만 장교는 문제가 달랐지요. 스웨덴 왕실은 장교의 경우는 가능한 스웨덴 귀족으로 채우고자 했지만 인구가 적으니 한계는 명확했습니다. 17세기 초 스웨덴의 귀족인구는 아무리 높게 잡아도 3,000명 이내였고 이 중 장교가 될 수 있는 성인 남성은 500-600명 정도였습니다.

스웨덴의 남성들은 15세에서 60세 까지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습니다. 왕실 소유지의 농민(Kronobönder)과 자유농(Skattebönder)의 경우 남성 10명 당 1명이 군역을 지고 나머지가 세금으로 비용을 대는 형식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인구 자체가 적다 보니 경제에 큰 부담을 주는 구조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구의 부족 때문에 30년 전쟁 당시 스웨덴군은 현찰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외국인 용병에 크게 의존해야 했습니다.

스웨덴이 경제적으로 튼튼하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30년 전쟁 이후 북방의 강자 노릇을 하느라 무리를 한 덕에 17세기 중반에는 재정적자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1681년에는 정부 부채가 5천만 릭스달러(Riksdaler)에 달했습니다. 왕실의 연간 수입이 4백만 릭스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하지요. 재정적자는 30년 전쟁 이후 스웨덴 왕실을 꾸준히 괴롭혀 온 문제였습니다. 스웨덴은 빈약한 국내 경제 때문에 사실상 ‘약탈’로 전쟁 비용을 충당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30년 전쟁이 종결된 뒤에는 전쟁으로 인한 수입도 짭잘하지가 못 했습니다. 재정난에 시달린 칼 10세(Karl X)는 1660년에 정규군을 9만3천명에서 4만6천명으로 감축하는 조치를 취하기 까지 합니다. 재정 지출을 억제한 덕에 1690년에는 정부 부채가 1천만 릭스달러까지 떨어지긴 했습니다만 스웨덴의 근본적인 경제적 취약성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칼 10세는 재정난으로 군대를 절반 가까이 감축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팽창한 스웨덴의 영역을 방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칼 10세는 스웨덴의 해외 영토인 폼메른(Pommern)에 평시 수비대로 배치해야 할 병력이 8,000명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스웨덴군의 총병력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큰 병력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인구로 군 병력과 경제 생산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군역의 의무를 부과하는 비율은 일정하게 유지되지 못 했습니다. 30년 전쟁 중인 1635년에는 귀족 소유지의 농민(Frälsebönder)은 30명 당 1명,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은 15명 당 1명이 징집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때는 용병으로 병력을 충당하는 것이 비교적 원활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30년 전쟁이 끝나고 점차 재정 적자가 악화되면서 다시 국내의 인적자원에 대한 의존이 높아졌습니다. 1653년에는 귀족 소유지 농민은 8명 당 1명,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은 16명 당 1명이 징집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의 징집 비중이 낮아진 것으로 보이지만 내막을 들여다 보면 암담했습니다. 스웨덴 왕실이 재정 수입을 늘리기위해 왕실 소유지를 귀족에게 대량으로 매각한 때문에 귀족 소유지의 비중이 전체 토지의 66%까지 높아진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왕실 소유지의 농민과 자유농이 줄어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귀결이었습니다.

칼 11세(Karl XI)가 1697년 사망했을 때 스웨덴군은 스웨덴 기병 1만1천명, 스웨덴 보병 3만명, 그리고 용병 2만5천명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리고 칼 12세는 이 군대로 장기전을 치르며 여러 차례의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스웨덴의 적들은 더 많은 인적자원을 가지고 장기전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패권 경쟁에서 소국이 가지는 한계는 명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군대와 지휘관이 있더라도 숫적인 열세를 감당하는데는 한계 있을 수 밖에 없지요. 한국사에 비교해 보자면 고구려가 장기전 끝에 당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던 것과 비슷할 것 입니다.

2009년 5월 19일 화요일

Men on Iron Ponies 라는 단행본이 출간됩니다

아마존 뉴스레터를 받았는데 Matthew Darlington Morton이라는 저자의 Men on Iron Ponies라는 단행본이 나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제목과 저자가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싶었는데 역시나 예전에 읽은 박사학위 논문이었습니다.

Men on Iron Ponies는 2004년 Morton이 플로리다 주립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입니다. 군사 분야로 센스가 있으신 분들이라면 이 논문이 미국 기병대의 기계화를 다룬 것이라고 짐작하실 수 있을 것 입니다.

꽤 흥미로운 내용이긴 한데 이미 논문을 가지고 있는지라 책이 출간되더라도 구매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Morton의 논문은 플로리다 주립대학 전자도서관에서 전문을 공개하고 있기도 하니까요.


링크 : Men on "Iron Ponies," The Death and Rebirth of the Modern U. S. Cavalry


예전에 유사한 주제를 다룬 Through Mobility We Conquer: The Mechanization of U.S. Cavalry가 출간 되었을 때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여의도 국회도서관에 이 책이 비치되어 김이 샜던 기억이 떠오르는 군요.

물론 현실적으로는 경제 사정을 감안해서 책을 사야 되지만 실제로 재미있는 책이 나왔는데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무척이나 배가 아픕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아직 우리는 불황의 한 가운데에 있으니 입맛만 다시는 수 밖에요.

2008년 10월 5일 일요일

Kenneth Chase가 주장하는 중국의 화기 개발이 낙후된 원인

번동아제님의 글, 「조선 후기 군대의 기본 전투대형인 층진의 개념도」에 달린 댓글을 읽다보니 흥미로운 구절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만 에도시대 일본의 병학이 1700년대까지 여전히 시대불명의 망상세계를 헤메고 있었고, 청나라 또한 화약병기 시대에 걸맞는 진형을 제대로 개발 못해 헤매던데 비하면 그나마 조선은 유럽의 선형 전술과 비슷한 대형을 내놓고 고민하고 있었다는 점에선 부분적이나마 긍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 번동아제

중국이 조선 보다도 화약무기를 활용한 진형의 개발에서 뒤떨어졌다는 점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중국은 명-청 교체기 이후로는 화약무기의 활용에서 유럽에게 완전히 추월당하고 말았지요. 중국이 화약무기를 개발한 원조임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이후로는 유럽을 따라잡지 못하게 된 이유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제가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한 가설은 Kenneth Chase의 주장입니다. Kenneth Chase에 대해서는 이글루에 있을 때 한번 간단히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글루를 닫으면서 해당 글을 날려버렸으니 다시 한번 언급해 볼까 합니다.

Kenneth Chase는 화약무기의 초기 발전단계에서 발전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병의 위협이고 두 번째는 보병의 위협입니다. 전자의 위협이 클 경우 초기 단계의 화기로 무장한 보병은 적 기병의 기동성을 상쇄할 만한 수단이 없으므로 전투에 불리할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기병의 위협이 심각한 곳에서는 기병에 대한 대항수단으로 기병을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경우 화기의 개발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됩니다. 보병의 위협이 크다면 조건은 반대가 되겠지요.

Chase는 이상의 조건에 따라 화기의 발달유형을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합니다.
먼저 기병과 보병의 위협을 모두 받는 경우는 화약무기의 발전이 중간 정도로 일어납니다. 보병위주의 서유럽과 기병위주의 유목민들을 동시에 상대한 오스만 투르크와 동유럽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다음으로 기병의 위협은 크지만 보병의 위협은 적은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가 바로 중국으로 이런 경우 화약무기의 발전은 느리게 진행됩니다.
세 번째는 기병의 위협은 적고 보병의 위협이 큰 경우 입니다. 서유럽이 여기에 해당되며 이 경우에는 화기의 발전이 급속히 진행됩니다.
마지막은 양쪽 모두의 위협이 없는, 전쟁의 위협이 적은 경우인데 이 경우는 이렇다 할 발전이 없습니다. 바로 도쿠가와 막부 시기의 일본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Chase는 명청교체기 중국의 화약무기 사용에 대한 장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중국이 (화약무기 개발에서) 뒤쳐지게 된 시점이 명 말기인지 또는 청 초기인지는 단언하기가 어렵다. 유럽은 1400년대 후반에 최초의 실용적 화기인 머스켓을 개발 함으로서 처음으로 중국을 앞서는 단초를 마련했지만 중국인들에게 머스켓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대안이 아니었다. 명 왕조의 멸망과 청 왕조가 건립된 시기에 있었던 사건들은 중국의 국방에 있어서 유용한 수단은 명 초기와 마찬가지로 기병이었음을 보여준다. 초기의 청 왕조는 (화기의 사용에서) 상대적으로 유럽에 비해 뒤쳐졌지만 유럽의 위협이 닥치기 까지는 아직 2세기나 더 남아 있었다.
화기, 특히 1300~1400년대의 조잡한 수준의 화기는 단독으로 명 왕조가 처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었다. 화기가 기병과 싸우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점은 중국에서 화기의 발달이 별로 이뤄지지 못한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Kenneth Chase, Firearms : A Global History to 17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171

Chase는 일본이 중국에게 유럽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했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일본은 서유럽에 비해 전쟁수행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제한된 정복전쟁 수행능력을 잘 보여줬으며 결국 일본은 이 전쟁의 실패 이후 조용히 고립노선을 걷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을 위협하는 존재는 기병을 운용하는 만주족 만이 남게 되어 화약무기 개발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는 결론입니다.

2007년 9월 12일 수요일

로마군의 중장기병은 어느 정도 규모였을까?

번동아제님이 쓰신 고수전쟁 당시 수나라 기병 부대의 편성에 대한 글을 읽고 나니 로마의 경우는 어땠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진 로마군과 관련된 책을 몇 권 뒤져서 계산을 대략 한 번 해 봤습니다.

몇몇 연구자들의 2차 문헌을 가지고 대략 추정한, 정확성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글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시고 그냥 재미삼아 한번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로마군에 중기병이라는 병과가 등장한 것은 생각보다는 제법 이른 시기입니다. 이르면 1세기 중엽(68년, 유대전쟁 당시)에서 늦어도 2세기 초 사이에는 로마군에도 중기병창(kontos)를 장비한 기병부대가 확인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후 로마군에는 지속적으로 중기병이 증가합니다. 그리고 숫자만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종류도 제법 다양해졌던 모양입니다. 로마군을 연구하는 군사사가들은 문헌상에 남아있는 로마군의 기병 병과가 보병 보다 다양하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3~4세기 경에 이르면 로마군의 중기병 부대는 scutarii, promoti, stablesiani, 그리고 clibanarii와 cataphracti 등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중장기병, 즉 말갑옷 까지 완벽하게 갖춘 기병은 clibanarii와 cataphracti 두 종류 입니다.

그렇다면 전체 기병에서 중장기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됐을까요? Hugh Elton의 Warfare in Roman Europe AD 350~425에서는 clibanarii와 cataphracti, 이 두 병과의 기병이 로마군의 전체 기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중앙군이라고 할 수 있는 comtatenses에서는 대략 15%, 지방군에 해당되는 limitanei에서는 2%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pp.106~107)

그 다음으로는 로마군의 총 병력 중 기병은 얼마나 됐는가가 되겠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로마군의 전체 기병 숫자에다가 위에서 언급한 Elton의 추정치를 곱해서 중장기병의 숫자를 산출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기병은 대충 어느 정도였을까요?

4~5세기경 동로마와 서로마의 중앙군 및 지방군의 병력 규모는 당연히 학자들 마다 추정치가 차이가 납니다. (로마사 전공자가 아니긴 하지만)Edward N Luttwak의 The Grand Strategy of the Roman Empire에는 후기 로마군의 규모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추정치를 정리해서 실어 놓았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서로마군은 최저(J. Szilagyi의 추정) 226,000(중앙군 94,000/지방군 122,000) 최대(A. H. M. Jones의 추정) 311,000(중앙군 111,000/지방군 200,000)이고 동로마군은 최저(Varady의 추정) 262,000(중앙군 96,300/지방군 165,700) 최대(E. Nischer의 추정) 426,500(중앙군 94,500/지방군 332,000)입니다.

문제는 총 병력에서 기병이 어느 정도냐 인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Luttwak의 책에는 보병대 기병의 비중에 대해 두리뭉실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서적에 실린 통계를 이용해 봤습니다.
Warren Tredagold의 Byzantium and Its Army 284~1081에는 Notitia Dignitatum에서 인용한 395년경의 동로마군 편제가 실려 있습니다. 다행히도 여기에는 전체 병력 중 기병의 비중이 나와 있군요. 여기에 따르면 중앙군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20.7%(104,000명 중 21,500명)이고 지방군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동부군이 49.9%(병력 195,500명 중 97,500명), 서일리리쿰군이 44.4%(병력 63,000명 중 28,000명)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여기다가 위에서 언급한 중장기병의 비중을 넣어서 계산을 해 보겠습니다.

중앙군 : 21,500 ⅹ 0.15 = 3225
지방군 동부군 : 97,500 ⅹ 0.02 = 1950
지방군 서일리리쿰군 : 28,000 ⅹ 0.02 = 560

395년경 동로마군의 중장기병은 대략 5,735명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다시 위에서 언급한 Luttwak의 저서에 실린 수치를 가지고 Notitia Dignitatum의 기병 비율과 Elton이 추정한 기병 중 중장기병의 비중을 가지고 계산하면 대략 이런 결과가 나옵니다.

동로마군의 중장기병(4~5세기경)
총 병력 426,500 기준 : 중앙군 2,977 지방군 3,320
총 병력 262,000 기준 : 중앙군 3,033 지방군 1,657

서로마군의 중장기병(4~5세기경)
총 병력 311,000 기준 : 중앙군 3,497 지방군 2,000
총 병력 226,000 기준 : 중앙군 2,961 지방군 1,220

신뢰도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심심풀이 수준의 계산이지만 나름대로 꽤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2007년 5월 26일 토요일

전투에서의 기만술 - 1870년 마 라 투르 전투의 사례

웹 서핑을 하다 보니 이런 농담이 있더군요.

여기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대치한 전선. 양군 모두 참호에 틀어박힌 채 두문불출, 전선은 교착 상태가 되었다.
독일군은 참호에 틀어박힌 이탈리아군을 저격하기 위해, 이탈리아인 중에 흔히 있는 이름을 외쳐서 머리를 내밀게 한 후 그것을 저격하는 잔꾀를 발휘했다.

독일 병사 「어이, 마르코! 마르코 어디있어?」

이탈리아 병사 「여기야―」

그렇게 머리를 내밀고 대답한 이탈리아 병사는 총격당했다.
그 방법으로 많은 손해를 입은 이탈리아군은 간신히 그 잔꾀을 깨닫고 똑같은 수법을 독일군에게 시도했다.

이탈리아 병사 「어이, 아돌프! 아돌프 어디야?」

독일 병사 「지금 내 이름을 부른 것은 누구냐!」

이탈리아 병사 「네? 아, 접니다!」

그렇게 머리를 내밀고 대답한 이탈리아 병사는 총격 당했다.

그런데 이게 웃기기만 하는게 아닌 것이 실제로 독일군은 이런 방법을 꽤 썼고 성공을 거둔 사례도 더러 있습니다. 그것도 한 두 명 단위의 저격이 아닌, 연대 급 전투에서 말입니다.

이런 종류의 기만술에 대해서 제가 알고 있는 가장 유명한 사례는 Geoffrey Wawro의 The Franco-Prussian War에 나와 있는 1870년 8월 16일에 벌어진 마-라-투르(Mars-la-Tour)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잘 아시다 시피 숫적으로 열세였던 프로이센군의 제 3군단과 제 10군단이 베르됭 방면으로 퇴각하려는 프랑스 라인군(Armée du Rhin)의 5개 군단을 포착해 승리한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프로이센군이 많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오후 까지 프랑스군 주력이 베르됭 방면으로 돌파하려는 것을 저지하고 오후 3시30분~오후 4시경 제 10군단이 증원되면서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전투는 저녁까지 계속됐는데 오후에 증원된 제 10군단은 프랑스군 우익의 제 4군단을 공격해 퇴각시키면서 사실상 마무리 됩니다.
저녁 전투에서 프로이센 6보병사단 병력은 프랑스군 제 4보병사단 70연대(제 6군단 소속)에 접근한 뒤 프랑스어로 아군이니 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프랑스 보병들이 아군으로 착각하고 소총을 내리자 프로이센군은 갑자기 일제사격을 퍼부어 프랑스군 제 70연대는 그대로 무너져 버렸습니다. 여기에 프로이센 기병이 가세해 프랑스어로 "프랑스 만세! 황제 만세!"를 부르며 돌격하자 프랑스 제 6군단전체는 공황상태에 빠져 버립니다.

마-라-투르 전투에서 있었다는 이 사례는 단순한 기만도 실전에서 꽤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 같습니다. 덤으로 외국어 교육의 중요성(!)도 일깨워 주는군요.

2007년 5월 11일 금요일

독일 육군의 기관총 도입과 운용 : 1894~1914

많은 분들이 잘 아시는 이야기 같긴 합니다만 농담거리가 생각이 안 나다 보니 이런 글이라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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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에 맥심이 개발한 기관총이 처음 선을 보이자 많은 국가들이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연히 유럽의 일류 육군국인 독일 또한 이 새로운 물건에 큰 흥미를 나타냈습니다. 1894년에 맥심 기관총의 실험을 참관한 빌헬름 2세는 기관총의 성능에 크게 감명을 받아 전쟁성에 기관총의 추가 시험을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황제의 취향 탓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독일 육군은 1895년에 기관총을 정식 채용합니다.

일선 부대가 기동훈련에서 기관총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98년이라고 합니다. 이 해에 동프로이센 제 1 군단의 엽병(Jäger) 대대는 기동 훈련에서 기관총을 운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동훈련에서는 기관총에 대한 평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고위 장교들은 기관총이 사격 시 총열의 과열 문제가 있고 기동 시 불편하다는 점을 들어 비판했습니다. 이 기동훈련의 결과 엽병대대는 물론 정규 보병 연대 조차 기관총의 도입을 꺼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정규 직업군인들 보다는 아마추어인 독일 황제가 기관총의 잠재력을 더 잘 파악 하고 있었고 그는 계속해서 군부에 기관총의 운용을 확대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1900년 9월의 기동훈련에서는 기병부대가 기관총을 운용했으나 기병 장교들 역시 기관총은 기동전에 적합한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황제가 기관총의 위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수적인 독일 보병 장교들은 기관총의 잠재력을 제대로 파악 하지 못 했으며 그 결과 1904년 까지도 독일 육군은 기관총을 독립 부대로 운용했습니다. 그렇지만 기관총이 쓸만한 물건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러일전쟁 이전까지 독일육군의 기관총 옹호자들은 기관총이 가진 범용성을 강조했습니다. 크레취마르(Kretzschmar), 플렉(A. Fleck), 메르카츠(Friedrich von Merkatz) 대위 같은 위관급 장교들이 대표적인 기관총 옹호자였는데 이들은 기관총은 공격시 특정 지점에 강력한 화력을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플렉은 4정으로 이뤄진 기관총대(Maschinengewehr-abteilung : 대대가 아님)와 소총으로 무장한 100명의 보병(정면 80m로 산개)의 사격실험 결과를 통해 기관총 팀은 한 목표에 대해 5분간 3,600발을 사격할 수 있는데 반해 보병 100명은 500발 내외에 그쳤다는 점을 들어 기관총의 유용성을 주장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차례의 운용 시험 결과 몇 가지의 문제점이 지적 됐는데 가장 큰 문제는 보병부대가 돌격을 시작하면 후방에서 지원하는 기관총이 아군의 등 뒤에 사격을 할 수 있다는 점 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문제점은 기관총 도입 초기에 빈번히 나타났으며 기관총을 공격적으로 활용한 일본군의 경우 러일전쟁 때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동을 중시하는 독일의 군인들은 기관총 화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동성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04년 이전 까지 기관총의 화력은 포병의 보조적인 역할 정도로 규정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포병운용은 여전히 직접 사격을 통한 화력지원을 중요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병은 직접 화력지원을 강조하는 교리 때문에 이동 및 사격 준비 사이가 매우 취약했는데 기관총은 바로 이 시점에서 포병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독일 육군의 보수적인 장교들 마저 기관총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는 1904년 러일 전쟁에서 기관총이 괴력을 발휘한 이후 였습니다. 독일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와 일본 양측이 대량의 기관총을 운용해 효과를 거두자 기관총 활용에 보다 적극적이 됐습니다.
독일은 1907년에 기관총 부대의 단위를 중대급으로 확대하고 기관총의 숫자를 4정에서 6정으로 늘렸습니다. 이 해에 총 12개의 기관총 부대가 중대급으로 확대되었고 1914년 발발 이전까지 현역 보병연대는 모두 기관총 중대를 가지게 됐으며 엽병 대대도 바이에른 1엽병대대와 바이에른 2엽병대대를 제외하면 모두 기관총 중대를 배속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관총의 유용성이 입증되자 기관총을 불신하던 보병과 기병 장교들 조차 기관총을 보병 및 기병연대의 편제에 넣어 줄 것을 전쟁성에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각 사단마다 기관총대대(3개 중대 편성)을 넣는 안이 제시되기도 했으나 사각편제 체제에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각 연대별로 기관총 중대가 배치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역시 1907년에는 기관총 팀의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서 기관총 1정 당 견인용 마필을 네 마리에서 여섯 마리로 늘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방식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기관총 1정 당 말 여섯 마리를 사용하는 것은 기동성은 높였지만 전장에서는 적의 목표가 될 확률을 높이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 대안으로 기관총의 소형화가 필요했고 그 결과 비록 일선 부대의 요구에는 미치지는 못하지만 MG 08이 도입됩니다. MG 08의 도입 이후 기관총 1정당 견인용 마필은 여섯 마리에서 두 마리로 줄어 듭니다.(기병 사단 소속의 기관총대는 1정당 네 마리)

1914년 전쟁 발발 당시 독일군의 기관총 부대는 정규 보병연대에 배치된 것이 219개 중대, 엽병 대대에 배치된 것이 16개 중대, 예비보병연대에 배치된 것이 88개 중대, 기병 사단에 배치된 것이 11개 대(Abteilung), 보충사단에 배치된 것이 43개 대였습니다.
전쟁 발발 당시 향토연대(Landwehr-regiment)는 기관총 중대가 없었는데 사실 향토연대 급의 예비부대는 전쟁 와중에 소총부족으로 1916년까지 Gew 88을 지급 받을 정도였으니 기관총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 입니다.
예비 사단 중에서는 제 1근위예비사단(Garde-reserve-division)이 좀 별종인데 이놈의 사단은 이름만 예비사단이었고 전쟁 발발 당시 정규 보병사단 편제를 갖춰 4개 기관총 중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냥 예비사단은 아니고 “근위(Garde)” 예비사단 이로군요. 그리고 제 1예비사단(Reserve-division)은 훨씬 더 해괴한 녀석인데 이 사단은 전쟁 발발 당시 예비 사단 주제에 예하 4개 보병연대 중 3개 연대가 기관총 중대를 2개씩 가지고 있어 기관총 중대가 7개나 됐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당시 보병연대와 엽병대대에 배속된 일반적인 기관총 중대는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장교 2명
부사관 및 사병 95명
말 45마리
기관총 7정(1정은 예비용)
탄약 수송용 마차 3대
야전 취사차 1대
장비 수송용 마차 1대
건초 수송용 마차 1대
화물 수송용 마차 1대

참고서적

Brose, Eric D., The Kaiser’s Army,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Cron, Hermann, Imperial German Army 1914~19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of-Battle, (Helion, 2001)
Echevarria Jr, Antulio J,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Stevenson , David, Armaments and The Coming of War, Europe 1904~1914,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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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6일 수요일

1635~40년 프랑스군의 기병 부족 문제

서유럽에서는 15세기부터 보병이 군대의 중추를 형성하게 되고 기병의 비중이 크게 축소 됩니다. 예를 들어 이베리아 반도에서 재 정복전쟁(reconquista)을 치루고 있던 카스티야 가 대표적인데 그라나다 전투 초기에 아라곤 군(대부분 카스티야에서 동원되었음)은 기병 6,000~10,000명, 보병 10,000~16,000명 으로 편성됐는데 그라나다 전투 말기에는 기병 10,000명, 보병 50,000명으로 그 비율이 1:1 에서 1:5 로 변화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494년 프랑스 국왕이 거느린 군대는 13,000명의 기병과 15,000명의 보병으로 편성돼 있었으나 1552년에는 기병 6,000명과 보병 32,000명으로 기병 대 보병의 비율이 1:5로 변화합니다.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보병의 중요성은 더더욱 증대됐고 이제 기병은 정찰, 보급 부대 호위 정도의 부차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많은 국가들이 더 많은 보병과 포병을 동원하는데 관심을 가졌고 기병은 부차적인 존재가 됐습니다.

그 결과 17세기 초-중반 프랑스 육군은 기병이 지나치게 축소됐습니다. 1635년 프랑스는 보병 115,000명을 유지할 수 있는 예산을 배정했지만 기병에 배정한 예산은 불과 9,500명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기병 대 보병의 비율이 이제 1:11에 달한 것 입니다.

30년 전쟁 시기에 주요 교전국들은 기병 전력 증강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무엇보다 17세기의 전투는 16세기 보다 기동의 중요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황당하지만 보급 문제도 기병의 존재를 부각시켰습니다. 현지 조달에 대한 의존이 높았던 당시의 보급체계는 더 넓은 반경에서 약탈을 수행할 수 있는 기병을 필요로 했던 것 입니다. 독일이 장기간의 전쟁으로 황폐화되자 어처구니 없게도 기병이 좀 더 보급에 유리해 진 것이죠.
그러나 상대적으로 태평했던(?) 프랑스는 이런 움직임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1630년대 내내 주요 야전군에서 기병 대 보병의 비율은 평균 1:10 에서 1:12 사이였다고 하죠.

그러나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30년 전쟁에 개입하자 기병의 부족은 매우 골치아픈 문제가 됐습니다. 1635~36년에 네덜란드와 북부 프랑스에서 전개된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에스파냐군은 보병 12,000과 기병 13,000명으로 구성돼 프랑스군에 비해 기동에서 압도적이었습니다. 특히 에스파냐군에 소속된 크로아티아 기병대는 이해 8월 기습적으로 파리 교외 지역을 휩쓸어 프랑스인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기도 했지요.

프랑스도 이 무렵 기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병 증강을 꾀했으나 예산은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스파냐 군대의 기병들이 프랑스 북부를 휘젓고 다니는 동안 이들은 사실상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상대할 프랑스 기병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정부는 황급히 기병연대 편성을 시작하지만 예산도 불충분한데다 숙련된 기병을 짧은 시간안에 긁어 모으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습니다. 결국 궁색한 상황에 몰린 프랑스 정부는 형식상으로 남아있던 봉건 의무를 귀족들에게 부과합니다. 1636년 프랑스는 왕령으로 아직 군에 있지 않은 귀족들에게 40일간 기병으로 복무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런 궁여지책도 효과가 없었던 것이 이미 봉건적인 군사 의무를 수행할 필요가 없었던 귀족들은 기병으로 거의 쓸모가 없었습니다. 평시에 훈련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아예 국왕의 소집령에 무시로서 대응하는 귀족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프랑스 국왕은 1638년 까지 계속해서 매년 소집령을 내렸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결국은 정부 예산으로 기병을 증강하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이 해에 프랑스는 6개 중대로 편성된 기병연대를 편성하기 시작했고 1641년이 되면 각 야전군 소속의 기병 전력은 5,000~7,000명 수준으로 증강됐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원정군의 경우 보병 10,855명에 대해 기병은 7,261명 이었다고 하지요. 프랑스 군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1650년대에는 40% 수준에 달했습니다.

비록 전장의 주역은 보병이었지만 기동력이 중요해 지면서 기병도 17세기 초반의 찬밥 대접은 벗어나게 됩니다. 물론 다시는 전장의 주역이 되지는 못 했지만 말입니다.

2006년 11월 6일 월요일

탄넨베르크(Tannenberg)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 기병부대

엠파스에서 어떤 전쟁 보드게임 카페를 운영하시는 운영자님과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탄넨베르크 전투에 투입된 양군 기병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게 됐다. 카페 운영자님 말씀인즉슨 Clash of Giants라는 게임에는 독일군 소속으로 각 군단별로 기병여단이 하나씩 있는 것으로 설정이 돼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편제에 따르면 탄넨베르크 전투 당시 독일 제 8군 소속 군단들은 군단 직할 기병여단이 아니라 사단 직할 기병연대를 한 개씩 가지고 있었고 이렇게 각 군단별로 2개 기병연대가 있었다. 큰 오류는 아니지만 아마도 게임을 만들다 보니 마커를 최대한 적게 하기 위해서 2개 연대를 따로 만들지 않고 1개 여단으로 묶은 모양이다.

탄넨베르크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의 기병 부대 중 향토부대(Landwehr)와 요새부대를 제외한 부대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Dennis E. Showalter, Tannenberg : Clash of Empires 1914 부록과 기타 몇 개의 자료에서 발췌)

보병사단 소속 기병연대

-1 보병사단 : 8 울란연대(Ulanen-Regiment 8)
-2 보병사단 : 10 기마엽병연대(Jägerregiment zu Pferde 10)
-1 예비사단 : 1 예비울란연대(Reserve-Ulanen-Regiment 1)
-36 예비사단 : 1 예비후사르연대(Reserve-Husaren-Regiment 1)
-35 보병사단 : 4 기마엽병연대
-36 보병사단 : 5 후사르연대(Husaren-Regiment 5)
-37 보병사단 : 11 용기병연대(Dragoner-Regiment 11)
-41 보병사단 : 10 용기병연대
-3 예비사단 : 5 예비용기병연대(Reserve-Dragonerregiment 5)

기 타

-1 기병사단
=1 기병여단 : 3 흉갑기병연대(Kürasierregiment 3), 1 용기병연대
=2 기병여단 : 12 울란연대, 9 기마엽병연대
=41 기병여단 : 5 흉갑기병연대, 4 울란연대

1차 대전당시 동부전선은 서부전선에 비해 기동전의 양상이 강했기 때문에 기병들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과거의 전통의 영향덕에 구닥다리 티가 물씬 나는 부대 명칭도 남아 있어서 그런지 가끔가다가 1차 대전당시 독일군의 전투서열을 살펴보는게 2차 대전당시 독일군의 전투서열 보다 재미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2006년 7월 22일 토요일

화력과 충격력 : 16-17세기 서유럽의 기병

에스파냐 사람들이 북이탈리아의 여러 전쟁에서 프랑스군에 피박을 먹인 이후 강력한 화력을 가지게 된 보병은 서유럽 전장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미 15세기부터 슬금 슬금 한물 가기 시작한 기병은 이제 완전히 전쟁터에서 보조적인 역할로 물러나게 됐다.
그렇지만 기병은 보병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한가지 강점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기동력’이었다.

이 때문에 서유럽에서는 기병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방책이 강구 됐는데 갑옷의 두께를 늘려 방어력을 향상시켜 전통적인 기병의 역할을 계속하는 것이 그 중 하나였고 나머지 하나는 기병의 기동성에 “화력”을 결합시키는 것 이었다.

기병의 화력 증대는 초보적인 형태의 용기병이라고 할 수 있는 ‘기마 화승총병’과 “Reiter”로 통칭하는 독일의 경기병으로 나타났다.
두 가지 모두 1540년대를 전후하여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두 가지 모두 화기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가능했다. 기마 화승총병의 경우 이미 14세기부터 영국의 기마 궁수, 유럽 본토의 기마 석궁수가 성공적으로 운용됐기 때문에 특별히 혁신적일 것은 없었다.
그러나 독일의 튀링엔 지역에서 처음 등장한 “Reiter”는 확실히 기병전술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다.

바로 기마전투에서도 화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 이다.

16세기 초반 독일에서는 바퀴식 격발장치가 발명됐고 이것은 바로 “Pistole”의 등장을 가져왔다. 바퀴식 격발장치가 처음 문헌에 언급된 것은 1505년이라고 하니 실제로 등장한 것은 15세기 말 일 가능성도 있다.
바퀴식 격발장치는 화기의 소형화를 가져와서 이미 1510년대에는 “범죄”에 악용되기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1517년에 칙령을 내려 “제국 영내”에서 민간인이 바퀴식 격발장치를 사용하는 화기의 사용을 금지할 것을 명하기도 했고 이와 유사한 사례는 1540년대 까지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동물인가.

이렇게 좋은 물건이 당연히 범죄에만 사용될 리는 없고 독일의 기병을 중심으로 급속히 사용이 확산 됐다.
15세기 중반에 독일 기병들이 주로 사용하던 화기는 faustrohre라고 불리는 길이 50cm 정도의 물건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획기적인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이 물건은 사람을 제대로 맞출 만한 명중률이 나오는 유효 사거리는 기껏해야 5m에 불과했지만 기본적으로 Reiter 1개 중대(Schwadron)가 400명 정도로 구성됐기 때문에 명중률의 부족은 머리 숫자로 때우는게 가능했다.
1540년대에 이르면 피스톨은 기병의 주요 장비로 자리 매김했고 슈말칼덴 전쟁 당시 황제군과 반란군 모두 기병대의 상당수가 피스톨을 장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슈말칼덴 전쟁 당시 황제군 진영에서 옵저버로 활동했던 베네치아인 Mocenigo는 당시의 Reiter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황제군의 기병대는 반란군의 기병대를 두려워 한다. 반란군의 기병은 숫자도 많고 그들이 타는 말도 품종이 좋은데다가 세 자루의 바퀴격발식 총을 휴대하기 때문이다. 한 자루는 안장에, 한 자루는 안장 뒤에, 나머지 한 자루는 장화 안에 넣고 다닌다.”

1557년의 생-캉탱 전투에서 기병창을 주 무장으로 한 프랑스 기병들이 신성로마제국군의 Reiter 들에게 엄청난 피박을 보면서 유럽각국도 앞다퉈 Reiter와 같은 병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때의 영향으로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에 각각 reitre, raitri라는 단어가 생기게 됐다고 한다.
프랑스군은 생-캉탱 전투의 피박 이후 Reiter를 대폭 증강시켜 1558년에는 8,000명을 확보했다고 한다.(불과 1년 전에는 1,000명 미만이었다.)

이렇게 16세기 중반에 이르자 서유럽의 많은 군사이론가들은 기병 전술도 화력을 극대화 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일부 군사이론가들, 특히 프랑스의 De la Noue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이론가들은 근접전에서는 창기병이 Reiter를 압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프랑스의 종교전쟁을 제외하면 보수적인 이론가들의 주장이 입증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서유럽 군대는 기병 편제를 충격력보다는 화력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개편했고 전술적으로도 충격은 화력의 우위를 뒤집지 못 했다.

이것이 구체화 된 것이 네덜란드 독립전쟁이었다.

네덜란드는 1597년에 11개 창기병 중대 중 7개를 피스톨을 주 무장으로한 Cuirassier로, 4개를 기마 화승총병으로 개편했고 그해에 벌어진 튀른하우트(Turnhout) 전투에서 기병창을 주무장으로한 에스파냐 기병대를 크게 격파한다.
튀른하우트 전투 결과 신성로마제국도 네덜란드를 모방해 그때 까지 남아있던 창기병을 거의 대부분 Cuirassier로 개편하게 됐다.
16세기 중반부터 적극적으로 군제를 개혁하던 스웨덴은 1611년에 독일의 “기마 화승총병”의 영향을 받아 최초의 “용기병” 부대를 편성했고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소규모의 기병을 피스톨을 주 무장으로 하는 체제로 개편했다. 스웨덴의 기병전술의 특징은 기존의 Reiter 부대와는 달리 적과 근접해서 사격을 하도록 해 화력의 효율적인 운용을 꾀했다는 점 이다.
Dodge 같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했듯 스웨덴의 기병은 소규모고 제국군의 기병 보다 종합적인 무장은 뒤떨어졌지만 효율적인 화력 운용으로 전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렇게 17세기 초-중반으로 접어 들면서 전통적인 중기병은 거의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됐고 기병은 더 이상 특수한 계층의 상징이 아니게 됐다. 화기는 기병을 전장의 주역에서 밀어냄과 동시에 그 계급적 특수성도 없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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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낀 책들.

Thomas Arnold, The Renaissance at War
Hans Delbruck, Geschicte der Kriegskust im Rahmen der politischen Geschichte
Theodore Dodge, Gustavus Adolphus
Bert S. Hale,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B. Hughes, Firepoewr, Weapon Effectiveness on the Battlefield, 1630-1850
V. Vuksic , Cavalry

2006년 6월 11일 일요일

14-15세기 잉글랜드와 기타 몇몇 동네 군대에서 보병의 규모(재탕!)

또 재탕이다.. 헐..

이것 저것 쓰긴 했는데 글의 요지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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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서유럽의 군대하면 기사를 떠올리는게 일반적이지만 실제로 책을 읽다 보면 의외로 보병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인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부사관의 어원이 되기도 한 Sergens가 대표적인데 12세기 후반 라틴왕국의 기록을 보면 라틴왕국의 각 도시들은 국왕의 소집명령이 떨어지면 총 5,025명의 Sergens를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간을 한참 건너서...

14세기의 잉글랜드 군대도 보병의 비중이 꽤 높았던 군대로 보인다.

1314년 배녹번(Bannockburn)전투 당시 잉글랜드군의 병력 구성을 보면 Men at Arms는 2,500명에 보병이 약 15,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백년전쟁 당시의 잉글랜드군은 기사를 포함한 기병의 비율이 프랑스군 보다 낮은 편이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전쟁이후 잉글랜드가 무장을 잘 갖춘 보병을 많이 확보하려 노력한 것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백년전쟁이 시작될 무렵의 병종 구성을 보면 그게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1339년 2월의 소집 명부에 기록된 잉글랜드 군대의 병력은 아래와 같았다고 한다.

[Men at Arms / 기마보병(Armati) / 궁수(Archer)]

Yorkshire 200 / 500 / 500
Glouchestershire 63 / 250 / 250
Worcestershire 30 / 120 / 120
Staffordshire 55 / 220 / 220
Shropshire 55 / 220 / 220
Herefordshire 30 / 120 / 120
Oxfordshire 20 / 80 / 80
Berkshire 15 / 60 / 60
Wiltshire 35 / 140 / 140
Devonshire 30 / 120 / 120
Cornwall 25 / 100 / 100
Hampshire 30 / 120 / 120
Somersetshire 35 /160 / 160
Dorsetshire 35 /160 / 160
Sussex 50 / 200 / 200
Surrey 20 / 80 / 80
Kent 35 / 140 / 140
Essex 35 / 160 / 160
Hertfordshire 18 / 70 / 70
Middlesex 10 / 40 / 40
Cambridgeshire 18 / 70 / 70
Huntingdonshire 18 / 70 / 70
Buckinghamshire 20 / 80 / 80
Bedfordshire 20 / 90 / 90
Lancashire 50 / 300 / 300
Norfolk 40 / 160 / 160
Suffolk 25 / 100 / 100
Northumberland 70 / 250 / 250
Westmoreland 25 / 150 / 150
Cumberland 50 / 200 / 200
Lincornshire 80 / 350 / 350
Nottinghamshire 35 / 150 / 150
Derbyshire 35 / 150 / 150
Leicestershire 25 / 120 / 120
Warwickshire 30 / 120 / 120
Northamptonshire 35 / 160 / 160
Rutland 10 / 40 / 40
총 계 : 1,407 / 5,600 / 5,600

그렇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서류상의 소집 명부였던 것 같다.

백년전쟁 초기의 전투를 보면 아직 Men at Arms의 숫자가 잉글랜드 내에서 벌인 전투 보다는 많은 편이다. 아마도 기사가 많은 프랑스와 전쟁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백년 전쟁 초기의 깔레 포위전 당시의 기록을 보면 Men at Arms만 4,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물론 이 기록이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1359년에 에드워드 3세가 군대를 소집했을 때의 기록에도 Men at Arms의 숫자는 꽤 많은데 기사 700명을 포함해서 3,000명에 달한다.

그런데 왜 14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갑자기 Men at Arms의 비율이 급격히 떨어졌는가? 많은 영국 중세사가들은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잉글랜드 국왕들이 비용을 많이 잡아 먹는 Men at Arms를 많이 유지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던 것이 큰 이유 중의 하나라고 보고 있다.

1322년 당시의 기록을 보면 보병에게 지급되는 수당은 다음과 같았다.

중무장 보병 : 일 4 펜스
경무장 보병 : 일 2 펜스

그리고 14세기 후반 말을 가진 궁수들의 일당은 일 6펜스 였다.

그렇다면 Men at Arms는 얼마나 들어갔을까? 1324년 당시의 예를 하나 들어 보자.

William de Norwell의 기사들에게 지급된 비용

Men at Arms : 일당 2 실링

1 실링이 12 펜스니까 일반 Men at Arms는 중무장 보병에 비해 일당이 여섯배, 말을 가진 궁수에 비해 네 배는는 더 됐다는 이야기다. 백년 전쟁 당시의 여러 전투들을 본다면 비용대 효과면서 궁수가 상당히 쓸만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14세기 후반부터 Men at Arms 대 궁수의 비율은 1 대 3 정도가 되기 시작했다. Andrew Ayton은 1380~90년대에 잉글랜드 군대에서 기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같은 시기 프랑스 군대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15세기로 들어가면서 궁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 커졌다. Anne Curry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15세기 전반기 프랑스로 파병된 잉글랜드 군대의 병종 구성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1428년 : Men at Arms 444명, 궁수 2250명
1437년 : Men at Arms 299명, 궁수 1777명
1441년 : Men at Arms 801명, 궁수 2997명
1443년 : Men at Arms 600명, 궁수 3949명
1449년 : Men at Arms 55명, 궁수 508명
1450년 : Men at Arms 255명, 궁수 2380명

보통 1 대 5에서 심한 경우는 1 대 9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15세기에 들어가면 보병 비율의 증가는 잉글랜드 만의 것이 아니라 서유럽 전체에서 보편화 되었다. 초보적인 화기의 등장과 보병 전술의 발달로 서유럽 각국에서 보병이 차지하는 비중이 기병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다. 카스티야 왕국이 15세기 말 재정복 전쟁을 벌일 당시 병력 규모는 다음과 같았다.

1485년 기병 11,000명 보병 25,000명 계 36,000명
1489년 기병 13,000명 보병 40,000명 계 53,000명

16세기로 넘어가면 사실상 기병이 보조적인 위치로 확실하게 굴러 떨어지고 보병이 전장의 주역이 된다. 물론 그 싹은 몇 백년 전 부터 이미 나타난 셈 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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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래의 책들을 대충 베껴서 정리한 것이다.

Anne Curry and Michael Hugh(ed), Arms, Armies and Fortifications in the Hundred Years War.
John France, Western Warfare in the Age of the Crusades 1000~1300
J. R. Hale, War and Society in Renaissance Europe 1450~1620
Maurice Keen(ed), Medieval Warfear : A History
Charles Oman, A History of the Art of War in the Middle Ages
Michael Prestwich, Armies and Warfare in the Middle Ages : The English Experience

2006년 5월 21일 일요일

러시아 육군의 개혁 1880-1914 (재탕!)

내가 생각해도 징허다.. 재탕 삼탕 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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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이후 러시아 육군은 신무기 도입과 체제 개편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보병화기의 교체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1880년대로 들어오자 끄렝끄식 소총은 물론 단발 노리쇠 장전식인 베르던 소총역시 구식화 되었고 유럽 각국이 채용하기 시작한 무연 화약을 사용한 탄창식 노리쇠 장전 소총은 러시아가 보유한 어떠한 보병 화기 보다도 우수했다. 러시아 육군은 1884년 까지 구식인 끄렝끄식 소총을 모두 베르던 노리쇠 장전식 소총으로 교체했지만 이때는 이미 이 소총 조차 구식화 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러시아 육군은 1889년부터 무연 화약을 사용하는 탄창식 노리쇠 장전 소총의 도입을 추진했으며 여기에 벨기에의 레옹 나강이 설계한 소총과 러시아 육군 장교인 모신이 설계한 소총이 경합을 벌인 끝에 모신의 소총에 나강 소총의 탄창 구조를 결합한 소총이 제식 명칭 M1891으로 채택되었다. 러시아 육군은 1897년까지 200만 정을 생산해서 일선 보병 사단의 장비를 완전히 교체했으며 1903년까지 추가로 170만 정을 생산해서 예비 여단까지 장비 시켰다. 이렇게 해서 러-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 육군은 1877년의 전쟁과는 달리 소화기 면에서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었다.

또한 기병의 부무장도 1895년에 나강의 리볼버로 교채했다. 나강 리볼버는 1898년부터 뚤라 육군 조병창에서 생산에 들어갔다.

포병은 강철제 강선식 야포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까지도 러시아 육군은 시대에 뒤떨어진 청동제 활강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포병의 낙후성은 러시아 육군의 가장 큰 고민 거리였다. 터키와의 전쟁에서 터키군의 야포에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철제 대포의 도입이 급히 추진 되었는데 러시아 내에는 생산 설비가 없어서 1877년에서 1878년 사이에 1,500문을 독일의 크룹 사로부터 수입했다. 자체 생산은 외국에서 도입한 설비로 오부호프 조병창에서1878년부터 시작되었다. 오부 호프 외에 뻬름 조병창도 생산 설비를 교체해서 500문의 철제 대포를 생산했다. 1881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4,884문의 철제 화포를 도입했는데 이중 러시아에서 생산한 것은 2,652문 이었고 독일에서 수입한 것이 2,232문 이었다. 독일에서 수입한 것 중 1,500문은 전시에 긴급히 도입한 것이므로 실제 수입량은 732문이며 이것은 전체 생산량의 4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것 이었다. 러시아는 야포의 국산화에 그런대로 성공을 거둔 셈 이었다.

1897년에 독일 육군이 신형 77 mm포를 채택하자 러시아는 이에 큰 자극을 받아 76mm급 야포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신형 76mm 포는 1900년에 정식 채용되어 생산에 들어갔고 1902년에 개량형이 채택되었다. 76.2mm M1902는 1차 대전 기간 동안 러시아 육군 보병 사단과 기병 사단의 표준 화포였으며 1930년대까지 개량을 거쳐 계속 사용되었다.

한편, 19세기 말 보병 전투를 뒤바꿀 혁신적인 무기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기관총 이었다. 러시아 육군은 일찍이 1870년에 수동식 개틀링을 도입해서 사용해 보았으나 수동식 개틀링은 이를 조작하는 사수가 피로해 지면 발사 속도가 급격히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어서 크게 호평 받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인 맥심이 1885년에 개발한 기관총은 이런 수동식 개틀링의 단점을 완전히 극복한 것 이었으며 1889년에 영국 육군에 정식 채용된 것을 필두로 유럽 각국의 군대에 급속히 보급 되었다. 당시 맥심 기관총은 “일반 소총병 1개 중대에 필적하는 화력”을 가졌다고 평가 되었으며 러시아 육군 역시 이 새로운 무기를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러시아 육군은 1896년에 2정의 맥심 기관총을 도입하여 시험 평가를 했으며 그 결과 맥심 기관총을 도입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1899년에 58정의 맥심 기관총이 영국으로부터 170,051 루블에 도입 되었으며 1902년부터는 뚤라 조병창에서 면허 생산이 시작되었다.

병력의 증강도 계속 되었다. 1871년에 프로이센의 징병제 군대가 프랑스의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완파 하자 유럽대륙의 여러 나라들은 앞 다투어 징병제를 도입했다. 징병제로 인해 벨기에 같은 소국도 수십 개 사단을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독일식의 예비군 체제는 유사시에 현역의 수배가 넘는 대군을 동원 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프랑스 등 주변국들도 예비군을 증강 시킴과 동시에 현역 사단도 증강 시켰다.

러시아 육군은 1881년 근위 사단 3개, 척탄병 사단 4개, 보병 사단 41개를 포함해 총 48개 사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1903년까지 보병 4개 사단이 추가되어 52개 사단으로 증강 되었으며 육군 병력은 1881년에 장교 30,768명, 부사관과 사병 844,396명에서 1904년에는 장교 41,079명, 부사관과 사병 1.066,894명으로 증가했다. 포병은 1881년에 107,601명에서 1903년 154,925명으로 증가했으며 현역 사단들은 청동제 포를 신형 M1902로 교체했다. 기병은 1881년에 근위 기병 2개 사단과 일반 기병 18개 사단이던 것이 1903년에는 근위기병 2개 사단, 일반 기병 17개 사단, 까자끄 기병 6개 사단으로 증가했다. 한편, 예비군은 1899년에 1,969,000명에 달했는데 총 21개 예비 여단이 전시 동원에 들어가면 35개 보병 사단으로 개편 되도록 계획 되었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 보다도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시에 이들을 동원하여 이동 시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러시아의 철도망은 아직 부실했으며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가설한 철도의 총 연장 보다도 못할 정도였다. 넓은 영토에 비해 교통망이 발달하지 못 했기 때문에 전시 동원에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보다 느릴 것은 뻔히 예상되는 일 이었다. 그나마 철도의 도입으로 1867년에는 동원 완료에 25일 이나 걸리던 끼예프 군관구가 1872년에는 9일로 줄어 들었으며 역시 1867년에 동원 완료 까지 111일이 걸리던 까프까즈 군관구가 39일로 줄어 들었다. 1877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도 1876년 11월과 1877년 4월에 부분 동원을 미리 시행 했기 때문에 전쟁 발발시 비교적 신속한 병력 동원이 가능 했던 것 이었다. 전시 동원 속도가 매우 느렸기 때문에 위기 상황이 닥칠 때의 대응 능력은 매우 떨어 졌으며 이것은 군 수뇌부의 큰 고민거리였다. 이 고민 거리는 곧 현실화 되었는데 바로 일본과의 전쟁이었다.

1904년에 벌어진 러-일 전쟁은 일본이 신속히 황해의 재해권을 장악 함으로서 초반부터 일본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일본군은 여순항을 손쉽게 고립 시켰으며 비록 러시아가 1902년부터 만주 일대의 군사력을 증강 시키고 있었다고는 하나 일본군에게 순식간에 압도 당했다. 러시아는 매우 멀리 떨어진 만주까지 병력을 동원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 때문에 여순이 고립될 동안 방어만을 취하고 있었다. 러시아군 포병은 일본군이 투입한 대구경 공성포에 대항할 수단이 없어 속수 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 만주 야전군은 제 1 시베리아 군단과 제 3 시베리아 군단으로 편성 되었는데 이 전력으로 일본군의 3개 야전군(1, 2, 4군)을 상대해야 했다. 시베리아 군관구에서 제 2,4,6 시베리아 군단과 10, 17 군단이 증원 된 후에야 일본군과의 병력 격차가 줄어들었다. 양군은 꾸준히 병력을 증강 시켜서 1905년 1월이 되면 일본군은 만주에 5개 야전군을 투입했으며 러시아도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병력 규모는 비슷했으나 러시아군은 상당수가 예비군에서 동원한 시베리아 군단이 주축이었으며 화력은 일본의 정규 사단에 비해 열세했다. 1905년 2월에 벌어진 목단 전투에서 양군의 병력 차는 나지 않았으나 일본군이 254정의 기관총을 보유한 반면 러시아군은 54 정에 불과했다. 또한 러시아 군이 1,200문의 화포를 보유해서 일본군의 1,000문에 비해 우세했지만 역시 러시아군은 중포를 거의 보유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총 병력 276,000명중 90,000명을 잃었으며 일본군은 270,000명중 70,000명을 잃었다. 목단 전투는 러-일 전쟁의 지상전에서 여순 전투와 함께 가장 결정적인 전투가 되었다.

러-일 전쟁은 또 다른 개혁의 시작이 되었다. 러-일 전쟁의 참패는 터키와의 전쟁 처럼 새로운 문제를 던져 주었다. 방대한 러시아의 영토는 유사시 신속한 병력의 전개에 큰 장애 요인이 되었으며 일본군은 러시아 육군 보다도 우세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훈련상태가 부실한 예비군이 주축이 된 러시아 육군은 불필요하게 많은 희생을 냈으며(비록 일본군 역시 나을 것은 별로 없었으나) 지휘관들의 자질 부족도 심각했다.

1909년에 새로 전쟁상이 된 수호믈리노프는 러시아 육군의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06년부터 러시아의 경제가 높은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에 군 개혁을 위한 재정 확보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개혁을 실행할 군인들의 사상이었다.

러-일 전쟁의 경험으로 전투시 양 측방을 보호하고 정찰 및 원거리 타격을 수행할 대규모 기병 집단의 필요성이 강조 되었으나 기병은 보병과 달리 유지 비용이 비싼 것은 물론 훈련에도 시간이 걸려서 예비군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세계 최고의 기병 보유국 임에도 불구하고 기병 부족에 시달렸다. 러-일 전쟁 직후인 1905년에 74,300명이던 기병은 1908년 까지 83,517명으로 증가했지만 군 수뇌부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불충분 했다. 동원 문제 때문에 기병 사단과 연대들은 최대한 국경 근처에 배치되었다.

포병도 마찬가지로 별로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러시아 육군의 고위 장성들은 중포의 도입을 추진하기는 했지만 야전 부대가 아닌 요새에 배치하기를 원했으며 운용상의 편의를 위해 1개 포대를 야포 6문으로 줄이자는 안은 1개 포대 8문을 고집하는 고참 포병 장교들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었다. 요새포를 확보하려는 고위 장교들의 고집은 1911년부터 1914년 까지 유럽의 군비 경쟁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엉뚱한 곳에 수백만 루블의 예산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쟁상 수호믈리노프는 요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장성들과 타협을 해서 낡은 요새 몇 개를 해체하고 요새 주둔 부대를 예비 연대로 개편할 수 있었지만 이 절충안은 실질적인 전력 증강에는 도움이 되지 못 했다. 각 군단 포병에 122mm 유탄포와 152mm 유탄포를 배치해서 독일의 군단 포병과 비슷한 전력을 확보 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발발 했을 때 러시아 육군의 1개 군단은 평균 122mm 유탄포 12문을 보유한 것에 그쳤다.

러-일 전쟁에서 큰 위력을 보인 기관총은 더 대량으로 장비 되었다. 각 보병 1개 연대마다 기관총 8정이 배속 되었다. 1914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4,157정의 기관총을 보유 하게 되었다.

기병은 여전히 중요시 되었다.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병 병과는 전통적인 귀족의 아성이었으며 군사 귀족들의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기병의 역할은 보병 사단의 측면을 방어하고 정찰을 실시하며 유사시 적 기병을 격파하는 것 이었다. 또한 정규 기병의 경우 말에서 내러 보병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 받았다. 까자끄 기병의 경우는 근접전을 위해 기병도를 사용했다. 한편 1912년부터 모든 기병 부대는 기병창을 필수 장비로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투에서 “충격 효과”를 내기 위해서 였다.

내연 기관을 사용하는 자동차의 도입은 군의 큰 관심을 끌었다. 1898년 12월에 끼예프 군관구 사령관이던 드라고미로프대장이 차량을 군사 수송에 사용하는 방안에 대해 전쟁성에 건의를 했다. 당시 전쟁상 이었던 꾸로빠낀은 이 제안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공병에 시험 부대를 편성해서 차량 운용을 시험해 보도록 지시했다. 이를 위해서 영국에서 자동차가수입 되었으며 1902년에 끼예프와 꾸르스끄 지구의 기동훈련에 처음으로 자동차가 사용 되었다. 자동차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자동차의 도입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1906~8년 까지 트럭과 프랑스에서 수입한 장갑차의 시험이 진행 되었다. 그러나 시험은 소규모로 이루어져 군 상층부에 큰 인상을 주지는 못 했다. 최초의 자동차 부대는 공병에 편성되었는데 1910년에 5개 중대가 편성되어 철도 공병에 배속 되었다. 1914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트럭 418대, 승용차 259대, 구급차 2대, 기타 챠랑 32대, 오토바이 101대를 보유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 전역에는 약 9,000대의 차량이 있었는데 이중 트럭 475대와 승용차 3,562대가 육군에 징발 되었다.

대부분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군 항공역시 육군 항공대의 일부로 출발했다. 러시아의 육군 항공대는 1909년에 정식으로 창설 되었는데 1909년부터 1911년 까지 육군 공병국 예하에 있었다. 1911년 까지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항공기 30대로 성장했는데 항공기는 모두 프랑스에서 수입한 기종이었다. 이 무렵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참패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서 다시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1911년에는 항공기가 육군의 기동 훈련에 참가하여 군사적인 잠재력을 인정 받았다. 이 성공에 힘입어1912년에는 육군 항공대가 총 참모부 중앙 관리국(GUGSh) 예하로 배속 변경 되었으며 각 군단에 직할대로 비행기 6대로 편성된 1개 비행대를 배속시킨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급속히 성장해서 1913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 제국을 추월하여 동유럽에서는 독일에 맞설 수 있는 항공력을 갖추게 되었다. 1913년 4월 1일에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13대의 비행선과 150대의 항공기로 증강되었으며 전쟁 직전인 1914년 8월 초에는 비행선 22대와 항공기 250대, 그리고 항공대 39개로 증강되었다. 또한 1913년에는 러시아 해군도 항공대를 편성했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벌어진 발칸 전쟁에서 항공기가 정찰과 연락에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자 러시아 육군과 해군은 항공기의 추가 획득에 박차를 가했다.

개전 직전에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양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매우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러시아 전쟁성은 육군 항공대를 수입한 항공기로 성장시키고 있었으며 명확한 항공 산업 육성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24 종류의 항공기와 12 종류의 항공기 엔진을 사용했으며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주로 독일제 엔진을 사용하던 항공기 16종류는 예비 부품 이 바닥나서 운용 불능이 되었다. 러시아의 항공 산업은 항공기 조립 생산에 불과한 수준이었으며 항공기 공장은 그저 단순한 “작업장”수준 이었다.

지휘 통신 체계는 병력의 증가를 따라 가지 못 했다. 1914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삼소노프의 제 2 군은 군 전체에 겨우 25대의 유선 전화를 보유했을 뿐 이었으며 대부분의 통신을 모르스 전신기에 의존했다. 그리고 실전에서 제한된 전화선으로는 예하 군단들 조차 제대로 통제하기가 어려워 전령을 사용하는 실정이었다.

한편, 1912년에 들어오면서 안보 환경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먼저 러-일 전쟁 이래 숙적이던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이 희박해 진 대신 동맹국 프랑스와의 밀착으로 독일에 대한 선제 공격의 필요성이 증대했다. 프랑스는 동원 개시후 12일 안에 독일에 대한 공세에 나설 것 이기 때문에 러시아 역시 여기에 맞춰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이 때문에 기존에 있던 제 19호 동원 계획을 수정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수정 안은 두개가 만들어 졌는데 첫번째 수정안은 А 로서 독일이 프랑스 전역에 주력을 집중할 경우를 상정한 것 이었다. 수정안 А에서는 북서 전선군 예하에 레넨깜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 1 군과 삼소노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 2 군이 동 프로이센에 대한 공격을 맡았으며 이 두개 야전군에 17개 보병 사단, 1개 보병여단과 8개 기병사단, 1개 기병여단 그리고 야포 1,104문과 병력 250,000명으로 편성 되었다. 이 계획에서 주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두어 졌으며 이 때문에 남서 전선군 예하에 3, 4, 5, 8 야전군이 배속 되었고 이 경우 남서 전선군은 34개 보병사단, 1개 보병여단 12개 기병사단, 1개 기병여단에 총 병력 600,000을 가지게 되었다. 이 계획안에 따를 경우 공세를 위해서 동원을 완료하는 시점은 20일에서 41일 사이였다.

독일이 주력을 러시아 전선에 집중해서 선제 공격에 나올 경우를 대비한 것이 Г 계획 이었다. 이 경우 1, 2, 4 군이 독일에 대항해 투입 되고 3군과 5군은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막도록 했다. 이 경우 러시아는 시베리아 등지에서 충분한 예비 병력이 동원 될 때 까지 완전히 방어로만 전환할 계획 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 시베리아 철도가 아직 충분히 정비 되지 못 해서 실제 동원 시 병력 동원 속도가 계획한 대로 나올 수가 없었다. 실제로 실제 동원 속도는 계획한 수준의 75%에 불과 했다. 여기에 동원한 병력을 지원할 보급 수송체계도 문제가 많았는데 독일 군의 경우 전시에 250,000대의 철도 차량을 동원 할 수 있었는데 러시아는 불과 214,000대에 불과했다.

한편 1912, 1913년의 독일 육군 법 제정과 발칸 전쟁으로 인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가능성 증대로 러시아 황제는 육군 예산을 더 증가 시켰다. 우선 1917년 까지 현역을 400,000명 더 늘리는 한편 군단 당 108문인 야포를 132문으로 늘리기로 결정했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 했듯이 프랑스 식으로 1개 포대를 야포 4문으로 개편하는 안도 추진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두마는 1914년 7월 까지도 이에 필요한 예산안을 통과 시키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 러시아 육군은 몇 년 전과 비슷한 상태에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글을 쓰면서 베낀 자료들...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Indiana University Press, 1999)
Daivd G. Her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7)
Jonathan Grant, "Tsarist Armament Strategies 1870~1914",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4, Issue 1(1991. 3)
Nikolai K. Struk, "Motor Vehicle Transport in the Russian Army, 1906~14",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12, Issue 3(1999. 9)
Stephen J. Cimbala, "Steering through Rapid : Russian mobilization and World War I",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9, Issue 2(1996. 6)

2006년 4월 29일 토요일

아즈텍의 전쟁수행 양식과 보급문제(삼탕!)

제목은 거창하나 내용은 어린양 블로그의 다른 글들이 다 그렇듯 별 거 없다.

몇 년 전에 Center for Hellenic Studies에서 나온 War and Society in the Ancient and Medieval Worlds라는 책을 얼떨결에 구하게 된 일이 있었다. 고대사쪽은 거의 아는게 없는지라 내가 왜 이 책을 가지게 됐는지는 아직까지도 수수께인데 한가지 확실한 것은 꽤 재미있었다는 점이다.

이 책은 각 문화권 별로 여러개의 짧은 글들이 실려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바로 Ross Hassig가 쓴 14장의 아즈텍 문화권의 전쟁이다.

Ross Hassig에 따르면 아즈텍 제국의 전쟁 수행의 가장 큰 장애 요인은 잘 발달된 도로망의 부재(대 도시를 제외하면 군사적으로 쓸만한 도로가 없었다고 한다)와 적절한 수송수단의 부재였다고 한다. 특히 도시간의 전쟁에서 이런 문제점은 가장 큰 장애요인이었다고 한다.

아즈텍 군대의 기본 단위는 대략 8,000명 정도의 병력으로 구성된 xiquipilli라고 하는데 말이 없었으므로 전 병력은 보병이었고 행군 속도가 지독히 느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모양이다. Hassig는 하나의 xiquipilli가 하룻 동안 이동할 수 있는 최대의 거리가 19km정도 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로사정이 열악해서 행군 대형은 쓸데 없이 길었다고 하는데 한개의 xiquipilli가 행군하면 부대 선두의 사제 부터 제일 후위의 병사까지의 길이가 대충 12km 정도 됐다고 한다.

※ 참고로, John Haldon의 저서에 따르면 도로망이 비교적 양호한 9세기경 비잔티움 군대의 경우 보병 10,000명과 기병 5,000으로 편성된 부대의 행군 대형은 14km였다. 여기서 본대 보다 2~3km 앞서서 나가는 정찰대와 역시 본대 보다 2~3km 뒤에서 따라오는 후위 부대가 차지하는 거리를 빼면 실제 행군 대형은 8~9km 정도다.

문제는 8,000명 정도의 대 병력이 이동하면서 보급을 해결할 수 있는 규모의 도시가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모든 보급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보급품은 병사 개개인이 가지고 다녀야 했고 무게와 부피가 많이 나가는 식량은 병사 한명당 한명의 짐꾼(tlamemes)이 배속되었다고 한다. 보통 짐꾼 한명이 23~25kg정도의 식량을 지고 행군했는데 이건 아무리 후하게 쳐 줘도 병사 두명과 짐꾼 한 명이 8일 정도 먹는 분량이었다.
결국 아즈텍의 도시 하나가 다른 곳과 전쟁을 벌일 경우 최대 작전 가능 범위는 대략 65~70km정도였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Hassig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3일간 행군한 뒤 하루 싸우고 하루 쉰 뒤 3일간 행군해서 돌아와야" 했다는 것이다.

물론 황제가 지휘하는 군대는 행군로 상의 도시들에게 사전에 식량과 보급품을 모으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 도시들 보다는 작전 가능한 범위가 좀 더 넓었다고 한다.

※덤으로 Hassig의 설명에 따르면 아즈텍의 전쟁에서 "기습"이란 요소는 별로 달성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한 도시가 다른 곳과 전쟁을 벌일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시장에서 소집 명령을 내리고 소집 명령이 내려지면 calpoleque라고 불리는 각 지역의 대표가 자신의 구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모아 온 뒤 숫자가 차면 행군을 시작했는데 위에서 말한대로 행군 속도가 지독하게 느려서 군대가 출정을 시작하고 얼마 안 지나서 상대방이 전쟁이 시작된 걸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뭐, 아즈텍의 전쟁은 종교 행사적인 성격이 되려 강했다고 하니 기습같은건 애시당초 고려할 필요가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