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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3일 일요일

Xiaoming Zhang저, Deng Xiaoping’s Long War : The Military Conflict between China and Vietnam, 1979-1991

 

2015년에 나온 장 샤오밍의 Deng Xiaoping’s Long War : The Military Conflict between China and Vietnam, 1979-1991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의 발발부터 1991년 양국 국교정상화까지 장기간에 걸쳐 지속된 중국-베트남 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아무래도 영어권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중국 본토에서는 공개적으로 하기 어려운 중공군에 대한 비판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저자의 배경상 외국인에 비해 중공 문헌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강점입니다. 다만 여전히 신뢰할 만한 베트남 문헌이 부족한 관계로 베트남군의 움직임에 대한 서술은 중공군에 비해 부족한 느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서 중공군의 전쟁 준비를 다룬 3, 1979년 전쟁의 경과를 다룬 4, 그리고 1979년 전쟁에 대해 평가하는 5장 까지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전쟁 자체의 전개 과정을 다루고 있어서 집중이 잘 되더군요.

3장에서는  중공군의 베트남 침공 준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중공 지도부가 설정한 전쟁 목표의 문제, 중공군의 전투력 문제를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전략적인 면에서는 중공 지도부가 무력으로 베트남에게 교훈을 준다는 모호한 전쟁 목표를 설정한 것을 지적합니다. 베트남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베트남 북부를 침공하라는 명령을 받은 광저우 군구와 쿤밍 군구의 지휘관들은 군구 단위의 목표 설정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베트남에게 교훈을 줄목표는 어느 선 까지 설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작전 목표에 대해서는 일선의 군구지휘관들에게 재량이 주어졌지만 작전에 소요되는 시간은 덩샤오핑이 직접 설정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북베트남 침공이 장기전의 수렁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지속적으로 경고했고 덩샤오핑도 이 경고를 염두에 두고 단기전을 계획했습니다. 시간적인 제한은 있으나 지리적인 목표는 모호한 상태에서 전쟁에 돌입하게 된 셈 입니다. 게다가 침공의 주력이었던 광저우 군구는 197925일 최종계획을 결정할 때 까지도 침공할 지역의 베트남군 전력과 지형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저자는 광저우 군구 사령관 쉬스유(世友)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입장입니다. 또한 베트남 침공에 투입된 광저우 군구와 쿤밍 군구가 협동 작전을 한 게 아니라 개별적으로 작전을 수행했다고 지적합니다.

중공군 전투부대의 질적 문제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당시 중공군의 평시 편제는 1개 군단의 1개 사단만 완편사단(갑종사단)이고 2개 사단은 동원사단(을종사단)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베트남 침공이 결정되자 황급히 을종사단을 완편하기 위해 동원이 이루어집니다. 광저우 군구 소속 제42군단은 소대장을 충원하기 위해 침공 직전 1,045명의 병사를 장교로 임관시켰습니다. 쿤밍 군구의 제13군단은 침공직전 11,874명의 군사경험이 없는 신병을 보충받았습니다. 전쟁 직전에 황급하게 경험이 부족한 인원으로 숫자를 채웠으니 실제 작전이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존에 있던 경험이 있는 인원의 상태도 좋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중공군 공군의 경우 1978년 기총 사격과 폭탄 투하 훈련에 참여한 조종사 800명 중 목표에 명중을 시킬 수 있었던 인원은 36% 정도였다고 합니다.

장비와 군수지원도 엉망이었다고 합니다. 인민해방군 총후근부장(군수국장)이었던 장젠() 회고에 따르면 베트남 침공 직전 일선부대들을 검열 했을 야포 포탄 불발탄이 많았고 수류탄은 3분의 1 불발탄이었다고 합니다.

4장에서는 중공군의 침공이 어떻게 초반부터 실패했는가를 이야기 합니다. 중공군은 개전 초기 까오방(Cao Bang) 방면에 광저우 군구 소속의 7 사단을 투입했습니다. 41(3 사단), 42(3 사단), 129사단(43) 입니다. 반면 지역을 방어하는 베트남군은 346사단(3 연대) 3 독립연대(31, 567, 576연대) 민병대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개전 초기 까오방 축선의 전투는 중공군의 정규군의 전투력이 베트남 정규군은 커녕 민병대와 비교할 수준이었음을 드러냈습니다.(실제로 중공측에서 베트남 민병대의 수준이 중공군의 일부 정규군 부대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했다고 합니다.) 광저우 군구는 개전 초기 국경돌파에 애를 먹으며 막대한 손실을 냈습니다. 물론 베트남군이 숫적으로 압도적 열세였기 때문에 우세한 중공군은 여러 곳에서 국경을 돌파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경을 돌파해 내륙으로 들어오면서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됩니다. 중공군 125사단은 개전 초기 푸호아(Phu Hoa) 방면에서 베트남 지방군의 저항으로 돈좌되었다가 우한 군구 54 예하 부대가 증원되고 나서야 진격을 재개할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숫적 우위를 활용해 작전 목표들을 대부분 점령할 있었지만 막대한 인명 장비 손실을 치러야 했습니다.

5장에서는 1979 전쟁의 결과를 평가합니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1979 전쟁에서 7,915명의 전사자와 23,298명의 부상자를 냈다고 인정합니다.(반면 서방에서는 중공군의 피해가 전사 26,000, 부상 37,000명이라고 추정해왔습니다.) 저자는 베트남측의 피해는 기록이 부족해서 파악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국측에서 주장하는 베트남군의 사상자 57,000명은 과장됐다고 인정합니다.

중공 공군의 작전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평가합니다. 주된 비판점은 중공 공군의 소련 공군의 영향으로 매우 방어적으로 운용됐다는 입니다. 중공 공군은 국경 근처의 기지를 이용할 있어서 훨씬 거리에서 오는 베트남 공군에 비해 체공 시간이 길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점을 살리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베트남 공군에 대해서는 베트남 육군 보다 부정적으로 봅니다. 실제로 베트남 공군 또한 소련식으로 조직됐기 때문에 중공 공군과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의 전술 단위 리더쉽 문제도 비판의 대상입니다. 까오방 방면 전투에서 중공군 484연대의 1 대대가 베트남군 전투공병대대 1 (숫자 미상) 매복 공격을 받자 장교들이 먼저 도망을 쳐서 괴멸된 사례를 전술 단위 리더쉽의 결여로 지적합니다. 또한 3장에서 지적한 처럼 중공군의 전반적인 훈련 전투경험 부족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비판합니다. 특히 신병 중심으로 편성된 150사단이 전쟁 막바지 단계의 철수 작전에서 베트남군의 매복으로 와해되어 타격을 입은 사례를 제시합니다.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1979 전쟁에 투입된 병사의 48% 실전경험이 없었고 장교의 25% 전쟁 직전 임관한 지휘경험이 없는 인원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제점들은 익히 알려졌듯이 중공 수뇌부가 인민전쟁노선이 해외에 군사력을 투사하는데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개혁에 나서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베트남군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고 있지만 중공군에 비하면 평가가 후한 합니다. 특히 개전 초기 북베트남 정규군이 숫적열세에 있었지만 민병대를 신속하게 동원해 숫적 격차를 줄인 점을 높게 평가합니다. 중공군의 주공이 투입된 까오방 방면에서만 40,000~50,000명의 민병대를 동원했다고 합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고 읽은 부분은 1979 전쟁을 다루는 부분입니다만 중공 수뇌의 전쟁 결심을 다룬 2장이나 1979 이후 장기간에 걸쳐 지속된 중국-베트남 국경분쟁을 다룬 6장도 재미있습니다. 특히 2장의 경우 중공과 중공군 내부의 정치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2장에서 또 하나 재미있는 부분이 미국의 역할입니다. 덩샤오핑이 카터에게 베트남 침공 계획을 처음 알렸을 때는 카터가 반대했지만 덩샤오핑이 주장을 굽히지 않자 미국 정부에서 정보 공유를 하는 등 제한적으로 협조를 했다고 합니다. 특히 미국을 통해서 중소국경에 배치된 소련군의 준비태세가 취약하다는 점을 확인한게 중공 수뇌부가 베트남 침공을 확실히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9년 1월 6일 일요일

꽌시(關係)


한국전쟁 당시 국군 제2사단 제17연대에서 학도병으로 복무한 중문학자 김학주 교수의 회고록을 읽다보니 흥미로운 일화가 몇개 보입니다. 그 중에서 특히 재미있었던게 황포군관학교 동기를 전쟁 포로로 만난 국군 장교의 이야기 입니다. 이런 우연이 현실에서 일어나는건 꽤 재미있지요. 회고록의 해당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우리를 특공대라고 호칭을 바꾼 목적을 알고 보니 우리를 일선으로부터 후방으로 보내어 후방에 낙오되어 있는 중공군들을 잡아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며칠 동안 국군이 너무 빨리 반격을 하며 진군하는 바람에 우리 후방 산속에 중공군 낙오병들이 무척 많이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역병은 후방으로 빼어 보낼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를 후방으로 보내어 그 낙오병들을 잡아오게 하겠다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그날부터 후방으로 가서 무척 많은 중공군 낙오병을 잡아왔다. 우리 특공대는 후방으로 나가면서 서너 명씩 조를 짜 가지고 패잔병들이 숨어있다고 알려준 지역으로 가서 포로를 잡아오는 작전에 임하였다. 후방으로 나간 우리 친구들이 첫 날 하루에 중공군을 모두 합쳐 60여명이나 잡아왔다. 중공군 낙오병들은 자신들이 후방에 낙오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우리 대원들을 보기만 하면 모두 대항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스스로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숨어있던 곳으로 부터 걸어 나왔다고 하였다. 그들을 잡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워오는 것이라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라 하였다. 
(중략) 
잡아온 많은 포로들을 한 곳에 모아놓자 그들은 불안한 듯 웅성거렸다. 그때 우리의 지휘관인 문창덕 중위가 그들 앞에 나서서 유창한 중국말로 일장 연설을 하자 포로들은 모두 안심한 듯 조용해졌다. 문 중위는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으로 해방 전에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자기 형과 함께 형제가 중국으로 도망쳐 우리 임시정부에 의탁하게 되었다 한다. 마침 우리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께서 항일의 중추가 될 광복군을 제대로 조직하고자 하여 광복군의 지휘관인 장교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중국국민당 정부에 청탁하여 장제스 총통이 창설한 황포군관학교에 20여명의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학시켰다고 한다. 그때 문 중위는 자기 형과 함께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고,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에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국군에 복무하게 된 것이라 한다.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중공군 포로들을 무마하는 문 중위의 모습이 무척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이로부터 우리 대원들은 매일 포로 잡아오기에 동원되었다. 6월 3일에는 나도 포로 잡기에 나가서 포로들을 잡아왔다. (중략) 오후 적당한 시기가 되어 다른 친구들과 함께 각자 잡은 포로들을 데리고 부대로 돌아왔다. 도착하여 내가 문 중위에게 장교 같은 포로를 한 명 잡아왔다고 보고하자 문 중위는 직접 나서서 그 중공군 장교를 쳐다보더니 "너 아무개 아니냐?"고 하면서 서로 알아보고 반기는 것 이었다. 그 중공군 장교는 문 중위와 중국의 황포군관학교 동기생이라는 것이었다. 문 중위는 즉시 내가 갖고 온 그의 권총은 자신이 간수하면서 나보고 그 중국 장교를 개별적으로 일정 기간 잘 데리고 있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문 중위는 가능하면 그를 데리고 있다가 포로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기회가 생기면 후방으로 빼주고 싶으니 기다리면서 기회를 엿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부터 문 중위의 부탁을 따라 그 중국 장교를 데리고 부대원들과 약간 떨어진 조용한 곳을 골라 작은 개인천막을 쳐놓고 둘이 지내면서 개별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낮에는 적당한 곳으로 나와 몸을 숨기고 중공군 장교와 함께 매일 전방에 벌어지고 있는 전투 구겨잉나 하며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참으로 운이 좋았다. 일선에 나가서도 직접 적을 상대로 싸우지는 않고 나처럼 전쟁 구경을 제대로 가까이에서 한 사람은 없으리라고 여겨진다. 다만 중국 친구가 지독히 몸 냄새를 피우면서도 세수조차 잘 하려 들지 않고 계속 음식이 제대로 그에게 맞지 않는 듯 배탈이 나서 설사를 하여 함께 지내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골짜기 맑은 시냇물로 데리고 가서 몸을 좀 씻도록 해 보았지만 몸을 제대로 씻으려 들지 않았고 또 씻을 줄도 모르는 사람만 같았다. 그와 지내면서 다만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도 함께 살아가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중략) 
문 중위는 여러날을 기다려 보아도 결국 달리 어찌하는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한국군 보다는 미군이 포로를 보다 잘 대우한다고 하면서 그를 바로 옆에 있는 미군들에게 넘겨주겠다고 하였다. 먼저 문 중위는 나를 미군들에게 보내어 그가 갖고 있던 리볼버 권총을 미군들에게 기념품으로 팔아보라고 하였다. 나는 그 권총을 들고 미군들에게로 가서 이것은 중공군 장교가 갖고 있던 무기이니 전쟁 참여 기념품으로 사라고 권하였다. 여러 미군들이 서로 자기가 사겠다고 하는 바람에 결국 나는 미군들에게 경매 방식으로 흥정하여 적지 않은 미국돈을 받고 팔았다. 100불을 넘게 받아 문 중위에게 전달해 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뒤에 다시 미군들에게로 나를 보내어 먼저 팔아넘긴 권총의 주인인 중공군 장교를 포로로 맡아달라고 교섭을 하도록 하였다. 나는 다시 미군들에게로 가서 중공군 장교 포로를 넘겨주는 일을 교섭한 뒤에 그들과 합의한 대로 중공군 장교를 데리고 가서 미군에게 넘겨주었다. 역시 미군들로 부터 포로를 넘겨주는 대가로 미불로 받았는데 얼마나 받았었는지 정확한 액수는 기억에 없다. 다만 이때도 적지 않은 액수의 미불을 받아 문 중위에게 전해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무렵의 6월의 2일, 3일을 전후하여 우리 부대가 머물렀던 곳은 자운리라는 동리이다. 
김학주, 『나와 625사변, 그리고 반년간의 군번없는 종군』, 明文堂 2017, 88~95쪽.

2017년 7월 13일 목요일

1952년 9월 4일 스탈린-펑더화이-김일성 회담



이 글은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14-15 합본호 378~381쪽에 실린 1952년 9월 4일 스탈린, 펑더화이, 김일성 회담 녹취록의 영역본입니다. 한국전쟁 중반기 공산군 수뇌부의 시각과 몇가지 갈등 요인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자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전황이 유리하다고 주장하는 중국-북한측과 이를 의심하는 소련쪽의 신경전이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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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동지와 김일성 동지, 펑더화이 동지의 회담 녹취록


1952년 9월 4일


기타 참석자
우리측: 몰로토프 동지, 말렌코프 동지, 미코얀 동지, 베리야 동지, 불가닌 동지, 카가노비치 동지
중국과 북조선측: 저우언라이 동지, 천윈陳雲 동지, 리푸춘李富春 동지, 장웬티안張聞天 동지, 박헌영 동지.
통역: 문, 스저師哲, 페도렌코




스탈린: 조선 인민들의 사기는 어떻습니까?


김일성: 높습니다.


스탈린: 박헌영 동지도 같은 생각입니까?


박헌영: 그렇습니다. 높습니다.


스탈린: 군대는 어떻습니까?


김일성: 군대도 사기가 높습니다.


스탈린: 펑더화이 동지는 어찌 생각하시오?


펑더화이: 좋습니다.


김일성: 전반적인 정세는 유리합니다. 적의 폭격을 제외하면 그렇습니다.


스탈린: 전투기사단은 있습니까?


김일성: 1개 사단이 있습니다.


스탈린: 중국은 공군을 투입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한다면 의용군이 아니라 중국 정부가 직접 개입한 것이라고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용군이 자체적인 공군력을 갖출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행동이 민주진영에 유리하겠습니까? 내 개인적으로는 중국 정부가 (누락) 선언하는 것은 불리한 행동입니다. 전쟁은 군대가 있어야 치를 수 있습니다. 김일성 동지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항공부대가 있어야 합니다.


김일성: 장비만 있다면 항공사단을 1~2개 편성할 수 있습니다.


스탈린: 조선 인민이 전쟁으로 고통을 받고있고 영웅적인 인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인민이 고통을 받고 있으니 우리 소련군 1~2개 사단을 해체해서 장비를 양도할 생각이 있습니다.


김일성: 감사드립니다.


스탈린: 전투기 사단이 1개 있다고 했지요?


김일성: 그렇습니다.


스탈린: 다른 부대의 조종사들을 전환시키는 것도 가능합니다.


김일성: 아직 훈련중인 항공사단이 하나 더 있습니다.


스탈린: 항공사단을 1~3개 정도 편성할 수 있는 장비를 제공할 수 있소.


김일성: 그에 필요한 인력을 충원할 수 있을 겁니다.


스탈린: 좋습니다. 3개 항공사단을 편성할 수 있는 장비를 주겠소. 또 필요로 하는건 없습니까?


김일성: 적의 공습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어서 대공포 부대를 조직해야 겠습니다. 얼마전 5개 대공포 연대를 편성할 수 있는 장비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10개 연대분의 장비가 필요합니다. 스탈린 동지께는 5개 연대 분 장비를 부탁드렸고 마오쩌둥 동지께도 5개 연대분의 장비를 부탁드렸습니다. 마오쩌둥은 현재 중국 정부는 그럴 능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스탈린 동지께서 대공포 연대 10개분의 장비를 원조해주셨으면 합니다.


스탈린: 지상군은 어느정도요?


김일성: 18개 사단입니다.


스탈린: 포병은 어느정도요?


김일성: 포병은 몇개 연대밖에 없고 장비도 부족합니다.


스탈린: 우리 소련군은 1개 사단에 포병연대가 2개입니다. 중국군도 마찬가지이고. 조선인민군의 편제는 어떻소?


김일성: 우리 군대의 편제도 동일합니다.


스탈린: 필요한게 있으면 목록을 주시오.


김일성: 목록을 작성해 놓았습니다.


스탈린: 박격포는 있소?


김일성: 그렇습니다. 122mm 입니다.(영어 번역문에 122mm로 되어 있습니다.)


스탈린: 조선에 대공포연대 10개분의 장비를 원조하겠소.


김일성: 스탈린 동지. 감사합니다. 우리 지상군은 122mm 곡사포를 비롯해 여러 장비가 부족합니다. 추가로 원조를 부탁드립니다.


스탈린: 또 부족한게 뭐가 있소?


김일성: 공병 부대와 통신 부대의 장비가 부족합니다. 너무 부족합니다. 항공기도 부족합니다. 우리는 장비와 물자가 부족합니다. 물자가 부족해서 한달 내에 122mm 포탄 생산을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스탈린: 필요한 물자 목록을 주시오.


김일성: 목록을 작성해 놓았습니다.


스탈린: 식량 상황은 어떻습니까? 빵이랑 쌀 말이요.


김일성: 올해는 작황이 좋습니다. 하지만 내년은 어떨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마오쩌둥 동지가 의류와 식량 원조를 약속하셨습니다.


스탈린: 조선 인민들은 밀가루도 먹습니까? 아니면 그냥 밥만 먹습니까?


김일성: 스탈린 동지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있을때 5만톤의 식량을 원조해 주셨습니다. 우리 인민들도 밀가루를 좋아합니다. 우리 인민들은 직면한 문제를 극복하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데 급급합니다. 하지만 운송 수단이 턱없이 부족하고 우리 힘으로는 극복할 능력이 없습니다. 자동차와 트랙터, 화학 비료를 원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스탈린: 필요한 목록을 주시오. 중국과 조선 동지들이 미국과 휴전협상을 진행하는데 의견 충돌이 있었다는데 사실입니까?


김일성: 제가 알기론 심각한 의견 충돌은 없습니다. 중국 동지들이 제안한 협상안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민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고려해서 최대한 빨리 휴전협상을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중국 동지들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스탈린: 그 문제는 중국 대표단과 논의했습니다. 중국 대표단은 미국이 제안한 포로송환 조건이 동의하지 않으며 우리의 조건을 관철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만약 미국이 중국군과 조선인민군 포로의 20%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그들이 풀려날 때 까지 미국 포로의 10%를 억류하자고 합니다. 아니면 같은 비율의 미군 포로를 억류하자고도 합니다. 그렇게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포로문제를 타결하고 휴전협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습니다. 석방되지 않은 포로들은 휴전이 성립되고 적대행위가 중단된 뒤에도 협상을 할 수 있을겁니다. 동지는 이 문제를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소만 포로문제야 말로 우리의 입장이 진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겁니다. 미국은 중국군과 조선인민군 포로의 20%는 송환을 거부한다고 주장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믿을 수 없다고 하면 됩니다. 이렇게 20%의 포로를 문제삼는 동안 60%는 송환이 될 겁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중국동지들은 지금 상황에서는 새로운 제안을 할 필요가 없으며 미국이 새로운 제안을 할 때 까지 기다려서 우리쪽에서 수정안을 내놓자고 합니다. 이에 관해 알고 있습니까?


김일성: 마오쩌둥 동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스탈린: 마오 동지가 뭐라고 합디까?


김일성: 마오쩌둥 동지께서 몇가지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첫 번째는 포로를 모두 석방하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휴전협상을 먼저 타결하고 포로 문제를 상의하는 것 입니다. 세번째는 아군 포로들이 억류되어 있는 만큼 그에 해당하는 수의 적 포로를 억류하는 것 입니다. 포로문제에 있어서 마오쩌둥 동지의 시각은 스탈린 동지의 시각과 같습니다. 이 세가지 대안은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포로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기 위해 스탈린 동지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스탈린: 나는 당분간 포로를 모두 송환하라고 주장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게 통하지 않으면 송환을 거부하는 20%의 포로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방안을 바꾸자는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 태도를 바꿔보자는 겁니다. 처음에는 모든 포로를 송환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하고 다음에는 적의 포로 20%를 석방하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다른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새로운 제안을 하거나 미국이 새로운 제안을 할 때 까지 시간을 버는게 괜찮겠는가? 포로 교환을 완료할 것을 주장하고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를 관망해야 합니다.
두번째 안은 김일성 동지와 동지의 투쟁에 유리합니다. 적이 아군 포로 20%를 석방하지 않는다면 적군 포로 20%를 석방하지 않으면 됩니다. 두번째 안을 택한다면 미국의 국론이 분열될 겁니다. 포로를 석방하고 전쟁을 그만두자는 움직임이 일어날 겁니다. 이렇게 되면 당신이 유리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미국인들은 전투에서 어떻게 싸웁니까? 잘 싸웁디까?


펑더화이: 미군은 사기가 낮은게 약점입니다.


스탈린: 미국내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하니 그럴겁니다. 미군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고 싶군요. 정신력입니까? 전술입니까? 아니면 물량입니까?


펑더화이: 1952년 1월 부터 2월 사이에 미군은 200번 이상의 공세를 취했지만 고작 1%만 승리했습니다. 반면 우리는 겨우 30번의 공세를 취해서 80~90%의 승률을 보였습니다.


스탈린: 구체적으로 어떻게 승리한겁니까?


펑더화이: 아군은 적의 1개 소대나 1개 중대 정도를 섬멸하는걸 목표로 했습니다.


스탈린: 김일성 동지도 동의하시오?


김일성: 물론입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스탈린: 미군의 방어진지는 강력합니까?


펑더화이: 최근 적은 방어진지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마찬가지로 방어진지를 강화했습니다. 미군의 야전 축성은 우리보다 취약하지만 건설자재는 훨씬 좋습니다.


스탈린: 적의 방어선은 어느 정도 요새화 되어 있습니까?


펑더화이: 방어선이 3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스탈린: 아군은 어떻소?


펑더화이: 제2선까지만 요새화 되어 있습니다. 제3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스탈린: 지뢰지대를 구축했습니까?


펑더화이: 지뢰와 철조망이 부족합니다. 적의 물자를 노획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탈린: 우리는 대조국전쟁 당시 지뢰를 대량으로 사용했습니다. 아군은 지뢰지대를 표시한 특수한 지도를 이용했습니다. 지뢰를 사용하지 않고 전쟁을 할 수는 없습니다.


펑더화이: 아군 진지와 적군 진지는 매우 가깝게 붙어있습니다. 보통 300~500미터 정도입니다.


스탈린: 지나치게 전방으로 진출했군요.


펑더화이: 지난 4월 이래 아군이 꾸준히 진격했기 때문입니다.


스탈린: 각 방어선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펑더화이: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가깝게 붙어있습니다. 일부 지역은 각 방어선간의 거리가 좁습니다. 하지만 어떤 지역은 방어선간의 거리가 20km 정도 되기도 합니다. 지금은 강화 콘크리트로 방어진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스탈린: 참호선도 구축하고 있습니까?


펑더화이: 그렇습니다.


말렌코프: 그럼 아군 포로가 적군 보다 더 많은 이유는 뭡니까?


펑더화이: 전반적으로 보면 우리가 더 많은 포로를 잡았습니다.


스탈린: 중국군과 조선인민군 포로가 몇명입니까?


펑더화이: 우리쪽 추산으로는 중국군 포로가 12,000명 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군 포로를 20,000명 잡았다고 주장합니다. 조선인민군 포로가 많은 이유는 1951년 10월 이전에 많은 수가 생포됐기 때문입니다. 미군은 공세 중 조선인민군의 예비 여단에서 많은 포로를 잡았습니다.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한 뒤 총 12,000명의 적을 생포했습니다. 이중 8,000명이 미군입니다. 이승만 군대로 부터 잡은 포로는 40,000명 입니다. 하지만 생활 환경이 열악해서 외국인 포로 중 많은 수가 사망했습니다.


김일성: 우리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포로 12,000명 중 4,416명이 미국 이외의 국가 출신입니다. 미군 포로 중 300명이 조종사이고 그 중 30명이 장교입니다. 남조선 군대의 포로 중 27,000명은 조선인민군에 편입시켰습니다. 인민군에 편입시킨 포로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말렌코프: 중국의용군을 교대로 순환 투입하고 있습니까?


펑더화이: 그렇습니다.


말렌코프: 그렇다면 중국의용군 사단들은 훈련할 시간이 있다는 뜻이군요?


펑더화이: 그렇습니다. 1953년 8월까지 현재 조선에 있는 의용군 사단을 모두 교대할 예정입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모든 지휘관들을 교대로 조선 전선에 참전할 수 있도록 할 것 입니다.


스탈린: 카츄사 로켓포도 가지고 있습니까?


펑더화이: 전선에 1개 사단을 배치했고 다른 사단은 후방에 배치했습니다.


스탈린: 후방에 빨치산도 활동하고 있습니까?


김일성: 그렇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지만 활동하고 있습니다.


스탈린: 포로 중에 일본군도 있습니까?


펑더화이: 일본계 미국인 뿐입니다.


말렌코프: 미군이 북조선을 폭격할때 격추한 비행기가 많지 않은건 어떻게 설명할겁니까?


펑더화이: 우리가 평가하기로는 격추한 적기가 많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미국 비행기 5,800대를 격추했습니다.


스탈린: 중국 조종사들을 어떻게 제트 전투기에 적응시킬 겁니까?


펑더화이: 중국 조종사들은 소련 조종사들이 지휘해야만 전투에 참가합니다.


스탈린: 왜  그럽니까? 뭘 두려워 합니까?


펑더화이: 우리 조종사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편대를 짜서 비행하지를 못합니다.


스탈린: 조종 훈련을 더 시켜야 겠군요. 일단 비행을 해야 훈련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소련 조종사들도 출격을 기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행을 시작하면서 점차 조종하는 법을 배워나갔습니다. 지금 우리는 조종사를 평가할때 비행시간을 따집니다. 조종시간이 많으면 기장을 줍니다. 비행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실전을 해야 진짜 경험을 쌓을 수 있습니다. 중국 조종사들도 출격하는걸 겁내면 안됩니다. 대신 조종하는 것을 집에 있는 것 처럼 편하게 여겨야 합니다. 야간 비행도 교육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공군을 육성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포상과 훈장 체계를 갖춰야 합니다.
중국군은 훈장이나 기장이 있습니까?


펑더화이: 아직 없습니다. 내년 쯤 도입하려고 생각합니다.


스탈린: 그러면 안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중국군은 무정부주의자들 처럼 훈장과 기장을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장성 계급도 없다지요? 훈장과 기장, 계급이 공산주의의 원칙에 반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계급 체계, 휘장, 포상 체계는 군대에 매우 중요합니다. 이게 없으면 진짜 군대가 아닙니다. 소련의 빨치산이 그런 식으로 운영됐지요. 우리 빨치산은 내전에 승리하고 미제국주의 군대를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군 계급도 없고 휘장이나 훈장도 없었습니다. 이건 잘못된 관행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장교단을 세심하게 육성해야 합니다. 장교들에게 봉급을 주는 등의 관리를 해야 합니다. 핵심은 장교단을 유지하고 관리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환경을 조성해 군사전문가로 키우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