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서점에 간 김에 책을 조금 샀는데 그 중의 한 권이 『일본의 군사혁명』 입니다. 올해 2월에 발행되었으니 제법 신간에 속하는 군요.
꽤 흥미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주저하지 않고 샀는데 사실 제가 일본사, 특히 20세기 이전의 일본사나 그 연구경향에 대해서는 완전히 깡통인지라 이 책에 대해서 뭐라고 평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저자인 구보타 마사시(久保田正志)는 일단 책에 소개된 약력에서 도쿄대에서 법학을 연구했고 현재 일본에서 성새사적(城塞史跡) 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라고 되어 있고 또 저자 후기에는 1984년 이래 군사사 연구를 계속해 오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 연구자인지 궁금합니다.
책 자체는 아주 재미있게 읽힙니다. 아직 앞부분과 결론 부분만 살펴 본 정도이지만 일본사에 문외한인 입장에서 꽤 흥미로운 서술이 많군요. 일단 저자가 '군사혁명(Military Revolution)'이라는 개념으로 일본의 전쟁양상 변화를 설명하려 하고 있어서 같은시기 유럽과 비교해서 서술하고 있는데 덕분에 이해가 잘 가는 편입니다. 앞부분을 조금 읽다가 꽤 재미가 있어서 결론을 먼저 읽어보게 됐는데 저자는 이시기 일본의 전쟁양상이 가진 특징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1. 일본 또한 동시기 유럽과 마찬가지로 14세기 이후 창을 사용하는 보병중심의 전술로 움직였다. 그러나 유럽과 달리 모든 창병이 밀집대형을 취하지는 않았는데 주된 이유는 일본의 기병은 유럽의 기병보다 덜 위력적이기 때문이었다.
2. 기병의 위협이 적었기 때문에 총포가 도입된 뒤에도 유럽과는 다른 발전양상을 보였다. 즉 유럽과 달리 탄막사격 대신 저격을 중심으로 하는 발전이 이루어졌다. 또한 유럽에서는 총병의 등장과 상비군의 발생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일본은 그렇지 않다.
3. 일본 말의 열등한 체격은 대포를 사람이 견인하는 소형포 위주로 발전하게 했으며 이때문에 축성 양식도 총포사용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이 때문에 유럽 처럼 성곽의 높이가 낮아지지 않았다.
4. 총포의 도입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상률을 높였다. 그러나 일본의 독특한 군사문화가 유럽과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했다. 일본의 군사문화는 수급 획득을 중시했다. 총포의 도입으로 인한 사상률 증가는 수급 획득의 기회를 늘렸으며 군사문화의 특성으로 적의 지휘관, 사령부에 대한 공격 지향이 강했다. 이것은 전역을 조기에 종결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유럽과 달리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지 않게 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5. 유럽은 군사혁명의 과정으로 들어가면서 병농일치를 통한 병력 확대가 이루어졌는데 일본에서는 전란이 조기에 종결되면서 잉여 병력이 늘어나면서 병농분리와 상비군화가 진행되었다.
6. 죠프리 파커 등은 일본에서는 군사혁명이 '중단' 되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것은 일본사의 특성을 무시한 것이다. 유럽의 군사혁명은 전쟁의 장기화의 결과였으나 일본은 통일을 이루면서 유럽과 같은 군사혁명의 과정을 밟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즉 군사혁명이 중단된 것이 아니라 필요한 범위 내에서 군사혁명을 완료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유럽군사사와의 비교분석이 꽤 흥미롭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나중에 渤海之狼님 같이 일본전통군사사를 공부하시는 분들을 뵐 때 한번 고견을 들어봤으면 합니다.
일단 국내에도 일본 전통군사사에 대한 책이 나왔다는 사실이 꽤 반갑습니다.
2010년 6월 30일 수요일
2009년 5월 5일 화요일
The Asian Military Revolution의 조선 관련 서술
또 책 이야기 입니다.
어제는 도서관에서 The Asian Military Revolution : From Gunpowder to the Bomb라는 책을 대출했습니다. 저자인 Peter A. Lorge는 머리말에서 화약무기의 개발이 중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아시아 전역에서 어떠한 군사적 혁신을 가져왔는지를 고찰하겠다는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상당히 매력적인 주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첫 인상이 약간 좋지가 않습니다.
아직 제대로 읽지는 않았고 주요 내용을 살짝 훑어본 수준이지만 다루는 시기가 9세기에서 19세기 초 까지 인데다 공간적 범위도 중국,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 인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라서 서술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쉬운 점은 한국에 대한 기술이 극도로 적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화약무기 도입과 활용에 대한 내용은 2장의 Japan and the wars of unification과 3장의 The Chinese military revolution and war in Korea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 지는 정도 입니다. 특히 임진왜란을 다룬 제3장 조차 명나라 군대의 화약무기 사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조선의 화약무기 사용은 해전과 관련해 다루어 지는 수준입니다. 2장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경험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조선 수군의 대규모 화포 운용이 일본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정도만 서술되어 있습니다. 3장의 경우는 임진왜란이 주가 되어야 하지만 절반 정도의 내용이 원명교체기 화약무기의 사용과 명나라 시기 왜구의 창궐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부분에서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와 조선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썩 서술의 밀도가 치밀하지 못합니다. 조선군의 활동은 주로 수군위주로 서술되어 있으며 조선 수군의 활동에 대해서도 첫 번째 승리인 옥포해전과 조선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에 대해서 언급하는 정도입니다. 조선수군의 승리 요인에 대해서도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와 화약무기의 대규모 사용이라는 서술만 있을 뿐 조선의 화포 개발이나 운용에 대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거북선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데 거북선이 철갑선인지 아닌지 논쟁이 진행 중이라고 적어 놓았더군요. 조선 육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임진왜란에서 명나라 육군이 대규모의 화약 무기를 운용했다는 정도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책의 분량상 조선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서술이 너무 부실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자는 임진왜란에 대해서 원사료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Samuel Hawley의 단행본인 The Imjin War : Japan’s sixteenth 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cuer China와 Kenneth M. Swope의 Crouching Tigers, Secret Weapons : Military Technology Employed during the Sino-Japanese-Korean War에 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저자는 2장에서 일본어를 모르는 Noel Perrin이 일본의 화약무기 사용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유포시켰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비록 특별히 잘못된 서술은 없다 하더라도 조선에 대한 서술을 보면 Lorge도 Perrin과 오십보 백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한국어를 모르는 Lorge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자료를 활용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 연구자들이 영어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거나 국내의 연구들을 활발히 영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최소한 군사편찬연구소의 저작들이라도 영역해서 외국에 소개한다면 한국 군사사에 대한 외국의 이해가 훨씬 넓어질 수 있을 것 입니다. 강바닥에 삽질하는 것 보다는 이런 일을 하는게 장기적으로는 대한민국에 더 큰 도움이 될 것 입니다. 인터넷을 보면 한국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들이 의외로 많은데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텍스트는 너무나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제는 도서관에서 The Asian Military Revolution : From Gunpowder to the Bomb라는 책을 대출했습니다. 저자인 Peter A. Lorge는 머리말에서 화약무기의 개발이 중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아시아 전역에서 어떠한 군사적 혁신을 가져왔는지를 고찰하겠다는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상당히 매력적인 주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첫 인상이 약간 좋지가 않습니다.
아직 제대로 읽지는 않았고 주요 내용을 살짝 훑어본 수준이지만 다루는 시기가 9세기에서 19세기 초 까지 인데다 공간적 범위도 중국,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 인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라서 서술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쉬운 점은 한국에 대한 기술이 극도로 적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화약무기 도입과 활용에 대한 내용은 2장의 Japan and the wars of unification과 3장의 The Chinese military revolution and war in Korea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 지는 정도 입니다. 특히 임진왜란을 다룬 제3장 조차 명나라 군대의 화약무기 사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조선의 화약무기 사용은 해전과 관련해 다루어 지는 수준입니다. 2장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경험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조선 수군의 대규모 화포 운용이 일본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정도만 서술되어 있습니다. 3장의 경우는 임진왜란이 주가 되어야 하지만 절반 정도의 내용이 원명교체기 화약무기의 사용과 명나라 시기 왜구의 창궐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부분에서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와 조선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썩 서술의 밀도가 치밀하지 못합니다. 조선군의 활동은 주로 수군위주로 서술되어 있으며 조선 수군의 활동에 대해서도 첫 번째 승리인 옥포해전과 조선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에 대해서 언급하는 정도입니다. 조선수군의 승리 요인에 대해서도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와 화약무기의 대규모 사용이라는 서술만 있을 뿐 조선의 화포 개발이나 운용에 대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거북선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데 거북선이 철갑선인지 아닌지 논쟁이 진행 중이라고 적어 놓았더군요. 조선 육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임진왜란에서 명나라 육군이 대규모의 화약 무기를 운용했다는 정도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책의 분량상 조선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서술이 너무 부실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자는 임진왜란에 대해서 원사료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Samuel Hawley의 단행본인 The Imjin War : Japan’s sixteenth 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cuer China와 Kenneth M. Swope의 Crouching Tigers, Secret Weapons : Military Technology Employed during the Sino-Japanese-Korean War에 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저자는 2장에서 일본어를 모르는 Noel Perrin이 일본의 화약무기 사용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유포시켰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비록 특별히 잘못된 서술은 없다 하더라도 조선에 대한 서술을 보면 Lorge도 Perrin과 오십보 백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한국어를 모르는 Lorge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자료를 활용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 연구자들이 영어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거나 국내의 연구들을 활발히 영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최소한 군사편찬연구소의 저작들이라도 영역해서 외국에 소개한다면 한국 군사사에 대한 외국의 이해가 훨씬 넓어질 수 있을 것 입니다. 강바닥에 삽질하는 것 보다는 이런 일을 하는게 장기적으로는 대한민국에 더 큰 도움이 될 것 입니다. 인터넷을 보면 한국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들이 의외로 많은데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텍스트는 너무나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2006년 6월 25일 일요일
롱보우인가 화승총인가 : 16세기 어떤 영국인들의 이야기
어떤 특정한 기술이 개발됐을 때 반발하거나 거부감을 가지는 집단은 신기술 보다는 기존의 기술로 더 재미를 보거나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집단이다.
그러면 이제 별 알맹이 없는 본론으로…
이런 것은 전쟁질의 역사를 보더라도 잘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16세기 영국의 군인들이 제기한 화약무기와 롱보우(Long Bow)의 효용성에 대한 논의였다.
중세 유럽의 화약무기는 성능과 신뢰도 모두가 신통치 않은 물건이었으나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싹수를 보이고 있었다. 플랑드르인들은 1382년의 베버하우드벨트(Beverhoudsveld) 전투에서 300문의 각종 화약무기를 집중 운용해 6000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3만에 달하는 프랑스군을 격파하는 대박을 터트리기도 했다.
프랑스인들도 돌대가리는 아닌지라 화약무기를 도입하는데 많은 자금과 시간을 투자했고 백년전쟁 후기에는 유럽 최고수준에 도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 됐다.
반면 영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프랑스에 비해 화약무기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이미 15세기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에서 화약무기를 대규모로 사용한 프랑스 군대에 죽을 쑨 경험이 있었다.
1428년의 오를레앙(Orléans) 포위공격에서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대포에 지휘관인 샐리스버리(Thomas Montagu Salisbury)가 전사한 일이 있었고 프랑스 군은 1449년에서 1450년 사이에 60여 차례의 공성전을 시도해 모두 승리를 기록하는 성과를 거뒀다.
1453년 7월 17일의 Castillon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300문의 대포(주로 컬버린)를 투입했고 이와 함께 약 700명의 핸드캐논 사수를 투입해 영국군을 크게 격파했다.
특히 화약무기 중에서도 화승총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핸드캐논의 보급은 유럽본토에서는 가히 놀라운 수준이었는데 1411년 부르군디 공작은 자신의 군대가 핸드캐논 4000정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물론 핸드캐논은 당시의 총신 제작 기술이 불량해 종종 쏘는 사람을 잡는 경우도 있었지만 확실한 파괴력과 간편한(?) 조작방법으로 빠르게 보급됐다.
1430년 뉘른베르크 시의 기록에 따르면 시 민병대가 보유한 발사 무기 중 핸드캐논 (Handbüchse)은 501정으로 석궁(607자루)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유럽 본토에서 이렇게 화약무기 도입에 열을 올리는 동안에도 영국은 뭔가 한 걸음 뒤쳐진 상황이었는데 몇가지 이유 중 하나는 롱보우에 있었다.
이미 영국인들은 백년전쟁 기간 내내 롱보우의 파괴력과 연사력을 활용해 여러 차례 재미를 보고 있었고 비록 백년전쟁 말기에 화기에 호되게 당하긴 했어도 야전(野戰)에서는 롱보우의 위력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백년전쟁이 끝나고 한참 지난 16세기 말 까지도 영국인들은 화약무기와 롱보우의 군사적 가치에 대해 열띤 논의를 하고 있었다.
용병으로 이름을 날린 존 스미티(John Smythe)라는 귀족은 1590년에 발행한 짧은 소책자에서 롱보우가 군사적으로 화약무기보다 더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 롱보우는 숙달된 사수가 사용할 경우 화승총에 비해 여섯배 이상 빠른 발사속도를 자랑하고 화약무기가 과열과 총신파열로 파괴될 위험이 있는데 비해 롱보우는 그럴 위험이 없다는 것을 들었다.
반면 역시 용병대장이었던 험프리 바윅(Humfrey Barwick)은 스미티의 주장에 반대했다.
바윅은 발사속도의 경우 기병을 상대할 때는 별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기병이 전력으로 돌격해 올 경우 롱보우와 화승총 모두 한번의 일제사격 뒤에는 돌격하는 기병과 육박전을 벌여야 한다는 것 이었다.
또 궁수가 활을 잘 쏘려면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하지만 화약무기는 방아쇠 당길 힘만 있으면 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았다.
바윅은 마지막으로 화약무기의 파괴력은 롱보우에 비해 위력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무엇보다 당시 유럽은 기병과 보병 모두 두꺼운 흉갑을 장비했기 때문에 롱보우로는 관통하기 어렵다는 것 이었다.
이미 백년전쟁 후반기부터 금속기술의 발달로 롱보우로는 갑주를 입은 적을 무력화 시킬 수 없었다.
어쨌든 영국 군대는 백년전쟁 이후 화약무기 장비에서 유럽의 대륙국가들에 뒤쳐졌는데 다행히도 대규모 전쟁을 치루진 않아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던 모양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이야기.
16세기 말 까지도 영국 뱃사람(대개는 해적)들은 롱보우나 석궁을 들고 돌아다녔는데 서부아프리카에서 노예사냥을 하러 갔다가 화승총을 쏴대는 현지인들에게 피박을 봤다는 기록이 많다.
총을 쏘는 흑인이 활을 쏘는 백인을 때려잡는 모습이라니. 여러분은 이 모습이 상상이 가시는가?
================================================
이 글을 쓰면서 베낀 책 들
Kenneth Chase, Firearms : a Global History to 1700
A. Curry, M. Hughes,Arms and Fortifications in the Hundred Years War
B. S. Hall, Weapon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J. R. Hale, War and Society in Renaissance Europe
그러면 이제 별 알맹이 없는 본론으로…
이런 것은 전쟁질의 역사를 보더라도 잘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16세기 영국의 군인들이 제기한 화약무기와 롱보우(Long Bow)의 효용성에 대한 논의였다.
중세 유럽의 화약무기는 성능과 신뢰도 모두가 신통치 않은 물건이었으나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싹수를 보이고 있었다. 플랑드르인들은 1382년의 베버하우드벨트(Beverhoudsveld) 전투에서 300문의 각종 화약무기를 집중 운용해 6000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3만에 달하는 프랑스군을 격파하는 대박을 터트리기도 했다.
프랑스인들도 돌대가리는 아닌지라 화약무기를 도입하는데 많은 자금과 시간을 투자했고 백년전쟁 후기에는 유럽 최고수준에 도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 됐다.
반면 영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프랑스에 비해 화약무기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이미 15세기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에서 화약무기를 대규모로 사용한 프랑스 군대에 죽을 쑨 경험이 있었다.
1428년의 오를레앙(Orléans) 포위공격에서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대포에 지휘관인 샐리스버리(Thomas Montagu Salisbury)가 전사한 일이 있었고 프랑스 군은 1449년에서 1450년 사이에 60여 차례의 공성전을 시도해 모두 승리를 기록하는 성과를 거뒀다.
1453년 7월 17일의 Castillon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300문의 대포(주로 컬버린)를 투입했고 이와 함께 약 700명의 핸드캐논 사수를 투입해 영국군을 크게 격파했다.
특히 화약무기 중에서도 화승총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핸드캐논의 보급은 유럽본토에서는 가히 놀라운 수준이었는데 1411년 부르군디 공작은 자신의 군대가 핸드캐논 4000정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물론 핸드캐논은 당시의 총신 제작 기술이 불량해 종종 쏘는 사람을 잡는 경우도 있었지만 확실한 파괴력과 간편한(?) 조작방법으로 빠르게 보급됐다.
1430년 뉘른베르크 시의 기록에 따르면 시 민병대가 보유한 발사 무기 중 핸드캐논 (Handbüchse)은 501정으로 석궁(607자루)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유럽 본토에서 이렇게 화약무기 도입에 열을 올리는 동안에도 영국은 뭔가 한 걸음 뒤쳐진 상황이었는데 몇가지 이유 중 하나는 롱보우에 있었다.
이미 영국인들은 백년전쟁 기간 내내 롱보우의 파괴력과 연사력을 활용해 여러 차례 재미를 보고 있었고 비록 백년전쟁 말기에 화기에 호되게 당하긴 했어도 야전(野戰)에서는 롱보우의 위력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백년전쟁이 끝나고 한참 지난 16세기 말 까지도 영국인들은 화약무기와 롱보우의 군사적 가치에 대해 열띤 논의를 하고 있었다.
용병으로 이름을 날린 존 스미티(John Smythe)라는 귀족은 1590년에 발행한 짧은 소책자에서 롱보우가 군사적으로 화약무기보다 더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 롱보우는 숙달된 사수가 사용할 경우 화승총에 비해 여섯배 이상 빠른 발사속도를 자랑하고 화약무기가 과열과 총신파열로 파괴될 위험이 있는데 비해 롱보우는 그럴 위험이 없다는 것을 들었다.
반면 역시 용병대장이었던 험프리 바윅(Humfrey Barwick)은 스미티의 주장에 반대했다.
바윅은 발사속도의 경우 기병을 상대할 때는 별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기병이 전력으로 돌격해 올 경우 롱보우와 화승총 모두 한번의 일제사격 뒤에는 돌격하는 기병과 육박전을 벌여야 한다는 것 이었다.
또 궁수가 활을 잘 쏘려면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하지만 화약무기는 방아쇠 당길 힘만 있으면 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았다.
바윅은 마지막으로 화약무기의 파괴력은 롱보우에 비해 위력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무엇보다 당시 유럽은 기병과 보병 모두 두꺼운 흉갑을 장비했기 때문에 롱보우로는 관통하기 어렵다는 것 이었다.
이미 백년전쟁 후반기부터 금속기술의 발달로 롱보우로는 갑주를 입은 적을 무력화 시킬 수 없었다.
어쨌든 영국 군대는 백년전쟁 이후 화약무기 장비에서 유럽의 대륙국가들에 뒤쳐졌는데 다행히도 대규모 전쟁을 치루진 않아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던 모양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이야기.
16세기 말 까지도 영국 뱃사람(대개는 해적)들은 롱보우나 석궁을 들고 돌아다녔는데 서부아프리카에서 노예사냥을 하러 갔다가 화승총을 쏴대는 현지인들에게 피박을 봤다는 기록이 많다.
총을 쏘는 흑인이 활을 쏘는 백인을 때려잡는 모습이라니. 여러분은 이 모습이 상상이 가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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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베낀 책 들
Kenneth Chase, Firearms : a Global History to 1700
A. Curry, M. Hughes,Arms and Fortifications in the Hundred Years War
B. S. Hall, Weapon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J. R. Hale, War and Society in Renaissance Eur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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