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와 채팅을 하다가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친구 : 거 참. 소련이 망하고 어지간한 자료들은 널리 공개됐는데 어째 한국에는 러시아 무기에 환상을 가진 사람이 늘어났을꼬?
어린양 : 그건 무슨 소리냐?
친구 : 뭐, 걸프전에서 이라크군의 T-72가 M1A1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이유가 이라크에 수출된건 소련제 ‘내수정품’ 보다 성능이 더 떨어지는 물건이기 때문이라는 애들이 있더라고. 뭐 소련제 ‘내수정품’은 무안단물이라도 바르는 모양이지?
뭐 소련의 기갑웨이브는 나토를 한큐에 발라버리느니 나토는 공군 없으면 쓸려버린다느니 80년대 내내 나토가 소련군의 기갑에 벌벌 떨었다는 등 유치한 헛소리가 21세기에도 통용 된다는게 정말 놀랍지 않냐?
어린양 : 그것 참;;;;;;
저는 무기체계, 특히 2차대전 이후의 무기체계에 대해서는 완전 깡통이지만 저런 소문이 돌아 다닌다는게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80년대라면 나토측에 레오파르트 2도 있고 M1A1도 있는데 왜 나토군의 기갑전력이 바르샤바 조약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렸다는 망상이 냉전이 끝난지 20년이 다 돼 가는 이 시점의 한국에는 퍼져있을까???
소련의 철통 같은 보안 유지 덕분에 냉전기간 동안 소련제 무기에 대한 과대평가는 흔한 일이었고 또 이런 과대평가에는 예산도 더 타먹자는 군대의 엄살도 제법 작용했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려져 있는 것 입니다. 소련제 전차들이 아주 못 써먹을 쓰레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레오파르트 2나 M1A1 같은 서방의 제 3세대 전차와 비교한다면 성능적으로 열세인 것은 확실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냉전시기 바르샤바 동맹군의 기갑전력에 대해서는 폴 케네디가 아주 간단히 핵심을 잘 짚은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중부 전선에서는 나토군이 대규모의 소련군 기갑 및 자동차 소총사단들에 비해 크게 열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 경우에도 바르샤바 동맹군의 우세는 안심할 정도가 못된다. 그것은 혼잡한 북부 독일의 지형에서는 신속하고 공격적인 기동작전을 수행하기가 어렵고 또한 소련의 주력 전차 5만 2000대 중 다수는 도로소통이나 방해하기에 알맞은 낡은 T-54형 전차들이기 때문이다. 나토가 군수품, 연료, 대체용 무기 등의 충분한 예비 비축량만 보유한다면 소련군의 재래식 공격을 격퇴하는데 1950년대 보다도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설 것이 확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일주, 전남석, 황건 공역, 폴 케네디, 강대국의 흥망, 한국경제신문사, 1988, 588쪽.
어쨌든 1980년대 후반 까지는 소련의 신형전차들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21세기 한국의 일부 밀리매냐(????) 들의 망상처럼 서방측이 바르샤바 동맹군의 기갑전력에 덜덜덜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찰머스(Malcolm Chalmers), 운터제어(Lutz Unterseher)와 잘로가(Steven J. Zaloga) 간에 있었던 논쟁이 좋은 예가 될 것 입니다.
찰머스와 운터제어는 1988년 International Security 13권 1호에 Is There a Tank Gap?: Comparing NATO and Warsaw Pact Tank Fleets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9년에는 잘로가가 역시 같은 잡지 13권 4호에 The Tank Gap Data Flap라는 제목으로 반대되는 논지의 글을 투고 했습니다. 이 토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찰머스와 운터제어의 주요 논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전차 전력의 숫적인 격차는 크지 않다.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서방보다 2.6배 더 많은 전차를 보유하고 있지만 주력인 소련군은 그 기갑전력의 상당수를 극동지역에 돌리고 있다. 서부전역에 국한할 경우 바르샤바 동맹군의 기갑전력은 불과 1.6배의 우세를 보일 뿐이며 특히 주 전장인 중부 전선에서는 겨우 1.4배에 불과하다. 중부전선의 나토군은 12,80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는 반면 바르샤바 조약군은 18,100대 정도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나토가 보유한 전차들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그것에 비해 기술적으로 월등히 우수하다.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전차들은 서방 전차의 탄도계산 컴퓨터, 열영상장치, 그리고 명중률 높은 전차포와 같은 것을 갖추지 못 하고 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보유한 전차 중 상당수를 이루는 T-55, T-62는 M-48, M-60 계열이나 레오파르트 1 수준의 전차를 상대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신형 전차인 T-64, T-72, T-80은 125mm 포를 탑재하고 있지만 그 명중률이 극도로 낮다. 또한 소련제 전차의 기계적 신뢰성은 매우 낮다. 소련의 신형 전차들은 방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반응장갑을 장착하고 있지만 이것은 서방의 120mm포에 대해서는 무용지물이며 또 소련 전차의 중량을 증가시켜 기동성에 제약을 가한다.
셋째, 나토의 전차전력은 전체적인 규모에서는 바르샤바 동맹군 보다 적지만 신형 전차의 비중을 놓고 보면 바르샤바 동맹군의 우위는 줄어든다. 나토는 1981년부터 1987년 사이에 7,200대의 제 3세대 전차를 도입했는데 이것은 1981년 나토가 보유한 전체 전차전력의 27%에 해당된다. 같은 기간 소련은 16,700대의 신형 전차를 도입했는데 이 경우 양 측의 숫적 격차는 더욱 줄어든다.
넷째,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동원능력은 나토에 비해 제한적이다. 카테고리 1으로 분류되는 바르샤바 조약군의 사단 중 소련군 사단과 동독군 6개 사단을 제외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군 사단은 최소 동원 개시 10일 이전에는 전선에 투입하기 어렵다. 카테고리 2 사단은 동원 개시 후 30일은 지나야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의 정보에 따르면 바르샤바 조약군의 동원 능력은 매우 형편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이 개시될 경우 전쟁 첫날에는 양측의 전차 전력의 비율이 1 대 1.42 지만 동원 개시 40일이 지나면 그 비율은 1 대 1.24까지 떨어질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나토군은 신형 전차의 성능면에서 바르샤바 조약군을 압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제 2세대 전차의 경우도 지속적인 성능 개선을 통해 전투력을 향상시켰다. 반면 바르샤바 조약군의 T-55나 T-62는 이렇다 할 성능 개선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소련은 경제적 능력의 제약 때문에 T-72와 T-80의 추가 생산에 주력하고 있을 뿐 구식 전차의 성능 개선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잘로가가 투고한 반박문은 1989년 봄에 나온 13권 4호에 실렸습니다.
잘로가는 먼저 나토의 신형 전차들이 원거리 교전과 야간 전투에서 소련의 신형전차에 대해월등히 우수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나머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습니다.
첫째, 찰머스와 운터제어는 바르사뱌 조약군의 전차 전력에 대해서 IISS (International Institute for Strategic Studies)의 추정치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 특히 신형전차의 생산량은 찰머스와 운터제어가 추측한 것 보다 더 많다. 1981년부터 1987년 사이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국의 신형 전차(T-72 이상) 생산량은 2만대 이상이다. 또 미국이 같은 기간 동안 대량의 M1과 M1A1을 생산했지만 그 반대로 유럽에 배치된 M60A3들이 퇴역하기 때문에 중부유럽에 배치된 나토군의 기갑전력은 증가했다고 볼 수 없다.
둘째, 찰머스와 운터제어는 분석의 대상을 전차에 한정하고 있다. 바르샤바 조약군이 보유한 대량의 보병전투차를 분석의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치명적 오류이다.
셋째, 바르샤바 조약군, 특히 소련군은 중부전선에 신형전차를 배치하고 구형 전차는 대부분 퇴역시켰다. 극히 일부의 소련군 부대만이 T-62를 장비하고 있다. 후방에 돌려진 대량의 구형 전차는 나토군이 신형전차를 대규모로 소모한 뒤에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찰머스와 운터제어는 체코의 T-55 개량이나 소련의 T-62 개량 등 바르샤바 조약군의 구형 전차 성능개선에 대해 무시하고 있다.
넷째, 찰머스와 운터제어는 바르샤바 조약군의 기술수준에 대해 지나치게 저평가 하고 있다. 비록 소련제 전차들은 나토군의 전차들에 비해 야간 장비가 뒤쳐져 있긴 하지만 30% 이상의 전차는 수동형 영상증폭장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형 T-72와 T-80의 방어력에 대해서도 저평가 하고 있다. 또 나토군 전차들이 가지고 있는 우수한 원거리 전투 능력은 중부 전선의 지형에서는 그 우위를 잃는다. 서독과 동독 국경 지대의 55% 이상의 지역은 실제 교전거리가 500m 수준이다. 1500m 이상의 교전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지역은 17%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찰머스와 운터제어는 역시 같은호에 반박문을 투고했습니다. 이들은 잘로가의 지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습니다.
첫째, 우리의 추정치가 부정확하다는 잘로가의 지적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우리는 추정치이기 때문에 충분히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전제하고 논지를 전개했다. 하지만 잘로가 또한 IISS의 추정치가 부정확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둘째, 잘로가는 보병전투차와 자주포 등도 계산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나토가 보유한 공격헬리콥터와 대전차 미사일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셋째, 잘로가가 지적한 바르샤바 조약군의 구형 전차 성능 개량에 대해서는 우리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동독의 예를 보더라도 소련의 동맹국들은 구형장비의 도태와 성능개선이 극히 저조함을 알 수 있다. 잘로가는 체코슬로바키아군의 T-55 개량사업이나 소련군의 T-62 개량사업의 예를 들고 있는데 이런 구형전차들이 성능개선을 통해 화력개선 같은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넷째, 잘로가는 주 전장이 될 중부유럽, 특히 독일에서는 원거리 교전이 가능한 지형이 매우 적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소련제 전차의 낮은 기계적 신뢰성과 제한된 기동성은 지형의 활용도를 극히 제약할 것이다.
다섯째, 잘로가는 우리의 글이 소련전차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저평가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에 비춰보면 소련전차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지나친 과대평가가 문제가 됐던 경우가 더 많았다. 처음 T-80에 대한 정보가 입수됐을 때 미국 국방부는 T-80이 기존의 전차에 비해 화력과 생존성이 강화됐을 것으로 추측했고 그 당시 나온 T-80의 상상도는 마치 서방의 제 3세대 전차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실제 T-80은 T-72의 강화형에 불과한 수준이다.
양 측의 견해는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양측 모두 서방의 제 3세대 전차가 T-72와 T-80에 비해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로가는 바르사뱌 조약군의 기갑전력이 숫적 우위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라고 전제하고 있을 뿐이지요. 소련제 ‘내수정품’에 대해 벌벌벌 떨거나 하지는 않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