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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일 토요일

새우 싸움에 고래 등 터질(?) 걱정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저우언라이와 나눈 대화랍니다.

저우언라이 : 우리는 조선 문제에 관한 미국의 견해를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도 우리의 견해를 알고 있을 것 입니다. 먼저 닉슨 대통령의 공식적인 정책은  미래에 조선에서 군대를 궁극적으로 철수하는 것입니다. 또한 일본 자위대가 남조선에 들어오는 것도 막을 것인데 이것은 극동의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북조선과 남조선의 교류를 촉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평화로운 재통일을 촉진할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는 오랜 시일이 필요할 것 입니다.
닉슨 : 중요한 문제는 우리 양국이 동맹국들이 억제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점 입니다. 총리에게 역사적인 이야기를 하나 알려드리지요. 나는 1953년 부통령이 된 뒤 처음으로 세계 각국을 순방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내게 이승만에 대한 매우 긴 구두 훈령을 주었습니다. 이승만은 북진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이승만에게 북진을 해서는 안되며 그렇게 한다면 미국이 그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줘야 했는데 이것은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하자 이승만이 울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나는 이승만이 북진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부통령으로서 그의 지시를 이행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처음 하는 것 입니다.
저우언라이 : 네. 방금 대통령께서 이야기한 이승만의 성격은 우리가 그에 대해서 듣던 것과 같군요.
닉슨 : 무엇이 비슷하다는 것 입니까?
키신저 : 이승만에 대해서 들었던 것입니다.
저우언라이 : 이승만이 정계에서 은퇴하고 몇년 뒤에 말입니다.
닉슨 : 한국인들은 남북을 가리지 않고 정서적으로 충동적인 사람들입니다. 한국인들이 충동성과 호전성 때문에 우리 두 나라를 곤란하게 만들수도 있는 사고를 치지 못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미국과 중국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반도가 우리 두 나라의 투쟁의 장이 된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고 말도 안될 일입니다. 이미 과거에 그런 선례가 있었으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될 것 입니다. 나는 총리와 내가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Memorandum of Conversation(1972. 2. 23)”,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9–1976, VOLUME XVII, CHINA, 1969–1972, (USGPO, 2006), pp.732~733

사실 강대국 입장이 아니더라도 크게 건질 것도 없는 곳에서 일을 벌여 손해보는 것은 피하려는 것이 정상입니다. 특히 저 당시 미국과 중국처럼 소련(!!!) 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는 마당에서는 더욱 더 그랬겠지요. 어쨌든 이 당시 양국의 기조는 쭈욱 이어져 내려왔고 현상유지가 되는 상태에서는 우리도 비교적 팔자가 나쁘지 않은 편 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기존의 판이 흔들릴 기미가 보이고 있지요. 찝찝한 일 입니다.

2012년 7월 29일 일요일

이승만 우상화에 대한 잡상

1990년대 초반 까지만 하더라도 각급 학교에서는 반공교육이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저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1990년대 초반이라서 학교에서 500원씩 내고 재미없는 반공영화를 봐야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그래도 모든 반공교육이 재미없는 것은 아니어서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에 대한 내용은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생각에도 워낙 멍청한 이야기들이었으니 말입니다. 나이를 먹은 뒤 실제로 북한 문헌을 보면서 이런 멍청한 짓을 확인하면서 비웃다 보니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나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이것 저것 주워듣다 보니 지도자 숭배라는 역겨운 문화가 북한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찝찝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통령이 당선될 때 마다 반복되는 당선자 찬양은 표현 수위의 차이만 있을 뿐 아첨을 위한 글이라는 점에서 밥맛떨어지는건 마찬가지였으니 말입니다. 그 중에서도 소위 ‘國父’라는 이승만 우상화는 가장 정도가 심한 것이어서 혐오감을 느끼다 못해 즐기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1950년대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다 보니 이승만 우상화에 대한 글을 심심치 않게 읽게 되더군요.

특히 이런 우상화는 195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심해집니다. 특히 1960년 선거를 앞두고는 이기붕에 대한 선전과 엮여서 더욱 눈뜨고는 못 볼 수준이 되지요. 최근에 읽은 것 중에서 해군의 정훈잡지였던 월간 『해군』 1959년 8월호에 실린 글들이 인상적입니다. 1959년 8월호에는 이승만에 대한 특집과 함께 이기붕에 대한 특집이 함께 실렸는데 적당히 참고 읽어줄 만한 글도 있지만 「豫言者로서의 李承晩 大統領」처럼 민망한 글도 있습니다. 8월호에 실린 글을 한편 인용해 보겠습니다.(문장이 비문 투성이인 것은 넘어가죠)

배달민족의 영원한 태양이시며 정의의 천사이신 우리 국부 리승만박사님 께서 조국의 자주 독립과 국제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싸워오신 형극의 길은 그대로 대한민국 중흥의 혈사이고 세계인류 평화의 건설자이시며 님께서 앞으로 실현하시려는 그 원대한 포부는 바로 겨레와 인류가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서는 반듯이 따라야 할 거룩한 정경대도이다.
겨레와 민국의 자유번영을 위하여 90평생을 아낌없이 헌신하여 오신 국부 리승만 박사께서는 유엔한국위원단 감시아래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케하고 초대 국회의장이 되시였고 헌법을 제정공포한 제헌국회에서 절대다수의 득표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시였다.
초대 대통령의 중책을 맡으시고 내각조직과 정권이양을 완료한 ‘리’대통령께서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하시였다. 표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기념식에서 선포문을 낭독하시는 국부 리승만 대통령의 감격어린 모습이다.

「표지설명」,『해군』(1959. 8)

글자만 몇개 바꾸면 북쪽에서도 쓸만한 글이라 하겠습니다. 195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정권재창출의 필요가 높아진 자유당, 특히 자유당의 강경파들은 이승만 우상화를 강화하고 여기에 이기붕 끼워팔기를 시도하는데 이것은 마치 김일성-김정일을 세트로 끼워파는 방식을 연상시킵니다. 다행히도 전자는 실패했지요. 사실 지도자에 초월적인 인격을 부여함으로써 권위를 얻고 이것을 집권의 정당성으로 삼는 방식은 요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치가로서의 자질이 검증되지 않은 인물들이 단지 막연한 이미지를 팔아먹으면서 집권을 꿈꾸는 오늘날 과거의 망령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겠지요.

2012년 1월 18일 수요일

3대장

이승만의 군부통치 방식 중 하나는 군 엘리트들을 서로 경쟁시켜 충성을 이끌어 내는 것 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백선엽, 이형근, 정일권 세명을 대립하도록 만드는 것 이었습니다. 특히 1954년 2월 17일 이형근과 정일권이 육군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이른바 ‘3대장’ 파벌이 정립되게 됩니다. 소위 3대장 체제는 1957년 5월 이형근과 정일권이 밀려날 때 까지 계속되면서 이승만이 군부를 통제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3대장 이야기를 후배들 있는데서 꺼내니 다들 키득키득 웃는 겁니다. 원피스에 나오는 해군 3대장이 생각난다나요;;;; 3대장이라 할때 백선엽, 이형근, 정일권을 이야기하느냐 아니면 원피스를 이야기 하느냐를 가지고 세대구분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이승만 시기 민군관계에 대한 신익희의 통찰

부산정치파동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민군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건입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군부 일각에서 이승만의 헌정유린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기도한 것 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육군참모총장 이종찬(李鐘贊) 중장은 미국에 쿠데타 가능성을 타진한 바 있습니다. 라이트너(E. Allan Lightner, Jr.) 미국 대리대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종찬 중장은 약간의 육군과 해병대 병력을 동원하면 이승만 대통령과 이범석 내무부장관, 원용덕 계엄사령관을 쉽게 체포하여 상황을 정상화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은 권력에 관심이 없으며 새 대통령을 선출하면 일주일 내에 군대를 복귀시킬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종찬 중장은 한국군이 유엔군의 지휘계통에 있는 만큼 미국의 지지만 있다면 쿠데타를 결행할 생각이었다고 합니다.1) 이종찬 중장은 정치 정상화를 미국이 지원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종찬 장군은 미국이 국회정상화를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을 무렵 제2병참사령부 예하의 병력을 동원해 이를 지원할 수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2)

이렇게 이종찬 중장이 쿠데타 또는 미국의 이승만 제거에 협력하려 했던 것은 생각 이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익희의 측근이었던 신창현(申昌鉉)의 기록에 따르면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난 직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3) 꽤 재미있는 내용이니 조금 인용을 해 보겠습니다.

(전략)

이날 저녁 무렵 서상렬(徐相烈)이 문병차 내방하였다. 서상렬은 일본 유학 중 학도병으로 끌려 나가 북지(北支) 전선에서 전투에 가담하여 중국군을 토벌하다가 일본 진중을 탈출하여 중경 임시정부의 경호대장을 지낸 사람이다. 경호대는 내무부에 예속되어 있었던 관계로 해공에게 가깝게 수종하던 터수였다.
이날 이 사람이 와서 뵙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박사의 폭거를 통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런 뒤 분을 참을 수 없다면서 “대구에 있는 육군 참모총장과는 지기(志氣)가 상통(相通)하는 처지이니 군을 동원해서 이 폭정을 응징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해공께서 “그거 아주 위험한 발상이야. 우리가 공산당과 싸우느라 병력을 자꾸 증강시킨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 하지만 전체 국민에 대한 수치 비례로 보아 너무나 방대하여 앞으로 어떤 사람이 대통령에 될지 모르겠으나 이 군부를 다루는 일이 아주 중요한 문제로 남을 것이오.
아직은 이박사의 과거 독립운동 역사로나 국제적 성망 등 카리스마적 위력으로 지탱해 나가고 있는데, 지금 그분이 국헌을 뒤엎고 주권을 짓밟는다고 하여 군대의 힘을 빌어 확청(廓淸)하였다고 칩시다. 당장은 분풀이도 되고 속시원하겠지만, 그 군권 밑에 매달려 있는 정부가 무슨 민주 정부가 되겠으며, 어떻게 정부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군부가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것 이라오. 그것은 군부가 자기들 끼리 또 찢고 당기고 할 테니 결국 군부 쿠데타라는 악순환의 씨를 뿌려 준 결과가 된다는 말이라오.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준조 절충(樽俎折衝)하고 토론ㆍ협상해 가며 차츰차츰 시정하고 광정(匡正)해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라오. 나라와 민족의 일에 감정은 절대 금물이지. 우리가 길의 중요한 요지를 목이라고 하는데, 정치는 긴 목 잡고 한다는 것이라오. 감정도 금물이려니와 조급하게 굴어서도 안 되지요. 여기에 정치력이 아닌 무력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발상은 위험 천만한 일이야. 양호유환(養虎遺患) 되고 말아요. 아예 그런 생각일랑 하지 말아요.”

(후략)

신익희의 통찰력은 주목할 만 합니다. 물론 이종찬 중장은 신태영 국방부장관이 계엄군을 증원하기 위해 2개 대대를 차출하라고 했을 때 군의 정치개입에 반대하며 거절한 바 있고 권력에는 뜻을 두지 않은 태도로 존경받는 군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마무리가 잘 되었으리라는 보장도 없지요. 군부가 쿠데타를 생각할 정도로 강력해진 시점에서 그것이 일어나지 않은 주된 원인은 신익희가 높이 평가한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군부통제와 통치능력에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민군관계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은 군부내 파벌을 이용한 이승만의 군부통제가 효율적이었음을 지적하고 있지요.4) 미국이 이승만 제거계획을 구상하다가 대안을 찾을 수 없어 포기한 사실에서 잘 드러나듯 이승만은 개인의 정치력으로 강력한 군부를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이라는 강력한 통제자가 사라지자 군부를 견제할 존재는 국내정치무대에 존재하지 않는 난감한 상황이 조성되지요. 5ㆍ16 쿠데타를 이야기 할 때 부산정치파동을 다루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입니다.

신익희가 예상했던 것 처럼 5ㆍ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민주당에 실망한 상당수의 국민들은 군부가 ‘구악’을 일소하고 혁신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군부는 그대로 권좌에 눌러앉아 이후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세명의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장기집권을 하게되지요. 1961년은 군대가 양적으로 팽창한 상태에서 그나마 군부와 균형을 맞출만한 집단은 ‘썩어빠진’ 기성 정치집단인 민주당 정도였고 기성 정치권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군부는 견제세력 없이 독주하게 됩니다. 공짜란 존재하지 않았고 군부를 통해 손안대고 코를 풀어보려던 세력은 제대로 한 방 얻어맞게 됩니다.



1) ‘Oral History Interview with E. Allan Lightner, Jr.’(1973. 10. 26), Truman Library, p.114
2) ‘Memorandum by the 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Young) to th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Allison)’(1952. 6. 13),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2~1954 Vol. XV Korea, Part 1, (USGPO, 1984), p.333
3) 申昌鉉, 『내가 모신 海公 申翼熙 先生』, (海公申翼熙先生紀念會, 1989) , 505~506쪽
4) 도진순ㆍ노영기,「군부엘리트의 등장과 지배양식의 변화」,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 (선인, 2004), 67~68쪽

2011년 10월 1일 토요일

리박사의 외교기조

리승만 박사의 외교 기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마디.

Specifically, we need more divisions, more air and more sea forces.

‘Hagerty diariy, July 27, 1954’,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2~1954, Vol. XV Korea, part2, (USGPO, 1985), p.1845

단순 명쾌합니다. 더 많은 육군사단, 더 많은 공군, 더 많은 해군. ㅋㅋㅋ

아 물론, 이것이 대한민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요구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읽으면 읽을수록 입가에 미소가...

아아. 이거 정말 중독될 것 같은 문구입니다. 꿈에 나올것 같아요.


More! More! More!

2011년 9월 8일 목요일

재활용 (2)

한국전쟁 직전까지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가 매우 제한적이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전차라던가 105mm M2 같은 사단 포병급 이상의 화포는 전혀 지원되지 않았지요. 하지만 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중장비의 지원은 크게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105mm M2나 107mm 중박격포가 원조되긴 했지만 사단의 편제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라서 한국전쟁의 나머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한국군의 보병사단은 사단 외부에서 배속되는 부대를 제외하면 사단 당 1개 대대의 포병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한동안 한국군의 전투력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장비의 지원은 전쟁 이후에도 최대한 자제했습니다. 미국이 계속해서 한국군 보병사단을 경장비 사단 수준으로 묶어둔 덕분에 한국전쟁 내내 한국군 보병사단을은 부족한 화력으로 싸워야 했지요.

이 점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측의 불만요인이었습니다. 이승만이 다양한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군사원조의 증대를 요청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실제로 국민방위군 창설 초기에는 미국이 국민방위군에 대한 장비 제공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 캐나다를 상대로 소총구매를 추진한 일 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어쨌든 미국이 중장비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자 이승만은 좀 색다른 방안을 강구했던 것 같습니다. 이승만은 1951년 2월 10일 임병직(林炳稷) 외무부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습니다.

(전략)

(미국의 고철 수집과 관련해서) 또 다른 중요한 문제가 본인의 관심을 끌고 있소. 장관은 북한 공산도당이 전차와 중포를 가지고 쳐들어 왔을 때 우리 국민이 끔찍한 피해를 입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오. 우리 국민들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도 전차와 중포를 가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소. (버려진) 전차와 기관총이 매우 많이 있소. 이중 대부분은 파손된 상태지만 우리 기술자들에 따르면 이것들은 80% 정도 수리가 가능하다고 하오. 제8군은 버려진 전차와 장비들을 긁어모아 분해한 뒤 고철로 만들려 하고 있소. 미국측의 당국자들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그것들을 인수하는 대신 고철을 공급하겠다고 요청하시오. 그리고 만약 미국측이 그것들을 판매하려 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사겠다고 하시오. 이렇게 한다면 대한민국의 방위를 준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오. 미국측이 버려진 장비들을 매일 같이 파괴하고 있으니 빨리 미국의 동의를 받도록 하시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의 사령부나 무초 대사에게 우리가 버려진 장비들을 가지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시오. 맥아더 장군과 무초 대사에게 이것은 우리 정부의 요청이라고 하시오.

「이승만 대통령이 임병직 장관에게」(1951. 2. 10), Oliver Paper 1951-2(국사편찬위원회 등록번호 HA0000004648)

하지만 버려진 전차와 중화기를 한국이 인수하는 것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사실 미국이 원조를 하는 것이나 버려진 전차를 회수해서 쓰는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인력과 기술, 물자의 지원이 필요한 일이니 쉽게 승인해 주기는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승만과 한국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원조 요청을 하고 독자적인 장비 획득을 추진한 것이 미국의 일정한 반응을 이끌어 내기는 했으니 비판적으로만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 과정이 깔끔하진 않지만 어쨌든 조금 더 많은 원조를 뜯어내는 데는 도움이 되긴 했으니 말입니다.


2011년 5월 28일 토요일

이승만의 협상술에 대한 논평 하나

이승만은 매우 머리가 잘 돌아가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런 점은 특히 외교적인 협상에서 잘 나타나는데 항상 성공하진 못했어도 복잡한 화술로 상대방을 혼란시키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한미국대사였던 무초가 트루먼 기념도서관에서 실시한 구술채록에서 이승만과 미육군부장관 로얄과의 회담에 대해 회고한 내용은 이점에서 꽤 재미있습니다.

헤스(Jerry N. Hess) : 국무부의 관료로서,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로의) 권력이행기에 취했어야 하는 조치들에 대해 이견을 보인 미군 지휘관들이나 국방부 관료들과 특별한 문제는 없으셨습니까?

무초 : 예.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괜찮은 사례라면 1948년 말에 있었던 육군부 장관과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의 방한을 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두 사람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안내했고 그 두 사람은 한국의 국방 문제에 대한 요구에 중점을 두면서 미국이 한국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승만 대통령에게 설명했습니다.

두 사람은 워싱턴으로 돌아가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제안에 동의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보낸 보고서도 우리가 이대통령의 군사적 요구에 대해 제안한 내용들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모두 “좋소, 좋소, 좋소”라고 한 것 처럼 보이도록 하는데 영향을 끼쳤는데 사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을 철수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는 제안에 대해서 결코 “좋소” 라고 한 적도 없었고 결코 “싫소”라고 한 적도 없었습니다.

Muccio : Well, there were a few. A good example was the visit in late ‘48 of the Secretary of the Army, accompanied by General (Albert C.) Wedemeyer. I escorted the two to President Rhee and they presented to President Rhee U. S. thingking about the Korean situation with stress on Korean needs in defense matters.

When they reported in Washington, they proceeded on the assumption that Rhee had agreed to this U.S. proposal. My report was to the effect that Rhee had said, “Yes, yes, yes,” to all of the things that we offered Rhee for his military needs, but that he had never said, “Yes,” and he never said, “no,” to the suggestion that the time had come for the withdrawal of the U.S. military forces.

“Oral History Interview with Ambassador John J. Muccio”(1971. 2. 10~2.18) by Jerry N. Hess, Harry S. Truman Library, pp.9~10

이승만의 담화문이나 언론과의 회견을 보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모호하고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이승만이 매우 머리가 좋고 정치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지요. 무초는 이 인터뷰 도중 이승만이 매우 지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는데 사실 이것은 이승만을 상대한 인물들이라면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이었습니다.(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의 경우는 이승만의 교활함에 치를 떨 정도였지요.)

이승만 시절 대한민국이 암울했다는 점과 이승만 정부가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는 점 때문에 가끔 이승만을 매우 무능한 인물로 보는 분들도 계신데 사실 저는 이승만이 특정 방면으로 지독하게 머리가 좋은게 문제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11년 5월 10일 화요일

현리전투와 리지웨이의 한국군 평가

중국군의 1951년 춘계공세는 UN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군은 이 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것은 한국군에 대한 평가에 부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UN군사령관 리지웨이는 1951년 5월 21일 육군부에 보낸 전문에서 미군 및 한국군 부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1. 본인은 모든 미군 군단, 미군 사단, 그리고 한국군 제1사단을 방문하였고 이 모든 부대들이 사기가 높으며 전투를 훌륭히 수행했음을 특기하고자 한다. 나는 특히 적의 주공에서도 주요한 공격을 받은 러프너(Clark Louis Ruffner) 소장의 미육군 제2보병사단을 특기하고 싶다. 나는 제2보병사단이 보수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자신들의 피해의 20배가 넘는 손실을 적에게 입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들에게 밴 플리트 장군의 미육군 제8군과 이를 지원하는 공군 및 해군의 탁월한 능력, 용맹성, 그리고 투지를 고취할 것이다.

1. Having visited all US Corps, all US Divisions, and the 1st ROK Division, I wish to cite all these units to you for superior spirit and conduct in battle. I particularly cite the US Army’s 2nd Infantry Division, Major General C L Ruffner, commanding, which has received the principal blow of the hostile main effort. It has inflicted losses, which conservatively estimated, exceed, I belive, 20 times its own. It would be an inspiration to our people to know of the professional competence, the gallantry, and the fighting spirit of General Van Fleet’s Eighth US Army and its supporting Air Force and Naval Forces.

2. 한국군 제2사단과 제6사단은 적의 가벼운 공격, 그리고 때로는 강력한 공격에 맞서 매우 훌륭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아직 자세한 사항이 파악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제3, 5, 7, 9사단은 형편없었고 막대한 양의 장비를 상실한 것이 명백하다. 한국군 제1군단은 적과의 교전이 제한적이긴 했으나 잘 싸웠다. 이런 유감스러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2. ROK 2nd and 6th Divisions have performed very creditable against moderate and in some cases strong enemy attacks. Although full details still lacking, it is clear that ROK 3rd, 5th, 7th and 9th Divisions have performed discreditably with loss of large amounts of equipment. ROK I Corps has done well though it has had little contact. We are continuing our efforts to correct this lamentable situation.

3. 이승만 대통령은 5월 18일 언론 회견에서 미국이 잘 훈련되어 있는 한국군에게 장비를 제공한다면 미군을 철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본인은 무초 대사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런 말도 안되고 유해한 발언은 그만 둘 것을 권유하려 한다. 본인은 이 문제를 국무부를 통해 제기하고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강한 압박을 가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3. President Rhee was reported to have stated to Press on 18 May that, if US would equip his already well trained Soldiers, American Troops could be withdrawn. I continue to seek through Ambassador Muccio to induce President Rhee to cease making such flagrant and damaging statements. I suggest consideration be given to presenting the matter through channels to Department of State with object of having strong pressure brought to bear to correct this situation.

4. 이 전문의 첫 번째 문단은 언론에 공개할 것을 요청함.

리지웨이

4. Recommend that 1st part of this message be released to Press.

Ridgway

CX62985(1951. 5. 21),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of Korea Army.

2번 항목은 현리 전투가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끼쳤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미군에 비해 화력이 부족하고 병력으로도 열세라는 문제를 고려해야 하긴 합니다만 1951년 초의 한국군이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한국군이 중국군에게 약하다는 점이 수 차례의 전투로 드러나긴 했습니다만 현리전투는 그 중에서도 최악의 패전이었습니다.

리지웨이가 3번에서 지적한 것 처럼 현리전투는 그동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한국군의 증강을 추진하고 있던 이승만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습니다. 한꺼번에 군단급 제대가 와해되고 장비를 대량을 상실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낯이 두꺼워도 무작정 군사원조를 하라고 요구할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이승만은 1950년 말 부터 국민방위군으로 대표되는 대규모 병력동원과 이를 위한 무기조달에 주력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무기조달의 경우는 미국이 원조를 해 주지 않을 경우 캐나다를 통해 소총을 조달하는 방안까지 고려되었을 정도로 이승만은 병력 증강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리전투는 이승만의 병력 증강 시도에 치명타였습니다.

유명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현리 전투의 결과 한국군에 미군 지휘관을 배치하는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될 정도로 한국군 장교단의 지휘능력은 불신의 대상이 됩니다. 그랬다면 한국군이 태평양전쟁 이전의 필리핀군과 비슷해 졌겠지요.

2011년 4월 17일 일요일

이승만 국부론에 대한 잡상

Big Train님의 이글루에 들렀더니 이승만 국부론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올라와 있어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Big Train님의 글에 달린 댓글과 트랙백으로 엮인 글들도 흥미롭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승만을 매우 싫어합니다. 이승만을 비판할 이유야 넘쳐나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전쟁 초기 무책임하게 서울을 버리고 피신했다는 점 입니다. 물론 전황이 불리했기 때문에 서울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승만의 피난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국회는 사전 통보조차 받지 못해 많은 국회의원들이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김규식과 같은 재야의 거물들은 또 어떻습니까? 이승만이 피난하면서 버려둔 수많은 문서들은 북한에 노획되어 북한의 선전도구가 되었지요. 이승만의 피난은 체계적으로 조직된 것이 아닌 공황상태에서의 도주에 불과했습니다. 긴급시에 국가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대통령이 공황상태에 빠져 도망쳤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이승만은 대통령의 자격이 없습니다.

더더욱 우울한 것은 이승만이 25일 오후 부터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1970년대 후반에 공개된 미국 대사관의 전문은 이승만이 25일 밤에 미국 대사를 불러 피난할 생각을 털어놓았다는 것을 밝혀냈지요. 그런데 이 자료가 공개되어 널리 알려진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일부 우익은 내용의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프란체스카 비망록을 들먹이며 이승만이 27일까지도 서울을 사수하려 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글,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의 서울탈출” 에 서도 언급했지만 프란체스카 비망록의 6월 25일~28일 기록은 작성된 시기조차 확실하지 않고 이승만에 대한 비난을 막고하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강한 글 입니다. 결정적으로 주한 미국대사 무초가 25일 밤~26일 새벽에 이승만을 면담하고 국무부에 보낸 전문이 남아있기 때문에 프란체스카 비망록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은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요즘도 프란체스카 비망록의 내용을 따르는 글들이 ctrl+c+v되어 인터넷 곳곳에 퍼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6월 25일~27일 경무대에서 일어난 일들은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입니다. 전선에서 수많은 군인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먼저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정말로 가장 먼저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승만이 정부기관과 국회의 피난을 책임졌다면 그가 서울을 버리고 피난한 것을 비난하지 못할 것 입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전쟁 당일 부터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정말로 가장 먼저 도망쳤습니다. 더욱 더 비참한 것은 정작 외국인인 주한미국대사 무초가 최후까지 남아 대통령이 도망치고 나서 공황상태가 된 한국군 수뇌부를 도우려 했다는 것 입니다.

무초 대사는 1950년 6월 27일 오전 6시에 다음과 같은 짤막한 전문을 보냈습니다.

966. 서울 북쪽의 북한군은 지난 밤 사이 조금 더 진격해왔습니다. 가장 신뢰할 만한 상황 평가에 따르면 서울 근방의 적군 병력과 전차 숫자가 과대평가되긴 했어도 숫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사관은 현재 고립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대통령과 대부분의 각료들은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피신했습니다.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 신성모와 한국군 참모부는 아직 서울을 사수할 것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저는 소수의 지원자와 함께 최후의 순간까지(until bitter end) 서울에 남을 것이며 드럼라이트 참사관 및 소수의 대사관 직원을  자동차 편으로 대통령을 따르게 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한국을) 포기했다는 비난을 막기 위해서 주한미군사고문단의 핵심 요원은 사태의 추이에 따라 차량을 이용해 남쪽으로 보내고 그밖의 군사고문단 요원들은 항공기편으로 피신시켜야 합니다.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1950. 6. 27),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VII Korea(U.S.GPO, 1976), p.173

이승만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정부의 수뇌인 이승만이 생포되면 대한민국이 붕괴될 수 있으므로 이승만의 피난을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옹호는 이승만이 정부와 의회, 그 밖의 국가 기관들을 체계적으로 피난시키려고 노력했을 때에나 가능할 것 입니다. 결정적으로, 주한미국대사인 무초는 한국군 수뇌부와 함께 글자그대로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까지 서울에 남았습니다. 한국에 대한 무초의 책임은 이승만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벼웠지만 무초는 위험을 무릅쓰고 외교관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외국인보다도 대한민국에 대한 책임감이 없던 자를 국부로 추앙하려는 정신나간 움직임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데서 오는 것이지 억지로 만든 국부 따위를 받들어 모신다고 생기는게 아닙니다.

2011년 1월 24일 월요일

『갈등하는 동맹』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대한 서술

2010년 봄에 역사비평사에서 낸 『갈등하는 동맹 - 한미관계 60년』을 읽는 중 입니다. 책이 나왔을 때 한번 읽어보라는 이야길 듣고 사놓긴 했는데 달력이 완전히 넘어가고 나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원래 『역사비평』에 연재된 글들을 정리해서 단행본으로 엮은 것인데 이승만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까지의 한미관계를 간략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진보적인 학계가 한미관계에 대해 가진 시각을 살펴보는데 도움이 되는 저작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가까운 현재를 보는 시각인 것 같습니다. 김대중 정부 시기를 맡은 필자는 박건영과 정욱식이고 노무현 정부 시기를 맡은 필자는 박선원인데 특히 박선원은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안보전략비서관이었습니다. 애시당초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한 인물들을 필자로 선정한 셈이지요.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한미관계의 갈등은 물론 북핵위기의 원인을 모두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 집단에 돌리고 있습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경직성과 전략적 오판이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겠습니다만 작년 말 북한의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에서 드러난 것 처럼 모든 책임을 부시행정부와 네오콘에게 전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태도 같습니다.

특히 이런 점은 제2차 북핵위기에 대한 정욱식과 박선원의 서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정욱식과 박선원은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이 북한의 우라늄 계획에 대한 정보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압박을 가해 북핵위기를 고조시켰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2010년 말 북한의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에서 드러난 것 처럼 북한의 우라늄 계획은 장기간에 걸쳐 치밀하게 진행된 것 입니다. 특히 박선원의 글은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변호하기 위해 쓰여졌기 때문에 더 불편합니다. 실패한 정책에 대한 변명과 책임전가처럼 불편한 것은 없지요.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대한 서술을 제외하면 개설서로 무난하다고 생각됩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분들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2011년 1월 10일 월요일

국개론;;;;

60년대 잡지를 읽다가 재미있는 구절이 있어서 발췌해 봅니다.

무엇보다 가장 논난될 수 있는 일은 1948년의 한국 선거가 너무 ‘진보적’이었다는 것이다. 즉 투표에 있어 판단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선거권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즉 문맹도의 기준을 문자해독에 두는 것은 국어교육에서 할 일이고 정치에서는 사리판단이 문맹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정치적 사리판단이란 사람을 죽였는데 그것이 옳은가, 나쁜가의 판단과 같이 간단히 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지식 뿐만 아니라 정치적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일제의 제한된 식민지 교육에서 그러한 정치적 판단능력이 기루어 질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번에 바로 보통선거제를 채택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남녀평등이라고 하여 여성에게도 무제한 선거권을 주었으나 당시 정치가나 입법자의 이상적 기질은 대단하였던 모양이다. 아니면 여성 득표공작의 안이성을 고려한 manipulation이었던가. 프랑스에서 보통선거제가 안정된 것은 대혁명을 거친 훨씬 뒤였으며 영국에서는 1832년, 1847년의 선거법개정 이후에야 되었으며 여성참정은 모두 20세기에 들어와서 실현되었고 瑞西(스위스)의 일부에서는 아직 여성참정권이 거부되고 있다.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여성은 자기의지가 박약하여 남의 의사에 따른다는 것이다. 구주에서는 성직자의 영향을 배제해야 한다는 이유를 공언하고 있다. 이러한 선거민이 있는 곳에 비합리적인 통치자가 등장하기 쉬운 것이다. 자유당이 붕괴하고 이승만씨의 단점이 내외에서 폭로되기까지 사실상 그의 mana를 많은 국민이 믿고 있지 않았던가.

한국에서의 투표율이 대체로 80%~98%에 이르렀다고 해서 국민의 정치적 수준이 높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전인수격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반드시 계수로 표시해야만 만족하는 부류의 순진성일 따름이다. 투표율이 높은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며 선진국에서 투표율이 약 60~70%된다고 해서 그 정도가 이상적이라는 말도 아니다. 99.9%의 투표율과 98%의 지지율을 공표해야 자기의 통치가 체면이 서는 것으로 생각하는 전체주의적 민주주의 사고방식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만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물론 투표율이 줄어서 50% 이하로 내려가는 것은 우려할 사태이다. 이것은 분명히 민주주의적 기반을 위태롭게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보통 90% 정도의 투표율을 보이다가도 가끔 50% 미만의 사례도 나오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국민이 갑자기 무관심의 경향을 나타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높은 투표율 가운데 이미 무관심의 투표가 항상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무관심은 단순히 붓대를 눌러 동그라미를 치고서는 어디다 눌렀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그런 것도 있고 또 정치적인 관심은 없으나 받은 것이 있으므로 일종의 계약 이행으로서 투표하는 그런 것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혹은 이른바 준봉(遵奉)투표라는 것도 있었다. 관권에 스스로 압복(壓伏)되거나 혹은 관의 투표에 대한 지시에 순종하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선거시의 테로 행위는 살상가상격이었다. 이러한 현성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지 않았다. 도시의 중산층이나 지식층이 아무리 정부와 여당의 횡포에 대해서 투표로서 항의하고 투표함을 사수하고 해도 그외의 다수인구가 횡포한 권력의 지지세력(?) -엄밀히 말하면 투표수-으로 남아 있는 한 정권교체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선거가 정권교체만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나 교체가 있어야 마땅한 지경에서 선거가 아무런 역활을 할 수 없다면 그러한 선거는 ‘하나 마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처음부터 5대원칙에 입각한 선거제도를 채택했던 것은 잘못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정부 수립이래 여러번 치루었던 선거가 한결같이 기존 집권자의 승리로 끝났는데 앞으로도 얼마간이나 이러한 현상이 되풀이 될지 알지 못한다.

裵成東, 「제도와 상황의 거리 : 한국의 두 정치제도에 대한 역사적 비판」『靑脈』11호(1965. 8), 110~111쪽

*필자인 배성동은 서울대 교수, 11,12대 국회의원(민정당), 명지대 북한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으로 재직중입니다.

이 글에 대한 제 개인적은 감상을 이야기 하라면 ‘투표란건 원래 그런게 아닐까’ 입니다. 

50~60년대의 지식인들이 자유당이나 공화당이 계속 집권하는 꼴을 보면서 울화통이 터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닌데 어쨌든 간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놈의 보통선거가 이승만이나 박정희에게 타격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2010년 9월 6일 월요일

짜증나는 사설

한주의 시작을 잡치는 짜증나는 사설 하나.



나는 전쟁 첫날 최전방의 장병들이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을 때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었던 인간의 기념관을 세우는 건 절대 반대다. 

예전에 축석령 전투 전적비에 이름조차 알수 없어 그냥 무명용사로 표기된 전사자들의 명단을 보면서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전쟁 초기의 혼란통에 기록을 상실해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무명용사들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을 때 이승만은 피난열차를 타고 도망쳤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국민을 버리고 도망치는 건국대통령 따위를 받들어 모신다고 생기는게 아니다. 글자그대로 권력이 시민에게 있기 때문에 정통성이 생기는 것이지.

2010년 6월 27일 일요일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의 서울탈출

6월 27일은 이승만이 서울에서 탈출한 날 입니다. 수도가 함락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함께 죽을 필요는 없겠지만 이승만은 정부와 의회, 그리고 군대를 내팽겨치고 혼자 도망쳤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승만에게는 정치적인 약점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승만이 비밀리에 수도 서울을 탈출한 데 대한 변호는 1983년에 중앙일보를 통해 공개된, 그의 아내였던 프란체스카 도너 리가 기록한 비망록에 나타납니다. 프란체스카의 비망록에서는 이승만은 수도를 사수하려 했으나 신성모 등의 간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이 글에서는 얼마전 단행본으로 나온 판본을 인용하겠습니다.)

숨 막힐 듯한 긴장과 긴박감 속에 하루가 지났다. 대통령이나 나나 자정을 넘겨 막 잠자리에 눈을 붙였을 때 비서의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맡의 시계는 27일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어 서울시장 이기붕씨와 조병옥씨가 들어왔다.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 겠습니다."

신 장관이 간곡히 남하를 권유했다.

"안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대통령은 그 이상 아무 말도 않고 문을 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신 장관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참을 멍하니 안장 있었다. 나는 대통령을 뒤따라 들어가 침착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지금 같은 형편에서는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날 거라고 염려들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존속이 어렵게 된답니다. 일단 수원까지만 내려갔다가 곧 올라오는 게 좋겠습니다."

내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대통령은 "뭐야! 누가 마미한테 그런 소릴 하던가? 캡틴 신이야, 아니면 치프 조야, 장이야. 아니면 만송(晩松, 이기붕씨의 아호)이야. 나는 안 떠나." 하고 고함을 질렀다.

대통령은 나에게는 신 장관을 캡틴 신(그는 한 때 선장을 했다), 조병옥 박사나 장택상 씨는 경찰국장을 지냈다고 해서 치프(chief) 조라고 불렀다. 나는 재차 "모두 같은 의견입니다. 저는 대통령 뜻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때 경찰간부(이름은 기억이 없다) 한 사람이 들어와 적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이닥쳤다고 메모를 전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적의 탱크는 그보다 훨씬 먼 곳에 있었고, 그것은 대통령의 남하를 독촉하려는 꾀였었다.

나도 "수원은 서울에서 별로 멀지 않아요" 라고 넌지시 거들었다. 신 장관은 때를 놓치지 않고 "각하가 수원까지만 내려가 주시면 작전하기가 훨씬 쉽겠습니다"라며 머리를 숙였다.

새벽 3시 30분. 남행 열차를 타기로 결정됐다.

프란체스카 도너 리/조혜자 옮김, 『6ㆍ25와 이승만 :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기파랑, 2010), 24~26쪽

프란체스카의 주장에 따르면 이승만은 27일 까지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신성모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의 간곡한 설득 끝에 서울에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중앙일보에 프란체스카의 비망록이 공개되기 이전에 미국에서 기밀해제된 주한미국대사 무초의 전문에 따르면 이야기는 크게 달라집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25일 밤 10시에 제게 전화를 걸어 자신과 면담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대사관에 있던 신성모 국무총리서리가 저와 동행했습니다. 제가 대통령관저에 도착했을 때 이범석 전국무총리는 이미 도착해 있었습니다. 다음의 내용은 우리가 나눈 대화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큰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룩거리면서 중간에 끊어져 뜻이 통하지 않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의정부의 상황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에 따르면 수많은 전차가 서울을 향해 쇄도하고 있으며 한국군의 능력으로는 저항할 수 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승만은 국무총리서리에게 한국어나 영어로 말을 걸었으며 가끔씩 이범석에게도 한국어로 말을 걸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내각에서 오늘 밤 정부를 대전으로 옮길것을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대통령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안전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정부를 반드시 보전해야 하며 만약 대통령 자신이 공산당에게 잡힐 경우 대한민국의 체제에 심각한 타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이대통령은 뜬금없이 국무총리서리에게 군사지식을 가진 "유능한 사람을 여러명" 모아서 현재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고 필요한 조치를 결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대통령은 만약 신성모가 만족할수 있을 정도로 군사적인 상황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주저없이 그 사람을 위해 국방부장관직을 사임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이대통령은 한국측은 미국이 큰 원조를 해 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우리는 1천만 달러 정도의 원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갑부인 박흥식(화신 그룹의 소유주인)이 무기 구매를 위해 백만달러를 제공하겠다고 한 것을 알고 있지만 내 생각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국무총리서리는 거듭해서 이대통령이 지시하면 상선단에서 얻은 경험에 따라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네 각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각하"를 연발했습니다. 하지만 신성모도 이대통령의 결정과 명령에 대해 매우 불쾌해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신성모는 결국에는 실례하겠다고 한 뒤 의정부 지구의 전투에 대한 최신 소식을 전화로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대통령에게 무기와 병력이 있다는 점과 전차를 저지하기 위해 바주카포와 대전차포, 그리고 대전차지뢰를 사용해 싸워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정부가 서울을 지키도록 설득하려 노력했습니다. 신성모는 57mm 대전차포가 북한군 전차의 장갑을 관통하지 못했다고 말했고 저는 대전차지뢰의 사용을 강조했습니다.(신성모의 주장은 다소 의심스럽습니다. 한국의 도로와 교량은 중전차(extremely heavy tanks)가 다닐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만약 정부가 서울을 포기한다면 전투에 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한국의 상황이 계속 악화된다면 이것을 다시 호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대통령은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그는 거듭해서 자신은 개인적인 안위에는 관심이 없으며 정부가 사로잡히는 위험을 감수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대통령의 생각을 바꿀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되자 자리를 뜨기로 했고 이대통령에게는 대전으로 피신하라고 한 뒤 저는 서울에 남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미국인 여성과 어린이들은 다음날 밝는대로 일찍 철수시킬 것이며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서울 상공에 공중 엄호가 있을 것 이라고 했습니다. 이대통령은 여성과 어린이들은 피신해야 한다는데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국 사절단의 남성들은 잔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회의를 끝내고 나오려 하자 이범석은 어설픈 영어로 그가 생각하기에 북한의 원래 전략은 서울 방면으로 기만 공격을 건 뒤 동해안에 게릴라 부대를 상륙시키는 것이었으나 서울 방면으로의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이 지구에 전력을 더 투입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범석은 한국군이 서울 방면으로의 공격에 대항해 완강하게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회의실을 떠나자 이범석은 대통령과 나눌 말이 더 있다고 하면서 남았습니다.

대통령관저를 나서자 신성모는 저에게 다가와 이대통령은 그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정부를 옮기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1950. 6. 26),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VII Korea(U.S.GPO, 1976), pp.141~143

바로 한국전쟁 당시의 기록인 무초의 주장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미 전쟁 당일 서울을 포기하고 피신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다른 측근들의 권유가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특히 프란체스카의 회고에서 이승만에게 피신을 권유했다고 하는 신성모는 오히려 이승만으로 부터 어떠한 통고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가장 재미있는 점은 이승만이 자신의 안위를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거듭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한 번 이야기 해도 될 것을 왜 계속해서 이야기 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읽는 분들이 판단하실 문제지요.

무초는 1971년의 인터뷰에서도 이승만이 이미 25일 저녁에 피난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증언을 한 바 있습니다. 세부적인 사항은 이 문서와 약간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은 골격은 대동소이합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두개의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바로 사건 당시의 기록인 반면 다른 하나는 사건으로 부터 시간이 지난뒤에 씌여진 기록입니다. 게다가 이승만을 변호하는 입장에서 씌여진 기록이지요. 어떤 것이 더 믿을만 한지는 읽은 분들이 판단하시면 되겠습니다.

2010년 4월 13일 화요일

약간 난감한 증언들....

현대사는 다루고 있는 시기의 특성상 글 쓰기를 할 때 조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키보드를 잘못 치거나 혓바닥을 잘못 놀리면 바로 고소가 날아오니 말입니다.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다루는 연구자나 언론인이 있으면 바로 고소를 때리는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박사가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 보니 재미있어 보이는 자료가 굴러들어와도 함부로 쓰긴 어렵습니다. 이런 종류의 자료로는 구술자료가 대표적입니다. 문서로 기록되지 않은 비사는 역사적 사건에 참여한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 떠돌고 구술자료의 형태로 정리가 되지요. 그런데 이런 자료들은 종종 문서로 기록되지 못할 만큼 난감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자료가 문서의 공백을 메꿔줄 만한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거나 기존의 설명과는 다른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경우 그것은 글쓰는 사람들을 갈등에 처하게 합니다. 욕 좀 먹더라도 이걸 쓸 것이냐 왠지 불길한데 그냥 쓰지 말 것이냐.

한국 현대사는 기묘하게도 자료의 공백이 많은 편입니다. 일단 한국전쟁으로 많은 문서를 잃어버린 것이 첫번째 이유 겠지만 현대사의 당사자들이 뭔가 구린 구석이 많다 보니 자신에게 불리할 법한 기록은 최대한 회피하지요. 간도특설대 출신의 한국군 장성들이 식민지 시대의 경험을 최대한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당사자들이 민감한 사실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하다보니 다른 기록이나 증언이 있다 보면 관심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임시정부나 만주국과 관련해서는 중국과의 수교 이후 조선족들이 꽤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신뢰도의 문제가 있습니다만. 1990년대 이후 새로 발굴된 증언들은 기존에 남한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한국측 기록에서는 김홍일 장군이 일본 항복 직후 만주로 파견되어 한인들을 보호하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 조선족들은 이와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김홍일은 만주 일대의 조선족들이 국민당을 지지하도록 공작을 벌이기 위해 만주로 보내졌지만 조선족들이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게 되자 그의 상관인 두율명(杜聿明)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두율명이 만주의 조선족들이 중국공산당을 지원한다고 보고하자 분노한 장개석이 김홍일을 파면해서 난징으로 소환했다는 게 조선족들 사이에 떠도는 버전입니다. 그나마 독립운동을 한 김홍일 같은 경우는 나은 편이고 간도특설대와 같이 악명(!!!) 높은 곳에서 복무한 이들에 대한 조선족들의 증언은 좀 더 난감합니다.

이 와는 조금 다른 경우가 1960년대에 이루어진 한국전쟁 참전자들의 증언록입니다. 국방부가 1960년대에 한국전쟁사 편찬을 시작하면서 참전자들을 대상으로 방대한 구술채록 작업을 한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증언록을 편집해서 단행본으로 내기도 했지요. 그런데 사실 책으로 나와 있는 증언록은 민감한 이야기들이 삭제된 축약본입니다. 1960년대에 채록한 원본을 열람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공문이 필요하며 군사편찬연구소장의 결재를 받아야만 합니다. 게다가 복사와 촬영이 금지되어 있지요. 받아 적는건 허용되는데 이 방대한 증언록을 노가다로 쳐 넣는건 문제가 있습니다. 어쨌든 저도 미공개된 증언록의 일부를 읽은 일이 있는데 정말 대한민국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할 만한 내용으로 가득하더군요;;;; 조선족들의 증언 처럼 신뢰도가 크게 의심되는 것도 아닌 당사자들의 증언이지만 좀 곤란한 내용이 많다보니 역시나 함부로 쓰기가 곤란합니다.

하여튼 흥미로운 자료는 많습니다만 잘못 썼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니 쓸수 없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아무래도 당사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시간이 조금 더 흘러야 이런 민감한 자료들을 자유롭게 쓸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0년 2월 28일 일요일

이건순 중위의 월남에 대한 미국쪽 기록

슈타인호프님이 이건순 중위의 월남에 대한 글을 하나 써 주셔서 저도 관련된 글을 하나 올려봅니다.

1950년 4월 28일 이건순 중위의 월남 사건은 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건순 중위는 월남한 뒤 북한의 남침 의도와 북한 공군의 현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남침에 대한 경고가 많았지만 바로 남침 직전에 북한군의 장교가 월남해서 남침에 대한 정보를 알린 것은 파급력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건순 중위가 제공한 정보에 대한 미국쪽 반응은 살짝 심드렁 했던 것 같습니다. 주한미국대사대리 드럼라이트(Drumright)가 국무부장관에게 보낸 전문을 보면 말입니다.

1950년 5월 11일 오후 6시 서울.

대사관전문 683호. 대사관전문 675호 참조. 5월 11일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 발표한 북한의 군사력1)에 대한 주한 미 대사관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한미대사관은 현재 북한의 군사력 수준에 대해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 발표한 통계와 다르게 판단하고 있으며 그 내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북한의 총 병력은 103,000명으로 여기에는 "인민군", 만주에서 귀환한 조선인 의용군 부대, 국경경비대, 공군 항공사단, 기갑부대와 해군이 포함됩니다. 여기에 대해 지방의 경찰력이 약 25,000명으로 판단됩니다. 북한군의 유일한 기갑전력은 한개의 여단규모 부대로 총 65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중 가장 강력한 것은 소련제 T-34입니다. 북한군의 포병 전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판단하고 있습니다. 76.2mm 보병포와 유탄포 224문, 122mm 유탄포 72문, 82mm 박격포 637문, 120mm 박격포 120mm문, 45mm 대전차포 356문, 경기관 총 및 중기관총 6,032정.

4월 28일 이건순 중위가 귀순하기 직전까지 북한 공군의 전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Yak 전투기 35대, 쌍발 폭격기 3대, 쌍발수송기 2대, 훈련기 35대. 이건순 중위가 제공한 정보는 F-3 등급2)으로 이 정보에 따르면 북한공군은 훈련용 전투기를 포함해 Yak 전투기 100대, IL-10 공격기 70대, PO-2 정찰기 8대, 미제 연락기 2대 입니다.

만약 본 대사관의 추정치가 정확하다면 한국측이 주장한 추정치는 아마도 의도적으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국측이 정보를 과장한 것이라면 그 이유는 우방국, 특히 미국으로 하여금 남북간의 군사력 격차를 납득하도록 만들어 군사원조를 더 받아내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오늘 있었던 면담을 포함해 최근 면담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추가적인 군사원조를 강력하게 요구한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의 성명은 한국 언론인들을 외국 언론인들과의 회견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고 외국 언론인들에게만 별도로 북한 군사력에 대한 보다 상세한 보고서를 제공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외국의 여론을 의식한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북한 군사력에 대한 일부 추정치가 한국의 일반 대중들의 불안감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한국 언론에게는 자세한 보고서가 제공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드럼라이트.

Department of Stat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 VII. Korea(Washington, USGPO, 1976), pp.84~85

이건순 중위는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 셈인데 문제는 미국측에서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미 전쟁이 임박한 시점이라 한국군의 증강 같은 본질적인 문제는 어쩔 방법이 없지만 말입니다.




1) 위에서 인용한 같은 책의 pp.83~84에 따르면 신성모가 발표한 북한 군사력에 대한 대한민국 국방부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총 병력 183,000명, 준군사조직을 합하면 30만명. 인민군 정규사단 6개 및 보안대 3개 여단 118,000명, 여군을 포함한 보조 인력을 포함할 경우 여기에 37,000명이 더 추가됨. 1개 전차 여단 1만명, 해군 15,000명, 공군 2,500명.

기계화 부대는 경전차 18대와 중형전차 155대 등 총 173대의 전차와 장갑차 30대, 오토바이 300대로 편성.

북한군의 포병전력은 76mm포와 122mm포를 합쳐 총 609문, 82mm 박격포와 120mm 박격포를 합쳐 총 1,162문, 대공포 54문, 대전차포 627문, 경기관총 및 중기관총 9,728정.

해군은 총 32척의 함정 보유.

공군은 총 195대의 항공기를 보유했으며 1개 항공사단으로 편성.

2) 위에서 인용한 이건순 중위가 제공한 정보 등급이 F-3 이란 것은 이건순 중위가 정보제공자로서의 신뢰도가 F, 아직 판단할 수 없으며 이건순 중위가 제공한 정보는 정보로서의 신뢰도가 3,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1995년에 출간한 『미군정기정보자료집 1-3 : CIC(방첩대) 보고서(1945.9~1949.1)』에 있는 설명에 따르면 미국 정보기관의 정보원 및 정보 등급 분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공원(Source)
A. 완전히 믿을 만함(completely reliable)
B. 통상 믿을 만함(usually reliable)
C. 꽤 믿을 만함(fairly reliable)
D. 통상 믿을 만하지 않음(not usually reliable)
E. 믿을 수 없음(improbable)
F. 판단할 수 없음(cannot be judged)

정보(Information)
1. 다른 원천에서 확인(confirmed by other source)
2. 아마 사실이다(probably true)
3. 사실일 수 있다(possibly true)
4. 사실인지 의심된다(doubtfully true)
5. 사실같지 않다(improbable)
6. 판단할 수 없다(cannot be judged)

2009년 12월 25일 금요일

하지와 제이콥스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

1947년 9월, 미 육군부 차관 드레이퍼(William H. Draper)가 남조선 문제로 방문했을 때 주한미군사령부와 미군정의 주요 인사들은 드레이퍼에게 한국의 정치정세를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물론 이 자리는 주한미군과 미군정의 입장을 옹호하고 육군부의 지원을 얻어내려는 목적이 있었으므로 드레이퍼에 대한 설명은 객관적인 것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자리에서 오고간 이야기들은 꽤 재미있습니다. 당시 대화의 녹취록이 남아있는 덕분에 후대의 우리는 이 자리에서 오고간 이야기들을 대부분 알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던 만큼 이 자리에서도 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는데 특히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이 자리에서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와 미군정 정치고문 제이콥스는 이승만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드레이퍼 : 이승만도 과도입법위원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제이콥스(Joseph E. Jacobs, 미군정 정치고문) : 아닙니다. 이승만은 어떠한 공식적인 직함도 없습니다. 이승만은 여전히 조선인들에게 자신이 미국 정치인들의 후원을 받고 있는 것 처럼 보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승만은 민족대표자대회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의 작은 집단에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가 그들을 방문해 회견을 할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웨드마이어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사기를 쳐 볼까 하다가 이 일로 체면만 구긴 셈입니다. 물론 이것이 문제의 근원은 아닙니다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입니다.

드레이퍼 : 이승만에게 과도입법위원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거나 또는 참여하지 말 것을 권유한 일은 있습니까?

하지 : 만약 이승만이 과도입법위원에 참여한다면 그의 권위는 크게 실추될 것 입니다. 이승만은 스스로를 조선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드레이퍼 : 알겠습니다. 이승만은 그런 사람인가 보군요. (이하 이승만의 미국인 로비스트 관련 내용은 생략)

(중략)

하지 : (앞부분 생략) 물론 공산주의자들이 남조선을 장악할 위험성이 꾸준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 위험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조선 우익집단들이 벌이는 짓은 우리가 이곳에서 조선인들의 지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인들의 저항을 받으며 동시에 러시아인들을 상대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승만을 추종하는 집단은 지난해 12월 이승만이 출국했을 때 남조선에서 봉기를 일으켜 이승만을 정부 수반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이러한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조선을 떠날 생각이었지만 김구는 이승만의 계획에 따라 우익의 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하려 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미국인을 죽이는 것을 포함해 무슨 짓이든지 할 생각이었습니다. 심지어 우익들은 미국인을 몇 명 살해해 미국 본토에서 미군정이 인기가 없으며 실패했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고 이를 통해 주한미군을 철군시키도록 하려는 생각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은 여전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승만의 추종세력은 때가 적당하다는 판단만 있으면 언제든 그런 짓을 하려 들 것입니다. 저는 우익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그들만의 단독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익들이 원하는 것은 독재정권입니다.

드레이퍼 : 물론, 주한미군이 철수하게 된다면 이승만도 오래 버티지는 못 할 것 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지 : 이승만은 단 15분도 버티지 못 할 것입니다. 이승만도 그 사실은 알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점점 (정권을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승만의 아내는 이승만에게 이 점을 계속해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승만의 아내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고약한 여자입니다. 우리는 이승만의 아내가 소련놈들로 부터 돈을 받아먹는건 아닌가 의심할 정도입니다. 이승만의 집단은 정권을 잡기 위해 필사적입니다. 이승만은 워싱턴을 방문했을때 국무부의 힐드링(John R. Hilldring, 국무부 민정담당 차관보)을 만난 것을 통해 정치적 성공을 거두고 귀국할 체면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미국인 로비스트들은 이승만이 전쟁부장관과 만날 수 있도록 하려고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승만은 이 모임에 참석했지만 우리가 이 소식을 전했을 때 전쟁부 장관께서는 너무 바빠서 이승만에게 내 줄 시간이 없었습니다. 국무부는 이승만이 조선으로 귀국할 때 군용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드레이퍼 : 먼슨(Munson) 대령이 이 항공편이 준비된 것을 알고 그것을 취소했지요.

하지 : 이승만은 중국을 방문할 허가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장개석은 여전히 임시정부의 늙은이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웨드마이어는 중국을 방문하고 있을 무렵 장개석이 김구 일당에게 미국돈 2십만 달러를 제공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 20만 달러는 장개석이 2년 전에 김구에게 제공한 것 입니다. 제가 이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 이유는 이승만이 이 돈에 손을 대려 했었기 때문입니다. 이 돈은 김구에게 주어진 것이었지만 이승만 일파는 김구의 돈을 먹으려 했습니다.

드레이퍼 : 하지 장군, 이승만과 김구는 잘 협력하지 않았습니까?

하지 : (두 사람의 협력 문제는) 그들이 무엇을 하려느냐에 좌우됩니다. 현재 이승만과 김구는 결별한 상태입니다. 작년 겨울 이승만이 출국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그들은 한 패였습니다. 우리는 이승만과 김구가 과거 중국의 군벌들이 하던 식으로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는 자료를 잔뜩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이승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승만이 중국을 방문할 허가를 얻었을 때 저는 이승만에게 선박편으로 갈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 무렵 조선을 오가는 항공편은 모두 미육군의 항공기였기 때문에 만약 이승만이 항공편으로 가게 된다면 조선인들은 그것이 미육군이 제공한 항공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됐다면 이승만은 "미국 정부는 내가 미국을 떠날 때 비행기를 마련해 주었소. 국무부와 전쟁부가 나에게 이 비행기를 마련해 준 것이오"라고 떠들었을 것 입니다. 조선인들은 이승만이 무슨 비행기를 타고 오건, 그게 L-5건 C-54건 상관없이 그것을 이승만의 전용기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이승만도 조선인들에게 그렇게 이야기 했을 것이며 사람들은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는 이승만이 미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습니다. 어쨌든 이승만은 국무부의 도움으로 비행기를 얻어 중국을 방문했고 장개석은 이승만에게 전용기를 내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지나친 대접이었으며 이승만은 장개석으로 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귀국해 조선인들에게 저를 당장 쫒아내겠다고 떠들었습니다. (이승만은) 내가 당장 떠나야 한다, 남조선에 지금 당장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힐드링 장군이 단독정부 수립을 약속했다, 나를 제외한 미국 정부의 모든 사람들이 단독정부 수립을 약속했다고 떠들어 댔습니다. 이승만이 미국 방문중에 저를 지독하게 공격했기 때문에 저는 2월에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고위층에 계신 분들에게 제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변론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절대 농담이 아닙니다. 몇몇 국회의원들과 제가 접촉한 많은 인사들, 그리고 언론은 제가 공산주의자는 아니더라도 친공적인 인물이라고 보고 있었고 저는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소문을 재빨리 잠재웠지만 뉴욕을 방문했을 때 이승만도 뉴욕을 방문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뉴욕의 헨리 루스(Henry Luce)는 이승만의 패거리들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지원을 계속하고 있으며 록펠러 빌딩의 사무실 한 칸, 그리고 다른 사무실 한 곳과 행정적인 지원을 공짜로 제공했습니다. 이승만의 패거리들은 자신들을 공산주의자들의 적이라고 광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적이긴 합니다만 조선문제에 있어서는 미국의 적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있었던 일 입니다. 우리는 매년 우리를 방해하는 이 자들과 일을 함께 하기 위해 고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제가 이 문제를 차관님께 말씀드리는 이유는 조선의 우익들이 싫어하지 않을 만한 인물을 이곳으로 보내는 것이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야 그 놈들에게 쫒겨난다는게 불쾌하겠지만 한 번쯤은 고려해 봐야 할 것 입니다.

'Orientation for Undersecretary of the Army Draper and Party, by Lt. Gen Hodge at 0900 23 September 1947', RG 338, Records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 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11070, Box 103, AG File, 340.

이승만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많이 나타나지만 꽤 흥미로운 평가입니다. 특히 이승만의 권력욕에 대해서는 꽤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것은 프란체스카에 대한 평가인데 이승만 대통령 당시 비서실에 계시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프란체스카 여사의 정치 개입문제도 다시 한번 검토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 뒷부분은 나중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09년 6월 19일 금요일

만만한게 제주도...

서산돼지님이 '닉슨 前부통령의 '1박 2일' : 푸대접과 오뉴월 서리 복수'라는 글을 쓰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글에서 특히 흥미있었던 부분은 박정희가 미국측에 제주도를 미군 기지로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부분입니다. 재미있게도 이승만도 미국측에 제주도를 해군기지로 제공할 것을 제안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육군부 차관 드레이퍼(William H. Draper. Jr)는 주한미군철수와 남한 단독선거 문제로 1948년 3월 서울을 방문합니다. 이때 드레이퍼는 향후 수립될 단독정부의 수반으로 유력했던 이승만을 만나 회견을 가집니다. 이 두 사람의 회견은 1948년 3월 28일 조선호텔에서 있었는데 이때 이승만은 꽤 재미있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회견에는 훗날 군사사가로 유명해지는 듀푸이(Trevor N. Dupuy) 중령이 육군부차관 보좌관으로 동석하고 있었습니다. 듀푸이 중령이 남긴 비망록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이박사는 미국정부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두는 것을 고려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정부가 수립되면 한국인들은 미국정부가 제주도에 영구 기지를 설치하는 것을 매우 반길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드레이퍼 차관보는 이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Dr. Rhee said that he had heard it suggested that the United States might wish to have a Naval Base on Cheju Island. He Said that he felt confident that when a Korean Government is established, that the Koreans would be very willing to have the United States establish a permanent base there. (Mr. Draper made no comment).

Conference between Under Secretary Draper and Mr. Syngman Rhee, on 28 March 1948(1948. 4. 10), RG 319 Army Staff Plans & Operations Division Decimal File 1946-48 091.Korea Box 20 (Folder #3-1)

물론 미국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둘 생각은 커녕 하루라도 빨리 주한미군을 모조리 철수시킬 계획 뿐이었습니다. 이승만은 노련한 정치가 답게 미군을 계속 주둔시키고 싶다는 뜻을 돌려서 밝힌 것이죠. 물론 인용문에 나와 있듯 드레이퍼는 이승만의 떡밥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만만하게 제주도라는 느낌입니다. 말 그대로 수난의 섬이로군요.

2009년 2월 24일 화요일

한국군의 소총에 대한 잡담

슈타인호프님이 한국전쟁 발발을 전후한 시기 국군과 경찰의 총기 문제에 대해서 재미있는 글을 한 편 써 주셨는데 사족을 조금 달아보려 합니다.

잘 알려져 있다 시피 1948년 초 NSC8이 작성될 당시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는 한국군에 대한 군사원조를 5만명 수준으로 제한했습니다. 즉 소화기는 5만명 분을 원조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1948년 말부터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병력을 증강하면서 애초 미국이 상정한 병력 상한선을 돌파해 버리자 미국은 이승만 정부와 병력규모를 놓고 협상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 결과 1949년 2월 미육군부 장관 로얄(Kenneth Claiborne Royall)웨드마이어(Albert Coady Wedemeyer) 중장을 대동하고 이승만과 회견합니다. 이 회견이 있은 뒤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규모를 육군 6만5천명으로 상향조정합니다. 이 내용은 1949년 3월 16일의 NSC8/1에 반영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NSC8/1에 반영된 군사원조가 당장 이행될 수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여기서 추가된 1만5천명분의 소화기는 1950년도 회계연도 군사원조가 결정된 이후에야 이행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한미군이 철수한 시점에서 한국군은 5만명 분의 미제 소화기만을 장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국정부가 독자적으로 육군을 7만5천명 수준으로 증강을 해 버렸기 때문에 일선 부대의 소화기 부족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참고로 1949년 6월경 국군 제7연대와 제10연대의 장비현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표에 잘 나타나듯 두 연대는 미제 소화기의 부족으로 편제를 초과하는 일본제 99식 소총을 갖추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화기가 편제에서 크게 미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보병연대는 미제 소총이 300여정 부족하며 제 10연대는 미국제 소총이 인가량에서 1200정 가량 미달하고 있습니다. 두 연대 모두 부족분을 일본제 소총으로 보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연대의 경우 소총이 없는 병력이 200명이나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 공용화기도 편제에서 미달하고 있으며 특히 기관총과 바주카포의 부족이 두드러지지요. 이 두 연대는 비교적 초기에 창설된 연대이지만 신규 창설 부대를 위해 장비를 차출해야 했기 때문에 1949년 6월 시점에서는 공용화기는 물론 기본적인 소총 마저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국군병력은 1949년 8월 시점에는 10만명에 육박해 버리지요.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49년 6월 이후 이승만과 미국 대사관, 군사고문단간의 협상은 나머지 5만명분의 미제 소총과 덤으로 중장비를 원조받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미국 정부는 NSC8/1과 수정안 8/2에 의거해 1만5천명분의 장비만 더 줄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렇지만 NATO의 창설과 같은해 통과된 상호방위원조법안(Mutual Defense Assistance Act) 때문에 미국의 지원능력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한국은 상호방위원조법안에 명시된 원조 우선순위 13위(15개 국 중에서)였기 때문에 충분한 원조 예산이 배정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에 배당된 원조액을 맞추기 위해서 1만5천정의 M-1 소총 대신 퇴출된 장비인 M-1903 스프링필드 소총을 대신 원조한다는 결정이 내려집니다.
1950년 5월 26일 미육군 군수국은 상태가 양호한 3만정의 M-1903 재고를 확보했으며 NSC8/2에 의거해 이 중 2만정을 수리해서 한국에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수리비용을 포함해 책정된 비용은 1정당 20달러로 총 30만 달러였습니다. 한국으로 보낼 2만정의 M-1903 소총이 정비창으로 보내진 것은 1950년 6월 19일 이었는데 2만정 모두를 사용 가능 상태로 수리하는데 90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뒤에 수령님이 땅크를 몰고 쳐들어 왔기 때문에 한국군이 스프링필드 소총을 만져볼 기회는 없어졌습니다.

2009년 2월 10일 화요일

이박사는 밀리터리매니아?

1949년 초의 어느 날, 국무회의에 참석한 이박사께서 갑자기 이런 이야길 하셨습니다.

찦車에 鐵板을 加工하야 鐵匣車를 우리의 손으로 優良品을 생산할 수 있다하니 五十臺 可量 製作하여 보는 것도 좋겠다.

第十二回 國務會議錄, 檀紀四二八二年 一月二十一日

이박사 말씀인즉, 이런 물건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죠.


아무래도 건국 초의 대한민국은 안보적으로 불안한 나라이다 보니 대통령인 이박사가 군대에 관심이 많은건 당연하겠습니다만 이렇게 시시콜콜한데 까지 신경쓰는걸 보면 좀 묘합니다. 물론 다른 기록을 보더라도 이승만은 군사 무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건 알 수 있습니다만 이런 잡다한 물건까지 관심을 가질 줄이야. 어쩌면 우리의 초대 대통령은 밀리터리매니아 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대한민국이 충분한 돈과 기술이 있었다면 이박사의 국방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을까요 아니면 더 매니악한 기질을 발휘해 히총통 처럼 됐을까요? 하여튼 여러모로 재미있는 양반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박사에게 지프를 개조해 장갑차를 만들자는 이야기는 누가 처음 꺼냈을까요? 이게 정말 궁금합니다.

2009년 1월 18일 일요일

각하의 정치력, 가카의 정치력

이명박의 낮은 정치력은 박근혜를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고 갈등만 키우는 점에서 아주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청와대측에서 한나라당 중진들을 오찬회동에 초대하면서 관례를 무시한 행동을 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요.

한나라 중진들, 靑 '의전소홀' 떨떠름

Sonnet님이 얼마 전에 지적했 듯 박근혜와 같은 강력한 정적을 제어하는데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는 큼지막한 감투를 하나 던져주는 것 입니다. 많은 권력자들이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 막강한 정적들을 쳤지요. 이 방법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 그 효과가 충분히 검증되었다는 점에서 아마도 이명박에게 가장 쓸만한 카드였을 것 입니다. 만약 집권 초에 이 카드를 썼다면 아마도 지금쯤 개각을 핑계로 박근혜를 칠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이 방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써먹은 사람은 이승만일 것입니다. 이승만은 첫 내각을 구성하면서 처음에 국무총리로 지명한 이윤영이 의회에서 거부당하자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지명해 통과시킵니다. 게다가 이범석은 국방부장관을 겸임하여 그야말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됩니다. 미국 측에서는 군 장교단이 이범석의 권력을 두려워해서 이범석의 지시가 없이는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는다고 불평할 정도였지요.
하지만 이승만은 이범석을 국무총리에 앉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범석의 중요한 권력 기반인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을 해체시켜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에 흡수시켜 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이범석이 저항을 하긴 했지만 이승만은 그것을 간단히 제압해 버리지요. 이승만은 족청을 해체한 뒤 얼마 있지 않아 이범석을 국방부장관에서 해임시켜 버립니다. 족청이라는 강력한 방패가 없어지자 이범석의 정치적 위상은 취약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승만은 1950년 4월에 이범석을 국무총리직에 해임 함으로서 이범석에게 결정타를 먹이지요.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할 때 다시 한번 이범석을 끌어들인 뒤 또 한번 등에 비수를 꽂으면서 자신의 정치적 수완을 과시합니다. 1952년 대선에서 이범석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더 이상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물론 가카의 정치적 수완이 바닥이라는 점은 그의 정적들에게 크나큰 축복입니다. 우리 같은 일반 시민에게도 좋은 일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