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30일 토요일

어떤 포로의 편지

1943년 4월 5일, 포로수용소에 있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관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이것을 도쿄에 있는 독일 대사관 무관 크레치머(Alfred Kretschmer) 소장에서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친애하는 크레치머!

자네도 잘 알고 있다시피 나는 제6군과 함께 포로가 되어 있네. 나는 지금 겨우 내 한몸을 챙기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네. 그래서 자네에게 이런 호사스러운 부탁을 하는 것이 정말 미안하기 그지 없구만. 다음과 같은 물건들을 보내줄 수 있겠나?

1. 긴 팔 스웨터 한벌, 될 수 있다면 색은 짙은 회색이면 좋겠네. 내 키는 자네도 대략 알고 있을 걸세.(파울루스의 키는 187cm)
2. 긴 양말(Wadenstrümpfe) 한 짝, 치수는 11½, 색은 짙은 회색이면 좋겠네.
3. 양말 세 짝, 치수는 11½, 색은 자네가 편한 대로 해 주게.
4. 비단 셔츠 두 벌, 목 둘레는 38, 카라 치수는 39, 소매는 긴 것으로 해 주게. 그리고 가능하다면 셔츠와 같은 색(특히 어두운 녹색)의 넥타이도 하나 부탁하네.
5. 멜빵 하나.
6. 종이 한 통과 연필 두 자루.

그리고 이것도 보내줄 수 있겠나?

7. 초콜렛과 쿠키(Kekse).
8. 잼(Marmelade) 한통.
9. 커피와 차.
10. 담배와 시거.
11. 향수(Eau de Cologne)
12. 화장품.

그리고 자네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나는 몇 년 전 부터 위와 장에 문제가 있었네. 위에 적은 목록 중 7번과 8번에 적은 기호품이 병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게는 도움이 된다네.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이네만 7번에서 12번까지의 물품은 매달 한 번씩 보내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100루블 정도 송금해 주었으면 좋겠네.
지출되는 비용은 나중에 정산할 때 까지 당분간 자네가 부담해 줄 수 있겠나?

Leonid Reschin, Feldmarschall Friedrich Paulus im Kreuzverhör 1943~1953, Bechtermünz Verlag, 2000, ss.47~48

어찌보면 당연하겠지만 파울루스가 보낸 편지는 독일 대사관 쪽에서 거부했던 것 같습니다.

파울루스의 편지는 이래저래 재미있는데 특히 포로가 된 고급장교를 우대하는 유럽 전쟁문화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근대 유럽에서 포로가 된 고급장교는 사병들과는 달리 꽤 근사한 대접을 받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제가 예전에 썼던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 포로의 대우문제」라는 글에서도 이야기 했는데 근대 유럽에서 포로가 된 장교처럼 팔자좋은 인생도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파울루스가 병사들 걱정을 전혀 안 한 것은 아니겠지만 병사들이 영양실조와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마당에 초콜렛 타령을 하고 있는것이 좋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본인도 그 점은 잘 느끼고 있었겠지요.

2010년 1월 29일 금요일

어제의 득템

그러고 보니 어제 모임에서 득템한 이야기를 깜빡했군요. 어제 참석하신 슈타인호프님께 재미있는 책을 한 권 선물받았습니다.

이글루스 역밸을 따끈따끈하게 달구었던 화제의 저작! 파닥파닥 세계사 교과서였습니다.


여기에 슈타인호프님의 친필서명도 받았지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슈타인호프님.

그리고 어제 모임에서는 이른바 '좋은 책, 나쁜 책, 이상한 책' 이라는 즉석 이벤트를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슈타인호프님이 나쁜 책과 이상한 책을 쓸어가셨지요. 책과 관련해서 복이 많으신 듯.

당첨된 나쁜책을 들고 포즈를 취해주신 슈타인호프님

오프에 참석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프에 참석해 주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주말이 아닌 평일 저녁에 일정을 잡게 된 점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오랫만에 뵌 분들도 많아서 서로 나누실 말씀도 많았을 텐데 부득이하게 중간에 마무리하게 된 점은 정말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금요일에 출근하실 직장이 있으신데도 귀한 시간을 내주신 분들께 특별히 감사를 드립니다. 피곤한 퇴근길에 일부러 들러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온라인에서만 뵙다가 처음으로 오프에서 뵌 분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능한 빨리 다음 번 모임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평일인지라 시간에 쫒기는 느낌이 적지 않았는데 다음번에는 좀 더 여유있는 분위기에서 즐거운 대화가 더 많이 오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오프에 참석하지 못하신 분들께는 택배로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직 주소를 보내주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제 이메일, panzerbear@지메일.com으로 주소를 보내주십시오.

귀한 시간 내 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더 감사드립니다.

2010년 1월 24일 일요일

오프모임을 28일 목요일로 결정했습니다.

공지가 약간 늦었습니다. 오프모임 일정을 다음과 같이 정했습니다.

일시 : 2010년 1월 28일 목요일 오후 7시
장소 : 강남역 옥토버페스트
회비 : 1만 5천원

목요일에 뵙겠습니다.

기분나쁜 추억 하나

구글리더를 읽던 중 나이지리아의 종교간 충돌에 대한 소식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지역의 종교간 갈등이야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것 이지만 제목이 눈길을 끌더군요.


국민학교 시절 반공서적에서 가장 공포감을 자극한 것은 학살된 시신을 우물에서 끄집어 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시골에 내려갈 때 마다 우물 안을 들여다 보면 그 생각이 나곤 했을 정도지요.

머나먼 이국에서 일어난 학살이 국민학교 시절의 불쾌한 추억을 끌어내는군요.

2010년 1월 23일 토요일

수령님의 경제관;;;;

최근 sonnet님이 북한의 개혁 개방 가능성에 대해 전망하는 글을 통해 김정일 체제의 구조적인 한계점을 지적했습니다. 저 또한 김정일 정권의 정통성이 김일성의 노선을 따르른 데서 나온다는 점이 체제의 융통성을 제약한다는 sonnet님의 지적에 동의하는 편 입니다.

김일성은 살아있는 동안 북한 체제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신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의 발언 한마디 한마디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북한 인민들에게는 불행하게도 김일성은 쓸데없이 말이 많았으며 그 점은 경제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김일성은 살아 생전에 중공업화와 이에 기초한 자력갱생 노선을 강조했습니다. 김일성에게 있어서 중공업화는 사회주의 국가로서 당연히 걸어야 할 것이었고 경공업 부터 시작해 중공업으로 이행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나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김일성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다른 나라들의 공업 발전 력사를 보면 많은 나라들에서는 우선 일정한 기간 중공업을 먼저 발전시킨 다음 경공업을 발전시켰으며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경공업을 먼저 발전시켜 돈을 모아가지고 중공업을 건설하였습니다.

량현갑 편, 『전후 우리 당 경제 건설의 기본 로선』(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61), 4쪽

김일성은 이렇게 중공업화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후 복구기 부터 중공업 위주의 경제건설에 집착했습니다. 그런 점은 1950년대에 김일성이 한 발언에서 잘 드러납니다.

1957년 인민경제계획은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킬데 대한 우리 당 경제건설의 기본로선에 기초하여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지난날과 마차가지로 다음해에도 중공업부문에 투자를 집중하고 많은 힘을 돌릴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조치입니다.

지금 일부 나라들에서는 중공업을 좀 죽이자거니 살리자거니 하는 론의가 많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문제가 절대로 설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중공업을 먼저 발전시키지 않고서는 전반적인 인민경제의 토대를 튼튼히 할 수 없으며 인민생활도 높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 나라 사회주의경제건설의 객관적 요구입니다.

(중략)

오늘 우리가 이런 큰 힘과 튼튼한 밑천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킬데 대한 우리 당의 로선이 옳았으며 당의 령도밑에 전체 인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투쟁하여 이 로선을 훌륭히 관철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3개년 계획기간에 당의 방침대로 중공업발전에 힘을 넣지 않았더라면, 인민생활을 높인다고 하여 형제나라들의 원조 같은 것도 그대로 다 때려먹었더라면 그때 한 두해 동안은 잘 살수 있었을지 몰라도 오늘에 와서 아무것도 자체로 할 수 없는 곤난한 처지에 놓이게 되였을 것 입니다.

김일성,「사회주의건설에서 혁명적대고조를 일으키기 위하여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한 결론 1956년 12월 13일」, 『천리마운동과 사회주의건설의 대고조에 대하여』(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0), 1~4쪽

********

만약 전후시기에 우리가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파괴된 경제를 복구하지 않고 형제나라들의 원조와 우리의 내부원천을 주로 인민들의 개인적 소비에만 돌렸더라면 우리는 자체의 경제토대를 쌓을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오늘 인민경제를 더욱 발전시키며 인민생활을 높이기 위한 5개년 계획을 세울수도 없었을 것 입니다. 전후시기에 있어서의 우리 당 경제정책의 커다란 의의는 그것이 형제나라들의 원조와 우리 나라 내부원천을 가장 합리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짧은 기간에 인민생활을 높일수 있게 하였으며 우리 인민경제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자립적 토대를 기본적으로 닦을 수 있게 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김일성,「모든것을 조국의 륭성발전을 위하여 :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회의에서 한 연설, 1958년 6월 11일」, 『천리마운동과 사회주의건설의 대고조에 대하여』(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0), 15~16쪽

김일성에게 있어 중공업은 민족적 자립경제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이 생각한 민족적 자립경제는 대외무역으로 인한 '폐해'를 최소화 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대외무역을 통해 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면 정치적인 자립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자립적 민족 경제의 기본 내용에 대한 김일성 동지의 명제에서 기본으로 되는 것은 자체의 수요를 기본적으로 자체로 보장할 수 있도록 경제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서는 경제를 다방면적으로 발전시키고 부문들 간의 유기적인 련계를 확고히 보장하는 종합적인 경제 체계를 형성하여야 하며 인민 경제를 현대적 기술로 장비하고 자체의 원료 기지 등 생산의 물질적 요인을 자체로 튼튼히 조성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립적 민족 경제는 한 마디로 말해서 자체의 기술, 자체의 자원, 자체의 간부와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경제를 발전시키며 생산 수단과 소비재에 대한 국내 수요를 기본적으로 자체로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자립적 민족 경제는 자체의 수요를 기본적으로 자체로 충족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주로 국내 시장을 대상으로 하여 발전하게 된다.

(중략)

대외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는 경제 발전의 일면성과 기형적인 구조를 면할 수 없으며 국내 수요의 원만한 충족을 보장하지 못 할 뿐 아니라 예속 경제의 참혹한 처지에서 결코 벗어 날 수 없게 한다.

정태식,『우리 당의 자립적 민족 경제 건설로선』(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63), 9~11쪽

********

자력갱생. 이것은 자기 나라 혁명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주체적력량에 의거하여 완수하려는 철저한 혁명적 립장이며 자기 나라 건설은 자기 인민의 로동과 자기 나라의 부원으로 진행하려는 자주적 립장입니다.

이러한 혁명적 립장과 혁명적 원칙을 견지하여야만 우리는 어떠한 복잡하고 어려운 정세에서도 혁명적 절개를 굽히지 않고 투쟁을 계속할 수 있으며 전진도상에서 제기되는 난관과 애로를 용감하게 이겨내고 혁명투쟁의 승리와 건설사업의 성과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이 없으면 자기의 힘을 믿지 않게 되고 자기 나라의 내부원천을 동원하기 위하여 노력도 하지 않게 되며 안일성과 해이성에 사로잡히고 소극성과 보수주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어떤 민족이든지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하여야만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고 나라의 부강발전과 민족의 번영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자립은 정치적 독립의 물질적 기초입니다. 경제적으로 외세에 의존하는 나라는 정치적으로도 다른 나라의 추종 국가로 되며 경제적으로 예속된 민족은 정치적으로도 식민지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하지 않고서는 사회주의의 물질 기술적 토대를 쌓을 수 없으며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성과적으로 건설할 수 없습니다.

김일성,「국가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자주, 자립, 자위의 혁명정신을 더욱 철저히 구현하자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4기 제1차 회의에서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정강, 1967년 12월 16일」, 『천리마운동과 사회주의건설의 대고조에 대하여』(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0), 317~318쪽

그렇다면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경제적 교류가 북한의 '민족경제 수립'에 있어 수행해야 할 역할은 무었이었을까요? 이에 대한 김일성의 생각은 다음의 인용문이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 시장을 공고발전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매개 형제나라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건설의 공동위업의 승리를 위한 정치적 리익으로 부터 출발하여 경제적 호상관계에서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숭고한 정신을 발휘하여 협애한 민족리기주의를 철저히 없애는 것 입니다. 특히 발전된 사회주의 나라들이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나라들에 어떠한 정치적 부대조건도 아무런 사심도 없는 더 많은 물질적 지원을 주어야 할 것 입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들이 제국주의 렬강들의 경제 봉쇄를 성과적으로 물리칠 뿐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과의 거래를 적게 하고 사회주의 시장에 의거할 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어야 할 것 입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외무역관계에서도 결코 계급적 립장을 떠나거나 공산주의적 도덕과 동지적 의리를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 입니다.

김일성, 「국가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자주, 자립, 자위의 혁명정신을 더욱 철저히 구현하자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4기 제1차 회의에서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정강, 1967년 12월 16일」, 앞의 책 362쪽

********

발전한 형제 국가가 뒤떨어진 나라에 대하여 사심 없는 원조를 제공하여 자립적 민족 경제의 건설을 최대한으로 촉진하며 락후한 나라는 자력 갱생의 정신으로 부터 출발하여 최단 기간에 나라의 경제력을 강화하여 형제국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으로 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정태식, 위의 책 31쪽

위의 인용문은 '외국의 간섭은 귀찮으니 경제적 지원은 아무 조건 없이 날로먹게 해주세요' 정도로 번역하면 적절할 것 입니다.

김일성은 정치적 자립(=고립)을 위해 자체 완결적인 산업 구조를 필요로 했으며 외국과의 교류는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최소한의 교류 또한 북한에 대해 정치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선에서 용인되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 입니다. 북한은 전후복구기에 사회주의 국가들의 막대한 원조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만 김일성은 대외 원조보다는 북한의 자체적인 역량을 과신했습니다. 동시에 대외지향적인 공업화를 외국에 대한 경제적 예속의 길로 보았다는 점은 북한경제가 1960년대 남한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가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잘 알고 있지요.

2010년 1월 19일 화요일

오프 모임 일자를 조정해 보려 합니다

신년 인사도 드리고 이벤트에 당첨되신 분들께 책도 나눠드릴 겸 해서 다음주에 오프 모임을 가질 계획입니다. 지금 생각중인 장소와 날자는 아래와 같습니다.

날자 : 1월 28일(목) 또는 1월 29일(금)
시간 : 오후 7시 또는 7시 30분
장소 : 강남역 옥토버페스트
기타 : 회비 1만5천원

참석하실 분들께서 의견을 주시면 최종 공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군의 M-24 경전차 운용과 관련된 의문 하나

한국군이 한국전쟁 기간 중 잠시 M-24 경전차를 운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즉 1952년에 보병학교 전차교육대의 교육용으로 20여대의 M-24를 도입하여 사용하다가 같은해 말 다시 대만으로 양도했다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미국 국방부장관실 문서 중에서 한국군이 1954년에도 M-24 경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어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954년 4월 30일자로 되어 있는 한국군 장비목록표에는 한국군의 기갑장비에 77대의 M4A3E8 중형전차 외에 21대의 M-24 경전차가 있는 것으로(In Hands of Troops)로 나타나 있습니다.* 보고서의 성격상 오타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1952년에 대만군에 M-24를 양도한 뒤 다시 도입된 기록이 있는지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Assets of selected items of equipment available to ROKA as of 30 April 1954', RG 330, 330.2 General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OSD) 1941-87, 330.2.4 Records of Other Special Assistants Entry 185, Van Fleet Report Files, Box 11, Tentative Proposal for Support of ROK Army, etc.

2010년 1월 17일 일요일

이벤트 공지 - 당첨자 발표

책 나눠드리는 이벤트의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정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죄송)

추첨은 the Hat이라는 프로그램으로 했습니다. 추첨을 돌리는것도 살짝 귀찮더군요.

책을 신청하신 분과 당첨되신 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청자 항목에서 이름 뒤에 괄호와 숫자가 표시된 분은 저에게 에반게리온 영화표를 인증해 주신 분 들입니다. 예를들어 카린트세이님의 이름 뒤에 (+6)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카린트세이님이 제게 에반게리온 영화표 여섯장을 찍은 사진을 보내주셨다는 것 입니다. 따라서 카린트세이님은 추첨할 때 7표로 계산되었습니다. 카린트세이님과 oldman님은 신앙심이 돈독하셔서 대부분의 추첨에서 사실상 경쟁자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외가 하나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사를 추첨할 때는 신기하게도 불리한 확률에도 불구하고 漁夫님이 선정되셨습니다.



진리의 에바 신앙을 뛰어넘은 漁夫님의 행운에 경의를 표하는 바 입니다.

책을 나눠드리는 방식은 두 가지로 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제가 1월 말에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해서 나눠드리는 것 입니다. 그냥 책만 나눠드리면 재미가 없으니 신년인사(?)를 겸해 한번 얼굴도 뵙고 덕담(!?)도 나누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술자리는 1월 29일에서 1월 31일 사이로 정할려고 생각 중 입니다. 이 어린양의 느글느글한 면상을 마주하고 맥주한잔 하시면서 책을 받으실 분들은 댓글을 달아주십시오.

두 번째는 지방에 계신 분들, 특히 경상도나 전라도 등 먼 곳에 계신분들에게 택배로 보내드리는 것 입니다. 이벤트에서 나눠드릴 책 중에는 제 친구가 드리는 것도 있으니 택배로 보내드리는 것은 신년 술자리가 끝난 다음이 될 것 입니다.

당첨되신 분들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책을 받고 싶으신지 댓글에 달아 주십시오.

우리 여자들을 지킵시다! - 안방전선 방어작전???

「또 하나의 전선 : 2차대전 중 독일과 영국의 안방전선」과 엮은 글 입니다.

즉 날로 먹자는 포스팅이지요;;;; 언제나 그렇듯 땜빵용 불법날림번역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전쟁에서 안방전선의 중요성이 어떤 방식으로 강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입니다.

"우리" 여자들을 지킵시다(Defending "our" women)

성 (性)은 민족주의에서도 이용된다. 민족은 여성화하고 국가는 남성화 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여성은 의미에 따라 민족으로 상징되며 백여년 전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기세를 떨치면서 여성과 (민주화 된)남성 대중은 정치적 맥락으로 포섭되었다. 여성의 모습은 19세기 벵갈 민족주의의 밑바탕에 깔린 상징적인 의미와 같이 혼란스러운 집단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어떤 집단을 통합하거나 또는 축출하기 위해 영토의 경계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육체를 민족의 상징, 집단 내부의 표식, 또는 남성에 의해 지켜지고 보호받아야 할 국가적 '자산'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 여자들이 강간당하는 것은 적국의 남자들이 민족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한 은유 방식이 되기도 했다. 한 인종 집단이 "민족의 영역이 위협받거나 위태롭다고" 느꼈을 때 이것은 노래나 전설을 통해 적들이 어린 여자를 납치하거나 유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는 "영웅이 될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미국 남북전쟁과 전후 남부의 복구 시기에 남부 백인 여성이 흑인과 섹스를 한다는 상징은 남부 백인 남성들을 동원하는 기제가 되었다. 2차대전 초기 독일의 폴란드나 폴란드 침공, 또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과 같은 군사적 침략은 "강간"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양차 세계대전 시기의 전시선전은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간이라는 주제를 활용했다. 1차대전 당시 영국 정부는 독일군의 강간에 대해 선전하면서 "당시 (독일에) 점령당한 나라의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것을 통해 전쟁을 상기시키고 묘사했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군 병사들에게 그들이 전선에서 싸우는 동안 러시아군이 그들의 고향을 점령하고 그들의 여자를 강간할 것이라는 전단을 살포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은 오스트레일리아군 병사들에게 미군이 그들의 여자와 놀아나고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선전을 했다. 독일에서는 프랑스 여자들이 프랑스 식민지군대의 흑인들과 섹스를 하고 영국 여자들이 미군의 흑인 병사들과 섹스를 한다는 선전을 했다. 과거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각 민족 상호간의 강간이 "민족의 표식"이 되었으며 다른 민족집단을 위협적인 강간마들로 묘사하는 선전을 통해 각 민족집단 내부의 단합을 강화했다.

민족을 여성화 하는 방식은 (강간 피해자 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의 성적 유동성을 제약하면서 전통적인 성차별을 강화했다. 1990년대에 크로아티아 정부는 여성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행위, 그중에서도 특히 낙태를 비난했다.(크로아티아의 집권당은 '태아도 크로아티아 민족의 일원이다'라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세르비아의 정교회 총대주교는 전쟁에서 하나 뿐인 자녀를 잃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아이를 낳으라고 권했다. 여성들은 사회적 재상산이라는 역할 외에도 "고장의 전통을 보존하고 .... (그렇게 함으로써) 민족의 미덕을 발휘" 하기 위해 집단의 문화를 수호하는 역할도 맡아야 했다.

"우리" 여자들에 대한 적들의 위협이라는 상징은 아주 기괴한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1997년에 팔레스타인 내에서 판매되는 이스라엘의 껌에는 아랍 여성들을 성적으로 흥분시키고 동시에 아랍인의 출산률을 낮추기 위해서 소녀와 소년들을 불임으로 만드는 프로게스테론(progesterone) 성분이 첨가되어 있다는 주장을 했다.(이런 소문 중에는 이슬람 도덕을 약화시키고 여성들을 성적으로 속박해 정보원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도 있었다) 이 괴소문은 널리 확산되었는데 사실 그 껌들의 원산지는 스페인이었으며 독립된 기관에서 분석한 결과 프로게스테론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프로게스테론은 여성의 성욕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성욕을 다소 감소시키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그렇다고 이 성분이 피임에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Joshua S. Goldstein, War and Gender : How Gender shapes the War System and Vice Vers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p.369-371

언제나 그렇듯 잘사는 양키의 존재는 잘 살지 못하는 남자들을 두렵게 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을 애낳는 기계로 여기는 것은 남의 일도 아닌 것이 남조선의 보수반동집단(?!)도 비슷한 접근법을 취하고 있지요. 물론 한국은 전쟁 상황은 아닙니다만 사회적으로 위기를 느낄 정도로 전반적인 상황이 좋지 않고 희한하게도 이런 상황에 맞춰 여자들을 갈궈대고 있습니다. 여기에 맞춰 보수적인 남성들은 여자들의 성적 방종과 영어 강사하러 온 양키나 공장일 하러 온 파키스탄인이 한국여자와 자는 것을 맹렬히 비난하지요. 어떻게 보면 영어 강사하러 온 양키는 돈 많은 GI에, 공장일 하러 온 파키스탄인은 식민지군대의 흑인이나 강간마 러시아군과 유사한 이미지 같기도 합니다. 여기에 요상한 소문이 뒤섞여 야릇한 괴담으로 진화하기도 하지요.

한국의 가부장적인 민족주의가 사회경제적 어려움과 맞물리면서 전쟁에서나 나타날 법한 요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야 말로 진짜 전쟁인지도;;;;

용서는 없다

시간을 내서 '용서는 없다'를 봤습니다. 그동안 에반게리온만 보느라 다른 영화는 거의 보질 못했는데 '용서는 없다'가 2010년 들어 처음 본 한국영화가 되었군요.

사실 용서가 안되는 영화라는 가혹한 혹평이 있길래 호기심이 동하더군요. 그래서 주말 오후에 롯데시네마에 가서 거금 9000원을 들여 봤습니다. 제 생각에는 용서가 안될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으나 어쨌든 좋은 영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 줄거리가 퍼질 대로 퍼져있어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도 아시겠지만 영화는 매우 비극적으로 마무리 되고 이야기의 진행도 다소 엉성합니다. 스릴러가 되기에는 좀 모자란 영화라고 해야 할까요? 논리적으로 허술한 장면이 한 두군데가 아닌데다 등장인물들의 행동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로 멍청합니다. 비극적인 결론으로 끌고 나가기 위해서 진행과정들을 지나치게 억지로 끌어맞췄다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영화는 독창적이지도 않습니다. 한국영화에서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 범죄자와 거래한다는 방식은 이미 세븐데이즈에서 한 번 봤고 영화가 준비한 반전이라는 것은 올드보이에서도 본 것 같은 구조입니다. 게다가 결말부분은 데이빗 핀처의 세븐의 결말을 보는 것 같더군요. 물론 천지개벽이래 세상에 독창적인 것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지만 이건 너무 심했습니다. 짬뽕도 잘 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네요.

게다가 한혜진이 연기한 여형사는 너무 뻔해빠진 등장인물이라 없는게 나을 뻔 했습니다. 물론 한혜진이 나쁘진 않습니다. 아주 아주 예쁘잖아요. 하지만 남자들로 가득찬 조직에서 꼴마초에게 시달림 받는 유능한 여자라니, 이건 너무 흔해빠진 캐릭터 아닙니까. 물론 묘사가 좋았다면 나쁘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한혜진의 연기가 너무 어색합니다. 대사도 문어투인데 한혜진의 연기는 그걸 그대로 받아 읽는 수준이라. 차라리 한혜진이 영화 중간 중간 나오는 나가요 언니라던가 아니면 부검대 위의 시체를 연기하는 쪽이 더 나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약 한혜진이 부검대 위의 시체였다면 이 영화에 후한 점수를 주었을지도;;;; 오오. 예쁜 시체다!) 게다가 한혜진이 연기한 인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인지는 몰라도 극중에서 한혜진을 괴롭히는 선배 형사(성지루)가 아주 무능하고 멍청한 인물로 묘사되었습니다. 성지루 같이 괜찮은 배우를 이런 멍청한 역할로 소모하다니. 이건 좀 심하지 않나요.

설경구는 좀 불쌍했습니다. 비극적인 영화에 아주 잘 맞는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영화의 시나리오가 꽝이었고 연출도 별로였다는 겁니다. 어쨌든 설경구는 괜찮았습니다.

살인범 역할을 맡은 류승범도 괜찮았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류승범이 맡은 등장인물이 더럽게 재미없는 인물이라는 점 입니다. 좋은 배우가 아깝게 소비되었다는 느낌입니다.

스릴러라기에는 너무 맥빠지는 영화였습니다. 차라리 잔인한 장면을 더 많이 늘렸다면 개인적으로 좋은 점수를 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10년 1월 14일 목요일

남자사냥;;;;

얼마전에 썼던 「또 하나의 전선 : 2차대전 중 독일과 영국의 안방전선」이라는 글에 아래와 같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nimishel님 말씀 마따나 소련 여군의 후덜덜한 남자 사냥에 대한 괴소문은 꽤 유명한 편이라서 대중매체에도 간혹 나타나곤 합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접한것은 1990년대인데 바로 반공의 횃불(;;;;) 한국논단에서 출간한 서적을 통해서 였습니다. 반공청소년 어린양은 1995년 어느날 한국논단을 보다가 일본공산당 당원 하기와라 료(萩原遼)라는 사람이 쓴 『한국전쟁』이라는 책이 번역출간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뭔가 솔깃해 이 책을 거금 7천원을 들여 샀는데 의외로 물건이더군요(;;;;) 반공서적 답게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온갖 난행을 묘사하고 있었는데 이게 꽤나 재미있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 소련 여군의 남자 사냥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서술이 아주 재미있으니 원문을 그대로 옮겨 보도록 하죠.

소련군 여군병사에 의한 조선인 남자사냥도 있었다.

이 말을 해준 사람은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장건섭(張健燮)씨. 장씨는 1924년 생으로 68세. 일본군에 징병되어 8.15해방은 평양에서 맞았다. 21세였다.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 장씨를 만나 그의 저서 『생과 사의 갈림길』을 얻었는데 그 속에 쓰여있다. 장씨 친구의 체험이라고 되어 있는 소련군 여군 병사에 의한 강간사건은....

어느날 평양 거리에서 갑자기 소련군 지프차가 섰다. 한 여군병사가 내리더니 권총을 대고는 "타라"한다. 차안에 있던 또 하나의 여군이 헝겊으로 눈을 가렸다. 지프차는 여기 저기를 빙빙 돌다가 한 건물에 닿았다. 소련군 병영이었다.

눈 가리개를 풀고 끌려간 방에서 5명의 여군병사가 차례 차례로 덤벼들어서 욕정을 채웠다. 그날 중으로 집에 돌려보내 주려니 생각했는데 사흘이나 감금당했다. 덩치 큰 풍만한 육체의 젊은 여군이 쉴새없이 차례로 덮쳐 거친 숨소리로 '할러쇼 할러쇼' 하며 헐떡인다.

청년의 두 눈은 쑥 들어가고 일어서지도 못하게 되었을때 겨우 석방되었다. 또 눈 가리개를 한 뒤 시내의 한 모퉁이에 내려주었다.

나는 장씨에게 물었다.

"이건 친구의 이야기로 쓰셨습니다만 굉장히 리얼한데, 혹시 선생님 자신의 체험이 아닙니까?"

장건섭씨는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하기와라 료(萩原遼) 지음/최태순 옮김, 『한국전쟁 : 김일성과 스탈린의 음모』(서울, 한국논단, 1995), 53~54쪽

이래서 반공서적이 재미있지요(;;;;)

2010년 1월 13일 수요일

이벤트 공지 - 나눠드릴 책이 조금 더 늘어났습니다

넵. 제목 그대로 입니다.

이벤트를 통해 나눠드릴 책이 조금 더 늘어났습니다. 제 친구 하나가 처분하다가 남은 책들을 저를 통해 나눠드리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책들이 이번에 나눠드릴 목록에 추가되었습니다.

기동전이란 무엇인가 / 박기련 지음 / 일조각 / 1998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1,2,3 / 박세길 지음 / 돌배게 / 1994

무사와 디지털 전사 / 이준철 지음 / 북랜드 / 2001

산업혁명사 상,하 / 뽈 망뚜 지음, 정윤형, 김종철 공역 / 창작과 비평사 / 1992

알라모 / 장우룡 지음 / 새만화책 / 2004

영웅 김영옥 / 한우성 저 / 북스토리 / 2006

중국의 붉은별 / 에드가 스노우 지음 / 두레 / 1985

첩보전쟁 / 윌리엄 V. 케네디 지음 권재상 옮김 / 자작나무 / 1999

페르시아 신화 / 편집부 편역 / 글사랑 / 1995

Pirates terror on the high seas / Angus konstam / Osprey / 2001

the vital guide to military aircraft / ? / airlife / 1994

war on the eastern front / James Lucas / military bookclub / ?

새로운 책이 목록에 추가되었으니 이벤트를 조금 더 연장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벤트 공지를 이번 일요일, 즉 1월 17일에 하는 것으로 변경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이벤트는 이쪽으로.

어떤 예측

1958년, 북한 정부는 전후복구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고 자평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막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원조가 밑바탕에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중공업 위주의 정책을 견지한 '당의 올바른 노선'에 있었다고 믿었던 것 이지요. 이렇게 자신감을 얻은 북한 지도부는 혼란을 겪고 있는 남한에 대해 우월감을 표출하게 됩니다. 아래의 인용문은 그러한 경향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쏘베트 군대의 결정적 역할에 의하여 한날 한시에 해방된 공화국 남반부에 기여든 미 제국주의자들은 남조선을 강점한 첫날부터 일제를 대신하여 그 보다도 더욱 악랄한 식민지 예속화 정책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8.15 해방후 우리나라 남반부에서는 어떠한 민주주의적 사회-경제 개혁도 실시되지 않았다. 우리 인민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으며 8.15 해방 직후 일제의 패잔 무리들과의 결사적 투쟁에서 우리의 로동자들이 확보하였던 공장과 광산들은 미제 독점 자본에 의하여 횡탈되였거나 매국적인 예속 자본가들의 수중에로 넘어갔다.

이리하여 우리나라 남반부 공업은 미제의 식민지 략탈 정책에 의하여 파탄과 파멸의 구렁이로 떨어지게 되었다.

오늘 남조선에서는 풍부한 전략 자원의 략탈과 관련되는 일부 공업 부문들, 례컨데 중석, 흑연, 동광과 기타 일부 섬유 제품의 생산이 극이 파동적인 곡선을 그리면서 그 생산을 풍전 등화의 운명으로 간신히 지속할 뿐 기계 제작, 야금, 화학 공업 및 기타 중요 공업 생산 부문은 전면적으로 파탄되고 있다.

8.15 해방전에 남조선에 집중되였던 일제의 식민지적 기계 제작공업 마저도 완전히 파괴되였다. 뿐만 아니라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으로 말미암아 기계 수입조차 억제당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 남조선 경제는 기계에 대한 초보적인 수요조차 충족시킬 수 업는 형편에 처하였다.

제철 공업에서 본다면 그의 대표적인 기업체들인 '대한 중공업' '삼화 제철'에서 생산되던 극소량의 선철류조차 국내에서 소비되지 못하고 생산비 이하의 렴가로써 일본에 공급되였었는데 최근에는 이것마자 증가되는 적자에 못이겨 조업을 중단하고 있다.

남조선 전체 공장수의 33%, 종업원 수의 38.8%를 점하고 있는 방적 공업에서는 1956년 8월 현재로 '대한방적협회'의 발표에 의하면 면방직 공장의 조업률이 62%에 불과하며 특히 중소 직물공장에서의 조업중단률은 95%이고 전체 기업체의 82%가 조업 마비 상태에 빠지고 있다.

1955년에 남조선 제조 공업 총생산액 중에서 36%, 기업체 수의 22%를 차지한 식료품 공업은 그 대부분이 미제의 잉여 생산물인 소맥과 당밀을 원료로 하는 밀가루 제조 공업과 제탕 공업, 미국의 수입 원료로써 그들의 리윤 찌끼를 얻어 먹는 예속 자본가를 육성하는 부문으로 되고 있다.

오늘 남조선의 공업은 이와 같이 급속한 몰락과 전면적인 붕괴의 일로를 걷고 있으며 다시 소생할 아무런 전망도 없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미제국주의자들의 소위 '원조'의 '혜택'이며 그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김정일, 「우리나라 공업의 발전」, 『우리 나라의 인민 경제 발전』(평양, 국립출판사, 1958), 139-140쪽

60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한국이 북한 공업은 급속한 몰락과 전면적인 붕괴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됐으니 묘하지요.

게다가 위의 인용문에서 북한측이 비판한 남한의 '매국적인 예속 자본가'들이 전후복구시기 기초적인 자본을 축적하여 1960년대 공업화의 바탕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은 정말 아이러니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런 '예속 자본가'들의 후계자들 중 몇몇을 '민족 자본가'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지요.

북한이 올바른 노선이라고 생각한 중공업화는 자체적인 자본 축적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추진된 까닭에 지속적인 원조를 필요로 하는 구조를 고착화 시켰고 이것은 1970년대 이후 북한 경제가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는 단초가 됩니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 중반까지 북한식의 중공업화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많았고 심지어는 남북간의 경제가 역전된 1970년대 까지도 남한 경제의 붕괴를 믿어 의심치 않는 지식인들이 있었다는 점을 보면 예측을 하기 위해서는 정치인 부럽지 않은 낯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10년 1월 12일 화요일

이벤트 공지를 조금 늦추겠습니다

이벤트를 신청해 주신 분들께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벤트 공지를 조금 늦추려고 합니다.

원래 어제 저녁에 결과를 공지하고 책을 나눠드릴 날자와 장소를 정하려고 했는데 주말에 급한일이 생겨서 강원도에 다녀오게 됐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조금 더 있어서 이것이 정리되는 대로 공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오늘, 즉 화요일이나 수요일 중에는 정리가 될 것 입니다.

2010년 1월 7일 목요일

중앙시네마에서 에반게리온을 연장상영합니다.

중앙시네마에서 에반게리온 序와 破를 다음주 수요일까지 연장상영합니다.

만세!!!

내일까지 해야할 일이 있어서 1월 1일에 본 것이 마지막 극장관람이 되나 했는데 다행히 더 볼 수 있게 됐군요.

제가 나눠드리는 책의 추첨은 에반게리온 상영이 종료되는 주의 일요일에 하겠다고 공지를 드렸는데 에반게리온이 연장상영에 들어갔으니 다음주 월요일 저녁에 공지 하는 것으로 변경 하겠습니다.

또 하나의 전선 : 2차대전 중 독일과 영국의 안방전선

넵. 많은 분들이 눈치 채셨겠지만 불법날림번역 땜빵포스팅입니다. 그래도 살짝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바로 2차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선 중 하나인 '안방전선'의 이야기 이지요.

독일과 영국 여성들의 생활은 두 나라의 전세가 점차 변화해가면서 총력전의 다섯가지 요소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 첫 번째는 대규모의 전시 동원으로 인해 가족구성원의 남성들이 군대나 공장에 징집되면서 수많은 여성들이 잠시 남성들과 떨어져 지내거나, 또는 떨어져 지낼 가능성이 높아지거나, 영원히 이별해야만 했다. 두 번째로 독일과 영국 모두 자국의 군인이나 외국군인, 전쟁포로, (독일의 경우에는) 외국인 노동자 등 외부 남성들과 접촉하는 경우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민간인을 목표로 한 폭격으로 대규모의 구호업무와 소개가 벌어졌다는 점이다. 네 번째는 경제적인 총력전으로 물자의 부족과 배급, 그리고 암시장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다섯번째는 남성들이 징집되었기 때문에 여성들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민간 업무나 군대의 보조적인 업무에 투입되거나 군에 지원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여성들의 삶에 끼친 영향은 나라마다 달랐으며 또한 개인의 환경별로도 달랐다. 특히 독일의 경우 "가치있는" 사람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 대한 공식적인 처우는 "인종적인 적"으로 구분되는 사람들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여성들과 독일의 "가치있는" 여성들이 총력전으로 부터 받은 영향은 비슷한 면이 많았으며 또한 다른 점도 많았다. 현지 여성들과 외국인들과의 관계는 다른 점이 많다고 여겨져왔다. 그러나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전쟁 수행을 위해 여성들을 동원한 지역에서는 다른 점 보다는 비슷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독일의 경우 남성이 전선에 투입되거나 점령지역에 배치되어 가정을 비우는 경우가 영국 보다 많았고 그 기간도 더 길었다는 것이다. 사상자의 숫자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독일 남성 중 300만명이 전사한 반면 영국군의 사망자는 독일의 10분의 1정도에 불과했다. 이때문에 독일은 영국보다 과부, 자식을 잃은 어머니, 아버지를 잃은 딸, 형제를 잃은 여성, 애인을 잃은 여성이 훨씬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독일에서는 남성들의 사망으로 인한 여성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1941년 11월 부터 약혼한 여성이 임신한 상태에서 남자가 전사했을 때 "영혼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해 태어나게 할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지 않도록 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독일에서는 전사자의 숫자가 많았던 만큼 전쟁포로와 실종자도 영국에 비해 훨씬 많아서 전쟁 말기와 종전 직후에는 수많은 독일 여성들이 현실적인 이유에서 독신을 택했다. 자신의 남자가 북아프리카나 중동, 극동 전선에 배치된 영국 여성들의 경우 불안감이 심했겠지만 이런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었으며 1944년 중반 이전까지 군대에 징집된 영국 남성의 상당수는 영국 본토에서 훈련을 받으며 지루한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장기간 가족과 가정으로 부터 떨어지게 되면서 가정에 있어서나 사회생활에 있어서나 익숙하지 않은 책임을 떠맏아야 했다. 여성들은 상점이라던가 독일에서는 작은 농장(여성들은 전쟁전에는 남편의 지도하에 가끔씩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과 같은 가업을 담당해야 했던 것이다. 여성들은 재주껏 아이를 키워야 했으며 어머니가 노동을 하는 경우 아이들이 탈선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포이커트(Deltlev J. K. Peukert)의 연구에 따르면 독일의 반체제 청소년 조직이었던 에델바이스 해적단(Edelweißpiraten)에 참여한 아이들은 대개 아버지가 전사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부부나 연인들이 생이별하게 되면서 평화시에는 안정적이었던 관계들이 심한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지역의 남성들이 군대나 산업계에 동원된 상태에서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의 남성들이 쏟아져 들어온 곳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영국은 전쟁 전 기간에 걸쳐 외국 군대의 점령을 받지 않았고 독일도 1944년 말 까지는 마찬가지였지만 두 나라 모두 전쟁 기간 중 군부대의 이동이 빈번했으며 전선으로 파병되기 전 징집된 신병들이 자국 내의 군부대로 입소했다. 영국은 전쟁 대부분의 기간 동안 프랑스군, 네덜란드군, 폴란드 군 등 약 50만명 정도의 외국군대가 주둔했으며 1944년 6월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에는 그 숫자가 거의 150만명에 달했다. 많은 여성들이 군인들을 호기심과 일상생활의 즐거움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종종 이들로 부터 성병을 옮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성행위를 매개로 한 질병이 1941년 부터 1942년 사이에 급증했으며 독일의 함부르크에서는 1942년에 질병에 걸린 여성의 3분의 2가 군인들로 부터 성병에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에서는 도시에서 시골로 피난한 여성들이 근처에 군부대가 있을 경우 이곳의 군인들과 접촉했으며 정부는 10대 소녀들이 군인들의 왕래가 빈번한 기차역이나 그 밖의 지역에 출몰하는 것에 대해 자주 우려를 포명했다. 군인을 남편으로 둔 많은 독일 여성들은 특히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생과부로 지내는 기간이 늘어났으며 군인들이 독일 본토나 외국에서 부정한 짓을 저지른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들도 비슷한 쾌락을 즐기려 했다. 독일 정부는 여성들의 문란한 행위에 대해 점점 우려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942년에는 "전선의 병사들에 대한 모욕죄"를 도입한 데 이어 다시 간통한 여성은 가족수당의 지급 대상에서 제외했고 1943년 3월에는 전사한 군인의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을 경우 연금 지금대상에서 제외하기 위해서 "사후 이혼"을 합법화 했다.

한편 영국과 독일은 시간상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미군이 대규모로 주둔했다. 크리스타벨 빌렌베르크(Christabel Bielenberg)는 독일에서 만난 미군 조종사의 "건강하면서도 행복해 보이며 또한 풍요로운" 모습에 대해 기록하기도 했으며 영국 여성들은 미군의 "멋진 군복과 .... 많은 돈, 그리고 자잘한 사치품을 무한정 가지고 있는 듯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전쟁 말기에 독일 여성들의 곤경은 심각했으며 독일의 공공시설들은 파손되거나 완전히 파괴되었고 식량 조차 얻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점령군인 연합군, 특히 미군과 관계를 가지면서 초콜렛이나 나일론 스타킹과 같은 물건을 불법적으로 구했으며 이것들을 직접 쓰거나 식량을 얻기 위한 물물교환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뷔르템베르크의 하일브론(Heilbronn)에 진주한 미군들은 "얼마 안가 뒤스부르크(Duisburg)에서 피난온 문란한 여자나 초콜렛으로 유혹한 슈바벤(Schwaben) 여자들을 자신의 여자친구로 삼았다." 영국에서도 물자 부족은 심각했다. "우리는 자크마(Jacqmar) 스카프나 나일론 스타킹을 가지고 싶어 하는 여자들을 항상 의심했다. 그 여자들이 (미군들과) 자유롭게 어울린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외국 군인들을 사귀고 싶어하는 젊은 여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화장품과 나일론 스타킹, 그리고 초콜렛을 무한정 가지고 있는 외국 군인들에게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실정, 그리고 실제보다 부풀려진 소문들은 병사들의 사기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크랭(J. A. Crang)은 "멋진데다 돈 많은 캐나다군과 미군이 (영국 본토에) 주둔하게 되면서 영국군 병사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조성되었다"는 점을 잘 서술했다. 영국군은 이 문제에 크게 신경썼으며 공무원들을 동원해 떨어져 지내는 부부가 결혼생활이 파탄에 이르지 않도록 중재하도록 했다. 외국군대가 떠나면서 "안도하는 분위기가 퍼졌으며 ... 아이를 가진 채 남겨진 많은 독신여성들은 외국 군인들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원망했다."

당당하고 상대적으로 풍족한 외국군인들이 외롭고 불행한 여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동안 다른 한편에는 사회적, 성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영국에 수용된 독일과 이탈리아군 전쟁포로들은 공식적인 방침에도 불구하고 영국 여성들과 접촉했으며 음식이나 다른 물품들을 얻기도 했다. 또한 영국 여자와 전쟁 포로간에 성적인 접촉도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다. 1943년 부터 영국으로 이송된 전쟁 포로가 급증했으며 이중 일부는 농가에 배치되어 일을 거들었지만 대부분은 포로수용소에 갇혀 엄격하게 격리되었다. 게다가 연합군, 특히 미군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전쟁포로들은 인기가 없을 수 밖에 없었다. 영국과 달리 독일은 1939년 부터 외국인 노동자와 전쟁포로가 많았으며 이 숫자는 1944년에 7백만명으로 최고에 이르렀다. 많은 포로들이, 특히 폴란드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포로들이 독일의 농업 노동력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들은 가족 농장에 함께 살았는데 전쟁 후반기에는 가정의 유일한 남성 노동력인 경우도 있었다. 독일에서는 영국에 비해 여성들이 노동력을 의존하고 있는 외국인들과 성적인 관계를 가질 동기(성적으로 매력을 느끼거나 도는 농장일을 돕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이거나)와 기회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치욕적이게도 이탈리아 포로의 유혹에 넘어간 유부녀들은 매우 심한 도덕적인 경멸의 대상"이 되는데 그쳤으나 독일에서는 외국인과 사랑에 빠진 "아리아인" 여성은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거나 때로는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독일에서는 지역의 나치당 간부들이 여자들을 수용소로 보내기 전에 공개적으로 삭발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1941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영국에서는 전쟁포로와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단지 국가에 대한 충성과 전통적인 성적 도덕의 문제였으나 독일에서는 정권의 과도한 인종적 정책으로 "혈통을 더럽히는 행위"는 가혹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Jill Stephenson, "The Home Front in "Total War" : Women in Germany and Britain in the Second World War", A World at Total War :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pp.213~217

인용한 글에서 설명하고 있듯 총력전 체제하에서 전통적인 가정과 여성의 역할은 완전히 산산조각 나게 됩니다. 물론 유럽에서 전쟁과 외국군대의 주둔같은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지만 2차대전은 그 규모면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사회에 미친 충격이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독일은 총력전 체제로 장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여성의 역할이 확대된데다 패전으로 인해 수백만의 외국군대가 쏟아져들어오는 사상초유의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인 가족과 여성의 역할이 유지될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요. 인용한 글에서 나타난 것 처럼 독일이 정부적인 차원에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 특히나 성적으로 정숙한 여성성을 지키기 위한 제도를 강구한 이유는 아마도 전통적인 여성역할의 붕괴가 사회적으로 감당하기 힘겨울 정도로 걷잡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 입니다. 효과가 신통치 않았던 모양입니다만.

이렇게 이미 장기간의 전쟁으로 전통적인 도덕이 위태위태해진 독일 사회에 미국이라는 재미있는 존재가 등장하면서 사태는 콩가루로 변해갑니다. 윌러비(John Willoughby)는 'The Sexual Behavior of American GIs during the Early Years of the Occupation of Germany'라 는 제목의 소논문에서 점령 초기 미군 당국이 독일 민간인들과의 사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지만 현실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점령군인 미군이 인기가 많다보니 점령초기 부터 여기에 반감을 가진 독일 남자들이 미군을 공격하는 사례가 간혹 발생했다고 하지요. 그리고 마치 한국의 인터넷 게시판에서 보수적 성향의 남자들이 여성들의 허영심이나 성적인 방종을 비난하는 것 처럼 점령초기의 독일에서도 미군과 사귀는 여자들을 비난하는 벽보가 붙기도 했다고 합니다. 약간 더 골때리는 것은 미국쪽에서도 일부 인사들은 독일 여자들이 순진한 미군 병사들을 사냥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는 것 입니다. 이런 점은 한국전쟁기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매춘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도덕적인 비난이 꽤 심했다고 하지요.(한국전쟁기 매춘과 이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는 이임하의 『여성, 전쟁을 넘어 일어서다』를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다음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전쟁포로가 현지 여성들을 유혹하는 경우입니다. 연합군에 사로잡힌 독일군 포로보다 독일군에 사로잡힌 소련군 포로가 이 점에서 유리했다는 점이 흥미롭지요. 물론 전쟁초기 소련군 포로의 경우는 독일의 농장에 배치받기 전에 요단강을 건너갈 확률이 더 높긴 했습니다만. 토마스 크레취만이 주연으로 나온 독일영화 스탈린그라드에서도 영화 중간에 한 병사가 마누라가 외국인과 바람이 났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장면이 있기도 합니다. 물론 영국이나 미국으로 이송된 독일군 포로 중에서도 현지 여성을 꼬셔서 눌러 앉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사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귀도 크놉(Guido Knopp)의 다큐멘터리에도 나온 게오르그 게르트너(George Gärtner)가 있을 겁니다. 이 양반은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뒤 미국 여자와 결혼해서 미국 시민권까지 취득했다죠;;;; 하지만 인용한 글에도 나와 있듯 여자들에게 훨씬 매력적인 풍족한 양키들이 있었던 까닭에 독일군 포로들은 여자 문제에서는 독일 본토의 러시아인이나 폴란드인보다 더 못했던 모양입니다.


역시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2010년 1월 2일 토요일

이벤트(를 빙자한 창고정리)

저의 비실용적이고 시시껄렁한 블로그를 꾸준히 찾아주시는 분들을 위해서 작은 이벤트를 해 볼까 합니다. 앞의 포스팅에서 말씀 드렸듯 새해 벽두부터 에반게리온을 보는 즐거움을 누린 기념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벤트를 빙자한 재고방출(;;;;) 정도 되겠습니다. 그저 그런 책들을 나눠드리는 것이라 무진장 찔리는군요;;;

아래에 책 사진과 간략한 설명을 올리니 가지고 싶으신 책을 댓글로 적어주시면 그 책을 드리겠습니다.

단. 혹시라도 같은 책에 신청자가 겹칠 경우 추첨을 할 생각입니다. 이 경우에는 에반게리온 극장판(序와 破 모두)을 많이 보신 분이 유리해 집니다. 예를들어 에반게리온을 안보신 분이 '한표'라면 에반게리온을 보신 분은 '한표+에반게리온 관람 회수 만큼의 표'를 가지게 되는 방식입니다. 그럴리는 없겠으나 만약 에반게리온 극장판을 수십번 보신 분이 있다면 그분이 책을 다 쓸어가실 가능성도 있습니다. 에반게리온 영화표를 찍어서 제 메일(panzerbear@지메일.com)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추첨(???)은 에반게리온 극장판이 서울 상영관에서 최종적으로 내려간 주의 일요일에 하고 공지는 곧바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The West Point Military History Series - Ancient and Medieval Warfare : 제목대로 평이한 개설서 입니다. 제목은 중세전쟁사 까지 다루는 것 처럼 되어있으나 대부분의 내용이 그리스와 로마 전쟁사입니다. 그럭저럭 읽을 만 합니다.



서양문명의 역사 1~3권 : 4권이 없긴 합니다만 상태는 나쁘지 않습니다.



Retreat to the Reich - The German Defeat in France 1944 : 아마 이번에 공짜로 드리는 책 중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책이 아닐까 합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패주하는 독일군의 상황을 잘 요약해 놓았습니다.



한국의 군제사 : 역시 평이한 개설서 입니다. 무난하게 읽을만 합니다.



Clash of Wings - World War II in the Air : 2차대전 항공전역에 대한 개설서 입니다. 역시나 무난하게 정리를 해 놓았다는게 특징이라면 특징입니다.



중국근현대사 : 일반적인 개설서라 딱히 설명이 필요하진 않겠군요.



Fighting Aircraft of World War II - 사실 이런걸 드리는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고등학생때 영어공부를 해 보겠다고 산 책인데 사실 요즘은 위키만 뒤져봐도 이 책 보다는 훨씬 알찬 내용이 많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혹시나 가져가실 분이 있으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스크린 밖의 한국영화사 : 친일파가 영화계에 있어서도 만악의 근원이라고 성토하는 좀 뷁스러운 책입니다. 1권을 읽고 무지막지 실망했는지라 1권밖에 없습니다;;;



가미카제 : 괴악한 번역이 일품(?)인 군사소설입니다. 역시 가져가실 분이 있으시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Ostfront - Hitler's War on Russia 1941-45 : 오스프리에서 내 놓는 적당히 잘 정리된 개설서 중 하나입니다. 글도 적당하고 지도도 적당하고 도판도 적당한 무난한 개설서 입니다.



한국의 귀신 : 무라야마 지준의 역작 '조선의 귀신'을 베껴서 잡스러운 괴담집으로 다운그레이드한 잡스러운 책입니다. 고등학생 때 여행을 떠나면서 고속버스터미널 서점에서 산 책인데 그럭저럭 읽을 만 했습니다. 역시나 가져가시겠다는 분만 있으시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비명을 찾아서 - 경성, 쇼우와 62년 : 설명이 필요없는 복슨상님의 대표작(?) 입니다.


이 외에도 정리하다가 나오는 책이 있으면 더 추가해서 올리겠습니다.


※ 조금 더 추가합니다.


Wehrmacht - The Illustrated History of the German Army in WW II : 독일군의 시점에서 바라본 아주 간략한 2차대전사 개설서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 공부한다고 샀다가 부실한 내용에 잔뜩 실망한 한 책 입니다. 이 책 또한 가져가시겠다는 분이 있으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타임라이프 인간세계사 - 탐험시대



타임라이프 인간세계사 - 근대유럽



한국전쟁 : 전쟁기념관이 처음 열었을 때 가서 산 책 입니다. 사실 내용은 정말 별 것 없죠;;;; 가져가시겠다는 분이 있으시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정치와 전쟁 - 20세기의 주요 전쟁을 중심으로 : 사실 이 책도 썩 좋은 책은 아닙니다;;;;



Hell on the Eastern Front - The Waffen-SS War in Russia 1941-1945 : 무장친위대가 동부전선에서 수행한 작전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1월 3일 추가



20세기 결전 30장면 : 싸게 팔길래 한권 샀는데 나쁘지는 않았던 책 입니다. 세부적으로 약간의 문제도 있지만 무난한 개설서 입니다.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 사극 작가로 유명한 신봉승씨의 책 입니다. 재미있게 착착 잘 읽히는 괜찮은 대중서적 입니다.



독일무장친위대 군장가이드




독일군 보병병기 대백과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 작년에 개봉해 쪽박찬 T4의 프리퀼입니다. 잔뜩 기대하고 샀다가 근검절약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준 물건입니다. 가져가시겠다는 분이 있으시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일본전통사회의 이해 : 대학교에 있을 때 교재로 썼던 책인데 개설서로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책 입니다. 제가 수업들으면서 표시한 자국이 조금 있습니다.



임진왜란 - 그것은 그렇지 않았다 : 민중사적 시각에서 임진왜란을 바라본 '괴작'입니다. 네. 정말 설명이 필요없는 괴작입니다. 고등학생 시절 멋 모르고 샀다가 쓴맛을 보게 해 준 멋진 책 이지요.



Das Reich - The Military Role of the 2nd SS Division : 무난한 개설서 입니다. Otto Weidinger의 걸작인 다스 라이히 사단사를 적당히 잘 편집해서 요약한 물건입니다.

중앙시네마에서의 에바 序, 破 연속관람

새해 첫 날인 어제는 중앙시네마에서 느긋하게 에반게리온 序와 破를 관람하며 즐겁게 보냈습니다.메가박스에서 破를 개봉할 때 이벤트로 序와 함께 심야상영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개인 사정으로 그 기회를 놓쳐 아쉽게 생각하던 터였습니다. CGV와 메가박스 등 대부분의 상영관에서 破가 상영중단됨과 동시에 중앙시네마가 에반게리온의 상영을 시작했는데 앞으로 일주일은 상영할 예정이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 번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불만이라면 중앙시네마에서는 필름으로 상영을 해서 화질이 썩 좋지 않았다는 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디지털 상영으로만 보다가 갑자기 필름으로 보니 화질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더군요. 디지털 상영관에서는 아주 또렷하게 보였던 세부적인 묘사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를들어 아스카가 3호기 실험장에서 미사토와 전화통화를 하는 장면을 보면 미사토가 3호기를 바라볼 때 아스카가 타고 있는 케이블카가 올라가는 모습이 필름 상영판에서는 알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소소한 재미가 스크린 구석에 묘사된 세부 묘사를 찾아내는 것인데 그 점에서 불합격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살짝 좋지 않은 화질이 상태나쁜 복사판 비디오로 에반게리온을 처음 봤을때 같은 느낌을 줘서 나름대로 즐겁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약간 이상했던 점은 破를 먼저 상영하고 그 다음에 序를 상영하는 구성을 취했다는 것 입니다. 1월 4일 부터는 序를 먼저 상영하고 破를 다음에 상영하는 방식으로 바뀐다고 하는데 왜 처음부터 이렇게 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이군요.

잡담하나 더. 새해 첫날을 에바 감상을 하면서 즐겁게 시작했으니 기념삼아 작은 이벤트를 하나 해 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