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31일 금요일

To Defeat the Few: The Luftwaffe’s Campaign to Destroy RAF Fighter Command, August-September 1940

Osprey 출판사에서 낸 Douglas C. Dildy Paul F. Crickmore To Defeat the Few: The Luftwaffe’s Campaign to Destroy RAF Fighter Command, August-September 1940를 읽었습니다. 영국본토방공전을 독일 공군을 중심으로 분석한 저작입니다. 필자들은 히틀러와 독일공군 수뇌부의 전략적 목표와 작전 단위의 결단을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작전 단위 이상의 전개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전술 차원의 공중전 교환비나 격추 전과 검증은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고급 지휘관들의 결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경우에 한해서 독일공군과 영국공군이 자군의 전과와 손실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언급합니다.

 

이 책은 총 14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1장부터 3장을 영국본토방공전의 전사인 서부전역 항공전과 됭케르크 항공전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4장부터 6장까지는 서부전역 이후 독일 수뇌부의 전쟁지도 방침, 독일공군과 영국공군의 조직과 편성, 교리, 전술을 비교분석 하는 내용입니다. 7장부터 13장까지는 영국본토방공전을 단계별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습니다. 7장은 영국해협의 해운 봉쇄를 위한 해협항공전(Kanalkampf), 8장은 제뢰베 작전의 입안, 9장부터 12장까지는 812일부터 917일까지의 영국본토방공전을 단계별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13장은 9월 공세에서 패배한 독일 공군이 10월까지 진행한 공세작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14장은 결론입니다.

 

저자들은 독일공군의 입장에서 서술을 하기 위해 영국본토방공전의 각 단계를 독일측의 기준에 맞춰 분류하고 있습니다. 각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우전단계, 프랑스전역 종결 직후부터 194087일까지: 영국해협 해운 봉쇄를 위한 해협항공전이 진행된 시기.

11단계, 88~823: 바다사자작전 준비 차원에서 영국 남부의 비행장과 해군 기지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이 진행된 시기.

12단계, 824~96: 영국 남부의 제공권 장악을 위해 영국공군 제11비행단(No.11 Group)의 기지에 공격을 집중한 시기.

21단계 , 97~919: 런던과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공격을 집중한 시기

22단계, 920~1113: 런던을 중심으로 전투폭격기(Jabo)의 주간 공격과 폭격기부대의 야간 폭격을 병행한 시기.

23단계, 1114~1941521: 영국 본토에 대한 대규모 폭격의 최종 단계. 영국에서 통칭 야간 전격전(Night Blitz)로 칭하는 시기.

 

작전사를 다루는 연구들이 모두 그렇듯 이 책의 핵심 주제는 독일 공군이 왜 영국본토방공전에서 패했는가?”입니다.

 

저자들은 독일 공군의 전술적 우위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문제는 작전~전략단위의 능력입니다. 결국 영국본토방공전이라는 전략 단위의 항공전에서 독일공군이 패배한 원인은 작전~전략 단위의 역량 부족에서 찾아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이 책에서는 먼저 독일공군본부의 조직적 문제를 지적합니다. 독일공군은 신생 병종이었고 이 때문에 공군본부를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을 만큼의 고급장교를 육성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독일공군의 고급장교들은 대부분 육군 출신으로 항공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인물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구조적 문제는 1940년 시점에서 독일공군본부에는 공군이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전략단위의 작전을 기획할 조직이 없었다는 점 입니다. 저자들은 19406월 시점에서 독일공군본부의 참모조직은 독일육군본부나 독일해군본부의 전문적인 참모조직과 달리 공군사령관 헤르만 괴링의 개인 참모조직에 불과한 수준이었다고 비판합니다.

오토 호프만 폰 발다우(Otto Hoffmann von Waldau) 소장이 이끄는 독일공군본부의 작전참모국은 작전과, 훈련과, 정보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공군본부의 작전참모국은 부대의 이동과 작전 목표 선정 및 우선순위 부여, 목표 목록 및 정보 하달 등의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실제 작전 수립은 항공군(Luftflotten) 사령부와 항공군단 사령부 단위에서 담당했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작전-전술 단위에 불과했으며, 이때까지 지상군의 작전과 연계된 작전만을 수행해 왔습니다. 공군본부의 작전참모국이 각 항공군사령부에 작전 목표 목록을 하달하면 항공군사령부는 지원하는 육군의 집단군 사령부와 협의해 목록 중에서 목표를 선정하고 실제 작전을 입안하는 방식이었습니다. 19406월 시점에서 독일공군본부는 단독으로 영국공군을 제압하는 전략 단위의 항공 작전을 수립해야 했습니다. 독일공군본부가 여지껏 단 한번도 수행해 보지 못한 과제였습니다.

 

다음으로는 정보 문제를 지적합니다. 사실 정보 수집 및 분석능력 부족은 독일 공군은 물론 육군본부의 참모조직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영국본토방공전 기간 중 독일공군본부 작전참모국의 정보과장은 요세프 슈미트(Josef Schmid) 중령이었습니다. 정보과의 정보 수집능력은 상당히 빈약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전쟁 이전에는 각국 주재 공군무관부와 국방군 방첩국(Abwehr)의 정보수집에 의존했습니다. 그리고 친위대 보안국(SD, Sicherheitsdienst)의 해외자료 수집에도 크게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친위대 보안국은 군사정보 수집을 주목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안국을 통한 군사정보 획득은 불규칙했습니다. 이런 빈약한 정보수집능력 조차 전쟁이 발발하면서 무너지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인적자산을 통한 정보수집은 마비되었고 항공정찰 및 감청이 주된 정보수집 수단이 됩니다. 정보과장 슈미트 중령의 분석 능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지만 수집되는 첩보가 감소하니 분석력을 발휘할 여지도 줄어든 셈 입니다. 그리고 슈미트의 분석력 또한 점차 감퇴해 결국에는 객관적인 분석력을 상실하고 상관들이 원하는 정보를 가공해서 바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평가합니다.

 

저자들은 슈미트가 8월의 공세 결과를 잘못 평가한 점을 예시로 듭니다. 1940819일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공군 수뇌부 회의에서 슈미트가 보고한 정보분석은 완전히 잘못된 분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슈미트는 1940 71일부터 영국공군이 561대의 전투기를 전투 손실로 잃었으며 추가로 196대의 전투기가 전투외의 원인으로 파괴되었다고 추산했습니다. 반면 같은 기간 보충된 전투기(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270~300대라고 과소평가했습니다. 그는 영국공군이 본토 남부지역에 투입할 수 있는 주간전투기가 330대 가량일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슈미트는 이후에도 괴링에게 계속해서 부정확하고 과장된 내용을 전달했습니다. 그는 824일부터 92일까지 제2항공군의 전투기부대가 공중전에서 영국공군의 전투기 572대를 격추했다고 보고했고 괴링은 이것을 토대로 영국 공군의 잔여 전력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비행장을 폭격하는 것 보다 공중전으로 끌어내는게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 8월 내내 영국공군의 전투기 부대는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슈미트는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독일공군의 전투기부대가 압도적인교환비로 공중전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91일 기준으로 영국공군의 전투기 전력은 총 600대이고 이중 420대가 영국 동남부에 배치되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괴링과 제2항공군 사령관 케셀링(Albert Kesselring)은 비행장을 계속 폭격하면 영국 전투기부대가 후방의 기지로 철수해 Bf109의 작전반경 안으로 끌어낼 수 없다고 생각해서 런던 폭격을 미끼로 영국공군의 남은 전투기를 끌어내 섬멸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독일공군의 고급 지휘관 중에서 제3항공군 사령관 후고 슈페를레(Hugo Sperrle)는 슈미트의 정보평가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국공군의 가용 전투기 전력이 1,000대 이내일 것이라고 슈미트 보다는 정확한 평가를 했습니다. 또한 독일공군 전투기부대의 전과 보고가 매우 과장되어 있다고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슈페를레는 영국공군의 전투기 전력이 상당한 규모이기 때문에 제뢰베 작전을 수행하려면 영국 남부의 비행장을 계속 타격해서 영국 공군의 전투기 부대를 북쪽의 기지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괴링은 슈미트의 정보평가를 신뢰해서 런던을 타격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괴링은 915일 런던 상공의 공중전에서 참패한 뒤에도 여전히 영국 전투기부대를 단기간 내에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일 공군은 927일의 런던 공습에서 참패하고서야 영국 전투기부대를 단기간에 제압하는게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독일공군은 이미 8월의 전투에서 영국 전투기부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고전을 하고 있었음에도 자신들이 공중전에서 압승하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평가를 맹신했습니다. 독일 공군 전투기 부대가 영국본토방공전 기간 중 1.77:1로 우세한 교환비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괴링이나 케셀링이 생각한 압도적 승리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영국공군 전투기 부대는 지속적으로 증강되고 있었고 전투가 소모전으로 접어들자 독일공군 전투기 부대 보다 훨씬 잘 견딜 수 있었습니다. 저자들은 괴링이 잘못된 정보분석을 맹신해 비행장에 대한 타격을 중단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라고 평가합니다.

 

각 단계의 작전에 대한 저자들의 평가도 꽤 재미있습니다. 됭케르크 항공전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저자들은 됭케르크 항공전 당시 영국공군 전투기부대의 역할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비판적입니다. 숫적 열세 때문에 독일 공군이 됭케르크에서 철수하는 연합군 선단을 공격할 때 충분한 공중 엄호를 제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다이나모 작전 당시 독일 공군의 피해는 폭격기 51대와 전투기 36대인 반면 철수작전을 엄호한 제11비행단은 작전에 투입한 전투기 106대를 잃었고 이중84대를 독일 전투기와 폭격기의 방어사격에 상실한 것으로 집계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독일공군이 다이나모 작전을 저지하는데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공격을 됭케르크에 집중하지 못한데 있다고 봅니다. 독일공군은 다이나모 작전이 진행된 9일 중 겨우 3일만 됭케르크에 공격을 집중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겁니다. 저자들은 영국공군이 수송함대를 엄호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다이나모 작전 기간 중 됭케르크 공격에 집중했다면 독일공군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영국 해협 봉쇄를 위한 항공작전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양호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영국의 해운을 단기간에 마비시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수준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독일공군은 이 기간에 급강하 폭격기와 중형폭격기의 폭격만으로 34척의 민간선박과 13척의 군함을 격침시켰으나 이것은 영국의 해운력과 해군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이 책은 꽤 장점이 많습니다. 독일공군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영국공군의 조직과 전술에 대한 설명도 풍부합니다. 오스프리 출판사의 저작 답게 독일공군과 영국공군의 전술을 그림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사진을 비롯한 도판도 풍부하고요.

저자들은 현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국본토방공전을 현대 나토의 군사용어와 개념에 맞춰서 설명합니다. 예를들어 영국공군의 위성 비행장(satellite airfields)와 독일공군의 야전비행장(Feldflugplätze)을 나토의 개념인 전방작전기지(Forward Operating Location)로 분류하고 다우딩 시스템을 현대의 통합방공체계(Integrated Air Defence System)으로 분류하는 식 입니다.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잘 정리해서 재미있게 잘 쓴 책입니다. 다만 이미 영국본토방공전에 대한 훌륭한 책이 많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유명한 오스프리 출판사의 책이라는 점 때문에 완전히 묻히지는 않겠지만요. 



2020년 7월 25일 토요일

찰스 딕의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에 인용된 통계 문제


1990년대 이후 새로운 사료가 꾸준히 공개되고 기존에 공개된 사료에 대한 분석이 심화되면서 제2차세계대전 시기 러시아 전선에 대한 연구는 크게 발전했습니다. 냉전시대에 독일이나 소련 어느 한쪽에 편향된 연구가 이루어졌던 것과 비교했을 때 큰 발전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료 활용에 있어 문제를 보이는 저작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2차문헌을 비판 없이 인용하는 경우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요. 1944년 러시아전선 하계전역을 분석한 찰스 딕(Charles J. Dick)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딕은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력비가 병력에 있어서 2.5:1, 박격포와 다련장포를 포병전력은 2.9:1, 기갑전력은 4.3:1, 항공전력은 6.3:1로 소련군이 우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 이 통계는 소련의 제2차대전 공간사에서 제시한 것 입니다. 소련측의 주장은 꽤 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딕이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의 바그라티온 작전 부분을 쓰면서 인용한 자료 중에는 게르트 니폴트의 Mittlere Ostfront Juni’44의 영어번역본인 Battle for White Russia가 있습니다. 니폴트는 이 연구에서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하고 있습니다.2) 니폴트가 소련 공간사의 잘못된 통계를 인용한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연구가 나왔을 당시인 1985년에는 중부집단군의 전체 전력을 집계할 만큼 사료 분석이 되어 있지 않아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니폴트가 이 연구에서 제시하고 있는 독일군의 전력 통계는 당시 사료의 한계 때문에 불완전 합니다. 4군과 제9군의 전력 통계를 제시하고 있는데 제4군은 병력 및 장비 통계를 제시하고 있지만 제9군은 병력 통계만 제시하고 있습니다.3)

물론 소련 공간사의 통계는 틀린 것 입니다. 역시 딕이 인용하고 있는 소련군 총참모부의 작전연구 영어번역본인 Belorussia 1944: The Soviet General Staff Study는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의 총 병력이 1,036,760, 야포 7,760, 대공포 2,320, 전차 800, 돌격포 530, 항공기 1,000~1,300대라고 추산하고 있습니다.4) 소련 자료에 실려있는 양군의 전력비는 바로 이 통계를 기반으로 한 것 입니다. 소련군 4개 전선군의 총병력 250만에 독일 중부집단군 1백만명으로 2.5:1의 병력비가 나온다는 계산입니다. 그러나 1944년 6월 1일 기준으로 독일 중부집단군 총병력이 578,225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 병력이 1백만명을 넘었다는 소련측의 추산은 크게 잘못되었음 알 수 있습니다.5) 소련측 통계는 양군의 기갑전력 비율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과장하고 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의 기갑전력에 대해서는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중부집단군 소속 사단급 부대들의 기갑 및 대전차전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독일측 사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보다 정확한 전력비는 칼-하인츠 프리저의 연구에 실려 있습니다. 프리저가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력비는 병력에서 3.7:1, 기갑전력 8.2:1, 포병전력 9.4:1, 항공전력 10.5:1로 소련군이 우세를 보이고 있습니다.6)

딕이 훨씬 정확한 프리저의 통계를 인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확한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해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한 이유는 의문입니다. 그는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군의 손실 통계는 프리저의 연구에서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 이런 식으로 양군의 전력비를 부정확하게 평가하면 제대로 된 작전 연구를 할 수 없습니다.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하는 서술은 자연히 소련군의 전투 효율성을 과장하는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2018년에 썼던 러시아 연구자의 '최신 연구' 얼마나 신뢰할 있는가?: 이고르 네볼신의 사례”에서 이야기 하기도 했습니다만, 최근에 나오는 연구 중에서도 냉전 시기 소련에서 제기한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는 사례가 간혹 발견됩니다. 군사사, 특히 작전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교차검증과 문헌 비판이 필수적이라 하겠습니다.



1)     Charles J. Dick,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 Decisive and Indecisive Military Operation, Vol. 2 (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16) p.99.
2)     Gerd Niepold, Mittlere Ostfront Juni’ 44, (Hamburg: Mittler und Sohn, 1985), p.55. 니폴트의 연구에서 소련 자료를 인용해 정리한 전력비는 병력 2.5:1, 포병 2.9:1, 기갑 4.3:1, 항공기 4.5:1 소련군이 우세했다고 되어 있음.
3)     Niepold., Ibid., pp.35~36.
4)     David M. Glantz and Harold S. Orenstein, Belorussia 1944: The Soviet General Staff Study (London: Frank Cass, 2001), p.6.
5)    Walter S. Dunn, Jr., Soviet Blitzkrieg: The Battle for White Russia, 1944 (Boulder: Lynne Riuenner Publishers, 2000), p.61.
6)     Karl-Heinz Frieser,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Sommer 1944“,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 Weltkrieg 8L: Die Ostfront 1943/44, Der Krieg im Osten und an den Nebenfronten (München: Deutsche Verlags-Anstalt, 2011), p.534. 전투병력 1,254,399:336,573, 전차 2,715:118, 자주포 1,355:277, 야포 24,383:2,589, 항공기 6,334:602. 프리저는 독일 제3기갑군, 제9군, 제4군의 전투병력과 같은 구역에 투입된 소련군 전투병력을 기준으로 양측 전력비를 계산하였음.
7)     Dick, Ibid., p.117.

2020년 7월 3일 금요일

새롭게 도색을 한 전쟁기념관 소장 중장비들

업무차 전쟁기념관에 들렀다가 최근에 도색을 새로 한 중장비들을 구경했습니다. 실내 전시실의 전차 및 야포류를 구경했는데 도색을 아주 깔끔하게 잘 해 놓았더군요. 차량의 부대 표식도 전쟁에 참전했던 부대에 맞춰 놓은게 인상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