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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8일 토요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러난 러시아 공군의 작전 수행 능력에 대한 비판

 듀푸이 연구소의 블로그에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한심한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러시아공군에 관한 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필자는 미해병대 출신의 군사연구자 윌리엄 세이어즈(William Sayers)인데 이 양반이 러시아 공군의 문제점을 덤덤하게 지적하니까 오히려 더 웃깁니다. 러시아 공군의 무능력함에 대해서는 RUSI의 저스틴 브롱크도 비슷한 지적을 했습니다. 

Is the Russian Air Force Actually Incapable of Complex Air Operations? | Royal United Services Institute (rusi.org)

세이어즈의 글은 전문적인 연구가 아닌 칼럼이긴 하지만 해당 분야에 수십년간 종사한 전문가의 견해인 만큼 참고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사실 글 자체가 웃겨서 번역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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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S View of Air Superiority | Mystics & Statistics (dupuyinstitute.org)


러시아 공군이 제공권을 보는 관점

윌리엄 세이어즈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됐을때  TV에서는 러시아 공군이 서방의 공군 처럼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하지만 러시아 공군은 언론인들이 미국 공군의 전쟁 수행 방식을 보면서 예측했던 대로 작전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언론인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러시아 공군은 어디 있는거야?" 그런데 이런 언론 보도들은 심각한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러시아는 한때 "대륙의 강국"으로 불렸다. 이 나라는 오직 지상군에 집중하고 있을뿐이라 공군과 해군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다. 그래서 러시아 공군은 항상 러시아 육군에 종속된 부산물 정도에 불과했다. 러시아 공군은 육군에 짓눌려 단순한 장거리 포병 이상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독립된 교리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만약 러시아 공군이 우리 공군과 같이 발전해왔다면 강력한 병종이 됐을 것이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면 러시아는 공군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비전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러시아 공군에 대해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공군의 주 임무는 미국이 전장항공차단(Battlfield Air Interdictio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임무는 지상군과의 협동 작전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전선 후방을 타격하는 임무이다.(접촉선에서 30~70km 후방) 러시아 공군은 미국의 개념과 같은 근접항공지원(Close Air Support)를 하지 않는다. 러시아 공군은 근접항공지원을 잘 하지 못한다. 냉전때도 그랬고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마찬가지로 못했다. 1999년 그로즈니 전투 이후 러시아군은 공군의 레파토리에 임무를 하나 더 추가했다. 적의 저항 의지를 분쇄하기 위해 민간 시설에 대량의 피해를 입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이 짓을 하는걸 보고 있지 않은가.

러시아 공군은 미국에서 '제공권' 이라고 부르는 것을 달성할 생각도 없다. 러시아에서 우군 상공의 공역 통제 임무를 수행하는 주력은 지대공 미사일 부대다. 전투기 부대는 지대공 미사일 부대가 담당하지 못하는 빈틈을 채우고 보조하는 역할이다. 러시아의 전투기 부대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를 뿐이다. 설사 러시아 공군이 서방의 개념과 같은 제공권을 장악한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제공권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러시아 공군은 제공권이 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래서 러시아 군은 이동식 방공차량을 대량으로 운용한다. 적의 공군이 러시아 지상군에 다가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러시아가 원하는건 이게 전부다.

냉전기 소련은 현재 러시아가 처한 것과 완전히 다른 상황에 처해있었다. 나토는 대량의 핵무기를 보유했다. 소련군 참모대학은 이런 것들을 가르쳤다.

          항공군은 전선군의 공세작전에서 다음과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

          -핵 타격의 초기 단계에 참여한다

          -아군 부대와 보급 시설을 적의 공습으로 부터 보호한다

          -적의 항공 전력을 비행장과 공중, 그리고 후방 지역에서 격파한다

          -적의 핵 미사일을 찾아서 파괴한다

          -제병협동군과 전차군의 작전을 지원한다

          -적의 예비대를 격파하고 제압한다

          -항공 정찰을 수행한다

          -강습 상륙작전과 공정작전을 지원한다

이것들은 전쟁을 수행할 때 핵무기를 사용하고, 나토의 공군은 소련군에 대한 핵 타격을 수행하지 못할 수준으로 격파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또 나토의 공군력에 대한 타격이 3순위의 임무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70년대에 소련군 총참모부는 나토군의 전투력 중 절반이 공군력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토군의 항공 우세를 상쇄하기 위한 항공 작전을 만들었다. 이론은 그럴싸 했다. 그리고 아군의 기지를 공격할 수 있는 혁신적인 무기들도 만들었다. 하지만 소련 공군은 나토 공군을 실전에서 무찌를 수 있는 기량은 연마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소련 공군은 폭격기들을 목표 지점 까지 호위하는데 적용할 교리나 전술을 만들지 못했다. 그 대신 전투기들을 유도하기 위해서 취약한 지상관제소에 의존하는 짓을 계속했다. 나토군의 전술과 역량에 대응하기에는 답이 없는 수준이었다. 냉전이 끝나고 핵무기의 위협이 크게 감소하자 러시아 공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공군에 가까운 교리로 돌아갔다.

언론에서는 "제공권"을 적 공군이 죽은 벌레 처럼 지상에 바싹 엎드려 있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한다. 미국에서는 30년 전쯤의 일을 고대사 처럼 생각하기는 하지만, Desert Storm(1991), Deliberate Force(1995), Allied Force(1999), Enduring Freedom(2001), Iraqi Freedom(2003), Odessey Dawn(2011) 등의 작전은 대중도 알고 있다. 이러한 작전에서 미국과 연합군의 공군은 적군을 압도했다. 미군과 연합군을 공중 우세를 달성한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바로 언론에 나오는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그 상황이다. 그리고 냉전 시기에 그랬던 것 처럼 (러시아 공군이 아니라) 러시아군 총참모부가 적 공군의 실질적이고 결정적인 위협을 마주한다면, 러시아 총참모부의 목표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교리 개념은 '파괴'다. '파괴'라는 개념은 포병 용어다. "파괴란 적 공군을 완전히 섬멸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적 공군이 조직적인 저항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파괴하려면 적 공군기의 50~60%를 격파해야 한다." 이건 마치 포병 교범에서 인용한 문구 같다. 사실 포병 교범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러시아 공군은 우수한 항공기와 유도폭탄, 미사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무기들을 적절하게 활용하는데 필요한 전술과 교리, 정보 및 표적 선정 수단이 없다. 서방에서는 유도무기로 갱도를 폭격하고 고층 건물에서 하중을 받는 부분을 타격해서 건물을 붕괴시킨다. 이렇게 해서 적국의 경제를 붕괴시키거나 국가 전체의 통치 체계를 무너트린다. 미국이 사용하는 유도무기는 1990년대에도 정확도가 높았다. 그래서 콘트리트를 채워 넣은 훈련용 폭탄에 유도 키트를 달아 적군의 대공포를 개별적으로 파괴하면서 부수적인 피해를 방지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부수적 피해라는 위험 없이 목표물을 파괴하기 위해 새로운 유도무기들이 배치됐다. 러시아군은 유도무기를 일반 폭탄 보다 정확도가 높은 장난감 정도로 치부한다. 즉 임무를 수행하는데 많은 폭탄을 사용하지 않아 군수보급의 측면에서 유리한 점에 주목할 뿐이다.

나는 1980년대에 소련의 군사항공 분야를 분석하는 일을 시작했다. 당시 소련 공군은 Su-27과 MiG-29 같은 4세대 전투기를 도입하고 있었고 이것들은 F-15, F-16/F-18에 비교할 만 했다. 이 기종들은 소련 공군이 과거에 사용하던 전투기 보다 훨씬 우수해서 우리 미국 공군과 같은 전술을 채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소련 공군이 신형 전투기의 성능을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지 않는지 열심히 관찰했다. 하지만 소련공군은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지 않았다. 40년이 지난 지금 러시아 공군은 여전히 과거와 같은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

조금 더 지적을 하자면, 러시아군은 우리 미군이 하는 방식과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 공군의 조종사 양성 과정을 보면 이 점을 아주 잘 알 수 있다. 미국 공군과 다른 서방 국가의 공군은 조종사를 교육할 때 가능한 최고의 기준에 맞춰 훈련을 실시한다. 하지만 러시아 공군의 조종사 양성 기준은 훨씬 낮다. 러시아 공군의 조종사 양성 기준은 그냥 우리 공군과 같은 높은 수준이 아닌 것이다. 왜 그런가? 가설을 하나 제시하자면 러시아 공군은 우리와 같이 높은 수준의 조종사를 양성할 능력이 없어 가능한 수준 내에서 훈련을 시키는 듯 하다. 그런데 다른 가능성도 있다. 러시아 공군은 전투 환경에서는 인간의 역량이 급격히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 조종사들에게 큰 기대를 하는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므로 조종사들에게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조종사의 기준을 실제 교전 상황에서 조종사들이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현실적인 수준으로 낮게 잡는것이다.

러시아 공군의 선천적인 보수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더 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본토 방공전을 다룬 헐리우드 영화들을 보면 용맹한 연합군 지휘관들이 상급 사령부로부터 다음 작전에는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라"는 명령을 받는다. (영화 Twelve O'Clock High의 주인공) 새비지 장군은 부대의 폭격기 18대 전부를 폭격 임무에 투입할 수 있도록 정비반원들에게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이도록 독려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냉전 시기 소련군 총참모부는 항공군들이 필요한 때에 각 연대가 일정한 소티를 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초기 단계에서는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는 나토와의 전쟁 계획이 그러했다. 항공연대의 소티 수는 연대가 수행해야 할 임무에 맞춰 정해졌다. 일반적인 전투기연대나 전투폭격기연대는 36대의 항공기를 보유했고, 연대의 항공기 1대가 1소티를 출격한다면 연대의 소티 수는 36소티가 된다. 그런데 정비 문제라던가, 작전상의 또는 전투 손실이 발생해 연대가 보유한 항공기 36대 이하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소련 공군은 항공연대에 비행기를 더 늘렸다. 전투기연대와 전투폭격기연대의 경우 9대를 더 추가했다. 이렇게 비행기 숫자를 더 늘려서 항공연대들이 항상 연대당 36소티를 출격할 수 있도록 했다. 비용이 많이 들지만 연대에 할당된 소티를 채울 수 있는 간편한 방법이었다.

이런 점들은 러시아인들은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하고 종종 우리가 보기엔 이상한 방법으로 문제에 접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공군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우리의 선배들은 한국전쟁 당시 중국과 소련의 안전한 기지에서 출격하는 소련 공군 조종사들이 모는 항공기와 싸웠다.(소련은 당시 이를 비밀로 했지만 요즘은 아주 당당하게 인정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 공군은 소련이 만들고 교육한 전술, 그리고 방공망을 상대해야 했다. 그래서 요즘 푸틴이 자신의 업보를 치르는 걸 구경하는게 꽤 재미있다.

2022년 6월 3일 금요일

Covert Legions : U.S. Army Intelligence in Germany, 1944-1949

 요즘 간행되는 미국 육군군사사연구소의 저작들을 보면 연구의 중점이 테러와의 전쟁과 냉전으로 옮겨간 것 같습니다. 사실 제2차세계대전은 워낙 많은 연구가 되어 있으니 혁신적인 연구가 나올 여지가 적지요. 미국 육군군사사연구소는 U.S. Army in the Cold War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유럽의 냉전을 중심으로 연구가 나오고 있지만 앞으로 아시아 지역의 냉전도 다루게 되겠지요. 올해 U.S. Army in the Cold War 시리즈로 꽤 흥미로운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Covert Legions : U.S. Army Intelligence in Germany, 1944-1949

이 연구는 미육군의 독일 점령 초기 부터 냉전이 본격화되는 베를린 봉쇄에 이르기까지 미국 육군이 독일에서 수행한 정보 활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제2차세계대전 시기 미육군의 대독 정보활동을 다루는 부분 입니다. 두 번째는 냉전 초기 미육군의 정보활동 조직과 체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미육군의 독일내 정보활동에 대한 분석입니다. 이 세번째 부분은 중요한 부분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미육군의 전쟁범죄 조사활동과 독일의 탈나치화 정책 수행, 그리고 마지막으로 냉전 초기 독일내의 대소련 정보활동 등 입니다. 소련 관련 내용을 다루는 제9장과 제10장은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9장은 미육군의 정보기구와 독일 사민당의 협력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이건 나중에 독일 총리가되는 빌리 브란트와 깊숙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빌리 브란트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오는 간첩 스캔들의 기원이 냉전 초기 대소련 정보활동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점을 보여주는게 재미있지요. 빌리 브란트가 미국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밝혀진지 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 입니다. 빌리 브란트를 비롯해 독일연방공화국 초기 정치계의 거물들과 미국 정보기관과의 관계를 밝혀낸 점은 이 연구의 장점입니다. 연구의 마무리를 짓는 제10장은 베를린 봉쇄로 냉전이 격화되고 미육군의 정보활동 방향이 전환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국 독일의 체제 변화에서 동맹 독일과의 협력 체계 구축으로 전환되는 과정이지요.

매우 재미있는 연구입니다. 특히 1945-1948년 시기 한국의 상황과 겹쳐 보이는 부분도 많아서 재미있게 읽히네요.

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Taking Nazi Technology - Douglas M. O'reagan 저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과학기술력은 전후 수십년에 걸쳐 신비화 되면서 대중문화의 단골소재가 되었습니다. 최근까지도 B급 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나치의 비밀병기라는 클리셰는 지겹기까지 할 정도죠. 그렇다면 그 실체는 어떠했을까요? 더글러스 오레이건(Douglas M. O'reagan)의 Taking Nazi Technology: Allied Exploitation of German Science after the Second World War(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19)는 제2차세계대전 말기와 직후에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독일의 과학기술력을 활용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과 이것이 냉전에 끼친 영향을 다루는 연구서입니다. 

이 책에서는 가장 먼저 미국의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저자는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 미국에서는 전반적으로 독일 과학기술력을 자국 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합동참모본부 예하에 있는 합동정보위원회(JIC, Joint Intelligence Committee), 주독일미군정 그리고 미국상부부 등이 독일의 과학기술, 산업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조사활동을 벌였습니다. V2 미사일과 제트기로 대표되는 항공 기술은  독일이 우위에 있어 미국이 습득해야 할 기술로 평가되었습니다. 미국 군부는 항공분야의 기술자와 설비를 철저하게 쓸어갔습니다. 예를들어 미국 육군항공대는 독일 항공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던 풍동시험시설이 미국 보다 월등히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이를 통째로 반출했습니다. 군부 뿐만 아니라 보잉과 같은 미국 회사들도 독일의 과학기술자들을 포섭하는데 열을 올렸습니다. 이외에도 마그네틱 테이프 같이 전후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산업기술도 독일에서 만들어져 미국으로 흘러들어간 대표적인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과학기술과 산업계에 대한 조사결과 독일의 과학기술 수준은 전쟁 이전에 미국 정부와 산업계가 기대했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항공 기술과 같은 일부 분야를 제외한 분야는 미국이 우월하거나, 독일의 기술 발전이 미국에 불필요한 방향으로 이루어져 쓸모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후자의 경우 석탄에 기반한 독일의 중화학 공업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독일은 석탄을 활용한 기술에서 높은 수준에 이르렀지만 미국의 화학공업은 석유 기반으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기술은 유용하지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석탄을 활용한 인조 고무 생산은 독일 화학 공업의 대표적인 성과입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전후 이를 조사한 뒤 독일의 인조 고무 생산 기술은 미국 보다 뒤떨어진다고 평가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독일이 우위에 있다고 평가받은 항공우주기술에서 조차 대량생산에 필요한 금속가공 등의 몇몇 공정은 미국이 우위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미국에 비해 산업력과 기술 수준이 뒤떨어졌던 영국과 프랑스는 사정이 조금 달랐습니다. 이미 전쟁 이전 부터 산업 경쟁력 저하로 고심하던 영국은 독일의 기술을 활용해 산업 경쟁력을 되찾고자 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독일의 군사기술 중에서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과학계와 산업계의 평시 이익에 활용할 수 있는"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1945년 10월에 보도된 한 언론기사는 독일에서 획득한 과학기술 정보의 가치가 1억 파운드에 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영국에서도 독일의 과학 기술 수준이 전쟁 이전에 기대하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으나, 미국에 비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프랑스 또한 비슷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미국이 자국에게 가치가 없는 독일의 기술이라도 전후 잠재적인 경쟁국이 습득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지적합니다. 영국은 미국과 비교적 밀접한 동맹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나 소련에 비하면 제약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소련은 영국과 달랐습니다. 프랑스는 독일의 과학기술자들을 최대한 포섭하려 했으나 미국과 영국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전후 배상 차원에서 독일의 산업시설을 철저히 약탈하고자 했으나 역시 실패했습니다. 프랑스가 포섭할 수 있었던 독일 과학기술자는 숫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주로 미국에 포섭된 주류 과학기술자들과 지적 네트워크가 단절되었습니다. 이때문에 프랑스 정부와 군에서는 지적 네트워크에서 고립된 독일 기술진과 연구시설들을 프랑스로 이전하는 것이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그 대안으로 독일의 연구소등에 프랑스 유학생을 파견해 기술을 습득하는 동시에 감시역을 맏기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시행하지는 못했습니다. 미국과 달리 국력의 한계가 있었던 프랑스는 '승전국' 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과학기술을 활용하는데 있어 미국이나 소련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없었습니다. 저자 오레이건은 프랑스가 독일의 과학기술을 약탈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독일과 협력하는 노선을 취할 수 밖에 없다고 평가합니다.

소련은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막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의 과학기술자들을 포섭하여 기술과 노하우를 흡수하는 동시에 이들이 독일로 돌아갔을 때 다시 군사분야의 연구를 지속하지 못하도록 지적으로 도태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소련은  독일의 과학기술과 산업을 약탈하는데 있어 프랑스와 동일한 정책을 폈으나 훨씬 효율적이고 큰 규모로 수행했습니다. 저자는 소련 정부가 독일 과학기술자들의 지식과 노하우를 흡수하는 동시에 이들이 더 이상의 연구를 진행할 수 없도록 방해함으로서 뒤쳐지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합니다. 또한 저자는 독일 과학기술자들의 지식이 소련의 기술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했음은 인정하지만 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경계합니다.

다음으로는 전후 연합국이 독일의 과학기술의 부흥에 끼친 역할입니다. 미국 등의 서방 연합국은 패전국인 독일이 더 이상 침략정책을 취하지 않는 평화국가로서 국제사회에 복귀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것은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문에 제2차대전 직후에는 제1차세계대전 직후와 달리 독일 과학계를 세계에서 고립시키는 정책은 취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등의 서방 연합국은 독일 과학계를 서방 세계와 연결시키고자 했습니다. 연합국이 독일의 과학 및 산업 기술을 평가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과학자와 공학자들은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또한 패전국인 독일 과학자들은 승전국의 대학 및 연구소와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화학 산업계는 미국과의 교류를 통해 뒤쳐져 있었던 석유 기반 화학 분야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소련을 자국이 주도하는 국제적인 과학 네트워크에서 축출합니다. 미국은 경제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의 강국으로 군림하게 되면서 과학기술과 산업 질서를 자국 중심으로 재편했습니다. 

이 연구는 대중적으로 과대 평가된 제2차세계대전기 독일 과학 기술의 한계를 지적할 뿐만 아니라, 독일의 과학기술을 평가하고 활용하기 위해 연합국이 조직한 기구가 국제적인 과학기술 교류를 촉진하는 동시에 미국의 기술 통제 수단이 되는 측면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 유용한 연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2016년 8월 8일 월요일

[번역글] ‘우리의 친구 롬멜’: 전후 영국 대중문화가 묘사한 독일 국방군이라는 ‘훌륭한 적’

불법날림번역 한 편 나갑니다.


이글은 German History 26-4(2008)에 실린 패트릭 메이저Patrick Major의 ‘ Our Friend Rommel ’ : The Wehrmacht as ‘ Worthy Enemy ’ in Postwar British Popular Culture을 번역한 것 입니다. 얼마 전 어떤 분과 롬멜 숭배 이야기를 하다보니 이 글이 생각나더군요. 대중문화 이야기라서 그런지 꽤 재미있습니다. 깨끗한 독일군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영국 대중문화계가 담당한 역할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주로 1950년대의 영국 전쟁 영화들을 분석하고 있는데 제가 보지 못한 작품이 많아서 내용을 모르는 작품이 많습니다. 요즘은 유튜브에서 고전 영화들을 쉽게 감상할 수 있으니 검색해서 나오는 것들은 한번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 참고로 저는 롬멜이 꽤 재미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해서 여전히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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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친구 롬멜’: 전후 영국 대중문화가 묘사한 독일 국방군이라는 ‘훌륭한 적’


패트릭 메이저


영국 전쟁영화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거의 대부분  전쟁 시기에 선전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1)  이 시기의 영화들은 영국인의 자기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당시 사회상을 축소해 보여주기 까지 한다. 하지만 전쟁 중에 만들어진 영화들은 ‘적에 대한 묘사’ 즉 Feindbilder가 없었다. 직업군인 캔디 씨 이야기The Life and Death of Colonel Blimp (Powell and Pressburger, 1943)2)를 제외한 영화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독일군을 전형적인 프로이센 군국주의자나 허세에 찌든 나치주의자로 묘사한 것은 놀랄일도 아니다. 학문적 관심은 2차대전 당시의 영화에 집중되고 있으나 대중들은 2차대전 이후에 나온 영화들에서 묘사한 것들을 더 강하게 기억하고 있다.3)  이 사실은 10여년 전 존 램스덴John Ramsden이 문제를 제기하기 전 까지 학문적 관심을 받지 못했다.4)  1950년대 영국 영화계에서는 전쟁영화가 크게 흥행했으며 특히 50년대 후반에는 꾸준히 흥행 1, 2위에 올랐다. 또한 전후에 제작된 영화들은 영국과 독일의 화해 과정의 일환으로 독일군을 좀 더 미묘하게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흥미롭게 묘사했다. 또한 이 시기의 영화들은 과거의 현실을 매우 선별적으로 다루었다. 최근 노먼 데이비스Norman Davies가 지적 것 처럼, 2차대전의 기억은 냉전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두 가지로 구분 되었다.5) 필자가 아는 범위내에서 전후에 나온 영국의 2차대전 영화는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독일 국방군과 붉은군대의 전쟁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 물론 동부전선 같이 거대한 주제를 다루기에는 영국 영화계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부전선이라는 주제를 의도적으로 말소하려는 경향도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다. 소련 영화 ‘베를린 함락(1949)’이 런던에서 개봉되었을때, 영국 외무성은 ‘이 영화 때문에 현 시점에서 독일에 대한 적대적인 기억이 되살아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6)  물론 이때는 바로 독일연방공화국이 유럽방위공동체European Defence Community를 포함한 서유럽 동맹에 참여하기 위해서 일련의 조약 협상을 전개하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영국 대중의 역사인식과 문화가 결코 정치적 주제에 무관심하지 않았으며,  2차대전의 다른 모든 전역 보다  북아프리카 전선을 재구성하는데 몰두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실제로, 북아프리카의 사막 전선은 영국 대중들에게 ‘명예로운 독일 국방군’이라는 이미지를 재구축하는데 매우 유용했다.


한 영화가 촉매제의 역할을 했다. 1951년 개봉한 20세기폭스사의 전기영화 ‘사막의 여우The Desert Fox’에서는 영국 배우 제임스 메이슨Jamese Mason이 독일 군인 에르빈 롬멜Erwin Rommel을 연기했다. 제임스 메이슨은 8년전에 카이로로 가는 다섯개의 무덤(빌리 와일더Billy Wilder 감독, 1943)에서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이라는 역할을 맡아 과장된 연기를 한 바 있었다. 그는 1943년 작품에서 이질적 느낌을 주기 위해 독일 억양의 영어를 썼지만 ‘사막의 여우’에서는 평범한 영어로 연기했다. 이 영화에서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과 영국 제8군 사이의 기사도적인 상호 존중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양측은 상대방의 포로를 각자의 응급 치료소에서 치료해주고, 롬멜은 히틀러가 연합군 특수부대원들을 총살하라는 명령서를 찢어 버리고 포로들을 제네바 조약에 의거하여 대우해 준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는 포로가 된 영국 장교가 롬멜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장교로서의 예의를 갖춰 경례하기까지 한다.
마지막에 언급한 일은 실화에 바탕을 둔 것이고 그 장면에 나오는 장교는 바로 그 실화의 주인공인 데스몬드 영Desmond Young 준장이었다. 그는 1950년 영국의 베스트셀러였던 Rommel의 저자였으며, 이 영화는 상당부분 그의 책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7)  이 책은 엄청난 베스트셀러였으며 출간된 첫 해에만 8쇄를 찍었다. 이 책은 원래 선데이 익스프레스에 연재되었던 글을 모아 편집한 것인데,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책 광고에 스바스티카 문양으로 장식을 하기도 했다.8)  이 책의 독일어 번역판도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예를 들어 1951년 이젤론Iserlohn에서 열린 아프리카 군단 출신 참전자들의 첫 번째 모임에서는 이 책이 불티나게 팔렸다.9)  
잘알려져 있다시피, 영은 이 책에서 영연방군 지휘관인 클로드 오킨렉 장군이 연합군 장병들 사이에서 롬멜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을 걱정하면서 “우리 장병들 사이에 롬멜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지면서 그는 일종의 마법사나  악령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롬멜이 매우 활력적이고 유능한 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결코 초인이 아니다.”10)라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오킨렉의 이 발언은 영화 대본에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또한 윈스턴 처칠이 1950년에 낸 책에서 롬멜에게 한 찬사도 영화 대본에 들어갔다.


“롬멜의 정열과 대담함은 우리에게 심각한 재앙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는 영국 대중의 비난을 받을지라도 내가 1942년 하원 연설에서 표한 경의를 받을 자격이 충분한 인물이었다. 나는 당시 하원 연설에서 롬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매우 대담하고 유능한 적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초래한 재난과는 별개로, 나는 롬멜을 명장이라 부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롬멜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조국에 충성하는 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히틀러가 하는 모든 일을 증오하게 되었고, 이 미치광이 폭군을 제거하고 그의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1944년의 거사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롬멜은 이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암울한 현대 민주국가의 전쟁에서 기사도가 있을 곳은 없다. 대규모의, 그리고 압도적인 영향력의 무감각한 도살은 모든 감정을 압도해 버린다. 나는 아직도 롬멜에게 찬사를 바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때문에 비난을 받기는 했어도 말이다.”11)


영의 저작은 거의 대부분 롬멜의 부인과 아들, 그리고 롬멜의 전우들을 인터뷰해서 씌여졌기 때문에 롬멜을 긍정적으로 묘사한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 결과 영의 책은 거의 성인의 전기에 가깝다. 그의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다시 군모를 쓰고 있는 롬멜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 아마도 나의 부친이 뱃사람이었고 내 유년기의 상당 기간을 바다에서 보냈기 때문인지 지금은 이 특별한 독일 장군을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롬멜은 그의 마지막 임무를 받기 전에는 바다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넬슨 휘하의 함장들, 낭만과는 거리가 먼 혼블로워와 같은 인물과 비교해 본다면 정말 그와 같은 유형의 사람임을 알 수 있다.”12)


영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영국인의 심성에 낭만적 인물로 남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롬멜을 비교하고자 했을 것이다. 물론 롬멜 전설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그가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자살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 국방군의 지휘관 중 한명을 나치에 항거한 인물로 묘사한 것은 일각에서 심각한 우려를 불러왔다. 영은 당시의 복잡한 국제정세에서 롬멜에 동정적인 시각을 보이는 것이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가지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유치한 인물은 아니었다.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와 연합국 고등판무관Allied High Commissions은 냉전의 압력으로 서독 재무장을 고려하고 있었다. 포츠담 회담으로 독일의 무장력 보유가 금지된지 불과 5년이 지난 1950년, 독일에서는 재무장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었다. 영은 언론 인터뷰에서 실용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독일 민족의 상무정신을 없애지 못할 바에는 권장하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상무정신을 갖춘 우리 지도층 인사 중 다수는 훌륭한 친구 다음으로 좋은 것은 훌륭한 적이라고 생각하지요.”13)


1950년 초 영의 롬멜 평전은 영국에서 뜨거운 이슈가 됐다. 과거 롬멜과 싸웠던 군인들이 가장 긍정적인 평을 했다. 그들은 롬멜이 ‘착한 독일인’으로서 국가사회주의에 저항한 순교자일 뿐만 아니라 야전지휘관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고 찬양했다.
웨이벨과 오킨렉은 물론, 심지어 몽고메리 조차도 롬멜 만큼의 인기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억눌린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다. 웨이벨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지난번 전쟁에서 상대한 적 중에서 멋진 야전지휘관이자 명예롭고 관대한 적수로서 대중의 감성을 자극한 인물은 오직 롬멜 한 명 뿐이었다. 다른 독일 장군들은 융통성이라곤 없고 사악한 재능만 있다는 인상을 주었으나,  이질적이게도 롬멜에게는 낭만적이고 기사도적인 아우라가 있었다.”14)


프랜시스 터커Francis Tuker 중장은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롬멜을 고대의 장군들과 비교하여 ‘우리 시대의 벨리사리우스’라고 칭했다.15)  과거 영국 8군에서 정보장교로 있었던 에녹 파웰Enoch Powell은 울버햄프턴의 토리당 후보로 출마해 선거 활동을 하던 중 “롬멜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어떤 장군 보다도 유능한 인물이었다”는 발언을 했다.16)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라하더라도 이와 같이 롬멜을 찬양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괴벨스가 선전을 통해 만들어낸 ‘역동적인’ 롬멜 이미지와 유사한 면이 있었고,17) 당시에도 많은 논평자들이 그 점을 지적했다.18) 또한 롬멜 전설이 등장한 원인 중 하나로 영국 지휘관 중에는 매력적인 인물이 없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측은 롬멜에 대항하기 위해 ‘몬티’ 전설을 만들어내려 했다.19) 이와 같은 현상은 몽고메리의 부하였던 브라이언 호록스Brian Horrocks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호록스는 롬멜 신화를 논파하기 위해 영국 제8군이 아프리카 군단을 정정당당하게 격파했다고 주장했다.2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영화평론가는 롬멜을 저돌적이며 임기응변에 능하고, 가차없으면서도 진지하며, 강인하면서도 지적이고, 예의바른 직업 군인이며, 무모하지만 유능한 지휘관’으로 묘사하는 것은 ‘앵글로 색슨’적인 미덕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이라고 지적했다.21)  반면 몽고메리는 교조적인, 거의 ‘프로이센’ 적인 인물로 그려졌는데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문화적 역할 전도였다.


그러나 롬멜 전설의 내면을 고찰하는 보다 면밀한 사람들도 있었다. 한때 좌파였다가 독립적인 우파 비평가로 전향한 맬컴 머저리지Malcolm Muggeridge는 롬멜에 동정적인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과거를 잊고 용서하자는 태도를 보인 사람들과 같다고 비판했다. 그는 히틀러와 함께 자살한 괴벨스와 같은 완고한 나치들이 막판에 가라앉는 배에서 도망친 장군들 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머저리지는 롬멜 같이 윗 사람에 아부하는 거만한 꼭두각시들을 멀리해야만 독일이 ‘슬라브 제국주의의 위협’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독일이 서구 기독교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한다면 롬멜과 같은 인간들을 제거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시스템을 제거하고, 아프리카 전선의 ‘명예’가 강제수용소라는 이루 말할수 없는 불명예와 상관없다고 믿는 집단적인 정신병 성향을 영구히 벗어나야 하며, 포로가 된 연합군 장군 한명에게 보여준 ‘기사도 정신’이  수많은 불행하 사람들이 직면했던 한결같은 배신으로 점철되고 모든 문명화된 관습적 요소들을 잔인하게 무시한 대외정책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22)


전통적으로 영국 보수층을 대변해온 텔레그래프지의 필진들은 머저리지의 주장에 동의하는 글을 썼다. 그러나 영국 좌파들은 불안감을 느꼈다. 과거 심리전 담당 장교였으며 전후 코벤트리의 노동당 하원의원이었던 리처드 크로스맨Richard Crossman은 국가사회주의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했다. “롬멜이 매우 매력적이고 용맹하며 기사도적이므로 나치는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일 문제를 잘못 바라보는 것이다. 당시에는 정치에 관심없던 독일인이라 하더라도 훌륭한 나치 당원인 동시에 훌륭한 동료가 될 수 있었다.”23) 크로스맨은 뒤에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전쟁 중 우리 영국인들은 롬멜을 릴리 마를렌Lili Marlene처럼 받아들였고 그를 명예 영국인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그가 크리켓 경기의 규칙을 따르듯 공정하게 전쟁을 수행하는 유일한 독일인 인것 처럼 묘사했다. 물론 이것은 그저 신화에 불과하다. 다른 독일 장군들도 친위대의 행동에 불쾌감을 느꼈다. 물론 아무리 생각 해도 롬멜이 신사적인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크로스맨은 “롬멜 숭배자들이 롬멜은 잔혹한 군국주의자인 다른 독일 장군들과 다른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믿는 것은 친독파들의 신화가  아니”라는 점을 예리하게 파악했다. 크로스맨이 진정으로 비판한 것은 영이 롬멜을 반나치 저항인사로 묘사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독일 민족이 착한 독일인과 나쁜 독일인의 두 부류로 나뉜다는 자기 기만을 하고 있다. 나쁜 독일인은 군국주의자, 나치, 반 민주주의자, 그리고 잔혹 행위에 가담한 자들이다. 착한 독일인에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주의자와 신사적인 인물들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롬멜은 깨끗한 전사였으므로 그는 결코 나치가 될 수 없으며, 롬멜과 같은 인물은 소련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의 훌륭한 동맹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24)


마지막으로, 역사가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도 이 논쟁에 참여했다. “이제 ‘우리의 친구 롬멜’은 마법사나 악령이 아니라 영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것은 위험하다.” 로퍼는 롬멜이 초기에 히틀러를 지지했으며, 1938년에는 히틀러의 경호대장을 맡았던 전형적인 국방군 내의 국가사회주의 지지자였으며 전쟁 말기까지도 그랬다는 점을 지적했다. “우리가 무찌른 적을 높여주는 행위가 우리의 허영심을 충족시켜 줄진 모르나, 롬멜을 영웅이나 순교자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히틀러의 정책과 그가 수행한 전쟁은 심각한 범죄 행위였다.”25)


하지만 롬멜 평전에 대한 비판적 의견들은 롬멜 지지자들에 의해 상쇄되었으며 대중의 여론까지 양분됐다. 영의 롬멜 평전이 2년 뒤 영화로 만들어지자 이 영화는 영국 내에서 매우 우호적인 평을 받았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26)  타임스는 영화 평에서 이 영화를 독일인의 관점에서 보라고 조언했다.27) 만약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프리카 군단이 연합군에 의해 패배한 것이 아니라 히틀러의 간섭으로 패배했다고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러너드 모슬리Leonard Mosley는 데일리 익스프레스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이 영화는 아주 잘 만들어졌다. 연기도 매우 훌륭하고 굉장히 재미있다. 그런데 문득 일어나서 스크린에 수류탄을 까 던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나를 아주 화나게 만들었다.”28) 물론 이런 악평은 드문 편이었다. 레스터 스퀘어Leicester Square의 오데온Odeon 극장에서 시사회가 있었을 때 시어즈라는 41세의 여성이 “살인자를 미화하지 말라!”고 외치며 항의해서 훈방 조치되는 등 자잘한 비판이 있었을 뿐이다.29) 이밖에 빈과 밀라노에서는 이 영화가 개봉하자 공산당이 주도한 폭동이 일어나 영화가 상영 중단되었다.30) 이에 비하면 영국내의 반응은 조용한 편이었다. 그리고 원작이 된 평전이 총선 기간 중 출간된 것 처럼 이 영화도 토리당의 1951년 재집권 선거운동 중에 개봉했다. 그리고 엘 알라메인 전투 기념일에 처칠과 몽고메리가 연설을 하자 BBC에서는 이 연설을 내보내는 것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고 판단해, 연설 대신 ‘사막의 여우’ 영화 음악을 방송하는 기상천외한 행동을 했다.31)


저명한 영국 군사사가 리델 하트는 “과거 헐리우드가 역사를 다룬 방식을 본 경험 때문에 매우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고 관람을 하러 갔다. 그러나 매우 즐거운 충격을 받았다”고 평했다.32) 리델하트는 다른 영국군 고위 장교들과 이 영화를 단체 관람했는데, 함께 관람한 장교들도 격찬을 했다. 리델 하트는 원작이 된 평전과 영화에 관한 논쟁에 부지런히 참여했다. 사실 그는 이 영화의 자문으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를 참여시키는데 큰 도움을 줬다. 리델하트는 The Other Side of the Hill(1948)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당시 포로 신세였던 룬트슈테트를 인터뷰한 경험이 있었다. 리델 하트는 이 책에서 국방군 장성들을 단순한 ‘군사 전문가’로 묘사했었다. 하지만 영국보다 1년 빠른 1950년에 낸 개정판의 독일어본에서는 롬멜에 대해 한 장을 추가했다.33)  리델 하트는 여기서 영국인들이 롬멜에 대해 매우 애정어린 존경을 바치고 있다고 썼다.34) 그러니 이후 서독의 재무장 논쟁에서 리델 하트가 독일에 우호적인 외국의 전문가로서 활동하고35) 독일 국방군 장교들의 자서전에 서문을 써준 것36)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리델 하트가 추락한 명성을 회복하고 자신이 전격전의 사상적 아버지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국방군 고위 장교들의 복권을 도와주는 대신 자신의 주장을 지지해 달라는 밀약을 맺었을 가능성도 있다.37)  리델 하트는 The Rommel Papers(1953)의 영어판의 편집을 담당했다. 이 책은 1950년 독일에서 Krieg ohne Haß라는 제목으로 발행된 것 이었다. 리델 하트는 여기서 롬멜을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견주어 “사막전의 두 대가”라고 불렀다.39) 또한 리델 하트는 미국에 있던 롬멜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들이 반환되도록 도움을 줬다. 이 편지들은 영어판에 수록되어 롬멜의 인간적 면을 부각시켰다.
또한 리델 하트는 서독 영화계가 롬멜을 복권시키는 것을 도왔다. 이것은 전후 국방군 신화가 국제적 협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콘스탄틴 영화사가 만든 다큐멘터리 필름 ‘이것이 우리의 롬멜이다Das war unser Rommel(Wigankow, 1953)’은 비통한 추모의 감정과 상무적인 회상이 흥미롭게 결합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독일 군인묘지 관리협회Volksbund Deutsche Kriegsgräberfürsorge e. V.의 주도로 제작됐는데, 롬멜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영국 코만도 지휘관 조프리 케예스Geoffrey Keyes의 무덤에 독일 병사와 영국 병사가 함께 헌화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케예스가 전사하는 장면은 ‘사막의 여우’ 시작 장면에 나온다.)40) 그리고 이 영화는 롬멜의 무덤을 경건하게 비추면서 마무리 된다.(‘사막의 여우’ 시작 장면과 비슷하다.) 이 영화에는 독일 전시 선전영화에서 추려낸 장면과 영국에서  제작한 사막의 승리Desert Victory(1943) 에서 가져온 장면이 나오는데, 콘스탄틴 영화사는 후자의 공동감독인 데이빗 맥도날드David MacDonald를 편집에 참여시키기까지 했다. 또한 영화사는 기술 고문으로 롬멜의 참모장이었던 프리츠 바이어라인Fritz Bayerlein과 함께 리델 하트를 섭외하는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리델 하트는 “내가 기술 고문으로 참여하는 것은 영국에서 홍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콘스탄틴 영화사는 내가 하자는 대로 할 기세다.”라고 썼다.41)  ‘사막의 여우’가 영국과 독일의 고위 군사관계자들 간의 화해를 목적으로 했다면, 콘스탄틴 영화사의 작품은 일선 장병들 단위의 화해를 목표로 한 것 이었다. 영화의 화자는 아프리카 군단 출신의 고참병과 순진하면서도 어눌한 독일어를 쓰는 가상의 영국 참전병 ‘잭 엘리엇Jack Elliott’이다. 만약 리델 하트가 이 영화를 일방적인 영국의 선절물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영국 제8군은 스승인 롬멜로 부터 전술을 배워나간다. 이 영화에서 롬멜은 이미 1942년에 10년 뒤에 닥칠 냉전의 전개를 예측하는 초인적인 통찰력을 보여준다. “독일은 서방과 생각을 일치시켜야 한다. 유럽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동을 멈춰야 한다. 오직 정치, 경제, 군사적 공동체를 만들어야만 미래의 유럽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화해란 독일의 자기 주장과 긴밀하게 엮여 있었다.  ‘이것이 우리의 롬멜이다’의 기술 고문 중 한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임스 메이슨은 롬멜의 역할을 잘 연기했다. 하지만 진짜로 롬멜과 함께 싸웠던 우리가 보기에는 시시하다. 우리는 진짜를 만들려는 것이다.”42)  그래서 이 영화는 경건한 시작과 마무리 사이에 기억을 더듬어 가며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마초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또 한편의 수정주의적 다큐멘터리 영화 ‘독일 군인은 이러했다So war der deutsche Landser(바우마이스터Baumeister 감독, 1955)’는 대중의 기억에서 모든 분야의 정상화를 촉구했다. 이 영화에서도 극영화와 마찬가지로 전쟁에 대한 추억과 합리화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롬멜을 미끼로 사용했다.


다른 영국 군사사가들도 롬멜을 숭배하는 분위기에 일조했으나 대개는 롬멜의 정치적 배경 보다 군사적 업적에 초점을 맞추었다.43)  이 점은 영의 롬멜 평전이나 영화에서 간과한 영역이었다. 하지만 곧 군사애호가들도 롬멜 숭배에 동참하려고 했다. 비록 약간의 변명이 필요하긴 했지만 말이다. 북아프리카 전역 참전자였으며  BBC 라디오 방송의 중견 간부이자 Today Programme을 만든 로날드 르윈Ronald Lewin은  군사사를 다루는 내용을 한 편 방송한 뒤,44) 두 번째 편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미화하는데 집착하지 않더라도, 사막의 순수함이 사막에서 벌어진 전쟁을 정화해 주는 불가사의한 방식이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주장해야 한다.”45)  퇴역장성 데이빗 프레이저David Fraser는 롬멜을 현대의 영웅으로 떠받드는데 그치지 않고, 롬멜의 최후의 순간 뿐 아니라 그가 전장에서 보여준 용맹을 서술하는데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46)  최근에 나온 북아프리카 전역을 다루는 책 한권은 롬멜의 사후에 나온 회고록의 제목을 부제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47) 영국의 평전 작가들은 전후 초기 서독의 작가들,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서 롬멜의 참모장이었던 한스 슈파이델Hans Speidel 같은 인물 처럼 롬멜을 민주주의자로 묘사하는 신화에 빠지는 경향이 덜한 것으로 보인다.48) 대신 롬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정치적인 면은 탈색시키고 군사적인 측면만 부각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경향의 극단으로 나간 인물이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라는 비난을 받는 데이빗 어빙David Irving이다. 어빙은 롬멜이 히틀러에 저항했다는 주장은 무시하고, ‘비열한 인상을 주는 일반적인 나치와 반대되는 착한 나치라는 반(反)악당’을 만드는 대신 롬멜의 적수들을 공격한다.49) 어빙은 독일 연방군과 나토 건설에 기여한 슈파이델이 자신의 ‘후광’으로 사용하기 위해 롬멜 신화를 이용한 핵심적인 인물이라고 보았다.50)


이러한 군사사 연구와 함께 허구의 경계에 걸쳐있는 모험담들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는 ‘롬멜의 황금’이다. 이것은 아프리카 군단이 황금을 약탈해 지중해 어디엔가 숨겨두었다는 이야기인데 가히 현대의 성배 전설이라 하겠다.51)  이 이야기는 로맨틱 스파이 스릴러 소설52)과 영화53)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또 롬멜은 연합군 암살특공대가 노리는 어려운 목표물이 되기도 했다.54) 이런 이야기는 특공대를 다룬 작품의 좋은 소재였다.55) 롬멜 암살이란 이야기를 다루는 하위장르 작품들까지 등장했다.56) 이 중에는 존 케리건John Kerrigan57)이란 필명으로 알려진 찰스 화이팅Charles Whiting이 있었다. 화이팅은 레오 케슬러Leo Kessler라는 필명으로 “SS Wotan” 시리즈58)를 집필하면서 롬멜을 소재로 다뤘다. ‘사막의 여우’의 감독이었던 헨리 해서웨이Henry Hatherway는 이 영화를 촬영하고 20년이 지난 뒤 리처드 버튼Richard Burton을 주연으로 후방 특수작전을 다룬 ‘롬멜 습격작전Raid on Rommel(1971)’을 감독했다. 1970년대 영국의 어린이들은 에어픽스사에서 출시한, 먼 곳을 가리키는 롬멜과 그의 전용 장갑차 모형을 조립하곤 했으며, 오늘날도 수많은 회사들이 섬유로 만든 제복에 원수봉을 들고 있는 12인치급 롬멜 액션 피겨를 생산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롬멜의 지휘봉’, ‘광란의 지휘차Krazy Kommand Kar’ 같은 제품을 판매했다.59)  롬멜은 이런 식으로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고, 실제의 역사적 시공간과 단절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조잡한 방식으로 다루어지기도 했다.


‘훌륭한 적’에 깔린 맥락


지금까지 언급한 대중문화계에서 이루어진 논쟁을 살펴보면, 대중들은 독일에 대해 노골적이고 자연스러운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애증의 감정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러한 애증의 감정은 비교적 최근의 반사적인 반응과는 다른 보다 미묘한 것이었다. ‘훌륭한 적’이라는 기묘한 존재에는 복잡한 담론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몇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다. 독일은 더 이상 영국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않았다. 냉전과 새로운 (혹은 오래된) 적 소련에 맞서 군사력을 증강해야 하는 상황에서 영국은 ‘현실정치적 입장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이라는 새로운 동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의 등장으로 영국의 지위는 추락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까지 지키려고 했던 식민지들은 독립해 버렸다. 현대전쟁의 군사기술과 1949년 소련의 핵개발로 인한 핵무기 분야의 균형상태가 이루어지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영국과 같은 국가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최후의 재래식 전쟁이라는 인식이 형성됐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소한 전쟁 초반에는 독일이 ‘영국만의’ 숙적이라 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항복했으며 소련은 독일과 불편한 불가침 조약을 유지하며 공존하고 있었다. 미국은 1942년에야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독일에 우호적인 과거 인식은 당시 영국의 ‘반미주의’에 덧씌워진 가면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43년 2월 카세린 고개에서 실전경험이 없는 미군이 롬멜에게 참패를 당하자 영연방군 내부에서는 이를 ‘고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에녹 파웰Enoch Powell은 알제리에서 미군을 처음 만난 뒤 이렇게 썼다. “독일이나 일본 보다 더 큰 위협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우리의 가장 끔찍한 적 미국이었다.”60)  북아프리카 전선을 다룬 창작물에서는 미국을 영광스러운 과거에서 제거하려는 문화적 분리 경향이 나타난다.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가 토치 상륙작전이 일어나기 몇달 전 부터 추축군과 싸우는 내용의 실제 역사와는 담을 쌓은 사하라(졸탄 코르다Zoltan Korda 감독, 1943)라 록 허드슨Rock Hudson과 조지 페퍼드George Peppard가 출연한 토브룩(힐러 감독Hiller, 1967) 같은 작품을 제외하면, 북아프리카 전선을 다룬 영국 영화는 소수의 영국인 등장인물을 위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초라한 현실을 직면하기 보다는 ‘최고의 시간her finest hour’을 다시 체험하고 싶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적을 상대로 했다는 점이다. 독일군을 다루는 태도는 이탈리아군을 다루는 태도와 대비된다. 이탈리아는 1943년 부터는 연합군에 협력했지만, 영국의 전쟁영화에서는 이탈리아군을 우습고 경멸스러운 존재로 묘사했다.61)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인들은 그들이 사랑했던 금단의 존재 아돌프 히틀러가 사라진데 대한  자각하지 못하는 금단증상을 겪었다는 심성사연구가 있다.62)  마찬가지로 영국인들도 친숙한 증오의 대상이 사라지면서 고통을 겪었지만 동시에 독일과의 화해를 통해 새로운 기쁨을 얻었다. 증오와 증오의 관계에서는 타자화 과정을 통해 종종 자신과 180도 대비되는 적의 거울상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애증의 관계에서는 적에게 자신과 유사한 이미지를 투영한다. 롬멜 논쟁에 참여했던 ‘한 심리학자’는 영국인들이 롬멜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려 한 것을 사냥꾼이 전리품을 챙기는 행위, 또는 동성애 성향을 가진 집단행위로 묘사했다.


“이런 신사적인 행동은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사람, 전쟁의 정치적, 인간적 중요성을 외면하고 전쟁을 게임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63)


어렸을 때 맞은 경험에 대해서는 별 거 아니라고 회고하는 식이다.


“강한 사람에게 단련 받는 것을 즐기고 여성성 보다 남성성을 찬양하는 것은 훌륭한 전사를 만들어 주는 미덕이다…. [롬멜은] 우리 영국인들에게 패배를 안겨주었으며 팽팽한 대결 끝에 패배한 독일 장군이었다.”64)


영국과 독일의 관계가 강화된 원인은 부분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문화적 친밀성이 바탕에 깔려있다. 영국의 문화는 이미 호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점은 영국인들 역시 독일과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을 ‘전사 민족’으로 생각했음을 보여준다.65) 규율과 의무, 그리고 헌신은 세계의 모든 보수주의자들을 묶어주는 가치였다. 전쟁을 ‘공정한 규칙’에 따라 치러야 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인들의 공정함에 대한 관념은 총력전의 시대에 맞지 않는 괴상한 것이었지만 이 때문에 패배한 적이라도 존중할 수 있었다. 북아프리카 전선의 싸움은 운동경기에 비유되었다. 몬티는 “아프리카에서 적에게 한방 먹이려 했었다.” 그리고 독일 국방군에 대한 억눌린 선망의 감정도 있었다. 독일군은 동등한 조건에서 대개 연합군 보다 우월했으나 물질적인 열세 때문에 패배했다.66) 장교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기동전을 수행했다는 점은 부분적으로 현대적인 소모전을 거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즉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부터 벗어난 것으로 여겨졌다.) 동시에 나치 독일에 대한 전쟁을  ‘재군사화’ 하는 것은 이 전쟁에 대한 묘사를 순수하게 군사적인 것으로 한정하고 정치적 표현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독일 국방군이 서부전선에서 수행한 전투는 물론 동부전선에서 수행한 처참했던 소련과의 전투에 대해서도 명예를 회복시켜주려는 위험한 징조였다. 동부전선의 독일 국방군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미국 대중문화를 연구한  최근의 연구서에서는 미국인들의 반공적 소망이 영화와 워게임, 그리고 역사재현단체 등을 통해 과거에 투영된 것이라고 지적했다.67)  롬멜이 저지른 과오는 밝혀지지 않는 것이 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롬멜은 비교적 평이 좋았고 이 때문에 더 많은 과오를 저지른 다른 독일군 장교들을 복권시키는데 이용됐다. 노샘프턴의 노동당 하원의원 레지널드 페이젯Reginald Paget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전범 재판에서 그를 변호하며  만슈타인의 지휘하에 벌어진 대게릴라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독일군이 빨치산을 상대로 공정한 규칙에 따라 싸웠어야 한다는 주장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68) 영국의 오드햄스Odhams 출판사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전범재판 기소를 피한 룬트슈테트의 전기69)를 발행하면서 룬트슈테트가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미수사건 관계자들을 폄하한 사실은 숨기고 넘어갔다.70) 1950년대 초반에는 영국과 독일에서 독일 국방군에 긍정적인 인상을 주고자 협력했기 때문에 독일군 장성들의 회고록을 두고 별다른 논쟁이 없었다. 영국에서 먼저 독일 국방군을 미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과거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선전기구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 수정주의적인 주장을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파울 카렐Paul Carell은 동부전선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의 역사서를 기술하기 전에 먼저 롬멜에 대한 책을 집필했다.71) 파울 카렐의 저작들은 번역되어 영어권 국가에도 소개됐다. 파울 카렐을 격찬한 영국과 미국의 독자들은 그의 본명이 파울 카를 슈미트Paul Carl Schmitt이고 리벤트로프의 외무부에서 언론담당관으로 재직한 친위대 중령이었단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영화의 대본 같은 문화적 산물을 다룰 때는 냉전 정치의 배경 뿐만 아니라 해당 장르의 일반적인 규칙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훌륭한 적’이라는 소재는 정치적 필요 뿐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각본가들은 적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묘사하면 관객들이 흥미를 잃을 것이라고 걱정한다. 대부분의 선전 영화들은 사상 개조를 위한 줄거리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 중에는 다소 갱생의 여지를 가진 사람이 포함돼야 했다.  좋은 작품에는 사악한 인물과 대비되는, 흠은 있으나 본성은 착한 인물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작품 내에서 (현실에서는 한 사람에게 모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심리를 가진 상호보완적인 한 쌍의 등장인물을 등장 시키게 된 것이다. 전형적인 방식은 성별로 구분하여 착한 독일인은 여성, 사악한 나치는 남성으로 한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은 바실 디어든Basil Dearden이 1947년에 감독한 프리다Frieda라는 작품이 있다. 일링Ealing 영화사에서 제작한 이 작품은 영국인과 결혼해 영국에 이주한 독일인 신부가 주인공으로, 주인공과 대립하는 인물은 그녀의 오빠인 구제불능의 나치 광신자 리키Ricki이다. 주인공 프리다는 전통적인 여성 역할인 순종적 부인으로 가상의 마을 덴필드 주민들의 적대감을 해소해 나간다.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프리다 같은 사람이 당신의 동네에 살아도 되겠습니까?’라는 질문과 ‘예’라는 답을 받게 된다. 반면 독일 국방군 포로인 리키는 호전적이고 광신적인 말만 하다가 끝내 패배한다.72)
그러나 이런 이분법적인 방식에는 대가가 따른다. 전쟁 직후의 영화에 부정적인 이미지의 독일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주 많았다. 하지만 부정적인 이미지의 독일인은 전형적인 ‘사악한 나치’로 한정됐다. 영국인들이 떠올리는 사악한 나치의 스테레오타입은 그들의 상상속에서 거위걸음으로 행진하는 모습이었다. 전형적인 사악한 나치/착한 독일인을 대비시키는 구도는 포로수용소를 다룬 작품에서 잘 나타났다. 이 경우에는 연합군 포로들과 친위대/게슈타포를 상대로 두 개의 전쟁을 치루는 명예로운 수용소 지휘관이 등장인물이었다. 이런 소재를 다룬 초기의 영국영화로는 The Captive Heart(디어든Dearden 감독, 1946)가 있다. 카렐 슈테파넥Karel Stepanek이 연기한 게슈타포 요원 포르스터는 외알 안경을 쓰고 방수 코트를 입고 다니는 인물로 심지어는 수용소 경비병들과도 친하지 않은 인물이다. Albert, R.N.(길버트Gilbert 감독,1949)에 등장하는 자상한 이미지의 독일 해군 지휘관은 매부리코의 배우 안톤 디프링Anton Diffring이 연기한 친위대원과 갈등을 빚는다. 안톤 디프링이 연기한 친위대원은 이후의 작품에서 사악한 나치의 전형이 되었다. 이러한 대립 구도는 스스로를 패러디할 때 까지 꾸준히 계속됐다. The Colditz Story(해밀턴Hamilton 감독, 1955)에서는 포로수용소 생활을 마치 영국의 어린이들이 불량배들을 골탕먹이는 수준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이런 주제의 영화에도 작은 변형이 있었다. 초기의 작품들은 장교들 간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반면, 후기의 포로 수용소 영화들은 병사 포로와 경비병들간의 무산계급적 연대를 보여주는 형태였다. 코미디 영화 The Password is Courage(스톤Stone 감독, 1962)에서 런던 출신의 딕 보가드는 모자라 보이는 독일군 부사관을 조롱하기도 하고 보호해 주기도 한다. 이 장르가 새로운 이야기 방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탈주자The One That Got Away(워드 베이커Ward Baker 감독, 1957)에는 독일군이 포로로 나온다. 이 영화는 새로운 스타 하디 크뤼거Hardy Krüger의 영국 무대 대뷔작이었는데 당대의 영국배우들과 달리 강인하고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고 엄청난 남성성을 과시했기 때문에 영국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73) 영국 관객들은 수용소를 탈출하려는 독일 공군 조종사를 응원하게 되었다. 이것은 감독이 ‘동성애자, 프로이센 장교, 게슈타포의 고문 기술자, 또는 맥주에 쩔은 바이에른 인’ 같은 스테레오타입을 극복한 결과였다.74)  존 램스덴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영국과 독일의 화해에 있어 중요한 요인은 재정 문제였다고 한다. 영국 영화 업계는 영국 국내시장 만으로는 이윤을 늘릴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유럽, 그리고 독일 영화 시장을 노렸다. ‘탈주자’는 서독에서 큰 흥행을 거뒀으며 300만 파운드를 벌어들였다.75)  아더 랭크J. Arthur Rank가 언론홍보자료에서 밝힌 것 처럼 영화배우들은 새로운 문화 외교관이었다. “외교부는 영화배우들에게 보너스를 줘야 합니다. ‘탈주자’는 ‘독일인’에 대한 반감과 편견을 없애는데 아주 효과가 좋았습니다.”76) 하디 크뤼거는 이 영화가 개봉한 뒤 해외 활동에 대한 공헌으로 독일연방공화국공로장을 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첫 번째 언론회견에서 영국 기자가 크뤼거에게 과거 나치 활동에 연루되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크뤼거는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크뤼거의 영화 데뷔작은 알프레드 바이더만의 1944년작 Junge Adler였다.77)


‘탈주자’는 영국과 독일의 화해를 다룬 가장 유명한 영화였다. 하지만 이 영화 말고도 다른 작품이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So Little Time(베넷 감독Bennett, 1952)에서 영국배우 마리우스 고링Marius Goring은 벨기에에 주둔한 독일 장교 역할을 맡았고 신인 배우 마리아 쉘Maria Schell이 젊은 여백작 역할을 맡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적막은 독일 장교가 사랑의 노래를 부르면서 깨지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고링은 파웰Powell과 프레스버거Pressburger의 작품 Ill Met by Moonlight(1957)에서도 유사한 역할을 맡았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전쟁 중에는 가장 유명한 반독일영화 The Life and Death of Colonel Blimp(1943)을 제작했다. 이 영화에서는 안톤 월브룩Anton Walbrook이 귀족 집안의 독일 장교 역할을 맡아 영화의 막바지에 신념에 차 파시즘에 반대하게 된다.  Ill Met by Moonlight는 1944년 크레타에서 있었던 크라이페 장군 납치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로 주인공들이 산을 가로지르는 장면에서 영국인의 아마추어적인 모습과 독일인의 정확한 모습을 다소 코믹하게 대조시켰다.78)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크라이페 장군은 추격대가 찾을 수 있도록 조심해서 표시한 것들을 영국군 특공대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제거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크라이페 장군은 영국 특공대의 진정한 프로페셔널리즘에 감복해 경례를 한다.
파웰과 프레스버거가 이전에 제작했던 라 플라타강 전투The Battle of the River Plate(1956) 에서도 피터 핀치Peter Finch가 연기한 랑스도르프Hans Langsdorff 함장에 대한 시선은 동정적이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비극적인 영웅으로 묘사한다. 이 영화와는 반대로 전쟁 중에 같은 소재로 만들어진 For Freedom(엘비Elvey, 나이트Knight, 1940)에서는 독일측을 그리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았다. 라 플라타강 전투에서는 독일 장교의 기사도적인 모습과 그라프 쉬페호의 마지막 순간을 보도하는 무신경한 미국 언론의 모습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 영화를 본 영국 관객이 누구의 입장에 공감할 것인지는 명확하다.


또한 영국과 독일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독일인 배우를 사악한 나치로 캐스팅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벌지 전투The Battle of the Bulge(아나킨Annakin 감독, 1965)의 광신적인 기갑 장교는 로버트 쇼Robert Shaw가 연기했다. 폴 스코필드Paul Scofield는 The Train(프랑켄하이머Frankenheimer 감독, 1964) 에서 미술 애호가 이면서 인질을 가차없이 죽이는 인물을 연기했다. 영국에서 제작했거나 영국인 배우가 나오는 전쟁 영화 중 많은 수가 독일군의 제복에 대한 판타지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복장도착이라고 부를 만 하다. 나치 독일은 패망했지만 독일 국방군은 나치의 프로파간다에 나타난 것 보다도 더 멋지게 표현되었다. 스코틀랜드 작가 알래스테어 맥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나바론의 요새The Guns of Navarone(1961)에서 그레고리 펙과 데이빗 니븐은 독일군으로 위장하는데, 이와 같은 장면은 역시 맥린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독수리 요새Where Eagles Dare(1968)에도 나온다. 또한 급행탈출Von Ryan’s Express(1965)에서는 연합군 포로들이 탈출하면서 독일군으로 위장하는데 영국 군종장교가 인질로 잡은 독일 장교의 제복을 입는 장면은 이 영화에 코믹함을 더해준다. 독일군들도 위장한 영국 군종장교에게 속아넘어가는데 이중 한명은 카메라에 대고 ‘이런. 나치당원이잖아!’라고 말한다. 진지하게 말하면, 이런 복장도착은 도덕적 선을 넘는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행위이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폴란드계 작가 표트르 우클란스키Piotr Uklanski는  독일 국방군 제복을 입은 헐리우드 배우들을 촬영한 사진 전시회의 관람객들은 독일군을 미화하는 것에 동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한 바 있다.79) 또한 어떤 경우에는 관객들이  극중의 독일군에 완전히 동조하기까지 한다. ‘독수리 내리다The Eagle Has Landed(Sturges, 1976)는 카발칸티의 Went the Day Well?(1942)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1942년 작에서는 독일군 제5열이 냉담한 태도 때문에 민간인들에게 정체를 들키게 된다. 그러나 ‘독수리 내리다’의 관객들은 오히려 마이클 케인이 연기한 독일 공수부대원을 응원한다.80)


다시 북아프리카 전선 이야기로 돌아가자. 북아프리카 전선은 1950년대에 만들어진 여러편의 전쟁영화의 무대였다. 사막은 화해라는 서사의 완벽한 무대였으며 또한 자연이라는 공동의 적이 실존의 문제를 제기하는 장소였다. 영국 영화 ‘Ice Cold in Alex’(톰슨Thompson 감독, 1958)는 사악한 나치가 교화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에서 남아프리카군 낙오병으로 위장한 독일 스파이는 개심하여 연합군에 합류하는 ‘착한 독일인’이 된다. 이 영화는 텍스트적인 측면에서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히치콕의 ‘구명정Lifeboat’(1944)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에서도 독일인은 괴력을 발휘해 자신의 적을 돕는다. 하지만 Ice Cold in Alex의 연합군은 독일인을 내쫒지 않으며 오히려 카타라 분지의 모래늪에 빠진 독일인을 구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쓴다. 루츠 대위는 영화 마지막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장면에서 ‘모두가 사막이라는 거대한 적에 맞서 싸웠다’고 말한다.  이와 비슷하지만 보다 서정적이고 비극적인 작품으로는 프랑스-스페인-서독 합작영화 Un Taxi pour Tobrouk(데 라 파테유de La Patelliere감독, 1960이 있다. 이 영화에서 하디 크뤼거는 리노 벤투라와 협력해서 지뢰밭을 뚫고 나가지만 결국 연합군의 오인 사격에 쓰러지고 만다. 크뤼거는 ‘피닉스Flight of the Phoenix’(알드리치Aldrich 감독, 1965)에서 그가 기존에 했던 배역과 비슷하게 사막에 조난된 석유기술자들과 힘을 합쳐서 추락한 비행기가 다시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술자를 연기했다. 1950년대 북아프리카 전선을 다룬 영화 중 나쁜 독일인을 묘사한 유일한 작품은 ‘젊은 사자들The Young Lions(드미트릭Dmytryk 감독, 1958) 정도이다. 이 영화에는 잠든 영국군 병사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이런 작품조차 불편한 부분은 제거했다. 원작 소설에 나오는 반영웅 캐릭터인 독일군 부사관은 부상당한 영국군 포로를 죽이라는 명령을 어쩔 수 없이 따른다. 하지만 영화판에서 말론 브란도가 연기한 크리스티안 디틀은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어째서 그랬는가? 당시 20세기폭스사의 최고경영자였던 버디 아들러Buddy Adler는 이렇게 설명했다.
“각본에 좋은 독일인도 있다는 장면을 넣은 것은 매우 훌륭했다. 독일군인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나치는 아니라는 묘사이다. 만약 이런 장면을 넣지 않는다면 오늘날 서독이라 하더라도 이 영화를 상영하지 못할 것이다. … 잘 만든 영화는 독일에서 백만달러는 벌어들일 수 있다.”81)


여기서 영국의 역사와 독일의 역사가 교차한다. 1950년대의 영화는 물론 도서 출판은 갈수록 국제적인 사업이 되어갔다. 1990년대의 국방군 논쟁은 대부분 독일 내의 문제로서 다루어 졌으며 전후 독일, 그 중에서도 특히 서독의 전후 문제로 다루어졌다.82) 하지만 영국과 미국이 깨끗한 독일 국방군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공모한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깨끗한 독일 국방군이라는 신화화는 국제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에르빈 롬멜은 끔찍한 전쟁 범죄자가 아니었을 것이며, 전쟁 범죄자라기 보다는 여행의 동반자와 같은 인물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막의 여우’에 대한 영화평 중 하나는 이런 영화는 당시의 독일에서 제작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국인이 독일 역사의 한 장을 열었다. 이 영화는 히틀러의 테러에 저항한 ‘또 다른 독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완고한 사람들에게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 독일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충분한 거리를 두고 설득력 있는 서사를 만들기 힘들었을 것이다.”83)


버벨 베스터만Bärbel Westermann은 이 영화로 인해 서독에서 전쟁 영화 제작에 대한 금기가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전쟁 영화 제작은 아무런 반성 없이 상무적 가치로 회귀하는 게 아니었다. 최근 이 학술지에 실린 논문 중 한편은 독일의 자유주의적 평론가들이 1957년 개봉한 영국의 반전영화 ‘콰이강의 다리’에 대해 대영제국을 찬미하고 있으며 인종주의적인 성향이 내재되어 있다고 비판했음을 지적했다.85) 몇몇 독일 평론가들은 ‘콰이강의 다리’가 국적을 불문하고 꺾이지 않는 전쟁 포로들의 의지를 보여준다고 평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들은 소련에 억류되었던 독일군 포로들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즉 문화 창작물은 지리적 경계를 뛰어넘으면서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영국 영화제작자들은 좋은 의도에서 독일군을 훌륭하게 묘사했지만 여기에는 위험성이 있었다. 리델 하트와 같은 영국 역사가들은 암암리에 독일군이 전쟁법규에 저촉되는 행위를 저지른 지역을 포함해 독일 국방군의 모든 행적에서 과오를 제거했다. 이들의 저작은 다시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어두운 과거에 정당성을 부여하도록 만들었다.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정치적 책임을 깔끔하게 흑백논리로 구분할 수 는 없겠지만, 그것은 최소한 검은색과 회색field gray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일 국방군을 ‘훌륭한 적’으로 재창조한 것은 전후 영국의 정체성을 남성적이고 탈 미국적으로 재건하고자 하는 필요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86) 영국인들은 비교적 최근의 과거로 부터  상무적인 기풍을 부활시키려다 반전영화가 아니라 다소 위험한 전쟁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좋은 독일인’에 대한 묘사는 ‘사악한 나치’에 대한 강박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대신 독일인들을 달래기 위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물이었다.


주석
1) Anthony Aldgate and Jeffrey Richards, Britain Can Take It: British Cinema in the Second World War (Oxford, 1986); James Chapman, The British at War: Cinema, State and Propaganda, 1939 – 1945 (London, 1998); S.P. ackenzie, British War Films, 1939 – 1945 (London, 2000).
2) Ian Christie, The Life and Death of Colonel Blimp: Powell and Pressburger (London, 1994); A.L. Kennedy, The Life and Death of Colonel Blimp (London, 1997).
3) Mark Connelly, We Can Take It! Britain and the Memory of the Second World War (Harlow, 2004), pp. 267 – 99.
4) John Ramsden, ‘ Refocusing “ The People’s War ” : British War Films of the 1950s ’ ,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 33 (1998), pp. 35 – 64, here p. 35.
5) Norman Davies, Europe at War, 1939 – 1945: No Simple Victory (London, 2006), p. 439.
6) Roberts to Strang, 29 Apr. 1952, The National Archives (Kew), FO 1110/528.
7) Desmond Young, Rommel (London, 1950).
8) Sunday Express (8 Jan. 1950).
9) Life (8 Oct. 1951).
10) Ibid ., p. 23.
11) Winston S. Churchill, The Grand Alliance (Boston, MA, 1950), p. 200.
12) Young, Rommel , p. 190.
13) Manchester Guardian (25 Jan. 1950).
14) Sunday Times (22 Jan. 1950).
15) Rommel: A Great Soldier ’ , Manchester Guardian (23 Jan. 1950).
16) Evening Standard (24 Jan. 1950).
17) Reuth, Rommel , pp. 121 – 61.
18) Cyril Kersh, The People (22 Jan. 1950); Jon Kimche, ‘ The White Knight ’ , Tribune (27 Jan. 1950).
19) E.T. Williams, ‘ The Rommel Legend ’ , Observer (22 Jan. 1950).
20) ‘ The Rommel Myth Debunked ’ , Picture Post (1 Apr. 1950), pp. 39 – 41.
21) George Malcolm Thomson, ‘ The fascinating story of a swashbuckling general ’ , Evening Standard (25 Jan. 1950).
22) ‘ Rommel: A Flattering and Unconvincing Portrait ’ , Daily Telegraph (23 Jan. 1950).
23) The New Statesman and Nation (28 Jan. 1950).
24) Picture Post, 1 Apr. 1950, p. 41.
25) Why should we idolise Rommel? ’ , Picture Post (18 Mar. 1950), pp. 25 – 9.
26) Johnson to Young, 26 Oct. 1951, Boston University — Howard Gotlieb Archival Research Center, Nunnally Johnson collection, box 7/61; see also Brian C. Etheridge, ‘ The Desert Fox, Memory Diplomacy, and the German Question in Early Cold War America’, Diplomatic History , 32 (2008), pp. 207 – 238.
27) The Times (10 Oct. 1951).
28) Daily Express (4 Oct. 1951).
29) ‘ War widows say “ Free wife who shouted at Rommel ” ’ , Herald (5 Nov. 1951).
30) Manchester Guardian (29 Feb. 1952); Rundschau am Montag (6 Oct. 1952).
31) Neue Zeitung (21 Oct. 1951).
32) Liddell Hart to editor of Daily Herald , 21 Nov. 1951, Liddell Hart Centre for Military Archives, King’s College London, Basil Liddell Hart papers, 9/24/34.
33) Basil Liddell Hart, The Other Side of the Hill: Germany’s Generals — Their Rise and Fall, with Their Own Account of Military Events, 1939 – 1945 (2nd edn, London, 1951), pp. 76 – 85. In German this appeared as Jetzt dürfen sie reden: Hitlers Generale berichten (Stuttgart, 1950).
34) Ibid ., p. 76.
35) Alaric Searle, ‘ A Very Special Relationship: Basil Liddell Hart, Wehrmacht Generals and the Debate on West German Rearmament, 1945 – 1953 ’ , War in History , 5 (1998), pp. 327 – 57.
36) 예를 들면, Heinz Guderian, Panzer Leader (London, 1952), pp. 11 – 15; Erich von Manstein, Lost Victories: The War Memoirs of Hitler’s Most Brilliant General (London, 1958), pp. 13 – 16 등이 있다.
37) John J. Mearsheimer, Liddell Hart and the Weight of History (London, 1988).
38) Basil Liddell Hart (ed.), The Rommel Papers (London, 1953); Erwin Rommel with Lucie Rommel and Fritz Bayerlein (eds), Krieg ohne Haß (Heidenheim, 1950).
39) Liddell Hart (ed.), Rommel Papers , p. xiv.
40) Illustrierte Film-Bühne , Nr. 1985.
41) BLH handwritten notes, LHCMA, Basil Liddell Hart papers, 9/24/35.
42) Daily Express (18 Sept. 1952).
43) Kenneth Macksey, Rommel : Battles and Campaigns (London, 1979).
44) Ronald Lewin, Rommel as a Military Commander (London, 1968).
45) Ronald Lewin, The Life and Death of the Afrika Korps (1977; Barnsley, 2003), p. 21.
46) David Fraser, Knight’s Cross: The Life of Field Marshal Erwin Rommel (London, 1994).
47) John Bierman and Colin Smith, Alamein: War without Hate (London, 2002).
48) Hans Speidel, Invasion 1944: Ein Beitrag zu Rommels und des Reiches Schicksal (Tübingen and Stuttgart, 1949), translated as Invasion 1944: Rommel and the Normandy Campaign (Chicago, 1950).
49) David Irving, The Trail of the Fox: The Life of Field Marshal Erwin Rommel (London, 1977), p. 5.
50) Ibid ., p. 408.
51) Peter Haining, The Mystery of Rommel’s Gold: The Search for the Legendary Nazi Treasure (London, 2004).
52) Maggie Davis, Rommel’s Gold (London, 1971).
53) Il Tesero di Rommel (Marcellini, 1955).
54) Michael Asher, Get Rommel: The Secret British Mission to Kill Hitler’s Greatest General (London, 2004).
55) Jon E. Lewis (ed.), The Mammoth Book of Special Forces: Over 30 Missions of Ultimate Danger Behind Enemy Lines, from the Attempted Assassination of Rommel to the Iraq War (Philadelphia, 2008).
56) Steven Pressfield, Killing Rommel (New York, 2008).
57) John Kerrigan, Kill Rommel (Sutton, 1995).
58) Leo Kessler (Charles Whiting), Rommel’s Last Battle (Sutton, 2006).
59) Dennis Showalter, Patton and Rommel: Men of War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2005), p. 1.
60) Simon Heffer, Like the Roman: The Life of Enoch Powell (London, 1998), p. 75.
61) 심지어는 영국과 이탈리아의 화해를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 The Best of Enemies (Hamilton, 1962) 조차도 이탈리아군을 만화에 나올법한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묘사했다. 사실 이탈리아군을 희화하 하는 것은 전쟁 중에 제작된 Five Graves to Cairo (Wilder, 1943)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62) Alexander and Margarete Mitscherlich, Die Unfähigkeit zu trauern: Grundlagen kollektiven Verhaltens (Munich, 1967).
63) ’ Why Rommel goes down with Sportsmen ’ , Picture Post (1 April 1950), p. 43
64) Ibid.
65) Michael Paris, Warrior Nation: Images of War in British Popular Culture (London, 2000).
66) John Laffin, Jackboot: The Story of the German Soldier (1965; Thrupp, 2003), p. vii.
67) Ronald Smelser and Edward J. Davies, The Myth of the Eastern Front: The Nazi-Soviet  War in American Popular Culture (Cambridge, 2008), esp. pp. 187 – 222.
68) R.T. Paget, Manstein: His Campaigns and His Trial (London, 1951), p. 139.
69) Guenther Blumentritt, Von Rundstedt: The Soldier and the Man (London, 1951).
70) Donald Bloxham, Genocide on Trial: War Crimes Trials and the Formation of Holocaust History and Memory (Oxford, 2001), p. 46.
71) Paul Carell, Die Wüstenfüchse: Tatsachenbericht (Hamburg, 1958), 이 책은 2년뒤 영어로 번역됐다. 또한 Wigbert Benz, Paul Carell: Ribbentrops Pressechef Paul vor und nach 1945 (Berlin, 2005)를 참고하라.
72) Charlotte Brunsdon and Rachel Moseley, ‘ She’s a foreigner who’s become a British subject: Frieda ’ , in Alan Burton et al. (eds), Liberal Directions: Basil Dearden and Postwar British Film Culture (Trowbridge, 1997), pp. 129 – 36.
73) Melanie Williams, ‘ “ The Most Explosive Object to Hit Britain since the V2! ” : The British Films of Hardy Krüger and Anglo-German Relations during the 1950s ’ , Cinema Journal , 46, 1 (2006), pp. 85 – 107.
74) Roy Ward Baker, The Director’s Cut: A Memoir of 60 Years in Film and Television (London, 2000), p. 99.
75) Sue Harper and Vincent Porter, British Cinema of the 1950s: The Decline of Deference (Oxford, 2003), p. 48.
76) J. Arthur Rank, ‘ Presse-Information ’ for Einer kam durch , Bundesarchiv-Filmarchiv, 3364.
77) Ramsden, Don’t Mention the War , pp. 295 – 324.
78) Michael Powell, Million Dollar Movie (New York, 1995), p. 352.
79) Piotr Uklanski, The Nazis (Zurich, 1999).
80) S.P. Mackenzie, ‘ Nazis into Germans: Went the Day Well ? (1942) and The Eagle Has Landed (1976) ’ , Journal of Popular Film and Television , 31 (2003), pp. 83 – 92.
81) Buddy Adler, ‘ Memorandum on First Draft Continuity of 4/25/57 ’ , 15 May 1957,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Doheny Library, 20th Century-Fox collection.
82) Michael Schornstheimer, ‘ “ Harmlose Idealisten und draufgängerische Soldaten ” : Militär und Krieg in den Illustriertenromanen der fünfziger Jahre ’ , in Hannes Heer and Klaus Naumann (eds), Vernichtungskrieg: Verbrechen der Wehrmacht 1941 bis 1944 (Hamburg, 1995), pp. 634 – 50.
83) Kurier (11 Oct. 1952). Emphasis in original.
84) Bärbel Westermann, Nationale Identität im Spielfilm der fünfziger Jahre (Frankfurt/Main, 1990), pp. 51 – 67.
85) Anne-Marie Scholz, ‘ The Bridge on the River Kwai (1957) Revisited: Combat Cinema, American Cinema and the German Past ’ , German History , 26 (2008), pp. 219 – 50.
86) Christine Geraghty, British Cinema in the 1950s: Gender, Genre and the ‘ New Look ’ (London and New York, 2000), pp. 175 – 95. 존 레논이 출연했으며, 전쟁영화들을 비튼 독특한 코미디 영화 How I Won the War (Lester, 1967)는 이러한 장르에 대한 자기 비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남성적인 기독교 문화와 독일 파시즘을 동일하게 묘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