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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17일 토요일

동맹국들의 조병창이 될 수 없었던 독일

2차대전 당시 외교라는 요소는 독일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것 보다는 문제를 많이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당장 첫 번째 동맹국으로 전쟁에 뛰어든 이탈리아 부터가 시작부터 독일의 지원에 기대는 형국이었으니 말입니다. 이탈리아가 가진 전력 중 독일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을 해군력 조차 독일의 부족한 석유자원을 소모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1941년 2월 독일에게 자국 해군이 최소한 25만톤의 연료를 공급받지 못하면 작전을 지속하기가 어렵다고 통보했습니다. 1940년 기준으로 독일이 주로 루마니아에서 수입하던 석유의 양이 150만톤, 독일이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인조석유가 400만톤 정도였으니 이탈리아 해군만 단독으로 25만톤을 요구한다는 것은 상당한 양이었습니다.1)

부족한 전략 물자를 동맹국과 공유해야 하는 것은 매우 골치아픈 문제였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이탈리아를 필두로 한 독일의 동맹국들이 세계 일류급 병기를 제작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이탈리아 해군은 제외하고) 특히 육군과 공군 장비에 있어서 그런 문제가 두드러 졌지요. 그랬기 때문에 전쟁 초기부터 동맹국들은 독일에 근대적인 장비를 공여해 줄 것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독일의 공업 생산능력은 자국군대의 수요를 충족하는데도 버거운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동맹국들을 근대적인 장비로 무장시키는데 처음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초기의 대표적인 사례라면 이탈리아 공군에 대한 급강하 폭격기 지원을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이탈리아 공군도 급강하 폭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쓸만한 기종을 개발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공군의 기대를 모은 SM.85는 급강하 폭격기로서 실패작이었고 결국 독일의 Ju 87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 6월 독일 정부에 50대의 Ju 87을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했습니다. 이에 대해 국방군총사령부OKW는 독일 공군에 우선적으로 공급되어야 할 기종을 수출하는데 반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그러나 괴링이 수출을 승인함으로써 이탈리아 공군은 Ju 87을 장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일측은 먼저 7월에 15대, 8월에 15대, 9월에 나머지 분량을 공급하기로 약속했습니다.2) 그러나 이탈리아 공군 제 96 독립 급강하폭격기 중대96º Gruppo Autonomo Bobardieri a Tuffo에 인도된 첫 번째 Ju 87은 공장에서 생산된 신품이 아니라 독일 공군이 사용하던 중고품 이었습니다.3) 인도 자체도 당초 약속 보다 느리게 이루어져 이탈리아 공군의 두 번째 급강하폭격기 부대인 97 급강하폭격기 중대는 11월 11일에 편성되었습니다.4) 외교적인 면에서 보면 괴링의 판단은 크게 나쁜 것이 아니었지만 독일 공군에 주어져야 할 장비가 다른 곳으로 새나가는 것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940년 여름에는 영국본토항공전이 한창이었고 독일공군, 특히 중형폭격기와 급강하폭격기의 손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은 1940년 5월 부터 9월 까지 총 210대의 Ju 87을 잃었는데 이것은 1940년 5월 4일을 기준 으로 한  급강하폭격기 대수의 50%에 달하는 것 이었습니다.5)
독일이 불과 50대의 급강하 폭격기를 지원하는 것 조차 버거워 했던 것에 비해 비슷한 시기 미국은 전시 동원체제에 돌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별 어려움 없이 수백대의 항공기를 생산해서 해외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공군은 1940년 5월 1일 기준으로 커티스 호크75 306대를 포함해 440대의 미국제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불과 한 달 뒤에는 이것이 544대에 달하게 됩니다.6)

전쟁이 확대되어 가면서 이탈리아의 원조 요청은 점차 늘어났습니다.  이탈리아는 1940년 11월 20일 독일 국방군총사령부에 3,000대(!)의 트럭을 알바니아에 주둔한 이탈리아군에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7) 그 무렵 바르바로사 작전을 앞두고 프랑스와 영국제 노획차량 까지 긁어모아 배치하고 있던 독일군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이 요구는 말 그대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독일군은 당연히 이 엄청난 요청을 거부합니다. 독일측은 트럭을 원조하지 못하는 대신(그리고 그 당시까지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그리스를 고려하여) 이탈리아군의 수송 지원을 위해 Ju 52를 장비한 제1 특수임무 폭격비행단 3대대III./Kampfgeschwader z.b.V.를 파견합니다. 이 대대는 1940년 12월 10일 부터 1941년 2월 5일 까지 이탈리아군 29,000명과 물자 2,700톤을 알바니아로 수송했고 부상병 7,500명과 그 밖의 병력 2,900명을 알바니아에서 이탈리아로 후송했습니다.8) 물론 이러한 지원이 이탈리아군에게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탈리아군 자체의 능력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의 장비가 개선되지 않는 이상 전투력의 향상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것은 이후 북아프리카 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1940년 프랑스의 패배 이후 독일 진영으로 합류한 루마니아는 이탈리아 보다 더 상황이 안좋은 곳이었습니다. 얼마안가 닥치게 될 바르바로사 작전은 기계화 부대가 중심이 된 대규모 지상전 위주였는데 루마니아는 그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루마니아는 1935년 까지도 1919년에 구입한 르노FT-17을 주력전차로 사용하고 있었고 이것들이 완전히 구식화 되고 제대로 가동도 되지 않게 된 1935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현대적인 전차를 생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루마니아는 기갑전력의 확충을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에 126대의 LT-35 전차와 417대의 CKD AH IV 소형전차Tankette, 프랑스에는 200대의 르노 R-35 전차를 주문했습니다. 이 중에서 루마니아가 주문한 대로 양도된 것은 LT-35 뿐이었고 CKD AH IV소형전차는 35대, 르노 R-35는 40대만이 인도되었을 뿐 입니다.9)
루마니아는 프랑스가 패배한 뒤 독일의 편으로 갈아타면서 독일이 자국의 부실한 기갑전력을 보충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루마니아의 요청에 의해 파견된 루마니아 주재 독일육군사절단Deutsches Heeresmission in Rümanien, 약칭 DHM은 루마니아군에 대한 훈련과 군사원조 요청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루마니아군에 대한 훈련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앞두고 루마니아에 독일군이 대규모로 증파되면서 훈련에 투입할 인력을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루마니아군의 제5, 6, 13, 18, 20 보병사단에 독일식의 소부대 전술 교육을 위한 훈련소가 설치되었고 별도로 독일육군사절단 본부에 의해 독일식의 전쟁대학Kriegsakademie과 유사한 고급장교 교육과정이 설치되었습니다.10) 하지만 장비 지원은 거의 성과가 없었습니다. 루마니아군은 독일의 3호전차와 같은 현대적인 전차를 원했지만 독일군도 전차가 부족한 실정이어서 결국 프랑스와 폴란드에서 노획한 30여대 정도의 R-35전차가 양도되는데 그칩니다. 이탈리아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한 괴링과 달리 육군참모총장 할더Franz Halder는 루마니아 정부의 독일제 전차 수출 요청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11) 히틀러는 대 프랑스전이 종결된 직후인 1940년 7월 9일 월간 전차생산량을 380대로 높일 것을 지시했지만 독일의 공업력으로는 단시일 내에 이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결국 히틀러는 1940년 9월 28일 명령에서 전차생산량 목표치를 하향 조정하게 됩니다. 이에 따르면 1940년 9월 부터 1941년 4월 까지 전차 1,490대, 즉 월간 213대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12) 이런 상황에서 동맹국에게 까지 최신형 전차를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루마니아 공군도 비슷한 실정이었습니다. 독일은 루마니아에 소수의 Bf109와  He111을 판매하긴 했으나 독일제 항공기의 면허생산은 거부했습니다. 현대적인 항공기를 대량으로 보유하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수입한 항공기들로 공군이 구성되었기 때문에 루마니아 공군은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폴란드, 루마니아제 등 잡다한 항공기를 운용해야 했습니다.13)

1941년에는 독일의 동맹군들이 제한적인 작전에만 참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장비의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루마니아군의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용감히 싸우긴 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고 오데사를 둘러싼 전투에서는 소련군이 자발적으로 철수할 때 까지  도시를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오데사 공격을 담당한 루마니아 제4군은 오데사가 함락 될 때 까지 장교 4,161명을 포함해 11만명에 달하는 인명손실을 입었습니다.14) 특히 루마니아의 유일한 기계화부대인 제1기갑사단은 오데사 전투에서 사실상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LT-35를 장비한 1기갑사단의 1전차연대는 오데사의 요새화된 방어선에 대한 공격에서 글자 그대로 소모되었습니다. 손실을 보충해 줄 수 있는 것은 독일 뿐이었는데 독일의 전차 생산능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15)
헝가리가 파병한 부대 중 유일하게 이렇다 할 기갑전력을 갖춘 쾌속군단(1, 2차량화여단과 2기병여단으로 편성)은 루마니아군의 1기갑사단 보다도 전투력이 더 떨어지는 수준이었습니다. 헝가리의 쾌속군단은 이탈리아제 CV35 65대와 스웨덴의 L60 전차를 면허생산한 톨디 전차 95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루마니아가 보유한 LT-35나 R-35와 마찬가지로 동부전선에 투입하기에는 심각하게 부족한 장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쾌속군단은 루마니아군과 달리 독일군을 따라 우크라이나 깊숙히 진격, 1941년 10월 말에는 이쥼Ізюм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을 따라 진격하면서 우마니Умань 전투 등 일련의 격전을 치러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됩니다. 헝가리 쾌속군단은 1941년 11월 재편성을 위해 전선에서 이탈할 때 까지 전차의 90%를 상실했고 차량 1200여대와 병력 26,000명 중 8,000명을 잃었습니다.16)
 이탈리아가 파견한 소규모 원정군,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단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 약자 CSIR” 은 1941~1942년 전역을 그런대로 잘 견뎌냈다고 평가받습니다. 이 군단은 북아프리카 전선에 파견한 기갑사단을 제외한다면 이탈리아군에서 가장 잘 장비된 사단들로 편성되었지만 루마니아나 헝가리군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전력이었습니다. 이 군단에 배속된 3개 사단 중 차량화사단Divisioni autotrasportabile이었던 파수비오Pasubio사단과 토리노Torino사단은 완전한 차량화 사단이 아니었습니다. 이때문에 군단장 메세Giovanni Messe는 작전 중 종종 두 사단 중 한 사단에 차량을 집중시켜 차량화시키고 나머지 사단은 일반 보병사단으로 운용하기도 했습니다.17) 그리고 쾌속사단Divisione celere이라는 명칭으로 불린 PADA(Principe Amedeo d’Aosta)사단은 2개 기병연대로 편성된 기병사단으로 역시 기계화와는 거리가 먼 부대였습니다. 이탈리아 원정군단은 기동수단으로 5,500대의 차량과 1,550대의 오토바이, 4,600마리의 말/노새를 보유했는데 이러한 장비 내역은 반쪽짜리 기계화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기갑전력은 PADA사단에 배속된 60대의 L3/33(CV33)이 고작이었습니다.18)

독일의 1942년 전역은 이렇게 누적된 문제가 재앙으로 전이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동맹국들은 1942년 전역에 더욱 더 대규모로 참전합니다. 헝가리와 이탈리아는 원정군의 규모를 1개 야전군으로 증강했고 루마니아군은 1941년과 달리 독일군을 따라 남부 러시아 깊숙히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루마니아, 헝가리, 이탈리아 정부는 독일에게 75mm Pak 40과 같은 일선급 대전차포를 요청했습니다. 또한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1941년 전역에서 크게 소모된 기갑전력을 복구하는데도 독일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 역시 1941년 전역의 피해를 채 복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세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맹국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독일은 동부전선의 동맹국들에게 Pak 40 대신 노획한 프랑스제 75mm포를 개조한 Pak 97/38이나 50mm  Pak 38, 37mm Pak 36을 제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가장 강력한 75mm  Pak 97/38은 수량이 충분치 못해 이탈리아 제8군의 경우 1942년 5월 1일 기준으로 54문을 보유하는데 그쳤습니다. 이탈리아군 대전차 전력의 주력은 구식인 47mm 대전차포 297문이었고 이것은 T-34에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여기에 포병연대에서 야포로 사용하는 75mm포(Cannone da 75/32 Modello 37) 201문이 유사시 대전차전을 수행하는 정도였습니다.19) 루마니아군의 사정도 그다지 나을 것은 없어 1942년 전역이 시작될 무렵에는 37mm Pak 36이나 47mm 대전차포가 주력이었습니다.20) 그리고 이탈리아군 보다도 더 늦은 1942년 10월이 되어서야 Pak 97/38이 소량 보급되는데 그쳤습니다.
Pak 97/38은 1942년 11월 소련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을 때 독일의 동맹군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대전차포 였습니다. 루마니아군은 소련군의 동계반격 당시 보병사단 당 6문 정도의 Pak 97/38를 보유하고 있었고 여전히 대부분의 대전차 전력을 37mm나 47mm 대전차포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일은 대전차 지뢰조차 제대로 보급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더 나빴습니다.21)  루마니아군 기병사단의 경우는 상황이 더 나빠서 5기병사단이 75mm 대전차포 4문을 보유하는데 그쳤고, 루마니아군 8기병사단은 단 한문도 보유하고 있지 못했습니다.22) 이탈리아 제8군도 그다지 나을 것은 없어서 사단 당 4문에서 16문 정도의 Pak 97/38을 보유하는데 그치고 있었습니다.23) 그리고 Pak 97/38 조차도 T-34에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태가 속출하자 루마니아군과 이탈리아군은 급격히 붕되었습니다.24) 독일은 동맹국들에게 겨우 겨우 소량의 75mm 대전차포를 지원했지만 충분한 대전차용 탄약을 공급하지 못했고 이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기갑전력에 있어서도 별로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독일은 1942년 초 부터 루마니아군과 헝가리군에 구식화된 35(t) 전차나 38(t) 전차를 소량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3호전차나 4호전차와 같은 일선급 전차의 지원은 매우 소규모로 이루어졌습니다. 헝가리군은 1942년 하계공세가 시작되기 직전인 1942년 5월 까지 불과 22대의 4호전차만을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헝가리는 독일의 지원이 너무 소규모 였기 때문에 독일이 루마니아군에 신형 장비를 우선적으로 지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만까지 가질 정도였습니다.25) 하지만 전차 지원은 헝가리군이 루마니아군 보다 나았습니다. 루마니아군은 보충용으로 LT-35의 독일판인 35(t) 전차를 지원받다가 1942년 9월이 되어서야 겨우 75mm포 탑재 3호전차와 4호전차(50mm 장포신형 3호전차로 기술한 자료도 있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을 때 루마니아군 제1기갑사단의 주력은 87대의 LT-35, 35(t) 전차였고 3호전차(와 4호전차)는 21대에 불과했습니다.26)

공군에 대한 지원도 그다지 나을것이 없었습니다. 독일이 1942년 초 부터 루마니아 공군에 인도한 항공기는 글자그대로 한줌에 불과한 수준으로 Bf 109 E-7 15대(1월~3월), He 111 H-6 10대(1~3월), Do 17M 10대(4~5월), Ju 52/3m 18대, He 114 10대(4월), Fi 156 14대(4월) 정도였습니다.27)
헝가리의 경우는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헝가리 또한 산업기반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1938년 부터 항공산업에 대한 투자를 증대시켰고 1941년 6월 6일에는 독일과 항공기 공동생산을 위한 협약에 조인해 Bf 109, Me 210 그리고 DB 605엔진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헝가리의 항공산업은 독일의 부족한 항공기 생산능력을 보완해 주는 존재였던 것 입니다. 이 협약은 독일이 부품과 기술을 제공하는 대신 헝가리가 생산하는 항공기와 엔진을 일정 비율로 독일공군에 납품하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즉 Bf 109는 독일과 헝가리의 비율이 2:1, Me 210은 1:1, DB 605엔진은 2:1였습니다.28) 물론 헝가리의 부족한 산업력으로 현대적인 공군을 단시간 내에 육성하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긴 했습니다만 헝가리의 노동력이 독일의 부족한 산업력을 보완하는데 사용된 셈입니다.

1943년 이후 독일의 군수물자 생산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동맹국에 대한 장비 지원도 다소 증가하게 됩니다. 루마니아는 1943년에 50대의 38(t) 전차외에 4호전차 31대와 돌격포 4대를 인도받았는데 1944년에는 4호전차 100대와  돌격포 114대를 인도받았습니다. 헝가리는 1944년에 4호전차 62대, 돌격포 40대, 헤처 75대, 판터 5대, 티거 3대를 인도받았습니다. 이밖에 다른 동맹국들도 예전 보다는 많은 전차를 지원받았습니다. 핀란드는 1943년 부터 1944년까지 4호전차 15대와 돌격포 59대를 받았고, 불가리아는 1943년에 38(t) 전차 10대와 3호전차 10대, 4호전차 46대, 돌격포 25대를 받았습니다. 슬로바키아는 1943년에 2호전차 16대, 38(t) 전차 37대, 3호전차 7대, 마더II 자주포 18대를 받았습니다.
항공기 지원도 비슷하게 증가해서 독일은1943년 부터 루마니아 공군의 현대화를 위해 Bf 109G, Ju 88, Ju 87, Hs 129등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1942년과 비교하면 1943년 이후의 항공기 지원은 다소 증가했습니다. Bf 109의 경우 1944년 7월에 60대, 8월에 40대가 루마니아 공군에 인도되었고 9월 이후로는 월간 20~25대를 인도할 예정이었습니다.29) 또한 뒤늦게나마 루마니아의 Bf 109 면허생산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 공군의 지속적인 손실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 구식화된 He 111이나 Ju 86도 함께 지원되는 등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헝가리의 경우 1942년 부터 1944년까지 Me 210 270(272)대와 Bf 109 471(488)대를 생산했습니다.30) 하지만 루마니아는 비슷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하게 동원하지 못했습니다. 루마니아는 1943년에 Fi 156 3대, 1944년에 Fi 156 7대와 Bf 109 6대를 생산하는데 그쳤습니다.31)

독일의 지원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미국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입니다. 미국은 1942년 이후 동맹국들이 여러개의 기갑사단을 편성해서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장비를 원조했습니다. 독일이 동맹국들에게 수십대의 전차를 인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1942년만 하더라도 미국은 수백대의 전차를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에게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항공기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독일이 불과 수십대의 Ju 87을 인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1940년만 하더라도 미국은 수백대의 항공기를 외국 군대에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차량을 예로 들면 그 차이가 더 잘 드러납니다.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수십만대의 차량을 지원했습니다. 반면 독일은 자국의 차량 수요도 채울 수 없었으며 독일의 동맹국들은 그보다 더 심각한 기동력 부족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미국이 자국의 최신 장비들을 대량으로 공여할 수 있었던 반면 독일은 그럴 수가 없어 노획장비나 구식화된 장비들을 소규모로 제공하는데 그쳤습니다.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의 조병창”이었던 반면 독일은 동맹국들의 자원까지 쥐어짜야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얼마 되지 않는 동맹국들의 산업력조차 적절하게 동원하지 못했습니다.



1) Adam Tooze, The Wages of Destruction : The Making and Breaking of the Nazi Economy, (Viking Penguin, 2007),  p.411
2) Hans Werner Neulen, Am Himmel Europas : Luftstreitkräfte an deutscher Seite 1939~1945, (Universitas Verlag, 1998),  pp.37~38
3) John Weal, Junkers Ju 87 Stukageschwader of North Africa and the Mediterranean, (Osprey Publishing, 1998), p.16
4) Richard L. DiNardo, Germany and the Axis Powers : From Coalition to Collaps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44
5) Williamson Murray, The Luftwaffe 1933~45 : Strategy for Defeat, (Brassey’s, 1996), p.45
6) Karl-Heinz Frieser, Blitzkrieg-Legende : Der Westfeldzug 1940, (Oldenbourg Verlag, 1995), p.55
7) Richard L. DiNardo, ibid., p.77
8) Karl-Heinz Golla, Der Fall Griechenlands 1941, (Mittler&Sohn, 2007), p.65
9) Alexander Statiev, “The Ugly Duckling of the Armed Forces : Romanian Armour 1919~41”,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12, No.2(1999. 6), pp.220~224
10) Richard L. DiNardo, ibid., p.99
11) Alexander Statiev, ibid., p.225
12)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 (Mittler&Sohn, 1988), pp.21~22
13) Richard L. DiNardo, ibid., p.98, 111
14) Peter Gosztony, Hitlers Fremde Heere : Das Schicksal der nichtdeutschen Armeen im Ostfeldzug, (Econ Verlag, 1976), p.152
15) Alexander Statiev, ibid., pp.237~239
16) Peter Gosztony, ibid., pp.154~156, 161
17) Richard L. DiNardo, ibid., p.128
18) Gerhard Schreiber, “Italiens Teilnahme am Krieg gegen die Sowjetunion : Motive, Fakten und Folgen”, Jürgen Förster(hrsg), Stalingrad : EreignisㆍWirkungㆍSymbol, (Piper, 1992), p.259; Thomas Schlemmer,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Dokumente zu Mussolinis Krieg gegen die Sowjetunion, (Oldenbourg Verlag, 2005), pp.14~15
19) Thomas Schlemmer, ibid., p.29; Richard L. DiNardo, ibid., p.141
20) Richard L. DiNardo, ibid., p.141
21) Manfred Kehrig, Stalingrad : Analyse und Dokumentation einer Schlacht, (Deutsche Verlags-Anstalt, 1974), p.66; Richard L. DiNardo, ibid., p.150
22) Manfred Kehrig, ibid., p.667
23) Peter Gosztony, ibid., pp.501~507
24) Richard L. DiNardo, ibid., p.154
25) Richard L. DiNardo, ibid., pp.140~141
26) Manfred Kehrig, ibid., p.668
27) Hans Werner Neulen,  ibid., p.103
28) Miklos Szabo, “The Development of the Hungarian Aircraft Industry, 1938~1944”,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65(2001. 1), p.64
29) Hans Werner Neulen,  ibid., p.108, 114
30) Hans Werner Neulen,  ibid., p.329; 괄호 안의 수치는 Miklos Szabo, ibid., p.76
31)  Hans Werner Neulen,  ibid., p.328

2006년 12월 24일 일요일

헝가리식 절멸전쟁? (재탕)

원래 페리스코프의 게시판에 올렸던 번역 글인데 이곳이 운영자님의 사정으로 폐쇄됐는지라 여기에 재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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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58호에 실린 Truman O. Anderson의 “A Hungarian Vernichtungkrieg? Hungarian troops and the Soviet Partisan War in Ukraine, 1942”를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에는 자주 영미권 학자들의 영어 논문이 실리는데 이놈도 그 중 하나입니다. 내용이 매우 좋다고 생각돼서 게시판에 올립니다. 각주 번역은 편의상 생략했는데 양해를 바랍니다.

헝가리식 절멸전쟁? 헝가리군과 우끄라이나의 빨치산 전쟁 1942년


1. 도입

독일의 전쟁 범죄에 대한 독일 정규군의 개입 문제는 독일 역사학계에서 중요한 문제로 다뤄져 왔다. 함부르크 사회학 연구소(Hamburger Institut für Sozialforschung)의 “독일 국방군 전시회”개최는 독일 사회의 “씻을 수 없는 과거” 문제를 새로운 논의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독일 국방군이 조직적으로 범죄행위에 개입했음은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독일 국방군이 행한 범죄의 정도와 규모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 연구도 이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학자들은 동유럽 출신 자원자들이 폴란드와 소련 유태인에 대한 학살에 개입한 문제와 이른바 “동방군단(Osttruppen)”문제에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으나 중동부 유럽 국가의 독일동맹군들이 “이념 전쟁”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서적들은 대부분 오래전에 출간되었으며 각기 다른 분석을 하고 있다. Alexander Dallin은 독일 점령하의 오뎃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독일군이 루마니아군 보다 민간인을 잘 대했다고 지적했지만 독일의 점령 정책 자체는 매우 가혹한 것 이었다고 평가했다. John Armstrong 역시 하버드 대학의 인터뷰 자료를 바탕으로 이 의견을 지지했는데 하버드 대학의 자료에 헝가리군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한편 Peter Gosztony(동부전선의 헝가리군을 연구한 몇 안되는 학자이다.)는 헝가리는 독일군에 비해 민간인을 훨씬 온건하게 대우했다고 주장했다.

본 논문에서는 1942년 우끄라이나 일대에서 독일군과 헝가리군 지휘관들이 전선후방의 빨치산 활동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분석하여 헝가리군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남부 후방군사구역(rückwährtiges Heeresgebiet Süd)에서는 독일, 헝가리군과 현지 자원병들이 중 동부 우끄라이나 일대에서 증대하는 일반 주민들의 소요와 날로 커져가는 빨치산 활동을 상대하여 독일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군사구역 북부(체르니히프와 수미)는 헝가리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헝가리군은 독일군에 비해 형편없는 무장과 훈련 상태였지만 빨치산 활동이 심각한 지구를 맡고 있었고 반대로 독일 보안 부대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남부 일대를 담당하고 있었다. 헝가리군 지휘관들은 손실이 증대하자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헝가리군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역량에 비해 지나치게 큰 임무를 맡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한 반면 독일측은 헝가리가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독일과 헝가리측의 논쟁은 인력과 장비 부족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우끄라이나 지역의 민간인에 대한 보복 문제로 넘어갔다. 헝가리군은 빨치산 세력을 직접적으로 타격할 수 없게 되자 많은 민간인을 살상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방식으로 대응했으며 이것은 독일군은 물론 우끄라이나의 협조적인 세력에게도 반발을 불러왔다. 이들은 이러한 보복은 효과가 없으며 반작용만 일으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 헝가리군 장군 한 명은 자신의 관할구역 내 빨치산 출몰지역의 남성 중 만 15세에서 60세 사이의 사람을 모두 사살하자는 의견을 내놓기까지 했다. 독일측은 헝가리측에 자제할 것을 권고하고 가혹한 보복은 게릴라 활동만 증대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양측은 1942년 9월에서 10월까지 게릴라 출몰지구의 마을 주민을 소개시키고 마을을 초토화 시키기로 합의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독일의 잔인하고 무차별적인 대 빨치산 작전 수행 방식에 비추어 보면 이런식의 대응은 약간 놀랍기도 하다. 그러나 그 실상을 보면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빨치산전에 대해서 독일측이 조사 분석한 문헌(주로 벨로루시아 지역을 다루고 있다)을 보면 독일측은 우끄라이나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끄라이나 대부분이 탐욕스러운 에리히 코흐(Erich Koch)의 우크라이나 제국위원회(Reichskommissariat Ukraine)의 통치하에 들어갔을 때 드네쁘르강 동안의 광대한 지역은 1942년부터 1943년 까지 독일의 군정 통치하에 있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파괴적인 경제 수탈등 가혹한 독일의 통치에 복종하고 있었으나 상당수의 독일군 고위 간부들은 친 우끄라이나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중에서는 남부 후방군사구역 사령관인 칼 폰 로끄(Karl von Roques)중장과 부사령관이고 나중에 로끄의 후임이 된 에리히 프리데리치(Erich Friderici) 중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유대-볼셰비즘에 대한 투쟁에 열성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은 우끄라이나 토착민들을 빨치산 활동에 대한 보복 같은 가혹한 독일의 점령정책 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들의 정책은 인간 존중 보다는 실용적인 목적이 강했지만 독일측이 1942~43년 기간동안 우끄라이나 주민의 협력을 이끌어 내려는 점령 정책으로 선회하기 전에 이미 그 기초가 확립되어 있었다. 반면 같은 기간동안 헝가리군이 저항세력을 분쇄하기 위해서 잔혹한 방식을 택했다. Gosztony는 헝가리군이 독일군 보다 민간인을 살상하는 것을 꺼렸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일측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부 후방군사구역에서 발생한 가장 잔혹한 보복 작전은 대부분 헝가리군이 수행한 것 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민간인에 대한 보복에 대해 독일측과 헝가리측이 벌인 논쟁에서 양측이 보인 태도는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독일측 역시 중요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민간인을 “적당하고” “공정하게” 대우한다는 독일군의 기준은 항상 지켜진 것이 아니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1943년에 독일의 우끄라이나 지배가 끝장날 때 까지 친 우끄라이나적 성향을 유지했으나 이런 온정주의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나마 전쟁이 격화되어 가면서 이에 대한 인식 자체도 희박해 졌다. 독일 지휘관들의 재량권 밖에서 행해지는 일들로 우끄라이나인들의 우호적 협력을 이끌어 내려는 군 당국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우끄라이나 주민에 대한 강제 노동 징발 – 로끄와 프리데리치가 강력히 반대했다. - 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독일측의 빨치산 소탕 방식 역시 사실은 헝가리군 보다 낫다고 할 수 없었다. – 물론 독일측은 자신들이 훨씬 온건하다고 믿고 있었으나. 독일측의 잔인한 대응역시 우끄라이나 인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게릴라 전에 대한 독일 지휘관들의 명령 역시 매우 모순적인 것 이었다. 이들은 이른바 “깨끗한 전쟁”을 치루려는 신념과 “이데올로기상의 적”을 분쇄하려는 투지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1942년에 독일측이 행한 빨치산 토벌작전 기록을 상세히 분석한 결과 독일 지휘관들이 우호적인 자세를 견지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에게 큰 피해를 줬음이 드러났다. 1942년 9월에서 10월사이에 독일측이 민간인 소개를 실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개된 민간인들을 위한 준비는 매우 형편없이 준비 되었다. 독일측은 작전과정에서 민간인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작전의 일부만을 행했을 뿐이며 나머지 “더러운 역할”은 다른 조직이나 부대 관할로 넘어갔다. SS와 경찰 부대는 1942년부터 43년까지 헝가리군 지구에서 헝가리군을 지원하여 여러 차례의 잔혹한 소탕 작전을 전개했다. 국방군 간부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보통 합동 작전이 순조롭게(reibunglos)진행되었다고 기록했을 뿐 이었다. 또한 잔학행위는 남부 후방군사구역 직할의 비밀 야전 헌병(geheim Feldpolizei)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헝가리군의 보복 작전에 대한 독일측의 비난은 자기 위선이나 뻔뻔한 기만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일군 지휘관들이 자국군의 잔학행위와 헝가리군의 잔학행위를 구별지워 판단하려 했다는 점은 흥미로운 점이다. 아마도 독일 지휘관들이 자국의 동맹군을 비난한 것은 독일군이 예의 바르고 전문적인 집단이라는 환상과 자국 군대가 41년 6월 22일 이후 자행한 일의 책임에 대한 두려움 간의 충돌로 인한 혼란을 반영하는 것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독일측 지휘관들의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것은 이 논문의 주제가 아니다. 이 논문의 초점은 헝가리군이 동부전선에서 수행한 “절멸 전쟁(Vernichtungkrieg)”이 실제로 어떻게 수행되었으며 잔학행위의 원인은 무었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 이다.

이 연구는 독일, 러시아, 헝가리의 1차 문헌을 이용하여 이루어 졌다. 독일측 기록으로는 남부 후방군사구역과 그 예하 부대의 작전 일지가 포함되어있다. 이 기록은 독일 연방 문서 보관소 군사 분과에 보관되어 있는데 다행히도 1942년 부분은 거의 손상 없이 남아있으며 민간인과 접촉이 빈번했던 비교적 하급 제대의 기록까지 있다. 관련 기록으로는 알렉산드리아의 미국 연방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마이크로필름도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측 문헌으로는 우끄라이나의 빨치산 조직과 지하 공산당 조직, 이들을 지원한 NKVD의 기록과 1944년 초까지 독일 점령기간을 연구한 지역 정부의 연구 기록등이 있다. 이러한 문서들은 기예쁘의 국가 중앙 문서보관소와 체르니히프, 수미 현의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일부 자료는 1997년에 필자가 체르니히프와 수미에 당시 살았던 주민들을 인터뷰하여 수집하였다. 헝가리군에 대해서는 부다페스트의 군사사 기록 보관소(Hadtörtnélmi Levéltar)에 보관된 자료를 참조했다.


2. 1942년 3월까지 우끄라이나의 빨치산 전쟁

바바로사 작전초기에 독일 국방군은 빨치산에 대한 문제는 겪지 않았다. 스딸린은 전쟁 이전에는 빨치산 부대 조직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소련측은 전쟁 초기에 효율적인 조직을 편성하지 못 했다. 초기에 편성된 빨치산 조직은 지역당 조직과 NKVD에 의해 조직되어 일반 주민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지 못 했다. 특히 우끄라이나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독일은 침공전에 준군사 조직이나 민간인의 저항이 있을 경우 무자비한 보복을 가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으나 그럴 필요 자체가 없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받자 보복은 유대인과 공산당 등 적대적(이라고 생각되는)집단에만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군 총 사령부는 1941년 7월 12일에 이러한 방침을 확정했다. 남부 후방 군사구역 사령관 폰 로끄는 우끄라이나는 우호적인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라고 주장하고 육군 총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정의롭다는 인상은 유지되어야 한다.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사보타지 행위에 대해서 우끄라이나인 들에게 책임을 돌려서는 안되며 그것은 유대인과 러시아인들에게 돌려야 한다. 보복 역시 유대인과 러시아인에 한해서만 행해야 할 것이다."

황당하지만 이 명령은 바바로사 작전 초기에는 충실하게 수행되었다. 폰 로끄는 민간인에 대한 보복행위가 있을 경우 모두 “특별 사건(besondere Ereignisse)”으로 분류하여 자신에게 분류하라고 명령했지만 일부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산발적인 빨치산 활동에도 불구하고 1941년 10월 이전에 대량 보복은 단 한 건이 있었다. 1941년 8월 29일 제 454 보안 사단 소속의 82 차량화 헌병 대대는 체르보녜 마을에서 우끄라이나인들이 빨치산이라고 고발한 유대인 63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10월부터 사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국방군은 동진하면서 공산당이 좀더 조직적으로 지하조직과 빨치산을 편성한 지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제 빨치산은 낙오된 소련 정규군이나 퇴각하는 정규군 부대를 지원하여 직접적으로 독일군과 교전하기 시작했다. 드녜쁘르강 만곡부 지역에서는 수주간 보안 사단과 빨치산 부대간의 교전이 계속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남부 후방군사구역은 제 6 군으로부터 제 62 보병사단을 증원 받아 뽈따바 지구의 빨치산을 소탕했다. 여기서부터 남부 후방군사구역의 대 민간인 정책과 상충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폰 로끄의 명령에 반해 남부 후방군사구역 예하 병력은 군사구역 참모부의 명령에 따라 우끄라이나인 마을을 불태우는 보복을 시작했다. 생포된 빨치산이나 의심스러운 사람은 순찰하는 독일군이 즉결 처형을 했다. 보복 작전에서 유대인에 대한 학살도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이것은 군사구역 사령부가 다른 동부 전선의 정규군과 마찬가지로 유대-공산주의에 대한 고정 관념을 대 빨치산 작전에 그대로 반영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우끄라이나 민간인의 살상에도 불구하고 군사구역 사령부는 12월에 친 우끄라이나적 점령 정책을 고수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우끄라이나 인을 “아리안”인종으로 규정했다. 프리데리치는 12월 14일자 명령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독일에 대한 우끄라이나 민간인들의 우호적인 태도는 반드시 지속되어야 한다. 우끄라인들의 해방에 대한 소망이 새로운 지배자에 대한 공포로 바뀌는 것은 안된다.”

한편, 12월부터 헝가리군이 후방군사구역에 투입되어 빨치산 소탕에 참여했으며 곧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군사구역 예하의 헝가리 군은 “헝가리 동부 수비 집단(königliche ungarische Besatzunggruppe Ost)”으로 불리웠으며 제 102, 105, 108 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12월 18일 에서 19일, 독일측은 체르니히프 북동쪽 75km 에 위치한 꼬류끼프까 지구에서 1,700명 정도로 추산되는 빨치산 집단을 파악했다. 독일 정보당국은 이들이 소련 제 4군의 장교와 중앙당 간부, 그리고 지역당의 열혈당원, 유대인 대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박격포와 자동화기, 그리고 많은 말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했다. 12월 20일, Kálman Csiby대령이 지휘하는 제 105 여단 2 대대가 게릴라 소탕을 위해 출동했다. 이틀 뒤 대대는 게릴라 700명을 사살했으며 잔여 인원은 중부 집단군 지구로 도주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보고서는 빨치산에게 식량을 제공한 유대인 90명을 작전 중 사살했으며 최소한 마을 한 곳을 완전히 초토화 시켰다고 기록되었다. 독일측 기록에는 이 지역의 전투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없다. 그러나 105 여단이 이후의 전투에서 형편없는 전과를 올린점에 미뤄 본다면 빨치산 700~800명 사살은 확실한 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소한 100명 이상이 죽은 것은 분명하다. 최근의 러시아측 문헌은 이 소탕 작전에서 114명이 학살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1년 12월에 체르니히프 지구 빨치산이 배포한 삐라에도 같은 숫자가 적혀 있다. 헝가리측의 사상자 숫자로 볼 때 교전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상당수의 빨치산은 보복으로 학살된 민간인 이었다. 여단의 보고서에는 헝가리군이 전사 7명과 부상 10명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세 명이 행방불명 됐으며 우끄라이나의 경찰 보조원(Hilfspolizei, 보통 Hipo 라고 부름)중에서 11명이 전사, 9명이 행방불명, 27명이 부상당했다.

꼬류끼프까 지구 전투는 이후 헝가리군의 전투 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독일군이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로 격전을 치루는 동안 후방군사구역의 북쪽 경계는 체르니히프 일대에 형성되었다. 헝가리군은 데스나강과 벨로루시아와 러시아 경계에서 활동하는 빨치산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다. 이 지구의 빨치산은 체르니히프 지하당 조직의 통제를 받고 있었으며 미래의 소련 연방영웅 페도로프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1월 에서 3월까지 독일군이 혼란한 전선일대로 집중된 동안 후방의 헝가리 제 105 여단은 페도로프가 지휘하는 빨치산 부대와 지속적인 교전을 벌였다. 이 교전은 헝가리군과 점령군에 협력하는 우끄라이나 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1월 15일에서 18일 사이에 빨치산 부대는 홀미 일대에서 26명의 우끄라이나 경찰 보조원을 죽이고 그들의 가족 17명을 죽였으며 후퇴하는 과정에서 집 34채를 불태웠다. 2월 5일에 옐니예 에서 두 명의 헝가리 병사가 매복 공격에 사살 되었으며 12일 뒤에는 같은 장소에서 105여단 소속 병력이 매복 공격을 받아 31명의 사상자를 냈다. 헝가리군은 보복작전에서 루끼-후또르 마을을 불태우고 139명의 “빨치산”을 “사살” 했다고 보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치산의 공격은 더욱 더 대담해 졌다. 3월 2일, 헝가리 제 46 보병연대는 홀미와 꼬노똡 일대에서 빨치산의 공격을 받아 28명이 전사하고 56명이 부상, 두명이 행방불명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10일 뒤에 페도로프는 제 105 경보병사단(이전의 105여단이 개편된)의 전투단을 아바니브까 마을에서 습격해 40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다. 또한 빨치산은 30명의 경찰 보조원을 죽이고 6채의 가옥을 불태웠다. 또한 독일측 보고서에 따르면 빨치산은 지역 주민들을 위협하기 위해서 경찰 보조원의 아이들의 손을 자르고 19명의 주민을 강제로 입대 시켰다.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헝가리군은 빨치산과 그 후원세력을 “전투원”이 아닌 “범죄자”로 파악했다. 늘어나는 손실로 헝가리군의 사기는 낮아졌다. 지휘관들은 증원병력을 요구함과 동시에 독일측이 자신들에게 너무 많은 임무를 맡겼다고 불만을 늘어놓았다. 동시에 민간인에 대한 대우도 가혹해 졌으며 빨치산 소탕도 한층 더 과격해 졌다. 생포된 빨치산이 그를 감시하던 경비병 두 명을 죽이자 105 사단측은 1월 28일에 일방적으로 빨치산을 포로로 잡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측도 헝가리측의 불만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헝가리 제 105 사단장 Kolossváry 준장과 체르니히프의 독일 제 194 야전사령부(Feldkommandantur) 지휘관 뷔어펠(Würfel)중령의 요청에 따라 남부 후방군사구역 사령부는 페도로프의 빨치산 부대에 대한 토벌을 위해 증원 병력을 투입했다. 703 경비 대대(Wachbattalion)과 544 향토 대대(Landesschützen-battalion)가 증원되어 헝가리군 2개 대대와 함께 옐리녜 남쪽의 삼림지대에 대한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또한 이 전투단은 남부 후방군사구역 사령부 예하의 비밀 야전 헌병 3개 분견대(Abteilung)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 작전에서는 독일측의 정보가 매우 정확했으며 일부 우끄라이나 경찰의 탈주와 영하 15~30도에 달하는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작전은 성공적 이었다. 페도로프 집단은 900명중 22명이 사살되고 53명이 부상을 입었다. 독일측 주장에 따르면 27명이 사살되고 2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전투의 전술적인 측면은 이 논문에서 다루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전투가 끝난뒤 지역 주민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Csendes 중령이 지휘하는 헝가리군은 옐니녜 마을을 점령했으며 마을 주민 대부분은 숲으로 달아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명의 주민이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독일공군의 공습으로 대부분 사망했다. 며칠 뒤 헝가리군이 마을로 다시 갔을 때 마을 주민 대다수는 마을로 돌아와 있었다. Csendes에 따르면 그의 부대는 체포에 저항하는 주민 30명을 사살했으며 나머지 주민들을 집합시켜 독일 비밀 야전 헌병에 인계했다. 헝가리군은 옐니녜 마을을 완전히 불태웠으며 3월 29일부터 4월 4일까지 옐니녜 주변에서 민간인 536명이 체포했다. 체포된 사람 중 230명은 석방되고 나머지는 고멜에 있는 민간인 수감시설로 이송되었다. 군사구역 사령부의 기록은 여기서 끝나는데 고멜은 중부 집단군의 관할 구역이었으며 프리데리치의 관할이 아니었다. 그러나 1944년 해방 뒤 NKVD가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것에 따르면 고멜에서는 민간인들 중 노인들만 석방되고 여성과 어린이는 학살됐다고 한다.

군사구역 사령부측이 민간인 학살 소식을 접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하는 문제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어쨌거나 독일측은 작전의 성공적 종료에 크게 만족했다. 이제 군사구역 북부 지역은 평정 된 것 처럼 보였다. 703 경비 대대 대대장은 그의 나이 먹은 부하들이 훌륭히 임무를 완수한 것에 만족했다. 신병 치료차 떠나있던 폰 로끄 역시 복귀한 직후 작전의 성과를 치하했다. 만약 독일측이 헝가리군의 작전에 불만이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기록을 남겼을 것 이다. 그러나 Csendes의 추정은 독일군에 비해 덜 낙관적 이었다. 그는 최소 300명 이상의 빨치산이 포위망을 돌파했다고 추정했다. 반면 Kolossváry 준장은 작전의 성과에 만족했으나 작전 기간 중 자신의 여단이 처했던 상황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 이었다. 그의 기록은 상당히 비판적이고 빈정거리는 투로 되어 있는데 독일-헝가리 관계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이며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3. Kolossváry 준장의 비판

Kolossváry 준장은 1942년 초 105 사단의 작전 경과를 상급 부대에 보고하기 위해서 “경 사단의 역경”이라는 제목으로 네 장 분량의 기록을 남겼다. 기록은 먼저 105 사단의 절반이 예비역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 상당수는 현역 복무에 “부적합한”상태 였다고 적고 있다. 또한 그는 장교와 병사들은 정신력으로 훈련과 육체적인 문제를 극복해 왔으나 부족한 보급과 좋지 않은 기후, 그리고 지속되는 전투 손실로 지휘관들의 “열정과 초인적인 의지”가 없이는 부대의 상황이 악화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문제를 좀더 세부적으로 기록했다. 1월의 작전에서 그의 부대는 평균 영하 20~30도를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허리 높이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장거리 행군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7명이 심각한 동상으로 절단 수술을 받았으며 250명이 2도 동상에 걸렸다. 사단 예하의 각 대대는 각각 호로드니아, 바흐마취 니즈인, 노브로로드-세베르스끼, 얌삘 등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 대대중 일부는 체르니히프의 야전 병원과 사단 본부로부터 최고 70~80km 까지 떨어져 있었다. 사단의 주둔 지역은 철도망이 부실했으며 빈약한 도로 사정으로 차량 운행도 어려웠다. 이 때문에 보급 문제는 매우 열악했으며 편지 배달도 원활하지 못 했다. 사단의 한 대대는 연 초의 작전 기간 중 거의 2500km를 행군했으며 주둔지의 거주 사정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으며 가내에 가축을 같이 키우는 우크라이나 가옥”이었다. 의무 지원은 기초적인 수준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보급품에 이 같은 기생충이라도 붙어 있는 경우에는 집단 감염을 막을 수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3월 말 까지의 소탕작전에서 105 사단은 101명의 전사자와 129명의 부상자를 냈다. 부상자들은 좋지 않은 날씨와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체르니히프의 병원으로 이송되는 동안 큰 고통을 겪었다.

헝가리군이 겪은 여러가지 고통 중에서도 가장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외국인 지휘관과 병사들의 노력을 무시하고 기상 상황에 대해 잘못 된 정보를 주며 불가능한 임무를 맡기는 그들의 행태”였다. 그는 소련측이 이런 불만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독일군과 헝가리군 사이의 균열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빨치산은 그들이 약탈하고 방화한 마을을 헝가리군의 소행으로 돌리고 있으며 이 때문에 독일측은 이러한 사태가 사전에 아무런 논의도 없이 발생한데 해서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그래서 양 측의 관계 개선이 되지 않으며 이런 문제를 조사하는데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Kolossváry 준장은 결론에 가까워 지면서 자신의 작전 구역의 빨치산이 숫적으로 매우 우세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 지역이 나폴레옹 전쟁당시 가장 치열한 빨치산 활동을 벌였으며 내전 당시에도 역시 활발한 게릴라 활동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현재의 상황은 빨치산의 세력 확대에 매우 유리한 상황 조성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자신의 한 페이지 반에 걸쳐서 자신의 담당 구역의 면적, 각 부대의 행군 범위, 3월의 작전에서 사살한 빨치산 숫자(그는 5,132명으로 추정했다.)등을 근거로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 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단이 맡고 있는 고정 거점 방어를 우끄라이나 부대에 넘기고 각 대대를 사단의 통제하에 운용하며 화염방사기와 박격포, 대전차포와 기관단총의 보급을 요청하는 한편 독일측에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을 요구했다. 사실 이것들은 매우 간단한 요구사항이었다. Kolossváry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 폰 로끄의 참모진들은 헝가리측에 추가적인 작전을 요구했다. 폰 로끄는 그의 후임인 프리데리치와 마찬가지로 헝가리측이 병력과 장비 부족이 작전 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폰 로끄는 헝가리군의 상태에는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Kolossváry가 보고서를 올리기 전에 폰 로끄는 육군총사령부 군수국에 헝가리측의 곤궁함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보복에 대한 문제는 논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헝가리군과 독일군측에 상당기간 의견 일치를 가져왔다. Kolossváry의 보고서에서는 헝가리군과 독일 상급 사령부 사이의 의견 불일치 문제를 주로 지적했으며 지역 주민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인 분석을 했다. 그러나 다시 여름으로 접어 들면서 민간인에 대한 헝가리군의 태도는 한층 더 격해 졌고 민간인에 대한 보복 문제는 헝가리군과 독일군 사이에서 전략 전술적으로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4. 하계 대공세와 보복에 대한 논의


봄의 홍수와 페도로프 집단의 퇴각으로 헝가리군의 담당 지구는 일시적으로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 4월부터 5월 사이에는 빨치산과의 특별한 교전은 없었다. 군사구역 사령부는 새로운 하계 공세인 BLAU 작전 수립에 몰두했다. 이 때문에 10만 평방 km에 달하는 지역에서 빨치산 소탕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기껏 1,32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6월에 군사구역의 관할 구역이 수미 지구까지 확대되면서 브랸스끄 일대의 삼림지대에 거점을 둔 강력한 빨치산 부대를 상대하게 되었다. 일부 빨치산 부대는 수미에 확보한 전방 기지를 기반으로 작전을 펼치고 있었으며 얌삘 남쪽과 서쪽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6월 말이 되자 군사지구 사령부는 중부 집단군 으로부터 병력을 증원 받았으며 시도르 꼬빡 일대에 있는 대규모 빨치산 부대를 섬멸하기 위해서 헝가리 108, 105 사단의 일부 병력과 소련군 포로로 편성한 “투르키스탄” 대대, 공군의 비행장 경비 병력 1개 중대, 꼬노똡 에서 차출한 건설 부대 병력(Gruppe Becker, 베커 집단), 1개 전차 중대, 공병, 대공포 등 1,2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작전은 6월 20일부터 26일 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평가는 상반되었으며 독일측은 기대이하의 성과로 헝가리측과 논쟁을 벌였다. 헝가리측은 250명을 작전 중 사살하고 143명을 생포한 뒤 처형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상당수의 포로를 독일 비밀 야전헌병의 감시하에 뿌띠블리 지구로 이송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독일과 헝가리 모두 빨치산 주력은 포위망을 빠져나갔다는 점을 인정했다. 헝가리군 사령관 Imre Bogányi 중장은 지역 민간인들이 작전 실패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작전 기간 중 민간인들이 빨치산이 포위망을 돌파하는데 도움을 줬다고 주장했다. 그는 작전 중에도 노바 슬로브다, 야치녜, 체레뽀보, 이바니프스끼, 세슐린등의 마을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그는 작전 구역의 남성중 15~60세의 남성은 모두 사살하고 생포해서 이송한 포로들도 사살해야 하며 여자 포로들 중에서도 가슴 밑에 별 무늬 문신(공산당 지하조직원들이 주로 사용한 표지)을 한 경우는 사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Bogányi 중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6월 25일에 베류흐에서 발생한 폭탄 폭발의 책임을 물어 베류흐에서 10명의 인질을, 그 인접 마을들에서 각각 5명씩의 인질을 처형했다.

이와 관련된 독일측 기록으로는 노바 슬로바다와 칼리체, 리노보 마을을 파괴했다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러한 파괴 행위는 인접 부대인 바익스 집단 사령관 폰 바익스 상급대장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7월 3일에 바익스는 브리데리치에게 헝가리군이 마을을 파괴하는 행동이 통제 가능한 범위를 벗어났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행위는 얌삘과 세레디냐-부다 일대의 빨치산 활동을 감소시키는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바익스는 독일 부대를 투입할 것을 요청했으며 헝가리측의 작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뿌띠블은 텅 비었다. 헝가리군의 작전은 실패했다. 1,300명의 비적이 포위망을 돌파했다. 12곳의 마을과 460톤의 곡물이 헝가리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일반 주민들은 헝가리군을 피해 달아났다. 헝가리군을 긴급히 (독일군 부대로)교체 시켜야 한다고 본다.”

프리데리치는 작전 기간중 뿌띠블을 시찰했다. 헝가리군의 보복 작전에서 프리데리치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헝가리군과 마찬가지로 지역 주민들이 빨치산을 지원하고 있다고 믿고 이것을 육군 본부에 보내는 보고서에도 똑같이 기록했다. 한편, 프리데리치나 그의 참모진 중 한명은 Bogányi가 인질을 대량 처형하자고 한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뿌띠블 작전 직후 프리데리치는 빨치산전에 대한 지침에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보복을 자제할 것을 지시했다.

새로운 지침은 누구를 “포로”로 대우하고 누구를 “빨치산”으로 구분 할 것인가를 언급한1941년에 내려진 명령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새 지침에는 “잔악한 유대-볼셰비즘적 전쟁 방식”에 대한 유사한 언급이 있었으며 이전 지침에서 벗어난 내용은 담고 있지 않았다. 새로운 내용도 추가 되었는데 교전 중이지 않은 상황에서 투항하는 빨치산은 처형을 하지 말라는 내용도 포함되었다(반면 소련 정규군 병사는 어떤 상황에서 항복하건 규정상 포로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프리데리치는 “집단 처벌”이라는 규정을 새로 도입해서 민간인에 대한 보복에 제약을 두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자발적인 게릴라에 대한 절멸 전쟁은 유조의 요소가 있다.” 또한 죄없는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은 “독일적 정의관에 반하는 행위이며 정치적인 면에서도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프리데리치는 모스끄바는 빨치산에게 독일군이 민간인에 대한 대량 보복을 하게 부추김 으로서 “주민들 사이에 독일군과 그 지원세력에 대한 적대감을 조성하려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적었다. 그는 인질을 잡고 실제로 처형해 봐야 “공산주의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하는 행위는 빨치산 소탕 작전에서 사용할 전술이 아니다. 이것은 작전이 끝나고 행하는 보복성 행위이다. 추가 조사 과정에서 밝혀낸 결과 이 때문에 주민들의 우호도가 감소하고 마을 전체가 빨치산에 협조하는 사태까지 있었다.”

프리데리치는 아무런 대책 없이 보복만 무자비하게 가함으로서 독일이 지지기반을 잃고 있으며 필요한 물자의 징발, 귀중한 노동력의 상실, 빨치산에 대한 지지만 높아지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군사구역 사령부는 이전에도 예하 부대의 잔학 행위를 단속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폰 로끄는 1941년 7월에 “사적 처벌”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프리데리치의 경우는 헝가리군의 행위 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프리데리치의 새로운 게릴라전 방침과 Bogányi가 옹호하는 무차별적 보복 방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프리데리치는 마을 주민 전체가(in ihrer Gesamtheit) 빨치산 활동에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절대로 민간인을 상대로 보복 학살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야전부대가 주민들의 빨치산 관여 여부를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기 때문에 프리데리치가 내린 명령의 의도는 의문의 대상이다. 아마 프리데리치 자신도 보복을 “완전히” 금지하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리데리치가 새 명령을 하달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독일 비밀 야전 헌병 부대는 니즈인 마을에서 독일 헌병 하사 한 명이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볼로드꼬 마을의 민간인 116명을 처형했다. 이 학살은 그 지구의 독일군 지휘관(194 야전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일어났지만 프리데리치는 이 잔학행위에 대해 어떠한 문제 제기도 하지 않았다. 프리데리치의 의도는 뿌띠블리 마을에서와 같이 반복적인 마을 초토화와 대량 학살을 감소시키는데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프리데리치의 의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Bogányi는 노바 슬로보다 마을을 6월 26일에 초토화 시켰다고 보고했는데 1943년 10월과 11월에 작성된 소련 뿌띠블리 지구당의 보고서에는 바로 7월 6일에 헝가리군이 다시 노바 슬로보다로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7월 7일의 학살에서 헝가리군은 마을 주민 407명을 사살하거나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

헝가리군의 군율 문란과 작전 수행 능력 부족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으며 다시 보복 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독일의 194 야전사령부 사령관은 7월 18일에 뿌띠블리의 시장으로부터 헝가리군의 잔학 행위에 대해서 보고 받았다. 뿌띠블리 시장은 헝가리군이 무차별적인 살상과 약탈, 방화를 자행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94 야전사령부측은 군사 지구 사령부에 대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추가했다.

“빨치산 무리를 특정 지역으로 몰아 붙이는 작전은 효과가 없다. 빨치산 집단은 지나가면서 머무르는 마을 마다 식량과 물자를 징발하며 지역 주민은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지역 유지들은 빨치산이 지역에 출몰한다는 점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 빨치산 주력을 포위 격멸해야만 지역 주민들이 현재 겪고 있는 문제점에서 해방 될 수 있을 것 이다.”

이런 보고서를 올린 사람이 며칠 전에 니즈인 마을에서 116명의 주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점이 아주 재미있다. 같은 기간에 194 야전사령부 예하의 307 지역사령부(Ortskommandantur 307)는 헝가리 105 경사단 소속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마을에서 자신들이 숙소로 쓰고 있던 민가를 파괴해 버렸다고 보고했다. 또한 제 450 투르키스탄 대대의 장교 한명은 프리데리치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헝가리군이 삼림 지대의 빨치산 소탕 작전에서 지원을 제대로 해 주지 못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이 보고되고 군사구역사령부가 헝가리측에 항의를 전달하는 일이 잦아질수록 헝가리군은 독일측의 비난에 더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프리데리치는 보복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내린지 3일 뒤에 빨치산 작전에 대한 새로운 전술 지침을 하달했다. 이 문건은 현재 없으나 네 명의 지휘관(제 213 보안사단, 제 194 야전사령부, 제 198 야전사령부, 헝가리 주둔군)이 이에 대해 보낸 회신이 남아 있다. 이 네통의 회신은 모두 남아 있으며 원래 명령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재 구성할 만한 자료를 담고 있다. 전술 지침의 핵심은 “예하 부대의 자원으로 좀더 공세적인”행동을 취하라는 것 이었다. 이 부분에서 프리데리치는 상급 사령부에 빨치산 소탕에 투입할 전력이 부족함을 여러 차례 호소했음을 밝히고 있다. 프리데리치는 자신이 증원병력을 요청했음에도 상급 사령부가 응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예하 지휘관들에게 현재 보유하고 있는 전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좀더 정교한 전술을 활용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Bogányi는 이 지침에 대해 직접적으로 분노를 나타냈다. 그는 자신의 예하 부대가 겪고 있는 문제점을 세부적으로 나열하고 “이미 이런 문제점은 충분히 겪고 있던 것이며 이 때문에 우리에게 분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 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Bogányi는 전문적인 군인이었다. 그는 회신에서 불만만 제기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해결안을 같이 적었다. 이것은 3월 31일에 Kolossváry가 올린 보고서와 유사한 내용 이었다. 물론 Bogányi의 답장에는 직접적으로 대응 보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빨치산을 소탕하는 전술적 측면 보다는 지역 주민이 빨치산의 지지 세력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쪽에 있었다. 그는 독일 비밀 야전 헌병은 작전 수행에 있어서 “지나치게 동정적”이며 빨치산 출몰 지역과 빨치산을 지지하는 마을은 경제활동을 봉쇄해 버려야 하며 필요하다면 봉쇄로 기아를 유발 시킬 필요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 대부분은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마지막 부분에서는 한가지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바로 북부 관할 구역의 민간인을 소개시키는 것 이었다. Bogányi는 빨치산 출몰지역의 성인 남성을 모조리 노동 수용소로 이송해서 노동에 투입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Bogányi는 7월 2일에 하달된 새로운 명령에 의거해서 이런 판단을 내렸을 것으로 보인다.

프리데리치가 Bogányi의 제안이 있기 전에 북쪽 지역의 민간인 소개를 생각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프리데리치는 민간인 소개를 실행하기로 결심했으며 9월 10일에 집단군 사령부에 세레디냐-부다 와 데스나 강 동안의 벨리까 베리즈까, 홀루비브까, 리스녜, 빌료시브까, 스챠하일리브까, 즈놉-노보호로지께, 류바히프, 우끄라이스끼, 체르보니, 바실리브까 일대의 민간인을 소개하고 이 일대의 자재와 물자를 이송시키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문제에 대한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민간인과 물자의 소개가 이루어 진 것은 확실한 것 같으며 10월까지 완료 된 것으로 보인다. 소개된 주민들은 제 213 보안사단과 197 야전사령부의 관할로 들어갔다.

게릴라 출몰 지역에서 민간인을 소개하는 작전은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미주리 주 서부와 필리핀 봉기, 보어 전쟁, 일본군의 만주 지역 게릴라 작전과 말라야, 케냐, 베트남 전쟁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민간인 소개는 경우에 따라서는 효과적 일 수 있으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남부 후방군사구역이 실시한 민간인 소개 작전이 효과적 이었는가는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