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존스Michael K. Jones의 Stalingrad : How the Red Army Survived the German Onslaught(Casemate,
2007)는 스탈린그라드를 방어한 제62군에 초점을 맞추어 소련군이 초기의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승리를 거두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거시적인 전황을 서술하는 대신 일선 전투원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들의 집단 심리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추적합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저작이라 하겠습니다.
동시에 이 책은 꽤 흥미로운 사실들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유명한 바실리 자이체프의 영웅화를 비판하는 것 입니다.
저자는 전쟁 중 바실리 자이체프가 영웅화되면서 왜곡된 진실들을 조명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실리 자이체프와 같이
제284소총병사단의 저격수였던 알렉산드르 칼렌티예프Александр Калентьев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저자는 바실리 자이체프의 소속 부대였던 제284소총병사단 1047소총병연대의 참모중 한명이었던 니콜라이 악쇼노프Николай Аксёнов의
회고록에 주목합니다. 악쇼노프는 자신의 저서에서 바실리 자이체프에 대한 널리 알려진 사실 중 상당수가 소련의 선전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알렉산드르 칼렌티예프입니다. 알렉산드르 칼렌티예프는 바실리 자이체프
보다 먼저 저격수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10월 중순이 되면 이미 제284소총병사단의 진중 신문에 그의 이야기가
기사화될 정도였다고 하는군요. 재미있는 점은 칼렌티예프가 시베리아의 오지 출신으로 문맹이었다는 점 입니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묘사하는 바실리 자이체프의 모습과 가까운 인물이었던 것 입니다.
칼렌티예프가 저격수로 성공을 거두면서 그는 많은 병사들에게 저격기술을 가르치게 됩니다. 그리고 칼렌티예프에게서 저격을 배운 사람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바실리 자이체프였다고 합니다. 바실리 자이체프는 1942년 12월에 한 인터뷰에서 스스로 칼렌티예프에게서
저격기술을 전수받았음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자이체프의 이야기를 좀 더 각색하면서 자이체프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저격술의 선구자였던 것 처럼 만들었습니다. 전후에 자이체프가 회고록을 저술했을때 소련 정부는 검열을 통해 몇몇 내용을
왜곡했고 이를 통해 자이체프가 스탈린그라드의 저격수들을 육성한 선구자로 둔갑하게 됩니다. 재미있게도 검열을 당한 자이체프의
회고록에서는 칼렌티예프와 자이체프의 관계가 뒤집혀버립니다. 그리고 칼렌티예프라는 인물도 시베리아의 문맹 농부에서 모스크바
저격학교를 수료한 저격수로 둔갑해버립니다. 소련의 선전매체가 쾨니히라는 가공의 독일 저격수를 만들어 낸 것 처럼말입니다.
실제 인물인 알렉산드르 칼렌티예프는 1942년 11월 18일 전사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가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소련 정부의 검열과
왜곡을 막을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남았다면 그의 이야기가 다른 이를 거치지 않고 조금 더 일찍 알려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2012년 7월 2일 월요일
2008년 11월 18일 화요일
2차대전 당시 소련여성의 전투 참여에 대한 John Barber의 글
A World at Total War를 읽다 보니 독소전 당시 소련의 여성문제를 다룬 바버(John Barber)의 글이 있더군요. 짤막하지만 핵심적인 부분들을 잘 짚은 것 같은데 이 글에서 소련 여군에 대한 부분만 발췌해서 올려봅니다.(좀 날림번역 입니다;;;)
전선의 병사로서(Фронтовики)
2차대전 당시 소련군에 입대한 여성들은 기존에 있던 여성과 전쟁간의 전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약 80만명의 소련 여성이 2차대전 기간 중 군대에 입대했다. 빨치산을 포함시키면 그 숫자는 100만을 넘어설 수도 있다. 연합군과 비교했을 때 소련의 전쟁은 발틱해에서 흑해까지, 그리고 카프카즈와 그 너머에 걸친 수백 킬로미터의 전선에 걸쳐 전개된 총력전이었기 때문에 현역 복무는 종종 전선에 직접 투입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상당수의 여성은 전통적인 업무 – 군의관, 간호사, 취사병, 제빵병, 세탁 및 목욕탕의 당번병으로 활동했다. 전선에 파견된 의사 중 41퍼센트, 그리고 군의관 중 43퍼센트가 여성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기존에는 남성들만의 영역이었던 전투공병, 야전공병, 전화교환수, 무전병, 운전병, 정비병, 교통헌병, 통역병, 정보병, 그리고 정치장교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열거한 임무들은 전쟁에서 필수적인 임무들이었으며 전선에서 직접 전투에 휘말리거나 사상자를 내곤 했다.
그러나 수 천명의 여성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전쟁이 시작된 초기의 몇 개월 동안은 여성 스스로의 자원이나 조종사 등의 특수한 임무에 필요한 경우가 아닐 경우 여성의 전투 참여는 배제되었다. 붉은군대가 수백만명의 전사자와 포로를 내고 이들의 빈자리를 메꿀 인력이 절실히 필요해 진 1942년 초에 가서야 공산당중앙위원회는 전투에 직접 참여할 여성 지원병을 모집한다는 공식 결정을 내렸다. 봄부터 시작된 콤소몰 주도의 대규모 모병 활동으로 방공군 10만을 포함해 수많은 여성이 모집되었다. 1944년까지 네 차례의 여성 모병운동이 더 있었다. 1943년에 이르러 여성은 소련 군대 병력의 8퍼센트에 달했다. 1945년에는 여군 병력이 246,000명에 달했다. 소련 여군들은 보병사단에 소속되어 백병전을 치르고 포병과 대공포 부대에서 활동했다. 또한 여군들은 저격병과 기관총사수, 공수부대원,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여군 중에는 전차장과 보병 소대장도 있었다. 전투기 연대 한 개와 폭격기 연대 세개는 조종사부터 정비병까지 모두 여성으로만 편성되었다. 독소전에 대한 영국의 권위있는 역사학자는 2차대전 중 소련 여성의 전쟁 참여 기록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인류 역사상 용기와 인내, 그리고 수난의 이야기로서 이것과 비교할 만한 것은 드물 것이다. 붉은군대의 우수한 병사들 중 상당수는 여성이었으며 이들은 소련 최고의 영예인 소연방영웅이 되거나 사후에 추서되었다.” [Erickson 1993, 59~60]
여성들이 전투에 참여한 동기는 다양했다. 많은 여성들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고취한 요소는 애국심과 전쟁수행에 기여하고자 하는 욕구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는 어떤 볼고그라드 출신의 여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탈린 동지에 대한 사랑”으로서 표출되었다. 그러나 여성 참전용사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의 참전 결정은 보다 개인적인 의도에서 이뤄지곤 했던 것 같다. 전사한 남편, 남자 형제, 아버지, 아들, 애인의 복수나 또는 전선에서 이들을 찾기 위해서 등의 이유였다. 그리고 이들은 여러 고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곤 했다.
최근 독소전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여성의 전투 참여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은 경외감, 이질감, 그리고 죄책감이 혼재된 상태로 나타났다. 전통적인 여성상과 전쟁의 현실간의 괴리는 다양한 감정을 만들었다. 한 참전군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남자군인들이 전선에서 여성을 목격하면 그들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여군 한 명의 목소리로도 남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다른 참전군인의 회고는 이렇다. “여성이 전투에 참여하면 남자들은 보다 명예롭게 행동하고 용감해졌다.” 반면 저격병으로 활동했던 한 참전군인은 살인이 가지는 “비여성적” 성격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두 명의 여자가 저격용 소총을 들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무인지대로 침투한다. 이것은 인간 ‘사냥’이다. … 비록 나 자신도 저격수였지만 … 어쨌든 나는 남자였다. … 나는 수색정찰을 나간다면 이런 여자들과 함께 가겠지만 아내로서 함께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전선의 여성들은 남성 전우들과 마찬가지로 끔찍한 위험과 잔인함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그들이 적의 손에 사로잡힐 경우 처하게 될 운명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또 여성들은 그와 반대로 폭력적인 가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
“전투 중 적의 전차 두 대로부터 공격 받았을 때 두 명의 남성 군인이 비겁한 행동을 했다. … 방어선이 유린되고 모두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 파시스트들은 우리의 부상병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 다음 아침에 대대원 전체가 정렬한 자리에서 비겁한 행동을 한 병사들을 끌어냈다.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선고가 내려졌다. : 총살대에 의한 처형 … 세 명이 앞으로 나오고 나머지는 제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기관단총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내가 먼저 앞으로 나서자 다른 사람들도 나를 따랐다. … 어떠한 자비도 없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전선의 남성과 여성간의 작용은 전우 이상의 관계로 발전했다. 야전의 아내(Подно-полевая Жена)라는 단어가 널리 쓰였다. 그리고 이것은 붉은 군대의 여성에 대한 태도 뿐 만 아니라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단어였다. 한 참전 군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보통 전선에 있는 여군은 장교들의 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어땠겠습니까? 만약 한 여군이 남자가 생기면 이제 다른 남자들도 끊임없이 치근덕 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격렬하고 한편으로는 허무한 전선의 생활은 개인간의 사적인 관계를 촉진시켰다. 일반 사회와 구별되는 것은 이러한 관계의 법적 지위였다. 군대에서의 결혼은 허가 없이는 불가능했고 공인된 관계를 가지는 남자와 여자의 숫자는 극소수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복잡한 남녀관계가 묵인될 수 밖에 없었다.
John Barber, ‘Women in the Soviet War Effort, 1941~1945’, A World at Total War :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pp.239~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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