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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6일 월요일

Wolfram von Richthofen : Master of the German Air War

독일공군에 관한 책은 세기 힘들정도로 많지만 독일공군의 장군을 다룬 평전은 그다지 많지가 않습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저작으로는 악명높은 데이빗 어빙David Irving이 집필한 독일공군원수 밀히Erhard Milch의 전기인 The Rise and Fall of the Luftwaffe : The Life of Field Marshal Erhard Milch 정도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2008년에 출간된 제임스 코럼James S. Corum의 리히토펜 전기, Wolfram von Richthofen : Master of the German Air War는 독일공군 장성을 주제로 삼은 보기 드문 저작입니다. 제임스 코럼은 독일공군의 창설에서 프랑스전역 까지를 다룬 The Luftwaffe: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의 저자로서 독일공군 연구의 권위자입니다. 제임스 코럼은 기존의 저작에서도 리히토펜의 역할에 대해 많은 주의를 기울였는데 결국에는 리히토펜을 독립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확대했습니다. 그 결과물인 이 전기는 제 기준에서 본다면 상당히 좋은 저작이라고 생각됩니다. 보기 드문 독일공군 장성에 대한 전기일 뿐만아니라 상당히 균형이 잡혀있으며 독일공군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는 저작입니다.

먼저 리히토펜에 대한 군사적인 측면의 서술을 살펴보지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코럼은 기존의 연구에서 독일공군 내에서 리히토펜의 역할에 대해 다룬바있습니다. 군인으로서 리히토펜은 독일공군의 교리와 조직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개척자이자 유능한 야전지휘관으로 요약됩니다. 스페인내전에서 보여준 탁월한 지휘능력과 현대적인 공지협동작전의 기틀을 확립한 것 만으로도 리히토펜의 군사적 능력은 높게 평가받을 만 합니다. 저자는 2차대전 초기 리히토펜이 승승장구하면서 항공사단장에서 항공군단장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공군원수로 진급하여 항공군을 지휘하게 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합니다. 또한 스페인내전과 2차대전 기간 중 보여준 탁월한 군사외교가의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리히토펜은 스페인내전 당시 부터 탁월한 정치감각을 보여줬으며 2차대전 발발 뒤에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서 군사외교를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동맹국과의 관계가 원할하지 못했던 독일에서 리히토펜과 같은 인물은 독특하다 하겠습니다.
물론 리히토펜의 성공을 단순히 그의 능력만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탁월한 군사사가 답게 리히토펜이 참여한 각 전역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농업국가로서 근대적인 공군을 건설할 능력이 부족했던 폴란드, 규모는 컸으나 근대적인 항공전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던 프랑스와 소련 공군에 대한 서술은 독일공군이 어떻게 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것을 도와줍니다.
리히토펜이 살았던 시대와 그가 몸담았던 조직의 구조적인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독일이 소모전에 말려들어가면서 서서히 패배로 치닫는 과정에서는 독일군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비판합니다. 영국본토항공전에서 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정보력의 부족, 그리고 독소전쟁으로 이어지는 거시적인 전략의 결여로 인한 방향성 상실은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특히 독일육군과 마찬가지로 작전 단위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던 독일공군이 잘못된 전략으로 소모되는 과정은 이 책의 후반부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독소전쟁에서 리히토펜의 제8항공군단이 운용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독일공군이 능력이상의 임무를 담당하면서 서서히 붕괴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독일공군이 소모전으로 붕괴되는 모습은 리히토펜이 마지막으로 지휘한 지중해전역에서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리히토펜이 1940년 공군소장의 계급으로 항공사단을 지휘했을 때 1943년에 공군원수의 계급으로 항공군을 지휘했을 때 보다 더 많은 항공기를 지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전략의 결여로 인한 소모전의 결과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또한 이 저작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균형이 잘 잡혀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데이빗 어빙의 밀히 전기가 독일측의 시각을 강하게 반영해 우호적인 논조로 씌여졌다면 코럼의 리히토펜 전기는 서술대상의 과오에 대해서는 엄격한 태도를 유지합니다. 스페인내전 당시 게르니카 폭격에 대한 서술에서 이 점이 두드러집니다. 코럼은 케르니카 폭격은 민간인을 목표로 한 ‘테러폭격’이 아니었으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민간인 피해도 과장된 것임을 지적하지만 동시에 리히토펜은 군사적인 목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군인으로 스페인 민간인의 희생에는 무관심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아마 어빙과 같이 독일측에 우호적인 저자가 같은 내용을 서술했다면 게르니카 폭격이 민간인에 대한 테러공격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면서 리히토펜에 면죄부를 주려 했을 것 입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히틀러와의 관계도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저자는 리히토펜이 다른 귀족 출신들과 마찬가지로 바이마르 공화국체제 보다는 나치즘에 우호적이었으며 또한 히틀러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음을 지적합니다. 코럼은 1944년 7월 20일의 쿠데타에 보여준 태도를 통해 완고한 보수주의자로서의 리히토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리히토펜이 히틀러를 지지한 동시에 히틀러의 지지를 받는 인물로서 나치체제의 그림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비단 히틀러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프로이센 군사귀족으로서의 보수성에 대한 서술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리히토펜의 일기를 통해 드러나는 타국에 대한 우월감은 그런 사례의 하나입니다. 저자는 리히토펜의 한계를 지적함으로서 리히토펜을 입체적인 인물로 되살려내고 있습니다.

물론 약간의 오류들이 있어 다소 아쉽기는 합니다. 특히 군사용어나 인명의 오류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점 입니다. 코럼은 독일 제6군 사령관 파울루스를 계속해서 ‘폰 파울루스’라고 적고 있는데 코럼 같은 군사사가가 이런 실수를 한다는 것이 다소 의아하기까지 합니다. 마찬가지로 독일육군이나 소련군의 부대명칭을 표기는 데 있어서도 사소한 오류가 몇개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몇가지 오류에도 불구하고 리히토펜 전기는 매우 훌륭한 저작으로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일독할 가치가 충분한 책 입니다.

2011년 1월 30일 일요일

재활용

얼마전에 읽은 스페인 내전에 대한 논문에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습니다. ‘비교적’ 유사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내전이 일어날 경우 일어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가장 재미있는 부분을 직접 인용해 보겠습니다.

내전에서 어느 한 쪽이 인력자원을 상실하는 것은 다른 쪽이 인력자원을 얻을 가능성을 뜻했다. 국민파는 공화파의 포로나 투항자 중 절반 정도가 국민군에 복무해도 될 정도로 믿을 만 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재활용’은 국민군이 새로운 병력을 얻는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재활용한’ 병력은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모로코 용병들과 함께 국민군이 징병해야 할 인력을 줄일 수 있도록 했다. 국민군은 진격할 때 마다 편을 바꿀 가능성이  있는 공화군 포로를 잡아들여 여분의 인력자원을 꾸준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

1937년 9월, 국민군 총참모부는 병력과 저렴한 노동력을 더 확보하기 위해서 포로수용소장 마르틴 피닐로스(Martin Pinillos) 대령에게 “신규 노동대대의 편성을 시작하기 위해 포로의 신속한 등급분류를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분류는 다음과 같이 문자를 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국민파의 대의에 충성’하는 것으로 간주되면 A, ‘(국민파의 대의에) 적대적이고 반대하는 것이 분명한’ 것으로 간주되면 B, ‘유죄’이며 법적 처리를 받아야 하는 포로들의 경우 범죄가 ‘경미할’ 경우에는 C, ‘심각할’ 경우에는 D로 분류되었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분류에 해당되지 않으면서 그 충성심도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의심스러운 A’로 분류되었다. 이렇게 분류한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는데 공화파 포로 중 무려 50퍼센트가 A, 20퍼센트가 ‘의심스러운 A’, 20퍼센트가 B에 해당됐다. C와 D는 합쳐서 전체 포로의 10퍼센트에 불과했다. 이것은 국민군이 거의 절반에 달하는 공화군의 포로를 자기 편으로 ‘재활용’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의심스러운 A와 B로 분류된 포로는 노동대대에 배치되었다.

또한 이 통계는 공화군 병사의 상당수가 자신의 안위가 위협을 받을 때는 편을 바꿀 수 있을 만큼 충성심이 약했다는 가설을 뒷받침 한다. 스페인 내전 전시기의 통계 자료는 없지만 국민군은 1937년 말 까지 107,000명의 공화군 포로를 잡았다. (이 중에서) 거의 59,000명이 곧바로 국민군에 입대했으며 약 30,000명은 노동대대에, 거의 12,000명 정도가 재판에 회부되었다. 나머지 6,000명은 이 보고서가 작성될 때 까지 아직 분류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1937년 가을, 아스투리아스(Asturias) 전역이 끝나갈 무렵 국민파는 다음과 같은 선전을 했는데 사실 이것은 많은 공화군 포로들의 현실을 정확히 설명했다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거의 10만명의 포로를 잡았다. 아스투리아스 점령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거의 7만명의 포로를 잡았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수일 내로 우리의 군인이 될 것이다.”

데 라 시에르바(De la Cierva)는 이중에서 대략 2/3이 1938년에 국민군으로 싸웠다고 추정했으며 인민군에 있었을 때와 ‘비슷한 정도의’ 전투력을 발휘했다고 보았다.

개별 모병소(Cajas de Recluta)의 보고서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전향이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1937년 10월에서야 북쪽에 있던 공화파의 마지막 거점이 국민군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북부전역이 진행되는 동안 함락된 산탄데르(Santander)의 모병소는 이미 9월 10일 부터 업무를 시작해 얼마전 까지 공화군에 있던 병사들을 국민군 일선 부대로 보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38년 5월의 보고서를 보면 부르고스(Burgos) 한 곳 에서만 15,000명을 ‘재활용’ 했다고 한다. 1938년 7월 14일 부터 20일 까지 단 일 주일간 사라고사 한 곳에서만 ‘적군 소속이었던’ 345명을 국민군에 입대시켰다. 마찬가지로, 바야돌리드(Valladolid) 에서는 같은해 7월, 단 10일 동안 246명을 모집했다.

공화군 병사로서 국민군에 사로잡힌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정파에도 속해 있지 않고 A로 분류될 경우 아주 빠르게 편을 바꿀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예를 들어 루이스 바스티다(Luis Bastida)는 공화파 북부군에 복무하다가 1937년 말 국민군의 포로가 되었다. 바스티다는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국민군 제35 ‘메리다’ 연대에 입대해 갈리시아(Galicia)의 비고(Vigo)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우리는 사상을 바꾸지 않고도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진영, 군대, 군복, 군가, 그리고 깃발을 바꾸었다. 대단한 기록이었다.”

놀랍게도 바스티다는 국민군 소속으로 공화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아이러니하다는 듯이 기록했다.

“나는 회색 상의와 카키색 바지의 국민군 군복이 우리의 모든 과거를 덮어 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일부 병사들은 너무 빨리 편을 바꾸는 통에 황색과 적색의 왕당파 깃발에 충성을 서약할 시간도 없었다.

James Matthews, “'Our Red Soldiers': The Nationalist Army's Management of its Left-Wing Conscripts in the Spanish Civil War 1936-9”,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45 No 2(2010), pp.354~356

이미 국민국가를 형성한 단계에서 내전이 일어나면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골치 아파집니다. 약간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다시 하나의 국민으로 편입될 존재들이기 때문에 적이라는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아주 애매해 지지요. 물론 독소전쟁의 경우 처럼 다른 국가와의 전쟁에서도 ‘재활용’이 이루어 지는 경우 많긴 합니다만 내전 처럼 간단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하지요. 어찌 보면 사상적 균열이 꽤 심각한 문제이긴 합니다만 같은 사회구성원간의 내전에서는 의외로 쉽게 덮어버릴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언어와 문화가 유사한 집단에서 특별한 표시가 없다면 그 사람이 빨갱이인지 파시스트인지 구분하기란 꽤 어렵지 않겠습니까?(반대로 독일과 소련이라면 그 문제는 훨씬 쉽겠지요)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한국전쟁 당시 남한과 북한도 비슷한 일을 했습니다. 특히 인력이 부족하던 북한은 한국군 포로를 대규모로 인민군에 편입시켰지요. 한 기록에 따르면 북한은 휴전 직전 13,094명의 한국군 포로를 억류하고 이중 6,430명을 인민군에 편입시켰다고 합니다.1)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의 포로가 되었던 박진홍 교수의 회고록을 보면 포로 송환 당시 한국군에서 인민군에 편입된 포로가 침통한 표정으로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2)

어쨌든 동일한 사회적 집단, 특히 민족이라는 집단의 테두리 내에서는 균열을 완전히 봉합하지는 못하더라도 적당히 은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친인척이 과거 ‘빨갱이’나 ‘친일파’ 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 충격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스페인 내전 당시 상대방의 포로를 전향시키는 과정을 보고 우리의 과거가 겹쳐지는 것 같아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1) 션즈화/최만원 역, 『마오쩌뚱, 스탈린과 조선전쟁』(선인, 2010), 413~414쪽
2) 박진홍, 『돌아온 패자 : 북한 포로수용소, 그 긴 전장을 가로지른 33개월의 증언』(역사비평사, 2001), 177~178쪽

2009년 3월 3일 화요일

게르니카 폭격 - 독일 측의 관점

오래된 떡밥이라 많은 분이 아시는 내용입니다.

게르니카(Guernica)에 대한 콘도르군단의 공습은 민간인을 상대로 한 테러 폭격으로 파시즘의 잔악상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독일 자료를 활용한 연구들이 나오기 전 까지는 민간인에 대한 테러 폭격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아래에 인용한 ‘타임라이프 2차대전사’의 기술은 그런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월에 접어들자 내셔널리스트군은 북부로 이동하여 독일군의 위력을 빌린 폭격에 의해 이윽고 이목을 끌게 되는 작전을 개시했다. 콘도르병단은 소이탄과 고성능폭탄을 병용하는 새 전술의 연습지로서 바스크지방을 선정했다. 맨 먼저 폭격을 당한 곳은 빌바오와 그에 버금가는 공업중심지 두랑고였다.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폭격의 표적이 되고 이 내전 전체를 상징하는 도시가 된 것은 그 근처의 게르니카였다.

빌바오의 동쪽 30km에 위치하는 인구 약 7,000명의 게르니카는 가도와 철도의 분기점이었다. 도시에 있든 그 밖의 군사목표는 공화국군이 철퇴할 때 필요한 교량과 두개의 조그만 군수공장 뿐이었다.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 두 사람의 수녀가 경보의 종을 울리며 “비행기, 비행기”하고 외쳤다. 상공에 날아온 것은 하인켈 폭격기 한 편대였다. 그 가운데 1대가 몇 개인가의 250킬로 폭탄을 역전 광장에 모여있는 군중 속에 투하했다. “여자와 어린이의 일단이 하늘 높이 흩날렸다. 그들의 몸은 분쇄되고 발, 팔, 머리 따위가 산산조각이 난 채 곳곳에 흩어졌다.” 생존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도시를 습격한 8회를 넘는 비행기의 파상공격이 밤까지 계속되었다. 약 1600명이 살해되고 900명이 부상했다. 독일의 폭격기는 군수공장을 폭격하지 못했다. 그들의 폭격장치는 매우 원시적이었으므로 정확히 목표를 포착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외 제국의 공화국 지지자는 비무장 시민 대량살륙의 소식에 충격을 받고 무차별폭격을 비난했다.

로버트 T. 엘슨(Robert T. Elson), 『라이프 2차 세계대전 : 대전의 서곡』,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1, 172쪽

그러나 폭격을 주도한 콘도르 군단의 보고서 등 독일 사료를 활용한 연구들이 출간 되면서게르니카 폭격은 민간인을 목표로 한 테러폭격이 아니라 통상적인 전술폭격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게르니카에 대한 폭격을 지휘한 리히트호펜(Wolfram von Richthofen)이 게르니카를 폭격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이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르니카를 폭격해 이곳의 도로망과 철도를 마비시킨다면 바스크군이 빌바오로 철수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습니다. 게르니카 일대에 전개한 바스크군의 병력은 23개 대대에 달했고 빌바오로 통하는 주요 도로 하나가 게르니카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만약 게르니카에 주둔한 바스크군이 제때 철수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민군이 신속히 진격한다면 바스크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 것 입니다. 그리고 당시 국민군 측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게르니카에는 바스크군의 제 18 로얄라(Loyala) 대대와 사세타(Saseta)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두 대대가 게르니카에서 저항을 한다면 국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주력 부대가 게르니카를 따라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도 있을 것이었습니다.

게르니카 일대에 대한 공습은 4월 25일 시작됐습니다. 리히트호펜은 전투기 부대에 빌바오와 게르니카를 잇는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바스크군에 공습을 가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한편 국민군이 게르니카 방면으로 진격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대로 게르니카의 교통망에 타격을 가해 바스크군의 퇴각을 방해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1937년 4월 26일에 감행된 게르니카 폭격은 전술적으로 기대했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콘도르군단의 폭격기들은 주요 목표 중 하나였던 렌타리아(Rentaria) 다리를 파괴하지 못했으며 도로 및 철도에 대한 폭격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 작전에 투입된 폭격기 중 많은 수를 차지한 Ju-52는 기본적으로 수송기 였고 초보적인 조준기를 장비했기 때문에 폭격의 정확도가 매우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하루 정도 게르니카의 도로망은 마비되었으며 리히트호펜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리히트호펜은 공습이 끝난 뒤 스페인 국민군의 느린 진격속도 때문에 게르니카 공습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바스크군에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고 불쾌해 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독일 공군 지휘관들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 폭격이 정치적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독일공군 장교들은 빌바오나 바르셀로나에 대한 국민군과 이탈리아 공군의 테러 폭격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특히 국민군의 경우 자국의 국민과 산업기반을 파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문제는 게르니카 폭격의 후폭풍 이었습니다. 바스크 자치정부는 게르니카 폭격으로 1,654명이 사망하고 889명이 부상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민간인에 대한 폭격이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온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국민군이나 이탈리아군에 의한 테러 폭격이 아니라 테러 폭격에 관심 없었던 독일 콘도르군단의 전술 폭격이 테러 폭격의 대명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 측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게르니카 폭격으로 영국의 전략폭격 지지자들은 공군의 위력과 민간인에 대한 테러폭격의 효과를 더욱 확신하게 됐습니다.

최근의 연구들은 게르니카 공습으로 250명에서 3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희생된 민간인들은 콘도르군단의 목표는 아니었지만 ‘군사목표’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리히트호펜과 콘도르군단에게 면죄부가 주어질 수는 없습니다. 리히트호펜의 전기를 쓴 코럼(James S. Corum)에 따르면 리히트호펜은 냉정한 군인으로 군사작전을 감행하면서 발생할 민간인의 피해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게르니카가 함락된 뒤 게르니카를 방문한 리히트호펜은 폭격의 성과에 만족하면서 특히 250kg 폭탄의 위력이 입증된 것에 주목했다고 합니다. 물론 민간인의 피해에 대해서는 별반 언급하지 않았다는 군요.


참고문헌
로버트 T. 엘슨(Robert T. Elson), 『라이프 2차 세계대전 : 대전의 서곡』,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1)
James S. Corum, The Luftwaffe :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7)
James S. Corum, Wolfram von Richthofen : Master of the German Air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8)

2008년 9월 27일 토요일

조지 오웰의 수류탄에 대한 추억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다 보면 조지 오웰이 장비 부족에 대한 불평을 자주 늘어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내전 초반 쓸만한 정규군 부대들은 프랑코 쪽에 많이 합류했고 소련의 지원도 내전 초기에는 외국 지원병들에게 잘 들어가지 않아서 장비 부족은 꽤 심각했던 모양이더군요. 조지 오웰의 무기에 대한 불평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사제 수류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철모도, 총검도 없었다. 리볼버나 피스톨도 없었다. 폭탄은 다섯 명이나 열 명에 하나 씩이었다. 이 시기에 사용되던 폭탄은 ‘F.A.I.수류탄’으로 알려진 무시무시한 것 이었다. 전쟁 초기에 무정부주의자들이 생산하던 것 이었다. 이것은 원리상으로는 달걀 모양의 밀스 수류탄과 같았으나, 레버가 핀이 아닌 테이프 조각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테이프를 떼는 즉시 최대한 빠른 속도로 수류탄을 던져야 했다.

이 수류탄을 “공평하다”고들 했다. 맞은 사람과 던진 사람을 다 죽였기 때문이다.

다른 종류도 몇 가지 있었는데, ‘F.A.I. 수류탄’보다 더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약간은 – 그러니까 던지는 사람에게 – 덜 위험할 것 같았다. 그나마 던질 만한 수류탄을 보게 된 것은 (1937년) 3월 말이 지나서였다.

조지 오웰/정영목 옮김,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2001, 50쪽

※F.A.I.는 1927년에 조직된 무정부주의 단체입니다. Federación Anarquista Ibérica의 약자이죠.

예전에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에서 수류탄 개발에 참여하셨던 원로 기술자 한 분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찾아 뵈었을 무렵에는 화장품 회사 고문으로 계시면서 가끔 글을 쓰고 계셨지요. 그 분 말씀이 수류탄을 개발하면서 시험할 사람이 따로 없다 보니 기술자들이 직접 수류탄 시제품 시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귀한 기술자들이 어이없게 희생된 사례가 꽤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 분의 증언을 들으면서 수류탄도 의외로 만들기 어려운 물건이구나 싶었는데 뒤에 조지 오웰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그 분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17세기 말에 원시적 수류탄이 사용된 뒤 요즘과 같은 모양을 가지기 까지 거의 300년 정도가 걸렸으니 지금 보면 참 단순한 물건 이라도 우습게 봐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2007년 9월 24일 월요일

스페인 내전당시 공화파 기갑부대의 작전

소련은 스페인 내전에 약 3,000명의 지원병과 항공기 648~806대, 전차 331~362대, 장갑차 60~120대, 야포 1,044~1,186문, 기관총 15,113~20,486정, 소총 414,645~497,813정, 폭탄 110,000발, 수류탄 500,000발, 포탄 3,400,000발, 소화기 탄약 862,000,000발 등을 지원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전이 진행되던 기간 중 상당 부분은 프랑스와의 국경이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화파에 대한 지원에서 소련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기갑장비에 있어서는 소련의 지원이 더욱 절대적이었습니다. 1930년대 중반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어중간한 국력의 국가들은 1920년대에 도입한 프랑스제 르노 FT-17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는데 이 점은 스페인도 마찬가지여서 독일의 1호전차, 이탈리아의 CV-33, 그리고 소련의 T-26이 대량으로 지원되기 전 까지는 양군 모두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소련항공기들이 전쟁 초반을 제외하면 독일측에 별다른 인상을 끼치지 못한 것과 달리 전차는 독일이 지원한 1호전차가 시원찮은 물건이었던 덕분에 전쟁 말기까지도 상당한 활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에 대한 군수물자 지원은 НКВД내의 X과(X는 스페인을 의미)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련의 지원은 1936년 가을과 1937년 초에 집중되었습니다. 1937년 하반기 부터는 공화파가 가진 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더 이상의 지원은 별로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자본주의자 같은 반응을 보였다지요.

소련이 지원한 기갑장비와 인력이 스페인으로 처음 보내진 것은 1936년 9월로 여기에는 50대의 T-26과 전차병 51명, 장갑차 30대, 그리고 탄약 및 유류가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10월 12월에 카르타헤나에 도착, 곧 바로 전선으로 향했습니다. 이어서 10월 말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T-26 111대와 전차병 330명을 파견하자고 건의, 승인을 받습니다. 그리고 스페인 주재 소련무관 고레프(Владимир Горев)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은 전차병 양성을 위해 아르헤나(Archena)에 기갑학교를 창설합니다. 이 학교의 교장은 크리보세인(Семён кривошеин) 여단지휘관이 임명되었습니다. 원래 소련 전차병들은 훈련 임무에만 투입될 계획이었지만 마드리드가 압박 받는 상황 때문에 전차병을 양성할 시간이 충분치 못했습니다. 결국 고레프는 소련 전차병들이 직접 전차를 운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요.(여기에 약간의 스페인 전차병이 합류합니다.)

T-26의 성능은 의심할 나위 없이 1호전차나 CV-33에 비해 월등했지만 보전협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다는 점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전차병은 러시아인인데 보병은 스페인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 통할리가 없었겠지요. 소련이 스페인에 파견한 인력 중 통역병이 204명이나 됐지만 이들이 모든 부대와 전차 한대마다 일일이 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런 문제점은 월등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소련제 전차들이 큰 피해를 입는 원인이 되지요.
T-26이 처음 투입된 1936년 10월 27~29일의 세세냐(Sesena) 전투는 이런 문제점을 확실히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는 소련인 노박(А. Новак)이 지휘하는 BA-3 장갑차 6대와 T-26 7대로 편성된 기갑집단과 스페인인으로 구성된 1개 전차소대, 그리고 아르만(Паул Арман)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이 지휘하는 1개 중대 등 3개의 전차부대가 투입되었습니다. 전투 초기에 아르만은 전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공격에 긍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마자 아르만이 지휘하는 15대의 T-26중 세대가 대전차지뢰로 기동불능이 되었고 또 한대의 전차는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세세냐 외곽의 한 마을로 진입해 화염병을 맞고 격파됐습니다.(이게 스페인 내전에서 최초로 화염병에 의해 전차가 격파된 사례라고 합니다.) 아르만의 중대는 마을을 돌파한 뒤 프랑코군의 야포 1개 포대를 유린했습니다. 이때 3대의 CV-33이 반격해 왔지만 1대가 T-26에 의해 격파되고 한대는 T-26에 들이 받혀 전복(!!!)돼 버립니다. 아르만은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공격을 계속했지만 두 대가 더 화염병에 의해 격파되고 세대는 야포에 의해 파괴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전투는 마드리드가 압박받던 상황에서 공화파의 사기를 높이는 데는 성공적이었지만 내용면에서는 불합격이었습니다. 특히 보전협동이 되지 않으니 전차들이 적 보병을 몰아내고 특정 지점을 점령하더라도 적이 반격을 해 올 경우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프랑코군은 1938년까지 30개 대전차포 중대(중대당 대전차포 6문)를 편성했는데 이것은 1937~1938년 전역에서 공화파의 전차부대를 저지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이와 함께 지상전에 전용된 88mm 대공포도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세세냐 전투 이후 공화파는 전차와 장갑차를 집결시켜 T-26 48대와 BA-3 장갑차 9대로 대대규모의 기갑전력(아랑훼즈Aranjuez 집단)을 만들기는 했지만 실제 운용은 중대 단위로 보병에 분산 배치되는 방식이 계속됐습니다. 당연히 기갑부대의 집중운용에 따른 파괴력을 확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랑훼즈 집단은 11월부터 12월에 걸쳐 마드리드를 둘러싼 공방전에 투입됐습니다. 공화파는 전쟁 이전에 편성된 제 1전차연대(FT-17 장비) 대부분을 예하에 두고 있었고 제 1전차연대는 아랑훼즈 집단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전술적 미숙함과 기계 자체의 신뢰성 미달로 전차의 손실은 매우 컸습니다. 1936년에 지원된 전차 중 52대가 1937년 2월까지 상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937년 9월에 이르면 전차 손실은 170대에 달했습니다.(이때 까지 지원된 전차는 T-26 256대) 흔히 생각하는 것 과는 달리 소련전차들의 기계적 신뢰성은 형편없었는데 T-26의 경우 150시간 마다 정비를 받아야 했으며 600시간 뒤에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습니다.(소련전차의 기계적 신뢰성은 T-34 초기 생산분 까지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저질 연료에다 끊임없는 격전으로 전차부대를 후방으로 돌려 정비할 시간이 없었으니 손실은 지속적으로 높아만 갔습니다. 여기다가 보충도 간헐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전차의 집중운용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아르만의 전차중대는 800시간이 넘도록 정비를 받지 못해 살아남은 전차들도 상당수가 고장으로 운용 불능이 됐습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차병 제 2진을 파견합니다. 제 2진은 전차병 및 정비병 200명으로 벨로루시 군관구의 제 4 독립전차여단에서 차출한 병력이었고 지휘관은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 Павлов) 여단지휘관이었습니다. 소련정부는 기존에 파견된 병력을 파블로프의 부대에 합류시켜 기갑여단으로 개편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갑여단의 편성은 난항을 겪었습니다. 먼저 전차의 손실을 막기 위해 경험이 부족한 스페인 전차병은 포탑에 배치하고 숙련도가 높은 소련 전차병이 조종수를 맡는 식으로 여단이 편성되었는데 러시아 전차병들이 모두 조종수는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전차의 손실률이 높아 여단은 편제(96대) 미달이었습니다.

새로 편성된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초부터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이 여단은 크리보세인이 지휘하는 1대대와 페트로프(М. П. Петров) 대대지휘관이 지휘하는 2대대로 편성되었는데 신규편성인 2대대의 전투력이 1대대 보다는 양호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전투에 투입될 당시 47대의 전차를 보유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11일 마드리드 서쪽에서 제 12인터내셔널 여단과 제 14인터내셔널 여단이 개시한 반격작전에 투입됐습니다.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은 스페인 사람 보다는 말이 잘 통했는지 보전협동이 원활히 이뤄져 이 반격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3일간 계속된 이 전투에서는 새로운 위협이 등장했는데 바로 독일의 37mm 대전차포 Pak 36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격파된 전차 모두가 이 37mm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7mm 대전차포는 독일이 지원한 지상장비 중 가장 효과적인 물건이었습니다.
이어서 전개된 1월 말의 Jarama강 공세는 보전협동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전차포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잘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 투입된 제 1기갑여단의 전차 60대 중 거의 40%가 격파되었고 이 중 상당수는 대전차포에 의한 것 이었습니다.

1937년 3월의 과달라야라(Guadalajara) 전투는 겨울의 전투에 비하면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주로 상대한 이탈리아군은 T-26을 장비한 부대와 수차례 교전을 벌인 뒤 전투를 회피하게 됐습니다. 이탈리아군의 주요 장비가 CV-33이었으니 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3월 18일의 반격에서 이탈리아군은 T-26을 앞세운 공화파군에게 격파당해 패주합니다. 그러나 제 1기갑여단의 손실도 커서 3월 말에는 가동 가능한 T-26이 9대로 줄어듭니다.

그러나 1937년 3월부터 5월에 걸쳐 150대의 T-26이 보충되면서 제 1기갑여단은 129대의 T-26, 43대의 BA-3 장갑차와 30대의 예비전차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1937년 7월부터 시작된 마드리드 구원 공세에 투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규모 공세에서도 37mm대전차포의 집중운용은 공화파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공세 첫날인 7월 6일 전투에서는 1문의 대전차포가 12대의 T-26을 격파하기도 했다지요. 피해는 급증해서 7월 11일이 되자 여단의 가동 전차대수는 38대로 줄어들었습니다. 이 공세에서 주공을 맡은 5군단과 18군단은 막심한 손실을 입은 끝에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결국 7월 18일부터 프랑코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마드리드 구원공세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프랑코군이 대전차포를 대량으로 운용하면서 보전협동은 더욱 어려워 졌습니다. 전차병들은 대전차포가 조준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최고 속도로 움직였는데 보병들은 이것을 도저히 따라잡을 능력이 없었던 것이죠.

1937년 여름에 소련은 마지막으로 대규모 전차부대를 지원합니다. 바로 BT-5 전차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로 이 연대는 소련이 특별히 고리키 전차학교에서 교육시킨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과 붉은군대 제 5기계화군단 소속의 전차병으로 편성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스페인인 전차병들이 충원되어 이 부대는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인 전차병의 경우 조종훈련은 충분히 받은 편이지만 소대나 중대단위의 훈련은 전혀 받지 못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BT-5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는 1937년 8월부터 진행되고 있던 사라고사 공방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임무는 제 35보병사단의 공격을 지원, 사라고사를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터내셔널 전차연대가 공격 개시 하루 전날인 10월 12일 밤에야 집결지에 도착했다는 것이고 작전 명령도 도착 직후에야 전달받았다는 점 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연대참모들은 작전지역에 대한 지형 정찰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을 개시해야 했습니다. BT-5가 고속전차라는 점 때문에 제 35보병사단장은 전차에 보병을 태워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전투 기동간에 전차에 올라탄 보병 중 상당수가 전차에서 굴러떨어져 다른 전차에 깔려 죽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지형도 전차에 불리하기 짝이 없는 관개시설이 된 경작지였습니다. 결국 첫 번째 공격에서는 탄약을 모두 소모할 정도로 교전하고도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라고사에 대한 공격 이후 공화파의 기갑부대는 별다른 보충을 받지 못 한채 지속적으로 감소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1937년까지도 상당수를 차지하던 소련인 전차병들은 전사하거나 본국으로 귀환해 스페인인들이 전차부대의 중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1937년 10월에 공화국 전차부대를 총괄하는 페랄레스(Sanchez Perales) 대령은 그때까지 살아남은 전차부대를 2개 기갑사단으로 개편했습니다. 이 “기갑사단”은 지원부대가 부족해 거의 전차로만 편성된 부대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1938년에 T-26 25대를 보낸 것을 끝으로 전차 공급을 중단했기 때문에 새로 편성된 기갑사단은 주로 자동차를 개조한 장갑차를 장비하게 됐습니다. 공화파의 기갑전력은 1938년 5월에 전차 176대와 장갑차 285대였는데 이것이 같은 해 12월에는 전차 126대와 장갑차 291대가 됩니다. 장갑차만이 겨우 보충이 가능했던 것 입니다.

공화파군의 기갑사단이 처음으로 전투에 투입된 것은 1937년 12월 15일로 이때 투입된 기갑사단은 T-26을 장비한 2개 전차대대와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잔존병력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이 사단은 작전 개시 당시 104대의 전차를 보유했는데 대부분의 전차가 기계 수명을 훨씬 초과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63대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현지 부대에서 어떻게든 수리를 해서 쓰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1938년 2월 22일까지 전선에서 활동했는데 특별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련은 스페인 내전 기간 중 전차병 351명을 지원했고 이중 53명이 전사했습니다. 소련은 이 전쟁에서 T-26과 BT-5의 성능이 현대적 대전차 병기를 견디기 어렵다고 보고 신형전차를 개발하는데 더 박차를 가했지만 대규모 전차부대의 운용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스페인 내전이 진행되는 기간 중에 대숙청이 함께 진행된 것도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소련의 전차지휘관들은 예상치 못한 실전 결과 때문에 위축되어 교훈을 도출하기 보다는 실패를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그 결과 193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발전하던 대규모 기계화부대의 편성과 교리개발이 일시적으로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실전 경험을 반영해 기계화 부대를 개혁해야 할 기계화부대지도국(Авто-бронетанковое управление)이 숙청으로 풍비박산 난 것은 가장 큰 타격이었습니다.

참고자료

Michael Alpert, "The Clash of Spanish Armies: Contrasting Ways of War in Spain, 1936~1939'", War In History, Vol.6. No.3(1999)
Mary Habeck, Storm of Steel: The Development of Armor Doctrine in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1919~1939,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G. F. Krivosheev, Soviet Casuali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 Hill Books, 1993, 1997)
Stanley G. Payne, The Spanish Civil War, The Soviet Union, And Communism, (Yale University Press, 2004)
Steven J. Zaloga, "Soviet Tank Operation in the Spanish Civil War",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12. No.3(September 1999)

2007년 3월 23일 금요일

국제여단에 대한 우울한 이야기

(전략) 국제여단 소속의 외국인 지원병들은 스페인 병사들과 유리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공식적인 방문을 제외하면 국제여단 병사들은 스페인 병사들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영국이나 미국인 병사들은 “럭키 스트라이크”를 피우지만 담배가 없어 피우지 못하는 스페인 병사들에게 자신들이 피우는 담배를 나눠줄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국제여단 병사들은 고국에서 보내오는 물품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지만 이것을 스페인 전우들과 나누지 않습니다. 외국인 지원병들에게는 출신 국가의 식품이 제공되지만 국제여단에 소속된 스페인 병사들에게 스페인 전통 음식을 제공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알바세테(Albacete)의 의무부대는 최근까지 외국인 지원병들만 치료했으며 스페인 병사들은 해당 부대에서 알아서 하라고 방관했습니다. 알바세테, 무르시아(Murcia), 알리칸테(Alicante), 베니카심(Benicassim)의 군병원은 매우 좋은 시설을 가지고 있지만 국제여단본부의 의무감 Telge 소령과 그의 부관 Franek 대위는 국제여단에서 외국인 전우들과 함께 싸운 스페인 병사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사단이 처음으로 스페인 전우들에게 외국인 지원병들과 동등한 처우를 한 것이 대단한 성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1여단장 Richard는 브루네테와 사라고사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보고하면서 외국인 지원병의 경우는 매우 자세하게 집계하고 때로는 이름까지 일일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정작 자신이 지휘하는 스페인 병사들의 피해는 얼마나 되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후 략)

1938년 1월 14일, 스베르쳅스키 대령의 보고서 중에서

Spain Betrayed : The Soviet Union in the Spanish Civil War, Yale University Press, 2001, pp453-454에서 재인용

부대 재편성 도중에 매우 유감스럽고 극도로 심각한 사고들이 발생했습니다. 본부의 요청에 따라 장교 한명과 정치위원 한명이 Trembleque로 파견됐습니다. 이 두 명이 도시에 도착하자 (Trembleque) 요새사령관과 인민전선위원회에서는 이들이 도착하기 전날에 발생한 (국제여단 병사들이 일으킨) 사고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국제여단소속의) 많은 병사들이 술에 취해서 밤새도록 도시에서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술에 취한 (국제여단) 병사들은 경비병을 강제로 무장해제 한 뒤 위협했으며 도시의 건물들을 마구 파손해 주민들이 밤새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부대 이동 과정에서 60명이 탈주했습니다.

(후 략)

1938년 2월 13일, 14혼성여단장 뒤몽 중령이 국제여단 본부에 보낸 보고서.

Spain Betrayed : The Soviet Union in the Spanish Civil War, Yale University Press, 2001, pp462-463에서 재인용

정치적 올바름을 외치는 자들의 이중성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모양입니다. 프랑코에 맞서 싸운 이들의 용기까지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렇게 깽판을 칠 요량이라면 스페인에는 뭐하러 간 것일까요?

이와 비슷하게 1820년대에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가한 서유럽 지원병들 상당수가 그리스인들을 극도로 혐오했다고 하지요.

2007년 2월 27일 화요일

[번역글][재탕] 독일공군의 육군 지원 교리 1918-1941

예전에 페리스코프의 게시판에 올렸던 글 입니다. 이 글의 저자인 코럼은 제가 개인적으로 꽤 좋아하는 군사사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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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9호에 실린 James S. Corum의 The Luftwaffe’s Army Support Doctrine, 1918~1941을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James S. Corum은 독일의 재 무장과 독일 공군의 창설 과정에 대한 두 권의 매우 훌륭한 저서를 낸 사람입니다. 아마 여기 오시는 분들께서도 James S. Corum의 저서를 접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독일 공군의 육군 지원 교리, 1918~1941

독일공군은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고도로 효과적인 근접 항공 지원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곧 전 세계는 독일 공군이 지상 작전을 지원하는 능력에 큰 충격을 받았다. 폴란드와 프랑스, 러시아 전역에서 독일 공군은 급속도로 발전한 지상군 지원 교리와 전술을 선보였다. 1941년 소련 침공은 독일의 근접 항공 지원 능력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으며 또한 지속적인 소모전으로 이 능력을 상실해 가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독일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능력은 전쟁 초기에 영국, 프랑스, 미국 공군과 육군 항공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독일 공군의 성공은 물량이나 기술력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우수한 교리와 훈련에 의한 것 이었다. 이 논문에서는 간략하게 어떤 방식으로 독일 공군이 지상 지원 교리를 발전 시켜 왔으며 근접 항공 지원의 어떠한 면이 이것을 지상전에서 결정적인 요소로 만들었는가를 살펴 보고자 한다.
오늘날 급강하 폭격기를 조종했던 독일 공군 조종사들의 회고록이나 독일 공군의 항공기와 장비를 다룬 책은 매우 많지만 상대적으로 독일 공군의 교리와 이것이 어떻게 발전해 갔는가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드물었다. 독일어로 된 저작 중에서 교리 문제를 다룬 훌륭한 서적이 소수 존재하는 실정이다. 독일 공군의 교리와 편제 발전에 대한 좋은 글로는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n Weltkrieg 제 2 권에 실린 클라우스 마이어(Klaus Meier)의 글이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지상군 지원 작전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호르스트 보크(Horst Boog)가 담당한 같은 책 제 4권에 실린 독소전 초기의 항공 작전에서는 지상 작전에 대해서 잘 서술하고 있다. 영어로 된 자료로는 The Conduct of the Air War에 실린 미첼 포겟(Michel Forget)의 “Co-operation between Air Force and Army in the French and German Air Forces during the Second World War”이 1940년 전역 당시 독일 공군의 전력과 구성에 대해서 잘 다루고 있다. 리처드 멀러(Richard Muller)의 “The German Air War in Russia”는 독일 공군의 항공 작전에 대해 훌륭한 분석을 하고 있으나 근접 항공지원 보다는 일반 폭격기 부대를 주로 다루고 있다. 윌리엄슨 머레이(Williamson Murray)는 Case Studies in the Development of Close Air Support에 실린 “The Luftwaffe Experience 1939~1941”에서 전쟁 초기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교리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나 그 분량은 적으며 또 어떤 방식으로 교리를 발전시켜 나갔는가에 대해서는 다루고 있지 않다. 사실 머레이는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교리가 대부분 1930년대 말에 발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1930년대 초기에는 특별한 사항이 없었다고 보고있다.
본 필자는 머레이의 가설과는 반대로 독일 공군의 지상군 지원 교리는 1차 대전 말기부터 독소전 발발시 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보고 있다. 비록 독일공군의 교리에서 근접 항공 지원은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으나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며 근접 항공 지원의 필요성은 독일 공군의 장비와 조직, 항공기등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논문에서 본 필자는 지상군 지원(Army Support), 근접 항공 지원(CAS, Close Air Support), 근접 저지(Close Interdiction)등의 용어를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독일 공군의 개념 정의는 비교적 모호한 편 이었으며 이러한 융통적인 면은 근접 항공 지원을 전력 폭격 만큼이나 결정적인 수단으로 만들었다.


초기 독일의 근접 항공 지원 교리

1차 대전 기간 동안 독일 육군 항공대(Luftstreitkäfte)는 매우 수준 높은 근접 항공 지원 교리와 전술을 발전 시켰다. 플랑드르의 제 4 야전군 항공대 지휘관 이었던 헬무트 뷜버그(Helmut Wilberg)대위는 중무장한 하노버와 할버슈타트 2인승 전투-정찰기를 이용하여 세계 최초의 전문적인 지상 공격기 부대를 편성했다. 지상공격기 부대는 흔히 보병(지원) 항공대(Infanterie-Flieger)로 불렸는데 이들은 조종사, 연료탱크, 엔진을 보호하기 위해서 방어력을 강화한 항공기를 이용했다. 1918년에 이르자 독일 육군 항공대는 융커스 J-1 이나 C1.I 같은 완전 금속제 항공기를 개발하여 전선에 투입했다. 두 기종 모두 5정의 기관총과 크롬-니켈 합금제인 5mm 두께의 방어 장갑을 가지고 있었으며 J-1의 경우는 폭탄 탑재량이 150kg에 달했다. 1917년 말에 이르러서는 독일 육군 항공대의 항공기중 10.5%가 지상지원 전용 항공기로서 그 당시로서는 가공할 전력이었다.
1917년 말 독일 육군 항공대는 매우 효과적인 근접 항공 지원 교리를 만들었으며 이 새로운 항공 전력의 운용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지상 공격기 부대는 중요한 지점을 선정하여 최대한 집중 운용하는 것을 강조 받았다. 1917년 11월의 깡브레 반격 작전을 예로 들면 이전투에서 지상 공격기 부대는 반격에 투입된 돌격대를 지원하여 영국군의 방어진지를 폭격하고 기총소사했다. 1918년에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이른바 공격기(Schlachtflugzeug)가 돌파 작전에서 매우 유용한 화력 지원과 충격 수단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지상 공격기 부대의 최우선 목표는 적의 요새화된 방어진지와 포병대, 지휘소, 예비대였다. 1918년 2월 육군항공대 사령관 폰 회프너(von Hoeppner)장군은 지상 공격기 부대는 미리 준비된 계획에 따라 운용하지 말고 최 전방의 지상군 지휘관들의 요청에 따라 융통성있게 운용하도록 지침을 하달했다. 1918년 1월의 공군 교범은 지상군 작전을 지원하고 지상군의 공격 훈련시 합동 훈련을 할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1918년 봄의 대공세에서 지상 공격기 부대는 육군 부대에 매우 중요한 존재임을 입증했다. 공세 초기 단계에서 주공을 맡은 3개 야전군은 총 27개 항공 중대로 편성된 지상공격기 부대의 지원을 받았다. 지상공격기 부대의 임무는 적의 방어 거점과 포병, 예비대를 타격하는 것 이었다. 그리고 상댕수의 항공 중대가 예비대로 대기하면서 육군의 지원요청이 떨어지고 30분 이내로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근접 항공 지원 교리의 발달

전쟁 직후인 1919~20년 사이에 독일 육군 항공대는 130명의 노련한 항공 지휘관과 참모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은 항공 교리를 수립할 자료 분석과 평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 계획은 헬무트 뷜버그가 주도했다. 헬무트 뷜버그는 1920년부터 1927년 까지 독일군 내에서 항공부대에 관한 고위 간부였으며 또한 그 자신이 1차 대전 당시 명성을 떨친 유능한 지상공격기 부대 지휘관 이었다. 전술 및 기술 위원회에 속했던 간부들 중에는 뒤에 독일 공군의 고위 지휘관이 된 장교들이 속해 있었는데 밀히(Erhard Milch), 슈투덴트(Kurt Student), 예쇼넥(Hans Jeschonneck), 슈페를레(Hugo Sperrle), 우데트(Ernst Udet)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직후 중점이 주어진 것은 항공력을 지상작전 지원에 사용하는 문제였다. 네 명 에서 여섯 명으로 구성된 많은 소 위원회가 정찰 항공, 근접 항공 지원, 전방 지역에 대한 차단 작전 등의 임무를 연구했다. 독일 공군의 전술 공군으로서의 성격은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경향은 1차 대전 당시 전술 항공 부대의 성과에 대한 분석과 당시 독일군 내의 항공 병과 간부인 뷜버그, 펠미, 슈투덴트, 밀히 등이 전투기 조종사나 정찰기 조종사로서 전쟁 기간 동안 지휘관 혹은 조종사로 참전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독일군이나 1930년대의 독일 공군 간부 중에서 폭격기 부대 출신은 소수에 불과했다.
독일군 내의 항공 교리는 육군 항공 참모부에 의해서 발전 되었으며 곧 간부 및 참모 본부 간부 훈련에 항공 교리 학습이 추가 되었으며 육군의 기본 작전 교리에도 포함 되었다. 육군 규정 487호 제병 합동 지휘와 전투(Führung und Gefecht der Verbundenen Waffen)에서는 항공력의 사용을 크게 강조했다. 여기서는 1차 대전 당시의 근접 항공 지원 경험을 공격 비행단(Schlachtgeschwader)이라는 장에 설명해 놓았다. 지휘관들은 항공력을 분산 운용하지 말고 집중 운용할 것을 강조 받았다. 여기에서는 지상 공격 항공 부대는 “적은 물론 아군에게도 심적 물리적 영향을 크게 미친다”고 설명했다.
독일군의 근본적인 항공 교리는 1920년부터 26년 까지 육군 사령관을 맡았던 젝트(Hans von Seeckt)상급 대장에 의해 기초가 닦였다. 젝트는 양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의 항공 교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폰 젝트는 항공 부대를 독립된 병종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항공력이 전장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 시키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적을 패배시키는 것은 적의 주력을 격멸하는 것에 의해 이루어 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항공대의 주요 임무는 두 가지의 공세 작전이었다. 첫째는 적의 항공력을 격멸하여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 이었으며 두 번째는 적 지상군에 대한 차단 임무로서 적의 철도 교통망, 창고, 군기지를 타격하는 것 이었다. 근접 항공 지원과 전장에 대한 차단 임무는 부차적 임무로 취급 되었으며 이것은 제공권을 획득한 이후에야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1920년대의 전술 교범은 젝트의 전쟁 사상을 반영하고 있었으며 항공력은 지상군 지원에 있어서 차단과 지상군 타격을 주 임무로 삼고 있었다. 폰 젝트는 항공력의 임무를 지상군과의 합동 작전의 차원에서 파악했다. 항공전의 승리는 신속히 기동하는 지상군이 적 지상군을 격파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이었다. 근접 항공 지원의 중점은 적 방어선의 돌파 지원에 맞춰졌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근접항공지원은 순전히 이론적인 연구에 머물렀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군은 러시아의 레뻬츠끄에 시험 및 전투 조종사 훈련소를 가지고 있었다. 리뻬츠끄에서 폭탄과 기관총을 사용한 지상공격 훈련은 전투기 조종사의 필수 교육 과정에 포함되었다.


전술과 기술의 발전 : 1934~1939

독일 공군은 대규모 징병과 재무장, 육군으로 부터의 간부 전입 등에 힘입어 1934년에 실질적으로 창설되었다. 지상군에 대한 항공지원의 기초적인 바탕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독일 공군의 기본적인 작전 교리는 헬무트 뷜버그가 이끄는 위원회에 의해 1934년에 작성되고 1935년에 배포된 공군 규정 제 16호, 항공전 지휘(Luftkriegführung)에 잘 나타나 있다. 규정 제 16호 에서는 항공전력을 기본적으로 제병 합동 작전의 틀 안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적의 인구 및 산업 밀집지구에 대한 전략 폭격은 중요한 임무였지만 공군의 최 우선 임무는 아니었다. 공군의 전시 주요 임무는 적 군사력의 격멸이었다. 규정 제 16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쟁에서 군의 임무는 적의 저항 의지를 분쇄하는 것 이다. 국가의 의지는 그 군대의 의지와 연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적의 군사력을 분쇄하는 것은 전쟁 수행의 근본적 목적이다.”

공군 규정 16호 에서는 지상군 지원 임무를 중요한 임무의 하나라고 정의했다.

“지상군과 해군에 대한 직접 지원은 전체적인 전쟁 전략의 틀 내에서 중요한 작전인가의 여부에 따라 수행 되어야 한다.”

독일 공군 사령부는 독일 육군과 합동으로 공군은 “결정적 지상 작전에 강력한 전력을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해야 했다.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육군의 요청과 공군의 다른 작전, 지상 작전에 투입될 전력의 비율에 대해서 연구했다. 1930년대에 공군내의 주요 논점은 공군이 근접 항공 지원 임무를 수행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근접 항공 작전에 필요한 전술과 기술을 개발하는 것 과 지휘 통제에 대한 것 이었다. 근접 항공 지원에 있어서 지휘와 통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1차 대전 당시 지상군을 지원한 항공대는 각 야전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항공부대 지휘관은 야전군 사령관의 직할로 있었다. 그러나 독일 공군은 독립된 병종이었으며 지상군의 지휘하에 움직일 수 있는 항공 부대를 지휘할 지휘 통제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 했다.그 대신 공군은 장군 한 명을 육군 총 사령부에 배속 시켜서 연락 장교의 역할을 하게 하고 육군에 소속된 정찰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공군에서 육군에 배속시킨 장교들은 공군 지휘관(Kommandeure der Luftwaffe, 약자로 Kolufts)으로 불렸다. 이들은 각 야전군과 군단에 배속된 정찰 항공대를 통제하고 육군에 배속된 항공 부대의 군수 지원 문제를 담당했다. 각 군단과 야전군에 배속된 상급 공군 장교는 해당 부대 지휘관에게 항공 작전에 관련된 참모 역할을 수행하는 임무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Kolufts는 자신의 지휘선을 통해 지상군에 대한 지원임무를 요청하는 임무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요청에 따라 육군 지휘관은 공군에 지원 요청을 했다. 그러나 Kolufts는 독자적으로 공군 지휘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근접 항공 지원 임무 수행에는 효과적이지 못 했다.
이 때문에 독일 공군 본부는 육군의 상급 제대와 공군 부대간의 직접 연락 체계를 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공군의 관점에서 볼 때 Kolufts는 육군 지휘관에게 직접 배속 되어 있어서 이런 임무를 수행하는 데는 부적합 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공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Kolufts에 더해서 독자적으로 각 지상군 부대 지원에 배속된 항공대 소속 장교에서 차출되고 공군과 연락 체계를 갖춘 연락 장교(Fliegerverbindungs Offiziere)를 배치했다. 1936년에 독일 공군 참모총장 베버(Walther Wever)대장은 연락 장교가 원거리에서도 배속된 군단과 지원 공군 부대를 연결 할 수 있는 통신팀을 배속 받도록 했다. 베버 대장은 공군 연락장교의 훈련에 매우 높은 우선 순위를 두고 실행했다.

1930년대 중반의 공군 연락 장교 체계는 근접 항공 지원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였다. 연락 장교 양성에 있어서 공군은 물론 육군의 작전 체계를 이해시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교육 이었다. 공군 참모 대학은 1930년대 중반에 육군 교리와 육군 지원을 강조하는 교육 과정을 개설했다. 1937년에 공군 참모 대학 학생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공군 지휘관, 공군 연락장교, 전선 후방 차단 임무, 방어와 공격시 지상군에 대한 근접 항공 지원 등 이었다. 1935년의 훈련 보고에서 베버 대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육군의 훈련 방식을 가능한 한 비슷하게 도입해서 공군 장교들이 육군과의 합동 작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중략) 공군은 훈련 시작부터 대규모 독립 작전이 육군의 작전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또한 경우에 따라서 육군에 대한 직접 지원을 수행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중략) 육군과의 직접적인 협력은 불필요한 행정 수요를 감소 시킬 것 이며 훈련에 참가하는 부대들에도 매우 유용할 것이다.”

육군과 공군과의 협력은 독일 공군내에 지상군 지원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군의 장교 훈련 규정은 공군 장교가 타 병종의 훈련과 워 게임에 참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공군 장교는 육군과 해군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이들의 작전 수행 방식을 익힐 것이 강조 되었다. 육군과 공군의 합동 작전은 전쟁 발발 이전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육군과 공군은 근접 항공 지원의 기초를 익히는데 중점을 두었다. 1937년 가을의 기동훈련에는 차단 작전과 근접 항공 지원이 연습 되었다. 새로이 창설된 기갑 부대는 육군의 다른 병과 보다 공군과의 합동 작전을 더 강조했다. 1936년에 기갑 부대 사령관(Kommandeur der Panzertruppen)이었던 루츠(Oswald Lutz)대장은 기갑 사단 지휘관 들에게 공군과의 합동 작전, 특히 무전기 사용과 정찰 훈련을 강조했다. 루츠는 정찰기 조종사들이 효과적인 전술적 보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보았다. 루츠는 성능이 충분한 항공기만 갖춰 진다면 정찰 임무를 훈련 받은 조종사가 훌륭한 지상 공격기 조종사도 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루츠는 또한 항공관구(Luftgau)사령부에 육군 참모를 둘 것을 요구 하기도 했다.


장비의 도입

공군은 항공 지원 교리와 전술, 훈련 등을 발전 시키는 동안 교리에 적합한 항공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흔히 독일 공군에 대해서 범하고 있는 오류 중에는 슈투카가 에른스트 우데트의 개인적인 선호에 의해서 채택되었다고 믿는 것이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우데트는 1936년에 독일 공군 기술감이 되었는데 그는 이전에 두 대의 미제 커티스 호크 급강하 폭격기(XF-11 C-2)를 조종해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커티스 호크에 매우 매료되어 급강하 폭격기의 도입을 강력히 주장했다는 것이다. 우데트는 이 때문에 그의 전임자인 리히토펜(Wolfram von Richthofen)이 급강하 폭격기의 도입을 중단 시킨 것에 대해 의견 충돌을 보였다는 것이 이 주장의 골자이다.
실제로 리히토펜과 우데트는 급강하 폭격기에 대해서 의견 대립을 보였으나 육군과 공군 참모본부는 그 이전부터 급강하 폭격기가 목표물에 대한 정밀 타격에 크게 효과적이라는 점 때문에 이의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1928년 초에 융커스 J u-47 단엽 전투기는 지상 공격기와 급강하 폭격에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 받았다. 1930년에 항공 참모부는 경 급강하 폭격기와 중 급강하 폭격기의 성능에 대한 기본 안을 내놓았다. 경 급강하 폭격기는 중 전투기의 역할도 겸하며 200kg의 폭탄 탑재량을 가질 수 있어야 했다. 중 급강하 폭격기는 완전히 급강하 폭격전용 으로서 500kg의 폭탄 탑재량을 가질 수 있어야 했다. 두 종류의 급강하 폭격기 모두 전방 기지의 임시 활주로 에서도 운용 가능해야 했다. 1932년에 육군의 급강하 폭격기 개발 계획은 He-50 복엽기의 시제품을 생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He-50은 500kg의 폭탄 탑재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1933년부터 양산이 시작되었다. He-50은 본격적인 급강하 폭격기가 등장하기 전 까지 임시로 사용될 예정이었으며 동시에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 양성에도 사용되었다. 1934년에 국방군 재무장 위원회는 중 급강하 폭격기 개발에 최 우선 순위를 두었으며 경 급강하 폭격기 개발은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다. 그 결과 중 급강하 폭격기로 채택된 것이 Ju-87 이었으며 경 급강하 폭격기로 채택된 것은 Hs-123 이었다.
밀히가 작정한 독일 공군의 제 1차 항공기 생산 계획에서는 항공기 3,820대 중 473대를 급강하 폭격기로 생산하기로 되어 있었다. 1934년에 항공 참모부는 1938년 까지 각 90대의 슈튜카로 편성된 3개 급강하 폭격 비행단을 창설할 계획을 세웠다. 급강하 폭격 비행단은 예비대로서 공군 사령관의 직할로 중점 지구에 집중 투입될 것 이었다. 벡(Ludwig Beck)대장이 편집한 육군복무규정 300(Heeresdienstvorschrift 300), 부대 지휘에서는 급강하 폭격기에 대한 장이 따로 있었으며 급강하 폭격기는 “특정 목표 타격이 가능한 무기”로 설명 되었다.
1936년 이전에 육군과 항공 참모부는 급강하 폭격기를 파괴력이 강력한 폭탄을 목표에 정확히 투하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독일이 근접 항공 지원과 차단 임무에서 슈투카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은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는데 그 주된 근거는 슈투카가 대공포와 적 전투기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 이었다.
그러나 급강하 폭격기의 개념은 그 시대의 요구에 따른 것 이었다. 독일 공군의 제 2 세대 급강하 폭격기인 Ju-87과 Hs-123은 매우 튼튼하고 일정한 타격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슈투카의 설계상 장점으로는 전방 전진 기지의 비포장 비행장에서도 운용이 가능했다는 점이고 활주 거리가 불과 400m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1934년에 재무장 위원회는 급강하 폭격기 개발에 최 우선 순위를 주었고 급강하 폭격기를 다양한 임무에 투입할 수 있는 긴 항속거리를 가진 기체로 파악했다. 계획상으로는 급강하 폭격기를 전략 폭격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Ju-87의 초기 양산형은 매우 짧은 항속 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Ju-87 B 형의 행동 반경은 최대 폭탄 탑재량일 경우 111~124 마일에 불과했다. 항속거리 문제와 전방 기지에서도 작전 가능한 능력은 슈투카를 근접 항공 지원 병기로 쓰게 만들었다. 2차 대전 이전 독일 육군의 전투 교리는 적의 요새화된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1차 대전의 경험을 반영한 것 이었으며 주적으로 설정된 프랑스는 국경지대에 강력한 요새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육군의 기본 교범이던 육군 규범 487은 항공 전력의 주 임무가 지상군 지원을 위해 적의 요새 방어선을 파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대형 폭탄을 이용한 요새선 격파는 Ju-87이 스페인 내전과 폴란드, 프랑스, 러시아 전역에서 잘 수행한 임무였다.
그러나 Ju-87은 불과 2정의 7,92mm 기관총 만을 장비하고 있어서 지상 공격기로서 이동 목표를 타격하는데는 큰 효과가 없었으며 실질적 타격 보다는 심리적 위력이 더 컸다. 독일 공군은 상대적으로 느린 급강하 폭격기의 속도와 약한 방어력에 우려를 하고 있었다. 1937년에 독일 공군은 지상 공격 전용의 항공기의 요구 성능을 발표하고 입찰을 시작했다. 이에 필요한 항공기는 20mm 기관포를 장비하고 충분한 고속에 방어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이 결과 Hs-129가 등장했다. 그러나 이 기종은 약한 엔진 출력과 기술적 복잡함, 그리고 좋지 못한 조종성 때문에 독일 공군의 실패작 중 하나가 되었다. 반면 소련은 충분히 무장을 갖추고 방어력도 강력하고 기술적으로도 단순하고 양산에 적합한 IL-2를 채택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Hs-129는 독일 공군의 교리의 실패로 인한 것은 아니었으며 설계와 생산에 큰 문제가 있었다. 독일 공군은 1937년에 지상 공격기를 발주하면서 육군과의 합동 작전을 발전 시켜 나갔다.


스페인 내전 1936~1939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 공군이 얻은 작전 경험은 그 동안 잘못 이해 되어 왔다. 일부 역사가들은 독일 공군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 해서 근접 항공 지원의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했으며 “콘도르 군단이 독일의 근접 항공 지원 교리의 시초”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근접 항공 지원은 리히토펜 같은 선구자들이 열성적으로 발전 시켰으며 공군 사령부는 이에 무관심 했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 봤듯이 독일의 육군 지원 교리는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해 갔으며 공군 파견 장교 체제는 1935~36년을 거치면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스페인 내전에서 He-51 복엽 전투기를 근접 항공 지원에 사용한 것은 새로 생긴 독자적인 교리가 아니었으며 근접 항공 지원은 1920년대 이래 전투기 조종사들에게는 제 2차 적인 임무였다. 독일 공군이 스페인에서 달성한 것은 기존에 발전시켜온 교리를 성공적으로 실전에 적용했다는 것이다. 독일 공군의 교리는 근접 항공 지원은 제공권을 달성한 뒤에 행해져야 하는 것 이었다. 근접 항공 지원은 대량으로 운용될 때 적의 사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다는 것이 내전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작전을 통해 입증 되었다. 독일의 근접 항공 지원은 1937년과 38년의 작전에서 돌파 작전에 매우 유용하다는 것이 입증 되었다.
리히토펜은 스페인내전에 처음에는 콘돌 군단의 참모장으로 나중에는 그 부대의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그는 근접 항공지원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페인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독일 공군에서 근접 항공 지원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가 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리히토펜이 예상했던 근접 항공 지원에서의 항공기 손실은 실제로는 매우 적게 나타났다. 1938년 5월부터 공화국 군이 20mm와 45mm 대공포를 투입한 이후에도 지상 공격기의 손실은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충분히 보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리히토펜의 감독하에 독일 공군은 최신예 항공기들의 실전 시험을 했다. 이 중에는 8대의 Ju-87 과 6대의 Hs-123이 포함 되었다. 리히토펜은 내전 후반기에 콘도르 군단에 제공권을 장악하자 새로운 근접 항공 지원 전술을 시험해 볼 기회도 가지게 되었다. 기갑 부대와 차량화 부대에 대한 근접 항공지원 기술은 스페인 내전의 경험으로 얻은 것이 많았다. 1938년 3월 콘도르 군단은 에브로 강 전선에 서 프랑코 군의 기갑 부대를 지원하는 작전에 투입 되었다. 공세 첫 단계에서 콘도르 군단은 공화국군의 비행장을 공격하여 제공권을 장악한 뒤 전선 후방의 도로와 철도를 타격함 으로서 적 예비대의 증원을 차단했다. 그리고 콘도르 군단은 근접 항공 지원에 집중하여 공화국군의 거점과 야전 축성을 무력화 시켰다. 항공기와 전차는 돌파에 매우 유용한 전력 이었으며 1938년 3월 12일에 콘도르 군단은 프랑코 군이 36km의 전진을 이루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외에도 독일 공군은 다른 여러 교리를 시험했으며 대부분 성공적 이었다. 콘도르 군단은 집중 공격뿐 아니라 제파 공격도 함께 행했다. 중점 지역에는 6대로 구성된 1개 편대가 목표물에 폭탄을 투하하고 바로 뒤에 다른 편대가 공격을 반복했다. 적을 계속적인 항공 공격으로 타격함 으로서 적의 사기에 대한 영향은 더 증대 되었다. 이러한 계속적인 공격은 폴란드와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 공군의 “전매 특허” 처럼 되었다.
한편 공군과 육군과의 통신 문제는 내전 기간 중 큰 문제로 남았다. 당시까지 지상과 항공기간의 교신을 확실하게 해줄 무전기가 없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지상 공격 임무는 사전에 세밀하게 준비 되었으며 아군에 대한 오폭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상으로 부터의 표지판, 연막, 신호탄, 불빛 등에 의해 조정되었다. 콘도르 군단의 첫 지휘관 이었던 슈페를레와 그의 후임자 였던 리히토펜은 중요한 지상 공격 임무는 전방 작전 지휘소 에서 직접 지휘했으며 비행장과의 직접 연락 체계를 갖추었다. 중요한 지상 지원 임무에서 직접 작전을 지휘하는 것은 독일 공군 고위 장교들의 관행이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얻은 경험들은 베를린에서 집중적으로 분석 되었다. 예쇼넥 대령은 1939년 6월에 “근접 지원 임무는 공군의 임무 중 가장 어려운 임무”라고 지적하고 이런 임무는 “공군과 공군이 지원하는 육군 부대 간에 밀접한 연락이 뒷 받침 되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스페인 내전의 경험은 폴란드 침공을 계획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독일 공군은 1939년 여름에 슈투카 전력의 절반을 리히토펜이 지휘하는 특수 항공단에 집중 시켰다. 스페인 내전은 독일에게 대규모의 전문화된 근접 지원 전력을 만들도록 했을뿐 아니라 근접 지원을 체득한 우수한 조종사와 근접 항공 지원 작전을 수립하고 지휘할 수 있는 지휘관을 얻게 해 주었다. 스페인 내전 말기에 많은 독일 공군의 고위 장교 – 슈페를레, 드룸, 폴크만, 플로쳐, 자이데만, 폰 리히토펜 등 – 들이 지상군 지원등의 실전 지휘 경험을 쌓았으며 기갑 부대 작전에 대한 항공 지원 등의 현대적 전술을 체득하게 되었다.


폴란드 전역

폴란드 전역에서 독일 공군의 급강하 폭격기와 지상공격기 부대는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 공군은 366대의 Ju-87과 40대의 Hs-123이 가동 가능했으며 대부분이 투입되었다. 지상 공격을 위해서 Hs-123과 Ju-87은 각 야전군을 지원하는 항공사단들에 분산 배치되었다. 1개 항공대(Gruppe)의 Ju-87 30대가 동프로이센에 배치되어 있던 항공 사단에 배속 되었으며 3개 항공대와 1개 항공 중대(Staffel)의 Ju-87 112대가 제 1 항공사단(1. Flieger-Division)에 배속 되었다. 나머지 지상 공격기와 슈투카는 폰 리히토펜의 특수 항공단에 집중 되었다. 리히토펜의 지휘하에 4개 슈투카 항공대(160대)와 1개 Hs-123 항공대(40대)가 배속되어 있었으며 1개 정찰 항공 중대와 2개 전투기 항공대가 호위를 위해 배속되어 있었다. 폰 리히토펜의 임무는 주공을 맡은 제 10 군을 지원하는 것 이었다.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은 폴란드군의 부대 집결지를 타격하는데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슈투카의 500kg 폭탄은 대형 공성포의 역할을 대체했으며 모들린의 요새를 포함한 폴란드군의 요새들을 무력화 시켰다. 슈투카 부대는 교리에 따라 대량으로 집중 운용 되었다. 보통 1개 항공대가 기본 단위로 투입 되었다. 9월 26일과 27일에 폰 리히토펜은 모들린 공격에 약 1천 소티의 출격을 해서 지원했다. 모들린은 항공 공격만으로 항복했다.
스페인에서 입증된 교리와 전술은 폴란드에서 그 위력을 입증했다. 근접 항공 비행대는 기동성을 최대한 활용해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이것은 1939년 에는 다른 어떤 나라의 공군도 할 수 없었던 지휘력 이었다. 리히토펜의 특수항공단은 제 4 항공함대로 이동했으며 별다른 문제 없이 작전했다. 슈투카와 지상공격기들은 폴란드 전역의 지상 작전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작전 초기에 슈투카 부대는 폴란드 공군의 무력화에 집중했다. 9월 7일부터 12일 사이에 폰 리히토펜의 부대는 라돔-데블린 지구의 폴란드군을 섬멸하는데 투입되었다. 13일부터 17일 까지 리히토펜은 Byzura 강의 폴란드군 방어선을 공격하여 제 10군의 작전을 지원했다. 라이헤나우 상급 대장은 특수 항공단이 전장의 전황을 결정 지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사용한 제파 공격은 폴란드 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슈파이델은 “슈투카 공격은 적의 사기를 꺾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독일 공군이 폴란드에서 거둔 성공은 상당 부분 기동성 있는 지상 지원 부대와 보급 조직의 효율성에 기인했다. 근접 항공 지원 부대와 전투기 부대는 그 임무를 위해서 최대한 전방에 가까운 비행장에서 작전해야 했다. 특히 Hs-123의 경우 최대 무장 탑재시 행동 반경이 70 마일 이었으며 Ju-87의 경우는 110마일에 불과했다. 전방 지역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독일 공군은 1939년에 117개 차량화 보급 수송대를 편성했다. 폴란드 전에서 제 2 항공 함대와 리히토펜의 부대에는 총 11개 비행장 지원 중대가 배속되었다. 이러한 지원 부대들은 수시간 안에 임시 활주로를 만들 능력이 있었다. 전방 기지로부터 작전하는 슈투카들은 하루에 보통 4~5회의 전투 출격을 했는데 이것은 독일군의 전력을 배가 시켰다.
폴란드는 기갑-항공 합동 작전을 최초로 대규모로 실시한 전역이 되었다. 공군 연락 장교는 각 기갑 사단과 차량화 사단 참모진과 함께 이동했으며 때때로 전방까지 가서 정확한 상황 정보를 전달했다. 그러나 기갑 사단과 차량화 사단의 급속한 진격은 종종 전방 지역에서 식별의 문제를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부족한 통신 문제와 결합하여 종종 슈투카가 독일군을 공격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폴란드전에서 얻은 경험은 신속히 공군 본부에 의해 부석 되었으며 프랑스 전역을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후방에 대한 종심 타격은 슈투카 부대가 대공포에 심한 피해를 입어서 중단 되었다. 폴란드전 직후 대부분의 슈투카 비행대와 Hs-123 비행대는 폰 리히토펜의 지휘하에 집중 되었으며 이 부대는 제 8 항공군단이 되었다.


1940년 프랑스 전역

폰 리히토펜은 프랑스 전역에서 근접 항공 지원을 맡으면서 근접 항공 지원의 지휘 통제 체계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각 기갑사단과 군단에 배속된 공군 연락 장교는 제 8 항공 군단 사령부로 직접 연락을 취했으며 더 이상 육군측에 항공 작전 참모 역할을 하거나 항공 지원 요청을 부탁하지 않았다. 제 8 항공 군단 사령부 에서는 항상 클라이스트의 기갑집단 사령부와 연락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기갑 사단 사령부의 상황 보고가 접수되면 바로 수분내에 일선 항공대에 공격 명령이 하달 되었다. 제 8 항공 군단은 항시 1개 슈투카 비행대와 1개 전투 비행대를 출격 시킬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며 출격 명령이 하달된지 45분에서 75분 내에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또한 슈투카 부대는 네덜란드에 대한 세계 최초의 공수 작전을 지원하는데 투입 되었다. 폰 리히토펜의 부대는 네덜란드 공군 기지와 대공포 진지, 그리고 기타 목표를 파괴하여 제 7 항공사단 병력이 네덜란드의 주요 목표를 점령하는 것을 지원했다.
폰 리히토펜이 1940년 전역에서 일으킨 최고의 혁신은 항공 전력을 지상 작전에 있어서 결정적인 수단으로 만든 것 이었다. 대규모로 집중된 슈투카 공격은 1940년 5월 14일 스당(Sedan)의 프랑스군 방어를 붕괴 시키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비록 슈투카는 방어선에 배치된 병력에는 타격을 별로 입히지 못 했으나 후방의 포병을 타격함 으로서 프랑스 포병이 도하하는 독일군을 공격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프랑스 군의 사기에 미친 영향 역시 캐우 컸다. 이날 밤에 프랑스 제 55 사단은 무너졌으며 이들의 퇴각에는 특히 항공 공격이 큰 도움을 주었다.
1940년 프랑스 전역 초기에 제 8 항공 군단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및 스당 방면 돌파등을 지원했다. 작전 초기에 리히토펜은 주공이 집중되는 지역에 제 8 항공 군단을 집중 투입해야 한다고 상급 부대에 건의했다. 5월 16일에 리히토펜은 괴링을 만나 바다로 진격하는 클라이스트 기갑 집단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아 냈다.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너무나 신속한 진격에 당황했으며 5월 14일 이후 맹진격 하는 기갑사단과 보병사단간에 큰 간격이 생겼다. 5월 16일에 룬트슈테트는 클라이스트에게 진격 속도를 늦춰서 보병 사단이 따라 붙도록 명령했다. 리히토펜은 예하 부대에 보병사단이 따라 붙을 동안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기갑집단의 측면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이 때문에 기갑사단에 대한 지원은 2차적인 임무로 돌려졌다. 육군측은 리히토펜이 측면에 대한 방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48시간 뒤에는 프랑스군이 제 2의 마른의 기적을 일으키지 못 했다는 것이 명백해 졌다. 최고 사령부는 다시 진격을 명령했다.
그동안 리히토펜은 육군의 측면을 잘 방어해 냈다. 8 항공군단의 정찰기들은 반격을 위해 이동하는 프랑스군 사단을 발견했으며 끊임 없이 프랑스 지상군을 공격하고 도로망을 타격했으며 프랑스 기갑부대의 집결지를 공격했다. 프랑스 제 9 군은 항공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또한 제 8 항공군단은 5월 17일 드골의 제 4 기갑사단이 몽꼬르네(Montcornet)에 가한 반격을 격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월 20일에 제 8 항공군단의 주력은 뒤아-라-샤토(Douai-la-Cateau)에 집결한 연합군 기갑 부대를 공격했으며 롬멜의 제 7 기갑사단이 아라(Arras)에서 영국군 전차 부대의 반격을 받았을때도 지원했다.
그러나 Ju-87은 전차에 명중탄을 잘 맞추지 못 했으며 Hs-123은 중 기관포가 없어서 공군의 공격으로 직접 격파한 전차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항공 공격은 전차 부대를 후속하는 지원-보급 부대로부터 분리 시키고 전차를 지원하는 보병과 포병에 큰 피해를 입혔다. 많은 자료에 기초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제 8 항공군단의 지상군 측면 보호와 근접 항공 지원 임무는 매우 성공적 이었다. 실제로 프랑스 전역 전체를 놓고 볼 때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독일의 대 승리를 가져온 가장 결정적인 요인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41년 러시아 전역

독일 공군은 프랑스에서 처럼 소련 침공에서도 주공이 집중되는 지역의 기갑사단에 항공 지원을 수행했다.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러시아 전선에서 매우 파괴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1941년 전역에서 독일공군은 지휘 통제에 있어 많은 변화를 겪었다. 특히 러시아의 광대한 전장으로 인해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넓게 분산되어 운용되었으며 전장의 확대로 인해 각 기갑 군단과 항공 군단, 항공 함대간의 원활한 협력을 위해서 많은 근접 항공 지원 부대가 6월부터 10월 사이에 편성 되었다. 1942년 초에 그동안 유지되었던 Koluft는 완전히 폐지 되었으며 이것은 공군 장군에게 배속된 1개 항공 정찰 사령부로 변경 되었다. 가장 중요한 전술적 혁신은 리히토펜이 가져왔다. 그는 소련 침공 당시도 제 8 항공 군단장으로 있었으며 그는 경험많은 슈투카 조종사를 항공기와 교신할 수 있는 무전기를 장비한 3호 전차에 탑승시켜서 이동 지상 관제관으로 활용했다. 이 때부터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최 전선의 지상 부대와 직접적으로 합동 작전을 수행 할 수 있었다.
폴란드와 프랑스 전역의 교훈으로부터 근접 항공 지원과 차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항공기 무장을 강화 시켜야 한다는 결론이 얻어졌다. 1940년 전역에서 슈투카의 위력은 물리적 이라기 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이 더 컸다. 슈투카가 장비한 무기 중 전차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것은 폭탄 뿐 이었다. 그리고 전차에 폭탄이 직접 명중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독소전 개전 당시 독일 공군은 여전히 Ju-87 B-2형을 주력으로 장비하고 있었으나 그 무렵부터 Ju-87 D 형이 양상 배치되고 있었으며 D 형은 늘어난 탑재량과 행동 반경을 가지고 있었다. 독소전을 치루면서 J u-87은 37mm Flak 18을 탑재하여 대전차 공격기로 활용 되었으며 근접 항공 지원을 수행하던 Hs-123은 1942년에 가서 대전차 공격 임무도 수행하기 위해 20mm 기관포로 무장을 교체했다.
1941년에 독일 공군은 SD-2 폭탄을 사용했는데 이 폭탄은 특히 보병 집단과 경장갑 목표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SD-2는 원시적인 집속 폭탄으로 각 폭탄 본체는 각 3파운드 무개의 자탄 96개를 넣고 있었다. 폭탄 본체는 공격시 열리면서 자탄을 살포했다. SD-2 하나는 차량 대열 전차나 보병 집결지 전체를 초토화 시킬 수 있었다. SD-2는 매우 효과적 이어서 미국 공군도 이를 복제해서 수년간 사용했다. 또한 러시아 전역에서 일어난 또 다른 혁신은 우수한 다목적 폭격기인 Ju-88의 대량 사용이었다. 폴란드 전역과 프랑스 전역의 경험으로 개발된 신무기 중 특이한 것은 보조 로켓 추진에 장갑 목표를 관통할 수 있는 탄두를 가진 1,000kg 폭탄(PC 1000)이었다. 이 폭탄의 사용으로 대부분의 요새 시설은 항공 공격에 무력해 졌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1941년의 러시아 전역을 정점으로 해서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세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1940년 전역을 치룬 이후 독일 공군은 전해 보다 더 적은 숫자의 항공기를 가지고 소련 침공에 들어갔다.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세력은 꾸준히 장비와 전술을 개선 시켜 나갔지만 더 이상 확실하게 제공권이 장악되지 못 했다. 제공권이 없는 상황에서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 더 이상 적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지 못 했다. 비록 독일 공군은 근접 항공 지원을 매우 중요시 했지만 러시아 전선의 인적, 물적 소모는 매우 심각했으며 결국은 독일 공군의 지상 공격 부대를 무력화 시켰다. 독일 공군의 우수한 교리와 전술은 물량의 열세를 만회할 수 없었다.
스페인과 폴란드, 프랑스에서 얻은 교훈은 근접 항공 지원은 최대한 집중해서 운용해야 효과가 있다는 점 이었다. 독일 공군이 1940~41년 사이에 조종사 양성과 항공기 증산에 실패했다는 점은 러시아의 광대한 전장과 함께 독일 공군이 더 이상 1940년 5월 스당에서 했던 것과 같이 대규모의 집중을 달성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 론

독일이 항공력을 지상군 작전 지원에 간접, 직접적으로 사용한 사실은 군사 교리의 발전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1939년에 근접 항공 지원과 근접 차단 임무는 독일 공군의 임무 우선 순위에서 제공권 달성과 원거리 차단에 이어 세번째에 해당했다. 1940년 프랑스 전역에서 근접 지원은 좀더 우선 순위가 높아 졌으며 제 8 항공군단이 창설 되었다. 폰 리히토펜이 클라이스트 기갑 집단의 돌파와 측면 보호에 큰 역할을 수행하자 이제 작전 수행에 있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41년 전역에서 근접 항공 지원과 근접 차단 임무는 원거리 차단과 동등한 중요도를 가지게 되었다.
독일이 연합군에 비해서 훨씬 더 우수한 지상군 지원 세력과 교리를 가지게 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가장 먼저 독일 공군과 육군은 교리면에서 특정 사상이나 개념에 구속 받지 않았다. 독일 공군의 교리를 보면 전략 항공 공격이나 항공력의 작전 단위 사용에 명확한 구분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독일 공군은 Ju-87을 전략적 임무에 투입하는 것이나 Bf-110이나 Ju-88 같은 중형 항공기를 근접 항공 지원 임무에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이러한 접근법은 전략 임무와 전술 임무를 명확하게 구분한 영국공군이나 미국 육군 항공대와는 매우 다른 것 이었다.
독일 공군의 참모 조직은 다른 어느 나라의 공군 보다도 1차 대전과 스페인 내전의 경험을 철저히 분석했으며 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각 전역이 끝날 때 마다 독일 공군은 그 교리를 각 전역의 교훈에 맞춰서 수정해 나갔다. 이것은 영국 공군과 미 육군 항공대가 1차 대전 당시 근접 항공 지원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근접 항공 지원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나 영국, 미국은 독일 육군이나 공군과는 달리 경험 으로부터 별다른 교훈을 얻어 내지 못했다. 심지어 폴란드 전역의 교훈 조차도 이들 국가들에서는 무시 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8개월 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별다른 근접 항공 지원 세력이 없는 상태에 처해 있었다.
독일 공군의 최대 강점 중 하나는 육군과의 합동 작전을 강조한 것 이었다. 1930년대부터 독일 공군과 육군은 제병 협동에 기초한 양 병종간의 합동 작전을 시작했으며 정기적으로 합동 기동 훈련과 연습이 행해졌다. 미 육군 항공대와 영국 공군은 2차 대전 이전에 육군과의 합동 작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또한 독일 공군은 매우 효과적인 참모 조직을 발전 시켰으며 이를 통해 독일 공군은 각 전역 마다 대규모 항공 부대를 특정 구역에 집중 투입 할 수 있었다. 또한 참모 조직은 독일 공군의 이동시 보급과 지원 문제에도 큰 효율성을 발휘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전선에 인접한 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효율적인 보급 조직은 부대의 전투력을 배가 시켰으며 공군 비행대가 하루에도 4회 혹은 그 이상의 전투 출격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마지막으로 우수한 지휘관들이 독일의 성공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뷜버그, 밀히, 슈페를레, 예소넥, 폰 리히토펜 같은 지휘관들은 근접 항공 지원 부대와 그 교리를 형성하는데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것이야 말로 독일 공군이 육군 지원 교리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2006년 7월 10일 월요일

무늬만 1류 공군 - Regia Aeronautica

2차 대전에 참전한 주요 교전국 중 이탈리아처럼 어정쩡한 국가는 찿아보기 힘들다. 이탈리아는 마치 체중 미달인 주제에 수퍼헤비급 경기에 나간 권투선수 같다고 해야 할까… 하여튼 2차 대전 같은 괴수들의 격전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국가다.

그나마 지중해에서 그럭저럭 밥값은 하던 해군과는 달리 시작부터 끝까지 졸전을 거듭하며 호사가들의 안주거리가 된 육군과 그 육군의 뒤치닥 거리만 하다가 종전을 맞은 공군, Regia Aeronautica는 그야말로 비참함 그 자체다.

이탈리아 공군은 육군과 마찬가지로 적들에 비해 뒤떨어진 장비, 그리고 불충분한 항공기 생산량으로 대표되는 결정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질과 양 모두 뒤떨어지는 비참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

이탈리아 공군이 193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세계적인 수준이었다는 점을 보면 불과 10년도 안된 사이에 이렇게 몰락했다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먼저 항공기 생산을 살펴 보면 이탈리아는 전쟁 이전부터 싹수가 글러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공군의 2차 대전 이전 항공기 생산 계획과 실제 생산량은 다음과 같았다.


연 도
생산계획
생산량
1933
424
386
1934
455
328
1935
1,236
895
1936
2,031
1,768
1937
1,900
1,749
1938
1,700
1,610
1939
1,930
1,750



위의 수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탈리아는 전쟁 이전에도 계획된 생산량을 달성하지 못 했고 이 때문에 1937년부터 생산계획량을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목표에 도달하지 못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이탈리아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골머리 아픈 경제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단 국방예산을 보자.

이탈리아는 동원체제에 들어간 나라도 아닌 주제에 전쟁 이전부터 국방비가 국가 예산의 30%를 돌파하고 있었다!

아래의 수치를 보자.


회계연도
국가예산
국방비
1934/35
22.5
5.3
1935/36
35.2
12.1
1936/37
39.2
13.1
1937/38
39.6
12.3
1938/39
40.9
13.4
1939/40
54.4
24.7


국방비가 이렇게 많은데 왜 공군은 저 모양이었는가?

가장 먼저 예산 우선순위가 해군과 육군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1933년부터 1940년 까지 이탈리아 공군에 배정된 예산은 평균 전체 국방비의 24.5%였는데 독일 공군은 재무장 직전인 1934년에도 36%, 영국 공군도 전시 동원 이전인 1938년에 국방예산의 38%를 배정 받고 있었다.
그리고 공군에 들어오는 예산도 신장비 도입보다는 기존에 있는 장비를 관리하는데 더 많이 배정이 됐다.
결정적으로 오지랖만 넓은 두체가 사방에 허세를 부리는 통에 그나마 배정 받은 예산도 괴상한 곳으로 많이 흘러 들어갔다.

먼저 1938년까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공군을 지원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공군의 예산(!)이 지원됐고 뒤이어 이디오피아와 스페인 내전 개입으로 더 많은 예산이 새 나갔다.
내실을 다져야 할 시기에 삽질만 한 셈이다.

1938년 12월 이탈리아 공군의 항공기 보유대수는 1년 전보다 500대 이상 줄어들었고 생각이 조금 있는 이탈리아 장군들은 미래의 전쟁을 점점 더 암담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특히 스페인 내전 개입은 1938년까지 공군 전력을 170개 비행대로 증강시킨다는 공군 증강계획을 말아먹는데 일조했다.

물론 이탈리아 공군도 1936년 스페인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미래 전쟁을 대비한 ‘R 계획’을 만들어 항공 전력을 확충하긴 했지만 영국 같은 강대국과 한판 벌이기에는 상당히 부실했다.
무 엇보다 이탈리아 공군은 매우 부실한 장비만 두루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탈리아 공군이 그나마 최신형이라고 내놓은 MC.200 전투기는 성능은 Bf-109 E나 스핏파이어 Mk.I 같은 동시기의 전투기보다 성능은 뒤떨어지는 주제에 생산성도 무려 다섯배나 떨어졌다.
Bf-109E의 생산에 소요되는 시간이 평균 4,500 시간이었는데 MC.200은 21,000시간(!)이나 잡아 먹고 있었다.

이탈리아 공군 전력은 1939년 10월 말 ‘서류상’으로는 총 5,200대에 달했으나 이 중 2,700대는 너무 구식이어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900대는 정비 상태가 매우 불량해 즉시 폐기 처분해야 했다.

이결과 삽질의 제왕인 두체께서 영국과 프랑스에 호기롭게 선전포고를 했을 때 이탈리아 공군이 보유한 항공기 3,296대 중 가동 가능한 물건은 2,000대를 겨우 채우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 중 폭격기가 995대, 전투기가 574대 였는데 전투기 중 그나마 현대적인 물건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MC.200 77대와 Fiat G.50 89대에 불과했다!
이탈리아는 전쟁에 돌입하고 나서도 주력 전투기가 CR.42라는 당시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확실히 구식화 된 물건이었다.

반면 독일 공군은 이미 1939년 8월에 세계 최고수준의 전투기인 Bf-109 D 112대와 Bf-109 E 631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선전포고를 한 이탈리아는 먼저 가장 만만한 코르시카 등 지중해 일대의 프랑스 군을 공격했는데 6월 11일부터 24일까지의 짧은 교전 기간 중 지상에 주기된 70대의 프랑스 항공기를 격파하고 40대의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프랑스가 곧바로 백기를 들고 이탈리아는 어쨌든 승전국 행세를 할 수 있게 됐다.

여기서 끝났다면 정말 행복했겠으나…

영국과의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면서 이런 재미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돼 버렸다.

두체는 동업자(실은 상전) 히틀러가 프랑스에서 대박을 터트리자 곧 영국도 나자빠질 것으로 보고 Corpo Aereo Italiano라고 간판을 달고 CR.42, G.50 등 구닥다리 비행기 178대로 구성된 부대를 파견했다.
이 부대는 영국에 27톤의 폭탄을 투하한 것 외에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대다가 리비아의 이탈리아군이 박살나자 땜빵을 위해 아프리카로 보내졌다.

1940년 말, 영국군이 이집트에서 공세를 개시하자 구식 항공기로 머리 숫자만 채운 이탈리아 공군은 2개월도 되지않아 풍비박산 나 버렸다. 단 2개월의 전투로 이탈리아 공군은 700대가 넘는 항공기를 잃어 버린 것이다!
이 중 100대가 공중전에서 격추됐고 140대는 영국공군의 공습으로 지상에서 격파 됐다. 그리고 약 400대는 이탈리아군이 패주하면서 자폭시키거나 소각시켰다고 한다.
2월 말 리비아에 남은 이탈리아 공군 전력은 채 70기가 되지 않았고 그나마 트리폴리의 제공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독일 공군이 파견한 ZG26의 20대 남짓한 Bf-110 장거리 전투기 덕분이었다.

이렇게 부실한 상태에서 전쟁에 뛰어든 허약한 공군은 지속적인 소모전으로 재미한번 보지 못한 채 역사의 뒷길로 초라하게 사라져갔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 6월부터 1941년 3월까지 3,500대의 항공기를 상실했는데 같은 기간 보충된 항공기는 3,100대에 불과했다.
적자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결과 이탈리아 공군의 전력은 계속해서 감소했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 6월 전쟁 발발 당시 2,000대의 작전 가능한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1941년 12월에는 1,493대, 1942년 11월에는 860대로 그 숫자가 계속 줄어들었다.

이탈리아 공군이 이렇게 전쟁 중반도 지나지 않아 나자빠진 원인은 이탈리아의 부실한 공업력과 전시동원 능력이었다.

먼저 이탈리아의 항공기 생산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전쟁 기간 중 이탈리아의 항공기 생산은 다음과 같았다.


연도
생산계획
생산량
1940
3,785
3,257
1941
4,200
3,503
1942
4,800
2,821
1943
3,822
2,024

이탈리아의 항공기 생산은 1942년에 이미 엄청난 감소세로 돌아서는데 독일과 달리 산업시설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탈리아의 항공산업 노동자는 1934년 9,700명에서 1938년 45,700명으로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동안 생산성은 불과 50% 증가하는데 그쳤다.
결정적으로 노동력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노동 숙련도가 낮은 수준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항공산업 노동자는 1943년 초 까지 115,000명으로 증가했지만 월 평균 항공기 생산량은 266대로 1940년의 308대 보다도 오히려 더 감소한 비참한 수준이었다.

여기다가 신형 항공기 생산 부족과 생산 라인의 전환이 매우 더뎌 1943년까지도 CR.42같은 구식 기종의 생산을 계속해야만 했다. 어차피 아예 없는 것에 비하면 낫지 않은가.

어쨌거나 1943년 휴전이 성립된 뒤 이탈리아 공군은 정부와 마찬가지로 독일, 또는 연합군에 합류해 전쟁을 계속했다.
독일측은 무솔리니에 충성하는 병력을 근간으로 항공기 100대로 편성된 소규모 공군을 재건했다.
독일은 이탈리아군의 무장 해제시 약 1,200대의 이탈리아 항공기를 압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항공기가 성능 미달이었고 쓸만한 조종사의 충원도 어려운 문제였다.

이후 이탈리아 공군은 독일, 또는 연합군의 지원을 받아 생계를 유지해 나가다가 역시 궁색한 최후를 맞았다.


참고한 자료들...
F. D’Amico & G. Valentini, Regia Aeronautica
Olaf Groehler, Geschichte des Luftkriegs
Hans W. Neulen, Am Himmel Europas : Luftstreitkrafte an deutscher Seite 1939-1945
Brian R. Sullivan, “The Impatient Cat : Assessments of Military Power in Fascist Italy, 1936-1940”
Brian R. Sullivan, “Downfall of the Regia Aeronautica 1933-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