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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9일 토요일

국민당군의 융통성있는 병력운용(?)

레이 황의 『장제스 일기를 읽다』는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 장교로 참전했던 저자의 경험담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민당군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이 많아서 꽤 재미있는데 그 중에서 중일전쟁 중 일선 부대의 병력 운용(?)에 대한 내용이 하나 있어서 인용을 해 봅니다.

중국은 운 좋게도 전쟁이 발발하기 얼마 전에 은의 국유화를 선포했다. 귀금속을 대거 지폐로 대체함으로써 전쟁 초기에는 인플레이션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41년에 이르러 물가는 처음으로 전쟁 발발 이전의 열 배를 돌파했다. 그 이후 물가의 상승이 빨라졌고, 그 파괴적인 효과가 모두의 일상생활을 위협했다. 1941년에 소위인 나의 월급은 42위안이었다. 식비는 정부가 지급했으나 의복과 신발은 내가 부담했다. 마을의 식당에서 국수 한 그릇이 3위안이었으므로, 월급을 아예 받지 않는 것보다 약간 나았을 따름이다.

이 당시 각 중대의 중대장에게는 두 명의 가짜 이름을 명부에 끼워 넣는 것이 용인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두 명의 급료와 수당을 챙길 수 있었다. 대대장과 연대장에게 용인된 숫자는 더 많았는데, 모두가 사단장의 묵인을 얻었다. 사단이 어떻게 운영되는가에 대한 뚜렷한 규칙은 존재하지 않았다. 총사령관 장제스는 1941년 최고위 장군들에게 돌린 한 통의 비밀 서한에서 몇몇 사단들이 명부상의 병력을 각각 3천명씩 부풀렸음을 지적했다. 그들은 전투의 사상자를 보고할 때 자신들을 구제할 기회를 잡았다. 한 사단이 5천에서 6천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과거에 이루어진 허위 보고의 증거를 모두 지우고 기록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걸 의미했다.

레이 황/구범진 옮김, 『장제스 일기를 읽다』(푸른역사, 2009),  234~235쪽

레이 황은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 중앙군 소속인 14사에 배속되었는데 중앙의 직계군이 이 정도로 엉망으로 운영되었다는 것이 다소 놀라울 정도입니다. 마치 르네상스 시기 용병단에서 급료를 올리기 위해 병력 규모를 허위로 부풀린 것과 비슷하지요. 이 상태로 전쟁을 1945년까지 지속했다는게 놀라울 지경입니다.

2010년 11월 20일 토요일

중국 전선의 패튼?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의 회고록에는 독일이 항복한 이후 패튼을 중국 전선으로 차출하려 한 이야기가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사실 광대한 중국 전선은 패튼 같은 인물에게는 꽤 잘 맞는 전장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독일이 6월(원문의 오류)에 무조건 항복을 한 뒤에는 일본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인력과 물자를 돌릴 수 있었으며 나는 마셜 장군으로부터 내가 패튼, 심슨(William Hood Simpson), 그리고 트러스콧(Lucian Truscott) 장군 등을 잘 통솔할 수 있다면 이들을 중국 전선에 파견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훌륭한 전투 경험을 갖춘 간부들을 보내주겠다는 제안을 즉시 받아들였다. 이런 능력을 갖춘 인물들은 중국 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이었다. 장 총통도 진심으로 찬성했다. 한편, 패튼 장군은 나보다 상급자였기 때문에 나는 마샬 장군에게 현재 직위를 그만 두고 전구 사령관을 패튼 장군에게 넘길 것과 어떤 역할이건 간에 그의 지휘 하에서 계속 복무하겠다고 했다. 마샬 장군은 내가 전구 사령관을 계속 맡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럴 경우 내가 4성 장군으로 진급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장 총통과 헐리(Patrick J. Hurley) 대사는 내가 4성 장군급의 직위를 이어 받았으며 유럽 전선에 있는 몇몇 대장 계급의 장군들보다 더 큰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대통령에게 나를 진급시켜줄 것을 요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는 두 사람에게 나는 매우 빨리 진급해 왔으며 다른 전구의 사령관들과 비교했을 때 근무 연한이나 경험 면에서 부족하며 현재의 계급으로도 중국군의 대장은 물론 원수들을 잘 상대해 왔다고 대답했다.

나는 잠정적으로 패튼에게 중국 북부를 담당하게 해서 베이징, 톈진, 그리고 친황다오(秦皇島) 등의 중요한 목표를 향해 동진하는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트러스콧은 중부를 맡아 양쯔강 계곡을 따라 상하이로 동진하는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이미 중국 남부를 잘 알고 있으며 지난 수개월간 능숙하고 공세적인 전투 지휘관으로써 뛰어난 자질을 보여준 매클루어(Robert A. McClure)는 남부를 맡아 광둥-주롱(九龍)-잔쟝(湛江, Fort Bayard) 등의 중요 목표를 향한 작전을 지휘하게 하려 했다. 나는 그 이전에 매클루어를 중장으로 진급 시켜야 한다고 건의한 바 있는데 이것은 그의 능력과 큰 임무에 걸맞는 직위였다. 심슨 중장은 전구 부사령관을 맡아 미군과 중국군 지상부대의 모든 작전을 총괄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인도에서 중국 전구로 차출된 유능한 항공 지휘관 스트레이트마이어 중장은 전구 부사령관이자 전구 연합군 공군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1945 년 8월로 넘어갔을 때 광둥을 점령하기 위한 카보네이도(CARBONADO) 계획은 초기 단계에 있었으며 실제로 광둥-주롱을 향한 진격 준비는 일정을 앞당겨 추진되고 있었다. 8월에 보다 공세적으로 동진을 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부상자를 치료하고 후송하고 보충병을 지속적으로 투입하기 위한 시설을 포함한 전방 군수 지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준비를 확실히 하고 싶었다. 즉, 나는 광둥을 향한 마지막 공세를 시작하면 공격 부대가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강력한 항공지원이나 탄약, 또는 보충병이 부족해서 돈좌되지 않기를 원했다.

Albert C. Wedemeyer, Wedemeyer Reports!(Henry Holts and Company, 1958) pp.331~332

그러나 중국 본토의 반격 작전이 아직 계획 단계이던 8월에 일본이 항복한데다 패튼도 사고를 당해 결국 패튼이 중국 본토에서 활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호사가라면 꽤 재미있는 가정을 할 수 있겠죠.

재미삼아 썰렁한 가정을 조금 해 보죠.

일단 패튼의 작전 구역이 중국 북부가 된다면 독일에 이어서 다시 한번 그가 혐오했던 소련군과 접촉하게 됐을 겁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습니다만 그렇게 됐다면 패튼과 소련측은 다시 한번 신경전을 벌였겠지요.

그리고 한가지 확실한 것은 중국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했다면 패튼이 그렇게 좋아했다던 셔먼이 전차 노릇을 아주 아주 잘 했을 겁니다. 태평양 전선의 셔먼 전차는 유럽 전선 처럼 얻어터지는 야라레메카 신세는 아니었으니 말이죠. 유럽 전선에서 셔먼의 굴욕을 지켜봐야 했던 패튼은 꽤나  흡족해 했겠죠.

2010년 4월 13일 화요일

약간 난감한 증언들....

현대사는 다루고 있는 시기의 특성상 글 쓰기를 할 때 조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키보드를 잘못 치거나 혓바닥을 잘못 놀리면 바로 고소가 날아오니 말입니다.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다루는 연구자나 언론인이 있으면 바로 고소를 때리는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박사가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 보니 재미있어 보이는 자료가 굴러들어와도 함부로 쓰긴 어렵습니다. 이런 종류의 자료로는 구술자료가 대표적입니다. 문서로 기록되지 않은 비사는 역사적 사건에 참여한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 떠돌고 구술자료의 형태로 정리가 되지요. 그런데 이런 자료들은 종종 문서로 기록되지 못할 만큼 난감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자료가 문서의 공백을 메꿔줄 만한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거나 기존의 설명과는 다른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경우 그것은 글쓰는 사람들을 갈등에 처하게 합니다. 욕 좀 먹더라도 이걸 쓸 것이냐 왠지 불길한데 그냥 쓰지 말 것이냐.

한국 현대사는 기묘하게도 자료의 공백이 많은 편입니다. 일단 한국전쟁으로 많은 문서를 잃어버린 것이 첫번째 이유 겠지만 현대사의 당사자들이 뭔가 구린 구석이 많다 보니 자신에게 불리할 법한 기록은 최대한 회피하지요. 간도특설대 출신의 한국군 장성들이 식민지 시대의 경험을 최대한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당사자들이 민감한 사실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하다보니 다른 기록이나 증언이 있다 보면 관심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임시정부나 만주국과 관련해서는 중국과의 수교 이후 조선족들이 꽤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신뢰도의 문제가 있습니다만. 1990년대 이후 새로 발굴된 증언들은 기존에 남한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한국측 기록에서는 김홍일 장군이 일본 항복 직후 만주로 파견되어 한인들을 보호하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 조선족들은 이와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김홍일은 만주 일대의 조선족들이 국민당을 지지하도록 공작을 벌이기 위해 만주로 보내졌지만 조선족들이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게 되자 그의 상관인 두율명(杜聿明)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두율명이 만주의 조선족들이 중국공산당을 지원한다고 보고하자 분노한 장개석이 김홍일을 파면해서 난징으로 소환했다는 게 조선족들 사이에 떠도는 버전입니다. 그나마 독립운동을 한 김홍일 같은 경우는 나은 편이고 간도특설대와 같이 악명(!!!) 높은 곳에서 복무한 이들에 대한 조선족들의 증언은 좀 더 난감합니다.

이 와는 조금 다른 경우가 1960년대에 이루어진 한국전쟁 참전자들의 증언록입니다. 국방부가 1960년대에 한국전쟁사 편찬을 시작하면서 참전자들을 대상으로 방대한 구술채록 작업을 한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증언록을 편집해서 단행본으로 내기도 했지요. 그런데 사실 책으로 나와 있는 증언록은 민감한 이야기들이 삭제된 축약본입니다. 1960년대에 채록한 원본을 열람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공문이 필요하며 군사편찬연구소장의 결재를 받아야만 합니다. 게다가 복사와 촬영이 금지되어 있지요. 받아 적는건 허용되는데 이 방대한 증언록을 노가다로 쳐 넣는건 문제가 있습니다. 어쨌든 저도 미공개된 증언록의 일부를 읽은 일이 있는데 정말 대한민국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할 만한 내용으로 가득하더군요;;;; 조선족들의 증언 처럼 신뢰도가 크게 의심되는 것도 아닌 당사자들의 증언이지만 좀 곤란한 내용이 많다보니 역시나 함부로 쓰기가 곤란합니다.

하여튼 흥미로운 자료는 많습니다만 잘못 썼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니 쓸수 없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아무래도 당사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시간이 조금 더 흘러야 이런 민감한 자료들을 자유롭게 쓸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9년 12월 25일 금요일

하지와 제이콥스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

1947년 9월, 미 육군부 차관 드레이퍼(William H. Draper)가 남조선 문제로 방문했을 때 주한미군사령부와 미군정의 주요 인사들은 드레이퍼에게 한국의 정치정세를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물론 이 자리는 주한미군과 미군정의 입장을 옹호하고 육군부의 지원을 얻어내려는 목적이 있었으므로 드레이퍼에 대한 설명은 객관적인 것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자리에서 오고간 이야기들은 꽤 재미있습니다. 당시 대화의 녹취록이 남아있는 덕분에 후대의 우리는 이 자리에서 오고간 이야기들을 대부분 알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던 만큼 이 자리에서도 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는데 특히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이 자리에서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와 미군정 정치고문 제이콥스는 이승만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드레이퍼 : 이승만도 과도입법위원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제이콥스(Joseph E. Jacobs, 미군정 정치고문) : 아닙니다. 이승만은 어떠한 공식적인 직함도 없습니다. 이승만은 여전히 조선인들에게 자신이 미국 정치인들의 후원을 받고 있는 것 처럼 보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승만은 민족대표자대회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의 작은 집단에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가 그들을 방문해 회견을 할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웨드마이어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사기를 쳐 볼까 하다가 이 일로 체면만 구긴 셈입니다. 물론 이것이 문제의 근원은 아닙니다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입니다.

드레이퍼 : 이승만에게 과도입법위원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거나 또는 참여하지 말 것을 권유한 일은 있습니까?

하지 : 만약 이승만이 과도입법위원에 참여한다면 그의 권위는 크게 실추될 것 입니다. 이승만은 스스로를 조선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드레이퍼 : 알겠습니다. 이승만은 그런 사람인가 보군요. (이하 이승만의 미국인 로비스트 관련 내용은 생략)

(중략)

하지 : (앞부분 생략) 물론 공산주의자들이 남조선을 장악할 위험성이 꾸준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 위험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조선 우익집단들이 벌이는 짓은 우리가 이곳에서 조선인들의 지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인들의 저항을 받으며 동시에 러시아인들을 상대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승만을 추종하는 집단은 지난해 12월 이승만이 출국했을 때 남조선에서 봉기를 일으켜 이승만을 정부 수반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이러한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조선을 떠날 생각이었지만 김구는 이승만의 계획에 따라 우익의 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하려 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미국인을 죽이는 것을 포함해 무슨 짓이든지 할 생각이었습니다. 심지어 우익들은 미국인을 몇 명 살해해 미국 본토에서 미군정이 인기가 없으며 실패했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고 이를 통해 주한미군을 철군시키도록 하려는 생각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은 여전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승만의 추종세력은 때가 적당하다는 판단만 있으면 언제든 그런 짓을 하려 들 것입니다. 저는 우익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그들만의 단독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익들이 원하는 것은 독재정권입니다.

드레이퍼 : 물론, 주한미군이 철수하게 된다면 이승만도 오래 버티지는 못 할 것 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지 : 이승만은 단 15분도 버티지 못 할 것입니다. 이승만도 그 사실은 알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점점 (정권을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승만의 아내는 이승만에게 이 점을 계속해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승만의 아내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고약한 여자입니다. 우리는 이승만의 아내가 소련놈들로 부터 돈을 받아먹는건 아닌가 의심할 정도입니다. 이승만의 집단은 정권을 잡기 위해 필사적입니다. 이승만은 워싱턴을 방문했을때 국무부의 힐드링(John R. Hilldring, 국무부 민정담당 차관보)을 만난 것을 통해 정치적 성공을 거두고 귀국할 체면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미국인 로비스트들은 이승만이 전쟁부장관과 만날 수 있도록 하려고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승만은 이 모임에 참석했지만 우리가 이 소식을 전했을 때 전쟁부 장관께서는 너무 바빠서 이승만에게 내 줄 시간이 없었습니다. 국무부는 이승만이 조선으로 귀국할 때 군용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드레이퍼 : 먼슨(Munson) 대령이 이 항공편이 준비된 것을 알고 그것을 취소했지요.

하지 : 이승만은 중국을 방문할 허가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장개석은 여전히 임시정부의 늙은이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웨드마이어는 중국을 방문하고 있을 무렵 장개석이 김구 일당에게 미국돈 2십만 달러를 제공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 20만 달러는 장개석이 2년 전에 김구에게 제공한 것 입니다. 제가 이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 이유는 이승만이 이 돈에 손을 대려 했었기 때문입니다. 이 돈은 김구에게 주어진 것이었지만 이승만 일파는 김구의 돈을 먹으려 했습니다.

드레이퍼 : 하지 장군, 이승만과 김구는 잘 협력하지 않았습니까?

하지 : (두 사람의 협력 문제는) 그들이 무엇을 하려느냐에 좌우됩니다. 현재 이승만과 김구는 결별한 상태입니다. 작년 겨울 이승만이 출국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그들은 한 패였습니다. 우리는 이승만과 김구가 과거 중국의 군벌들이 하던 식으로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는 자료를 잔뜩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이승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승만이 중국을 방문할 허가를 얻었을 때 저는 이승만에게 선박편으로 갈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 무렵 조선을 오가는 항공편은 모두 미육군의 항공기였기 때문에 만약 이승만이 항공편으로 가게 된다면 조선인들은 그것이 미육군이 제공한 항공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됐다면 이승만은 "미국 정부는 내가 미국을 떠날 때 비행기를 마련해 주었소. 국무부와 전쟁부가 나에게 이 비행기를 마련해 준 것이오"라고 떠들었을 것 입니다. 조선인들은 이승만이 무슨 비행기를 타고 오건, 그게 L-5건 C-54건 상관없이 그것을 이승만의 전용기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이승만도 조선인들에게 그렇게 이야기 했을 것이며 사람들은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는 이승만이 미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습니다. 어쨌든 이승만은 국무부의 도움으로 비행기를 얻어 중국을 방문했고 장개석은 이승만에게 전용기를 내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지나친 대접이었으며 이승만은 장개석으로 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귀국해 조선인들에게 저를 당장 쫒아내겠다고 떠들었습니다. (이승만은) 내가 당장 떠나야 한다, 남조선에 지금 당장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힐드링 장군이 단독정부 수립을 약속했다, 나를 제외한 미국 정부의 모든 사람들이 단독정부 수립을 약속했다고 떠들어 댔습니다. 이승만이 미국 방문중에 저를 지독하게 공격했기 때문에 저는 2월에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고위층에 계신 분들에게 제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변론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절대 농담이 아닙니다. 몇몇 국회의원들과 제가 접촉한 많은 인사들, 그리고 언론은 제가 공산주의자는 아니더라도 친공적인 인물이라고 보고 있었고 저는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소문을 재빨리 잠재웠지만 뉴욕을 방문했을 때 이승만도 뉴욕을 방문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뉴욕의 헨리 루스(Henry Luce)는 이승만의 패거리들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지원을 계속하고 있으며 록펠러 빌딩의 사무실 한 칸, 그리고 다른 사무실 한 곳과 행정적인 지원을 공짜로 제공했습니다. 이승만의 패거리들은 자신들을 공산주의자들의 적이라고 광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적이긴 합니다만 조선문제에 있어서는 미국의 적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있었던 일 입니다. 우리는 매년 우리를 방해하는 이 자들과 일을 함께 하기 위해 고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제가 이 문제를 차관님께 말씀드리는 이유는 조선의 우익들이 싫어하지 않을 만한 인물을 이곳으로 보내는 것이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야 그 놈들에게 쫒겨난다는게 불쾌하겠지만 한 번쯤은 고려해 봐야 할 것 입니다.

'Orientation for Undersecretary of the Army Draper and Party, by Lt. Gen Hodge at 0900 23 September 1947', RG 338, Records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 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11070, Box 103, AG File, 340.

이승만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많이 나타나지만 꽤 흥미로운 평가입니다. 특히 이승만의 권력욕에 대해서는 꽤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것은 프란체스카에 대한 평가인데 이승만 대통령 당시 비서실에 계시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프란체스카 여사의 정치 개입문제도 다시 한번 검토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 뒷부분은 나중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08년 12월 6일 토요일

회해전역 패배에 대한 장개석의 반응

장경국이 쓴 장개석에 대한 책을 읽고 있는데 회해전역이 종결될 무렵 장개석의 반응을 서술한 부분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회해전역은 국민당 직계 군이 대규모로 괴멸되어 남경이 직접적으로 위협받게 된 계기를 만든 중요한 전역인데 장개석이 그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는 꽤 궁금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장경국의 주장에 따르면 의외로 담담했던 모양이더군요. 과연 실제로 그랬을지는 조금 의심이 가기도 합니다.

해당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구청천(邱淸泉) 사령관이 오늘(1월 9일) 전쟁터에서 전사 했다. 지난해 11월 22일 황백도(黃伯鞱) 장군이 서방회전에서 전사한 이래로 우리 군의 전세는 점점 불리해지고 있다. 두율명(杜聿明) 부대 역시 근일 정세가 몹시 위급한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 군이 서주에 저장해 두었던 화학포탄을 미리 폐기하지 못한 관계로 공산군이 이것을 이용하여 우리 진지를 파괴하고 많은 장병들을 참살시켰으니 더욱 통분할 일이다. 영성(永城)과 숙현(宿縣) 사이의 청룡집(靑龍集)과 진관장(陳官莊) 지구의 두율명 부대는 이미 반격할 수 없는 곤경에 빠져 버렸다. 아버지는 두(杜), 구(邱) 사령관의 전보를 받고는 전국이 절망 상태임을 판단하고 그들을 데려올 비행기를 보냈다.
두율명 부대가 격파를 당한 뒤 아버지는 일기에 그때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두율명 부대가 오늘 아침 태반이 공산군에게 격멸된 모양이다. 보고에 따르면 그래도 3만 명이 진관장 서남에서 포위망을 뚫고 있다는데 무사히 탈출했는지 말할 수 없이 불안하기만 하다. 내가 여태 남들의 강압 때문에 인퇴를 할 수 없다고 버텨 온 것도 실은 이 두율명 부대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는데, 내 책임을 다 할 수 없게 되었다. ‘부끄러울 것도 창피할 것도 없어야 하고 근심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야 한다’는 교훈을 생각하면, 한편 마음이 태연해 지기도 한다.

蔣經國 著/金學主 譯, 『풍운 80년의 나의 아버지 蔣介石』, 澈文出版社, 1976, 183~184

주력군이 붕괴되어 남경이 직접적으로 위협받게 되었는데 마음이 태연해 진다니(;;;) 확실히 장 총통 각하도 대인배는 대인배인 모양입니다. 장경국이 인용한 일기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장개석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궁금해지더군요.


※ 회해전역 당시 국민당군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짧은 글을 두 편 썼습니다.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에 대한 약간의 잡설

회해전역 당시 국민당군의 전투서열

2008년 10월 25일 토요일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김일성의 증언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아래의 글과 관련해서 내용 보충을 하지요.

우선 진명행님이 토론중에 하신 주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진명행님께서는 이종석이『세기와 더불어』에 수록된 북한의 중국 지원관련 내용을 아무 근거 없이 김일성의 허풍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관련 내용을 살펴보시겠습니다. 북한식 표현 그대로 입력했습니다.

해방 후 나는 주보중을 몇 번 만났습니다. 두 번은 우리 나라에서 만났고 마지막 번은 베이징에서 만났습니다.

주보중이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온 것은 1946년 초봄이였습니다. 그를 남양에서 만나보았습니다. 그때 주보중은 동북민주련군 부총사령원 겸 길료군구 사령원으로 있으면서 국민당반동들과의 싸움을 하였습니다.
장개석이 반공을 하면서 국민당군대를 총동원하여 해방지구에 달려드는 바람에 중국대륙은 또다시 국내전쟁의 소용돌이속에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주보중은 동북지방의 형세가 매우 위험하다고 하면서 적아의 력량대비와 군사정치정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쫓겨간 다음 만주땅은 얼마 동안 정치적 공백지대로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어느 편이 장악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장개석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첨예한 싸움을 벌렸습니다. 국민당도 공산당도 만주를 중국전토장악을 위한 주요한 대결장으로 보았습니다.
국민당이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함선과 비행기로 그리고 륙로로 수십만의 군대를 들이미는 통에 갓 조직된 동북지구의 민주련군은 우세한 적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주보중이 나를 만나려고 한 것은 이런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긴급지원을 요청하려는데 있었습니다. 모택동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한때 조직부장을 하다가 중공중앙 동북국의 부서기로 임명된 진운을 평양에 보내여 우리의 지원을 청한 것도 그 무렵 이였습니다.
나는 주보중에게 중국의 전우들이 장차 동북에서 진행하게 될 작전과 관련하여 제기하는 문제들을 죄다 해결해주고 최대한의 지원을 줄데 대해 쾌히 약속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우리나라의 형편은 남을 도와줄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조건 같은 것은 아예 념두에도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 혁명의 견지에서 볼 때에도 동북땅이 장개석의 세상으로 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그 당시 동북땅에서는 항일유격대출신의 우수한 군정간부들인 강건, 박락권, 최광을 비롯하여 약 25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청년들이 동북해방전투에 직접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동지회고록 – 세기와 더불어 8』, 조선로동당출판사, 1998, 261~262쪽

이 뒤에는 왕일지가 북한을 방문해 부상병의 피난과 전략물자의 소개 문제 등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물론 신발을 보내줬다는 내용도 있지요.

진명행님은 이종석이 아무 근거도 없이 김일성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인용한 부분에 나와 있듯 1946년에 이미 25만에 달하는 조선계가 국공내전에서 싸우고 있다는 김일성의 주장은 오히려 신뢰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만약 김일성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진명행님이 주장하신 것 처럼 1947년부터 1948년까지 10만의 북한군이 참전했을 경우 국공내전에서 싸운 조선계 군인은 총 35만 명에 달하게 됩니다.

※ 참고로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계 군인의 규모에 대한 학계의 통설은 63,000명 수준입니다.

이런 황당한 결론이 나오니 『세기와 더불어』를 읽은 사람이라면 여기에 실린 내용을 신뢰하기 어려운 것 입니다.

다음으로, 역시 북한이 국공내전에 병력을 파견했다는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북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 대표들과 한 담화」(1947년 9월 3일)의 내용을 보시겠습니다.

지금 중국의 정치정세는 좋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령도 밑에 중국인민해방군과 중국인민은 장개석 국민당군대와 반혁명세력의 책동을 분쇄하는 투쟁에서 성과를 확대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인민들의 혁명투쟁이 조만간에 승리하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해방 후 수차에 걸쳐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하였으며 무기를 비롯하여 필요한 전략물자도 보내주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방조하기 위하여 헌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기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에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낼 것 입니다.

「북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 대표들과 한 담화」(1947년 9월 3일) , 261쪽, 『김일성전집 6』, 조선로동당출판사, 1993

보시면 아시겠지만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한 구체적인 시기도 모호하고 몇 명이나 보냈는지도 모호합니다. 그리고 이게 전투병력을 보낸 것인지 아니면 지원이라는 표현 그대로 의료인력 등 전투지원을 위한 인력을 보냈는지도 모호합니다. 이런 몇 줄의 문장으로 수 만명 규모의 전투병력이 파병됐다는 ISNK의 정보를 뒷받침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제 다시 진명행님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진명행님께서는 이종석이 아무 근거 없이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김일성의 증언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진명행님께서는 어떤 점에 근거하여 김일성의 증언을 신뢰하십니까?

2008년 9월 19일 금요일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에 대한 약간의 잡설

그냥 잡담입니다. ^^

첫 번째 잡설. 국민당군의 장개석 직할 사단의 무장 상태에 대한 것 입니다. 원래 sonnet님의 글, “회해전투 당시 사단 무장”을 읽은 뒤 관련 자료를 찾아서 트랙백 해야 겠다 하다가 건망증으로 잊어 버리고 이제서야 올리게 되는 군요.

1947년 중순 3각 편제로 편성된 일반적인 “장개석 직할 사단”의 무장 상태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비교 대상으로 비슷한 시기 인민해방군의 군단급 부대인 종대(纵队)의 장비현황도 같이 올려 봅니다.


이 표에서 재미있는 것은 전체적으로 인민해방군의 한 등급 높은 부대 조차 장비와 화력에서 국민당군 사단에 비해 열세인 것은 사실인데 50mm박격포와 경기관총에서는 격차가 그나마 적다는 점 입니다. 국민당군에 비해서 중화기는 부족하지만 경장비는 그럭저럭 충실한 수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국민당군 보다 장비가 열세인 것은 어쩔 수 없지요. 인민해방군은 차량 같은 경우는 아예 보유하고 있질 못 합니다.

두 번째 잡설. 회해전역(淮海战役) 당시 국민당군의 전투서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회해전역 당시 국민당군의 사단급 전투서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2병단 : 사령 구청천(邱淸泉)
-제5군 : 45사, 46사, 200사
-제70군 : 32사, 96사, 139사
-제74군 : 51사, 57사, 58사
-제12군 : 112사, 238사
-제72군 : 34사, 233사, 122사
-제116군 : 287사, 288사
기병 제1여
독립여

제6병단 : 사령 이연년(李延年)
-제99군 : 92사, 99사, 268사
-제39군 : 103사, 147사
-제54군 : 8사, 198사, 291사
-제96군 : 141사, 212사

제7병단 : 사령 황백도(黃百韜)
-제25군 : 40사, 108사, 148사
-제63군 : 152사, 186사
-제64군 : 156사, 159사
-제100군: 44사, 63사
-제44군 : 150사, 162사

제13병단 : 사령 이미(李彌)
-제8군 : 42사, 107사, 237사
-제9군 : 3사, 166사, 253사
-제115군 : 39사, 180사
-제64군 : 156사, 159사

제16병단 : 사령 손원량(孫元良)
-제41군 : 122사, 124사
-제47군 : 125사, 127사

제12병단 :사령 황유(黃維)
-제10군 : 18사, 75사, 114사
-제14군 : 10사, 85사, 83사
-제18군 : 11사, 49사, 118사
-제85군 : 23사, 110사, 216사

제4수정구(绥靖区) : 사령 류여명(劉汝明)
-제55군 : 29사, 74사, 181사
-제68군 : 81사, 119사, 143사

제3수정구 : 사령 풍치안(馮治安)
-제59군 : 38사, 180사
-제77군 : 37사, 132사

독립 제107군 : 260사, 261사
독립 제20군 : 133사, 134사

이상의 전투서열은 중국 국민당군의 구조에 대해 꽤 재미있는 점을 보여줍니다. 장개석 직계부대와 군벌 계통 부대가 뒤섞여 있는 잡탕이란 점이죠.
회해전역에 투입된 국민당 군의 총 77개 사단 중 장개석 직계, 즉 중앙군 직계 사단은 46개 사단입니다. 원래 동북군계에서 장개석 쪽으로 넘어온 112사와 광동계에서 넘어온 152사를 중앙군 계열로 분류하면 48개 사단이군요. 여기에 기병 1여가 중앙군 직계이니 장개석 직계의 부대는 총 48개 사단과 1개 여단이 됩니다. 나머지 32개 사단은 국민당이 아니라 다른 군벌 소속 부대로 장개석 쪽에 붙은 사단이 되겠습니다.
다시 각 병단 별로 중앙군 직계 사단의 비율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2병단 : 총 16개 사단, 2개 여단 / 중앙군 직계 13개 사단, 1개 여단
제6병단 : 총 10개 사단 / 중앙군 직계 9개 사단
제7병단 : 총 11개 사단 / 중앙군 직계 5개 사단
제13병단 : 총 10개 사단 / 중앙군 직계 7개 사단
제16병단 : 총 4개 사단
제12병단 : 총 12개 사단 / 중앙군 직계 11개 사단
제4수정구 : 총 6개 사단
제3수정구 : 총 4개 사단
독립 제107군 : 총 2개 사단 사단 / 중앙군 직계 2개 사단
독립 제20군 : 총 2개

중앙군 직할 사단의 숫자로 보면 구청천의 제2병단과 황유의 제12병단이 실질적인 주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7병단은 중앙군에 광동계(粤)와 사천계(川) 사단이 뒤섞여 있었고 16병단은 4개 사단 전체가 사천계, 그리고 제3수정구와 제4수정구는 모두 서북계, 독립 제20군은 모두 사천계 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장개석의 북벌 자체도 국민당 직계에 잡다한 군벌 부대를 긁어모아 완성한 것이었고 이런 난감한 구조는 중일전쟁을 거치면서도 결코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제롬 첸(陳志讓)이 재미있게 지적한 것 처럼 중국의 상황은 일본의 전국시대와 비슷했는데 장개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니었던 것 이죠.

다시 회해전역 이야기로 돌아가면, 인민해방군의 제 1단계 공격으로 괴멸당한 황백도의 제7병단은 서북군벌인 풍치안의 제3수정구가 반란을 일으켜 인민해방군에 가담하면서 퇴로가 차단되어 포위됩니다. 제3수정구의 반란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 입니다. 상대적으로 기동성에서 우위에 있었던 제7병단은 어이없게 퇴로가 차단되면서 도보로 추격해온 인민해방군에게 따라잡히게 됩니다. 만약 제3수구의 반란이 없었다면 제7병단은 예정대로 철수를 마쳤을 수도 있을 것 입니다. 이렇게 해서 퇴로가 차단된 제7병단은 서주방면으로 돌파하려 노력합니다만 서주에서 증원 나온 제2병단과 제13병단의 지원공격도 반란을 일으킨 제3수구에 인민해방군 산동병단 소속의 3개 종대가 증원되면서 막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제7병단은 그대로 전멸해 버리고 맙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군벌부대가 다수 섞여 있어 전투력이 떨어졌던 것이 제7병단이 돌파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이 점은 나중에 더 공부를 해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인민해방군의 회해전역 2단계 작전에서 국민당군의 정예부대인 황유의 제12병단이 섬멸된 문제입니다. 1948년 11월 24일, 장개석은 숙현(宿懸)을 탈환해 진포철도를 개통한 뒤 주력부대를 회남으로 철수시켜 방어에 임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데 원래 숙현지역을 방어하던 것은 제4수정구 였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제4수정구도 제3수정구와 같은 서북계 부대였습니다. 제4수정구는 11월 15일 인민해방군 주력의 1단계 공격에 그대로 밀려나면서 숙현을 넘겨줬습니다. 인민해방군은 숙현 탈환을 위해 북상하는 황유 병단을 유인해서 섬멸할 계획을 짰는데 숙현이 제대로 방어됐더라면 이런 덫이 놓이진 않았겠지요. 황유의 제12병단이 예정대로 숙현 탈환을 위해 공격을 개시하자 인민해방군은 유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철수했고 이를 추격한 황유 병단은 그대로 포위되어 섬멸됩니다.

그리고 회해전역에서 가장 결정적인 패배는 두율명이 지휘하는 제 2, 제 13병단이 포위되어 섬멸된 것이었습니다. 두율명 집단이 포위된 것은 황유 병단을 구원하기 위해 남하하다가 인민해방군에게 포착되었기 때문이니 결국은 제3, 제4수정구가 문제였던 셈 입니다. 서북군벌계의 이 두 수정구는 장개석의 이탈리아군(?)이 된 셈 입니다.

국공내전시기의 다른 전역에 대해서도 장개석의 중앙군과 군벌계 사단의 전투 양상을 분석해 보면 아주 재미있을 듯 싶습니다.

참고문헌
中国人民革命军博物馆 编,『中国人民解放军战史图集』,中国地图出版社, 1990
曹剑浪,『国民党军简史』下, 解放军出版社,2004
国防大学 “战史简编” 编写组,『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 解放军出版社,1983/2003
국방군사연구소, 『중공군의 전략전술 변천사』, 1996
陳志讓, 박준수 옮김, 『軍紳政權 : 근대중국 군벌의 실상』, 고려원, 1993

2007년 6월 15일 금요일

중국공군항전사 - 唐學鋒


혜화동 로터리 근처에 있는 화문서적에 갔다가 중국어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의도로 구매한 책 입니다. 가격은 22위안인데 4,500원에 샀습니다. 이 책은 중일전쟁 발발부터 2차대전 종전까지 국민당 공군의 작전과 편제 변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책 입니다. 관심은 있으되 아는게 없는 분야고 가격도 5,000원이 안되는지라 바로 질렀는데 조금 훑어보니 심각한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가장 먼저... 각주와 참고문헌 목록이 없습니다! 맙소사. 명색이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책인데 이럴수가! 경악했습니다. 사회주의권의 책들이 이런 경향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동독의 군사사가인 그뢸러(Olaf Groehler)도 자신의 저작에 각주를 달지 않았지요. 물론 이 사람은 참고문헌 목록까지 빼 먹진 않았습니다만.... 이 당학봉이란 양반은 더 대인배로군요.

다음으로는 제본 상태가 불안합니다. 이거 몇년이나 더 갈런지... 물론 중국책이 러시아 책 보다는 더 잘만들긴 하는데 아직 평균적으로는 한국 만큼 잘 만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책에 쓰는 종이도 질이 약간 낮은 것 같고...

이것을 제외하면 개설서로서 상당히 만족스럽습니다. 중국공군(국민당공군)의 주요 작전을 잘 다루고 있으며 일본측 자료도 많이 참고한 듯 일본측에 대한 서술도 충실해 보입니다. 여기에 중국 전선에서 작전한 미육군항공대에 대해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어서 대략 훑어본 느낌으로는 개설서로서 상당히 충실해 보입니다. 여기에 중국의 초기 공군발전과정에 대해서도 앞 부분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는 점도 좋은 점 입니다. 전체적인 인상은 von Hardesty의 Red Phoenix에 비교할 만한 저작 같습니다. 각주와 참고문헌이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만 뺀다면 말이죠.

2007년 3월 8일 목요일

대인배의 꿈을 키웁시다

아래의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일화이지요.

(전략) 그러나 7월 2일에 시작된 협상은 거의 시작하자 마자 난항에 부딛혔다. 스탈린이 소련의 국가안보에 있어서 외몽골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15년 혹은 20년 내에 일본이 다시 국력을 회복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련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므로 외몽골을 소련의 영향력 안에 둬야 한다는 것 이었다. 스탈린은 송자문(宋子文)에게 말을 계속했다.

“만약 우리가 일본과 전쟁을 시작한다면 인민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막 4년에 걸친 전쟁을 끝냈는데 왜 또 전쟁을 시작하냐고 할 것 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는데 왜 소련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냐고 하겠지요. 그러니 우리 인민들에게 전쟁을 벌이는 이유가 소련의 안보를 더 굳건히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 말고 더 좋은 구실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송자문은 외몽골 문제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외몽골은 중국의 고유한 영토이기 때문에 외몽골을 독립시키는 것은 중국의 자존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 이라는 것 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스탈린이 국민당 정부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자 만약 소련이 만주에서도 국민당의 우위를 보장하고 여기에 덧붙여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도 중단할 경우 외몽골을 소련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7월 9일, 송자문은 이에 따라 스탈린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송자문은 중국이 외몽골을 포기하는 대가로 소련이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경우 국민당 정부는 소련에게 뤼순과 다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또 만주 철도는 중국이 소유권을 가지되 운영은 중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하자는 제안을 내 놓았다. 스탈린은 이 제안을 받자 즉시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만주 문제에 있어서는 이견이 있었다. 스탈린은 뤼순은 소련이 소유권을 가져야 하며 또 만주 철도 역시 소련이 소유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었다. 왜냐하면 “만주 철도를 건설한 것은 러시아 였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빨리 국민당 정부와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뤼순과 만주 철도 문제에 있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7월 11일 회담에서 스탈린은 “내가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에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했으나 결국 양측의 이견을 좁히지는 못했다. 7월 12일 회담에서도 양측은 평행선을 달렸고 결국 스탈린이 먼저 포기했다. 협상은 일시 중단됐으며 스탈린은 중국측과 포츠담 회담 이후 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스탈린이 겪게 될 여러 문제 중 하나에 불과했다.

Tsuyoshi Hasegawa, Racing the enemy : Stalin, Truman, and surrender of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129

한때는 우리의 마오 주석도 대인배들의 거스름 돈 이었다고 합니다. 자. 우리도 대인배의 꿈을 키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