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方の医師不足対策 医学生に新奨学金検討 文科省
한국어로 옮기고 명사만 바꾸면 한국 이야기라고 해도 믿겠군요.
각 지자체가 의료인력 부족에 대해 자구책에 고심하는 것이나 정부차원에서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야 나쁘진 않지만 지역사회의 공동화가 이정도로 심각하다니 비참한 일입니다. 정말 다른나라 이야기 같지가 않군요.
예전에 채승병님이 블로그에서 다루었던 일본 사회의 '지역격차'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2009년 10월 5일 월요일
2009년 5월 5일 화요일
The Asian Military Revolution의 조선 관련 서술
또 책 이야기 입니다.
어제는 도서관에서 The Asian Military Revolution : From Gunpowder to the Bomb라는 책을 대출했습니다. 저자인 Peter A. Lorge는 머리말에서 화약무기의 개발이 중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아시아 전역에서 어떠한 군사적 혁신을 가져왔는지를 고찰하겠다는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상당히 매력적인 주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첫 인상이 약간 좋지가 않습니다.
아직 제대로 읽지는 않았고 주요 내용을 살짝 훑어본 수준이지만 다루는 시기가 9세기에서 19세기 초 까지 인데다 공간적 범위도 중국,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 인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라서 서술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쉬운 점은 한국에 대한 기술이 극도로 적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화약무기 도입과 활용에 대한 내용은 2장의 Japan and the wars of unification과 3장의 The Chinese military revolution and war in Korea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 지는 정도 입니다. 특히 임진왜란을 다룬 제3장 조차 명나라 군대의 화약무기 사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조선의 화약무기 사용은 해전과 관련해 다루어 지는 수준입니다. 2장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경험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조선 수군의 대규모 화포 운용이 일본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정도만 서술되어 있습니다. 3장의 경우는 임진왜란이 주가 되어야 하지만 절반 정도의 내용이 원명교체기 화약무기의 사용과 명나라 시기 왜구의 창궐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부분에서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와 조선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썩 서술의 밀도가 치밀하지 못합니다. 조선군의 활동은 주로 수군위주로 서술되어 있으며 조선 수군의 활동에 대해서도 첫 번째 승리인 옥포해전과 조선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에 대해서 언급하는 정도입니다. 조선수군의 승리 요인에 대해서도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와 화약무기의 대규모 사용이라는 서술만 있을 뿐 조선의 화포 개발이나 운용에 대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거북선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데 거북선이 철갑선인지 아닌지 논쟁이 진행 중이라고 적어 놓았더군요. 조선 육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임진왜란에서 명나라 육군이 대규모의 화약 무기를 운용했다는 정도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책의 분량상 조선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서술이 너무 부실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자는 임진왜란에 대해서 원사료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Samuel Hawley의 단행본인 The Imjin War : Japan’s sixteenth 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cuer China와 Kenneth M. Swope의 Crouching Tigers, Secret Weapons : Military Technology Employed during the Sino-Japanese-Korean War에 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저자는 2장에서 일본어를 모르는 Noel Perrin이 일본의 화약무기 사용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유포시켰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비록 특별히 잘못된 서술은 없다 하더라도 조선에 대한 서술을 보면 Lorge도 Perrin과 오십보 백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한국어를 모르는 Lorge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자료를 활용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 연구자들이 영어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거나 국내의 연구들을 활발히 영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최소한 군사편찬연구소의 저작들이라도 영역해서 외국에 소개한다면 한국 군사사에 대한 외국의 이해가 훨씬 넓어질 수 있을 것 입니다. 강바닥에 삽질하는 것 보다는 이런 일을 하는게 장기적으로는 대한민국에 더 큰 도움이 될 것 입니다. 인터넷을 보면 한국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들이 의외로 많은데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텍스트는 너무나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제는 도서관에서 The Asian Military Revolution : From Gunpowder to the Bomb라는 책을 대출했습니다. 저자인 Peter A. Lorge는 머리말에서 화약무기의 개발이 중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아시아 전역에서 어떠한 군사적 혁신을 가져왔는지를 고찰하겠다는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상당히 매력적인 주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첫 인상이 약간 좋지가 않습니다.
아직 제대로 읽지는 않았고 주요 내용을 살짝 훑어본 수준이지만 다루는 시기가 9세기에서 19세기 초 까지 인데다 공간적 범위도 중국,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 인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라서 서술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쉬운 점은 한국에 대한 기술이 극도로 적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화약무기 도입과 활용에 대한 내용은 2장의 Japan and the wars of unification과 3장의 The Chinese military revolution and war in Korea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 지는 정도 입니다. 특히 임진왜란을 다룬 제3장 조차 명나라 군대의 화약무기 사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조선의 화약무기 사용은 해전과 관련해 다루어 지는 수준입니다. 2장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경험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조선 수군의 대규모 화포 운용이 일본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정도만 서술되어 있습니다. 3장의 경우는 임진왜란이 주가 되어야 하지만 절반 정도의 내용이 원명교체기 화약무기의 사용과 명나라 시기 왜구의 창궐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부분에서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와 조선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썩 서술의 밀도가 치밀하지 못합니다. 조선군의 활동은 주로 수군위주로 서술되어 있으며 조선 수군의 활동에 대해서도 첫 번째 승리인 옥포해전과 조선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에 대해서 언급하는 정도입니다. 조선수군의 승리 요인에 대해서도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와 화약무기의 대규모 사용이라는 서술만 있을 뿐 조선의 화포 개발이나 운용에 대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거북선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데 거북선이 철갑선인지 아닌지 논쟁이 진행 중이라고 적어 놓았더군요. 조선 육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임진왜란에서 명나라 육군이 대규모의 화약 무기를 운용했다는 정도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책의 분량상 조선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서술이 너무 부실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자는 임진왜란에 대해서 원사료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Samuel Hawley의 단행본인 The Imjin War : Japan’s sixteenth 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cuer China와 Kenneth M. Swope의 Crouching Tigers, Secret Weapons : Military Technology Employed during the Sino-Japanese-Korean War에 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저자는 2장에서 일본어를 모르는 Noel Perrin이 일본의 화약무기 사용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유포시켰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비록 특별히 잘못된 서술은 없다 하더라도 조선에 대한 서술을 보면 Lorge도 Perrin과 오십보 백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한국어를 모르는 Lorge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자료를 활용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 연구자들이 영어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거나 국내의 연구들을 활발히 영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최소한 군사편찬연구소의 저작들이라도 영역해서 외국에 소개한다면 한국 군사사에 대한 외국의 이해가 훨씬 넓어질 수 있을 것 입니다. 강바닥에 삽질하는 것 보다는 이런 일을 하는게 장기적으로는 대한민국에 더 큰 도움이 될 것 입니다. 인터넷을 보면 한국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들이 의외로 많은데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텍스트는 너무나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2008년 12월 23일 화요일
유가환급금으로 지른 책 두 권
유가환급금을 받아서 책을 두 권 샀습니다.
한 권은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의 ‘박정희 정부의 선택 : 1960년대 수출지향형 공업화와 냉전체제’이고 다른 한 권은 테사 모리스 스즈키(Tessa Morris-Suzuki)의 ‘북한행 엑소더스 : 그들은 왜 북송선을 타야만 했는가?’ 입니다.
기미야 다다시의 ‘박정희 정부의 선택’은 저자가 1991년에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을 증보하고 문체를 다듬어서 내놓은 저작입니다. 1991년의 논문은 1차5개년 계획의 수립과정만을 다루고 있는데 이번에 나온 단행본은 범위를 더 넓혀서 1차5개년 계획의 진행과정과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무역특수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보론으로 남한의 민주화 운동과 518도 다루고 있는데 본문의 내용과는 약간 동떨어진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단행본은 일단 1991년의 논문보다 문장이 많이 가다듬어 져서 읽기가 편합니다. 1991년의 박사논문은 학술논문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외국인이 쓴 한글이라는 점에서 다소 문체가 어색한 면이 없지 않았는데 이번 단행본의 문체는 읽기 편하고 좋습니다.
일전에 이글루스에서 이승만과 박정희 시기의 경제성장정책에 대한 논쟁이 있었을 때 제가 이 주제와 관련해 흥미롭게 읽었던 책을 몇 권 추천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좀 심하게 게으르다 보니 그러질 못했죠;;;; 기미야 다다시의 이 단행본은 박정희 정부 초기의 경제정책에 대한 꽤 재미있는 개설서입니다. 일단 박사논문의 주제에서 범위를 더욱 확장해 베트남전 특수까지 다루고 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해 2차산업 주도의 경제구조로 개편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961년에서 1970년 사이의 기간은 한국의 산업구조가 극적으로 개편된 매우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박정희 시기의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특히 기미야 다다시의 박사논문은 군사정권이 집권 초기 이승만 시기 경제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수출대체 위주의 공업화를 구상하다가 국내외적인 요소로 이 계획이 좌절된 뒤 수출주도의 공업화로 이행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으며 이 단행본도 이 주제의 연장선상에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즉 박정희 정권 초기 경제개발에 대한 논쟁을 이해하는데 꽤 유용합니다. 또한 관련 주제에 대한 단행본 중 가장 최근의 저작(2008년 12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이라는 점도 강점입니다. 최근까지의 관련 연구사 정리가 잘 되어 있어 논쟁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테사 모리스 스즈키의 ‘북한행 엑소더스’는 영어판(Exodus to North Korea: Shadows from Japan's Cold War)을 사려고 아마존의 Wish List에 담아두고 있다가 다른 책들에 밀려 사지 못하는 사이에 번역판이 먼저 나와 버렸습니다. 한국어판이 더 싸고 요즘은 환율문제도 있는지라 한국어판으로 질러버렸습니다. 재미있게도 이 책은 저자의 요청에 따라 일본어판(北朝鮮への エクソダス―「歸國事業」の 影をたどる)을 번역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는데 북송과정에서 일본정부와 일본적십자사가 수행한 역할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북한은 일본측에서 재일 조선인의 북송을 추진하고 있던 초기에는 북송에 소극적이었다고 하는군요. 일본이 이승만 정부의 북송반대 운동을 제압하는데 미국의 지원을 받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거스름돈의 운명이란;;;;)
한 권은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의 ‘박정희 정부의 선택 : 1960년대 수출지향형 공업화와 냉전체제’이고 다른 한 권은 테사 모리스 스즈키(Tessa Morris-Suzuki)의 ‘북한행 엑소더스 : 그들은 왜 북송선을 타야만 했는가?’ 입니다.
기미야 다다시의 ‘박정희 정부의 선택’은 저자가 1991년에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을 증보하고 문체를 다듬어서 내놓은 저작입니다. 1991년의 논문은 1차5개년 계획의 수립과정만을 다루고 있는데 이번에 나온 단행본은 범위를 더 넓혀서 1차5개년 계획의 진행과정과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무역특수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보론으로 남한의 민주화 운동과 518도 다루고 있는데 본문의 내용과는 약간 동떨어진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단행본은 일단 1991년의 논문보다 문장이 많이 가다듬어 져서 읽기가 편합니다. 1991년의 박사논문은 학술논문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외국인이 쓴 한글이라는 점에서 다소 문체가 어색한 면이 없지 않았는데 이번 단행본의 문체는 읽기 편하고 좋습니다.
일전에 이글루스에서 이승만과 박정희 시기의 경제성장정책에 대한 논쟁이 있었을 때 제가 이 주제와 관련해 흥미롭게 읽었던 책을 몇 권 추천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좀 심하게 게으르다 보니 그러질 못했죠;;;; 기미야 다다시의 이 단행본은 박정희 정부 초기의 경제정책에 대한 꽤 재미있는 개설서입니다. 일단 박사논문의 주제에서 범위를 더욱 확장해 베트남전 특수까지 다루고 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해 2차산업 주도의 경제구조로 개편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961년에서 1970년 사이의 기간은 한국의 산업구조가 극적으로 개편된 매우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박정희 시기의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특히 기미야 다다시의 박사논문은 군사정권이 집권 초기 이승만 시기 경제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수출대체 위주의 공업화를 구상하다가 국내외적인 요소로 이 계획이 좌절된 뒤 수출주도의 공업화로 이행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으며 이 단행본도 이 주제의 연장선상에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즉 박정희 정권 초기 경제개발에 대한 논쟁을 이해하는데 꽤 유용합니다. 또한 관련 주제에 대한 단행본 중 가장 최근의 저작(2008년 12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이라는 점도 강점입니다. 최근까지의 관련 연구사 정리가 잘 되어 있어 논쟁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테사 모리스 스즈키의 ‘북한행 엑소더스’는 영어판(Exodus to North Korea: Shadows from Japan's Cold War)을 사려고 아마존의 Wish List에 담아두고 있다가 다른 책들에 밀려 사지 못하는 사이에 번역판이 먼저 나와 버렸습니다. 한국어판이 더 싸고 요즘은 환율문제도 있는지라 한국어판으로 질러버렸습니다. 재미있게도 이 책은 저자의 요청에 따라 일본어판(北朝鮮への エクソダス―「歸國事業」の 影をたどる)을 번역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는데 북송과정에서 일본정부와 일본적십자사가 수행한 역할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북한은 일본측에서 재일 조선인의 북송을 추진하고 있던 초기에는 북송에 소극적이었다고 하는군요. 일본이 이승만 정부의 북송반대 운동을 제압하는데 미국의 지원을 받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거스름돈의 운명이란;;;;)
2008년 12월 3일 수요일
'칼, 실용과 상징' : 고려대학교 박물관
얼마전에 번동아제님께서 소개해 주신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도검 전시회, '칼, 실용과 상징'전을 관람하고 왔습니다.
평일 오전이어서 그런지 관람객이 별로 없어서 여유있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전시는 '제왕의 칼', '무사의 칼', '선비의 칼', '여인의 칼', '신들의 칼' 등 다섯가지 주제로 이루어 졌는데 재미있는 구분 방식 같습니다. 전시 구성외에도 많은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료로 배포되는 안내용 브로셔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알차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전시실의 구성과 배치도 좋은 느낌이더군요.
전시물 중에는 조선, 일본, 청나라의 갑옷도 있어서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복을 입은 철종어진의 모사도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군복을 입은 조선국왕의 어진은 처처음 봤습니다. 전시실의 설명문에는 철종어진이 유일하게 군복을 입은 조선국왕의 어진이라고 하는군요.
전시된 칼 중에서는 흑칠천단초금장곡병환도(黑漆千段草金裝曲柄環刀)가 인상 깊었습니다. 개항기 이후 서양식 예도의 외형을 응용했다는 점이 흥미롭더군요. 도검류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이런 물건을 접하니 매우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궁중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식 식칼도 흥미로운 전시품이었습니다.
전시물 관람을 마친 뒤 전시실 밖에서 은장도 제작과정을 다룬 영상물을 관람했습니다. 정말 재미있더군요.
그리고 전시회 포스터도 한 장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박물관 전시가 그렇지만 사진 촬영이 안되는 점은 유감이었습니다. 전시도 재미있었고 전시물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점도 있어서 도록을 구입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매우 알찬 전시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도검류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라서 전시물들에 대해서는 뭐라 평할 방법은 없지만 꽤 재미있더군요. 시간 여유가 있으신 분들께서는 한번 관람하셨으면 싶습니다.
평일 오전이어서 그런지 관람객이 별로 없어서 여유있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전시는 '제왕의 칼', '무사의 칼', '선비의 칼', '여인의 칼', '신들의 칼' 등 다섯가지 주제로 이루어 졌는데 재미있는 구분 방식 같습니다. 전시 구성외에도 많은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료로 배포되는 안내용 브로셔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알차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전시실의 구성과 배치도 좋은 느낌이더군요.
전시물 중에는 조선, 일본, 청나라의 갑옷도 있어서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복을 입은 철종어진의 모사도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군복을 입은 조선국왕의 어진은 처처음 봤습니다. 전시실의 설명문에는 철종어진이 유일하게 군복을 입은 조선국왕의 어진이라고 하는군요.
전시된 칼 중에서는 흑칠천단초금장곡병환도(黑漆千段草金裝曲柄環刀)가 인상 깊었습니다. 개항기 이후 서양식 예도의 외형을 응용했다는 점이 흥미롭더군요. 도검류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이런 물건을 접하니 매우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궁중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식 식칼도 흥미로운 전시품이었습니다.
전시물 관람을 마친 뒤 전시실 밖에서 은장도 제작과정을 다룬 영상물을 관람했습니다. 정말 재미있더군요.
그리고 전시회 포스터도 한 장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박물관 전시가 그렇지만 사진 촬영이 안되는 점은 유감이었습니다. 전시도 재미있었고 전시물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점도 있어서 도록을 구입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매우 알찬 전시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도검류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라서 전시물들에 대해서는 뭐라 평할 방법은 없지만 꽤 재미있더군요. 시간 여유가 있으신 분들께서는 한번 관람하셨으면 싶습니다.
2008년 11월 8일 토요일
Gunpowder - 1948년 3차대전이 발발했다면 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이 새로운 가상적이 되자 미군 수뇌부는 매우 심각한 전략적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2차대전이 종결된 뒤 병력 감축이 급속히 이루어진 결과 재래식 전력으로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소련을 상대하기가 버겁게 된 것 이었습니다. 스탈린은 미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핵무기에서의 열세를 재래식 전력으로 만회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재래식 전력의 강화에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1947년에 들어오면 재래식 전력에서 육군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략적 상황에서 미합동참모본부(JCS)는 1948년 5월 소련과의 전쟁을 상정한 반달(Halfmoon) 계획을 작성합니다. 반달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 발발시 아시아 전선에서는 지상군으로 방어가 어려운 중국과 한국의 미군 병력을 철수하고 그 대신 일본은 사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국민당 정부를 군사적으로 지원할 것이었습니다. 반달계획에 이어서 1949년 1월 28일에는 다시 트로잔(Trojan) 계획이 수립되는데 이 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 발발시 전쟁 첫 해는 재래식 전력을 축적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은 공군 주도의 핵폭격으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은 소련이 1949년 8월 핵실험에 성공하기 전 까지는 전쟁 초기에는 핵 전력을 중심으로 소련을 상대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래전 측면에서는 주 전장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이고 아시아는 부차적 전장으로 전략적 방어를 수행할 계획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의 전략적 방어는 대규모 지상군이 필요한 중국과 한국은 포기하고 해군과 공군으로 방어가 용이한 일본을 방어하는 다소 소극적인 측면이 보입니다.
합참의 전략에 따라 아시아에서 전략방어를 수행할 극동군 사령부는 건파우더(Gunpowder) 라는 개념계획을 작성합니다. 이것은 정식 작전계획은 아니고 개념 연구로서 반달계획이 수립되고 4개월이 지난 1948년 9월 8일에 수립되었습니다. 극동군사령부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 개념계획 몇 가지를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초 RG 554의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문서를 보던 중 1948년 12월에 작성된 건파우더 계획의 수정안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읽어 보니 흥미로운 점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합참의 거시적 전략의 틀 안에서 수립된 계획이다 보니 중국과 한국에서의 철수, 핵무기 사용 등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이 일부 있더군요. 제가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들을 조금 발췌해 봅니다.
먼저 전쟁초기 미군과 그 동맹국의 능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안 에서는 한국은 방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으며 국민당 정부의 능력에 대해서도 낮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연구 단계의 계획이지만 부산에 대한 핵폭격이 고려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때 3차대전이 났다면 부산에도 평화공원이 하나 생겼겠군요;;;;
작전에서는 일본 본토의 방어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관련 내용들만 발췌해 보겠습니다.
위에 언급된 내용들은 한 줄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일본을 공격방어한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은 무조건 철수고 중국에서도 필요한 인원을 제외하면 철수. 그리고 일본은 결사 방어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소련에 대한 공격은 공군에 의해 주도되며 해군에 의한 해상봉쇄가 함께 수행될 계획입니다.
그리고 주한미군으로 있었던 24군단에는 다음과 같은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고려되고 있습니다.
역시 한 줄 요약이 가능합니다.
한국에서 발을 뺀다(;;;;)
네. 만약 이 개념계획이 정식 작전계획으로 승격되었다면 주한미군은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을 겁니다.(;;;;;) 물론 소련과의 재래식 전력 격차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군사적 선택이긴 합니다만. 당시 한국인들이 미군 내부에서 저런 이야기가 오간다는 걸 알았다면 매우 실망했을 것 입니다.
결국 위기상황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선택하게 되는데 1948년 무렵미국에게 있어 일본은 전자에 속했고 한국은 후자에 속했습니다. sonnet님이 예전에 태풍이 몰아치면 차라리 태풍의 눈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게 낫다는 이야길 하셨었는데 이 경우가 딱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전략적 상황에서 미합동참모본부(JCS)는 1948년 5월 소련과의 전쟁을 상정한 반달(Halfmoon) 계획을 작성합니다. 반달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 발발시 아시아 전선에서는 지상군으로 방어가 어려운 중국과 한국의 미군 병력을 철수하고 그 대신 일본은 사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국민당 정부를 군사적으로 지원할 것이었습니다. 반달계획에 이어서 1949년 1월 28일에는 다시 트로잔(Trojan) 계획이 수립되는데 이 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 발발시 전쟁 첫 해는 재래식 전력을 축적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은 공군 주도의 핵폭격으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은 소련이 1949년 8월 핵실험에 성공하기 전 까지는 전쟁 초기에는 핵 전력을 중심으로 소련을 상대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래전 측면에서는 주 전장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이고 아시아는 부차적 전장으로 전략적 방어를 수행할 계획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의 전략적 방어는 대규모 지상군이 필요한 중국과 한국은 포기하고 해군과 공군으로 방어가 용이한 일본을 방어하는 다소 소극적인 측면이 보입니다.
합참의 전략에 따라 아시아에서 전략방어를 수행할 극동군 사령부는 건파우더(Gunpowder) 라는 개념계획을 작성합니다. 이것은 정식 작전계획은 아니고 개념 연구로서 반달계획이 수립되고 4개월이 지난 1948년 9월 8일에 수립되었습니다. 극동군사령부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 개념계획 몇 가지를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초 RG 554의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문서를 보던 중 1948년 12월에 작성된 건파우더 계획의 수정안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읽어 보니 흥미로운 점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합참의 거시적 전략의 틀 안에서 수립된 계획이다 보니 중국과 한국에서의 철수, 핵무기 사용 등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이 일부 있더군요. 제가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들을 조금 발췌해 봅니다.
먼저 전쟁초기 미군과 그 동맹국의 능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b) 아군 :
(1) 미군은 한국에 대한 침공을 격퇴할 수 없을 것이다.
(2) 태평양함대는 Y일로부터 15일이 지난 뒤에야 제한적인 작전이 가능할 것 이다.
(3) 극동공군(FEAF)은 Y일로부터 3일에서 9일이 지나기 이전에는 대한해협에서 소규모의해상 활동을 보호하는 제한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며 (이 기간 동안) 제공권을 장악하지는 못 할 것이다.
(4) 일본정부와 일본국민은 일본 본토 방위를 전력으로 지원할 것이다.
(5) 국민당정부는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겠으나 만주와 화북, 산동반도의 주요 철도노선과 항구를 적이 이용하는 것을 저지하지는 못 할 것이다.
(6) 블라디보스톡, 부산,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은 각각 한 발의 핵폭탄으로 핵 폭격을 실시하면 이후 90일간 주요 항구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b) Own Forces:
(1) That US forces will be unable to repel the invasion of Korea
(2) That Pacific Fleet units will be available for limited operations on or before Y plus 15 days.
(3) That FEAF will be unable to maintain air superiority over the Korea-Tsushima Straits area except for limited ability to protect ship movements from Y plus 3 through Y plus 9 days.
(4)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and people will wholeheartedly support the defense of Japan.
(5) That the National Government of China will declare war and will be unable to prevent hostile use of the principal rail lines and ports of Manchuria, North China and the Shantung Peninsula.
(6) That one atomic bomb at each port can effectively deny Vladivostok, Pusan, and Port Arthur-Dairen as major embarkation points for 90 days after detonation.
December 31, 1948, 「Memorandum for General Almond, Status of Gunpowder」, RG 554,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Assistant Chief of Staff, G-2, Intelligence, Subject File, 1945-52, Entry 2, Box 5
이 연구안 에서는 한국은 방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으며 국민당 정부의 능력에 대해서도 낮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연구 단계의 계획이지만 부산에 대한 핵폭격이 고려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때 3차대전이 났다면 부산에도 평화공원이 하나 생겼겠군요;;;;
작전에서는 일본 본토의 방어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관련 내용들만 발췌해 보겠습니다.
4. 작전
a. 생략(작전지역)
b. 작전은 일본 본토와 류쿠에 대한 전략적 방어를 기본으로 한다.
c. 총괄 기동계획에 따라 한국과 화북에의 병력 철수를 신속히 하고 극동군 병력을 규슈 북부와 혼슈에 집결시키고 홋카이도는 가능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방어하되 극동군사령부의 특정한 명령이 있을 경우 포기한다.
d. 간토(関東) 평야는 일본의 핵심적인 지역이기 때문에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수해야 한다.
e. 극동군 사령부의 지도하에 일본정부는 다음의 지역에 전반적인 방어시설을 건설할 것이다. : 가고시마(鹿児島), 고베(神戶)-오사카(大阪), 나고야(名古屋), 도쿄-요코하마(橫濱), 센다이(仙台)
f. 중국에 주둔한 미군은 해로를 통한 철수를 고려하여 칭타오(靑島)를 가능한 장기간 방어해야 한다.
g. 중국에 파견된 군사고문단은 가능한 오랫동안 활동을 지속해야 한다.
h. 제5공군은 초기에는 방공 임무에 주력하며 서부 내해 지역(동해)에서 아군 측 선박 항행에 대한 적의 공습을 저지하고 24군단의 철수를 보호하며 홋카이도-쓰가루(津輕) 해협 지구에서도 동일한 임무를 수행한다.
i. 오키나와에 전개한 중(中)폭격비행단들은 가능할 경우 간토 평야 지대로 이동해 극동에서의 전략 폭격 임무에 참가한다.
j. 해군은 위에서 언급한 해상 철수 임무를 수행하며 극동 지역에서의 기뢰 부설, 극동 해역의 제해권 확보를 수행한다.
4. Operations
a. –
b. Operations are based upon a strategic defense of Japan and the Ryukyus.
c. The general scheme of maneuver visualizes a precipitate evacuation of Korea and North China, a concentration of CINCFE forces in north Kyushu and Hinshu, and the defense of Hokkaido to the maximum effort practicable, to be abandoned only upon specific order of CINCFE.
d. The Kanto plain in considered the vital area of Japan, to be defended at all costs.
e. All-round field defenses will be construct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under general CINCFE direction in the following areas : Kagoshima, Kobe-Osaka, Nagoya, Tokyo-Yokohama, and Sendai.
f. US forces in china will hold Tsingtao as long as practicable consistent with Water withdrawal.
g. The Military Advisory Group in China will continue their functions as long as practicable.
h. The 5th Air Force is initially employed in air defense, in preventing hostile air attacks on friendly ship movement in the western inland seas area, in protecting the withdrawal of XXIV Corps, and similar mission in the Hokkaido-Tsugaru Straits area.
i. Medium bomb groups are concentrated on Okinawa, are displaced to the Kanto Plain area as feasible, and will participate in the Far East Strategic Air Offensive.
j. Naval forces will conduct evacuation as indicated above, will participate in the Far East minig campaign, and secure control of seas in Far East waters.
「Memorandum for General Almond, Status of Gunpowder」, 위의 문서
위에 언급된 내용들은 한 줄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은 무조건 철수고 중국에서도 필요한 인원을 제외하면 철수. 그리고 일본은 결사 방어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소련에 대한 공격은 공군에 의해 주도되며 해군에 의한 해상봉쇄가 함께 수행될 계획입니다.
그리고 주한미군으로 있었던 24군단에는 다음과 같은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고려되고 있습니다.
(a) 24군단
(1) 지연전 수행.
(2) 인천과 부산의 항만 시설 파괴.
(3) 한국에서 민간인 철수.
(4) 한국에 잔류 시킬 정보조직의 구성.
(a) XXIV Corps
(1) Delaying Action
(2) Destruction of port facilities of Inchon and Pusan
(3) Evacuation of civilians from Korea.
(4) An intelligence establishment to remain in Korea.
「Memorandum for General Almond, Status of Gunpowder」, 위의 문서
역시 한 줄 요약이 가능합니다.
네. 만약 이 개념계획이 정식 작전계획으로 승격되었다면 주한미군은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을 겁니다.(;;;;;) 물론 소련과의 재래식 전력 격차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군사적 선택이긴 합니다만. 당시 한국인들이 미군 내부에서 저런 이야기가 오간다는 걸 알았다면 매우 실망했을 것 입니다.
결국 위기상황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선택하게 되는데 1948년 무렵미국에게 있어 일본은 전자에 속했고 한국은 후자에 속했습니다. sonnet님이 예전에 태풍이 몰아치면 차라리 태풍의 눈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게 낫다는 이야길 하셨었는데 이 경우가 딱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2008년 10월 5일 일요일
Kenneth Chase가 주장하는 중국의 화기 개발이 낙후된 원인
번동아제님의 글, 「조선 후기 군대의 기본 전투대형인 층진의 개념도」에 달린 댓글을 읽다보니 흥미로운 구절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중국이 조선 보다도 화약무기를 활용한 진형의 개발에서 뒤떨어졌다는 점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중국은 명-청 교체기 이후로는 화약무기의 활용에서 유럽에게 완전히 추월당하고 말았지요. 중국이 화약무기를 개발한 원조임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이후로는 유럽을 따라잡지 못하게 된 이유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제가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한 가설은 Kenneth Chase의 주장입니다. Kenneth Chase에 대해서는 이글루에 있을 때 한번 간단히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글루를 닫으면서 해당 글을 날려버렸으니 다시 한번 언급해 볼까 합니다.
Kenneth Chase는 화약무기의 초기 발전단계에서 발전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병의 위협이고 두 번째는 보병의 위협입니다. 전자의 위협이 클 경우 초기 단계의 화기로 무장한 보병은 적 기병의 기동성을 상쇄할 만한 수단이 없으므로 전투에 불리할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기병의 위협이 심각한 곳에서는 기병에 대한 대항수단으로 기병을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경우 화기의 개발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됩니다. 보병의 위협이 크다면 조건은 반대가 되겠지요.
Chase는 이상의 조건에 따라 화기의 발달유형을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합니다.
먼저 기병과 보병의 위협을 모두 받는 경우는 화약무기의 발전이 중간 정도로 일어납니다. 보병위주의 서유럽과 기병위주의 유목민들을 동시에 상대한 오스만 투르크와 동유럽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다음으로 기병의 위협은 크지만 보병의 위협은 적은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가 바로 중국으로 이런 경우 화약무기의 발전은 느리게 진행됩니다.
세 번째는 기병의 위협은 적고 보병의 위협이 큰 경우 입니다. 서유럽이 여기에 해당되며 이 경우에는 화기의 발전이 급속히 진행됩니다.
마지막은 양쪽 모두의 위협이 없는, 전쟁의 위협이 적은 경우인데 이 경우는 이렇다 할 발전이 없습니다. 바로 도쿠가와 막부 시기의 일본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Chase는 명청교체기 중국의 화약무기 사용에 대한 장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Chase는 일본이 중국에게 유럽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했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일본은 서유럽에 비해 전쟁수행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제한된 정복전쟁 수행능력을 잘 보여줬으며 결국 일본은 이 전쟁의 실패 이후 조용히 고립노선을 걷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을 위협하는 존재는 기병을 운용하는 만주족 만이 남게 되어 화약무기 개발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는 결론입니다.
다만 에도시대 일본의 병학이 1700년대까지 여전히 시대불명의 망상세계를 헤메고 있었고, 청나라 또한 화약병기 시대에 걸맞는 진형을 제대로 개발 못해 헤매던데 비하면 그나마 조선은 유럽의 선형 전술과 비슷한 대형을 내놓고 고민하고 있었다는 점에선 부분적이나마 긍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 번동아제
중국이 조선 보다도 화약무기를 활용한 진형의 개발에서 뒤떨어졌다는 점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중국은 명-청 교체기 이후로는 화약무기의 활용에서 유럽에게 완전히 추월당하고 말았지요. 중국이 화약무기를 개발한 원조임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이후로는 유럽을 따라잡지 못하게 된 이유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제가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한 가설은 Kenneth Chase의 주장입니다. Kenneth Chase에 대해서는 이글루에 있을 때 한번 간단히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글루를 닫으면서 해당 글을 날려버렸으니 다시 한번 언급해 볼까 합니다.
Kenneth Chase는 화약무기의 초기 발전단계에서 발전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병의 위협이고 두 번째는 보병의 위협입니다. 전자의 위협이 클 경우 초기 단계의 화기로 무장한 보병은 적 기병의 기동성을 상쇄할 만한 수단이 없으므로 전투에 불리할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기병의 위협이 심각한 곳에서는 기병에 대한 대항수단으로 기병을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경우 화기의 개발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됩니다. 보병의 위협이 크다면 조건은 반대가 되겠지요.
Chase는 이상의 조건에 따라 화기의 발달유형을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합니다.
먼저 기병과 보병의 위협을 모두 받는 경우는 화약무기의 발전이 중간 정도로 일어납니다. 보병위주의 서유럽과 기병위주의 유목민들을 동시에 상대한 오스만 투르크와 동유럽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다음으로 기병의 위협은 크지만 보병의 위협은 적은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가 바로 중국으로 이런 경우 화약무기의 발전은 느리게 진행됩니다.
세 번째는 기병의 위협은 적고 보병의 위협이 큰 경우 입니다. 서유럽이 여기에 해당되며 이 경우에는 화기의 발전이 급속히 진행됩니다.
마지막은 양쪽 모두의 위협이 없는, 전쟁의 위협이 적은 경우인데 이 경우는 이렇다 할 발전이 없습니다. 바로 도쿠가와 막부 시기의 일본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Chase는 명청교체기 중국의 화약무기 사용에 대한 장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중국이 (화약무기 개발에서) 뒤쳐지게 된 시점이 명 말기인지 또는 청 초기인지는 단언하기가 어렵다. 유럽은 1400년대 후반에 최초의 실용적 화기인 머스켓을 개발 함으로서 처음으로 중국을 앞서는 단초를 마련했지만 중국인들에게 머스켓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대안이 아니었다. 명 왕조의 멸망과 청 왕조가 건립된 시기에 있었던 사건들은 중국의 국방에 있어서 유용한 수단은 명 초기와 마찬가지로 기병이었음을 보여준다. 초기의 청 왕조는 (화기의 사용에서) 상대적으로 유럽에 비해 뒤쳐졌지만 유럽의 위협이 닥치기 까지는 아직 2세기나 더 남아 있었다.
화기, 특히 1300~1400년대의 조잡한 수준의 화기는 단독으로 명 왕조가 처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었다. 화기가 기병과 싸우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점은 중국에서 화기의 발달이 별로 이뤄지지 못한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Kenneth Chase, Firearms : A Global History to 17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171
Chase는 일본이 중국에게 유럽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했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일본은 서유럽에 비해 전쟁수행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제한된 정복전쟁 수행능력을 잘 보여줬으며 결국 일본은 이 전쟁의 실패 이후 조용히 고립노선을 걷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을 위협하는 존재는 기병을 운용하는 만주족 만이 남게 되어 화약무기 개발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는 결론입니다.
2007년 10월 21일 일요일
북한의 50~60년대 경제성장에 대한 잡상
남북한의 경제를 비교할 때 흔히 하는 말 중 하나가 북한이 60년대까지 남한보다 경제가 잘나갔다고 하는 것 입니다. 사실 통계수치 같은걸 보더라도 북한은 전후복구 과정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기록들을 보여준게 사실입니다. 북한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1957~60년도에는 GNP 증가율이 연평균 21%에 달했다고 하지요. 1970년대 중반까지도 연평균 10%가 넘는 성장세를 보였다고 추정되니 대단한 성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차피 저런 고도성장은 소련과 중국의 경제원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입니다. 북한 체제 자체가 자력갱생 노선이었고 경제에 필수적인 원자재나 연료 등은 상당수가 소련의 원조로 충당되었으니 경제를 일정수준까지 성장시키는게 가능했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60년대 후반부터 사실상 공짜에 가까웠던 원조가 줄어들면서 결국 일본, 프랑스, 서독 등의 “자본주의” 국가에게 손을 벌리게 된 것 입니다.
사실 경공업 제품이라도 수출하던 남한과 달리 북한이 팔아먹을 것은 납, 아연 같은 원자재류에 불과했는데 오일쇼크 이전까지만 해도 아연의 가격이 높았으니 이것을 믿고 차관을 들여온 것 입니다. 아마 북한 쪽은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 까지 원자재 수출로 공백을 메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이 상황에서 오일쇼크가 터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남한은 60년대에 뭔가 팔아먹을 수 있는 산업을 만들어 놨는데 비해 북한은 “잘 나가던” 50~60년대에 자력갱생 노선을 추구하느라 그런 것을 갖추지 못했던 것 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공짜원조가 들어오던 50~60년대에 헛다리를 짚었다고 해야 되나요.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수출할게 없다 보니 서방과의 교역은 적자였습니다. 일본, 프랑스, 서독 등의 차관을 들여와 대규모 플랜트 건설을 시작한 것이 1972년 부터인데 벌써 1974년이 되면 채무불이행 이라는 추태를 보이기 시작하지요.
양문수 교수가 지적했듯 북한이 70년대 중반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것은 오일쇼크가 1차적인 원인이긴 하지만 본질적인 위기의 원인은 원자재를 제외하면 주력 수출상품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는 것 입니다. 북한의 경제당국이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신하고 남한과의 자존심 경쟁을 위해 대규모 차관을 들여와 공업건설에 나선 것이 결국 그 자체의 목을 조른 것 입니다. 물론 남쪽도 70년대 말에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구조조정을 통해 80년대에는 어느 정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은 소위 “잘나가던” 50~60년대에 개방을 위한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조조정이건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건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70년대 중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계속해서 경제가 내리막 길 이지요. 이미 1973년에 김일성은 공장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생산이 정상화 되지 못한다고 공개적으로 문제점을 시인하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이 무렵 남북한의 게임은 끝난 것 같습니다.
결국 북한의 50~6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은 소련의 대규모 무상원조가 결정적이었으며 북한인들은 이 좋은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 했습니다. 결과론적인 비판에 불과하지만 북한이 자랑한 경이적인 성장은 사실 그 자체가 무상원조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허깨비였던 셈입니다. 결국 북한은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건국 이후 단 한번도 원조경제 수준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어차피 저런 고도성장은 소련과 중국의 경제원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입니다. 북한 체제 자체가 자력갱생 노선이었고 경제에 필수적인 원자재나 연료 등은 상당수가 소련의 원조로 충당되었으니 경제를 일정수준까지 성장시키는게 가능했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60년대 후반부터 사실상 공짜에 가까웠던 원조가 줄어들면서 결국 일본, 프랑스, 서독 등의 “자본주의” 국가에게 손을 벌리게 된 것 입니다.
사실 경공업 제품이라도 수출하던 남한과 달리 북한이 팔아먹을 것은 납, 아연 같은 원자재류에 불과했는데 오일쇼크 이전까지만 해도 아연의 가격이 높았으니 이것을 믿고 차관을 들여온 것 입니다. 아마 북한 쪽은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 까지 원자재 수출로 공백을 메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이 상황에서 오일쇼크가 터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남한은 60년대에 뭔가 팔아먹을 수 있는 산업을 만들어 놨는데 비해 북한은 “잘 나가던” 50~60년대에 자력갱생 노선을 추구하느라 그런 것을 갖추지 못했던 것 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공짜원조가 들어오던 50~60년대에 헛다리를 짚었다고 해야 되나요.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수출할게 없다 보니 서방과의 교역은 적자였습니다. 일본, 프랑스, 서독 등의 차관을 들여와 대규모 플랜트 건설을 시작한 것이 1972년 부터인데 벌써 1974년이 되면 채무불이행 이라는 추태를 보이기 시작하지요.
양문수 교수가 지적했듯 북한이 70년대 중반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것은 오일쇼크가 1차적인 원인이긴 하지만 본질적인 위기의 원인은 원자재를 제외하면 주력 수출상품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는 것 입니다. 북한의 경제당국이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신하고 남한과의 자존심 경쟁을 위해 대규모 차관을 들여와 공업건설에 나선 것이 결국 그 자체의 목을 조른 것 입니다. 물론 남쪽도 70년대 말에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구조조정을 통해 80년대에는 어느 정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은 소위 “잘나가던” 50~60년대에 개방을 위한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조조정이건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건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70년대 중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계속해서 경제가 내리막 길 이지요. 이미 1973년에 김일성은 공장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생산이 정상화 되지 못한다고 공개적으로 문제점을 시인하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이 무렵 남북한의 게임은 끝난 것 같습니다.
결국 북한의 50~6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은 소련의 대규모 무상원조가 결정적이었으며 북한인들은 이 좋은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 했습니다. 결과론적인 비판에 불과하지만 북한이 자랑한 경이적인 성장은 사실 그 자체가 무상원조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허깨비였던 셈입니다. 결국 북한은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건국 이후 단 한번도 원조경제 수준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2007년 7월 3일 화요일
코낼리 상원외교위원장 인터뷰 사건
애치슨 국무장관의 극동방위선 관련 발언으로 한국이 어수선하던 1950년 5월 5일, 미국 상원의 외교위원장 코낼리 의원은 U.S. News & World Report와의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코낼리 의원은 한국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고 합니다.
이 인터뷰가 나가자 국무부는 당황합니다. 애치슨 라인 덕분에 이 박사로부터 별로 좋지 않은 소리를 듣고 있던 국무부는 코낼리 상원의원의 인터뷰가 한국 내에서 일으킬 반향을 걱정하게 됩니다. 국무부는 한국정부의 입장을 고려해 대략 다음과 같은 대책을 강구합니다.
당연히 한국의 언론들은 이 심각한 발언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또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박사는 심기가 아주 불편하셨습니다.
그리고 대략 한 달 뒤에 수령님께서는 스탈린 동지가 하사하신 땅크를 몰고 진짜로 쳐 내려왔지요. 전쟁이 터지기는 했지만 이 전쟁은 이 박사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미국으로부터 버림받는 일은 없도록 해 줬습니다. 이박사에게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군요.
Q - 의원께서는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A - 저는 우리가 원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한국은 포기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을 지지합니다. 우리는 한국을 돕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미국은 한국을 돕기 위해 예산을 편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되어 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북부 지역은 아시아 본토, 즉 소련과 접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일은 없기를 바라지만 만약 소련이 한국을 정복하려는 의도만 있다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만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Q - 그렇지만 한국은 미국의 방위 전략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요?
A - 물론입니다. 한반도의 모든 지역은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한국이 가장 중요한 지역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일본과 오키나와, 필리핀을 잇는 방어선이 가장 중요합니다. 물론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더 중요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 인터뷰가 나가자 국무부는 당황합니다. 애치슨 라인 덕분에 이 박사로부터 별로 좋지 않은 소리를 듣고 있던 국무부는 코낼리 상원의원의 인터뷰가 한국 내에서 일으킬 반향을 걱정하게 됩니다. 국무부는 한국정부의 입장을 고려해 대략 다음과 같은 대책을 강구합니다.
극동차관보(러스크)가 국무부차관(웹)께
대외비 워싱턴 1950년 5월 2일
미국의 대한정책에 대한 코낼리(Connally) 상원의원의 발언
이 문서에는 코낼리 상원의원이 1950년 5월 5일자 U.S. News and World Report에 실린 “국제 정책과 초당파적단결”이라는 제목의 인터뷰에서 한국 문제에 대해 대답한 두 개의 문제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차관께서는 주말로 예정된 코낼리 상원의원과의 면담에서 코낼리 의원의 발언이 미칠 파급효과, 특히 한국정부와 국민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제기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국무부는 다음과 같은 대응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1) 코낼리 의원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국무부의 기본 입장과는 무관한 패배주의적 경향을 드러낸 것이며 이것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반박해야 합니다. 미국이 남한을 “포기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국무부의 기본 입장은 1950년 3월 7일에 국무부장관이 코낼리 의원도 참석한 상원외교위원회에서 한 발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는 이렇습니다. : 대한민국이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가 입니다. 최근 있은 논의에서 많은 의원들이 미국이 한국을 원조하기 위해 지원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제기했습니다. 저는 미국의 정책은 실패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대신 성공하겠다는 결의에 바탕을 둬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대내외적 문제와 한국의 자치 경험의 부족과 기술적, 행정적 노하우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안정성과 공공질서는 꾸준히 개선되고 있으며 공산주의자들의 체제 전복 시도도 일시적이나마 효과적으로 차단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 우리의 원조에 힘입어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해도 될 만큼 충분한 희망을 가져도 됩니다. 물론 100% 확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원조가 없다면 이런 희망조차 가질 수 없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2)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코낼리 의원의 답변은 대한민국 정부가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을 미국의 극동 방어선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문제입니다.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있는 “방위권(Defense Perimeter)"에 대한 국무장관의 프레스 클럽 연설 이후 국무부는 한국정부의 외교관과 미국의 극동방위권에 한국까지 포함시켜야 된다는 (미국 내의) 집단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현 행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대한민국을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 포함시키는) 공약을 제안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언론이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방위선에 대해 보도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의 (미국에 대한) 신뢰와 지속적인 공산주의의 위협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를 꺾을 것입니다.
코낼리 의원의 발언과 관련해서, 만약 언론기자들이 국무장관께 코낼리 의원의 인터뷰에서한국에 대한 발언에 대해 질문한다면 다음과 같은 맥락으로 대답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는 한국과 관련해서 코낼리 의원 및 코낼리 의원이 위원장으로 있는 상원외교위원회와 많은 의견을 나눴으며 또한 하원외교위원회(House Foreign Affairs Commitee)와도 의견을 나눴습니다. 저는 의회와 국무부간에는 어떤 의견이나 견해 차이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미국은 대한민국이 독립된 국가로서 생존하는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미국정부는 직간접적으로 국제연합을 통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할 것입니다.”
“저는 코낼리 상원의원이 말한 것은 한국과 사실상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공산주의의 압제로부터 독립되고 자유를 누리는 것이 미국에게 있어 극도로 중요한 것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의회가 군사원조나 다른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충분히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USGPO 1976, pp.64~65
당연히 한국의 언론들은 이 심각한 발언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대리대사(드럼라이트)가 국무부 장관께
코넬리 의원의 한국 문제에 대한 발언으로 언론들의 반발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들은 5월 5일에 코낼리 의원의 발언에 대한 소식을 추가적인 설명 없이 전송 받았습니다.
5월 6일자 석간 신문 두 곳(서울, 경향)은 AP통신이 보도한 무초대사의 발언을 대서특필했습니다. 경향신문의 “코낼리의 어리석은 발상을 반박함”이라는 제목의 사설은 한국은 미국의 소련에 대한 투쟁의 동반자이며 특히 한국이 공산주의와의 투쟁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과 단호한 자세를 강조했습니다. (경향신문 사설은) 코낼리 의원이 상원 외교위원장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언은 미국 국민과 민주당의 영향이 강한 국무부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으며 소련에 대한 강경한 정책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은 코낼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설은 미국의 대한 원조 공약을 언급하면서 만약 한국이 공산화 된다면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방어선도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후 략)
Ibid, pp.66~67
또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박사는 심기가 아주 불편하셨습니다.
드럼라이트 대리대사와 이승만 대통령의 회견록
2급비밀, 1950년 5월 9일, 서울
주제 : 코낼리 상원의원의 한국 관련 발언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지적
오늘 아침 이승만 대통령과의 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코낼리 상원의원이 최근 인터뷰에서 한 한국관련 발언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는 매우 분노에 찬 목소리와 냉소적인 태도로 한국에서 수천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이 한국과 3,000만의 한국인이 미국에게 전략적으로 가치가 별로, 아니면 아예 없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고 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코낼리 의원의 발언은 공산당에게 대한민국을 쳐들어와도 좋다고 초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코낼리 상원외교위원장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과연 이런 발언을 하는 사람이 제정신일 수 있겠냐고 비난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코낼리 의원의 발언은 매우 해로운 것이며 코낼리 의원이 국무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상 그의 발언은 미국 정부의 공식 정책에 영향을 끼치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후 략)
Ibid. p.77
그리고 대략 한 달 뒤에 수령님께서는 스탈린 동지가 하사하신 땅크를 몰고 진짜로 쳐 내려왔지요. 전쟁이 터지기는 했지만 이 전쟁은 이 박사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미국으로부터 버림받는 일은 없도록 해 줬습니다. 이박사에게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군요.
2007년 3월 8일 목요일
대인배의 꿈을 키웁시다
아래의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일화이지요.
한때는 우리의 마오 주석도 대인배들의 거스름 돈 이었다고 합니다. 자. 우리도 대인배의 꿈을 키웁시다!
(전략) 그러나 7월 2일에 시작된 협상은 거의 시작하자 마자 난항에 부딛혔다. 스탈린이 소련의 국가안보에 있어서 외몽골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15년 혹은 20년 내에 일본이 다시 국력을 회복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련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므로 외몽골을 소련의 영향력 안에 둬야 한다는 것 이었다. 스탈린은 송자문(宋子文)에게 말을 계속했다.
“만약 우리가 일본과 전쟁을 시작한다면 인민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막 4년에 걸친 전쟁을 끝냈는데 왜 또 전쟁을 시작하냐고 할 것 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는데 왜 소련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냐고 하겠지요. 그러니 우리 인민들에게 전쟁을 벌이는 이유가 소련의 안보를 더 굳건히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 말고 더 좋은 구실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송자문은 외몽골 문제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외몽골은 중국의 고유한 영토이기 때문에 외몽골을 독립시키는 것은 중국의 자존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 이라는 것 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스탈린이 국민당 정부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자 만약 소련이 만주에서도 국민당의 우위를 보장하고 여기에 덧붙여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도 중단할 경우 외몽골을 소련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7월 9일, 송자문은 이에 따라 스탈린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송자문은 중국이 외몽골을 포기하는 대가로 소련이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경우 국민당 정부는 소련에게 뤼순과 다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또 만주 철도는 중국이 소유권을 가지되 운영은 중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하자는 제안을 내 놓았다. 스탈린은 이 제안을 받자 즉시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만주 문제에 있어서는 이견이 있었다. 스탈린은 뤼순은 소련이 소유권을 가져야 하며 또 만주 철도 역시 소련이 소유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었다. 왜냐하면 “만주 철도를 건설한 것은 러시아 였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빨리 국민당 정부와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뤼순과 만주 철도 문제에 있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7월 11일 회담에서 스탈린은 “내가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에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했으나 결국 양측의 이견을 좁히지는 못했다. 7월 12일 회담에서도 양측은 평행선을 달렸고 결국 스탈린이 먼저 포기했다. 협상은 일시 중단됐으며 스탈린은 중국측과 포츠담 회담 이후 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스탈린이 겪게 될 여러 문제 중 하나에 불과했다.
Tsuyoshi Hasegawa, Racing the enemy : Stalin, Truman, and surrender of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129
한때는 우리의 마오 주석도 대인배들의 거스름 돈 이었다고 합니다. 자. 우리도 대인배의 꿈을 키웁시다!
2007년 3월 3일 토요일
북한이 외교에 강한 이유!
다나카와 엑스의 논의는 진전 없이 반복됐고 시간만 하릴 없이 흘러갔다.
"당신은 경질되는 것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나는 목숨을 걸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엑스가 골똘히 생각한 끝에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후나바시 요이치, 김정일 최후의 도박 : 북한 핵실험 막전막후 풀 스토리, 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07, p41
북한 외교가 강한 이유는 이것이었습니다!
2007년 2월 14일 수요일
창의력 넘치는 어떤 장군
Conrad C. Crane의 Bombs, Cities and Civilians를 읽고 있는데 아놀드(Henry H. Arnold)의 무한한 상상력에 대한 부분이 나왔습니다. 뭔가 기묘한 느낌을 들게 하더군요.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B-29들이 후지산 분화구에 폭탄을 쏟아 넣는걸 생각하니 뭔가 난감한 느낌이 드는군요.
아놀드는 전문가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 놓는 것을 좋아했다. 기발하고 창의적인 발상은 그를 흥분시키는 요소였다. 아놀드의 초기 저작들을 읽으면 그에게 폭격기만 충분했다면 어떤 일이든지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아놀드는 도쿄 주변의 화산을 폭격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일본 연안의 물고기를 몰살 시키는 것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는 독일의 V-1과 유사한 무인비행폭탄에 열띤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일군이 부비트랩을 사용하는데 대해 만년필이나 작은 책으로 위장한 폭탄을 독일 본토에 투하하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와 그의 참모진은 일본인들 보다 먼저 풍선에 소이탄을 매달아 일본을 공격하는 것을 구상했다.
Conrad C. Crane, Bombs, Cities and Civilians : American Airpower Strategy in World War II,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3, p35
B-29들이 후지산 분화구에 폭탄을 쏟아 넣는걸 생각하니 뭔가 난감한 느낌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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