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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6일 목요일

'지원병제 군대에 관한 대통령 위원회 보고서'를 다시 읽으면서

1970년에 나온 ‘지원병제 군대에 관한 대통령 위원회 보고서(The Report of the President’s Commission on an All-Volunteer Armed Froce)’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몇 년전만 하더라도 이 보고서에서 주장하는 몇몇 논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이 보고서가 예측한 많은 사실들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는 것이라 지금은 약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이 보고서를 읽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베트남전쟁을 겪고 있던 미국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고 게다가 미국이라는 나라는 근대적인 징병제가 시작된 유럽의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정치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징병제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만큼 현재의 우리들도 한번 읽어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보고서는 서두에서 모병제 반대진영에서 제기하는 아홉가지 문제들을 열거한 뒤 모병제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는 것들은 근거가 부족하거나 지나친 걱정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들고 있는 모병제 반대진영의 주요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모병제 문제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쉽게 짐작하실 수 있는 문제들이죠.

1. 지원병 만으로 군대를 편성할 경우 유지비가 매우 많이 들어 국가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2. 지원병 만으로 군대를 편성할 경우 갑작스러운 위기시에 신속하게 규모를 늘릴 수 있는 유연성이 부족해 질 것이다.
3. 지원병 만으로 군대를 편성할 경우 모든 시민은 국가에 헌신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전통적인 믿음을 약화시켜 애국심을 약화시킬 것이다.
4. 징집병은 (군에 대한) 민의 우위, 자유, 그리고 민주적 제도들을 위협하는 독립된 군사문화가 성장하는 것을 막아준다.
5. 지원병제에서 제시하는 높은 급여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계층(미국의 경우 흑인)을 군대에 집중적으로 끌어들일 것이며 이것은 계급적인 약자들에게 국방의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 될 수 있다.
6. 지원병제 하에서는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 주를 이룰 것이며 이들은 애국심이 아닌 금전적 보상을 바라고 입대하는 사실상의 용병에 불과할 것이다.
7. 지원병 만으로 군대를 편성할 경우 해외에 대한 군사적 모험을 부추기고 무책임한 대외정책을 조성하는 한편 군사력 사용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약화시킬 것이다.
8. 지원병으로 편성한 군대에는 유능한 인재가 들어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군대의 효율성이 저하할 것이다. 군인의 자질이 저하되면 군대의 권위와 존엄성도 떨어지고 이것은 다시 모병에 어려움을 가져올 것이다.
9. 완전한 지원병제를 실시할 만큼 국방예산을 늘리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다른 국방 부문의 예산을 삭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전반적인 국방 태세를 약화 시킬 것이다.

물론 보고서 작성자들은 이 아홉가지 문제 모두가 실제와는 거리가 있으며 지원병제 추진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예언은 틀리기 마련입니다. 언급된 아홉가지 문제 중 아마 2번과 5, 6번 문제는 어느 정도 현실화 된 문제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8번도 해당될 수 있겠군요. 어쨌든 지원병제가 직접적인 경제적 부담이 더 크다는 점과 징병제에 비해 우수한 인력을, 특히 낮은 계급에 충당하는게 어려워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미국과 달리 인구와 경제력에서 여유가 없는 한국같은 나라는 더 위험하겠지요.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 도 있을 겁니다. 게다가 경제적, 안보적 환경은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징병제를 계속 유지시키는 구실이 되고 있지요. 사실 저도 아직까지는 한국에서 징병제를 불가피하게 유지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한국의 현실에서는 장기적으로 군 복무 단축을 계속해서 12개월에서 18개월 사이로 줄일수만 있어도 다행이겠지요.

하지만 미국의 징병제 폐지론자들이 강하게 주장한 것 처럼 징병제란 아무리 좋게 포장하더라도 국가가 시민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는 제도입니다. 어쩌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나 그린스펀(Alan Greenspan)이 주장한 것 처럼 서구의 근대적인 징병제도 실상은 중세의 군역과 다를바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한국의 징병제 처럼 불합리하게 운영되는 제도는 어떻게 변호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상적인 근대적 징병제라면 무엇보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써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되어야 할 텐데 한국의 실상은 정말 군역에 불과한 수준이니 말입니다. 필요성은 절감하는데 옹호하기 참 어렵습니다.

이 보고서를 처음 읽었을 무렵에는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근대적인 징병제를 비판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요즘은 제 생각도 조금 바뀌었습니다. 얼마전 군복무기간을 다시 24개월로 늘리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반사적으로 화가 치밀더군요.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 징병제에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9년 6월 26일 금요일

작은 국가의 한계

땜빵 포스팅 한 개 더 추가입니다;;;;

배군님이 칼 12세(Karl XII)와 북방전쟁에 대한 글을 써 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침 예전에 읽었던 Robert I. Frost의 The Northern Wars의 내용이 생각난 김에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간단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칼 12세는 군사적으로 유능하지만 운은 따라주지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필 그가 즉위했을 무렵은 스웨덴이 사회 경제적으로 한계에 부딪힌 데다 발트해의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지요. 덴마크-작센-러시아 연합군은 전쟁이 그리 길게 끌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큰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스웨덴은 30년 전쟁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며 발트해의 강국으로 떠올랐지만 강국으로 남기에는 근본적으로 제약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인구 자체가 적었습니다. 1620년대에 스웨덴의 인구는 핀란드를 합쳐도 125만 명 정도였으니 폴란드, 러시아, 그리고 독일의 여러 국가들과 비교하면 절대적인 열세였습니다. 병사는 돈을 벌어 용병으로 채우면 된다지만 장교는 문제가 달랐지요. 스웨덴 왕실은 장교의 경우는 가능한 스웨덴 귀족으로 채우고자 했지만 인구가 적으니 한계는 명확했습니다. 17세기 초 스웨덴의 귀족인구는 아무리 높게 잡아도 3,000명 이내였고 이 중 장교가 될 수 있는 성인 남성은 500-600명 정도였습니다.

스웨덴의 남성들은 15세에서 60세 까지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습니다. 왕실 소유지의 농민(Kronobönder)과 자유농(Skattebönder)의 경우 남성 10명 당 1명이 군역을 지고 나머지가 세금으로 비용을 대는 형식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인구 자체가 적다 보니 경제에 큰 부담을 주는 구조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구의 부족 때문에 30년 전쟁 당시 스웨덴군은 현찰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외국인 용병에 크게 의존해야 했습니다.

스웨덴이 경제적으로 튼튼하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30년 전쟁 이후 북방의 강자 노릇을 하느라 무리를 한 덕에 17세기 중반에는 재정적자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1681년에는 정부 부채가 5천만 릭스달러(Riksdaler)에 달했습니다. 왕실의 연간 수입이 4백만 릭스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하지요. 재정적자는 30년 전쟁 이후 스웨덴 왕실을 꾸준히 괴롭혀 온 문제였습니다. 스웨덴은 빈약한 국내 경제 때문에 사실상 ‘약탈’로 전쟁 비용을 충당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30년 전쟁이 종결된 뒤에는 전쟁으로 인한 수입도 짭잘하지가 못 했습니다. 재정난에 시달린 칼 10세(Karl X)는 1660년에 정규군을 9만3천명에서 4만6천명으로 감축하는 조치를 취하기 까지 합니다. 재정 지출을 억제한 덕에 1690년에는 정부 부채가 1천만 릭스달러까지 떨어지긴 했습니다만 스웨덴의 근본적인 경제적 취약성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칼 10세는 재정난으로 군대를 절반 가까이 감축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팽창한 스웨덴의 영역을 방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칼 10세는 스웨덴의 해외 영토인 폼메른(Pommern)에 평시 수비대로 배치해야 할 병력이 8,000명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스웨덴군의 총병력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큰 병력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인구로 군 병력과 경제 생산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군역의 의무를 부과하는 비율은 일정하게 유지되지 못 했습니다. 30년 전쟁 중인 1635년에는 귀족 소유지의 농민(Frälsebönder)은 30명 당 1명,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은 15명 당 1명이 징집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때는 용병으로 병력을 충당하는 것이 비교적 원활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30년 전쟁이 끝나고 점차 재정 적자가 악화되면서 다시 국내의 인적자원에 대한 의존이 높아졌습니다. 1653년에는 귀족 소유지 농민은 8명 당 1명,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은 16명 당 1명이 징집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의 징집 비중이 낮아진 것으로 보이지만 내막을 들여다 보면 암담했습니다. 스웨덴 왕실이 재정 수입을 늘리기위해 왕실 소유지를 귀족에게 대량으로 매각한 때문에 귀족 소유지의 비중이 전체 토지의 66%까지 높아진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왕실 소유지의 농민과 자유농이 줄어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귀결이었습니다.

칼 11세(Karl XI)가 1697년 사망했을 때 스웨덴군은 스웨덴 기병 1만1천명, 스웨덴 보병 3만명, 그리고 용병 2만5천명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리고 칼 12세는 이 군대로 장기전을 치르며 여러 차례의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스웨덴의 적들은 더 많은 인적자원을 가지고 장기전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패권 경쟁에서 소국이 가지는 한계는 명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군대와 지휘관이 있더라도 숫적인 열세를 감당하는데는 한계 있을 수 밖에 없지요. 한국사에 비교해 보자면 고구려가 장기전 끝에 당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던 것과 비슷할 것 입니다.

2009년 4월 2일 목요일

Women, Armies, and Warfare in Early Modern Europe by John A. Lynn II

Women, armies, and warfare in Early Modern Europe
저자 : John A. Lynn II
출판사 :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17세기 중반까지 유럽 각국의 군대는 군병력 만큼이나 많은 수의 비전투원을 동반하고 움직였습니다. 규모가 큰 군대는 어지간한 대도시의 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민간인을 달고 다녔다고 하니 재미있지요. 군대를 따라다니는 민간인 중 상당수는 여성이었고 그 규모는 수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군대에 속한 여성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듭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저자인 린(John A. Lynn II)은 근대 초기 유럽군대에서 여성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절대왕정의 강화와 함께 군대가 상비군화 되어 가면서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근대 유럽의 군대의 성격과 군부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간인 집단, campaign community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근대 초기 유럽군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운영, 유지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집단이 형성되는 과정과 민간인 집단이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6~17세기의 유럽군대는 용병집단으로 구성되었고 보급의 대부분을 약탈에 의존했습니다. 직업군인인 용병들은 자신의 급여로 부양하는 가족들을 동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군대가 편성되면 군대의 규모와 비슷한 숫자의 민간인이 모여들었습니다. 또한 보급을 약탈에 의존하는 특성 때문에 상업적 이익, 또는 단순한 생존을 위해서 모여드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근대 초기의 유럽군대는 군사작전에 지장을 초래하는 대규모의 민간인 집단, 특히 많은 여성들을 포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장에서는 군대를 따른 여성들의 성격에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군대에 동반된 여성 집단을 크게 매춘부(Prostitutes), 애인(Whores : 이 글의 저자는 whore를 매춘부가 아니라 미혼이되 한 명의 남자를 따르는 여자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군인의 부인(Wives)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매춘부와 애인의 경우 17세기 중반까지 많은 수가 군대와 함께 생활했지만 용병군대가 점차 상비군화 되어 가면서 군 규율의 유지를 위해 제도적으로 추방되어 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군인의 부인들이 부업 차원에서 매춘에 나서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군인의 부인들 또한 점차 군대에서 추방되어갔고 많은 유럽군대는 군인의 결혼을 엄격히 통제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여성들이 전투와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해서 간략히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여러 사례를 통해 군대와 함께 생활한 여성들은 폭력의 피해자인 동시에 군대 외부의 여성들에 대한 가해자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3장에서는 여성들이 군대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남성이 하지 않는 ‘여성적인’ 일, 빨래와 바느질, 요리와 청소 등의 일을 수행했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다양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부대 내의 상업과 수공업 등의 영역에 종사했으며 전투에서 일어나는 약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외에도 육체적으로 힘든 수송, 특히 군인들의 짐꾼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으며 공성전시 참호를 파는 사실상의 ‘공병’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근대 초기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한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군대와 함께 생활한 여성들은 민간 사회의 여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존재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군대의 상비군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체계적인 보급체계가 자리 잡아갔고 동시에 여성들이 수행하는 역할도 축소되어 갔습니다.

4장에서는 여성들의 실제 전투참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먼저 대중문화에서는 여성의 전투 참여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본 뒤 실제 여성의 전투 참가 사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17~18세기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남성에 비해 낮았고 여성이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가하는 것은 터부시 되었지만 대중문화에서 전투에 참여하는 여성은 흥미의 대상으로서 자주 다루어 졌습니다. 반면 실제 군대에서 여성의 전투 참가는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전투에 참가한 여성들은 대부분 남장을 하고 정체를 남자로 속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남자로서 군인이 된 여성들 중 동성애자인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프랑스혁명도 전체적인 틀을 바꾸어 놓지는 못 했습니다. 프랑스혁명 초기에는 구체제의 악습을 타파하는 차원에서 여성들이 여성으로서 군대에 입대하는 경우가 늘어났지만 대부분 선전적인 의도에서 이루어 졌으며 결국 혁명의 열기가 점차 가라앉으면서 혁명정부는 ‘쓸모 없는’ 여군들을 군대에서 추방했습니다. 저자의 지적 처럼 혁명 군대 또한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구체제의 군대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저자는 근대초기의 자율적인 용병군대가 점차 절대왕정 아래의 규율 잡힌 상비군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여성이 수행하던 역할의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고 결론 내립니다. 근대국가의 군대로 개편되어 가면서 군대가 국왕의 신민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밖에 없는 약탈 보급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보급에 부담을 초래하는 불필요한 민간인, 특히 여성들은 퇴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근대 초기의 유산인 군대를 따르는 민간인 사회는 군대의 근대화와 함께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이 저작은 16세기부터 19세기 초 까지 전쟁과 여성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좋은 개설서 입니다. 특히 19세기부터 최근까지 연구사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여성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비록 저자가 자신의 연구가 논리적으로 약간의 비약이 있으며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훌륭한 저작입니다.


잡담 하나. 읽다 보니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눈에 띄더군요.

In any case, officer’s wives were at the top of the hierarchy where her husband’s rank determined her position.(p.89)

사단장 마누라는 사단장 행세를 하고 연대장 마누라는 연대장 행세를 한다는 한국 군대가 생각이 났습니다;;;;

잡담 둘. 많은 저작들은 책의 앞 부분에 ‘이 책을 000에게 바칩니다’ 라는 문구를 적어 넣지요. 이 책의 저자는 이 책을 자신의 손녀인 Helena Grace Lynn에게 바치고 있군요. Miss Lynn, 훌륭한 할아버지를 두어서 좋겠습니다!

2007년 1월 8일 월요일

한국의 모병제 논의에 대한 짧은 생각

노무현 대통령의 “군대가서 썩는다”는 발언은 지난 연말 최고의 히트작 이었습니다. 현직 대한민국 최고의 강태공 노무현 대통령답게 이 발언을 통해 수많은 월척을 낚았지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구조적으로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 한국의 “국민개병제”에 대한 대안으로 “모병제”가 꾸준히 논의되고 있는 와중에서 튀어 나왔다는 점에서 더 흥미 있었습니다.

한국의 “모병제”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모병제에 대해 더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진보적”인 사람들이 내세우는 논의는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의 논의와 유사하다는 점이지요.
닉슨의 참모 중 하나였던 밀튼 프리드먼은 시장경제의 원리를 가지고 징병제를 공격했던 대표적 인사입니다. 프리드먼은 “국민개병제”로 만들어진 군대는 노예의 군대라고 조소하기도 했습니다.(이건 프리드먼이 국민 개병제의 정치적 의미를 모르거나 알면서도 무시했다는 이야기죠)
당시 모병제에 찬성하는 시장주의자들은 모병제를 실시하더라도 육군이 필요로 하는 병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으며 군대의 효율도 보장될 것이라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모병제를 실시한 직후부터 심각한 인건비 상승과 효율 저하에 시달렸습니다. 1968년 미군은 320만명의 병력에 320억달러(국방비의 42%)의 인건비를 지출했지만 징병제 폐지 2년차인 1974년에는 병력 220만에 439억달러(국방비의 56%)의 인건비를 지출했습니다. 직업군인의 증가로 이에 필요한 부대비용(특히 가족 부양에 필요한)이 급증했고 전반적인 급여가 증가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정치적 논의가 활발한 유럽의 경우는 “진보” 또는 “좌파”로 자처하는 인사들이 “국민개병제”를 옹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J. Erickson의 기념비적인 저작, The Soviet High Command는 혁명 초기 소련에서 전개된 국방제도의 골격에 대한 공산당내 좌우파의 논의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소련의 공산당 좌파들은 9차 전당대회에서 “전문화된 군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에 대해 군사력이 민중으로부터 괴리될 경우 그 군사력은 민중을 압제하는 도구가 된다고 주장하며 민병대 체제를 소련 군사력의 근간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진보적 지식인들이 모병제나 전문적인 군인 집단에 거부감을 가졌던 이유는 19세기 초 까지도 용병으로 이뤄진 직업군대가 민중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던 유럽의 역사에 기인합니다. V. G. Kiernan이 여러 사례를 들어 잘 지적했듯 절대 왕정시기 주로 외국인으로 만들어진 용병군대는 국민을 억압하는 도구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고용주인 부르봉 왕가에 충성하며 시민들을 상대로 최후까지 항전한 스위스 용병들의 이야기는 슬프기도 하지만 역으로 뒤집어보면 용병군대가 얼마나 절대권력의 이익에 충실히 복무하면서 국민을 짓밟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절대왕정의 성립과정에서 중앙 권력에 의한 무력 장악이 중요한 과정이었다는 것은 정치사가들의 공통적인 견해이죠.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런 역사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개병제에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장 경제 원리에 따라 모병제를 도입한 미국의 군대가 과연 모든 조건에서 잘 돌아가고 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닉슨은 선거운동 기간에 모병제가 사실상의 용병제라는 국민개병제 옹호자들의 주장에 대해 미국의 모병제는 미국 시민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현재 미국은 모병율 저하로 시민권이 없는 영주권자까지 모병 범위를 확대하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병사 일인당 소요되는 인건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비용 대 효용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지요. 미국은 꾸준히 모병에 따른 인건비 증가와 병력 확충의 어려움에 따른 전쟁 수행능력 부족을 겪고 있습니다.
모병제로 움직이는 이라크의 미군은 징병제로 움직였던 40년 전 베트남의 미군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전 하에서 어려움에 봉착해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교리와 전술의 문제입니다. 모병제로 만들어지는 오늘날의 미군은 분명히 강력하고 매우 우수한 군대입니다. 하지만 이라크에서는 여전히 40년 전 징병제 시절과 마찬가지의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모병제가 만능이 아님을 직접 보여주고 있는 것 입니다. 모병제로 만들어진 군대도 적절한 교리와 전술이 없다면 국민개병제로 이뤄진 군대만도 못 한 것이 현실입니다. 즉 뒤집어 말하면 합리적으로 운영 되고 적절한 교리와 전술이 있다면 국민개병제로 만들어진 군대도 충분히 잘 움직일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지금 한국의 국민개병제가 수많은 문제점을 노출 시키고 있고 비능률적이라고 혹평 받는 것은 운영 방식이 잘못된 것이지 국민개병제가 모병제보다 나쁜 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은 국민개병제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굳이 제가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많은 분들이 군대를 다녀오셨기 때문에 그 폐해를 경험적으로 잘 아실 것 입니다. 하지만 폐해가 많다고 하더라도 모병제 말고도 현재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은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칭 진보들은 모병제냐 징병제냐의 단순한 이분법적 논지만 전개하고 있습니다. 답답할 따름입니다.

사족 하나 더. 모병제로 이뤄진 군대가 국민개병제로 이뤄진 군대보다 더 우수하다면 극도로 우수한 전투력을 보여줬던 2차대전기의 독일 국방군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핸슨 볼드윈 같은 초기의 미국 모병제 지지자들은 국민개병제의 비효율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독일의 “전격전”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전격전”을 수행한 독일의 군대는 국민개병제로 만들어진 군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웃기는 일 이지요.

국내에서 진보로 자처하는 인사들의 모병제 논의가 단순히 겉멋만 잔뜩 든 언어유희에 불과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저 혼자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칭 진보들이 시장논리를 만병통치약인 양 전면에 내세우고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군사력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무관심 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물론 시장의 논리도 중요하며 많은 경우 사회에 유익한 작용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