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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31일 금요일

To Defeat the Few: The Luftwaffe’s Campaign to Destroy RAF Fighter Command, August-September 1940

Osprey 출판사에서 낸 Douglas C. Dildy Paul F. Crickmore To Defeat the Few: The Luftwaffe’s Campaign to Destroy RAF Fighter Command, August-September 1940를 읽었습니다. 영국본토방공전을 독일 공군을 중심으로 분석한 저작입니다. 필자들은 히틀러와 독일공군 수뇌부의 전략적 목표와 작전 단위의 결단을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작전 단위 이상의 전개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전술 차원의 공중전 교환비나 격추 전과 검증은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고급 지휘관들의 결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경우에 한해서 독일공군과 영국공군이 자군의 전과와 손실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언급합니다.

 

이 책은 총 14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1장부터 3장을 영국본토방공전의 전사인 서부전역 항공전과 됭케르크 항공전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4장부터 6장까지는 서부전역 이후 독일 수뇌부의 전쟁지도 방침, 독일공군과 영국공군의 조직과 편성, 교리, 전술을 비교분석 하는 내용입니다. 7장부터 13장까지는 영국본토방공전을 단계별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습니다. 7장은 영국해협의 해운 봉쇄를 위한 해협항공전(Kanalkampf), 8장은 제뢰베 작전의 입안, 9장부터 12장까지는 812일부터 917일까지의 영국본토방공전을 단계별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13장은 9월 공세에서 패배한 독일 공군이 10월까지 진행한 공세작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14장은 결론입니다.

 

저자들은 독일공군의 입장에서 서술을 하기 위해 영국본토방공전의 각 단계를 독일측의 기준에 맞춰 분류하고 있습니다. 각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우전단계, 프랑스전역 종결 직후부터 194087일까지: 영국해협 해운 봉쇄를 위한 해협항공전이 진행된 시기.

11단계, 88~823: 바다사자작전 준비 차원에서 영국 남부의 비행장과 해군 기지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이 진행된 시기.

12단계, 824~96: 영국 남부의 제공권 장악을 위해 영국공군 제11비행단(No.11 Group)의 기지에 공격을 집중한 시기.

21단계 , 97~919: 런던과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공격을 집중한 시기

22단계, 920~1113: 런던을 중심으로 전투폭격기(Jabo)의 주간 공격과 폭격기부대의 야간 폭격을 병행한 시기.

23단계, 1114~1941521: 영국 본토에 대한 대규모 폭격의 최종 단계. 영국에서 통칭 야간 전격전(Night Blitz)로 칭하는 시기.

 

작전사를 다루는 연구들이 모두 그렇듯 이 책의 핵심 주제는 독일 공군이 왜 영국본토방공전에서 패했는가?”입니다.

 

저자들은 독일 공군의 전술적 우위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문제는 작전~전략단위의 능력입니다. 결국 영국본토방공전이라는 전략 단위의 항공전에서 독일공군이 패배한 원인은 작전~전략 단위의 역량 부족에서 찾아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이 책에서는 먼저 독일공군본부의 조직적 문제를 지적합니다. 독일공군은 신생 병종이었고 이 때문에 공군본부를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을 만큼의 고급장교를 육성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독일공군의 고급장교들은 대부분 육군 출신으로 항공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인물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구조적 문제는 1940년 시점에서 독일공군본부에는 공군이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전략단위의 작전을 기획할 조직이 없었다는 점 입니다. 저자들은 19406월 시점에서 독일공군본부의 참모조직은 독일육군본부나 독일해군본부의 전문적인 참모조직과 달리 공군사령관 헤르만 괴링의 개인 참모조직에 불과한 수준이었다고 비판합니다.

오토 호프만 폰 발다우(Otto Hoffmann von Waldau) 소장이 이끄는 독일공군본부의 작전참모국은 작전과, 훈련과, 정보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공군본부의 작전참모국은 부대의 이동과 작전 목표 선정 및 우선순위 부여, 목표 목록 및 정보 하달 등의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실제 작전 수립은 항공군(Luftflotten) 사령부와 항공군단 사령부 단위에서 담당했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작전-전술 단위에 불과했으며, 이때까지 지상군의 작전과 연계된 작전만을 수행해 왔습니다. 공군본부의 작전참모국이 각 항공군사령부에 작전 목표 목록을 하달하면 항공군사령부는 지원하는 육군의 집단군 사령부와 협의해 목록 중에서 목표를 선정하고 실제 작전을 입안하는 방식이었습니다. 19406월 시점에서 독일공군본부는 단독으로 영국공군을 제압하는 전략 단위의 항공 작전을 수립해야 했습니다. 독일공군본부가 여지껏 단 한번도 수행해 보지 못한 과제였습니다.

 

다음으로는 정보 문제를 지적합니다. 사실 정보 수집 및 분석능력 부족은 독일 공군은 물론 육군본부의 참모조직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영국본토방공전 기간 중 독일공군본부 작전참모국의 정보과장은 요세프 슈미트(Josef Schmid) 중령이었습니다. 정보과의 정보 수집능력은 상당히 빈약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전쟁 이전에는 각국 주재 공군무관부와 국방군 방첩국(Abwehr)의 정보수집에 의존했습니다. 그리고 친위대 보안국(SD, Sicherheitsdienst)의 해외자료 수집에도 크게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친위대 보안국은 군사정보 수집을 주목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안국을 통한 군사정보 획득은 불규칙했습니다. 이런 빈약한 정보수집능력 조차 전쟁이 발발하면서 무너지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인적자산을 통한 정보수집은 마비되었고 항공정찰 및 감청이 주된 정보수집 수단이 됩니다. 정보과장 슈미트 중령의 분석 능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지만 수집되는 첩보가 감소하니 분석력을 발휘할 여지도 줄어든 셈 입니다. 그리고 슈미트의 분석력 또한 점차 감퇴해 결국에는 객관적인 분석력을 상실하고 상관들이 원하는 정보를 가공해서 바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평가합니다.

 

저자들은 슈미트가 8월의 공세 결과를 잘못 평가한 점을 예시로 듭니다. 1940819일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공군 수뇌부 회의에서 슈미트가 보고한 정보분석은 완전히 잘못된 분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슈미트는 1940 71일부터 영국공군이 561대의 전투기를 전투 손실로 잃었으며 추가로 196대의 전투기가 전투외의 원인으로 파괴되었다고 추산했습니다. 반면 같은 기간 보충된 전투기(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270~300대라고 과소평가했습니다. 그는 영국공군이 본토 남부지역에 투입할 수 있는 주간전투기가 330대 가량일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슈미트는 이후에도 괴링에게 계속해서 부정확하고 과장된 내용을 전달했습니다. 그는 824일부터 92일까지 제2항공군의 전투기부대가 공중전에서 영국공군의 전투기 572대를 격추했다고 보고했고 괴링은 이것을 토대로 영국 공군의 잔여 전력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비행장을 폭격하는 것 보다 공중전으로 끌어내는게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 8월 내내 영국공군의 전투기 부대는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슈미트는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독일공군의 전투기부대가 압도적인교환비로 공중전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91일 기준으로 영국공군의 전투기 전력은 총 600대이고 이중 420대가 영국 동남부에 배치되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괴링과 제2항공군 사령관 케셀링(Albert Kesselring)은 비행장을 계속 폭격하면 영국 전투기부대가 후방의 기지로 철수해 Bf109의 작전반경 안으로 끌어낼 수 없다고 생각해서 런던 폭격을 미끼로 영국공군의 남은 전투기를 끌어내 섬멸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독일공군의 고급 지휘관 중에서 제3항공군 사령관 후고 슈페를레(Hugo Sperrle)는 슈미트의 정보평가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국공군의 가용 전투기 전력이 1,000대 이내일 것이라고 슈미트 보다는 정확한 평가를 했습니다. 또한 독일공군 전투기부대의 전과 보고가 매우 과장되어 있다고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슈페를레는 영국공군의 전투기 전력이 상당한 규모이기 때문에 제뢰베 작전을 수행하려면 영국 남부의 비행장을 계속 타격해서 영국 공군의 전투기 부대를 북쪽의 기지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괴링은 슈미트의 정보평가를 신뢰해서 런던을 타격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괴링은 915일 런던 상공의 공중전에서 참패한 뒤에도 여전히 영국 전투기부대를 단기간 내에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일 공군은 927일의 런던 공습에서 참패하고서야 영국 전투기부대를 단기간에 제압하는게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독일공군은 이미 8월의 전투에서 영국 전투기부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고전을 하고 있었음에도 자신들이 공중전에서 압승하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평가를 맹신했습니다. 독일 공군 전투기 부대가 영국본토방공전 기간 중 1.77:1로 우세한 교환비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괴링이나 케셀링이 생각한 압도적 승리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영국공군 전투기 부대는 지속적으로 증강되고 있었고 전투가 소모전으로 접어들자 독일공군 전투기 부대 보다 훨씬 잘 견딜 수 있었습니다. 저자들은 괴링이 잘못된 정보분석을 맹신해 비행장에 대한 타격을 중단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라고 평가합니다.

 

각 단계의 작전에 대한 저자들의 평가도 꽤 재미있습니다. 됭케르크 항공전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저자들은 됭케르크 항공전 당시 영국공군 전투기부대의 역할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비판적입니다. 숫적 열세 때문에 독일 공군이 됭케르크에서 철수하는 연합군 선단을 공격할 때 충분한 공중 엄호를 제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다이나모 작전 당시 독일 공군의 피해는 폭격기 51대와 전투기 36대인 반면 철수작전을 엄호한 제11비행단은 작전에 투입한 전투기 106대를 잃었고 이중84대를 독일 전투기와 폭격기의 방어사격에 상실한 것으로 집계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독일공군이 다이나모 작전을 저지하는데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공격을 됭케르크에 집중하지 못한데 있다고 봅니다. 독일공군은 다이나모 작전이 진행된 9일 중 겨우 3일만 됭케르크에 공격을 집중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겁니다. 저자들은 영국공군이 수송함대를 엄호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다이나모 작전 기간 중 됭케르크 공격에 집중했다면 독일공군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영국 해협 봉쇄를 위한 항공작전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양호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영국의 해운을 단기간에 마비시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수준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독일공군은 이 기간에 급강하 폭격기와 중형폭격기의 폭격만으로 34척의 민간선박과 13척의 군함을 격침시켰으나 이것은 영국의 해운력과 해군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이 책은 꽤 장점이 많습니다. 독일공군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영국공군의 조직과 전술에 대한 설명도 풍부합니다. 오스프리 출판사의 저작 답게 독일공군과 영국공군의 전술을 그림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사진을 비롯한 도판도 풍부하고요.

저자들은 현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국본토방공전을 현대 나토의 군사용어와 개념에 맞춰서 설명합니다. 예를들어 영국공군의 위성 비행장(satellite airfields)와 독일공군의 야전비행장(Feldflugplätze)을 나토의 개념인 전방작전기지(Forward Operating Location)로 분류하고 다우딩 시스템을 현대의 통합방공체계(Integrated Air Defence System)으로 분류하는 식 입니다.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잘 정리해서 재미있게 잘 쓴 책입니다. 다만 이미 영국본토방공전에 대한 훌륭한 책이 많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유명한 오스프리 출판사의 책이라는 점 때문에 완전히 묻히지는 않겠지만요. 



2016년 7월 27일 수요일

Robert Forczyk,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3-1945: Red Steamroller (Pen and Sword, 2016)

매우 흥미롭게 읽었던 책의 후속작이 나온다면 항상 기대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전작이 좋았다고 후속작도 좋으란 법은 없지요. Robert Forczyk의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3-1945: Red Steamroller (Pen and Sword, 2016)는 딱 그런 경우입니다. 전작인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1-1942: Schwerpunkt (Pen and Sword, 2014)가 매우 재미있어서 기대를 했으나 아마존 서평 부터 심상치 않더니 정말 실망스럽군요.

이 책의 단점은 이렇습니다.

1. 서술의 불균형.
- 제목은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3~1945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943년'에 대부분의 서술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제가 읽은 E-Book 기준으로 1943년도의 작전을 다루는 부분은 14쪽 부터 199쪽까지 인데, 1944년 1월 부터 8월까지의 작전을 서술하는데는 216~252쪽, 1944년 9월 부터 1945년 5월까지의 작전은 252~255쪽만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전쟁 말기의 작전을 불과 4쪽만 가지고 대충 서술하고 넘어가는데서는 거의 황당함을 느낄 지경입니다. 물론 저자가 1943년 이후의 작전은 중요성이 덜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으나 그럴 거라면 애시당초 책을 1943년의 기갑작전에 집중해서 썼어야 한다고 봅니다.

2. 매우 제한적인 1차사료 활용
- 이 책의 주석만으로 판단하면 1차사료 활용이 전작에 비해 격감했습니다. 대부분의 주석이 2차사료를 출처로 하고 있습니다. 전작의 경우도 1차사료 활용이 미국에 소장중인 독일 노획문서에 한정된다는 한계가 있긴 했습니다만 이 책은 독일 노획문서 조차도 그리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지 않아 보입니다.
 사료 활용면에서 이렇다 할 장점이 없으니 책의 내용도 매우 평이하고 결론도 평이합니다. '독일이 연료 소모가 큰 중전차 생산에 집중한 것은 패착이다' '무장친위대와 공군이 많은 자원을 소모해 육군 기갑전력의 증강을 방해했다' '히틀러가 조장한 비효율적 관료제가 독일 군수산업에 악영향을 끼쳤다'와 같은 주장은 합리적이지만 기존의 연구자들도 충분히 지적해 온 문제입니다. 기존의 주장만을 답습하는데 그친다면 이 책의 의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 지 회의적이군요.


 다만 1943년과 1944년 초의 기갑작전이 잘 정리된 점은 충분한 장점입니다. 저는 뭔가 좀 새로운 내용이 없을까 기대해서 실망했지만, 개설서라는 측면에서는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전작에 비해서는 확실히 실망스럽습니다.


2012년 3월 17일 토요일

The German Air War in Russia - Richard Muller

오늘은 리처드 멀러Richard MullerThe German Air War in Russia라는 좀 오래된 책 이야길 해 볼까 합니다. 1992년에 나왔으니 딱 20년 전에 나온 책이군요. 뜬금없이 예전의 책 이야길 꺼내는 이유는 제임스 코럼James S. Corum의 리히토펜Wolfram Freiherr von Richthofen 평전, Wolfram von Richthofen: Master of the German Air War를 읽고 나서 몇가지 확인해 볼 것이 생각나서 이 책을 꺼내 들었다가 또 읽은 김에 내용 정리나 해 볼까 해서 입니다.

이 책이 나왔던 1990년대 초반에는 학계 외부에서 독일공군이 처음부터 단순히 육군을 지원하는 ‘전술공군’으로 등장했다고 보는 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1982년에 나온 호르스트 보크Horst BoogDie Deutsche Luftwaffenführung 1935-1945가 이러한 인식을 비판하면서 반향을 일으켰지만 독일어라는 언어의 특성상 독일어권 바깥에서는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Die Deutsche Luftwaffenführung 1935-1945는 연구사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번역되지 못했지만 보크의 논의는 영어권의 군사사 연구자들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리처드 멀러의 연구는 보크의 연구에 영향을 받아서 출간될 당시에는 매우 신선한 시각을 보여주었습니다. 멀러의 문제의식은 독소전쟁 당시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항공전은 단순히 지상군 지원작전에 그치지 않고 전략폭격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는데 기존의 저작들은 독일공군을 단순히 전술공군으로 파악하는 틀 안에 갇혀 있어 동부전선 항공전의 다면적인 측면을 설명할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독일공군의 작전을 재해석하고 있으며 특히 오랫동안 관심을 받지 못했던 1943~44년 시기 전략폭격 작전을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약간 사족을 더 붙이자면 1999년에 출간된 제임스 코럼의 대표작, The Luftwaffe -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도 호르스트 보크, 리처드 멀러와 유사한 인식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독소전쟁 시기 독일공군의 개별 작전들을 서술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대신 독일공군의 교리가 소련 전선에서 어떻게 적용되었고 어떠한 한계에 부딛혀 패배로 이어졌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전쟁 이전의 독일공군 교리에 대해서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독일공군이 처음 부터 전술공군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음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독일공군 참모총장 베버Walther Wever의 군사사상에 대한 재검토에서 드러납니다. 저자는 베버를 단순히 두에Giulio Douhet의 이론을 따르는 전략폭격의 옹호자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베버가 전략폭격에 관심을 가지고 장거리 폭격기 개발에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베버의 사상은 공군의 다양한 가능성에 주목하여 제공권 장악, 지상군에 대한 직간접지원, 그리고 전략폭격에 이르는 다양한 방면에 걸쳐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독일공군의 융통성 있는 교리가 베버의 군사사상에 대한 해석에 어려움을 주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베버의 사상에서 전략폭격은 독일이 1차대전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소모전을 피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적의 핵심적인 전략 목표를 타격함으로써 전략적인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것이 두에의 사상과 차이를 보이는 것은 민간인에 대한 테러 폭격은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베버의 사후에도 전략폭격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진행되었음을 강조하면서 단순히 베버의 죽음으로 독일공군이 전술공군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서술은 무리한 비약임을 지적합니다. 아래에서 또 이야기 하겠지만 저자는 이러한 사상이 1943~44년에 독일공군이 동부전선에서 전략폭격으로 선회하게 되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봅니다.
반면 독일공군의 상징과 같은 지상군지원에 대해서는 2차대전이 일어날 때 까지도 독일공군 내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우선순위를 부여받았음을 지적합니다. 저자는 1938년 까지도 지상군에 대한 직접지원을 임무로하는 전문 부대가 편성되지 않았으며 독일공군의 주력이었던 중형폭격기 부대는 오히려 차단과 같은 간접지원에 더 적합했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독일 육군 내에서도 1930년대 중반까지는 공군의 간접지원에 만족하는 견해가 우세했다고 강조합니다. 스페인 내전을 통해 지상군 직접지원에 대한 경험이 상당히 축적되었지만 지상군 직접지원을 전담하는 부대의 증강은 매우 더디게 이루어 졌으며 독소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리히토펜이 지휘하는 제8항공군단외에는 지상군 직접지원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독소전쟁의 첫 단계인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 공군의 작전에 대한 서술은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개전 초기에는 독일 공군이 교리를 충실하게 따라 독립된 공군으로서 소련 공군을 목표로 한 제공권 장악과 지상군에 대한 ‘간접 지원’에 집중했다고 지적합니다. 당시까지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제공권을 장악한 직후 육군에 대한 직접 지원 보다는 항공차단과 같은 간접 지원의 비중이 더 컸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 입니다. 남부집단군을 지원한 제4항공군이 계획 입안 단계에서 육군측의 지원요청에 대해 제공권 장악이 제4항공군의 최우선 목표이며 이를 위해 지상군 지원을 위한 급강하폭격기 부대의 차출은 최대한으로 제한하려 했다는 점을 예로 드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스페인 내전과 폴란드, 프랑스 전역을 거치면서 독일공군의 근접항공지원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지만 그것을 전담한 것은 리히토펜의 제8항공군단이었고 이 때문에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도 근접항공지원과 같은 직접 지원의 상당수는 제8항공군단이 전담하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수성을 부각하기 위하여  공군지휘장교Kommandeur der Luftwaffe, KoLuft의 성격에 대해서 서술합니다. 공군은 육군과의 협력을 위해 육군의 사령부에  공군지휘장교를 배속 시켰지만 역할이 육군과의 연락임무와 정찰비행부대를 통제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며 육군에 대한 지원임무는 전적으로 항공군단 사령부 내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단급 부대들에 파견되었던 항공연락장교Fliegerverbindungsoffizier, FliVO도 마찬가지여서 1941년 전역에서는 단순한 연락업무 이외의 역할에 머물렀습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1941년 말에 실시된 몇 차례의 모스크바 공습이 단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전쟁 이전의 항공전 교리에 기반한 작전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점 입니다. 저자는 전쟁 후 헤르만 괴링과 같은 독일 공군 지휘관들이 모스크바 공습을 단순히 히틀러를 의식한 체면치레의 성격을 가진 공격이라고 증언한 것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독일공군의 능력 부족으로 소수의 폭격기를 동원할 수 밖에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적의 “힘의 원천”을 타격할 것을 강조하는 교리에 기반한 것이라고 보는 것 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독일 공군은 독립된 공군에서 점차 육군에 종속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저자는 이것이 본질적으로 독일의 전쟁 지도자들이 가진 전략적 사고의 한계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1941년의 바르바로사 작전과 마찬가지로 1942년의 블라우 작전도 단지 수개월의 짧은 작전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얻으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리고 독일 공군도 그러한 방향을 추구했습니다. 저자는 독일 공군이 전략적인 작전 능력을 갈수록 상실하게 된 원인이 단지 히틀러를 위시한 수뇌부와 육군에 있다는 전후 독일 공군 지휘관들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1942년 전역이 그러한 주장에 대한 반례라고 보는 것 입니다. 그리고 독일공군 지휘관들, 특히 남부전선의 제4항공군과 제8항공군단의 지휘관들은 독일공군도 “전략적인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 남부에 독일 공군의 전력을 집중하는데 적극적으로 찬성했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1942년 전역에서 독일 공군이 육군의 지원에 집중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독일 공군 지휘관들의 이러한 결정은 또다시 실패로 이어집니다. 독일 공군은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 전투에서는 전력의 집중을 통해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여름 전역에서 리히토펜이 지휘한 제4항공군은 크림반도에 투입한 전력보다 그리 많지 않은 500여대의 항공기로 카프카즈에서 스탈린그라드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담당해야 했던 것 입니다. 공세가 진행되면서 독일 육군은 카프카즈로의 진격에 전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 조금씩 전력을 돌릴 수 밖에 없었는데 독일 공군 또한 마찬가지의 문제를 겪게 됩니다. 1941년 전역에서 1개 항공군이 1개 집단군을 지원한 것과 달리 1942년 전역에서는 1개 항공군단이 1개 집단군을 지원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독일 공군은 전략적인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 지역에서 전력의 집중을 달성할 수 없었던 것 입니다.

결국 1942년 전역의 실패로 독일 공군이 다른 출구를 찾게 되었고 그것이 소련의 핵심 공업지역에 대한 폭격 계획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입니다. 독일 육군이 전략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동안은 공군이 이를 지원했으나 육군의 작전이 한계에 다다르자 공군의 독자적인 능력으로 전략적인 영향을 끼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다시 공군의 독립적인 지위를 찾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만슈타인의 반격으로 남부전선이 일시적으로 안정된 이후 독일 공군은 폭격기 부대의 재정비에 들어가면서 폭격기 부대를 육군에 대한 직접지원 임무에 투입하는 것을 최소화 합니다. 6월 초 부터 독일 제4항공군과 제6항공군은 고리키, 야로슬라블, 사라토프 등에 대한 야간 폭격을 시작했고 독일 공군은 이 공격, 특히 고리키에 대한 공격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독일 공군 수뇌부는 동부전선에서 보다 효과적인 전략 폭격을 위한 표적 선정과 함께 이에 필요한 능력을 확충하려 합니다.
1943년 8월 예쇼넥이 자살하자 그의 후임으로 공군 참모총장에 임명된 귄터 코르텐Günther Korten은 두가지의 목표를 추구합니다. 먼저 전선의 요구에 따라 지상군에 대한 지원 능력을 강화하는 한편 또 다른 한편으로 공군의 독립적인 역할로서 전략 폭격을 추구하게 된 것 입니다. 그렇지만 코르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준비는 지나치게 늦었고 충분하지가 못했습니다. 독일 공군 폭격기 부대의 주 전력이 He 111이나 Ju 88은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없었고 He 177은 동부전선에 지나치게 늦게 등장했습니다. 또한 갈수록 심각해 지는 연료 부족은 폭격기 부대의 작전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는 요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1943년 하반기 부터 독일 육군이 소련군의 반격에 밀려하면서 독일 공군 폭격기 부대가 고리키와 같은 전략 목표들을 타격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비행장들을 계속해서 상실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결국 독일 공군이 전략 폭격으로 선회하기에는 그 능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시기 조차 늦었던 것 입니다.

1943년 이후 독일 공군의 지상군 지원 능력은 크게 향상됩니다. 독일 공군이 추구했던 전략 공군으로서의 역할은 좌절되었으나 지상군에 대한 지원은 육군의 요구에 따라 강화됩니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설명한 것 처럼 제공권 장악, 지상군에 대한 직간접지원, 그리고 전략폭격에 이르는 다양한 방면에 걸친 독일 공군의 융통성 있는 교리가 결국에는 독일 공군이 육군의 보조적인 역할로 전락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전쟁 초기와 달리 독일 공군의 육군 지원 능력은 크게 향상됩니다. 특히 1944년에 공군과 육군의 협조 체제가 개편된 것을 지적합니다. 먼저 항공연락장교, 즉 FliVO는 집단군과 야전군 단위의 연락을 담당하고, 군단급과 중점Schwerpunkt 사단의 연락은 항공통신연락장교Fliegerverbindungsoffizier Luftnachrichten, FliVO-LN가 담당하며, 마지막으로 지상군과 지상공격기 부대의 직접적인 연락은 지상공격 항공관제장교Fliegerleitoffizer(Schlacht)가 지휘하는 지상관제단Fliegerleittruppe이 담당하는 체제가 완성된 것 입니다. 저자는 지상공격기가 차지하는 비중도 커져서 1944년 6월에 이르면 동부전선의 독일 공군에서 지상공격기 부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커졌다고 지적합니다. 바르바롯사 작전 개시 당시 폭격기 부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지상공격기 부대의 규모가 작았던 것 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 입니다. 그러나 전략적인 판세가 뒤집힌 상황에서 지상공격기 부대는 큰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저자는 결론에서 독일 공군의 실패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보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외부적 요인인데, 그것은 바로 독일의 전략적인 열세입니다. 독일 공군은 육군과 마찬가지로 제한된 전력으로 소련과의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전쟁이 확대될 수록 그 제한된 능력을 집중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소모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독일 공군의 내부적 요인으로서 융통성있는 교리와 독일 공군이 동부전선에서 처한 상황에 대한 독일 공군 지휘관들의 판단에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독일 공군 지휘관들은 전장의 상황에 따라 동부전선에서 독일 육군이 가지는 핵심적인 지위를 인정했으며 결국 독일 육군이 전장의 주도권을 상실한 이후에야 독립된 공군의 역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2011년 9월 17일 토요일

동맹국들의 조병창이 될 수 없었던 독일

2차대전 당시 외교라는 요소는 독일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것 보다는 문제를 많이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당장 첫 번째 동맹국으로 전쟁에 뛰어든 이탈리아 부터가 시작부터 독일의 지원에 기대는 형국이었으니 말입니다. 이탈리아가 가진 전력 중 독일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을 해군력 조차 독일의 부족한 석유자원을 소모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1941년 2월 독일에게 자국 해군이 최소한 25만톤의 연료를 공급받지 못하면 작전을 지속하기가 어렵다고 통보했습니다. 1940년 기준으로 독일이 주로 루마니아에서 수입하던 석유의 양이 150만톤, 독일이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인조석유가 400만톤 정도였으니 이탈리아 해군만 단독으로 25만톤을 요구한다는 것은 상당한 양이었습니다.1)

부족한 전략 물자를 동맹국과 공유해야 하는 것은 매우 골치아픈 문제였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이탈리아를 필두로 한 독일의 동맹국들이 세계 일류급 병기를 제작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이탈리아 해군은 제외하고) 특히 육군과 공군 장비에 있어서 그런 문제가 두드러 졌지요. 그랬기 때문에 전쟁 초기부터 동맹국들은 독일에 근대적인 장비를 공여해 줄 것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독일의 공업 생산능력은 자국군대의 수요를 충족하는데도 버거운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동맹국들을 근대적인 장비로 무장시키는데 처음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초기의 대표적인 사례라면 이탈리아 공군에 대한 급강하 폭격기 지원을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이탈리아 공군도 급강하 폭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쓸만한 기종을 개발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공군의 기대를 모은 SM.85는 급강하 폭격기로서 실패작이었고 결국 독일의 Ju 87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 6월 독일 정부에 50대의 Ju 87을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했습니다. 이에 대해 국방군총사령부OKW는 독일 공군에 우선적으로 공급되어야 할 기종을 수출하는데 반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그러나 괴링이 수출을 승인함으로써 이탈리아 공군은 Ju 87을 장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일측은 먼저 7월에 15대, 8월에 15대, 9월에 나머지 분량을 공급하기로 약속했습니다.2) 그러나 이탈리아 공군 제 96 독립 급강하폭격기 중대96º Gruppo Autonomo Bobardieri a Tuffo에 인도된 첫 번째 Ju 87은 공장에서 생산된 신품이 아니라 독일 공군이 사용하던 중고품 이었습니다.3) 인도 자체도 당초 약속 보다 느리게 이루어져 이탈리아 공군의 두 번째 급강하폭격기 부대인 97 급강하폭격기 중대는 11월 11일에 편성되었습니다.4) 외교적인 면에서 보면 괴링의 판단은 크게 나쁜 것이 아니었지만 독일 공군에 주어져야 할 장비가 다른 곳으로 새나가는 것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940년 여름에는 영국본토항공전이 한창이었고 독일공군, 특히 중형폭격기와 급강하폭격기의 손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은 1940년 5월 부터 9월 까지 총 210대의 Ju 87을 잃었는데 이것은 1940년 5월 4일을 기준 으로 한  급강하폭격기 대수의 50%에 달하는 것 이었습니다.5)
독일이 불과 50대의 급강하 폭격기를 지원하는 것 조차 버거워 했던 것에 비해 비슷한 시기 미국은 전시 동원체제에 돌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별 어려움 없이 수백대의 항공기를 생산해서 해외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공군은 1940년 5월 1일 기준으로 커티스 호크75 306대를 포함해 440대의 미국제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불과 한 달 뒤에는 이것이 544대에 달하게 됩니다.6)

전쟁이 확대되어 가면서 이탈리아의 원조 요청은 점차 늘어났습니다.  이탈리아는 1940년 11월 20일 독일 국방군총사령부에 3,000대(!)의 트럭을 알바니아에 주둔한 이탈리아군에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7) 그 무렵 바르바로사 작전을 앞두고 프랑스와 영국제 노획차량 까지 긁어모아 배치하고 있던 독일군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이 요구는 말 그대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독일군은 당연히 이 엄청난 요청을 거부합니다. 독일측은 트럭을 원조하지 못하는 대신(그리고 그 당시까지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그리스를 고려하여) 이탈리아군의 수송 지원을 위해 Ju 52를 장비한 제1 특수임무 폭격비행단 3대대III./Kampfgeschwader z.b.V.를 파견합니다. 이 대대는 1940년 12월 10일 부터 1941년 2월 5일 까지 이탈리아군 29,000명과 물자 2,700톤을 알바니아로 수송했고 부상병 7,500명과 그 밖의 병력 2,900명을 알바니아에서 이탈리아로 후송했습니다.8) 물론 이러한 지원이 이탈리아군에게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탈리아군 자체의 능력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의 장비가 개선되지 않는 이상 전투력의 향상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것은 이후 북아프리카 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1940년 프랑스의 패배 이후 독일 진영으로 합류한 루마니아는 이탈리아 보다 더 상황이 안좋은 곳이었습니다. 얼마안가 닥치게 될 바르바로사 작전은 기계화 부대가 중심이 된 대규모 지상전 위주였는데 루마니아는 그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루마니아는 1935년 까지도 1919년에 구입한 르노FT-17을 주력전차로 사용하고 있었고 이것들이 완전히 구식화 되고 제대로 가동도 되지 않게 된 1935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현대적인 전차를 생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루마니아는 기갑전력의 확충을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에 126대의 LT-35 전차와 417대의 CKD AH IV 소형전차Tankette, 프랑스에는 200대의 르노 R-35 전차를 주문했습니다. 이 중에서 루마니아가 주문한 대로 양도된 것은 LT-35 뿐이었고 CKD AH IV소형전차는 35대, 르노 R-35는 40대만이 인도되었을 뿐 입니다.9)
루마니아는 프랑스가 패배한 뒤 독일의 편으로 갈아타면서 독일이 자국의 부실한 기갑전력을 보충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루마니아의 요청에 의해 파견된 루마니아 주재 독일육군사절단Deutsches Heeresmission in Rümanien, 약칭 DHM은 루마니아군에 대한 훈련과 군사원조 요청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루마니아군에 대한 훈련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앞두고 루마니아에 독일군이 대규모로 증파되면서 훈련에 투입할 인력을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루마니아군의 제5, 6, 13, 18, 20 보병사단에 독일식의 소부대 전술 교육을 위한 훈련소가 설치되었고 별도로 독일육군사절단 본부에 의해 독일식의 전쟁대학Kriegsakademie과 유사한 고급장교 교육과정이 설치되었습니다.10) 하지만 장비 지원은 거의 성과가 없었습니다. 루마니아군은 독일의 3호전차와 같은 현대적인 전차를 원했지만 독일군도 전차가 부족한 실정이어서 결국 프랑스와 폴란드에서 노획한 30여대 정도의 R-35전차가 양도되는데 그칩니다. 이탈리아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한 괴링과 달리 육군참모총장 할더Franz Halder는 루마니아 정부의 독일제 전차 수출 요청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11) 히틀러는 대 프랑스전이 종결된 직후인 1940년 7월 9일 월간 전차생산량을 380대로 높일 것을 지시했지만 독일의 공업력으로는 단시일 내에 이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결국 히틀러는 1940년 9월 28일 명령에서 전차생산량 목표치를 하향 조정하게 됩니다. 이에 따르면 1940년 9월 부터 1941년 4월 까지 전차 1,490대, 즉 월간 213대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12) 이런 상황에서 동맹국에게 까지 최신형 전차를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루마니아 공군도 비슷한 실정이었습니다. 독일은 루마니아에 소수의 Bf109와  He111을 판매하긴 했으나 독일제 항공기의 면허생산은 거부했습니다. 현대적인 항공기를 대량으로 보유하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수입한 항공기들로 공군이 구성되었기 때문에 루마니아 공군은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폴란드, 루마니아제 등 잡다한 항공기를 운용해야 했습니다.13)

1941년에는 독일의 동맹군들이 제한적인 작전에만 참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장비의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루마니아군의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용감히 싸우긴 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고 오데사를 둘러싼 전투에서는 소련군이 자발적으로 철수할 때 까지  도시를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오데사 공격을 담당한 루마니아 제4군은 오데사가 함락 될 때 까지 장교 4,161명을 포함해 11만명에 달하는 인명손실을 입었습니다.14) 특히 루마니아의 유일한 기계화부대인 제1기갑사단은 오데사 전투에서 사실상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LT-35를 장비한 1기갑사단의 1전차연대는 오데사의 요새화된 방어선에 대한 공격에서 글자 그대로 소모되었습니다. 손실을 보충해 줄 수 있는 것은 독일 뿐이었는데 독일의 전차 생산능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15)
헝가리가 파병한 부대 중 유일하게 이렇다 할 기갑전력을 갖춘 쾌속군단(1, 2차량화여단과 2기병여단으로 편성)은 루마니아군의 1기갑사단 보다도 전투력이 더 떨어지는 수준이었습니다. 헝가리의 쾌속군단은 이탈리아제 CV35 65대와 스웨덴의 L60 전차를 면허생산한 톨디 전차 95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루마니아가 보유한 LT-35나 R-35와 마찬가지로 동부전선에 투입하기에는 심각하게 부족한 장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쾌속군단은 루마니아군과 달리 독일군을 따라 우크라이나 깊숙히 진격, 1941년 10월 말에는 이쥼Ізюм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을 따라 진격하면서 우마니Умань 전투 등 일련의 격전을 치러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됩니다. 헝가리 쾌속군단은 1941년 11월 재편성을 위해 전선에서 이탈할 때 까지 전차의 90%를 상실했고 차량 1200여대와 병력 26,000명 중 8,000명을 잃었습니다.16)
 이탈리아가 파견한 소규모 원정군,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단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 약자 CSIR” 은 1941~1942년 전역을 그런대로 잘 견뎌냈다고 평가받습니다. 이 군단은 북아프리카 전선에 파견한 기갑사단을 제외한다면 이탈리아군에서 가장 잘 장비된 사단들로 편성되었지만 루마니아나 헝가리군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전력이었습니다. 이 군단에 배속된 3개 사단 중 차량화사단Divisioni autotrasportabile이었던 파수비오Pasubio사단과 토리노Torino사단은 완전한 차량화 사단이 아니었습니다. 이때문에 군단장 메세Giovanni Messe는 작전 중 종종 두 사단 중 한 사단에 차량을 집중시켜 차량화시키고 나머지 사단은 일반 보병사단으로 운용하기도 했습니다.17) 그리고 쾌속사단Divisione celere이라는 명칭으로 불린 PADA(Principe Amedeo d’Aosta)사단은 2개 기병연대로 편성된 기병사단으로 역시 기계화와는 거리가 먼 부대였습니다. 이탈리아 원정군단은 기동수단으로 5,500대의 차량과 1,550대의 오토바이, 4,600마리의 말/노새를 보유했는데 이러한 장비 내역은 반쪽짜리 기계화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기갑전력은 PADA사단에 배속된 60대의 L3/33(CV33)이 고작이었습니다.18)

독일의 1942년 전역은 이렇게 누적된 문제가 재앙으로 전이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동맹국들은 1942년 전역에 더욱 더 대규모로 참전합니다. 헝가리와 이탈리아는 원정군의 규모를 1개 야전군으로 증강했고 루마니아군은 1941년과 달리 독일군을 따라 남부 러시아 깊숙히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루마니아, 헝가리, 이탈리아 정부는 독일에게 75mm Pak 40과 같은 일선급 대전차포를 요청했습니다. 또한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1941년 전역에서 크게 소모된 기갑전력을 복구하는데도 독일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 역시 1941년 전역의 피해를 채 복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세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맹국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독일은 동부전선의 동맹국들에게 Pak 40 대신 노획한 프랑스제 75mm포를 개조한 Pak 97/38이나 50mm  Pak 38, 37mm Pak 36을 제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가장 강력한 75mm  Pak 97/38은 수량이 충분치 못해 이탈리아 제8군의 경우 1942년 5월 1일 기준으로 54문을 보유하는데 그쳤습니다. 이탈리아군 대전차 전력의 주력은 구식인 47mm 대전차포 297문이었고 이것은 T-34에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여기에 포병연대에서 야포로 사용하는 75mm포(Cannone da 75/32 Modello 37) 201문이 유사시 대전차전을 수행하는 정도였습니다.19) 루마니아군의 사정도 그다지 나을 것은 없어 1942년 전역이 시작될 무렵에는 37mm Pak 36이나 47mm 대전차포가 주력이었습니다.20) 그리고 이탈리아군 보다도 더 늦은 1942년 10월이 되어서야 Pak 97/38이 소량 보급되는데 그쳤습니다.
Pak 97/38은 1942년 11월 소련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을 때 독일의 동맹군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대전차포 였습니다. 루마니아군은 소련군의 동계반격 당시 보병사단 당 6문 정도의 Pak 97/38를 보유하고 있었고 여전히 대부분의 대전차 전력을 37mm나 47mm 대전차포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일은 대전차 지뢰조차 제대로 보급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더 나빴습니다.21)  루마니아군 기병사단의 경우는 상황이 더 나빠서 5기병사단이 75mm 대전차포 4문을 보유하는데 그쳤고, 루마니아군 8기병사단은 단 한문도 보유하고 있지 못했습니다.22) 이탈리아 제8군도 그다지 나을 것은 없어서 사단 당 4문에서 16문 정도의 Pak 97/38을 보유하는데 그치고 있었습니다.23) 그리고 Pak 97/38 조차도 T-34에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태가 속출하자 루마니아군과 이탈리아군은 급격히 붕되었습니다.24) 독일은 동맹국들에게 겨우 겨우 소량의 75mm 대전차포를 지원했지만 충분한 대전차용 탄약을 공급하지 못했고 이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기갑전력에 있어서도 별로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독일은 1942년 초 부터 루마니아군과 헝가리군에 구식화된 35(t) 전차나 38(t) 전차를 소량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3호전차나 4호전차와 같은 일선급 전차의 지원은 매우 소규모로 이루어졌습니다. 헝가리군은 1942년 하계공세가 시작되기 직전인 1942년 5월 까지 불과 22대의 4호전차만을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헝가리는 독일의 지원이 너무 소규모 였기 때문에 독일이 루마니아군에 신형 장비를 우선적으로 지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만까지 가질 정도였습니다.25) 하지만 전차 지원은 헝가리군이 루마니아군 보다 나았습니다. 루마니아군은 보충용으로 LT-35의 독일판인 35(t) 전차를 지원받다가 1942년 9월이 되어서야 겨우 75mm포 탑재 3호전차와 4호전차(50mm 장포신형 3호전차로 기술한 자료도 있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을 때 루마니아군 제1기갑사단의 주력은 87대의 LT-35, 35(t) 전차였고 3호전차(와 4호전차)는 21대에 불과했습니다.26)

공군에 대한 지원도 그다지 나을것이 없었습니다. 독일이 1942년 초 부터 루마니아 공군에 인도한 항공기는 글자그대로 한줌에 불과한 수준으로 Bf 109 E-7 15대(1월~3월), He 111 H-6 10대(1~3월), Do 17M 10대(4~5월), Ju 52/3m 18대, He 114 10대(4월), Fi 156 14대(4월) 정도였습니다.27)
헝가리의 경우는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헝가리 또한 산업기반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1938년 부터 항공산업에 대한 투자를 증대시켰고 1941년 6월 6일에는 독일과 항공기 공동생산을 위한 협약에 조인해 Bf 109, Me 210 그리고 DB 605엔진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헝가리의 항공산업은 독일의 부족한 항공기 생산능력을 보완해 주는 존재였던 것 입니다. 이 협약은 독일이 부품과 기술을 제공하는 대신 헝가리가 생산하는 항공기와 엔진을 일정 비율로 독일공군에 납품하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즉 Bf 109는 독일과 헝가리의 비율이 2:1, Me 210은 1:1, DB 605엔진은 2:1였습니다.28) 물론 헝가리의 부족한 산업력으로 현대적인 공군을 단시간 내에 육성하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긴 했습니다만 헝가리의 노동력이 독일의 부족한 산업력을 보완하는데 사용된 셈입니다.

1943년 이후 독일의 군수물자 생산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동맹국에 대한 장비 지원도 다소 증가하게 됩니다. 루마니아는 1943년에 50대의 38(t) 전차외에 4호전차 31대와 돌격포 4대를 인도받았는데 1944년에는 4호전차 100대와  돌격포 114대를 인도받았습니다. 헝가리는 1944년에 4호전차 62대, 돌격포 40대, 헤처 75대, 판터 5대, 티거 3대를 인도받았습니다. 이밖에 다른 동맹국들도 예전 보다는 많은 전차를 지원받았습니다. 핀란드는 1943년 부터 1944년까지 4호전차 15대와 돌격포 59대를 받았고, 불가리아는 1943년에 38(t) 전차 10대와 3호전차 10대, 4호전차 46대, 돌격포 25대를 받았습니다. 슬로바키아는 1943년에 2호전차 16대, 38(t) 전차 37대, 3호전차 7대, 마더II 자주포 18대를 받았습니다.
항공기 지원도 비슷하게 증가해서 독일은1943년 부터 루마니아 공군의 현대화를 위해 Bf 109G, Ju 88, Ju 87, Hs 129등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1942년과 비교하면 1943년 이후의 항공기 지원은 다소 증가했습니다. Bf 109의 경우 1944년 7월에 60대, 8월에 40대가 루마니아 공군에 인도되었고 9월 이후로는 월간 20~25대를 인도할 예정이었습니다.29) 또한 뒤늦게나마 루마니아의 Bf 109 면허생산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 공군의 지속적인 손실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 구식화된 He 111이나 Ju 86도 함께 지원되는 등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헝가리의 경우 1942년 부터 1944년까지 Me 210 270(272)대와 Bf 109 471(488)대를 생산했습니다.30) 하지만 루마니아는 비슷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하게 동원하지 못했습니다. 루마니아는 1943년에 Fi 156 3대, 1944년에 Fi 156 7대와 Bf 109 6대를 생산하는데 그쳤습니다.31)

독일의 지원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미국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입니다. 미국은 1942년 이후 동맹국들이 여러개의 기갑사단을 편성해서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장비를 원조했습니다. 독일이 동맹국들에게 수십대의 전차를 인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1942년만 하더라도 미국은 수백대의 전차를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에게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항공기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독일이 불과 수십대의 Ju 87을 인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1940년만 하더라도 미국은 수백대의 항공기를 외국 군대에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차량을 예로 들면 그 차이가 더 잘 드러납니다.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수십만대의 차량을 지원했습니다. 반면 독일은 자국의 차량 수요도 채울 수 없었으며 독일의 동맹국들은 그보다 더 심각한 기동력 부족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미국이 자국의 최신 장비들을 대량으로 공여할 수 있었던 반면 독일은 그럴 수가 없어 노획장비나 구식화된 장비들을 소규모로 제공하는데 그쳤습니다.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의 조병창”이었던 반면 독일은 동맹국들의 자원까지 쥐어짜야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얼마 되지 않는 동맹국들의 산업력조차 적절하게 동원하지 못했습니다.



1) Adam Tooze, The Wages of Destruction : The Making and Breaking of the Nazi Economy, (Viking Penguin, 2007),  p.411
2) Hans Werner Neulen, Am Himmel Europas : Luftstreitkräfte an deutscher Seite 1939~1945, (Universitas Verlag, 1998),  pp.37~38
3) John Weal, Junkers Ju 87 Stukageschwader of North Africa and the Mediterranean, (Osprey Publishing, 1998), p.16
4) Richard L. DiNardo, Germany and the Axis Powers : From Coalition to Collaps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44
5) Williamson Murray, The Luftwaffe 1933~45 : Strategy for Defeat, (Brassey’s, 1996), p.45
6) Karl-Heinz Frieser, Blitzkrieg-Legende : Der Westfeldzug 1940, (Oldenbourg Verlag, 1995), p.55
7) Richard L. DiNardo, ibid., p.77
8) Karl-Heinz Golla, Der Fall Griechenlands 1941, (Mittler&Sohn, 2007), p.65
9) Alexander Statiev, “The Ugly Duckling of the Armed Forces : Romanian Armour 1919~41”,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12, No.2(1999. 6), pp.220~224
10) Richard L. DiNardo, ibid., p.99
11) Alexander Statiev, ibid., p.225
12)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 (Mittler&Sohn, 1988), pp.21~22
13) Richard L. DiNardo, ibid., p.98, 111
14) Peter Gosztony, Hitlers Fremde Heere : Das Schicksal der nichtdeutschen Armeen im Ostfeldzug, (Econ Verlag, 1976), p.152
15) Alexander Statiev, ibid., pp.237~239
16) Peter Gosztony, ibid., pp.154~156, 161
17) Richard L. DiNardo, ibid., p.128
18) Gerhard Schreiber, “Italiens Teilnahme am Krieg gegen die Sowjetunion : Motive, Fakten und Folgen”, Jürgen Förster(hrsg), Stalingrad : EreignisㆍWirkungㆍSymbol, (Piper, 1992), p.259; Thomas Schlemmer,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Dokumente zu Mussolinis Krieg gegen die Sowjetunion, (Oldenbourg Verlag, 2005), pp.14~15
19) Thomas Schlemmer, ibid., p.29; Richard L. DiNardo, ibid., p.141
20) Richard L. DiNardo, ibid., p.141
21) Manfred Kehrig, Stalingrad : Analyse und Dokumentation einer Schlacht, (Deutsche Verlags-Anstalt, 1974), p.66; Richard L. DiNardo, ibid., p.150
22) Manfred Kehrig, ibid., p.667
23) Peter Gosztony, ibid., pp.501~507
24) Richard L. DiNardo, ibid., p.154
25) Richard L. DiNardo, ibid., pp.140~141
26) Manfred Kehrig, ibid., p.668
27) Hans Werner Neulen,  ibid., p.103
28) Miklos Szabo, “The Development of the Hungarian Aircraft Industry, 1938~1944”,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65(2001. 1), p.64
29) Hans Werner Neulen,  ibid., p.108, 114
30) Hans Werner Neulen,  ibid., p.329; 괄호 안의 수치는 Miklos Szabo, ibid., p.76
31)  Hans Werner Neulen,  ibid., p.328

2008년 4월 18일 금요일

2차 대전중 독일 공군 전투기사단의 지휘통제 문제

아래 글에서 윤민혁님이 der grosse Schlag 작전이 계획대로 실행될 경우 심각한 공역통제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고 지적해 주셨습니다. 제가 기술적인 부분에 좀 많은 지식이 있다면 여기에 대해서 좀 재미있는 글을 하나 써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전투기 부대의 통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아돌프 갈란트가 전쟁 후에 지적한 전투기부대의 지휘통제 문제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독일본토 방공전 당시 전투기부대의 전술통제는 전투기사단(Jagddivision)이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전투기사단은 대전 초기의 전투기지휘부(Jagdfliegerführer)를 개칭한 것으로 1943년 무렵에는 각 전투기 사단 별로 5~10개 전투비행대대(Gruppe)를 예하에 두고 있었습니다.

각 전투기사단은 6,000~7,000명 정도의 인력으로 구성되며 사령부에는 전투기 통제와 관련된 인력이 150명 정도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전투기통제장교(J.L.O, Jagerleitoffizier) 들이 포함됩니다. 전투기통제장교는 비행대대, 경우에 따라서 비행단에 대한 통제를 담당하는데 일반적으로 사단장이 선임통제장교를 겸합니다. 선임통제장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데 선임통제장교는 상황을 종합해 적 폭격기 부대의 예상 목표와 진로를 판단하고 그에 맞춰 사단 지휘하에 있는 모든 전투기 부대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즉 방공전투에서 전투기사단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셈 입니다.

그런데 전쟁 중에는 이 전투기 사단의 지휘 통제능력에 문제가 조금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돌프 갈란트는 전쟁이 끝난 뒤에 독일 본토 방공전에서의 전투기 지휘통제 문제, 특히 전투기 사단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고 하네요.(D. Caldwell & R. Muller, The Luftwaffe over Germany : Defense of the Reich, p.148)

1. 전투기사단의 지휘 방식은 명백히 지역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각 사단은 사단 예하 부대가 다른 사단의 전투 지경선으로 넘어가더라도 계속 통제했지만 무전과 레이더 관제 범위를 벗어나면 지휘를 (인접 사단으로) 넘겼다. 하지만 이것은 원만하지 않았다.
2. 전투기사단 사단장들은 1차대전의 베테랑들이었고 그들의 참모장은 공군 장군참모 출신이었다. 이들은 유능하긴 했으나 전투기 조종사가 아니었다.
3. 전투기사단에는 부사단장이 없었다. 부사단장 보직을 만들어 거기에 전투기 조종사 출신을 임명해야 했지만 문제는 적당한 인물이 드물었다.
4. 전투기들은 전투기통제장교의 통제를 받았으며 각 통제장교는 1개의 비행대대를 통제했다. 전투기통제장교들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거나 매우 우수한 통신 장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보드 게임을 하듯 통제했지 (공중전의) 입체적 환경을 이해하지 못해 그들이 통제하는 부대에 전술적 이점을 주지 못했다.
5. 무전감청은 공군 통신감인 마르티니(Wolfgang Martini) 장군의 담당이고 공군 총사령부 단위에서나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전투기사단의 전투기통제장교들은 무전감청을 이용해서 (영국공군처럼) 속임수를 쓰는게 불가능했다.
6. 전투기군단, 전투기사단, 제국항공군, 괴링, 전투기부대총감(갈란트)는 모두 한 전화회선을 이용하고 있었으며 전투기부대총감을 제외하면 모두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괴링은 종종 멍청한 명령을 내렸다.
7. 1944년 초부터 적 호위전투기 때문에 폭격기 집단과 접촉을 유지하며 정보를 보내는 항공기(Fühlungshalter)를 더 이상 임무에 투입할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전투기통제장교들은 기상, 구름상태, 적의 고도, 호위기 여부 등을 전혀 알 수 없었다.
8. 각 편대장들에게 행동의 자유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이 외에도 갈란트는 괴링에 의해서 전투기사단장의 교체가 빈번히 일어난 점도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단장 교체가 잦으니 예하 전투기 부대들에 대한 통제가 어려웠다는 것이죠. 하기사, 괴링은 툭하면 조종사들에게 동부전선에 소총수로 보내겠다는 망발이나 날리던 종자이니 사단장교체가 빈번한 것도 이해가 가긴 합니다. 어쩌면 괴링은 정말 영국공군이 심은 스파이가 아니었을는지.

2007년 3월 15일 목요일

독일의 점령지역 산업시설 활용 1939-1945 - 항공산업의 사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전시 동원과 관련해 자주 논의되는 이야기 중 하나는 1940년 독일이 장악한 서유럽의 공업기반이 독일의 전쟁 수행능력에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줬는가 하는 점 입니다.

가장 먼저…

전후 연합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차 대전 기간 중 독일에 점령된 국가들이 독일 공군에 공급하기 위해 생산한 항공기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국 가1941194219431944총 계
프랑스626681,2855022,517
체코슬로바키아8195688051,9554,147
네덜란드1675414442947
헝가리0073344417
이탈리아003279111
Richard Overy, The Luftwaffe and the European Economy 1939-1945,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1979/2


통계에도 나타나 있듯 독일이 가장 재미를 본 국가는 체코였습니다. 일단 오스트리아를 제외하면 가장 먼저 독일의 수중에 들어온 산업화된 국가였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국항공성(RLM) 내에는 체코의 기업들에게는 항공기 완제품 생산대신 부품과 반조립 정도만 맡겨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우데트(Ernst Udet)가 체코의 공업시설 활용을 적극적으로 밀어 붙였기 때문에 이미 1939년 말에 체코의 항공기 제조업체들은 독일공군으로부터 총 1,797대의 항공기 생산을 수주 받습니다. AVIA가 이때의 경험으로 전후에도 Bf 109의 짝퉁(?)을 생산한 것은 유명하지요.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체코의 군수 산업체들은 독일 점령지역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고 기여도가 컸다는 점 입니다. 체코의 기술 좋은 노동자들은 비교적 말도 잘 듣고 사보타지에 취미가 없었다지요. 군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도 경호를 위해 무장 병력을 붙여줘야 했던 유고슬라비아에 비하면 체코는 독일 기업들이 털어먹기 좋은 낙원이었다고 합니다.

슬로바키아는 명색은 독립국이었지만 실제 사정은 옆 동네인 체코와 같아서 거의 일방적으로 독일에 털립니다. 독일의 공군사절단(Luftwaffenmission)은 슬로바키아 정부로부터 국영 항공기 공장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권리를 얻어내는데 사실 이건 반 강제적인 것이었지요. 독일은 슬로바키아 정부에게 슬로바키아의 국영 공장이 생산한 항공기의 75%는 독일 공군이 인수하고 25%만 슬로바키아 공군에 공급한다는 조항을 강요해서 아주 재미를 봅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꽤 흥미로운 경우입니다.
먼저 독일 점령지역의 공장과 비시 정부 관할 지역의 공장을 다루는 주체가 달랐습니다. 비시 정부 관할 지역은 1943년 점령 이전까지는 스위스, 스웨덴과 함께 중립국으로 분류돼 독일항공산업위원회(DELIKO, Deutsche Luftfahrtindustriekommision)의 담당이었습니다. 반면 독일 점령지역은 제국항공성의 관할하에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특히 항공기 완성품 뿐 아니라 중간 부품의 공급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서는 독일 다음으로 항공 산업이 발달한 나라였기 때문에 많은 독일 기업들이 침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국항공성이 나서기 전에 기업들이 먼저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지요. 많은 수의 항공 기업(특히 융커스)들은 아직 프랑스와의 휴전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즉 이론적인 교전상태)에서 프랑스 기업들과 사업계약을 체결하러 인력을 파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는 전체적인 항공기 생산에서는 슬로바키아에 뒤지긴 하지만 독일 공군의 중요한 해외 파트너(?) 였습니다. 1942년 까지 독일 공군과 납품 계약을 체결한 프랑스 기업은 192개사였다고 합니다.(같은 기간 독일 육군은 60개사, 해군은 9개사)
프랑스는 휴전 이후에도 자국 정부를 위해서 항공기 생산을 계속했는데 가끔은 독일이 제 3국에 공여할 목적으로 프랑스제 항공기를 주문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1943년에 불가리아 정부는 독일측에게 Dewoitine D.520(도데체 왜 이걸 독일에?) 96대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전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이건 취소되고 Bf 109 16대가 공여 됩니다.

폴란드의 경우는 말 그대로 안습 입니다. 국가사회주의 강도단의 두목인 괴링 부터가 폴란드는 산업적으로 가치가 없으며 약탈할 건덕지가 없다고 공언할 정도였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켈은 크라쿠프에, 융커스는 포즈난에 부품 생산 공장을 확보합니다. 물론 폴란드의 경우 서유럽과 달리 항공기 완성품을 조립할 수 있는 공장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폴란드와 유사한 국가로는 유고슬라비아도 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항공 기업들은 독일 점령과 동시에 독일 항공기업들의 자회사로 강제 흡수됩니다. 전쟁 이전 유고슬라비아의 대표적인 항공기업이었던 Aeroput은 루프트한자의 정비공장으로 바뀌고 Rakovica는 융커스의 엔진 부품 공장으로 전환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일이 가장 재미를 보지 못한 곳은 이탈리아였습니다.
독일은 이탈리아를 점령한 뒤 이탈리아의 항공기업들을 독일의 항공기 생산에 활용하려 했으나 성과가 매우 시원치 않았다고 하지요. 항공기 생산이 1943년에 32대, 1944년에 79대로 독일의 한달 치 생산도 안 되는 규모였습니다.

독일이 해외의 산업 기반을 활용한 것은 이렇게 외형적으로나마 합법의 탈을 쓴 것도 많았지만 아예 노골적인 약탈로 나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많았습니다.
먼저 체코슬로바키아가 점령된 다음 접수된 장비와 시설은 불가리아로 매각됐고 폴란드 점령 후 압수된 항공기와 기자재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스웨덴 등지로 매각, 또는 공여 됐습니다.
독일 공군은 점령지로부터 산업 시설을 인수하는데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소련 침공을 앞두고는 제국항공성 내에 산업시설 노획을 위한 조직(Beute-Sonderkommando)를 만들었습니다. 이 조직은 1941년 한 해 동안 소련의 점령 지역내에서 8,400여대의 대형 공작기계를 약탈해서 독일로 보냈다고 합니다.
뭐, 어쨌건 소련도 전쟁이 끝난 뒤 실레지엔과 동프로이센의 기계들을 잔뜩 뜯어 갔으니 피장 파장이려나요?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항공산업 부문만 놓고 보면 독일인들은 2차 대전기간 동안 충분히 재미를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으로 거덜직전까지 가긴 했지만 그것 조차 미국의 경제원조로 피해가니 말 다했지요.

2006년 10월 29일 일요일

독재자(The Great Dictator)에 나오는 어용 예술인

채플린의 독재자(The Great Dictator)의 초반을 보면 힌켈(Adenoid Hinkel)이 관저 곳곳을 돌아다니며 똘마니들을 관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중에서 가장 흥미있는 부분은 바로 미술가 두명이 나오는 부분이다.





조각가 한명과 화가 한명이 농땡이를 피우다가 힌켈이 들이닥치자 뭔가 하는 것 처럼 수선을 떠는 장면이다. 조각가는 브레커(Arno Breker)나 토락(Josep Thorak) 정도 될 성 싶고 화가는 잘 모르겠다. 하긴, 생각해 보니 채플린이 별 볼일없는 어용 미술인 개개인에 신경을 썼을 것 같진 않다. 대충 그놈이 그놈이려니 하고 등장 시켰겠지.
이 장면이 재미있는 것은 저 두 사람 역시 프로파간다에나 써먹을 쓰레기를 만드는 작업을 내켜하지 않는 다는걸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다. 힌켈이 나가자 마자 저 두 사람은 다시 논다.

괴링을 희화한 사람은 그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를 잘 빈정거린 것 같았다.

그외에, 웃겼던 장면이라면...



편지를 붙이시는 힌켈 각하. 전형적인 악당 두목의 면모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