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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5일 월요일

어떤 책을 읽다 보니...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전 예멘 대사 유지호씨가 쓴 『예멘의 남북통일』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겠지만 예멘의 통일은 한국의 진보 계열에게는 독일식의 흡수통일에 대한 대안으로 인식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뭐 얼마가지 않아 예멘 내전이 발발해 예멘 통일을 찬양하는 주장들이 쑥 들어가 버렸지만 말입니다. 몇몇 논객들은 예멘의 사례를 모범적으로 치켜세우다가 예멘이 내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자 꽤 당황해 했다고 하지요. 유지호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예멘이 내전에 돌입하자 한국에서는 크게 실망하는 분위기가 나타난 반면 서방에서는 예상했다는 듯 시니컬한 반응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에게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려는 성향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당시의 진보적 지식인들을 마냥 비판하는 것도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때의 일과 관련해서 자신의 실수가 잊혀질 때 까지 잠자코 있다가 슬금슬금 목소리를 높이는 양반들을 보면 난감함을 느끼곤 합니다. 왜이리 다 큰 어른들이 쿨하지 못한 것인지.

2009년 5월 10일 일요일

제정 러시아의 병역과 유태인 문제

Reforming the Tsar’s Army를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중간에 Mark von Hagen이 쓴 19세기말~20세기 초 제정 러시아 군대의 민족문제에 대한 글이 한 편 있는데 유태인과 관련된 부분이 꽤 재미있습니다. 해당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유태인은 군 복무에 있어 다른 민족들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면서도 더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일반적인 징병에 있어서도 다른 민족 집단이 누리던 보다 자유주의적인 병역 면제의 대상이 되지 못 했다. 러시아는 제국 내의 유태인 집단에 별도의 징병 할당 인원을 배정했다. 만약 유태인의 징병 인원이 할당 인원에 미치지 못할 경우 “무조건 면제”로 분류될 젊은이들이 병역의 책임을 짊어 져야 했다. 이 정책은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종종 징병을 회피하려 한다는 이유로 옹호되었다. 개종하지 않은 유태인은 장교가 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군사 의학 대학’에 입학할 수 도 없었다. 러시아 군인들은 유태인이 전사로서 형편없다고 믿었다. 유태인들이 군 입대를 꺼려했다는 점 때문에 이러한 편견은 더욱 강화되었다. 1911년에 전쟁성은 두마에 유태인에게 군 복무 의무를 부과하는 대신 방위세를 내도록 하자는 법안을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Mark von Hagen, ‘The Limit of Reform : The Multiethnic Imperial Army Confronts Nationalism, 1874~1917’, Reforming the Tsar’s Army : Military Innovation in Imperial Russia from Peter the Great to the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p.46

유태인이 겁쟁이라는 인식은 유럽 국가들에 꽤 널리 퍼진 편견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군 장군들이 중동전쟁을 봤다면 생각이 달라졌겠지요.

2008년 12월 23일 화요일

유가환급금으로 지른 책 두 권

유가환급금을 받아서 책을 두 권 샀습니다.

한 권은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의 ‘박정희 정부의 선택 : 1960년대 수출지향형 공업화와 냉전체제’이고 다른 한 권은 테사 모리스 스즈키(Tessa Morris-Suzuki)의 ‘북한행 엑소더스 : 그들은 왜 북송선을 타야만 했는가?’ 입니다.

기미야 다다시의 ‘박정희 정부의 선택’은 저자가 1991년에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을 증보하고 문체를 다듬어서 내놓은 저작입니다. 1991년의 논문은 1차5개년 계획의 수립과정만을 다루고 있는데 이번에 나온 단행본은 범위를 더 넓혀서 1차5개년 계획의 진행과정과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무역특수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보론으로 남한의 민주화 운동과 518도 다루고 있는데 본문의 내용과는 약간 동떨어진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단행본은 일단 1991년의 논문보다 문장이 많이 가다듬어 져서 읽기가 편합니다. 1991년의 박사논문은 학술논문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외국인이 쓴 한글이라는 점에서 다소 문체가 어색한 면이 없지 않았는데 이번 단행본의 문체는 읽기 편하고 좋습니다.
일전에 이글루스에서 이승만과 박정희 시기의 경제성장정책에 대한 논쟁이 있었을 때 제가 이 주제와 관련해 흥미롭게 읽었던 책을 몇 권 추천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좀 심하게 게으르다 보니 그러질 못했죠;;;; 기미야 다다시의 이 단행본은 박정희 정부 초기의 경제정책에 대한 꽤 재미있는 개설서입니다. 일단 박사논문의 주제에서 범위를 더욱 확장해 베트남전 특수까지 다루고 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해 2차산업 주도의 경제구조로 개편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961년에서 1970년 사이의 기간은 한국의 산업구조가 극적으로 개편된 매우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박정희 시기의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특히 기미야 다다시의 박사논문은 군사정권이 집권 초기 이승만 시기 경제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수출대체 위주의 공업화를 구상하다가 국내외적인 요소로 이 계획이 좌절된 뒤 수출주도의 공업화로 이행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으며 이 단행본도 이 주제의 연장선상에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즉 박정희 정권 초기 경제개발에 대한 논쟁을 이해하는데 꽤 유용합니다. 또한 관련 주제에 대한 단행본 중 가장 최근의 저작(2008년 12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이라는 점도 강점입니다. 최근까지의 관련 연구사 정리가 잘 되어 있어 논쟁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테사 모리스 스즈키의 ‘북한행 엑소더스’는 영어판(Exodus to North Korea: Shadows from Japan's Cold War)을 사려고 아마존의 Wish List에 담아두고 있다가 다른 책들에 밀려 사지 못하는 사이에 번역판이 먼저 나와 버렸습니다. 한국어판이 더 싸고 요즘은 환율문제도 있는지라 한국어판으로 질러버렸습니다. 재미있게도 이 책은 저자의 요청에 따라 일본어판(北朝鮮への エクソダス―「歸國事業」の 影をたどる)을 번역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는데 북송과정에서 일본정부와 일본적십자사가 수행한 역할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북한은 일본측에서 재일 조선인의 북송을 추진하고 있던 초기에는 북송에 소극적이었다고 하는군요. 일본이 이승만 정부의 북송반대 운동을 제압하는데 미국의 지원을 받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거스름돈의 운명이란;;;;)

2008년 12월 10일 수요일

자유인도군단(Freie Indische Legion)

원래 슈타인호프님이 올려주신 글에 호응해서 올리려 했는데 좀 늦어졌습니다. 이준님도 관련 글을 한 편 써 주셨군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당연한 말 이겠지만 어느 나라건 간에 외국인의 자국군대 입대에 대한 법적 근거는 있기 마련이고 독일도 당연히 그런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5년 5월 21일에 제정된 독일 국방법(Wehrgesetz)의 1조 1항은 모든 ‘독일남성’을 대상으로 국방의무를 부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일 국적자가 아닌 외국인과 무국적자의 경우에는 18조 4항에 의거해 총통의 허가를 받을 경우 자원입대가 가능했습니다. 외국인의 자원입대를 허가하는 권한은 다시 1935년 6월 26일에 전쟁성장관(Reichskriegsminister)에게 주어졌다가 1938년 2월 4일에는 국방군총사령관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자 국방군사령부는 1939년 10월 7일자로 이중국적자, 무국적자, 외국인, 독일계 외국인(Volksdeutschen)의 국방군 입대를 허용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러한 법령과 명령들이 전쟁 기간 중 잡다한 외국인 지원병 부대를 편성하는 근거가 됩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지요.

독일은 전쟁 초반부터 잡다한 외국인 의용부대를 편성합니다. 이것이 본격화 된 것은 독소전 발발 이후이지만 그 이전에도 서유럽에서 모병활동이 있었지요. 어쨌건 초기에는 유럽인 위주로 외국인 입대를 허용했지만 소련 및 미국과의 전쟁으로 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독일군도 인종전시장이 되어 버립니다.

독일이 인도인 부대를 편성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41년 4월 3일 찬드라 보스(Chandra Bose)가 소련을 경유해 독일로 입국한 뒤였습니다. 슈타인호프님의 글에 잘 나와 있는데 보세는 스탈린이 인도 독립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크게 실망해서 독일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보세가 독일로 오자 독일 외무성은 그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트로트 주 졸츠(Adam von Trott zu Solz) 참사관의 관할하에 ‘인도 특별국(Sonderreferats Indien)’을 설치합니다. 그러나 히틀러도 스탈린 처럼 인도 독립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보스는 1941년 4월 29일에 처음으로 인도군 포로를 중심으로 인도독립군을 편성하자는 주장을 했으나 독일측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스는 독일 측에 소련의 지원을 얻어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인도독립군을 인도로 진격시키자는 제안을 했는데 이 방안은 현실성이 부족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스는 독일에 도착한지 1년이 지난 1942년 5월 27일에 히틀러와 회견하고 인도 독립문제를 논의했으나 역시 별다른 결과는 없었습니다.

한편,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펀자브 출신의 이슬람교도인 무함마드 셰다이(Mohammed Iqbal Shedai)라는 독립운동가가 반영 선전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셰다이는 종교 때문에 이슬람 중심의 인도독립운동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1941년 12월 보스와 회담한 뒤에는 힌두교도와의 협력으로 돌아섭니다. 두 사람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움직여 인도독립군을 편성하자는데 합의합니다. 보스의 활동으로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는 인도독립군 편성에 동의하게 됩니다. 인도독립군의 근간은 북아프리카에서 포로가 되어 이탈리아에 수용된 인도군 포로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42년 6월 자유인도군단(Freie Indische Legion, 이하 인도군단)이 창설됩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정부와의 합의에 따라 1942년 7월에 1,738명의 인도인 포로가 기차편으로 독일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에 롬멜이 1942년 6월 21일에 토브룩을 함락시키면서 추가로 6천여명의 인도군 포로가 잡히게 됩니다. 인도군 포로가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에 이 무렵부터 인도 독립군을 연대 급으로 편성하는 방안이 고려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이탈리아에서 공작원으로 공수훈련을 받고 있던 80명의 인도군 포로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도 자체적으로 인도군 포로들을 활용할 계획은 가지고 있었으나 1942년 이후 사실상 이 계획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포로들을 받고 보니 보스 휘하의 인도군단에 지원하지 않는 포로들이 많았습니다. 1942년 7월에 인도군단에 자원한 포로는 280명에 불과했고 이것은 당초 보스의 예상을 밑도는 규모였습니다. 이탈리아로부터 인도받은 포로 중 인도군단에 지원하지 않은 자들은 다시 안나부르크(Annaburg)와 람스도르프(Lamsdorf)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여기서 모집을 계속했습니다. 독일군은 최초의 자원자가 모집되자 작센의 프랑켄베르크(Frankenberg)에서 첫 번째 대대의 편성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드레스덴 근교의 쾨니히스브뤽에 훈련소가 설치되고 이후의 부대편성과 훈련은 이곳에서 이루어 집니다. 그리고 인도군단의 본대와 별도로 50명이 브란덴부르크 교도연대(Lehrregiment Brandenburg)로 보내져 특수공작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도군단의 편성 초기에는 자원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기의 지원자 중에는 부사관 이상의 포로가 전혀 없어 소대 편성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독일측은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부사관 교육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여기에 포로들은 거의 대부분 독일어를 몰랐기 때문에 독일어 교육부터 시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한줌밖에 안되는 포로들이 또 다시 카스트와 종교별로 나뉘었습니다. 포로 중 50%는 힌두교도, 25%는 이슬람교도, 20%는 시크교도, 5%는 기독교도였는데 이들을 그냥 섞어놓으니 문제가 없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인도군단은 1942년 10월까지 추가 지원자를 받아들여 대대급으로 확장됩니다. 첫 인도군 대대의 지휘관은 크라페(Kurt Krappe) 소령이었습니다. 이 대대는 42년 10월 보스와 주독일본대사관 무관 등의 참관하에 대대훈련 시범을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선전 목적이 강한 훈련이었습니다. 인도군단은 1943년 2월에는 제3대대의 창설을 마치고 총 15개 중대 3,000명으로 증강됩니다.

그런데 이때는 동부전선과 아프리카 전선 모두 정신 없이 꼬여가던 시점이라 독일군 수뇌부는 인도군단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보스도 독일의 태도에 실망해 일본으로 떠나버렸고 인도군단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어쨌든 1개 연대를 만들어 놓았으니 그냥 놀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국방군 총사령부는 인도군단을 프랑스로 보내버립니다. 그러나 인도군단 병사들 중 일부는 당초 인도독립전쟁을 위해 자원한 만큼 프랑스로 갈 수 없다고 항의하며 시위를 벌입니다. 독일측은 이 중 주모자 두 명은 6년형을 선고하고 이외에 시위에 가담한 40명도 수용소로 보내버립니다.

서부전선으로 이동명령을 받은 인도군단은 1943년 5월 벨기에로 이동해 제16공군야전사단에 배속됩니다. 이때 인도군단은 제950보병연대로 개편됩니다. 연대장은 크라페 소령이 중령으로 진급해서 맡게 되었습니다. 16공군야전사단에 배속된 2개 대대는 다시 네덜란드로 이동해 1대대는 Ymuiden에, 2대대는 Texel섬에 배치됩니다. 인도군단의 2개대대는 다시 1943년 9월에 남부프랑스로 이동해 제344보병사단에 배속됩니다. 1944년 1월 8일에 제159예비사단이 보르도를 담당하게 되자 인도군단은 159예비사단으로 배속 변경됩니다. 인도 자원병에 대한 교육훈련은 지속적으로 실시되어 1943년 10월 1일에는 12명의 인도인 부사관이 소위로 임관되었습니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독일-힌두어 사전이 보급되어 언어 문제도 그럭저럭 해결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1944년 6월 30일, 인도군단의 9중대(장교 3명, 부사관 및 사병 199명)에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9중대는 278보병사단에 배속되어 44년 7월 리미니(Rimini)에 배치됩니다. 9중대는 1945년 1월까지 이탈리아 전선에서 빨치산 토벌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인도군단의 나머지 병력은 연합군이 남부 프랑스에 상륙한 이후 퇴각전 과정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교전했는데 이중 레지스탕스에 항복한 29명이 9월 22일에 학살되어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합니다. 프랑스 측은 인도군단이 퇴각 과정에서 범죄행위를 자행했기 때문이라고 항의했는데 실제로 인도군단 병력이 레지스탕스와 교전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민간인을 살해하고 약탈행위를 한 사례가 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독일 국경으로의 퇴각 과정에서 인도군단 병사 중 상당수가 탈영하기도 합니다. 인도군단 3대대는 9월 16일에 미군과 교전하게 되는데 별다른 중장비가 없는데다 전의도 없어서 그대로 붕괴되어 버립니다. 제3대대가 콜마-스트라스부르 지구에 도착했을 때는 대대 병력 중 300명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프랑스에서 퇴각한 이후 인도군단은 후방 경계 및 진지 공사 등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인도군단이 프랑스에서 퇴각전을 치르는 동안 인도군단에 관심을 가진 고위층이 한 명 나타났습니다. 친위대의 몸집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히믈러였습니다. 인도군단은 1944년 8월 8일부로 친위대 해외국(Auswärtigen Amt) 관할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인도군단이 퇴각전 중이었기 때문에 크라페 중령이 계속해서 지휘관으로 있었습니다. 퇴각전을 치르고 알자스에 도착한 인도군단은 그제서야 자신들의 관할이 친위대로 넘어간 것을 알게 됩니다.

1944년 11월, 인도군단은 다시 독일 영내로 이동해 라스타트(Rastatt)와 뷜(Bühl) 지구에 주둔하다가 다시 12월 말에는 호이베르크(Heuberg) 훈련장으로 이동합니다. 이 무렵 인도군단은 사실상 전투부대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1945년 초에는 계속 후퇴만 하다가 4월에 모든 전투장비를 독일측에 반납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인도군단의 일부는 스위스로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군단 대부분은 프랑스군의 포로가 됩니다. 본대와는 떨어져 있던 인도군단의 보충대대(Ersatzbataillon)는 미군에 항복합니다.

인도군단 소속 병사들이 항복한 뒤에 있었던 일은 슈타인호프님의 글에 설명이 잘 되어 있으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서적
Rudolf Absolon, Die Wehrmacht im Dritten Reich Band V, Harald Boldt Verlag, 1988
Carlos Caballero Jurado, Foreign Volunteers of the Wehrmacht 1941~45, Osprey, 1983
Franz W. Seidler, Avantgarde für Europa : Ausländische Freiwillige in Wehrmacht und Waffen-SS, Pour le Merite, 2004

※ 위에서 언급한 저작 들 중 Carlos Caballero Jurado의 Foreign Volunteers of the Wehrmacht 1941~45는 오류가 몇 가지 있더군요. 인도군단에 대한 내용 자체도 짤막하긴 하지만 연대 편성에 대해 나와 있어서 참고했습니다.

2008년 11월 2일 일요일

2차대전 중 독일 국방군의 성범죄 문제 - Birgit Beck의 연구

살인적인 유로의 환율 때문에 요 몇 달간 독일책은 전혀 구입하지를 못했습니다. 구입하려고 찜해놓은 책이 몇 권 있긴 한데 1유로당 1800원에 육박하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그저 침만 흘릴 뿐 이죠. 이렇게 살 생각만 굴뚝같고 경제적 문제로 못 사는 책 중 한권이 비르기트 벡(Birgit Beck)의 Wehrmacht und sexuelle Gewalt : Sexualverbrechen vor deutschen Militärgerichten 1939-1945입니다. 제목부터 흥미가 당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요즘 읽고 있는 A World at Total War라는 책에 비르기트 벡이 자신의 저작 중 일부를 요약해 놓은 에세이, Sexual Violence and Its Prosecution by Courts Martial of the Wehrmacht가 실려 있더군요. 비록 경제적으로 궁해서 비르기트 벡의 책은 못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을 축약해 놓은 에세이라도 읽을 수 있으니 나쁘진 않더군요.

이 에세이에서는 독일 국방군이 자행한 성범죄가 독일 군법회의에서 어떻게 다뤄졌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자인 벡은 1차대전 초기 독일군에 의해 자행된 벨기에와 프랑스에서의 강간이나 일본군이 중일전쟁 기간 중에 저지른 강간, 또는 남북전쟁 기간 중 양측에서 대량으로 자행된 성폭력 등은 비교적 연구가 많이 이뤄졌는데 2차대전 중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가 자행한 성범죄에 대해서는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벡의 연구에 따르면 2차대전 기간 중 독일군의 민간인 강간 사례 중 실제로 군법회의에 회부된 것은 5,300여건에 불과하며 실제 강간에 의해 처벌받는 비중도 적었다고 합니다. 전반적인 양상을 보면 독일군에 의한 강간은 프랑스의 패전 이후 급증했다가 1943년 이후 줄어든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1943년 이후는 독일군이 패배하면서 도망치기 바쁜 시기이니 강간할 정신이 없어서 그랬나 봅니다.;;;;
프랑스의 패전 이후 일어난 강간사례에 대한 분석은 흥미로운데 독일군 또한 강간대상을 가리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독일군의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106보병사단과 211보병사단에 의해 자행된 강간 피해자의 연령대는 6세의 아동부터 67세의 노인(;;;;)까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나마 프랑스는 다행이었던 것이 독일군 고위 지휘관들이 프랑스 여성에 대한 성범죄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군율로 통제가 가능했다는 점 입니다. 1940년 7월 5일에는 육군총사령관 브라우히취(Walther von Brauchitsch)가 각 야전군사령관들에게 강간범에 대한 처벌 문제에 대한 명령을 하달합니다. 프랑스에서 강간으로 기소되는 경우 유죄가 인정되면 10년의 징역을 선고 받는 사례도 나타납니다. 독일군 지휘부는 프랑스에서 대민관계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선전 목적에서도 성범죄자에게 중형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군요. 프랑스에서는 1944년까지 독일군이 주둔하면서 성범죄 예방을 위해 국방군이 관할하는 위안소를 대량으로 설치했는데 이것도 나름대로 문제가 되긴 합니다.

서부전선과 달리 동부전선은 인종전쟁이라는 막장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범죄에 있어서도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저자인 벡은 독일군 지휘관들도 동부전선에서는 군율을 무너뜨릴 정도가 아닌 강간은 묵인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통계 자체가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서부전선에서 강간으로 기소된 병사는 유죄가 10년 형을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동부전선의 경우는 기소받는 경우도 드물었고 유죄로 판결 받더라도 1년에서 2년 형이 최고형이었다고 합니다. 나치의 인종적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슬라브인 여성에 대해서는 독일인 여성과 같은 정조(Geschlechtehre)의 기준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에 강간도 강간이 아니게 되는 황당한 결정이 자주 내려졌다고 합니다. 서부전선, 특히 프랑스의 경우 성범죄는 피해자가 직접 해당 경찰서에 신고하면 프랑스 경찰이 독일 헌병과 협조해서 처리하는 등 상식적으로 처리되었으나 동부전선에서는 그나마 양심적인 독일군인들이 성범죄를 신고해야 기소가 되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가혹한 점령통치 때문에 피해를 입은 소련 여성들이 독일 점령군을 상대로 직접 강간피해를 신고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하는 군요. 벡은 소련에 대한 전쟁은 정복전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강간은 그 정복 행위의 일종이었기 때문에 범죄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2008년 7월 8일 화요일

음베키에겐 애시당초 기대를 말았어야지

Zimbabwe sanctions could lead to civil war, Mbeki warns leaders - The Guardian

짐바브웨가 여전히 막장을 달리고 있는 가운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빵 음베키는 서방 지도자들에게 무가베에 대한 강력한 압박은 짐바브웨를 내전으로 몰고갈 수 있다고 언급했다고 합니다. 물론 음베키의 주장은 타당성이 제법 있다고 생각되지만 평소 그의 행태로 볼 때 그냥 가재가 게편을 드는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드는군요. 음베키와 무가베의 정책 몇 가지를 놓고 보면 둘 다 아프리카에 백인이 엉덩이를 깔고 있는 것 자체를 극도로 혐오하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평가를 내리는게 굉장히 곤란한 것 같습니다. 일단 제가 제 3국인에 특별히 관련 지식이 깊은것도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말이죠. 역시 식민통치를 경험한 조선사람의 입장에서는 백인을 경멸하는 현지인들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백인 중산층 없이 국가가 제대로 돌아가느냐면 그건 결코 아니거든요. 뭐, 시간이 흐르면 해답이 나오겠지요. 그때까지 신문이나 보고 있어야 겠습니다.

이전글 - 막장을 달리는 짐바브웨 사태

추가 - 가디언 기사의 아랫 부분에 황상폐하의 말씀이 실렸습니다. 역시 세계를 자유로서 교화하겠다는 황상폐하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경하할 일 입니다.

"I wish for a world free from tyranny : the tyranny of hunger, disease; and free from tyrannical governments. I wish for a world in which the universal desire for liberty is realised. I wish for the advance of new technologies that will improve the human condition and protect our environments."

2차대전 중 소련군의 민족별 포상내역

채승병님이 쓰신 '독소전쟁기 소련군 야전부대의 민족분포'라는 글을 읽고 나니 저도 재미있는 통계가 하나 생각났습니다. 아래의 표는 Народы Кавказа и Красная Армия : 1918-1945 Годы라는 책의 292쪽에서 293쪽에 걸쳐 실려있는 통계인데 1942년 3월 2일 시점에서 정리한 민족별 포상 내역입니다.

표. 2차대전 초기 민족별 포상 내역(1941.6~1942.3)

소련방영웅
레닌훈장
적기훈장
적성훈장
공훈기장
참전기장
총계
러시아인
95
765
7,106
8,815
6,650
4,369
27,800
우크라이나인
28
209
1,910
2,438
1,652
1,230
7,497
유태인
3
21
234
366
216
225
1,065
타타르인
2
6
114
123
124
122
491
벨로루시인
2
35
323
410
294
185
1,249
그루지야인
0
10
71
76
72
39
268
아르메니아인
0
5
53
73
27
30
188
아제르바이잔인
1
3
18
14
16
18
70
카자흐인
0
3
41
51
59
41
195
추바시인
1
1
26
57
41
26
152
라트비아인
0
7
61
59
16
9
152
우즈벡인
0
1
20
25
32
14
92
타지크인
0
4
1
3
7
3
18
키르기스인
0
1
4
3
5
5
18
투르크멘인
1
0
4
3
2
1
11
마리인
0
1
10
9
13
5
38
에스토니아인
1
1
4
3
6
1
16
리투아니아인
0
0
1
1
1
1
4
레즈기인
0
0
4
3
2
0
9
카바르디인
0
0
5
3
3
3
14
체르케스인
0
0
0
0
1
2
3
카라차이인
0
0
1
3
3
4
11
체첸인
0
0
4
3
3
2
12
아디게야인
0
1
3
5
1
3
13
쿠묵인
0
0
1
2
0
0
3
라크치인
0
1
1
1
0
0
3
다르긴인
0
0
0
0
0
1
1
타바사란인
0
0
0
0
1
0
1
잉구시인
0
0
0
0
0
1
1
[표 출처: А. Ю. Безугольный, Народы Кавказа и Красная Армия : 1918-1945 Годы, (ВЕЧЕ, 2007), 292~293]

역시 재미있는 점 이라면 유대인이 포상에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전쟁 종결 시점의 통계도 궁금하긴 한데 여기서 인용한 책에는 달랑 1942년 3월의 통계만 실려있더군요.

추가 – 소련의 민족 분류는 약간 괴상하게 이뤄진 것이 사실입니다. 전에 제가 올렸던 “주머니안에 있는 거스름돈의 처리”라는 포스팅에도 나와 있지만 소련의 민족 구분은 인구조사가 실시 될 때 마다 여러 차례 바뀌었습니다. 즉 과학의 탈을 뒤집어쓴 정치였던 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