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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1일 금요일

슬랫 아머를 장착한 북한군 T-34-85

Stijn Mitzer와 Joost Oliemans의 공저 The Armed Forces of North Korea: On the Path of Songun를 읽고 있는데 북한 전차부대에 대한 설명에서 가장 먼저 슬랫 아머를 장착한 북한군 T-34-85의 일러스트레이션이 나옵니다. 북한이 이 고물을 아직 후방의 예비부대 용으로 비축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있는데 나름 소소한 개량도 하고 있다니 재미있네요. 이 일러스트레이션에 나온 슬랫 아머의 형태는 북한군의 T-55에 달려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북한군의 T-55에 슬랫아머를 장착한 모습은 영상으로 공개된 게 있는데 T-34-85는 좀 생소합니다. 하여튼 북한 녀석들도 꽤 알뜰하군요.





2019년 9월 25일 수요일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에 노획되었던 한국군 문서류

간만에 포스팅 하나 합니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군사사 글 하나 쓰기가 어렵군요.^^

현재 한국전쟁 이전 창군기의 문헌 자료는 매우 부족한 편 입니다. 전쟁 초기 서울이 함락되면서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가지고 있던 문헌 상당수가 파괴되거나 북한군에 노획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문에 창군기를 연구할 때는 미국 문헌에 의존하는 정도가 심합니다. 창군기에 활동한 인물들의 회고록도 유용하지만 회고록의 특성상 엄밀한 교차검증이 필요하죠.

그런데 북한군이 노획한 문서들이 미군에 의해 다시 노획된 사례가 간혹 발견됩니다. 예를들면 1949년 6월 24일 제3보병사단에서 작성한 현황보고서가 있습니다. 이 문서는 개전 초반 북한군에 노획되었다가 미군이 다시 노획해서 미국으로 가져갔습니다. 북한 문서들에 섞여 있다 보니 한국 정부에 반환되지 않고 미국 국립기록관리청에 이관되어 RG242 문서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국사편찬위원회, 국립중앙도서관 등 국내 기관들에 의해 수집되어 온라인으로 쉽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부처간 교류가 잘 되지 않는 것인지 여러 기관이 중복적으로 수집을 했습니다. 온라인으로 이용할 때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수집한 것을 보는게 낫습니다. 상대적으로 최근에 수집을 해서 컬러로 깔끔하게 스캔이 되어 있습니다.

한동안 행방을 알수 없었던 정부 수립 초기 문서들을 노획문서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입니다.


출처: RG242 Entry NM44 299-C Box142









2018년 6월 9일 토요일

탱크 사냥꾼

트위터에 신녕-영천지구 전투 당시 국군 6사단의 대전차전투에 대한 썰을 풀었는데, 이야기 나온김에 해당 증언을 소개해 봅니다.


변규영(卞圭瑛)(당시 제6사단 19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장 소위·예비역 중령·현 석공 원주주재 사무소장·49)  
6사단 본부 군수처에서 상사로 근무하면서 신녕(新寧)까지 후퇴했다가 장교가 모자라 830일에 현지임관되어 소대지휘를 맡았읍니다. 영천으로 가는 신녕 고개 위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적 16연대가 10여대의 탱크로 공격해서 19연대는 큰 피해를 봤어요. 적 탱크 때문에 장병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어요. 적 탱크 포탄이 30리 떨어진 영천 읍내까지 날아갔으니까요. 
94일께인데 새벽 1시에 10여대의 적 탱크가 헤드라이트를 켠 채 일렬종대로 신녕고개 위로 올라왔어요. 아군이 다 후퇴한 것으로 알았는지 보병엄호도 없이 아주 유유히 올라와요. 내 소대원들은 겁이 나서 벌벌떨어요. 군수처의 일을 보았기 때문에 나도 이때 처음으로 적 탱크를 보았지만 춘천에서부터 저놈 때문에 사단이 쫒긴 생각을 하니 이가 부드득 갈립디다. 한번 겨루어보자는 결심이 생겼어요. 강성의(姜成義, 전사), 모 등 2명의 일등중사에게 수류탄 10여발씩을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어요. “내가 혼자서 탱크에 기어오를테니 너희들은 나에게 수류탄을 공급하고 엄호사격을 하라. 그리고 내가 죽거들랑 결혼 6개월된 마누라에게 죽은 날짜나 알려줘라고 당부했어요. 
고갯길을 내려가 길가에 엎드려 있는데 모두 14대의 탱크가 우르렁거리며 지나가요. 탱크들이 나의 매복지점 앞을 지나가는데도 겁이 나서 떤 것은 아닌데 뛰어오르기가 마땅치 않아요. 그냥 엎드려 기회를 보았지요. 좀 있으려니 도로파괴용 매설지뢰가 폭파하여 5미터 직경의 큰 웅덩이가 파지며 선두 탱크가 처박힙디다. 그러니 뒤따르던 탱크들이 차례로 정지해요. 이어 도로지뢰 폭파지점에서 3백미터 아래의 교량에 설치된 TNT가 터졌어요. 그러니까 또 한 대가 개울에 떨어지더군요. 이렇게 해서 모두 8대가 꼼짝 못하게 됐고 나머지 꽁무니의 6대는 도망칩디다. 앞 탱크의 뚜껑이 열리면서 적병들이 기어나오는 것을 셋이서 카빈으로 사살했어요. 
이어 나 혼자 뛰어나가 다음 탱크의 뚜껑을 주먹으로 두드렸어요. “! 빨리 열어했더니 저희 편인 줄 알고 뚜껑을 엽디다. 수류탄 1발을 집어넣었죠. 이런 식으로 차례로 부쉈는데, 마지막 탱크에서 눈치를 챘어요. 길가에 엎드려 있는 사병한테서 수류탄을 받아서 달려드는데 기관총을 냅다 쏩디다. 엎드리며 굴러 길가에 숨었다가 다시 탱크에 올라서서 뚜껑을 두드리며 너희 편 탱크는 다 죽었다. 문 열고 나오라고 했더니 장교 1명과 사병 4명이 손을 들고 나와요. 
이때 동이 트고 있었는데 김익렬 연대장, 김종오 사단장, 미군 고문 등 많은 19연대 장병들이 고개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었어요. 나 혼자서 모두 적 탱크 6(지뢰에 걸린 것 까지 8)를 부수거나 생포했어요. 거짓말 같지만 사실이에요. 보병의 호위 없이 좁은 고갯길에서 탱크는 맥을 못써요. 이 전공으로 나는 임관 7일만에 중위로 특진하고 을지무공훈장을 받았읍니다. 
다시 영천 동북쪽 포항가두(지금의 제2육사 근처)에서 영천공방전을 하다가 적 포탄에 오른쪽 다리가 날아갔어요. 탱크 부술 때 같이 나갔던 강성의 중사는 이때 전사했는데 강 중사는 6·25전에 북에서 혼자 월남한 사람이에요. 단독으로 수색활동을 귀신같이 잘하던 사람인데 지금도 내가 그 사람의 사진을 꼭 갖고 다니지만, 통일된 후에나 찾아갈 사람이 혹 나타날는지요.  
中央日報社, 民族證言: 2을유문화사, 1972, 282~284

변규영씨의 증언 내용은 한국군에서 간행한 공간사와 약간 차이가 있으니 공간사의 해당 전투에 대한 서술도 함께 소개합니다. 일단 날자가 다릅니다. 물론 이 정도는 기억의 착오라고 할 수 있겠죠. 국방부 공간사에도 변규영씨가 대전차 특공대를 지휘한 사실은 확인되지만 세부적인 전투 양상이 다릅니다.


다음날(9월 1일) 21:00쫌 적은 전차 2대와 보병 1개 소대로 편성된 보전 협동부대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아군 포화가 집중되자 곧 고개 중턱에서 철수하였다. 날이 밝은 뒤 대대장은 전날 밤의 교전 상황을 여러 각도로 분석한 결과 이는 적의 차기 작전을 위한 위력수색이라고 판단하고 적정을 수집하기 위하여 대대 수색대를 적 지역에 침투시켰다. 이날 오후 행동을 개시한 대대 수색대는 덕천-인각사(麟覺寺)-화수동 일대의 적정을 수색하였으나 적 부대 배치 지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한 때문인지 그들이 공격을 개시할 뚜렷한 징후는 포착되지 않았다.이러한 수색활동을 끝마친 대대 수색대는 대대로 복귀 도중 넌덧마을 뒷산 고개에서 피난가지 않고 그 마을에 남아 있던 장임실(張任實, 당시 64세) 외 2, 3명의 노인을 만났다. 그들은 수색대원들을 보자 반가와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오늘 새벽 우리 동네에 많은 인민군과 열 서너 대의 전차가 왔네. 그들은 오늘 밤에 큰 싸움이 벌어진다고 하면서 우리들보고 마을에서 떠나라고 했네. 그래서 지금 우리 늙은이들은 덕천으로 피난가는 중이네"라고 그들이 직접 보고 들은 바 그대로의 적정을 알려 주었다. 그 노인들의 말대로라면 두세시간 이내에 적이 공격을 개시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 수색대장은 고맙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지름길로 달린 끝에 노을이 질 무렵에는 대대장에게 수색결과를 보고하였다. 
대대장은 넌덧마을 노인들이 전해 준 첩보는 비록 신빙성이 희박하다고는 하지만 전날 밤의 적 위력수색과 일맥상통한 데가 있다고 생각하고 지체없이 작전회의를 소집하여 다음과 같이 적의 보전협동공격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1. 적 전차가 갑령 고갯마루에 설치된 대전차지뢰지대에 들어설 때 까지 사격을 엄금한다.
2. 적 선두 전차가 파괴되면 즉시 넌덧마을-갑령고개 중턱 일대에 지원포병의 화력을 집중하며, 대대내의 모든 화기도 일제히 사격한다.
3. 전차특공대는 갑령 고개의 두 번째 도로, 굴곡 지점 서쪽 능선에서 매복대기할 것이며, 아군 포병 지원사격이 끝나는 즉시 적 후미 전차부터 먼저 공격한다.
4. 각 중대는 전차특공대가 적 전차를 공격할 때 이를 엄호한다.
5. 사격개시 신호: 예광탄 3발. 
그로부터 약 1시간이 경고한 20:00쯤 적의 공격준비사격이 대대 방어지역에 집중되기 시작하더니 5, 6분이 경과하자 맹렬하기 이를 데 없는 포격으로 아군 방어진지를 강타하였다. 이 바람에 대대 방어진지는 잠깐 동안에 초연으로 휩싸이고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철수를 건의하는가 하면, 제3중대와 대대간의 통신이 두절되어 적정 파악마저 어렵게 되었다.
바로 이 때쯤 넌덧마을 부근에서는 수 미상의 적 전차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면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렇듯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상황하에서 대대장은 철수 건의를 단호하게 물리치고 오직 방어진지의 사수를 강조하여 마지 않았다. 
약 30분간에 걸친 적의 포격이 대대 방어지역 후방으로 연신된 얼마 뒤, 드디어 적 선두 전차가 어렴풋한 달빛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아군 진지에서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쥐죽은 듯 잠잠하기만 하였다.
고갯마루 20m 앞 까지 육박한 적 선두 전차는 그를 지켜보는 수많은 시선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지뢰지대 전방에서 일단 정지하더니 헷치를 열고 상반신을 전차 밖으로 내민 전차장이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대대 관측소와의 거리는 불과 50m 안팎! 이 광경을 보다못한 어느 병사는 총을 겨냥하고 이것을 제지한 대대 작전장교의 손은 떨고 있었다. 잠시 뒤에 적 선두 전차가 다시 움직이자 그 후방 300~400m 지점에서 정지했던 2번 전차도 뒤를 따랐다. 몇 초 뒤 "쾅"하고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적 선두 전차가 길 옆으로 비스듬히 전복되었다.
그 직후 대대 관측소에서 예광탄 3발이 발사되어 붉은 포물선 세줄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순간 대대의 모든 화기가 일제히 불을 뿜었으며, 넌덧마을-갑령 고개 중턱에는 제16포병대대의 일제사격(TOT)이 집중되었는데 동 대대 포격은 신속하고 정확하여 매우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약 20분이 경과하였을 때 쯤 대대장은 모든 사격을 중지시켰다. 이 때를 기다리던 변 소위는 전차특공대를 지휘하여 두 번째 굴곡 지점에서 후진중인 적 후미 전차에 3.5inch 로켓탄을 집중사격한 것을 필두로 고개 아래에서 차례로 적 전차 7대를 파괴하고 승무원 다섯 명을 사로잡았다. 
이 날 밤의 적 공격은 단 1회로 끝이 났다. 갑령 고개에서 파괴된 적 전차 8대 중 승무원이 전차 안에서 전사한 전차는 선두와 후미 전차 두 대였고 전차특공대에 대항을 시도한 전차는 단 한대 뿐이었다. 나머지 다섯 대의 승무원들은 아군 포격이 집중될 때 이미 탈출했는지 전차특공대가 접근하였을 때에는 전차 내부가 텅 비어 있었다. 동이 튼 얼마 뒤에 대대는 전장을 정리하여 증강된 1개 중대 규모의 적 시체를 확인하고 트럭 2대분이 되는 각종 화기를 노획하였다. 대대장은 갑령 고개 북쪽에도 적 전차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미군 전방항공통제장교에게 항공지원을 요청하도록 협조하였다.이리하여 06:00쯤 갑령고개 상공에 나타난 우군기는 갑령고개-화수동과 그 북쪽 28번 도로상에 있는 적 전차에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이를 모두 불태웠다. 신녕전투가 끝난 뒤에 확인된 바에 따르면 이 일대에는 제19연대 제1대대가 파괴한 8대를 포함하여 총 21대의 적 전차가 파괴되어 있었다고 한다.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신령ㆍ영천전투』 , 1984, 161~165쪽.


2017년 12월 4일 월요일

신속한 지뢰 제거 방법


다부동을 쳐들어가야 하겠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이 하나밖에 없었다. 적들은 길에다 지뢰를 촘촘히 묻어놓았다. 공병이 없었기에 우리는 어쩔수 없었다. 하여 나무를 찍어다가 길을 가로막아놓았다. 이때 찌프차 한대가 오더니 꺽다리 쏘련 군관이 내렸다. 그는 번역을 통해 막아놓은 나무를 치우라고 야단을 쳤다. 지뢰가 많아 그리로 못간다고 하자 그는 권총을 들이대면서 당장 치우라고 윽박질렀다. 

"죽고싶으면 가거라!" 

하는수 없어 우리는 나무를 치웠다. 하지만 그 쏘련 군관이 탄 차는 얼마 가지 못하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날아갔다.

낙동강 전투 당시 북한군 6사단 정찰중대 중대장대리였던 김리정의 증언
연변조선족자치주 문사자료위원회 편, 『돌아보는 력사』 (료녕민족출판사, 2002), 185쪽.

※전쟁이 끝나고 수십년이 지난 뒤 회고한 내용이기 때문에 구술자의 증언에 약간의 오류가 있습니다. 중국군 출신자로 편성된 북한군 제6사단은 낙동강 전투 당시 마산 방면에 투입되었습니다.

2017년 7월 13일 목요일

1952년 9월 4일 스탈린-펑더화이-김일성 회담



이 글은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14-15 합본호 378~381쪽에 실린 1952년 9월 4일 스탈린, 펑더화이, 김일성 회담 녹취록의 영역본입니다. 한국전쟁 중반기 공산군 수뇌부의 시각과 몇가지 갈등 요인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자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전황이 유리하다고 주장하는 중국-북한측과 이를 의심하는 소련쪽의 신경전이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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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동지와 김일성 동지, 펑더화이 동지의 회담 녹취록


1952년 9월 4일


기타 참석자
우리측: 몰로토프 동지, 말렌코프 동지, 미코얀 동지, 베리야 동지, 불가닌 동지, 카가노비치 동지
중국과 북조선측: 저우언라이 동지, 천윈陳雲 동지, 리푸춘李富春 동지, 장웬티안張聞天 동지, 박헌영 동지.
통역: 문, 스저師哲, 페도렌코




스탈린: 조선 인민들의 사기는 어떻습니까?


김일성: 높습니다.


스탈린: 박헌영 동지도 같은 생각입니까?


박헌영: 그렇습니다. 높습니다.


스탈린: 군대는 어떻습니까?


김일성: 군대도 사기가 높습니다.


스탈린: 펑더화이 동지는 어찌 생각하시오?


펑더화이: 좋습니다.


김일성: 전반적인 정세는 유리합니다. 적의 폭격을 제외하면 그렇습니다.


스탈린: 전투기사단은 있습니까?


김일성: 1개 사단이 있습니다.


스탈린: 중국은 공군을 투입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한다면 의용군이 아니라 중국 정부가 직접 개입한 것이라고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용군이 자체적인 공군력을 갖출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행동이 민주진영에 유리하겠습니까? 내 개인적으로는 중국 정부가 (누락) 선언하는 것은 불리한 행동입니다. 전쟁은 군대가 있어야 치를 수 있습니다. 김일성 동지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항공부대가 있어야 합니다.


김일성: 장비만 있다면 항공사단을 1~2개 편성할 수 있습니다.


스탈린: 조선 인민이 전쟁으로 고통을 받고있고 영웅적인 인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인민이 고통을 받고 있으니 우리 소련군 1~2개 사단을 해체해서 장비를 양도할 생각이 있습니다.


김일성: 감사드립니다.


스탈린: 전투기 사단이 1개 있다고 했지요?


김일성: 그렇습니다.


스탈린: 다른 부대의 조종사들을 전환시키는 것도 가능합니다.


김일성: 아직 훈련중인 항공사단이 하나 더 있습니다.


스탈린: 항공사단을 1~3개 정도 편성할 수 있는 장비를 제공할 수 있소.


김일성: 그에 필요한 인력을 충원할 수 있을 겁니다.


스탈린: 좋습니다. 3개 항공사단을 편성할 수 있는 장비를 주겠소. 또 필요로 하는건 없습니까?


김일성: 적의 공습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어서 대공포 부대를 조직해야 겠습니다. 얼마전 5개 대공포 연대를 편성할 수 있는 장비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10개 연대분의 장비가 필요합니다. 스탈린 동지께는 5개 연대 분 장비를 부탁드렸고 마오쩌둥 동지께도 5개 연대분의 장비를 부탁드렸습니다. 마오쩌둥은 현재 중국 정부는 그럴 능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스탈린 동지께서 대공포 연대 10개분의 장비를 원조해주셨으면 합니다.


스탈린: 지상군은 어느정도요?


김일성: 18개 사단입니다.


스탈린: 포병은 어느정도요?


김일성: 포병은 몇개 연대밖에 없고 장비도 부족합니다.


스탈린: 우리 소련군은 1개 사단에 포병연대가 2개입니다. 중국군도 마찬가지이고. 조선인민군의 편제는 어떻소?


김일성: 우리 군대의 편제도 동일합니다.


스탈린: 필요한게 있으면 목록을 주시오.


김일성: 목록을 작성해 놓았습니다.


스탈린: 박격포는 있소?


김일성: 그렇습니다. 122mm 입니다.(영어 번역문에 122mm로 되어 있습니다.)


스탈린: 조선에 대공포연대 10개분의 장비를 원조하겠소.


김일성: 스탈린 동지. 감사합니다. 우리 지상군은 122mm 곡사포를 비롯해 여러 장비가 부족합니다. 추가로 원조를 부탁드립니다.


스탈린: 또 부족한게 뭐가 있소?


김일성: 공병 부대와 통신 부대의 장비가 부족합니다. 너무 부족합니다. 항공기도 부족합니다. 우리는 장비와 물자가 부족합니다. 물자가 부족해서 한달 내에 122mm 포탄 생산을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스탈린: 필요한 물자 목록을 주시오.


김일성: 목록을 작성해 놓았습니다.


스탈린: 식량 상황은 어떻습니까? 빵이랑 쌀 말이요.


김일성: 올해는 작황이 좋습니다. 하지만 내년은 어떨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마오쩌둥 동지가 의류와 식량 원조를 약속하셨습니다.


스탈린: 조선 인민들은 밀가루도 먹습니까? 아니면 그냥 밥만 먹습니까?


김일성: 스탈린 동지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있을때 5만톤의 식량을 원조해 주셨습니다. 우리 인민들도 밀가루를 좋아합니다. 우리 인민들은 직면한 문제를 극복하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데 급급합니다. 하지만 운송 수단이 턱없이 부족하고 우리 힘으로는 극복할 능력이 없습니다. 자동차와 트랙터, 화학 비료를 원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스탈린: 필요한 목록을 주시오. 중국과 조선 동지들이 미국과 휴전협상을 진행하는데 의견 충돌이 있었다는데 사실입니까?


김일성: 제가 알기론 심각한 의견 충돌은 없습니다. 중국 동지들이 제안한 협상안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민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고려해서 최대한 빨리 휴전협상을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중국 동지들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스탈린: 그 문제는 중국 대표단과 논의했습니다. 중국 대표단은 미국이 제안한 포로송환 조건이 동의하지 않으며 우리의 조건을 관철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만약 미국이 중국군과 조선인민군 포로의 20%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그들이 풀려날 때 까지 미국 포로의 10%를 억류하자고 합니다. 아니면 같은 비율의 미군 포로를 억류하자고도 합니다. 그렇게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포로문제를 타결하고 휴전협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습니다. 석방되지 않은 포로들은 휴전이 성립되고 적대행위가 중단된 뒤에도 협상을 할 수 있을겁니다. 동지는 이 문제를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소만 포로문제야 말로 우리의 입장이 진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겁니다. 미국은 중국군과 조선인민군 포로의 20%는 송환을 거부한다고 주장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믿을 수 없다고 하면 됩니다. 이렇게 20%의 포로를 문제삼는 동안 60%는 송환이 될 겁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중국동지들은 지금 상황에서는 새로운 제안을 할 필요가 없으며 미국이 새로운 제안을 할 때 까지 기다려서 우리쪽에서 수정안을 내놓자고 합니다. 이에 관해 알고 있습니까?


김일성: 마오쩌둥 동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스탈린: 마오 동지가 뭐라고 합디까?


김일성: 마오쩌둥 동지께서 몇가지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첫 번째는 포로를 모두 석방하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휴전협상을 먼저 타결하고 포로 문제를 상의하는 것 입니다. 세번째는 아군 포로들이 억류되어 있는 만큼 그에 해당하는 수의 적 포로를 억류하는 것 입니다. 포로문제에 있어서 마오쩌둥 동지의 시각은 스탈린 동지의 시각과 같습니다. 이 세가지 대안은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포로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기 위해 스탈린 동지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스탈린: 나는 당분간 포로를 모두 송환하라고 주장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게 통하지 않으면 송환을 거부하는 20%의 포로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방안을 바꾸자는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 태도를 바꿔보자는 겁니다. 처음에는 모든 포로를 송환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하고 다음에는 적의 포로 20%를 석방하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다른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새로운 제안을 하거나 미국이 새로운 제안을 할 때 까지 시간을 버는게 괜찮겠는가? 포로 교환을 완료할 것을 주장하고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를 관망해야 합니다.
두번째 안은 김일성 동지와 동지의 투쟁에 유리합니다. 적이 아군 포로 20%를 석방하지 않는다면 적군 포로 20%를 석방하지 않으면 됩니다. 두번째 안을 택한다면 미국의 국론이 분열될 겁니다. 포로를 석방하고 전쟁을 그만두자는 움직임이 일어날 겁니다. 이렇게 되면 당신이 유리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미국인들은 전투에서 어떻게 싸웁니까? 잘 싸웁디까?


펑더화이: 미군은 사기가 낮은게 약점입니다.


스탈린: 미국내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하니 그럴겁니다. 미군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고 싶군요. 정신력입니까? 전술입니까? 아니면 물량입니까?


펑더화이: 1952년 1월 부터 2월 사이에 미군은 200번 이상의 공세를 취했지만 고작 1%만 승리했습니다. 반면 우리는 겨우 30번의 공세를 취해서 80~90%의 승률을 보였습니다.


스탈린: 구체적으로 어떻게 승리한겁니까?


펑더화이: 아군은 적의 1개 소대나 1개 중대 정도를 섬멸하는걸 목표로 했습니다.


스탈린: 김일성 동지도 동의하시오?


김일성: 물론입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스탈린: 미군의 방어진지는 강력합니까?


펑더화이: 최근 적은 방어진지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마찬가지로 방어진지를 강화했습니다. 미군의 야전 축성은 우리보다 취약하지만 건설자재는 훨씬 좋습니다.


스탈린: 적의 방어선은 어느 정도 요새화 되어 있습니까?


펑더화이: 방어선이 3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스탈린: 아군은 어떻소?


펑더화이: 제2선까지만 요새화 되어 있습니다. 제3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스탈린: 지뢰지대를 구축했습니까?


펑더화이: 지뢰와 철조망이 부족합니다. 적의 물자를 노획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탈린: 우리는 대조국전쟁 당시 지뢰를 대량으로 사용했습니다. 아군은 지뢰지대를 표시한 특수한 지도를 이용했습니다. 지뢰를 사용하지 않고 전쟁을 할 수는 없습니다.


펑더화이: 아군 진지와 적군 진지는 매우 가깝게 붙어있습니다. 보통 300~500미터 정도입니다.


스탈린: 지나치게 전방으로 진출했군요.


펑더화이: 지난 4월 이래 아군이 꾸준히 진격했기 때문입니다.


스탈린: 각 방어선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펑더화이: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가깝게 붙어있습니다. 일부 지역은 각 방어선간의 거리가 좁습니다. 하지만 어떤 지역은 방어선간의 거리가 20km 정도 되기도 합니다. 지금은 강화 콘크리트로 방어진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스탈린: 참호선도 구축하고 있습니까?


펑더화이: 그렇습니다.


말렌코프: 그럼 아군 포로가 적군 보다 더 많은 이유는 뭡니까?


펑더화이: 전반적으로 보면 우리가 더 많은 포로를 잡았습니다.


스탈린: 중국군과 조선인민군 포로가 몇명입니까?


펑더화이: 우리쪽 추산으로는 중국군 포로가 12,000명 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군 포로를 20,000명 잡았다고 주장합니다. 조선인민군 포로가 많은 이유는 1951년 10월 이전에 많은 수가 생포됐기 때문입니다. 미군은 공세 중 조선인민군의 예비 여단에서 많은 포로를 잡았습니다.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한 뒤 총 12,000명의 적을 생포했습니다. 이중 8,000명이 미군입니다. 이승만 군대로 부터 잡은 포로는 40,000명 입니다. 하지만 생활 환경이 열악해서 외국인 포로 중 많은 수가 사망했습니다.


김일성: 우리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포로 12,000명 중 4,416명이 미국 이외의 국가 출신입니다. 미군 포로 중 300명이 조종사이고 그 중 30명이 장교입니다. 남조선 군대의 포로 중 27,000명은 조선인민군에 편입시켰습니다. 인민군에 편입시킨 포로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말렌코프: 중국의용군을 교대로 순환 투입하고 있습니까?


펑더화이: 그렇습니다.


말렌코프: 그렇다면 중국의용군 사단들은 훈련할 시간이 있다는 뜻이군요?


펑더화이: 그렇습니다. 1953년 8월까지 현재 조선에 있는 의용군 사단을 모두 교대할 예정입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모든 지휘관들을 교대로 조선 전선에 참전할 수 있도록 할 것 입니다.


스탈린: 카츄사 로켓포도 가지고 있습니까?


펑더화이: 전선에 1개 사단을 배치했고 다른 사단은 후방에 배치했습니다.


스탈린: 후방에 빨치산도 활동하고 있습니까?


김일성: 그렇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지만 활동하고 있습니다.


스탈린: 포로 중에 일본군도 있습니까?


펑더화이: 일본계 미국인 뿐입니다.


말렌코프: 미군이 북조선을 폭격할때 격추한 비행기가 많지 않은건 어떻게 설명할겁니까?


펑더화이: 우리가 평가하기로는 격추한 적기가 많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미국 비행기 5,800대를 격추했습니다.


스탈린: 중국 조종사들을 어떻게 제트 전투기에 적응시킬 겁니까?


펑더화이: 중국 조종사들은 소련 조종사들이 지휘해야만 전투에 참가합니다.


스탈린: 왜  그럽니까? 뭘 두려워 합니까?


펑더화이: 우리 조종사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편대를 짜서 비행하지를 못합니다.


스탈린: 조종 훈련을 더 시켜야 겠군요. 일단 비행을 해야 훈련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소련 조종사들도 출격을 기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행을 시작하면서 점차 조종하는 법을 배워나갔습니다. 지금 우리는 조종사를 평가할때 비행시간을 따집니다. 조종시간이 많으면 기장을 줍니다. 비행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실전을 해야 진짜 경험을 쌓을 수 있습니다. 중국 조종사들도 출격하는걸 겁내면 안됩니다. 대신 조종하는 것을 집에 있는 것 처럼 편하게 여겨야 합니다. 야간 비행도 교육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공군을 육성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포상과 훈장 체계를 갖춰야 합니다.
중국군은 훈장이나 기장이 있습니까?


펑더화이: 아직 없습니다. 내년 쯤 도입하려고 생각합니다.


스탈린: 그러면 안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중국군은 무정부주의자들 처럼 훈장과 기장을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장성 계급도 없다지요? 훈장과 기장, 계급이 공산주의의 원칙에 반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계급 체계, 휘장, 포상 체계는 군대에 매우 중요합니다. 이게 없으면 진짜 군대가 아닙니다. 소련의 빨치산이 그런 식으로 운영됐지요. 우리 빨치산은 내전에 승리하고 미제국주의 군대를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군 계급도 없고 휘장이나 훈장도 없었습니다. 이건 잘못된 관행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장교단을 세심하게 육성해야 합니다. 장교들에게 봉급을 주는 등의 관리를 해야 합니다. 핵심은 장교단을 유지하고 관리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환경을 조성해 군사전문가로 키우는 것 입니다.

2017년 4월 9일 일요일

다부동 전투당시 북한군 기갑차량 손실원인

흥미로운 자료 하나를 올려봅니다.


이 표는 다부동전투가 끝난 뒤 미 1기병사단 방어구역에서 발견된 북한군 전차와 자주포의 잔해를 분석한 결과를 정리한 겁니다. 조사는 두 차례 이루어졌는데 재조사 결과 손실원인이 바뀐 경우가 몇건 있습니다. 작전연구에서 장비 손실원인을 추정하는 어려움을 잘 보여주는 듯 합니다. 2차 조사에서 결론이 바뀐 것이 19건 중 12건이란 점은 꽤 흥미롭습니다. 한차례의 조사만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오류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잔해를 바탕으로 손실원인을 추정하는 것은 꽤 어렵습니다. 지난번에 소개했던 영국군의 보고서 “1944년 6월 6일 부터 8월 31일까지 독일 전차의 손실 원인에 대한 분석”을 보면 영국군은 분석 대상이 될 전차의 잔해도 주의깊게 선정해서 유기된 차량에 사격한 흔적으로 판정되면 샘플에서 제외하기까지 합니다.


표. 다부동 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기갑차량의 손실원인
차종
1차조사결과
(50.9.27)
2차조사결과
(50.10.11)
비고
SU-76
야포(확실)
승무원이 유기(확실)
차량번호 1324
SU-76
-
야포(추정)

SU-76
항공폭탄(추정)
야포(확실)

T-34/85
승무원이 유기(추정)
승무원이 유기(확실)
바주카포 피격흔
T-34/85
야포(추정)
90mm전차포(확실)
차량번호 328
T-34/85
항공기(추정)
90mm전차포(확실)

SU-76
전차포(추정)
3.5인치 바주카(확실)

T-34/85
항공기 로켓 또는 야포(추정)
네이팜탄(확실)

SU-76
야포 또는 전차포(추정)
90mm전차포(확실)
차량번호 13XX
SU-76
야포 또는 전차포(추정)
90mm전차포(확실)

T-34/85
추정불가
90mm전차포(확실)

T-34/85
추정불가
네이팜탄(확실)
차량번호 320
90mm 관통흔
SU-76
추정불가
박격포 또는 야포(추정)

SU-76
추정불가
승무원이 유기(확실)

SU-76
기계고장(추정)
승무원이 유기(확실)
차량번호 1326
SU-76
항공기 로켓(추정)
-

T-34/85
네이팜탄(확실)
-

T-34/85
네이팜탄(확실)
-

T-34/85
네이팜탄(확실)
-

(Robert J. Best, ORO-T-261, The Structure of a Battle: Analysis of a UN-NK Action North of Taegu, Korea, September 1950(1954. 1. 20), RG550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Pacific, Entry A1-2-A Organizational History Files Box 105, pp.368~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