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8일 수요일

잡담 하나 더

재보궐 잡담 하나만 더 해볼까 합니다.



 어제 오전에 괴산 읍내를 돌아다니다가 민노당 후보의 현수막을 봤을 때 좀 기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평소 민노당의 행각에 대해 불쾌감을 많이 느끼는 편이긴 하지만 이 현수막을 처음 봤을 때는 약간 측은한 감정이 들더군요. 오죽 당에 인물이 없으면 강기갑을 내세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물이나 당에 대한 호불호를 배제하고 평가하더라도 강기갑은 그저 그런 기행으로 유명할 뿐이지 다른 정당의 거물급들과 비교하기에는 모든 면에서 뒤떨어지는 정치인입니다. 사천에서 이방호를 꺾고 당선된 것도 강기갑의 실력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은 만큼 강기갑은 기본적인 실력조차 검증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웹상에서는 제법 거물로 비쳐질 지 몰라도 실질적인 파괴력은 그저 그런 수준이죠.

 아직 재보선 개표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기호 5번에게는 별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2009년 10월 25일 일요일

양치기 늑대?

대한민국 정치 소식은 블랙유머의 산실이라죠.

"與, 재보선 패배시 서민경제정책 추동력 상실"

저는 이 기사를 읽은 뒤 늑대가 양들에게 "늑대가 온다!!!"고 외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별로 믿음이 안가죠.

유탄포

귀찮기는 한데 쓸건 써야겠죠.

일단 앞의 글에 달린 대사님의 반론을 먼저 읽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희한하게도 대사님은 제가 하지 않은 말을 한 것 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 글과 댓글들을 모두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두 단어가 수십년간 혼용되어 왔는데 어느게 더 익숙하냐는 문제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합니까? 이걸 객관화 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까?"라고 썼지 두 단어가 "같은 비중으로 쓰인다"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로 "일본책 그대로 베낀 고색창연한 인쇄물 말고, 21세기 인쇄물 중에서 유탄포로 쓰인 책 좀 봤으면 좋겠네요.일본책 베낀 거 말고..국군에서도 그냥 곡사포로만 번역하고 있는데 무슨.." 이라는 대사님의 주장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런 쓸데없는 주장을 반박하는데 시간을 낭비하긴 싫으니 제 컴퓨터에 있는 PDF 파일 중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행한 단행본을 조금 찾아 봤습니다. 국방부의 공식적인 견해를 대변하는 연구소이니 대사님의 주장에 대한 답변은 되리라 생각됩니다.

먼저 2004년에 출간된 『6ㆍ25 전쟁사』 1권입니다.


다음은 2006년에 출간된 『6ㆍ25 전쟁사』 3권입니다. 3권에서도 Howitzer는 유탄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귀찮아서 제가 가진 책만 대충 찾아봤는데 대사님의 주장에 대한 답변은 어느정도 될듯 싶습니다.

유탄포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도 표준어로 등재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제가 앞의 글에서 적었듯 영한사전의 경우도 출판사 별로 Howitzer를 곡사포와 유탄포로 옮기고 있습니다. 저의 견해는 앞서 거듭 밝혔듯 Howitzer를 유탄포로 번역하는 것은 일반적인 수준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 입니다.

애시당초 원래의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것 이었을 뿐입니다.

2009년 10월 23일 금요일

단어 사용 문제

원래 별도로 글을 쓸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입장에 대해 간략히 정리할 필요는 있겠더군요.

제가 이전의 글의 댓글에서 이야기 했듯 Howitzer라는 영어단어는 한국에서 '곡사포' 그리고 '유탄포'로 번역이 됩니다. 두 가지 용례가 널리 사용되다 보니 영한사전의 표기도 두가지가 혼용되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민중 영한사전'이나 '동아 프라임 영한사전' 같은 경우는 Howitzer 항목을 간단히 '곡사포' 라고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사영어사에서 내고 있는 'e4u 영한사전'의 경우는 Howitzer 항목을 '유탄포(곡사포의 일종)'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곡사포'와 '유탄포' 모두가 번역 용례로 사용되고 있으니 일반적인 번역에서 '유탄포'로 번역한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 일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둘 중 어느 단어가 더 익숙한 것이냐는 질문은 그야말로 넌센스입니다. 두 단어가 수십년간 혼용되어 왔는데 어느게 더 익숙하냐는 문제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합니까? 이걸 객관화 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까?

그리고, 아예 잘못된 표현이라면 모를까 엄연히 영한사전에도 수록되어 있는 단어를 가지고 '뭘 번역했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물어보면 뭘 어쩌자는 겁니까.

오역도 아니고 영한사전에 있는 일반적인 용례를 사용한 것에 불과한데 이게 도데체 논쟁거리나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말 이런 쓸데없는 시간낭비가 싫습니다.

2009년 10월 21일 수요일

미 육군의 프랑스제 야포 채용

예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번 했습니다만 이번에는 순수하게 "야포" 이야기만 해 볼까 합니다.

1차대전이 장기화 되면서 서부전선에서는 무시무시한 화력전이 전개되었고 여기에 대해서는 대서양 건너의 미육군에서도 심각하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대륙의 불똥이 언제 바다 건너까지 튈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그 러나 비교적 19세기 말 유럽의 육군군비경쟁과는 무관하게 한발 물러서 있던 미육군의 포병전력은 세계대전에 뛰어들기에는 살짝 모자란 수준이었습니다. 1898년에 미서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육군이 보유한 야포는 123문의 3.2인치 야포, 22문의 3.6인치 야포, 22문의 3.6인치 유탄포, 그리고 소수의 공성포(siege gun)가 전부였습니다. 미국 전쟁부는 이때문에 포병 전력의 확충을 위해 영국으로 부터 34문의 암스트롱 4.7인치 야포와 8문의 6인치 포를 급히 구매해서 배치해야 했습니다.1) 미국 전쟁부는 이 전쟁의 경험과 유럽의 군비경쟁에 자극을 받아 포병전력의 확충에 고심했지만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될 때 까지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전쟁부는 유럽대륙의 군비증강에 자극받아 1912년에 새로운 보병사단의 포병개편안을 내놓았습니다. 이 개편안은 1개 보병사단에 1개 포병여단을 두고 이 포병여단은 다시 2개 포병연대로, 그리고 각 포병연대는 2개 대대의 3인치 야포(각 대대당 3인치 야포 12문)과 1개 대대의 4.7인치 유탄포(대대 당 4.7인치 유탄포 8문)로 편성하는 것 이었습니다.2) 이 개편안의 목적은 미육군 보병사단의 포병전력을 유럽대륙의 보병사단 포병편제에 준하는 수준으로 증강하는 것 이었습니다.

※ 그리고 4.7인치 유탄포는 6인치 유탄포를 배치하는 방안으로 교체됩니다.

사실 1차대전 직전에는 포병전력 뿐 아니라 미육군 자체가 전반적으로 전력 강화에 부진을 겪고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1916년의 국가방위법(National Defense Act)이 목표로 한 것은 1921년까지 정규군을 165,000명, 주방위군(민병대)을 450,000명으로 증강하는 것에 그치고 있었습니다.3) 포병 증강을 위한 시도는 1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꾸준히 행해지고 있었지만 1917년 까지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계획만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포병 증강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조직된 트리트 위원회(Treat Board)는 1915년 4월 17일의 보고서에서 육군의 포병전력을 8년에 걸쳐 3인치 야포 1,968문, 3.8인치 유탄포 936문, 4.7인치 유탄포 312문, 4인치 야포 312문, 7.6인치 유탄포 104문, 11인치 유탄포 72문으로 증강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 방대한 계획에 필요한 예산은 총 4억8천만 달러로 예상되었습니다.4)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단포병의 주력장비가 될 3인치 야포의 개량형, M1916을 예정에 따라 충분히 확보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여전히 현대적 야포의 생산에 필요한 기술적 정보가 부족했으며 이때문에 1916년에는 병기국의 힐맨(L. T. Hillman) 소령을 유럽에 파견하기로 결정합니다. 힐맨 소령은 프랑스, 영국 정부와 접촉해 미국이 필요로하는 기술을 획득하려 했습니다. 프랑스는 처음에 미국측에게 기술을 판매하는 것을 기피했으나 힐맨 소령이 영국과 접촉해 빅커스(Vickers)의 9.2인치 유탄포와 12인치 유탄포의 설계도와 기술을 구매하자 태도를 바꿉니다. 힐맨 소령은 프랑스로 부터 생샤몽(St. Chamond)사의 야포용 완충기 생산권 등 중요한 기술을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5)

미 전쟁부는 1917년 부터 유럽으로 부터 구매한 신기술을 대거 활용해 대규모 포병증강계획에 돌입합니다. 역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단포병의 주력 장비인 3인치 야포와 6인치 유탄포의 대량생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게 되면서 자체적인 포병증강계획은 차질을 빚게 됩니다. 미국이 이제 막 유럽에서 도입한 신기술을 적용해 개량한 3인치 포는 시험 결과 수많은 문제를 일으켜 예정된 시간까지 유럽에 파견할 육군을 무장시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M1916은 물론 영국제 18파운드을 바탕으로 한 M1917의 시험 결과도 신통찮았기 때문에 미육군 포병감 스노우(William J. Snow)소장은 "우리는 이번 전쟁에 우리 군대를 야포로 무장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한탄을 했다고 합니다.6) 미국정부는 미국 원정군이 독립적인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가능한 "미국제" 장비로 무장하길 원하고 있었습니다.7) 하지만 현실은 미국의 "야무진 꿈"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 국 병기국장 크로지어(William Crozier) 소장과 프랑스 병기국장 갸네(M. J. M. Ganne)간에 1917년 5월 25일 진행된 회의에서는 프랑스제 야포를 도입해 미국원정군(AEF)을 무장시키고 미국제 야포는 국내에서 훈련용으로만 사용하는 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회의의 결과 프랑스 정부는 1917년 8월 1일 부터 75mm포를, 1917년 10월 1일 부터는 155mm포를 공급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따라 7월 9일에는 공식적으로 보병사단의 포병편제에서 3인치 포를 프랑스의 75mm포로 교체하고 6인치 포는 155mm유탄포로 교체한다는 명령이 내려집니다.8) 이미 미국원정군의 제 1진 14,000명은 1917년 6월 28일에 프랑스의 생나제르(St. Nazaire)에 도착했으며9) 다음날인 1917년 7월 10일에는 퍼싱 장군이 1919년 6월 까지 총 95개 사단을 편성하고 이 중 80개 사단을 유럽전선에 투입한다는 계획을 제출했습니다. 이것은 유럽에 투입할 80개 사단을 무장시키는데만 총 3,840문의 75mm급 야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당시의' 미국으로써는 단시일내에 그정도의 국산 야포를 배치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1918년 11월 11일까지 미육군에 총 3,352문의 각종 야포를 원조하게 됩니다.10)

※ 물론 국제관계가 다 그렇듯 미국도 날로 먹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프랑스 정부에 75mm포 1문당 6톤의 강철을, 155mm유탄포 1문당 40톤의 강철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11)

하 지만 그동안 진행되고 있던 3인치포 등 국산 무기의 개발을 취소하고 새로이 프랑스의 기준에 맞춰 야포와 탄약을 생산하는 문제는 쉽지않은 것이었습니다. 특히 프랑스가 제공하는 설계도 등을 번역하는 등 기술적 문제가 산적해 있었습니다. 75mm 포탄 생산을 위해 프랑스가 제공한 자료들의 번역이 완료된 것은 1917년 12월 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여전히 자국산 야포의 개발에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75mm포 면허생산을 공식적으로 결정한 것은 1918년 2월이 되어서였습니다.12) 그러나 기술적 문제로 생산이 계속 지연되었기 때문에 1차대전 중 미국 국내에서는 프랑스제 75mm포는 단 1문도 생산되지 못했고 대신 영국제 18파운드포를 기초로한 M1917이 724문 생산되는데 그쳤습니다. 미국이 면허생산한 프랑스제 야포는 146문으로 이중 144문이 155mm유탄포였습니다.13)

미국은 1차대전 중 프랑스제 야포를 매우 유용하게 활용했으며 특히 사단포병의 75mm포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물론 일부 지휘관들은 75mm의 탄두 위력 부족으로 사단포병에 1개 연대의 105mm 유탄포를 배치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전쟁이 끝날때 까지 75mm포는 사단포병의 주력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미육군이 75mm포에 크게 만족했기 때문에 1940년까지도 사단포병에 75mm 대신 105mm를 배치하자는 제안은 진지하게 검토되지 못할정도였다고 하지요.14) 그리고 155mm 구경은 오늘날에는 서방 국가들의 표준적인 야포 구경이 되었습니다. 만약 미국이 원래 계획대로 인치 구경을 사용하는 자국산 야포의 대량생산에 성공했다면 오늘날 표준적인 야포구경은 6인치가 되어 있겠지요.




1) H. A. De Weerd, "American Adoption of French Artillery 1917-1918", The Journal of the American Military Institute, Vol. 3, No. 2, (Summer, 1939), pp.104~105
2) Vardell E. Nesmith Jr, "Stagnation and Change in Military thoght : The Evolutuion of American Field Artillery Doctrine 1861~1905", U.S.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1976, p.284
3) Mark E. Grotelueschen, The AEF Way of War : The American Army and Combat in World War I,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11
4) De Weerd, Ibid., p.106
5) De Weerd, Ibid., p.108
6) Robert B. Bruce, A Fraternity of Arms : America and France in the Great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pp.100~111
7) Elisabeth Glaser, "Better Late than Never : The American Economic War Effort, 1917~1918", Great War, Total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2006, pp.405~406
8) De Weerd, Ibid., p.110
9) Bruce, Ibid., p.91
10) Bruce, Ibid., p.105
11) Bruce, Ibid., p.106
12) De Weerd, Ibid., pp.111~112
13) De Weerd, Ibid., p.116
14) Janice McKenney, "More Bang for the Buck in the Interwar Army: The 105-mm. Howitzer", Military Affairs, Vol. 42, No. 2, (Apr., 1978), pp.80~81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까요?

흥미로운 떡밥이 투하됐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해지는군요.

추가. 오늘은 31차 한미군사위원회 회의가 있었습니다. 내일은 한미안보협의회가 있을 예정이지요.

國漢混用의 필요성


쓸데없는 오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네. 물론 저는 국한혼용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농담입니다.

2009년 10월 18일 일요일

질보다 양?!

'영국'이라는 단어와 '전차'라는 단어는 따로 사용할 때는 뭔가 멋진 느낌을 주지만 함께 사용할 경우에는 희극의 탈을 쓴 비극이 된다지요.

영국 육군은 북서유럽에서 대재앙을 겪는 바람에 장갑차량을 대부분 상실했으며 신형 전차를 개발하는 것 보다는 실용성과 유용성을 갖추었다고 판단되는 전차라면 무엇이든지 생산부터 하는 것에 우선권을 두었다. 영국은 이미 프랑스가 붕괴하기 이전 부터 전차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 질보다 양을 중시하고 있었는데 1940년 여름에는 영국 본토와 다른 지역을 방어하는 문제가 최우선과제였으며 이러한 경향이 1941년 부터 1942년까지 전차 생산을 좌우했다.

이런 압력은 설계도 단계의 전차에 생산 결정을 내리고 시험평가도 부족한 전차를 양산하는 정책을 채택하도록 만들었다. 이 방법은 요구사양의 결정에서 선행양산품(pilot) 생산까지의 시간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시제품을 생산할 필요성을 줄였다. 이러한 정책은 다른 분야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육군은 이 정책을 단지 장갑차량의 생산에만 적용했다. 그 성과는 경우에 따라 달랐다. 실제로 1942년 하원의 보고에서는 '우리는 시제품 생산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곧바로) 생산을 하는 것(we were not avoiding the manufacture of prototypes, we were manufacturing nothing else)'이라는 발언이 있었다.

이렇게 숫자부터 채우자는 정책은 여러가지 문제점을 불러왔으며 그 중 하나로는 막대한 투자를 퍼부은 A13 코베난터(Covenanter) 전차가 있었다. 이 전차는 무작정 생산을 시작했지만 자체적인 결함과 전반적인 신뢰성 부족 때문에 실전에는 투입도 하지 못 했다. 뿐만아니라 "설계도 단계에서 생산명령이 내려진(off the drawing board)" 또 다른 사례 중 하나인 A22처칠은 시간이 지난 뒤에는 연합군의 장비 중 효율적이고 유용한 것이 되었으나 처음 배치될 당시에는 자질구레한 문제와 결함에 시달렸다.

John Buckley, British Armour in the Normandy Campaign 1944, Frank Cass, 2004, p.162~163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는 다들 잘 아시죠?

Cat Shit One 80 VOL.2

용역비를 받아서 질렀습니다.

"적의 최후 방어거점입니다."

"구르카부대를 투입해!"

"메에" "메에" "메에"

"구르카부대, 돌격전진!"

"메에!" "메에!" "메에!" "메에!" "메에!" "메에!" "메에!" "메에!" "메에!" "메에!" "메에!"

"안되겠다"

"항복하자"


푸하하하!


저작권 문제로 이 장면을 그림으로 올릴수 없는게 아쉽군요.

한미관계에 대한 어떤 논평

최근 이글루스에서 한일회담과 관련된 토론이 진행중입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논쟁거리여서인지 좋은 글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저는 특히 번동아제님의 '한국이 원하는 돈을 받지 못한 이유'를 가장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번동아제님께서는 이 글에서 한일협정이 진행되던 과정의 국제적 정세와 당시 한국이 처한 한계점에 대해 명료하게 정리를 해 주셨는데 저 또한 이 글의 주된 논지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저도 뭔가 사족을 조금 달아볼까 했는데 생각해 보니 한일협정과 관련된 문서는 주로 이승만 정부 시기에 이루이전 협상에 대한 문서만 조금 읽었는지라 박정희 정부 시기의 한일협상에 대해서는 마땅히 적을 만한 것이 없더군요;;;; 대신 당시 한일협정 문제로 고조된 반미/반일감정을 경계하는 보수적인 지식인들의 견해를 보여주는 글을 한 편 소개해 볼까 합니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재직중이던 박준규(朴俊圭)는 시사잡지인 청맥 1965년 1월호에 「條約協定으로 본 韓美關係」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습니다. 이 글의 결론부분에서는 당시 한일협정 체결문제로 격앙된 민족감정을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전략)

이상에서 몇 가지 주요 조약과 협정을 통하여 한미관계를 고찰하였다. 결과적으로 느껴지는 것은-적어도 조약 및 협정의 조문을 통해서는- 과연 우리는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마땅히 받어야 할 대접을 받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 다음에 느껴지는 것은 대체로 미국은 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소극적이고 회피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 문제를 하나의 가외(加外)의 부담으로 생각하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의아심이다. 그리고 최근의 미일관계를 조감할 때 미국의 한국과 일본에 대한 비중의 격차가 너무나 현격하다는 비애감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느낌을 어떻게 승화시키고 한미관계를 어떻게 조정해나가느냐가 한국의 당면한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한미관계를 국가대 국가의 외교관계로서 고찰할 때 우리는 미국에 대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친 기대를 걸고 있는것이 아닌가를 재삼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국제사회란 도덕사회도 자선사회도 아니며 그곳에서는 '힘'의 서열에 따라서 응분의 지위가 규정되며 각자의 지위에 따라서 응분의 대우를 받기 마련이다. 일본이 한국보다 월등한 비중의 대우를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는 것도 그러한 원리로 부터 연유하는 것이며 어느 의미에서 한국은 미국의 대우를 탓하기 전에 스스로의 무력함을 한탄해야 할 입장인지도 모른다.

일본이 받고있는 정도의 대우를 미국으로부터 받지 못한다고 반미적 감정에 흐른다거나 한미관계의 역사적 의의를 망각하고 미국 이외의 다른 강국(예컨데 일본)과 새로운 기축(基軸)관계를 형성하려고 덤벼드는 것은 모두가 '한국의 국가이익'에 배치되는 처사라고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한반도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2차대전 말기에 한국을 분점(分占)하게 된 것은 대일전쟁 종결을 위한 전략적 고려의 결과였으며 한반도에 항구적으로 고착할 의도를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대한정책은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지만 한미관계의 기축이 변동할 리는 없을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대미일변도니 사대주의니 하고 비판할는지도 모르나 세계정치의 현세하(現勢下)에서 소위 중립국가를 제외한 국가로서 미국 혹은 쏘련과의 기축에 크고 작고간에 의존하지 않는 나라가 몇개나 되는지 따져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영국, 서독, 일본 등은 말할 필요도 없고 '드골'의 프랑스가 큰소리 칠 수 있는 것도 역시 미국 세력의 배경하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한국처럼 미국의 전쟁처리 과정에서 탄생한 나라가 대미관계를 국가 이익의 기축으로 삼는것은 자명의 이치라 하겠다.

(후략)

朴俊圭,「條約協定으로 본 韓美關係」, 靑脈 第5號(1965.1), 82~83쪽

지금은 이 당시보다 사정이 많이 좋아졌지만 큰 틀은 유지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입니다. 물론 '민족감정'에 입각해서 본다면 당시 협상은 굴욕적인 면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어쩔수 없는 당시의 국제적 역학관계가 그대로 반영된 것 이었습니다. 우리가 강화협상에 승전국의 지위를 가지고 참여할 수 있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수는 없었지요.

사실 논쟁의 시발점(?) 이었던 슈타인호프님의 글이나 번동아제님의 글은 어디까지나 당시 협상이 진행된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필요이상으로 흥분하는 분들이 보이는 것 같아 구경하는 입장에서 약간 난감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1964년이 아닌데 말입니다.

잡담하나. 한일협정관련문서가 공개된 뒤 동아일보에서는 이 협정 문서 전체를 PDF로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한일회담 관련 공개 문서 全文 다운 받기

2009년 10월 14일 수요일

인터넷의 유용함

어떤 책을 읽던 중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인용한 재미있는 구절이 나오더군요. 영어로 "The deeper we delve in search of these causes the more of them we find"라고 번역된 부분이었는데 책에는 어디서 인용했는지 따로 설명이 없어서 출처가 꽤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구글 검색창에 해당 구문을 넣고 검색하니 전쟁과 평화 9권 1장이 뜨더군요. 만약 인터넷이 없었다면 영어로 번역된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일일이 읽어보며 이 구절을 찾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을 텐데 인터넷 덕분에 그런 수고를 덜게 되었습니다.

잡담하나. 그런데 평소에 고전을 즐겨 읽었더라면 바로 알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문학과 담을 쌓고 살다 보니 결국 교양인과는 거리가 먼 아주 재미없는 사람이 된것 같습니다;;;;

2009년 10월 13일 화요일

이태준의 스탈린그라드 기행기

이태준(李泰俊)은 식민지 시기의 문인 중 가장 유명한 편인데 해방 이후 월북해버려 노태우 정권하에서 월북작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있기 전 까지는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그의 작품들을 접할 수 없었습니다. 네. 물론 이 어린양도 문학쪽에는 관심이 없지만 북한 현대사에는 관심이 있다 보니 이태준의 글들을 조금 읽은 편인데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것이 논픽션인 『소련기행』입니다.

『소련기행』은 이태준이 1946년 8월 소련을 방문해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 등 여러 지역을 여행한 경험을 기록한 글로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이 강하긴 해도 종전 직후 소련의 모습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스탈린그라드를 다룬 부분은 매우 재미있는데 이 중 마마예프 쿠르간에 대한 묘사가 아주 좋습니다. 해당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9월 19일.

일찍부터 전적(戰跡) 구경을 나섰다. 먼저 옆에 있는 전사광장, 여기는 이번 싸움(독소전쟁)보다 10월 혁명 때 혁명군 54명이 사형받은 광장으로 기념되는데 광장 중앙에는 공원처럼 된 그들의 묘가 화원과 화환과 기념비로 장식되어 있다. 광장 주위는 모다 속은 타버린 거죽만 5, 6층의 대건물들로 둘리웠는데 그 독군사령관(파울루스)이 잡힌 백화점, 혁명 때 '혁명군'이란 신문이 발간되던 집, 이런 유서 깊은 집들이 지하에서 발굴된 고대의 유적들처럼 잔해들과 침묵으로 둘려 있었다.

다음으로는 강변에 가까이 있는 침입하는 독군을 향해 최초의 공격을 개시한 '5월 9일광장' 그리고 바로 그 옆인 '빠블로브 군조관(дом павлова)'을 구경하였다. 과히 크지 않은 벽돌 4층의 건물인데 독군에게 포위되어 우군과 연락이 끊어진 곳에서 하졸 8명을 다리고 빠블로브(Якоб Павлов) 군조가 57일간 싸워 네 명은 죽고 군조와 다른 네 명은 지하도를 뚫고 생환하여 영웅 빠블로브는 지금 독일 점령지에 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공동주택으로 쓰고 있으나 이 집을 기념키 위해 먼저 나선 것이 '첼까쓰운동'의 주인공 알렉산드라 첼까쓰 여사로서 가장 맹렬한 사격을 받어 허물어진 한편을 서툴은 솜씨로나마 고쳐 쌓어서 집 면목을 유지시킨 것이 이 여사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여자들도 벽돌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에서 '첼까쓰운동'이 일어난 것이니 이 집에서 영웅 두 사람이 난 것이였다. 전후좌우 할 것 없이 용케 무너지지 않었고 벽돌 한 장 한 장 성한 장이 별로 없다. 창마다 문마다에는 더욱 사격이 집중되어 창틀, 문틀은 모두 새로 고쳐 쌓었다.

여기서부터 10리나 되게 공장지대만을 지나보는데, 공장이 무너지고 불타고 한 것은 철근의 난마(亂麻) 무데기요, 큰 빌딩만큼한 석유탱크, 까쓰탱크가 무수한데 모두 불에 녹아 바람 빠진 고무주머니가 되어 어떤 것은 아주 주저앉어버렸다. 이런 공장지대엔 큰 건물들이 벌써 많이 새로 서있었다. 우리는 공장구경은 오다 하기로 하고 그 길로 '마마애브' 구릉으로 왔다.

이 언덕은 스딸린그라드의 유일한 고지로서 여기를 차지하고 못하는 것이 서로 승패의 운명을 결하는 것이 되였다. 주위 10리는 넘을까 고도도 시가에서 4, 50척 될지한 정도다. 나무도 별로 없다. 잔숲이 군데군데 있으나 그 뒤에 자란 것들일 것이다. 큰 전차 한 대가 보인다. 이것은 기념으로 남겨둔 것으로 우군 응원전차대가 가장 깊이 들어왔던 선봉전차였다 한다. 탄피는 걸음마다 밟히고 가장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은 여기 저기 해변에 조개껍질 나부끼듯 하는 임자 없는 쇠 전투모들이다. 산적했던 전차, 트럭, 대포, 비행기, 기관총 등의 잔해를 기계로 긁어가고 철모, 혹은 벌써 자루가 썩고 녹투성이가 된 총신들은 다시 부스러기로 떨어진 것이라 한다. 뒹구는 철모는 탄환에 구멍 뚤린 것도 많었다. 독군 시체만 14만이 넘었다니 이 임자 없는 전투모인들 얼마나 많었으랴! 장비 좋은 독군으로도 가장 중장비와 중포(重砲), 중전차(重戰車)로 들어왔던 곳이 여기라 한다. 이 언덕에서만 독군의 시체 14만 7천, 포로가 9만 1천, 그 중에 장관만 25명, 장교 2천5백, 대포 4천, 자동차 6만, 비행기 3천여대 였다 한다. 적시(敵屍)만 14만7천! 얼마나 많은 피였을까! 여기 저기 피 묻은 군복자락 썩는 것이 그냥 나부낀다. 푹신푹신한이 붉으레한 황사언덕, 걸음마다 아직도 신바닥에 피가 배일 것 같다. 더욱 언덕 밑에서 독군포로들이 수도공사로 땅을 파고 있는 것과 건너편 마을 가까이서 꽝 소리가 나더니 검은 연기가, 영화에서 보던 폭탄처럼 올려솟는 것이 실감을 준다. 전적을 설명해주던 장교의 말에 의하면 아직도 지뢰가 가끔 저렇게 터지기 때문에 길 이외에는 들어서기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태진, 『소련기행ㆍ농토ㆍ먼지』, 깊은샘, 2001, 112~114쪽

구글 블로거의 라벨 제한

글을 수정하다가 라벨(다른 블로그의 태그 정도 되겠군요) 제한에 걸렸다는 오류 메시지가 나와서 당황했습니다. 구글 블로거는 라벨을 최대 2000개 까지만 허용한다는 군요. 이런 저런 글을 쓰다 보면 여러가지의 라벨을 달게 되는데 구글이 인심(?)을 써서 라벨 제한을 올려주거나 해제하지 않는 이상 새로운 라벨은 더 달수 없을 것 같습니다. 기존 라벨 중 잘 쓰지 않는 것을 몇 개 지워볼까 했는데 그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겠더군요.

2009년 10월 11일 일요일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 장비 상태에 대한 독일군의 평가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1942년 하계공세를 준비하고 있던 1942년 6월, 이탈리아군에 배속된 독일군 연락본부(Verbindungskommandos)는 이탈리아군의 장비현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2. 장비상태(Ausrüstung)

a) 화기 및 장비
: 보병용 소화기 - 기관총과 박격포는 쓸만하다. (이탈리아군의) 기관단총은 각 부대에 보급된 수량이 적다.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부족한 수량은 보충되었다.
: 포병 - 사단포병의 75mm와 100mm포는 사정거리와 위력이 부족하다. 군단포병의 105mm포(사정거리 13km)는 훌륭한 포이다. 단점은 탄도가 곧은 편이라는 것이다. 현재 포신은 과도하게 사격한 상태이다. 교체할 포신이 수송중에 있다. 대전차용 탄약이 전혀 없다. 75mm와 20mm 대공포는 훌륭한 장비이나 마찬가지로 대전차용 탄약이 전혀 없다.
: 대전차포 - 보병연대와 군단 직할, 사단 직할의 대전차 부대는 공통으로 47mm를 장비하고 있다. 포의 위력에 있어 독일군의 구형 37mm포에 상응한다. 포구초속은 360m/sec이며 유효사거리는 700m라고 말해지고 있지만 실제로는200m에 불과하다. 소련군의 중형 전차 및 중전차에 대항할 장비가 부족하다. 75mm 대공포는...(후략)
: 공병장비 - 목재부교는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성능을 입증했다. 독자적인 건설 방법으로 통과중량(Tragfähigkeit)을 5-10톤에서 7-13톤으로 증가시켰다.
: 통신장비 - 수량과 성능 모두 불충분하며 유선전화기의 경우 구식이고 습기에 민감한데다 케이블도 부족하다. 무선통신장비는 부분적으로 현대화되어있고 성능도 좋은 편 이지만 야전에서의 유용성이 떨어진다.

b) 차량현황
: 현재 기동성이 심각하게 감소된 상태이다. 이탈리아군의 차량 가동 현황은 다음과 같다. 쾌속(Celere)사단 75%, 파수비오(Pasubio)사단과 토리노(Torino)사단은 35~40%. 모든 정비부대를 통합하고 현재 보충용 차량을 배치하는 방법으로 (군수참모의 견해에 따르면) 2개 사단의 차량가동율을 3주 이내에 15~20% 정도 상승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밖에 현재 이탈리아군은 차량화된 수송부대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새로 배치된 차량 : 매우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 더 많은 수송부대가 (이탈리아) 8군의 차량수송에 투입되고 있다. 보병부대의 차량인 1톤 트럭(LKW)을 수송용차량으로써 평가하면 강력한 엔진을 가지고 있으나 야지주행능력은 굴곡이 없는 지형에 한정되어 있다. 2륜 오토바이와 3륜 오토바이는 훌륭한 장비이다. 화물차의 대부분은 디젤을 사용하고 있으며 가솔린을 사용하는 차량은 일반적으로 반궤도차량, 고기동 트럭(화학대대에 배치된), 트레일러(Karette), 병력수송차량 및 오토바이 등 [으로 제한되어 있다] 평상시의 소모는 2/3이 디젤이고 1/3이 가솔린이며 모든 차량의 운용에는 V.S*가 1/2에서 1/2이다.

c) 마필현황

각 기병연대와 마필화 포병연대의 마필 현황은 (편제의) 50% 수준이다. 보충용 마필이 도착하는 중이다. 보병연대의 노새는 마찬가지로 (편제의) 50%이다.

d) 피복

정상적이다. 동계 피복은 대부분 항공수송을 통해 적시에 도착하였다. 매우 훌륭하다.(Sehr Zweckmäßig) 하계피복은 상의만이 확보된 상태이다.1)
*1V.S.(Verbrauchssatz)는 해당 부대의 전 차량이 100km 이동할 수 있는 연료량을 뜻함.

독일군의 평가는 이탈리아군의 고질적인 약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화기의 부족, 통신수단의 부족, 수송수단의 부족.

이 세가지 모두 현대 전쟁에서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고 특히 기동전이 중심이었던 동부전선에서는 그야말로 중요한 요소였지요. 불행하게도 이탈리아군은 이 모든 것을 결여하고 있었습니다. 피복상태는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옷이 좋다고 싸움을 잘 하는건 아니죠;;;;

동부전선에 파견된 이탈리아군은 이 시점에서는 제8군으로 개편되어 있었습니다. 인용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단들은 1941년 파견된 이탈리아 러시아원정군단, CSIR(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에 소속되어 있던 부대들로 고참사단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CSIR에 배속된 사단들은 제가 예전에 쓴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에서 언급했듯 명칭상으로는 모두 그럴싸한 차량화사단(Divisioni autotrasportabile), 쾌속사단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차량화 사단이었던 파수비오 사단과 토리노 사단은 소련으로 출동할 당시 부터 말로만 차량화였고 보병연대는 도보 부대였다고 하지요.2) 어쨌든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될 당시에는 소련군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군의 이런 약점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탈리아군은 키예프 포위전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했으며 스탈리노를 점령하는데도 꽤 기여를 해서 클라이스트 장군도 호평을 했다고 하지요.3)

하지만 1942년으로 접어들면서 이런 약점은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탈리아군은 1941/42년의 겨울 방어전에서도 꽤 괜찮은 성과를 냈지만 상당한 장비를 손실했고 이 때문에 원래부터 좋지 않던 사단들의 장비상태도 더 나빠졌다는 점 입니다. 독일군은 이탈리아군이 동부전선의 작전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1941년에 무솔리니가 이탈리아군을 추가로 파병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수송능력의 부족등을 이유로 거부한 바 있었습니다.4) 그러나 잘 아시다 시피 독일은 1941/42년 겨울에 큰 타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하계공세 준비를 위해 이탈리아 등 동맹국들에게 추가 파병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탈리아가 추가로 파병한 사단들은 1941년에 파병한 사단들에 비해 장비면에서 나을것이 없는 부대들이었고 이러한 부대들은 1942/43년 겨울에는 소련군의 반격에 그야말로 철저하게 박살이 나게 됩니다.

※소련군의 동계공세 당시 이탈리아군의 장비 현황에 대해서는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에 간략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특히 위에서 언급했듯 차량을 포함한 기동수단의 부족은 공격 보다 방어전에서 결정적인 약점이 됩니다. 알피니 군단과 같은 정예부대는 전력의 열세에도 분전했지만 장비의 열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반 보병사단이었던 라벤나(Ravenna) 사단은 1942/43년의 동계전투에서 야포를 포함한 각종 장비를 90%이상 상실했습니다.5) 만약 충분한 수송/견인수단이 확보되어 있었다면 피해를 조금 더 줄일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수송수단의 부족은 장비 뿐 아니라 병력손실을 크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소련군이 12월 25일에 알렉세예보-로소브스코예를 차단하자 후퇴하던 이탈리아군은 와해되어 1만5천명 이상이 생포되었습니다.6) 독일군도 차량 등 수송수단의 약화가 심각해진 1943년 이후로는 비슷한 경우가 많아집니다.

이탈리아 제8군이 동계전투에서 괴멸된 뒤에도 이탈리아 측은 최소한 이탈리아군 1개 군단은 동부전선에 잔류시키고자 했다고 합니다.7) 그러나 결국 이탈리아군은 동부전선에서 발을 빼게 됩니다. 이 무렵이 되면 이탈리아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으니 말입니다. 1943년으로 접어들면 미영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로 침공해 오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이탈리아의 빈약한 공업능력을 고려해 본다면 이탈리아가 항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1개 군단을 동부전선에 잔류시켰다 하더라도 그 전력은 1941년의 CSIR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 'Bericht des Deutschen Verbindungskommandos über das italienische Expeditionskorps vom 9. Juni 1942', Thomas Schlemmer(Hrsg),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Dokumente zu Mussolinis Krieg gegen die Sowjetunion, Oldenbourg, 2005, ss.95~96에서 재인용.
2) Gerhard Schreiber, 'Italiens Teilnahme am Krieg gegen die Sowjetunion', Stalingrad, Piper, 1992, s.259.
3) Richard L. DiNardo, Germany and the Axis Powers : From coalition to Collaps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127.
4) DiNardo, ibid. p.129.
5) 'Gefechtsbericht des Deutschen Verbindungskommandos bei der Division "Ravenna" vom 20.März 1943', Thomas Schlemmer(Hrsg),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Dokumente zu Mussolinis Krieg gegen die Sowjetunion, s.123에서 재인용.
6) Peter Gosztony, Hitlers Fremde Heere : Das Schicksal der nichtdeutschen Armeen im Ostfeldzug, Econ Verlag, 1976, s.319.
7) DiNardo, ibid. p.155.

2009년 10월 10일 토요일

나는 군대에 가지 않았는데...

클린턴이 대선 출마를 고려하던 무렵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클린턴과 그의 측근들은 대체로 대선의 가능성에 대해 약간 긍정적이거나 최소한 분위기를 살펴보자는 쪽이었다. 대선에 출마한다는 구상은 4년 전 부터 주지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들의 측근들이 고려하던 것 이었다. 클린턴은 1988년 대선을 얼마 앞두고 출마를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그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과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그 생각을 철회해야만 했다. 그러나 대선 출마에 대한 구상을 결코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1990년, 클린턴은 재선 운동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와 그의 참모들은 적절한 시점에 성공적인 전략을 사용했으며 그는 다시 낙승을 거둘 수 있었다. 클린턴과 그의 아내 힐러리, 그의 선거참모인 프랭크 그리어(Frank Greer), 여론조사가인 스탠 그린버그(Stan Greenberg), 그리고 소수의 가까운 측근들은 주지사직을 확보하자 즉시 1992년 대선에 대해 구상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모두 클린턴이야 말로 민주당을 통털아 가장 유능한 중도적 인물이라고 믿었다. 이들의 모임은 1990년 12월 초 부터 시작되었으며 1991년 초에는 더욱 더 심각하게 진전되었다. 그러나 그때 걸프전쟁이 터졌으며 부시의 인기도는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아 별반 잃을 것이 없던 클린턴 조차도 대선에 뛰어드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클린턴은 그리어에게 이렇게 물었다.

"미국인들이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대통령을 내쳤다는 이야길 들어 봤나?"

그리어는 자신은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 했다고 대답했지만 또한 매우 유동적인 시대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적 대중매체의 위력 때문에 과거의 규칙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다는 것 이었다. 그리어는 정치적 흐름은 훨씬 빨리 변화하고 예측하기 어려워 졌다고 말했다.

클린턴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군대에 가지 않았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었는데."

그리어가 대답했다.

"저도 군대에 가지 않았고 베트남전에 반대했습니다."

그리어는 한 반전단체의 활동을 도운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어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리고 국민 대부분이 군대에 가지 않았습니다."

클린턴은 마침내 대선에 뛰어들 결심을 했다.

David Halberstam, War in a Time of Peace : Bush, Clinton, and the Generals, (Scribner, 2001), p.19

지원병제를 실시하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병역이 한 번 정도는 고려해 봐야 할 문제였다는 점에서 꽤 재미있게 읽은 부분입니다.

최근의 사건들을 보면 군복무 문제는 우리에게 있어 참으로 뜨거운 감자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회창 같은 거물도 자녀의 병역문제로 격침당했고 최근에는 정운찬 총리가 비슷한 문제로 고역을 치렀지요. 그리고 한 편에서는 또다시 식지않는 떡밥인 군가산점 문제가 다시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만약 대한민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지원병제로 전환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 집니다. 최소한 요즘 처럼 병역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정치인들은 없겠지요. 클린턴은 걸프전 때문에 병역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했다지만 특별히 전쟁할 일이 없는 대한민국이라면 의무 병역이 폐지될 경우 정치에 뛰어들려는 엘리트들은 한가지 부담은 덜게 될 것 입니다.

시민의 상당수가 군대와 무관한 상황이 오게 된다면 병역문제는 어떤 존재가 될까요? 의무 병역제는 인권 침해라는 측면에서 아주 고약한 제도이긴 합니다만 한국에서는 그나마 엘리트들이 적어도 선거철에는 시민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 장치라는 점에서 아직까지는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고 봅니다. 물론 병역 문제가 아니더라도 정치인들이 시민의 눈치를 봐야할 것이 많긴 합니다만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병역 만큼 효과적인 것이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2009년 10월 8일 목요일

되는 일이 없습니다;;;

요즘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아주 멋지게 꼬이는 중 입니다.

면담 대상자들이 최하 1920년대에 출생하신 분들이다 보니 연락을 해 보면 몇 주전에 돌아가셨다, 치매라 대화가 불가능하다 같은 대답이 돌아오고 있지요. 정말 위기의식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다 발주처에서 돈 토해내라 그러는건 아닐까 하는 망상까지 들 정도이죠.

한 20년 정도 일찍 시작했으면 좋았을 사업인데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신 분들은 혹시나 나중에 술자리에서 뵙게 되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2009년 10월 5일 월요일

뭐냐. 이 '남조선'스러움은???

地方の医師不足対策 医学生に新奨学金検討 文科省

한국어로 옮기고 명사만 바꾸면 한국 이야기라고 해도 믿겠군요.

각 지자체가 의료인력 부족에 대해 자구책에 고심하는 것이나 정부차원에서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야 나쁘진 않지만 지역사회의 공동화가 이정도로 심각하다니 비참한 일입니다. 정말 다른나라 이야기 같지가 않군요.

예전에 채승병님이 블로그에서 다루었던 일본 사회의 '지역격차'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책을 읽다 보니...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전 예멘 대사 유지호씨가 쓴 『예멘의 남북통일』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겠지만 예멘의 통일은 한국의 진보 계열에게는 독일식의 흡수통일에 대한 대안으로 인식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뭐 얼마가지 않아 예멘 내전이 발발해 예멘 통일을 찬양하는 주장들이 쑥 들어가 버렸지만 말입니다. 몇몇 논객들은 예멘의 사례를 모범적으로 치켜세우다가 예멘이 내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자 꽤 당황해 했다고 하지요. 유지호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예멘이 내전에 돌입하자 한국에서는 크게 실망하는 분위기가 나타난 반면 서방에서는 예상했다는 듯 시니컬한 반응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에게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려는 성향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당시의 진보적 지식인들을 마냥 비판하는 것도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때의 일과 관련해서 자신의 실수가 잊혀질 때 까지 잠자코 있다가 슬금슬금 목소리를 높이는 양반들을 보면 난감함을 느끼곤 합니다. 왜이리 다 큰 어른들이 쿨하지 못한 것인지.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휴같지 않은 연휴는 잘들 지내셨습니까?

얼마전 이야기 했듯 그동안 남발한 공수표를 조금씩 수습해 볼까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유명한 '슐리펜 계획(Schlieffenplan)'에 대한 한 논쟁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 논쟁은 10년간 계속되면서 매우 재미있는 단행본과 논문들을 생산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간략하게 이 논쟁의 진행상황과 그 부산물(?)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논쟁의 시작

1999년 War in History 6권 3호에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의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라는 제목의 논문이 실렸습니다. 주버의 이 논문은 매우 논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다른 학술지에서 거부를 당하고 있었는데 War In History의 공동편집자였던 군사사가 휴 스트라찬(Hew Starchan)은 War in History에 이 논문을 게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주버의 이 논문은 매우 엄청난 주장을 담고 있었는데 한마디로 '슐리펜 계획'이란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 논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오 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슐리펜 계획은 독일군 총참모부 출신의 군인들이 1차대전 직후 군부에 쏟아진 패전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공간사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유명한 군사사가이자 군사평론가였던 한스 델브뤽(Hans Delbrück)은 전쟁 기간 중 독일군 총참모부의 전쟁지휘에 대해 비판을 가했고 군부에서는 이러한 민간의 비판에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전쟁후 1차대전 중의 군문서는 기밀로 분류되어 제한적인 장교들만이 접할 수 있었으며 헤르만 폰 쿨(Hermann von Kuhl), 볼프강 푀르스터(Wolfgang Foerster)등 이 문서를 접할 수 있었던 소수의 장교들은 독일군부의 책임을 완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슐리펜이 훌륭한 전쟁계획을 남겼으나 후임자인 몰트케가 이를 올바르게 실행하지 못해 전쟁에 승리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초반에 이에 대한 일련의 논쟁이 있었으나 원사료에 접근할 수 있는 인원은 제한되었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이 1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작전계획이었다는 점은 정설로 굳어졌다. 이후 1990년대 까지 원사료를 활용한 연구는 1950년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독일 노획문서에서 슐리펜의 (실제로는 1906년 1월 경 작성한 된) 1905년 비망록(Denkschrift)을 발굴한 게르하르트 리터(Gerhard Ritter)의 연구가 사실상 유일한 것이었으나 리터 또한 슐리펜 계획이 실제 전쟁계획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이후 1990년대까지 대부분의 연구들은 1920년대에 확립된 시각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된 뒤 냉전기간 동안 기밀로 묶여있던 공산권의 자료들이 대량으로 공개되었다. 경제사가이며 군인이었던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이 1930년대 후반에 작성한 슐리펜 계획에 대한 연구는 슐리펜이 총참모장 재직기간 중 작성한 작전계획에 대한 여러 비망록을 보여주고 있다. 슐리펜이 1890년대 후반 부터 퇴임 직전까지 작성한 비망록을 분석하면 슐리펜은 다양한 전쟁계획을 검토했으며 서부에 대한 공세 외에도 동부에 대한 공세도 진지하게 검토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또한 1904년에 총참모부가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를 상정하고 실시한 두차례의 참모부연습(Generalstabsreisen)은 주공을 우익에 두고있지 않다. 그리고 이 참모부연습에는 실제 편성된 부대 뿐 아니라 편성되지 않은 가상의 부대도 포함되어 있다. 슐리펜이 1905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은 우익에 주력을 집중하는 등 흔히 알려진 '슐리펜 계획'과 비슷한 병력배치를 하고 있지만 프랑스군의 주력이 알자스-로렌 방면으로 공세를 개시할 경우 우익에 배치된 병력을 차출해 프랑스군의 좌익을 공격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슐리펜 계획'과 다르다. 결정적으로 슐리펜은 1905년 겨울에 있었던 그의 마지막 참모부연습에서는 '전략방어'를 취했다. 슐리펜이 실시한 여러차례의 참모부연습 중 오늘날 알려진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것은 없다. '슐리펜 계획'이 실제 전쟁계획이었다면 이 계획에 입각한 훈련이 실시되었어야 하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1905년 비망록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부대들 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 작전계획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늘날 '슐리펜 계획'으로 알려진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단지 그가 구상한 여러 '참모부연습' 중 하나일 뿐이다. 슐리펜이 사망하기 직전인 1912년에 작성한 비망록은 '슐리펜 계획'의 연장선 상에 있는 자료로 인용되었으나 이 비망록은 슐리펜이 현역 시절 실시했던 여러 참모부연습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으로 실제 결전은 벨기에에서 벌어질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또한 슐리펜의 후임인 소(小) 몰트케가 '슐리펜 계획'을 전쟁계획으로 넘겨받았다면 그가 재임하던 시기에 이 계획, 즉 1905년 비망록에 따라 훈련을 실시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몰트케는 1906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에서 프랑스군이 공세에 나설 경우 슐리펜이 1904년 훈련에서 제안한 바 있었던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 대신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했던 대로 메츠(Metz)를 통한 반격을 실시하고 있다. 몰트케가 실시한 1908년의 참모부연습도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을 개시할 경우 반격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이것은 프랑스가 방어를 취하고 독일이 전략적인 공세로 나선다는 오늘날 알려진 '슐리펜 계획'과는 다른 것이다.

주버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슐리펜과 소 몰트케는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을 감행할 경우 반격으로 이것을 격파하고 프랑스 영내로 침공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즉 '슐리펜 계획'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There never was a 'Schlieffen Plan')


홈즈의 반론과 주버의 재반론

이렇게 주버가 새로운 자료에 근거한 '거대한 떡밥'을 던지자 이 바닥에서 침 좀 뱉는다는 인물들이 논쟁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웨 일즈 대학의 테렌스 홈즈(Terence M. Holmes)는 같은 학술지의 2001년 8권 2호에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라는 논문을 기고합니다. 홈즈의 반박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주버의 논문은 '슐리펜 계획'인 1905년 비망록을 슐리펜의 다른 비망록, 또는 참모부연습과는 매우 다른 돌출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주버는 당시의 전략적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먼저 러일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의 군사적 취약성이 명백해 졌으며 이것은 슐리펜이 서부 전선에 주력을 집중하도록 하는데 중대한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한데 주버는 이 사실을 축소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의 공세적 작전계획인 12호 계획은 러시아와의 양면 공세를 염두에 둔 것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동원이 완료되기 전에는 실시될 수 없었으며 슐리펜은 이 점을 명백히 간파하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한 것 또한 프랑스군의 공세를 분쇄하더라도 단순히 반격을 통해 독일-프랑스 국경을 돌파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이 점은 슐리펜이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강조한 바 있다. 파리 서쪽으로의 대규모 우회기동은 프랑스군 주력을 조기에 격파하지 못하고 이들이 국경지대의 요새로 퇴각해 방어로 전환할 경우, 즉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 계획이었다. 주버가 강조한 것과는 반대로 슐리펜은 국경지대의 전투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았다.
'슐리펜 계획'인 1906년 1월의 비망록이 작성된 배경은 슐리펜이 여러 차례의 도상 훈련과 정보를 종합해 국경지대를 통한 반격으로는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인식했다는 데 있다. 슐리펜은 여러차례의 참모부연습을 통해 프랑스군의 주력을 조기에 격파하지 못하고 단계적인 철수를 허용하게 된다면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의 우회기동을 실시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슐리펜이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은 그가 은퇴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계획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반영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주버는 1904년 참모부연습이 주력을 우익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잘못된 것이다. 1904년 참모부연습은 주력을 우익에 집중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1905년의 참모부연습은 주버의 주장과는 달리 '슐리펜 계획'의 요소들이 잘 나타나고 있다. 1905년 참모부연습의 핵심은 '프랑스군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건 우익의 주력으로 공세를 강행하는 것' 이었다. 슐리펜은 1904년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을 통해 슐리펜 계획이 될 1905년 비망록을 완성한 것이다. 슐리펜 계획의 핵심은 주력을 우익에 집중해 최단시일내에 프랑스군의 주력을 격파하는데 있었으며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은 프랑스군이 방어를 취하며 단계적 후퇴를 실시하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는 방안이었다. 또한 주버는 1905년 비망록은 당시 존재하지 않던 부대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 작전계획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것은 슐리펜이 그 계획을 1906년에 즉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군이 충분히 증강될 장래를 예승하고 작성했기 때문으로 해석해야 한다.
주버는 소 몰트케가 초기에 1905년의 비망록에 따른 훈련 대신 1905년 참모부연습을 답습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슐리펜 계획'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으나 소 몰트케가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은 초기에는 그가 벨기에를 통한 대규모 우회 기동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1911년에 이르면 소 몰트케도 1905년의 비망록을 다시 검토한 끝에 슐리펜의 계획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또한 프랑스가 공세적인 계획을 강화함으로써 슐리펜이 우려한 것 처럼 프랑스군이 단계적 철수를 통한 방어를 취할 가능성도 줄어들었다.
주버의 오류는 '슐리펜 계획'의 핵심이 대규모 우회기동으로 파리를 포위하는데 있다고 인식한 데 있다. 파리를 포위하는 것은 프랑스군이 단계적 철수에 성공하는 최악의 경우에 대한 방안이었으며 슐리펜 계획의 고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주버는 이러한 오류 때문에 슐리펜이 실시한 참모부연습과 그가 작성한 비망록을 잘못 해석할 수 밖에 없었다.

주버는 홈즈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War in History 2001년 8권 4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라는 제목의 반박문을 투고합니다. 이 논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홈즈는 슐리펜 계획이란 실재로 존재했으나 그 핵심은 어디까지나 우익을 강화하여 파리-베르덩을 잇는 중간선에서 프랑스군의 주력을 포위섬멸하는 것이었으며 파리를 서쪽에서 우회포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 대안에 불과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슐리펜 계획에 대한 기존의 주장은 슐리펜 계획의 핵심이 강화한 우익으로 파리를 서쪽에서 포위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1905년 비망록에서 당시 존재하지 않고 있던 부대들을 포함시킨 것은 슐리펜이 앞으로 진행될 독일군의 증강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전쟁 계획은 그 시점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바탕으로 작성되는 것이다. 또한 홈즈는 무리하게 1904년의 참모부연습과 '슐리펜 계획'을 연결하고 있다. 1904년의 참모부연습은 '슐리펜 계획'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홈즈는 슐리펜 계획은 '프랑스군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건 우익의 주력으로 공세를 강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1938년 독일군 장성이었든 폰 죌너(von Zoellner)가 썼던 글의 논지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 홈즈는 죌너의 주장에 따라 1905년 참모부연습이 슐리펜 계획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1905년 참모부연습은 주력을 로렌 지방으로 침입한 프랑스군에 돌리고 있다. 그리고 홈즈는 슐리펜의 전략 구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빌헬름 디크만의 연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홈즈에 따르면 소 몰트케는 1911년 경에는 슐리펜 계획을 재검토하고 수용했다고 하지만 이 시점에서도 독일군의 병력은 슐리펜 계획에 명시된 것에는 한참 미치지 못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몰트케는 1914년에 슐리펜 계획을 실행한 것이 아니다. 독일군 제1군의 임무는 독일군의 우익인 세느강 하구를 방어하는 것이었지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후 1904~05년의 참모부연습과 1905년 비망록 등 핵심적인 사료에 대한 해석을 두고 주버와 홈즈간에 논쟁이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이부분은 위에서 진행된 논의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니 '생략'할까 합니다.

한편,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박사학위를 취득한 주버는 자신의 주장을 더 강화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하게 됩니다.


주버의 단행본,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과 German War Planning

주 버가 2002년에 낸 단행본,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은 기본적으로 1999년에 발표한 논문의 내용을 더 추가한 것으로 기본적인 골격은 동일한 것 입니다. 중간에 있었던 홈즈와의 논쟁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보충하기 위해 내용이 풍부해졌습니다.

먼저 1장에서는 1차대전 직후 오늘날 알려진 '슐리펜 계획'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999년의 논문의 내용을 확대한 것으로 1920~30년대의 여러 논쟁들과 오늘날 알려진 '슐리펜 계획'이 역사적 사실로 확립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2장과 3장은 슐리펜의 전쟁계획들이 성립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 대 몰트케의 전쟁 계획들과 1880년대 후반의 군사적 상황의 변화에 대해서 검토하고 있습니다. 1999년의 논문에는 없었던 새로 작성된 부분입니다. 2장에서는 대 몰트케가 보불전쟁 이후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양면 전쟁에 대비해 러시아에 주력을 집중하는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버에 따르면 대 몰트케는 1870년대 후반까지는 서부전선에 주력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으나 프랑스가 독일과의 국경지대 요새선을 강화하고 또 러시아의 군사적 취약성이 드러나면서 계획을 수정해 동부전선에 주력하는 계획으로 전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 몰트케의 재임 말기에는 러시아에 대한 신속한 승리도 어렵다는 점이 명백해 졌기 때문에 동부전선에 주력하는 계획이 포기되었다고 합니다. 3장에서는 1880년대 국경지대의 요새와 기술의 발전으로 포병의 파괴력이 강화되는 등 대 몰트케가 다시금 서부전선으로 관심을 돌리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4장은 1999년 논문의 핵심으로 슐리펜이 취임 이후 실시한 참모부연습과 그가 작성한 작전계획을 분석하고 있으며 1905년 비망록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5 장은 소 몰트케 시기의 참모부연습과 작전계획, 그리고 1차대전 초기의 작전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홈즈와의 논쟁에서 지적된 부분을 강화하고 있으며 특히 홈즈의 주장에서 소 몰트케가 슐리펜의 계획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1911년 부터 1914년 까지 프랑스, 러시아의 전쟁계획과 이에 대한 독일군의 정보, 그리고 이것이 이 시기 전쟁계획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1999년의 논문에서 다소 미흡했던 부분이 1차대전 직전 소 몰트케의 작전 계획이 어떻게 수립되어 실행되었는가 였는데 단행본에서는 그점이 보충되었습니다. 주버는 현존하는 1차대전 초기 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의 각 야전군 사령부 작전 명령서를 분석하여 독일 제 1군의 임무는 프랑스군에게 결정타를 날릴 주공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일군의 우익을 방어하는 것이었으며 제 2군이 소 몰트케의 1914년 작전계획의 주공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국경지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프랑스 영내로 깊숙히 진격한 것은 '슐리펜 계획'의 실행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경 지대 전투에서 획득한 전과를 확대하기 위해서 프랑스군이 회복되기 전 까지 프랑스 영토를 최대한 점령하려는 의도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서는 기존의 논의를 강화하면서 논문 분량의 제한으로 설명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다루고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1999년의 논문은 '슐리펜 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1914년에 실행된 작전은 도데체 뭐란 말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었는데 단행본에서는 그 점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다시 2004년에 German War Planning, 1890~1914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합니다. 이 자료집은 슐리펜이 총참모장에 취임한 다음 부터 1차대전에 발발하는 1914년, 그리고 1차대전 직후 슐리펜의 작전 계획에 대해 전개된 논쟁에 대한 사료를 영어로 번역해 싣고 있으며 각 사료 마다 주버의 간략한 해제가 달려있습니다.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서 언급한 대 몰트케 시기의 작전 계획은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아쉽지만 기본적으로 논쟁의 핵심에 대한 자료를 소개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기존 주장들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모범적인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계속되는 논쟁

한편, 이 논쟁은 연구자들의 지속적인 참여로 근 10여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주 버와 홈즈의 논쟁이 진행되던 와중인 2003년, 역시 1차대전 연구자인 로버트 폴리(Robert T. Foley)가 War in History 10권 2호에 "The Origins of the Schlieffen Plan"이라는 논문을 기고해 홈즈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논쟁에 참여했으며 2005년에는 아니카 몸바우어(Annika Mombauer)가 Journal of Strategic Studies에 "Of War Plans and War Guilt: The Debate Surrounding the Schlieffen Plan"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 몸바우어의 논문은 제가 아직 읽어보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에는 게르하르트 그로스(Gerhard P. Groß)가 War in History 15권 4호에 "There Was a Schlieffen Plan: New Sources on the History of German Military Planning"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투고했습니다. 그로스는 주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의 작전계획에 대해서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의 연구와 해석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반면 독일군 총참모부의 기동계획(Aufmarschpläne)은 검토하지 않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주버는 슐리펜의 1898년 비망록에서 슐리펜은 프랑스군의 선제공격에 대응해 반격을 가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반격을 가하는 것은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동원 완료 이전에 선제공격에 나설 경우에 취할 방안이었으며 이 비망록에서는 두번째 방안으로 독일군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거쳐 공세에 나설 것을 제안하고 있다. 슐리펜의 구상에서 적의 선제공격에 대해 반격에 나서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일군이 적에 비해 숫적으로 열세에 처하는 경우에 한하는 것 이었다. 주버는 1905년의 참모부연습을 슐리펜이 선제공격에 대응한 반격개념을 확립한 것으로 해석했으나 이 참모부연습은 단순히 슐리펜이 참모장교들의 교육을 위해 다양한 상황을 가정해 실시한 것에 불과하다. 주버는 참모부연습의 성격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
또한 주버는 슐리펜이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으로 파리를 서쪽에서 포위하는 기동을 연구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슐리펜은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벨기에를 돌파해 루앙 부근에서 세느강을 도하, 파리를 서쪽에서 포위하는 기동을 실시한 바 있다. 주버는 이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주버는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대해서 실제 작전계획이라기 보다는 독일 육군의 증강과 동원태세 강화를 위한 계획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슐리펜은 재임 기간 중 육군의 증강에 과도할 정도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무렵에는 전쟁부의 축소된 방안을 수용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주버의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주버는 1905년 비망록에 제시된 병력에는 당시 존재하지 않던 사단이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실제 작전계획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슐리펜은 여러 훈련에서 실제 편성되지 않은 부대들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것은 당시 총참모부의 장교들도 쉽게 납득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 서류상의 사단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실제 작전계획은 될 수 없다는 해석은 무리가 있다.
그 리고 주버는 1905년 비망록의 작전계획은 슐리펜의 다른 작전계획이나 훈련과 동떨어진 존재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설득력이 낮다. 슐리펜의 기동계획, 참모부연습, 전쟁연습 등을 검토하면 슐리펜은 비록 위험하다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항상 포위기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슐리펜은 이미 1897년의 비망록에서 프랑스 국경지대의 요새를 돌파하는 것을 포기하고 베르덩 북쪽으로의 우회기동을 진지하게 고려했으며 이 비망록은 벨기에-룩셈부르크 국경의 열악한 교통망 때문에 벨기에 전체를 침공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초기의 우회 기동은 프랑스군을 국경지대에서 포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으나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약체화 되어 프랑스군의 선제공격 가능성이 감소하자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벨기에를 돌파해 대규모 포위기동을 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비록 소 몰트케가 1914년에 취한 계획은 슐리펜의 1905년 계획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서부전선에서 주도적으로 공세를 실시하고 우익을 강화해 대규모 포위기동을 실시한다는 점에서는 슐리펜의 계획을 상당부분 이어받은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주버의 문제 제기를 계기로 10여년간 지속된 이 논쟁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 졌으며 논쟁 참여자 중 한 명인 로버트 폴리의 지적대로 1차대전에 대한 논의를 풍부하게 하는데 일조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 논쟁과 관련해 아직 검토하지 못한 논문이 많다 보니 전체적인 평가를 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주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직까지는 전통적인 해석이 좀 더 타당성이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최근 몇 년간 슐리펜 계획과 관련해 주버의 연구 외에도 흥미로운 저작들이 몇 권 등장했는데 이것들은 뒤에 입수하는 대로 평을 해볼까 합니다.(또 공수표 발행이군요!)

2009년 10월 2일 금요일

아 웃겨라...

명랑한 미국 소식

People reluctant to book Palin for speaking engagements because ‘they think she is a blithering idiot.’

기사 일부만 인용하자면...

“The big lecture buyers in the US are paralyzed with fear about booking her, basically because they think she is a blithering idiot.”

아. 정말 감동적입니다. 국내 정치인들도 이렇게 깔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예를 들어 전모의원이나 나모의원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