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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1일 토요일

제2차세계대전 시기 항공모함의 전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

 


밀리터리 오타쿠의 관점에서 읽은 연구논문 중 지난 1년간 가장 재미있었던 걸 꼽으라면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84에 실린 미국 해군대학 교수 피츠시몬즈(James R. FitzSimonds)의 "Aircraft Carriers versus Battleships in War and Myth: Demythologizing Carrier Air Dominance at Sea"를 들겠습니다. 과연 제2차세계대전 당시 항공모함이 전함에 대해 압도적인 우세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밀리터리 오타쿠 입장에서 환장할만한 주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피츠시몬즈는 레이테만 해전의 예를 들면서 항공모함의 위력이 과대평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레이테만 해전에서 미국 해군은 에섹스급 7척을 포함한 35척의 항공모함과 항공모함 항공대 소속의 항공기 1,500여대를 동원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작전상 미끼로 던진 항공모함을 제외한 일본군 주력을 상대로는 전함 1척과 중순양함 1척만이 미군 항공모함 탑재기에 격침되거나 대파되었습니다. 저자는 이상적인 조건에서 미국 항공모함 항공부대가 전투력을 최대한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함 중심의 일본군 주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한 점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기간 중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항공기가 기동중인 주력함을 격침한 것은 야마토와 무사시 외에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히에이는 미국 수상함대와의 전투로 전투불능이 된 상태에서 항공기 공격을 받았으므로 제외합니다.) 진주만 공습 같이 정박해 있는 주력함을 공격한 경우에도 완전히 전열에 복귀하지 못하게 타격을 입힌 사례는 4척 밖에 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프랑스 해군의 덩케르크, 이탈리아 해군의 로마, 미해군의 애리조나와 오클라호마) 전함보다 작고 약한 순양함이나 구축함의 경우도 항공모함 탑재기 보다는 수상함이나 잠수함과의 교전에서 더 많은 숫자가 격침되었습니다. 

저자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항공모함 탑재기들은 전함과 같이 빠르고 강력한 방어력을 갖춘 군함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능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합니다. 해군 항공기용의 폭탄은 1,000파운드 정도로 전함의 갑판에 유효한 타격을 주기 어려웠고, 어뢰는 위력이 충분했으나 명중율이 부족했다는 겁니다. 게다가 뇌격기들은 대부분 저고도에서 느린 속도로 움직여 전함의 대공화력에 대해 생존성이 떨어졌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저자는 제2차세계대전 시기 수상함의 대공화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대전 초기인 1942년 초의 산호해 해전에서도 미국 함대는 대공화력 만으로 일본군 항공대를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미군 보다 뒤떨어지는 일본 해군 함정의 대공화력도 미국항공모함 탑재기들을 상대로 충분히 유효했다고 지적합니다. 레이테만 전투 당시 일본해군의 이세가 100대 가까운 미군 함재기의 공격을 대공화력 만으로 격퇴한 점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또한 제2차세계대전 시기의 항공모함들의 작전 지속능력이 떨어졌던 점도 지적합니다. 항공모함은 육상기지에 비해 비축할 수 있는 물자에 한도가 있어 장기간 작전을 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항공모함 탑재기의 소모율이 높았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이때문에 미 해군이 항공모함 전력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압도한 1944년이 되어서도 미해군의 항공모함 항공부대는 충분한 전과를 거둘 수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예를들어 필리핀해 해전에서는 미해군 항공부대가 전력 우세에도 불구하고 항공모함 한척과 유조선 2척을 격침시키는데 그쳤고 그 댓가로 출격시킨 항공기 200대 중 80대를 여러가지 이유로 상실했습니다. 게다가 장거리 출격 때문에 미군 함재기의 무장 탑재에도 지장이 있어 타격력이 더 감소했다고 지적합니다.(뇌격기들도 항속거리 문제로 폭탄을 탑재했음) 미국 항공모함의 지상 타격도 예상외로 결정적이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피츠시몬즈는 레이더도 부실하고 대공화력도 약하며 조종사의 수준도 뒤떨어지는 일본군을 상대로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미국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유럽으로 가서 독일 공군 기지를 타격했다면 어떤 성과가 나왔겠냐고 반문합니다.

반면 전함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평가를 상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피츠시몬즈는 대평양 전쟁의 분기점은 미드웨이 해전이 아니라 미국의 고속전함부대가 전장에 등장하기 시작한 1942년 말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전함 전력없이는 태평양에서 전략적인 공세가 가능하지 않았다고 보는 겁니다. 저자는 과달카날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주 요인이 미해군의 신형고속전함들의 활약이라고 평가합니다. 또한 1943년 이후 미해군의 반격작전에서도 전함의 역할을 더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자는 제2차세계대전 직후 전함 전력이 급속하게 감축된 주된 요인은 항공모함의 우위 보다는 미해군에 대항할 수상함 전력을 가진 가상적이 소멸하고 대함미사일이 등장한데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직후 미국 해군항공대가 해군 내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항공모함 항공대의 위력을 강조하는 여론을 조성한 점도 항공모함의 '신화'를 부풀리는데 일조했다고 주장합니다.

꽤 재미있는 주장을 하는 글 입니다. 

2014년 11월 13일 목요일

[번역글] 영국 해군은 전간기에 쇠퇴했던 것인가?

몇달 전에 The RUSI Journal 159권 4호에 실린 Joseph A. Maiolo의 Did the Royal Navy Decline between the Two World Wars?를 읽고 흥미로운 관점이라고 생각해서 번역을 하겠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제서야 번역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해군에 대해서는 아는게 많지 않아 특별히 덧붙일 이야기는 없습니다만 전간기 영국의 가상 적국에 대한 서술이 부족한 점만 제외하면 괜찮은 글 같습니다.




영국 해군은 전간기에 쇠퇴했던 것인가?

Joseph A. Maiolo


비교적 최근까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전간기에 영국 해군이 쇠퇴한 것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단호하게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1)  영국 해군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하여 독일의 대양함대와 잠수함대를 무찔렀다. 그리고 전투력과 명성에 대해 말하자면, 세계의 어떤 해군도 영국 해군에 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의 좋은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영국 정부는 전쟁이 끝난 뒤 국방비 보다 사회 복지에 더 많은 지출을 하려고 했다. 즉 영국 해군의 쇠퇴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1919년의 파리 평화회담과 국제연맹의 등장으로 평화가 지속될 것이고 군축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한 영국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영국 해군의 규모를 영국의 안보 상황에 맞추지 않고 군축 회의의 합의 결과에 맞추었다. 전후 영국 정부가 영국 해군의 우위를 지켜내지 못한 것은 영국 해군 수뇌부의 실책과 맞물려 더욱 악화되었다. 게다가 영국 해군 수뇌부는 새로운 사상과 신기술을 싫어했고 위협에 대처하는 태도도 안이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쇠퇴를 주목한 역사학계의 경향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생겨났는데, 이러한 학설은 영국의 전 세계에 대한 영향력 감퇴와 전후 영국 경제의 상대적인 쇠퇴의 원인을 설명하고자 했다. 영국 해군은 국력의 주요한 척도였기 때문에 영국의 쇠퇴를 연구하는 학파가 여기에 주목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2) 영국 해군의 쇠퇴했다거나 정체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흥미롭긴 하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3) 존 페리스John Ferris, 크리스토퍼 벨Christopher Bell, 데이빗 이거튼David Edgerton, 그리고 본 필자의 최신 연구는 영국 해군이 그 훌륭한 전통을 이어가며 탁월한 기술로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도 그 위용을 유지했음을 증명하였다. 영국 해군은 영국의 안보를 위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군비 통제를 활용했으며 기만을 통해 경쟁국들의 건함 계획에 영향을 끼쳤다. 

영국 해군의 쇠퇴를 주장하는 학설에서는 1914년 이전의 10년간을 ‘팍스 브래타니카’의 종언으로 서술한다. 영국 해군은 1906년 세계 최초의 단일 구경 주포 전함인 HMS 드레드노트를 건조하여 독일 해군이 촉발한 건함 경쟁에서 승기를 잡았다. 12인치 주포와 강력한 터빈엔진을 장비한 22,000톤의 드레드노트와 그 후속 전함들은 기존의 전함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퇴물로 만들어 버렸다. 이후 계속된 건함 경쟁에서도 영국 해군은 질과 양 모두 상대를 압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때 영국 해군은 21척의 드레드노트형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독일은 같은 종류의 전함을 13척만 보유한데 그쳤다. 이같은 격차는 독일 해군이 기지에 묶여 있는 동안 영국 해군은 독일의 해운을 봉쇄하고, 독일의 전시 경제를 옭죄어 독일 국민의 사기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1916년의 유틀란트 전투에서는 세계 1위와 2위의 함대가 격돌했지만 승패를 가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독일 해군은 결전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해 독일이 절실히 필요로 했던 영국의 해상 봉쇄 분쇄와 독일 수상함대 및 잠수함대를 통한 영국 봉쇄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 전투는 영국의 전략적 승리로 끝났다.4)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 해군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영국, 미국, 일본의 군비 경쟁이었다. 1916년 미 의회는 영국의 해상 봉쇄 가능성과 독일의 잠수함대가 미국의 이해관계를 침해할 것을 우려하여 66척의 군함을 건조하는 것을 승인했는데 여기에는 4척의 전함, 4척의 순양전함, 4척의 순양함, 20척의 구축함, 30척의 잠수함이 포함되었다. 이 전례없는 건함 계획은 다시 1917년에는 전함 10척, 순양전함 6척과 기타 지원함정을 건조하여 1925년 까지 세계 최대의 해군을 건설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5)  미해군의 팽창은 단지 영국 해군을 위축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이미 세계 3위의 해군국이었던 일본의 해군 증강을 촉발했다. 1919년 파리 평화회담에서 있었던 미국과 영국간의 해군력 균형에 관한 회담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듬해에 영국은 미국의 해군력 증강에 맞서기 위해 18인치 주포를 장비한 5만톤급의 전함과 순양전함 8척을 건조하기로 했다. 1922년에는 영국과 미국, 일본 모두가 기존의 전함을 훨씬 뛰어넘는 화력과 방어력을 갖춘 16인치에서 18인치 주포를 장비한 4~5만톤 급의 전함 건조를 추진하고 있었다.6) 

하지만 영국은 미국이 전력을 다해 함대를 건설할 경우 건함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재정적, 공업적 기반이 없었다. 1920~21년에 열린 워싱턴 회의에서 영국측은 현명하게도 미국에게 조약상의 평등한 지위라는 상징성을 양보하는 대신 미국이 건함 경쟁에 나서지 못하도록 유도했다. 워싱턴 해군조약에서는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해군의 전함 및 항공모함의 총톤수를 5:5:3:1.75:1로 정했다. 하지만 한 미해군 제독이 씁슬하게 토로했듯이 문서상의 동등함이 실전에서의 동등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과 일본은 조약을 이행하기 위해서 새로 건조하는 전함을 폐기 처분하거나 취소해야 했지만 영국은 기존의 구형 전함을 폐기하는 것으로 그쳤다. 영국 해군은 1920년대에 전함 배수량에서 미해군 보다 54,000톤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가장 유력한 가상적인 일본 해군에 대해서는 279,130톤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워싱턴 조약에서는 미해군과 일본 해군의 16인치급 전함에 대응할 수 있도록 영국 해군이 두 척의 16인치급 전함을 건조할 수 있게 했는데, 이렇게 해서 건조된 넬슨과 로드니는 세계대전을 통해 얻은 전훈을 반영한 함포, 기뢰, 어뢰 방어 기술을 적용한 전함이었다. 그리고 조약에서는 각 함선의 성능에 제약을 걸었는데, 전함의 경우 16인치 주포에 35,000톤, 순양함은 8인치 주포에 10,000톤이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 해군성은 재무성에 더 큰 전함에 필요한 설비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과 같이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영국측에서 미국이 순양함의 총톤수를 늘리려 한 것을 저지함으로써 영국 해군은 큰 이득을 얻었다. 영국 해군은 세계 최대의 순양함대를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있는 해군 기지를 확보했고, 보조 순양함으로 개장할 수 있는 상선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전 세계에 걸쳐 해상 봉쇄를 수행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확보했다.7) 

영국 해군이 협상을 통해 전함 배수량에서 우위를 달성하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을 낡은 무기 체계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말고 다른 국가들도 전함의 숫자에 해군력과 국제적인 위신이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전투 함대의 숫적 우위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인 흥정은 영국 해군성의 주특기였다.8) 그리고 영국 해군은 전함이 항공기와 잠수함의 위협에 맞서 발전할수 있는 무기 체계라고 생각했다. 워싱턴해군군축조약에서 주요 열강들은 10년간 전함의 신규 건조를 중단하기로 했기 때문에 영국 해군은 평화로운 긴축 재정의 시기에 막대한 예산을 들여 전함을 교체하는 것을 늦출 수 있었고 동시에 새로운 설계와 건조 기술을 시험해 볼 수 있었다. 동시에 낡은 전함들의 엔진과 방어력, 사격 통제장치를 개량할 수 있었다. 영국 해군성은 새롭게 전함을 건조할 수 있는 1930년대 초반이 될 때 까지 건함 예산을 잠수함, 구축함, 항공모함, 순양함을 현대화 하는데 사용하고자 했다.

1922년 부터 1926년 사이에 영국 정부는 해군에게 같은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 해군이 건조한 군함의 총 톤수에 필적하는 규모의 신규 건조를 승인했다. 영국 해군은 순양함 전력을 성공적으로 확충했고 이로 인해 영미관계에 위기를 초래했다.9) 일본과의 전쟁을 고려해서 배수량 1만톤에 8인치 주포를 탑재한 순양함을 선호했던 미해군은 순양함 전력에 있어서도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 의회는 순양함 증강을 계속해서 거부했다. 영국 해군은 해상 교역로 보호를 위해서 중순양함과 6인치 주포를 탑재한 경순양함을 골고루 건조하기를 원했는데 이를 위해 미해군 보다 더 많은 순양함을 필요로 했다. 1927년에 있었던 제네바 회담에서 영국과 미국 협상단은 절충점을 찾지 못하면서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했고 영국과 미국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미의회는 영국과의 협상이 실패하자 순양함을 추가로 건조하는 것을 승인했다. 일각에서는 순양함 건조를 둘러싼 영국과 미국의 경쟁이 해양 패권을 둘러싼 양국간의 전쟁 신호라고 보기도 했지만 이것은 다소 과장된 견해였다.10) 어찌되었건 영국과 미국은 자유주의 국가로서 당시의 국제 질서로 부터 서로 이득을 얻고 있었고 국제적인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는 것을 선호했다. 순양함을 둘러싼 논쟁에서 중요한 점은 영국 해군이 워싱턴 조약에 의거해 주요 경쟁 상대에 대해 유리한 점을 최대한 끌어냈다는 점과 영국 해군성이 영국 해군의 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 확신을 가지게 됐다는 점이다. 

전간기의 영국 해군은 일본 해군이 적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봤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정치적인 이유, 예산상의 이유, 그리고 조직의 목표라는 측면에서 너무나도 유용했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전쟁을 상정한 계획은 영국 정부가 대규모 함대는 물론 연료와 탄약을 비축하기 위해 싱가포르의 해군 기지를 증강하도록 설득하기에 적합했다.11) 해군성은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주력함대를 싱가포르에 파견해 일본 해군이 전투에 임하도록 끌어낼 것이었다. 일본 해군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전함, 항공모함, 순양함과 기타 지원함정이 균형을 이룬 함대가 필요했다. 달리 말하자면 해군성에서 대영제국의 방위를 위해 필요한 가장 경제적인 전력 구조라 할 수 있었다. 전간기 영국 해군 전략에서 기본적으로 전제한 것은 주력 함대를 가상적의 주력 함대에 대응하기에 적절한 지점에 배치하여 영국의 대외 무역을 보호하고 적국을 해상 봉쇄하는 것 이었다. 그러므로 영국 해군은 장차 벌어질 일본과의 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을 상대했던 방식으로 대영 제국을 방어할 것이었다. 

하지만 항공모함 관련 기술을 놓고 보자면 영국 해군은 캐터펄트와 어레스팅 와이어 부문에서 미해군이나 일본 해군 보다 뒤떨어진 것이 사실이었다. 그 원인은 해군본부가 새로운 장비들을 시험하도록 결정을 내리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과 영국 공군과 해군항공대의 역할에 대해 논쟁이 있었던데 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이 기술적인 진보에 거부감을 가진 보수적인 집단이었다고 서술하는 쇠퇴 신화와는 달리 영국 해군은 1918년에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인 아르거스Argus를 건조했으며 해군 본부의 입안가들은 미래의 전쟁에서 항공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에 전간기에도 항공모함 건조에 많은 예산을 투자했다. 해군항공대는 적 함대를 포착하고, 적의 항공기를 격추시키고, 적의 전함을 어뢰와 폭탄으로 타격한 뒤 아군 전함에게 끌어들여 최후의 승리를 가져올 것이었다.12) 미래의 함대전에서 최종 단계를 전함의 포격으로 마무리 한다는 영국 해군의 구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은 매우 드물었다.(예외라고 할 수 있는 사례는 두 건이 있다. 1941년 3월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마타판 곶 해전과 1941년 5월의 비스마르크 격침 이었다.)13)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폭격기는 전함의 주포를 해전의 주역에서 밀어냈다. 하지만 전간기에는 미해군과 일본 해군 역시 마찬가지로 작전 교리에서 항공모함을 부차적인 위치에 놓고 있었고, 항공모함이 해전에 변화를 가져오기는 하겠지만 혁명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14) 

영국 해군이 전간기에 잠수함의 위협을 과소평가했다는 쇠퇴론자들의 주장 또한 잘못된 것이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영국 해군본부의 전쟁 계획과 작전 연구는 미래의 전쟁에서 적국이 영국의 해상 교통로를 차단하거나 교란시킬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해군본부의 참모장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적국이 영국의 해상 교통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식은 오늘날의 말하는 ‘비대칭’ 전략이라는 점을 알았다. 바로 영국 주력 함대를 피해서 영국의 민간 상선단을 격침시킬 수 있는 함정을 건조하는 것 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이 독일 해군은 영국이 해상 교통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잠수함을 사용했고 일정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1917년에서 1918년 사이에 영국과 연합국은 호송선단 방식을 도입해 잠수함의 위협에 대처했다. 해군본부의 참모 장교들은 다음번 전쟁에서도 적국이 동일한 방식을 택하겠지만 그때에는 훨씬 더 큰 잠수함과 중순양함, 항공모함을 함게 운용하여 호송선단을 타격할 것이라고 보았다.15)  영국 외무성과 해군본부는 다른 국가들이 잠수함을 발전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외교적 수단과 기만책을 사용했다. 영국은 외교 분야에서 잠수함을 없앨 것을 제안했고 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다른 국가들의 잠수함 보유량에 제한을 걸려고 했다.16) 예를 들어, 프랑스 해군이 1920년대에 개발한 새로운 대형 잠수함은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 회담에서 자주 논의된 주제였다. 영국 해군 또한 미래의 전쟁에서는 적국이 대규모의 잠수함대를 준비해 놓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영국의 대잠외교에 있어서 핵심은 어떠한 적이라도 대규모의 잠수함 공세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방지하는데 있었다. 전쟁이 유럽이나 극동에서 일어날 경우 영국 해군은 상선단을 호위 하기 위한 대잠용 함선을 신속히 증강시켜 적의 잠수함 위협을 무력화 시킬 대비가 되어 있었다. 

영국 해군은 대잠외교를 뒷받침 하기 위해서 영국이 소나를 발전시켜 잠수함의 위협을 완전히 해소했다는 선전을 해서 외국의 해군을 기만하려고 했다. 수중의 물체를 음향으로 탐지할 수 있는 기술을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은 1917~18년 무렵으로 이때는 해상 작전에 영향을 끼치기에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영국 해군은 전간기에 소나 개발에 대한 정보를 일급 비밀로 하면서 동시에 치밀하게 소나의 성능을 부풀린 정보를 퍼뜨렸다. 1930년대 초반 정보당국으로 부터 독일 해군이 조약을 위반하고 잠수함을 다시 건조하기 위한 실험을 시작할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자 영국 해군은 언론과 정치권을 통해 가짜 정보를 더욱 더 많이 흘렸다. 해군 본부는 1937년에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군을 지원하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잠수함을 소나를 활용해 격침시켜 소나의 성능을 과시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다. 기만 공작의 효과를 평가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평화시에 오랫동안 지속된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1939년, 2차대전 중 독일의 잠수함 공세를 총지휘한 칼 되니츠 제독은 히틀러에게 영국이 소나의 성능을 과장한 기만 전술을 구사하는 가장 큰 원인은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이 충분한 잠수함을 확보해 전면적인 잠수함 공세에 나서는 것을 저지하는데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17) 물론 영국 해군도 독일 잠수함의 위협을 잘못 평가한 측면이 있다. 영국 해군은 독일 해군이 1918년 이래로 잠수함 기술에서 어떠한 결정적인 발전도 없었다는 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되니츠가 새로운 기술 대신에 야간에 부상하여 상선단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전술을 개발해 소나를 장비한 호위 함대를 회피할 것이라고 잘못 받아들였다.18) 그렇기는 해도 영국 해군의 대잠외교와 기만책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1939년 이후 5년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독일군의 잠수함 공세는 천천히 강화되었고 영국 해군은 이에 맞설 대비책을 충분히 강구할 수 있었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영국 해군에 대한 도전은 급격히 증대되었다. 전세계적인 경제 및 정치 위기에 독일이 1차대전의 설욕을 꿈꾸면서 군비 경쟁을 시작함으로써 영국의 해군 정책의 근간이 크게 흔들렸다. 예를 들어 해군은 일본을 제1의 가상적으로 삼고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했는데 해군의 몫이 크게 줄어들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 공군의 폭격기는 매우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1933년에서 1936년 사이에 독일의 군사력 증강이 유럽의 질서에 가한 전략적, 외교적 도전이 일본 해군 내부의 과격파와 상호작용을 일으켰다. 일본 해군 내에서는 1936년 워싱턴 조약이 만료되자 일본 해군 내에서는 총톤수를 영국 및 미국과 맞추지 못하는 이상 군비 통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20) 1934년 이후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소련은  군함 건조에 더 많은 투자를 시작했는데 이때 영국 해군은  구식 전함들을 개장하고 전체 함대의 규모를 일본 해군과 유럽 제2위의 해군을 합한 것 과 대등한 규모로 증강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 해군이 새롭게 시작된 군비 경쟁에 대처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1930년대 초반 영국 조선업계를 강타한 위기였다.21) 

이러한 위기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맞물리면서 생긴 결과였다. 1930년 주요 해군국들은 런던에서 회담을 열고 순양함의 비율을 등을 포함한 몇가지 사안을 결정했다. 런던해군군축조약에서 영국, 미국, 일본은 1936년까지 전함의 신규 건조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경제 상황이 정상적이었다면 1936년까지 전함 건조를 연기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터였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해군성에서 민간 조선소와 국영 조선소에 꾸준히 계약을 발주하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선박 건조 능력을 유지하여 낡은 전함들을 대체했을 뿐 아니라 가상적국의 공격적인 함대 건설에 맞설 대규모의 함대 증강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1930년 런던해군조약이 조인되고 얼마 있지 않아 대공황의 파도가 영국 조선업계를 휩쓸었다. 1929년에서 1935년 사이에 해군성의 신규 발주 감소와 전반적인 공업계의 침체 여파로 군함과 민간 선박 발주는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22) 비록 갑작스럽게 산박 건조량이 감소하기는 했어도 영국은 1930년대  내내 세계 최대의 조선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1940년대 이전까지는 함대를 증강하기에는 부족하고 현존하는 함대를 현대화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그쳤다.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에서 군비 경쟁은 시기상조였다. 만약 일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소련이 1941년 이전에 총력을 다해 함대를 증강했다면 영국의 조선 능력으로는 이를 압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해군성과 외무성은 이런 취약한 시기를 넘기기 위해서 1934~35년 사이에 영국 해군이 세계 최대의 해군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세계 각국의 해군력 증강을 제약할 새로운 국제해군조약을 추진했다. 

1936년의 새로운 해군조약의 협상 과정은 복잡했다. 해군성은 영국이 군비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기 전에 경쟁이 시작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새로운 해군조약에서 함대의 총 톤수를 제약할 것이 아니라 함종별로 주포의 구경과 톤수를 제약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얻었다. 함대의 총톤수 제약을 철폐함으로써 군비 경쟁을 억제한다는 발상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영국 해군성과 외무성은 총톤수의 비율에 국가별로 위계질서를 부여한 것이야 말로 각국 해군의 불만 요인이라는데 합의를 보았다.23)  함대의 총톤수 비율에서 국가의 명예와 위신이라는 요인을 제외하면, 해군력의 규모에는 각 국가의 전략적 필요성과 자원의 수준에 따른 전략적 이해관계가 반영되는 것이며 여기에서 영국을 최우선 순위로 놓고 미국, 일본, 그리고 다른 국가들은 그 뒤에 놓아야 한다는 점을 인식한 것이다. 영국의 군함 건조능력이 구식 전함을 신형 전함으로 교체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면 영국의 입장에서는 전함의 성능이 급격히 향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군함의 함종 별로 성능의 한계를 통일하는 국제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야 말로 합리적인 것 이 아닐 수 없었다. 1930년대에 제1해군경을 지냈으며 해군 정책의 큰 틀을 만든 어니 채트필드Ernie M. Chatfield경은 해군 군비통제를 통해 “어느 한 국가가 전함의 크기와 성능에서 우위에 서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24) 

이와 같은 관점에서 1935년 6월에 히틀러가 독일의 해군력을 영국의 35% 수준으로 맞춰달라고 제안한 것을 영국 정부가 신속히 승락한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25) 영국해군의 관점에서 영독해군협정은 독일의 해군력 증강을 덜 위협적이고 지리멸렬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외교적 미끼였다고 할 수 있다. 독일 정부가 해군조약을 준수하여 독일 해군을 작지만 균형을 맞춘 전력으로 만든다면 영국으로서는 이것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일 해군이 영국이 두려워 하던 비대칭 전략을 채택하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독일의 해군력 건설이 베르사이유조약의 제약을 받고 있었던 1920년대 후반에 독일 해군은 배수량 1만톤에 11인치 주포를 장비해 전함 보다는 빠르면서 순양함 보다는 중무장을 갖춰 영국의 해상 교통을 교란하는데 적합한 혁명적인 전함을 개발했다.26) 영독해군협정의 조항들은 포켓전함과 신형 순양함의 개발을 제약할 것 이었다. 

1936년 3월 영국, 미국, 프랑스는 제2차 런던해군군축조약에 서명하였고 이 조약은 영국 해군성이 원하던 규정들을 대부분 담고 있었다.  독일과 소련도 1937년 7월 조약에 서명함으로서 해군군비통제에 따랐다. 이탈리아는 1938년 조약에 서명했다. 영국 해군은 영국이 세계 제일의 해군국으로 남아있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기 위하여 1937년 대규모의 전함 건조계획을 발표하고 다섯척의 킹조지5세급 전함의 기공을 시작했다. 1930년대 초반 영국의 조선업계는 위축되어 있었지만 이제 영국 해군은 새롭게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고 노동력도 증가했다. 1928년 부터 1941년 까지 신규 건조한 물량으로 영국은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다른 열강의 해군력을 상회할 수 있었다. 영국 해군은 전반적으로 1백만톤의 새 군함을 획득했지만 미국은 70만톤, 일본은 60만톤에 그쳤다.27)  즉, 가상적과 우방국의 해군력을 능가하는 군함을 건조하고 자국의 전략적 목적에 맞춰 해군군비통제를 유도한 국가를 쇠퇴했다고 서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겠다. 

영국 해군의 계획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5년간의 평화가 필요했다. 이때문에 제1해군경이자 참모총장위원회Chiefs of Staff committee 위원장이었던 채트필드 제독은 네빌 체임벌린 수상의 대독유화정책을 지지했던 것이었다.28)  해군성은 너무 이른 시기에 독일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대형 군함을 건조할 예산이 호송선단을 호위할 군함을 건조하는데 전용되거나 제1차 세계대전때 처럼 육군과 공군으로 돌려질 수 있으며 미국과 일본의 군함 건조를 촉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군성은 영국과 미국, 일본이 보조를 맞추는 한 일본은 군축협상을 준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29) 영국 해군과 미해군은 일본을 건함 경쟁에서 압도할 수 있으며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1938년 3월, 일본 정부가 새로운 군함 건설 계획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겠다고 하자 제2차 런던해군군축조약 조인국들은 전함의 성능 기준을 배수량 35,000톤에서 40,000톤으로, 주포 구경은 15인치에서 16인치로 상향하기로 했다. 영국과 미국 정보당국은 일본이 새로 건조하는 전함이 이정도 수준일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측은 배수량 70,000톤에 18인치 주포를 갖춘 첫번째 전함을 기공한 상태였다.30) 영국 해군성은 영국 조선소의 건조 능력의 한계 때문에 40,000톤급의 전함을 건조하기로 결정했다.31) 
 
영국 해군이 배수량 40,000톤에 16인치 주포를 장비한 라이온급 전함의 건조를 시작할 무렵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해군성의 예상대로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해군의 우선순위는 장기적인 함대 건설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에서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을 갖추는데 돌아갔다. 전쟁 초기에 영국 해군은 소중한 전함을 독일의 잠수함과 일본군의 폭격기에 잃어버리는 등 많은 패배와 재앙을 겪었다. 하지만 싸우는 군대의 질적인 요소는 그 군대가 고난을 이겨내는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이 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의 성과는 특히 독일이 프랑스와 노르웨이를 정복해 영국 해군이 전쟁 이전에 구상한 해상전 수행 계획을 뒤틀어 놓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놀라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영국 해군은 1939~40년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수상함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비시 프랑스의 해군을 무력화 했고 독일의 잠수함 공세를 막아내는 동시에 히틀러가 영국 침공 계획을 단념하게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영국 해군이 대서양과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추축국에 맞설 연합이 결성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1945년 이후의 세대의 역사가들은 제2차세계대전 중 영국 해군의 업적에 대해서는 칭송했지만 전간기의 영국 해군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비판했는데 그 이유는 전쟁 초기 패배의 원인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간기 영국 해군의 역사를 단지 불운한 막간극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전간기의 영국 해군을 당시의 환경을 고려해 바라본다면 전간기의 역사가 불가피한 쇠퇴의 시기가 아니라 수많은 난제에 직면해 탁월한 기량과 대담한 용기를 발휘한 시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석

1) 이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로는 Paul Kennedy, The Rise And Fall of British Naval Mastery (London: Macmillan, 1984), pp. 267–98과  Stephen Roskill, Naval Policy Between the Wars, 2 vols. (London: Collins, 1968/76)가 있다. 
2) Gordon Martel, ‘The Meaning of Power: Rethinking the Decline and Fall of Great Britain’,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Vol. 13, No. 4, November 1991), pp. 662–94. 
3) 영국의 쇠퇴를 주장하는 학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반론으로는 David Edgerton, Warfare State: Britain, 1919–197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가 있다. 
4) Matthew S Seligmann, The Royal Navy and the German Threat 1901–1914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Paul G Halpern, A Naval History of World War I (London: UCL Press, 1994). 
5) William J Williams, ‘Josephus Daniels and the US Navy’s Shipbuilding Program during World War I’,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 60, No. 1, 1996), pp. 7–38. 
6) John Jordan, Warships After Washington: The Development of the Five Major Fleets 1922–1930 (Barnsley: Seaforth Publishing, 2011), pp. 1–24. 
7) John Ferris, ‘“It Is Our Business in the Navy to Command the Seas”: The Last Decade of British Maritime Supremacy, 1919–1929’, in Keith Neilson and Gregory C Kennedy (eds),Far Flung Lines: Studies in Imperial Defence in Honour of Donald Mackenzie Schurman (London: Frank Cass, 1997), pp. 129–34. 
8) Colin S Gray, The Leverage of Sea Power: Strategic Advantage of Navies in Major Wars (New York, NY: The Free Press, 1992). 
9) Ferris, ‘“It Is Our Business in the Navy to Command the Seas”’, pp. 129–34. 
10) Christopher M Bell, ‘Thinking the Unthinkable: British and American Naval Strategies for an Anglo–American War, 1918–1931’,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Vol. 19, No. 4, 1997), pp. 789–808. 
11) Christopher M Bell, The Royal Navy, Seapower and Strategy between the Wars (Basingstoke: Macmillan, 2000), pp. 59–98. 
12) Geoffrey Till, Air Power and the Royal Navy, 1914–1945 (London: Jane’s, 1979). 
13) Duncan Redford, A History of the Royal Navy: World War II (London: I. B. Tauris, 2014), pp. 102–08,133–54. 
14) Geoffrey Till, ‘Adopting the Aircraft Carrier: The British, American and Japanese Case Studies’, in Alan R Millett and Williamson Murray (eds), Military Innovation in the Interwar Period(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p. 191–226. 
15) Joseph A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Basingstoke: Macmillan, 1998), pp. 63–86. 
16) David Henry, ‘British Submarine Policy, 1918–39’, in Brian Ranft (ed.), Technological Change and British Naval Policy, 1860–1939 (London: Hodder & Stoughton, 1977), pp. 81–163. 
17) Joseph A Maiolo, ‘Deception and Intelligence Failure: Anglo–German Preparations for U-Boat Warfare’, Intelligence and National Security (Vol. 11, No. 1, 1996), pp. 32–58. 
18) Joseph A Maiolo, ‘“I Believe the Hun is Cheating”: British Admiralty Technical Intelligence and the German Navy, 1936–39’, Intelligence and National Security (Vol. 11, No.1, 1996), pp.32–58. 
19) Marc Milner, ‘The Battle of the Atlantic’,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Vol. 13, No. 1, 1990), pp. 45–66. 
20) Sadao Asada, From Mahan to Pearl Harbor: The Imperial Japanese Navy and the United States (Annapolis, MD: Naval Institute Press, 2006), pp. 99–157. 
21)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33–38. 
22) Ferris, ‘“It Is Our Business in the Navy to Command the Seas’”, pp. 76–95; Jon T Sumida, ‘British Naval Procurement and Technological Change, 1919–39’, in Phillips P O’Brien (ed.), Technology and Naval Combat in the Twentieth Century and Beyond (London: Frank Cass, 2001), pp. 128–47. 
23)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5–19. 
24) Ibid., pp. 1–19. 
25) Ibid., pp. 19–62. 
26) Jost Dülffer, Weimar, Hitler, und die Marine: Reichspolitik und Flottenbau, 1920 bis 1939 (Düsseldorf: Droste Verlag, 1973), pp. 109–30. 
27) Edgerton, Warfare State, pp. 26–33. 
28)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38–58. 
29) Stephen E Pelz, Race to Pearl Harbor: The Failure of the Second London Naval Conference and the Onset of World War II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4), pp. 149–64. 
30) Malcolm Muir, ‘Rearming in a Vacuum: United States Navy Intelligence and the Japanese Capital Ship Threat, 1936–45’,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 54, No. 4, 1990), pp. 473–85;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33–58. 
31) David K Brown, Nelson to Vanguard: Warship Design and Development, 1923–1935 (London: Chatham Publishing, 2000), pp. 35–37.

2013년 9월 18일 수요일

워싱턴 DC의 Navy Yard 총격사건을 보고

어제 새벽에 워싱턴 DC에 있는 Navy Yard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군사시설 치고는 좀 개방적인 곳이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Navy Yard에는 민간인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두곳의 시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미해군의 군사사연구소라 할 수 있는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이고 다른 하나는 미해군 박물관인 National Museum of the U.S. Navy입니다. 전자의 경우 한국에서도 꽤 많은 분들이 연구를 위해서 방문한 덕분에 유명한 편입니다. 후자의 박물관도 마찬가지죠.

저는 저곳에 갔을때 관리사무소에 여권번호만 기입하고 엉성한 임시 출입증을 끊어주고는 자유롭게 기지안을 돌아다니게 허용하는 것에 꽤 놀랐습니다. 스위스군 기갑박물관에 갔을때 군사시설 내에 있어서 안내인을 대동하도록 한게 생각나더군요. 미국을 돌아다니면서 의외로 군사시설의 경비가 엉성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습니다.

확실히 엉성한 출입증입니다.

그래서 만약 이상한 녀석이 군부대 내에서 총기난사를 하면 어떻게 대응할까 했는데 결국 그 망상이 현실화 됐군요. 굉장히 씁슬합니다. 사회의 개방성과 관용에 대한 짜증나는 도전이로군요.

2013년 3월 24일 일요일

BB-64 위스콘신

노퍽에서 맥아더 기념관을 구경한 뒤 늦은 점심을 먹고 근처에 있는 BB-64 위스콘신을 구경하러 갔습니다. 위스콘신은 미국에서 건조되어 완성된 최후의 전함이죠. 이날 다른 일정 때문에 관람시간을 맞추지 못해서 바깥에서만 구경한 것이 아쉽더군요. 이런 곳은 좀 여유있게 방문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BB-64 위스콘신은 미국에서 첫번째로 구경한 전함이었습니다. "전함"의 실물을 태어나서 처음 보는지라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군요. 유감스럽게도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으니 바깥에서 잠시 구경하며 찍은 사진을 몇장 올려봅니다.




위스콘신의 함수는 사고로 파손되어 같은 급의 켄터키의 함수를 이식했다죠

이 위치에서 보면 정말 그 거대함에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을 비롯해 한국전쟁 관련 기장이 둘이나 있네요

2번 포탑을 찍어 봤습니다.



5인치 부포용 Mk.37 사격통제체계의 Director


그리고 위스콘신의 좌현쪽에는 수병 동상이 하나  세워져 있습니다. 이것도 나름 유명한 물건이더군요. 시큰둥해 보이는 표정이 자대 복귀를 앞둔 듯 싶습니다...



블루엔젤스 마킹을 한A-4

늘 그렇듯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시 오겠다는 생각만 하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커서 그런지 더 근사해 보이더군요.


2012년 9월 8일 토요일

[번역글] "마스터 플랜" : 중국의 신형 유도미사일 구축함

9월 4일 The Diplomat 인터넷 판에 재미있는 글이 한 편 실렸습니다. 제목은 “‘마스터 플랜’ : 중국의 신형 유도미사일 구축함(The Master ‘PLAN’: China’s New Guided Missile Destroyer)”인데 영어로 계획을 뜻하는 Plan과 인민해방군 해군(PLAN, People’s Liberation Army Navy)의 영문약자가 같은 점을 이용해서 재미있는 글장난을 하고 있네요. 제목부터 재미있습니다. PLAN이라는 글자가 중의적이라서 ‘기본계획’ 대신 ‘마스터 플랜’이라고 옮겼습니다.

이 글의 필자인 미해군전쟁대학U.S. Naval War College교수 요시하라 도시吉原俊井와 제임스 홈즈James R. Holmes는 중국해군의 건함 양상이 구축함 중심의 대형함정 위주로 나가고 있으며 영유권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중국 인근 해역에서의 작전을 염두에 두고 진행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중국의 구축함 건조가 해군력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방향으로 서술을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대응이 어떤 양상으로 나갈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불균형을 메꿔줄 나라가 어디인지는 뻔한 것인데 한국에는 한미일의 군사적 협력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이 많아서 이 글을 불편하게 받아들일 사람도 많을 듯 싶습니다.

날림번역이긴 합니다만 한번 읽어보시죠.


“마스터 플랜(The Master PLAN)’ : 중국의 신형 유도미사일 구축함”

우리는 야구장의 철학자 요기 베라Lawrence Peter "Yogi" Berra의 열렬한 추종자이다. 요기 베라는 “예측을 하는 것은 어렵다. 특히 미래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위대한 요기 베라가 그랬던 것 처럼 우리도 예언에 운을 걸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2010년 말 더 디플로맷The Diplomat에 중국 정부가 해군 증강을 늦추거나 중단할 것이라고 예측한 서방 전문가들의 견해가 틀릴 것이라는 예측을 한 바 있다.
중국이 해군 증강을 늦추거나 중단할 것이라고 예측한 전문가들은 그 증거로서 중국이 유도미사일구축함, 즉 DDG의 건조를 중단했다는 점을 내세웠다. 만약 그대로 되었더라면 중국은 의도적으로 자국 해군의 타격력을 감소시키는 선택을 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중국해군은  여러 종류의 유도미사일 구축함을 시험하면서 이중에서 가장 뛰어난 요소만을 종합한 함정을 완성하려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에 공개된 052D 뤼양(旅洋)2급 유도미사일 구축함의 사진을 놓고 봤을때 구축함의 건조를 본격적으로 재개할 것이라고 보았다.
최근까지 서방의 중국인민해방군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중국의 조선소에서는 유도미사일 프리킷이나 고속정 처럼 방어에 특화된 항속거리가 짧은 소형함정을 건조하기 위해서 유도미사일 구축함 같은 주력함정의 건조를 늦추거나 중단하고 있다는 주장이 주를 이루었다. 이들은 2005년 이래로 구축함의 건조가 줄어들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 이들은 이를 통해 중국의 해군력 건설이 위협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아무리 잘 봐줘야 직관력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지난 몇년간 중국과 서방의 군사 웹사이트에는 이런 낙관적인 전망을 뒤흔들 사진들이 잇달아 올라왔다. 이러한 사진들은 우리가 중국의 건함 경향에 대한 예측을 내놓았던 2010년에 이미 중국은 유도미사일 구축함의 건조를 재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최근의 정보들은 상하이에 있는 장난(江南) 조선소에서 여섯번째의 052C 유도미사일 구축함을 진수했으며 연평균 두척을 기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옆에서 건조중인 새로운 함정은 052C의 후속함인 052D로 추정된다. 그리고 잘 알려진 중국 전문가 한명은 지난주 신형 함정(052D) 한척이 진수되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이 배가 당장 항해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조선소의 일반적인 공정을 감안할 때, 더 많은 작업이 진행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배를 진수한 것은 대양으로 신형 군함을 내보내는 중요한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중국해군은 가장 적합한 수상전투함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타이페이 타임즈에 따르면 비밀에 둘러쌓인 새 군함은 052C의 개량형으로 중국의 해군 지지자들에게 “중국판 이지스”로 불리고 있으며 미국의 이지스함과 기술적으로 대등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필자들은 이런 주장을 신뢰하지 않는다.) 052D는 스텔스 설계가 적용된 6,000톤급 함정으로 가스터빈 엔진을 갖췄으며 64개의 수직발사기(VLS)를 갖추고 있다. 수직발사기는 함체에 내장된 수납통이라 할 수 있다. 각 수직발사기는 미사일 적재량에 따라 한 발에서 네 발의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 수직발사기는 함내의 무기고에서 발사대까지 미사일을 옮기면서 일어나는 불편함, 시간 지연, 기술적 문제 없이 함대공, 함대함, 함대지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게 해준다.
최소한 서류상으로 052D는 미해군의 알레이버크Arleigh Burke급 유도미사일구축함이나 타이콘데로가Ticonderoga급 유도미사일순양함의 축소판에 가깝다. 중국해군의 유도미사일 구축함은 미국 해군의 해당 함종보다 배수량이 작은데 미국 해군의 알레이버크급은 11,000톤, 타이콘데로가급은 9,600톤이다. 배수량이 작다는 것은 연료탑재량이 더 적고 그만큼 항속거리도 짧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정도의 능력은 이 군함이 활동하게 될 중국의 “근해”와 인도양에서의 국지적 임무에는 적합한 것이다. 052D급의 무장 또한 알레이버크급이나 타이콘데로가급 보다 적은데 전자는 수직발사기 96개를, 후자는 수직발사기 122개를 장착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구축함들은 아시아 해역에서의 국지분쟁에는 충분한 타격력을 갖추고 있다. 또한 중국 구축함들은 대부분 연안에 배치된 전력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작전을 펼칠 것이므로 화력의 격차는 줄어들 것이다.
중국정부는 199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해군 증강을 시작하면서 함대 건설에 매우 합리적인 접근방식을 취했다. 중국을 둘러싼 전략환경이 유리하고 미국이 공해와 하늘에 대해 자유로운 출입을 허용하는 동안 중국해군은 여유롭게 “함대에 대한 실험”을 시도했다. 조선소에서는 여러 종류의 소형함정을 건조하면서 장점만을 골라서 취했으며 나머지는 버렸다. 이러한 ‘위험회피risk-averse’ 방식을 통해 기술적인 감각을 획득하면서 조선공학 측면에서 질적인 도약을 이룩했다.
각각 두척 내외가 건조된 다섯 종류의 함급으로 이루어진 중국의 수상함대는 이러한 느린 접근방식의 증거이다. 이 함정들은 모항 근처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 중국해군은 승무원들의 기량을 향상시키고 새로운 교리를 개발하며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험적으로 건조된 함정들을 원양에 투입했으며 이를 통해 실질적인 가치를 얻어냈다. 인도양에서의 해적 퇴치 작전에서도 이런 방식을 취한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중국해군은 한 종류의 함정을 대량 건조하게 될 것이다. 중국이 해군에 대한 실험을 마무리 짓기에는 적절한 시기로 보인다. 소련이 건조한 항공모함 바략을 개장한 중국해군의 첫번째 항공모함은 시험 운항을 실시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 정보에 따르면 중국은 바략의 갑판에서 운용이 가능한 러시아의 Su-33 전투기를 역설계한 파생형인 J-15의 시험비행을 실시했다고 한다. 중국해군의 첫 항공모함 기동전단에서 아직 미비한 것은 항공기와 미사일로 부터 주력함을 보호할 수 있는 다목적의 감시용 함선이다. 052D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신형 유도미사일 구축함이 순전히 항공모함을 보유하려는 중국의 야망을 실현하려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중국이 미국과 동등한 항공모함 전투단을 편성하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다. 중국은 항공모함과 항공모함 항공단, 수상함정, 그리고 전위를 맡을 원자력추진 공격잠수함으로 빈틈없이 상호 연계가 가능한 팀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구축함의 유용성은 단지 중국의 항공모함 도입 계획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구축함은 주력이 되는 함선이다. 다목적의 유도미사일 구축함은 중국해군이 체계적으로 항공모함 운용 방식을 습득하는 동안에 다른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다. 특히 052D급은 수상함전투전대SAG, Surface Action Group나 상륙기동부대의 지원에 배속하거나 항공모함이 아닌 다른 중요 함선을 보호할 수 있다. 또한 052D급은 임무에 따라서는 부대의 핵심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052D은 광대한 해역에서 이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지난 5년간 11척에 달하는 수상함전투전대들이 류큐 열도를 가로지르는 공해상의 해협을 통과해 서태평양으로 진출했다. 2012년의 첫 6개월 동안에만 4개의 수상함전투전대가 이곳을 통과해 대양으로 나갔다. 이러한 해상 활동 경향은 수상함전투전대가 운용하게 될 수상함에 관한 조직원칙을 이해하는 핵심일 수 있음을 보여주며 그 중에서도 052D급은 핵심적인 위치에 있을 것이다.
중국해군은 무엇을 할 것인가? 특히 개량된 뤼양급은 대함공격에 특화되어 있는, 중국이 보유한 러시아제 소브레메늬급 구축함에 대한 공격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052D급은 중국이 연안지역에 힘을 투사하기 위해서 건조하고 있는, 아직은 얼마 안되지만 꾸준히 규모가 증가하고 있는 상륙강습함들을 호위할 수도 있다. 이러한 원정타격부대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해군을 간단히 압도할 수 있을것이다. 특히 이런 종류의 부대는 남중국해의 섬을 점령하는데 적합하다. 또한 052D급은 기동성과 스텔스성을 갖춘 022 허베이급 쌍동선에 대한 대공방어를 제공할 수 있다. 허베이급은 작은 선체로 감지를 회피하며 우세한 적 함대를 상대로 제해권을 확보하거나 거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거리 대함 순항미사일을 운용한다.
게다가 타이완에서 돌발사태가 발생할 경우, 최신예 유도미사일 구축함은 방어하는 대만공군의 생존능력을 위협할 수 있는 함대 기반의 방공능력을 제공할 수 있다. 한척의 052D급은 장거리 탐지능력과 교전 거리를 가졌기 때문에 중국본토에 배치된 지대공 미사일의 유효사정거리를 훨씬 넘어서 타이완 인근, 혹은 타이완 전역에 걸친 범위를 담당할 수 있다. 타이완 동쪽에 배치된 052D급은 타이완을 완전히 포위해서 타이완 조종사들이 이륙하면 모든 방향에서 위협을 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해군은 이토록 인상적인 일선의 함선들을 해외로 파견해서 중국의 군사적 강력함을 외국인들에게 과시하고 해군외교를 증진할 수 있을것이다. 핵심은 중국이 더 많은, 그리고 더 우수한 대형 구축함을 가지게 될수록 다양한 임무를 위해서 중국해군의 다양한 자산을 조합할 수 있게 될것이라는 점이다.
끝으로 한마디 더 하자면, 중국해군이 유도미사일 구축함을 증강하는 것이 이 지역의 해군력 균형을 뒤바꿀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답은 간단하다. 그렇다. IISS의 밀리터리 밸런스Military Balance에 근거해 간략하게 추산해 보는 것 만으로도 실상이 잘 드러난다. 타이페이 타임즈가 예측한 것 처럼 중국이 10척의 052D급을 배치한다면 중국해군은 이지스함에 견줄수 있는 함정을 16척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중국해군이 10척만 건조하고 멈출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 현재 아시아 지역에서 이지스함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인 일본과 한국의 경우 각각 6척과 3척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최소한 서류상으로는, 이 경우 중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국이 되는 것이다. 일단 052D급이 함대에 배치되기만 하면 중국해군은 미해군을 제외하면 다른 어떤 나라의 해군을 상대로 하더라도 우위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해군은 일본해상자위대에 대해서 16:6의 우세를 보일 것이며, 한국해군에 대해서는 16:3의 우세를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의 연합함대에 대해서는 16:9의 우세를 보일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That’s significant.)
중국에게 유리한 쪽으로 균형이 기울게 되면 수년내로 아시아에서는 새로운 건함 경쟁이 일어날 것인가? 미국이 아시아에서 유지할 수 있는 힘과 아시아 국가들이 군비경쟁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이로 인한 비용을 부담하려는 의지에 많은 것이 달려있다. 이제 중국해군이 해군력 건설을 멈추었느냐는 논의는 할 필요도 없다. 이제는 이 골치아픈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할 때이다.

2012년 9월 4일 화요일

항공모함의 효용에 대한 최근 미국의 논의

얼마전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에 올라온 로버트 해딕Robert Haddick의 글, “Shipping Out : Are aircraft carriers becoming obsolete?”을 읽고나서 몇가지 잡생각을 했습니다.

미국 연방정부의 예산감축에 따라 국방비도 크게 감축되고 있는데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많은 예산을 잡아먹는 항공모함의 효용성에 대한 논의가 있는 모양입니다. 막대한 유지비가 소요되는데다가 고속의 장거리 대함미사일의 발전 때문에 갈수록 작전에 제약을 받게될테니 “값싼” 다른 대안을 찾아봐야 하는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것 입니다. 특히 최대의 가상적인 중국은 접근거부전략을 취하면서 대함미사일을 중시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는데 이 경우 항공모함 항공단의 주 용도인 지상타격은 꽤 곤란해 질 수 있습니다. 항공모함이 항공기들의 작전범위 내에서 미사일 때문에 활동의 제약을 받게된다면 그야말로 돈낭비가 되겠지요. 특히 항공모함은 미국의 강력함을 상징하는 정치적 자산이기도 한데 싸구려 미사일 몇발 때문에 써먹을 수 없다면 미국의 정치적 위신이 실추될 수도 있습니다.(이건 꽤 심각한 타격이 되겠지요.)

재미있게도 이런 상황에서 항공모함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미국 공군의 B-1이나 B-52 같은 장거리폭격기들이 매력적인 대안으로 비춰지는 모양입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드러난 것 처럼 긴 항속거리와 많은 탑재량을 가진 장거리폭격기는 새로운 전장 환경에 잘 맞는 유용한 무기였습니다. 신속대응이 가능하면서도 항공모함에 비하면 ‘저렴한’ 무기체계라는 점에서 예산에 신경을 쓰는 정치인들의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 입니다.

이 상황은 마치 트루먼 행정부에서 ‘제독의 반란’이 일어날 당시의 상황과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트루먼 행정부도 국방예산 삭감을 추진하면서 비용이 많이드는 항공모함 중심의 해군 보다는 B-36으로 대표되는 장거리폭격기와 핵무기를 중심으로 한 국방정책을 취하려 했지요. 똑같은 상황은 아닙니다만 예산감축이 필요한 상황에서 장거리폭격기가 항공모함의 대안으로 비춰지는 것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2012년 5월 1일 화요일

[번역글] 미국방부를 갉아먹은 비행기(The Jet That Ate the Pentagon)

F-35 계획은 이미 오래전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소비하며 수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제 F-35 계획을 취소하자는 목소리는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지난 4월 26일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에 실린 휠러Winslow Wheeler의글, 미국방부를 갉아먹은 비행기(The Jet That Ate the Pentagon) 또한 이 계획의 중단을 촉구하는 목소리 중 하나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계획에 반대하는 입장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지난 1월에 번역했던 “어째서 파네타의 국방부가 예산을 삭감하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가?”와 함께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윈슬로 휠러

미국은 차세대, 즉 5세대의 공대공, 공대지 전투항공기에 대한 옹호의 목소리에 떠밀려 F-35 통합타격전투기에 막대한 투자를 해왔다. F-35는 레이더에 거의 포착되지 않으며 어떠한 미래의 전장도 장악할 수 있다고 선전되면서 미공군과 해군, 해병대와 9개국에 달하는 해외 동맹국이 보유한 대부분의 전투용항공기를 대체하여 향후 55년간 일선에 머무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비용이 소요된 이 계획이 재난에 빠졌다는 것은 지금 모두가 알고 있다.

4월에 미국방부는 F-35의 도입비용에 2억8900만 달러를 더 추가했는데 이것은 계속된 비용 증가 중 가장 최근의 것이다. 그리고 이 계획은 미국방부의 국방조달계획 중 38%라는 어처구니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게다가 그 비용은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F-35 계획의 문제점은 각 정당의 지도급 인사들이 미국방부에 지출 삭감을 요청하기 위해서 요청한 것에서 잘 드러나는데, 하원의 프랭크Barney Frank(민주당, 메사추세츠) 의원, 상원의 코번Tom Coburn(공화당, 오클라호마) 의원, 오바마 대통령의 재정 책임과 개혁에 관한 국가위원회National Commission on Fiscal Responsibility and Reform, 그리고 상원의 도미니치Pete Domenici(공화당, 뉴멕시코) 의원과 의회예산국Congressional Budget Office 및 대통령실 행정관리예산국Office of Management and Budget의 국장을 지낸 리블린Alice Rivlin 등의 예산전문가들이 그러하다.

이것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미국방부의 모든 계획에서 가장 기본적인 3대 요소인 비용, 일정, 그리고 성능의 측면에서 F-35 계획은 근본적인 문제를 보이고 있으며 계속해서 심각해지고 있다. 가장 먼저 정치인들이 계속해서 엄격한 국방비용지출을 이야기 하는 상황에서 특히 중요한 요소인 비용문제를 살펴보면 F-35는 말그대로 용납될 수가 없다. 원래 이 비행기는 비용절감을 위한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나 지난 10년간 심각한 비용 상승으로 계획이 몸살을 앓아왔다. 지난해 미국방부의 수뇌부는 의회에서 획득비용이 또다시 16%나느 상승해서 2,457대를 획득하는데 3283억달러에서 3794억 달러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걱정을 마시라, 국방부에서는 비용증가를 억제하겠노라고 공언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올해 2월 조달비용은 또다시 4%가 증가해 3957억 달러가 되었고 4월에도 또다시 뛰어올랐다. 비용증가가 여기서 멈출것이라는 기대는 접어야 한다. 연방회계국의 보고에 따르면 시험계획은 이제 겨우 20% 완료되었을 뿐이며 더 심각한 시험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정리해보면 이 계획의 비용은 2001년 처음 예상했던 2265억달러에서 75%나 증가했는데 원래의 계획은 2,866대를 도입하는 것 이었다.

초기 시험이 완료되면 2019년 이전까지 수백대의 F-35가 생산될 것이다. 그 이후에 발견될 피치 못할 결함을 수정하기 위한 추가 비용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시험에 사용된 비용 5억3400만 달러보다 많을 것은 확실하다. 총 대당계획비용은 현재 F-35 한대에 1억6100만달러에 달하는데 이것도 단지 일시적인 잠정에 불과하다. 새로운 예산 제한이 국방부에 타격을 끼치게 될 2013년 초까지 예상되는 또다른 비용상승을 감안하면 F-35는 더 큰 타격을 받게 되어 도입 대수가 줄어들게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대당 비용도 더 늘어날 것이다.

비용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도록 하자. F-35의 비용은 위에서 언급한 3957억 달러보다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될 것이다. 이것은 순수하게 현재 기준에서 도입비용만을 예측한 것이지 F-35의 전체 운용에 소요될 비용은 감안하지 않은 것이다. 현재 예상치로는 운영과 지원에 1조1천억 달러가 소요될 것이며 도입비용을 합하면 총 1조5천억 달러에 달할 것이다. 이것은 스페인의 연간 GDP보다도 더 많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조차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이다. F-35는 F-16을 운영하는 것 보다 단지 42% 정도만 더 비쌀것이라고 예상되고 있지만 F-35는 훨씬 복잡한 기종이다. F-35를 제외한 다른 “제5세대” 항공기로서 역시 같은 회사가 제작한 F-22는 몇몇 측면에서는 F-35 보다 덜 복잡하지만 2010년 기준으로 시간당 운영비용이 F-16의 세배에 달했다. 아주 보수적으로 추산하더라도 F-35의 운영 및 지원비용은 F-16의 두배는 될 것이다.

F-35의 가격은 이미 감당할 수 없을 수준이 되었지만 오직 한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바로 위로! F-35는 비싸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일정까지 초과했다. 최초의 계획에서는 F-35의 초도물량이 2010년까지는 전력화 되도록 되어있었다. 그 다음에는 첫 배치를 2012년으로 늦췄다. 가장 최근 군에서는 배치 시기를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청문회에서 비공식적으로 밝힌 내용에 따르면 새로운 목표는 2019년이다. 거의 10년이나 늦춰진 것이다.

F-35의 성능이 압도적이라면 비용 초과와 시간지연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다. 설사 F-35가 초기에 제시된 성능을 달성한다 하더라도 엄청나게 실망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그 성능 조차 내지 못 할 것이다. F-35가 그저그런 성능을 낼것이라는 점은 왜 이것을 용납할 수 없으며 앞으로도 한동안 획득할 수 없을 것인지를 말해준다.

필자는 F-16, A-10과 같은 매우 성공적인 항공기의 개발을 담당했던 이들을 포함한 항공기 전문가들과 국방부에서 수십년간 조달분야의 경험을 쌓고 F-35 계획의 초기 단계를 직접 지켜보았던 조달분야의 전문가들과 대화를 나눈 결과 F-35의 문제는 근본적인 단계(very DNA)부터 예정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F-35의 기원은 1980년대 말, 약삭빠른 혁신으로 과도한 명성을 얻었던 국방부 산하기관인 방위고등연구기획국DARPA, 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에 서 비롯되었다. 이 계획은 STOVL , 즉 초단거리이륙 및 수직착륙 능력을 갖추고 초음속으로 비행할 수 있는 항공기에 대한 제안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 기종에 대한 요구사항으로는 짧고 뭉툭하며 단발 엔진을 가진 기체와 날렵하며 긴, 그리고 일반적으로 쌍발엔진이 가진 강력한 추력을 가진 기체가 동시에 제기되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기 미국방부는 이미 절충적인 설계 개념에다가 이 기종이 제공전투기는 물론 폭격도 할 수 있는 다목적 항공기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사항을 추가해서 어려움에 봉착하게 만들었다. 이 요구사항은 융통성과 경량화, 그리고 더 많은 탑재량 사이의 절충점을 더 맞추기 어렵게 했다.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관료들은 ‘스텔스’ 기능을 추가해서 공기역학적인 요구사항과 유지에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레이더 반사를 낮추는 표면 코팅이 더해졌다. 또한 탑재하는 미사일과 폭탄의 레이더 탐지를 피하기 위해서 기본 중량과 항력을 늘리는 두개의 무장창을 추가했다. 최종적으로 국방부는 각군이 공동으로 운용하도록 하여 공군, 해병대, 그리고 해군의 크게 다른, 게다가 까다로운 요구사항을 만족시키기 위해 더 많은 절충을 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역시 클린턴 행정부 시기에 이 계획을 옹호하는 집단은 매우 “병행적인” 도입 전략을 고안했다. 이것은 시험 결과가 나오기 전에 수백대의 F-35를 생산하고, 재정 및 정치적인 뒷받침을 받도록 하는 것 이었다.

이 기괴하기 짝이없는 가망없는 계획은 이미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시험비행의 80%가 아직 남아있다. 날아다니는 피아노와 같은, F-35는 공대공 모드에서는 F-16의 민첩성을 따라가지 못하며 지상공격 모드에서는 F-15E의 작전범위와 장착량을 따라가지 못하고, 심지어 교전중인 지상부대에 대한 저고도 근접항공지원 임무에서는 A-10과도 비교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더 끔찍한 것은 F-35는 복잡해서 정비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즉시 사용하기에 제약이 많다보니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혹은 임무만큼 중요한 조종사의 훈련을 위해 빈번하게 출동할 수 없을 것이란 점이다. F-35와 가장 비슷한 항공기인 F-22의 경우 완전히 운용가능한 상태에서 한달에 겨우 평균 15시간을 비행할 수 있을 뿐이다.(F-22는 2011년에 거의 5개월간 비행을 못했기 때문에 비행시간은 훨씬 줄었다.)

이러한 평범한 성능은 F-35가 가진 “5세대”의 특징으로 가장 두드러진 “스텔스” 기능으로도 상쇄할 수가 없다. 흔히 “스텔스”는 레이더에 전혀 포착되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이것은 특정 각도에서 몇몇 레이더의 탐지 거리를 제한하는 것에 불과하다. 달리말하면 일부 구식 기종을 포함한 몇몇 레이더는 “스텔스”특성을 가진 항공기를 꽤 먼거리에서 탐지해낼 수 있으며 심지어 민감한 레이더는 F-35를 특정 각도에서 포착할 수 있다. 이러한 한계점을 확실하게 보여준 사례는 1999년 코소보 전쟁에서 일어났는데 이 당시 1960년대의 구식 소련 레이더와 미사일이 “스텔스기”인 F-117을 한 대 격추했으며 또 다른 한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결론은 이렇다. F- 35는 옹호하는 집단에서 주장하는 것 처럼 엄청나지 않다. F-35의 성능은 실망스러운 수준이며 몇몇 측면에서는 오히려 퇴보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점은 설계와 합쳐저서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고칠수도 없는 수준이 되었다.

파네타 국방부장관과 미국의 각 군, 그리고 의화가 사실을 똑바로 봐야 할 때가 왔다. F-35의 성능은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그저 그런 수준이며 이 계획은 하드웨어의 변경이나 예산 통제 같은 것을 결합한다고 하더라도 바로잡을 수가 없다. F-35에 대해 취해야 할 단 한가지 조치는 바로 이것이다. 때려치우는 것이다(Junk it). 미국의 공군과 해군, 해병대 항공대는 훨씬 나은 비행기를 가질 자격이 있으며 납세자들은 훨씬 더 싼 비행기를 가질 자격이 있다. 쓰레기통이 앞에 있다.

F-35 계획은 어떻게 될까요? 매몰비용 때문에 어쩔수 없이 계속 가게 될지, 아니면 미군 역사상 가장 처참하게 실패한 조달사례로서 역사에 남을지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