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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6일 목요일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 박물관 - 3 : Steven F. Udvar-Hazy Center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 박물관 - 1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 박물관 - 2
Me 262에 대한 미군 시험조종사들의 평가


작년 10월 중순에는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 박물관의 분관을 다녀왔습니다. 사실 분관이라고 적긴 했는데 소장하고 있는 항공기 및 각종 항공장비의 양으로 따지면 '분관'이라고 적은 Steven F. Udvar-Hazy Center가 본관을 압도합니다.

이날 찍은 항공기 사진을 몇 장 올려보겠습니다.


1. Nieuport 28C.1

Nieuport 28C.1은 제1차대전 당시 미육군항공대에서 사용되었고 전후에는 미해군항공대에서도 사용한 기종이라고 합니다. 박물관의 안내문을 보면 프랑스 육군항공대에서 SPAD XIII에 밀려 채용이 안 된 기종인데 마땅한 전투기가 없던 미육군항공대가 이거라도 감사합니다 하고 채용한 물건이라는군요.







2. SPAD S.XVI

제1차대전 당시 프랑스군과 미군에서 정찰기로 사용한 2인승 기종입니다.







3. Halberstadt CL.IV

제1차대전 말기에 독일 육군항공대에서 지상공격기로 사용한 기종입니다. 전쟁 말기에 그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독일 육군항공대의 지상공격기 부대의 상징과 같은 기종입니다.







4. Caudron G.4

이 기종은 제1차대전 당시 프랑스군에서 경폭격기와 정찰기로 운용되었다고 합니다.





5. FB-5

1920년대에 미해군항공대와 미해병항공대에서 전투기로 사용된 보잉의 FB-5 입니다. 이 박물관에 전시된 기종은 미해병항공대에서 사용한 형식으로 되어 있네요. 개인적으로 화려한 도색 때문에 1920~1930년대의 미육군항공대와 미해군항공대에서 운용한 전투기들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6. P-26

1930년대 미육군항공대의 주력 전투기였던 기종입니다. 전시된 기종은 그리 화려하지 않은 색상으로 칠해져 있는데 다른 부대에서 운용했다는 기체들을 보면 꽤 화려한 색상으로 칠해진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 죽이는 물건 치고는 꽤 귀엽게 생겼죠.




사진을 꽤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정리하고 보니 그리 많지는 않네요. 혹시나 다음에 이 곳을 한번 더 갈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다음에는 제2차대전에 사용된 기종들의 사진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중국측이 본 상하이 지구 항공전(1937년 8월 14일~17일)

10일 전에 쓴 "1930년대 미 육군 항공대의 폭격기 우월론에 대한 궁금증"이란 글에 배군님이 "전투기 무용론"이란 답글을 써 주셨습니다. 배군님의 글에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1936년 8월 14일에서 8월 17일에 걸쳐 벌어진 일본군과 중국군의 항공전인데 여기에 대해서 조금 써 보려 했으나 제가 요 며칠동안 약간 정신이 없다 보니 제때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조금 늦긴 했습니다만 이 공중전에 대한 중국측 시각에 대해 간단하게 써 보겠습니다.

먼저 중일전쟁 초기의 공중전이니 만큼 중일전쟁 직전 중화민국 공군의 편성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중일전쟁 직전 중화민국 공군은 급속히 증강되었습니다. 1936년 까지 중화민국 공군은 총 14개 비행중대(飛行中隊)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936년 8월에 광동공군의 9개 비행중대가 중앙군 예하로 들어와 다음과 같이 개편되었습니다.1)


광동공군 제1비행중대 → 중앙군 제16비행중대
광동공군 제2비행중대 → 중앙군 제17비행중대
광동공군 제3비행중대 → 중앙군 제18비행중대
광동공군 제4비행중대 → 중앙군 제19비행중대
광동공군 제5비행중대 → 중앙군 제20비행중대
광동공군 제6비행중대 → 중앙군 제28비행중대
광동공군 제7비행중대 → 중앙군 제29비행중대
광동공군 제8비행중대 → 중앙군 제30비행중대
광동공군 제9비행중대 → 중앙군 제31비행중대

그리고 10월에는 중앙군 예하에 7개 비행중대가 새로 편성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37년 7월에 중화민국 공군은 총 10개 비행대대(飛行大隊)와 6개 독립 비행중대로 편성되었고 구체적인 편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2)

항공위원회
 │
 └공군전적총지휘부(空軍前敵總指揮部)
   │
   └공군굉작기사령(空軍轟炸機司令)*
   │   └제1비행대대
   │     └제1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2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2비행대대
   │     └제9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11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14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8비행대대
   │     └제10비행중대(사보이아 S.72)
   │     └제19비행중대(He111A-0)
   │     └제30비행중대(마틴 138WC)
   │    
   └공군구축기사령(空軍驅逐機司令)**
   │  └제3비행대대
   │     └제7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8비행중대(브레다 Ba.27, 피아트 CR.32)
   │     └제17비행중대(P-26A)
   │  └제4비행대대
   │     └제21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22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23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Fw44)
   │  └ 제5비행대대
   │     └제24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25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28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 Fw44)
   │  └독립제29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공군정찰기사령(空軍偵察機司令)
   │  └제6비행대대
   │     └제3비행중대(더글라스 O-2MC)
   │     └제4비행중대(더글라스 O-2MC)
   │     └제5비행중대(더글라스 O-2MC)
   │     └제15비행중대(피아트 CR.32)
   │   └제7비행대대
   │      └제6비행중대(Vought V-92C)
   │      └제12비행중대(Vought V-92C)
   │      └제16비행중대(Vought V-92C)
   │   └독립제31비행중대(정찰기)
   │
   └제9비행대대(공격기)
   │  └제26비행중대(커티스 A-12 슈라이크)
   │  └제27비행중대(커티스 A-12 슈라이크)
   │
   └항주견교항교잠편대대(杭州筧橋航校暫編大隊)
   │   └제32비행중대
   │   └제34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
   │   └제35비행중대(Vought V-92C)
   │
   └제13독립비행중대
   └제18독립비행중대
   └제20독립비행중대
   └제33독립비행중대

*굉작기(轟炸機) 폭격기죠
**다들 잘 아시겠지만 구축기(驅逐機)는 전투기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상하이에 대한 상륙작전을 개시합니다. 중국 항공위원회는 8월 14일 오전 2시, 공군작전명령 제2호를 발령해 상해에 상륙하고 있는 일본군을 폭격하도록 했습니다. 이 작전에는 폭격기 부대인 제2비행대대와 전투기 부대인 제4, 제5비행대대, 그리고 공군전적총지휘부(空軍前敵總指揮部) 직할대인 항주견교항교잠편대대(杭州筧橋航校暫編大隊, 이하 잠편대대)가 투입됐습니다.

8월 14일 부터 8월 17일까지 전개된 항공전의 추이는 唐学锋저, 中国空军抗战史, 90~100쪽의 내용에 따라 서술하겠습니다.

8월 14일 오전 7시, 잠편대대 제35비행중대 소속의 보우트 V-92C 5대로 편성된 중국공군의 제1차 공격대가 젠차오(筧橋)비행장을 출격했습니다. 제1차 공격대는 손실 없이 임무를 마치고 귀환했습니다. 제2차 공격대는 제2비행대대 소속의 노스롭 감마 2E 21대로 편성되었으며 오전 8시 40분 제2비행대대 부대대장 쑨통강(孫桐崗)의 지휘하에 250kg 폭탄 14발과 50kg 폭탄 70발을 탑재하고 광더(廣德)비행장에서 출격했습니다. 2차 공격대는 두 제대로 나뉘어 첫 번째 제대는 휘산(山) 부두를 폭격하고 두 번째 제대는 우송(吳淞) 하구에 상륙하는 일본군 함선을 공격했습니다. 2차 공격대 또한 손실 없이 귀환했습니다. 3차 공격대는 제5비행대대의 호크III 8대로 편성되었으며 5대대장 딩지쉬(丁紀徐)가 직접 지휘하는 가운데 250kg 폭탄 1발씩을 탑재하고 오전 9시 20분 출격해 상해 인근의 일본 해군 함정을 공격했습니다.
중국공군은 오후부터 폭격을 재개했습니다. 제4차 공격대는 제5대대 제24중대의 호크III 3대로 편성되었으며 3차 공격대와 마찬가지로 각각 250kg 폭탄 1발을 탑재하고 오후 2시20분 출격했습니다. 4차 공격대는 일본군의 본격적인 반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4차 공격대가 목표 상공에 도달했을 때 일본군 전투기가 기습해와 부중대장이 격추되어 전사하는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제5차공격대는 제2대대의 폭격기로 편성되어 오후 2시 40분 출격했으며 상해의 일본해군 육전대사령부를 폭격했습니다. 제6차 공격대는 제35중대장의 지휘하에 오후 2시 40분에 출격해 궁다(公大) 방직공장을 폭격했습니다. 제7차 공격대는 제25중대의 호크III 3대로 편성되었으며 25중대장의 지휘하에 오후 2시 45분 출격해 일본군 사령부 등을 폭격했습니다. 오후 3시 40분에는 제2대대의 폭격기로 구성된 제8차 공격대가 출격했으며 오후 3시 50분에는 잠편대대 소속 제34중대의 호크 II와 호크III로 편성된 제9차 공격대가 출격해 50kg 폭탄 2발과 18kg 폭탄 11발을 투하하고 귀환했습니다.
한편, 이날 제공전투는 제4비행대대 소속의 전투기들이 담당했습니다. 오후 2시 50분, 제4비행대대는 공격해 오는 일본군 폭격기들을 습격해 21, 22, 23중대가 각각 1대씩, 총3대를 격추시켰습니다.

중국공군은 8월 15일에도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이날 중국공군은 모두 8차에 걸쳐 공격을 감행했는데 각 공격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습니다.

1차 공격대 : 제6대대 5중대, 3대
2차 공격대 : 제6대대 5중대, 5대
3차 공격대 : 제6대대, 대대장 단독출격
4차 공격대 : 제5대대, 14대
5차 공격대 : 제2대대 11중대, 17대
6차 공격대 : 제5대대, 6대
7차 공격대 : 제7대대 16중대, 6대
8차 공격대 : 제4대대, 8대

한편, 8월 15일 전투는 배군님의 글에 잘 서술되어 있듯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중국쪽 기록은 이날 전투에서 러이친(樂以琴)이 4대, 탄원(潭文)이 3대를 격추하는 등 총 30대의 일본 항공기를 격추시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중국측의 주장은 실제보다 다소 과장되었지만 어쨌든 이 전투는 일본측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이 사실입니다. 8월 16일에도 대규모 공중전이 계속되었는데 중국측은 이날에는 11대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17일에는 제 2, 4, 5, 7대대의 호크 17대와 노스롭 감마 2E 12대, 보우트 V-92C 15대 등 총 44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6차 걸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날 전투에서는 소규모 공중전이 있었으며 일본군 항공기 1대를 격추시켰다고 합니다.

중국공군은 8월 내내 상하이와 우송 일대에 출격하여 지상군의 작전을 지원했습니다만 이 글을 쓴 이유가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은 8월 14일~17일의 항공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이었으니 8월 하순의 작전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이 전투가 흥미로운 점은 그 당시 미국에서 퇴물로 취급하던 호크II, III와 같은 기종으로도 공격해 오는 적의 폭격기를 요격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는 점을 입증했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구식 항공기들이 동원된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이 전투의 교훈을 살려 전투기들을 개선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만.

이상하게도 미국은 전간기의 여러 전쟁에서 교훈을 얻는데 신통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1) 刘凤翰, 国民党軍事制度史 上(北京, 中国大百科全书出版社, 2009), p.469
2) 曹剑浪, 国民党军简史 下(北京, 解放军出版社, 2004), pp.1557~1558

잡담하나, 이 글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참고한 唐学锋의 中国空军抗战史는 한가지 문제가 있는데 각주가 제대로 달려 있지 않다는 겁니다;;;;

2010년 6월 5일 토요일

1930년대 미 육군 항공대의 폭격기 우월론에 대한 궁금증

다들 잘 아시는 이야기 겠지만 1930년대 미국 육군항공대의 주류는 폭격기의 발전이 전투기를 앞지르고 있어서 미래전에서 폭격기가 전투기를 압도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에. 이런 견해를 뭐라고 부르는게 좋을지 몰라서 그냥 "폭격기 우월론"**이라고 부르겠습니다.

1차대전 직후만 하더라도 미육군 항공대는 폭격기에 전투기의 호위를 강조했습니다. 1922년에 소령으로 제1추격항공단(1st Pursuit Group) 단장이었던 스파츠(Carl Spaatz)는 폭격기 호위를 위해 중무장에 폭격기와 같은 항속거리를 가지는 전투기 개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역시 육군항공대 장교였던 셔먼(William Sherman)도 1926년에 출간한 저서에서 폭격기에 대한 호위기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미육군항공대가 직면한 문제는 폭격기의 항속거리는 길어지는데 호위 전투기는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925년에서 1926년에 걸쳐 증가연료탱크를 사용하는 방식이 시험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증가연료탱크를 장착할 경우 공기저항을 높여 전투기의 성능을 저하시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당장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전투기가 증가연료탱크를 장착한 상태에서 폭격기의 순항속도를 따라갈 수 있겠느냐는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1) 항속거리가 같더라도 폭격기와 속도를 맞춰 날 수 없다면 호위기는 무용 지물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육군항공대에 "전략폭격" 이론이 도입되기 시작하고 폭격기가 기술적으로 진보하자 점차 전투기의 역할에 대한 회의감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1930년대 초반에 들어오면서 미육군항공대에 전략폭격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931년에 발행된 육군항공대 전술학교(Air Corps Tactical School)의 교재는 "적 부대를 상대로 한 작전은 제외하고" 육군항공대의 임무 대부분을 전략적 목표에 맞춰야 하며 동시에 "정치적 목표" 즉 적국의 민간인에 대한 폭격도 명시하고 있었습니다.2)

게다가 폭격기의 급속한 발전은 이런 경향을 더 가속화 했습니다. 전투기가 폭격기에 대해 열세를 보이는 경향은 신형폭격기의 등장 이전 부터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1931년에 실시한 워게임에서 제1추격항공단은 가상적의 폭격기를 단 한대도 요격하지 못하는 패배를 당합니다.3) 그리고 기술적으로 발전한 신형 폭격기가 등장하면서 폭격기 우월론은 더 힘을 받게 됩니다. 1931년 육군항공대가 개량형 중폭격기(advanced type heavy bomber) 사업을 발주했을 때 응모한 마틴(Martin)사의 폭격기는 시속 330km/h를 돌파해 당시 육군항공대의 주력 폭격기였던 B-3A의 속도(160km/h)를 두 배나 능가했습니다. 폭탄탑재 능력도 거의 2톤에 육박해(4380파운드) 1톤 남짓에 불과한 B-3A를 압도하고 있었습니다.4) 그야말로 엄청난 기술적 진보였습니다. 마틴사의 폭격기는 B-10으로 정식채택되었습니다. B-10의 성능은 전투기가 폭격기를 효과적으로 요격할 수 없다는 견해를 더 강화했습니다. 1934년에 캘리포니아에서 실시된 모의교전에는 B-10의 개량형인 B-12와 당시 육군항공대의 주력 전투기였던 P-26이 대결했는데 결과는 B-12의 승리였습니다. 이 모의교전 결과 육군항공대 내에서는 "최전선의 비행장에서 작전하는 추격기나 전투기는 우발적인 경우가 아니면 현대적인 폭격기를 요격할 기회가 별로 없을 것"이라는 평가까지 나왔습니다. 1930년대 후반에 등장한 P-35나 P-36도 B-17에 대해 열세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하지요.5) 폭격기 옹호론자들은 빠른 속도에 중무장을 갖춘 폭격기는 전투기가 요격하기 어려운 상대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인 전략폭격 지지자이고 1930년대 초 육군항공대 전술학교의 폭격기 교관이었던 조지(Harold L. George) 중위는 1932-33년 사이에 한 강의에서 폭격기 한 대당 6정의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편대 대형으로 상호 엄호가 가능하기 때문에 폭격기는 "공격해 오는 적 전투기에게 까다로운 상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6)

사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미육군 항공대가 보유한 전투기들이 고속폭격기를 요격하기에는 성능이 부족했기 때문에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1년과 1934년의 훈련에 사용된 P-26은 기관총 2정이라는 빈약한 무장에 느린속도를 가진 기종이었기 때문에 중무장한 폭격기를 상대하기는 버거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상 적국이 개발하는 전투기도 미국의 전투기들 처럼 별 볼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플라잉 타이거즈의 두목이 되어 이름을 떨친 셴놀트는 초창기의 폭격기 우월론에 강한 회의감을 드러냈습니다. 셴놀트는 여러 차례의 훈련에서 전투기가 폭격기를 요격하는데 실패했지만 이것은 전투기를 집중운용해 화력을 극대화 하고 전투기간의 유기적인 협동전술로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7) 그리고 폭격기를 조기에 포착해서 요격하는 데 대해서는 전자기술의 발전을 이용한 조기경보체계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무전기나 유선전화를 가진 대공감시원을 활용하는 방안을 꼽았습니다.8)

구식화된 전투기로도 충분히 신형 폭격기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던 만큼 적이 신형전투기를 가지게 된다면 폭격기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을법 한데 이상하게도 1930년대의 폭격기 우월론자들은 이런 가능성을 과소평가했습니다. 그 이유가 참 궁금하지요. 당시 미육군 내부의 의사결정과정이 어떠했는지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셴놀트가 옳았고 폭격기 만능론은 허상이라는 것이 드러났지만 분명히 1930년대 미육군항공대 내에서는 폭격기를 과대평가할 이유가 충분했을 테니 말입니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 사이 미육군 항공대 내의 관련 문건을 직접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거나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미육군항공대가 폭격기와 전투기 중 어느 한 쪽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었습니다. 대공황의 여파로 예산 부족에 시달린 미육군은 폭격기와 전투기 개발을 동시에 추진하기 보다는 폭격기 개발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자하는 방향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의 논리는 꽤 단순했습니다. 첫 번째로는 B-10이나 B-17과 같이 전투기의 호위가 필요없는 장거리 폭격기가 존재하고 있으니 전투기는 필요 없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런 장거리 폭격기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적이 미국 본토를 직접 타격하기 이전에 타격해서 제압할 수 있으므로 요격기의 필요성도 감소한다는 것 이었습니다;;;;9) 강력한 공격력을 가지게 되었으나 방어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논리이죠;;;;

1930년대의 미육군항공대가 모든 면에서 폭격기 중심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전투기 부대 지휘관으로 1920년대 초반에 전투기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스파츠가 1920년대 후반 이후로는 계속해서 폭격기 부대를 지휘하게 된 것 일겁니다.


**일단 "전투기 무용론"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폭격기 지지자들 중에서도 전투기의 역할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Tami D. Biddle, Rhetoric and Reality in Air Warfare : The Evolution of British and American Ideas about Strategic Bombing, 1914~1945(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2), p.166
2) Conrad C. Crane, Bombs, Cities, and Civilians : American Airpower Strategy in World War II(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3), p.21
3) Daniel Ford, Flying Tigers : Claire Chennault and the American Volunteer Group(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1991), p.15
4)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S.Army 1917-1945(Cornell University Press, 1998), p.154
5) Biddle, ibid., p.168
6) Johnson, ibid., p.155
7) Ford, ibid., p.16
8) Biddle, ibid., p.169
9)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Washington,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p.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