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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23일 수요일

소통 방식의 한 유형

1929년 4월, 코민테른의 미국 위원회는 미국공산당의 분파 투쟁을 해결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습니다. 당시 미국공산당의 다수파를 이루고 있던 러브스톤(Jay Lovestone), 기트로우(Benjamin Gitlow), 페퍼(John Pepper), 올퍼(Bertram Wolfe)는 코민테른이 미국공산당의 다수파인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1929년 3월 뉴욕을 출발할 때 까지만 하더라도 꽤 자신만만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미국 대표단은 모스크바에 도착한 직후 코민테른 지도부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러브스톤과 기트로우 등은 부하린에 동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스탈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 이었습니다. 코민테른 미국위원회의 위원 열두명 중 여덟명이 소련인이었는데 여기에는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탈린이 부하린에게 우호적인 러브스톤을 어떻게 봤을지는 뻔한 일이지요. 결국 미국공산당의 분파투쟁은 모스크바에서 미국공산당의 주류와 코민테른과의 대립으로 발전했습니다. 스탈린은 러브스톤으로 부터 당권을 빼앗으려고 했고 러브스톤은 완강히 저항하지요.

미국공산당원들의 저항은 스탈린의 혈압을 오르게 했습니다. 당시 스탈린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공식기록에 따르면 스탈린은 완강히 저항하는 여덟명의 미국 공산당원이 굳은 결의와 완고함을 지녔다고 칭찬했지만 "진정한 볼셰비키적 용기란" 코민테른의 의지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복종하는 것 이라고 충고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스탈린은 러브스톤, 기트로우, 그리고 엘라 리브 블루어(Ella Reeve Bloor)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이들이 무정부주의자, 개인주의자, 그리고 파업방해자(Strike-breakers)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괴롭히면서 미국공산당은 그들의 분파가 몰락하더라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올퍼에 따르면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고 한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뭐라도 되는지 아는가? 트로츠키는 나에게 대들었소. 그자가 어디에 있소? 지노비예프도 나에게 대들었소. 그자가 어디에 있소? 부하린도 나에게 대들었소. 그자가 어디에 있소? 그리고 당신들은? 당신들이 미국에 돌아가면 당신들의 마누라 말고는 아무도 당신들과 함께 하려 하지 않을 것이오!"

러브스톤은 나중에 스탈린의 발언을 "묘지의 연설(graveyard speech)"이라고 불렀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미국공산당원들에게 러시아인은 파업방해자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소련의 공동묘지에는 묘자리가 충분하오!"

Theodore Draper, American Communism and Russia : The Formative Periode(Viking Press, 1960), p.422.

스탈린의 이런 소통방식은 미국공산당원들의 정나미를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러브스톤은 훗날 반공으로 선회하는데 이때의 경험이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 입니다.

2009년 1월 24일 토요일

적백내전기 볼셰비키 정부의 징병제 실시와 그 문제점

군사사, 또는 소련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대부분 잘 아시겠지만 소련을 세운 볼셰비키들은 군사력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군대를 조직하는데 자신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합니다.

볼셰비키들은 붉은군대의 창설 초기 계급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노동자’ 계층의 지원을 통해 군대를 확장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상당수의 볼셰비키들은 계급으로서의 농민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을 군대에 받아들일 생각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적백내전 초기 단계에서는 농민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하는데 소극적인 경향을 보였다고 하지요. 그러나 러시아 전역에서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원한 노동자만으로 이루어진 군대로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격화되는 마당에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군대를 증강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막상 모병을 실시해 보니 노동자들은 총을 잡는데 큰 관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918년 2월에 모스크바에서 모병을 실시했을 때 30만명의 노동자가 자원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실제로 지원한 것은 2만 명에 불과했으며 게다가 이 중 70%는 원래 군인이었습니다. 군인 출신이 아닌 자원자들도 도시 실업자나 범죄자가 상당수여서 혁명군대라고 하기에는 뭔가 민망한 상태였습니다.[Figes, 1990, p.175]

1918년 5월과 6월에 겪은 여러 차례의 군사적 패배는 대규모 병력 동원의 필요성을 증대시켰습니다. 볼셰비키 정부는 급박한 전황에 대처하기 위해 1918년 4월 8일에 실질적으로 국민개병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따라 5월부터 대규모의 병력 동원이 시작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형식적으로는 지원병 모집이었지만 징병 연령대의 남성들에게 입대를 강요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5월 29일, 트로츠키는 공식적으로 징병을 선포합니다.[Ziemke, 2004, pp.42~43] 그러나 볼셰비키 정부는 여전히 도시 노동자들을 동원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1918년 6월에서 8월 사이에 있었던 총 15회의 모병 캠페인 중 11회는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이뤄졌다고 합니다.[von Hagen, 1999, p.36] 이러한 대규모의 병력 동원으로 1918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만 20만명의 노동자가 군대로 편입되었습니다. 농민 또한 동원 대상에 포함되었지만 초기에는 농민의 참가가 매우 저조했습니다. 볼셰비키 정부는 1893~1897년 출생의 농민 275,000명을 동원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1918년 6월과 7월의 동원을 통해 4만명을 충원하는데 불과했습니다. 물론 1918년 8월 이후 80만명이 넘는 농민을 동원하는 성과를 거두긴 했습니다만 초기의 저조한 성과는 충분히 실망스러운 것 이었습니다.[Figes, 1990, p.177]

게다가 1918년 8월 6일 카잔이 함락되자 볼셰비키 정부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제극렬 좌파조차도 승리를 위해서는 그들이 혐오하는 중앙 통제적인 지휘체계와 대규모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레닌은 1918년 10월 3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VTsIK, Всероссийский Центральный Исполнительный Комитет)에서 당장 3백만의 군대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Figes, 1990, p.181] 이런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농민을 대상으로 대규모 ‘징병’을 실시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미 트로츠키는 짜르 통치하의 장교와 부사관들을 ‘군사전문가’로서 혁명 군대에 대거 편입시킨 경험이 있었습니다. 혁명의 승리가 절실한 마당에 농민을 징집하는 실용노선을 택한다 한 들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1919년 3월 18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8차 전당대회는 농민 문제에 대한 일대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볼셰비키들은 혁명이 완수된 이후에도 중농 계급은 오랜 기간 존속할 것이기 때문에 혁명 승리를 위해 계급으로서의 중농층과 연합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빈농 및 중농과 연합하여 부농을 치자’는 논리 였습니다.[von Hagen, 1999, p.60] 8차 전당대회 이후 농민에 대한 대규모의 징집이 추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1919년부터 붉은군대는 폭증하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1월 약 80만명 수준이던 붉은군대는 불과 1년 뒤인 1920년 1월에는 3백만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징병이 절정에 달한 1919년 3월에는 한 달 동안 345,000명이 징집되었습니다.[Figes, 1990, p.183] 부하린은 붉은군대에 농민이 대거 유입됨으로서 프롤레타리아들이 농민화 되어 혁명의 전위로서의 의식을 사라지게 만든다고 툴툴댔습니다.[Lincoln, 1999, p.374] 또한 군대 내의 당원들도 붉은군대의 계급적 순수성이 더럽혀 지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어쩌겠습니까. 전쟁 중인데…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징병은 겉으로는 꽤 인상적인 것이었지만 실제 내용면에서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해 징집한 훈련병들을 신속히 훈련시켜 전선으로 투입할 수 가 없었습니다. 내전 기간 중 붉은군대가 최대 규모에 달했던 1920년 10월의 경우 총 550만명의 병력 중 225만명이 훈련병이었습니다. 그리고 1차대전이 끝난 직후에 바로 내전이 발발했기 때문에 징병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것도 문제였습니다. 특히 1차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남성들은 군대에 징집되는 것을 회피했습니다.
게다가 기본적인 장비의 부족으로 실제 전투 병력은 더 적었습니다. 1920년 10월 기준으로 총 병력 550만명 중 전투 병력은 70만 명이고 이 중 제대로 무장을 갖춘 숫자는 50만명 내외로 추정됩니다.[Figes, 1990, p.184] 붉은군대의 장비 부족 문제는 특히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러시아는 이미 1차대전 당시에도 군수물자 부족으로 고생했습니다만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진 내전 상황에서는 문제가 더 심각했습니다. 볼셰비키 정부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마구 잡이로 증강시켰기 때문에 보급 문제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붉은군대의 병사 1인당 식량 지급량은 1919년 2월 기준으로 하루 400그람의 빵이었으나 실제로 일선 부대는 이 수준의 급식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일부 부대는 식량 보급이 되지 않아 병사들이 굶어죽는 경우도 발생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먹을 식량도 보급이 안되는 마당이었으니 군마에게 먹일 사료의 보급도 딱히 나을 게 없었습니다. 물론 전선에서의 혹사나 질병으로 인한 손실도 많았으나 상당수의 군마는 사료가 없어 죽었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폐사도 사료의 부족이 원인인 경우가 많았다고 하지요.[Figes, 1990, pp.191~192] 식량 사정이 이 지경이었으니 다른 보급품의 상태가 더 좋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선 부대들의 경우 군복을 지급받지 못한 병사가 60~90% 사이를 오가는 것은 기본이었고 아예 군복 자체를 받지 못한 부대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겨울에 특히 심각한 문제였는데 동복을 지급받지 못하면 바로 얼어 죽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군대가 갑자기 팽창한 1919~1920년의 겨울에는 동복 부족으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이 얼어 죽었습니다. 군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가죽 신발보다는 현지에서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천으로 만든 신발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 부대들은 전선 근처에서 직접 물자를 조달했는데 이것은 사실상 수백년 전의 약탈 보급으로 되돌아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족한 식량, 피복, 위생 도구는 바로 질병을 불러왔고 적백내전 기간 중 붉은군대 사망자의 대부분은 전사가 아닌 질병 및 부상의 악화로 인한 사망이었습니다. 내전 기간 동안 붉은군대의 전사자는 259,213명이었는데 질병과 부상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는 616,605명이었습니다.[Krivosheev, 1997, p.35] 대부분의 부대들은 부대원의 10~15% 정도가 항상 질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고 심지어는 환자가 전 병력의 80%인 부대가 전선에서 작전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티푸스, 콜레라, 천연두, 독감, 성병이 만연했고 많은 희생자를 가져왔습니다.[Figes, 1990, pp.193] 붉은 군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병원균 군락이 되다 보니 피부병 같은 것은 질병 축에도 못 낄 정도였다지요.

상황이 이 모양이다 보니 군기의 문란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특히 병사들이 작전 중에도 술을 마셔대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미 트로츠키는 1918년 11월 일선 지휘관들에게 군기 확립을 위해 사병에 대한 즉결처분권을 부여한 바 있었습니다.[von Hagen, 1999, p.65] 음주 문제가 대두되면서 즉결처분의 대상이 근무 중 술을 마시는 병사로 확대되었습니다. 물론 병사들의 사정을 잘 아는 지휘관들은 명령을 받아도 이것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런 짓을 했다가는 뒤통수에 총을 맞을 거라는 것을 잘 알았겠지요. 실제로 분노한 병사들이 장교나 공산당원을 살해하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그리고 간혹 부대내의 유태인을 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군요.(;;;;)
탈영은 군기문란이 가져온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전선에서의 탈영은 물론 징집과정에서의 탈주도 빈번했다고 합니다. 징병되어 전선으로 향하는 도중 탈영하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징집병들이 집단으로 도망가기도 했다는 군요. 1919년에는 징병 도중 도망치는 경우가 전체 탈영병의 18~20%였다고 합니다.[von Hagen, 1999, p.69] 게다가 혼란기이다 보니 징집 대상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과 관리가 되지 않아서 한 번 탈영한 병사가 다른 부대에 들어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내전기의 국민당 군대나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군대를 연상시키는 이야기 입니다.(;;;;) 탈영으로 인한 병력 손실은 꽤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1920년 2월과 4월 사이에 붉은군대는 294,000명의 병력을 잃었는데 이 중 전사자와 부상자는 2만명에 불과했습니다. 실제로 탈영병의 규모는 엄청났는데 1919년 6월부터 1920년 6월의 1년간 탈영한 병사의 숫자는 2,638,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수백만명을 징집하면 수백만명이 탈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중 탈영 뒤 자수한 1,531,000명을 제외하더라도 1년에 백만이 넘는 탈영병이 발생했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였습니다.[Figes, 1990, pp.198~328]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실제 전투 부대에서는 탈영율이 낮았다는 것 입니다. 전투부대의 탈영병은 전체 탈영병의 5~7% 수준이었다고 하는군요.[von Hagen, 1999, p.69]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듯 붉은군대의 총 병력 중 전투 병력이 얼마 되지 않으니 딱히 좋다고 하기도 그렇습니다. 특히 강제적으로 징병된 병사들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23사단 202포병여단의 경우 자원한 노동자가 주축을 이뤘던 시기에는 큰 문제없이 싸웠으나 1919년 8월에 손실보충을 위해 농민 징집병들을 배치받은 뒤로는 문제가 심각해 졌습니다. 이후의 전투에서 200명 정도의 농민 징집병들이 여단 정치위원을 사살한 뒤 도망가 버려 결국에는 이 여단이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Figes, 1990, pp.203] 심지어 연대단위로 반란을 일으킨 뒤 도망가는 경우도 발생했습니다.[Lincoln, 1999, p.252] 전선의 상황에 분노한 트로츠키는 탈영병들을 모두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역시 일선의 상황을 잘 아는 지휘관이나 모병 담당자들은 본보기로 몇 명을 처형하는 정도로 그쳤습니다.[von Hagen, 1999, p.72] 어차피 상당수의 탈영병들은 알아서 돌아올 테고 또 아무리 총살을 해 봤자 병사들을 탈영하게 만드는 군대의 문제점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적백내전기 볼셰비키 정부의 병력 동원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부가 유지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군대가 늘어났기 때문에 일선 부대들은 만성적인 보급 부족에 시달렸으며 수백만의 군대를 만들었지만 정작 전투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급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비전투손실은 근대국가의 군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병제를 통해 증강된 붉은군대는 결국 볼셰비키를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아마 좌파 볼셰비키들의 주장대로 혁명적 순수성을 위해 노동자 지원병만으로 내전을 치렀다면 현대사는 조금 다르게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을 것 입니다.


참고문헌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Third Edition), Frank Cass, 1962/2001
Orlando Figes, ‘The Red Army and Mass Mobilization during The Russian Civil War 1918~1920’, Past and Present 129, 1990
Mark von Hagen, Soldiers in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 The Red Army and the Soviet Socialist State, 1917~1930, Cornell University Press, 1999
G. F. Krivosheev(ed), Soviet Casuali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hill, 1993/1997
W. Bruce Lincoln, Red Victory : A History of the Russian Civil War 1918~1921, Da Capo, 1989/1999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 A Social History of the Soviet Army Officer Corps 1918~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Earl F. Ziemke, The Red Army 1918~1941: From Vanguard of World Revolution to US Ally, Frank Cass, 2004

※ 잡담 1. 그러고 보면 러시아/소련군은 항상 신발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것 같습니다.

※ 2. '역사학도'님이 용어의 사용, 개념 문제에 대해서 지적을 하셨습니다. 표현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본문의 일부를 수정했습니다.

2008년 10월 7일 화요일

스탈린 동지의 동종혐오

꽤 재미있는 스탈린 전기의 저자인 라진스키(Edvard Radzinsky)는 스탈린과 히틀러는 서로를 혐오했지만 동시에 또 비슷한 점이 많은 인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니 스탈린과 히틀러의 관계는 동종혐오라고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스탈린의 혐오감은 소련의 언론들에 다소 기묘한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바로 ‘무시’ 였습니다.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는 1933년 1월 30일에 있었던 히틀러의 집권을 1면에 싣지 않고 그 대신 다른 면에 짤막한 단신으로 처리했다. 두 신문은 같은 해 2월 제국의회 방화사건이 일어나자 이것을 대서특필했고 또 히틀러에게 절대권력을 안겨준 3월의 수권법(授權法, Ermächtigungsgesetz) 통과에 대해서는 더 많은 비중을 뒀으나 얼마 있지 않아 이 사건들은 ‘제1차 소연방 집단농장 돌격노동자 대회’의 개최 소식에 밀려 지면에서 사라져버렸다. 프라우다는 독일에서 공산당원에 대해 자행되는 테러에 대해서는 자주 보도했지만 독일의 정치적 상황 변화에 대해서는 몇 달 동안 한 줄의 사설도 내지 않았다. 비록 히틀러의 등장으로 서구의 지식인들 중 일부가 소련을 민주주의의 보루로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소련 자체의 인식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Jeffrey Brooks, 『Thank you, Comrade Stalin! : Soviet Public Culture from Revolution to Co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0, 2001, p.151

물론 1939년의 독소불가침 조약으로 독일과 히틀러에 대한 태도는 갑자기 돌변했지만 오래 지속될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레닌과 트로츠키에 이어 ‘스탈린의 세 번째 스승(라진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패배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아. 그러나 서쪽의 호적수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동방에서 새로운 골칫거리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바로.




毛主席万岁!




네. 스탈린은 마오 주석에게도 히총통과 마찬가지의 혐오감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니 소련의 언론들이 마오 주석을 어떻게 취급했을지는 다들 짐작하시겠지요.

이렇게 중국혁명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었다. - 소련 언론들은 마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관영지인 ‘노보예 브레먀(Новое Время)’는 마오에 대해 단지 혁명의 지도자라고만 언급했을 뿐 그가 제2차 전원회의에서 채택된 여러 계획들의 창시자라는 점과 그가 맑스-레닌주의에 기여한 점을 모두 무시했다. 그리고 뒤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수립되었을 때 ‘노보예 브레먀’의 사설은 마오의 이름 자체를 언급하지 않았다; 전원회의에 대해서는 스탈린의 “천재적인 예언”이 실현된 것이라고 지적했을 뿐이다. 이와 비교했을 때 프라우다의 사설은 마오에 대해 단 한번 언급했으나 그것도 마오의 발언 중 중국혁명의 승리는 소련의 영향과 원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을 인용하기 위한 것 이었다.

Sergei N. Goncharov, John W. Lewis, Xue Litai, 『Uncertain Partners :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46

그렇습니다. 대인배가 갖춰야 할 품성에는 쪼잔함이 필수인 것입니다.

2007년 8월 26일 일요일

부하린이 감옥에서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부하린이 스탈린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글입니다.

자신의 최후가 다가오기 때문인지 편지의 곳곳에서 불안한 심리가 표출되고 있으며 또 성경의 일화를 언급하는 등 공산주의자 답지 않은 모습도 조금씩 보입니다. 특히 감옥에서 환각을 본다는 내용을 읽을 때는 한때 최고의 이론가이던 사람의 몰락에 비참함 마저 느껴집니다. 편지에는 삶을 체념했다고 적고 있는데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스탈린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으로 보입니다.(제가 보기에도 목숨을 체념했다기 보다는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애쓰는 것 같아 안스럽습니다.)

스탈린 동지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이 편지를 읽지 못하도록 하시오.

스탈린 동지께

요시프 비사리오노비치(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아마도 이것은 내가 죽기 전에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습니다. 지금 나는 죄수의 신분이기 때문에 이 편지를 공문서 형식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이 편지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 입니다. 이 편지의 존재 여부는 오로지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 단계, 아마도 내 삶의 최종 단계에 도달했을지 모릅니다.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내가 과연 이것을 써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감옥의) 정적은 나를 오싹하게 만들며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감정을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내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그리고 내가 아직 글을 쓸 수 있을 때, 내가 눈을 감기 전에, 그리고 아직 나의 두뇌가 기능을 하고 있는 지금 제 죽음을 동지께 미리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어떠한 오해도 피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이 점들을 밝히고 싶습니다.; a) 나는 내가 고백한 혐의를 부인하지 않을 것 입니다 b)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 편지를 가지고 동지가 내 문제를 어떻게 처리 하실지에 대해 영향을 미치려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순전히 동지와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것 입니다. 지금 나는 동지께 이 문제를 반드시 알려드려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 때문에 이 편지를 쓰기 전에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1) 나는 지금 벗어날 수 없는 벼랑의 끝에 몰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이므로 솔직히 이야기 하겠습니다. 나는 수사과정에서 밝혔듯 어떠한 범죄와도 관련이 없는 무죄입니다.

2)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생각해 보더라도 회의에서 이미 밝혔듯 다음과 같은 사실 외에는 더 말씀 드릴 것은 없습니다.

a) 나는 예전에 어떤 사람이 누군가 무슨 소리를 질렀다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아마 쿠즈민(Кузьмин)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쿠즈민이 한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들은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 합니다.

b) 아이헨발드(Айхенвальд)는 예전에 나와 함께 시내를 걸으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회의, 또는 회의 비슷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 대해 안스럽게 생각해서 아이헨발드와 이야기 한 사실에 대해 숨겼습니다.

c) 나는 1932년도에 내가 당에서 다시 실권을 잡을 것이라고 믿고 나를 따르던 나의 추종자들과의 “표리부동한” 태도에 대해서 유죄를 시인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추종자들을 당에서 유리시켰습니다. 이 점은 내가 말한 그대로 입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다른 혐의들은 모두 허구이거나 설사 그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나 자신은 전혀 알지 못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전체회의에서 이야기 한 것은 모두 진실이며 거짓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 수년간 나는 당의 노선을 진심으로, 그리고 충실히 따랐으며 동지를 따르고 존경했습니다.

3) 나는 제게 씌여진 혐의나 “다른 이들의” 자백을 시인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무장해제 당했다”는 허위 사실을 밝힐 수 없었을 것 입니다.

4) 이와 관계없는 것과 3번과는 별도로, 나는 우리의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번 숙청에는 거대하고 엄청난 정치적 바탕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a) 전쟁 이전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으며, b) 민주화로의 이행 과정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숙청에는 1) 범죄혐의자 2)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 3) 잠재적으로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 또한 이 세 가지의 범주 중 하나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부는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 있으며 일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고 마지막으로 두 번째 집단과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일부가 있습니다.
어찌됐던 이제 인민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고 상호간의 불신은 지속적으로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이것은 나의 경험을 통해 판단한 것입니다. 나는 내 명예를 훼손한 라덱()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으며 결국 그의 뒤를 따르게 됐습니다…) 이 방식을 통해 지도부는 자체에 대한 권위를 확립했습니다.

아무쪼록 내가 하는 말이 동지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바보가 아닙니다. 나는 이번 숙청에 어떤 계획, 어떤 의도, 그리고 어떤 이해관계가 걸려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과 나와 가깝던 사람들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스탈린 동지에게 달려있다는 점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극심한 고뇌에 시달리고 있으며 심각한 역설적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5) 만약 내가 동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 입니다. 하긴, 그게 어쨌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만약 동지의 의도가 그런 것이라면 그렇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나의 마음은 동지께서 내가 유죄라는 점을 믿고, 또 동지가 진심으로 내가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려 했다고 믿고 있을 것 같아 답답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일까요? 나 자신이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을 당으로부터 축출당하게 만들었다, 즉 나 자신이 이런 행동이 범죄라는 것을 알고도 그대로 했다는 것 입니까? 만약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 될 수 없을 것 입니다. 지금 나의 머리는 이런 혼란으로 어지럽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외침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냥 내 머리를 벽에 들이받아 죽어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 때문에 또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의 빌미를 만들겠지요.

도데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도데체 내가 뭘 하면 좋겠습니까?

6)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적개심을 고취하지 않았고 나 또한 누구에게 원망을 품지 않았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습니다. 나는 (당의 노선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보복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동지께서 진심으로 알고 싶을 것 같아 이야기 하는데, 내가 답답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신이 과거에 있었던 일 중 하나를 까맣게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1928년 여름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내가 동지의 옆에 앉아 있을 때 동지는 내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동지는 내가 왜 동지를 나의 친구로 생각하는지 아시오? 그건 동지는 음모 같은 것을 꾸미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소?” 그래서 나는 “그렇지요. 나는 음모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나는 카메네프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동지께서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지만 카메네프와의 관계는 나에게 있어서 마치 유대인들의 원죄의식과도 같았습니다. 아. 이런. 이게 무슨 유치한 생각이란 말입니까! 이게 무슨 바보짓이란 말인지! 결국 카메네프와의 친분 때문에 지금 나의 명예와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코바.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지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지금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나의 처지를 더욱 더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해야겠습니다. 내가 당 지도부나 나를 수사한 수사관이건 간에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나는 나의 주변이 모두 암흑천지 같이 보이고 어둠이 감싼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심한 처벌을 받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지의 용서를 구하는 바입니다.

7) 내가 환상에 시달리고 있을 때, 동지를 여러 차례 보았고 한번은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 스탈린의 두 번째 아내)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 환상 속에서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도데체 당신들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요,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이오시프에게 말해서 당신을 빼내겠어요.” 이 환상이 너무나 사실 같아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동지께 제발 저를 풀어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지금 저의 정신은 현실과 망상이 뒤섞여 있습니다.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는 제가 동지에게 어떤 악독한 음모도 꾸미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 입니다. 결국 나의 피폐한 정신이 이런 환상을 만들어 냈겠지요. 나는 동지와 수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 이런. 만약 나의 마음을 보여주는 기계가 있다면 동지에게 나의 영혼을 모두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동지께서 내가 스테츠키(Стецки)나 탈(Тал) 같은 사람과 달리 나의 정신과 육체를 모두 동지께 바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동지께서는 나를 용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게는 아브라함이 (이삭에게서) 칼을 거두도록 했던 것 같은 천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나의 끔찍한 운명은 이제 결정되었습니다.

8) 마지막으로, 나의 마지막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a)사실 나는 재판을 받지 않고 그냥 목숨을 끊어버릴 기회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나는 그저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을 뿐입니다. 동지께서도 나의 성품을 잘 알 것입니다. 나는 당이나 소연방의 적이 아니며 나의 힘이 닫는 한도 내에서 당의 의도에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서 나의 힘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나는 많은 고뇌를 했습니다. 나는 부끄러움이나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당신 앞에 무릎 꿇고 간청합니다. 제발 나를 재판에 회부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이건 불가능하겠지요. 만약 가능하다면 내가 재판 이전에 죽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b) 만약 내가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면, 동지께서 먼저 이 사실을 알려주셨으면 하고 또 진심으로 총살은 피하도록 부탁 드립니다. 나는 총살 대신 독약으로 목숨을 끊고 싶습니다. (모르핀을 맞고 영원히 잠들고 싶습니다.) 특히 이점은 내게 중요합니다. 동지께서 내게 자비로운 행위를 베풀도록 부탁 드리려면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할 지 도무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정치적으로 어떤 표현을 사용할지는 중요한 일이 아닐 것 이고 또 어느 누구도 이 일에 대해 알지 못 할 것 입니다.
하지만 나의 마지막 시간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나에게 동정을 베풀어 주십시오. 동지께서도 나를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동지께서도 나와 같이 하시겠지요. 결정을 내리시면 알려주십시오. 나는 충분히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끔씩 죽음의 공포를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혼란을 느낄 때 마다 내가 정신적으로 고갈된 상태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니 만약 사형이 선고된다면 내게 치사량 만큼의 모르핀을 주십시오. 진심으로 간청합니다.

c) 그리고 나의 아내(Анюта, 부하린의 두 번째 아내)와 아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단, 내 딸은 만나고 싶지 안습니다. 그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함을 느낍니다. 나의 죽음은 내 딸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울 것 입니다. 그리고 나디아(부하린의 첫 번째 아내)와 제 아버지 역시 고통스러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뉴타는 아직 젊으니 충분히 충격을 이겨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그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될 수 있으면) 재판 이전에 아뉴타를 만났으면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만약 나의 가족들이 재판에서 나의 (조작된) 진술을 듣는다면 충격을 받아 자살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에 몇 마디 이야기를 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려 합니다.

d) 만약 나의 예상과 반대로 내가 석방된다면 (나의 아내와 먼저 상의하는 것이 순리이겠지만) 다음과 같은 사안을 부탁 드리고자 합니다.
- 미국에 몇 년 정도 망명을 하고 싶습니다. 나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재판을 받는 대신 정치 활동을 하겠습니다. 즉 트로츠키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고 혼란에 빠진 지식계층들의 마음을 사로 잡겠습니다. 또 나는 반 트로츠키 주의자가 되어 트로츠키를 타도하는데 진심으로 전력을 다 하겠습니다. 동지께서는 나에게 비밀경찰 한 명을 감시 목적으로 붙이고 그래도 미덥지 않으시다면 나의 아내를 내가 트로츠키와 그 일당에게 큰 타격을 입힐 때 까지, 즉 여섯달 정도 본국에 두고 감시하도록 하십시오.
-만약 그래도 나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으시면 뻬초라(Печора)나 콜릐마(Колыма)의 수용소에 25년 정도 유배를 보내십시오. 나는 유배지에서 대학과 지역 문화 박물관, 연구소, 그리고 미술관, 민속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언론사를 세우겠습니다. 즉 나와 나의 가족은 내가 죽을 때 까지 그곳에서 문화 사업을 전개할 것 입니다. 어떤 경우에든 나는 온 힘을 다하여 일을 할 것 입니다. 그러나 사실 나는 2월 전체회의에서 있었던 사안을 고려하면 내가 석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재판이 언제라도 열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게 나의 마지막 부탁입니다.(하나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의 철학 원고들은 내가 죽더라도 없애지 말아 주십시오. 매우 가치있는 저작들이 있습니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당신은 당신에게 충실했던 가장 유능한 측근을 하나 잃게 되었습니다. 나는 마르크스가 알렉산드르 1세는 바클레이 드 톨리(Михаи́л Богда́нович Баркла́й-де-То́лли)를 반역 혐의로 의심해서 결국 가장 유능한 조력자를 잃었다고 평했던 글을 읽었었는데 지금 나의 상황이 마치 바클레이 드 톨리와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그렇지만 나는 눈물을 거두고 이 세상과 이별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동지와 당, 그리고 당의 뜻에 대해서는 무한한 사랑 말고는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나는 동지에게 모든 것을 다 적었습니다. 내 편지를 꼼꼼하게 읽어 주십시오. 지금 나의 상황이 당장 내일이라고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편지는 미리 적었습니다. 신경이 쇠약해 졌기 때문에 지금은 손가락을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무감각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두통과 눈물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씁니다. 코바, 나의 양심은 당신 앞에 떳떳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당신에게 용서를 구합니다.(오직 마음속으로만 표현해 주십시오) 이런 이유로 나는 나의 마음속에 당신을 품고자 합니다. 영원한 이별이로군요. 이 불쌍한 사람을 좋게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부하린 1937년 12월 10일

J.Arch Getty and Oleg v. Naumov(ed), The Road to Terror : Stalin and the Self-Destruction of the Bolsheviks, 1932~1939, (Yale University Press, 1999), pp.556~560

추가 1. 이 편지의 러시아어판은 이 사이트에 있습니다.

추가 2. 이 편지 말고도 한국에 번역된 부하란 : 인간, 학자 그리고 혁명가라는 책에는 부하린이 자신의 두 번째 아내에게 쓴 편지가 부록으로 실려 있습니다. 이 두 번째 편지는 스탈린에게 쓴 편지에 비해 조금 더 차분한 마음에서 쓴 것 같아 보이며 또 상당히 슬픕니다.

2007년 1월 14일 일요일

붉은군대의 간부 계급체계 : 1919~1941

1. 적백내전기~1935년

붉은군대의 군 계급체계는 적백내전과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개편됐습니다.

레닌과 많은 혁명가들은 전문적인 장교집단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인민위원이었던 트로츠키는 붉은군대를 차별 없는 “사회주의”적인 군대로 만드는데 주력했습니다. 역시 차별의 대표적인 상징은 “계급”이 될 수 밖에 없었지요.

그 결과 붉은군대는 기존의 계급제도와 장교(Офицер)라는 명칭을 폐지하는 대신 직위별 호칭과 “지휘관(Командир)”이라는 명칭을 도입했습니다. 직위별 호칭 제도는 부사관과 장교계급의 상징성을 없애는 것이 목표였고 혁명 이후 도입돼 1924년에 그 기틀이 잡혔습니다.

직위별 호칭 제도는 군 간부의 호칭을 계급대신 “중대지휘관”, “연대지휘관”등 직위에 따라 불렀습니다. 물론 제국 시절부터 군대물을 먹은 장교들은 여기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지요.

혁명 이후의 간부 계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분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ения)
소대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중대선임부사관(Старшина роты)
소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중대지휘관(Командир роты)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
연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полка)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
사단지휘관(Начальник дивизии)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армией)
전선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фронтом)

보시면 군단지휘관이 빠져있는데 내전기의 야전군 규모는 1차 대전 당시의 군단 수준을 약간 밑도는 수준이었습니다. 마치 독소전쟁 초반인 1941년 말부터 1942년 말 처럼 야전군 사령부가 직접 사단을 지휘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군단지휘관이라는 계급이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내전이 끝난 뒤 1924년에 정립된 직위별 호칭 제도는 군대의 직위를 1등급부터 14등급까지 구분했는데 다음과 같았습니다.

초급지휘관
1등급 : 분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ения) / 반지휘관(Командир звена)
2등급 : 소대 부(副)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 중대 선임부사관(Старшина роты)

중급지휘관
3등급 : 소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4등급 : 중대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роты) / 독립소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ьного взвода)
5등급 : 중대지휘관(Командир роты)
6등급 : 대대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 / 독립중대지휘관(Командир otdel’noy roty)

고급지휘관
7등급 :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 약칭 Комбат)
8등급 : 연대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а полка) / 독립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ьного батальона)
9등급 : 연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полка, 약칭 Компол)

상급지휘관
10등급 : 사단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дивизии) /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 약칭 Комбриг)
11등급 : 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дивизии, 약칭 Комдив)
12등급 : 군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корпуса, 약칭 Комкор)
13등급 : 야전군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ующего армией) / 군관구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ующего округа) / 전선군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ующего фронтом)
14등급 :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армией, 약칭 Комарм) / 군관구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округом) / 전선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фронтом)

2. 1935년~1941년

소련은 1930년대 중반까지 적백내전기 트로츠키가 확립한 체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군 병력이 증가하고 또 전문적인 장교집단의 필요성이 증대되면서 적백내전 시기에 확립된 제도로는 계속해서 팽창하는 군대를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 졌습니다. ‘평등한’ 계급 내에서 직위만 가지고 지휘를 한다는 게 생각 만큼 비효율 적이었고 가뜩이나 생활수준도 열악한 장교들에게 권위 없이 책임만 지워놓고 있으니 잘 돌아가는게 좀 비정상 이었겠지요.
마침내 국방인민위원회는 1935년 9월 22일 직위별 호칭제도를 폐지하고 계급 제도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정치국은 장군 계급에 대해서는 직위별 호칭제도를 계속 유지하도록 했고 특수 병과의 경우 직위별 호칭제도를 계속 유지해 1935년의 계급제도는 뭔가 어정쩡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5년 도입된 붉은 군대의 장교 계급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소위(Лейтенант)
중위(Старший лейтенант)
대위(Капитан,)
소령(Майор)
대령(Полковник)
여단지휘관(Комбриг)
사단지휘관(Комдив)
군단지휘관(Комкор)
2급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арм 2-го ранга)
1급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арм 1-го ранга)
소비에트연방원수(Маршал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1935년 개편안에 따른 특수 병과의 계급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소위급
: 2급 군기술관(Воентехник 2-го ранга)
2급 기술-보급관(Техник-интендант 2-го ранга)
보조군의관(Военфельдшер)
보조수의관(Военветфельдшер)
하급군법무관(Младший военный юрист)

중위급
: 1급 군기술관(Воентехник 1-го ранга)
1급 기술-보급관(Техник-интендант 1-го ранга)
상급보조군의관(Старший военфельдшер)
상급보조수의관(Старший военветфельдшер)
군법무관(Военный юрист)

대위급
: 3급 공병관(Военинженер 3-го ранга)
3급 보급관(Интендант 3-го ранга)
군의관(Военврач)
수의관(Военветврач)
상급군법무관(Старший военюрист)

소령급
: 2급 공병관(Военинженер 2-го ранга)
2급 보급관(Интендант 2-го ранга)
2급 군의관(Военврач 2-го ранга)
2급 수의관(Военветврач 2-го ранга)
2급 군법무관(Военный юрист 2-го ранга)

대령급
: 1급 공병관(Военинженер 1-го ранга)
1급 보급관(Интендант 1-го ранга)
1급 군의관(Военврач 1-го ранга)
1급 수의관(Военветврач 1-го ранга)
1급 군법무관(военный юрист 1-го ранга)

여단지휘관급
: 여단공병지휘관(Бригинженер)
여단군수관(Бригинтендант)
여단군의관(Бригнврач)
여단수의관(Бригветврач)
여단법무관(Бригвоенюрист)

사단지휘관급
: 사단공병지휘관(Дивинженер)
사단군수관(Дивинтендант)
사단군의관(Дивврач)
사단수의관(Дивветрач)
사단법무관(Диввоенюрист)

군단지휘관급
: 군단공병지휘관(Коринженер)
군단군수관(Коринтендант)
군단군의관(Корврач)
군단수의관(Корветврач)
군단법무관(Корвоенюрист)

2급 야전군지휘관급
: 야전군공병지휘관(Арминженер)
야전군군수참모(Арминтендант)
야전군군의관(Армврач)
야전군수의관(Армветврач)
야전군법무관(Армвоенюрист)

한편, 1935년 이후의 군 정치위원 계급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소위급 : 하급군정치원(Младший политрук)
중위급 : 군정치원(Политрук)
대위급 : 상급군정치원(Старший политрук)
소령급 : 대대정치위원(Батальонный комиссар)
대령급 : 연대정치위원(Полковой комиссар)
여단지휘관급 : 여단정치위원(Бригадный комиссар)
사단지휘관급 : 사단정치위원(Дивизионный комиссар)
군단지휘관급 : 군단정치위원(Корпусной комиссар)
2급 야전군지휘관급 : 2급 야전군정치위원(Армейский комиссар 2-го ранга)
1급 야전군지휘관급 : 1급 야전군정치위원(Армейский комиссар 1-го ранга)

새로 개편된 계급체계에는 소비에트연방원수 계급이 신설됐는데 부존늬, 예고로프, 보로실로프, 블뤼헤르, 투하체프스키가 1935년 11월 20일자로 소연방원수로 임명됐습니다.

1937년 8월 20일에는 소위의 바로 아래에 준위(Младший лейтенант), 준기술관(Младший воентехник) 계급이 신설 됐습니다.

계급제도는 다시 1940년 5월 7일 개편됩니다. 이 개편의 특징은 마침내 붉은군대에 “장군”과 “제독”의 호칭이 다시 도입됐다는 것이었습니다. 1940년 새로 도입된 장군 호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여단지휘관 -> 해당 계급 없음
사단지휘관 -> 소장(Генерал-майор)
군단지휘관 -> 중장(Генерал-лейтенант)
2급 야전군지휘관 -> 상장(Генерал-полковник)
1급 야전군지휘관 -> 대장(Генерал армии)

그리고 같은 해 11월 2일에는 중령(Подполковник) 계급과 이에 준하는 상급대대정치위원(Старший батальонный комиссар) 계급이 새로 신설됐으며 부사관 계급의 직위별 호칭이 폐지됐습니다. 이렇게 1940년에 확립된 계급 체계는 전쟁 기간 중 부분적인 변화를 제외하면 큰 변동 없이 유지됐습니다.

1940년 장군(Генерал) 호칭이 도입됨에 따라 직위별 호칭제도는 폐지됐습니다. 그렇지만 20년 가까이 계속된 직위별 호칭제도의 잔재는 1945년 종전 시 까지도 계속 남아 고참 병사들의 경우 장교들을 기존의 직위별 호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1941년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한 뒤 계급체계의 변화 중 특기할 만한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942년에는 장교 호칭이 통일 되면서 특수병과에 남아있던 직위별 호칭이 폐지됐으며 같은해 10월에는 이중지휘체계가 폐지되면서 정치위원의 계급이 없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장교”라는 호칭이 1943년부터 공식적으로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서 트로츠키가 구상했던 “사회주의적 군대”의 잔재는 완전히 청산되고 소련의 장교단은 전문적인 군인집단으로, 사회의 엘리트 층을 구성하게 됩니다.

2007년 1월 8일 월요일

한국의 모병제 논의에 대한 짧은 생각

노무현 대통령의 “군대가서 썩는다”는 발언은 지난 연말 최고의 히트작 이었습니다. 현직 대한민국 최고의 강태공 노무현 대통령답게 이 발언을 통해 수많은 월척을 낚았지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구조적으로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 한국의 “국민개병제”에 대한 대안으로 “모병제”가 꾸준히 논의되고 있는 와중에서 튀어 나왔다는 점에서 더 흥미 있었습니다.

한국의 “모병제”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모병제에 대해 더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진보적”인 사람들이 내세우는 논의는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의 논의와 유사하다는 점이지요.
닉슨의 참모 중 하나였던 밀튼 프리드먼은 시장경제의 원리를 가지고 징병제를 공격했던 대표적 인사입니다. 프리드먼은 “국민개병제”로 만들어진 군대는 노예의 군대라고 조소하기도 했습니다.(이건 프리드먼이 국민 개병제의 정치적 의미를 모르거나 알면서도 무시했다는 이야기죠)
당시 모병제에 찬성하는 시장주의자들은 모병제를 실시하더라도 육군이 필요로 하는 병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으며 군대의 효율도 보장될 것이라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모병제를 실시한 직후부터 심각한 인건비 상승과 효율 저하에 시달렸습니다. 1968년 미군은 320만명의 병력에 320억달러(국방비의 42%)의 인건비를 지출했지만 징병제 폐지 2년차인 1974년에는 병력 220만에 439억달러(국방비의 56%)의 인건비를 지출했습니다. 직업군인의 증가로 이에 필요한 부대비용(특히 가족 부양에 필요한)이 급증했고 전반적인 급여가 증가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정치적 논의가 활발한 유럽의 경우는 “진보” 또는 “좌파”로 자처하는 인사들이 “국민개병제”를 옹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J. Erickson의 기념비적인 저작, The Soviet High Command는 혁명 초기 소련에서 전개된 국방제도의 골격에 대한 공산당내 좌우파의 논의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소련의 공산당 좌파들은 9차 전당대회에서 “전문화된 군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에 대해 군사력이 민중으로부터 괴리될 경우 그 군사력은 민중을 압제하는 도구가 된다고 주장하며 민병대 체제를 소련 군사력의 근간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진보적 지식인들이 모병제나 전문적인 군인 집단에 거부감을 가졌던 이유는 19세기 초 까지도 용병으로 이뤄진 직업군대가 민중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던 유럽의 역사에 기인합니다. V. G. Kiernan이 여러 사례를 들어 잘 지적했듯 절대 왕정시기 주로 외국인으로 만들어진 용병군대는 국민을 억압하는 도구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고용주인 부르봉 왕가에 충성하며 시민들을 상대로 최후까지 항전한 스위스 용병들의 이야기는 슬프기도 하지만 역으로 뒤집어보면 용병군대가 얼마나 절대권력의 이익에 충실히 복무하면서 국민을 짓밟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절대왕정의 성립과정에서 중앙 권력에 의한 무력 장악이 중요한 과정이었다는 것은 정치사가들의 공통적인 견해이죠.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런 역사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개병제에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장 경제 원리에 따라 모병제를 도입한 미국의 군대가 과연 모든 조건에서 잘 돌아가고 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닉슨은 선거운동 기간에 모병제가 사실상의 용병제라는 국민개병제 옹호자들의 주장에 대해 미국의 모병제는 미국 시민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현재 미국은 모병율 저하로 시민권이 없는 영주권자까지 모병 범위를 확대하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병사 일인당 소요되는 인건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비용 대 효용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지요. 미국은 꾸준히 모병에 따른 인건비 증가와 병력 확충의 어려움에 따른 전쟁 수행능력 부족을 겪고 있습니다.
모병제로 움직이는 이라크의 미군은 징병제로 움직였던 40년 전 베트남의 미군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전 하에서 어려움에 봉착해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교리와 전술의 문제입니다. 모병제로 만들어지는 오늘날의 미군은 분명히 강력하고 매우 우수한 군대입니다. 하지만 이라크에서는 여전히 40년 전 징병제 시절과 마찬가지의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모병제가 만능이 아님을 직접 보여주고 있는 것 입니다. 모병제로 만들어진 군대도 적절한 교리와 전술이 없다면 국민개병제로 이뤄진 군대만도 못 한 것이 현실입니다. 즉 뒤집어 말하면 합리적으로 운영 되고 적절한 교리와 전술이 있다면 국민개병제로 만들어진 군대도 충분히 잘 움직일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지금 한국의 국민개병제가 수많은 문제점을 노출 시키고 있고 비능률적이라고 혹평 받는 것은 운영 방식이 잘못된 것이지 국민개병제가 모병제보다 나쁜 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은 국민개병제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굳이 제가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많은 분들이 군대를 다녀오셨기 때문에 그 폐해를 경험적으로 잘 아실 것 입니다. 하지만 폐해가 많다고 하더라도 모병제 말고도 현재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은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칭 진보들은 모병제냐 징병제냐의 단순한 이분법적 논지만 전개하고 있습니다. 답답할 따름입니다.

사족 하나 더. 모병제로 이뤄진 군대가 국민개병제로 이뤄진 군대보다 더 우수하다면 극도로 우수한 전투력을 보여줬던 2차대전기의 독일 국방군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핸슨 볼드윈 같은 초기의 미국 모병제 지지자들은 국민개병제의 비효율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독일의 “전격전”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전격전”을 수행한 독일의 군대는 국민개병제로 만들어진 군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웃기는 일 이지요.

국내에서 진보로 자처하는 인사들의 모병제 논의가 단순히 겉멋만 잔뜩 든 언어유희에 불과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저 혼자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칭 진보들이 시장논리를 만병통치약인 양 전면에 내세우고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군사력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무관심 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물론 시장의 논리도 중요하며 많은 경우 사회에 유익한 작용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2006년 8월 31일 목요일

[美利堅史] - 露西亞國王 스탈린 世家

노서아 국왕 스탈린은 성은 쥬가시빌리, 이름은 요시프다. 그의 어머니 예카테리나는 노비 출신이라 전한다. 스탈린이 자라자 예카테리나는 아들을 사찰에 집어 넣었다. 이때 노서아에는 마르크스 귀신을 섬기는 사교가 성행했다. 마르크스를 섬기는 무리들은 붉은색을 숭상했기 때문에 홍건적이라고도 한다. 많은 무뢰배들이 마르크스를 섬겼는데 스탈린도 여기에 현혹돼 홍건적이 됐다.

테오도어 루즈벨트 5년, 스탈린이 무리들과 함께 노략질을 시작했는데 이로서 홍건적들 사이에 이름을 떨치게 됐다.
태프트 4년, 마침내 스탈린이 여러 도적들의 추대를 받아 장군이 됐다. 이때 홍건적의 수괴 레닌은 대장군을 칭하며 무리를 모았는데 그 수효가 수만이었다.

윌슨 5년, 노서아 국왕 니콜라이 2세가 부덕해 왕위에서 물러나니 케렌스키가 섭정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이때 노서아는 덕국과 전쟁을 치르며 연전 연패 하니 민심이 자못 흉흉하였다.
괴수 레닌이 때를 틈타 도적의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키니 섭정 케렌스키는 크게 낭패하여 도주하였다. 레닌이 스스로 노서아 왕을 칭하고 국호를 소련이라 하였다.

이때 뜻있는 노서아의 장수들이 앞다투어 홍건적을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켰다.
이 중 대장군 데니킨과 수군 제독 콜착의 군세가 가장 왕성했다. 처음에 관군의 기세가 등등하여 곳곳에서 도적들이 대패했으나 레닌이 트로츠키를 대원수에 임명해 기세를 올리니 이때부터 관군의 예기가 꺾였다.
이때 스탈린도 장군이 되어 관군과 싸웠다. 스탈린이 거느린 군사가 가는 곳 마다 승리하니 그 명성이 거듭 높아졌다.

이때 파란(波蘭)이 군사를 일으키니 순식간에 노서아의 서쪽 변경 수천리가 파란 군사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대장군 투하체프스키와 스탈린에게 군사 수십만을 주어 파란을 치게하니 파란 군대가 일패도지하였다. 이때 영길리와 불란서는 홍건적의 기세가 왕성함을 우려해 군사를 일으키려 하니 레닌은 이를 우려해 파란을 치는 군대를 거두었다.

쿨리지 2년, 레닌이 붕어(崩御)하였다. 이에 트로츠키와 부하린 등 여러 괴수들이 서로 앞다퉈 왕위를 노렸다.
홍건적들이 왕을 추대하는 법도는 자못 괴이하다. 먼저 막사과(莫斯科)의 크렘린 궁에 각지의 두령들을 모으고 왕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 서로 언변을 겨루는데 이 중 가장 달변인 자를 왕으로 추대한다고 한다.
이때 트로츠키는 자신의 학식을 뽐내며 스탈린이 무뢰배 출신이라 하여 심히 업신여겼다.
그러나 스탈린과 여러 차례 언쟁을 겨루매 매번 논파 당하였다.

이에 여러 무리가 스탈린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스탈린은 국왕이 되자 흉포한 본색을 드러냈다. 스스로 마르크스, 레닌에 이은 미륵의 현신이라 칭하고 여러 경전을 저술해 두령들 앞에서 강론했는데 그 말이 요망하여 모두 옳은 말이 아니었다.
묵서가에서 숨어살던 트로츠키가 스탈린이 지은 경전을 두고 평하여 “모두 사특하고 괴이한 설이다”라고 하니 스탈린이 이를 듣고 노하여 곡괭이로 쳐 죽였다.

그리고 산업을 일으킨다 하여 농민들을 핍박하니 굶어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또 사나운 개 키우기를 좋아하여 그 수가 수천이었는데 그 중 가장 아끼는 개를 “예조프”라 하였다. 예조프의 성질이 사나워 사람을 여럿 물어 죽였으나 오히려 스탈린은 이를 보고 즐거워 하였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5년, 스탈린이 대원수 투하체프스키와 여러 장군들을 참살하였다.
투하체프스키는 일찍이 명장으로 이름이 높아 각국의 무인들이 그 이름을 사모하였다. 하루는 스탈린이 투하체프스키를 잡아들여 죄를 추궁했다.

“네가 덕국과 내통하고 있다니 어찌된 일인가?”

투하체프스키가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어찌 소장이 덕국과 내통하겠사옵니까?”

“짐이 관심법으로 보았노라”

이리하여 투하체프스키와 여러 장수들이 예조프에게 물려 죽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7년, 스탈린이 예조프를 솥에 삶고 더 사나운 개를 들였다. 그 이름을 베리야라고 지으니 사람들이 예조프 보다 더 두려워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9년, 덕국왕 히틀러가 대군을 일으켜 노서아를 쳤다. 노서아의 이름 높은 장수들이 이미 예조프에 물려 죽은지라 군대를 제대로 지휘할 자가 없었다. 덕국 군대가 노서아의 강역 수천리를 휩쓸고 노서아 군사 수백만을 무찌르니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11년, 대장군 바실레프스키가 스탈린그라드에서 덕국 군사를 크게 무찌르니 비로서 덕국의 예기가 꺾였다.

트루먼 1년, 대원수 주코프가 덕국의 왕성 백림을 함락하니 덕국왕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 천자가 친히 포츠담 성에서 스탈린의 노고를 치하하고 동구라파를 식읍으로 하사했다. 천자가 일본국을 토벌할 것을 명하니 스탈린이 명을 받들어 일본국을 토벌했다. 다시 천자가 스탈린에게 작위를 거듭 내리고 한국의 절반을 봉읍으로 하사했다.

스탈린이 덕국을 정벌하고 동구라파를 식읍으로 받으니 교만한 마음이 더하여 역심을 품었다.
소련의 군사가 수백만이요 전차가 수만대에 달하니 서구라파의 여러 왕들이 두려워 하니 천자가 나토라는 관청을 두고 구라파에 천병을 보내어 국경을 순찰하게 하였다.
스탈린이 이때부터 번번히 천명을 거스르며 천자의 예를 행하니 화성돈의 뜻 있는 신료들은 이를 불안하게 여겼다.

아이젠하워 1년, 스탈린이 붕어하였다. 이에 베리야가 달을 바라보며 슬피 짖었다.

2006년 4월 25일 화요일

두개의 군대, 두개의 혁명(재탕+약간 수정)

정치는 현실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래서 그런지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도 정권을 잡으면 그들이 뒤엎은 세력들 보다 더 정치적이 된다. 하기사. 대한민국의 얼치기 혁명가들은 이상도 없는 주제에 현실 감각도 없지...
이상주의자들이 가장 현실과 타협을 잘 하게 되는 것이 정치고 정치 중에서도 군사문제가 최고인 듯 싶다.
그 사례를 가장 잘 보여주는건 아마도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오늘날 책을 통해서 접하는 절대 왕정시기 일반 사병의 군대 생활은 안락하고 좋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던 것 같다. 기본적인 의식주 자체가 형편 없었고 당시의 보병 전술 상 엄한 군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군대내에서 구타도 공식적으로 장려 되었다고 하니까. 1764년에 베를린을 방문했던 보스웰(James Boswell)이란 영국인은 한 프로이센 보병연대의 훈련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유럽 최고의 군대라는 프로이센 군대의 훈련을 참관한 보스웰의 소감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공원에서 한 프로이센군 연대가 훈련하는 것을 구경했다. 병사들은 매우 겁에 질려있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훈련 중 조금만 실수하더라도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

평상시의 생활이 이렇게 가혹하니 전쟁 때는 오죽 했을까. 7년 전쟁 다시 프로이센군의 병력 손실 중에서 약 8만 명이 탈영으로 인한 손실이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프로이센군대의 탈영에 대해 연구한 단행본도 한 권 있는 모양이다.

이러던 와중에 프랑스 혁명이 터졌다. 혁명으로 멋진 신세계로 변한 프랑스에서는 군대까지 멋진 신세계가 돼 버렸다. 평소 군생활이 비참했으니 이참에 한번 갈아보자!! 하는 게 정상이긴 하겠지만 그게 좀 정도가 지나쳤던 것 같다. 혁명 덕택에 대부분 귀족 출신인 장교들의 권위는 땅바닥에 처 박히게 됐다.
혁명으로 귀족들의 권위를 지탱해주던 사회 구조가 통째로 붕괴되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1788년 당시 9,478명이던 장교 중 약 6,000명 정도가 1791년에서 1792년 사이에 군대를 그만 두고 외국으로 도망치거나 숨어 버렸다고 한다.

그 덕택에 프랑스 군대는 매우~ 매우~ 자율적인 군대가 되어 버렸다. 이제 장교를 병사들의 투표로 선출하고 갈아 치워 버렸으니 군대꼴이 제대로 돌아갈리가 없었다. 빠 드 깔레 연대 1 대대는 고다르(Godart)라는 부사관을 대대장으로 선출했는데 고다르가 훈련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당장 들고 일어나서 고다르를 교수형에 처하려 했다고 한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다행히도 고다르는 목숨을 건져서 나폴레옹이 황제가 됐을 때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자율적으로 험악하게 나가니 차라리 탈영을 하는 병사는 양반축에 들어갔다. 물론 탈영도 너무 많이 하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혁명 직전에 182,000명이었던 정규군은 1792년에는 11만 명으로 격감했다. 많은 병사들은 귀찮게 자율적으로 부대를 운영하는 것 보다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쪽을 더 선호했던 모양이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어쨌든 자유를 외치던 혁명가들도 혁명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군대의 규율을 바로 잡아야 했다. 결국 자유를 외치던 혁명가들은 체제 유지를 위해서 군사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그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잘 잡힌 규율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1799년에 나폴레옹이 시작한 군대 개혁이란 솔직히 말해서 구체제하의 엄격한 규율을 다시 도입하는 것 이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헌병이야 말로 군대의 규율을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 했다고 한다. 결국 혁명으로 인한 자유의 열기는 최소한 군대에서는 완전히 사그러 들었다.

사회는 자유로울 수 있어도 군대는 결코 그럴 수가 없는 조직이니.

그리고 대략 130년 뒤에 역사는 비슷하게 반복 됐다.

1917년, 이번에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 군대도 구타라면 유럽에서 손꼽히는 국가였다. 요즘도 러시아 군대의 구타는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하는걸 보면 러시아 군대는 별로 진보한 것 같진 않지만. 군인에 대한 처우도 좋지 않아서 하급 장교들은 기차의 2등 칸을 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예산 절감을 위해서 하급 장교들에게는 3등칸 요금만 지급했다나?

러시아는 표면상으로는 19세기 중반의 농노 해방 등의 개혁을 취해서 18세기 말의 프랑스 같은 체제는 아니었다. 실제로 장교 집단의 계급 구성을 보면 대령급 이하 장교의 40%는 과거의 농노 계급 출신이었다고 한다. 특히 보병 병과는 과거 농노였던 계층 출신의 장교들이 많았다고 한다.(상대적으로 기병 병과는 귀족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근위사단 같은 핵심 보직은 귀족 출신 장교들이 차지했다. 농노 계층 출신 장교들의 교육 수준과 자질이 낮았기 때문에 귀족 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봐야 서유럽,특히 독일 장교단과 비교하면 러시아 장교들의 수준은 도토리 키재기 였지만.

러시아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혁명이 터지자 군대의 규율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이미 2월 혁명당시 군대는 충분히 엉망이 된 상태였다. 전쟁에 염증을 느낀 병사들은 제멋대로 탈영해서 귀향해 버리거나 부대에 남아 있더라도 장교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레닌이 10월 혁명을 일으킬 무렵에는 러시아 군대의 상태가 충분히 엉망이었다. 볼셰비키들의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동한 정부군은 오히려 사병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해 버리면서 그대로 붕괴되었고 총사령관 두호닌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모길료프역 앞에서 총살당했다고 한다. 오오 혁명 만세! 혁명 직후 볼셰비키는 장교 계급을 폐지하고 호칭을 사단지휘관, 연대지휘관 같은 식으로 바꿔 버렸다. 그리고 역시 프랑스 처럼 지휘관을 투표로 선출했다. 대개는 인기 많은 부사관들이 중대장이나 포대장으로 많이 선출 되었다고 한다. 35 보병사단의 경우 혁명 전에는 상병이었던 병사가 투표에 의해 사단 참모장으로 선출 됐다고 한다.

귀족 출신 장교들을 불신했던 자코뱅들처럼 볼셰비키들도 짜르 체제에서 양성된 장교들을 혐오했다. 혁명 직후에 약 8,000명의 장교가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지만 많은 볼셰비키들은 노동자 계급으로 새로운 장교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교들에게는 다행히도 내전이라는 불씨가 볼셰비키들의 발등에 떨어졌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투표로 선출된 지휘관들 상당수는 지휘 능력이 없다는게 드러났고 지나치게 “민주화된” 군대는 제대로 전투를 하지 못 했다.
트로츠키는 내전 초반에 30개 사단을 조직할 계획이었지만 전황이 악화되자 1918년 5월에는 추가로 58개 사단을 더 편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신규 부대 편성은 한시가 급한 문제였기 때문에 짜르 시절의 장교들은 거의 대부분 지원만 하면 받아 들여졌다. 결국 구 체제의 장교들은 슬금 슬쩍 새로운 체제에 편입될 수 있었다. 내전이 끝난 뒤에 공산당은 다시 장교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30년대에 들어가면서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중단되고 장교의 권위는 상승했다. 그리고 2차 대전을 거친 뒤 등장한 “소련군(소련 군대가 정식으로 “소련군”이라고 불린 것은 2차 대전 이후라고 한다.)”은 장교의 권위가 절대적이 된 강압적인 군대가 돼 버렸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잘 보여주듯이 혁명은 정치 논리만 가지고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전쟁은 정치 논리만 가지고는 절대 수행할 수 없는 일 이다.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구 체제의 군사 엘리트들을 불신했지만 결국에는 자신들이 만든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구체제 하에서 육성된 군사 엘리트들에 의존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정말 세상은 재미있는 곳이다. 뭐, 이런 몇 개의 사례를 보면 역사라는 건 돌고 도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자료는 대략 아래와 같다.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Gunther E. Rothenberg, The Art of Warfate in the Age of Napoleon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
Mark von Hagen, Soldiers in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 The Red Army and the Soviet Socialist State, 1917-1930
M. S. Anderson, War and Society in Europe of the old regime 1618-1789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Victor Serge, 러시아 혁명의 진실(한국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