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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일 화요일

전쟁이 변화시킨 독일의 작은 마을 - Kirchmöser

Frontline and Factory : Comparative Perspectives on the Chemical Industry at War : 1914~1924를 읽는 중인데 1차대전 중 화학공업(주로 화약)에 대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습니다. 뒤에 간단한 소개글을 써 볼 생각입니다. 이 책은 개별주제에 대한 소논문을 모아놓은 책인데 그 중 독일의 한 작은 마을의 공업화에 대한 글이 상당히 좋습니다. Sebastian Kinder의 Transforming a village into an industrial town : The royal Prussian powder plant in Kirchmöser라는 글인데 이 글의 내용을 요약해 볼 까 합니다.

1차대전이 발발할 당시 독일에는 민간 화학기업들이 운영하는 화약공장외에 국영 화약 공장이 다섯 곳 있었다고 합니다. 슈판다우(Spandau), 하나우(Hanau)의 프로이센 왕립화약공장, 그나슈비츠(Gnaschwitz)의 작센왕립화약공장, 다하우(;;;;)와 잉골슈타트(Ingolstadt)의 바이에른왕립화약공장 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영화약공장들은 군대의 평화시 화약소요량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에 불과했고 민간이업들의 생산능력도 막대한 화약소모량 때문에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격화되면서 새로운 화약공장의 설립이 필요해졌습니다. 전쟁 발발전 독일 군부는 한달에 200톤의 화약을 생산하면 전시 소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산업동원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져서 1914년 가을에는 화약 생산량을 월 1천톤까지 끌어올렸지만 전선의 요구량은 충족시키지 못 했습니다.

독일정부는 1914년 9월에 새로운 국영화약공장을 설립하고 다하우, 잉골슈타트, 그나슈비츠의 설비를 증설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 새로운 공장은 결국 키르히뫼저(Kirchmöser)에 건설되는데 이 공장은 1차대전 중 새로 건설된 유일한 국영화약공장이었다고 하는군요. 나머지는 민간기업의 설비 증설로 충당했다고 합니다.
화약공장을 증설할 때 요구된 조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최소 350급 선박이 항행할 수 있는 수로에 위치할 것
- 4분의 1은 숲으로 되어 있는 350헥타르 면적의 야산, 혹은 그 근처에 위치할 것. 폭발사고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야산지역에 건설되어야 하며 숲은 적의 첩보활동으로 부터의 은닉에 필요함
- 주요 철도노선에서 4km이내에 위치할 것

이러한 필수조건 외에 요구된 부가 사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일일 8000~10000입방미터의 식수를 공급할 수 있을 것
- 폭발사고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서 건물로부터 250미터 이내에 주거지가 없어야 할 것
- 공장 주변에 600에서 800명의 노동자와 그 부양가족을 수용하고 공장 내 기숙사에 50에서 60명의 노동자를 수용할 수 있을 것
- 건설회사와 기타 공업기반을 갖추고 있을 것
- 석탄광산
- 가능하면 지가를 낮추기 위해 국유지일 것

이렇게 해서 1914년 11월 10일에 뫼저(Möser)라는 마을이 적합한 건설지로 추천됩니다. 전쟁 당시 약 30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던 이 마을은 하벨(Havel) 강을 끼고 있어 실레지엔과 루르 공업지대로의 접근성이 용이했고 동시에 함부르크(Hamburg)와 슈테틴(Stettin) 등으로의 접근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베를린-하노버 철도가 지나가는 지역에 위치해 철도 교통도 좋은 위치였습니다. 기본적인 요구조건은 대부분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문제는 건설 예정지역이 대부분 사유지였다는 것인데 이것은 총 1,154,480 마르크의 비용을 들여 국가가 매입했습니다.
빌헬름 2세의 최종승인은 1914년 11월 29일에 내려졌지만 실제 건설은 뫼저 마을이 선정된지 이틀 뒤인 11월 12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작은 마을이다 보니 충분한 건설 노동력을 확보할 수가 없었고 1915년 1월부터 3월까지는 겨울이다 보니 건설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노동력이었는데 주변 지역에서 3,000여명의 건설도동자가 모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가 농부여서 농번기에는 노동력이 다시 유출되는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군요. 결국 1915년 3월에는 전쟁포로를 동원하자는제안도 나왔으나 최종적으로는 점령한 폴란드에서 모집한 노동자를 투입하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1915년 1월 말까지 건설작업을 위해 베를린-하노버 철도선과 뫼저 마을을 연결하는 철도가 완성되었고 2월부터 건설작업이 시작되어 1915년 5월 7일 부터는 내부 설비 공사 단계에 들어갑니다. 1915년 7월 1일에는 건물 공사가 완료되어 생산라인 구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화약의 시험생산은 아직 공장단지가 완공되지 않은 1915년 5월 12일부터 시작되었으며 1918년 중순에는 공단 전체가 완성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당시 300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뫼저 마을은 1918년까지 6,000~7,000명의 공장노동자와 3,000명의 건설노동자가 거주하는 중소규모 도시로 발전합니다. 노동자들의 편의를 위해 대규모의 주택단지도 건설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전시에 급히 건설한 공단이다 보니 숙련노동자는 확보할 수 없었고 TNT 같이 상대적으로 복잡한 제품은 생산할 수 없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공단이 완공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전쟁이 끝나버렸습니다.



키르히뫼저의 인구는 1918년 말에는 1,000명 수준으로 감소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공장의 생산설비들은 프랑스, 벨기에, 세르비아에게 넘겨집니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정부는 전쟁 중 새로 만들어진 공업도시가 그냥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키르히뫼저의 공단은 1920년에 철도청(Reichsbahn)에 넘겨져 기관차 공장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 공장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포드-테일러식의 대량생산 공정을 적용해 기관차 정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제3제국 시기에 키르히뫼저는 중요한 철도공업지구로 탈바꿈합니다. 1939년에 키르히뫼저의 인구는 5,000명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이 도시가 몰락한 것은 2차대전 이후 동독으로 편입된 이후 였습니다. 동독 시기에도 키르히뫼저는 철도청의 정비공장이 있었지만 2차대전 이전의 수준은 회복하지 못했다고 하는군요.

2007년 9월 4일 화요일

슈페어가 1945년 3월 18일 히틀러에게 보낸 비망록

알베르트 슈페어, 베를린 W 8, 1945년 3월 18일

경제의 붕괴가 기정 사실화 된데다 국토가 적에게 함락되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기 때문에 라인강과 오데르강 선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처가 필요합니다.
라인강과 오데르강 양 쪽이 돌파된 상황에서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중무장한 적군이 두 강을 도하하기 시작한다면 강력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기동전을 수행할 것이기 때문에 장비와 연료가 부족한 아군은 속수무책이 될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8주간의 전투에는 동원 가능한 전 병력을 투입해야 할 것이며 여기에는 어떤 예외도 없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의 각 집단군 사령관들은 자신들의 관할 구역에 있는 모든 병력 자원을 투입하는데 전권을 가져야 할 것 입니다.
만약 병력 동원이 제때 이뤄지지 못하고 많은 수의 아군 병력이 여전히 편성 지역에서 훈련중인 상태에서 적군이 두 강을 도하해 공세로 나올 경우에는 1940년에 프랑스군이 아군에게 당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재앙이 벌어질 것 입니다.
또한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원 가능한 각 지역의 국민돌격대도 모두 투입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제국의 모든 병력을 라인강과 오데르강 선을 사수하는데 투입해야 합니다.

각 집단군 사령관들은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자신의 관할구역에 있는 모든 군 병력에 대해서 절대적인 통제권을 가져야 하며 이렇게 해서 자신들의 의도대로 작전을 펼쳐야 합니다.
전선에 배치된 대공포 부대들은 반드시 단일한 지휘관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휘 범위가 너무 넓어져 신속한 판단이 필요할 경우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노르웨이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북부의 산업기반은 현 상황에서는 교통망의 문제로 전혀 활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의 경제적 중요성은 없는 것으로 보고 이 지역에 있는 부대들을 차출해 독일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조치를 취한 후에야 라인강과 오데르강의 상황을 어느정도 안정시킬 수 있을 것 입니다.
한 걸음의 후퇴만으로도 패배는 가속화 될 것 입니다. 몇주만이라도 현재의 전선을 사수하는데 총력을 다 한다면 적은 우리의 단호한 의지를 알게 될 것이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조금 더 유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종결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슈페어

Heinrich Schwendemann, ‘Drastic Measures to Defend the Reich at the Oder and the Rhine…’ A Forgotten Memorandum of Albert Speer of 18 March 1945,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38, 2003, pp.605~606

슈페어가 1945년 3월 18일에 히틀러에게 보낸 이 글은 상당히 흥미로운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전쟁말기에 히틀러의 초토화 명령에 반대했다는 점을 강조해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려 했습니다. 슈페어는 광기에 휩싸인 히틀러가 패배에 직면해 독일 전체를 초토화시키려 했지만 자신은 전후 독일의 재건을 위해 히틀러에게 반대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종류의 문건들을 놓고 보면 1945년의 어느 시점까지는 슈페어 자신도 연합국과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조금이라고 가지고 있었다는 것 으로 보입니다. 즉 이 글에서 나타나듯 슈페어 자신도 총통 만큼이나 유리한 조건에서의 종전 가능성을 믿고 필사적으로 저항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연합군이 라인강을 도하해 파죽지세로 밀고들어올 무렵에는 슈페어의 생각도 상당히 바뀐것 같긴 합니다만.

각 지역의 군지휘관들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한다던가 아직 훈련도 마치지 못 한 병력이나 국민돌격대까지도 모두 전선에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목에서는 완전한 패배라는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한 슈페어의 정신적 공황이 느껴집니다.

2007년 5월 16일 수요일

The Wages of Destruction - Adam Tooze

이 책은 이번에 도착한 책 중에서 제일 두꺼운 녀석입니다.

대략 한번 훑어 본 느낌은 약간 별로입니다. 이 책을 사게 된 계기는 서평들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서평들은 이 책이 히틀러 시기 독일 경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정립했다고 좋은 평을 하고 있더군요.

Bertrand Benoit의 서평(파이낸셜 타임즈)

Bruce Ramsey의 서평(시애틀 타임즈)

Simon Williams의 서평

아직 통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의 내용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기는 조금 그런데 전반적으로는 1차사료 보다는 기존의 저작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통계들이 기존의 저작들, 예를들어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 Weltkrieg같은 저작에서 인용한 것 입니다. 물론 2차사료를 가지고 쓴 책 중에도 훌륭한 책이 많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1차사료의 활용이 부족한 저작에 믿음이 안가는지라 첫 인상은 별로입니다.

물론 좋은책인지 아닌지는 끝까지 한 번 읽어 본 뒤에 이야기 할 수 있겠지요. 다 읽고 나면 전반적인 인상을 한번 올려 볼까 합니다.(그 전에 밀린 것들을 처리해야 하는데 난감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