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슈타인호프님이 쓰셨던 ‘한국 군경의 총기 교체(1946~1951), 그리고 최후의 빨치산이 가졌던 총’에 엮어서 씁니다. 지난 번에는 한국전쟁 직전 육군의 소총 부족 문제에 대해 썼는데 이번에는 국립경찰의 총기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죠.
먼저 아래의 표를 보시겠습니다.
출처에 나와 있는 것 처럼 이 표는 1949년 말 미군사고문단이 작성한 반기보고서(Semi-annual Report)의 부록에 실려있는 도표를 참고로 한 것 입니다. 표를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느끼실 겁니다. 네, 제주도와 철도경찰의 무장 현황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제가 참고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사본에는 이상하게도 제주도 이하가 잘려 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시 표의 내용으로 돌아가지요.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던 경상북도의 경우 대량의 38식 소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슈타인호프님의 글에도 나와 있듯 빨치산이 38식 소총을 많이 보유했던 이유 중 하나는 후방에서 빨치산 토벌에 동원된 경찰이 대량의 38식을 보유했던데 있습니다. 전북과 전남의 경우도 경북 보다는 적지만 역시 대량의 38식 소총을 보유하고 있지요.
하지만 의외인 것은 경찰이 보유한 소총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것이 미제 카빈이라는 점 입니다. 빨치산을 다룬 회고록이나 소설 등을 읽다 보면 일본제 소총에 대한 언급이 많아서 후방의 경찰이 사용한 총기는 일제가 많았을 것 같은데 실제 통계를 보면 카빈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빨치산 토벌에 가장 많이 동원되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일제 소총 보유량이 많고 후방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경찰은 미제 카빈의 보유량이 압도적이라는 점도 역시 의외입니다.
이 밖에 경기도 경찰과 강원도 경찰의 경우 경상도와 전라도 경찰은 전혀 보유하고 있지 않은 50구경 중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경기도는 7정, 강원도는 4정을 보유하고 있군요. 다음으로 특이한 점은 전라남도 경찰이 가장 많은 기관단총을 가지고 있다는 점 입니다. 서울과 경기도 보다도 더 많은 기관단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2009년 5월 11일 월요일
2008년 11월 18일 화요일
2차대전 당시 소련여성의 전투 참여에 대한 John Barber의 글
A World at Total War를 읽다 보니 독소전 당시 소련의 여성문제를 다룬 바버(John Barber)의 글이 있더군요. 짤막하지만 핵심적인 부분들을 잘 짚은 것 같은데 이 글에서 소련 여군에 대한 부분만 발췌해서 올려봅니다.(좀 날림번역 입니다;;;)
전선의 병사로서(Фронтовики)
2차대전 당시 소련군에 입대한 여성들은 기존에 있던 여성과 전쟁간의 전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약 80만명의 소련 여성이 2차대전 기간 중 군대에 입대했다. 빨치산을 포함시키면 그 숫자는 100만을 넘어설 수도 있다. 연합군과 비교했을 때 소련의 전쟁은 발틱해에서 흑해까지, 그리고 카프카즈와 그 너머에 걸친 수백 킬로미터의 전선에 걸쳐 전개된 총력전이었기 때문에 현역 복무는 종종 전선에 직접 투입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상당수의 여성은 전통적인 업무 – 군의관, 간호사, 취사병, 제빵병, 세탁 및 목욕탕의 당번병으로 활동했다. 전선에 파견된 의사 중 41퍼센트, 그리고 군의관 중 43퍼센트가 여성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기존에는 남성들만의 영역이었던 전투공병, 야전공병, 전화교환수, 무전병, 운전병, 정비병, 교통헌병, 통역병, 정보병, 그리고 정치장교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열거한 임무들은 전쟁에서 필수적인 임무들이었으며 전선에서 직접 전투에 휘말리거나 사상자를 내곤 했다.
그러나 수 천명의 여성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전쟁이 시작된 초기의 몇 개월 동안은 여성 스스로의 자원이나 조종사 등의 특수한 임무에 필요한 경우가 아닐 경우 여성의 전투 참여는 배제되었다. 붉은군대가 수백만명의 전사자와 포로를 내고 이들의 빈자리를 메꿀 인력이 절실히 필요해 진 1942년 초에 가서야 공산당중앙위원회는 전투에 직접 참여할 여성 지원병을 모집한다는 공식 결정을 내렸다. 봄부터 시작된 콤소몰 주도의 대규모 모병 활동으로 방공군 10만을 포함해 수많은 여성이 모집되었다. 1944년까지 네 차례의 여성 모병운동이 더 있었다. 1943년에 이르러 여성은 소련 군대 병력의 8퍼센트에 달했다. 1945년에는 여군 병력이 246,000명에 달했다. 소련 여군들은 보병사단에 소속되어 백병전을 치르고 포병과 대공포 부대에서 활동했다. 또한 여군들은 저격병과 기관총사수, 공수부대원,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여군 중에는 전차장과 보병 소대장도 있었다. 전투기 연대 한 개와 폭격기 연대 세개는 조종사부터 정비병까지 모두 여성으로만 편성되었다. 독소전에 대한 영국의 권위있는 역사학자는 2차대전 중 소련 여성의 전쟁 참여 기록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인류 역사상 용기와 인내, 그리고 수난의 이야기로서 이것과 비교할 만한 것은 드물 것이다. 붉은군대의 우수한 병사들 중 상당수는 여성이었으며 이들은 소련 최고의 영예인 소연방영웅이 되거나 사후에 추서되었다.” [Erickson 1993, 59~60]
여성들이 전투에 참여한 동기는 다양했다. 많은 여성들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고취한 요소는 애국심과 전쟁수행에 기여하고자 하는 욕구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는 어떤 볼고그라드 출신의 여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탈린 동지에 대한 사랑”으로서 표출되었다. 그러나 여성 참전용사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의 참전 결정은 보다 개인적인 의도에서 이뤄지곤 했던 것 같다. 전사한 남편, 남자 형제, 아버지, 아들, 애인의 복수나 또는 전선에서 이들을 찾기 위해서 등의 이유였다. 그리고 이들은 여러 고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곤 했다.
최근 독소전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여성의 전투 참여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은 경외감, 이질감, 그리고 죄책감이 혼재된 상태로 나타났다. 전통적인 여성상과 전쟁의 현실간의 괴리는 다양한 감정을 만들었다. 한 참전군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남자군인들이 전선에서 여성을 목격하면 그들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여군 한 명의 목소리로도 남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다른 참전군인의 회고는 이렇다. “여성이 전투에 참여하면 남자들은 보다 명예롭게 행동하고 용감해졌다.” 반면 저격병으로 활동했던 한 참전군인은 살인이 가지는 “비여성적” 성격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두 명의 여자가 저격용 소총을 들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무인지대로 침투한다. 이것은 인간 ‘사냥’이다. … 비록 나 자신도 저격수였지만 … 어쨌든 나는 남자였다. … 나는 수색정찰을 나간다면 이런 여자들과 함께 가겠지만 아내로서 함께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전선의 여성들은 남성 전우들과 마찬가지로 끔찍한 위험과 잔인함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그들이 적의 손에 사로잡힐 경우 처하게 될 운명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또 여성들은 그와 반대로 폭력적인 가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
“전투 중 적의 전차 두 대로부터 공격 받았을 때 두 명의 남성 군인이 비겁한 행동을 했다. … 방어선이 유린되고 모두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 파시스트들은 우리의 부상병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 다음 아침에 대대원 전체가 정렬한 자리에서 비겁한 행동을 한 병사들을 끌어냈다.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선고가 내려졌다. : 총살대에 의한 처형 … 세 명이 앞으로 나오고 나머지는 제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기관단총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내가 먼저 앞으로 나서자 다른 사람들도 나를 따랐다. … 어떠한 자비도 없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전선의 남성과 여성간의 작용은 전우 이상의 관계로 발전했다. 야전의 아내(Подно-полевая Жена)라는 단어가 널리 쓰였다. 그리고 이것은 붉은 군대의 여성에 대한 태도 뿐 만 아니라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단어였다. 한 참전 군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보통 전선에 있는 여군은 장교들의 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어땠겠습니까? 만약 한 여군이 남자가 생기면 이제 다른 남자들도 끊임없이 치근덕 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격렬하고 한편으로는 허무한 전선의 생활은 개인간의 사적인 관계를 촉진시켰다. 일반 사회와 구별되는 것은 이러한 관계의 법적 지위였다. 군대에서의 결혼은 허가 없이는 불가능했고 공인된 관계를 가지는 남자와 여자의 숫자는 극소수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복잡한 남녀관계가 묵인될 수 밖에 없었다.
John Barber, ‘Women in the Soviet War Effort, 1941~1945’, A World at Total War :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pp.239~241
2007년 9월 28일 금요일
스탈린의 1941년 7월 3일 라디오연설
독소전쟁 발발이후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스탈린은 1941년 7월 3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매우 유명한 이 연설을 합니다. 스탈린의 다른 연설들은 매우 재미가 없고 지루한데 비해 이 7월 3일의 연설은 매우 비장하고 감동적이어서 이 어린양과 같은 반공청년의 마음 조차 움직이는 걸작(?!)입니다.
아래에 인용한 내용은 소련정부가 1947년에 조선어로 번역 출간한 『쏘련의 위대한 조국전쟁에 대하여』라는 스탈린 연설문집에서 가져온 것 입니다. 요즘 문법과 맞지 않는 부분은 고치고 원 번역이 딱딱해서 문체도 좀 부드럽게 바꿨습니다.
아래에 인용한 내용은 소련정부가 1947년에 조선어로 번역 출간한 『쏘련의 위대한 조국전쟁에 대하여』라는 스탈린 연설문집에서 가져온 것 입니다. 요즘 문법과 맞지 않는 부분은 고치고 원 번역이 딱딱해서 문체도 좀 부드럽게 바꿨습니다.
동지들이여! 인민들이여!
형제자매들이여!
우리 육해군 병사들이여!
나의 친구들이여! 나는 여러분께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 조국에 대해 6월 22일에 개시한 히틀러 독일의 배신적 기습공격은 의연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붉은군대의 용맹한 저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적군의 정예 사단들과 그 우수한 공군 부대들이 격멸되어 전장에 매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전장에 새로운 부대를 투입하면서 계속 전진해 오고 있습니다.
히틀러의 군대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의 대부분, 벨로루시아의 서부, 서우크라이나의 일부를 점령했습니다. 파쇼의 공군은 그 폭격기의 활동구역을 넓히면서 무르만스크, 오르샤, 모길료프, 스몰렌스크, 키예프, 오데사, 세바스토폴리에 폭격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조국은 중대한 위협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광스러운 붉은군대가 파쇼군대에 여러 도시와 지역을 내주게 됨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말 독일 파쇼군대가 허세를 부리는 파쇼 선전자들이 떠들듯이 정말로 무적의 군대이기 때문이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는 무적의 군대가 없으며 또 최근에도 없었다는 점을 보여줬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과거 무적의 군대로 생각됐지만 그 군대는 러시아군, 영국군, 프로이센군에게 연달아 패배했습니다. 제 1차 제국주의전쟁시기에 있어서 빌헬름의 군대도 역시 무적의 군대로 인정되었지만 그 군대 조차도 러시아군 및 영국과 프랑스 군대에 의해 수차 패배를 맛보았고 결국에는 영불군에게 격파되었습니다. 지금 히틀러의 독일 파쇼군대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군대는 아직까지 유럽 대륙에서 심각한 저항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직 우리 소련에서만이 강력한 저항을 받고 있습니다.그러면 이 항전의 결과로 독일 파쇼군대의 우월한 사단들이 우리 붉은군대에게 격파되었는즉 이는 나폴레옹 및 빌헬름 군대가 분쇄되었던 바와 같이 히틀러 파쇼군대도 분쇄될 수 있음 또는 당장이라도 분쇄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조국의 일부가 독일 파쇼군대에 의해 점령된데 관해서는 그것이 주로 파쇼독일의 소련에 대한 전쟁이 독일군대에 대해 유리한 조건에서, 소련군대에 대해서는 불리한 조건에서 개시된 때문인 것입니다. 이미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독일군대는 전시 동원을 끝내고 소련을 대치한 170개 사단이 독일에서 파견되어 소련국경에 도착해 만전의 준비상태에 돌입한 상태에서 오직 공격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소련군대는 아직 군사동원을 해서 국경에 집결하는 도중에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이에 있어 파쇼독일은 불원간 전 세계가 독일을 침략국으로 공인할 것도 개의치 않고 1939년에 체결한 독소불가침조약을 돌연히, 배신적으로 위반한 사실이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나라는 조약 위반에 대한 발단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배신적 길에 들어설 수 없었던 것은 가히 알만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소련정부가 히틀러 및 리벤트로프 따위의 배신자와 원흉과 더불어 불가침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는가? 이 점에서 소련 정부에서 과오를 범한 것은 아닌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물론 아닙니다! 불가침조약이란 양국간의 평화조약입니다. 1939년에 독일은 이런 조약을 우리에게 제의했던 것입니다. 소련 정부가 이 제의를 거절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평화를 애호하는 나라라면 설사 이웃 국가에 히틀러나 리벤트로프와 같은 원흉과 식인귀가 지도자라 하더라도 그 이웃나라와의 평화조약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물론 평화조약이 평화애호국가의 전일(全一), 독립 및 영예를 직접 혹은 간접 훼손하지 않는 이상 일정한 필수조건만 충족된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무엇을 얻었습니까? 우리는 일년 반 동안 우리나라에 평화를 보장했으며 또는 파쇼독일이 조약을 위반하고 우리나라를 공격하려고 시도할 경우 반격에 필요한 역량을 준비해 왔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우리의 이익이며 파쇼 독일의 손해입니다.
파쇼독일이 배신을 하고 조약을 파기한 채 소련을 침공하여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을 잃었습니까? 독일은 이렇게 해서 단기간 자국의 군대에 유리한 정세를 어느 정도 확보했습니다. 그렇지만 독일은 그 자신을 전세계의 눈 앞에 탐욕스러운 침략국가로 드러내 정치상으로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단기간의 군사적 이익이 독일에 있어서는 오직 짧은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이 거대한 정치상 이익은 소련에 있어서 중요하고도 장구한 동인(動因)이 되는 바 이에 근거하야 파쇼독일과의 전쟁에서 붉은군대의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가 반드시 전개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용감한 전 육군, 우리의 용감한 전 해군, 우리의 독수리 같은 모든 조종사, 우리나라의 전체 인민, 유럽, 아메리카 및 아시아의 우수한 인물, 나아가서는 독일의 우수한 인물들 까지도 다 독일 파쇼들의 배신적 행동을 꾸짖고 소련 정부에 동정을 표하며 소련 정부의 행위를 찬동하며 또는 우리의 사업이 정당한 것과 적들이 파멸할 것과 우리가 승리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를 전쟁으로 끌어들인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는 지극히 잔인하고 교활한 원수, 독일 파시즘과의 결사적 전쟁에 나서게 됐습니다. 우리군대는 전차와 비행기로 무장한 적군과 함께 용맹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붉은군대와 붉은해군은 무수한 난관을 물리치면서 한치의 소련 영토도 희생적으로 방어하고 있습니다. 붉은군대 전사들의 용맹은 유례가 없는 것입니다. 원수들에게 가하는 우리의 타격은 견실한 것이고 가혹(원 번역문에는 重杖)할 것입니다. 전 소련인민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붉은군대와 함께 일어서고 있습니다.
우리 조국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적을 박멸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책이 필요하겠습니까?
무엇 보다도 우리 인사(人士)들, 즉 소련 인사들은 우리나라에 닥쳐온 온갖 위험의 깊은 의의를 이해하는 동시에 태연함과 무관심을 버리며 전쟁전에는 아주 설득력이 있었지만 전쟁이 근본적으로 정세를 변화시킨 지금에는 일을 망쳐버리는 평화건설론을 버려야 합니다. 원수들은 포악하고 완강합니다. 놈들은 우리의 피땀이 묻은 우리의 땅을 빼앗으며 우리 노력으로 얻은 우리의 곡식과 석유를 빼앗으려 합니다. 놈들은 대지주의 정권을 회복시키고 짜르 제도를 회복시키고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로루시인,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 에스토니아인, 우즈벡인, 타타르인, 몰다비아인, 그루지아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 및 기타 소련 자유인민의 민족문화와 민족국체를 말살하고 그들을 독일인화 시키며 그들을 독일의 공작 및 남작의 노예로 만들려 합니다. 이렇게 해서 문제는 소련국가의 존망에 대하여, 소련인민의 존망에 대하여, 소련민족이 자유롭게 생존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속박에 얽매일 것인가의 것이 되었습니다. 소련 인민들은 이 점을 깨닫고 무관심해서는 안 될 것이며 스스로를 동원하고 개인의 사업을 원수들에게 대한 무자비한 새 전시궤범에 맞게 개조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우리의 대열에 비관론자, 비겁자, 낙망자(落望者), 도피분자들이 없어야 하며 우리의 인민들은 투쟁에서 공포를 느끼지 아니하고 파쇼 압제자를 대항하여 우리의 조국 해방전쟁이 몸바쳐 나서야 합니다. 우리나라를 세운 위대한 레닌 동지께서는 소련 인민들의 기본적인 품성에는 용감함, 굳셈(원 번역문에는 剛毅), 전투에서의 담대함, 우리 조국의 원수들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의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훌륭한 볼세비키적 품성이 붉은군대, 붉은해군의 수백만 명과 소련의 각 민족의 품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작전상의 목적과 적군의 격멸이라는 조직임무에 종속시키도록 하루 바삐 모든 사업을 개조해야 할 것입니다. 소련의 인민들은 독일의 파시즘이 모든 근로인민들에게 자유 노동과 복지를 보장한 우리 조국에 대해 광신적 증오와 적개심을 도발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소련 인민들은 반드시 원수들에 대항하여 자기의 권리, 자기의 강토를 지키기 위해 궐기해야 합니다.
붉은군대 육해군과 소련의 전 인민은 소련의 강토의 한 뼘이라도 사수하며 우리의 도시와 농촌을 위해 마지막 피 한방울을 흘릴때 까지 싸울 것이며 우리 인민의 본래 품성인 용맹, 창의성,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붉은군대에 대한 전면적인 지원을 조직하고 그 대열에 보충병을 보내며 군대에 일체의 필수품을 공급하고 군대 및 군수품의 긴급수송, 부상병에 대한 광범위한 구호를 조직할 것입니다.
우리는 붉은군대의 후방을 공고히 하되 이 사업의 필요에 모든 일을 맞추며 전기 업소가 힘차게 일하도록 보장하고 소총, 기관총, 대포, 탄환, 포탄, 비행기를 보다 더 생산하며 공장, 발전소, 전화전신상 연락을 보관하고 지방의 방공시설을 정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후방의 온갖 와해분자, 도피분자, 낙망자, 유언비어 유포자들과 무자비하게 투쟁할 것이며 밀정, 게릴라, 적의 공수부대를 일망타진하는 이 모든 방편에 있어서 우리의 박멸단을 신속히 조직할 것입니다. 원수들은 교활하고 음험한 기만과 유언비어 유포에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헤아려 악선동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낙망비겁으로 국방사업을 방해하는 자들은 다 즉시 군법회의에 넘겨야 할 것입니다.
붉은군대가 부득이 퇴각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전반적인 철도 교통수단을 옮겨 가면서 원수들에게 한 대의 기관차, 한 대의 차량도 남기지 말고 원수들에게 1킬로그램의 빵, 1리터의 기름도 남겨놓지 말아야 합니다. 콜호즈원들은 모든 가축을 몰아가며 곡물은 후방지역에 옮기기 위하여 국가기관에 넘겨주어 보관해야 합니다. 운반할 수 없을 경우에는 일체의 값어치 있는 재산, 즉 귀금속과 곡물 및 연료를 모두 파괴해야 할 것입니다.
적군이 점령한 지역에는 기병 및 보병 빨치산 부대를 편성할 것이며 적군과 투쟁하기 위하여 방방곳곳에서 게릴라전을 일으켜 도로, 교량을 폭파하고 전화전신연락망을 파괴하며 산림, 창고, 화물에 불을 질러야 할 것입니다. 점령지에는 적군과 그 앞잡이들이 견디지 못하도록 하고 적들을 모든 곳에서 추격, 섬멸하여 그들의 모든 수단을 파탄시켜야 할 것입니다.
파쇼독일과의 전쟁을 그냥 보통의 전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두 군대간의 전쟁이 아닙니다. 이것은 (두 군대간의 전쟁인) 동시에 독일 파쇼군대에 대항하는 전 소련 인민의 위대한 전쟁입니다. 파쇼 압제자들과 대항하는 이 전 인민적 조국수호전쟁의 목적은 우리나라에 떠돌고 있는 위험만을 소멸할 것이 아니오 독일 파시즘의 압제에 신음하는 유럽의 전체 인민을 돕는 것입니다. 이 해방전쟁에 우리만이 외롭게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위대한 전쟁에서 우리는 구미(歐米, 美자를 안 쓰더군요)의 각국 인민들, 그리고 히틀러의 주구들에게 압제받는 독일인민들과 같은 성실한 동맹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조국의 자유를 위한 우리의 전쟁은 구미 각국 인민들의 독립, 민주자유를 위한 그들의 투쟁과 함께 할 것입니다. 이는 히틀러 파쇼군대의 압박 또는 그 위협에 반대하는 영국 수상 처칠씨의 역사적인 연설과 우리나라를 원조할 결단에 대한 미국정부의 선언을 통해 십분 알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상징적인 것입니다.
동지들!
우리의 힘은 무한합니다. 오만한 적들은 곧 이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수천명의 노동자, 콜호즈원, 인텔리겐차가 붉은군대와 함께 우리를 침공하는 적과의 전쟁에 궐기하고 있습니다. 수백만명의 우리 인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근로대중은 붉은군대를 지원하려고 어느덧 수천명의 인민지원병을 편성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우리가 독일 파시즘을 상대하여 벌이는 조국수호전쟁에 있어서, 적군의 침략 위험에 시달리는 각 도시에 우리는 반드시 이런 지원병을 창설할 것이며 희생적으로 자유, 명예, 조국을 방어하기 위한 투쟁에 일반 근로대중을 일으킬 것입니다.
소련 인민의 일체 역량을 급히 동원하며 우리 조국을 배신하고 침공한 적군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하여 국방위원회를 설립하였는 바 지금 국내의 모든 정권은 전적으로 이 위원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국방위원회는 사업에 착수하였으며 붉은육해군을 헌신적으로 도우며 적을 때려 부수고 승리하기 위하여 레닌-스탈린의 당 주위에, 소련 정부의 주위에 모이라고 전체 인민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역량을 우리의 용감한 붉은군대, 우리의 용감한 해군을 돕는데 돌립시다!
인민의 일체 역량을 원수의 박멸에 돌립시다!
우리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앞으로!
2007년 9월 11일 화요일
이현상 평전 - 안재성
얼마전에 이준님의 블로그에서 이현상 평전과 관련된 글을 읽고 시간이 나는대로 이 책을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종각역의 반디 앤 루니스에 들렀는데 인문서적 코너에서 이 책이 눈에 확 띄더군요.
책 디자인도 예쁘게 잘 되어 있고 저자도 제법 재미있게 읽었던 경성 트로이카의 안재성씨 인지라 어떤 내용인가 보자 하고 집어서 쭉 훑어 봤는데…
아아. 대 실망입니다.
대한민국의 평전 문화가 너무 수준이 낮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망했습니다.
열심히 쓰신 저자 분께 죄송하지만 이 책의 수준은 그저 분량만 많은 아동용 위인전에 불과했습니다.
경성 트로이카나 이관술에 대한 책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안재성씨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애정이 많은 분 같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평전을 쓸 때는 그 애정을 자제하는 법도 알아야 하는데 이현상 평전은 그 도가 지나쳤습니다. 내용 중 상당수가 빨치산을 미화하는 것이아니냐 싶을 정도로 유치한 표현으로 이뤄져 있더군요. 하도 한심한 문장이 많아서 여기다가 옮겨 적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책 부록으로 딸려 있는 이현상 약력을 보니 1950년 여름에 미군 후방에서 유격전을 펼치면서 미군 수백명을 사살(!) 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별다른 교차 검증 없이 실어 놓았습니다.
유감스럽지만 평전이라는 제목을 달기에는 책의 수준이 낮았습니다. 문장이 깔끔하다는 것을 빼면 연예인 팬클럽의 오빠 찬양글과 거의 다를바가 없더군요.
책을 읽다 보니 저자는 빨치산 활동에 대해 약간의 낭만 같은 것도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 앞으로 책을 쓸 때는 그런 망상은 버리고 썼으면 싶습니다. 하긴, 망상에 가까울 정도의 애정이 없었다면 이현상 같은 인물의 평전을 쓰기도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사회 특성상 이현상 같은 사회주의자에 대한 평전이 많을 수는 없으니 이 책은 최소한 그 희소성으로는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평전으로서는 수준 미달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특별히 한국전쟁이나 이현상에 관심 있는 분이 아니라면 비추입니다.
책 디자인도 예쁘게 잘 되어 있고 저자도 제법 재미있게 읽었던 경성 트로이카의 안재성씨 인지라 어떤 내용인가 보자 하고 집어서 쭉 훑어 봤는데…
아아. 대 실망입니다.
대한민국의 평전 문화가 너무 수준이 낮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망했습니다.
열심히 쓰신 저자 분께 죄송하지만 이 책의 수준은 그저 분량만 많은 아동용 위인전에 불과했습니다.
경성 트로이카나 이관술에 대한 책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안재성씨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애정이 많은 분 같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평전을 쓸 때는 그 애정을 자제하는 법도 알아야 하는데 이현상 평전은 그 도가 지나쳤습니다. 내용 중 상당수가 빨치산을 미화하는 것이아니냐 싶을 정도로 유치한 표현으로 이뤄져 있더군요. 하도 한심한 문장이 많아서 여기다가 옮겨 적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책 부록으로 딸려 있는 이현상 약력을 보니 1950년 여름에 미군 후방에서 유격전을 펼치면서 미군 수백명을 사살(!) 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별다른 교차 검증 없이 실어 놓았습니다.
유감스럽지만 평전이라는 제목을 달기에는 책의 수준이 낮았습니다. 문장이 깔끔하다는 것을 빼면 연예인 팬클럽의 오빠 찬양글과 거의 다를바가 없더군요.
책을 읽다 보니 저자는 빨치산 활동에 대해 약간의 낭만 같은 것도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 앞으로 책을 쓸 때는 그런 망상은 버리고 썼으면 싶습니다. 하긴, 망상에 가까울 정도의 애정이 없었다면 이현상 같은 인물의 평전을 쓰기도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사회 특성상 이현상 같은 사회주의자에 대한 평전이 많을 수는 없으니 이 책은 최소한 그 희소성으로는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평전으로서는 수준 미달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특별히 한국전쟁이나 이현상에 관심 있는 분이 아니라면 비추입니다.
2006년 12월 24일 일요일
헝가리식 절멸전쟁? (재탕)
원래 페리스코프의 게시판에 올렸던 번역 글인데 이곳이 운영자님의 사정으로 폐쇄됐는지라 여기에 재탕합니다.
이 글은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58호에 실린 Truman O. Anderson의 “A Hungarian Vernichtungkrieg? Hungarian troops and the Soviet Partisan War in Ukraine, 1942”를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에는 자주 영미권 학자들의 영어 논문이 실리는데 이놈도 그 중 하나입니다. 내용이 매우 좋다고 생각돼서 게시판에 올립니다. 각주 번역은 편의상 생략했는데 양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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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58호에 실린 Truman O. Anderson의 “A Hungarian Vernichtungkrieg? Hungarian troops and the Soviet Partisan War in Ukraine, 1942”를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에는 자주 영미권 학자들의 영어 논문이 실리는데 이놈도 그 중 하나입니다. 내용이 매우 좋다고 생각돼서 게시판에 올립니다. 각주 번역은 편의상 생략했는데 양해를 바랍니다.
헝가리식 절멸전쟁? 헝가리군과 우끄라이나의 빨치산 전쟁 1942년
1. 도입
독일의 전쟁 범죄에 대한 독일 정규군의 개입 문제는 독일 역사학계에서 중요한 문제로 다뤄져 왔다. 함부르크 사회학 연구소(Hamburger Institut für Sozialforschung)의 “독일 국방군 전시회”개최는 독일 사회의 “씻을 수 없는 과거” 문제를 새로운 논의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독일 국방군이 조직적으로 범죄행위에 개입했음은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독일 국방군이 행한 범죄의 정도와 규모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 연구도 이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학자들은 동유럽 출신 자원자들이 폴란드와 소련 유태인에 대한 학살에 개입한 문제와 이른바 “동방군단(Osttruppen)”문제에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으나 중동부 유럽 국가의 독일동맹군들이 “이념 전쟁”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서적들은 대부분 오래전에 출간되었으며 각기 다른 분석을 하고 있다. Alexander Dallin은 독일 점령하의 오뎃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독일군이 루마니아군 보다 민간인을 잘 대했다고 지적했지만 독일의 점령 정책 자체는 매우 가혹한 것 이었다고 평가했다. John Armstrong 역시 하버드 대학의 인터뷰 자료를 바탕으로 이 의견을 지지했는데 하버드 대학의 자료에 헝가리군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한편 Peter Gosztony(동부전선의 헝가리군을 연구한 몇 안되는 학자이다.)는 헝가리는 독일군에 비해 민간인을 훨씬 온건하게 대우했다고 주장했다.
본 논문에서는 1942년 우끄라이나 일대에서 독일군과 헝가리군 지휘관들이 전선후방의 빨치산 활동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분석하여 헝가리군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남부 후방군사구역(rückwährtiges Heeresgebiet Süd)에서는 독일, 헝가리군과 현지 자원병들이 중 동부 우끄라이나 일대에서 증대하는 일반 주민들의 소요와 날로 커져가는 빨치산 활동을 상대하여 독일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군사구역 북부(체르니히프와 수미)는 헝가리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헝가리군은 독일군에 비해 형편없는 무장과 훈련 상태였지만 빨치산 활동이 심각한 지구를 맡고 있었고 반대로 독일 보안 부대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남부 일대를 담당하고 있었다. 헝가리군 지휘관들은 손실이 증대하자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헝가리군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역량에 비해 지나치게 큰 임무를 맡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한 반면 독일측은 헝가리가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독일과 헝가리측의 논쟁은 인력과 장비 부족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우끄라이나 지역의 민간인에 대한 보복 문제로 넘어갔다. 헝가리군은 빨치산 세력을 직접적으로 타격할 수 없게 되자 많은 민간인을 살상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방식으로 대응했으며 이것은 독일군은 물론 우끄라이나의 협조적인 세력에게도 반발을 불러왔다. 이들은 이러한 보복은 효과가 없으며 반작용만 일으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 헝가리군 장군 한 명은 자신의 관할구역 내 빨치산 출몰지역의 남성 중 만 15세에서 60세 사이의 사람을 모두 사살하자는 의견을 내놓기까지 했다. 독일측은 헝가리측에 자제할 것을 권고하고 가혹한 보복은 게릴라 활동만 증대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양측은 1942년 9월에서 10월까지 게릴라 출몰지구의 마을 주민을 소개시키고 마을을 초토화 시키기로 합의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독일의 잔인하고 무차별적인 대 빨치산 작전 수행 방식에 비추어 보면 이런식의 대응은 약간 놀랍기도 하다. 그러나 그 실상을 보면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빨치산전에 대해서 독일측이 조사 분석한 문헌(주로 벨로루시아 지역을 다루고 있다)을 보면 독일측은 우끄라이나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끄라이나 대부분이 탐욕스러운 에리히 코흐(Erich Koch)의 우크라이나 제국위원회(Reichskommissariat Ukraine)의 통치하에 들어갔을 때 드네쁘르강 동안의 광대한 지역은 1942년부터 1943년 까지 독일의 군정 통치하에 있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파괴적인 경제 수탈등 가혹한 독일의 통치에 복종하고 있었으나 상당수의 독일군 고위 간부들은 친 우끄라이나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중에서는 남부 후방군사구역 사령관인 칼 폰 로끄(Karl von Roques)중장과 부사령관이고 나중에 로끄의 후임이 된 에리히 프리데리치(Erich Friderici) 중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유대-볼셰비즘에 대한 투쟁에 열성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은 우끄라이나 토착민들을 빨치산 활동에 대한 보복 같은 가혹한 독일의 점령정책 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들의 정책은 인간 존중 보다는 실용적인 목적이 강했지만 독일측이 1942~43년 기간동안 우끄라이나 주민의 협력을 이끌어 내려는 점령 정책으로 선회하기 전에 이미 그 기초가 확립되어 있었다. 반면 같은 기간동안 헝가리군이 저항세력을 분쇄하기 위해서 잔혹한 방식을 택했다. Gosztony는 헝가리군이 독일군 보다 민간인을 살상하는 것을 꺼렸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일측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부 후방군사구역에서 발생한 가장 잔혹한 보복 작전은 대부분 헝가리군이 수행한 것 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민간인에 대한 보복에 대해 독일측과 헝가리측이 벌인 논쟁에서 양측이 보인 태도는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독일측 역시 중요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민간인을 “적당하고” “공정하게” 대우한다는 독일군의 기준은 항상 지켜진 것이 아니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1943년에 독일의 우끄라이나 지배가 끝장날 때 까지 친 우끄라이나적 성향을 유지했으나 이런 온정주의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나마 전쟁이 격화되어 가면서 이에 대한 인식 자체도 희박해 졌다. 독일 지휘관들의 재량권 밖에서 행해지는 일들로 우끄라이나인들의 우호적 협력을 이끌어 내려는 군 당국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우끄라이나 주민에 대한 강제 노동 징발 – 로끄와 프리데리치가 강력히 반대했다. - 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독일측의 빨치산 소탕 방식 역시 사실은 헝가리군 보다 낫다고 할 수 없었다. – 물론 독일측은 자신들이 훨씬 온건하다고 믿고 있었으나. 독일측의 잔인한 대응역시 우끄라이나 인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게릴라 전에 대한 독일 지휘관들의 명령 역시 매우 모순적인 것 이었다. 이들은 이른바 “깨끗한 전쟁”을 치루려는 신념과 “이데올로기상의 적”을 분쇄하려는 투지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1942년에 독일측이 행한 빨치산 토벌작전 기록을 상세히 분석한 결과 독일 지휘관들이 우호적인 자세를 견지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에게 큰 피해를 줬음이 드러났다. 1942년 9월에서 10월사이에 독일측이 민간인 소개를 실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개된 민간인들을 위한 준비는 매우 형편없이 준비 되었다. 독일측은 작전과정에서 민간인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작전의 일부만을 행했을 뿐이며 나머지 “더러운 역할”은 다른 조직이나 부대 관할로 넘어갔다. SS와 경찰 부대는 1942년부터 43년까지 헝가리군 지구에서 헝가리군을 지원하여 여러 차례의 잔혹한 소탕 작전을 전개했다. 국방군 간부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보통 합동 작전이 순조롭게(reibunglos)진행되었다고 기록했을 뿐 이었다. 또한 잔학행위는 남부 후방군사구역 직할의 비밀 야전 헌병(geheim Feldpolizei)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헝가리군의 보복 작전에 대한 독일측의 비난은 자기 위선이나 뻔뻔한 기만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일군 지휘관들이 자국군의 잔학행위와 헝가리군의 잔학행위를 구별지워 판단하려 했다는 점은 흥미로운 점이다. 아마도 독일 지휘관들이 자국의 동맹군을 비난한 것은 독일군이 예의 바르고 전문적인 집단이라는 환상과 자국 군대가 41년 6월 22일 이후 자행한 일의 책임에 대한 두려움 간의 충돌로 인한 혼란을 반영하는 것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독일측 지휘관들의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것은 이 논문의 주제가 아니다. 이 논문의 초점은 헝가리군이 동부전선에서 수행한 “절멸 전쟁(Vernichtungkrieg)”이 실제로 어떻게 수행되었으며 잔학행위의 원인은 무었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 이다.
이 연구는 독일, 러시아, 헝가리의 1차 문헌을 이용하여 이루어 졌다. 독일측 기록으로는 남부 후방군사구역과 그 예하 부대의 작전 일지가 포함되어있다. 이 기록은 독일 연방 문서 보관소 군사 분과에 보관되어 있는데 다행히도 1942년 부분은 거의 손상 없이 남아있으며 민간인과 접촉이 빈번했던 비교적 하급 제대의 기록까지 있다. 관련 기록으로는 알렉산드리아의 미국 연방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마이크로필름도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측 문헌으로는 우끄라이나의 빨치산 조직과 지하 공산당 조직, 이들을 지원한 NKVD의 기록과 1944년 초까지 독일 점령기간을 연구한 지역 정부의 연구 기록등이 있다. 이러한 문서들은 기예쁘의 국가 중앙 문서보관소와 체르니히프, 수미 현의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일부 자료는 1997년에 필자가 체르니히프와 수미에 당시 살았던 주민들을 인터뷰하여 수집하였다. 헝가리군에 대해서는 부다페스트의 군사사 기록 보관소(Hadtörtnélmi Levéltar)에 보관된 자료를 참조했다.
2. 1942년 3월까지 우끄라이나의 빨치산 전쟁
바바로사 작전초기에 독일 국방군은 빨치산에 대한 문제는 겪지 않았다. 스딸린은 전쟁 이전에는 빨치산 부대 조직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소련측은 전쟁 초기에 효율적인 조직을 편성하지 못 했다. 초기에 편성된 빨치산 조직은 지역당 조직과 NKVD에 의해 조직되어 일반 주민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지 못 했다. 특히 우끄라이나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독일은 침공전에 준군사 조직이나 민간인의 저항이 있을 경우 무자비한 보복을 가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으나 그럴 필요 자체가 없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받자 보복은 유대인과 공산당 등 적대적(이라고 생각되는)집단에만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군 총 사령부는 1941년 7월 12일에 이러한 방침을 확정했다. 남부 후방 군사구역 사령관 폰 로끄는 우끄라이나는 우호적인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라고 주장하고 육군 총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정의롭다는 인상은 유지되어야 한다.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사보타지 행위에 대해서 우끄라이나인 들에게 책임을 돌려서는 안되며 그것은 유대인과 러시아인들에게 돌려야 한다. 보복 역시 유대인과 러시아인에 한해서만 행해야 할 것이다."
황당하지만 이 명령은 바바로사 작전 초기에는 충실하게 수행되었다. 폰 로끄는 민간인에 대한 보복행위가 있을 경우 모두 “특별 사건(besondere Ereignisse)”으로 분류하여 자신에게 분류하라고 명령했지만 일부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산발적인 빨치산 활동에도 불구하고 1941년 10월 이전에 대량 보복은 단 한 건이 있었다. 1941년 8월 29일 제 454 보안 사단 소속의 82 차량화 헌병 대대는 체르보녜 마을에서 우끄라이나인들이 빨치산이라고 고발한 유대인 63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10월부터 사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국방군은 동진하면서 공산당이 좀더 조직적으로 지하조직과 빨치산을 편성한 지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제 빨치산은 낙오된 소련 정규군이나 퇴각하는 정규군 부대를 지원하여 직접적으로 독일군과 교전하기 시작했다. 드녜쁘르강 만곡부 지역에서는 수주간 보안 사단과 빨치산 부대간의 교전이 계속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남부 후방군사구역은 제 6 군으로부터 제 62 보병사단을 증원 받아 뽈따바 지구의 빨치산을 소탕했다. 여기서부터 남부 후방군사구역의 대 민간인 정책과 상충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폰 로끄의 명령에 반해 남부 후방군사구역 예하 병력은 군사구역 참모부의 명령에 따라 우끄라이나인 마을을 불태우는 보복을 시작했다. 생포된 빨치산이나 의심스러운 사람은 순찰하는 독일군이 즉결 처형을 했다. 보복 작전에서 유대인에 대한 학살도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이것은 군사구역 사령부가 다른 동부 전선의 정규군과 마찬가지로 유대-공산주의에 대한 고정 관념을 대 빨치산 작전에 그대로 반영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우끄라이나 민간인의 살상에도 불구하고 군사구역 사령부는 12월에 친 우끄라이나적 점령 정책을 고수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우끄라이나 인을 “아리안”인종으로 규정했다. 프리데리치는 12월 14일자 명령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독일에 대한 우끄라이나 민간인들의 우호적인 태도는 반드시 지속되어야 한다. 우끄라인들의 해방에 대한 소망이 새로운 지배자에 대한 공포로 바뀌는 것은 안된다.”
한편, 12월부터 헝가리군이 후방군사구역에 투입되어 빨치산 소탕에 참여했으며 곧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군사구역 예하의 헝가리 군은 “헝가리 동부 수비 집단(königliche ungarische Besatzunggruppe Ost)”으로 불리웠으며 제 102, 105, 108 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12월 18일 에서 19일, 독일측은 체르니히프 북동쪽 75km 에 위치한 꼬류끼프까 지구에서 1,700명 정도로 추산되는 빨치산 집단을 파악했다. 독일 정보당국은 이들이 소련 제 4군의 장교와 중앙당 간부, 그리고 지역당의 열혈당원, 유대인 대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박격포와 자동화기, 그리고 많은 말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했다. 12월 20일, Kálman Csiby대령이 지휘하는 제 105 여단 2 대대가 게릴라 소탕을 위해 출동했다. 이틀 뒤 대대는 게릴라 700명을 사살했으며 잔여 인원은 중부 집단군 지구로 도주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보고서는 빨치산에게 식량을 제공한 유대인 90명을 작전 중 사살했으며 최소한 마을 한 곳을 완전히 초토화 시켰다고 기록되었다. 독일측 기록에는 이 지역의 전투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없다. 그러나 105 여단이 이후의 전투에서 형편없는 전과를 올린점에 미뤄 본다면 빨치산 700~800명 사살은 확실한 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소한 100명 이상이 죽은 것은 분명하다. 최근의 러시아측 문헌은 이 소탕 작전에서 114명이 학살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1년 12월에 체르니히프 지구 빨치산이 배포한 삐라에도 같은 숫자가 적혀 있다. 헝가리측의 사상자 숫자로 볼 때 교전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상당수의 빨치산은 보복으로 학살된 민간인 이었다. 여단의 보고서에는 헝가리군이 전사 7명과 부상 10명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세 명이 행방불명 됐으며 우끄라이나의 경찰 보조원(Hilfspolizei, 보통 Hipo 라고 부름)중에서 11명이 전사, 9명이 행방불명, 27명이 부상당했다.
꼬류끼프까 지구 전투는 이후 헝가리군의 전투 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독일군이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로 격전을 치루는 동안 후방군사구역의 북쪽 경계는 체르니히프 일대에 형성되었다. 헝가리군은 데스나강과 벨로루시아와 러시아 경계에서 활동하는 빨치산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다. 이 지구의 빨치산은 체르니히프 지하당 조직의 통제를 받고 있었으며 미래의 소련 연방영웅 페도로프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1월 에서 3월까지 독일군이 혼란한 전선일대로 집중된 동안 후방의 헝가리 제 105 여단은 페도로프가 지휘하는 빨치산 부대와 지속적인 교전을 벌였다. 이 교전은 헝가리군과 점령군에 협력하는 우끄라이나 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1월 15일에서 18일 사이에 빨치산 부대는 홀미 일대에서 26명의 우끄라이나 경찰 보조원을 죽이고 그들의 가족 17명을 죽였으며 후퇴하는 과정에서 집 34채를 불태웠다. 2월 5일에 옐니예 에서 두 명의 헝가리 병사가 매복 공격에 사살 되었으며 12일 뒤에는 같은 장소에서 105여단 소속 병력이 매복 공격을 받아 31명의 사상자를 냈다. 헝가리군은 보복작전에서 루끼-후또르 마을을 불태우고 139명의 “빨치산”을 “사살” 했다고 보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치산의 공격은 더욱 더 대담해 졌다. 3월 2일, 헝가리 제 46 보병연대는 홀미와 꼬노똡 일대에서 빨치산의 공격을 받아 28명이 전사하고 56명이 부상, 두명이 행방불명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10일 뒤에 페도로프는 제 105 경보병사단(이전의 105여단이 개편된)의 전투단을 아바니브까 마을에서 습격해 40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다. 또한 빨치산은 30명의 경찰 보조원을 죽이고 6채의 가옥을 불태웠다. 또한 독일측 보고서에 따르면 빨치산은 지역 주민들을 위협하기 위해서 경찰 보조원의 아이들의 손을 자르고 19명의 주민을 강제로 입대 시켰다.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헝가리군은 빨치산과 그 후원세력을 “전투원”이 아닌 “범죄자”로 파악했다. 늘어나는 손실로 헝가리군의 사기는 낮아졌다. 지휘관들은 증원병력을 요구함과 동시에 독일측이 자신들에게 너무 많은 임무를 맡겼다고 불만을 늘어놓았다. 동시에 민간인에 대한 대우도 가혹해 졌으며 빨치산 소탕도 한층 더 과격해 졌다. 생포된 빨치산이 그를 감시하던 경비병 두 명을 죽이자 105 사단측은 1월 28일에 일방적으로 빨치산을 포로로 잡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측도 헝가리측의 불만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헝가리 제 105 사단장 Kolossváry 준장과 체르니히프의 독일 제 194 야전사령부(Feldkommandantur) 지휘관 뷔어펠(Würfel)중령의 요청에 따라 남부 후방군사구역 사령부는 페도로프의 빨치산 부대에 대한 토벌을 위해 증원 병력을 투입했다. 703 경비 대대(Wachbattalion)과 544 향토 대대(Landesschützen-battalion)가 증원되어 헝가리군 2개 대대와 함께 옐리녜 남쪽의 삼림지대에 대한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또한 이 전투단은 남부 후방군사구역 사령부 예하의 비밀 야전 헌병 3개 분견대(Abteilung)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 작전에서는 독일측의 정보가 매우 정확했으며 일부 우끄라이나 경찰의 탈주와 영하 15~30도에 달하는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작전은 성공적 이었다. 페도로프 집단은 900명중 22명이 사살되고 53명이 부상을 입었다. 독일측 주장에 따르면 27명이 사살되고 2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전투의 전술적인 측면은 이 논문에서 다루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전투가 끝난뒤 지역 주민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Csendes 중령이 지휘하는 헝가리군은 옐니녜 마을을 점령했으며 마을 주민 대부분은 숲으로 달아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명의 주민이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독일공군의 공습으로 대부분 사망했다. 며칠 뒤 헝가리군이 마을로 다시 갔을 때 마을 주민 대다수는 마을로 돌아와 있었다. Csendes에 따르면 그의 부대는 체포에 저항하는 주민 30명을 사살했으며 나머지 주민들을 집합시켜 독일 비밀 야전 헌병에 인계했다. 헝가리군은 옐니녜 마을을 완전히 불태웠으며 3월 29일부터 4월 4일까지 옐니녜 주변에서 민간인 536명이 체포했다. 체포된 사람 중 230명은 석방되고 나머지는 고멜에 있는 민간인 수감시설로 이송되었다. 군사구역 사령부의 기록은 여기서 끝나는데 고멜은 중부 집단군의 관할 구역이었으며 프리데리치의 관할이 아니었다. 그러나 1944년 해방 뒤 NKVD가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것에 따르면 고멜에서는 민간인들 중 노인들만 석방되고 여성과 어린이는 학살됐다고 한다.
군사구역 사령부측이 민간인 학살 소식을 접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하는 문제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어쨌거나 독일측은 작전의 성공적 종료에 크게 만족했다. 이제 군사구역 북부 지역은 평정 된 것 처럼 보였다. 703 경비 대대 대대장은 그의 나이 먹은 부하들이 훌륭히 임무를 완수한 것에 만족했다. 신병 치료차 떠나있던 폰 로끄 역시 복귀한 직후 작전의 성과를 치하했다. 만약 독일측이 헝가리군의 작전에 불만이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기록을 남겼을 것 이다. 그러나 Csendes의 추정은 독일군에 비해 덜 낙관적 이었다. 그는 최소 300명 이상의 빨치산이 포위망을 돌파했다고 추정했다. 반면 Kolossváry 준장은 작전의 성과에 만족했으나 작전 기간 중 자신의 여단이 처했던 상황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 이었다. 그의 기록은 상당히 비판적이고 빈정거리는 투로 되어 있는데 독일-헝가리 관계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이며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3. Kolossváry 준장의 비판
Kolossváry 준장은 1942년 초 105 사단의 작전 경과를 상급 부대에 보고하기 위해서 “경 사단의 역경”이라는 제목으로 네 장 분량의 기록을 남겼다. 기록은 먼저 105 사단의 절반이 예비역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 상당수는 현역 복무에 “부적합한”상태 였다고 적고 있다. 또한 그는 장교와 병사들은 정신력으로 훈련과 육체적인 문제를 극복해 왔으나 부족한 보급과 좋지 않은 기후, 그리고 지속되는 전투 손실로 지휘관들의 “열정과 초인적인 의지”가 없이는 부대의 상황이 악화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문제를 좀더 세부적으로 기록했다. 1월의 작전에서 그의 부대는 평균 영하 20~30도를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허리 높이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장거리 행군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7명이 심각한 동상으로 절단 수술을 받았으며 250명이 2도 동상에 걸렸다. 사단 예하의 각 대대는 각각 호로드니아, 바흐마취 니즈인, 노브로로드-세베르스끼, 얌삘 등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 대대중 일부는 체르니히프의 야전 병원과 사단 본부로부터 최고 70~80km 까지 떨어져 있었다. 사단의 주둔 지역은 철도망이 부실했으며 빈약한 도로 사정으로 차량 운행도 어려웠다. 이 때문에 보급 문제는 매우 열악했으며 편지 배달도 원활하지 못 했다. 사단의 한 대대는 연 초의 작전 기간 중 거의 2500km를 행군했으며 주둔지의 거주 사정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으며 가내에 가축을 같이 키우는 우크라이나 가옥”이었다. 의무 지원은 기초적인 수준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보급품에 이 같은 기생충이라도 붙어 있는 경우에는 집단 감염을 막을 수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3월 말 까지의 소탕작전에서 105 사단은 101명의 전사자와 129명의 부상자를 냈다. 부상자들은 좋지 않은 날씨와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체르니히프의 병원으로 이송되는 동안 큰 고통을 겪었다.
헝가리군이 겪은 여러가지 고통 중에서도 가장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외국인 지휘관과 병사들의 노력을 무시하고 기상 상황에 대해 잘못 된 정보를 주며 불가능한 임무를 맡기는 그들의 행태”였다. 그는 소련측이 이런 불만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독일군과 헝가리군 사이의 균열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빨치산은 그들이 약탈하고 방화한 마을을 헝가리군의 소행으로 돌리고 있으며 이 때문에 독일측은 이러한 사태가 사전에 아무런 논의도 없이 발생한데 해서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그래서 양 측의 관계 개선이 되지 않으며 이런 문제를 조사하는데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Kolossváry 준장은 결론에 가까워 지면서 자신의 작전 구역의 빨치산이 숫적으로 매우 우세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 지역이 나폴레옹 전쟁당시 가장 치열한 빨치산 활동을 벌였으며 내전 당시에도 역시 활발한 게릴라 활동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현재의 상황은 빨치산의 세력 확대에 매우 유리한 상황 조성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자신의 한 페이지 반에 걸쳐서 자신의 담당 구역의 면적, 각 부대의 행군 범위, 3월의 작전에서 사살한 빨치산 숫자(그는 5,132명으로 추정했다.)등을 근거로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 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단이 맡고 있는 고정 거점 방어를 우끄라이나 부대에 넘기고 각 대대를 사단의 통제하에 운용하며 화염방사기와 박격포, 대전차포와 기관단총의 보급을 요청하는 한편 독일측에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을 요구했다. 사실 이것들은 매우 간단한 요구사항이었다. Kolossváry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 폰 로끄의 참모진들은 헝가리측에 추가적인 작전을 요구했다. 폰 로끄는 그의 후임인 프리데리치와 마찬가지로 헝가리측이 병력과 장비 부족이 작전 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폰 로끄는 헝가리군의 상태에는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Kolossváry가 보고서를 올리기 전에 폰 로끄는 육군총사령부 군수국에 헝가리측의 곤궁함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보복에 대한 문제는 논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헝가리군과 독일군측에 상당기간 의견 일치를 가져왔다. Kolossváry의 보고서에서는 헝가리군과 독일 상급 사령부 사이의 의견 불일치 문제를 주로 지적했으며 지역 주민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인 분석을 했다. 그러나 다시 여름으로 접어 들면서 민간인에 대한 헝가리군의 태도는 한층 더 격해 졌고 민간인에 대한 보복 문제는 헝가리군과 독일군 사이에서 전략 전술적으로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4. 하계 대공세와 보복에 대한 논의
봄의 홍수와 페도로프 집단의 퇴각으로 헝가리군의 담당 지구는 일시적으로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 4월부터 5월 사이에는 빨치산과의 특별한 교전은 없었다. 군사구역 사령부는 새로운 하계 공세인 BLAU 작전 수립에 몰두했다. 이 때문에 10만 평방 km에 달하는 지역에서 빨치산 소탕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기껏 1,32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6월에 군사구역의 관할 구역이 수미 지구까지 확대되면서 브랸스끄 일대의 삼림지대에 거점을 둔 강력한 빨치산 부대를 상대하게 되었다. 일부 빨치산 부대는 수미에 확보한 전방 기지를 기반으로 작전을 펼치고 있었으며 얌삘 남쪽과 서쪽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6월 말이 되자 군사지구 사령부는 중부 집단군 으로부터 병력을 증원 받았으며 시도르 꼬빡 일대에 있는 대규모 빨치산 부대를 섬멸하기 위해서 헝가리 108, 105 사단의 일부 병력과 소련군 포로로 편성한 “투르키스탄” 대대, 공군의 비행장 경비 병력 1개 중대, 꼬노똡 에서 차출한 건설 부대 병력(Gruppe Becker, 베커 집단), 1개 전차 중대, 공병, 대공포 등 1,2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작전은 6월 20일부터 26일 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평가는 상반되었으며 독일측은 기대이하의 성과로 헝가리측과 논쟁을 벌였다. 헝가리측은 250명을 작전 중 사살하고 143명을 생포한 뒤 처형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상당수의 포로를 독일 비밀 야전헌병의 감시하에 뿌띠블리 지구로 이송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독일과 헝가리 모두 빨치산 주력은 포위망을 빠져나갔다는 점을 인정했다. 헝가리군 사령관 Imre Bogányi 중장은 지역 민간인들이 작전 실패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작전 기간 중 민간인들이 빨치산이 포위망을 돌파하는데 도움을 줬다고 주장했다. 그는 작전 중에도 노바 슬로브다, 야치녜, 체레뽀보, 이바니프스끼, 세슐린등의 마을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그는 작전 구역의 남성중 15~60세의 남성은 모두 사살하고 생포해서 이송한 포로들도 사살해야 하며 여자 포로들 중에서도 가슴 밑에 별 무늬 문신(공산당 지하조직원들이 주로 사용한 표지)을 한 경우는 사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Bogányi 중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6월 25일에 베류흐에서 발생한 폭탄 폭발의 책임을 물어 베류흐에서 10명의 인질을, 그 인접 마을들에서 각각 5명씩의 인질을 처형했다.
이와 관련된 독일측 기록으로는 노바 슬로바다와 칼리체, 리노보 마을을 파괴했다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러한 파괴 행위는 인접 부대인 바익스 집단 사령관 폰 바익스 상급대장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7월 3일에 바익스는 브리데리치에게 헝가리군이 마을을 파괴하는 행동이 통제 가능한 범위를 벗어났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행위는 얌삘과 세레디냐-부다 일대의 빨치산 활동을 감소시키는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바익스는 독일 부대를 투입할 것을 요청했으며 헝가리측의 작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뿌띠블은 텅 비었다. 헝가리군의 작전은 실패했다. 1,300명의 비적이 포위망을 돌파했다. 12곳의 마을과 460톤의 곡물이 헝가리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일반 주민들은 헝가리군을 피해 달아났다. 헝가리군을 긴급히 (독일군 부대로)교체 시켜야 한다고 본다.”
프리데리치는 작전 기간중 뿌띠블을 시찰했다. 헝가리군의 보복 작전에서 프리데리치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헝가리군과 마찬가지로 지역 주민들이 빨치산을 지원하고 있다고 믿고 이것을 육군 본부에 보내는 보고서에도 똑같이 기록했다. 한편, 프리데리치나 그의 참모진 중 한명은 Bogányi가 인질을 대량 처형하자고 한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뿌띠블 작전 직후 프리데리치는 빨치산전에 대한 지침에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보복을 자제할 것을 지시했다.
새로운 지침은 누구를 “포로”로 대우하고 누구를 “빨치산”으로 구분 할 것인가를 언급한1941년에 내려진 명령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새 지침에는 “잔악한 유대-볼셰비즘적 전쟁 방식”에 대한 유사한 언급이 있었으며 이전 지침에서 벗어난 내용은 담고 있지 않았다. 새로운 내용도 추가 되었는데 교전 중이지 않은 상황에서 투항하는 빨치산은 처형을 하지 말라는 내용도 포함되었다(반면 소련 정규군 병사는 어떤 상황에서 항복하건 규정상 포로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프리데리치는 “집단 처벌”이라는 규정을 새로 도입해서 민간인에 대한 보복에 제약을 두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자발적인 게릴라에 대한 절멸 전쟁은 유조의 요소가 있다.” 또한 죄없는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은 “독일적 정의관에 반하는 행위이며 정치적인 면에서도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프리데리치는 모스끄바는 빨치산에게 독일군이 민간인에 대한 대량 보복을 하게 부추김 으로서 “주민들 사이에 독일군과 그 지원세력에 대한 적대감을 조성하려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적었다. 그는 인질을 잡고 실제로 처형해 봐야 “공산주의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하는 행위는 빨치산 소탕 작전에서 사용할 전술이 아니다. 이것은 작전이 끝나고 행하는 보복성 행위이다. 추가 조사 과정에서 밝혀낸 결과 이 때문에 주민들의 우호도가 감소하고 마을 전체가 빨치산에 협조하는 사태까지 있었다.”
프리데리치는 아무런 대책 없이 보복만 무자비하게 가함으로서 독일이 지지기반을 잃고 있으며 필요한 물자의 징발, 귀중한 노동력의 상실, 빨치산에 대한 지지만 높아지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군사구역 사령부는 이전에도 예하 부대의 잔학 행위를 단속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폰 로끄는 1941년 7월에 “사적 처벌”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프리데리치의 경우는 헝가리군의 행위 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프리데리치의 새로운 게릴라전 방침과 Bogányi가 옹호하는 무차별적 보복 방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프리데리치는 마을 주민 전체가(in ihrer Gesamtheit) 빨치산 활동에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절대로 민간인을 상대로 보복 학살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야전부대가 주민들의 빨치산 관여 여부를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기 때문에 프리데리치가 내린 명령의 의도는 의문의 대상이다. 아마 프리데리치 자신도 보복을 “완전히” 금지하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리데리치가 새 명령을 하달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독일 비밀 야전 헌병 부대는 니즈인 마을에서 독일 헌병 하사 한 명이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볼로드꼬 마을의 민간인 116명을 처형했다. 이 학살은 그 지구의 독일군 지휘관(194 야전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일어났지만 프리데리치는 이 잔학행위에 대해 어떠한 문제 제기도 하지 않았다. 프리데리치의 의도는 뿌띠블리 마을에서와 같이 반복적인 마을 초토화와 대량 학살을 감소시키는데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프리데리치의 의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Bogányi는 노바 슬로보다 마을을 6월 26일에 초토화 시켰다고 보고했는데 1943년 10월과 11월에 작성된 소련 뿌띠블리 지구당의 보고서에는 바로 7월 6일에 헝가리군이 다시 노바 슬로보다로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7월 7일의 학살에서 헝가리군은 마을 주민 407명을 사살하거나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
헝가리군의 군율 문란과 작전 수행 능력 부족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으며 다시 보복 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독일의 194 야전사령부 사령관은 7월 18일에 뿌띠블리의 시장으로부터 헝가리군의 잔학 행위에 대해서 보고 받았다. 뿌띠블리 시장은 헝가리군이 무차별적인 살상과 약탈, 방화를 자행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94 야전사령부측은 군사 지구 사령부에 대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추가했다.
“빨치산 무리를 특정 지역으로 몰아 붙이는 작전은 효과가 없다. 빨치산 집단은 지나가면서 머무르는 마을 마다 식량과 물자를 징발하며 지역 주민은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지역 유지들은 빨치산이 지역에 출몰한다는 점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 빨치산 주력을 포위 격멸해야만 지역 주민들이 현재 겪고 있는 문제점에서 해방 될 수 있을 것 이다.”
이런 보고서를 올린 사람이 며칠 전에 니즈인 마을에서 116명의 주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점이 아주 재미있다. 같은 기간에 194 야전사령부 예하의 307 지역사령부(Ortskommandantur 307)는 헝가리 105 경사단 소속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마을에서 자신들이 숙소로 쓰고 있던 민가를 파괴해 버렸다고 보고했다. 또한 제 450 투르키스탄 대대의 장교 한명은 프리데리치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헝가리군이 삼림 지대의 빨치산 소탕 작전에서 지원을 제대로 해 주지 못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이 보고되고 군사구역사령부가 헝가리측에 항의를 전달하는 일이 잦아질수록 헝가리군은 독일측의 비난에 더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프리데리치는 보복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내린지 3일 뒤에 빨치산 작전에 대한 새로운 전술 지침을 하달했다. 이 문건은 현재 없으나 네 명의 지휘관(제 213 보안사단, 제 194 야전사령부, 제 198 야전사령부, 헝가리 주둔군)이 이에 대해 보낸 회신이 남아 있다. 이 네통의 회신은 모두 남아 있으며 원래 명령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재 구성할 만한 자료를 담고 있다. 전술 지침의 핵심은 “예하 부대의 자원으로 좀더 공세적인”행동을 취하라는 것 이었다. 이 부분에서 프리데리치는 상급 사령부에 빨치산 소탕에 투입할 전력이 부족함을 여러 차례 호소했음을 밝히고 있다. 프리데리치는 자신이 증원병력을 요청했음에도 상급 사령부가 응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예하 지휘관들에게 현재 보유하고 있는 전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좀더 정교한 전술을 활용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Bogányi는 이 지침에 대해 직접적으로 분노를 나타냈다. 그는 자신의 예하 부대가 겪고 있는 문제점을 세부적으로 나열하고 “이미 이런 문제점은 충분히 겪고 있던 것이며 이 때문에 우리에게 분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 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Bogányi는 전문적인 군인이었다. 그는 회신에서 불만만 제기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해결안을 같이 적었다. 이것은 3월 31일에 Kolossváry가 올린 보고서와 유사한 내용 이었다. 물론 Bogányi의 답장에는 직접적으로 대응 보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빨치산을 소탕하는 전술적 측면 보다는 지역 주민이 빨치산의 지지 세력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쪽에 있었다. 그는 독일 비밀 야전 헌병은 작전 수행에 있어서 “지나치게 동정적”이며 빨치산 출몰 지역과 빨치산을 지지하는 마을은 경제활동을 봉쇄해 버려야 하며 필요하다면 봉쇄로 기아를 유발 시킬 필요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 대부분은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마지막 부분에서는 한가지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바로 북부 관할 구역의 민간인을 소개시키는 것 이었다. Bogányi는 빨치산 출몰지역의 성인 남성을 모조리 노동 수용소로 이송해서 노동에 투입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Bogányi는 7월 2일에 하달된 새로운 명령에 의거해서 이런 판단을 내렸을 것으로 보인다.
프리데리치가 Bogányi의 제안이 있기 전에 북쪽 지역의 민간인 소개를 생각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프리데리치는 민간인 소개를 실행하기로 결심했으며 9월 10일에 집단군 사령부에 세레디냐-부다 와 데스나 강 동안의 벨리까 베리즈까, 홀루비브까, 리스녜, 빌료시브까, 스챠하일리브까, 즈놉-노보호로지께, 류바히프, 우끄라이스끼, 체르보니, 바실리브까 일대의 민간인을 소개하고 이 일대의 자재와 물자를 이송시키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문제에 대한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민간인과 물자의 소개가 이루어 진 것은 확실한 것 같으며 10월까지 완료 된 것으로 보인다. 소개된 주민들은 제 213 보안사단과 197 야전사령부의 관할로 들어갔다.
게릴라 출몰 지역에서 민간인을 소개하는 작전은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미주리 주 서부와 필리핀 봉기, 보어 전쟁, 일본군의 만주 지역 게릴라 작전과 말라야, 케냐, 베트남 전쟁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민간인 소개는 경우에 따라서는 효과적 일 수 있으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남부 후방군사구역이 실시한 민간인 소개 작전이 효과적 이었는가는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2006년 10월 3일 화요일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의 1950년 3월 8일자 보고서
주한미국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1950년 3월 8일 육군부 작전국에 한국의 상황에 대해 보고하면서 북한의 공군력 증강에 대응하기 위해 주일 미공군의 잉여 장비인 P-51또는 P-47 중 50대를 한국군에 양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보고서의 전문을 옮겨 본다.
흥미롭게도 북한의 육군을 남한군 보다 약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A. Millet의 연구에 인용된 1950년 6월 15일자 미국 군사고문단의 북한군 전력 평가는 특기할 만한데 북한군의 병력이 103,000명, 전차는 불과 64대로 보고 있다. 흥미롭게도 같은 시기 미국 대사관쪽의 분석은 실제 북한군의 전력을 거의 정확하게 추정하고 있다. 아무래도 국무부의 정보망이 군대 보다 나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로버츠 준장의 요청에 대한 미국방부의 회신은 다음과 같다.
한마디로 줄이면 한국군 병력 증강과 전투기 지원은 국무부의 방침에 어긋나므로 어렵다는 내용이다.
참고로 NSC 8/2는 한국군의 병력 상한선을 육군 65,000명, 해안 경비대 4,000명, 경찰 35,000명으로 제약하고 있었지만 이미 1950년 3월 한국군의 병력은 이걸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미 육군이 북한의 지상군 전력에 대해서는 과소평가 했던 것은 맞는 듯 싶다.
친애하는 찰리(볼테 소장의 애칭)
본인이 “한국 내부” 정보에 대해 보고서를 올린 것이 2-3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주한미군사고문단과 한국 국방군의 최신 정보를 요약해서 보냅니다.
지난 겨울 기간 동안 한국군은 두 세곳의 지역에서 게릴라의 침투를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게릴라들은 대개 북쪽에서 침투하고 있으며 종종 북쪽으로부터 무기 보급도 받고 있습니다. 아군은 동해안 지역에서 무기를 실은 적의 선박을 발견해 무기 대부분을 압수했습니다. 한국군은 게릴라전에 5개 연대를 투입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부대 훈련에 심각한 지장이 초래되고 있지만 계속해서 각 중대, 대대, 연대를 순환 투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38도선에 배치된 4개 사단의 사단장들이 사단 및 연대 예비 대대의 운용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됐으며 그에 맞춰 훈련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지원 중대 및 소대 단위 부대에 대한 훈련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1948년과 1949년에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8월 이후로그런 위협은 감지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38도선 상의 충돌은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게릴라 침투를 완전히 차단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으며 현재의 게릴라 토벌 상황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현재 400명 정도의 게릴라를 사살했지만 아직도 산악지역에는 수배에 달하는 게릴라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상황과 현재 국립경찰 병력이 50,000명(본관은 현재의 경찰 병력이 적정수준에서 15,000명에서 20,000명 정도는 많다고 생각합니다)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해 본관은 경찰 10,000명(각 465명으로 편성된 22개 대대)을 전투경찰로 게릴라 토벌작전에 투입하려 합니다. 현재 이를 위한 조직과 훈련이 진행 중입니다. 경찰 간부 240명이 보병학교에서 8주 과정의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경찰 병력이 4월 1일부터 육군으로부터 게릴라 토벌 임무를 인계 받을 예정이고 5월 1일에는 임무 교대가 끝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실질적인 한국군 병력은 1만이 증가하는 셈이고 육군 부대들을 게릴라 토벌에서 빼내 훈련을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경찰의 게릴라 토벌이 잘 진행되면 51년 여름에 추가로 5,000명에서 10,000명의 경찰을 이 임무에 투입할 계획입니다.
본인의 한국 근무기간은 거의 끝나가고 있으며 10월 1일에는 전역할 예정입니다. 본인은 5월 8일 부로 24개월의 근무기간을 끝냅니다. 제가 도쿄의 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참모장 콜린스 장군과 잠시 만난 일이 있습니다. 콜린스 장군은 제가 전역하기 전인 여름에 한국에서 전출 될 수 있을지 확약할 수 는 없다고 말했고 만약 한국근무를 끝낸다면 전역하기 전 까지 어디서 근무하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저는 제 6군 사령부에서 근무하고 싶다고 대답 했습니다. 지금 엘라(Ella)는 병을 앓고 있는데 수막염, 소아마비 또는 뇌막염 중 하나인 모양입니다. 의사도 정확히 어떤 병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엘라는 지금 캘리포니아에 있습니다. 저는 엘라의 곁에 있고 싶지만 제 후임이 도착하기 전 까지는 한국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제 후임으로는 행정력 보다는 전투 경험과 부대 지도에 유능한 소장급 장성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3개월 이내에 주한미군사고문단의 주요 고위 장교들이 전출될 예정입니다. 먼저 제 참모장은 6월에 근무기간이 끝나며 작전참모, 정보참모, 인사참모, 군수참모, 부참모장, 회계장교와 유능한 고문관 여러명이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
미군사고문단이 언제부터, 그리고 어느 정도 역할을 축소해야 할 지가 앞으로의 문제입니다. 제 의견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a. 미군사고문단은 1949년 12월 15일 이래 편제에 항상 미달했습니다.
b. 병과학교 체계(보병학교, 참모학교, 사관학교, 포병학교, 통신학교, 정비학교, 공병학교, 군수학교, 재정학교, 군의학교)는 한국군의 굳건한 기반이며 이 체계는 계속해서 강화되야 합니다.
c. 미국의 군사원조(MDAP)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미군사고문단의 감독이 필수적입니다.
d. 고문단의 지도가 이제 효과를 발휘하기 지작했습니다.
e. 일부 사단은 이제 대대급 기동훈련을 시작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중대단위 훈련만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f. CPX는 이제 막 진행되고 있습니다.
g. 한국군의 사격 실력은 우수하며 미군보다 조금 뒤지는 수준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먼저 대대급에서 고문단을 철수 시키고 점차 사령부와 지원부대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고문단의 감축은 1951년 1월 1일 이전에는 절대 불가합니다. 왜냐하면 이때 까지의 기간이 한국군의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부분을 특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남한 정부가 북한의 공격을 받게 될 경우 남한 육군은 충분히 그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 고문단이 잔류한다면(최소한 연대와 사단급 부대만이라도) 한국군은 훨씬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고문단은 더 직접적인 방식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전쟁이 발발할 경우 고문단은 명칭만 고문단일 뿐 실질적으로 지휘를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보부의 보고에 따르면 북한은 100대 가량의 러시아제 항공기를 획득했으며 조종사를 양성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유사시) 이 100대의 항공기가 남한군 부대와 도시, 그리고 주요 수송로에 대해 어떤 짓을 할 지는 우리 모두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지금 당장이라도 북한이 남침한다면 숫적으로 열세인 북한육군은 공군의 지원으로 남한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한 국민들이 전쟁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다면 그들은 기꺼이 승자를 따를 것이며 남한은 아시아 공산국의 하나로 전락할 것입니다.
현재 남한은 ECA원조로 물자가 풍부하며 인플레이션으로 재정 상태는 좋지 않으나 풍년으로 식량도 충분한 상태입니다. 남한이 북쪽에 점령된다면 매우 훌륭한 전리품이 될 것입니다. 남한은 전략적으로 일본의 심장부를 위협하고 있으며 적의 손에 떨어질 경우 서방세계의 보루인 일본의 방어를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북한 공군에 대한 대응책으로 즉각 남한정부에 항공기를 제공해야 한다고 요청하는 바입니다. 현재 남한군은 12대에서 14대 정도의 L 계열 항공기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월요일 3대의 AT-6 기가 남한군에 배치됐으며 한국 정부는 추가로 7대를 더 구매했습니다.
일본에 배치된 미국 공군의 P-51과 P-47은 제트기로 대체될 예정입니다. 이것들은 우리에게는 구식 장비이지만 남한에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물론 필리핀 군도 이 장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 공군의 퇴역 전투기 50대를 양도하면 폐기에 필요한 비용이 절감될 것입니다. 미국 정부는 이렇게해서 납세자들의 세금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전투기만 있다면)한국 정부는 조종사들을 충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공군 고문단도 필요합니다. 이런 방안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만 KMAG의 편제가 500명으로 제한돼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을 보낸 바 있습니다만 NSC 8/2가 한국군의 “항공대” 확장에 부정적인 것이 문제입니다. 10만에 달하는 남한군은 서방을 위해 싸우는 군대이며 워싱턴이 이들에게 제공하는 것 보다 더 큰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 정부는 언젠가 한국군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군수공장 프로그램은 전 참모총장인 채병덕 소장의 책임하에 활발히 추진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번달에 일본제 99식 소총탄 500,000발을 생산했으며 다음달에는 1,000,000발에 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국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공작 기계를 도입하는 것을 추진 중입니다. 최근 한국은 M-1과 유사한 반자동 소총의 시제품을 생산했으며 또 스프링필드 소총과 비슷한 노리쇠 장전식 소총의 시제품도 생산했습니다. 채병덕은 고위층의 조언을 잘 듣고 있으며 현재 소수의 민간인 기술자들을 조병창에 배치해 필요한 장비들을 생산하고 있고 또 비현실적인 목표를 추진하지도 않습니다.
현재 주한미군사고문단은 한국군 장교 중 자질이 뛰어난 33명을 선발해 포병 관측 훈련을 위해 일본으로 3개월간 파견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이들은 4월 1일 출발할 예정입니다. 세부적인 사항은 모두 결정됐습니다.
행정적인 측면에서 주한미군사고문단의 활동은 훌륭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모든 임무는 감찰관의 배석하에 진행됐으며 주한미군사고문단을 감독하기 위해 극동사령부(FEC)에서 중령 한명이 파견됐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활동에 대해 잘 정리해 놨습니다. 우리는 4월에 있을 프리켓(Prickett) 장군의 감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기는 매우 양호한 수준입니다. 아직까지 고문단 소속의 군인과 민간인 중 큰 물의를 일으킨 사례는 보고된 바 없습니다. 군인 자녀들은 좋은 학교에서 교육 받고 있으며 의료 지원도 훌륭합니다. 또 사병들의 여가 시설도 훌륭하며 서울의 PX가 취급하는 제품은 도쿄에 있는 PX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서울에서는) 좋은 술 한병 가격이 2달러입니다. 장교 51명과 사병 138명이 한국 근무를 연장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군사고문단 소속으로 MATS(Military Air Transportation Service) 항공기가 한 대 있으며 (김포에 기착하는) 노스웨스트 항공편 외에도 섬을 오가는 항공편이 한달에 한 대 있습니다.
고문단의 회계 장교인 화이트(R. R. White) 중령은 최고 수준의 회계 장교이며 한국군의 재정 상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데 5월 25일 부로 국방성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이 친구는 장군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한미군사고문단의 전 군수참모인 가이스트(Geist) 소령도 1~2주 내에 국방성 수송국으로 전출될 예정입니다.
베니에게 제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미육군 준장 W. L. 로버츠
주한미군사고문단장
수신인
C. L. 볼테 소장
미육군부 작전국장
국방성, 워싱턴 D. C.
흥미롭게도 북한의 육군을 남한군 보다 약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A. Millet의 연구에 인용된 1950년 6월 15일자 미국 군사고문단의 북한군 전력 평가는 특기할 만한데 북한군의 병력이 103,000명, 전차는 불과 64대로 보고 있다. 흥미롭게도 같은 시기 미국 대사관쪽의 분석은 실제 북한군의 전력을 거의 정확하게 추정하고 있다. 아무래도 국무부의 정보망이 군대 보다 나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로버츠 준장의 요청에 대한 미국방부의 회신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린
언제나 그랬듯 귀관의 3월 8일자 보고서는 매우 유용한 정보가 많았으며 내가 한국에 대해 고민하던 많은 문제에 대해 해답을 줬소.
먼저 키팅(Frank A. Keating) 소장이 귀관의 후임자로 내정됐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소. 그러나 불행하게도 귀관이 희망한 대로 5월 또는 6월에 귀국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는 점을 알리는 바이오. 키팅 장군이 한국에 부임하는 것은 7월 말이나 돼야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오. 엘라의 건강이 좋지 않고 귀관의 걱정이 심한 것을 알기에 더 미안하게 생각하오. 그러나 귀관의 근무지를 LA 근처로 하는 것은 가능하오.
키팅 소장은 미군사고문단을 맡기 위해 특별히 선발됐소. 그는 지난 대전 때 유럽전선에서 102 보병사단을 지휘했고 이 사단을 지휘하기 전에는 에드워드 기지의 상륙훈련소 부소장이었고 커크(Kirk) 제독의 참모진에서 선임 육군연락장교로 있었소.
주한미군사고문단의 감축에 대한 귀관의 건의는 시의적절한 것으로 판단되오. 현재 합참은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각지의 사절단, 고문단 등의 감축을 검토중에 있소. 귀관의 의견은 먼저 무초 대사의 승인을 받은 뒤 육군성에 제출할 예정이오. 이와 함께 우리는 국무부에 남한 해안경비대에 대한 민간 고문단의 예산을 집행할 것을 요구하는 중이오.
그리고 예산절감에 대한 귀관의 의견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소. 나 역시 한국에서 벌이는 미국의 모든 활동에 대한 경상비용 책정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는데 군사고문단의 경우 그 활동의 특성상 현재 예산의 3분의 1 수준만 집행돼야 할 것으로 생각되오. 특히 최근 합의에 따라 한국정부가 군사고문단의 활동 비용의 상당수를 부담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오.
현재의 MDAP(Mutual Defense Assistance Program)는 3월 15일 최종 승인을 위해 국무부에 제출됐소. 만약 이 원조프로그램의 실행이 늦춰진다면 이건 전 세계적인 군사원조를 재조정 하겠다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오. MDAP와 함께 한국에 대한 다른 원조 계획도 정치적 문제로 아직 국무부의 결정이 나지 않았소. 육군의 대부분은 군사고문단의 요청은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국 육군의 증강은 NSC의 정책결정사항에 위배되오. 물론 NSC 8/2가 한국 해군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금지하고 있고 공군 창설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라는 것을 말해두오. 또 귀관 역시 NSC 8/2에서 규정하고 있는 한국 육군과 해안 경비대, 경찰병력의 상한선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므로 본인은 국무부의 승인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형태의 추가적인 원조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오.
우리는 프리켓 장군에게 한국 방문에 앞서 몇가지 사항을 브리핑 했으며 이전 감찰관이 방문한 이후 많은 점이 변화했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당부했소. 나는 프리켓 장군이 미 군사고문단의 모든 활동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확신하오.
귀관의 반년 단위의 보고서는 완결적이고 정보가 가득한 자료요. 귀관의 보고서는 육군의 작전 수립에 필요한 매우 유용한 자료라고 할 수 있소. 귀관의 보고서 사본은 아직 국무부에서 검토중이며 육군부에는 전달되지 않았지만 귀관이 같이 보내준 정보보고서는 가지고 있소. 이 훌륭한 보고서에 대해 귀관과 주한미군사고문단의 모든 장교들에게 감사하는 바이오.
귀관과 귀관의 가족에 경의를 표하며 엘라가 빨리 건강을 회복하기를 기원하오.
볼테
한마디로 줄이면 한국군 병력 증강과 전투기 지원은 국무부의 방침에 어긋나므로 어렵다는 내용이다.
참고로 NSC 8/2는 한국군의 병력 상한선을 육군 65,000명, 해안 경비대 4,000명, 경찰 35,000명으로 제약하고 있었지만 이미 1950년 3월 한국군의 병력은 이걸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미 육군이 북한의 지상군 전력에 대해서는 과소평가 했던 것은 맞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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