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책 이야기 입니다.
어제는 도서관에서 The Asian Military Revolution : From Gunpowder to the Bomb라는 책을 대출했습니다. 저자인 Peter A. Lorge는 머리말에서 화약무기의 개발이 중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아시아 전역에서 어떠한 군사적 혁신을 가져왔는지를 고찰하겠다는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상당히 매력적인 주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첫 인상이 약간 좋지가 않습니다.
아직 제대로 읽지는 않았고 주요 내용을 살짝 훑어본 수준이지만 다루는 시기가 9세기에서 19세기 초 까지 인데다 공간적 범위도 중국,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 인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라서 서술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쉬운 점은 한국에 대한 기술이 극도로 적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화약무기 도입과 활용에 대한 내용은 2장의 Japan and the wars of unification과 3장의 The Chinese military revolution and war in Korea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 지는 정도 입니다. 특히 임진왜란을 다룬 제3장 조차 명나라 군대의 화약무기 사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조선의 화약무기 사용은 해전과 관련해 다루어 지는 수준입니다. 2장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경험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조선 수군의 대규모 화포 운용이 일본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정도만 서술되어 있습니다. 3장의 경우는 임진왜란이 주가 되어야 하지만 절반 정도의 내용이 원명교체기 화약무기의 사용과 명나라 시기 왜구의 창궐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부분에서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와 조선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썩 서술의 밀도가 치밀하지 못합니다. 조선군의 활동은 주로 수군위주로 서술되어 있으며 조선 수군의 활동에 대해서도 첫 번째 승리인 옥포해전과 조선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에 대해서 언급하는 정도입니다. 조선수군의 승리 요인에 대해서도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와 화약무기의 대규모 사용이라는 서술만 있을 뿐 조선의 화포 개발이나 운용에 대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거북선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데 거북선이 철갑선인지 아닌지 논쟁이 진행 중이라고 적어 놓았더군요. 조선 육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임진왜란에서 명나라 육군이 대규모의 화약 무기를 운용했다는 정도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책의 분량상 조선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서술이 너무 부실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자는 임진왜란에 대해서 원사료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Samuel Hawley의 단행본인 The Imjin War : Japan’s sixteenth 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cuer China와 Kenneth M. Swope의 Crouching Tigers, Secret Weapons : Military Technology Employed during the Sino-Japanese-Korean War에 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저자는 2장에서 일본어를 모르는 Noel Perrin이 일본의 화약무기 사용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유포시켰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비록 특별히 잘못된 서술은 없다 하더라도 조선에 대한 서술을 보면 Lorge도 Perrin과 오십보 백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한국어를 모르는 Lorge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자료를 활용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 연구자들이 영어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거나 국내의 연구들을 활발히 영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최소한 군사편찬연구소의 저작들이라도 영역해서 외국에 소개한다면 한국 군사사에 대한 외국의 이해가 훨씬 넓어질 수 있을 것 입니다. 강바닥에 삽질하는 것 보다는 이런 일을 하는게 장기적으로는 대한민국에 더 큰 도움이 될 것 입니다. 인터넷을 보면 한국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들이 의외로 많은데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텍스트는 너무나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2009년 5월 5일 화요일
2008년 5월 5일 월요일
16-17세기 스페인의 군사비 지출에 대한 잡담
지난 3월에 ‘국가에 의한 무장력의 독점 - 미국의 방식’이란 글을 쓰면서 글의 마지막 부분에 르네상스 시기에 살았던 이탈리아인 트리불치오(Gian Giacomo Trivulzio)의 명언(?) 한마디를 인용했었습니다.
“(전쟁에는) 다음의 세가지가 필수적이다. 돈, 더 많은 돈, 그리고 더 더욱 많은 돈 이다.”
트리불치오가 지적한 것 처럼 전쟁에서 돈 문제는 백만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중요한문제입니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여러 국왕들은 늘어나는 전쟁 비용으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고 종종 돈이 없어 피박을 보기도 했습니다. 폴 케네디는 강대국의 흥망에서 몰락한 강대국의 첫 번째 사례로 스페인을 들고 있는데 그가 지적하는 스페인의 몰락 요인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재정적 측면입니다.
스페인의 군사비 지출은 같은 시기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도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단순히 비용뿐 만 아니라 국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다 스페인은 단연 최고였습니다. 예를 들어 16세기 유럽국가들은 국가총생산의 2% 정도를 군사비에 사용한 반면 스페인은 4~5% 수준으로 추정됩니다.
카를 5세는 사방에서 전쟁을 벌여댄 탓에 유럽 최고의 채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1520년부터 1532년 사이 카를 5세의 연 평균 채무액은 41만3,000 두카도였는데 이것은 1552~56년 사이에는 192만9,000두카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은 그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 때도 딱히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로부터 물려받은 부실한 재정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펠리페 2세는 돈이 나올 만한 곳은 모조리 쥐어 짜냈고 아메리카로 부터의 수입은 카를 5세 치세기에 연 평균 20~30만 두카도 수준에서 200만 두카도로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수입이 늘면 뭘 하겠습니까. 지출은 더 늘어나는데.;;;;; 먼저 펠리페 2세가 심혈을 기울인 영국원정은 군사적 재앙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치명적인 재앙이었습니다. 펠리페 2세가 아르마다의 건설에 투자한 비용은 엄청났는데 배를 건조하는 비용만으로 4백만 두카도가 날아갔다고 합니다. 여기에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 주둔한 육군에 소요되는 비용도 엄청난 것이어서 1574년 한 해에만 570만 두카도가 해외 주둔군을 유지하는데 소비되었습니다. 펠리페 2세 시기의 연 평균 군사비는 무려 840만 두카도 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쨌건 스페인은 강대국이라 펠리페 2세 이후로도 계속해서 군사비에 엄청난 투자를 해댔습니다. 스페인의 군사비 지출을 연구한 톰슨(I. A. A. Thompson)에 의하면 16세기 초부터 17세기 중엽까지 스페인의 국가 예산 지출은 무려 20배가 넘게 증가했는데 이것은 같은 시기 물가 상승률의 네 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중 상당수는 군사비가 차지하고 있었다지요. 톰슨의 연구에 따르면 스페인은 1621년부터 1640년 까지 4억 두카도의 예산을 사용했는데 이 중 47%가 군사비였다고 합니다. 이 시기 스페인은 30년 전쟁에 참전해 가뜩이나 시원찮은 재정에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 무렵 스페인의 연 평균 군사비 지출은 1700만 두카도 였습니다.
스페인의 군사비 지출이 증가한 원인은 방대한 지배영역과 이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커져버린 군대에 있었습니다.
먼저 지배영역이 늘어나면서 그 만큼 성곽 건설과 개량,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이 늘어났습니다. 오랑의 경우 펠리페 2세의 재위 시기에 30년에 걸쳐 축성에 300만 두카도가 사용되었고 1590년에는 영국의 대서양 연안지역을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100만 두카도가 성곽의 건설과 유지 보수에 소비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보통 성곽 하나를 개량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7만~15만 두카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늘어난 영역을 방어하기 위해 병력이 증가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15세기 후반에 기껏해야 2만 정도이던 육군은 세기가 바뀌기 전에 6만으로 불어났고 불과 100년 뒤인 1590년에는 네덜란드 주둔군만 85,000~86,000명에 달했습니다. 물론 15~17세기 동안 유지비용이 비싼 기병의 비중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 대신 보병이 엄청나게 불어났기 때문에 기병의 감소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수만의 대군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 이었고 월급이 체불될 경우에는 난감한 결과가 따라왔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라면 네덜란드 주둔군 병사들이 월급 체불에 항의해 안트베르펜을 약탈한 것이 있지요. 펠리페 2세는 대륙에서 비싼 돈을 들여 이단들을 응징하는 동안 지중해에서도 역시 비싼돈을 들여 이교도들을 응징하고 있었습니다. 1570년대에 지중해의 갤리선 함대를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한해에 67만 두카도 정도였다고 합니다. 17세기로 접어들어 스페인의 해양 전략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자 갤리선 함대에 들어가는 비용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대신 대서양에서 함대를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늘어났습니다. 대서양 함대의 유지 비용은 한해에 보통 50만 두카도에서 많은 경우 100만 두카도 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육군 병력의 증가로 화약무기를 획득하는데 많은 비용이 소모되었습니다. 화약 무기 자체는 기존의 냉병기 종류와 비교하면 비싸지는 않았지만 대신 대량으로 장비하는 특성상 전체적인 비용은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스페인은 1588년 단 한 해에만 대포와 화약을 구매하는데 622,758 두카도를 사용했습니다. 이 중 30만 두카도 가량이 대포를 구매하는데 쓰여졌다고 합니다. 단, 일단 대포를 구입해 놓으면 포탄이나 심지, 화약 등의 소모품의 가격이 쌌던 탓에 유지비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어쨌건 화약무기의 도입은 스페인에 있어 경제적인 부담이었습니다. 스페인은 군사강국이었지만 경제와 산업기반은 난감할 정도로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국왕의 주 수입원은 아메리카의 은이었고 병기창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였다죠. 스페인의 연간 병기 생산량은 1590년대 초반에 아퀘부스 2만정, 머스킷 3천정 수준이었는데 군 병력은 십만 단위이니 전쟁을 하려면 군대에 필요한 총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밖에서 가져온 돈을 총 사느라 다시 밖으로 내 보내는 구조이고 이 상태에서 전쟁질을 해대니 국왕의 지갑이 항상 텅 비어있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이었습니다.
참고서적
피에르 빌라르/김현일 옮김, 『금과 화폐의 역사 1450-1920』, 까치, 2000
존 H. 엘리엇/김원중 옮김,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까치, 2000
폴 케네디/이일수, 전남석, 황건 공역, 『강대국의 흥망』, 한국경제신문사, 1987
J. R. Hale, 『War and Society in Renaissance Europe 1450-1620』,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5
I. A. A. Thompson, 「“Money, Money, and Yet More Money!” – Finance, the Fiscal-State, and the Military Revolution : Spain 1500-1600」, 『The Military Revolution Debate』, Westview, 1995
“(전쟁에는) 다음의 세가지가 필수적이다. 돈, 더 많은 돈, 그리고 더 더욱 많은 돈 이다.”
트리불치오가 지적한 것 처럼 전쟁에서 돈 문제는 백만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중요한문제입니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여러 국왕들은 늘어나는 전쟁 비용으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고 종종 돈이 없어 피박을 보기도 했습니다. 폴 케네디는 강대국의 흥망에서 몰락한 강대국의 첫 번째 사례로 스페인을 들고 있는데 그가 지적하는 스페인의 몰락 요인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재정적 측면입니다.
합스부르크체제의 실질적인 약점을 드러나게 한 것은 치솟는 전비였다. 1500년에서 1630년 사이에 식량가격은 3배, 제품가격은 5배로 오른 전반적 인플레이션은 정부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다. 여기에 육해군이 2배, 4배로 늘어남에 따라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합스부르크는 계속해서 부채의 변제에 안간힘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520년대 알제리, 프랑스 그리고 독일 프로티스턴트와 맞서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른 카를 5세는 자신의 경상수입이나 특별수입으로는 도저히 지출을 감당할 수 없게 되고 자신의 수입은 이미 몇 년 앞서 은행가에 담보되어 있었다. 오직 인도에서 오는 재화에 대한 결사적인 몰수 조치와 스페인에 있는 모든 금의 압수를 통해서만 프로티스턴트 군주에 대한 전쟁을 지원할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1552년의 메츠(Metz) 전투에 소요된 전비만 해도 250만 두카도로서 당시 황제가 아메리카에서 얻던 경상수입의 거의 10배에 해당하였다. 어절 수 없이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대부자금을 물색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때마다 조건이 점점 불리해져 갔음은 당연하였다. 왕가의 신용이 무너지면서 은행의 금리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경상수입의 대부분이 몽땅 지난 부채에 대한 이자지불에만 충당되었다. 카를 5세가 퇴위하면서 펠리페 2세에게 상속한 스페인의 공식 부채는 약 2,000만 두카도였다.
폴 케네디/이일수, 전남석, 황건 공역, 강대국의 흥망, 한국경제신문사, 1987, 67쪽
스페인의 군사비 지출은 같은 시기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도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단순히 비용뿐 만 아니라 국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다 스페인은 단연 최고였습니다. 예를 들어 16세기 유럽국가들은 국가총생산의 2% 정도를 군사비에 사용한 반면 스페인은 4~5% 수준으로 추정됩니다.
카를 5세는 사방에서 전쟁을 벌여댄 탓에 유럽 최고의 채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1520년부터 1532년 사이 카를 5세의 연 평균 채무액은 41만3,000 두카도였는데 이것은 1552~56년 사이에는 192만9,000두카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은 그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 때도 딱히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로부터 물려받은 부실한 재정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펠리페 2세는 돈이 나올 만한 곳은 모조리 쥐어 짜냈고 아메리카로 부터의 수입은 카를 5세 치세기에 연 평균 20~30만 두카도 수준에서 200만 두카도로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수입이 늘면 뭘 하겠습니까. 지출은 더 늘어나는데.;;;;; 먼저 펠리페 2세가 심혈을 기울인 영국원정은 군사적 재앙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치명적인 재앙이었습니다. 펠리페 2세가 아르마다의 건설에 투자한 비용은 엄청났는데 배를 건조하는 비용만으로 4백만 두카도가 날아갔다고 합니다. 여기에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 주둔한 육군에 소요되는 비용도 엄청난 것이어서 1574년 한 해에만 570만 두카도가 해외 주둔군을 유지하는데 소비되었습니다. 펠리페 2세 시기의 연 평균 군사비는 무려 840만 두카도 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쨌건 스페인은 강대국이라 펠리페 2세 이후로도 계속해서 군사비에 엄청난 투자를 해댔습니다. 스페인의 군사비 지출을 연구한 톰슨(I. A. A. Thompson)에 의하면 16세기 초부터 17세기 중엽까지 스페인의 국가 예산 지출은 무려 20배가 넘게 증가했는데 이것은 같은 시기 물가 상승률의 네 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중 상당수는 군사비가 차지하고 있었다지요. 톰슨의 연구에 따르면 스페인은 1621년부터 1640년 까지 4억 두카도의 예산을 사용했는데 이 중 47%가 군사비였다고 합니다. 이 시기 스페인은 30년 전쟁에 참전해 가뜩이나 시원찮은 재정에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 무렵 스페인의 연 평균 군사비 지출은 1700만 두카도 였습니다.
스페인의 군사비 지출이 증가한 원인은 방대한 지배영역과 이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커져버린 군대에 있었습니다.
먼저 지배영역이 늘어나면서 그 만큼 성곽 건설과 개량,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이 늘어났습니다. 오랑의 경우 펠리페 2세의 재위 시기에 30년에 걸쳐 축성에 300만 두카도가 사용되었고 1590년에는 영국의 대서양 연안지역을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100만 두카도가 성곽의 건설과 유지 보수에 소비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보통 성곽 하나를 개량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7만~15만 두카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늘어난 영역을 방어하기 위해 병력이 증가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15세기 후반에 기껏해야 2만 정도이던 육군은 세기가 바뀌기 전에 6만으로 불어났고 불과 100년 뒤인 1590년에는 네덜란드 주둔군만 85,000~86,000명에 달했습니다. 물론 15~17세기 동안 유지비용이 비싼 기병의 비중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 대신 보병이 엄청나게 불어났기 때문에 기병의 감소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수만의 대군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 이었고 월급이 체불될 경우에는 난감한 결과가 따라왔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라면 네덜란드 주둔군 병사들이 월급 체불에 항의해 안트베르펜을 약탈한 것이 있지요. 펠리페 2세는 대륙에서 비싼 돈을 들여 이단들을 응징하는 동안 지중해에서도 역시 비싼돈을 들여 이교도들을 응징하고 있었습니다. 1570년대에 지중해의 갤리선 함대를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한해에 67만 두카도 정도였다고 합니다. 17세기로 접어들어 스페인의 해양 전략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자 갤리선 함대에 들어가는 비용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대신 대서양에서 함대를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늘어났습니다. 대서양 함대의 유지 비용은 한해에 보통 50만 두카도에서 많은 경우 100만 두카도 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육군 병력의 증가로 화약무기를 획득하는데 많은 비용이 소모되었습니다. 화약 무기 자체는 기존의 냉병기 종류와 비교하면 비싸지는 않았지만 대신 대량으로 장비하는 특성상 전체적인 비용은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스페인은 1588년 단 한 해에만 대포와 화약을 구매하는데 622,758 두카도를 사용했습니다. 이 중 30만 두카도 가량이 대포를 구매하는데 쓰여졌다고 합니다. 단, 일단 대포를 구입해 놓으면 포탄이나 심지, 화약 등의 소모품의 가격이 쌌던 탓에 유지비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어쨌건 화약무기의 도입은 스페인에 있어 경제적인 부담이었습니다. 스페인은 군사강국이었지만 경제와 산업기반은 난감할 정도로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국왕의 주 수입원은 아메리카의 은이었고 병기창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였다죠. 스페인의 연간 병기 생산량은 1590년대 초반에 아퀘부스 2만정, 머스킷 3천정 수준이었는데 군 병력은 십만 단위이니 전쟁을 하려면 군대에 필요한 총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밖에서 가져온 돈을 총 사느라 다시 밖으로 내 보내는 구조이고 이 상태에서 전쟁질을 해대니 국왕의 지갑이 항상 텅 비어있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이었습니다.
참고서적
피에르 빌라르/김현일 옮김, 『금과 화폐의 역사 1450-1920』, 까치, 2000
존 H. 엘리엇/김원중 옮김,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까치, 2000
폴 케네디/이일수, 전남석, 황건 공역, 『강대국의 흥망』, 한국경제신문사, 1987
J. R. Hale, 『War and Society in Renaissance Europe 1450-1620』,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5
I. A. A. Thompson, 「“Money, Money, and Yet More Money!” – Finance, the Fiscal-State, and the Military Revolution : Spain 1500-1600」, 『The Military Revolution Debate』, Westview,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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