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9일 토요일

국민당군의 융통성있는 병력운용(?)

레이 황의 『장제스 일기를 읽다』는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 장교로 참전했던 저자의 경험담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민당군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이 많아서 꽤 재미있는데 그 중에서 중일전쟁 중 일선 부대의 병력 운용(?)에 대한 내용이 하나 있어서 인용을 해 봅니다.

중국은 운 좋게도 전쟁이 발발하기 얼마 전에 은의 국유화를 선포했다. 귀금속을 대거 지폐로 대체함으로써 전쟁 초기에는 인플레이션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41년에 이르러 물가는 처음으로 전쟁 발발 이전의 열 배를 돌파했다. 그 이후 물가의 상승이 빨라졌고, 그 파괴적인 효과가 모두의 일상생활을 위협했다. 1941년에 소위인 나의 월급은 42위안이었다. 식비는 정부가 지급했으나 의복과 신발은 내가 부담했다. 마을의 식당에서 국수 한 그릇이 3위안이었으므로, 월급을 아예 받지 않는 것보다 약간 나았을 따름이다.

이 당시 각 중대의 중대장에게는 두 명의 가짜 이름을 명부에 끼워 넣는 것이 용인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두 명의 급료와 수당을 챙길 수 있었다. 대대장과 연대장에게 용인된 숫자는 더 많았는데, 모두가 사단장의 묵인을 얻었다. 사단이 어떻게 운영되는가에 대한 뚜렷한 규칙은 존재하지 않았다. 총사령관 장제스는 1941년 최고위 장군들에게 돌린 한 통의 비밀 서한에서 몇몇 사단들이 명부상의 병력을 각각 3천명씩 부풀렸음을 지적했다. 그들은 전투의 사상자를 보고할 때 자신들을 구제할 기회를 잡았다. 한 사단이 5천에서 6천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과거에 이루어진 허위 보고의 증거를 모두 지우고 기록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걸 의미했다.

레이 황/구범진 옮김, 『장제스 일기를 읽다』(푸른역사, 2009),  234~235쪽

레이 황은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 중앙군 소속인 14사에 배속되었는데 중앙의 직계군이 이 정도로 엉망으로 운영되었다는 것이 다소 놀라울 정도입니다. 마치 르네상스 시기 용병단에서 급료를 올리기 위해 병력 규모를 허위로 부풀린 것과 비슷하지요. 이 상태로 전쟁을 1945년까지 지속했다는게 놀라울 지경입니다.

댓글 10개:

  1.  사단마다 수천명의 '유령군인'이 있었다고 가정하면 국민당군 전체에서는...(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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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준님11:49 오후

    1.  그래도 이책은 장제스 일기(?)라는 본연의 주제에서 많이 벗어나서 2차 대전 당시의 중국의 입장이나 장제스 개인의 고민을 충실하게 구성했지요. 실지로 절반 이상은 2차 대전 전후 이야기와 나름 변명, 처칠이나 스틸웰에 대한 안 좋은 감정등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2. 뭐 "사람"가지고 장난하는게 중국이라면 "함선"가지고 장난하는 게 일본이었죠. 대본영 발표에서 자신의 피해를 축소한후에 "다른 해전의 결과가 나오면 그때 격침된 걸로 처리"하는거나 국민당의 계산방식이나 다를 건 없지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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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공정한 서술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장개석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의 글로는 꽤 읽을만 한 것 같습니다. 너무 막나가지도 않고.

      2. 일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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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niMishel1:48 오후

    저런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당나라군대라는 속어의 기원이 국민'당'군대라는 설이 무척 설득력 있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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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권성욱12:45 오후

    저자인 레이황이 있었던 제14사단은 이른바 총통 직속의 8개 "독일식사단"중 하나로 340개 중국군 사단중 최강 부대중의 하나이죠. 중국군의 군기이완은 그 당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중국군은 근대화된 징병제도가 없었고 통합된 "국군"이 아니라 독재군벌에 의해 지휘되는 소수의 중앙군과 다수의 지방군, 민병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죠. 무엇보다 장개석의 통일후 재정을 안정시키고 내부를 공고화화기전에 전면전이 발발했습니다. 당시 국민정부의 재정상황은 30년대초 중원대전, 만주사변, 열하사변, 공산토벌, 복건반란, 양광대전 등 노구교사변 직전까지도 지속적인 전시상태였습니다. 한국전쟁직전의 이승만정권보다도 더 열악하고 불리한 상황이었죠. 그럼에도 북경정권이 진 부채 대부분을 갚고 중앙은행을 설립하여 법폐를 상당히 안정시켰습니다. 37년 중국의 국채 가격은 일본보다도 더 높았습니다. 그러나 전쟁 발발후 일본은 중국을 봉쇄했고 3년이 경과하자 재정은 파탄이 되고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니 어떻게 하더라도 방법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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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권성욱12:50 오후

    저 내용만 보면 "중국군은 왜 저리 무능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국전 당시 신생 한국군이 유능한 장교부족과 작전경험 부족으로 졸전을 했듯 당시 중국이 처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저정도라도 버틴 것도 기적, 라는 생각도 듭니다. 오히려 "당나라군대"라고 비판받을만한 군대는 중국군이 아니라 일본군이죠. 군기이완, 하극상과 탈영, 범죄의 증가로 당나라군대의 극치를 보인 것이 바로 중국군을 비웃던 일본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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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권성욱12:53 오후

    <span>개인적으로 중일전쟁에 관심이 있어서 글을 남겨봅니다.^^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요즘 블로그에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 대해 글을 쓰고 있고 어린양님의 자료도 종종 인용하고 있습니다.(대신 출처는 꼭 표기하고 있음^^. 시간되시면 방문하셔서 좋은 의견도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atena02)</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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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블로그에 인사를 드리려 했는데 로그인을 해야만 글을 쓸수가 있군요. 제가 네이버 이용을 가급적 피하는지라. 제 개인적으로는 1941년 까지의 중일전쟁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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