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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7일 월요일

2차대전 중 미국의 화학전 검토에 대한 잡상

John Ellis van Courtland Moon이 1989년에 Journal of Strategic Studies에 기고했던 “Project SPHINX: The Question of the Use of Gas in the Planned Invasion of Japan”라는 논문을 읽다보니 앞부분에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미국이 1945년 이전에는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 사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지 못했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43년의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이 상당한 인명손실을 입은 뒤 미국내에서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금씩 힘을 받기 시작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1944년 9월에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하는데 찬성하는 여론은 23% 남짓이었는데 1945년 6월에는 40%까지 늘어났다고 하지요. 타라와 전투 이후 일본군이 각 지역에서 보여준 극단적인 저항은 미국인들에게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일본군의 저항으로 인명손실이 높아지면서 대중과 언론은 물론 미육군 내에서도 요새화된 섬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화학무기가 효과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특히 미육군 화학전국Chemical Warfare Service의 국장 포터William N. Porter 소장은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펼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포터 소장의 제안은 육군참모본부 작전국에서 검토만 되었을 뿐 1945년 이전에는 그 이상의 단계로 나가질 못했습니다.

문은 그 이유를 몇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루즈벨트 대통령이 화학무기 사용에 부정적이었다는 점 입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먼저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제시하는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미국은 일본군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할 경우 유럽전선에서 독일이 화학전을 전개할 가능성을 우려했다는 것 입니다. 일본군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강력한 화학전 능력을 갖춘 독일이 화학무기를 뿌려댄다면 제법 골치가 아팠을 것 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망한 것과 함께 독일의 항복도 미국이 1945년 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을 상대로 한 화학전을 진지하게 검토한 이유라는 것 입니다.

이점을 보면 냉전기에 핵무기 사용을 둘러싼 논의가 연상됩니다. 특히 독일의 화학전 능력이 상대적으로 화학전에 대한 보복수단이 마땅치 않은 일본에 대한 억지력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마치 핵무장을 한 강대국이 하위 동맹에 대한 핵억지력을 제공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고 할까요.

2010년 5월 19일 수요일

트루먼 - 꽤 재미있는 미국 대통령

요즘 읽는 책 중에는 마이클 펄만(Michael D. Pearlman)의 Truman and MacArhur : Policy, Politics, and the Hunger for Honor and Renown이 꽤 재미있습니다. 작년에 조금 읽다가 책장에 꽂아두고 1년이 지나서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맥아더를 해임하는 부분을 읽고 있습니다.

트루먼 재임기는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입장에서 매우 재미있는 시기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트루먼 행정부 시기는 꽤 매력적입니다. 트루먼은 2차대전이 종결되고 냉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미국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지위에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트루먼은 약간 난감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직위에 앉았습니다. 루즈벨트가 급사해서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는데 트루먼에게 남겨진 임무는 전후 세계질서의 재편이라는 엄청난 것 이었지요. 상대해야 할 인간들도 스탈린이나 처칠 같은 희대의 대인배들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관점을 군대로 돌려보더라도 트루먼이 처한 상황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재임하는 기간 동안 미군은 전시동원체제에서 평화시의 급격한 병력 감축을 경험했으며 동시에 냉전의 시작과 함께 소련이라는 새로운 적을 상대하기 위해 체제 개편을 단행합니다.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에서는 각 군을 총괄하는 국방부가 조직되지요. 물론 초기 구상과는 매우 다른 형태의 국방부가 만들어졌습니다만.(자유주의자 놈들의 딴지란!) 그리고 이런 혼란의 와중에 초대 국방부장관인 포레스탈이 자살하고 이른바 제독의 반란이라는 민군관계에 파란을 몰고오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런 와중에 한국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지요. 어수선한 사건들을 그럭 저럭 잘 수습하면서 대통령직을 수행한 것 만 보더라도 트루먼에게는 개인적으로 후한 평가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민군관계에 있어서 2차대전을 통해 등장한 수많은 전쟁영웅들은 골치 아픈 존재였습니다. 별일이 없었어도 거만했을 맥아더 같은 인물이 전쟁 영웅이라는 간판까지 달게 되었으니 군 통수권자로서 이들을 적절히 제어하는 것은 골치 아팠을 것 입니다. 전쟁영웅이란 민주주의 체제에서 필요로 하는 대중적 인기를 가진 존재들이니 말입니다. 이런 문제는 바로 제독의 반란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문민통제에 반기를 든 제독들 상당수가 전역과 같은 처분을 받았지만 몇몇 유명한 제독들은 그렇게 되지 않았지요. 아마 맥아더도 중국군의 개입으로 참패를 하지 않았다면 쉽게 축출하기가 어려웠을 것 입니다.(뭐, 마샬과 그 계열의 인물들은 맥아더를 싫어했다고 하니 좀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맥아더는 한국전쟁 기간 중 행정부와 군수뇌부의 아시아 정책을 공공연히 비판했는데 이것은 문민통제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트루먼은 단호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트루먼은 초대 국방부 장관에 임명한 포레스탈이 자신을 기만했다고 판단하자 가차없이 교체했으며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과정에서도 단호한 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의회에 대해서도 자신의 영역에 쓸데없이 간섭한다고 툴툴댔다죠. 물론 포레스탈의 후임으로 앉힌 존슨은 별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만;;;; 대중적으로 인기가 상당했던 맥아더를 교체할 때에도 맥아더가 일정한 선을 넘었다고 판단하자 해임시키지요. 문제가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습니다만 그래도 민군관계의 측면에서 꽤 모범적인 군통수권자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2008년 6월 17일 화요일

天朝의 兵部尙書 두 양반에 대한 책

세상이 우울하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이 어린양 같은 소시민에게는 소소한 즐거움이 계속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오늘은 아마존에 주문 넣은 책이 몇 권 도착했습니다.


발송한 날자는 다른데 도착은 같은 날 했습니다. 그야말로 Time on Target이로군요!

경제사정도 갈수록 악화되어 지르는 책의 양이 줄어들다 보니 그에 맞춰 책을 고를때도 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신간을 바로 지르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고 나온지 최소한 두어달 이상은 된 책들을 서평을 살펴가며 사 보게 되었지요.

이번에 도착한 책 중에는 미국의 국방부 장관 두 명에 대한 책이 있습니다.

첫번째 양반을 다룬 책은 바로 이 책 입니다.


루즈벨트 행정부에서 전쟁부 차관을 지내고 트루먼 행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냉전 초기 미국의 국방정책 형성에 큰 역할을 한 루이스 존슨(Louis Arthur Johnson)을 다룬 책 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양반을 다룬 책은...

표지에 낚였습니다?

민군관계의 권위자인 허스프링(Dale R. Herspring)이 작심하고 럼즈펠드를 까기위해 쓴 책 입니다.

예전에 허스프링이 루즈벨트 이래의 미국 민군관계에 대해 쓴 책을 한 번 소개한 적이 있었지요. 그때도 허스프링은 럼즈펠드를 열심히 까고 있었는데 그때 까지도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현재 진행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직' 국방부 장관이 되었지요. 까기에 아주 이상적인 환경이 조성된 것이죠. 그래서 허스프링은 단행본 한 권을 할애해서 럼즈펠드를 까고 있습니다. 결론 부분을 먼저 읽어 보니 허스프링은 민군관계에 있어 갈등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고 국방부장관의 임무는 이 갈등을 조정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해서 협력적으로 끌고 가야하는데 럼즈펠드는 이 점에서 실패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장마철의 무료함을 덜어줄 물건들이 생기니 아주 즐겁습니다.

2007년 2월 21일 수요일

징병제와 미국 스포츠계

징병제가 실시될 무렵 미국 스포츠계의 이야기랍니다.

(전략)

언론과 대중은 운동선수와 영화배우들의 군 입대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징병제가 실시된 초기에 야구 구단주들은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맞춰 자신의 애국심을 과시했다. 신시내티의 워렌 가일스(Warren Giles)는 스타들의 군 입대는 “배트 보이들이 (경기장에서 하듯) 최대한 신속해야”하며 야구계는 징병 문제에 있어 특별 대우를 바라지 않는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화이트 삭스의 해리 그라비너(Harry Grabiner)는 전쟁중이긴 하지만 대중들에겐 오락거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레드삭스의 톰 야키(Tom Yawkey)는 야구계가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으나 돔 디마지오(Dom DiMaggio)와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가 팀에서 차출되는 것은 걱정하고 있었다. 구단주들은 12월 11일 회의를 열어 군대에 입대하는 선수들은 군복무 리스트에 넣고 군대에 입대한 선수들의 방출이나 영입에 관심을 가진 구단이 참고하도록 하자는데 합의했다. 그리고 군복무 리스트에 오른 선수들은 각 구단의 선수 보유 제한에 해당되지 않도록 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밥 펠러(Bob Feller)와 양키스의 필 리주토(Phil Rizzuto)는 1-A(현역)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디트로이트 슬러거의 행크 그린버그(Hank Greenberg) 만큼 많은 관심을 끈 선수는 없었다. 그린버그는 군 입대와 관련된 첫번째 인터뷰에서는 결코 군 입대 유예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한 기자에 의해 그린버그가 징병당국에 생계에 따른 징병유예 또는 한 시즌 더 뛸 수 있도록 징병을 늦춰 달라고 요청한 사실을 밝혀냈다. 징병당국은 언론 보도를 전면 부인했으며 연봉 55,000달러를 받을 예정이었던 그린버그는 30세의 나이에 징집됐다. 권투선수인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Joe Louis)는 아내와 이혼 수속을 밟는 바람에 “부양자 징집유예” 대상에서 제외됐다. 루이스는 그의 팬 중 한명에게 “난 언제든지 군대에 갈 준비가 돼 있습니다. 어떤 대우라도 받을 겁니다”라고 밝혔다. 이보다 좀 웃기는 일 중에는 미네소타주 오스틴의 스타 고등학교 축구팀의 풀백이 실제로는 23세로 가명을 쓰고 고등학교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지역에서 추방됐다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스타들이 징집되자 야구 구단주들은 초기에 징병제도에 열렬히 찬성했던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브루클린 다저스의 래리 맥페일(Larry MacPhail)은 징병제도는 소득을 떨어트리기 때문에 야구 선수들에게 불리하게 적용되고 있다고 언론에 불평을 늘어놓았다. 맥페일은 야구선수들도 과학자나 의사들 처럼 특별 대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Washington Senators의 구단주인 클라크 그리피스(Clark Griffith)는 루즈벨트의 군사보좌관인 왓슨(Edwin M. Watson) 장군에게 서한을 보내 각 구단마다 훈련을 담당할 교관을 보내 선수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는 대신 야구 경기를 계속하게 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 것을 제안했다. 그리피스는 서한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야구 구단은 준 공공기관(semi-public institution) 입니다.”

(후략)

George Q.Flynn, The Draft 1940-1973, Universtiy Press of Kansas, 1993, pp.27-28

그리피스 선생. 왜 군대에 야구팀을 만들자는 생각은 안하셨습니까!

역시 대한민국의 "상무"는 훌륭한 제도입니다. 대한민국 만만세.

2006년 8월 31일 목요일

[美利堅史] - 露西亞國王 스탈린 世家

노서아 국왕 스탈린은 성은 쥬가시빌리, 이름은 요시프다. 그의 어머니 예카테리나는 노비 출신이라 전한다. 스탈린이 자라자 예카테리나는 아들을 사찰에 집어 넣었다. 이때 노서아에는 마르크스 귀신을 섬기는 사교가 성행했다. 마르크스를 섬기는 무리들은 붉은색을 숭상했기 때문에 홍건적이라고도 한다. 많은 무뢰배들이 마르크스를 섬겼는데 스탈린도 여기에 현혹돼 홍건적이 됐다.

테오도어 루즈벨트 5년, 스탈린이 무리들과 함께 노략질을 시작했는데 이로서 홍건적들 사이에 이름을 떨치게 됐다.
태프트 4년, 마침내 스탈린이 여러 도적들의 추대를 받아 장군이 됐다. 이때 홍건적의 수괴 레닌은 대장군을 칭하며 무리를 모았는데 그 수효가 수만이었다.

윌슨 5년, 노서아 국왕 니콜라이 2세가 부덕해 왕위에서 물러나니 케렌스키가 섭정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이때 노서아는 덕국과 전쟁을 치르며 연전 연패 하니 민심이 자못 흉흉하였다.
괴수 레닌이 때를 틈타 도적의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키니 섭정 케렌스키는 크게 낭패하여 도주하였다. 레닌이 스스로 노서아 왕을 칭하고 국호를 소련이라 하였다.

이때 뜻있는 노서아의 장수들이 앞다투어 홍건적을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켰다.
이 중 대장군 데니킨과 수군 제독 콜착의 군세가 가장 왕성했다. 처음에 관군의 기세가 등등하여 곳곳에서 도적들이 대패했으나 레닌이 트로츠키를 대원수에 임명해 기세를 올리니 이때부터 관군의 예기가 꺾였다.
이때 스탈린도 장군이 되어 관군과 싸웠다. 스탈린이 거느린 군사가 가는 곳 마다 승리하니 그 명성이 거듭 높아졌다.

이때 파란(波蘭)이 군사를 일으키니 순식간에 노서아의 서쪽 변경 수천리가 파란 군사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대장군 투하체프스키와 스탈린에게 군사 수십만을 주어 파란을 치게하니 파란 군대가 일패도지하였다. 이때 영길리와 불란서는 홍건적의 기세가 왕성함을 우려해 군사를 일으키려 하니 레닌은 이를 우려해 파란을 치는 군대를 거두었다.

쿨리지 2년, 레닌이 붕어(崩御)하였다. 이에 트로츠키와 부하린 등 여러 괴수들이 서로 앞다퉈 왕위를 노렸다.
홍건적들이 왕을 추대하는 법도는 자못 괴이하다. 먼저 막사과(莫斯科)의 크렘린 궁에 각지의 두령들을 모으고 왕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 서로 언변을 겨루는데 이 중 가장 달변인 자를 왕으로 추대한다고 한다.
이때 트로츠키는 자신의 학식을 뽐내며 스탈린이 무뢰배 출신이라 하여 심히 업신여겼다.
그러나 스탈린과 여러 차례 언쟁을 겨루매 매번 논파 당하였다.

이에 여러 무리가 스탈린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스탈린은 국왕이 되자 흉포한 본색을 드러냈다. 스스로 마르크스, 레닌에 이은 미륵의 현신이라 칭하고 여러 경전을 저술해 두령들 앞에서 강론했는데 그 말이 요망하여 모두 옳은 말이 아니었다.
묵서가에서 숨어살던 트로츠키가 스탈린이 지은 경전을 두고 평하여 “모두 사특하고 괴이한 설이다”라고 하니 스탈린이 이를 듣고 노하여 곡괭이로 쳐 죽였다.

그리고 산업을 일으킨다 하여 농민들을 핍박하니 굶어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또 사나운 개 키우기를 좋아하여 그 수가 수천이었는데 그 중 가장 아끼는 개를 “예조프”라 하였다. 예조프의 성질이 사나워 사람을 여럿 물어 죽였으나 오히려 스탈린은 이를 보고 즐거워 하였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5년, 스탈린이 대원수 투하체프스키와 여러 장군들을 참살하였다.
투하체프스키는 일찍이 명장으로 이름이 높아 각국의 무인들이 그 이름을 사모하였다. 하루는 스탈린이 투하체프스키를 잡아들여 죄를 추궁했다.

“네가 덕국과 내통하고 있다니 어찌된 일인가?”

투하체프스키가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어찌 소장이 덕국과 내통하겠사옵니까?”

“짐이 관심법으로 보았노라”

이리하여 투하체프스키와 여러 장수들이 예조프에게 물려 죽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7년, 스탈린이 예조프를 솥에 삶고 더 사나운 개를 들였다. 그 이름을 베리야라고 지으니 사람들이 예조프 보다 더 두려워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9년, 덕국왕 히틀러가 대군을 일으켜 노서아를 쳤다. 노서아의 이름 높은 장수들이 이미 예조프에 물려 죽은지라 군대를 제대로 지휘할 자가 없었다. 덕국 군대가 노서아의 강역 수천리를 휩쓸고 노서아 군사 수백만을 무찌르니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11년, 대장군 바실레프스키가 스탈린그라드에서 덕국 군사를 크게 무찌르니 비로서 덕국의 예기가 꺾였다.

트루먼 1년, 대원수 주코프가 덕국의 왕성 백림을 함락하니 덕국왕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 천자가 친히 포츠담 성에서 스탈린의 노고를 치하하고 동구라파를 식읍으로 하사했다. 천자가 일본국을 토벌할 것을 명하니 스탈린이 명을 받들어 일본국을 토벌했다. 다시 천자가 스탈린에게 작위를 거듭 내리고 한국의 절반을 봉읍으로 하사했다.

스탈린이 덕국을 정벌하고 동구라파를 식읍으로 받으니 교만한 마음이 더하여 역심을 품었다.
소련의 군사가 수백만이요 전차가 수만대에 달하니 서구라파의 여러 왕들이 두려워 하니 천자가 나토라는 관청을 두고 구라파에 천병을 보내어 국경을 순찰하게 하였다.
스탈린이 이때부터 번번히 천명을 거스르며 천자의 예를 행하니 화성돈의 뜻 있는 신료들은 이를 불안하게 여겼다.

아이젠하워 1년, 스탈린이 붕어하였다. 이에 베리야가 달을 바라보며 슬피 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