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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13일 금요일

Jason D. Mark著, Into Oblivion-Kharkov to Stalingrad : The Story of Pionier Bataillon 305

얼마전 페리스코프에서 활동하셨던 Das Reich님이 책 몇권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감사하게도 책값 문제로 구매를 미루고 있었던 Into Oblivion과 같은 재미있는 책을 구해주셔서 기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Das Reich님께 책을 선물받은 뒤 전체적으로 한번 훑어보고 다시 조금씩 정독하는 중인데 꽤 근사한 물건입니다!

Into Oblivion은 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관련된 저작을 집필해온 Jason D. Mark가 작년에 출간한 책입니다. 이 책은 흥미롭게도 제305보병사단 소속의 제305공병대대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제2차대전 당시 참전한 독일군의 부대사는 셀수없이 많이 출간되었지만 상당수는 정예부대인 무장친위대나 육군의 기갑사단등을 다루는 것 이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자국의 역사이다 보니 일반 보병부대의 부대사도 꽤 많이 출간됐지만 영어권 국가에서 출간되는 부대사는 거의 대부분 인기있는 엘리트 부대의 부대사였습니다. 이 점에서 보병사단도 아니고 그 예하의 공병대대를 다룬 연구는 그 자체로 흥미롭습니다.

저자가 주로 사용한 사료는 1940년 12월 제305보병사단이 창설될 때부터 1942년 11월 까지 제305공병대대에서 복무한 리하르트 그림(Richard Grimm)중위가 전쟁 후 정리한 기록들입니다. 그림 중위는 운좋게도 1942년 11월 중순 독일로 후송되어 포위망에 같히는 것을 모면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그가 소속되어 있었던 부대의 기록을 모았고 이것을 정리한 글을 썼습니다. 저자는 그림의 기록에 힘입어 제305보병대대의 전투사를 상당히 자세하게 그려냈습니다. 그리고 다른 전투부대에 배속되는 공병부대의 특성상 제305사단의 작전도 전반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저자는 공병대대의 작전을 그리면서도 이것을 제6군의 전체 작전의 범주안에서 유기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이러한 장점은 이미 저자의 전작인 Death of the Leaping Horseman에서 잘 나타난 바 있습니다.

공병부대의 작전을 다루고 있다보니 꽤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야전에서 교량을 건설하고 통제하는 임무는 어떻게 수행하는가? 대전차전이나 시가전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공병은 어떻게 운용되는가? 매우 중요하지만 의외로 쉽게 접하지 못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전투외에도 장교와 사병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서술도 흥미롭습니다. 주목을 받지 못했던 평범한 부대의 평범한 장교와 사병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이 책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제305공병대대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한 뒤 생존한 인원을 중심으로 다시 편성되는 과정과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끝으로 책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생존자들 운명과 전사자의 유가족들의 후일담에 대한 덤덤한 서술은 읽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여러모로 의미있는 훌륭한 저작입니다. 2차대전사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분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2009년 10월 11일 일요일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 장비 상태에 대한 독일군의 평가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1942년 하계공세를 준비하고 있던 1942년 6월, 이탈리아군에 배속된 독일군 연락본부(Verbindungskommandos)는 이탈리아군의 장비현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2. 장비상태(Ausrüstung)

a) 화기 및 장비
: 보병용 소화기 - 기관총과 박격포는 쓸만하다. (이탈리아군의) 기관단총은 각 부대에 보급된 수량이 적다.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부족한 수량은 보충되었다.
: 포병 - 사단포병의 75mm와 100mm포는 사정거리와 위력이 부족하다. 군단포병의 105mm포(사정거리 13km)는 훌륭한 포이다. 단점은 탄도가 곧은 편이라는 것이다. 현재 포신은 과도하게 사격한 상태이다. 교체할 포신이 수송중에 있다. 대전차용 탄약이 전혀 없다. 75mm와 20mm 대공포는 훌륭한 장비이나 마찬가지로 대전차용 탄약이 전혀 없다.
: 대전차포 - 보병연대와 군단 직할, 사단 직할의 대전차 부대는 공통으로 47mm를 장비하고 있다. 포의 위력에 있어 독일군의 구형 37mm포에 상응한다. 포구초속은 360m/sec이며 유효사거리는 700m라고 말해지고 있지만 실제로는200m에 불과하다. 소련군의 중형 전차 및 중전차에 대항할 장비가 부족하다. 75mm 대공포는...(후략)
: 공병장비 - 목재부교는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성능을 입증했다. 독자적인 건설 방법으로 통과중량(Tragfähigkeit)을 5-10톤에서 7-13톤으로 증가시켰다.
: 통신장비 - 수량과 성능 모두 불충분하며 유선전화기의 경우 구식이고 습기에 민감한데다 케이블도 부족하다. 무선통신장비는 부분적으로 현대화되어있고 성능도 좋은 편 이지만 야전에서의 유용성이 떨어진다.

b) 차량현황
: 현재 기동성이 심각하게 감소된 상태이다. 이탈리아군의 차량 가동 현황은 다음과 같다. 쾌속(Celere)사단 75%, 파수비오(Pasubio)사단과 토리노(Torino)사단은 35~40%. 모든 정비부대를 통합하고 현재 보충용 차량을 배치하는 방법으로 (군수참모의 견해에 따르면) 2개 사단의 차량가동율을 3주 이내에 15~20% 정도 상승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밖에 현재 이탈리아군은 차량화된 수송부대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새로 배치된 차량 : 매우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 더 많은 수송부대가 (이탈리아) 8군의 차량수송에 투입되고 있다. 보병부대의 차량인 1톤 트럭(LKW)을 수송용차량으로써 평가하면 강력한 엔진을 가지고 있으나 야지주행능력은 굴곡이 없는 지형에 한정되어 있다. 2륜 오토바이와 3륜 오토바이는 훌륭한 장비이다. 화물차의 대부분은 디젤을 사용하고 있으며 가솔린을 사용하는 차량은 일반적으로 반궤도차량, 고기동 트럭(화학대대에 배치된), 트레일러(Karette), 병력수송차량 및 오토바이 등 [으로 제한되어 있다] 평상시의 소모는 2/3이 디젤이고 1/3이 가솔린이며 모든 차량의 운용에는 V.S*가 1/2에서 1/2이다.

c) 마필현황

각 기병연대와 마필화 포병연대의 마필 현황은 (편제의) 50% 수준이다. 보충용 마필이 도착하는 중이다. 보병연대의 노새는 마찬가지로 (편제의) 50%이다.

d) 피복

정상적이다. 동계 피복은 대부분 항공수송을 통해 적시에 도착하였다. 매우 훌륭하다.(Sehr Zweckmäßig) 하계피복은 상의만이 확보된 상태이다.1)
*1V.S.(Verbrauchssatz)는 해당 부대의 전 차량이 100km 이동할 수 있는 연료량을 뜻함.

독일군의 평가는 이탈리아군의 고질적인 약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화기의 부족, 통신수단의 부족, 수송수단의 부족.

이 세가지 모두 현대 전쟁에서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고 특히 기동전이 중심이었던 동부전선에서는 그야말로 중요한 요소였지요. 불행하게도 이탈리아군은 이 모든 것을 결여하고 있었습니다. 피복상태는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옷이 좋다고 싸움을 잘 하는건 아니죠;;;;

동부전선에 파견된 이탈리아군은 이 시점에서는 제8군으로 개편되어 있었습니다. 인용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단들은 1941년 파견된 이탈리아 러시아원정군단, CSIR(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에 소속되어 있던 부대들로 고참사단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CSIR에 배속된 사단들은 제가 예전에 쓴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에서 언급했듯 명칭상으로는 모두 그럴싸한 차량화사단(Divisioni autotrasportabile), 쾌속사단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차량화 사단이었던 파수비오 사단과 토리노 사단은 소련으로 출동할 당시 부터 말로만 차량화였고 보병연대는 도보 부대였다고 하지요.2) 어쨌든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될 당시에는 소련군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군의 이런 약점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탈리아군은 키예프 포위전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했으며 스탈리노를 점령하는데도 꽤 기여를 해서 클라이스트 장군도 호평을 했다고 하지요.3)

하지만 1942년으로 접어들면서 이런 약점은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탈리아군은 1941/42년의 겨울 방어전에서도 꽤 괜찮은 성과를 냈지만 상당한 장비를 손실했고 이 때문에 원래부터 좋지 않던 사단들의 장비상태도 더 나빠졌다는 점 입니다. 독일군은 이탈리아군이 동부전선의 작전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1941년에 무솔리니가 이탈리아군을 추가로 파병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수송능력의 부족등을 이유로 거부한 바 있었습니다.4) 그러나 잘 아시다 시피 독일은 1941/42년 겨울에 큰 타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하계공세 준비를 위해 이탈리아 등 동맹국들에게 추가 파병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탈리아가 추가로 파병한 사단들은 1941년에 파병한 사단들에 비해 장비면에서 나을것이 없는 부대들이었고 이러한 부대들은 1942/43년 겨울에는 소련군의 반격에 그야말로 철저하게 박살이 나게 됩니다.

※소련군의 동계공세 당시 이탈리아군의 장비 현황에 대해서는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에 간략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특히 위에서 언급했듯 차량을 포함한 기동수단의 부족은 공격 보다 방어전에서 결정적인 약점이 됩니다. 알피니 군단과 같은 정예부대는 전력의 열세에도 분전했지만 장비의 열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반 보병사단이었던 라벤나(Ravenna) 사단은 1942/43년의 동계전투에서 야포를 포함한 각종 장비를 90%이상 상실했습니다.5) 만약 충분한 수송/견인수단이 확보되어 있었다면 피해를 조금 더 줄일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수송수단의 부족은 장비 뿐 아니라 병력손실을 크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소련군이 12월 25일에 알렉세예보-로소브스코예를 차단하자 후퇴하던 이탈리아군은 와해되어 1만5천명 이상이 생포되었습니다.6) 독일군도 차량 등 수송수단의 약화가 심각해진 1943년 이후로는 비슷한 경우가 많아집니다.

이탈리아 제8군이 동계전투에서 괴멸된 뒤에도 이탈리아 측은 최소한 이탈리아군 1개 군단은 동부전선에 잔류시키고자 했다고 합니다.7) 그러나 결국 이탈리아군은 동부전선에서 발을 빼게 됩니다. 이 무렵이 되면 이탈리아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으니 말입니다. 1943년으로 접어들면 미영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로 침공해 오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이탈리아의 빈약한 공업능력을 고려해 본다면 이탈리아가 항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1개 군단을 동부전선에 잔류시켰다 하더라도 그 전력은 1941년의 CSIR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 'Bericht des Deutschen Verbindungskommandos über das italienische Expeditionskorps vom 9. Juni 1942', Thomas Schlemmer(Hrsg),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Dokumente zu Mussolinis Krieg gegen die Sowjetunion, Oldenbourg, 2005, ss.95~96에서 재인용.
2) Gerhard Schreiber, 'Italiens Teilnahme am Krieg gegen die Sowjetunion', Stalingrad, Piper, 1992, s.259.
3) Richard L. DiNardo, Germany and the Axis Powers : From coalition to Collaps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127.
4) DiNardo, ibid. p.129.
5) 'Gefechtsbericht des Deutschen Verbindungskommandos bei der Division "Ravenna" vom 20.März 1943', Thomas Schlemmer(Hrsg),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Dokumente zu Mussolinis Krieg gegen die Sowjetunion, s.123에서 재인용.
6) Peter Gosztony, Hitlers Fremde Heere : Das Schicksal der nichtdeutschen Armeen im Ostfeldzug, Econ Verlag, 1976, s.319.
7) DiNardo, ibid. p.155.

2009년 4월 2일 목요일

Women, Armies, and Warfare in Early Modern Europe by John A. Lynn II

Women, armies, and warfare in Early Modern Europe
저자 : John A. Lynn II
출판사 :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17세기 중반까지 유럽 각국의 군대는 군병력 만큼이나 많은 수의 비전투원을 동반하고 움직였습니다. 규모가 큰 군대는 어지간한 대도시의 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민간인을 달고 다녔다고 하니 재미있지요. 군대를 따라다니는 민간인 중 상당수는 여성이었고 그 규모는 수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군대에 속한 여성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듭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저자인 린(John A. Lynn II)은 근대 초기 유럽군대에서 여성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절대왕정의 강화와 함께 군대가 상비군화 되어 가면서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근대 유럽의 군대의 성격과 군부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간인 집단, campaign community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근대 초기 유럽군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운영, 유지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집단이 형성되는 과정과 민간인 집단이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6~17세기의 유럽군대는 용병집단으로 구성되었고 보급의 대부분을 약탈에 의존했습니다. 직업군인인 용병들은 자신의 급여로 부양하는 가족들을 동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군대가 편성되면 군대의 규모와 비슷한 숫자의 민간인이 모여들었습니다. 또한 보급을 약탈에 의존하는 특성 때문에 상업적 이익, 또는 단순한 생존을 위해서 모여드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근대 초기의 유럽군대는 군사작전에 지장을 초래하는 대규모의 민간인 집단, 특히 많은 여성들을 포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장에서는 군대를 따른 여성들의 성격에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군대에 동반된 여성 집단을 크게 매춘부(Prostitutes), 애인(Whores : 이 글의 저자는 whore를 매춘부가 아니라 미혼이되 한 명의 남자를 따르는 여자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군인의 부인(Wives)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매춘부와 애인의 경우 17세기 중반까지 많은 수가 군대와 함께 생활했지만 용병군대가 점차 상비군화 되어 가면서 군 규율의 유지를 위해 제도적으로 추방되어 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군인의 부인들이 부업 차원에서 매춘에 나서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군인의 부인들 또한 점차 군대에서 추방되어갔고 많은 유럽군대는 군인의 결혼을 엄격히 통제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여성들이 전투와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해서 간략히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여러 사례를 통해 군대와 함께 생활한 여성들은 폭력의 피해자인 동시에 군대 외부의 여성들에 대한 가해자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3장에서는 여성들이 군대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남성이 하지 않는 ‘여성적인’ 일, 빨래와 바느질, 요리와 청소 등의 일을 수행했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다양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부대 내의 상업과 수공업 등의 영역에 종사했으며 전투에서 일어나는 약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외에도 육체적으로 힘든 수송, 특히 군인들의 짐꾼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으며 공성전시 참호를 파는 사실상의 ‘공병’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근대 초기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한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군대와 함께 생활한 여성들은 민간 사회의 여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존재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군대의 상비군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체계적인 보급체계가 자리 잡아갔고 동시에 여성들이 수행하는 역할도 축소되어 갔습니다.

4장에서는 여성들의 실제 전투참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먼저 대중문화에서는 여성의 전투 참여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본 뒤 실제 여성의 전투 참가 사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17~18세기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남성에 비해 낮았고 여성이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가하는 것은 터부시 되었지만 대중문화에서 전투에 참여하는 여성은 흥미의 대상으로서 자주 다루어 졌습니다. 반면 실제 군대에서 여성의 전투 참가는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전투에 참가한 여성들은 대부분 남장을 하고 정체를 남자로 속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남자로서 군인이 된 여성들 중 동성애자인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프랑스혁명도 전체적인 틀을 바꾸어 놓지는 못 했습니다. 프랑스혁명 초기에는 구체제의 악습을 타파하는 차원에서 여성들이 여성으로서 군대에 입대하는 경우가 늘어났지만 대부분 선전적인 의도에서 이루어 졌으며 결국 혁명의 열기가 점차 가라앉으면서 혁명정부는 ‘쓸모 없는’ 여군들을 군대에서 추방했습니다. 저자의 지적 처럼 혁명 군대 또한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구체제의 군대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저자는 근대초기의 자율적인 용병군대가 점차 절대왕정 아래의 규율 잡힌 상비군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여성이 수행하던 역할의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고 결론 내립니다. 근대국가의 군대로 개편되어 가면서 군대가 국왕의 신민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밖에 없는 약탈 보급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보급에 부담을 초래하는 불필요한 민간인, 특히 여성들은 퇴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근대 초기의 유산인 군대를 따르는 민간인 사회는 군대의 근대화와 함께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이 저작은 16세기부터 19세기 초 까지 전쟁과 여성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좋은 개설서 입니다. 특히 19세기부터 최근까지 연구사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여성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비록 저자가 자신의 연구가 논리적으로 약간의 비약이 있으며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훌륭한 저작입니다.


잡담 하나. 읽다 보니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눈에 띄더군요.

In any case, officer’s wives were at the top of the hierarchy where her husband’s rank determined her position.(p.89)

사단장 마누라는 사단장 행세를 하고 연대장 마누라는 연대장 행세를 한다는 한국 군대가 생각이 났습니다;;;;

잡담 둘. 많은 저작들은 책의 앞 부분에 ‘이 책을 000에게 바칩니다’ 라는 문구를 적어 넣지요. 이 책의 저자는 이 책을 자신의 손녀인 Helena Grace Lynn에게 바치고 있군요. Miss Lynn, 훌륭한 할아버지를 두어서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