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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9일 토요일

국민당군의 융통성있는 병력운용(?)

레이 황의 『장제스 일기를 읽다』는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 장교로 참전했던 저자의 경험담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민당군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이 많아서 꽤 재미있는데 그 중에서 중일전쟁 중 일선 부대의 병력 운용(?)에 대한 내용이 하나 있어서 인용을 해 봅니다.

중국은 운 좋게도 전쟁이 발발하기 얼마 전에 은의 국유화를 선포했다. 귀금속을 대거 지폐로 대체함으로써 전쟁 초기에는 인플레이션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41년에 이르러 물가는 처음으로 전쟁 발발 이전의 열 배를 돌파했다. 그 이후 물가의 상승이 빨라졌고, 그 파괴적인 효과가 모두의 일상생활을 위협했다. 1941년에 소위인 나의 월급은 42위안이었다. 식비는 정부가 지급했으나 의복과 신발은 내가 부담했다. 마을의 식당에서 국수 한 그릇이 3위안이었으므로, 월급을 아예 받지 않는 것보다 약간 나았을 따름이다.

이 당시 각 중대의 중대장에게는 두 명의 가짜 이름을 명부에 끼워 넣는 것이 용인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두 명의 급료와 수당을 챙길 수 있었다. 대대장과 연대장에게 용인된 숫자는 더 많았는데, 모두가 사단장의 묵인을 얻었다. 사단이 어떻게 운영되는가에 대한 뚜렷한 규칙은 존재하지 않았다. 총사령관 장제스는 1941년 최고위 장군들에게 돌린 한 통의 비밀 서한에서 몇몇 사단들이 명부상의 병력을 각각 3천명씩 부풀렸음을 지적했다. 그들은 전투의 사상자를 보고할 때 자신들을 구제할 기회를 잡았다. 한 사단이 5천에서 6천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과거에 이루어진 허위 보고의 증거를 모두 지우고 기록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걸 의미했다.

레이 황/구범진 옮김, 『장제스 일기를 읽다』(푸른역사, 2009),  234~235쪽

레이 황은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 중앙군 소속인 14사에 배속되었는데 중앙의 직계군이 이 정도로 엉망으로 운영되었다는 것이 다소 놀라울 정도입니다. 마치 르네상스 시기 용병단에서 급료를 올리기 위해 병력 규모를 허위로 부풀린 것과 비슷하지요. 이 상태로 전쟁을 1945년까지 지속했다는게 놀라울 지경입니다.

2011년 4월 16일 토요일

난징의 클레릭

아무래도 중일전쟁은 1937년에 끝났던 모양입니다.


클레릭의 쌍권총이 일본군을 상대로 불을 뿜겠군요.

2011년 1월 11일 화요일

抗日奇侠

중일전쟁에 대해 검색하던 중 왠지 재미있어 보이는 동영상이 하나 걸렸습니다;;;;;

대충 보아하니 무공으로 일본군을 파리잡듯 때려잡는 이야기인데 깔깔대며 보기에 좋을 듯 싶습니다.

2010년 12월 5일 일요일

중일전쟁 직전 국민당 중앙군 직계 보병사단의 편제

제가 이것 저것 늘어놓고 질질끄는 성향이 있다 보니 공수표만 남발하고 아직 못쓴 글이 꽤 많습니다;;;; 그 중에 독일 군사고문단이 훈련시킨 국민당군의 독일식 사단에 대한 글이 하나 있는데 기분 내킬 때 몇 줄씩 쓰는 제 성향상 언제 다 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중일전쟁 직전 국민당 중앙군의 사단 편제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를 해 봤는데 오늘은 이거나 올려볼까 합니다.

※이 글의 내용은 모두 曹剑浪, 国民党军简史 上册(解放军出版社, 2009) 457쪽~496쪽을 정리한 것 입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국민당군과 여기에 속한 군벌군대는 전형적인 4각 편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은 일본군도 마찬가지인데 유럽의 군대가 1차대전을 거치면서 3각 편제로 전환한 것과 비교하면 편제의 개편이 지독하게 늦었다고 할 수 있지요. 중일전쟁 발발당시 국민당군은 4각 편제사단이 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3각 편제로 편성된 사단도 상당수 존재하는 상태였습니다.


1. 4각 편제로 구성된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
사실 국민당군의 4각 편제는 제대로 된 4각 편제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기본적인 편제는 각각 2개 보병연대로 편성된 2개 보병여단 이었지만 사단 직할대의 규모가 형편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냥 편제상의 편성만 보더라도 포병은 불과 대대급에 불과했으니 말입니다. 1차대전 초기 일반적인 4각 편제 보병사단은 2개 포병연대로 구성된 1개 포병여단을 가지고 있었으니 중국군의 포병전력이 얼마나 약했는지는 편제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1930년대 국민당군의 4각 편제 보병사단의 편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사단사령부
-참모처(參謀處)
-부관처(副官處)
-군계처(軍械處)
-군수처(軍需處)
-군법처(軍法處)

보병여단(2개)
-보병연대(3개 보병대대)
 >보병대대(3개 보병중대)
   =보병중대(3개 보병소대)
     -보병소대(3개 분대(班))
   =기관총중대(機槍連, 기관총 6정)
 >박격포중대(박격포 6문)
 >통신소대(通信排, 2개 분대)
 >수송소대(輸送排)
 >후송소대(擔架排, 3개 분대)

기병중대(4개 소대)
-기병소대(2개 분대)

포병대대(砲兵營, 3개 중대)
-포병중대(3개 소대)
 >포병소대(2개 분대)
-통신소대
-수송소대(3개 분대)
-탄약대(彈藥隊, 3개 분대)

공병대대(3개 중대)
-공병중대(3개 소대)
 >공병소대(3개 분대)
-수송소대(3개 분대)

특무대대(보병대대와 편성 동일)

병원(300 침상 규모)

통신대

정비대(修械所)
(中国军事史 编写组, 中国历代军事制度(解放军出版社, 2006), p.627 )

하지만 편제란 어디까지나 편제라서 중일전쟁 발발당시 국민당 중앙군 직계 사단 중에서 실제로 포병대대를 제대로 갖춘 사단은 15개 사단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사단은 포병중대 1개만 가졌거나 아예 포병이 편제에 없었지요;;;; 편제대로 1개 포병대대를 가져봐야 산포 16문 정도에 불과하니 완전 편제된 일본군 보병사단에게 상대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군에서 정예로 꼽혔던 독일식 사단도 산포 1개 대대만 달고 있었던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중일전쟁 발발 당시 국민당군 보병사단의 편제상 공용화기 및 중화기 보유량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경기관총 : 274정
중기관총 : 54정
경박격포(擲彈筒) : 243문
박격포 : 30문
산포/야포 : 16문

국민당군 직계사단 중 중일전쟁 발발당시 4각 편제로 편성되어 있던 사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 1, 공병대대 1, 보급대대(輜重營) 1, 기병중대 1, 특무중대1
3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의무대(衛生隊)1
4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위생대1
6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 1, 포병중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통신중대1, 위생대1
9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의무대1
10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2, 통신대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위생대1
11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중대1, 통신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위생대1
14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통신중대1
25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36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통신대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42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44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보충연대 1, 포병대대1
45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특무대대1, 보급중대1, 통신중대1
47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54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군병원 1
55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특무중대1
57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특무중대1
58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통신대대1, 공병중대1
67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중대1, 통신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의무대1
78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보급대대1, 기병주대1, 특무중대1
80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통신대대1, 포병중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83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87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88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89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대전차포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의무중대1, 군병원1
95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중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특무중대1
98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보급대대1, 통신중대1, 특무중대1
99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특무대대1,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2. 3각 편제로 구성된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
한편,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 중에도 3개 보병연대로 구성된 3각 편제사단이 상당수 존재했습니다.

5사 : 3개 보병연대,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의무대1
43사 : 3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보급대대1, 특무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49사 : 3개 보병연대, 보급대대1, 특무대대1, 포병중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51사 : 3개 보병연대, 통신중대1, 특무중대1, 위생대1
59사 : 3개 보병연대, 보급대대1, 특무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60사 : 3개 보병연대, 특무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보급대2, 의무대1, 전신반1
61사 : 3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보급대대1, 특무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92사 : 3개 보병연대, 특무대대1,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의무대1
93사 : 3개 보병연대, 특무대대1,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96사 : 3개 보병연대,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97사 : 3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특무대대1,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3. 특이한 편제를 가진 보병사단
특이한 편제를 갖춘 사단도 있었습니다.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인 2보병사단은 무려 6개 보병연대에 보충연대도 하나 가진 특이한 사단이었습니다. 물론 포병은 달랑 1개 대대로 머릿수만 많은 사단이었지만 말입니다;;;

2사 : 3개 여단 6개 보병연대, 보충연대1, 기병연대1, 포병대대 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의무대1

94사의 경우는 3각 편제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 별도로 2개 보병대대가 더 추가된 편제입니다.

94사 : 3개 보병연대 2개 보병대대, 특무대대1, 포병중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보급중대1


이 글에서는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만 이야기 했는데 사실 국민당 중앙군의 직계가 아닌 사단이나 군벌 사단도 이것 보다 나을 건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군벌군대까지 정리를 하면 한번 표로 정리해서 다시 올려보겠습니다.

잡담하나. 이 글을 쓸 때 참고한 曹剑浪의 国民党军简史는 원래 두권 짜리였는데 2009년에 개정판이 나오면서 세권으로 늘어났습니다. 처음 개정판을 샀을 때는 구판과 크게 다른 것이 없어 보여 김이 샜는데 다시 처음부터 읽어보니 꽤 괜찮은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상권의 앞부분에서 국민당군의 복잡한 계통을 보기 쉽게 표로 정리해 놓았는데 이게 정말 좋더군요. 구판에서는 그냥 간단히 중앙군과 군벌군대에 대한 설명만 있어서 좀 아쉬웠지요.

2010년 11월 20일 토요일

중국 전선의 패튼?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의 회고록에는 독일이 항복한 이후 패튼을 중국 전선으로 차출하려 한 이야기가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사실 광대한 중국 전선은 패튼 같은 인물에게는 꽤 잘 맞는 전장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독일이 6월(원문의 오류)에 무조건 항복을 한 뒤에는 일본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인력과 물자를 돌릴 수 있었으며 나는 마셜 장군으로부터 내가 패튼, 심슨(William Hood Simpson), 그리고 트러스콧(Lucian Truscott) 장군 등을 잘 통솔할 수 있다면 이들을 중국 전선에 파견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훌륭한 전투 경험을 갖춘 간부들을 보내주겠다는 제안을 즉시 받아들였다. 이런 능력을 갖춘 인물들은 중국 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이었다. 장 총통도 진심으로 찬성했다. 한편, 패튼 장군은 나보다 상급자였기 때문에 나는 마샬 장군에게 현재 직위를 그만 두고 전구 사령관을 패튼 장군에게 넘길 것과 어떤 역할이건 간에 그의 지휘 하에서 계속 복무하겠다고 했다. 마샬 장군은 내가 전구 사령관을 계속 맡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럴 경우 내가 4성 장군으로 진급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장 총통과 헐리(Patrick J. Hurley) 대사는 내가 4성 장군급의 직위를 이어 받았으며 유럽 전선에 있는 몇몇 대장 계급의 장군들보다 더 큰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대통령에게 나를 진급시켜줄 것을 요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는 두 사람에게 나는 매우 빨리 진급해 왔으며 다른 전구의 사령관들과 비교했을 때 근무 연한이나 경험 면에서 부족하며 현재의 계급으로도 중국군의 대장은 물론 원수들을 잘 상대해 왔다고 대답했다.

나는 잠정적으로 패튼에게 중국 북부를 담당하게 해서 베이징, 톈진, 그리고 친황다오(秦皇島) 등의 중요한 목표를 향해 동진하는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트러스콧은 중부를 맡아 양쯔강 계곡을 따라 상하이로 동진하는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이미 중국 남부를 잘 알고 있으며 지난 수개월간 능숙하고 공세적인 전투 지휘관으로써 뛰어난 자질을 보여준 매클루어(Robert A. McClure)는 남부를 맡아 광둥-주롱(九龍)-잔쟝(湛江, Fort Bayard) 등의 중요 목표를 향한 작전을 지휘하게 하려 했다. 나는 그 이전에 매클루어를 중장으로 진급 시켜야 한다고 건의한 바 있는데 이것은 그의 능력과 큰 임무에 걸맞는 직위였다. 심슨 중장은 전구 부사령관을 맡아 미군과 중국군 지상부대의 모든 작전을 총괄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인도에서 중국 전구로 차출된 유능한 항공 지휘관 스트레이트마이어 중장은 전구 부사령관이자 전구 연합군 공군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1945 년 8월로 넘어갔을 때 광둥을 점령하기 위한 카보네이도(CARBONADO) 계획은 초기 단계에 있었으며 실제로 광둥-주롱을 향한 진격 준비는 일정을 앞당겨 추진되고 있었다. 8월에 보다 공세적으로 동진을 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부상자를 치료하고 후송하고 보충병을 지속적으로 투입하기 위한 시설을 포함한 전방 군수 지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준비를 확실히 하고 싶었다. 즉, 나는 광둥을 향한 마지막 공세를 시작하면 공격 부대가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강력한 항공지원이나 탄약, 또는 보충병이 부족해서 돈좌되지 않기를 원했다.

Albert C. Wedemeyer, Wedemeyer Reports!(Henry Holts and Company, 1958) pp.331~332

그러나 중국 본토의 반격 작전이 아직 계획 단계이던 8월에 일본이 항복한데다 패튼도 사고를 당해 결국 패튼이 중국 본토에서 활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호사가라면 꽤 재미있는 가정을 할 수 있겠죠.

재미삼아 썰렁한 가정을 조금 해 보죠.

일단 패튼의 작전 구역이 중국 북부가 된다면 독일에 이어서 다시 한번 그가 혐오했던 소련군과 접촉하게 됐을 겁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습니다만 그렇게 됐다면 패튼과 소련측은 다시 한번 신경전을 벌였겠지요.

그리고 한가지 확실한 것은 중국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했다면 패튼이 그렇게 좋아했다던 셔먼이 전차 노릇을 아주 아주 잘 했을 겁니다. 태평양 전선의 셔먼 전차는 유럽 전선 처럼 얻어터지는 야라레메카 신세는 아니었으니 말이죠. 유럽 전선에서 셔먼의 굴욕을 지켜봐야 했던 패튼은 꽤나  흡족해 했겠죠.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중국측이 본 상하이 지구 항공전(1937년 8월 14일~17일)

10일 전에 쓴 "1930년대 미 육군 항공대의 폭격기 우월론에 대한 궁금증"이란 글에 배군님이 "전투기 무용론"이란 답글을 써 주셨습니다. 배군님의 글에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1936년 8월 14일에서 8월 17일에 걸쳐 벌어진 일본군과 중국군의 항공전인데 여기에 대해서 조금 써 보려 했으나 제가 요 며칠동안 약간 정신이 없다 보니 제때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조금 늦긴 했습니다만 이 공중전에 대한 중국측 시각에 대해 간단하게 써 보겠습니다.

먼저 중일전쟁 초기의 공중전이니 만큼 중일전쟁 직전 중화민국 공군의 편성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중일전쟁 직전 중화민국 공군은 급속히 증강되었습니다. 1936년 까지 중화민국 공군은 총 14개 비행중대(飛行中隊)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936년 8월에 광동공군의 9개 비행중대가 중앙군 예하로 들어와 다음과 같이 개편되었습니다.1)


광동공군 제1비행중대 → 중앙군 제16비행중대
광동공군 제2비행중대 → 중앙군 제17비행중대
광동공군 제3비행중대 → 중앙군 제18비행중대
광동공군 제4비행중대 → 중앙군 제19비행중대
광동공군 제5비행중대 → 중앙군 제20비행중대
광동공군 제6비행중대 → 중앙군 제28비행중대
광동공군 제7비행중대 → 중앙군 제29비행중대
광동공군 제8비행중대 → 중앙군 제30비행중대
광동공군 제9비행중대 → 중앙군 제31비행중대

그리고 10월에는 중앙군 예하에 7개 비행중대가 새로 편성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37년 7월에 중화민국 공군은 총 10개 비행대대(飛行大隊)와 6개 독립 비행중대로 편성되었고 구체적인 편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2)

항공위원회
 │
 └공군전적총지휘부(空軍前敵總指揮部)
   │
   └공군굉작기사령(空軍轟炸機司令)*
   │   └제1비행대대
   │     └제1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2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2비행대대
   │     └제9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11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14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8비행대대
   │     └제10비행중대(사보이아 S.72)
   │     └제19비행중대(He111A-0)
   │     └제30비행중대(마틴 138WC)
   │    
   └공군구축기사령(空軍驅逐機司令)**
   │  └제3비행대대
   │     └제7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8비행중대(브레다 Ba.27, 피아트 CR.32)
   │     └제17비행중대(P-26A)
   │  └제4비행대대
   │     └제21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22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23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Fw44)
   │  └ 제5비행대대
   │     └제24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25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28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 Fw44)
   │  └독립제29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공군정찰기사령(空軍偵察機司令)
   │  └제6비행대대
   │     └제3비행중대(더글라스 O-2MC)
   │     └제4비행중대(더글라스 O-2MC)
   │     └제5비행중대(더글라스 O-2MC)
   │     └제15비행중대(피아트 CR.32)
   │   └제7비행대대
   │      └제6비행중대(Vought V-92C)
   │      └제12비행중대(Vought V-92C)
   │      └제16비행중대(Vought V-92C)
   │   └독립제31비행중대(정찰기)
   │
   └제9비행대대(공격기)
   │  └제26비행중대(커티스 A-12 슈라이크)
   │  └제27비행중대(커티스 A-12 슈라이크)
   │
   └항주견교항교잠편대대(杭州筧橋航校暫編大隊)
   │   └제32비행중대
   │   └제34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
   │   └제35비행중대(Vought V-92C)
   │
   └제13독립비행중대
   └제18독립비행중대
   └제20독립비행중대
   └제33독립비행중대

*굉작기(轟炸機) 폭격기죠
**다들 잘 아시겠지만 구축기(驅逐機)는 전투기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상하이에 대한 상륙작전을 개시합니다. 중국 항공위원회는 8월 14일 오전 2시, 공군작전명령 제2호를 발령해 상해에 상륙하고 있는 일본군을 폭격하도록 했습니다. 이 작전에는 폭격기 부대인 제2비행대대와 전투기 부대인 제4, 제5비행대대, 그리고 공군전적총지휘부(空軍前敵總指揮部) 직할대인 항주견교항교잠편대대(杭州筧橋航校暫編大隊, 이하 잠편대대)가 투입됐습니다.

8월 14일 부터 8월 17일까지 전개된 항공전의 추이는 唐学锋저, 中国空军抗战史, 90~100쪽의 내용에 따라 서술하겠습니다.

8월 14일 오전 7시, 잠편대대 제35비행중대 소속의 보우트 V-92C 5대로 편성된 중국공군의 제1차 공격대가 젠차오(筧橋)비행장을 출격했습니다. 제1차 공격대는 손실 없이 임무를 마치고 귀환했습니다. 제2차 공격대는 제2비행대대 소속의 노스롭 감마 2E 21대로 편성되었으며 오전 8시 40분 제2비행대대 부대대장 쑨통강(孫桐崗)의 지휘하에 250kg 폭탄 14발과 50kg 폭탄 70발을 탑재하고 광더(廣德)비행장에서 출격했습니다. 2차 공격대는 두 제대로 나뉘어 첫 번째 제대는 휘산(山) 부두를 폭격하고 두 번째 제대는 우송(吳淞) 하구에 상륙하는 일본군 함선을 공격했습니다. 2차 공격대 또한 손실 없이 귀환했습니다. 3차 공격대는 제5비행대대의 호크III 8대로 편성되었으며 5대대장 딩지쉬(丁紀徐)가 직접 지휘하는 가운데 250kg 폭탄 1발씩을 탑재하고 오전 9시 20분 출격해 상해 인근의 일본 해군 함정을 공격했습니다.
중국공군은 오후부터 폭격을 재개했습니다. 제4차 공격대는 제5대대 제24중대의 호크III 3대로 편성되었으며 3차 공격대와 마찬가지로 각각 250kg 폭탄 1발을 탑재하고 오후 2시20분 출격했습니다. 4차 공격대는 일본군의 본격적인 반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4차 공격대가 목표 상공에 도달했을 때 일본군 전투기가 기습해와 부중대장이 격추되어 전사하는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제5차공격대는 제2대대의 폭격기로 편성되어 오후 2시 40분 출격했으며 상해의 일본해군 육전대사령부를 폭격했습니다. 제6차 공격대는 제35중대장의 지휘하에 오후 2시 40분에 출격해 궁다(公大) 방직공장을 폭격했습니다. 제7차 공격대는 제25중대의 호크III 3대로 편성되었으며 25중대장의 지휘하에 오후 2시 45분 출격해 일본군 사령부 등을 폭격했습니다. 오후 3시 40분에는 제2대대의 폭격기로 구성된 제8차 공격대가 출격했으며 오후 3시 50분에는 잠편대대 소속 제34중대의 호크 II와 호크III로 편성된 제9차 공격대가 출격해 50kg 폭탄 2발과 18kg 폭탄 11발을 투하하고 귀환했습니다.
한편, 이날 제공전투는 제4비행대대 소속의 전투기들이 담당했습니다. 오후 2시 50분, 제4비행대대는 공격해 오는 일본군 폭격기들을 습격해 21, 22, 23중대가 각각 1대씩, 총3대를 격추시켰습니다.

중국공군은 8월 15일에도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이날 중국공군은 모두 8차에 걸쳐 공격을 감행했는데 각 공격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습니다.

1차 공격대 : 제6대대 5중대, 3대
2차 공격대 : 제6대대 5중대, 5대
3차 공격대 : 제6대대, 대대장 단독출격
4차 공격대 : 제5대대, 14대
5차 공격대 : 제2대대 11중대, 17대
6차 공격대 : 제5대대, 6대
7차 공격대 : 제7대대 16중대, 6대
8차 공격대 : 제4대대, 8대

한편, 8월 15일 전투는 배군님의 글에 잘 서술되어 있듯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중국쪽 기록은 이날 전투에서 러이친(樂以琴)이 4대, 탄원(潭文)이 3대를 격추하는 등 총 30대의 일본 항공기를 격추시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중국측의 주장은 실제보다 다소 과장되었지만 어쨌든 이 전투는 일본측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이 사실입니다. 8월 16일에도 대규모 공중전이 계속되었는데 중국측은 이날에는 11대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17일에는 제 2, 4, 5, 7대대의 호크 17대와 노스롭 감마 2E 12대, 보우트 V-92C 15대 등 총 44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6차 걸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날 전투에서는 소규모 공중전이 있었으며 일본군 항공기 1대를 격추시켰다고 합니다.

중국공군은 8월 내내 상하이와 우송 일대에 출격하여 지상군의 작전을 지원했습니다만 이 글을 쓴 이유가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은 8월 14일~17일의 항공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이었으니 8월 하순의 작전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이 전투가 흥미로운 점은 그 당시 미국에서 퇴물로 취급하던 호크II, III와 같은 기종으로도 공격해 오는 적의 폭격기를 요격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는 점을 입증했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구식 항공기들이 동원된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이 전투의 교훈을 살려 전투기들을 개선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만.

이상하게도 미국은 전간기의 여러 전쟁에서 교훈을 얻는데 신통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1) 刘凤翰, 国民党軍事制度史 上(北京, 中国大百科全书出版社, 2009), p.469
2) 曹剑浪, 国民党军简史 下(北京, 解放军出版社, 2004), pp.1557~1558

잡담하나, 이 글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참고한 唐学锋의 中国空军抗战史는 한가지 문제가 있는데 각주가 제대로 달려 있지 않다는 겁니다;;;;

2010년 2월 5일 금요일

황군의 정신력은 세계 최강?!?!

쇼와(昭和) 15년(1940년), 지나 전선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귀국한 김석원 중좌는 어떤 잡지에 이런 글을 기고하셨더랍니다.

나는 전지에 나갓슬때 황군의 아름다운 행동이며 부상병이 엉금엉금 기여가면서 돌격해 나가든그 눈물나는 정경을 생각하면 전쟁이란 반드시 무긔로만 익이는 것이 아니라 용사들의 아름답고, 놉고, 굿센 정신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와 갓흔 정신이 투철한 우리 황군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것은 당연한 리치입니다. 명치 37, 8년 일로전쟁때 탄환대신으로 2만명의 황군이 적의 진지에 뛰여드러가 성공한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황군이 얼마나 굿센 정신을 가젓는지 아실 것 입니다.

김석원, 「軍人의 立場에서 銃後에 附託함」,『家庭之友』(1940. 1) 28호, 4~5쪽

이 시절의 정신력 드립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한번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군인 뿐 아니라 식민지 지식인들도 황군의 정신력을 찬양하던 시절이죠.

김중좌께서는 정말 황군의 정신력에 감화받으셔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해방되고 1사단장을 하실 때도 육탄 10용사 같은 황군의 전통을 잇는 공격을 좋아하셨다고 하죠. 김석원 외에도 채병덕 같은 양반들도 정신력 드립을 쳐대고 있었던 걸 보면 정말 이것이야 말로 최악의 식민지 잔재인듯;;;;


잡담 하나. 위에서 인용한 글은 요즘 국립중앙도서관에 전자문서로 열람 가능하게 되어 있더군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아주 깨끗하게 스캔을 잘 해 놓아서 제가 예전에 복사했던 상태 나쁜 것은 못 보겠더군요. 전자문서들이 잘 되어 있다보니 옛날에 구닥다리 복사기로 복사한 것들 중 통째로 복사해서 제본 뜬 것이 아니면 모두 이면지로 재활용 하고 있지요.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이상 국립중앙도서관이 문 닫지는 않을 테니.

잡담 둘. 위의 인용문에서 *표 표시한 것은 아무래도 203고지 전투를 이야기 하는 것 같지요?

2007년 6월 15일 금요일

중국공군항전사 - 唐學鋒


혜화동 로터리 근처에 있는 화문서적에 갔다가 중국어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의도로 구매한 책 입니다. 가격은 22위안인데 4,500원에 샀습니다. 이 책은 중일전쟁 발발부터 2차대전 종전까지 국민당 공군의 작전과 편제 변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책 입니다. 관심은 있으되 아는게 없는 분야고 가격도 5,000원이 안되는지라 바로 질렀는데 조금 훑어보니 심각한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가장 먼저... 각주와 참고문헌 목록이 없습니다! 맙소사. 명색이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책인데 이럴수가! 경악했습니다. 사회주의권의 책들이 이런 경향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동독의 군사사가인 그뢸러(Olaf Groehler)도 자신의 저작에 각주를 달지 않았지요. 물론 이 사람은 참고문헌 목록까지 빼 먹진 않았습니다만.... 이 당학봉이란 양반은 더 대인배로군요.

다음으로는 제본 상태가 불안합니다. 이거 몇년이나 더 갈런지... 물론 중국책이 러시아 책 보다는 더 잘만들긴 하는데 아직 평균적으로는 한국 만큼 잘 만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책에 쓰는 종이도 질이 약간 낮은 것 같고...

이것을 제외하면 개설서로서 상당히 만족스럽습니다. 중국공군(국민당공군)의 주요 작전을 잘 다루고 있으며 일본측 자료도 많이 참고한 듯 일본측에 대한 서술도 충실해 보입니다. 여기에 중국 전선에서 작전한 미육군항공대에 대해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어서 대략 훑어본 느낌으로는 개설서로서 상당히 충실해 보입니다. 여기에 중국의 초기 공군발전과정에 대해서도 앞 부분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는 점도 좋은 점 입니다. 전체적인 인상은 von Hardesty의 Red Phoenix에 비교할 만한 저작 같습니다. 각주와 참고문헌이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만 뺀다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