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대공황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대공황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0년 6월 5일 토요일

1930년대 미 육군 항공대의 폭격기 우월론에 대한 궁금증

다들 잘 아시는 이야기 겠지만 1930년대 미국 육군항공대의 주류는 폭격기의 발전이 전투기를 앞지르고 있어서 미래전에서 폭격기가 전투기를 압도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에. 이런 견해를 뭐라고 부르는게 좋을지 몰라서 그냥 "폭격기 우월론"**이라고 부르겠습니다.

1차대전 직후만 하더라도 미육군 항공대는 폭격기에 전투기의 호위를 강조했습니다. 1922년에 소령으로 제1추격항공단(1st Pursuit Group) 단장이었던 스파츠(Carl Spaatz)는 폭격기 호위를 위해 중무장에 폭격기와 같은 항속거리를 가지는 전투기 개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역시 육군항공대 장교였던 셔먼(William Sherman)도 1926년에 출간한 저서에서 폭격기에 대한 호위기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미육군항공대가 직면한 문제는 폭격기의 항속거리는 길어지는데 호위 전투기는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925년에서 1926년에 걸쳐 증가연료탱크를 사용하는 방식이 시험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증가연료탱크를 장착할 경우 공기저항을 높여 전투기의 성능을 저하시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당장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전투기가 증가연료탱크를 장착한 상태에서 폭격기의 순항속도를 따라갈 수 있겠느냐는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1) 항속거리가 같더라도 폭격기와 속도를 맞춰 날 수 없다면 호위기는 무용 지물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육군항공대에 "전략폭격" 이론이 도입되기 시작하고 폭격기가 기술적으로 진보하자 점차 전투기의 역할에 대한 회의감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1930년대 초반에 들어오면서 미육군항공대에 전략폭격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931년에 발행된 육군항공대 전술학교(Air Corps Tactical School)의 교재는 "적 부대를 상대로 한 작전은 제외하고" 육군항공대의 임무 대부분을 전략적 목표에 맞춰야 하며 동시에 "정치적 목표" 즉 적국의 민간인에 대한 폭격도 명시하고 있었습니다.2)

게다가 폭격기의 급속한 발전은 이런 경향을 더 가속화 했습니다. 전투기가 폭격기에 대해 열세를 보이는 경향은 신형폭격기의 등장 이전 부터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1931년에 실시한 워게임에서 제1추격항공단은 가상적의 폭격기를 단 한대도 요격하지 못하는 패배를 당합니다.3) 그리고 기술적으로 발전한 신형 폭격기가 등장하면서 폭격기 우월론은 더 힘을 받게 됩니다. 1931년 육군항공대가 개량형 중폭격기(advanced type heavy bomber) 사업을 발주했을 때 응모한 마틴(Martin)사의 폭격기는 시속 330km/h를 돌파해 당시 육군항공대의 주력 폭격기였던 B-3A의 속도(160km/h)를 두 배나 능가했습니다. 폭탄탑재 능력도 거의 2톤에 육박해(4380파운드) 1톤 남짓에 불과한 B-3A를 압도하고 있었습니다.4) 그야말로 엄청난 기술적 진보였습니다. 마틴사의 폭격기는 B-10으로 정식채택되었습니다. B-10의 성능은 전투기가 폭격기를 효과적으로 요격할 수 없다는 견해를 더 강화했습니다. 1934년에 캘리포니아에서 실시된 모의교전에는 B-10의 개량형인 B-12와 당시 육군항공대의 주력 전투기였던 P-26이 대결했는데 결과는 B-12의 승리였습니다. 이 모의교전 결과 육군항공대 내에서는 "최전선의 비행장에서 작전하는 추격기나 전투기는 우발적인 경우가 아니면 현대적인 폭격기를 요격할 기회가 별로 없을 것"이라는 평가까지 나왔습니다. 1930년대 후반에 등장한 P-35나 P-36도 B-17에 대해 열세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하지요.5) 폭격기 옹호론자들은 빠른 속도에 중무장을 갖춘 폭격기는 전투기가 요격하기 어려운 상대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인 전략폭격 지지자이고 1930년대 초 육군항공대 전술학교의 폭격기 교관이었던 조지(Harold L. George) 중위는 1932-33년 사이에 한 강의에서 폭격기 한 대당 6정의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편대 대형으로 상호 엄호가 가능하기 때문에 폭격기는 "공격해 오는 적 전투기에게 까다로운 상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6)

사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미육군 항공대가 보유한 전투기들이 고속폭격기를 요격하기에는 성능이 부족했기 때문에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1년과 1934년의 훈련에 사용된 P-26은 기관총 2정이라는 빈약한 무장에 느린속도를 가진 기종이었기 때문에 중무장한 폭격기를 상대하기는 버거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상 적국이 개발하는 전투기도 미국의 전투기들 처럼 별 볼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플라잉 타이거즈의 두목이 되어 이름을 떨친 셴놀트는 초창기의 폭격기 우월론에 강한 회의감을 드러냈습니다. 셴놀트는 여러 차례의 훈련에서 전투기가 폭격기를 요격하는데 실패했지만 이것은 전투기를 집중운용해 화력을 극대화 하고 전투기간의 유기적인 협동전술로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7) 그리고 폭격기를 조기에 포착해서 요격하는 데 대해서는 전자기술의 발전을 이용한 조기경보체계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무전기나 유선전화를 가진 대공감시원을 활용하는 방안을 꼽았습니다.8)

구식화된 전투기로도 충분히 신형 폭격기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던 만큼 적이 신형전투기를 가지게 된다면 폭격기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을법 한데 이상하게도 1930년대의 폭격기 우월론자들은 이런 가능성을 과소평가했습니다. 그 이유가 참 궁금하지요. 당시 미육군 내부의 의사결정과정이 어떠했는지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셴놀트가 옳았고 폭격기 만능론은 허상이라는 것이 드러났지만 분명히 1930년대 미육군항공대 내에서는 폭격기를 과대평가할 이유가 충분했을 테니 말입니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 사이 미육군 항공대 내의 관련 문건을 직접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거나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미육군항공대가 폭격기와 전투기 중 어느 한 쪽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었습니다. 대공황의 여파로 예산 부족에 시달린 미육군은 폭격기와 전투기 개발을 동시에 추진하기 보다는 폭격기 개발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자하는 방향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의 논리는 꽤 단순했습니다. 첫 번째로는 B-10이나 B-17과 같이 전투기의 호위가 필요없는 장거리 폭격기가 존재하고 있으니 전투기는 필요 없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런 장거리 폭격기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적이 미국 본토를 직접 타격하기 이전에 타격해서 제압할 수 있으므로 요격기의 필요성도 감소한다는 것 이었습니다;;;;9) 강력한 공격력을 가지게 되었으나 방어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논리이죠;;;;

1930년대의 미육군항공대가 모든 면에서 폭격기 중심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전투기 부대 지휘관으로 1920년대 초반에 전투기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스파츠가 1920년대 후반 이후로는 계속해서 폭격기 부대를 지휘하게 된 것 일겁니다.


**일단 "전투기 무용론"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폭격기 지지자들 중에서도 전투기의 역할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Tami D. Biddle, Rhetoric and Reality in Air Warfare : The Evolution of British and American Ideas about Strategic Bombing, 1914~1945(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2), p.166
2) Conrad C. Crane, Bombs, Cities, and Civilians : American Airpower Strategy in World War II(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3), p.21
3) Daniel Ford, Flying Tigers : Claire Chennault and the American Volunteer Group(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1991), p.15
4)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S.Army 1917-1945(Cornell University Press, 1998), p.154
5) Biddle, ibid., p.168
6) Johnson, ibid., p.155
7) Ford, ibid., p.16
8) Biddle, ibid., p.169
9)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Washington,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p.28

2010년 4월 4일 일요일

미육군의 인사적체와 주방위군, 그리고 대공황

미국은 1차대전에 승리한 뒤 육군을 대규모로 감축합니다. 미육군은 1차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후에도 육군 병력을 50만명 정도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정치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독일이 사실상 전쟁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대규모 육군의 필요성이 사라졌다고 본 것 입니다. 물론 일본이라는 유력한 가상 적국이 있었지만 일본과의 전쟁은 주로 해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평시에도 대규모 육군을 유지하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견해가 많았다고 합니다. 1920년 6월 4일에 제정된 국방법(National Defense Act)은 육군 병력 상한선을 장교 17,726명으로 포함한 28만명으로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국방법에서 명시한 병력 상한선은 어디까지나 평화시 유지할 수 있는 육군의 최대 규모를 명시한 것이었을 뿐 육군의 규모는 예산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결정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국방법이 제정될 당시 미육군 병력은 약 20만명이었는데 1921년 1월에는 의회가 이것을 175,000명으로 줄이도록 했고 다시 같은해 6월에는 150,000명으로, 그리고 1922년에는 다시 장교 12,000명과 부사관 및 사병 125,000명으로 줄여 버립니다.1) 한편, 정규군을 보조할 주방위군의 병력 상한선은 435,800명 이었는데 이것 또한 실제로는 180,000명 수준에서 유지되었습니다.2)

미 육군은 이렇게 평화시의 병력이 큰 규모로 축소되면서 심각한 인사적체 문제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군대의 규모가 줄어들었으니 자리를 늘리는 것이 어려웠고 이것은 장교는 물론이요, 사병들이 부사관으로 진급하는 것 까지 매우 어려워 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군대라는 것이 피라미드식의 구조를 가진 조직이니 말입니다. 1923년의 통계를 보면 미육군의 소위는 1,184명, 중위는 2,783명 이었는데 대령은 509명이었습니다.3) 하지만 그나마 장교는 나았던 것이 사병들의 경우 진급을 위한 경쟁이 더 치열했습니다(;;;;)  1926년의 통계를 보면 미육군의 부사관 이하 계층의 구성비에서 사병(이등병~일병)이 차지하는 비중이 74.1%였는데 상병에서 하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22.7%, 중사에서 상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3.1%에 불과했습니다. 육군항공대의 경우는 사정이 눈꼽만큼 나아서 사병이 71.5%, 상병에서 하사가 23.0%, 중사에서 상사가 4.6%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4) 소위가 대령으로 진급할 가능성 보다 이등병이 상사로 진급할 가능성이 더 낮았던 셈입니다. 아무래도 직업군인으로 구성되는 군대인 만큼 사병들도 진급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는데 1차대전 직후의 미육군은 그 점에서 문제가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병의 진급문제가 당시에는 꽤 심각했는지 이와 관련해서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5)

한 보병중대의 중대원들이 이등병에서 일등병으로의 진급공고를 읽기 위해 부대 게시판 앞에 모여들었다. 병사 한 명이 불쾌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 이놈의 군대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호건은 일등병이 됐는데 이녀석은 겨우 '6년' 복무했단 말이야. 다른 좋은 데로 옮겨야 겠어."

이당시 미육군에서는 상사까지 올라가는 데 보통 24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육군항공대는 조금 더 사정이 좋아서 16년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게다가 1차대전 직후의 호황으로 일자리가 넘쳐났기 때문에 미육군은 급여 면에서도 민간보다 못했습니다.6) 진급도 잘 안되고 박봉이니 군대가 인기있는 직장일 수가 없었겠지요. 실제로 미육군의 재입대율은 대공황 직전인 1928년 0.47로 신병 두 명이 입대할 때 복무기간을 마친 병사가 제대하지 않고 군대에 남는 것이 한 명도 채 못되었다는 것 입니다.7)

하지만 대공황은 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비록 진급이 안 되는 것은 대공황 전이나 그 후나 별 다를바가 없었으나 군대는 불황기에 안정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직장이었습니다. 미육군 장교들은 심각한 진급적체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계속 남는 방향을 택했습니다.8) 사병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대공황 전에는 1도 넘지 못하던 사병의 재입대율이 높아져 1931년에는 1.24, 1932년에는 2.99가 되었고 특히 육군항공대의 경우 1931년에는 1.69, 1932년에는 3.35가 되었습니다.9) 주방위군도 마찬가지여서 대공황이 밀어닥치자 주방위군 자원자가 폭증했다고 합니다.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 주방위군의 훈련 참석율은 평균 90% 이상을 상회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훈련에 참석할 경우 훈련수당이 지급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 의회가 국방비를 삭감한 덕분에 1934년에는 매주 훈련 수당을 지급하던 것을 1년에 36주만 훈련 수당을 지급하는 것으로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10)

어쨌거나 끔찍한 인사적체와 대공황을 견뎌낸 군인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미군이 급속도로 증가하자 그때까지 군대에 남아있던 소수의 장교들은 특별히 무능하지 않은한 군 내에서 한자리씩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 Richard W. Stewart ed., American Military History Vol.II : The United States Army In A Global Era, 1917~2003(Washington, U.S.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2005) , pp.53~59
2) Michael D. Doubler, Civilian in Peace, Soldier in War : The Army National Guard, 1636~2000(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p.188
3)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Washington,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p.11
4) Mark R. Grandstaff, Foundation of the Force : Air Force Enlisted Personnel Policy : 1907~1956(Washington, Air Force History and Museums Program, 1997), p.21
5) Victor Vogel, Soldiers of the Old Army(College Station,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0), p.3
6) Grandstaff, ibid., p.23
7) Grandstaff, ibid., p.31
8) Davis, ibid., p.12
9) Grandstaff, ibid., p.31
10) Doubler, ibid., p.191

2009년 5월 18일 월요일

장하준에 대한 단상

sonnet님이 지난 4월 3일에 있었던 SBS 시사토론을 해설과 함께 요약해 주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sonnet님이 인용하신 토론 내용을 보니 상당히 흥미로운 토론이었던 것 같습니다.

SBS시사토론: 이창용-장하준(sonnet)


저 또한 다른 많은 분들과 마찬가지로 이창용이 장하준에 대해 우세한 판정승을 거둔 것으로 봅니다. 사실 지난 정권에서 장하준이 명성을 떨치다 보니 이 어린양도 ‘사다리 걷어차기’ ‘개혁의 덫’ ‘국가의 역할’을 모두 돈 주고 사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장하준이 SBS 시사토론에서 발언한 내용을 보니 장하준이 그의 저작들에서 보여준 취약점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이창용은 꽤 설득력 있는 사례들을 들고 나오는데 장하준은 왜 그렇지 못하다고 느껴질 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장하준이 들고 있는 사례들은 대공황 이전의 세계를 설명할 때는 적절할지 몰라도 대공황 이후의 세계를 설명 하는데는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사다리 걷어차기’의 경우는 꽤 재미있게 읽었지만 미리 답을 정해놓고 그 답에 맞춰 이야기를 끌어 맞추는 경향이 강하다고 느꼈습니다. 장하준은 선진국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주로 19세기와 1차대전 이전의 20세기의 사례를 들어 논지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대공황과 2차대전을 거치면서 선진국들이 오늘날 가지고 있는 위상이 확립되었기 때문이겠지만 그 결과 대공황 이후 근본적으로 변화된 세계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장하준의 저작들은 재미있긴 하지만 선진국의 태도에 대한 비판 대신 오늘날의 세계에 필요한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역부족 입니다. SBS 시사토론도 마찬가지 였다고 생각됩니다.

2008년 7월 27일 일요일

1차대전 이후 미 육군 장교단의 인사적체 문제

1차대전이 종결된 뒤 미국은 고립주의 노선을 취하며 국제연맹에도 참여하지 않습니다. 이런 대외정책의 기조에 따라 군 병력도 급격히 감축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육군의 감축 규모가 해군 보다 더 컸습니다. 미국 전쟁부는 최소 현역 병력을 장교 17,717명과 사병 280,000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었지만 의회에서 국방예산을 감축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이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감군을 해야 했습니다. 이에 따라 1923년 까지 미 육군은 장교 14,021명과 사병 119,222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이렇게 제한된 인원만 군대에 남다 보니 진급 적체현상은 굉장히 심했고 장교단의 노화 현상이 두드러 졌다고 합니다. 아이젠하워의 경우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데 16년이 걸릴 정도였다고 하지요. 어찌나 진급적체 현상이 심했는지 1930년의 경우 육군항공대 소속의 중위 계급의 장교 494명 중 400명이 1차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1931년의 통계를 보면 육군의 현역 중위 중 50세 이상이 46명이었는데 이 중 최고령자는 61세였고 현역 대위 중에서는 274명이 50세 이상에 최고령자는 62세였다고 합니다. 이때 최연소 대위가 32세였으니 진급적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초급 간부들이 이 정도였으니 위로 올라가면 더 심각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같은 해에 대령은 470명이었는데 이 중 109명이 60을 넘겼고 이 중 8명은 64세였습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조사를 보면 현역 장교의 90%는 군대에 남길 희망했다고 합니다.

왜냐?

사회에 나가면 대공황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2006년 12월 19일 화요일

폴란드 침공에 참가한 Einsatzgruppe 주요 지휘관들

독일의 Einsatzgruppen은 소련에서 깽판친 것이 꽤 유명하지만 처음 이들의 깽판에 피박을 본 곳은 폴란드 였습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는 Einsatzgruppe I 부터 z.b.V 까지 6개 Gruppe가 투입됐다고 합니다. Alexander B. Rossino의 Hitler strikes Poland에는 폴란드전에 참가한 Einsatzgruppen 지휘관들의 약력을 잘 정리해 놨는데 이게 꽤 흥미롭더군요. Rossino가 정리한 주요 지휘관들의 약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Einsatzgruppe I : SS-Brigadeführer Bruno Streckenbach

이 양반은 1902년 2월 7일 생으로 부친은 함부르크의 세관 공무원이었다고 합니다. 1919년 김나지움에 입학했지만 공부가 별로 재미 없었는지 자퇴하고 Freikorps에 자원해 함부르크의 사회주의자들을 열심히 때려잡았습니다. 모범적인 반공청년이었군요. Streckenbach가 소속된 Freikorps는 곧 정규군으로 흡수가 됐는데 군에서 제대한 뒤 이런 저런 자영업을 하다가 1930년 나치당에 가입했습니다. 1년 남짓 돌격대에 있다가 1931년 친위대로 옮겼고 1933년에는 SD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또다시 반공의 투사가 되어 이름을 날렸다고 하는 군요. 1939년에 Brigadeführer로 진급했습니다.

Einsatzkommando 1/I : SS-Sturmbahnführer Dr Ludwig Hahn

이 양반은 1908년 1월 23일 생으로 부친은 농부였습니다. 1930년 나치당에 가입해 1년 정도 돌격대원을 하다가 1931년 이 짓을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1933년에는 다시 친위대에 가입했고 1935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같은해 6월 SD로 전속됐고 1937년에는 바이마르의 게슈타포 지휘관이 됩니다.

Einsatzkommando 2/I : SS- Sturmbahnführer Dr Bruno Müller

이 양반은 1905년 9월 13일 생으로 알자스 태생입니다. 부모가 골수 독일 민족주의자 인지라 1차대전이 끝나고 프랑스가 알자스를 다시 점령하자 독일로 이주합니다. 1925년에 착실하게 김나지움을 마친 뒤 취직을 했는데 자리가 잡힐만 하니 대공황.... 결국 이 양반 대학에 진학합니다. 올덴부그크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 취득. 1932년 친위대에 입대한 뒤 역시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3/I : SS- Sturmbahnführer Dr Alfred Hasselberg

1908년 8월 30일생. 전형적인 독일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군에 지원하지만 경쟁률이 높아 탈락. 1927년 대학에 진학해서 1935년 5월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박사과정 진학 이전에 지방법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는군요. 1935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몇 달 뒤 다시 친위대에 자원합니다. 1936년 잠시 베를린의 게슈타포 본부에서 근무하다가 1937년부터 폼메른의 슈나이데뮐(Schneidemühl) 게슈타포 책임자로 근무합니다.

Einsatzkommando 4/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Karl Brunner

1900년 7월 26일 생. 1917년 육군에 자원해 2급 철십자훈장을 수여 받았습니다. 1919년 제대한 뒤 다시 고등학교에 복학해서 학업을 하려는 찰나... 우익 학생들과 Freikorps에 가입해 빨갱이 사냥을 시작합니다. 역시 반공청년이로군요. 1923년까지 이렇게 자유의 투사를 하다가 대학에 진학합니다. 1927년에 학위를 취득한 뒤 1933년까지는 비교적 조용하게 보낸것으로 돼 있군요.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다시 1934년 SS로 옮겼고 여기서 SD 차출돼 1937년에는 뮌헨의 게슈타포 책임자가 됩니다. 1938년 Obersturmbahnführer로 진급했습니다.


Einsatzgruppe I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Emanuel Schaefer

1900년 4월 20일 생으로 실레지엔이 고향입니다. 부친이 작은 호텔을 운영해서 집안은 비교적 넉넉했던 모양입니다. 재수없게 전쟁 막판인 1918년에 징집됐지만 여기서 다시 인생역전으로 전투 한번 안하고 동원해제가 돼서 귀향합니다. 그런데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집에 돌아와보니 고향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이 국경을 넘어들어와 깽판을 치는지라 살벌해 졌습니다. 결국 이 양반도 우익 민병대에 가입해 폴란드인들과 싸우게 됩니다.
1926년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법학 석사를 받은 뒤 경찰에 취직합니다. 1933년 나치당에 가입하는데 이미 학위도 있는데다가 경찰 경력이 만만찮아 게슈타포에서 승승장구 합니다. 1936년 SD로 전출됐습니다.

Einsatzkommando 1/ II : SS- Sturmbahnführer Otto Sens

1898년 4월 14일 데사우(Dessau)에서 태어났습니다. 전쟁 중에는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제대 뒤 Freikorps에서 활동했습니다. 1919년부터 실레지엔에서 폴란드인들과 피박터지게 싸웁니다. 1931년 SS에 입대했고 1934년에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2/ II : SS- Sturmbahnführer Karl-Heinz Rux

1907년 9월 3일 서 프로이센 브롬버그 태생. 1936년 SS에 입대했는데 1938년에 무려 세번 진급해 순식간에 Sturmbahnführer가 됐습니다.

Einsatzgruppe II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Hans Fischer

1906년 8월 21일생. 1926년 예나 대학에 입학해서 1933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1932년 친위대에 입대했으며 에어푸르트와 뮌스터의 게슈타포 책임자를 지냈습니다. 1938년 Obersturmbahnführer로 진급합니다.

Einsatzkommando 1/ III : SS-Hauptsturmführer Dr Wilhelm Scharpwinkel

1904년 7월 4일 반네-아이켈(Wanne-Eickel)에서 태어났습니다.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습니다. 특이하게도 보험 조사원 경력이 있습니다. 3년간 했군요. 역시 게슈타포에서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Einsatzkommando 2/ III : SS-Hauptsturmführer Dr Fritz Liphardt

1905년 5월 3일 슈테틴에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24년 육군에 입대했으나 1926년 장교로 진급하지 못하고 전역됩니다. 결국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려 했는데 10학기가 넘도록 졸업을 못 했다는군요. 머리는 약간 별로였나 봅니다.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1936년 친위대로 옮깁니다. 차를 갈아타는게 늦은거로 봐서는 확실히 두뇌회전이 별로인 모양입니다. 어쨌건 박사학위는 취득했는데 언제인지는 안나오는군요. 1938년 베를린의 SD 본부로 전출됐다가 여기서 전쟁을 맞습니다.


Einsatzgruppe IV : SS-Brigadeführer Dr Lothar Beutel

이 아저씨는 1902년 5월 2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이가 어려서 전쟁에는 참전하지 못했지만 싹수가 노랬는지 17세부터 우익 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1921년 군에 입대해서 1923년에 제대했습니다. 대학 전공이 재미있는게 미학, 그리고 약학이라고 합니다. 박사학위를 약학으로 받은 유일한 Einsatzgruppe 지휘관입니다. 1931년 돌격대에 입대했으나 바로 그해 친위대로 옮깁니다. 1932년 SD로 전출됐고 1939년 4월 Brigadeführer로 진급합니다.

Einsatzkommando 1/IV : SS- Sturmbahnführer Helmut Bischoff

1908년 3월 1일 생으로 아버지는 정육점을 했던 것으로 돼 있습니다. 1930년 돌격대에 입대한 뒤 1935년 친위대로 옮겼고 1936년에는 SD로 전출됐습니다.

Einsatzkommando 2/IV : SS- Sturmbahnführer Dr Walter Hammer

1907sus 6월 30일 하겐 출생. 부친은 판사로 전형적인 중산층 집안 출신입니다. 1931년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33년 주법원에서 근무하던 중 돌격대에 가입합니다. 1935년에는 게슈타포로 옮겼고 2년간 베를린 본부에서 근무한 뒤 1937년 에어푸르트의 게슈타포 책임자로 임명됩니다.


Einsatzgruppe V : SS-Standarteführer Ernst Paul Damzog

1882년 10월 30일 생으로 폴란드전에 참가한 Einsatzgruppe 지휘관 중 최고령자입니다. 1912년 경찰에 들어갔으며 1915년에는 육군에 입대해 헌병이 됩니다. 1933년 SS에 지원한 뒤 장기간의 경찰 경력을 인정받아 1934년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1/V : SS- Sturmbahnführer Dr Heinz Graefe

1908년 7월 15일 생으로 아버지는 1914년 전사했습니다. 1928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진학해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1932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작센의 법률사무소에 취직했습니다. 1937년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33년에 돌격대에 들어갔다가 같은해 말 친위대로 옮겼고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는 베를린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Einsatzkommando 2/V : SS- Sturmbahnführer Dr Robert Schefe

1909년 8월 23일 생으로 폴란드전에 참가한 주요 Einsatzgruppe 지휘관 중 최연소 였습니다. 1934년 친위대에 입대해 1935년 SD로 전출됐습니다. 이 사람의 경력이 흥미로운 점은 친위대에 들어 온 뒤 법학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점 입니다. 1936년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베를린의 게슈타포 본부에서 근무했습니다.

Einsatzgruppe z.b.V : SS-Obergruppenführer Udo von Woyrsch

주요 지휘관 중 유일한 귀족 출신으로 1895년 7월 24일 생입니다. 1차 대전당시 기병장교로 참전했으며 전후 Freikorps에 가입해 활동했습니다 1930년 친위대에 입대했는데 장교에다가 귀족출신이어서 그런지 진급이 빨랐습니다. 히믈러는 실레지아의 친위대를 책임지게 하기 위해서 직접 von Woyrsch를 직접 관리했던 모양입니다. 지역 친위대를 관리하다가 1936년 베를린으로 전출돼 히믈러의 참모진에 들어갑니다. 1938년에는 히믈러의 배려로 경찰 간부 교육과정을 이수합니다.

이 살인 전문가들을 보시면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중산층 이상에 고등 교육을 이수한 사회 엘리트층이라는 점 입니다. 이런 걸 보면 배운자들이 무서워 집니다.
하여간 이렇게 깡패집단인 친위대에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많이 가담한 것을 1920년대 후반 독일 지식인 사회의 급속한 보수화가 원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뭐,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대한민국도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그런지 지식인계층의 보수화가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히총통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