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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1일 토요일

제2차세계대전 시기 항공모함의 전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

 


밀리터리 오타쿠의 관점에서 읽은 연구논문 중 지난 1년간 가장 재미있었던 걸 꼽으라면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84에 실린 미국 해군대학 교수 피츠시몬즈(James R. FitzSimonds)의 "Aircraft Carriers versus Battleships in War and Myth: Demythologizing Carrier Air Dominance at Sea"를 들겠습니다. 과연 제2차세계대전 당시 항공모함이 전함에 대해 압도적인 우세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밀리터리 오타쿠 입장에서 환장할만한 주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피츠시몬즈는 레이테만 해전의 예를 들면서 항공모함의 위력이 과대평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레이테만 해전에서 미국 해군은 에섹스급 7척을 포함한 35척의 항공모함과 항공모함 항공대 소속의 항공기 1,500여대를 동원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작전상 미끼로 던진 항공모함을 제외한 일본군 주력을 상대로는 전함 1척과 중순양함 1척만이 미군 항공모함 탑재기에 격침되거나 대파되었습니다. 저자는 이상적인 조건에서 미국 항공모함 항공부대가 전투력을 최대한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함 중심의 일본군 주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한 점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기간 중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항공기가 기동중인 주력함을 격침한 것은 야마토와 무사시 외에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히에이는 미국 수상함대와의 전투로 전투불능이 된 상태에서 항공기 공격을 받았으므로 제외합니다.) 진주만 공습 같이 정박해 있는 주력함을 공격한 경우에도 완전히 전열에 복귀하지 못하게 타격을 입힌 사례는 4척 밖에 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프랑스 해군의 덩케르크, 이탈리아 해군의 로마, 미해군의 애리조나와 오클라호마) 전함보다 작고 약한 순양함이나 구축함의 경우도 항공모함 탑재기 보다는 수상함이나 잠수함과의 교전에서 더 많은 숫자가 격침되었습니다. 

저자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항공모함 탑재기들은 전함과 같이 빠르고 강력한 방어력을 갖춘 군함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능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합니다. 해군 항공기용의 폭탄은 1,000파운드 정도로 전함의 갑판에 유효한 타격을 주기 어려웠고, 어뢰는 위력이 충분했으나 명중율이 부족했다는 겁니다. 게다가 뇌격기들은 대부분 저고도에서 느린 속도로 움직여 전함의 대공화력에 대해 생존성이 떨어졌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저자는 제2차세계대전 시기 수상함의 대공화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대전 초기인 1942년 초의 산호해 해전에서도 미국 함대는 대공화력 만으로 일본군 항공대를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미군 보다 뒤떨어지는 일본 해군 함정의 대공화력도 미국항공모함 탑재기들을 상대로 충분히 유효했다고 지적합니다. 레이테만 전투 당시 일본해군의 이세가 100대 가까운 미군 함재기의 공격을 대공화력 만으로 격퇴한 점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또한 제2차세계대전 시기의 항공모함들의 작전 지속능력이 떨어졌던 점도 지적합니다. 항공모함은 육상기지에 비해 비축할 수 있는 물자에 한도가 있어 장기간 작전을 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항공모함 탑재기의 소모율이 높았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이때문에 미 해군이 항공모함 전력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압도한 1944년이 되어서도 미해군의 항공모함 항공부대는 충분한 전과를 거둘 수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예를들어 필리핀해 해전에서는 미해군 항공부대가 전력 우세에도 불구하고 항공모함 한척과 유조선 2척을 격침시키는데 그쳤고 그 댓가로 출격시킨 항공기 200대 중 80대를 여러가지 이유로 상실했습니다. 게다가 장거리 출격 때문에 미군 함재기의 무장 탑재에도 지장이 있어 타격력이 더 감소했다고 지적합니다.(뇌격기들도 항속거리 문제로 폭탄을 탑재했음) 미국 항공모함의 지상 타격도 예상외로 결정적이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피츠시몬즈는 레이더도 부실하고 대공화력도 약하며 조종사의 수준도 뒤떨어지는 일본군을 상대로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미국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유럽으로 가서 독일 공군 기지를 타격했다면 어떤 성과가 나왔겠냐고 반문합니다.

반면 전함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평가를 상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피츠시몬즈는 대평양 전쟁의 분기점은 미드웨이 해전이 아니라 미국의 고속전함부대가 전장에 등장하기 시작한 1942년 말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전함 전력없이는 태평양에서 전략적인 공세가 가능하지 않았다고 보는 겁니다. 저자는 과달카날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주 요인이 미해군의 신형고속전함들의 활약이라고 평가합니다. 또한 1943년 이후 미해군의 반격작전에서도 전함의 역할을 더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자는 제2차세계대전 직후 전함 전력이 급속하게 감축된 주된 요인은 항공모함의 우위 보다는 미해군에 대항할 수상함 전력을 가진 가상적이 소멸하고 대함미사일이 등장한데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직후 미국 해군항공대가 해군 내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항공모함 항공대의 위력을 강조하는 여론을 조성한 점도 항공모함의 '신화'를 부풀리는데 일조했다고 주장합니다.

꽤 재미있는 주장을 하는 글 입니다. 

2012년 10월 1일 월요일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 박물관 - 1

이번 토요일(9월 29일)에는 워싱턴 D.C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 박물관 본관을 다녀왔습니다. 사실 항공기 소장 규모로 따지면 버지니아주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분관,  Steven F. Udvar-Hazy Center가 훨씬 더 방대합니다만 일단은 본관부터 가는게 좋겠더군요. 워낙 유명한 박물관이니 제 개인적으로 흥미있었던 전시물만 간략히 올려 봅니다.

박물관에 처음 들어가자 제 눈을 잡아끈 것은 냉전의 상징중 하나인 퍼싱 미사일과 SS-20 이었습니다. 냉전이 끝나서인지 사이좋게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세계최초로 음속의 벽을 넘은 항공기, X-1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렸을 때 The Right Stuff를 매우 재미있게 봤기 때문에 기억에 아주 강렬히 남은 기체였는데 이렇게 구경을 하니 재미있더군요,


 물론 제 개인적으로는 군용비행기들이 가장 관심있었습니다. 항공기술에 한 획을 그은 민간항공기들도 흥미로운 물건들이지만 아무래도 군용기만큼은 아니더군요. 1층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전시물은 바로 Me 262였습니다. 프로펠러 전투기들에게 얻어터지는 등 체면을 좀 구기긴 했어도 제트기 시대를 연 역사적인 전투기 아니겠습니까.

글자 그대로 역사적인 항공기, Me 262 

라이벌이 될 뻔한 P-80은 바로 옆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P-80

Me 262 보다 좀 세련되게 생긴것 같긴 한데 박력은 한참 모자랍니다.

이밖의 1차대전과 2차대전 관련 전시물은 2층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1차대전 전시실은 매우 재미있는 구성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무성영화시대에 크게 히트했던 1차대전 공중전 영화에 대한 전시물이 입구를 차지하고 있더군요. 이런 구상을 한 담당자가 누구인지 궁금했습니다. 상당히 좋은 아이디어 같더군요.

화면 구석에 익숙한 무엇인가가 보이실 겁니다
전시물은 공간 문제때문인지 단좌전투기 중심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이것 때문에 별관이 따로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SPAD S.XIII
SPAD S.XIII 사진 한장 더. AEF 소속 기체로 도장되어 있더군요
1차대전 단좌전투기 중 가장 귀여운(?) 외형을 가진 Albatros D.Va
반대편에서 찍은 사진 한 장 더
개인적으로는 1차대전 전투기 중 가장 좋아하는 Fokker D.VII
Fokker D.VII 한장 더
Sopwith 7F.1 Snipe
항공기 외에도 매우 재미있는 전시가 많았습니다. 각 전시관이 다루는 시대상을 이해하기 쉽도록 많은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이더군요. 예를 들어 아래의 사진에 나오는 것 처럼 독일의 전시총동원체제를 보여주는 전시물을 설치한다던가 하는 등.

머리카락을 원자재(!)로 내놓는 독일 여성. 표정이 리얼합니다?
2차대전관 역시 단좌전투기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기체인 Bf 109라던가 스핏파이어, P-51등 시대를 대표할만한 기종들 위주였는데 이탈리아의 Macchi C.202는 좀 뜬금없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Spitfire HF. Mk. VIIc
Bf109 G-6
좋아하는 비행기니까 한 장 더
스미스소니언에 전시된 Bf 109에 얽힌 사연은 꽤 재미있습니다. 알자스 출신의 독일군 조종사가 탈영하면서 입수한 기체라는군요. 제가 5년전 포스팅에서 인용한 글에서 잘 지적했듯 알자스-로렌 지역은 근대 이후 프랑스라는 정체성이 더 강한지역이어서 독일에겐 계륵같은 존재였지요. 이 비행기에도 그런 사연이 있다니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やられメカ.....
Macchi C.202. 솔직히 이 비행기가 여기에 전시될 가치가 있는지는 좀;;;;
그리고 재미있는게 2차대전관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진주만 기습을 묘사한 벽화가 그려져 있더군요.

Day of Infamy
飛虎隊 두목 셴놀트가 소장 시절 썼다는 철모
DC3은 C-47도 되니 군용기로 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스미스소니언이 미국 박물관이다 싶었던 것은 바로 해군항공대를 위해서 전시관을 하나 따로 뒀다는 점이었습니다.


FM-1(F4F)
FM-1 한장 더
SBD Dauntless
SBD Dauntless. 뒷쪽에서 한장 더
1930년대 미육군항공대와 미해군항공대의 주력전투기였던 F4B

이 전시관은 항공모함 함교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한쪽에는 정말 함교와 같은 느낌을 주도록 대형화면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함재기들이 착륙하는 모습을 잠깐 구경했는데 참 재미있더군요.


그리고 엔터프라이즈의 1/100 모형도 상당히 재미있는 전시물 이었습니다. 처음에는 1/72인가 싶었는데 아니더군요. 


다음으로는 특별전시실에서 해병항공대 100년 기념 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이건 나중에 따로 올리도록 하지요.

그리고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듯 무인항공기들도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우주개발에 대한 전시물은 제 주된 관심사에서 약간 비껴나 있긴 합니다만 로켓 발전사의 일환으로 V-1과 V-2가 있으니 간단히 사진을 올려놓지요. 이 포스팅은 이정도에서 마무리하고 다음번 포스팅은 미해병항공대 100년사 특별전시전으로 하겠습니다.


2012년 9월 8일 토요일

[번역글] "마스터 플랜" : 중국의 신형 유도미사일 구축함

9월 4일 The Diplomat 인터넷 판에 재미있는 글이 한 편 실렸습니다. 제목은 “‘마스터 플랜’ : 중국의 신형 유도미사일 구축함(The Master ‘PLAN’: China’s New Guided Missile Destroyer)”인데 영어로 계획을 뜻하는 Plan과 인민해방군 해군(PLAN, People’s Liberation Army Navy)의 영문약자가 같은 점을 이용해서 재미있는 글장난을 하고 있네요. 제목부터 재미있습니다. PLAN이라는 글자가 중의적이라서 ‘기본계획’ 대신 ‘마스터 플랜’이라고 옮겼습니다.

이 글의 필자인 미해군전쟁대학U.S. Naval War College교수 요시하라 도시吉原俊井와 제임스 홈즈James R. Holmes는 중국해군의 건함 양상이 구축함 중심의 대형함정 위주로 나가고 있으며 영유권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중국 인근 해역에서의 작전을 염두에 두고 진행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중국의 구축함 건조가 해군력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방향으로 서술을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대응이 어떤 양상으로 나갈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불균형을 메꿔줄 나라가 어디인지는 뻔한 것인데 한국에는 한미일의 군사적 협력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이 많아서 이 글을 불편하게 받아들일 사람도 많을 듯 싶습니다.

날림번역이긴 합니다만 한번 읽어보시죠.


“마스터 플랜(The Master PLAN)’ : 중국의 신형 유도미사일 구축함”

우리는 야구장의 철학자 요기 베라Lawrence Peter "Yogi" Berra의 열렬한 추종자이다. 요기 베라는 “예측을 하는 것은 어렵다. 특히 미래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위대한 요기 베라가 그랬던 것 처럼 우리도 예언에 운을 걸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2010년 말 더 디플로맷The Diplomat에 중국 정부가 해군 증강을 늦추거나 중단할 것이라고 예측한 서방 전문가들의 견해가 틀릴 것이라는 예측을 한 바 있다.
중국이 해군 증강을 늦추거나 중단할 것이라고 예측한 전문가들은 그 증거로서 중국이 유도미사일구축함, 즉 DDG의 건조를 중단했다는 점을 내세웠다. 만약 그대로 되었더라면 중국은 의도적으로 자국 해군의 타격력을 감소시키는 선택을 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중국해군은  여러 종류의 유도미사일 구축함을 시험하면서 이중에서 가장 뛰어난 요소만을 종합한 함정을 완성하려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에 공개된 052D 뤼양(旅洋)2급 유도미사일 구축함의 사진을 놓고 봤을때 구축함의 건조를 본격적으로 재개할 것이라고 보았다.
최근까지 서방의 중국인민해방군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중국의 조선소에서는 유도미사일 프리킷이나 고속정 처럼 방어에 특화된 항속거리가 짧은 소형함정을 건조하기 위해서 유도미사일 구축함 같은 주력함정의 건조를 늦추거나 중단하고 있다는 주장이 주를 이루었다. 이들은 2005년 이래로 구축함의 건조가 줄어들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 이들은 이를 통해 중국의 해군력 건설이 위협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아무리 잘 봐줘야 직관력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지난 몇년간 중국과 서방의 군사 웹사이트에는 이런 낙관적인 전망을 뒤흔들 사진들이 잇달아 올라왔다. 이러한 사진들은 우리가 중국의 건함 경향에 대한 예측을 내놓았던 2010년에 이미 중국은 유도미사일 구축함의 건조를 재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최근의 정보들은 상하이에 있는 장난(江南) 조선소에서 여섯번째의 052C 유도미사일 구축함을 진수했으며 연평균 두척을 기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옆에서 건조중인 새로운 함정은 052C의 후속함인 052D로 추정된다. 그리고 잘 알려진 중국 전문가 한명은 지난주 신형 함정(052D) 한척이 진수되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이 배가 당장 항해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조선소의 일반적인 공정을 감안할 때, 더 많은 작업이 진행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배를 진수한 것은 대양으로 신형 군함을 내보내는 중요한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중국해군은 가장 적합한 수상전투함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타이페이 타임즈에 따르면 비밀에 둘러쌓인 새 군함은 052C의 개량형으로 중국의 해군 지지자들에게 “중국판 이지스”로 불리고 있으며 미국의 이지스함과 기술적으로 대등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필자들은 이런 주장을 신뢰하지 않는다.) 052D는 스텔스 설계가 적용된 6,000톤급 함정으로 가스터빈 엔진을 갖췄으며 64개의 수직발사기(VLS)를 갖추고 있다. 수직발사기는 함체에 내장된 수납통이라 할 수 있다. 각 수직발사기는 미사일 적재량에 따라 한 발에서 네 발의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 수직발사기는 함내의 무기고에서 발사대까지 미사일을 옮기면서 일어나는 불편함, 시간 지연, 기술적 문제 없이 함대공, 함대함, 함대지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게 해준다.
최소한 서류상으로 052D는 미해군의 알레이버크Arleigh Burke급 유도미사일구축함이나 타이콘데로가Ticonderoga급 유도미사일순양함의 축소판에 가깝다. 중국해군의 유도미사일 구축함은 미국 해군의 해당 함종보다 배수량이 작은데 미국 해군의 알레이버크급은 11,000톤, 타이콘데로가급은 9,600톤이다. 배수량이 작다는 것은 연료탑재량이 더 적고 그만큼 항속거리도 짧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정도의 능력은 이 군함이 활동하게 될 중국의 “근해”와 인도양에서의 국지적 임무에는 적합한 것이다. 052D급의 무장 또한 알레이버크급이나 타이콘데로가급 보다 적은데 전자는 수직발사기 96개를, 후자는 수직발사기 122개를 장착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구축함들은 아시아 해역에서의 국지분쟁에는 충분한 타격력을 갖추고 있다. 또한 중국 구축함들은 대부분 연안에 배치된 전력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작전을 펼칠 것이므로 화력의 격차는 줄어들 것이다.
중국정부는 199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해군 증강을 시작하면서 함대 건설에 매우 합리적인 접근방식을 취했다. 중국을 둘러싼 전략환경이 유리하고 미국이 공해와 하늘에 대해 자유로운 출입을 허용하는 동안 중국해군은 여유롭게 “함대에 대한 실험”을 시도했다. 조선소에서는 여러 종류의 소형함정을 건조하면서 장점만을 골라서 취했으며 나머지는 버렸다. 이러한 ‘위험회피risk-averse’ 방식을 통해 기술적인 감각을 획득하면서 조선공학 측면에서 질적인 도약을 이룩했다.
각각 두척 내외가 건조된 다섯 종류의 함급으로 이루어진 중국의 수상함대는 이러한 느린 접근방식의 증거이다. 이 함정들은 모항 근처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 중국해군은 승무원들의 기량을 향상시키고 새로운 교리를 개발하며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험적으로 건조된 함정들을 원양에 투입했으며 이를 통해 실질적인 가치를 얻어냈다. 인도양에서의 해적 퇴치 작전에서도 이런 방식을 취한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중국해군은 한 종류의 함정을 대량 건조하게 될 것이다. 중국이 해군에 대한 실험을 마무리 짓기에는 적절한 시기로 보인다. 소련이 건조한 항공모함 바략을 개장한 중국해군의 첫번째 항공모함은 시험 운항을 실시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 정보에 따르면 중국은 바략의 갑판에서 운용이 가능한 러시아의 Su-33 전투기를 역설계한 파생형인 J-15의 시험비행을 실시했다고 한다. 중국해군의 첫 항공모함 기동전단에서 아직 미비한 것은 항공기와 미사일로 부터 주력함을 보호할 수 있는 다목적의 감시용 함선이다. 052D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신형 유도미사일 구축함이 순전히 항공모함을 보유하려는 중국의 야망을 실현하려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중국이 미국과 동등한 항공모함 전투단을 편성하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다. 중국은 항공모함과 항공모함 항공단, 수상함정, 그리고 전위를 맡을 원자력추진 공격잠수함으로 빈틈없이 상호 연계가 가능한 팀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구축함의 유용성은 단지 중국의 항공모함 도입 계획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구축함은 주력이 되는 함선이다. 다목적의 유도미사일 구축함은 중국해군이 체계적으로 항공모함 운용 방식을 습득하는 동안에 다른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다. 특히 052D급은 수상함전투전대SAG, Surface Action Group나 상륙기동부대의 지원에 배속하거나 항공모함이 아닌 다른 중요 함선을 보호할 수 있다. 또한 052D급은 임무에 따라서는 부대의 핵심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052D은 광대한 해역에서 이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지난 5년간 11척에 달하는 수상함전투전대들이 류큐 열도를 가로지르는 공해상의 해협을 통과해 서태평양으로 진출했다. 2012년의 첫 6개월 동안에만 4개의 수상함전투전대가 이곳을 통과해 대양으로 나갔다. 이러한 해상 활동 경향은 수상함전투전대가 운용하게 될 수상함에 관한 조직원칙을 이해하는 핵심일 수 있음을 보여주며 그 중에서도 052D급은 핵심적인 위치에 있을 것이다.
중국해군은 무엇을 할 것인가? 특히 개량된 뤼양급은 대함공격에 특화되어 있는, 중국이 보유한 러시아제 소브레메늬급 구축함에 대한 공격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052D급은 중국이 연안지역에 힘을 투사하기 위해서 건조하고 있는, 아직은 얼마 안되지만 꾸준히 규모가 증가하고 있는 상륙강습함들을 호위할 수도 있다. 이러한 원정타격부대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해군을 간단히 압도할 수 있을것이다. 특히 이런 종류의 부대는 남중국해의 섬을 점령하는데 적합하다. 또한 052D급은 기동성과 스텔스성을 갖춘 022 허베이급 쌍동선에 대한 대공방어를 제공할 수 있다. 허베이급은 작은 선체로 감지를 회피하며 우세한 적 함대를 상대로 제해권을 확보하거나 거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거리 대함 순항미사일을 운용한다.
게다가 타이완에서 돌발사태가 발생할 경우, 최신예 유도미사일 구축함은 방어하는 대만공군의 생존능력을 위협할 수 있는 함대 기반의 방공능력을 제공할 수 있다. 한척의 052D급은 장거리 탐지능력과 교전 거리를 가졌기 때문에 중국본토에 배치된 지대공 미사일의 유효사정거리를 훨씬 넘어서 타이완 인근, 혹은 타이완 전역에 걸친 범위를 담당할 수 있다. 타이완 동쪽에 배치된 052D급은 타이완을 완전히 포위해서 타이완 조종사들이 이륙하면 모든 방향에서 위협을 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해군은 이토록 인상적인 일선의 함선들을 해외로 파견해서 중국의 군사적 강력함을 외국인들에게 과시하고 해군외교를 증진할 수 있을것이다. 핵심은 중국이 더 많은, 그리고 더 우수한 대형 구축함을 가지게 될수록 다양한 임무를 위해서 중국해군의 다양한 자산을 조합할 수 있게 될것이라는 점이다.
끝으로 한마디 더 하자면, 중국해군이 유도미사일 구축함을 증강하는 것이 이 지역의 해군력 균형을 뒤바꿀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답은 간단하다. 그렇다. IISS의 밀리터리 밸런스Military Balance에 근거해 간략하게 추산해 보는 것 만으로도 실상이 잘 드러난다. 타이페이 타임즈가 예측한 것 처럼 중국이 10척의 052D급을 배치한다면 중국해군은 이지스함에 견줄수 있는 함정을 16척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중국해군이 10척만 건조하고 멈출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 현재 아시아 지역에서 이지스함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인 일본과 한국의 경우 각각 6척과 3척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최소한 서류상으로는, 이 경우 중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국이 되는 것이다. 일단 052D급이 함대에 배치되기만 하면 중국해군은 미해군을 제외하면 다른 어떤 나라의 해군을 상대로 하더라도 우위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해군은 일본해상자위대에 대해서 16:6의 우세를 보일 것이며, 한국해군에 대해서는 16:3의 우세를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의 연합함대에 대해서는 16:9의 우세를 보일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That’s significant.)
중국에게 유리한 쪽으로 균형이 기울게 되면 수년내로 아시아에서는 새로운 건함 경쟁이 일어날 것인가? 미국이 아시아에서 유지할 수 있는 힘과 아시아 국가들이 군비경쟁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이로 인한 비용을 부담하려는 의지에 많은 것이 달려있다. 이제 중국해군이 해군력 건설을 멈추었느냐는 논의는 할 필요도 없다. 이제는 이 골치아픈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할 때이다.

2012년 9월 4일 화요일

항공모함의 효용에 대한 최근 미국의 논의

얼마전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에 올라온 로버트 해딕Robert Haddick의 글, “Shipping Out : Are aircraft carriers becoming obsolete?”을 읽고나서 몇가지 잡생각을 했습니다.

미국 연방정부의 예산감축에 따라 국방비도 크게 감축되고 있는데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많은 예산을 잡아먹는 항공모함의 효용성에 대한 논의가 있는 모양입니다. 막대한 유지비가 소요되는데다가 고속의 장거리 대함미사일의 발전 때문에 갈수록 작전에 제약을 받게될테니 “값싼” 다른 대안을 찾아봐야 하는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것 입니다. 특히 최대의 가상적인 중국은 접근거부전략을 취하면서 대함미사일을 중시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는데 이 경우 항공모함 항공단의 주 용도인 지상타격은 꽤 곤란해 질 수 있습니다. 항공모함이 항공기들의 작전범위 내에서 미사일 때문에 활동의 제약을 받게된다면 그야말로 돈낭비가 되겠지요. 특히 항공모함은 미국의 강력함을 상징하는 정치적 자산이기도 한데 싸구려 미사일 몇발 때문에 써먹을 수 없다면 미국의 정치적 위신이 실추될 수도 있습니다.(이건 꽤 심각한 타격이 되겠지요.)

재미있게도 이런 상황에서 항공모함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미국 공군의 B-1이나 B-52 같은 장거리폭격기들이 매력적인 대안으로 비춰지는 모양입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드러난 것 처럼 긴 항속거리와 많은 탑재량을 가진 장거리폭격기는 새로운 전장 환경에 잘 맞는 유용한 무기였습니다. 신속대응이 가능하면서도 항공모함에 비하면 ‘저렴한’ 무기체계라는 점에서 예산에 신경을 쓰는 정치인들의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 입니다.

이 상황은 마치 트루먼 행정부에서 ‘제독의 반란’이 일어날 당시의 상황과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트루먼 행정부도 국방예산 삭감을 추진하면서 비용이 많이드는 항공모함 중심의 해군 보다는 B-36으로 대표되는 장거리폭격기와 핵무기를 중심으로 한 국방정책을 취하려 했지요. 똑같은 상황은 아닙니다만 예산감축이 필요한 상황에서 장거리폭격기가 항공모함의 대안으로 비춰지는 것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2009년 2월 8일 일요일

미국 합동참모 본부의 대소 작전계획 : 1945~1950

지난해 11월에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작전 연구안 Gunpowder의 내용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안은 합동참모본부의 작전 계획의 하위 개념으로 연구된 것이었기 때문에 상위 계획인 미 합참의 전쟁계획안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히 1945년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미 합참이 수립한 여러 개의 전쟁계획에 대한 글을 쓰려 했었는데 깜빡하고 넘어간 것이 벌써 석 달 째로군요.

이 글에서는 Steven T. Ross의 American War Plans 1945~1950의 내용을 골격으로 하고 여기에 다른 서적의 내용을 일부 참고해서 냉전 초기 미 합참의 전쟁 계획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1. 소련의 위협에 대한 미 합참의 평가

미 합참은 1944년부터 전후 세계에서 소련이 미국과 대등한 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차대전이 종결된 지 2개월 남짓 지난 1945년 10월 9일에는 합참 예하의 합동전략조사위원회(Joint Strategic Survey Committee)에서 소련과 협상을 통해 유럽과 태평양 지역의 안정을 이루는 것이 어려워 졌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합참은 이 보고서를 받아 들인 뒤 10월 16일에는 소련군의 전력에 대한 정보평가를 검토했는데 여기에 따르면 소련군은 동원해제 이후에도 병력 441만1천명, 113개 사단 및 410개 항공연대를 유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이 예측에 따르면 동원해제 이후의 미 육군은 소련의 위협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합참은 만약 소련이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에 전쟁을 시작한다면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을 석권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물론 1945년 10월 시점에서는 아직 냉전이 격화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 합참은 소련이 전쟁을 먼저 도발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1945년 11월 16일에는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전력에 대한 평가 보고서가 제출됐는데 이 보고서는 프랑스의 전력은 극도로 빈약하고 영국은 본토 방어에 급급하거나 기껏 해야 수에즈 운하 일대를 방어할 능력밖에 없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미 합참은 계속해서 소련의 전략적 의도와 능력에 대한 분석을 계속했습니다. 1946년 1월 31일에 합참 예하 합동정보위원회(Joint Intelligence Committee)가 제기한 소련의 전략적 목표에 대한 문제제기는 소련의 전쟁 도발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합동정보위원회는 소련은 경제 복구를 위해서 향후 5년간은 전쟁을 피하겠지만 만약 스탈린이 다른 국가들의 저항 의지를 과소평가한다면 무력도발을 감행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흥미롭게도 합동정보위원회에서는 1946년 7월 9일에 전후 안정을 위해서 소련과 세력권을 분할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합참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만.
전후 처리 문제로 소련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미 합참은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 더욱 더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 11월 6일의 합참 정보평가에서는 향후 10년 내에 소련과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상정했으며 소련이 1956년까지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전략공군과 150발의 원자폭탄을 보유할 수 있다고 예측했습니다. 특히 이 평가에서는 소련이 재래식 전력의 우위 때문에 미국이 핵 전력의 우위를 가지고 있더라도 유럽과 아시아 본토를 상실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미국은 2차대전 종결 이후 급속히 군사력을 감축하고 있었고 특히 육군이 집중적으로 감축되었기 때문에 대륙의 지상전에서 소련을 저지할 가능성은 낮았습니다.


2. Pincher 계획과 그 보완계획 – 최초의 대소 작전계획

1946년 3월 2일, 합참 예하의 합동전쟁기획위원회(Joint War Plans Committee)는 소련과의 전쟁을 상정한 핀처(Pincher) 계획안을 제출합니다. 이 계획안은 소련이 전면전을 도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시작한 도발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상황을 가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한 전략적 차원의 첫 번째 작전계획이기도 했습니다.

이 계획안은 소련이 그리스와 터키, 이란 방면으로 이익을 획득하려 압력을 가하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소련이 터키를 장악한다면 이것은 영국의 중동에 대한 통제력에 큰 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에 소련의 터키 침공은 영국과의 충돌을 가져와 이것이 3차대전으로 확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은 전쟁 발발시 총 113개 사단과 동맹군 84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으며 이 중 40개 사단을 터키 및 중동 방면의 침공에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은 총 20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으며 수에즈 운하 지구를 방어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소련이 영국의 참전과 동시에 서유럽에서 전면적인 공세로 나서는 것 이었습니다. 이 계획안은 미군과 영국, 프랑스군의 전력으로는 기껏해야 라인강 선에서 지연전을 펴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또 오스트리아 방면의 연합군은 이탈리아로 철수해 포 강을 끼고 방어선을 형성할 계획이었지만 만약 소련군이 총력을 기울인다면 이탈리아는 함락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핀처 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초기부터 지상전에 휩쓸려 소모되는 것을 피하고 미국이 가진 해군과 공군의 우세를 살리는 방안을 추천했습니다. 서유럽은 포기하되 영국, 이집트, 인도, 이탈리아(방어가 가능하다면), 중국을 거점으로 소련에 대한 봉쇄와 전략 폭격으로 대응하자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에서는 서유럽을 탈환하는 것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소련군에 점령된 서유럽을 탈환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면 숫적으로 열세인 미 육군이 소모전에 말려들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레닌그라드나 무르만스크, 리가 등 소련의 해안지역에 상륙하는 것 또한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핀처 계획의 초기안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병력 감축으로 제한된 미군의 능력을 고려한 계획이기는 하지만 이 계획에는 소련에 어떻게 승리할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핀처 계획에 대한 추가 연구는 계속 되었는데 추가 연구에서는 극동에서 소련군이 공세로 나올 경우 만주와 한반도는 소련에게 넘겨주고 미 지상군은 일본으로 철수하는 방안이 채택되었습니다. 핀처 계획에서 승인된 이 방안은 이후 미국의 전쟁계획에서 계속 유지됩니다.

핀처 계획이 상정한 소련군의 전력은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미 합참은 소련이 동원을 시작하면 동원 시작 60일 이후 서유럽 전선에 총 270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와 별도로 42개 사단을 중동 방면에, 49개 사단을 극동 방면으로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반면 소련의 공군과 해군 항공대는 막대한 숫자에도 불구하고 전략 공군이 취약하기 때문에 지상군 만큼 큰 위협이 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평가됐습니다. 그리고 핀처 계획에서 중요하게 평가된 것이 터키였습니다. 터키는 48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것은 미군을 제외한다면 연합군 중 최대의 전력이었습니다. 비록 소련군에 비해 장비가 구식이긴 하지만 훈련도가 높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또 터키를 통해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즈를 폭격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핀처 계획을 기반으로 1946년 12월 20일에는 이탈리아 방어 계획인 닭발톱(Cockspur) 계획, 1947년 8월 4일에는 이베리아 반도 방어 계획인 북소리(Drumbeat) 계획, 1947년 8월 29일에는 극동 방어 계획인 월출(Moonrise) 계획 등이 작성되었습니다.

한편, 핀처 계획은 어디까지나 전쟁 초기 단계의 대응만을 상정한 계획이었기 때문에 소련과의 전쟁에 대한 전체적인 계획은 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 합참은 핀처 계획을 보완할 계획 작성을 시작합니다.

1947년 2월 13일 합동전략기획위원회가 제출한 전쟁계획 JCS 1725/1은 핀처 계획의 연장선 상에서 수립된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전쟁 초기 소련이 유럽 본토를 석권하는 것은 저지할 수 없기 때문에 북미의 주요 공업지대를 방어하고 영국과 수에즈 운하지대, 인도 북부 등의 핵심 지역을 사수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공격은 전략 폭격 중심으로 이루어 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소련의 석유 생산시설 중 80%가 영국이나 이집트에서 발진하는 미국 폭격기의 작전 범위내에 있기 때문에 충분히 효과적이라고 평가되었습니다. 또한 터키를 방어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터키를 잃게 되면 지중해 동부가 소련 공군의 위협을 받기 때문에 이집트를 통한 보급을 대서양을 통해 해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터키가 소련군에 함락 될 경우 그 다음의 방어선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형성하도록 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전쟁 발발 1년 차에는 전략 방어를 취하고 전쟁 발발 2년 부터는 전략폭격을 중심으로 소련의 전쟁 수행역량을 감소 시킨 뒤 전쟁 발발 3년 째에 흑해와 카프카즈를 통해 소련 남부로 진격해 소련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을 상정했습니다. 미군의 병력 동원은 전쟁 1년 차에 육군 45개 사단과 공군 70개 항공단 및 56개 독립항공대대, 항공모함 9척, 전쟁 2년 차에는 육군 80개 사단과 공군 139개 항공단 및 113개 독립항공대대, 전쟁 3년 차에는 육군 90개 사단과 공군 264개 항공단 및 141개 독립항공대대, 해군은 항공모함 21척으로 계획되었습니다. 육군의 규모는 2차대전 당시 동원한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점이 특징입니다.

다음으로 7월 말에 작성된 동원계획 JWPC 486/7에서는 소련에 대한 전략 폭격 중 핵공격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전략 핵폭격을 통해 소련의 항공기 생산능력의 86%, 항공기 엔진 생산능력의 99%, 각종 화기 생산능력의 56%, 전차 및 장갑차량 생산능력의 99%, 석유 생산능력의 52%를 파괴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부수적으로 민간인을 대량으로 살상해 소련의 사기를 꺾고 최선의 경우 이를 통해 소련의 항복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합니다.

핀처 계획을 보완하는 여러 계획들은 공통적으로 전쟁 초기의 전략 방어와 전략 폭격을 통한 대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영국, 그린랜드, 아이슬랜드, 알래스카, 중동, 파키스탄, 오키나와, 일본의 기지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특히 공군이 강력히 지지하는 B-36 폭격기는 미국의 전략 폭격 및 핵 타격능력을 크게 높여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러 계획에서 논의된 전후 처리 문제인데 소련이 항복하면 동유럽의 국경은 1939년의 국경으로 되돌린다는 합의가 잠정적으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혹시 히총통이 노린 것은 이것?!?!)


3. Broiler, Frolin 계획 – 비상대응계획

브로일러(Broiler) 계획은 핀처 계획과 1947년에 작성된 여러 동원 계획을 반영해 작성되었습니다. 브로일러 계획은 소련이 1948년에 전쟁을 시작할 경우를 상정한 계획으로 일종의 비상대응계획이었습니다. 합참의 합동전략기획위원회는 1947년 8월 29일에 그 당시까지 연구된 각종 계획을 반영해 1948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의 대응 계획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계획의 초기안은 같은 해 11월 8일 합참 브리핑에서 처음 발표됩니다.
브로일러 계획에서는 전략 핵폭격을 위해 충분한 원자폭탄을 확보할 필요성을 제기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재래식 전력이 부족하고 원자폭탄의 숫자도 부족하기 때문에 서유럽을 상실하는 것은 물론 터키와 지중해 해안 일대, 이집트를 방어하는 것 조차 어려울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특히 소련군이 우세한 전술 공군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에 공군 기지를 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브로일러 계획에서는 미국의 군사적 상황이 극도로 불리하다고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핵 폭격은 사실상 거의 유일한 반격 수단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합동전략기획위원회는 다시 1949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를 상정한 브로일러 계획의 개정안을 작성했고 이것은 1948년 2월 11일에 채택되었습니다.

물론 브로일러 계획의 개정안도 우울한 전망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브로일러 개정안은 1949년 전쟁이 발발할 경우 소련은 순식간에 서유럽과 아시아 본토를 장악하고 미국이 전략 핵폭격을 할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영국과 이집트에 대한 공격에 나설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소련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총 173개 사단과 동맹군의 68개 사단 및 25개 독립여단의 지원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또한 공군은 13,0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고 전쟁 개시 150일 이내에 2만대로 증강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미국은 1949년 전쟁이 발발할 경우 육군 9개 사단과 9개 독립연대, 해병대 1개 사단을 동원하는데 그칠 것이기 때문에 유럽 본토에서 소련을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브로일러 개정안은 소련군이 공격을 시작하면 개전 70일 만에 프랑스까지 점령되고 만약 소련군이 스페인까지 침공할 경우 소련군은 개전 180일에 지브롤터까지 함락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중동방면의 공격에서는 최악의 경우 개전 90일에 터키가 항복하고 175일 차에는 수에즈 운하까지 점령될 것으로 상정했습니다. 또한 서유럽이 함락되면 개전 12개월 뒤에는 서유럽에 전개한 소련공군이 하루 평균 전술폭격 1,550회를 실시하고 또한 V-2 개량형으로 영국을 타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경우 한반도는 모두 포기하고 중국은 연안 일대의 방어 가능한 지역으로 후퇴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중국 본토도 포기하되 일본은 반드시 사수하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한편, 반격은 거의 유일하게 전략 핵폭격에 의해 실시될 계획이었습니다. 이 경우 가장 유력한 기지는 이집트와 인도 북부였습니다. 브로일러 개정안의 핵폭격 계획은 위에서 언급한 JWPC 486/7과 거의 동일한 것 이었습니다. 이 밖에 중동의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쿠웨이트와 바레인에 대한 상륙작전이 계획되어 있었고 이 작전이 성공할 경우 바그다드와 모술까지 반격한 뒤 2단계 작전으로 이란에서 소련을 축출할 예정이었습니다. 이 계획에서 중동에 대한 반격작전에는 미군 12개 사단과 영국군 8개 사단이 배정되었습니다. 만약 소련이 핵폭격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계속한다면 흑해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상륙작전을 펼 계획이었는데 이것은 기존 계획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이었습니다.

1948년 3월 17일에는 브로일러 계획을 간략화한 프롤릭(Frolic) 계획이 입안되었는데 브로일러 계획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재래식 전력의 취약상을 강조하고 전략 핵폭격을 중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브로일러와 프롤릭 계획은 핀처 계획 및 그 보완 계획들 보다 더 비관적인 전망을 담은 계획이었습니다. 특히 터키와 이집트, 지중해 재해권의 상실까지 염두에 둔 점이 그렇습니다. 또한 영국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도 비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등 군축에 따른 미국 군부의 위기의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4. Bushwacker 계획

1948년 1월 3일, 합참의 전쟁 계획들을 검토한 군수위원회(Munitions Board)에서는 핀처 계획에 기반한 작전 계획들이 현재 미국의 전쟁 수행 능력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안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합참에 미국의 전쟁 수행능력에 맞는 새로운 전쟁 계획을 수립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에 따라 1948년 3월 8일, 기존의 계획을 대체할 새로운 작전 계획, 부시워커(Bushwacker) 계획이 입안됩니다. 부시워커 계획은 전쟁이 1952년 경에 시작된다는 가정하에 수립되었습니다.
먼저 소련이 1952년에 전면전을 시작할 경우 투입할 수 있는 전력에 대한 평가가 다시 이루어 졌습니다. 부시워커 계획안에서는 소련이 1952년에 전쟁을 시작할 경우 전쟁 발발과 동시에 110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으며 동원 개시 180일 만에 500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소련 지상군은 3만대의 전차와 77,500문의 견인포, 7,500문의 로켓포, 13,000대의 자주포 등 압도적인 전력을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공군의 경우도 1952년에는 대부분 제트기로 이루어지는 2만대의 항공기를 보유할 것이며 특히 B-29에 필적하는 중폭격기 1,600대도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해군은 200척의 신형 고속 잠수함과 130척의 재래식 잠수함을 가지고 미군의 교통선을 위협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부시워커 계획에서는 소련이 1952년까지 원자폭탄을 보유할 가능성은 적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기존의 계획들과 마찬가지로 부시워커 계획은 소련이 미국의 의도를 과소평가하고 제한적 도발을 시작하면 이것이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물론 서유럽은 소련 육군에 의해 단기간에 석권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알래스카와 일본에 대한 전략적 폭격을 실시하고 그린랜드와 아이슬랜드에 대한 대규모 공수부대 투입도 가정하고 있는 등 소련이 보다 과감한 공격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시워커 계획 또한 다른 계획들과 유사하게 전쟁이 3단계로 진행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단계는 16일간 지속되며 소련의 전략적 공세와 미국의 전면적인 방어로 진행됩니다. 2단계는 미국이 소련의 공세를 둔화시키면서 제한적인 공세작전을 감행하고 3단계에서는 미국이 전면적인 반격에 돌입한다는 것 입니다. 특히 부시워커 계획은 미군의 증강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계획에 따르면 1단계와 2단계는 신속히 진행되기 때문에 전시 동원의 효과가 없어 미국이 당장 보유하고 있는 전력만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이 계획에서는 미 육군을 14개 사단과 1개 독립연대로 증강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공군은 기존의 계획들과 마찬가지로 폭격을 통해 소련군의 공세 능력을 감소시키는 한편 민간인에 대한 폭격을 통해 소련인들의 전쟁 의지를 꺾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특히 1952년 까지는 충분한 수의 B-36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공군으로 소련의 20개 주요도시들에 충분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련이 초기의 핵공격에도 저항을 계속한다면 다음 단계로 터키, 스칸디나비아 반도, 영국, 북아프리카 등에 기지를 확보하고 전략 폭격을 지속하고 추가적으로 소련 본토에 대한 지상공격을 준비하도록 되었습니다.

또한 핀처 계획에 기반한 비상 작전계획인 브로일러, 프롤릭 계획과 같이 부시워커 계획을 기반으로 한 비상 작전계획도 수립되었습니다. 브로일러와 프롤릭 계획에 이어 수립된 새로운 비상작전 계획은 크랭크축(Crankshaft) 계획으로 명명되었습니다.
크랭크축 계획 또한 이전의 비상 작전계획들과 마찬가지로 당장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미국과 영국군은 유럽과 아시아 본토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유럽, 중동, 중국, 한반도는 포기하고 해당 지역의 방어는 각국의 지상군에 맡기되 미국은 공군 및 해군 지원만을 하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개전 60일차에 소련군이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고 이탈리아는 개전 75일에, 시칠리아는 개전 105일에, 그리스는 개전 60일에서 90일 사이에 점령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또한 터키는 최대 개전 150일까지, 수에즈 운하지대는 개전 175일 무렵 소련군에 장악되고 이란과 아라크는 개전 60일차에, 그리고 중국과 남한은 개전 150일차에 점령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크랭크축 계획은 공군의 위력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고 있는데 브로일러, 프롤릭 처럼 전략폭격을 통해 소련의 항복을 받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래전은 전략폭격이 통하지 않을 경우 수행될 예정이었습니다.
1단계의 반격은 페르시아만 일대의 유전 지구에 감행될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개전 초기에는 소련군의 공격에 이곳을 상실할 것이기 때문에 석유 생산시설을 모두 파괴하고 철수할 것이었지만 소련이 전략 폭격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한다면 장기전으로 가기 때문에 페르시아만의 유전을 반드시 확보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1단계 반격에는 미군 18개 사단과 영국군 9개 사단을 먼저 바레인에 상륙시킨 뒤 쿠웨이트-바스라를 장악하고 다음 단계로는 이라크와 이란에서 소련군을 격퇴하는 것이 반격의 개요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확보한 뒤 이곳을 그리스와 터키 탈환의 발판으로 삼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를 장악하면 다음 단계로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 침공도 가능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합참은 전면적인 전략 핵폭격과 뒤이어 그리스와 터키 까지 탈환한 상태에서도 소련이 항복하지 않을 경우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기존의 계획들은 터키를 발판으로 우크라이나에 상륙, 지상전을 수행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었는데 소련 본토에서 지상전을 수행한다면 대규모의 육군이 필요했습니다. 과연 2차대전과 비슷한 90개 사단 수준으로 소련에서 지상전을 수행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입안가들이 부정적이었습니다.


5. Halfmoon 계획 – 서유럽의 적극적인 방어

한편, 미 합참은 1948년 4월 워싱턴에서 영국, 캐나다군 관계자와 함께 기존에 작성된 대소 작전계획을 토의합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영국, 캐나다는 새로운 작전계획인 반달(Halfmoon)을 승인합니다.
반달계획은 전쟁 첫 해에 시행될 단기간의 비상 계획으로 기본적으로는 브로일러 계획과 유사한 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소련이 1949년에 국지 도발을 감행해 전면전으로 발전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획 또한 전쟁 종결 뒤에는 소련의 국경을 1939년 국경으로 되돌리는 방안을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반달 계획은 기본적으로 이전의 계획들과 동일한 골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단 한가지만은 기존 계획들과 차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전 계획에서는 서유럽이 소련에게 단기간내에 석권되는 것을 불가피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지만 반달 계획에서는 서유럽에서 소련군을 최대한 저지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연합군은 라인강 선에서 소련군을 최대한 저지하면서 점령지역의 저항 활동을 촉진하고 만약 라인강이 돌파된다면 영국군은 본토 방어를 위해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미군은 프랑스에 남아 지연전을 계속할 계획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미군 주력은 스페인이 중립으로 남는다면 프랑스의 연안 지역으로 퇴각하고 스페인이 참전할 경우 피레네 산맥을 경유해 스페인으로 퇴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주둔 연합군은 가능하면 독일 주둔군과 함께 라인강선으로 퇴각하고 소련군의 신속한 진격으로 라인강 방면으로의 퇴각이 봉쇄되면 이탈리아로 후퇴하도록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 오스트리아 주둔군은 스위스를 경유해 후퇴하는 방안도 고려되었습니다. 서유럽과 달리 그리스는 방어를 포기하고 철수하도록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미국은 전면전 발발시 서유럽에서 대규모 지상전을 수행할 계획을 수립한 것 입니다.
다른 지역은 기존의 계획과 유사했습니다. 수에즈 운하 지대는 지중해와 중동일대의 방어 거점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과 한국을 포기하고 일본을 거점으로 전략 방어를 실시할 것이었습니다. 경우에 따라 중국 국민당 정부에 군사원조를 실시하기는 하겠지만 아시아 본토를 포기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반달계획은 전쟁 첫해에 적용될 비상계획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전략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미국이 처음으로 서유럽의 적극적인 방어를 계획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계획들과 차별화 되는 계획입니다. 이후 수립된 전쟁 계획들은 유럽 대륙에서 보다 적극적인 지상작전을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1949년 1월 28일 완성된 트로잔(Trojan) 계획은 기본적으로 반달계획을 바탕으로 한 전쟁 첫해의 전략 계획이었는데 전략 핵폭격에 대한 내용이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트로잔 계획에서는 전쟁 첫 해에 소련의 주요도시 70곳에 총 133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해 소련의 전쟁 수행능력에 타격을 입힌다는 내용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트로잔 계획은 언급된 대규모 공군작전에 대규모의 군수지원이 필요하고 작전 기지가 될 수에즈 운하 지구의 비행장들의 수준이 낮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고 지적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트루먼 행정부의 광범위한 군축 때문에 트로잔 계획의 실행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반대가 빗발쳤습니다. 트로잔 계획을 검토한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Hoyt S. Vandenberg) 장군과 해군참모총장 덴펠드(Louis E. Denfeld) 제독은 현재의 병력으로는 트로잔 계획을 수행할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6. Offtackle 계획 – 유럽에서의 적극적인 작전

각 군 수뇌부들은 반달 계획 및 트로잔 계획에 필요한 병력이 부족하다는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사실 트루먼 행정부의 군비 축소는 군대의 입장에서 보면 지나치게 과도했습니다. 특히 육군의 감축은 심각해서 트로잔 계획에 명시된 개전 초기의 능동적 방어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해군 또한 예산 확보에서 공군에 밀려 극도로 불만이 많았고 그나마 감축을 덜 당했다는 공군 조차 원래 계획했던 70개 비행단을 확보할 수 없어 불만이었습니다. 결국 축소된 군사력에 맞춘 새로운 계획의 수립이 요구되었습니다.

특히 소련군의 전력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지상전력의 취약성을 더 두드러지게 했습니다. 1948년 8월 1일 합참의 정보 평가에 따르면 소련 육군은 총 104개 소총사단, 35개 기계화사단, 10개 전차 사단, 15개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고 여기에 위성국의 90개 사단이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미육군은 겨우 10개의 현역 사단 밖에 없었고 이 중 당장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것은 1개 사단이었습니다. 나머지 9개 사단은 편제에 미달하는 병력과 장비만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한편,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한 것은 더욱 더 큰 불안감을 가져왔습니다.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 장군은 원자탄을 추가적으로 생산하는 것 보다 본토 방공을 위한 전력을 확충하는 것이 더 시급해 졌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합참의 정보평가는 소련이 1953년 중순까지 135발의 원자폭탄을 보유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미국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전략적 우위가 사라진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게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으니 그것은 1948년 3월 17일에 브뤼셀 조약(Treaty of Brussels)을 통해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3국이 공동 방위 체제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서유럽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서유럽에 보다 적극적인 안보공약을 제공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에게 유사시 라인강선의 적극적인 방어를 요구했고 미국도 1948년부터 이에 대해 긍정적이 되었습니다. 장기적으로 군사원조를 통해 서유럽 국가들의 군사력을 강화한다면 이것은 미국의 안보에도 이익이 된다는 관점이었습니다. 물론 소련이 단기간에 전쟁을 개시한다면 이것은 재앙으로 돌변할 수 도 있었지만 어쨌든 미국에게는 충분히 해 볼 만한 시도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전쟁 계획의 수립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반달계획은 처음으로 서유럽에 대한 적극적인 방어를 명시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기존의 작전계획들을 조금 변경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1949년 4월 26일 합동참모본부는 예하 합동전략기획위원회에 새로운 비상 전쟁 계획의 수립을 지시합니다. 이 계획은 기본적으로 서유럽에서의 전략적 공세와 동아시아에서의 전략적 방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주전장이 될 서유럽에서는 영국-라인강 선을 잇는 방어선을 고수하고 라인강이 돌파되더라도 서유럽 본토에 교두보를 유지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불가피하게 서유럽 전체가 석권된다면 최대한 빨리 서유럽에 대한 상륙과 탈환을 계획하도록 했습니다. 즉 새로운 작전 계획은 기존에 취하고 있던 서유럽 포기를 완전히 폐기한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계획인 오프태클(Offtackle) 계획은 1949년 12월 합참에 의해 승인됐습니다. 이 계획은 사실 여전히 부족한 병력으로 더 큰 목표를 추구한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 안보목표인 서유럽의 방어를 위해서는 전력이 증강될 때 까지의 단기간의 문제점은 감수한다는 것이 합참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프태클 작전은 처음으로 3차대전 이후의 정치적 질서 재편을 언급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기존의 계획들도 전쟁 후 소련의 영토를 축소한다는 계획 정도는 언급하고 있었으나 정부의 명확한 대소 정책의 뒷받침은 없었습니다. 오프태클 계획은 전쟁이 종결되면 동유럽에서 러시아 세력을 축출하고 공산당 조직을 완전히 와해시킬 것을 명시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소련의 공산 정부를 붕괴시킬 수 없을 경우에는 전쟁 수행능력 만이라도 와해시킬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대소 작전계획에 이스라엘을 포함시켰는데 오프태클 계획에서는 소련이 중동으로 침공해 이스라엘을 위협한다면 이스라엘도 동맹에 포함시킨다는 내용이 들어갔습니다.

오프태클 계획은 소련이 서유럽과 중동, 아시아에서 동시에 공세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전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제 1단계에서 라인강선을 방어하는 것은 한동안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전의 계획들과는 다르게 라인강선이 돌파되더라도 꾸준히 지연전을 펼치고 서유럽에 최소한의 교두보를 확보해 반격의 발판을 삼는 다는 점을 명시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마지막 교두보에서 밀려나더라도 서유럽에 대한 탈환작전을 최대한 이른 시기에 실행하도록 했습니다. 또 유럽을 상실할 경우 영국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개전 2개월 이내에 영국에 총 144개 대공포연대와 전투기 1,152대를 배치할 계획이었습니다. 유사시에는 미국 항모기동부대 또한 영국 방공전에 투입하는 방안이 고려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지중해 서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북아프리카에 지상군과 공군을 신속히 증강하고 서유럽이 함락될 경우 북아프리카를 유럽 탈환의 발판으로 삼을 것이었습니다. 또한 소련이 스페인을 침공할 가능성은 적다고 판단되었으나 만약 소련이 스페인을 침공한다면 피레네 산맥에서 1차 방어를 하고 이곳이 돌파되면 지브롤터로 점진적으로 후퇴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전쟁 1단계에 서유럽에서 전략방어를 실시하는 동안 미공군은 가능한 모든 전력을 동원해 전략 핵폭격을 실시하도록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 개시 3개월 이내에 영국 주둔 전략폭격기 부대를 7개 항공단으로 증강해 소련의 서부 공업지대에 타격을 가할 것이었습니다.
전쟁 개시 3개월 이후 부터는 제 2단계로 전환해 전략 폭격을 계속하는 동시에 병력 동원을 가속화해 유럽 탈환을 준비할 예정이었습니다. 동시에 서유럽 상륙작전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칠리아와 코르시카, 사르데냐, 또는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작전을 실시하는 방안도 고려되었습니다.
전쟁개시 12개월 에서 24개월 사이에는 제 3단계로 전환해 서유럽 탈환작전을 시작하도록 되었습니다. 서유럽에 대한 상륙작전에는 미군 41개 사단과 항공모함 전투단 10개, 그리고 43개 항공단이 투입될 계획이었습니다. 이 상륙작전은 셀부르에서 덴마크 서해안에 이르는 지역 중 그때 상황에 적합하다고 예상되는 지역에 감행될 것이었으며 서유럽에 상륙한 주력은 이탈리아에서 북상하는 부대와 대규모의 포위망을 만들어 서유럽의 소련군을 섬멸할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다시 동쪽으로 진격해 소련이 항복할 때 까지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이 이 계획의 결론이었습니다.

오프태클 계획은 군사적인 면 보다 서유럽에 대한 정치적 고려가 많이 작용된 계획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 군부에서는 오프태클 작전의 수행을 위해 전력 증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7. Dropshot 계획 – 유럽에서의 대규모 지상전

한편, 합참은 소련과의 전면전이 1956년 7월 발생할 경우를 상정한 비상 계획안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연구안은 다시 전쟁 발발시기를 1957년 1월로 늦추었고 당시 미군의 군비 축소를 고려해 최소한의 병력과 물자가 소요되는 방향으로 연구되었습니다. 이 연구안은 1949년 1월 31일 제출되어 드롭샷(Dropshot)이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드롭샷 계획은 소련이 개전 당일 135개 사단과 20개 포병사단을 동원하고 개전 한달 이내에 248개 사단, 그리고 개전 1년 내에 500개 사단으로 증강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이에 대해 연합군이 라인강-알프스-피아브 선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병력은 76개 사단으로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라인강 방어선이 돌파될 경우 프랑스 북부에 교두보를 유지하는 방안도 고려되었는데 이 경우 코탕탱 반도에 10개 사단, 브르타뉴에 20개 사단을 배치해 방어하도록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2차대전 당시의 경험에서 드러났듯 북부 프랑스에는 대규모 육군을 지원할 만한 항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교두보를 장기간 유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드롭샷 계획에서는 그 대안으로 이탈리아 남부에 34개 사단을 투입해 교두보를 확보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말타, 크레타, 키프러스 등을 확보하는 방안이 있었는데 이러한 작은 섬은 유럽 탈환의 기지가 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드롭샷 계획은 기존의 계획과 달리 중동을 장기간 방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터키의 경우 전토를 방어하는 것은 어렵지만 연합군의 지상군과 공군 지원이 있을 경우 터키 남부를 장기간 방어하는 것은 가능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이란과 쿠웨이트의 유전지대도 가능한 사수하되 소련군에게 점령될 경우 최대한 빨리 탈환작전을 펼치도록 예정됐습니다. 극동지역은 기존의 계획들과 동일하게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를 중심으로 전략 방어를 하되 홋카이도는 유사시 소련군에게 점령되는 것을 감수할 것이었습니다.

이후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 장군과 육군참모총장 브래들리 장군이 드롭샷 계획의 보강을 지시해 드롭샷 계획의 개정안이 1949년 12월 19일 합참에 제출되었습니다.
개정안에서는 작전에 필요한 병력 규모를 보다 구체적으로 산정했습니다. 먼저 반격의 주력이 될 공군의 경우 개전 당일 미공군은 3,529대, 영국 등 연합군은 5,058대를 투입할 수 있어야 하고 개전 6개월 차에는 미공군이 4,270대, 연합군은 5,399대로 증강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개전 30개월 차에 미공군은 11,152대까지 증강될 것이었습니다. 해군은 13척의 정규항모, 4척의 경항모, 9척의 호위항모를 동원하고 육군은 개전 첫 단계에 15개 사단, 그리고 개전 30개월 까지 74개 사단과 2개 독립연대로 증강될 예정이었습니다. 또한 아시아를 포함한 전 전선의 연합군은 같은 기간 동안 총 213개 사단으로 증강될 것이었습니다.
소련에 대한 전략 핵공격에는 미군 19개 비행단, 영국군 7개 비행단 등 총 26개 비행단, 폭격기 780대가 배정되었습니다. 최 우선 공격목표는 소련의 핵공격 수단으로 여기에는 핵폭탄 제조 시설, 폭격기 기지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것을 파괴하는데 100발의 원자탄이 배정됐습니다. 다음 목표는 석유 생산시설, 발전소, 철강을 포함한 금속 생산공장이었는데 이 목표를 공격하는데 최초의 30일간 180발의 원자탄을 배정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타격을 한 이후에도 복구를 저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핵폭격 및 통상 폭격을 실시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련 위성국의 공업 시설을 타격하는데 원자탄 73발이 배정됐습니다.

지상에서는 전쟁 1단계에 총 76개 사단(이중 미군은 2개 사단)을 동원해 라인강-알프스-피아브 선을 방어하고 2단계에서는 서유럽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미군을 55개 사단으로 증강할 것이었습니다. 만약 소련이 2단계에서 연합군에 항복한다면 그대로 동유럽과 소련으로 진격해 무장해제 및 점령에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이 2단계에서도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동유럽에 대한 대규모 지상전을 감행하는 대안이 준비되었습니다.
동유럽에 대한 공세는 다시 세가지 안으로 뉘었습니다. 첫 번째는 North안으로 이 안은 108개 보병, 38개 기갑, 5개 공수사단과 90개 항공단을 동원해 쾰른을 거쳐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것 이었습니다. 주력은 베를린을 해방한 뒤 계속 동진해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로 진입한 조공은 크라쿠프에서 주력과 합류할 것이었습니다. 다음 단계로는 폴란드 남부에서 남동쪽으로 진격해 발칸반도를 소련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작전이 실시될 예정이었습니다.
두번째 안은 Pincer안으로 이 안은 117개 보병, 30개 기갑, 9개 공수사단과 110개 항공단을 동원해 독일과 발칸반도에서 동시에 공격을 실시하는 것 이었습니다. 먼저 터키 남부의 연합군이 공세로 전환해 그리스에 상륙한 뒤 교두보를 확대해 루마니아로 진출하고 이후 폴란드 남부로 공세를 확대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유럽의 연합군도 반격을 개시해 78개 사단이 베를린을 거쳐 폴란드로 진격, 대규모 포위망을 완성할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안은 South안으로 이 계획은 총 182개 사단과 124개 항공단을 동원하는 등 세가지 안 중 가장 규모가 큰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에서 주력은 터키에서 발칸반도로 진출, 베를린과 폴란드로 진격할 예정 것 이었습니다. 여기서 서유럽의 연합군은 소련군을 묶어두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었습니다.

결국 드롭샷 계획은 합참에서 승인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오프태클과 함께 미국의 서유럽 방어 계획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은 NATO의 강화와 함께 서유럽에 대한 적극적 방어를 일관되게 유지해 나갑니다.

2007년 11월 25일 일요일

키티호크의 홍콩 입항 거부가 달라이 라마 때문?

워싱턴포스트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있더군요.

China's Naval Rebuff Could Be Reply to Dalai Lama's Medal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웃기는 일 입니다. 중국에게 티벳 문제가 민감한 줄은 알겠는데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굴 필요까지야..

지름신 앞에 장사없다 - 레이건 행정부 시기 국방예산 증액에 따른 문제점

에. 오늘도 날림 번역으로 때우게 됐습니다.;;;;

요상하게도 대한민국의 우국충정에 넘치는 많은 분들께서는 신무기만 잔뜩 들여오면 군사력이 알아서 강해지고 나라가 강해진다는 순진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은 승하하신 미리견 황제 레이건 폐하께서도 가지고 계시던 것인데 잘 아시다시피 미군은 레이건 폐하의 이런 관심에 힘입어 1980년대에 신무기를 잔뜩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게 좋기만 했을까요?

합참은 국방예산의 증액에 대해 복합적인 반응을 보였다. 와인버거는 군대가 요구하는 만큼의 예산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콜린 파월은 이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이것은 마치 2월의 크리스마스와 같았고 네트를 치우고 테니스를 치는 것 같았다. 합참은 즉시 필요한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요구한 내역은 국방예산을 대략 9% 정도 증가시켰다."
역사상 처음으로 합참은 국회나 행정부의 반대를 받지 않고 예산을 늘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군은 베트남전 직후의 반군정서 때문에 교체하거나 개량할 수 없어서 노후화된 장비를 대규모로 교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군은 마구잡이로 '질러대기' 시작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첫 2년 동안 군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런 축복에도 불구하고 군의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예를 들어 존스 장군은 이런 대규모 증강이 일시적인 것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비록 적은 금액이라도 장기적이고 꾸준한 예산 증액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존스 장군은 와인버거에 의해 예산이 통제 불능으로 폭증하는 것에 반대해 '실질적인' 국방예산 증가를 주장했다.
신형 장비, 그리고 특히 값비싼 장비를 대규모로 사들인 레이건 행정부 초기의 군사력 증강은 사실 명확한 개념이 없는 상태로 진행되었으며 미국의 전체적인 군사력 구조나 전쟁 준비상태에 끼칠 영향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려도 없었다.

결국 존스 장군의 우려는 얼마가지 않아 현실로 구체화 되었다. 1983년 회계연도에 국방예산은 물가상승률 보다 25% 이상 증가했다. 그리고 불과 5년만에 국방부의 예산은 두배로 폭증했다. 그러나 예산의 대부분이 신무기를 구매하는데 소비되었기 때문에 군대는 갈수록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1984년에는 "레이건 행정부가 6320억 달러를 군사력 증강에 쏟아부었지만 전투에 즉각 투입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육군 부대는 1980년의 25% 수준으로 감소했다." 이런 문제는 육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유럽전구 부사령관인 로슨(Richard L. Lawson) 장군은 1985년 의회에서 “대대급 야전기동과 비행훈련시간, 군함의 기동훈련은 불충분한 수준으로 감소했습니다. (중략) 일부 탄약, 특히 공대공미사일과 해군의 탄약, 특수 탄약의 재고량은 규정량 이하로 감소했으며 이 때문에 전쟁 수행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1985년에 이르자 국방부가 안게된 예산 문제가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 게 되었다. 존스 장군과 합참의 여러 관계자들이 경고했던 것들이 현실화 된 것이었다. 합참과 군부의 요구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넌(Sam Nunn) 상원의원은 와인버거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우리는 국방부가 예산 문제를 현실적으로 대응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의회가 기존에 승인한 신무기 도입계획에 소요될 1500억에서 2000억 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충원하기에는 자금이 부족하며 신무기를 도입하기에는 예산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의회와 대립하는 와인버거의 행태는 국방력 강화에 대해 국회와 대중들이 공감대를 가지고 있던 레이건 행정부 초기에는 그럭 저럭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국회의원들은 타협을 거부하는 와인버거에 대해 역겨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레이건이나 와인버거가 아니라 의회가 나서서 국방부의 예산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1984년에 접어들면서 조치가 취해지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의 재정은 군사력 유지와 이미발주되었지만 아직 지불은 되지 않는 신무기 도입을 동시에 추진할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공화당 소속의 상원의원들 마저도 우려를 나타낼 지경이었다. 공화당측은 '레이건 행정부의 첫 1년에 국방부가 얻어낸 연간 9%의 국방예산 증가율보다 훨씬 낮은 3~4% 수준의 예산 증액을 이끌어 내는 것도' 엄청난 행운이 따라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와인버거는 국방예산을 늘리는데 있어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가 7년간 장관직을 수행하고 퇴임했을 때 그는 '1982년 회계연도에 1807억 달러였던 국방예산을 1987년 회계연도에는 2740억 달러로'늘렸다. 와인버거는 아슬아슬한 시기에 퇴임을 한 덕분에 그가 마구잡이로 "질러댄" 결과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있었다.

예산 문제를 손보는 것은 1987년에 새로 국방부장관이 된 프랭크 칼루치(Frank Carlucci)의 임무가 되었다. 칼루치는 의회가 국방예산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낸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은 와인버거와 같은 대립적인 태도는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와인버거와 달리 신무기의 생산과 도입 시기를 늦추면서 예산을 절감하려 했고 국방예산 증가율을 낮추려 했다. 실제로, 칼루치가 1988년 2월 상원에 출두했을 때 그는 국방예산 증가율을 2%로 낮췄다고 의원들에게 설명했다. 와인버거가 3320억 달러의 예산을 요구한데 반해 칼루치는 2990억 달러를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상원은 3000억 달러의 예산을 승인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군비증강 노력이 끝나갈 무렵, 국방부는 대통령이 약간 도움이 된 정도라고 생각했다. 합참은 MX 미사일, B-1 폭격기, 트라이던트 미사일, 그리고 새 항공모함을 도입할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했다. 1985년 10월 1일, 베시(John W. Vessey Jr.) 장군을 대신해서 합참의장에 취임한 크로우(William Crowe Jr.) 제독은 레이건 행정부 초기에 무분별하게 집행된 예산으로 인한 문제를 고스란히 떠안았으며 비록 행정부 초기 예산의 일부가 적절하게 사용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군은 예산 사용에 있어 현명해야 했다고 비판했다.

"레이건 행정부 초기 후하게 책정된 국방예산은 국방부 내에서 활발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때는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던’ 시기였다. 국방부가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예산이 떨어졌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과연 우리가 5년 뒤에는 이 정도의 예산을 받을 수 없을지언정 예산이 있을 때 일단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되더라도 써야 하는가? 그리고는 결정이 이뤄졌다. - 그래. 지르자! 예산이 들어오는 동안은 수중에 있는 모든 돈을 써 버리자! 그래서 국방부는 예산을 써 버렸고 예산이 모두 현명하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국방부는 5년이 지난 뒤 더 이상은 많은 예산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돈이 있을 때 쓰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그 당시의 판단에 대해 비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체계적인 군생활을 거친 군인들은 예산이 증액되던 초기에 이미 레이건 행정부가 군대를 심각한 문제에 처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한 해병대 장군은 다음과 같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해병항공대 사령관 핏맨(Charles H. Pitman) 중장은 '만약 누군가 내일’ 해병대가 앞으로 3~5년간 극복해야 할 것에 대해 묻는다면 '일단 나를 혼자 내버려 두면 내부개혁을 한 뒤 좀더 나은 계획을 제안하겠다'고 말했다. '만약 그러지 못하겠다면,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싸울 것이다. 만약 해병대가 현재의 3-5년 예산안에 따라 움직여야 할 경우 사업 입찰에 참여한 회사들은 그들의 직원들을 내 눈 앞에서 꺼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목표를 세우고 결정을 내린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군예산의 문제는 레이건이 집권했을 때 보다 레이건이 퇴임했을 때 더 악화되었다. 국방부의 한 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1970년대와 같은 구제불능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미 시작된 것 이죠. 육군은 레이건이 집권했을 때 보다 더 축소되었고 해군은 군함들을 퇴역시켜야 했으며 공군은 비행단 규모를 감축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빴던 것은 군대의 전투수행태세가 악화된 것 이었다. 사실상 이제는 국방예산이 현재 보유한 장비들을 운용하는 데도 벅찰 지경이 되었다. 국방예산에 관한한 레이건이 남긴 유산은 복합적인 성격을 가졌다.

Dale R. Herspring, The Pentagon and the Presidency : Civil-Military Relations fron FDR to George W. Bush,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p.275~278

2007년 8월 14일 화요일

NATO의 군사력에 대한 소련의 추정

아래의 글은 소련이 분석한 NATO 회원국의 군사력 현황 중 일부로 1984년 12월 3일에서 4일에 걸쳐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방장관 회의에서 발표되었습니다.

[전략]

최근 수년간 NATO 회원국들은 이미 자국을 방어하기에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위협적인 수준으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계속해서 서유럽에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증강하고 있으며 이것은 바르샤바 조약국들에 대한 전략 핵공격 위협을 높이고 있다. NATO 회원국들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대한) 군사력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1993년을 목표로 한 장기 군사력 강화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NATO의 군사비 지출은 1978년에서 1984년 사이에 17억달러에 달했다. NATO 조약국들의 군사비 지출은 크게 증가했으며 미국 국방비의 50% 수준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출은 80% 증가했으며 서독은 40%,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2.5배 증가했고 터키는 9배나 늘어났다.
이 기간 동안 NATO의 유럽지역 핵전력은 더욱 발전했다. 유럽전역의 병력도 크게 증강됐다. NATO군은 새롭고 현대화된 무기체계로 개편 중이며 새로운 전술을 도입하고 있다. 조직구조와 지휘통제 체계, 그리고 군사기술 지원체계도 개선되고 있다. 동원 기반도 확충되고 있으며 참모조직과 군부대의 작전 훈련은 횟수도 늘어나고 더욱 심화되었다.

[중략]

1. (서부전역)의 NATO측 핵전력을 살펴보면 핵미사일 운용가능 한 차량이 25% 이상 증가했으며 약 3,600대에 달한다. 이것으로 총 4,200발의 핵탄두를 운용할 수 있다.
2. 새로 증강된 병력은 6개 사단(프랑스 3개 사단,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각 1개 사단)이며 여기에 따로 에스파냐군도 5개 사단이 증강됐다. 이들 국가의 사단별 전투력은 거의 1.5배 늘어났으며 신형 전차와 야포, 미사일, 대전차화기, 신형 지휘통제 체계의 도입으로 질, 양적으로 확충됐다.
[중략]
3. 전투기의 숫자는 1.8배 증가했으며 이중 거의 25%가 신형 전투기이다. 전투기 중 2/3 이상이 다목적 전투기이며 이중 절반은 핵병기 운용이 가능하다. 공군의 전투력은 60% 이상 증가했다.
4. 대서양 동부와 지중해 지역을 관할하는 미 해군의 전력은 신형 수상전투함과 잠수함, 현대화 개장을 받은 전함의 배치, 그리고 핵 및 재래식 대함미사일의 배치로 강화되었다. NATO 가맹국의 해군 중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신형 함대공 미사일과 항공모함의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
5. 유럽 전역의 전자전 부문, 특히 공군과 지상군은 신호 및 무선 정보 능력을 확충함과 동시에 바르샤바 조약군의 무전망을 모든 주파수에 걸쳐 교란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고 있다.
6. 유럽 전역의 방공 체계 중 호크(Hawk) 방공시스템은 개량에 들어갔다. 요격기 중 1/3이 신형으로 교체되었다. 방공 능력은 2~2.5배 이상 강화되었으며 동시에 1,000대의 항공기를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고 있다.
7. 앞에서 살펴본 내용을 기초로 할 때 서부 전역의 NATO군은 총 46개 사단, 51개 독립 부대, 핵탄두 3,600발, 전차 11,000대, 야포 및 박격포, 방사포 9,800문, 대전차 무기 11,500개, 공군의 고정익항공기 2,870대, 육군항공대의 헬리콥터 및 고정익항공기 3,000대, 일선 전투함 480척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중 대략 60%의 전력이 서유럽 전역에 집중되어 있다.
동원에 들어갈 경우 지상군의 전투력은 보병 사단들의 증강에 의해 두 배 이상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며 특히 서독, 영국, 프랑스 지상군의 전력은 30% 이상 증강될 것이다. 서유럽 전역의 NATO군은 높은 수준의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다. 사실상 거의 모든 상비 사단이 전투 준비를 마치고 있으며 최대 48시간 이내에 전투 태세를 완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해군 또한 지상군과 비슷한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공군은 12시간 이내에 완벽히 전투 태세를 갖출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Simple Alert”에서 “Reinforced Alert”단계로 전환되는데 필요한 시간은 6일에서 4일로 단축되었다.
서유럽 전역에는 30일분의 물자가 비축되어 있으며 미군의 경우 60일분의 물자를 비축하고 있다. 그러나 NATO 공군은 탄약의 경우 90일치를 확보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8. 서부 전역의 NATO 군은 작전 및 전술 훈련을 강화, 심화 함으로서 매우 높은 수준의 대비 태세를 확보했다.

[중략]

서부 전역 NATO군의 전투력

서부 전역의 NATO군은 1990년까지 전투 대비 태세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질적인 향상을 이룩하려 하고 있다.
1990년까지 서부 전역에서 선제 핵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NATO의 전체적인 핵 전력은 40%(6,000발의 핵탄두) 이상 증가할 것으로 보이며 핵미사일 발사 차량을 14%(3,660대에서 4,150대) 이상 증강할 계획이 세워져 있다.
서부 전역의 전략적 상황은 매우 극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NATO의 핵 전력은 서부 전역은 물론 소련의 상당 지역에 걸쳐서 강력히 방어되는 지역을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것으로 예상된다.
서부 전역의 NATO 지상군의 전투력은 새롭고 고성능인 장비를 받아 증가하고 있다.
기갑 장비의 45%가 M 1 및 레오파르트 2, 챌린저, AMX 30B로 구성될 것이며 신형 보병 수송장갑차와 정찰용 항공기가 배치될 계획이다.
포병의 사거리는 30km에서 40km 대로 늘어날 것이며 사거리 연장탄과 유도 포탄, 다탄두식 포탄과 신형 미사일의 도입에 의해 발사 속도는 1.5~2배, 화력의 효율성은 3~5배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지상군 군단은 1980년대 말에 이르면 “Assault Breaker” 정찰-통제 체계를 도입해 최대 200km 거리에서 기갑 장비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미육군의 제 5군단과 제 7군단의 예하 사단들은 1986년형 사단으로 편제개편을 마쳤으며 우리측의 추정에 따르면 기계화보병사단의 전투력은 70%, 기갑사단의 전투력은 40% 이상 증강되었다.
1990년에 이르면 서부전역의 NATO 지상군 전투력은 1984년과 비교해 50% 이상 증강될 것이다.
1990년까지 서부전역의 NATO 공군의 45%가 F-16, F-15, A-10, 토네이도, 미라지 2000및 기타 신형 항공기로 구성될 것이며 이들 신형 항공기는 그 이전 세대의 항공기에 비해 전투력, 특히 무장 탑재 능력이 2~3배 이상 늘어났다. 공군의 전투력은 거의 두 배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다.

[후략]

Vojtech Mastny and Malcolm Byrne(ed),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500~502

러시아어로 된 문서를 영어로 번역한 것을 중역했는지라 문장이 좀 기묘합니다만 전체적인 논조는 NATO의 군사력 증강이 매우 위협적이라는 것 입니다. 특히 신형장비의 도입에 따른 기술력 격차를 우려하는 점이 주목할 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