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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8일 토요일

기병에 관한 한국 전통군사사 논문 한 편

한국 전통군사사에 대한 논문을 한 편 읽었습니다. 저자는 여기 들러주시는 분들이라면 다들 아실만한 바로 ‘그 분’입니다. 사실 19세기 이전 군사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지만 매우 흥미롭게 읽은 논문이기에 짧은 평을 하고 싶습니다. 이 논문을 읽을 기회를 주신 필자께는 죄송하게도 도움이 될 만한 평이 못 되는게 아쉽습니다.

이 논문의 제목은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으로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한국의 기병 병종에 대해 통사적인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필자께서 처음 논문을 보내주셨을 때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범위가 매우 방대해서 놀랐습니다만 내용을 철저하게 기병 병종의 분류에 맞췄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밀도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글도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논문은 부록을 포함해 90쪽이고 짧은 단행본 한 권으로 만들어도 될 정도입니다. 아마 필자께서도 글을 쓰시는 동안 글의 분량에 상당한 신경을 쓰셨을 것 같은데 독자의 입장에서는 적당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 글의 구성은 머릿말과 맺음말을 제외하고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2장에서는 이 논문의 근간을 이루는 기병 병종의 기본 개념을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는 여기서 서구의 중기병과 경기병이라는 구분을 한국사에 적용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하고 그 대신 사용하는 장비와 전술의 성격에 따라 창기병과 궁기병이라는 분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말에도 갑옷을 입히는 중장기병은 다른 병종과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으므로 중장기병이라는 개념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외국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빌려오지 않고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 맞는 개념을 고민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합니다.

다음의 3장에서는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기승문화가 도입된 시점부터 삼국시대 까지의 기병 병종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고대의 문헌사료가 부족한 만큼 고고학의 연구성과를 풍부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료의 공백이 많은 시기인 만큼 논리를 전개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수 밖에 없는데 필자는 중국 등 동시기 다른 지역과의 비교 분석을 통해 접근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필자가 기승문화의 확산 시점을 추정하면서 마구의 기술적인 수준 보다는 말을 대량으로 사육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이 주장은 주로 문헌자료에 바탕을 하고 있는데 상당히 재미있는 가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다음으로는 삼국시대 기병 병종의 분화를 분석하기 위해 이 글에서 사용하는 구분의 기준이 되는 전투용 활과 기병창, 그리고 말의 품종과 마구의 발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구의 발전에 대한 부분에서 중국은 물론 같은 시기 유럽(로마)과의 비교 분석이 돋보입니다. 필자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 삼국시대의 기병 병종을 중장기병, 창기병, 궁기병이라는 세 종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4장에서는 삼국시대의 중장기병에 대해 분석하고 있습니다. 논문이 전체적으로 시기적 구분을 채택하고 있는데 비해 4장에서만 특별하게 삼국시대의 중장기병이라는 하나의 병종에 대해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분석하고 있는 것은 다소 의외입니다. 이 부분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한반도 내에서의 중장기병 운용 방식에 대한 추정입니다. 필자는 한반도의 산악지형과 열악한 도로 환경 때문에 중장기병이 소규모로 성곽을 거점으로 한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5장은 고려시대의 기병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헌사료의 부족과 고고학적인 자료의 부족 때문인지 그 분량은 고대나 조선시대에 비해 적습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원간섭기 이후 몽골의 영향으로 궁기병의 비중이 늘어났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은 조선 초기의 기병운용과 내용적으로 연결이 되는데 뒷받침 할 수 있는 자료가 더 풍부하다면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6장은 조선초기의 기병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6장 부터는 풍부한 문헌사료를 바탕으로 보다 밀도있는 서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고대에서 고려시대 까지는 문헌사료의 부족으로 많은 부분을 고고학적인 자료나 다른 지역과의 비교를 통해 논리적인 추론을 해야 하는데 조선시대는 상대적으로 문헌자료가 풍부하다는 점 때문에 이런 제약에서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6장에서 흥미로운 것은 조선초기에는 궁기병과 창기병이라는 2원적 체제에서 16세기에 이르면 사실상 궁기병 중심의 체제가 완성되었다는 지적입니다. 필자는 이미 5장에서 원간섭기 이후로 궁기병의 비중이 늘어났을 가능성을 제시했으며 조선초기도 문헌사료를 통한 분석으로 궁기병이 다소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16세기까지 창기병이 꾸준히 쇠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는 주장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필자는 15세기를 거치면서 기병의 훈련 체계와 선발체계에서 기병창 보다 활을 중요시 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점을 밝혀내 궁기병 중심으로의 전환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약간 아쉬운 점 이라면 왜 궁기병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 정도입니다. 또한 안정적인 말 공급기반의 쇠퇴가 기병의 점진적인 쇠퇴를 가져왔다는 주장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7장에서 다루고 있는 조선 기병의 쇠퇴와 내용적으로 연결이 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7장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기병의 쇠퇴를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는 임진왜란 이후 전술이 보병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군사력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기병의 우선순위가 밀리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조선후기 기병의 변화에서 제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내용은 근접전 능력 향상을 위해 편곤 사용이 확대되었고 18세기 초에 창설된 평안도의 별무사의 경우 하마전투를 고려해 조총도 사용하게 되었다는 부분입니다.
7장에서는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조선 기병의 질적ㆍ양적 쇠락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쉬운 점은 조선 후기에 기병이 쇠퇴하게 되었다는 설명은 있으나 구체적인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점 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제가 전통 군사사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부족해 논문에 대한 대략적인 평 밖에 할 수 없었지만 상당히 인상깊은 논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병 병종에 대한 통사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이 글에서 필자가 제시한 몇몇 독특한 논점들은 후속 연구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9년 5월 5일 화요일

The Asian Military Revolution의 조선 관련 서술

또 책 이야기 입니다.

어제는 도서관에서 The Asian Military Revolution : From Gunpowder to the Bomb라는 책을 대출했습니다. 저자인 Peter A. Lorge는 머리말에서 화약무기의 개발이 중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아시아 전역에서 어떠한 군사적 혁신을 가져왔는지를 고찰하겠다는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상당히 매력적인 주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첫 인상이 약간 좋지가 않습니다.

아직 제대로 읽지는 않았고 주요 내용을 살짝 훑어본 수준이지만 다루는 시기가 9세기에서 19세기 초 까지 인데다 공간적 범위도 중국,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 인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라서 서술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쉬운 점은 한국에 대한 기술이 극도로 적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화약무기 도입과 활용에 대한 내용은 2장의 Japan and the wars of unification과 3장의 The Chinese military revolution and war in Korea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 지는 정도 입니다. 특히 임진왜란을 다룬 제3장 조차 명나라 군대의 화약무기 사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조선의 화약무기 사용은 해전과 관련해 다루어 지는 수준입니다. 2장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경험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조선 수군의 대규모 화포 운용이 일본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정도만 서술되어 있습니다. 3장의 경우는 임진왜란이 주가 되어야 하지만 절반 정도의 내용이 원명교체기 화약무기의 사용과 명나라 시기 왜구의 창궐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부분에서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와 조선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썩 서술의 밀도가 치밀하지 못합니다. 조선군의 활동은 주로 수군위주로 서술되어 있으며 조선 수군의 활동에 대해서도 첫 번째 승리인 옥포해전과 조선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에 대해서 언급하는 정도입니다. 조선수군의 승리 요인에 대해서도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와 화약무기의 대규모 사용이라는 서술만 있을 뿐 조선의 화포 개발이나 운용에 대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거북선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데 거북선이 철갑선인지 아닌지 논쟁이 진행 중이라고 적어 놓았더군요. 조선 육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임진왜란에서 명나라 육군이 대규모의 화약 무기를 운용했다는 정도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책의 분량상 조선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서술이 너무 부실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자는 임진왜란에 대해서 원사료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Samuel Hawley의 단행본인 The Imjin War : Japan’s sixteenth 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cuer China와 Kenneth M. Swope의 Crouching Tigers, Secret Weapons : Military Technology Employed during the Sino-Japanese-Korean War에 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저자는 2장에서 일본어를 모르는 Noel Perrin이 일본의 화약무기 사용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유포시켰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비록 특별히 잘못된 서술은 없다 하더라도 조선에 대한 서술을 보면 Lorge도 Perrin과 오십보 백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한국어를 모르는 Lorge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자료를 활용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 연구자들이 영어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거나 국내의 연구들을 활발히 영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최소한 군사편찬연구소의 저작들이라도 영역해서 외국에 소개한다면 한국 군사사에 대한 외국의 이해가 훨씬 넓어질 수 있을 것 입니다. 강바닥에 삽질하는 것 보다는 이런 일을 하는게 장기적으로는 대한민국에 더 큰 도움이 될 것 입니다. 인터넷을 보면 한국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들이 의외로 많은데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텍스트는 너무나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2008년 10월 5일 일요일

Kenneth Chase가 주장하는 중국의 화기 개발이 낙후된 원인

번동아제님의 글, 「조선 후기 군대의 기본 전투대형인 층진의 개념도」에 달린 댓글을 읽다보니 흥미로운 구절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만 에도시대 일본의 병학이 1700년대까지 여전히 시대불명의 망상세계를 헤메고 있었고, 청나라 또한 화약병기 시대에 걸맞는 진형을 제대로 개발 못해 헤매던데 비하면 그나마 조선은 유럽의 선형 전술과 비슷한 대형을 내놓고 고민하고 있었다는 점에선 부분적이나마 긍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 번동아제

중국이 조선 보다도 화약무기를 활용한 진형의 개발에서 뒤떨어졌다는 점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중국은 명-청 교체기 이후로는 화약무기의 활용에서 유럽에게 완전히 추월당하고 말았지요. 중국이 화약무기를 개발한 원조임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이후로는 유럽을 따라잡지 못하게 된 이유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제가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한 가설은 Kenneth Chase의 주장입니다. Kenneth Chase에 대해서는 이글루에 있을 때 한번 간단히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글루를 닫으면서 해당 글을 날려버렸으니 다시 한번 언급해 볼까 합니다.

Kenneth Chase는 화약무기의 초기 발전단계에서 발전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병의 위협이고 두 번째는 보병의 위협입니다. 전자의 위협이 클 경우 초기 단계의 화기로 무장한 보병은 적 기병의 기동성을 상쇄할 만한 수단이 없으므로 전투에 불리할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기병의 위협이 심각한 곳에서는 기병에 대한 대항수단으로 기병을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경우 화기의 개발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됩니다. 보병의 위협이 크다면 조건은 반대가 되겠지요.

Chase는 이상의 조건에 따라 화기의 발달유형을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합니다.
먼저 기병과 보병의 위협을 모두 받는 경우는 화약무기의 발전이 중간 정도로 일어납니다. 보병위주의 서유럽과 기병위주의 유목민들을 동시에 상대한 오스만 투르크와 동유럽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다음으로 기병의 위협은 크지만 보병의 위협은 적은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가 바로 중국으로 이런 경우 화약무기의 발전은 느리게 진행됩니다.
세 번째는 기병의 위협은 적고 보병의 위협이 큰 경우 입니다. 서유럽이 여기에 해당되며 이 경우에는 화기의 발전이 급속히 진행됩니다.
마지막은 양쪽 모두의 위협이 없는, 전쟁의 위협이 적은 경우인데 이 경우는 이렇다 할 발전이 없습니다. 바로 도쿠가와 막부 시기의 일본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Chase는 명청교체기 중국의 화약무기 사용에 대한 장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중국이 (화약무기 개발에서) 뒤쳐지게 된 시점이 명 말기인지 또는 청 초기인지는 단언하기가 어렵다. 유럽은 1400년대 후반에 최초의 실용적 화기인 머스켓을 개발 함으로서 처음으로 중국을 앞서는 단초를 마련했지만 중국인들에게 머스켓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대안이 아니었다. 명 왕조의 멸망과 청 왕조가 건립된 시기에 있었던 사건들은 중국의 국방에 있어서 유용한 수단은 명 초기와 마찬가지로 기병이었음을 보여준다. 초기의 청 왕조는 (화기의 사용에서) 상대적으로 유럽에 비해 뒤쳐졌지만 유럽의 위협이 닥치기 까지는 아직 2세기나 더 남아 있었다.
화기, 특히 1300~1400년대의 조잡한 수준의 화기는 단독으로 명 왕조가 처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었다. 화기가 기병과 싸우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점은 중국에서 화기의 발달이 별로 이뤄지지 못한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Kenneth Chase, Firearms : A Global History to 17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171

Chase는 일본이 중국에게 유럽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했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일본은 서유럽에 비해 전쟁수행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제한된 정복전쟁 수행능력을 잘 보여줬으며 결국 일본은 이 전쟁의 실패 이후 조용히 고립노선을 걷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을 위협하는 존재는 기병을 운용하는 만주족 만이 남게 되어 화약무기 개발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는 결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