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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3일 화요일

만헤이 전투에 대한 뻘글


근자에 먹고사는 문제로 업데이트가 전혀안되고 있어 민망하군요. 블로그에 밀덕썰 푸는게 소소한 삶의 재미 중 하나인데 말입니다.

예전에 어디에 투고하려고 썼던 뻘글 한 편 투척합니다. 만헤이 전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원래 연재하려 했던 곳의 특성상 자료출처나 주석은 없습니다. 뭐, 전부 다 제 블로그에서 오래전에 했던 이야기이니 이곳을 꾸준히 들르신 분들이라면 지겨우시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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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크만의 기묘한 모험


독일군의 야심찬 아르덴느 공세가 미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좌절되어 가고 있던 1944 12 24, N15도로가 지나가는 교통 요충지인 만헤이(Manhay)가 독일 무장친위대 제2기갑사단 다스 라이히(Das Reich)’에 점령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편찬된 미육군의 공간사에서는 이날 밤 독일군이 노획한 셔먼 전차를 앞세우고 미군으로 위장해 만헤이를 점령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독일측 참전자들의 증언이 공개되면서 만헤이 전투는 미육군의 설명과는 다르게 전개됐음이 밝혀졌다. 이날 만헤이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아르덴느 전투가 시작될 무렵 다스 라이히사단은 제6기갑군의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1944 12 19,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는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다스 라이히사단을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무렵 독일군을 괴롭히던 고질적인 연료부족 때문에 다스 라이히사단은 투입 명령을 받고도 이동을 할 수 없었다. ‘다스 라이히사단에 대한 연료보급은 12 22일 오전이 지나서야 마무리 되었다. 보급을 마친 다스 라이히사단은 N15 도로를 따라 북상하다가 바하끄 쁘헤듀흐(Baraque Fraiture)에서 미 82공수사단 325글라이더 보병연대 2대대와 여기에 배속된 미 3기갑사단 32전차연대 3대대 소속의 1개 전차소대의 저항에 부딛혔다. ‘다스 라이히전차연대 7중대의 4호전차와 미 32전차연대 3대대의 셔먼 전차간에 전차전이 벌어졌다. 독일측은 4대의 4호전차를 잃었고 미군은 11대의 셔먼전차와 다수의 차량을 상실하고 바하끄 쁘헤듀흐에서 퇴각했다. 그러나 23일부터 24일까지 미육군항공대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만헤이를 목표로 한 독일군의 진격은 저지되었다. 일부 독일 전차병들은 끊임없는 공습으로 공황상태에 빠져 전차를 버리고 도망치기까지 했다. 여기에 바하끄 쁘헤듀흐를 탈환하기 위해 미 3기갑사단과 82공수사단이 병력을 증원하면서 독일군은 더욱 곤경에 빠졌다.

결국 독일군은 미군의 공습을 피해 야습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다스 라이히전차연대장 루돌프엔셀링(Rudolf Enseling) SS중령은 만헤이 방면에 대한 야습에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1대대 4중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4중대는 경험이 풍부한 장교였던 오르트빈 폴(Ortwin Pohl) SS대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폴 대위는 우수한 지휘관이자 전차 에이스였다. 그는 노르망디 전선에서 12대의 미군 전차를 격파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부관이 바로 유명한 전차에이스 에른스트 바르크만(Ernst Barkmann) SS상사였다. 바르크만 상사는 노르망디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특히 쿠탕스 가도의 전투로 명성을 떨쳤다. 1소대는 아르덴느 공세 직전 임관한 크노케(Heinrich Knocke) SS소위가, 2소대는 비스만(Alfred Wissmann) SS소위가, 3소대는 경험이 풍부한 부사관인 프란츠 프라우셔(Franz Frauscher) SS원사가 지휘하고 있었다. 각 소대는 모두 5대의 판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대본부는 폴 대위의 402호차와 바르크만 상사의 401호차 2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4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만프레트 하게샤이머(Manfred Hargesheimer) SS중위가 지휘하는 2중대 소속의 판터 6대가 4중대에 배속됐다. 그리고 전차를 지원하기 위해 제3SS기갑척탄병연대 16중대(공병중대)가 배속됐다.

1638분에 4중대의 전차들은 오데뉴(Odeigne)에 집결해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공격의 선봉에 서는 것은 베테랑인 프라우셔 원사가 지휘하는 3소대였다. 3소대의 뒤에는 중대본부가 따랐고 그 뒤에는 2소대, 그리고 최후위에는 경험이 부족한 1소대가 배치됐다.
한편 4중대의 정면에는 미 3기갑사단의 올린 브루스터(Olin F. Brewster) 중령이 지휘하는 TF브루스터가 배치되어 있었다. TF브루스터는 3기갑사단 32전차연대 소속의 3개 전차소대, 36기계화보병연대 I중대 병력 일부, 82공수사단 509강하연대 병력 일부, 그리고 75보병사단 290보병연대 C중대 등 잡다한 부대로 급조된 전투단이었다.

오후 10, 예정대로 공격이 개시됐다. 만헤이 방면으로 북상하던 4중대는 곧 TF브루스터 소속의 전차들과 격돌했다. 짧지만 격렬한 전투가 전개됐고 프라우셔 원사의 판터가 피격됐다. 미군은 셔먼 전차 두대를 잃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4중대는 잠시 진격을 멈추고 재정비에 들어갔으며 프라우셔 원사는 지휘를 위해 전차를 바꿔탔다.

그런데 혼란의 와중에 상황 전달을 받지 못한 바르크만 상사는 중대가 잠시 진격을 멈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단독으로 북상했다. 바르크만 상사는 자신이 낙오됐다고 생각한 나머지 아군을 만날 때 까지 계속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군이 아니라 만헤이를 방어하고 있던 미 7기갑사단 A전투단 40전차대대 소속의 셔먼 전차였다. 셔먼 전차장 마티어스(Mathias) 하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바르크만의 판터를 아군의 셔먼 전차로 착각했다. 남쪽에는 아군이 배치되어 있었으니 당연한 것 이었다. 바르크만 상사는 마티어스 하사의 셔먼 전차를 프라우셔의 판터라고 착각해 그 옆에 정지하고 말을 걸었다. 마티어스 하사는 갑자기 독일어가 들리자 당황해서 포탑 안으로 들어가 해치를 잠궈버렸다. 바르크만도 상대의 반응에 당황했다. 옆에 있는 전차를 다시 살펴보니 후미등이 미군의 붉은 색이 아닌가! 판터의 후미등은 녹색이었다. 당황한 바르크만은 인터폰에 소리를 질렀다.

포수! 옆에 있는 전차는 적 전차다! 쏴라!(Richtschütze! Panzer neben uns ist ein Feindpanzer! Abchießen!)“

사수인 호르스트 포겐도르프(Horst Poggendorf) SS병장도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쏠 수가 없습니다! 포탑을 돌릴 수 없어요!(Abschießen geht nicht! Turmschwenkwerk klemmt!)“

두 대의 전차가 너무 가까이 붙어있다 보니 판터의 포신이 걸려서 포탑을 회전 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판터 조종수인 그룬드마이어(Grundmeyer) SS상병이 순발력을 발휘했다. 포탑을 돌릴 수 있도록 판터를 재빨리 후진 시킨 것 이었다. 포겐도르프 병장도 때를 놓치지 않고 셔먼을 격파했다. 놀랍게도 마티어스 하사를 비롯한 셔먼의 승무원들은 살아남았는데 근거리에서 발사된 판터의 포탄이 셔먼의 후부까지 관통해 버리는 바람에 내부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티어스 하사는 부상을을 입은 포수를 구출해 탈출했다.

이제 바르크만은 자신이 적진 한가운데에 고립됐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는 이 상황에서 그대로 전진하는 것을 택했다. 마티어스 하사의 셔먼을 격파하고 이동하던 바르크만의 앞에 제814대전차대대 B중대 소속의 M10 구축전차 두 대가 나타났다. 이들도 바르크만의 판터를 아군의 셔먼으로 오인해 사격을 가하지 않았다. 포겐도르프는 신속하게 사격을 가해 두 대의 M10을 격파했다. 바르크만은 미군 전차가 계속해서 나타나자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이동하기로 했다. 다시 전진하던 바르크만의 앞에 제40전차대대 C중대 소속의 셔먼 아홉대가 나타났다. 바르크만은 천연덕스럽게 계속 이동했고 미군들은 바르크만의 전차를 아군 전차로 생각해 한 발의 사격도 가하지 않았다. 바르크만은 그곳을 벗어나 만헤이 교차로에 도착했다. 바르크만은 원래 그랑므닐 방면으로 가려고 했으나 셔먼 전차 세대가 그랑므닐 방향에서 오는 것을 보고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대로 만헤이로 돌입하기로 했다. 만헤이는 철수를 준비하는 미군 차량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미군은 철수 준비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바르크만의 판터가 만헤이에 돌입했을 때도 한동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는 없었다. 미군들은 갑자기 만헤이 한 복판에 독일 전차가 나타난 것을 깨닫고 혼란에 빠졌다. 바르크만은 앞에서 다가오던 지프를 그대로 깔아뭉갠 뒤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미군 운전병들도 질주하는 판터를 피해 차량을 모느라 우왕좌왕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미군 전차들이 바르크만의 셔먼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대의 M5 스튜어트가 판터의 앞을 막았으나 바르크만의 판터는 그대로 스튜어트를 들이받고 전진했다. 그리고 포탑을 6시 방향으로 회전시켜 추격해 오는 미군 전차들을 차례대로 격파하기 시작했다. 바르크만의 판터는 만헤이를 벗어나 마을 외곽의 숲으로 달아났다. 바르크만은 혼란에 빠진 미군이 추격을 멈춘 것을 확인한 뒤 숲 속에 숨기로 했다. 판터의 엔진이 이상을 일으켜 더 이상 이동하는 것이 위험했다.

바르크만이 만헤이에서 좌충우돌 하는 동안 전열을 가다듬은 4중대는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때 미 40전차대대 C중대 소속의 셔먼 한 대가 4중대의 판터들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프라우셔는 즉시 조명탄을 발사한 뒤 이 셔먼을 격파했다. C중대의 나머지 셔먼 전차들도 순식간에 격파됐다. 미군 전차병들은 대부분 전차 밖에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기습이었다. C중대를 전멸시킨 4중대는 만헤이로 돌입했다. 그러나 바르크만이 이미 한바탕 난리를 피운 뒤라 미군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 다시 프라우셔의 판터가 셔먼의 근거리 사격에 피격됐다. 프라우셔의 뒤를 따르던 판터가 즉시 반격을 가해 셔먼을 격파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프라우셔와 승무원들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프라우셔는 다시 전차를 갈아타고 지휘를 해야 했다.

4중대는 만헤이를 점령한 뒤 다시 방향을 돌려 그랑므닐 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628대전차대대 소속의 M10 구축전차들이 포격을 가해 3소대의 베테랑 전차장인 오스카 피셔의 판터가 격파되고 피셔도 전사했다. 피셔의 판터는 도로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공격 기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랑므닐을 둘러싸고 포격전이 전개되는 와중에 4중대장 폴 대위가 부상을 입고 후송됐다. 폴 대위의 중대장 차량은 크노케 소위의 포수가 인계했다. 중대장 차량은 만헤이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피셔의 판터를 우회하는 와중에 판터 네 대가 미군의 대전차 지뢰를 밟고 기동불능이 됐다. 4중대의 공격이 난관에 부딛혔다. 4중대는 미군의 방어를 물리치고 그랑므닐 서쪽의 에흐제(Erezze)에 도착해 다시 재정비에 들어갔다. 폴 대위가 후송됐기 때문에 4중대에 배속되어 있던 하게샤이머 중위가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그런데 하게샤이머 중위도 낙오된 미군의 총격에 어깨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결국 4중대의 간부들은 다시 그랑므닐로 후퇴해 방어태세를 갖추기로 결정했다.

12 24일 밤의 전투로 7기갑사단 A전투단은 21대의 전차를 잃었고, 40전차대대 A중대장 앨런(Malcolm O. Allen) 대위가 포로가 되고 D중대장 휴즈(Walter J. Hughes) 대위가 전사하는 등 420여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한편, 숲속에 숨어있던 바르크만은 상황이 정리된 것으로 보이자 다시 만헤이로 돌아왔다. 만헤이에는 중대장의 판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바르크만은 중대장차의 임시 전차장과 상의를 한 뒤 건물 사이에 전차를 숨기고 방어 태세를 취하기로 했다. 12 25일 오전, 미군은 만헤이를 탈환하기 위해 7기갑사단 31전차대대 B중대를 투입했다. B중대 소속의 셔먼 다섯대는 만헤이를 향해 전진하다가 바르크만을 비롯한 4중대 본부 판터 두대의 포격으로 전멸했다. 잠시 뒤 올프(Emerson Wolfe) 대위가 지휘하는 본대의 셔먼 10대가 도착했으나 앞서 투입된 선발대가 전멸한 것을 보고는 공격을 머뭇거렸다. 만헤이 탈환을 지휘하기 위해 도착한 7기갑사단 B전투단장 브루스 클라크(Bruce Clark) 준장은 올프 대위에게 즉시 공격하라고 명령했으나 올프 대위는 판터가 매복하고 있는 상황에서 엄폐물 없는 개활지로 돌격하는 것은 불리하다고 설명했다. 클라크 준장은 올프 대위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해 공격 명령을 취소했다. 한편 그랑므닐 방면을 방어하고 있던 4중대의 주력은 TF맥조지(McGeorge) 소속의 셔먼 전차 17대와 교전해 15대를 격파하는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만헤이와 그랑므닐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12 25일부터 27일까지 8개 포병대대를 동원해 포격을 퍼부었다. 여기에 미육군항공대가 가세해 만헤이-그랑므닐의 독일군은 옴싹달싹 할 수 없었다. 크노케 소위의 411호차가 미군의 포격으로 격파됐다. 4중대는 포격이 뜸해진 25일 밤에 만헤이를 버리고 남쪽으로 철수했다. 바르크만의 대담한 모험으로 독일군은 만헤이를 비교적 쉽게 점령할 수 있었으나 전쟁을 운으로만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르크만의 모험은 제2차 세계대전의 특이한 일화로만 남았다.

2016년 1월 25일 월요일

[번역글] T-34에 대한 재론(再論)

불법 날림 번역 하나 나갑니다.


이 글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8-1호(2015)에 실린 보리스 카발레르치크의 “Once Again About the T-34”를 번역한 것 입니다. 원 글은 러시아어로 발표된 것이라 영어 중역입니다. 본문의 주석에도 있지만 필자인 카발레르치크는 꽤 오래전에 미국으로 이주해서 지금은 미국인입니다. 해롤드 오렌스타인의 번역 자체는 훌륭하다는 느낌입니다만 기술적인 용어가 많아서 저의 번역에 문제가 많을 듯 싶습니다.

이 논문의 기초 사료가 된 보고서는 인터넷 곳곳에 공개되어 있고 해외 포럼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으니 내용 자체는 익숙한 분이 많으실 겁니다. 그래도 필자인 카발레르치크의 논평도 꽤 흥미롭습니다.


참고삼아 몇년 전에 번역했던 스티브 잘로가의 글 “기술적 충격과 전쟁 초기의 상황 : 1941년 T-34 전차의 사례”도 함께 읽어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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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34에 대한 재론(再論)1)


필자: 보리스 카발레르치크(Boris Kavalerchik)
영문번역: 해롤드 오렌스타인(Harold S. Orenstein)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많이 생산된 전차가 그 유명한 소련의 T-34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T-34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전차는 수많은 영화와 그림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옛 전장에 세워진 수많은 기념물에도 묘사되어 있다. 전설적인 T-34에 대한 문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대개 이러한 것들은 T-34의 장점만을 다루고 있는데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이 전차는 당시의 기준으로 강력한 무장과 장갑을 갖추었고 기동력도 우수했다. 중요한 것은 이 세가지 요소가 균형을 갖추었다는 것이고 어느 한가지 요소를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T-34의 주무장은 장포신의 76mm포였다. 이 포는 독소전쟁 초기 전장에 투입된 모든 목표물을 격파할 수 있었는데 장갑을 갖춘 목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독일군이 중장갑을 갖춘 중전차를 투입하고 기존의 중형전차들도 장갑을 강화하자 T-34의 무장은 신형의 훨씬 강력한 85mm포로 교체됐다.
T-34의 방어력은 장갑의 두께 뿐만 아니라 효율적인 경사장갑과 장갑판을 조립하는 개선된 용접방식에 기인했다. 개선된 용접방식을 채택함으로써 T-34는 높은 생산성을 가지게 됐을 뿐 아니라 용접공의 숙련도나 건강, 정신 상태에 상관없이 안정적인 용접이 가능했다.
T-34는 강력한 디젤엔진과 폭이 넓은 궤도를 채택하여 기동성이 우수했다. 여기에 사용된 디젤엔진은 출력과 토크 값이 높아 성능이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국가들이 전차에 사용했던 가솔린 엔진에 비해 생산성이 높고 화재위험도 적었다. 폭이 넓은 궤도를 사용했기 때문에 접지압이 낮았고 야지기동 능력이 우수했는데 특히 러시아의 도로 사정이 엉망이란 점을 고려하면 이 점이 중요했다.


이와 같은 T-34의 장점들은 셀 수 없이 많이 언급되었기에 잘 알려져 있다. T-34는 우수한 성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소량만 생산된 값비싼 전차가 아니라 수만대가 생산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독소전쟁 발발 직전 부터 1945년까지 총 52,000대에 달하는 각종 형식의 T-34와 이 전차에 기반한 6,000대의 자주포를 비롯한 파생형 차량이 생산되었다. 하지만 이 중에서 전쟁이 끝날때 까지 살아남은 차량은 그리 많지가 않다. 대조국전쟁 기간 중 붉은군대의 중형전차 손실은 생산량의 80%에 달했으며 이 중 절대다수가 T-34였다.(Krivosheev, p.479) 그토록 찬양받는 T-34의 손실이 이렇게 높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원인은 다양하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손실 원인을 모두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T-34의 손실 원인 중에는 순수한 기술적인 문제가 몇가지 있었고 이 글에서는 바로 그 기술적인 문제를 다룰 것이다.


전차를 포함한 모든 장비는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전차를 기술적 걸작이라고 칭할 수도 있고 고철 덩어리라고 평할 수도 있다. 하나의 장비에 대한 평가를 한가지 측면에서만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모든 사람들의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평가는 여러가지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소련이 건재하던 시기에는 언론검열국2)이 검열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T-34는 힌두교도가 소를 떠받드는 것 같은 숭배의 대상이 됐으며 어떠한 비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소련의 공식 선전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최고의 전차는 T-34라는 평가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T-34가 최강의 전차라는 논의의 근거를 독일측이 제공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패전국 독일의 장성들은 전후 패전에 대해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한 변명은 천편일률적이었다. 무능한 히틀러, 소련의 열악한 교통망, 동장군 등등. 이러한 변명 중에는 T-34가 독일군의 전차와 대전차포를 압도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독일 장성들에게는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 보다는 T-34의 강력한 성능 같은 것을 강조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체면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일반인들은 T-34의 장단점을 구체적으로 평가할 방법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종류의 전투차량을 다른 것과 비교할 때 기초적인 전술적, 기술적 특성을 활용한다. 이와 같은 통계는 전차의 무게, 주포의 구경, 장갑의 두께, 엔진 출력, 최대속도와 같은 지표를 반영하고 있고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수치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물 밖에 나와있는 일부분만 보고 빙산에 대해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보다 완전하고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는 실험장에서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전차를 시험한 내용을 담은 시험 보고서를 봐야 한다. 기갑차량에 관심을 가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런 종류의 보고서는 소수의 사람들만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개 이런 열성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찾아낸 정보를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1943년 5월 영국군은 튀니지에서 거의 완벽한 상태의 티거 중전차 한대를 노획했다. 이 전차를 분석한 보고서가 단행본으로 공개된 것은 1986년이 되어서였다. 이 책은 여러개의 도표, 사진, 축적도 등을 담고 있었으며 총 200쪽 분량이었다.(Fletcher)


미국과 영국은 T-34와 KV전차3)에 대해서도 비슷한 시험을 실시했으며 자세한 시험을 거친 뒤 티거 전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국과 영국은 어떻게 소련제 전차를 획득했을까? 그것은 렌드-리스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렌드-리스 프로그램은 미국 정부가  히틀러에 맞서는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군장비, 무기, 탄약, 전략물자, 식량을 비롯한 다양한 물자를 대여해 주고, 미국 또한 마찬가지로 동맹국으로 부터 물자를 빌리는 것 이었다. 미국이 렌드-리스 프로그램을 통해 동맹국에게서 물자를 빌린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렌드-리스 프로그램에 따르면 미국으로 부터 원조를 받는 동맹국은 가능한 만큼 미국에 지원을 해야 했다. 전쟁 기간 중 소련은 미국에 목재, 모피, 크롬과 망간, 백금, 금을 제공했다. 또한 소련이 획득한 독일의 군사기술과 소련의 군사기술도 교환의 대상이었는데 여기에는 전투용 장비도 포함되었다. 예를들어 1945년에 소련은 미국으로 부터 최신형 M-26전차를 제공 받았다. 그리고 소련이 동맹국에게 보낸 장비 중에는 T-34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2년 6월 3일 니즈니 타길에 위치한 우랄 전차공장에 파견된 군사대표 코지례프 중령은 모스크바로 부터 1개월 내에 세대의 T-34전차를 외국으로 보낼 준비를 하라는 서면명령을 받았다. 이 중 한대는 미국에 보낼 예정이었다. 다른 두대의 발송지는 나중에 통보하겠다고 되어 있었다.(TsAMO D. 936, pp. 52–53) 우랄 전차공장이 선정된 이유는 우연이 아니었다. 이당시 우랄 전차공장이 생산하는 T-34는 다른 공장에서 생산한 것들 보다 품질이 나았기 때문이다. 1941년 가을에 T-34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하리코프 기관차공장은 니즈니 타길로 피난해서 현지에 있던 기관차 공장과 합병했다. 우랄 전차공장은 굳건한 전통이 있었으며 하리코프 기관차공장의 공장번호 183번을 넘겨받았다. 물론 우랄 전차공장의 담당자들도 외국인들에게 체면을 구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성능시험을 통과한 가장 우수한 전차 3대를 골랐다. 이 3대는 당시까지 적용된 개선사항을 모두 반영한 최신형이었다. 장거리를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해당 차량들은 차량의 내외부를 깔끔히 정리했으며 연료와 윤활유를 가득 채웠다.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서 페인트는 세겹이나 칠했다. 차체 하부의 물이 새어 들어올 수 있는 틈에는 그리스를 가득 발랐고 해치와 구멍, 각 부위의 틈새는 세심하게 밀봉처리를 했다. 그리고 차체 내부에는 방습제를 넣은 주머니를 달았다. 또한 세대의 T-34는 자세한 운용 및 정비 교범이 첨부되었다. 또한 엔진, 무장, 무전기에는 별도의 교범이 첨부되었으며 조립공정을 담은 설명서와 예비부품, 장비품도 포함되었다. 1942년 8월에 이 중 한대의 T-34가 KV전차와 함께 미국으로 보내졌다. 10개월 뒤인 1943년 6월에는 또 다른 한대의 T-34와 KV전차가 아르항겔스크를 통해 영국으로 보내졌다.(TsAMO D. 1744, pp. 58, 64) 마지막 한대의 T-34는 전차공업위원회가 보관하게 됐다. 이 전차는 오늘날 모스크바의 연방군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미국에 도착한 T-34의 시험은 1942년 11월 29일에 시작되어 거의 1년간 계속됐다. 이 실험은 당시 미육군의 장비 실험장이었던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북쪽의 에버딘 시험장에서 이루어졌다. 첼랴빈스크 트랙터공장에서 생산된 KV전차도 이곳에서 시험받았다. 시험이 끝난 뒤 두 종류의 전차에 대한 두꺼운 보고서가 작성되었으며 사본 한 부는 소련에 보내졌다. 영국 또한 자국에서 T-34를 시험한 결과를 소련에 통보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보고서들은 지금까지 완전히 공개되지 않았다. 이 보고서의 내용들은 부분적으로 공개되어 있다. 전차애호가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943년 8월에 작성되어 붉은군대 정보총국 제2국장 흘로포프Василий Ефимович Хлопов소장이 서명한 ‘T-34와 KV 시험에 참여한 미국 에버딘 시험장의 기술자, 기업체 대표자, 군간부, 군사위원회 성원들의 해당 전차에 대한 평가’이다.(TsAMO D. 1712, pp. 91-99) 많은 사람들이 이 보고서를 미국에서 소련 전차를 시험한 결과를 요약한 내용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보고서의 제목과 여기에 서명한 책임자의 지위를 고려하면 이 보고서를 단지 미국측 시험 보고서나 그 요약본으로 볼 수는 없다. 그리고 ‘평가’라는 단어를 볼때 시험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보고서의 실체는 무엇이었는가? 여기에 대한 의문은 이 보고서의 사본을 스탈린, 전차공업위원회 위원장 말리셰프, 붉은군대 기갑총국장 페도렌코 상장에게 제출한 정보총국의 임시 국장 일리쵸프Иван Иванович Ильичёв 중장을 통해 풀 수 있다. 일리쵸프가 보고서에 첨부한 서한을 보면 이 보고서는 붉은군대 정보총국 소속 장교가 에버딘 시험장의 기술자와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국 기술자는 그의 의견 뿐만 아니라 그의 동료들과 미군 장교, 전문가들, 군사위원회 성원들, 그리고 미국 기업들이 파견한 대표자들에게서 들은 내용을 이야기 하고 있다.(TsAMO D. 1712, p. 90a) 이 보고서의 내용이 얼마나 객관적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각 ‘평가’ 내용을 하나 하나씩 인용하고 그에 대한 논평을 하겠다.

“전차의 상태:

중형전차 T-34는 343km를 주행한 뒤 완전히 고장이 났으며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고장원인: 엔진 내부에 엄청난 양의 먼지가 쌓여 있었는데 그 원인은 엔진의 에어클리너가 너무 조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스톤과 실린더가 망가져 고장이 났으며 수리를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전차의 시험은 중단될 예정이며 KV전차 및 3인치포 탑재 M-10 전차와의 사격시험이 예정되어 있다. 사격시험을 마친 뒤에는 에버딘으로 이송해 전시할 예정이다. KV중전차에도 기계적 문제가 속출하고 있지만 아직 가동은 가능하며 시험을 계속하고 있다.”


T-34가 쉽게 고장났다는건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당시 T-34의 공장 보증한도는 1,000km 주행이었지만 실제로는 생산된 차량 대부분이 보증한도 근처도 달려 보지 못했다. 붉은군대 기갑총국장 페도렌코 장군에게 제출된 기갑병과 과학연구시험소 소속의 시험장의 통계를 보면 T-34는 평균 200km 미만을 주행하면 창정비를 받아야만 했다. 에버딘에 보내진 T-34는 되려 평균보다 양호한 것 이었다.
게다가 1942년 당시 소련 전차산업이 처한 환경은 최악이었고 전차의 성능은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저하되었다. 그 중 하나는 새로운 장소로 피난한 공장들의 생산 조직을 재편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대규모의 생산설비를 이동한 뒤 다시 생산 체제를 갖추는 것은 생소한 일 이었다. 수많은 고정 설비와 기계 장치, 다른 공장들과의 생산 체계, 그리고 생산에 필요한 자원이 사라졌다. 경험이 풍부한 노동자와 숙련공, 기술자의 손실이 많았기 때문에 공장 노동력의 평균 수준도 급락했다. 공장 노동 경험이 없는 사람을 대규모로 동원해야 했는데 여기에는 여성과 청소년이 다수 포함되었다. 새로운 노동자들은 헌신적으로 일했으며 전선의 군인들을 돕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들은 지식과 경험, 전문적인 기술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대한 많은 전차를 만드는 것 이었다. 전쟁 초반에는 전차 손실이 엄청난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래서 생산 품질에 대한 요구 기준을 낮출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품질관리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엔진에 시동만 걸려도 합격 처리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결과 1942년도에 생산된 T-34 중 다수는 30~35km만 주행해도 창정비를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이런 문제점은 몇가지 측면에서 정당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에 전차는 실제 기계적 수명을 다 할 때 까지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짧건 간에 말이다. 당시 일선에 배치된 소련군 전차의 ‘기대수명’은 철로로 수송되고 정비를 받는 기간을 제외한다면 평균 4~10일, 혹은 1~3회의 공격작전에 투입될 때 까지였다. 1942년에는 평균 66.7km를 주행하면 기계고장, 혹은 전투로 인해 완전손실이 되었다. 이것은 T-34가 창정비를 받아야 하는 기계수명의 3분의 1 정도였다. 즉 대부분의 전차는 고장이 날 기회 조차 없었다.


또한 당시 전차의 심장이었던 б-2 디젤엔진(T-34와 KV 두 차종에 장착되는)이 아직 초기의 ‘기술적 결함’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시 엔진 공장에서는 б-2 엔진의 수명을 최소 100시간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б-2 엔진은 연구소의 환경 하에서는 어느 정도 작동했지만 실제로 전차에 장착되면 기껏해야 70시간 정도 밖에 버티지 못했다. 에버딘 시험장에서 시험하던 T-34의 엔진은 72.5시간을 가동한 뒤 고장이 났는데 이 중에서 58.45시간은 저부하 상태, 14.05시간은 부하가 걸리지 않은 상태였다. KV전차의 엔진은 66.4시간을 가동한 뒤 고장이 났고 이 중에서 20.02 시간만 부하가 걸리지 않았다는게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Bakhmetov et al., pp.25, 26) 그리고 б-2 엔진의 가장 큰 결함은 연료 소모량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엔진은 다른 디젤엔진에 비해 연료 소비량이 12% 많았다. 그리고 윤활유 소모량은 다른엔진에 비해 3~8배나 많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1942년 가을 무렵에는 연료 부족 보다는 윤활유 부족 때문에 T-34의 행동반경에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전차공업위원회 기술부에 따르면 T-34는 평균적으로 200~220km를 주행한 뒤 연료보급을 해야 했지만 윤활유 교체는 평균 145km를 주행한 뒤에 해야 했다.(Technical Manual No.9-759, p. 32) 반면 같은 시기 미국과 독일 전차는 T-34 처럼 엔진오일을  자주 교체할 필요가 없었다. 예를들어 T-34와 동급이라 할 만한 M4A3셔먼 전차는 400km를 주행할 때 마다 엔진오일을 교체해야 했다.(Technical Manual No.9–759, p. 32) 독일의 4호전차는 2,000km를 주행한 뒤에 엔진오일을 교체해도 됐다.(Perrett, p. 15)  


“전차의 외형:

미국측에서는 단 한명의 예외 없이 우리 전차의 차체 형태를 좋게 평가했다. 특히 T-34가 좋은 평가를 받았다. 모두가 T-34의 차체 형태가 미국측이 알고 있는 다른 어떤 차종 보다 우수하다는 데 동의했다. KV전차의 경우 미군이 현재 사용하는 전차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았다.”


미국측이 T-34의 차체형태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T-34의 차체형태는 당시 기준으로 혁신적인 것이었으며 그 유명한 독일 판터 전차의 차체 형태에도 영향을 끼쳤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어떤 무기를 접한 적군이 그것을 복제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무기에 대한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하지만 경사장갑을 적용한 최초의 전차는 T-34가 아니다. T-34의 시제품은 1937년 독학으로 공부한 발명가 치가노프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BT-SV전차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치가노프는 프랑스의 FCM36 경전차에 영향을 받았다. FCM36은 용접한 40mm 두께의 경사장갑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FCM36전차의 생산대수는 100대에 그쳤다. 그러니 T-34야 말로 경사장갑을 채택한 전차 중에서는 최초로 대량생산에 들어간 차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장갑:

T-34와 KV 전차의 장갑재에 대한 화학 분석에 따르면 두 차종의 장갑판은 대부분 연철이지만 표면경화처리가 되어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미국측은 장갑판의 경화방식을 변경하여 장갑판의 두께는 줄이면서 방어력을 강화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을 택한다면 전차의 중량을 8~10% 정도 줄일 수 있으며 (속도를 증가시키고 접지압을 낮추는 등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


T-34의 장갑방어력은 충분했지만 개선될 필요가 있었다. T-34의 장갑구조는 1930년대 말에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45mm 구경의 철갑탄에 대응하기 위한 것 이었다. 충분한 방어력을 얻기 위해서 장갑판에 열처리를 해서 경도를 높였다. 그리고 T-34의 ‘전우’ 였던 미국의 셔먼 탱크의 장갑판은 경도가 균일하고 품질도 훌륭했다. 그래서 셔먼의 장갑은 T-34의 경도높은 장갑판과 달리 적의 포탄이 명중했을 때 장갑판에 균열이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었으며, 특히 관통을 당했을 경우 그러했다. 그러므로 T-34의 장갑판은 결함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측은 T-34를 시험한 뒤 작성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경화처리는 표면에만 적용됐으며 균일하지도 않다.
2.장갑판의 강도가 부족하다. 장갑은 주로 연철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화학적 구성도 일정치 않다.
3.장갑판의 경도는 공식적인 데이터와 일치하지 않으며 부위별로 차이가 난다.
4.용접 처리가 매끄럽지 못하다.


이와 같은 단점이 앞서 언급한 제조 공정상의 문제로 인한 직접적인 결과라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또 한가지 문제점을 추가해야 한다. 예를 들어 T-34의 주조제 포탑도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주물로 만든 장갑은 용접으로 조립한 장갑 보다도 품질이 조악했는데 그 이유는 주물로 장갑을 만들때 압연 강판에 사용하는 мз-2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мз-2철은 민수품목으로 사용될 때 и8-с철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는데 여기서 с라는 철자는 이 제품의 사용처를 명시하는 것 이었다. 즉 용접 조립에 사용되는 압연강을 제조하는 철이었다.4)  이 제품은 주물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мз-2로 만든 주조장갑은 품질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비단 포탑 장갑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T-34의 차체 내부의 보우빔(Bow Beam)도 주조 방식으로 만들면서 내부에 직경 0.5인치 정도의 수축기공(shrinkage porosity)으로 둘러싸인 공동이 생겼고 이로 인해 강도가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5) 반면 전차 생산에 мз-2철만 사용함으로서 사용하는 재료와 열처리 방식이 단일화 되었기 때문에 작업공정이 단순화 되고 노동생산성도 높아졌다. T-34/85의 주조포탑은 71л철로 만들었는데 이 철은 바로 주조작업용으로 만들어진 제품이었다.(Postnikov, pp. 22, 24, 26) 이로 인해 주조장갑의 품질이 크게 향상되었다. 하지만 이건 1944년의 일이었다.


1943년 11월 24일 메릴랜드의 워터타운 조병창에서 작성한 공식 보고서의 일부를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워터타운 조병창의 연구실에서는 에버딘 시험장에 있는 T-34와 KV전차의 장갑재 샘플을 얻어 재질을 분석했다.


“Mn-Si-Ni-Cr-Mo강과 Mn-Si-Mo강의 실리콘 함유량은 1.0~1.5% 수준으로 높다. 장갑재의 구성요소들은 각 부위에 필요한 경도를 충족할 만큼의 경화능성을 제공한다…T-34중형전차의 장갑재는 최대한의 관통 저항력을 얻기 위해 열처리를 통해 매우 높은 경도 수준(429~495 브리넬)을 얻었지만 그대신 구조적 안정성6)이 저하되었다…. 압연강으로 만든 장갑과 주물로 만든 장갑의 인장력을 시험한7) 결과 미국 내에서 사용하는 철과 비교했을때 상대적으로 높은 인장력을 보이고 있다…..압연강판의 품질은 부위별로 최상과 최하를 오갈 정도로 들쑥날쑥하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 부위 별로 조립 방식에 차이가 있는 듯 하다. 장갑재의 일부는 그 두께 때문에 충분한 수준의 강도를 가지고 있지만 경화 처리 자체는 불완전한 경우가 있다.(Experimental Report No. WAL. 640/91, pp. 1, 5, 9)”


이 평가는 한 미국인의 주관적 평가라고 할 수 없으며, 또한 기록이나 번역 과정에서 왜곡된 것도 아니다. 이것은 미국인 전문가들의 공식적인 의견이었다.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국 기술자들은 장갑재의 화학적 조성과 기계적 특성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열처리 방식으로 인해 품질이 균일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차체:

가장 큰 문제점은 차체 하부의 경우 물 속에 들어가면 물이 새어 들어오고 차체 상부는 비가 내릴 경우 물이 새어 들어온다는 것이다. 폭우가 내리면 더 많은 물이 틈을 타고 차체 안으로 스며들어와 전자 장비를 고장 내고 탄약을 못 쓰게 만든다. 탄약의 적재 방식은 호평을 받았다.”


물이 새어 들어오는 위치는 다음과 같았다.


1.용접면의 불량. 앞서 언급한 것 처럼 미국측은 T-34의 용접 상태가 불량한 점을 지적했다. 또한 전기 용접으로 용접면이 장갑판에 과도한 스트레스를 줄때 이것을 적절한 기술적 방식으로 제거하지 않을 경우 쉽게 균열을 발생 시킬 수 있다. T-34의 경우 이런 일이 가끔 발생했다.(Kolomiets, pp. 295-296, 304)
2. 해치를 포함해 승무원이 드나드는 부분, 전차의 점검창이나 각 부위의 결합부, 포탑과 차체의 상면, 각종 커버, 조준경 등에 있는 틈.
3. 관측창, 피스톨 포트, 엔진 커버와 같은 작은 구멍.
4. 포탑링의 볼베어링.


기본적으로 T-34는 설계단계에서 틈이 생기는 부분에는 고무로 밀봉을 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1942년 초 소련은 극심한 고무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무 생산에 필요한 원료를 생산하던 공장들은 서부에 집중되어 있었고 독일군이 진격해 오면서 이들 공장은 새로운 지역으로 피난해서 생산을 시작해야 했다. 그 결과 1941년 11월 부터 1942년 5월까지 고무 생산 공장들은 전쟁전에 비축한 원료와 렌드-리스로 들어온 원료로 고무를 생산했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고무 소비를 줄이려 했고 고무가 반드시 필요한 부문에만 고무가 공급됐다. 고무를 아끼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1942년 1월 부터 1943년 8월까지 T-34의 보기륜은 외부에 타이어를 씌우는 대신 내부에 고무 쿠션을 넣는 방식으로 생산됐다.(Zheltov et al., Neizvestnyi T-34, p. 43) 또한 노동 소요를 줄이고 기계류의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조립 후 마무리 공정을 대거 생략했고 특히 차체의 경우 그게 심했다.  그 결과 부품 사이에는 공간이 발생했다. 이때문에 T-34는 물이 잘 샐 수 밖에 없었다.
T-34의 주포 포탄은 대부분 전투실 바닥에 있는 특수한 탄약상자에 적재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상자당 2~3발이 수납되었다. 안전성의 측면에서는 이것이 최상이었다. 그래서 에버딘에서 T-34를 시험한 관계자들은 이 점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도 문제는 있었다. 전차의 차고가 높아지면 탄약을 꺼내는 것이 불편할 수 밖에 없었고 전차 안으로 물이 스며들기라도 하면 탄약상자에 들어있는 포탄이 바로 영향을 받기 때문이었다. 미국 기술자들은 이 때문에 탄약에 녹이 슬었다고 지적했다.


“포탑:

가장 큰 문제점은 포탑 내부가 너무 좁다는 것이다. 미국측은 우리 전차병들이 어떻게 양가죽으로 된 겨울복장을 하고도 포탑에 들어갈 수 있는지 궁금해 했다. 전차의 포탑 선회 장치는 매우 불량했다. 모터가 매우 약해서 자주 과부하가 걸렸고 불꽃이 자주 튀었으며 이때문에 포탑 선회모터에 달린 저항기가 타버렸다. 또한 선회장치의 기어 이빨이 뭉개지기도 했다. 미국측은 유압식을 택하거나 아예 수동으로 돌리는게 낫다고 평가했다.”


T-34의 포탑이 비좁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놀랄일도 아니다. T-34의 포탑은 이 전차의 직계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45mm포 탑재 A-20전차의 포탑을 답습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비좁은 포탑에 훨씬 더 큰 포미와 제퇴 공간이 필요한 76mm포를 탑재했으니 그야말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비좁은 포탑 내부 공간 때문에 전차병들은 단순히 불편함만 느낀 것이 아니라 포탑 내부에서 움직이는 것 조차 어려웠고 특히 외부 관측을 위해 움직이는데 제약이 심했다. 이때문에 전차장이 T-34에서 내리는데 최소한 11초는 소요됐다. 그러니 전차에 불이라도 붙으면 몇 초 사이로 전차병의 생사가 갈렸다. 내부 공간이 비좁고 탄약 배치 방식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T-34는 기동을 하면서 분당 세발 정도 밖에 쏠 수 없었다.(TsAMO D. 41, p. 15) 포탑링의 직경이 1,420mm로 매우 좁았기 때문에 승무원을 한명 더 태워 전차장이 사수를 겸하지 않게 할 수도 없었다. T-34/85에서는 포탑링의 직경이 1,600mm로 커져서 포탑 승무원을 세명으로 늘리고 85mm포를 탑재할 수 있었다. 반면 셔먼의 포탑링은 1,753mm였다. 셔먼의 승무원은 T-34의 승무원보다 1.5배는 많은 공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미국측에서  T-34의 전차병들이 내부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미국측의 포탑선회장치에 대한 비판은 주관적이다. 셔먼에는 두 종류의 포탑선회장치가 있었다. 유압식과 전기식이다. 유압식이 보다 잘 작동했기 때문에 셔먼의 각 형식 중 대부분이 유압식포탑선회장치를 채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압식포탑선회장치 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일부는 유압식과 호환이 가능한 전기식포탑선회장치를 달고 있었다.
물론 T-34의 포탑도 수동으로 선회가 가능했다. 수동식 선회장치는 정밀한 조준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 속도를 3단으로 조정할 수 있는 전기식선회장치는 신속한 선회에 사용하는 것 이었다. 포탑의 신속한 회전은 전투, 특히 근접전에서 매우 중요했다. 전기식선회장치 때문에 T-34는 14.3초에 포탑 회전을 마칠 수 있었다.(Tank T-34, p. 41) 그렇기 때문에 전기식선회장치를 채택한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설계와 생산 공정은 수준이하였는데 특히 에버딘의 시험에 사용된 T-34에 탑재된 선회장치가 그러했다.


“무장:

ф-34 전차포는 매우 훌륭하다. 매우 단순하고 고장도 거의 없으며 운용이 편리하다. 단점은 미제 3인치 전차포에 비해 포구초속이 낮다는 것이다.(전자는 초당 3,200피트, 후자는 초당 5,700피트이다.)


미국측이 T-34에 탑재된 ф-34를 높게 평가한 것은 당연하다. 이 전차포는 당대의 걸작 중 하나였다. 단순하고 값도 싸며, 크기도 작도 신뢰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서 제시한 수치는 다소 이상하다. ф-34 전차포에 철갑탄을 사용했을때 포구초속은 662미터(2,172피트)였다.(Ust’yantsev and Kolmakov, p. 210)  1942년 부터 생산된 M4셔먼 전차는 75mm M3 전차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이 전차포는 철갑탄을 사용했을때 포구초속이 619미터(2,030피트)였다. 그러므로 포구초속으로 비교하면 M3 전차포는 ф-34 전차포 보다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설사 HVAP T45탄을 사용한다고 해도 포구초속은 869미터(2,850피트)에 불과하다.(Hunnicutt, p. 562) 또한 T45탄은 시험적으로 소량만 생산된 것으로 일선 부대에는 지급되지 못했다. 보고서에서 포구초속을 실제의 두배 가량인 1,737미터(5,700피트)로 기재한 것은 논의가 필요하다. 제2차대전이 끝난 뒤에 등장한 APFSDS탄 정도나 되어야 이정도 속도가 나오며 게다가 이 탄은 활강포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작성 당시의 오류이거나 번역 당시의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조준경:

이 조준경은 세계적으로도 우수하다는 것이 중평이다.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조준경은 물론 현재 미국이 개발 중인 조준경 중에서도 이것 보다 우수한 것은 없다고 한다.”


T-34의 주포 조준경은 당시 기준으로 우수한 편에 속했지만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었다. 좀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시 에버딘 시험장의 시험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익숙한 조준경 중에서 가장 우수한 물건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노획한 독일 전차의 시험은 T-34의 시험 이후에 이루어졌다. 독일 전차의 조준경은 구조나 생산품질 측면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었고 쉽게 복제생산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버딘에 보내진 T-34에 탑재된 тмфд 조준경은 당시 미군 전차에 사용하던 조준경 보다는 우수했다. 이 조준경은 당시 기준에서 충분히 유용한 제품이었고 600~800미터 거리까지는 정확한 사격이 가능했다. 당시에는 이보다 먼 거리에서는 포격전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 조준경의 주요한 단점은 렌즈에 사용된 재료의 질이 낮았다는 점이다. 렌즈의 투명도가 낮고 기포가 있었다. 1941년 8월 부터 1943년 10월까지 소련에서 생산된 전차포 조준기의 품질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이 시기에는 조준경에 사용할 원재료의 생산지가 적의 손에 있었으며 숙련된 인력도 구하기 어려웠고 광학장비를 생산하는 공장들은 동부로 이동해야 했다. 조준경과 관측장비는 종종 필요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조립되고 조정되었다. 게다가 이런 비숙련 노동자들 조차 과로와 굶주림,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위해서는 극단적인 수단이 필요했다. 살아남은 광학장비 전문가들이 다시 전선에서 차출되어었고 광학장비 생산과 관리에 필요한 특수장비와 원재료는 미국으로 부터 렌드-리스를 통해 조달했다. 전쟁 후기에는 노획한 독일제 조준경을 기반으로 한 신형 조준경이 개발됐다.(T-34/85에 탑재된 тш-16 조준경이 대표적이다.) 그 결과 전쟁 후반기에는 소련 전차에 사용되는 조준경의 품질이 크게 향상됐다.

“무한궤도:

미국측은 철제 무한궤도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미국측은 북아프리카를 비롯한 전선에 투입된 미제 전차의 철제 무한궤도와 고무 무한궤도에 대한 평가를 얻기 전에는 고무 궤도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미국측의 관점에서 소련 전차의 궤도는 너무 얇게 만들어졌다는게 단점이다. 아군 전차의 궤도는  소화기의 사격과 지뢰에 쉽게 파괴된다. 궤도를 연결하는 핀은 너무 조잡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사용된 철의 재질도 저질이다. 이때문에 궤도가 쉽게 마모되고 종종 끊어지기까지 한다. 처음에 미국측은 기동륜으로 궤도핀을 당겨서 기동하는 방식을 좋게 평가했지만 궤도가 마모되고 나면 궤도핀이 휘어지고 이로인해 종종 궤도 자체가 끊어지기도 했다. 미국측은 궤도를 좀더 두껍고 무겁게 만들기 위해서 장갑 두께를 조금 줄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미국측은 궤도가 넓은 점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사람이 기술적인 지식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지식이 있었다면 미제 전차도 고무 무한궤도는 사용하지 않는 다는 점을 명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철 케이블로 보강한 고무 궤도는 경장갑차량, 특히 10톤 미만의 반궤도장갑차에 주로 사용됐다.(16톤급 차량에 대해서도 고무궤도를 시험하기는 했다. Ogorkiewicz, p. 103) 셔먼 전차의 경우 궤도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 고무 패드를 단 강철 궤도를 사용하기는 했다. 궤도의 고무 패드는 기동시 소음을 줄여주고 도로 주행시 승차감을 향상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물론 모든 지형에서 그런 효과를 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련은 대부분의 도로가 비포장이었기 때문에 도로 표면의 손상을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비포장 도로에서는 전차의 접지압을 낮추는 것이 더 중요했으며 특히 야지에서 기동할때 그러했다. T-34의 무한궤도는 이런 환경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T-34가 셔먼보다 우월하다고 하겠다. T-34의 접지압은 0.72kg/cm인 반면 셔먼은 0.96kg/cm이다. 야지 기동 능력은 셔먼이 T-34보다 뒤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 공정의 문제로 인한 결함이 있었다. 주된 원인은 무한궤도 생산량이 부족한데 있었다. 무한궤도가 부족했기 때문에 우랄 전차공장은 1942년 2월 1일 부터 10일까지 생산한 전차 중에서 68%만 전선에 보낼 수 있었다. 나머지 전차는 궤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한궤도 생산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궤도 제작에는 부적합한 공장에서도 궤도를 생산해야 했다. 그 결과 생산된 무한궤도의 절반이 불량품이었다. 궤도는 자주 부러지고 궤도의 핀이 찌그러지거나 떨어져 나갔다.(Svirin, ‘Lapti’ dlya T-34, pp. 39–40) 궤도핀의 문제점은 에버딘에서 실시한 시험에서도 드러났다. 그리고 미국측은 이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T-34의 궤도는 시험중에 몇 차례 끊어졌다.


“현가장치:

T-34의 현가장치는 형편없다. 미국측은 수년전 크리스티 현가장치를 시험한 결과 이것의 채용을 단호히 거부한 바 있다. T-34의 현가장치에 사용된 스프링은 저질의 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쉽게 늘어지고 이로 인해 차체가 주저앉는 현상이 있다. KV전차의 현가장치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현가장치에 사용한 스프링의 조악한 재질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이당시에는 스프링에 사용할 철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1942년 3월 부터 1943년 5월까지 스프링에 사용할 수 있는 철을 생산할 수 없었다. 스프링 생산에 필요한 철은 렌드-리스를 통해 공급되었고 그 양도 충분치 못했다. 그래서 스프링 생산에 필요한 철은 최대한 절약해야 했다.
현가장치에 사용된 스프링의 품질이 조악했던 또 하나의 원인은 열처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T-34에 사용되는 부품들의 열처리는 장갑판의 사례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균일하지가 못했다.
또 한편으로는 현가장치의 구조 자체가 문제라는 견해도 있다. T-34는 기본적인 구조를 BT전차로 부터 이어받았다. 그리고 BT전차는 기본적인 설계를 미국의 발명가 존 월터 크리스티의 시제품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크리스티 현가장치는 장점(리턴 롤러가 필요 없어 구조가 단순하고, 대형 보기륜을 채택해 리턴 롤러가 없어도 궤도의 마찰이 적으며, 현가장치 자체가 측면 방어력을 강화함)과 단점(스프링하 중량이 무거워 주행감이 나쁘고, 차체에서 현가장치의 스프링 축이 차지하는 면적이 넓으며, 현가장치를 제외하면 측면 방어력이 낮아진다)을 가지고 있었다. 요약하면, 크리스티 현가장치는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이라 할 수 있었으며 소련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사용했다.
T-34의 현가장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완충장치가 없어서 내부 마찰이 적기 때문에 거친 지형에서 고속으로 기동시 전차의 차체가 끊임없이 요동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티 현가장치에도 완충장치는 달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단점이 현가장치 구조상의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미국측은 완충장치가 없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셔먼 전차도 완충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셔먼의 현가장치 또한 문제는 있었다. 소련과 미국의 다음 세대 전차들은 독립된 토션바 현가장치를 채택했다. 토션바 현가장치는 현대 전차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현가장치이다. KV전차는 토션바 현가장치를 채택했지만 미국측은 이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엔진:

디젤엔진은 성능이 좋고 가볍다. 전반적으로 미국 기술자와 군 관계자들은 전차에 디젤엔진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데 동의했지만 미국의 디젤엔진 생산 기업들은 모두 미해군에 납품을 하고 있기 때문에 미육군은 디젤엔진을 획득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T-34에 사용하는 디젤엔진의 단점은 공기정화기의 성능이 범죄수준이라는 점이다. 미국측은 공기정화기를 이렇게 설계한 것은 의도적인 사보타지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측에 제공한 설명서에서 공기정화기를 유조(油槽)여과장치로 칭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실험실과 야외에서 시험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a)전반적으로 공기정화기가 엔진으로 들어가는 공기를 정화하지 못하고 있다.b)공기정화기의 처리능력으로는 설사 공회전을 하고 있다 해도 엔진에 충분한 공기를 공급하지 못한다. 그결과 엔진이 충분한 출력을 낼 수 없으며 실린더로 들어간 먼지가 실린더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엔진내부 압력을 낮춰서 출력을 더욱 더 떨어트린다.  또한 기계적인 관점에서 필터는 매우 조악하게 만들어졌다. 용접을 한 부위는 심하게 손상되어 있고 이때문에 엔진오일이 새는 등의 문제가 있다. KV 전차의 필터는 조금 더 나은 수준이지만 이것 또한 마찬가지로 충분한 양의 정화된 공기를 공급하지는 못한다. 엔진 시동장치는 아주 형편없다.(출력이 낮고 신뢰성도 떨어진다.)”


당시 미국측도 셔먼 전차의 일부 형식에는 디젤엔진을 탑재했었다는 점은 언급하고 넘어가자. 디젤엔진을 탑재한 셔먼은 렌드-리스 프로그램을 통해 소련에 공급됐다. 하지만 미국은 자국군 용으로는 거의 대부분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차량만을 보급했다. 이것은 일선부대에 연료 보급을 단순화하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디젤엔진을 필요한 만큼 조달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해군의 잠수함, 소해함, 상륙정, 소형 선박에 최우선적으로 디젤엔진을 공급했다.
T-34의 공기정화기에 대한 미국측의 비판은 모두 타당하다. 기본적인 구조가 매우 원시적이었다. 공기정화에 사용되는 부품은 기본적으로 오일을 바른 망에 불과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하고 비용도 저렴했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비효율적이었다. 공기정화기의 기능은 형편없었다. 공기정화능력은 거의 전적으로 망의 간격이 얼마나 균일하냐에 달려있었다. 그리고 이 망이 최대한 균일하게 만들어졌다 해도 제때 청소하고 기름을 쳐주지 않으면 공기 중 입자의 수준이 1g/㎥만 되더라도 공기정화능력의 79.6% 밖에 발휘할 수 없었다.(TsAMO D. 1712, p. 100) 공기정화기가 처리하지 못하는 먼지는 그대로 엔진 실린더로 들어와 마모를 일으키면서 실린더 라이너와 피스톤 링을 닳아버리게 했다. 그리고 이것은 불가피하게 실린더압을 떨어트리고 오일 소모량을 늘렸다. 100호 시험공장의 기술자들은 1943~44년에 б-2엔진의 공기중 입자에 의한 오염 효과를 연구하기 위한 특별 시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공기중에서 걸러낸 먼지가 일반적인 펄라이트 주철 보다 단단한 입자로 날카롭게 뭉쳐져 엔진 오일과 뭉쳐지면 마모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어 피스톤 링과 피스톤 실린더, 흡기 밸브를 마모시킨다. 그 결과 엔진출력이 저하되고 엔진 오일과 윤활유 소모를 늘리며, 조기에 엔진 고장을 일으켜 정비 소요를 일으킨다.(Ust’yantsev and Kolmakov, p. 50)”


게다가 공기정화기가 걸러낸 먼지는 빨리 망의 구멍을 틀어막아 엔진에 충분한 공기를 공급하지 못하게 했다. 여름철에는 엔진을 10시간 가동할 때 마다 공기정화기의 망을 등유로 청소한 뒤 1~1.5리터의 항공기용 오일을 부어줘야 했다. 겨울철에는 매 20~25시간 마다 동일한 정비를 해 주어야 했다.(Tank T-34, p. 79) 게다가 먼지가 심할때는 이와 같은 정비를 매 2~3시간 마 다 해 줘야 했는데 실제 전투상황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결과 엔진의 실제 출력은 낮아지고 쉽게 고장났다. 1942년 하계 전역 당시 б-2엔진 중 일부는 먼지가 심한 날엔 10~15시간 마다 정비를 받아야 했으며 30~50시간 정도 가동하면 고장이 나 버렸다.(Ust’yantsev and Kolmakov, p. 50) 반면 1942년 생산에 들어간 미국의 M4A3 전차에 장착된 공기정화기는 400km를 주행한 뒤에 오일을 교체해 주면 충분했고 먼지가 심할 경우엔 하루에 한번 오일을 교체해 주면 되었다.(Technical Manual No. 9-759, p. 26)
에버딘의 T-34 시험에 참여한 미국 기술자들이 T-34의 공기정화기를 제대로 정비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T-34의 엔진이 고장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에버딘 시험장에는 소련에서 파견한 대표 기술자 마트베예프가 있었다. 마트베예프의 임무 중 하나는 미국 기술자들에게 T-34와 KV의 운용법 및 유지정비를 가르치는 것 이었다. 에버딘의 시험에 참여한 소련측 인원의 보고서를 보면 미국 기술자들 처럼 꼼꼼하고 철저한 정비인력은 없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T-34에 사용된 포몬Pomon식 공기정화기의 문제점은 오래 전 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미 1941년 1월 소련 전차생산기업을 대표한 말리셰프가 참석한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결정이 채택됐다. “1941년 7월 1일까지 신형 엔진 공기정화기를 개발해 탑재하도록 한다.” 하지만 공기정화기 문제에 대처할 시간이 부족했다. 99.4%의 정화능력을 가진 신형 원심형 사이클론 공기정화기는 1942년 말에 가서야 첼랴빈스크의 키로프 공장에서 생산하는 T-34에 탑재되기 시작했으며 이것 조차도 전체 생산물량에 적용되진 못했다. 신형 공기정화기 조차 먼지가 심한 환경에서는 3~4시간을 운용할 때 마다 청소하고 윤활유를 교체해야 했다.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IS 중전차 용으로 개발된 다중사이클론식 공기정화기가 등장한 뒤였다. 다중사이클론식 공기정화기는 대기중 입자수준이 3g/㎥인 환경에서도 100%의 정화능력을 보여주었으며 8시간을 가동할 때 까지 정비가 필요없었다.(TsAMO D. 1712, p. 100) 1944년 부터 이 공기정화기가 T-34/85에 탑재되기 시작했다.

출력이 낮은 시동장치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하다. 사실 디젤엔진에 시동을 걸 때는 같은 출력의 가솔린 엔진에 비해 더 높은 토크값과 크랭크샤프트 회전속도가 필요하다. 디젤엔진은 가솔린 엔진보다 두 배 높은 실린더압을 가지고 있으며, 내부의 부품들도 더 크다. 즉 훨씬 더 관성이 커야 한다. 디젤엔진의 내부 부품들은 연료와 공기를 혼합하기 위해서 더 빠르고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즉 전기식 시동장치, 특히 출력이 더 큰 것을 사용할 경우에는 한번에 엔진 시동이 걸리지 않을 경우 배터리를 더 빨리 소모할 수 밖에 없다. T-34의 경우 엔진시동을 위해 예비 공기공급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차에 컴프레서가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비 공기공급장치도 문제였다. 예비 공기공급장치는 공기를 수동으로 넣어줘야 했는데 항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T-34 이후에 개발된 소련 전차에는 컴프레서가 탑재되었고 엔진 시동을 위한 공기공급 체계가 정착되었다.

“변속기:

한마디로 형편없다.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KV 전차의 변속기를 수리하던 미국 기술자는 여기에 탑재된 변속기가 자신이 12~15년 전에 접했던 것과 동일한 구조같다는 생각을 했다. 에버딘 시험장에서는 뉴저지 린든Linden에 있는 US 휠트럭레이스US Wheel Truck Rayes사에 관련 정보를 요청했다. 이 회사에서는 A-23변속기의 설계도를 보냈다. 놀랍게도 우리측의 변속기 설계도와 A-23 변속기 설계도가 일치했다. 미국 기술자들이 충격을 받은 이유는 우리가 미국측 설계를 베꼈기 때문이 아니라 15~20년 전에 미국에선 기각된 설계안을 베꼈기 때문이었다. 미국 기술자들은 우리의 전차 설계자들이 이런 변속기를 설치한 것은 전차 조종수에 대한 비인간적 잔혹행위라고 말했다.(즉, 조작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T-34의 변속기도 매우 형편없었다. 시험 기간 중 T-34의 변속기의 기어 이빨은 모조리 뭉개졌다. 기어 이빨에 대한 화학적 분석 결과 열 처리가 매우 형편 없었으며 미국에서 기어에 적용하는 산업 기준에 미달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지적에는 약간의 혼동이 있다. 여기서 언급하는 뉴저지주의 소도시 린든에 있었던 US 휠트랙레이어사US Wheel Track Layer는 월터 크리스티의 회사였다. 일단 보고서에는 회사 명칭에 오자가 세개나 있다. 이것을 제외하면 대략 옳은 설명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KV가 아니라 크리스티가 개발한 M1940 전차의 손자뻘이라 할 수 있는 T-34의 변속기이다.  크리스티는 1930년 두 대의 시제품 전차를 소련에 판매하면서 설계도를 함께 넘겼다. 물론 T-34의 변속기는 M1940의 것에 비해 보강된 것이긴 했지만 전차의 중량이 증가한 반면 기본적인 구조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니 미국 기술자가 한눈에 크리스티 전차의 변속기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 것은 당연한 일이다.
즉 T-34의 변속기는 그야말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 이었다. 이 변속기는 전방기어가 4단 뿐이었는데 이것은 가솔린엔진에 비해 동작하는 속도 영역이 훨씬 좁은 디젤엔진을 사용하고 있는데다 중량은 더 무거운 T-34 같은 전차에는 부족했다. 이 변속기는 샤프트축을 따라 평기어가 움직이는 방식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시대착오적인 것 이었다. 당시 다른 국가에서는 자동차와 전차의 변속기에 맞물림기어와 동시클러치를 쓰는게 일반적이었다. T-34와 같은 방식의 기어를 사용하는데는 조종수의 숙련도가 중요했다. 그리고 주의해서 기어를 넣는다 해도 충격부하가 걸렸다. 그리고 리드 반경Lead-in Radius때문에 평기어에서 실제로 동작하는 부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기어를 변경하는게 불가능했다. 그 결과 주행시 기어의 이빨의 특정 부위에 부하가 집중되었다. 게다가 앞서 설명한 열처리 방식의 문제로 인해 에버딘에서 실시한 시험에서 T-34의 변속기 기어의 이빨이 쉽게 뭉개진 것 이었다. 또 미국측이 조종수에게 잔인하다고 언급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미국측은 기어 변속 방법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들을 몇가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언급하도록 하자.
1930년대와 1940년대 초에 등장한 소련제 전차들은 거의 대부분 동력계통이 취약했음을 지적해야 겠다. 소련의 전차 설계자들은 전차와 같이 복잡한 무기체계를 올바르게 만들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이 없었다. 소련 기술자들이 최대한 외국의 경험을 통해 검증된 기술을 받아들이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KV전차의 변속기도 외국 기술에 기반하고 있다는게 놀랄 일은 아니다. KV전차 개발의 중심 인물이었던 샤슈무린Николаем Федоровичем Шашмурин의 증언에 따르면 KV전차의 변속기는 수석 설계자인 두호프Никола́й Леони́дович Ду́хов가 설계했으며 이를 승인한 것은 키로프 공장의 설계주임 코틴Жозе́ф Я́ковлевич Ко́тин 이었다. 이들은 변속기의 기본적인 설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미국 잡지에서 얻었다. 이것은 20세기 초에 유명한 캐터필러사의 전신인 홀트 트랙터에서 사용했던 변속기였다. 이런 낡은 기술도 절실했던 것이다.


“조향 클러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비판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조향 클러치를 사용하지 않은지 수년이 지났으며 심지어 농업용 트랙터에도 쓰지 않는다.(전차는 말할 것도 없다.) 그 자체의 불합리함은 둘째치고 소련제 클러치는 조잡하게 만들어져있고 사용된 철의 재질도 저질이다. 이때문에 쉽게 마모되고 불순물이 드럼으로 쉽게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안정적인 조종을 담보할 수 없다.”


이 당시 클러치-브레이크 조향 시스템이 시대에 뒤떨어졌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런 단순한 디자인에 더해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클러치 방식을 사용하면 정확하게 조정을 해야 했으며 정지한 궤도의 에너지를 움직이는 궤도로 전환하는게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T-34는 선회하려면 일단 한번 멈춰야 했고, 멈추는 과정에서 발생한 에너지는 그대로 조향클러치와 궤도로 전달되어 마모가 일어나게 했다.(최고의 품질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이 결합되어 이같은 결함은 더욱 커졌다. 소련의 차세대 전차들은 클러치-브레이크 조향 시스템 대신 기어식 조향 시스템을 채택했다.

“총평:

미국측은 T-34와 KV가 매우 둔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우리 전차는 미국 전차에 비해 등판능력이 우수하다. 장갑판의 용접방식은 매우 조잡하고 엉성하다. 무전기의 경우 연구실의 환경에서는 잘 동작했다. 하지만 조립 마무리가 엉성하고 무전기를 보호할 장치가 없기 때문에 전차에 장착한 뒤에는 전차의 엔진 진동에 영향을 받아 10마일 이상이 되면 정상적인 통신이 불가능했다. 반면 무전기의 작은 크기와 무전기가 적절한 위치에 장착된 점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각 부품의 가공 수준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형편없었다. 특히 미국 기술자들은 T-34에 달린 변속기 레버의 조악한 디자인과 형편없는 조작감에 불만을 표했다. T-34와 KV 전차의 메커니즘은 앞으로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


첫 줄을 보면 다소 이상한 모순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소련 전차가 동시기 미국 전차 보다 둔하단 말인가? 1942년 당시 T-34의 톤당마력은 17.8마력이었고 셔먼의 톤당마력은 13.2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T-34의 동력체계상의 결함 때문에 엔진의 높은 출력을 완전히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T-34의 변속기는 조작하기가 매우 불편했다. 4단 기어는 평탄한 도로 위에서나 사용할 수 있었고 야지에서는 3단 기어가 최대였다. 즉 평균시속은 25km에 불과했다. 게다가 기동 중에 기어를 변경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는데 특히 2단에서 3단으로 올릴때가 그랬다. T-34의 초기 생산분의 경우 조종수가 기어를 변경할 때 46~112kg의 힘을 가해야 했으며 조종수의 오른쪽에 위치한 무전수도 기어 변경을 도와줘야 했다.(Drabkin, p. 26) 미국 기술자들은 변속기 레버를 두 명이 조작해야 한다는 점을 비판했다. 이런 불편한 조작감에 변속기 자체의 구조적 결함과 기어의 부족 때문에 기어비gear ratios가 형편 없었다. 1941월 9월 이후의 생산분에서는 3단 기어의 기어비가 변경되어 기어를 변경하는데 들어가는 힘이 31kg 정도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거친 지형에서 기동할 때는 기어를 자주 변경해야 했기 때문에 이것 조차 힘든 일 이었다. 그래서 실전에서 T-34는 주로 2단 기어로 움직였다. 즉 최대 시속이 15km 밖에 되지 않았다. 신형 5단 기어가 나온 뒤에야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 1943년 부터 5단 기어가 T-34의 일부에 장착되기 시작했다. 5단 기어를 적용한 뒤에는 야지에서 4단 기어로 기동할 수 있었으며 최고 시속도 두 배 가량 높아졌다. 반면 1단 기어로 경사진 지형을 오를 때는 구형 변속기를 쓰는 T-34라 해도 셔먼에 비해 우세한 톤당 마력비를 십분 발휘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T-34의 통신수단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1943년 이전에는 T-34에 71-тк-3 무전기가 장착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무전기는 전차가 기동할 때는 18km, 전차가 엔진을 멈추고 정지했을때는 25km라는 나쁘지 않은 수준의 교신범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전신 모드로 사용할 때나 가능한 최대 교신범위였다. 쌍방향 음성 통신을 할 때는 4km가 최대 교신범위였다. 무전기는 생산과 운용이 까다로운 장비였다. 이 무전기에는 튜닝에 필요한 조정 스위치 다섯개가 있었지만 분리감도가 형편없고 간섭보호가 잘 되지 않아  실제로는 튜닝이 매우 어려웠고 특히 기동 중 원거리 교신을 시도할 때 더욱 그랬다. 그리고 71-тк-3은 꽤 부피가 커서 대략 100리터 정도 됐다.(Makarov, p. 18)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미국 기술자들은 왜 이 무전기를 높게 평가했을까? 답은 단순하다. 에버딘에 보낸 T-34는 실전 차량에 쓰이는 것과는 다른 무전기인 9-р무전기가 탑재됐다. 당시 영국제 무전장비는 수준이 높은 것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소련은 1942년 영국제 무전기의 생산면허를 취득했다. 소련은 1942년 말 부터  9-р무전기의 대량생산을 시작했는데 이 무전기는 최대 18km까지 양방향 음성통신이 가능했다. 하지만 진정한 도약은 1944년에 일어났다. 이 해 부터는 생산되는 모든 T-34/85에 이 무전기를 탑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기껏해야 소대장, 중대장 차량과 그 이상의 상급 지휘차량에만 무전기가 장착됐다. 일반적으로 보통 전차는 송신기는 커녕 수신기도 없었다.  T-34의 전차장이 포수를 겸했고 관측 시야도 불량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전장에서 전차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소련 전차의 각 부품이 얼마나 저질이었는가는 앞서 언급했다. 그리고 1942년에는 특히 그 수준이 최악이었는데 여기에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다. 수많은 설계자와 기술자, 노동자들의 헤아릴 수 없는 노력으로 T-34의 품질은 꾸준히 향상됐다. 전쟁이 끝날 무렵 새로 생산된 T-34는 500km 이상을 주행할 수 있었고 이것은 전쟁 초기에 생산된 차량들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 이었다. 렌드-리스로 지원된 장비와 기술, 공작기계와 설비, 물자들도 큰 기여를 했다. 또한 전쟁 말기에는 소련 전차병들도 전차를 관리하는데 더 큰 주의를 기울였다.


“결론 및 제안:

1. T-34와 KV의 공기정화기는 즉시 정화능력과 효율성이 높은 것으로 교체해야 한다. 
2. 장갑판을 가공하는 기술을 변경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같은 두께의 장갑으로 더 좋은 방탄 성능을 강화하거나 장갑의 두께를 줄여서 전차의 중량과 생산에 소요되는 강철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3. 무한궤도를 더 무겁게 만들어야 한다. 
4. 현재의 구식 변속기를 미국식 변속기로 교체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전차의 기동력이 향상될 것이다. 
5. 조향 클러치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6. 작은 푸품들의 디자인을 단순화하고 신뢰성을 높이는 한편 조정이 필요한 요소들은 최대한 줄여야 한다. 
7. 미제 전차와 소련제 전차를 비교했을때, 후자를 조종하는게 훨씬 더 힘들다. 소련군 전차병이 기동 중에 기어를 변경할 때는 훨씬 더 큰 숙련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클러치식 조향장치를 사용하고, 자주 고장나는 부품을 고치면서  전차가 가동 가능하도록 유지하는데는 더 풍부한 경험이 필요하다. 즉 소련의 경우 전차병의 훈련에 필요한 요소가 많다. 
8. 에버딘에서 시험한 표본으로 미루어 보면 소련측은 전차를 생산하면서 가공, 마무리, 그리고 작은 부품의 기술을 소홀히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때문에 전체적으로 잘 설계된 전차들의 모든 장점이 상쇄되고 있다. 
9. 소련 전차들은 디젤 엔진 탑재, 훌륭한 외형, 두꺼운 장갑, 성능 좋고 안정성 높은 무장, 무한궤도의 훌륭한 디자인 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조종성과 기동성, 화력과 속력, 기계적 신뢰성, 그리고 조작의 편리성 측면에서 미국제 전차보다 뒤떨어져 있다.”


결론에서 제기한 문제들은 이미 언급한 것 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소련 기술자들에겐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미국측이 지적한 T-34의 문제점은 오래 전 부터 잘 알려진 것 들이었다. 1940년 11월 6일 국방인민위원 티모센코는 국방인민위원장 보로실로프에게 보낸 서한에서 T-34의 설계 변경안을 아홉개 제시했다. 여기에는 승무원 숫자를 늘릴 것, 시야를 개선할 것, 통신 수단을 개선할 것, 신뢰성을 높일것, 현가장치를 토션바 형식으로 바꿀 것, 변속기를 유성기어식으로 바꿀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Zheltov et al., Neizvestnyi T-34, pp. 28-29) 티모센코가 이 편지를 쓴 이유는 T-34의 시제차량과 초기 양산차량을 시험한 결과 때문이었다. 티모센코가 지적한 문제점은 미국측의 지적 사항과도 대부분 일치한다. 이때문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해결될 때 까지 T-34를 배치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중단됐으며 T-34M형(A-43)의 개발이 시작됐다. T-34M형은 여러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이었다. 변속기의 기어를 두배로 늘리고, 도션바 현가장치를 도입하며, 포탑링의 직경을 1,700mm로 늘리고, 승무원에 사수를 추가해 전차장의 업무를 줄이는 것 등이었다. 또한 전차장 큐폴라를 설치하는 것도 포함됐다. T-34를 대신해 T-34M의 생산을 시작할 예정 시기는 1942년 1월 이었다. 하지만 전쟁 발발로 이 모든 것이 무산됐다.(Svirin, Esli by voyna povremenila, p. 3)
전례 없는 규모의 격렬한 전쟁으로 막대한 양의 군장비가 소모되고 손실도 엄청났기 때문에 평화시에는 결코 하지 않을 완전히 다른 해결 방식이 필요했다. 수량도 적고 생산 일정이 늦춰지더라도 신형 전차를 도입할 것이냐, 아니면 각종 결함을 고치지 못하더라도 당장 생산 가능한 전차를 최대한 많이 생산할 것이냐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는 명백했다. 일선에서는 앞으로 더 좋은 전차가 나올 때 까지 기다리면서 버틸 여유가 없었다. 전선의 병사들에게는 적에 맞설 충분한 양의 무기 없이 더 나은 미래가 있을 수 없었다. 잔혹한 소모전이 이어지면서 연합국에 비해 인력과 자원이 부족했던 독일은 승리할 가능성이 사라져갔다. 무기 생산량에서 연합국과 경쟁할 수 없었던 독일이 무기의 질을 향상시키고 기적의 신무기를 만들어서 전세를 뒤집어 보려고 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기갑 분야에서는 티거와 판터가 그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이 두차종의 압도적인 전투력으로도 적은 생산량을 벌충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두 차종도 나름대로의 결함이 있었다. 독일은 티거와 판터의 품질을 향상시킬 여유가 없었고 이 전차들은 기술적으로 불완전한 상태에서 전장에 투입되어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 마찬가지로 무기 생산에 있어 숫자에 중점을 뒀다. 하지만 미국은 훨씬 우수한 무기를 만들 기술력이 있었다. 미제 전차 중 가장 많은 숫자가 생산된 셔먼의 경우 1942년 부터 1945년 사이에 T-34와 비슷한 숫자가 생산됐다. 하지만 평균적인 고장율을 고려하면 셔먼의 생산대수가 T-34의 여섯배는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43년에 들어와 셔먼이 독일 전차에 비해 화력면에서 뒤처진다는 점이 명백해 졌을때 미국측은 반쪽짜리 해결책을 내놓았다. 미국은 1944년 부터 셔먼전차에 구식 75mm포 보다 훨씬 포신이 긴,  신형의 보다 강력한 75mm포를 탑재했으며 여기에 포구초속이 높은 HVAP탄을 개발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 전차병들은 이전 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 독일 전차와 교전이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거와 판터는 셔먼을 더 먼 거리에서 격파할 수 있었으며 셔먼의 주포는 이들에 무력했다. 셔먼에 신형 90mm포를 탑재하고, 여기에 쾨니히스티거의 장포신 88mm포의 장갑관통력과 비견할만 HVAP탄을 사용한다면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셔먼의 포탑을 대형화 하면 기술적으로도 가능했지만 셔먼의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서 채택하지 않았다.(Hunnicutt, p. 212) 그 결과 대전 말기의 퍼싱 전차에 이르러서야 미국 전차는 90mm 전차포를 탑재할 수 있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T-34의 기술적 결함, 특히 낮은 신뢰성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그 원인은 다양해서 생산공정, 기술, 그리고 설계의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공정과 기술의 문제는 전쟁 초기 소련의 어려운 현실을 감안하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수백개의 공장이 황급히 이동을 해야 했고, 생산 공정간의 연계가 무너졌으며, 수많은 인력과 물자, 자원을 상실하게 됐다. 결국 새롭고 부적합한 환경 하에서 숙련된 인력을 비롯한 생산에 필요한 여러가지 요소가 부족한 상태에서 전차 생산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 또는 단독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생산 품질을 향상시키기는 커녕 전쟁 이전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 조차 불가능해졌다. 기술이 있다 해도 적용할 도리가 없었으니 이상적인 방식으로 부터 탈선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설계는 해당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물적 기반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물적 기반을 상실하고 환경이 크게 변화했다면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든 적응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과 자원이 극도로 부족한 상황에서는 설사 최선이 아니라 할지라도 임시변통의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추우나 더우나, 눈이 오나 비가오나, 과로와 굶주림, 그리고 때로는 질병에 시달리고 적의 공습을 받으면서 까지 수만대의 무시무시한 T-34를 전선으로 보낸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T-34의 결함 중 상당수가 설계 단계에서 생겨났음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T-34는 1930년대 말에 개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를 전쟁으로 돌리고 설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된다. 이 복잡한 문제를 정리해 보자. T-34의 설계자 중에서 유명한 사람은 코시킨Михаи́л Ильи́ч Ко́шкин, 쿠체렌코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Кучере́нко, 모로조프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оро́зов등 세 명이 있다. 이들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당시 이들의 기술과 지식 수준은 어떠했으며, 이들의 작업 환경은 어떠했고, 이들은 T-34 프로젝트에 어떤 역할을 했을까?
코시킨은 1898년 야로슬라블Ярослáвль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베르들로프Свердло́в 공산 대학을 졸업한 뒤 1921년 부터 1924년까지 뱌트카에서 공산당 업무를 맡았다. 그는 비교적 늦게 엔지니어가 됐다. 그는 1934년 레닌그라드 기술대학을 졸업한 뒤 키로프 레닌그라드 실험기계공업공장에서 설계기사, 직장 당비서, 설계부주임을 맡았다. 그가 설계 업무를 한 것은 겨우 2년 반 밖에 되지 않았고 T-29 전차와 T-46-5 전차의 개발에 참여했다. 이 두 차종은 실험적인 차량이었고 대량생산에 이르지는 못했다. 1936년 12월 28일 코시킨은 하리코프의 183공장에 발령되어 제190전차설계국의 설계주임이 되었다. 그가 그곳에서 담당한 유일한 프로젝트는 BT-9 전차였는데 이 프로젝트는 목표한 성능에 미달하고 기계적 결함이 많이 취소됐다. 예를 들어 전차의 보조 롤러의 서스펜션 암은 전방을 향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후방으로 향해야 했다.(Kolomiets, pp. 15–16) 하지만 그의 동료들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설계국에서는 코시킨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그는 프로젝트의 리더로서 업무를 조율하고 추진하는데 있어 뛰어난 리더쉽을 발휘했다. 특히 당시 중요했던 것은 그가 설계국의 동료들을 정치적 탄압으로 부터 보호하고 심지어는 체포된 사람까지 석방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코시킨의 능력은 뛰어나지 않았다.
쿠체렌코 또한 매우 젊었다. 그는 1908년 1월 6일 태어났으며 T-34 개발에 참여했을 때는 갓 서른이었다. 그는 1930년 하리코프 교통공업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생산현장에서 탁월한 전문가였으며 T-34의 개발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T-34는 높은 생산성을 가지게 되었고 전시의 극도로 혹독한 상황에서도 수많은 공장에서 대량생산 되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많은 숫자가 생산된 전차가 될 수 있었다. 쿠체렌코야 말로 설계국과 생산 공장을 긴밀하게 연결해 준 인물이었다.
T-34의 설계 과정에서 생긴 수많은 공학적 문제를 해결한 것은 주로 모로조프였다. 그는 매우 유능했으며 독학으로 성공한 인물이었다. 그는 1904년 10월 29일에 태어났으며 실업학교를 졸업한 뒤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에 취직했다. 처음에 맡은 업무는 사무직이었으나 곧 도면을 복사하는 업무를 맡았고 다시 제도를 담당하게 됐다. 그는 군대에서 항공기술병으로 복무한 뒤 다시 공장으로 복귀하면서 전차설계국의 설계자가 되었다. 모로조프는 1929년 부터 1931년까지 하리코프 공학기술학교의 야간반에 다녔다. 하지만 그가 정식으로 공학 학위를 취득한 것은 1950년 이었다. 모로조프는 딕Адольф Яковлевич Дик이 이끄는 실험설계국이 담당한 BT-20전차의 동력계통의 설계를 담당했다. 그리고 곧 코시킨이 이끄는 제24설계국에서 A-20과 A-32의 설계를 담당하게 됐다. 코시킨이 장기간 병가를 내면서 모로조프가 그를 대행하게 됐고, 1940년 9월 26일 코시킨이 사망하자 곧 제183공장의 설계주임이 되었다. 모로조프가 뛰어난 재능과 탁월한 업무 능력을 갖췄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당시 그의 지식과 경험 부족을 만회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전쟁 기간 중 소련 기갑부대의 중추였던 T-34의 개발에 이토록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투입됐을까? 사실 당시에는 T-34가 그토록 중요한 전차가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했다. 당시 소련 최고의 전차 기술자들은 레닌그라드에 모여있었다. 바릐코프Николай Всеволодович Барыков, 긴즈부르그Семё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Ги́нзбург, 두호프, 코틴, 트로야노프Лев Сергеевич Троянов, 체이츠, 그리고 다른 수많은 재능넘치고, 훌륭한 교육을 받고, 경험이 풍부한 기술자들은 레닌그라드에 있었다. 하리코프에도 소규모의 지역 설계국이 있긴 했으나 이곳은 주로 1930년 4월 28일 미국의 크리스티로 부터 시제품을 구매한 뒤 생산면허를 취득한 BT계열 전차의 생산에 필요한 기술지원업무를 맡고 있었다.(Zheltov et al., Tanki BT , p. 4) 이 설계국은 크리스티 전차를 점진적으로 개량해 BT-2, BT-5, BT-7, BT-7M에 이르는 독자적인 모델을 내놓았다. 하지만 하리코프 설계국에서 나온 새로운 설계안들은 대부분의 경우 실험적 모델에 그치고 말았다. 신형전차의 대량생산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하리코프 기관차공장에는 유능한 전문가가 부족했다. 하리코프 전차설계국의 창시자이자 첫 번째 설계주임이었던 알렉세옌코и. н. алексеенко는 특별한 업적도 남기지 못한채 레닌그라드로 떠나버렸다. 1931년에는 알렉세옌코의 후임으로 피르소프가 부임했다. 그리고 설계집단에서 본격적인 설계국으로 개편됐다.(Veretennikov et al., pp. 23–24) 숙청으로 설계국의 인력 부족은 더욱 심해졌다. 설계국은 숙청 기간 중 시도 때도 없이 직원들이 체포됐으며 단순한 실수나 착오만으로 사보타지 혐의자가 되었다. 1937년의 대숙청으로 공장의 임원이었던 본다렌코와 설계국장이자 가장 유능하고 경험많은 기술자였던 피르소프 본인도 체포됐다.
1937년 8월 제183공장은 신형의 무한궤도/바퀴 겸용 전차를 개발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중요한 임무를 위해서 하리코프 설계국에 유능한 인원을 보강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으며 딕이 이끄는 기계화-차량화 학교 졸업생들이 대거 충원됐다. 딕이 이끌고 온 집단을 중심으로 하리코프 공장에서 가장 유능한 설계자들이 모여들었다. 딕은 이들을 공장의 기사장 직속의 독립설계국으로 배치했는데 이 독립설계국은 당시 설계주임이었던 코시킨을 제외하고 있었다. BT-20으로 명명된 이 전차의 예비 설계안은 한달 반 가량 지연됐다.누군가가 딕에 대한 익명의 투서를 써서 딕은 체포되었다. 딕은 정부가 부여한 과업을 이행하는 것을 막고 기한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10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독립설계국은 해체됐다.
BT-20을 완성하는 임무는 코시킨에게 주어졌다. 코시킨은 이를 위해 새로운 특별설계국을 만들었는데 이 설계국은 나중에 кб-24로 개칭됐다. 코시킨의 새 설계국은 새로운 기술자를 충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무한궤도와 바퀴주행 겸용이었던 BT-20 개발 뿐만 아니라 BT-20의 완전 궤도식 버전도 개발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코시킨과 그의 동료들은 정해진 시간 내에 개발을 완수하지 못할 경우 무슨 일이 닥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설계안을 변경하는 대신 BT 계열 전차에 적용된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하리코프 공장의 기술자들이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기도 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전차를 개발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 이었다.
그 결과 T-34는 근본적으로 BT-7M과 차체와 포탑 형태, 장갑의 두께, 무장, 그리고 완전 궤도식이라는 점만 달라졌을 뿐이었다. T-34의 기본적인 부품과 조립 공정은 근본적으로 BT-7M을 보강한 것 뿐 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BT전차의 시제품은 크리스티 전차였다. 이것은 1920년대에 개발됐으며 중량은 BT-7M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그런데 T-34는 BT-7M 보다 두 배는 무거웠다. T-34에 4단 변속기를 적용한 결과가 어떠했는가는 앞서 설명했다. 최종구동장치도 BT-7M을 그대로 베낀 것 이었다. 하리코프 설계국의 업무는  기어비 5.7의 대형감속기어를 설계하는 것 이었다. 하리코프 공장의 생산 기술 사이 이 감속기어에는 일반적인 평기어를 쓸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높은 기어비를 얻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중감속기어가 필요했다. 하지만 T-34의 최종구동장치는 BT 전차의 일단감속기어를 답습한 것 이었다. 설계상의 용적에 이것을 넣기 위해서 리드 기어의 톱니 갯수를 10개로 줄여야 했다. 하지만 기계공학을 전공한 학생이라면 기어의 톱니가 17개 이하가 돼서는 안된다는 것 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T-34의 최종구동장치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부품인 드라이빙 기어가 약해진 것이다. 그 결과 T-34의 모든 부품 중에서 최종구동장치가 가장 신뢰성 낮은 부분이 되었다. 1942년 1월 1일 부터 8월 25일 사이에만 T-34의 최종구동장치 파손이 188건이나 보고되었다. 게다가 이런 현상은 생산 공장을 가리지 않고 나타났다.(Zheltov et al., Neizvestnyi T-34, p. 52) 그 원인은 단지 생산상의 오류가 아니라 설계 단계 부터의 결함이었던 것이다.

T-34 개발자들의 지식과 경험 부족은 그들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불운이었다 하겠다. 하지만 이들은 더 열심히 일하고 자신들의 실수로 부터 배워나갔다. 특히 모로조프가 그러했다. 그가 설계한 차기작인 T-44는 T-34에 비해 훨씬 진보했지만 여전히 신뢰성과 안정성이 부족했다. 결국 T-44는 공식적으로 육군에 채용되긴 했으나 사실상 대량생산에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곧 이어 등장한 차기작 T-54는 당시 기준으로 모든 면에서 탁월한 전투차량이었다. 강력하고 생산단가도 저렴하며 신뢰성도 높았다. T-54/55가 수많은 개량을 거치며 세계 각국에서 10만대 이상 생산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생산기록은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 무렵 모로조프와 그의 설계국은 전쟁 기간 중 T-34와 다른 여러 차종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경험을 쌓았다. 이들의 경험에는 밝은 면 뿐만 아니라 어두운 면도 있었지만 하나 같이 유익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모로조프의 설계국이 제2차대전 기간 중 귀중한 경험을 쌓고 많은 것을 배웠다 해도 T-54를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것 처럼 신뢰성 있는 전차로 만들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T-54의 첫 시제품은 1945년 3월에 시험을 받았지만 궁극적으로 대량생산에 들어간 것은 1949년이었다. 불행하게도 T-34의 설계자들은 충분한 경험과 기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부문에서는 성공적이었다. T-34의 차체 자체는 추가적인 중량을 감당할 수 있었고 크기도 컸기 때문에 내부에 들어가는 개별적인 구성품을 개량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간단하고 시간도 적게 걸렸으며 차체를 재설계 할 필요도 없는데다가 생산 속도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예를 들어 5단 변속기는 4단 변속기와 완벽하게 호환됐다. T-34/85는 T-34의 최초 새산분 보다 20%나 더 무거웠지만 구동계통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며 성능 감소도 제한적이었다.T-34는 설계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급격히 변화하는 전장의 요구를 반영하면서 전쟁 전 기간 동안 생산될 수 있었다.
T-34의 단순한 설계가 전쟁 당시 소련의 제한적인 공업 생산 능력에 적합했다는 것은 앞서 언급했다. 이 점은 전차의 생산 뿐만 아니라 야전에서의 정비에도 적용됐다. 또 다른 장점은 전차의 조종이 쉬웠다는 점이다. 이 덕분에 T-34의 대량생산에 맞춰 전차병을 양성하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또한 T-34를 조종하는데 필요한 수준은 당시 붉은군대의 인적자원의 교육 및 기술 수준과도 대략 합치했다.
평시와 전시에 적용되는 군용차량의 성능, 신뢰성, 내구성 기준에 차이가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평시에는 장기간 사용할 수 있는 차량이 높게 평가받지만 전시에는 단지 소모성 물자에 불과하다. 군용차량의 질적 수준 또한 예상되는 수명주기내에서 용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만 맞추면 된다. 하지만 노동력과 중요한 자원을 절약하기 위해서 생산성은 높아야 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이렇게 생산된 전차라도 평시에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신뢰성과 내구성을 높이기 위한 현대화 개수를 받아야 한다. 소련에서 전후에 실시한 차량 현대화 프로그램은 укн8)이라고 한다. 1945년 부터 1966년 까지 제2차대전 기간 동안 생산된 T-34를 비롯한 수천대의 전차와 자주포가 이 프로그램의 적용을 받았다.(Svirin, Tankovaya mosch SSSR, p. 566) 그 결과 T-34의 보증 주행거리는 단지 제원표 상이 아니라 실제로 2,000km에 달하게 됐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T-34의 수명은 늘어났으며 그 덕분에 수천대의 대체용 차량이 필요없어져 막대한 자원을 절약할 수 있었다.
결론을 대신해 T-34의 시험에 참여한 에버딘 시험장의 기술자들이 작성한 공식 보고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겠다. 미국 기술자들은 T-34의 결함을 지적하면서도 그 장점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았다.


“T-34 중형전차는 기본적으로 훌룽한 차량이다. 숙련되지 않은 인력으로도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이 전차의 돋보이는 장점은 다음과 같다. 

1.외형이 나쁘지 않고 차고가 낮다.2.설계가 단순하다.3.야지 주행 성능이 우수하다. 

차체와 포탑 장갑에 경사장갑을 채택해 방어력이 탁월하다.”(Bakhmetov et al., pp. 25–26)


이와 같은 높은 평가는 비슷한 시기 영국 기술자들이 T-34를 시험한 뒤 내린 평가와도 일치한다. 영국에 보내진 T-34를 연구한 뒤 작성한 기초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 전차의 설계는 효율적인 전차의 기본 요소, 전쟁의 요구사항, 소련군 병사의 특성, 그리고 러시아의 환경과 가용한 생산시설을 냉철하게 판단한 결과물이다. 소련의 공업화가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 졌으며 대부분의 공업지대가 적에게 점령되어 공장 설비와 노동력의 다수를 잃고 나머지를 황급히 철수시켜야 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성능의 전차를 대량으로 생산했다는 것은 최고의 공업적 성취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Preliminary Report 20 II)


소련의 對히틀러 동맹국이 내린 이 평가에 대해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주      석
1) ‘еще раз о T-34’를 해롤드 오렌스타인이 번역했다. 보리스 카발레르치크는 1957년 과거 소련령이었고 현재는 벨라루스 공화국에 속한 고멜에서 태어났다. 그는 벨라루스 기술대학을 졸업한 뒤 민스크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는 대학에서 군사교육을 이수한 뒤 군사학교에서 추가 교육을 받고 최종적으로 예비역 전차소대장이 되었다. 카발레르치크는 1989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현재는 뉴저지에 거주하면서 ECI 테크놀로지의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다.
2) 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по делам литературы и издательств
3) KV전차의 명칭은 소련방원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의 이름을 딴 것이다.
4) 러시아어로 용접은 сва́рка라고 한다. 그래서 이 철에는 с라는 기호가 붙은 것이다.
5) 나중에 T-34의 보우빔은 압연강판으로 만들게 됐다.
6) 즉, 장갑재가 훨씬 깨지기 쉬워졌다는 뜻이다.
7) 영어 번역본은 The elongation and reduction of area임.
8)이것은 ’설계상의 결함 제거(устранение конструктивных  недоста́тков)의 약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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