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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3일 월요일

최근 넷플릭스 코리아에 올라온 세계대전 영화


최근 넷플릭스 코리아에 세계대전 영화가 몇 편 업데이트 됐습니다.

극영화로는 Das Boot가 올라왔군요. 이외에도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극영화가 몇편 더 있는데 잘 모르는 작품이라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도 못했던 멋진 물건이 하나 있었으니 2차대전 중 만들어진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Why We Fight: The Battle of Russia가 그것입니다. 이 영화는 독소전쟁 발발부터 스탈린그라드의 승리까지를 다룬 다큐멘터리인데 소련에서 촬영된 선전영상을 많이 활용하고 있습니다. 비록 선전용 필름이긴 하지만 전쟁 중 소련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영상도 풍부하고 좋습니다.

역시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Prelude to War도 함께 올라왔습니다. 이 영화는 2차대전의 발발 원인을 설명하면서 미국이 싸워야 할 당위성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이 작품은 예전에 본 기억이 있어서 새롭지는 않으나 매우 반갑습니다. 그리고 미군이 독일의 강제수용소를 해방한 뒤 그 참상을 기록한 Nazi Concentration Camp도 훌륭한 다큐멘터리 작품입니다.

그리고 전쟁중에 제작된 멤피스 벨 대원들을 다룬 뉴스영화도 한 편 있습니다. 이건 컬러 작품이네요! 화질은 나쁜 편이지만 볼만합니다.

넷플릭스가 돈값을 충실히 하는군요.

2012년 4월 4일 수요일

소련 형벌부대의 인력 충원에 대한 잡상

로저 리즈Roger R. ReeseWhy Stalin’s Soldiers Fought : The Red Army’s Military Effectiveness in World War II를 읽는 중인데 중간에 형벌부대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꽤 흥미로운 부분인데 그 중에서도 수용소 수감자들을 형벌부대에 동원하는 방식에 관한 내용이 눈에 띄는군요. 해당 부분을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형벌부대는 장교와 병사들이 명령에 따르도록 강제하기 위해 처벌하는 것 외에 동원의 수단이기도 했다. 일반인들이 수용소와 교도소에서 그대로 형벌중대에 편입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위협과 강요는 흔한 일이었다. 소련 정부는 전쟁 기간 동안 수형자들에게 징역 기간을 그대로 형벌부대의 복무 기간으로 바꿔주고 이를 마치면 정규군에서 복무하도록 해 주었다. 5년 이하의 징역을 선고받은 죄수는 형벌중대에서 1개월 간 복무하는 것으로 그 기간을 대체할 수 있었다. 5년에서 7년사이의 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은 그 기간을 2개월 간의 형벌부대 복무로 대체할 수 있었다. 7년에서 10년 사이의 징역을 선고받은 경우에는 형벌중대에서 3개월간 복무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치범은 형벌부대에 징집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정치범은 보통 10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Roger R. Reese, Why Stalin’s Soldiers Fought : The Red Army’s Military Effectiveness in World War II,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11), p.167

이 부분을 읽으면서 형벌부대에서 3개월 넘게 살아남을 가능성과 정치범 수용소에서 10년 이상 살아남을 가능성 중 어느게 더 높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2009년 12월 13일 일요일

히틀러 집권기 독일의 보탄(Wotan)신앙

히틀러 집권기의 보탄(Wotan, 오딘) 신앙은 과거 이글루스 시절에 댓글로 한 번 언급했던 문제인데 이글루스를 날려먹었으니 재탕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인용한 책은 "그 때의 그 책" 입니다.

히틀러가 독일을 통치하던 시기(1933~1945)에는 이단 신앙이 널리 고취되었다는 서술이 많은데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원인 중에는 1933년 의회에서 가톨릭 정당의 나치당 지지가 있었는데 이로인해 나치당은 집권당이 될 수 있었다. 수많은 가톨릭과 개신교 성직자들이 나치 정권을 열렬하게 지지했다. 나치 정권이 이교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2차세계대전 중의 전시선전을 통해 형성되었다. 신비학자(Occultist) 루이스 스펜스(Lewis Spence)는 대독일선전의 일환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오딘과 토르 신앙'으로 알려져 있는 고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신앙은 수많은 문학적 찬양의 대상이었다. 나는 민속학과 신화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고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신앙이 다른 하급 종교는 물론 폴리네시아나 고대 페루의 신앙과 비교하더라도 특별히 품격있거나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고대 독일신앙은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극단적인 나치 광신자들이 부활시키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히틀러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몰락한다면 인위적으로 부활시킨 다른 이교신앙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히믈러와 헤스라는 두 명의 '극단적인 나치 광신자'들은 우수인종이 미래의 지배자가 된다는 믿음을 고무하는 아리아 신비주의를 적극적으로 추종했던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1941년에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보탄(Wotan) 신앙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것 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야. 우리의 고대 신화는 기독교 신앙이 확립되었을 때 더이상 살아남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스펜스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전통에 기반하고 있는 국가사회주의를 "나치의 이단 교회"인 다신신앙과 결부시키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존 요웰(John Yeowell)의 최근 연구는 다신교도들이 나치 독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커녕 박해받는 존재였다는 점을 밝혀냈다. 다신종교의 지도자들은 나치정권에 의해 탄압받고 체포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루넨마이스터(Runenmeister)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마르비(Friedrich Bernhard Marby)는 1936년에 체포되어 이후 9년동안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마르비만 체포된 것이 아니었다. 1941년에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에 의해 수많은 다신교와 밀교 단체가 불법화 되었다.(이 중에는 보탄 숭배자이며 아리아주의자였던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의 추종자들도 포함되었다.) 수많은 다신교도들이 다른 히틀러 정권의 희생자들처럼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Prudence Jones and Nigel Pannick, A History of Pagan Europe, (Routlege, 2000), pp.218~219

물론 여기서 제가 인용한 구절은 사실의 일부분을 전달할 뿐 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프리드리히 마르비가 탄압받았던 원인으로는 다신교간의 교파 분쟁으로 히믈러의 지원을 받은 교파가 승리한 결과라는 주장이 있으며 히틀러의 경멸에도 불구하고 나치당의 소수 인사들이 이교도 신앙에 심취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치 집권기를 통해 독일의 전통 신앙이 광범위하게 부활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와 만화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이런 이상한 선입견이 확산되는 것은 찝찝한 일이지요.

2009년 11월 27일 금요일

기이한 도덕적 먹이사슬

1950년대에 무장친위대 출신 퇴역군인들은 상호원조회(HIAG, Hilfsgemeinschaft auf Gegenseitigkeit)로 불리는  참전군인단체를 조직했습니다. 그런데 HIAG의 각종 대외활동은 외부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장친위대 출신자들은 전쟁기간중 나치당의 무장조직인 무장친위대에 소속되었다는 점 때문에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고 이때문에 전직 무장친위대원들은 공개적으로 무장친위대 출신이라는 점을 밝히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향으로 인해 HIAG에 가입한 회원은 2만명을 기록한 뒤 1960년에 이르면 기존의 회원조차 이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문에 하우서(Paul Hausser)길레(Herbert Otto Gille)와 같은 무장친위대의 유명인사들은 무장친위대가 나치의 전쟁범죄와 '거리가 먼' 조직이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했습니다. 예를들어 길레는 1953년 함부르크에서 열린 무장친위대 출신자들의 집회에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무장친위대에게 전쟁범죄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고 성토했습니다. 또한 HIAG의 기관지 중 하나인 Der Freiwillige는 1957년 6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무장친위대를 친위대보안국(SD, Sicherheitsdienst), ..... 그리고 강제수용소 경비원들과 동일한 부류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실은 최근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무장친위대는) 이러한 조직들과 비슷한 임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해군, 공군 또는 육군과 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무장친위대는) 다른 병종과 같은 군사조직이었으며 전투에 임할때나 점령지의 민간인들을 상대할 때에 있어서나 군사규율을 엄격하게 준수했다."

Large, David Clay. 'Reckoning without the Past: The HIAG of the Waffen-SS and the Politics of Rehabilitation in the Bonn Republic, 1950-1961',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Vol.59 No.1(Mar., 1987) pp.84~85 

기이하게도 전직 친위대가 또 다른 전직 친위대에게 전쟁범죄 책임을 떠넘기는 양상이 된 것 이었습니다. 물론 무장친위대는 전쟁범죄로 부터 자유롭지도 않았고 점령지의 민간인들에 대해 항상 규율을 엄격히 준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1990년대에 독일 국방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될때 까지 전쟁범죄 문제를 두고 기이한 도덕적 먹이사슬(???)이 형성되었는데 육해공군등 국방군은 친위대 조직(무장친위대+일반친위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무장친위대는 일반친위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구조였습니다.

요약하면 이렇게 되겠군요.

육해공군 : 우리는 친위대와는 달리 깨끗한 군인이랍니다.

무장친위대 : 우리는 일반친위대와는 달리 깨끗한 군인이랍니다.

일반친위대 : 이런 위선자 새퀴들!!!


다행히도 1990년대 이후로는 나치 시기의 범죄연구가 국방군의 전쟁범죄로 까지 확산되어 더 이상은 이런 기이한 도덕적 먹이사슬이 존재할수 없게 되었지요.

2008년 2월 20일 수요일

친위대 사관학교 중국음식점이 되다 - 다하우 수용소와 바드 퇼츠 친위대 사관학교

여행 둘째 날은 다하우(Dachau), 그리고 바드 퇼츠(Bad Tölz)를 가기로 정했습니다. 그 때문에 원래 갈 계획이었던 잉골슈타트(Ingolstadt)의 바이에른 육군 박물관(Bayerisches Armeemuseum)은 다음 기회로 미뤘습니다. 그래도 좀 아쉬워서 잉골슈타트를 잠깐 가 봤습니다.

잉골슈타트 역 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야간이라 바이에른 육군 박물관은 못 찾았습니다. 비도 조금 내리고 있어서 길 찾기가 어렵더군요.

잉골슈타트 역은 매우 작지만 따뜻한데다 구내서점도 괜찮았습니다. 이곳 구내서점은 무려 오전 5시 30분에 여는데다 쓸만한 책이 더러 있더군요.

잉골슈타트 역의 대합실에는 도시의 발전 과정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사진이 흔들린게 유감입니다. 빨리 좋은 카메라를 하나 장만해야 겠습니다.


잉골슈타트 역에서 책을 한 권 산 뒤 커피 한잔을 마시고 다하우 수용소로 향했습니다. 뮌헨 근처에서 가장 유명한 나치 시대의 유적이니 만큼 구경을 하고 가야 겠더군요.


정문 안 쪽에는 다하우 수용소를 해방시킨 미육군 제 20기갑사단의 공적을 기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다하우 수용소는 유명한 사적지인지라 단체 관람객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한가한 분위기더군요.




다하우 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명인사 중 한 명인 Vojtech Preissig의 데드 마스크 입니다.


전쟁 당시 다하우 수용소의 축소모형입니다.


이 곳은 다하우 수용소의 화장터 입니다. 괴이하게도 수용소의 다른 건물들에 비해 훨씬 평온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하우 수용소 관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은 걸어서 갔습니다. 다하우 기차역까지 대략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중간에 제 3제국 시절 친위대가 연병장으로 쓰던 곳의 터가 있더군요.


그리고 조금 더 가니 케네디 광장이라는 곳도 있더군요.


그리고 다하우 역에 도착했습니다. 걸어다니면서 게으름을 피운 탓에 뮌헨으로 가는 기차를 놓쳤습니다.;;;;;


바드 퇼츠로 가려면 뮌헨으로 돌아가서 다시 기차를 한 번 더 갈아타야 합니다. 사진 오른쪽 끝에 있는 기차가 바드 퇼츠로 가는 녀석입니다.


바드 퇼츠 역입니다. 다른건 다 좋은데 유별나게 플랫폼이 지저분한 역이었습니다. 쓰레기가 정말 많이 떨어져 있더군요.;;;;


바드 퇼츠의 시내는 꽤 예쁘장하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정말 장난감 집 같더군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바드 퇼츠에 온 목적은 예쁜 집들을 구경하는게 아니고 친위대 사관학교(SS-Junkerschule)를 답사하러 온 것 이었습니다.;;;;; 이런 정신상태하고는.

그런데 관광상품 파는 곳에 가서 물어보니 그런 곳이 있다는게 금시초문이라는 것 이었습니다. 뭐, 젊은 아가씨들이니 그런 우중충한 역사에 대해 모르는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관광상품 파는 곳 옆에 있는 바드 퇼츠 박물관으로 갔습니다.


박물관 매표소의 직원에게 물어보니 친절하게도 공짜 지도와 함께 위치를 잘 알려 줬습니다. 그런데 박물관에 들어오니 박물관 구경도 하고 싶어지더군요. 바드 퇼츠 박물관은 전형적인 민속박물관이었습니다. 생활사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군요. 그런데 이 박물관의 마루 바닥은 너무 삐걱 거려서 걸어다니기가 두려울 정도였습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친 뒤 바로 친위대 사관학교 터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뭐가 씌였는지 지도를 잘못 보고 얼마 안되는 거리를 한참 돌아갔습니다.

친위대 사관학교는 바드 퇼츠 주민들을 위한 스포츠 센터와 상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스포츠 센터에는 태권도장도 있더군요.



우수 인종 중의 엘리트들을 교육시키던 장소에서 열등인종의 무술을 가르치고 있다니 이거야 말로 나치들대한 최고의 조롱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태권도장 간판을 바라보며 한참 즐거웠습니다.

친위대 사관학교의 정문입니다. 처음 만들어 질 당시에는 아치가 있는 구조였다는데 전쟁이 끝난 뒤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건물 내로 들어가 보니 태권도장은 약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병장 터에는 아예 중국음식점이 들어섰더군요. 지옥에 있을(?) 히믈러가 약이 오를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