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 31일 목요일

[美利堅史] - 露西亞國王 스탈린 世家

노서아 국왕 스탈린은 성은 쥬가시빌리, 이름은 요시프다. 그의 어머니 예카테리나는 노비 출신이라 전한다. 스탈린이 자라자 예카테리나는 아들을 사찰에 집어 넣었다. 이때 노서아에는 마르크스 귀신을 섬기는 사교가 성행했다. 마르크스를 섬기는 무리들은 붉은색을 숭상했기 때문에 홍건적이라고도 한다. 많은 무뢰배들이 마르크스를 섬겼는데 스탈린도 여기에 현혹돼 홍건적이 됐다.

테오도어 루즈벨트 5년, 스탈린이 무리들과 함께 노략질을 시작했는데 이로서 홍건적들 사이에 이름을 떨치게 됐다.
태프트 4년, 마침내 스탈린이 여러 도적들의 추대를 받아 장군이 됐다. 이때 홍건적의 수괴 레닌은 대장군을 칭하며 무리를 모았는데 그 수효가 수만이었다.

윌슨 5년, 노서아 국왕 니콜라이 2세가 부덕해 왕위에서 물러나니 케렌스키가 섭정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이때 노서아는 덕국과 전쟁을 치르며 연전 연패 하니 민심이 자못 흉흉하였다.
괴수 레닌이 때를 틈타 도적의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키니 섭정 케렌스키는 크게 낭패하여 도주하였다. 레닌이 스스로 노서아 왕을 칭하고 국호를 소련이라 하였다.

이때 뜻있는 노서아의 장수들이 앞다투어 홍건적을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켰다.
이 중 대장군 데니킨과 수군 제독 콜착의 군세가 가장 왕성했다. 처음에 관군의 기세가 등등하여 곳곳에서 도적들이 대패했으나 레닌이 트로츠키를 대원수에 임명해 기세를 올리니 이때부터 관군의 예기가 꺾였다.
이때 스탈린도 장군이 되어 관군과 싸웠다. 스탈린이 거느린 군사가 가는 곳 마다 승리하니 그 명성이 거듭 높아졌다.

이때 파란(波蘭)이 군사를 일으키니 순식간에 노서아의 서쪽 변경 수천리가 파란 군사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대장군 투하체프스키와 스탈린에게 군사 수십만을 주어 파란을 치게하니 파란 군대가 일패도지하였다. 이때 영길리와 불란서는 홍건적의 기세가 왕성함을 우려해 군사를 일으키려 하니 레닌은 이를 우려해 파란을 치는 군대를 거두었다.

쿨리지 2년, 레닌이 붕어(崩御)하였다. 이에 트로츠키와 부하린 등 여러 괴수들이 서로 앞다퉈 왕위를 노렸다.
홍건적들이 왕을 추대하는 법도는 자못 괴이하다. 먼저 막사과(莫斯科)의 크렘린 궁에 각지의 두령들을 모으고 왕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 서로 언변을 겨루는데 이 중 가장 달변인 자를 왕으로 추대한다고 한다.
이때 트로츠키는 자신의 학식을 뽐내며 스탈린이 무뢰배 출신이라 하여 심히 업신여겼다.
그러나 스탈린과 여러 차례 언쟁을 겨루매 매번 논파 당하였다.

이에 여러 무리가 스탈린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스탈린은 국왕이 되자 흉포한 본색을 드러냈다. 스스로 마르크스, 레닌에 이은 미륵의 현신이라 칭하고 여러 경전을 저술해 두령들 앞에서 강론했는데 그 말이 요망하여 모두 옳은 말이 아니었다.
묵서가에서 숨어살던 트로츠키가 스탈린이 지은 경전을 두고 평하여 “모두 사특하고 괴이한 설이다”라고 하니 스탈린이 이를 듣고 노하여 곡괭이로 쳐 죽였다.

그리고 산업을 일으킨다 하여 농민들을 핍박하니 굶어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또 사나운 개 키우기를 좋아하여 그 수가 수천이었는데 그 중 가장 아끼는 개를 “예조프”라 하였다. 예조프의 성질이 사나워 사람을 여럿 물어 죽였으나 오히려 스탈린은 이를 보고 즐거워 하였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5년, 스탈린이 대원수 투하체프스키와 여러 장군들을 참살하였다.
투하체프스키는 일찍이 명장으로 이름이 높아 각국의 무인들이 그 이름을 사모하였다. 하루는 스탈린이 투하체프스키를 잡아들여 죄를 추궁했다.

“네가 덕국과 내통하고 있다니 어찌된 일인가?”

투하체프스키가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어찌 소장이 덕국과 내통하겠사옵니까?”

“짐이 관심법으로 보았노라”

이리하여 투하체프스키와 여러 장수들이 예조프에게 물려 죽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7년, 스탈린이 예조프를 솥에 삶고 더 사나운 개를 들였다. 그 이름을 베리야라고 지으니 사람들이 예조프 보다 더 두려워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9년, 덕국왕 히틀러가 대군을 일으켜 노서아를 쳤다. 노서아의 이름 높은 장수들이 이미 예조프에 물려 죽은지라 군대를 제대로 지휘할 자가 없었다. 덕국 군대가 노서아의 강역 수천리를 휩쓸고 노서아 군사 수백만을 무찌르니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11년, 대장군 바실레프스키가 스탈린그라드에서 덕국 군사를 크게 무찌르니 비로서 덕국의 예기가 꺾였다.

트루먼 1년, 대원수 주코프가 덕국의 왕성 백림을 함락하니 덕국왕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 천자가 친히 포츠담 성에서 스탈린의 노고를 치하하고 동구라파를 식읍으로 하사했다. 천자가 일본국을 토벌할 것을 명하니 스탈린이 명을 받들어 일본국을 토벌했다. 다시 천자가 스탈린에게 작위를 거듭 내리고 한국의 절반을 봉읍으로 하사했다.

스탈린이 덕국을 정벌하고 동구라파를 식읍으로 받으니 교만한 마음이 더하여 역심을 품었다.
소련의 군사가 수백만이요 전차가 수만대에 달하니 서구라파의 여러 왕들이 두려워 하니 천자가 나토라는 관청을 두고 구라파에 천병을 보내어 국경을 순찰하게 하였다.
스탈린이 이때부터 번번히 천명을 거스르며 천자의 예를 행하니 화성돈의 뜻 있는 신료들은 이를 불안하게 여겼다.

아이젠하워 1년, 스탈린이 붕어하였다. 이에 베리야가 달을 바라보며 슬피 짖었다.

2006년 8월 30일 수요일

1949년 부평 조병창의 무기 생산

KMAG 문서군을 뒤지다 부평 조병창에 대한 내용을 조금 찾게 됐다.(정작 원래 찿으려는 내용은 하나도 못 찿았음) 일제시대 때 남한지역에 있던 몇 안되는 군수산업 관련 시설이라서 예전에도 관심이 조금 있었기 때문에 꽤 흥미로웠다.

첫 번째는 1949년 2월 5일자로 이범석 장관이 미 군사고문단을 통해 미국 정부에 무기 생산을 위해 기술자를 파견해 달라는 내용이다. 재미있게도 이범석은 부평 조병창이 사실상 가동이 중단된 상태라고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 문서는 1949년 4월 13일자 주한미군사고문단 보고서로 제목은 “Reply to arsenal request’로, 작성자는 라이트(Wright)대령으로 돼 있다. 이 문서는 첫머리에 대한민국 국방부가 희망하는 조병창의 생산능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희망하는 월간 장비 생산능력은 다음과 같다.

권총 : 500정
소총 : 500정
지뢰 : 100개
수류탄 : 5,000발
99식 소총탄 : 10,000발
무연화약 : 1톤
다이너마이트 : 30톤

세번째 문서는 1949년 12월 23일자 보고서로 제목은 ‘Production Report’이고 작성자는 우터스(Wooters) 중령이다. 이 문서의 내용은 부평 조병창에서 미군사고문단에 넘겨준 보고서를 요약 번역한 것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1949년 12월 19일부터 12월 23일까지 부평 조병창의 장비 생산은 다음과 같다.

수류탄 : 5,950발
99식 소총탄 : 16,010발
99식 소총탄피 : 18,195개
99식 소총탄두 : 59,678개
지뢰 : 19발
권총 : 27정(어떤 권총일까? 일제 권총인 것 같은데 아직 잘 모르겠다. 원문에도 그냥 Pistols로 돼 있다)
무연화약 : 58kg
권총탄 : 6,900발
99식 부품 : 700개

그리고 이때 까지 총 생산량은 다음과 같이 돼 있다.

수류탄 : 18,853발
99식 소총탄 : 55,550발
99식 소총탄피 : 90,146개
99식 소총탄두 : 145,467개
지뢰 : 212발
권총 : 266정
무연화약 : 221kg
권총탄 : 6,900발
99식 부품 : 2,708개

권총탄 총 생산량이 6,900발로 기록된 것으로 봐서는 12월 19일 이후 권총탄 생산을 시작한 것 같다.

나중에 국방부 자료를 구해 본다면 좀 더 구체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단편적이긴 하지만 꽤 재미있는 내용이다.

2006년 8월 27일 일요일

단재 신채호 평전 - 김삼웅 지음

사실 이 책은 읽으려고 산 책이 아니다. 서점에서 책을 뒤지다 보니 책 제본이 통째로 뒤집어져 있는 책이 있기에 소장용으로 산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책을 샀으니 읽긴 해야 할 터. 그러나 이 책은 특이하게 제본 된 것을 제외하면 나를 철저히 실망시켰다.

인물평전은 쓰기가 어려운 글이다. 자칫 잘못하면 해당 인물에 대한 찬양으로 빠져 그저 분량만 긴 어린이 위인전 수준을 못 벗어나게 되고 그 반대의 경우 비난만 가득 찬 잡글 덩어리가 되기 때문이다. 유감스럽도 근-현대사 인물의 평전은 이런 경우가 많다.

김삼웅이라는 양반이 지은 단재 신채호 평전은 바로 위에서 지적한 분량만 많은 어린이 위인전 수준을 못 벗어난 책이다. 저자의 약력을 보니 현재 독립기념관장 이라고 한다. 아. 그러나 최소한 글을 쓸 때는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해야지 이 책은 너무 직업정신을 충실히 구현했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 책은 신채호 찬양으로 시작해 신채호 찬양으로 끝난다.

저자는 신채호에 대한 찬양만 늘어놓다 보니 중간 중간 쓸데 없는 과잉 논리를 펼치는데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단재의 고대사 연구만 제대로 배웠대도 중국이 ‘동북공정 프로젝트’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 했을 터이다.”

요즘 시각에서 보면 단재 신채호의 역사 연구 방법은 비판받을 여지가 많다. 지나칠 정도로 구전 설화를 확대 해석하는 점이 대표적이다. 오늘날 이런 방식으로 역사를 연구한다면 비웃음 거리도 못 되리라.

단재에 대한 저자의 찬양은 책이 끝날 때 까지 그칠 줄 모른다. 저자는 단재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내용만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출처는 상당수가 ‘신X하 교수’등 뭔가 미심쩍은 양반들이다.

우리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을 기리는 것 역시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을 우상시하고 거의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어쩐지 두렵다. 우리가 진지하게 지난날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면 이런 식의 우상숭배(?)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은 꽤나 말썽이 됐던 “만화 박정희”를 출간한 “시대의 창”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어쩐지 책장을 덮을 때 뭔가 찝찝했다. 아무래도 이 출판사는 출간할 책을 선정할 때 객관성과는 베를린 장벽을 친 듯 싶다.

2006년 8월 24일 목요일

오만 잡상을 일으키는 멋진 노래 - Don't look back in anger

블로그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놀라운 블로그들이 참 많다. 왜 들 이렇게 생각이 깊고 진지할까,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문화적인 소양이 풍부할까 등등…

그리고 나의 두뇌를 뒤져 보면 이 빈곤한 문화적 토양에 절망을 금치 못하게 된다. 어쩌다 두뇌 전체를 삭막하고 시니컬한 잡동사니들로 가득 채우게 된 것인지! 친한(?) 친구 하나가 말했듯 그나마 쓸만한 지식은 고등학교에서 습득한 것 뿐인 듯 싶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얼마 안되는 문화적 소양도 고등학교의 것이 아닌가 싶다. 클래식 음악도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이 알려준 정도나 듣는 정도고 즐겨 듣는 노래들도 고등학교-대학년 초년 때 듣던 것 정도만 머리에 남아 있다.

U2와 오아시스 역시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접하게 됐고 그 덕에 아직까지도 기억력 나쁜 두뇌속에 남아있다. 오아시스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교보문고에 갔다가 (What’s the Story)Morning Glory가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다시 출시 된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What’s the Story)Morning Glory는 음악을 잘 아는 사람들이 오아시스의 최고(?) 걸작으로 꼽는 물건이다. 물론 나는 음악에 대한 소양은 개뿔도 없지만 이 앨범에 들어 있는 Don’t look back in Anger는 확실히 무지막지 멋진 노래인 것은 틀림 없다고 확신한다.
특히 And so Sally can wait, she knows it's too late로 시작하는 후렴부는 정말 멋지지 않은가. 우울할 때 맥주를 마시며 이 노래를 들으면 정말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감정이 일어난다.

아. 이 노래를 들으며 행복한 여유를 즐기던 게 벌써 10년 전이라니. 아쉽다. 정말 아쉬운 시간이다.

2006년 8월 22일 화요일

미국의 주방위군 혹은 구사대의 활약에 대해 : 1865-1899

Jerry Cooper의 The Rise of the National Guard : The Evolution of the American Militia : 1865-1920의 47쪽에는 아주 재미있는 통계 자료가 하나 있다. 1868년부터 1899년까지 주방위군 동원 사유에 대한 통계인데 대략 다음과 같다.

선거 난동 진압 : 20회
행정 기관 지원(대개는 난동 진압) : 80회
죄수 호송 : 106회
인종 관련 사고 : 31회
기타 폭동 진압 : 41회
노동 문제 관련 : 118회
인디언 문제 : 15회
총 계 : 411회

주방위군이 동원된 사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노동 문제와 관련된 경우다.

19세기 중-후반의 주방위군 지휘관들은 대중적인 지지를 끌기 위해 파업 진압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보수적인 미국 중산층들이 노동 운동에 부정적이어서 파업 진압을 통해 후원금과 주방위군 지원률을 높이려 했다고 한다. 얼씨구.
여기다가 지극히 당연하게도 주방위군 동원을 명령할 수 있는 주지사는 99% 자본가들의 편에 있었기 때문에 요청만 들어오면 즉시 출동 명령을 내려줬다고 한다.
당시 미국은 지방 경찰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주방위군이 구사대의 역할을 떠맡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오지의 광산파업이나 철도 파업의 경우 말 그대로 한 줌 밖에 안되는 보안관들로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방위군이 열심히 뛸 수 밖에 없었다.
카네기 같이 돈이 철철 남아도는 자본가들은 아예 주방위군들을 구사대(!)로 고용하기도 할 정도였다. 카네기의 주방위군 구사대들이 대활약(!)을 펼친 홈스테드(Homestead) 제철소 파업 진압은 미국 노동운동사에서도 꽤 유명한 에피소드가 아니던가!

미국의 노동운동이 1880년대로 접어 들면서 과격한 양상을 띄게 되자 주방위군의 활약도 늘어났다. 1886년 미국 최대의 노동 단체인 Knights of Labor가 일리노이, 캔사스, 텍사스, 미주리에서 철도 파업을 일으키자 주방위군은 이 파업을 순식간에 진압해 버리는 위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1894년에 연달아 터진 대규모 파업은 무려 32,000명의 주방위군이 동원되는 사태를 불러왔다.(이것은 남북전쟁 이후 최대규모였다.) 그리고 이듬해 브루클린의 노동자 소요사태에는 6,000명의 주방위군이 진압을 위해 투입됐다.

당연히 미국의 노동 단체 지도부는 노동자들이 주방위군에 지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저지했고 주방위군 출신이 취업하는 것을 열심히 방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총질에 관심이 많거나 부족한 임금을 주방위군 수당으로 때우려는 노동자들이 주방위군에 지원하는 사례는 많았다.
물론 많은 주방위군 지휘관은 노동 단체 지도부와 비슷하게 노동자들이 주방위군에 지원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물론 가끔씩 투표를 의식한 주지사들이 주방위군의 중립을 유지하려 노력한 사례가 가끔은 있었다고 한다. 1894년 크리플 크릭(Cripple Creek) 탄광 파업사태에서 콜로라도 주지사였던 웨이트(David Waite)는 선거를 의식해 주방위군을 동원하면서 유혈 충돌을 저지하라는 지시만 내렸다고 한다. 주 방위군은 파업 노동자와 구사대의 무장을 해제 시키고 해산 시켜 크리플 크릭 파업은 이 시기의 파업 치고는 유혈 사태 없이 끝나게 됐다.

어쨌거나 노동자가 주방위군에 들어가서 구사대를 하는 해괴한 사례는 19세기 말의 미국에서는 꽤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것은 그럭 저럭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2006년 8월 19일 토요일

NSC-68의 소련 핵 전력 평가

업무상(?) NSC-68을 읽는 중이다. 거의 60년 전에 생산된 문서이니 만큼 냉전 이후 공개된 실상과 비교하며 읽어 보면 참 재미있다.

이 중 흥미로운 부분은 소련의 핵탄두 보유에 대한 예상이다. NSC-68 19쪽에는 소련의 핵 전력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전략)

현재 소련의 핵 전력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CIA, 국무성, 육군, 해군, 공군 및 원자력에너지위원회는 소련의 원자폭탄 생산능력을 다음과 같이 추산하고 있다.

1950년 중반까지 : 10-20
1951년 중반까지 : 25-45
1952년 중반까지 : 45-90
1953년 중반까지 : 70-135
1954년 중반까지 : 200

(후략)….


그렇다면 당시 실제 소련의 핵무기 보유량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1950년 : 5발
1951년 : 25발
1952년 : 50발
1953년 : 120발
1954년 : 150발

참고로 같은 시기 미국의 핵무기 보유량은 다음과 같았다.

1950년 : 298발
1951년 : 438발
1952년 : 832발
1953년 : 1,161발
1954년 : 1,630발

소련의 핵탄두 보유량이 미국을 능가하는 것은 1977년의 일로서 미국이 1967년을 기점으로 핵탄두 보유량을 줄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론은?

大美利堅國 萬萬歲!!!

2006년 8월 17일 목요일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 by John Erickson

어쩌다 보니 사정상 오랫만에 이 책을 더 읽게 됐다. 벌써부터 두꺼운 책 읽은 것이 귀찮아져 압박을 느끼던 차에 이 물건을 읽게 돼 압박이 더 심해지는 중이다.

하여튼, 이 책을 읽으면서 역시 에릭슨은 대단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냉전시기에 이 정도로 자료 조사를 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일 아닌가. 책장을 넘길 때 마다 출간된 지 40년이 넘은 책에 위압감 마저 느낀다.

당시에는 상당한 수작으로 평가 받았던 매킨토시의 저작도 세월의 압박을 견디진 못 했는데 에릭슨의 저작들은 수많은 일차 사료가 공개된 90년대 이후에도 호평을 받는 것을 보면 역시 에릭슨은 '本座'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책 뒷부분에 달린 부록들은 모르는 사람에게 유식한 척 하고 싶을 때 베껴 쓰기 딱 좋게 정리도 잘 돼 있어 나같이 게으른자에게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세월의 압박으로 중간 중간 저자가 확실치 않다고 인정한 부분도 있지만 당분간 영어권에서 2차대전 이전의 소련 군사사에 관해 이정도의 저작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물론 나의 어설픈 짐작이 맞지 않는다면 더 좋겠지만) 비교적 최근에 나온 짐케의 저작이 비싼 가격에 비해 다소 실망을 안겨 준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두꺼운 책이 모두 멋진 책은 아니지만 멋진 책 중에는 두꺼운 책이 많은 것 같다.

2006년 8월 14일 월요일

Sudden Strike II를 해 보다.

몇 달 전에 아는 인간 하나가 Sudden Strike II 라는 몇 년 된 게임 CD를 줬다.

그런데 이건 2차 대전물이 아닌가!

하여간 설치하고 바로 플레이를 해 보니 화면이 지독하게 어두웠다. 이거 뭐가 제대로 보여야 게임을 하던가 말던가 하지.

그래서 몇 달간 방치해 뒀다가 얼마 전 우연히 다시 한번 플레이 해 보게 됐다.

그런데 이게 왜 갑자기 재미있어 진 것인가!

독일군 캠페인과 소련군 캠페인을 모두 끝내봤다.

손이 많이 가고 지독하게 불편한 게임인데 뭔가 끌리는 면이 있다.

물론 티거가 소련군 보병의 수류탄 다구리에 파괴되거나 스탈린 전차가 독일군의 37mm 대전차포에 격파되는 문제가 있으나 어차피 게임 아닌가.

간만에 게임 하나를 재미있게 해 봤다.

귄터 그라스의 인터뷰

귄터 그라스가 Frankfurter Allgemeiner Zeitung을 통해 자신이 전쟁 말기에 무장친위대 대원으로 복무했다는 사실을 밝히자 세상이 조금 시끄러워졌다.

이게 8월 11일자 기사이니 한참 뒷북은 뒷북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귄터 그라스가 무장친위대 대원이었다는 이야기 가지고 시끄러운게 많으니 한번 올려본다.

번역이 엉망이고 문장이 투박해서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먼저 구한다.

=========================================

왜 나는 60년이 지나서야 침묵을 깼는가?

2006년 8월 11일

귄터 그라스가 60년 만에 최초로 자신이 무장 친위대(Waffen SS) 대원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15세에 잠수함 승무원에 지원했었으며 17세에는 노동봉사단으로 “소집(einberufen)” 됐다가 무장친위대 “프룬츠베르크” 사단으로 입대하게 됐다. 그라스는 9월에 출간될 자신의 회고록 “양파 껍질을 벗길 때(Beim Hauten der Zwiebel)”에서 단치히에서 보낸 유년기와 목숨을 잃을 뻔 했던 군인으로 보낸 전쟁 막바지 기간, 그리고 포로 시기와 전쟁 직후의 혼란기에 대해 이야기 할 예정이다.

-회고록의 제목이 “양파 껍질을 벗길 때” 입니다. 여기서 양파란 무엇을 뜻하는 건가요?

이번 회고록을 어떤 식으로 쓸 것인지 결정해야 했는데 이건 매우 어려운 일 이었습니다. 우리의 기억과 자화상은 왜곡될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왜곡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까요.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대해 변명하고, 미화하며, 하나의 일화로 치부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진실성에 대한 의문은 모든 문학적 회고록이 안고 있는 문제인데 나는 이런 문제들을 드러내고 밝히는 형식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양파라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마치 양파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껍질이 나오 듯 글을 쓸 때 계속해서 문장이 이어지면 그 의미가 다소 명확하고 읽을 만 해 지지만 결국 생동감은 잃게 됩니다.

-회고록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나는 회고록에 대해 이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회고록을 쓰기에 앞서 시작의 어려움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대부분의 회고록들은 독자들이 한 가지 사실이 그랬고 다른 것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믿게 하려고 합니다. 나에게 있어 형식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솔직하게 서술하고 싶습니다.

-이번 회고록은 유년기부터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 대신 전쟁이 발발한 열 두 살 되던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2차 세계대전은 요점(Drehpunkt)이자 핵심(Angelpunkt) 입니다. 전쟁의 발발로 제 가족도 외부의 문제에 휩쓸리게 됐기 때문에 2차 대전은 제 유년기의 끝을 알리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삼촌은 폴란드의 우체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연락이 끊어졌고 다시는 사촌들과 만날 수 없게 됐습니다. 나중에 듣기로는 즉결재판으로 처형 됐다고 하더군요.
제 어머니의 외가인 카슈브계(Kaschubish) 친척들은 전쟁 이전만 해도 자주 왕래가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처음으로 외할머니가 우리를 찿아 오셨는데 농장에서 어떤 물건을 가져 오셨고 우리집에서 석유를 얻어 가셨죠. 물자가 부족해져서 외할머니가 계신 곳에서는 석유를 구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가족간의 유대는 더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제 부모님은 나중에는 현실에 맞춰 그때 그때의 실정에 맞춰 생활해야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기억과 성향을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회고록을 쓰는데 도움이 된 가족들의 자료는 없습니까?

저는 피난민 꼬마(Flüchtlingskind) – 저는 이제 80대를 바라보는 나이 이지만 아직도 스스로를 이렇게 부릅니다 – 이기 때문에 그런 물건이 없습니다. 제 책에서 보덴제, 아니면 뉘른베르크 출신인 친구들이 여전히 졸업증명서와 그들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지금 남은 것은 제 어머니가 보관하신 사진 몇 장이 고작 입니다. 또 저는 나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선생님이 전쟁 중 잃어 버린 유년기의 물건 중에는 처음으로 쓴 소설의 원고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네, 그 소설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가 공석이었던 13세기의 대공위시대(Interregnums)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 이었습니다. 그 소설은 중세의 비밀 재판,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몰락, 죽음과 혼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 소설에서 제가 창조한 가공의 인물들은 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두 죽습니다. 다시는 등장하지 않지요. 그렇지만 저는 이 소설을 쓰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 뒤로 등장인물들을 효율적으로 쓰게 됐습니다. 툴라 포크립케(Tulla Pokriefke)와 오스카 마체라트(Oskar Matzerath)는 처음 등장한 소설에서도 살아 남고 그 뒤에 쓴 소설에도 등장하지요.

-선생님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쉬라흐(Baldur von Schirachs)의 진술을 듣고 나서야 독일의 대량 학살에 대해 알게 됐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최근 처음으로 무장친위대 대원이었다는 사실을 밝혀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왜 지금 그 사실을 밝히시는 것 입니까?

무장친위대 대원이었다는 사실은 언제나 저를 짓눌렀습니다. 이 시기에 대해 그 동안 침묵했던 이유는 이번에 나올 회고록에 설명해 놓았습니다. 드디어 털어 놓을 때가 된 것이지요...

-무장친위대에 배속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입대를 결심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아니면 친위대로 징집된다는 명령이 따로 있었습니까?

저 자신도 제가 어떻게 친위대로 징집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소집 명령서를 통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제가 처음 드레스덴에 도착했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됐을까요? 저는 그 이상은 모르겠습니다.

-노동봉사단에 소속돼 있었을 때 동료들과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은 없습니까? 그시기에 소년들이 모이면 그런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회고록에도 적어 놨는데 당시 소년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칼을 연마하는 것 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이것 뿐 이었습니다. 저는 황달에 걸렸었는데 한 2주 정도 병을 앓았습니다. 황달이 나은 뒤에는 다시 칼 가는 것을 했고 낡은 도구들로 약간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기록했습니다.

-그것을 꼭 기록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도 선생님에게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내 스스로 원해서 한 것 입니다.

-왜 자원해서 군에 입대하려 했습니까?

나는 그저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답답함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이런 것들을 끝내고 싶었기 때문에 군에 자원해서 입대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에 남는 일 이었습니다. 군에 지원했을 때 저는 15세 였는데 지원 이후의 과정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같은 나이 또래들이 많이 있었는데 노동 봉사단으로 배치됐고 일년 정도 지난 뒤 갑자기 전출 명령서를 받게 됐습니다. 그리고 아마 드레스덴에 도착해서야 우리가 무장 친위대로 가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셨습니까?

그 당시에 말인가요? 아닙니다. 나중에서야 친위대에 입대한 것에 대해서 죄의식을 가지게 됐습니다. 나는 이후 항상 의문을 가지게 됐습니다. 나는 그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없었는가?

-선생님은 같은 세대 중에서는 처음으로 과거의 과오를 밝히고 독일 역사의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다뤘습니다. 선생님은 무엇을 위해 비판을 하셨던 것 입니까?

네. 오늘날 독일에는 나치에 저항했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히틀러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을까요?
50년 전으로 되돌아 가서 내가 처음 양철북을 구상하게 된 발단을 알려주고 싶군요. 무조건 항복이 아니라 독일이 붕괴된 1945년 이전에 어떤 일이 일어 났었습니까?
독일의 상황은 암흑 그 자체였습니다. 불쌍한 독일인들은 검은 옷을 입은 무리들의 유혹에 빠져들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 이었습니다. 저는 어린시절 이 모든 것을 생생히 체험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열광과 감격에 휩싸인 채로 말입니다. 그리고 또 저 역시 유혹에 빠진 것 입니다.
저는 양철북과 곧 출간될 제 회고록을 통해 이 열광과 이것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2006년 8월 11일 금요일

궁상스러우면서도 멋진 노래 - always on my mind

컨트리 음악은 이유 없이 사람을 당기는 마력이 있다. 개인적으로 컨트리 음악을 좋아하지 않지만 몇몇 노래에는 엄청나게 감동하는 걸 보면 그 마력(또는 매력)을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always on my mind는 특히 컨트리 음악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인데 촌스럽고 궁상스러운 가사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마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여러 버전 중 가장 감동을 받은 버전은 Willie Nelson이 1982년에 부른 버전인데 아마도 이게 엘비스 폐하가 부르신 것과 함께 가장 유명한 버전이 아닐까 싶다.

새벽에 라디오를 듣다 보니 이 노래가 가사 없는 연주곡 버전으로 나오고 있어서 잠시 궁상맞은 상상을 했다. 그러나 역시 이 노래는 궁상맞으면서도 멋진 가사가 없다면 매력이 80%는 반감 되는 것 같다.

글이 너무 짧아 성의가 없어 보이니 Willie Nelson 버전의 가사를 올려 본다.


Maybe I didn't love you
Quite as often as I could have
And maybe I didn't treat you
Quite as good as I should have

If I made you feel second best
Girl I'm sorry I was blind
You were always on my mind
You were always on my mind

And maybe I didn't hold you
All those lonely.. lonely times
And I guess I never told you
I'm so happy that you're mine

Little things I should have said and done
I just never took the time
You were always on my mind
You were always on my mind

Tell me
Tell me that your sweet love hasn't died
Give me
Give me one more chance to keep you satisfied
I'll keep you satisfied

Little things I should have said and done
I just never took the time
You were always on my mind
You were always on my mind
You were always on my mind

2006년 8월 9일 수요일

독일 육군의 포병 1871-1914

1.1870-71년 전쟁

보불전쟁에서 크룹(Krupp)의 6파운드 포를 장비한 독일 포병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독일 포병은 불과 4년 전 보오전쟁의 쾨니히스그레츠(Königgrätz)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병에 압도돼 보병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던 것과는 달리 주요 전투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전술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마-라 투르(Mars-la-Tour) 전투에서 프랑스군 사상자의 60%가 독일 포병에 의한 것 이었고 그 직후의 그라벨로(Gravelotte) 전투에서는 무려 70%였다고 한다.
특히 독일 포병은 그라벨로 전투에서 프랑스 포병보다 세배 많은 포탄을 발사하면서 화력면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했으며 프랑스군의 국지적인 역습을 격퇴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프랑스 포병은 청동제 포신에 강선도 없는 포구 장전식 4파운드 포와 위력은 좋지만 기동전에는 부적합한 12파운드 포를 장비하고 있어 독일군 보다 화력면에서 뒤떨어 졌다. 그리고 수 년 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프랑스는 화력의 집중운용을 써먹어 크게 재미를 봤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독일군이 이 방식을 써먹는 바람에 피박을 보게 됐다.

이 전쟁을 참관한 각국의 군사 관계자들은 독일군의 후미장전식 철제 강선포가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에 크게 주목했다.
이미 벨기에는 1866년에 크룹의 철제 강선포를 도입했고 보불전쟁 이후 유럽 각국은 철제 강선포 확보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독일 포병은 전술 운용 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문제는 보병에 대한 직접 화력지원을 위해 적의 소총 사거리 안 까지 무리하게 전진해서 사격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보오전쟁과 보불전쟁 당시 독일군 포병은 공격하는 보병중대의 600m 후방까지 따라붙어 직접화력지원을 했는데 보오전쟁 당시 오스트리아군의 소총은 이 거리에서 위협이 되지 못했던 반면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개틀링과 샤스포 소총은 900m 에서도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그라벨로 전투에서 18 보병사단을 지원하던 포병들은 프랑스군의 샤스포 소총 사격을 많은 피해를 입었다.
보불전쟁에서 독일군 포병은 총 병력의 6.5%의 인명피해를 입었는데 이것은 기병의 6.3% 보다도 조금 높은 수치였다.

그러나 어쨌든 독일은 승리했다.
독일은 포병 전력의 우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신형 장비의 도입을 서둘렀다.

2.러시아-터키 전쟁과 대구경 야포 도입 문제 : 1872-1882

보불전쟁 이후 세계 각국의 군사 관계자들은 현대 전쟁에서 포병의 중요성과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게 됐다.
독일군이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에서 보여줬듯이 효과적인 공격준비 사격은 중요한 요소였지만 이를 위해서는 소총의 유효사거리 밖에서 효과적으로 포격을 할 수 있는 야포가 필요했다.

독일은 보불전쟁이 끝난 뒤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6파운드 포를 대체할 신형 야포의 개발에 착수했다.
그 결과 1874년 채용된 것이 88mm C-73 이었다.
C-73의 최대 사거리는 7,000m로 6파운드 포에 비해 거의 2배 이상 늘어났으며 함께 도입된 신형 포탄의 파편효과도 크게 향상돼 보병에 대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편효과가 두 배 향상된 C-76 유탄이 도입됐다.

그러나 아직 1870년대의 포병 장교들은 C-73의 향상된 사거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기존의 전술에 맞춰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 무렵의 일반적인 포병 전술은 2,000-2,500m 에서 적 포병을 무력화 시킨 뒤 600-700m 까지 전진해 직접 화력지원을 하는 것 이었다.
1876년 당시 포병 소령이었던 호프바우어(Ernst Hoffbauer)가, 그리고 1878년에는 포병 연대장이었던 쉘(Adolf von Schell)이 이런 내용의 교범을 저술했다. 특히 쉘의 경우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1880년에 이르러 C-73이 기존의 야포들을 대체하면서 이 우수한 물건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방법이 강구됐고 점차 군사 이론가들은 보병을 뒤따르며 직접화력을 지원하는 것 보다는 보다 늘어난 최대사거리와 유효사거리를 활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인정하게 됐다.
먼저 1880년 몰트케가 직접 화력지원에는 포병 전력의 극히 일부만을 투입하고 대부분의 포병은 적 방어전면으로부터 최소 2,000m 이상 떨어진 위치에서 사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881년 7월에는 이것이 문서로 공식화 됐다.
그리고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에 대한 중요성이 줄어 들면서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는 소구경, 경량의 화포 보다는 장거리에서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대구경 화포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되기 시작했다.
쉘 같이 기존의 포병 운용방식을 고집하는 이론가들은 이에 대해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러시아-터키 전쟁은 보수적인 이론가들에게도 충격을 안겨 줬다.

1877년의 플레브나(Plevna) 전투는 대구경 야포의 도입을 주장하던 이론가들에게는 복음과도 같았고 경량의 소구경 야포와 보병에 대한 직접지원을 강조하던 이론가들에게는 그들의 이론이 미래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 줬다.
러시아군은 플레브나의 터키군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매번 막대한 손실만 내고 실패했다. 러시아 포병은 주요 공세 때 마다 300-400문의 야포를 동원해 3-6시간의 공격 준비사격을 퍼부었으나 러시아군의 소구경 야포들은 참호로 강화된 터키군의 방어진을 분쇄하는데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독일 군사이론가들은 “현대전”에서 야전 축성의 중요성과 이를 분쇄하기 위한 대구경 화포의 필요성을 이미 남북전쟁 시기부터 제기하고 있었다.
남북전쟁 당시 중령의 계급으로 북군의 여러 요새 공격을 참관한 프로이센군의 쉘리아(von Scheliha)는 소구경 화포의 포격이 남군의 야전 축성에 거의 효과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어 보불전쟁에서도 4파운드 포와 6파운드 포는 참호에 들어앉은 프랑스군을 때려잡는데 효과가 적다는 것이 입증됐다.

보불전쟁 직후인 1872년, 젊은 포병 장교들은 보다 대구경인 120mm 유탄포의 도입을 요구했으나 군 상층부는 당시 개발 중이던 C-73으로 야전포병의 장비를 통일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120mm 유탄포는 결국 도입되지 않았다.

그러나 플레브나 전투의 결과 독일의 보수적인 이론가들 조차 적의 야전 축성을 분쇄하기 위한 대구경 화포의 도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C-73은 기존의 포병 교리에 맞춰 개발됐고 특히 탄도가 직사인데다가 사용하는 포탄도 파편효과를 노리고 개발된 것 들이어서 야전 축성에 대한 공격에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플레브나 전투 이후 몰트케는 총참모부에 현대 야전 축성과 이를 공략하기 위한 대구경 야포 문제를 적극적으로 연구하도록 명령했다.
독일군은 1882년 새로 도입한 150mm 구포(Mörser)와 1872년 도입된 210mm 구포로 적 참호에 대한 공격을 시험해 봤으나 두 종류 모두 매우 형편없는 결과를 보였다.
게다가 프랑스가 1885년과 1886년에 걸쳐 베르덩(Verdun), 벨포르(Belfort) 요새를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강화한 것은 독일군에게 또 다른 문제를 안겨줬다.
당시 독일 포병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구성된 야전 축성을 분쇄할 효과적인 수단이 사실상 전무했던 것이다.

3.프랑스의 도전과 러일전쟁의 영향 : 1883-1904

독일의 군사 이론가들이 새로운 전쟁 환경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동안 프랑스는 복수의 칼을 열심히 갈고 있었다.
혁신적인 포병 장교단은 1886년부터 대구경 유탄포의 도입을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887년이 돼서야 뒤늦게 120mm 유탄포가 독일군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20mm 유탄포의 초기 야전 실험은 포병들이 직사탄도를 가진 C-73에 익숙했기 때문에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여전히 보수적인 군 상층부에서는 C-73과 기존의 포병 운용방식을 고집하고 있었다.
1897년에 도입된 77mm C-96은 포신에 니켈 합금강을 사용해 C-73의 단점이었던 짧은 포신 수명을 극복했지만 기본적으로 20년이나 뒤떨어진 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 졌으며 프랑스가 1898년에 도입한 75mm 포에 비해 여러 면에서 뒤떨어지는 물건이었다.
프랑스군의 75mm 포는 유압식 제퇴기 등 최신 기술을 적용해 분당 발사속도가 최대 20발(!)에 달했는데 이것은 보병에 대한 직접지원사격을 중시하는 교리에서 보면 엄청난 장점이었다. 반면 C-96은 분당 발사속도가 5발 정도에 불과했다.

결국 이런 어수선한 상황을 해결한 것은 발더제의 뒤를 이어 육군 총참모장이 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이었다.
슐리펜은 1896년 참모본부에 대구경 유탄포의 잠재성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 결과 105mm l.FH 98의 개발이 시작됐다. C-96을 선호한 보수적인 포병 장교들은 l.FH 98이 일곱 종류의 탄약을 사용해 신속한 이동과 운용이 어렵다는 점을 들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특히 1891년에 포병감에 임명된 호프바우어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FH 98은 1900년부터 양산돼 대량으로 장비되기 시작했다. 결국 호프바우어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포병장교단과 슐리펜을 중심으로 한 총참모부 및 개혁적인 포병장교단의 대결은 후자에게 유리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한편, 1900대 초 까지 88mm C-73과 77mm C-96이 주력 야포였던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유압식 제퇴기를 갖춘 75mm포의 등장으로 크게 한방 먹게 됐다.
무엇보다 프랑스군의 75mm포의 압도적인 발사 속도는 독일 총참모부에 큰 충격이었다.
1901년에 전쟁상 이었던 고슬러(Heinrich von Gossler)는 육군에 프랑스군의 75mm포에 대응할 야포의 개발을 명령했다.
특히 보어전쟁에서 영국군은 압도적인 포병 전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보어군이 사용한 막심 75mm 포의 속사에 큰 피해를 입었고 이것은 독일군에게도 속사가 가능한 야포의 개발을 서두르게 했다.
그 결과 1907년에 C-96을 개량한 C-96 n/A(neue Art)이 채용됐는데 이것은 한참 뒤의 이야기다.

한편, 러일전쟁은 독일군에게 현대적인 요새를 효과적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대구경 화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해 줬다.
일본군은 려순 요새 공격에 총 443문의 야포를 투입했지만 18문의 280mm 포와 72문이 투입된 150mm 구포를 제외하면 러시아군의 방어망을 분쇄하는데 효과적인 물건은 별로 없었다. 특히 120문이 투입된 75mm 포는 잘 구축된 야전축성에 대해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 했다.

4.중포의 도입과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 : 1905-1914

독일은 1903년 까지 총 23개 군단 중 105mm 이상의 중포를 장비한 군단이 단 하나도 없었으나 1904년 150mm s.FH 02가 채용되면서 조금씩 프랑스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1904년 10개 포대가 150mm s.FH 02를 장비한 이후 배치가 확대됐다.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 했듯 프랑스군의 75mm 포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으로 C-96의 개량형인 C-96 n/A가 1907년부터 육군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C-96 n/A는 유압식 제퇴기를 갖춰 프랑스군의 75mm와 거의 비슷한 발사 속도를 가지게 됐고 포 방패를 장비해 포병에 대한 보호도 강구 됐으나 신형 포신을 장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정거리는 프랑스의 75mm 보다 1,000m가 짧았다.
이와 함께 105mm l.FH 98를 개량한 l.FH 98/09가 1910년부터 생산에 들어갔다.
독일군은 신형 105mm 포의 생산과 함께 23개 군단에 각 3개 포대로 구성되는 105mm 포병 대대를 배속시키는 한편 1913년 까지 105mm 포의 배치를 664문으로 늘려 프랑스를 완전히 압도했다.
그리고 사단 포병의 1개 대대는 105mm l.FH 98/09를 장비해 프랑스군 사단을 화력면에서 완전히 압도할 수 있게 됐다.
또 150mm 유탄포는 1913년 까지 400문이 배치돼 각 군단은 4개 포대의 150mm를 보유할 수 있게 됐다.

신형 장비의 도입과 함께 포병 교리도 완전히 바뀌게 됐다.
1907년의 포병 교범은 이미 사실상 폐지된 것이나 다름 없던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을 폐기했다.
러일전쟁에서 드러 났듯 참호에 들어 앉은 보병을 1,000m 이내의 근거리에서 직접 사격으로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그리고 1907년 포병감으로 임명된 슈베르트(Schubert) 장군은 프랑스 군과 마찬가지로 포 진지를 위장하고 관측장교의 통제에 따른 사격을 강조했다.
유선 전화의 도입은 전방의 관측 장교와 후방의 포대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효율적인 운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910년 독일군의 야전 기동을 참관한 프랑스 장교단은 자신들이 먼저 사용한 방식을 독일군이 능숙하게 사용하는 점에 주목했다.
물론 대개 보병 병과인 군단장급 장성들은 5,000m 이상의 거리에서 관측장교의 통제에 따라 사격하는 것을 포탄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갈수록 강화되는 벨기에와 프랑스의 요새들은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을 가속시켰고 1903년에는 신형 210mm 구포가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 총참모부는 여러 실험을 거친 결과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구축된 요새에 효과적인 물건은 1906년 당시 겨우 6문이 생산된 305mm 베타(Beta Gerät)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보다 더 강력한 공성포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1909년에는 420mm 유탄포인 감마(Gamma Gerät)가 개발됐다. 감마는 2년에 걸친 테스트를 받은 뒤 1911년 육군에 인도 됐다.
그러나 감마는 무려 175톤에 달하는 괴물이었기 때문에 육군에서는 크룹에 좀더 이동과 운용이 용이한 420mm 포를 개발할 것을 요청했고 이 결과 44톤에 불과한 420mm M Gerät가 개발됐다.
감마의 최대 사거리가 17km에 달한 반면 M Gerät는 그 절반에 불과한 9km에 불과했고 포탄의 위력도 약했다.
독일군은 전쟁 초기 벨기에와 프랑스의 요새들을 격파하기 서는 8문의 420mm와 16문의 305mm, 그리고 이를 지원할 100문 이상의 210mm급 구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305mm의 경우 배치된 수량이 부족해 1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스코다제 305mm포를 빌려와야 했다.
독일군은 1911년 까지 예산 문제로 305mm 포를 10 문 확보하는데 그쳤는데 이것은 1년 평균 1 문도 생산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1914년 까지 추가로 2문이 더 생산되는 데 그쳤다.

독일군의 중포 및 공성포 배치는 원래 계획에는 조금 못 미치는 것 이었으나 다른 경쟁국들에 비하면 압도적인 것 이었다.
특히 개전초기의 전투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화력은 벨기에의 요새들을 분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베낀 책 들
Eric D. Brose,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Antulio J. Echevarraia Jr,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David G. Her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Jonathan M. House, Combined Arms Warfare in the Twentieth Century
Jay Luvaas,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 – The European Inheritance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Geoffrey Wawro, The Franco-Pru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

2006년 8월 7일 월요일

블로그질에 대한 잡생각

외국 블로그 중에는 재미있는게 많지만 아무래도 한국인인 이상 한글로 된 블로그에 더 정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인 것 같다.

다행히도 올블로그 같은 것이 있어서 블로그질은 재미있다.

그렇지만 한글 블로그들이 아쉬운 것은 여전히 펌글이 많다는 점이다. 펌글로 채워지는 블로그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끔 거의 펌질로만 때워지는 블로그도 발견하게 되는데 이럴 바에는 블로그를 뭐하러 운영하는 지 알 수 가 없다. 차라리 신변잡기로 때우는 블로그가 더 영양가가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네이버, 야후 등 포털업체들의 블로그에 예상외로 재미있는 글이 많더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접근성이 좋기 때문인가?

하여튼 블로그를 개발한 사람은 대대손손 축복받을 지어다.

The War for Korea 1945-1950 : A House Burning - by Allan R. Millett

The War for Korea 1945-1950 : A House Burning

서평에 혹해 샀으나 상당히 많이 실망한 책이다.

저자인 Allan R. Millett은 꽤 재미있는 군사사 서적을 여러 권 집필했고 서평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기에 주저하지 않고 샀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알만한 내용이고 그나마 미국쪽 사료를 이용한 미국측의 움직임이 그럭저럭 읽을만한 부분이다. 특히 1949년 옹진반도 전투에서 소련 군사고문단이 17연대에 생포됐다던가 하는 부분은 개인적으로는 처음 접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국내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고 특히 38도선 충돌의 경우 정병준 선생의 아주 멋진 연구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은 한국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미국인을 대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국 근대사에 대해 너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어 정작 중요한 1948-1950년의 상황에 대한 서술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리고 저자가 한국의 연구성과를 잘 활용하지 못해서 오류도 많이 보인다.

결론.

좀 많이 실망.

그렇지만 책 뒷 부분에 달려 있는 문헌자료에 대한 해설은 아주 유익한 것 같다.

2006년 8월 2일 수요일

7월 여행에 대한 대략적인 결산

이번 7월 말에 다녀온 여행을 간략히 결산해 보고자 한다.

긴 글을 쓰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복잡하므로 각 항목별로 A, B, C, D, E, Z(Ziral or Zot) 등급으로 나눈다.

여기서 빠지는 부분은 나중에 약간씩 추가 정정할 예정. 이전에 했던 여행들도 이렇게 정리를 해 볼까 함.

들른 순서대로

가. 순천 :

1. 인심
일반 주민 인심 : B
주요 관광지 인심 : Z - 밥먹고 신용카드 내겠다는데 뒤 돌아 나갈때 까지 지랄하는 곳은 여태까지 다녀 본 곳 중 낙안읍성이 유일했다. 정말 황당했다. 내가 피곤하지 않았다면 주인"女ㄴ"의 면상을 갈겼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곳에서 유일하게 택시로 사기치려는 삐끼를 만났다.

2. 공무원 친절도, 서비스
일반 공무원 : ?
경찰 공무원 : B
지자체가 발행하는 지도 : ? 못 받았다.
우체국, 관공서 인터넷 : ? 안 써봤다.

3. 먹을거리 : ? - 낙안읍성에서 기분을 잡쳐 순천에서는 생수 빼고 아무것도 안 사먹었다.

4. 유적 등 기타 관광지 : B - 특히 순천 왜성의 전망은 좋다. 현대 하이스코 제철이 들어서 전망이 약간 안 좋아 졌지만 기본적으로 좋다. 낙안읍성은 꽤 괜찮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인간들이 재수없다.

5. 교통 : B - 제법 시내 버스가 많아 걸어서 여행하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 결정적으로 기차역이 있다.

6. 걷기 : D - 도로가 걸어다니기에 즐거운 구조는 아니다. 가로수도 적고 큰 공장이 있어서 그런지 화물차량이 많고 과속도 심하다. 과속하면서 인도로 들어오는 차량도 여러대. 보행자에겐 최악이다.


나. 보성 :

1. 인심
일반 주민 인심 : B
주요 광광지 인심 : ? - 구경 한 곳이 벌교 읍내의 여순반란 관련 유적과 녹차밭 뿐이었다.

2. 공무원 친절도 서비스
일반 공무원 : ?
경찰 공무원 : ?
지자체가 발행하는 지도 : ? 못 받았다.
우체국 인터넷 : B - 잘 된다.

3. 먹을거리 : ? - 낙안읍성에서 기분을 잡쳐 여기서 조차 아무것도 안 사먹었다.

4. 유적 등 기타 관광지 : C - 녹차 밭 외에는 특별히 감흥을 일으키는 곳이 없다.

5. 교통 : C - 많은 지방 고속터미널들이 그렇지만 이곳 터미널 역시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다. 벌교역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

6. 걷기 : D - 순천과 거의 비슷하다. 도로가 걸어다니기에 즐거운 구조는 아니다.

다. 광주 : 내가 호남 지역 여행을 즐기기 때문에 비교적 자주 들르는데 정말 들르는 것 이외엔 할 일이 없는 심심한 동네다.

1. 인심
일반 주민 인심 : C - 그저 그런 수준. 대도시라 그런가?
주요 광광지 인심 : ? - 특별히 들른 곳이 없다.

2. 공무원 친절도, 서비스
일반 공무원 : B
경찰 공무원 : ?
지자체가 발행하는 지도 : - 예전에 받았던 지도는 좋았는데 개정판이 나왔을라나?
우체국, 관공서 인터넷 : ? 쓸 일이 없다.

3. 먹을거리 : C - 개인적으로 봤을 때 호남 전체에서 광주가 최악이다. 음식 잘하는 호남 사람들은 죄다 수도권으로 간 것 같다.

4. 유적 등 기타 관광지 : ? - 특별히 들른 곳이 없다.

5. 교통 : A - 대도시 잖소?

6. 걷기 : Z - 심심한 시가지. 걸어다니면서 권태감을 느끼게 한다.

라. 나주 :

1. 인심
일반 주민 인심 : B+ - 순천 여행으로 잡친 기분을 말끔히 풀어 줬다. 즐겁고 유쾌한 곳이다.
주요 광광지 인심 : B - 어딜 가도 기본 이상은 된다.

2. 공무원 친절도, 서비스
일반 공무원 : B+
경찰 공무원 : B
지자체가 발행하는 지도 : C - 매우 예쁘게 잘 만든 지도였다. 그러나 자동차 사용자 위주로 돼 있어 보행자에겐 거의 무용 지물이다.
우체국, 관공서 인터넷 : D - 내가 인터넷을 쓰려고 들른 나주시 우체국은 컴퓨터 네대 모두 꺼 놓고 있었는데 도무지 코드를 꽃는 곳을 찿을 수 없었다. 하필이면 모두 회의중이라 어디 물어볼 곳도 없었다.

3. 먹을거리 : B - 식당들은 친절하고 음식도 평균 이상은 됐다. 그러나 어떤 곳은 김치찌개에 돼지 비계를 넣지 않았으며 어떤 곳은 파리가 너무 많았다.

4. 유적 등 기타 관광지 : A - 볼거리가 너무 많다. 이번 여행에서 시간이 너무 부족해 아쉬웠던 곳

5. 교통 : C - 시가지를 벗어나면 교통이 불편하다.

6. 걷기 : B+ - 전통이 느껴지는 시가지. 시외 지역의 경치도 좋다.

마. 해남 : 요 수년간 거의 매년 갔다. 좋긴 좋은데 왜 가는지는 모르겠다.

1. 인심
일반 주민 인심 : B
주요 광광지 인심 : B

2. 공무원 친절도, 서비스
일반 공무원 : ?
경찰 공무원 : ?
지자체가 발행하는 지도 : ? - 역시 광주와 마찬가지로 예전에 받아 놓은 게 있다. 물론 가져가진 않았다.
우체국, 관공서 인터넷 : ? - 쓸 일이 없었다.

3. 먹을거리 : C - 역시, 그럭 저럭 먹을 만 하다.

4. 유적 등 기타 관광지 : C - 땅 끝 마을 말고는 임팩트가 있는 곳이 없다. 공룡 유적지는 고성 만 못하며 우수영 유적지는 사극 "불멸의 이순신"의 대박 이후 신경을 쓴 것 같은데 좀 심심하다. 울돌목은 진도에 포함시키겠다.

5. 교통 : D - 일단 해남 자체가 엄청나게 넓은데 비해 대중 교통은 턱도 없다.

6. 걷기 : A - 언제 가도 느끼지만 경치가 너무 좋아 걷는 걸음 걸음이 유쾌하다.

바. 진도 : 진도는 이번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 봤다.

1. 인심
일반 주민 인심 : A - 매우 좋다
주요 광광지 인심 : ? - 주요 유적지에 사람이 별로 없다.

2. 공무원 친절도, 서비스
일반 공무원 : B
경찰 공무원 : B+
지자체가 발행하는 지도 : E - 팜플렛 몇 종류에 간략한 약도 위주. 좀 더 개선이 필요하다.
우체국, 관공서 인터넷 : C - 진도 읍사무소의 인터넷 PC를 이용해 봤다. 좋다.

3. 먹을거리 : B - 역시 해안가라 먹을게 풍부하다. 그러나 나는 수산물을 별로 안 좋아하므로 부득이하게 A를 못 주겠다.

4. 유적 등 기타 관광지 : B+ - 볼거리른 제법 많지만 넓은 지역에 분산돼 있어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개인 소유의 차량이 없다면 매우 불편한 지역

5. 교통 : E - 해남 보다도 안 좋다. 서울 가는 버스가 하루에 네 대다.

6. 걷기 : B+ - 경치는 좋지만 주요 유적, 구경거리들이 너무 멀리 멀리 떨어져 있어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에겐 고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