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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일 화요일

전쟁이 변화시킨 독일의 작은 마을 - Kirchmöser

Frontline and Factory : Comparative Perspectives on the Chemical Industry at War : 1914~1924를 읽는 중인데 1차대전 중 화학공업(주로 화약)에 대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습니다. 뒤에 간단한 소개글을 써 볼 생각입니다. 이 책은 개별주제에 대한 소논문을 모아놓은 책인데 그 중 독일의 한 작은 마을의 공업화에 대한 글이 상당히 좋습니다. Sebastian Kinder의 Transforming a village into an industrial town : The royal Prussian powder plant in Kirchmöser라는 글인데 이 글의 내용을 요약해 볼 까 합니다.

1차대전이 발발할 당시 독일에는 민간 화학기업들이 운영하는 화약공장외에 국영 화약 공장이 다섯 곳 있었다고 합니다. 슈판다우(Spandau), 하나우(Hanau)의 프로이센 왕립화약공장, 그나슈비츠(Gnaschwitz)의 작센왕립화약공장, 다하우(;;;;)와 잉골슈타트(Ingolstadt)의 바이에른왕립화약공장 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영화약공장들은 군대의 평화시 화약소요량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에 불과했고 민간이업들의 생산능력도 막대한 화약소모량 때문에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격화되면서 새로운 화약공장의 설립이 필요해졌습니다. 전쟁 발발전 독일 군부는 한달에 200톤의 화약을 생산하면 전시 소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산업동원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져서 1914년 가을에는 화약 생산량을 월 1천톤까지 끌어올렸지만 전선의 요구량은 충족시키지 못 했습니다.

독일정부는 1914년 9월에 새로운 국영화약공장을 설립하고 다하우, 잉골슈타트, 그나슈비츠의 설비를 증설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 새로운 공장은 결국 키르히뫼저(Kirchmöser)에 건설되는데 이 공장은 1차대전 중 새로 건설된 유일한 국영화약공장이었다고 하는군요. 나머지는 민간기업의 설비 증설로 충당했다고 합니다.
화약공장을 증설할 때 요구된 조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최소 350급 선박이 항행할 수 있는 수로에 위치할 것
- 4분의 1은 숲으로 되어 있는 350헥타르 면적의 야산, 혹은 그 근처에 위치할 것. 폭발사고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야산지역에 건설되어야 하며 숲은 적의 첩보활동으로 부터의 은닉에 필요함
- 주요 철도노선에서 4km이내에 위치할 것

이러한 필수조건 외에 요구된 부가 사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일일 8000~10000입방미터의 식수를 공급할 수 있을 것
- 폭발사고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서 건물로부터 250미터 이내에 주거지가 없어야 할 것
- 공장 주변에 600에서 800명의 노동자와 그 부양가족을 수용하고 공장 내 기숙사에 50에서 60명의 노동자를 수용할 수 있을 것
- 건설회사와 기타 공업기반을 갖추고 있을 것
- 석탄광산
- 가능하면 지가를 낮추기 위해 국유지일 것

이렇게 해서 1914년 11월 10일에 뫼저(Möser)라는 마을이 적합한 건설지로 추천됩니다. 전쟁 당시 약 30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던 이 마을은 하벨(Havel) 강을 끼고 있어 실레지엔과 루르 공업지대로의 접근성이 용이했고 동시에 함부르크(Hamburg)와 슈테틴(Stettin) 등으로의 접근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베를린-하노버 철도가 지나가는 지역에 위치해 철도 교통도 좋은 위치였습니다. 기본적인 요구조건은 대부분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문제는 건설 예정지역이 대부분 사유지였다는 것인데 이것은 총 1,154,480 마르크의 비용을 들여 국가가 매입했습니다.
빌헬름 2세의 최종승인은 1914년 11월 29일에 내려졌지만 실제 건설은 뫼저 마을이 선정된지 이틀 뒤인 11월 12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작은 마을이다 보니 충분한 건설 노동력을 확보할 수가 없었고 1915년 1월부터 3월까지는 겨울이다 보니 건설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노동력이었는데 주변 지역에서 3,000여명의 건설도동자가 모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가 농부여서 농번기에는 노동력이 다시 유출되는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군요. 결국 1915년 3월에는 전쟁포로를 동원하자는제안도 나왔으나 최종적으로는 점령한 폴란드에서 모집한 노동자를 투입하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1915년 1월 말까지 건설작업을 위해 베를린-하노버 철도선과 뫼저 마을을 연결하는 철도가 완성되었고 2월부터 건설작업이 시작되어 1915년 5월 7일 부터는 내부 설비 공사 단계에 들어갑니다. 1915년 7월 1일에는 건물 공사가 완료되어 생산라인 구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화약의 시험생산은 아직 공장단지가 완공되지 않은 1915년 5월 12일부터 시작되었으며 1918년 중순에는 공단 전체가 완성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당시 300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뫼저 마을은 1918년까지 6,000~7,000명의 공장노동자와 3,000명의 건설노동자가 거주하는 중소규모 도시로 발전합니다. 노동자들의 편의를 위해 대규모의 주택단지도 건설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전시에 급히 건설한 공단이다 보니 숙련노동자는 확보할 수 없었고 TNT 같이 상대적으로 복잡한 제품은 생산할 수 없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공단이 완공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전쟁이 끝나버렸습니다.



키르히뫼저의 인구는 1918년 말에는 1,000명 수준으로 감소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공장의 생산설비들은 프랑스, 벨기에, 세르비아에게 넘겨집니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정부는 전쟁 중 새로 만들어진 공업도시가 그냥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키르히뫼저의 공단은 1920년에 철도청(Reichsbahn)에 넘겨져 기관차 공장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 공장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포드-테일러식의 대량생산 공정을 적용해 기관차 정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제3제국 시기에 키르히뫼저는 중요한 철도공업지구로 탈바꿈합니다. 1939년에 키르히뫼저의 인구는 5,000명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이 도시가 몰락한 것은 2차대전 이후 동독으로 편입된 이후 였습니다. 동독 시기에도 키르히뫼저는 철도청의 정비공장이 있었지만 2차대전 이전의 수준은 회복하지 못했다고 하는군요.

2008년 6월 19일 목요일

북한의 전후 복구에 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지원

비록 북한인민들이 (전후복구에) 엄청난 노력을 쏳아 넣었다지만 "사회주의형제국가"들의 원조가 없었다면 신속한 전후복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미 1952년 11월 경부터 북한의 전후 복구를 위한 다국적 원조계획의 윤곽은 잡혀있었다. 1953년 9월 1일부터 29일까지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대표단은 경제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소련은 북한의 부채 중 절반을 탕감했으며 나머지 절반의 지불도 연기시켰다. 또한 소련은 북한에게 10억루블에 달하는 무상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총 60만 루블에 달하는 원조가 물자와 설비의 형태로 제공되었으며 나머지는 공장의 재건과 시설설비에 투입되었다. 특히 후자에는 청진, 성진, 남포의 주물공장과 흥남의 화학공장, 수풍의 수력발전소, 마동의 시멘트공장, 평양의 섬유공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소련은 양덕-청성간의 철도를 전력화 하는 것과 남포항의 복구, 평양 중앙 라디오 방송국을 건설하는 것을 지원했으며 평양에 병원 하나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어선, 버스, 농업기계, 화학비료, 과학서적, 그밖의 소비재를 원조 받았다.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에서 그들의 조선인 동료들이 받는 것과 동일한 월급을 받으며 근무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노동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것이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소련 대사관이 지급했다. 전체적으로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인 기술자에 비해 네 배의 월급을 받았다. 또한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의 외국인 상점을 이용하기 위해서 위안화를 별도로 지급받았다.

김일성은 (1953년) 11월 12일에서 27일에 걸쳐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 소련정부와 체결했던 것과 같은 조약을 체결했다. 베이징 정부는 한국전쟁 이래 누적된 북한의 채무를 모두 탕감하고 8조 위안에 달하는 경제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1954년에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3조 위안의 원조를 받았으며 이 중 76.14퍼센트는 물자지원, 그리고 23.86%는 재정지원이었다. 중국은 남포의 유리 공장과 한 개의 철물 공장을 포함해 몇 개의 공장을 재건하는 것을 도왔다.
또한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해방군 부대는 북한의 노동력 부족을 완화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인민해방군 병사들은 전쟁 기간 중 파괴된 북한의 외무성 건물과 중앙은행건물을 다시 건설하는데 투입되었으며 철도와 교량, 도로의 보수공사에도 참여했다. 1954년에 총 295명에 달하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북한의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북한에 체류했으며 동시에 2,963명의 북한 기술자들이 실무경험을 쌓기 위해 중국으로 1년 기간의 연수를 떠났다. 중국은 북한에 여러 가지의 기계와 어선, 기관차, 화차, 건축 자재, 그리고 면화를 제공했다. 1950년대 중반에 중국은 북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소비재 공급처였다.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중국제 군복을 입었으며 북한의 상점과 백화점에서는 중국제 의류, 방한복, 셔츠, 양말, 속옷, 운동화, 식기, 세면도구등을 판매했다.

1953년 말에 북한정부는 동유럽국가들, 그리고 몽골을 상대로 중국과 맺었던 것과 비슷한 조약을 체결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휘천과 운산에 기계 생산공장을, 덕천에 자동차 공장을 한 개 건설하기로 했다. 그리고 동독은 인쇄소, 디젤엔진공장, 제철소를 건설하기로 했다. 또 폴란드 정부는 원산과 평양에 기관차 및 화차 수리 공장을 건설하는 것과 북한의 광산 세 곳을 기계화 하는데 지원하기로 했다. 헝가리는 구성, 평양, 봉궁에 기계 공장, 저울공장, 페인트 공장을 건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루마니아는 북한에게 시멘트공장, 제약공장, 어선, 기계류 등 6500만 루블에 해당하는 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불가리아는 1954년에서 1955년에 걸쳐 2000만 루블의 원조를 했다. 불가리아는 북한에 섬유와 판유리를 보내는 한편 벽돌공장과 제제소에 한 곳에 장비를 제공하기로 했다. 1954년부터 1956년에 걸쳐 동유럽 국가들은 북한에 총 11억3400만 루블에 해당하는 원조를 했다.

게다가 몽골정부도 스스로가 해외 원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입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의 재건을 위해 기여를 하기로 결정했다. 몽골은 특별히 북한에 보낼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1만마리의 말을 보내기로 했다.


Balázs Szalontai, 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 : Soviet-DPRK Relations and the Roots of North Korean Despotism 1953-1964(Woodrow Wilson Center Press/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pp.45-47

몽골정부의 원조 내역을 보니 뭔가 안습이란 생각이 듭니다. 과연 북조선 인민들은 몽골정부가 어떤 원조를 해 줬는지 알긴 했을까 궁금하군요.

추가 - 아래의 사진은 1957년에 북한에 파견된 동독 기술자 에리히 레셀(Erich Robert Ressel)이 촬영한 사진입니다. 말을 탄 인민군 병사들인데 왠지 이 말들이 몽골에서 보낸 그 놈들이 아닐까 싶군요.

Erich Robert Ressel,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 : 50년대의 북녘, 북녘사람들』, (효형출판, 2000), 245쪽

2008년 1월 13일 일요일

산업화된 전쟁의 비산업적 요소 : 독일육군의 마필 사용 1939~1942

2차 대전당시의 독일 육군이 마필에 수송수단을 크게 의존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니 좀 식상한 이야기 입니다. 그렇지만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마필 사용은 그 규모의 방대함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산업화된 전쟁에서 산업화와는 거리가 먼 말 이라는 동물 조차도 전쟁의 규모에 걸맞게 대량으로 사용되고 소모된다는 점이 꽤 재미있더군요.

독일이 2차대전에 돌입한 1939년 9월에 독일 육군이 보유한 마필은 약 59만 마리였습니다. 비록 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으로 대규모의 마필이 입수되긴 했지만 전쟁 발발과 함께 신규부대 편성이 대규모로 이뤄지면서 마필의 입수는 상당히 골치아픈 일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독일 육군의 1개 보병사단은 약 4,800필 정도의 말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당시 독일군의 1개월 보충량으로는 3개 사단 정도의 소요량을 맞추는 정도에 그쳤다고 합니다. 다행히 폴란드 전은 단시일 내에 종결되었고 독일군은 아주 쓸만한 말 공급처를 확보하게 됐습니다. 1940년 초부터 폴란드는 독일군에 1주일 평균 4,000마리의 말을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의 서부전역은 비교적 단기일에 끝났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기동이 이뤄진 까닭에 마필의 소모가 컸습니다. 제 4군의 경우 1940년 5월 10일 말 52,700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프랑스 전역이 종결될 무렵에는 44,000마리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부 전역이 순식간에 종결되면서 독일군은 폴란드에 이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라는 새로운 말 공급처를 얻게 됩니다.

독일의 다음 목표는 소련이었는데 소련은 독일군의 기계화 부대는 물론 말들에게도 매우 어려운 도전이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625,000마리의 말을 동원했으며 이 중 13만 마리는 중부집단군의 주력 야전군인 제 4군에 소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련 전장은 독일군의 말들에게는 아주 지독한 곳이 되었습니다. 넓은 땅 만큼이나 신속한 진격이 거듭되다 보니 보급로는 길어지고 이것은 말 사료의 전방 추진을 어렵게 했습니다. 폴란드와 서유럽산의 덩치 큰 말들은 독일군의 철제 달구지와 보병사단의 주력인 105mm 포를 견인할 만큼 튼튼했지만 동시에 먹어대는 사료의 양도 엄청났습니다. 사료 추진이 제때 되지 않으니 픽픽쓰러지는 말들이 매우 많았고 그 숫자는 소련 깊숙이 진격할수록 늘어났습니다. 독일군의 마필 손실 중 폐사는 1941년 7월 1일부터 7월 10일까지는 2,839마리였는데 8월 1일부터 8월 10일에는 9,847마리로 급증했습니다. 마필의 보충은 인력과 장비의 보충 만큼이나 더뎠는데 7월 1일~10일 기간 동안 폐사 2,839마리, 부상 및 질병 9,442마리 등 총 12,281마리를 상실하는 동안 보충된 것은 1,500마리에 불과했습니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11월 1일부터 10일 사이에는 폐사 11,605마리, 부상 및 질병 7,991마리에 보충은 1,700마리로 마필의 상황은 크게 악화되어 보병사단들이 제대로 보급추진을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습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말의 손실은 더욱 높아졌고 독일군의 수의 부대는 질병에 걸리거나 쇠약해진 말들이 급증해 기능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보통 야전군급 수의부대는 최대 550마리의 말을 치료할 수 있었는데 41년 겨울이 되면 2,000마리에서 많게는 3,000마리 이상을 치료해야 했다고 합니다.
물론 소련군으로 부터도 많은 말을 노획했고 현지 징발로도 보충이 가능하긴 했지만 문제는 러시아산 말은 튼튼하기는 했으나 폴란드와 서유럽산 말들에 비해 덩치가 작고 체력이 떨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산 말들은 독일군의 표준형 철제 달구지를 끌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 농촌에서 사용하는 전통적인 목재 달구지를 사용해야 했는데 이것은 보통 독일군용 달구지보다 수송량이 적었다고 합니다. 러시아산 말로 105mm포를 견인하려면 포 1문당 더 많은 말이 필요했습니다.

독일군은 1942년 공세를 준비하면서 동부전선으로 보낼 약 21만 마리의 보충용 말을 징발했고 이 중 109,000 마리가 1942년 5월 1일까지 전선에 도착했습니다. 마필의 보충은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사단들로부터 인계받는 방식으로도 이뤄졌는데 전차와 같은 중장비처럼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부대들은 보유한 마필을 전선에 있는 부대에 넘겨주고 이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2년 하계전역 개시당시 평균적인 보병사단들의 마필 보유량은 3,000마리 선에 그쳤다고 합니다. 다른 장비와 물자처럼 말 또한 동부전선의 지독한 소모전 앞에서는 배겨낼 재주가 없었고 일선 부대의 말 보유량은 계속 줄어듭니다. 1944년 봄에 가면 보병사단 1개의 평균 마필 보유량은 2,000마리 선으로 떨어진다고 하지요.

2007년 11월 16일 금요일

1939년 폴란드 침공과 소련의 동원 문제

오늘의 이야기는 독일육군의 흑역사 -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시의 사례에 이은 속편입니다. 이번의 주인공은 천하의 대인배 스탈린 동지의 지도를 받는 붉은군대입니다.
사실 전편의 독일군은 총통의 갑작스러운 명령으로 만슈타인이 불과 몇 시간 만에 뚝딱 만든 계획으로 움직이다 보니 엉망이 되었는데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의 소련군은 오래전부터 계획이 세워지고 준비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엉망이었다는 점에서 더 안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과거 소련의 공식적인 문헌들은 1939년 폴란드 침공에 대해 대략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술하고 있었다는군요.

소련군대에 폴란드 국경을 넘어 서부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의 근로인민들을 폴란드 의 압제와 파시스트의 노예화로부터 해방하고 보호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마자 벨로루시 전선군과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모든 병사와 지휘관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영광된 인민해방의 임무를 달성하겠노라고 맹세했다. 전선군 군사평의회의 명령서는 소련 병사들은 서부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로 «정복자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형제들을 지주와 자본가들의 모든 압제와 착취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진격하는 것이라고 언명했다. 소련 병사들은 특히 인민들을 위협자들로부터 보호하고 민족에 상관없이 인민들의 재산을 보호하며 폴란드군과 폴란드 정부 관료들이라도 소련군에게 저항하지 않을 경우 정중하게 다루도록 명령받았다. 또한 공세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도시와 마을에 대한 포격 및 폭격은 금지되었으며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헝가리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했다.
소련군대는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군작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소련군은 해방 전역을 수행하기 때문에 엄격한 군기와 조직력을 유지해야 했으며 또한 적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이 작전은 단지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서부의 근로인민들을 해방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독일 파시스트들의 노예화와 빈곤화, 그리고 완전한 물리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수백년 동안 그들의 원래 조국과 민족으로 다시 통합되기를 갈망해온 인민들의 염원을 민주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Excerpts on Soviet 1938-40 operations from The History of Wafare, Military Art, and Military Science, a 1977 textbook of the Military Academy of the General Staff of the USSR Armed Forces」,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6 No.1, March 1997, pp.110-111

그런데 실제로 이 임무는 그다지 영광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특히 그 준비 과정은 영광과는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까지의 거리 만큼이나 멀었던 것 같습니다.

영광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이 이야기는 대충 이렇게 시작됩니다.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스탈린은 폴란드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즉시 침공준비를 시작합니다. 9월 3일에는 키예프 특별군관구, 벨로루시 특별군관구, 하리코프 군관구, 오룔 군관고, 칼리닌 군관구, 레닌그라드 군관구, 모스크바 군관구에 다음과 같은 지시가 하달됩니다. 1) 전역까지 1년 남은 병사들은 1개월간 복무 연장 2) 각급 부대 지휘관 및 정치장교들의 휴가 취소 3) 모든 부대는 전투 태세를 갖추고 무기, 장비 및 물자를 점검할 것. 그리고 9월 6일에는 22호 동원계획에 따라 위에서 언급한 군관구의 예비역들은 전역 12년차 까지 소집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보로실로프는 동원 부대들에게 집결지들을 지정하고 이에 따라 폴란드와 인접한 벨로루시 특별군관구와 키예프 특별군관구는 소속 부대들에 대한 재배치를 시작했습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이무렵 독일군대는 폴란드군의 저항을 차근 차근 분쇄하면서 바르샤바로 쇄도하고 있었지요.

마침내 9월 11일에는 벨로루시 특별군관구가 벨로루시 전선군으로, 우크라이나 특별군관구가 우크라이나 전선군으로 개칭되어 침공준비에 박차가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전에 동원된 붉은군대의 전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벨로루시 전선군 : М. П. 코발레프 2급 야전군지휘관
- 제 3군 : В. И. 쿠즈네초프 군단지휘관
- 제 11군 : Н. П. 메드베데프 사단지휘관
- 제 10군 : И. Г. 자하르킨 군단지휘관
- 제 4군 : В. И. 추이코프 사단지휘관
- 볼딘 기병-기계화집단(Конно-механизированная Группа) : В. И. 볼딘 군단지휘관. 제 3, 6기병군단, 제 15전차군단
- 제 23 독립소총병군단
- 제 22 항공연대

우크라이나 전선군 : С. К. 티모셴코 1급 야전군지휘관
- 제 5군 : И. Г. 소베트니코프 사단지휘관 : 제 8, 27소총병군단, 제 14, 36전차여단
- 제 6군 : Ф. И. 골리코프 군단지휘관 : 제 13, 17, 49, 36소총병군단, 제 2기병군단, 제 24, 10, 38전차여단
- 제 12군 : И. В. 튤레네프 2급 야전군지휘관 : 제 6, 37소총병군단, 제 23, 26전차여단
- 제 13군 : 제 35소총병군단
- 기병-기계화집단 : 제 4, 5기병군단, 제 25전차군단
- 제 15 독립소총병군단
- 제 13 항공여단

이렇게 출동할 부대가 정해지고 집결지도 지정되었으니 해당 부대들이 기동을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미 소련은 1938년부터 22호 동원계획에 따른 준비를 해 왔다는 것을 위에서 언급했지요.

그런데 황당하게도 1년 동안 준비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준비가 첫 단계부터 엉망으로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동원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병력 동원이 느리게 이뤄져서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경우 이 작전을 위해 신규 편성하는 야전군들은 9월 17일이 돼서야 “대충” 동원을 완료할 수 있었고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는 계획과는 달리 이미 편성이 완료된 부대들만 진격을 해야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동원이 완료된 것은 9월 27일의 일이었는데 이 때는 상황이 거의 종료됐을 무렵이죠;;;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핵심 기동전력인 제 25전차군단은 동원 3일차 까지 편제의 30%도 채우지 못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병력 뿐 아니라 장비 동원도 문제였습니다. 사람이야 억지로 머릿수를 채울수는 있을텐데 없는 물건은 땅에서 솟는게 아니니까요. 예를 들어 제 36전차여단의 경우 완전편제시 트랙터 127대가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동원된 것은 42대에 불과했으며 ZIS-6 트럭은 187대가 필요했는데 실제로는 15대에 불과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 25전차군단은 편제상 각종 차량 1,142대가 있어야 했는데 9월 11일 까지 451대를 확보하는 데 그쳤습니다. 제 13소총병군단은 편제상 2,500대의 트럭이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9월 7일까지 확보한 것은 1200대에 그쳤고 게다가 이 중에서 20%는 예비부품이나 타이어가 없어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이 사단은 1,400통의 연료를 확보하고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160통만 가지고 있었으니 차량이 있어도 모두 굴리기는 어려웠습니다. 벨로루시 전선군의 제 6전차여단은 장갑차가 단 1대도 없었습니다.
차량 같은 것은 대형 장비니 그렇다 치더라도 동원된 예비군에 지급할 개인 장비까지 부족했습니다. 제 27소총군단은 철모 16,379개가 모자랐으며 제 15소총군단은 군화 2,000족이 없었고 제 36소총군단은 허리띠 2,000개가 부족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동원된 부대들을 폴란드 국경까지 이동시킬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 입니다.
철도 수송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소련의 철도는 이탈리아의 철도와 비슷하게 돌아갔던 모양입니다. 예를 들어 제 96소총병사단의 선발대인 41소총병연대는 두 시간 늦게 열차에 탑승했는데 제 44소총병사단의 경우 포병연대와 직할대는 침공이 개시될 때 까지 기차를 타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차 시간이 늦는 것은 그렇다 치고 집결지에서 기차역으로 이동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특히 전차부대의 경우는 심각했다고 합니다. 침공에 투입된 부대들 중에는 T-26을 장비한부대가 많았는데 T-26은 기계적 신뢰성이 낮아 기차역으로 행군하는 동안 자주 도로에 주저앉아 버렸다지요. 간신히 기차역에 도착한 몇몇 부대는 전차들의 엔진 및 동력계통의 수명이 행군도중(!!!!) 초과되어 기차를 탈 수 없었다는 어이없는 사태도 발생했습니다. 머리가 세개 달린 T-28을 장비한 제 10전차여단은 12일에 기차에 탑승해 이동해야 했으나 실제로는 제때 화차가 준비되지 못 해서 16일에야 장비 적재를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대가 국경에 전개를 완료한 것은 19일 이었고 결국 폴란드 침공이 시작됐을 때는 일부 부대는 아직 화차에서 내리지도 못 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철도는 물론이고 도로 이동도 엉망이었습니다. 이런 대규모 부대의 기동을 위해서는 사전에 도로를 잘 배분해 놔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하지 못 해 한 도로에 여러 부대가 뒤섞이는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했습니다.

한편, 소련군대가 사전에 준비된 동원조차 완료하지 못해 쩔쩔매는 동안 독일군은 폴란드를휩쓸고는 독소불가침조약에서 합의된 소련 영역까지 넘어오고 있었습니다. 결국 소련은 동원이 완료되지 못한 상태에서 당장 준비된 병력만 가지고 침공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넘은 부대들도 상당수는 편성이 완료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360독립통신대대의 경우 침공 당시 편제의 60%에 불과했고 제 362독립무전대대는 편제의 82% 수준이었습니다.

결국 1939년 9월 17일 오전 5시 40분, 폴란드 침공은 동원이 대충 완료된 상황에서 시작됐고 선발대가 국경을 넘는 동안 원래 침공에 같이 투입될 나머지 부대들은 계속 편성 중 이었습니다.
제 60소총병사단은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편제의 67%까지만 동원이 된 상태였습니다. 특히 특수병과의 동원률은 매우 낮았습니다. 제 81소총병사단의 경우 기술병과는 45%, 행정 및 보급병과는 69%, 의무병과는 47%, 수의병과는 79%만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단을 수송할 자동차 대대의 정비중대는 편제의 20%만 채운 상태였습니다. 제 99소총병사단은 침공 직전인 16일 까지도 포병연대가 편성되지 않아 보병만 달랑 있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한편, 먼저 나간 침공부대들은 폴란드군의 저항이 신통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병력 및 장비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특히 비전투 부대는 편제율이 낮았는데 이것은 작전 수행에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경우 제빵부대들의 편제미달이 심각해 사단당 하루 12톤의 빵만 배급되고 있었습니다.(실제 배급 소요량은 17톤) 대부분의 침공 부대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며 진격했고 폴란드군의 식료품을 탈취하지 못한 부대들은 작전이 종료될 때 까지 배를 곯았다고 전해집니다.

폴란드 침공에서 드러난 소련군의 문제라면 크게 두 개를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첫째, 사전에 계획과 준비가 꾸준히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동원은 엉망이었다는 점. 둘째, 자국 영토 내에서 이동하는 것 조차 엉망이었다는 점. 이런 문제점은 핀란드 전에서도 거듭되었고 결국 1941년의 대재앙의 기원이 되고 말지요.

2007년 4월 23일 월요일

폴란드군의 하노버 점령 통치 계획 - 1971년 들소작전 계획 중

전선군 사령부는 하노버 수비대의 항복에 따라 제 5군 사령부에 도시 기능의 회복을 위한 지원을 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우리 폴란드군은 제 5군 사령부의 계획에 따라서 다음의 인력을 배속받는다.

1. 국가인민군(Nationale Volksarmee, 동독군) 헌병 1개 중대
2.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군 방첩부대 1개 중대
3. 독일민주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당원 (20명)
4. 독일민주공화국의 방송 언론인 (8명)
5. 타자 및 통신 담당 (12명)
6. 특별 선전대 (장교 및 부사관 24명)

이상의 인력은 오늘 오후 6시를 기해 제 5군 사령부의 통제를 받는다. 다음날부터 독일민주공화국의 행정 요원이 하노버에 투입될 예정이다. 독일민주공화국의 행정요원이 하노버에 도착하는 것은 사전에 통보될 것이다.

제 5군 사령부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a. 하노버 주둔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제 6전차사단의 선임장교를 주둔군 사령관으로 둔다.
b. 위에서 언급한 인력과 필요한 장비는 하노버 주둔군 사령부의 통제하에 둔다. 국가인민군의 지원을 받아 새로 정규 경찰을 편성한다.
c. 인민들에게 최대한 신속하고 효율적인 언론 보도를 한다.
d. 항복한 적군을 수용할 포로수용소를 건설한다.
e. 병기고 및 물류시설을 철저히 보호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한다.
f. 상수도, 발전시설, 난방시설을 정상화 한다.
g. 식량 및 필수품 배급을 위한 조직을 만든다.
h. 독일연방공화국의 독일공산당(DKP)과 사회민주당(SPD)으로 합작 지방 정부를 만든다.
i. 파괴된 공장을 복구해 최대한 빨리 생산을 재개 할 수 있도록 한다.

(중 략)

하노버 시의 민간인과 포로에게 공급할 식량 비축량 및 의약품 재고량을 확인한 뒤 1971년 4월 29일 오전 11시까지 전선군 참모부에 보고할 것.

실롱스크 군관구 정치국 문서 152448/74/42

Vojtech Mastby and Malcome Byrne,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380-381

1971년 4월 21일부터 4월 28일까지 실시된 들소작전에 포함된 시나리오라고 합니다. 폴란드군이 하노버를 점령한 후 취해야 할 행동 이라는군요. 이 시기의 바르샤바 조약군은 전반적으로 낙관적인 가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점령지역에 새로운 정부 수립까지 생각했던 것을 보면. 그리고 합작 대상으로는 서독에서 진보적이라고 할 만한 사회민주당과 독일공산당이 언급 돼 있고 우익 정당은 언급이 없습니다. 독일공산당은 서독에서 불법화 된 이래 아주 세력이 죽었고 이 시점에서는 이렇다 할 세력이 없었습니다.

이걸 읽다 보니 60~70년대 북한애들은 서울을 확보한 뒤 어떤 조치를 취할 생각이었는지 궁금해 집니다. 남쪽에는 합작할 만한 진보적 정당이 없었으니 합작의 형태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뭐, 그것은 통일이 되면 알 수 있겠지요. 통일이 될 때 까지 살아야 겠습니다.

2007년 2월 24일 토요일

1차 대전 동부전선의 전쟁포로

2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은 서부전선에 비해 그 영향력이 과소 평가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이야기 돼 왔습다만 탄넨베르크 전투나 브루실로프 공세 같은 몇몇 전투를 제외하면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 1차 대전의 동부전선에 비하면 양반인 셈입니다. 오죽하면 독일애들이 1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역을 Die vergessene Front라고 하겠습니까.

2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엄청난 인력과 물량이 동원된 전장이었지만 1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규모가 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차 대전 동안 포로가 된 교전국들의 군인이 약 900만 명인데 이 중 대략 500만 명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포로라고 하니까요.
무엇보다 2차 대전당시에는 주로 소련측의 포로가 압도적으로 많이 잡힌데 비해 1차 대전당시에는 대규모 육군을 보유했으나 전투력은 부실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있었기 때문에 양측이 모두 사이 좋게 많은 포로를 잡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차 대전 당시 동부전선의 전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전체적으로 독일-오스트리아군이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면서 우세를 보이지만 간간히 러시아군의 강력한 반격도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서로 승리와 패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난타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고 독일은 거의 일방적으로 승리만을 거두는 형국입니다.

이렇다 보니 포로의 비율을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가 서로 비슷한 규모로 엄청난 포로를 내고 있고 독일은 상대적으로 극히 적은 포로만을 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러시아군은 1918년 초까지 독일에 240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에 186만 명, 그리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에 3만~4만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17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85만 명,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 두 나라가 합쳐서 8만 명 가량이 러시아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오스트리아는 근소한 차로 적자를 면했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는 적자를 낸 셈이군요.
이 중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목할 만한 점은 전쟁 초-중반에 엄청나게 많은 포로를 발생시켰다는 것 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체 포로 중 73만 명은 개전 첫 1년에 잡힌 것이고 1915년 12월까지 포로 숫자는 97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즉 1년 만에 전체 포로의 50%가 발생한 것 입니다. 1916년 6월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38만의 포로가 발생한 것을 제외하면 전쟁 후기에는 포로가 되는 숫자는 크게 감소합니다. 하긴, 초반에 원체 많이 잡히다 보니 1916년 이후가 되면 더 잡힐 만큼의 병력도 없었다지요.

※ 브루실로프 공세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 러시아측의 보고서에는 포로가 19만으로 돼 있다는 것 입니다. 1차 대전 연구자들은 이렇게 된 원인이 러시아측의 포로 집계가 잘못된 것 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독일-러시아간의 대결에서는 독일이 꾸준하게 승리를 거두면서 적당히(?) 많은 숫자의 포로를 잡고 있습니다. 간단히 1914-1915년 전역, 즉 1914년 탄넨베르크 전투부터 1915년의 제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까지 여러 차례의 전투가 적당한 사례가 되겠습니다. 독일군은 탄넨베르크에서 10만, 1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3만,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9만2천명의 포로를 잡았습니다. 상당한 성과이긴 하지만 결정타를 먹이지는 못해서 러시아군은 계속 밀려나면서도 붕괴되지 않고 저항을 하지요.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의 대결은 그야말로 난타전의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전쟁 초기인 1914년 9월의 갈리치아 전역에서 10만에 달하는 포로를 냈다고 하지요. 그리고 1915년 1월~2월에 걸쳐 프세미우(Przemysl) 구원을 위해 감행한 공격에서는 러시아군 6만을 생포했지만 오스트리아군도 4만(!)의 포로를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3월 23일 프세미우가 함락되면서 11만9천명의 포로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독일군이 증원된 뒤 갈리치아에서 벌어진 5월 전역에서는 러시아가 포로만 14만에 달하는 패배를 당합니다. 이건 뭐 난장판이 따로 없군요.

이렇게 난타전이 벌어지면 인구가 부족한 쪽이 결정적으로 부족한데 1차 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가 바로 그런 꼴이었습니다. 특히 1914-1915년 전역에서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을 대규모로 잃어 버렸다는 점은 오스트리아의 전쟁 역량을 결정적으로 약화 시켰습니다. 1915년 중반부터 대규모로 투입된 속성으로 양성한 장교단은 대학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전쟁 이전의 직업군인들에 비해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 편이었다지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다민족 국가라는 점 때문에 특히 포로가 더 많이 발생했습니다.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체코인으로 편성된 제 8보병사단은 사단전체가 항복해 버려 마치 2차 대전당시 소련군 소속의 에스토니아인 부대의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특히 체코계 부대는 “슬라브 형제”들과 싸우는 것을 별로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헝가리나 크로아티아계 국민을 제외하면 전쟁에 별다른 열의가 없었다고 하지요. 슬라브계 국민들은 오히려 러시아에 더 친근감을 느낄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입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러시아인을 증오하는 폴란드인 역시 강대국의 전쟁에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독일이 1916년에 “해방(?)” 시킨 폴란드 지역에서 러시아와 싸울 의용병을 모집했을 때 당초 목표는 1917년 상반기 까지 폴란드 인으로 15개 보병사단을 편성하는 것 이었는데 지원자는 동부 폴란드 전역에서 4천명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폴란드인의 입장에서는 독일인이나 러시아인이나 그놈이 그놈 이었겠지요.

이런 강대국들간의 난타전 말고도 루마니아와 같은 어중간한 나라의 흥미로운 사례도 있습니다. 루마니아는 1916년 9월 헝가리를 침공했다가 바로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의 반격으로 박살이 나는데 독일군의 11월 공세에서 루마니아군은 14만명의 포로 외에도 그냥 집으로 돌아간 병사가 9만명에 달해 말 그대로 군대가 분해돼 버렸다고 전해집니다.(한편, 같은 기간 루마니아군의 전사자는 14,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루마니아군은 사실상 증발해 버리고 러시아군이 루마니아에 들어와 독일군과 싸우는 양상으로 전개가 됩니다.

전쟁포로의 처우는 아주 개판이었습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는 독일에 포로가 된 러시아 포로들의 비참한 모습이 짧지만 인상적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러시아에 포로가 된 독일, 오스트리아 포로에 비하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잡힌 러시아 포로는 “아주 약간” 나은 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1914/15년 겨울과 1915/16년 겨울에 유행한 티푸스로 러시아군에 포로가 된 인원 중 30만 명이 사망했고 이 외에도 강제노동으로 인한 사망자도 엄청났습니다. 무르만스크 철도 공사에서는 2만5천명이 중노동과 영양실조로 사망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이렇게 대규모의 포로가 발생한 것은 양측 모두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는 1916년 여름이 되자 전쟁 수행능력을 거의 상실해 더 이상 대규모 공세작전을 펼칠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독일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지요. 러시아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짜르 체제가 붕괴돼 버리죠.

이런 것을 볼 때 2차 대전당시 소련이 1차 대전당시의 러시아보다 더 짧은 기간동안 더 많은 손실을 입고도 전쟁에 승리한 것을 보면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2차 대전 때도 짜르 체제였다면 러시아는 1941년에 전쟁에 졌을지도 모릅니다.

참고서적

Holger Herwig, The first world war : Germany and Austria-Hungary 1914-1918, Arnold, 1997
Reinhard Nachtigal, Die Kriegsgefangenen-verluste an der Ostfront, Die vergessene Front – Der Osten 1914/1915, Schoningh, 2006
Dennis E. Showalter, Tannenberg : Clash of Empires, Brassey’s, 2004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917, Penguin Books, 1998

2007년 1월 29일 월요일

1차대전 이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민족문제

Sonnet님이 쓰신 최근 레바논 현황에 대한 글을 보니 다음의 구절이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레바논 정부군의 병사들은 각각 소속 종파를 찾아 탈영했다. 슈프 산악지대에서는 드루즈파가 팔랑헤당을 무참히 부수었다. 이스라엘군과 레바논 정부군이 지원하지 않으면 팔랑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미 해병대가 재건한 레바논 정부와 정부군은 와해되고 있었다.


확실히 민족, 정파 구성이 복잡한 국가에서 멀쩡한 단일 통치체제를 확립하는 것은 어려운 과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문제는 19세기 민족주의의 창궐 이후 여러 국가들을 엿 먹였지요.
근대 민족주의의 최대 피해자라면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꼽을 수 있을 것 입니다. 두 국가 모두 민족주의가 제국이 붕괴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지요.

그래서 다인종으로 구성된 국가의 문제점을 언급할 때 많이 언급되는 사례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이 항상 끼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은 당장 큼지막한 덩어리로 쪼개더라도 독일인, 헝가리인, 폴란드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인, 루테니아인 등으로 나뉘고 발칸 반도의 그저 그런(?) 민족들 까지 넣으면 더욱 더 골치가 아파집니다.
민족 구성이 복잡했던 덕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의 군대에서는 사용 언어가 명령어(Kommandosprache)와 직무어(Dienstsprache), 그리고 지휘 및 통신용 언어로 나뉘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신민들 중 상당수가 황제폐하가 사용하시는 Deutsch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으니 당연한 결과였을 것 입니다.
명령어, 그리고 지휘 및 부대간 통신 언어는 독일어였지만 직무어는 민족별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빈이나 짤즈부르크 등에서 편성되는 독일인 부대의 경우 명령어와 직무어가 모두 독일어 였지만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인 부대는 명령어는 독일어, 직무어는 헝가리어, 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Erwin A. Schmidl의 짧은 에세이, Die k.u.k Armee : intergrierendes Element eines zerfallenden Staates? 에는 1차대전 발발 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참모부에서 각 부대별 사용 언어를 조사한 결과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조사에 따르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의 각 연대 및 독립대대 중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부대는 142개 였고 2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부대는 163개, 그리고 3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부대가 24개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런 경향은 국경지대, 혹은 민족별 접경지역에서 심했는데 예를 들어 프세미시우(Przemysl) 10보병연대는 연대 병력 중 47%가 루테니아어, 43%가 폴란드어, 10%가 기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66보병연대는 46%가 슬로바키아어, 25%가 헝가리어(magyarische), 22%가 루테니아어, 7%가 기타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우 부사관의 임무에는 병사들 간의 ‘통역’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하며 또 전쟁이전 임관한 장교들은 배치된 연대의 공식어를 배워야 했다고 합니다.

언어에 따른 지휘계통상의 문제가 기술적인 것 이었다면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 아주 골치 아픈 물건이었습니다. 평화시에 입대한 직업군인 장교나 부사관들은 민족에 상관없이 황제에 충성하는 편 이었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소집된 장교나 부사관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전쟁 기간 중 대학생이나 아비투어 합격자는 장교로 소집됐는데 이들 중 많은 수는 대학에서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채 들어왔다는 점 입니다. 당연히 많은 수가 말도 안통하는 황제에게 충성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학생이나 아비투어 합격자의 20%가 유대인이었다는 점 도 문제였습니다. 유대인은 민족을 불문하고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었죠. 유대인들이 장교로 충원되니 반유대정서를 가지고 있는 병사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 지는 뻔 했습니다.

결국 이런 사회적인 문제는 군대의 편제, 교리, 장비 만큼이나 전쟁 초-중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연달아 참패를 당하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러시아군의 공세가 개시되면 폴란드나 체코인 부대는 대규모로 항복해 버렸다고 하지요.

그러나 sonnet님의 중동문제에 대한 글들을 계속 보다 보니 21세기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신 레바논같은 나라의 이야기를 하는 쪽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어쨌든, 대한민국 군대에 민족문제가 없다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지역 문제가 있다고는 해도 최소한 경상도 말이나 전라도 말이 서로 못 알아먹을 수준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럭저럭 균질적인 사회구성을 가진 덕에 이런 저런 문제가 많아도 국가가 유지되는게 아닐까 가끔씩 생각해 봅니다.

2006년 12월 19일 화요일

폴란드 침공에 참가한 Einsatzgruppe 주요 지휘관들

독일의 Einsatzgruppen은 소련에서 깽판친 것이 꽤 유명하지만 처음 이들의 깽판에 피박을 본 곳은 폴란드 였습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는 Einsatzgruppe I 부터 z.b.V 까지 6개 Gruppe가 투입됐다고 합니다. Alexander B. Rossino의 Hitler strikes Poland에는 폴란드전에 참가한 Einsatzgruppen 지휘관들의 약력을 잘 정리해 놨는데 이게 꽤 흥미롭더군요. Rossino가 정리한 주요 지휘관들의 약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Einsatzgruppe I : SS-Brigadeführer Bruno Streckenbach

이 양반은 1902년 2월 7일 생으로 부친은 함부르크의 세관 공무원이었다고 합니다. 1919년 김나지움에 입학했지만 공부가 별로 재미 없었는지 자퇴하고 Freikorps에 자원해 함부르크의 사회주의자들을 열심히 때려잡았습니다. 모범적인 반공청년이었군요. Streckenbach가 소속된 Freikorps는 곧 정규군으로 흡수가 됐는데 군에서 제대한 뒤 이런 저런 자영업을 하다가 1930년 나치당에 가입했습니다. 1년 남짓 돌격대에 있다가 1931년 친위대로 옮겼고 1933년에는 SD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또다시 반공의 투사가 되어 이름을 날렸다고 하는 군요. 1939년에 Brigadeführer로 진급했습니다.

Einsatzkommando 1/I : SS-Sturmbahnführer Dr Ludwig Hahn

이 양반은 1908년 1월 23일 생으로 부친은 농부였습니다. 1930년 나치당에 가입해 1년 정도 돌격대원을 하다가 1931년 이 짓을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1933년에는 다시 친위대에 가입했고 1935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같은해 6월 SD로 전속됐고 1937년에는 바이마르의 게슈타포 지휘관이 됩니다.

Einsatzkommando 2/I : SS- Sturmbahnführer Dr Bruno Müller

이 양반은 1905년 9월 13일 생으로 알자스 태생입니다. 부모가 골수 독일 민족주의자 인지라 1차대전이 끝나고 프랑스가 알자스를 다시 점령하자 독일로 이주합니다. 1925년에 착실하게 김나지움을 마친 뒤 취직을 했는데 자리가 잡힐만 하니 대공황.... 결국 이 양반 대학에 진학합니다. 올덴부그크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 취득. 1932년 친위대에 입대한 뒤 역시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3/I : SS- Sturmbahnführer Dr Alfred Hasselberg

1908년 8월 30일생. 전형적인 독일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군에 지원하지만 경쟁률이 높아 탈락. 1927년 대학에 진학해서 1935년 5월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박사과정 진학 이전에 지방법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는군요. 1935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몇 달 뒤 다시 친위대에 자원합니다. 1936년 잠시 베를린의 게슈타포 본부에서 근무하다가 1937년부터 폼메른의 슈나이데뮐(Schneidemühl) 게슈타포 책임자로 근무합니다.

Einsatzkommando 4/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Karl Brunner

1900년 7월 26일 생. 1917년 육군에 자원해 2급 철십자훈장을 수여 받았습니다. 1919년 제대한 뒤 다시 고등학교에 복학해서 학업을 하려는 찰나... 우익 학생들과 Freikorps에 가입해 빨갱이 사냥을 시작합니다. 역시 반공청년이로군요. 1923년까지 이렇게 자유의 투사를 하다가 대학에 진학합니다. 1927년에 학위를 취득한 뒤 1933년까지는 비교적 조용하게 보낸것으로 돼 있군요.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다시 1934년 SS로 옮겼고 여기서 SD 차출돼 1937년에는 뮌헨의 게슈타포 책임자가 됩니다. 1938년 Obersturmbahnführer로 진급했습니다.


Einsatzgruppe I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Emanuel Schaefer

1900년 4월 20일 생으로 실레지엔이 고향입니다. 부친이 작은 호텔을 운영해서 집안은 비교적 넉넉했던 모양입니다. 재수없게 전쟁 막판인 1918년에 징집됐지만 여기서 다시 인생역전으로 전투 한번 안하고 동원해제가 돼서 귀향합니다. 그런데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집에 돌아와보니 고향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이 국경을 넘어들어와 깽판을 치는지라 살벌해 졌습니다. 결국 이 양반도 우익 민병대에 가입해 폴란드인들과 싸우게 됩니다.
1926년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법학 석사를 받은 뒤 경찰에 취직합니다. 1933년 나치당에 가입하는데 이미 학위도 있는데다가 경찰 경력이 만만찮아 게슈타포에서 승승장구 합니다. 1936년 SD로 전출됐습니다.

Einsatzkommando 1/ II : SS- Sturmbahnführer Otto Sens

1898년 4월 14일 데사우(Dessau)에서 태어났습니다. 전쟁 중에는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제대 뒤 Freikorps에서 활동했습니다. 1919년부터 실레지엔에서 폴란드인들과 피박터지게 싸웁니다. 1931년 SS에 입대했고 1934년에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2/ II : SS- Sturmbahnführer Karl-Heinz Rux

1907년 9월 3일 서 프로이센 브롬버그 태생. 1936년 SS에 입대했는데 1938년에 무려 세번 진급해 순식간에 Sturmbahnführer가 됐습니다.

Einsatzgruppe II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Hans Fischer

1906년 8월 21일생. 1926년 예나 대학에 입학해서 1933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1932년 친위대에 입대했으며 에어푸르트와 뮌스터의 게슈타포 책임자를 지냈습니다. 1938년 Obersturmbahnführer로 진급합니다.

Einsatzkommando 1/ III : SS-Hauptsturmführer Dr Wilhelm Scharpwinkel

1904년 7월 4일 반네-아이켈(Wanne-Eickel)에서 태어났습니다.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습니다. 특이하게도 보험 조사원 경력이 있습니다. 3년간 했군요. 역시 게슈타포에서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Einsatzkommando 2/ III : SS-Hauptsturmführer Dr Fritz Liphardt

1905년 5월 3일 슈테틴에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24년 육군에 입대했으나 1926년 장교로 진급하지 못하고 전역됩니다. 결국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려 했는데 10학기가 넘도록 졸업을 못 했다는군요. 머리는 약간 별로였나 봅니다.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1936년 친위대로 옮깁니다. 차를 갈아타는게 늦은거로 봐서는 확실히 두뇌회전이 별로인 모양입니다. 어쨌건 박사학위는 취득했는데 언제인지는 안나오는군요. 1938년 베를린의 SD 본부로 전출됐다가 여기서 전쟁을 맞습니다.


Einsatzgruppe IV : SS-Brigadeführer Dr Lothar Beutel

이 아저씨는 1902년 5월 2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이가 어려서 전쟁에는 참전하지 못했지만 싹수가 노랬는지 17세부터 우익 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1921년 군에 입대해서 1923년에 제대했습니다. 대학 전공이 재미있는게 미학, 그리고 약학이라고 합니다. 박사학위를 약학으로 받은 유일한 Einsatzgruppe 지휘관입니다. 1931년 돌격대에 입대했으나 바로 그해 친위대로 옮깁니다. 1932년 SD로 전출됐고 1939년 4월 Brigadeführer로 진급합니다.

Einsatzkommando 1/IV : SS- Sturmbahnführer Helmut Bischoff

1908년 3월 1일 생으로 아버지는 정육점을 했던 것으로 돼 있습니다. 1930년 돌격대에 입대한 뒤 1935년 친위대로 옮겼고 1936년에는 SD로 전출됐습니다.

Einsatzkommando 2/IV : SS- Sturmbahnführer Dr Walter Hammer

1907sus 6월 30일 하겐 출생. 부친은 판사로 전형적인 중산층 집안 출신입니다. 1931년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33년 주법원에서 근무하던 중 돌격대에 가입합니다. 1935년에는 게슈타포로 옮겼고 2년간 베를린 본부에서 근무한 뒤 1937년 에어푸르트의 게슈타포 책임자로 임명됩니다.


Einsatzgruppe V : SS-Standarteführer Ernst Paul Damzog

1882년 10월 30일 생으로 폴란드전에 참가한 Einsatzgruppe 지휘관 중 최고령자입니다. 1912년 경찰에 들어갔으며 1915년에는 육군에 입대해 헌병이 됩니다. 1933년 SS에 지원한 뒤 장기간의 경찰 경력을 인정받아 1934년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1/V : SS- Sturmbahnführer Dr Heinz Graefe

1908년 7월 15일 생으로 아버지는 1914년 전사했습니다. 1928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진학해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1932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작센의 법률사무소에 취직했습니다. 1937년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33년에 돌격대에 들어갔다가 같은해 말 친위대로 옮겼고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는 베를린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Einsatzkommando 2/V : SS- Sturmbahnführer Dr Robert Schefe

1909년 8월 23일 생으로 폴란드전에 참가한 주요 Einsatzgruppe 지휘관 중 최연소 였습니다. 1934년 친위대에 입대해 1935년 SD로 전출됐습니다. 이 사람의 경력이 흥미로운 점은 친위대에 들어 온 뒤 법학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점 입니다. 1936년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베를린의 게슈타포 본부에서 근무했습니다.

Einsatzgruppe z.b.V : SS-Obergruppenführer Udo von Woyrsch

주요 지휘관 중 유일한 귀족 출신으로 1895년 7월 24일 생입니다. 1차 대전당시 기병장교로 참전했으며 전후 Freikorps에 가입해 활동했습니다 1930년 친위대에 입대했는데 장교에다가 귀족출신이어서 그런지 진급이 빨랐습니다. 히믈러는 실레지아의 친위대를 책임지게 하기 위해서 직접 von Woyrsch를 직접 관리했던 모양입니다. 지역 친위대를 관리하다가 1936년 베를린으로 전출돼 히믈러의 참모진에 들어갑니다. 1938년에는 히믈러의 배려로 경찰 간부 교육과정을 이수합니다.

이 살인 전문가들을 보시면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중산층 이상에 고등 교육을 이수한 사회 엘리트층이라는 점 입니다. 이런 걸 보면 배운자들이 무서워 집니다.
하여간 이렇게 깡패집단인 친위대에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많이 가담한 것을 1920년대 후반 독일 지식인 사회의 급속한 보수화가 원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뭐,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대한민국도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그런지 지식인계층의 보수화가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히총통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