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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4일 월요일

이제 어려운 단계가 왔다(Now Comes the Hard Part)

이집트 사태를 전망하는 다른 글을 하나 더 소개해 볼까 합니다. 이번 글은 2월 10일, 그러니까 무바라크가 퇴진하기 직전  포린 폴리시 인터넷 판에 올라온 콜게이트 대학 부교수 브루스 러더포드(Bruce K. Rutherford) “이제 어려운 단계가 왔다(Now Comes the Hard Part)”라는 글 입니다. 사실 이 글은 무바라크가 퇴진하기 직전에 씌여진 글이라서 그냥 놔 둘까 했는데 나름대로 재미있는 구석이 있어서 올려 봅니다. 현재 진행형인 사태이다 보니 “오 재미있는 글이 올라왔는걸?” 하는 동안 상황이 변해버리니 재미있더군요. 이 글에서는 무바라크 퇴진 이후 미국과 서방세계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것 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그에 따라 각 정파의 이해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날림번역이니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이집트 사태의 다음단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미 이행 과정의 큰 윤곽은 카이로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아마도 이르면 2월 10일 목요일 쯤 호스니 부마라크 대통령이 사임하고 반대파를 포함한 과도 정부가 성립되는 것이 포함된다. 아마도 올해 말 까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 이집트의 헌법과 법규를 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누가 상황을 이끌어 갈 것인지 불분명하다.

개혁 과정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은 주로 세 집단이 될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로, 물론  가장 중요한 집단은 시위대들이다. 비록 무바라크의 퇴진은 그들의 대의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부패의 척결과 시민 사회 및 정치적 권리의 확대, 그리고 경쟁 선거의 시행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 다수가 대의를 위해 전진하면서 크나큰 고통과 상처를 감내해 왔다. 그리고 그들은 3주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타흐리르 광장에 시위대로 모여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표에 대한 실질적인 진척이 이루어 지는 것을 보기 전에는 해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수면 위로 갑자기 부상한 문제는 향후 (권력) 승계의 시나리오 -오마르 슐레이만이 9월 선거 이전까지 과도 정부를 이끌게 된다 -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시위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인 것 같다. 이 계획에 따르면 타흐리르 광장의 군중들이 반대하는 기구인 정보국의 수장을 최근까지 역임했던 슐레이만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만약 이러한 계획을 성공시키려면 일반 반대파 인사들과 노벨상 수상자인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등을 과도 정부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위대가 이들을 존중한다 할 지라도 이들이 리더쉽을 발휘하기를 바란다고 볼만한 징후는 많지 않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4월 6일 운동의 젊은 지도자들(이들은 원래 2008년 섬유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케파야(Kefaya), 가드(Ghad)당, 민주전선, 그리고 무슬림 형제단 등이 정권과 협상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고려해야 할 문제는 타흐리르 광장에서 시위를 일으킨 청년층이 더 많은 이집트인들을 무기한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집트 정부는 시위대가 지치고 일반인들, 특히 중산층들이 지난 수주간의 경제적 붕괴 상태에 분노를 느껴 점차 시위대에 반감을 가지게 되길 원하고 있다. 만약 타흐리르 광장의 군중들이 줄어든다면 시위대의 정치적 지렛대는 기울게 될 것이다. 기세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그럴듯한 방법은 더 많은 일반 시민들이 타흐리르 광장에서 그들의 휴일(과 기도일)을 시위에 쓸 수 있도록 매주 금요일을 “시위의 날”로 하는 것이다. 만약 금요일의 시위 규모가 지속적으로 커지게 된다면 시위대는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의 핵심적인 집단은 이집트의 군부로 이들은 개혁 절차가 진행되면 그들의 다양한 이익을 지켜내야 한다. 장군들이 국방 예산을 지키고 국가 안보에 대한 의사 결정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고수하려 할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장군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는 단지 국방 예산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장군들은 군대를 먹여살릴 뿐 만 아니라 민간 시장에 제품을 판매하고 있는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농장, 공장, 무역 회사 등을 통제하고 있다. 또한 군부는 이집트 전역(특히 지중해 연안과 나일강 일대)에 막대한 규모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중 상당수를 민간 기업에 임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장교단 또한 사적인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장교들은 정권으로 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급여와 식비 및 주거비 지원, 휴양지, 사교시설, 그리고 다른 이득을 제공 받아 왔다.

현재의 정치적 이행 과정은 군부에 상당한 무게가 쏠려 있다. 군부는 질서를 유지하고 정치 체제의 공백 부분을 관리하고 새로운 경제 정책을 도입하는 것을 허용할 것 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 군부는 이러한 모든 기능을 효율적으로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군부는 그들이 부여받은 안보적 역할을 수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 어쨌든 이집트군은 465,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나 군부가 정치적인 공백 상태를 관리할 능력이 있을지는 명확하지 않다.

군부가 민주주의를 지지하거나 혹은 민주주의가 좋은 사상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불확실하다.

실제로 장교단을 포함한 정치 엘리트의 다수는 공개된 정치적 경쟁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러한 회의주의는 (무바라크가 집권 초기에 명확히 했던 것 처럼) 이집트 인들이 민주주의에 걸맞는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문화적 소양도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 정치에 완전히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민주화가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기술과 판단력을 결여한 카리스마적이고 포퓰리즘 적인 지도자들, 특히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이용되어 불안정을 가져올 것이라고 본다. 엘리트들 사이에 이러한 견해가 널리 퍼져 있는 것이 군부가 민주화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필요한 안보와 안정을 뒷받침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군부가 민주화 과정에서 중립을 지키지 않을 수 있으며 보다 명확히 하자면 무슬림 형제단이 민주화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일부 이집트 인들과 (그리고 분명히 일부 외국인들은) 군부가 이러한 역할을 해 주는 것을 반길 것이다. (이집트의) 장군들이 25년전 터키의 군부와 달리 정치에 참여하는 모든 세력은 정부의 세속적인 토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건설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이집트의 장군들은 이집트와 지역의 안정을 위협한다는 구실로 특정한 이슬람주의자들을 제외하는 식으로 정치적인 논의의 범주를 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장군들이 보다 급속한 변화를 요구하는 집단을 제외하고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참여하는 이슬람 주의자들을 참여시키는 식으로 이러한 역할을 소극적으로 수행 한다면 그들의 역할은 실제로 긍정적인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장군들이 강경한 방식을 택하고 (현행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이슬람주의자들을 제외한다면 민주화 이행과정의 정당성은 심각하게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다.

또한 군부가 경제 개혁 과정을 감독할 능력이 있는지도 의문의 대상이다. 이집트의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에는 최소한 군부가 소요한 기업 다수를 민영화하고 군부가 통제하고 있는 상당한 규모의 토지를 매각하는 것을 포함해 민간 경제 부문에서 군부가 차지하고 있는 역할에 대한 재평가를 수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국방비의 삭감과 (미국의 군사원조의 상당부분을 경제 원조로 돌리는 것과 같은) 미국과 이집트 사이의 군사원조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도 포함된다. 장군들은 아마도 이러한 조치에 저항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치들은 시위대를 지지하고 있는 많은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데 절실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집단은 무슬림 형제단이다. 무슬림 형제단의 시위 참여는 지금까지 미미한 수준이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시위가 시작된지 며칠이 지난 1월 28일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단원들에게 시위에 참여하라는 호소를 하지 않았다. 비록 무슬림 형제단은 시위대에 참여하고 있으나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으며 타흐리르 광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에서 가장 잘 조직된 반대세력이며 어떠한 정치적 변화가 있더라도 한 축을 담당할 것이 틀림없다.

지난 15년간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부는 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법률을 준수할 것이라고 공언해 왔다. 무슬림 형제단은 현제 이집트의 법률을 받아들이며 평화적이며 의회를 통한 방식으로 법을 개정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의 위치는 완전히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무슬림 형제단은 여전히 기독교인이 대통령이나 총리가 되는데 반대하고 있으며 여성이 대통령이 되는데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의 대변인은 민주적인 절차에 참여하여 그들의 목표를 비폭력적인 수단으로 달성하길 원한다고 거듭 밝힌바 있다. 불행하게도 많은 이집트인들은 이것을 믿지 못하고 있으며 무슬림 형제단이 비밀스러운 계획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두려워 하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 전체 인구의 거의 1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콥트 기독교인들의 두려움을 달래는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비록 콥트 기독교인들은 이집트 전역에 거주하고 있고 다양한 사회경제 계층에 분포되어 있지만 1월 초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에서 일어난 차량 폭탄 테러와 같이 지난 해 기독교 사회에 가해진 여러 차례의 강도 높은 공격에 무력함을 느끼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러한 공격과는 연관이 없으며 이것들을 국가적 통합에 대한 공격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콥트 기독교인들은 만약 이집트의 정치적, 안보적 상황이 악화된다면 기독교인에 대한 새로운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두려워 하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이 그들은 양의 탈을 쓴 알 카에다가 아니라는 점을 이집트 인들에게 확신 시킬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몇 가지 방안은 다음과 같다. 앞으로 무슬림 형제단의 소년 단원을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콥트 기독교도 형제들에게 보내 주는 것, 여성들을 무슬림 형제단의 고위 직책에 앉히는 것, 그리고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들과 콥트 기독교도들을 모두 포함한 정당을 건설할 계획을 공표하는 것 등이다. 대부분의 무슬림 형제단 단원들은 이러한 방안들이 완전히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은 바로 “새로운 발상(outside the box)” 이기 때문에 필요하다. 이렇게 극적인 제스쳐를 취하는 것 만이 무슬림 형제단이 대다수의 이집트 인들로 부터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낼 유일한 방법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평화로운 이행으로 가는 길은 어렵다는 것이다. 설사 헌법적인 도전을 극복하더라도 미국이 지지하고 있고 슐레이만이 추진하고 있는 현재의 계획은 고위 장교단이 사심이 없어야 하며 선견지명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한마디로 비현실 적이다. 설사 군부가 일어서더라도 이집트는 이번 봉기로 인해 더 악화된 막대한 경제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게다가 이행 과정은 상대적으로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만약 알 카에다가 이집트에서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한다면 약간의 차량 폭탄을 잘 활용하는 것 만으로도 - 콥트 교회 밖에서 터뜨린다던가 - 정치적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이집트 대중과 국제 사회의 시각을 극단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이행과정을 성공시키기 위한 핵심은 헌법을 개정하고 경쟁 선거를 치르는데 필요한 안정적인 환경을 확보할 수 있도록 안보와 실업문제를 해결하는데 달려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이집트 경제가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곧 바로 직면하게 될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상당한 규모의 원조를 제공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 이것은 아직 미국과 유럽연합 당국의 공식 성명에는 언급 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도 부족할 수 있다. 국제 사회는 이집트의 제조업 분야의 개편과 광범위한 민간 경제 분야의 성장을 촉진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에는 어쩌면 미국과의 자유 무역 협정이라는 범위 내에서 이집트의 상품에 대한 우선적인 접근권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앞서 나가는 것일 수도 있다. 의회는 대외 원조를 늘리거나 더 많은 특별 무역 협정을 허용할 생각이 없다.

만약 이집트에서 민주화의 시도가 성공하게 된다면 이것은 이 지역과 그 너머의 세계를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불행하게도 실패하게 된다면 마찬가지로 심각한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미국의 적대 세력을 강화하고 이 지역의 안정을 해치며 수십년간 민주적인 개혁의 정당성을 약화시킬 것이다.

사실은 오늘 오후에 RSS 피드를 살펴보다가 이스라엘의 반응에 대한 기사가 몇 편 눈에 들어와서 이것도 조금 번역하다가 왠지 의욕이 없어져서 놔뒀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게 현재 똥줄이 타는 이스라엘의 움직임인데 여기에 대해서 흥미로운 글이 몇 편 나왔더군요. 급박한 사태인 만큼 향후의 추이가 궁금해 집니다.

그리고 러더포드 교수는 2008년에 Egypt after Mubarak: Liberalism, Islam, and Democracy in the Arab World 라는 책을 낸 바 있습니다. 어떤 저널의 서평에 실렸을 때 그냥 보고 지나쳤는데 이 기사를 번역하다 보니 새삼 생각이 떠오르는군요. 과연 이 책에서는 어떤 전망을 했는지 살펴봐야 겠습니다.

2010년 3월 13일 토요일

나름 공정한 서술....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과 안악지방에서 일어난 학살은 당시 38선 이북지역에서 일어난 학살 중에서도 유명합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이 학살은 단일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로는 한국전쟁 당시 가장 규모가 큰 것입니다. 물론 정확한 피학살자가 몇 명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요. 어쨌든 북한 정부는 한국전쟁 당시 부터 이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을 '미국의 전쟁범죄'로 요란하게 선전했습니다. 이때문에 한국 측에서도 북한의 선전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신천 봉기에 참여한 월남민들은 1957년에 『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라는 책을 발간합니다. 이 책은 당시 우익측 시각을 반영한 저작이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신천 지방에 서술의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안악 등 학살이 벌어진 인접 지역의 정보는 소략하지만 주된 서술대상인 신천 지방의 사건에 대해서는 우익의 입장에서 매우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민군과의 교전에서 신뢰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도한 전과를 자랑하는 등 의심스러운 면이 많긴 합니다만 봉기에 가담한 우익 인사들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어 유용합니다.

이 저작이 재미있는 점은 우익측의 보복 학살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에 나온 저작에서 우익의 보복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꽤 흥미로웠는데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해 보니 오히려 전쟁 직후라서 사람을 죽인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을것 같더군요. 물론 북한 측의 학살에 대한 서술은 자세한 반면 우익의 보복학살에 대한 서술은 매우 소략합니다. 황해도 인민위원장을 조리돌림한 뒤 총살한 내용과 교전 중 인민군이나 당원을 사살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좌익에 대한 보복학살을 다룬 부분은 세 쪽 정도에 불과합니다. 내용도 얼마 되지 않으니 해당 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원문 그대로 인용해서 맞춤법은 엉망입니다)

끝없이 맑게 개인 가을하늘에 높이 계양된 태극기 밑에서 남녀노소 할것없이 총동원되여 구국대업에 나섰다. 의거대가 확보해 놓은 지구마다 유능한 지방유지를 선출하고 또 선출된 그들은 남한의 기관조직기구를 따라 미약하나마 손색없는 자치위원회와 치안대를 조직하였다.

봉기군과 아군 -국군들과 유엔군-의 진격으로 퇴각의 혈로를 차단당하게 된 괴뢰들은 수많은 애국지사를 학살하며 구월산으로 대거 입산하였다. 신천에서 八百여명에 달하는 애국자의 시체를 내무서 방공호와 유치장 참호 정치보위부의 지하실 -양민을 학살하기 위하여 가설한 곳- 및 유치장 군당의 방공호 및 토굴-양민을 학살하기 위하여 가설한 곳- 각처 방공호 창고 하수도 등에서 발굴해 내였고 해주형무소에서 一千여명 안악중학교 강당 및 지하실에서 五ㆍ六백명의 시체를 발굴하였다. 또한 재령과 안악 서하면 장련면 붕암리에서 의거하였으나 실패한 관계로 무참하게도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학살당하였다.

이러한 참변을 목격한 이 지구 주민들은 놈들 소행에 대하여 무조건 복수할것을 맹서하고 이를 갈며 때를 기달렸다. 한편 치안대들은 부역자 숙청과 공비 소탕이 그 중요한 임무였다. 이와같이 이 지구에서는 매일같이 피의 복수가 계속되였다. 이러한 피의 복수는 공산정치가 지난 五년동안에 저질러 놓은 죄악 -가혹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학살- 에 대한 어디까지나 당연한 것이었으며 또한 치안대원들이 놈들을 잔인하게 처단하는 것은 놈들이 가르치고 간 그대로 이른바 복습(?) 이라는 것 뿐이었다. 심지어는 예수교인들도 놈들이 베풀어준 은혜(?)에 대하여 곱게 보답해 주었다. 사실상 인과응보라는 결과밖에 아무것도 아닌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한편 어떻한 부역자의 아네는 남편이 도망한 뒤라 정의의 심판을 받게됨이 두려워 치안대를 찾아와서는 "저는 친정의 가정 성분으로 보아 절대로 공산당이 될수 없읍니다. 그저 남편하나 잘못맞난 탓이라 생각하고 남편의 대를 받은 자식을 내손으로 처단했으니 저만은 살려주시요" 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애원하였다.

이토록 전율할 피의 복수는 전 북한을 휩쓸었으나 특히 반공의 전위인 구월산지구 일대가 제일 심하였다. 그러나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이러한 피의 복수는 무고하고 졸렬한 방법이었음을 각 책임자들이 선무 만류하고 패잔 공산괴뢰들의 역습을 방어하며 동족상쟁의 해를 피하였다.

趙東煥,『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서울, 1957), 474~476쪽

학살을 저지른 것은 모두 미국의 소행이라는 북한의 주장에 비하면 아주 솔직한 기록인 셈인데 그래도 뭐랄까, 사람 죽인 것을 아주 당연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꽤나 으스스합니다. 보복학살 외에 위에서 언급한 봉기 과정에서의 살인에 대한 묘사도 좀 깹니다. 자신들도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죽였다고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잡담하나.
『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은 국회도서관에서 전자문서로 전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번 읽어보십시오. 이박사 치세하의 반공정서를 듬뿍(???) 느끼실 수 있습니다.

잡담둘. 2008년에 북한이 신천학살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미군 장교에 대해 잡담을 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결론이 바뀔일은 없겠지만 미국 자료를 추가로 확보하면 보강해서 한번 더 써볼까 합니다. 

2008년에 썼던 글은☞  신천학살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

2010년 1월 24일 일요일

기분나쁜 추억 하나

구글리더를 읽던 중 나이지리아의 종교간 충돌에 대한 소식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지역의 종교간 갈등이야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것 이지만 제목이 눈길을 끌더군요.


국민학교 시절 반공서적에서 가장 공포감을 자극한 것은 학살된 시신을 우물에서 끄집어 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시골에 내려갈 때 마다 우물 안을 들여다 보면 그 생각이 나곤 했을 정도지요.

머나먼 이국에서 일어난 학살이 국민학교 시절의 불쾌한 추억을 끌어내는군요.

2009년 12월 13일 일요일

히틀러 집권기 독일의 보탄(Wotan)신앙

히틀러 집권기의 보탄(Wotan, 오딘) 신앙은 과거 이글루스 시절에 댓글로 한 번 언급했던 문제인데 이글루스를 날려먹었으니 재탕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인용한 책은 "그 때의 그 책" 입니다.

히틀러가 독일을 통치하던 시기(1933~1945)에는 이단 신앙이 널리 고취되었다는 서술이 많은데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원인 중에는 1933년 의회에서 가톨릭 정당의 나치당 지지가 있었는데 이로인해 나치당은 집권당이 될 수 있었다. 수많은 가톨릭과 개신교 성직자들이 나치 정권을 열렬하게 지지했다. 나치 정권이 이교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2차세계대전 중의 전시선전을 통해 형성되었다. 신비학자(Occultist) 루이스 스펜스(Lewis Spence)는 대독일선전의 일환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오딘과 토르 신앙'으로 알려져 있는 고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신앙은 수많은 문학적 찬양의 대상이었다. 나는 민속학과 신화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고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신앙이 다른 하급 종교는 물론 폴리네시아나 고대 페루의 신앙과 비교하더라도 특별히 품격있거나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고대 독일신앙은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극단적인 나치 광신자들이 부활시키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히틀러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몰락한다면 인위적으로 부활시킨 다른 이교신앙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히믈러와 헤스라는 두 명의 '극단적인 나치 광신자'들은 우수인종이 미래의 지배자가 된다는 믿음을 고무하는 아리아 신비주의를 적극적으로 추종했던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1941년에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보탄(Wotan) 신앙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것 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야. 우리의 고대 신화는 기독교 신앙이 확립되었을 때 더이상 살아남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스펜스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전통에 기반하고 있는 국가사회주의를 "나치의 이단 교회"인 다신신앙과 결부시키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존 요웰(John Yeowell)의 최근 연구는 다신교도들이 나치 독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커녕 박해받는 존재였다는 점을 밝혀냈다. 다신종교의 지도자들은 나치정권에 의해 탄압받고 체포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루넨마이스터(Runenmeister)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마르비(Friedrich Bernhard Marby)는 1936년에 체포되어 이후 9년동안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마르비만 체포된 것이 아니었다. 1941년에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에 의해 수많은 다신교와 밀교 단체가 불법화 되었다.(이 중에는 보탄 숭배자이며 아리아주의자였던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의 추종자들도 포함되었다.) 수많은 다신교도들이 다른 히틀러 정권의 희생자들처럼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Prudence Jones and Nigel Pannick, A History of Pagan Europe, (Routlege, 2000), pp.218~219

물론 여기서 제가 인용한 구절은 사실의 일부분을 전달할 뿐 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프리드리히 마르비가 탄압받았던 원인으로는 다신교간의 교파 분쟁으로 히믈러의 지원을 받은 교파가 승리한 결과라는 주장이 있으며 히틀러의 경멸에도 불구하고 나치당의 소수 인사들이 이교도 신앙에 심취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치 집권기를 통해 독일의 전통 신앙이 광범위하게 부활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와 만화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이런 이상한 선입견이 확산되는 것은 찝찝한 일이지요.

2008년 5월 24일 토요일

2MB를 탄핵할 수 있는 방법

많은 분들이 현재의 청와대 주인을 쫓아내고 싶어하지만 마땅한 방도가 없어 고민하고 계시는 바를 잘 알고 있습니다. 네. 확실히 현재는 법적으로 대통령을 탄핵할 만한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어린양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어떤 경우에 탄핵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 봤는데...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대통령은 개신교 장로입니다. 그리고 이미 서울 시장때 서울시를 주님께 봉헌한 바가 있지요.

네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봉헌하는 것 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천국의 통치자인 여호와와 내통한 죄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국가반역죄가 되는 것이니 탄핵을 백만번은 하고도 남지요.

자. 장로님 부탁합니다.

2008년 3월 2일 일요일

[妄想大百科事典] 순복음교회(Full Gospel Church)

妄想大百科事典 - 순복음교회(Full Gospel Church)

대한민국 종교업 기독교 부문 시장 점유율 1위를 자랑하는 초대형 종교 체인점. 대한민국의 주요 서비스업 중 유일하게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종교업 중에서도 점유율 1위를 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 받고 있다. 현재 순복음교회 가입자는 75만명 이상으로 추산되며 그 규모에서 부동의 세계 1위를 자랑한다. 창업주인 조용기 회장이 지난 2008년 2월 3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으로 옮기면서 다시 한번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순복음교회의 성공 요인은 사원들의 발로 뛰는 영업력 외에도 조용기 명예회장의 탁월한 경영능력에 있다. 순복음교회는 지난 1958년 5월 18일 은평구(당시 서대문구)에서 작은 좌판으로 출발하여 창립 60년 만에 세계 제일의 종교업 체인으로 거듭났다. 조용기 회장은 1961년 서대문 로터리에 1호점을 개업한 후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500명의 가입자를 확보했다. 이후 순복음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 마침내 1973년에 여의도로 본점을 옮기고 이후 여의도 순복음교회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 본토로 진출해 대 성공을 거둔 문선명 회장의 통일그룹에 비견할 바는 아니며 조용기 명예회장은 한국의 다른 교회업 종사자들과 함께 통일그룹에 대한 공격에 앞장선 바 있다. 또한 다른 교회업과 함께 세금탈루 혐의로 도덕성이 도마위에 올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다.

순복음교회는 해외시장 개척에 일찍부터 적극적이었다. 순복음교회는 1976년에는 미주 지사를 시작으로 해외 진출을 시작한 이래 독일, 일본 등에 진출,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종교업에 제약이 있었던 구 사회주의권 국가에도 진출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순복음교회는 지난 1991년 러시아에 성공적으로 진출함으로서 그 동안 해외 교민을 상대로 제한적인 영업을 했던 다른 교회들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현재 순복음 교회는 세계 각국에 31개의 지점을 내고 활발한 영업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조용기 회장의 은퇴로 경영 전반에 대한 불안감이 잠시 있었으나 후임 회장으로 임명된 이영훈 회장 체제가 정상궤도에 오르면서 다시 높은 신용등급을 회복했다.

2007년 9월 6일 목요일

어떤 승려와 목사의 말싸움 중에서

좀 오래전에 어떤 목사가 불교도들을 개종시키겠노라고 공개적으로 종교 토론을 신청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토론에 나온 승려 한명이 이런 말을 했다더군요.

만약 그 누군가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항상 볼 수 있는, 이 세상의 상식을 초월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눈을 갖고 있는 것 만으로도 그것은 지옥과 같은 괴로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불타에게 그러한 지옥의 눈의 지혜는 없는 것 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기독교의 친구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호와께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나쁜일들, 예를 들어서 인간들이 대변을 보고 있는 것, 혹은 소변을 보는 것 등을 항상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참으로 차마 볼 수 없는 것들을 언제나 보고 계시는 여호와의 괴로움은 그야말로 지옥의 괴로움에 비유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실론의 승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가 불교도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여호와의 전지전능을 자랑하는 영국 목사 데이비드 데 실바를 조롱하면서

석오진 편역, 『파아나두라 대논쟁 : 기독교인가 불교인가?』, (운주사, 2001), 202쪽

과연, 전지전능한 것이 다 좋은건 아닌가 봅니다.

2007년 8월 7일 화요일

탈레반의 센스도 제법이군요

이번 아프가니스탄의 인질 사태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언론과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처럼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 문제가 TV에 나오면 인질들을 비웃는 정도로 그치는군요.

그런데 오늘은 연합뉴스에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탈레반, 인질처리 고심..이슬람 개종 권고"<외신>

기독교 선교를 하러 간 사람들에게 이슬람 개종을 권고하다니 이건 정말 대단한 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폭력을 쓰지 않고도 이렇게 골탕먹이는 것이 가능하군요.

전도하러 간 자매님들이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2006년 11월 8일 수요일

이근안 "앞으로 신앙생활을 하겠다"

이근안씨 7일 새벽 만기출소

이 양반이 다시 사회에 나오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앞으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대목에서 심히 덜덜덜이다.

이 양반이 나가는 교회 분위기는 대충 이렇지 않을까?

2006년 10월 20일 금요일

이시대의 참 종교인

오늘 이 시대의 진정한 종교인에 대한 훈훈한 소식 하나를 접했다.

일찌기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하라(데살로니가 전서 3:10)


아. 그동안 교회의 쇠락을 가슴아프게 지켜보던 차에 이렇게 말씀을 실천하는 참 목사를 알게 되니 마음이 뿌듯하다.

할렐루야!

2006년 5월 8일 월요일

A History of Pagan Europe - by Prudence Jones & Nigel Pennick

피상적으로 떠오르는 켈틱 음악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중학교 다니던 시절 처음으로 March of the Celt를 들었을 때의 느낌은 지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 이었다. 엔야의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자연히 켈트 문명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렇게 해서 지금은 유럽의 전통신앙, 흔히 말하는 "이교도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다.

처음 이와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을때 접했던 책이 바로 이 책 "A History of Pagan Europe"이다.

이책은 전형적인 개설서로 구성은 고대 그리스 부터 시작해서 20세기의 "이교도 신앙"까지를 연대 순으로 다루고 있다. 구성상 이 책은 거꾸로 뒤집어 본 기독교 발전사라고 할 수 있는데 로마 후기 이후 부터의 내용은 기독교의 교세가 성장해 가면서 각 지역의 토착 신앙을 말살하는 내용들이다. 특히 8세기 독일 지역의 강제 개종을 위한 대량 학살은 읽는 사람을 소름끼치게 한다. 아마도 독일 지역의 강제 개종이야말로 최초의 종교 전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저자들은 계속 유럽의 동쪽으로 무대를 옮겨 가면서 토착 종교들이 소멸되는 과정을 덤덤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10장과 11장에서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전통 재발견 차원에서 고대의 신앙들이 조금씩 재발견되어 가는 과정이 나온다.

책 후반부에는 짤막하게 Neo-paganism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 역시 우울하기는 마찬가지다. 히틀러 시기의 오딘 숭배주의자들은 독일 카톨릭계의 지지를 얻기 위한 히틀러의 조직적 박해로 괴멸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전통 신앙들은 완전히 말살 되지는 않고 기독교적 전통과 조금씩 융합되어 오늘날 까지도 그 잔재가 조금씩 남아 있기도 하다.이 책은 매우 슬픈, 사라진 전통들에 대한 잘 정리된 글이다. 아직 절판 되진 않았으니 흥미가 있으신 분들은 한번 읽어 보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